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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자유의 가격 도망치거나 항복했다면 살 수도 있었다. 까토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바깥의 자유가 안의 자유와 같지 않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가 아니면 삶도 아니다.

정을병(1934~2009)은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면서 ‘고발문학의 기수’가 된다.


인텔리겐치아 2484, 2015년 3월 10일 발행

이봉일이 엮은 정을병의 ≪까토의 자유≫ 다만, 피하면서 맞는 비겁한 죽음과, 죽음을 맞대하면서 죽는 용감한 죽음이 있을 뿐이 다. 이 둘 중에서, 현자는 후자의 것을 택한 다. 메레토스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 면서도 이를 거절한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후자에 속하는 죽음이요, 카에사르에게서 목숨을 구할 수 있으면서도 이를 거부한 자 기의 죽음 또한 후자에 속한다. -≪까토의 자유≫, 정을병 지음, 이봉일 엮음, 67쪽


구할 수 있는 목숨을 거부한 ‘자기’는 누구인 가? 소크라테스처럼 용감한 죽음을 맞는 자의 이름은 이 작품의 주인공, 카토다. 죽었는가? BC 46년 4월 12일, 함께 있던 동료들이 돌아 간 뒤 침실에서 ≪파이돈≫을 읽었다. 그리 고 단검을 꺼내 배를 찔렀다. 살 수도 있었는가? 카이사르의 공격을 피해 피란을 갈 수도 있 었고 동료들을 통해 구명 운동을 펼 수도 있 었다. 그랬으면 살았을 것이다.


왜 살지 않았는가? 그렇게 일신을 구해서는 자신의 행복을 기 대할 수 없었다. 조국과 국민이 카이사르의 손에 갈기갈기 찢긴 뒤에 혼자 무엇을 하겠 는가? 죽음 선택의 논리는 뭔가? 공화정 아래 모든 시민은 동동한 권리를 갖 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로마인은 다른 로마 인을 용서하거나 사면할 수 없다. “살려주기 를 비는 것은, 정복당한 자나 하는 일이며, 용서를 청하는 것도 역시 죄지은 사람이나 할 일…”이라고 동료들에게 말한다.


동등한 권리 때문에 사면할 수 없다는 주장인 가? 그렇다. 용서나 사면은 권리가 비대칭일 때 가능하다. 용서나 사면은 권리가 큰 쪽이 적 은 쪽을 대하는 태도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같은 권리를 가진 상태, 곧 권력의 대칭 상태 라면 누가 누구를 용서하거나 사면할 수 있 는가? 죽기 전에 ≪파이돈≫을 읽은 까닭은? 자유에 대한 그의 생각이 소크라테스와 다 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모든 폭력과 그리고


모든 악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는 길은 죽음 밖에 없지. 죽음 없이 어디서 자유를 찾으며, 어디서 참다운 삶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카토가 말한다. “이 지상에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지금은 조금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 는, 양심과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야!” 카토는 어떤 인물이었나? “어려서부터 독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었 으나, 기지가 모자라고 융통성이 없는 데다 환경에 적응할 줄 몰라서 언제나 고독하게 지냈다. 누구에게 아첨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는 지극히 완고하고 비사회적인 인간이어 서 그게 되려 주위의 주목과 존경을 받게도 되었다. (…) 그가 가장 존경하는 미덕은 감


정에 영향 받지 않는 ‘엄격한 정의’ 그것이었 다. (…) 옷은 언제나 단벌이었으며 귀족이 되었을 때도 소박한 흑자색의 옷을 입고 다 녔다.” 카이사르와는 어쩌다 그런 사이가 되었나? 원로원파와 민중파의 싸움 끝에 BC 60년 로 마에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삼두정치가 출현한다. 이로써 원로원 주도 의 공화정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크라수스 사후, 카토는 카이사르를 견제하고 공화정 을 지키기 위해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는다. 그러자 BC 49년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 너 폼페이우스 일당을 토벌한다.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 한국에서 카토는 무 엇이었나? ≪까토의 자유≫는 1966년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 마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려 한 정치 적 시도를 카토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실존적 자유의 문제를 다룬 정치적 알레고리다. 작가 정을병의 삶은 어땠나? 1934년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났다. 1959년 ≪자유공론≫ 제1회 신인문학상에 <철조망 과 의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74년 2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구속되어 10 월 항소심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을 때까 지 옥고를 치렀다. 2009년 75세로 영면했다.


