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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의 귀환 유한의 존재는 죽음으로 사라지고 남은 존재는 망각을 얻는다. 흔적, 조상, 유전, 기념비 같은 것들. 죽은 자들은 갇혀 있지 않다. 추억과 회상은 그들을 귀환시킨다.

토머스 하디(1840~1928)는 생전에 1000편이 넘는 시를 썼지만 시인으로서는 과소평가되었다.


인텔리겐치아 2482, 2015년 3월 9일 발행

윤명옥이 옮긴 토머스 하디의 ≪하디 시선≫ 그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86번째 생일의 회고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기약하지는 못한단다, 얘야, 너무 많은 것을 기약하지는 못해, 그저 중간 색조의 우연 같은 정도지.” 그대는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지. 그대의 신용을 지키는 현명한 경고였지!


그 경고를 받아들인 덕택에 나는 해마다 할당되는 고통과 아픔을 견딜 수 있었지. -«하디 시선(Selected Poems of Thomas Hardy)»,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지음, 윤명옥 옮김, 148~149쪽

‘해마다 할당되는 고통과 아픔’이 뭔가? 시인의 개인사다. 하디는 소설가로 명망을 날리다가 «무명의 주드»가 신랄한 악평을 받자 낙담한다. 소설을 단념하고 58세부터 는 시 쓰기에 몰두했다. 고통과 아픔은 어떤 시를 만드나? 염세주의가 보인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슬


프고 우울하며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분위기 가 흐른다. 운명적인 분위기란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의 조그마한 행위 뒤에는 이해할 수 없 고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 또는 절대자 가 있다는 성찰을 말한다. 그것이 무관심한 우주 속의 인간 상황이다. 하디는 그것을 적 나라하게 응시한다. 응시하여 무엇을 보았는가? 우주를 여러 가닥을 섞어 짠 거대한 조직망 으로 묘사한다. 직물이나 그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그 속에 인간 드라마를 설정 하고 인간이 가진 순수한 요소를 그린다. 운


명의 내재 의지를 본 것이다. 운명의 내재 의지란 어떤 모습인가? 만물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초도덕적인 의지로 나타난다. 운명은 그의 시에서 어떤 모습인가? 일화들, 재난이나 아이러니를 조명한다. 다 양성과 모순을 지닌 다채로운 언어와 운율 이 매력적으로 통합된다. 인간의 슬픔이나 상실, 좌절을 특수한 상황으로 제시하면서 개념의 일반성을 획득한다. 표현의 태도는 어떤가? 조심스럽고 진솔하다. 때로는 독설적이고


냉소적이다. 하디 시의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상상력의 구심으로 기억을 활용한다. 기억 은 내면의 언어가 풀려나올 수 있도록 심성 을 자극하는 원동력이다. 기억은 죽음과 연 결된다. 유한의 존재는 죽음으로 사라지고 남은 존재는 망각을 얻는다. 기억과 망각은 어떤 관계인가? 망각의 세계로부터 기억이 일어난다. 하디 는 이런 기억들, 즉 현존하는 사물에 남겨진 죽은 자의 흔적, 조상, 유전, 기념비 같은 것 에 주목한다. 죽은 자들은 갇혀 있는 것이 아 니라 추억과 회상에 의해 귀환하는 존재다.


그는 무엇을 추억하나? 죽은 첫째 부인 에마다. 생전에는 소원했지 만 그녀가 갑자기 죽자 하디는 시 창작의 르 네상스를 맞는다. 회한과 후회로 충만한 연 애시를 쓰기 시작한다. 죽음이 불멸하는 영 원의 형식으로 승화된다. 하디 시의 특징이 뭔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자전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평범한 개인사에서 인간의 가 장 감동적인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가? 이것 이 하디 시의 개성이고 매력이다. 그는 어떤 시인이었나? «더버빌가의 테스», «무명의 주드» 같


은 소설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시인으로서 는 과소평가되다가 최근에 와서야 그 위상 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생전에 1000편도 넘는 많은 시를 남겼 다. 소박하고 겸손한 정신으로 사소한 것을 면밀히 검토하는 한편, 우주적인 규모로 사 색하며 양면적인 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하는 현대적인 시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윤명옥이다.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다.


