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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서 가짜의 진짜 연극은 가짜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가 되려면? 배우는 죽어야 한다. 주검은 연극인가? 아니다. 연극의 진실은 어디 있는가? 관객에게 있다. 그들은 죽고 불타고 피 흘리기 때문이다.

연극 ‹관객›, 후안 로카 연출, 쿠바 아바나파마 극장, 2013


인텔리겐치아 2508, 2015년 3월 25일 발행

전기순이 옮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관객≫ 요술사 도대체 지하 극장에서 무슨 연극이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연출가 모든 연극은 유폐된 습기에서 나오 는 법이오. 진정한 연극은 모두 과거의 달 [月]이 지닌 깊은 악취를 풍기는 법이지. 의 상들이 말을 하면 산 사람들이 뼈로 만든 단 추가 되는 그런 연극. 내가 터널을 만든 이유 는 의상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소.


의상들을 통해 숨은 힘의 윤곽을 가르쳐 주 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그때 관객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연기에 복종하면서 집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게 되오. -«관객(El Público)»,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지음, 전기순 옮김, 85쪽

연출가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가? 아레나, 곧 무대 밑에서 펼쳐지는 지하 연극 이 진정한 연극이라고 주장한다. 뭐가 진정한 연극인가? 가짜 연극이 아니라 진짜 연극을 말한다.


뭐가 진짜 연극인가? 등장인물이 무대에서 죽는 척하다 막이 내 리면 헤헤거리며 일어나는 연극은 진짜 연극 이 아니다. 그럼 배우가 정말 죽어야 진정한 연극인가? 그렇다. 진짜 연극은 막을 불태우고 배우가 관객들 앞에서 진짜로 죽는다. 연출가는 그 것이 예술의 진실을 전하는 연극이라고 주 장한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재현 예술이 취하는 외면적 사실주의 때문이 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진정한 실제를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


다. 초현실주의 연극이 그랬다. <관객>이 초현실주의 연극인가? 그렇다. 로르카는 이 작품으로 진정한 초현 실주의자가 되었다. 1920년대 유럽 연극을 장 악했던 초현실주의, 피란델로와 브레히트가 제기한 연극론과 일맥상통하는 작품이다. 피란델로, 브레히트와 로르카의 일맥상통은 무엇인가? 이 셋은 모두 “잠자는 관객, 수동적인 관객, 무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관객”을 깨우 려 한다. <작가를 찾아다니는 여섯 명의 인 물들>을 발표한 피란델로, 서사극을 제안 한 브레히트, 초현실주의 연극을 주장한 장


콕토의 공통된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관객을 어떻게 깨우는가? 그들에게 “공연 불가능한” 연극을 감상하도 록 요구한다. 전위의 무대다. 무대와 관객 사 이를 벌려 놓고 관객이 무대의 내면과 그 내 면에 잠재한 ‘숨은 힘’을 직시하도록 내몬다. 숨은 힘으로 관객을 내몬 이유가 뭔가? 1920년대 스페인에서는 입센과 버나드 쇼의 계보를 잇는 부르주아 연극이 지배적이었 다. 젊은 극작가들이 반발한다. 이 사이에서 사실주의 연극의 환영을 깨뜨리려는 실험적 이고 전위적인 연극 조류가 형성되었다.


“공연이 불가능한” 연극이 받은 비판은 뭔가? 작가 폴 오스터는 전위주의 예술가들이 의 식적으로 실험성 짙은 작품을 선보이는 태 도를 비판했다.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안고 있 는 위험성을 거론한 것이다. 로르카는 누구인가?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다. 전통에 뿌리를 둔, 자전적인 문학적 재료를 모더니즘 언어 와 결합하며 신화적 매력을 갖춘 문학작품 을 선보였다. 전통은 어디서 얻었나?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에서 보낸 유년기 경험이었다. 유모는 로르카에게 집시에 얽


힌 신화를 들려주거나 인형극을 함께하곤 했다. 안달루시아 전통음악인 칸테혼도는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모더니즘은 어디서 만났나? 스무 살이 되던 1918년부터 10년간 레시덴시 아라고 부르는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기숙사 에서 생활했다. 후안 라몬 히메네스, 다마소 알론소, 라파엘 알베르티, 살바도르 달리 등 이 비슷한 시기에 레시덴시아를 거쳐 갔다. 이들과 교감하며 모더니즘을 흡입했다. 이 후 뉴욕에서 몇 달을 보내며 생애 후반부를 결정짓는 변화를 겪는다.