장편소설 42편과 중·단편소설 150여 편, 수 필집 6권을 남겼다. 어떤 작품을 썼나?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고 정치색 짙은 실존적 자유의 문제를 다루었다. ‘고발 문학의 기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고발문학에는 무엇이 있나? ≪현대문학≫에 발표한 장편소설 ≪개새끼 들≫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병역 미필자 를 강제 징집해 ‘국토건설단’ 공사 현장에 투 입시켜 인권을 유린한 사건을 고발한 작품 이다. <육조지>(1974), <본회퍼의 죽음> (1980), <인동(忍冬)덩굴>(1980)에서는 그


의 옥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봉일이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 창작학과 교수다.


죽음, 자유의 가격 도망치거나 항복했다면 살 수도 있었다. 까토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바깥의 자유가 안의 자유와 같지 않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가 아니면 삶도 아니다.

정을병(1934~2009)은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면서 ‘고발문학의 기수’가 된다.


까토의 자유 정을병 지음 2010년 4월 15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148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까토의 자유


1 소크라테스. “…사람들이 快樂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이 상한 무엇인 것 같더군. 그것은 快樂의 정반대인 것처럼 보 여지는, 다시 말하면 苦痛이라는 것과도 이상한 관계가 있 는 모양이야. 그 둘은 동시에 하나의 人間에게 주어지려고 는 하지 않으나, 마치 둘이면서 하나의 머리에 묶여 있는 것 처럼 사람이 그 한쪽을 追求하여 붙잡으면, 언제건 간에 다 시 한쪽을 자연히 붙잡게 되거든. 그래서 나는 생각하는데… 만일 아이소포스가 이런 것에 着眼하였더라면 寓話라도 하나 더 만들 수 있었을 거야. 즉 神은… 그 두 놈이 하도 싸움을 하니까 그걸 말릴 셈으로 두

놈의 머리를 하나로 비끌어 매었다고. 그러기 때문에 그 한쪽 을 잡는 사람은 必然的으로 다른 한쪽도 잡게 된다고 말이야.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기를 들어서….”

까토1)는 잠깐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쾌락과 고통은 1) 까토: 소(小)카토(Marcus Porcius Cato Uticensis, BC 95∼BC 46)라고 불리 기도 하는데, 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대(大)카토(Cato, Marcus Porcius, BC 234∼BC 149)의 증손자이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으로 카이 사르와 대적해 로마 공화정을 수호한 것으로 유명하고,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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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묶여진 것…’,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니, 지금 그의 사상을 접하고 있는 이 까토는 무엇을 느끼고 있 는 것일까? 쾌락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고통 또한 어디서 오 는 것이기에 소크라테스는 이 이론으로 죽기 전의 자신을 달 래었을까? 음침한 하데스의 입구에서…. 그러나 삶이 쾌락만은 아닐 것 같으면, 죽음 또한 고통만 이 아니리라. 존재에로의 탄생은 길다란 고통으로 오는 쾌락이며, 고통 속에서 생장이 뒤따르고 쾌락은 고통으로 가는 그 아랫계단 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고통과 쾌락으로 된 군화를 신고 싸움터 로 달리는 군인과 같고, 고통과 쾌락은 시간을 좇아 그를 쾌 락으로, 혹은 고통으로 이끌게 마련인 것이다. 모든 성장은 쾌락과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하고, 그 양은 주체자의 질에 정비례한다. 따라서 위대한 인간은 보다 많은 쾌락 이전에 보다 많은 고통을 불러들이고, 위대한 국가 역 시 쾌락을 위하여 엄청난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잡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는 사실이며, 또 불가피하게 받아야 하는 고통이라면 엄숙하 이기도 하다.