사라진 것들의 귀환 유한의 존재는 죽음으로 사라지고 남은 존재는 망각을 얻는다. 흔적, 조상, 유전, 기념비 같은 것들. 죽은 자들은 갇혀 있지 않다. 추억과 회상은 그들을 귀환시킨다.

토머스 하디(1840~1928)는 생전에 1000편이 넘는 시를 썼지만 시인으로서는 과소평가되었다.


하디 시선 토머스 하디 지음 윤명옥 옮김 2010년 9월 15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172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Selected Poems of Thomas Hardy 하디 시선


10월의 마지막 주

나무들이 옷을 벗어 사방으로 내던진다− 잿빛 길과 지붕과 창문턱 위로− 그들의 찬란한 옷과 리본과 노란 레이스를. 나뭇잎이 매초마다 이렇게 제멋대로 내던져진다, 여기, 저기, 하나, 또 하나, 끊임없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거미줄에 걸렸다, 다른 잎들은 아래로 계속 떨어지는데. 목매단 죄수처럼 그1)가 매달려 있다, 황금 옷을 입고 말없이. 한편 저 높은 곳에서는, 아직 푸른 나뭇잎 하나 곧 자신에게 다가올 그런 운명이 두려운 듯 떨고 있다.

1) 그(he): 거미줄에 걸린 나뭇잎을, 목매단 죄수로 의인화해 표현했다.


그녀 (그의 장례식에서)

그들이 그이를 메고 그이가 쉴 곳1)으로 가네− 느린 행렬로 휩쓸며 가네, 나는 낯선 사람의 자리에서 뒤따라가네, 그들은 그이의 친척, 나는 그이의 연인. 그들의 의상은 슬픈 검은색 상복이지만, 갈아입지도 못한 내 옷은, 번쩍이는 색상. 하지만 나의 회한이 불같이 타오르는 데 반해, 그들은 슬픔 없는 눈으로 둘러서 있네.2)

1) 쉴 곳(resting-place): 무덤을 가리킨다. 2) ‘그’의 친척들과 ‘그’의 연인인 나의 대비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스름 속의 개똥지빠귀

‘서리’가 유령처럼 잿빛이고, ‘겨울’의 잔재들이 낮의 침침해지는 눈1)을 적막하게 할 때, 나는 관목림 문에 기대어 섰네. 뒤엉킨 덩굴들이 끊어진 수금2)의 현처럼 하늘을 할퀴었네, 가까이에서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모두 집 안의 벽난로 불을 찾아 돌아갔다네.

땅의 날카로운 모습은 쭉 뻗은 ‘세기’의 시체 같아 보였네, 구름 덮인 천개(天蓋)는 그3)의 납골당이고 바람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소리 같았네. 배아(胚芽)와 탄생의 고대의 맥박은 말라 오그라들어 딱딱하게 굳어 버렸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영혼은

1) 낮의 침침해지는 눈: 해를 비유하는 말이다. 2) 수금: 리라(lyra)를 말한다. 리라는 4∼11개의 줄이 있는 고대 그리스의 현악기 이며, 하프와 비슷하다. 3) 그(His): ‘세기’의 시체로 비유된 땅을 가리킨다.


나처럼 열정이 없는 것 같았다네.

그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머리 위에 있는 황량한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온통 가슴을 쏟아 내는 무한한 기쁨의 저녁 노래를 터트렸네. 연약하고, 야위고, 조그만, 나이 든 개똥지빠귀가 돌풍에 깃털을 날리며, 점점 짙어지는 어둠 위로 이렇게 그의 영혼을 온통 내던지는 것이었다네.