어떤 변화인가? 유럽과는 다른 현대 도시의 날카로움을 경 험했다. 새로운 도시 분위기가 그의 내면에 초현실주의에 대한 강한 욕구를 불어넣었 다. 이 시기에 발표한 시집 «뉴욕의 시인» 과 희곡 <관객>은 초현실주의에 사로잡혀 써내려간 것이다. 그 이후의 삶은? 1936년 마드리드에서 파시스트의 활동이 본 격화하면서 동성애자, 집시 옹호자였던 로 르카는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내전이 발발 하자 피신했다가 우파 국민전선 사령관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작품은? 시집 «집시 로만세»와 안달루시아를 배경 으로 쓴 3대 전원 비극 <피의 결혼>, <예 르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등이 대 표작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전기순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이고 외국문학연구소 소장이다.


연극에서 가짜의 진짜 연극은 가짜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가 되려면? 배우는 죽어야 한다. 주검은 연극인가? 아니다. 연극의 진실은 어디 있는가? 관객에게 있다. 그들은 죽고 불타고 피 흘리기 때문이다.

연극 ‹관객›, 후안 로카 연출, 쿠바 아바나파마 극장, 2013


관객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전기순 옮김 2015년 3월 27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108쪽, 14,500원


작품 속으로

관객


나오는 사람들

연출가 말 1, 2, 3, 4 하인 남자 1, 2, 3 엘레나 훌리에타 황금 방울 형상 포도 넝쿨 형상 소년 센투리온 황제 흰 말 세 마리 검은 말 어릿광대 의상 발레 의상 누드 남자 간호사 학생 1, 2, 3, 4, 5


귀부인 1, 2, 3, 4 소년 도둑들 프롬프터 요술사 부인


1막


(연출가의 방. 연출가 앉아 있다. 모닝코트를 걸쳤다. 푸른 색 무대 장식. 벽에는 인쇄된 커다란 손. 방사선 사진처럼 그려진 창문들)

하인

선생님.

연출가 무슨 일이야? 하인

관객이 오셨습니다.

연출가 들어오라고 해.

(흰 말 네 마리가 들어온다.)

연출가 뭘 원하시오? (말들이 트럼펫을 분다.) 이게 뭐지?

나는 피리라도 불어야 하는 건가. 나는 연극을 늘 야 외에서 할 예정이었소! 야외무대에 내가 독을 뿌리 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내가 재산을 다 날렸다는 거 지. 주사 한 방으로 충분하오. 여기서 꺼지시오! 내 집에서 꺼지라고, 말 놈들아! 이런, 벌써 말들이 이렇 게 커 버렸네. 어느새 침대도 준비됐고 말이야. (울 면서) 오, 나의 말들이여. 말들

(울면서) 300페세타에, 200페세타에, 소파 한 접시 에, 빈 향수병 하나에, 당신이 침으로, 당신의 잘린


손톱으로. 연출가 꺼져! 꺼져! 꺼져! (벨을 누른다.) 말들

공짜로! 전에는 당신 발에서 냄새가 났고 그때 우리 는 세 살이었지. 우리는 뒤뜰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는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잠시 뒤에 당신 침대를 눈물로 채웠지. (하인이 들어온다.)

연출가 채찍을 가져와! 말들

당신의 구두는 땀으로 썩어 버렸지만 우리는 당신이 이해할 줄 알았어. 풀 속에서 썩어 버린 사과들과 달 이 맺는 관계도 그것과 똑 같다는 걸.

연출가 (하인에게) 문 열어! 말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염병할! 아직 솜털로 덮여 있는 주제에, 자기 것도 아니면서 담벼락 석회나 집 어 먹는 놈이!

하인

문을 안 열래요. 극장으로 나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연출가 (하인을 때리며) 문 열어!

(말들이 번쩍이는 긴 트럼펫을 꺼내더니 자신들의 음악에 맞춰 천천히 춤을 춘다.)

말1

염병할!1)


말 2, 3 그리고 4 할병염!2) 말1

염병할!

말 2, 3 그리고 4 할병염!

(하인이 문을 연다.)

연출가 야외극장으로! 가자! 어서! 야외극장! 여기서 꺼져!

(말들이 나간다.)

(하인에게) 계속해.

(연출가 탁자 뒤에 앉는다.)

하인

선생님.

연출가 뭐야? 하인

관객이 오셨습니다.

1) 원문은 “Abominable!”다. 2) 원문은 “Blenamiboá!”다. “abominable”를 대충 거꾸로 표기한 것이 다.


연출가 들어오라고 해.

(연출가 금색 가발을 갈색 가발로 바꾼다. 똑같은 연미복을 입은 남자 셋이 들어온다. 시커먼 수염들을 길렀다.)