게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자연에 순응하여야 하고, 인간의 노력은 그 순응의 범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순응을 넘어 선, 까토의 자유를 위한 노력은, 벌써 노력이 아니다. 그러나 까토는 생각한다. …인간의 노력은 영원한 것이 며, 영겁을 돌아 인간의 노력을 다시 평가할 때가 오면, 그것 은 자유를 지상에다 더욱 넓고 두텁게 펼쳐주리라. 비록 로 마는 카에사르2)의 칼끝으로 찢어지지만, 자유를 향한 인간 의 양심은 제신의 은총 밑에 사는 영원한 불사조요, 결코 굴 하지 않는 넋…. 까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로마를 사랑하였다. 휘드 라3)처럼 결코 끊이지 않는 목을 가진 로마를 그는 지극히 사 랑하였다. 그러나 이 로마도… 이제는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로 물루스4)의 굳은 건국정신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허영과

2) 카에사르: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 고대 로마의 정 치가, 장군, 작가.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 다. 3) 휘드라: 히드라(Hydra).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9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괴물. 티폰과 에키드나의 자손으로 가운데 머리는 죽지 않는다. 4) 로물루스(Romulus): 전설 속 로마의 건립자이며 초대 왕. 전설에 의하면,


사치로 퇴색되어 갔고, 안으로는 빈궁과 부패로 바야흐로 누 란5)의 형세에 이르러, 언제 허물어져 내릴지 앞을 내다보기 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에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군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괴롭히고….

로마의 자랑스러운 폼페이우스6)가 로마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자, 로마는 극도의 불안에 덮싸이 고 말았다. 시민들은 생각하였다. 그가 그야말로 로마의 자 랑스러운 대장군이기는 하였으나, 만일 불법으로 정권을 잡 고 시민을 압제하는 날이면, 장차 로마는 또 어떻게 될 것이 냐고…. 그런 기우는 로마 시민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폼페 이우스에 앞서, 마리우스7)와 술라8)가 개선하고 돌아와서 로

로물루스는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전쟁의 한 영웅인 아이네이아스(Aeneas)의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라티누스(Latinus)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 누란(累卵): 층층이 쌓아 놓은 알이란 뜻으로, 몹시 위태로운 형편을 비유적 으로 이르는 말. 6)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 106∼BC 48): 고대 로마의 장 군이며 정치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지지를 얻어 카이사르, 크라 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이끌었다. 후에 카이사르와 대립했으나 패하고 망명 중에 암살당했다. 7) 마리우스(Marius, Gaius, BC 157?∼BC 86): 콘술(집정관)을 7차례(BC 107,


마를 칼과 군화로 다스렸고, 폼페이우스 역시 그 술라의 한 부장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폼페이우스에게도 어떤 야심 이 있다면, 로마 시민은 그에게 또 한바탕의 핍박을 겪지 않 을 도리가 없는 운명이었다.

원로원 의견은 대개 일치를 본 것 같았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 로마의 위력을 크게 떨친 폼페이우스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그가 요구하는 집정관9)의 선거 일자쯤은 연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까토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3백 명이 나 되는 원로원 의원이 자신들과 나라를 압제하게 될 폼페이 우스를 놓고, 이렇게도 이의가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까토는 발언권을 얻어 연단에 올랐다. 그래서는 폼페이

BC 104∼BC 100, BC 86) 지낸 로마의 장군·정치가. 8)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 138∼BC 78): 역사상 최초의 전면적 인 내전(BC 88∼BC 82)에 승리했으며 뒤이어 딕타토르(독재관)를 지내면서 (BC 82∼BC 79)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세기에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한 헌정 개혁을 실시했다. BC 82년 말 자신이 행운아라고 믿는 마음에서 펠릭스라는 이름을 썼다. 9) 집정관(Consul): 고대 로마의 관직으로, 공화정 시대에는 관리가 실제적으 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으며, 제국 시대에는 명목상 황제 다음가는 자리였다.