멀리 혹은 가까이, 주위를 둘러보아도 땅에 있는 어떤 사물들에도 그렇게 황홀한 소리로 즐거운 노래를 불러야 할 이유가 쓰여 있지 않았는데, 그 새의 행복한 저녁 인사 노래 속에 그는 알고 나는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축복의 ‘희망’이 떨려 오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그녀의 비밀

사랑의 희미한 아픔이 내 마음을 괴롭히는지를 그가 은밀히 알고 싶어 했네, 하지만 내가 죽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네.

그는 어떤 얼굴의 자취라도 찾으려 뒤졌네, 그는 서로 주고받는 편지가 오나 눈여겨봤네, 그리고 사랑의 말 같아 보이는 게 있으면 표정이 얼어붙거나 시무룩해졌네.

그는 시내로 가는 내 발걸음을 미행했네, 그는 바다로 가는 나를 몰래 뒤따랐네, 하지만 그는 이웃에 있는 교회 묘지로 가는 나를 따라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네.


반짇고리

“자, 봐요, 여기 반짇고리가 있어요, 작은 부인, 내가 반들반들한 참나무로 만든.” 그는 촌마을에 사는 목수였고, 그녀는 도시 출신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줄 선물을 만들고 있자, 그녀는 가까이에서 미소를 지으며, 그걸 줄 사람에게 이렇게 응답했다, “제가 평생 바느질하는 데 쓸 수 있겠군요!”

“틀림없이 그럴 거요. 그보다 더 오래갈 거요. 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불쌍한 존 웨이워드1)의 관을 짜고 남은 나뭇조각을 얻어 만들었으니.

당신의 반짇고리 가장자리에서 끝나는 이 나무 문양은

1) 존 웨이워드(John Wayward): 이 시에서 부인과 예전에 연인 관계였으며 그녀 의 결혼으로 인해 죽었음이 암시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다.


땅속에 있는 그 사람의 관에서 계속 맞게 이어지거든.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목재의 다양한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는구려, 나무 한쪽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데 쓰이고 있는데, 바로 그 옆쪽은 무덤 속에 있을 수도 있다는.

그런데, 당신 얼굴이 왜 그렇게 하얀 거요, 여보, 얼굴 좀 돌려 봐요? 그 착한 사람이 당신과 같은 도시 출신이긴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사람을 모르겠지?”

“그 사람이 저와 같은 도시 출신이라고 해도, 제가 그 젊은 남자를 어떻게 알겠어요, 그 사람이 제가 여자로 다 자라기도 훨씬 전에 그 도시를 떠났을 텐데요?”

“아, 그 말이 아니라오. 내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나머지 다른 쪽은 무덤 속에 있는 나무의 조각으로 당신에게 이걸 만들어 준다는 데 당신이 충격을 받았느냐는 말이오?”


“아니에요, 여보, 제가 그걸 알게 된 건 신경 쓰지 마요, 그저 우연한 그런 사실들이 제가 이상한 상상을 하도록 부추기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맥이 빠져 입술이 창백했고,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옆으로 돌려져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그녀가 존을 알고 있었을뿐더러, 그가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86번째 생일의 회고)

아, 세상이여, 그대는 내게 한 약속을 지켰구나, 내게 한 약속을 지켰어, 그대가 말했던 대로 그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했구나.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어렸을 적부터 나는 삶이 모두 아름다울 거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때 그대가 말했지, 그리고 그 후로도 말했지, 구름과 언덕에서 쏟아지는 그 신비한 목소리로 여러 번 말했지, “많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나를 사랑한단다, 또 많은 사람들이 아주 침착하게 나를 사랑한단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나를 경멸하다가 지하 세계로 떨어졌단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기약하지는 못한단다,


얘야, 너무 많은 것을 기약하지는 못해, 그저 중간 색조의 우연 같은 정도지.” 그대는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지. 그대의 신용을 지키는 현명한 경고였지! 그 경고를 받아들인 덕택에 나는 해마다 할당되는 고통과 아픔을 견딜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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