남자 1 야외극장의 연출이십니까? 연출가 분부만 하십시오. 남자 1 당신의 최근 작품을 축하해 주려고 왔소. 연출가 감사합니다. 남자 3 정말 독창적입니다. 남자 1 멋있는 제목하며, 로메오와 훌리에타라! 연출가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 남자 1 로메오는 새가 되고 훌리에타는 돌이 될 수도 있소.

로메오는 소금 한 톨 훌리에타는 지도 한 장이 될 수 도 있지. 연출가 그렇다고 로메오와 훌리에타가 아닌 건 아니죠. 남자 1 사랑에 빠졌다…. 정말 그렇게 믿소? 연출가 글쎄요…. 제 생각을 말하자면…. 남자 1 충분하오! 충분해! 스스로 폭로할 것까지야. 남자 2 (남자 1에게) 신중해야지. 자네 잘못이야. 무엇 때문

에 극장 문을 두드린 겐가? 숲을 찾았어야지. 안 그


래? 숲이 수액의 소음을 자네에게 들려주는 게 더 쉽 겠네. 그런데 연극이라니? 남자 1 연극 문을 두드린 것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남자 3 무덤의 진실을 알고 싶어서겠지. 남자 2 가스등 스포트라이트가 번쩍이는 무덤, 홍보 전단

지, 길게 늘어선 관람석. 연출가 신사 양반들…. 남자 1 네, 네. 야외극장 연출 양반, 로메오와 훌리에타의

작가 양반. 남자 2 그런데 연출 양반, 로메오는 오줌을 어떻게 갈기나

요? 그러면 나쁜 일일까? 로메오가 오줌 싸는 걸 훔 쳐보면? 그놈이 고통의 코미디 속에서 신음하는 척 하며 몇 번이나 탑에서 몸을 던졌지? 연출 양반, 그 래서 무슨 일이라도 났나? 또 안 나면 어때? 그리고 그 무덤3) 말이야. 마지막 부분에서 당신은 왜 무덤 계단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거지? 천사가 자기 것 떼 어 내고 로메오의 물건을 달고 나타난 걸 봤을 텐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독을 품 은 꽃4)이라는 거요. 어떻게 생각하쇼? 대답해 봐!

3) 지하 극장을 말한다.


연출가 선생님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남자 1 (말을 자르며) 진정한 연극을 시작하기 위해 내 몸에

한 방을 날릴까 하는데. 아레나 밑에서 펼쳐지는 연 극 말이야. 연출가 곤살로…. 남자 1 뭐라고…? (잠시 숨을 고른다.) 연출가 (격하게 반응하며) 나는 그럴 수 없소. 모든 게 허물

어질 거요. 내 자식들을 장님으로 만들어서 내가 관 객과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리에 난간을 다 치 워 버리고 관객과 무엇을 하겠습니까? 가면이 나를 잡아먹으려 할 거요. 나는 가면이 한 남자를 잡아먹 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소. 도시의 힘센 젊은이들 이 피 묻은 창을 들고 그의 엉덩이를…. 아메리카에 서는 가면이 한 소년을 처형하고 내장을 빼서 걸어 둔 사건도 있었소. 남자 1 대단한데! 남자 2 그런 말을 왜 연극에서 하지 않는 거죠?

4)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꽃의 독’으로, 독을 눈 에 넣으면 잠들었다 깨어나게 되는 데, 그때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남자 3 그거 이야기의 줄거리가 되겠는걸. 연출가 어떤 경우든 마지막이 되어야 하오. 남자 3 두려움에 질린 엔딩이라. 연출가 그렇소, 선생. 선생은 내가 가면을 무대에 올리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남자 1 그렇지 않소. 연출가 도덕심도 못 올릴 것 같지? 관객들의 내장도? 남자 1 어떤 관객은 문어가 몸만 비틀어도 토악질을 해 대

지. 암이란 단어를 또박또박 발음만 해도 창백해지 는 관객도 있고. 선생도 알다시피 그런 걸 방지하려 면 양철이나 석고가 필요하지요. 돌비늘은 어떻고? 마분지만 있으며 표현 못할 건 아무것도 없소. (일어 난다.) 그렇지만 선생은 지금 우리를 속이려 하고 있 소.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그래서 우리가 죽은 자들을 돕는 걸 방해하려는 속셈이지. 당신은 파리 새끼들이 내가 차려 놓은 4천 개의 오렌지 레모네이 드로 낙하한 사건에 책임을 져야 하오. 목이 말라 죽 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말이오! 연출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싸움은 그만합시다. 내게 원하

는 게 뭡니까? 새로운 작품이라도 가지고 왔습니까? 남자 1 수염을 달고 나타난 우리가 바로 새로운 작품이오.