우스의 범법성을 통렬히 비난하는 한편, 그것을 간파하지 못 하고 있는 원로원의 어리석음과, 폼페이우스의 압력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그들의 비굴함을 여지없이 비난하였다. “…폼페이우스가 시석10)을 무릅쓰고 로마를 위해서 싸웠 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 한 애국심에서 우러난 행위였느냐 아니냐는 것은 쉽게 속단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가 원로원의 지령도 없이 23세에 장군 이 되어 술라에게 가담한 것은, 그 저의를 해석하기에 상당 한 신중을 요하게 합니다. 아무리 나라를 사랑하였다고 하더 라도, 그의 가슴속에는 터무니없는 영웅심과, 끝내는 독재자 가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읍니다. 이런 그의 심 리를 악용하여 당시의 군정관이던 술라는 자기의 딸 에밀리 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주어 사위를 삼았음은 여러분도 다 잘 아는 얘기가 아닙니까? 폼페이우스는 몰인정하게도 이때에 자기의 아내를 버리고 에밀리아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이런 불의의 결혼 관계가 다 만 그들의 사사로운 가정 사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에 그 악영향을 발동시킨다는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앞으로도 이 썩은 나라에 권력을 위한 목적의 혼인 관계는 10) 시석(矢石): 예전에, 전쟁에 쓰던 화살과 돌.


얼마든지 있을 것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읍니다. 이런 폐 풍 속에서 폼페이우스는 자라났을 뿐만 아니라 교만에 빠진 자신을 스스로 마그누스라고 부르는 야심가입니다. 여러분! 당시 폼페이우스의 나이는 불과 24세였으며 원로원 의원도 아니었고 어떤 관직에 있어보지도 못했읍니다. 그런 사람이 리비아를 정복하고 돌아와서는 법적인 자격이 없음에도 불 구하고 개선식을 올리도록 술라에게 압력을 가해, 이를 강행 했읍니다. 이것은… 이것은, 여러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 니까? 교만한 군화로 법과 원로원을 짓밟은 처사가 아닙니 까? 그러고서 폼페이우스는 여태까지 법을 어기며 자신의 무 력을 살찌게 해왔읍니다. 또한 독재자 술라가 죽고 난 다음, 그는 제2의 술라가 되고자, 불량배들과 결탁하여 끊임없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혀 왔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는 사 실입니다. 그는 이제… 리비아, 이베리아에 뒤이어 아시아 를 정벌하고 세 번째로 개선식을 올리겠다고 원로원에 압력 을 가하고 있읍니다. 허지만, 이것은 좋습니다. 세 번이 아니 라 서른 번이라도 개선식을 올릴 수 있는 위대한 장군이 있 기를 로마는 원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정복은, 로마의 영원 한 정복은 마음의 정복에 있는 것이지, 결코 칼이나 폭력으 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는 피를 불러올 뿐 결코 피를


마르게 할 수는 없으며, 로마의 무력이 허물어질 때 모든 지 배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까토는 잠깐 말을 끊고 숨을 돌렸다. 잠자코 까토의 연설 을 듣고 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까토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키케로11)도 끼어 있었다. 그는 냉소 적인 얼굴로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무슨 말을 했는지 본인 외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원로원 안에는 약간의 동요가 일고 있었으나 까토가 다시 목청을 돋구자, 곧 잠잠 해졌다. “로마가 원하는 것은… 그런 장군입니다. 현실적으로 그 것이 불가능하다면 로마의 최고 기관인 원로원에서 로마 시 민에게 그런 기풍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마리우스를 필두로 로마는 한낱 장군의 손에 의하여 우리의 조상들이 물려준 이 나라의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읍니다. 자, 여기에 다 시 폼페이우스가 뛰어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이 나라를 지

11)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로마의 정치가·법률 가·학자. 아르피눔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로마와 그리스에서 훌륭 한 교육을 받았다. BC 89년 폼페이우스 트라보(폼페이우스의 아버지) 밑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로마 공화국 마지막 내전 때 공화정의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 지만 실패했다. 수사학, 법률, 철학, 웅변 등에 관한 다양한 책을 썼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로마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자로 명성이 높다.


키겠읍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감히 칼을 뽑아 들고 폼페이 우스를 대적하겠읍니까?” 원로원에는 소란의 물결이 스치고 지나갔다. 즉 폼페이 우스는 까토가 지나치게 걱정할 만한 그런 독재자는 아니다, 그가 지금 원로원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집정관의 선거 일자를 연기해 달라는 것이 아니냐,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등등의…. “…물론 그것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가 가장 나쁜 로마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도 확신하는 바입니 다. 그러나 어쨌든, 나라의 법은 누구라도 어길 수 없는 것이 며, 만약 어긴다면 합법적인 제재가 있을 뿐입니다. 집정관 의 선거 일자는 엄연히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개선장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기의 부 장 한 사람을 집정관에 당선시키고자 날짜를 연기해 달라는 것은, 그 요구 자체가 법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려는 오만한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개선해 오는 첫날부터 습관화되 어 간다면, 그의 요구에 의하여 끝내는 원로원도 폐쇄할 수 있을 것이며, 여러분의 직권도 쉽게 박탈할 수 있을 것입니 다. 만일 이런 불법도 참아 나갈 수 있으시다면, 기꺼이 폼페 이우스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한


다면… 이 까토는 선두에 서서, 그런 모욕이라도 달게 받겠 읍니다….” 까토는 좀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으로써 동의를 묻 듯이 의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더듬어 나갔다. 그들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까토는 연단에서 내려섰다. 곧 뒤이어 가부를 결정하는 행렬이 늘어섰다. 줄 맨 끝에 키케로가 있었는데, 까토는 조 용히 그의 곁에 붙어 섰다. “스토아학파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키케로의 가벼운 빈정거림이었다. “키케로, 지금은 철학 시간이 아니오.” 까토의 대꾸.

폼페이우스의 이 세 번째 개선식은 지극히 성대하였다. 32만의 로마 시민들은 전 세계를 정복하고 극도의 영광에 싸 여 돌아오는 폼페이우스를 보기 위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로마 시민들은 일찍부터 폼페이우스를 매우 좋아하였다. 무용을 떨친 거친 사나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상하게 사람 들의 마음을 끄는 부드러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알렉


산더와 같은 호남이면서 멋쟁이인데다, 친절하여 많은 사람 에게 호감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그가 권력을 잡기 위하여 불필요한 일만 하지 않는다면, 시민은 그를 무조건 사랑할 판이었다.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개선장군의 행렬이 성문을 들어 서자, 격동하기 좋아하는 로마 시민들의 박수 소리와 환호성 은 하늘을 찢어놓는 것 같았다. 시민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다가 장병들에게 달려들어 얼싸안기 시작했다. 축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 감격에 넘쳐 제신의 이름을 외는 사 람, 꽃송이를 뿌리는 사람, 이름을 큰 소리로 처부르는 사람, 사람과 사람에게 깔려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 길과 길, 그 리고 넓은 마르스의 광장과 테라스의 지붕에는 입추의 여지 도 없이 사람들이 들어서서 팔과 입을 놀리고 있었다. 거무스름하게 얼굴이 그을은 장병들은 잔뜩 흥분한 모습 들이었으나,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동상과 같은 굳은 몸집으 로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네 마리의 흰 말이 끄는 전차 에 드높이 선 폼페이우스는 찬란한 치장을 한 의장대에 뒤이 어, 시민들에게 나타났다. 그는 마흔이 갓 넘은 좋은 몸집에 황금 투구를 쓰고, 호화스럽게 꾸민 갑옷을 입고서 패기만만 하게 전차 위에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거만하게 보


이지 않았고, 무수한 전쟁에서 무수한 무훈을 세웠건만, 그 의 호인 타입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 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로마 시민들은 미칠 듯이 소리를 질렀다. “로물루스의 아들, 폼페이우스!”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로마의 영웅,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세계를 정복한 대장군!” “아마존 여군을 무찌른 로마의 폼페이우스!” 남자들의 환호성에 뒤이어 여자들은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 개선 행렬이 마르스의 광장에 이르자 환영식은 최고조에 달한 것 같았다. 넓은 광장을 굽어보는 테라스 위에는 로마 의 대정관들로부터 집정관, 호민관 등의 고급 관직자들과 원 로원 의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개선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란 뱀처럼 움직이는 행렬은 끝이 없었 다. 폼페이우스가 정복한 나라들의 이름을 새긴 패말들이 끊 일 줄 모르게 지나갔고, 그곳에서 얻은 수입금의 목록이 한 없이 계속되었다. 그다음으로는 폼페이우스의 포로들이 지 나갔다. 그중에는 아르메니아 왕을 비롯하여 유대 나라의 아


리스토블루스 등의 왕과 그 귀족들, 그리고 수많은 나라들의 패전 장군들이 기죽은 모습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개선 행렬은 언제 끝이 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복으로써 얻은 갖가지 전리품을 실은 마차의 행렬은 하마 끝날 때가 되었으나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시민들도 이제 환성을 지 르기에도 지쳐버린 것 같았다. 까토는 원로원 의원들 틈에서 이 개선식을 구경하고 있었 다. 그의 곁에는 매부인 루쿨루스12)가 침울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어떻습니까? 기분이….” 까토가 루쿨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훌륭한 장군이지. 세 번의 개선식으로 세 대륙을 정복하 였으나 나보다 더 훌륭한 개선식을 올린 셈이지.” 루쿨루스의 말투는 약간 빈정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들은 천천히 군중 속을 빠져 나와 자갈이 깔린 조용한 골목 길로 접어들었다. 루쿨루스는 호화스럽게 단장한 말을 타고 있었으며 까토는 거무스레한 옷을 입고 그냥 걸어가고 있 었다.

12)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 BC 117?∼BC 56): BC 74∼BC 66년에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 유파토르와 싸운 로마의 장군.


“난, 폼페이우스 그 사람이 싫단 말이야. 훌륭한 군인이기 는 한데… 아주 서투르고 위험한 정치인이거든. 칼을 차고 싸움터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을 군인답게 잘 처리하지만… 포 룸13)에 나와서 정치에 개입할 때는 정치인답게 이성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정치와 전쟁은 다른 모양이야.” 루쿨루스의 말이었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술라의 부장으로 있었으나, 그가 술라의 더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 자, 폼페이우스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쿨루스는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가까와지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폼페이우스가… 이 영광스런 때에 일생을 끝맺는 다든가, 적어도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로마는 영원히 그 를 사랑할 것이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큰일이지.” “아마 로마의 정계는 곧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겁 니다. 그가 군화를 신은 채 포룸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벌써부터 간절한 것입니다.” 까토가 말했다. “그렇겠지.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어떤 불법이라도 하니까. 허지만, 자네가 너무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은 다시

13) 포룸(Forum): 로마의 공공 집회가 열리는 광장. 그리스의 아고라와 아크 로폴리스를 질서 정연한 공간으로 바꾼 것.


생각해 볼 문제야. 질녀의 혼사 문제는 거절해 버렸다던가?” “거절해 버렸죠. 내가 혼자서 자기에게 반대하니까, 나만 잡으면 되겠다는 생각에서 조카 년에게 장가를 들겠다는 거 지만 어디 그게 사리에 맞는 일입니까? 동기가 불손하거든 요. 집에서는 폼페이우스를 조카사위로 맞아들인다는 것이 영광이라고 대환영입니다만 결혼 문제 따위로 인연을 맺어 나라를 어지럽힌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깨끗이 거절 해 버렸지요.” “…거절한 거야 좋지만, 그런 이유라면 폼페이우스는 다 른 사람과 그런 관계를 맺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이를테 면, 크랏수스14)나 카에사르 같은 자들과 말일쎄.” “가능성은 있지요. 홀애비니까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하고. 허지만….” “그렇게 되면… 나랏일은 더욱 나빠지는 셈이지. 나야 정 치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지만….” 14) 크랏수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년?∼BC 53). 로마 의 정치가.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끌었으며 실제적으로 원로원의 세력에 도전했다. BC 87년 가이우스 마리우 스가 로마를 장악하자 도망갔다. 당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마리우 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자(BC 83∼BC 82) 술라를 지지했으며, 82년 로마로 돌아와 술라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사후, 카 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BC 49∼BC 45)이 일어났다.


그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걸어갔다. 고 요한 뒷골목 길은 더욱 음침해 보였다. “어떻게 되든… 이 나 라의 자유는 지켜야 합니다.” 까토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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