그나저나 선생은? 연출가 나 말입니까…? 남자 1 그렇소… 선생은? 남자 2 곤살로! 남자 1 (연출가를 쳐다보며) 아직은 선생을 인정하고 있소.

그날 아침 선생은 속도의 귀재였던 산토끼 한 마리 를 책가방에 유폐시켰더군. 한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양쪽 귀에 장미를 달고 말이야. 당신은 나를 인정합 니까? 연출가 그건 핵심이 아니오. 세상에! (밖을 향해) 엘레나! 엘

레나! (문으로 뛰어간다.) 남자 1 억지로라도 당신을 무대로 데려가야겠소. 당신 때문

에 나는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지. 병풍을 가져와! 어서! (남자 3이 병풍을 꺼내 무대 한가운데 놓는다.) 연출가 (울면서) 관객이 나를 바라보고 있잖아. 연극은 끝났

어. 이번 시즌 최고의 드라마를 만든 내가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은 이 꼴이라니….

(말들이 부는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남자 1이 무대 후경으 로 가 문을 연다.)


남자 1 자네들도 들어오지. 이 드라마에는 자네들 자리도

있다고. 누구나 있지. (연출가를 향해서) 병풍 뒤로 오시오!

(남자 2와 남자 3이 연출가를 민다. 연출가 병풍을 지나치 고, 무대 반대쪽 모퉁이에서 흰 융단을 걸치고 목에 흰 목받 침을 두른 소년이 등장한다. 여배우가 틀림없다.5) 검은색 작은 기타를 들고 있다.)

남자 1 엔리케! 엔리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남자 2 나한테 병풍으로 가라고 명령하지 마! 나를 좀 내버

려 둬. 곤살로! 연출가 (차갑게, 기타 줄을 퉁기며) 곤살로, 네 녀석에게 침

을 잔뜩 뱉어 주고 싶은걸. 침을 뱉고 네 연미복을 가 위로 싹둑싹둑 잘라 버리고 싶단 말이다. 바늘하고 비단실을 가져와. 그걸로 수를 놔야겠다. 문신은 질

5) 등장한 인물은 소년인데, 여배우가 틀림없다는 지문은 원고가 완결 된 것이 아님을 감안하면 로르카의 실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이끌고 가는 자기 반영성이라는 틀에서 보면 소외효과로 해 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색이지만 네 몸에 비단으로 수를 놓아 주고 싶어. 남자 3 (말들을 바라보며) 꼴리는 대로 앉아. 남자 1 (울면서) 엔리케! 엔리케! 연출가 네 살점에 수를 놔 줄게, 그런 다음 천장에서 잠드는

거야.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지? 태워 버려! (남자 1 성냥에 불을 붙여 지폐를 태운다.) 지폐 그림이 불꽃 으로 사라져 버렸군. 멋있는데. 이봐, 돈 더 없나? 곤 살로, 지지리도 가난한 놈! 내 립스틱은 어디 갔어? 이봐 연지 없어? 이건 정말 아니야. 남자 2 (소심하게) 여기 있어. (수염 밑에서 립스틱을 꺼내

준다.) 연출가 고마워… 고마운데… 이봐,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병풍으로 가. 곤살로, 아직도 그걸 붙잡고 있나?

(연출가가 남자 2를 거칠게 밀어내고, 병풍 다른 쪽 끝에서 검은색 파자마 바지를 입고 머리에 양귀비 왕관을 쓴 여자 가 등장한다. 손에는 금발 수염이 달린 뿔테 안경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의 어느 순간이 되면 그걸 입에 착용하려고 한 다.)

남자 2 (샐쭉한 목소리로) 립스틱 돌려줘.


연출가 하, 하, 하! 바비에라의 여왕 폐하 막시밀리아나가 아

니신가! 오, 나쁜 년! 남자 2 (입술 위에 콧수염을 붙이려고 애를 쓰며) 한마디 하

겠는데. 입 좀 다물어 줄래. 연출가 오, 나쁜 년! 엘레나! 엘레나! 남자 1 (강하게) 엘레나를 부르지 마. 연출가 왜, 그러면 안 되나? 내 연극이 야외에서 벌어졌을

때 그녀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나 해? 엘레나!

(엘레나가 왼쪽에서 나타난다. 그리스 여자처럼 입었다. 눈 썹은 파란색이고 머릿결은 하얗고, 두 발은 석고로 감쌌다. 옷의 앞부분이 완전히 열려 있어서 안으로 탄탄한 피부가 보이고 그 피부는 장밋빛 비늘들로 촘촘하게 덮여 있다. 남 자 2, 이제는 입술 위에 콧수염이 붙어 있다.)

엘레나 이번에도? 연출가 응, 이번에도. 남자 3 엘레나, 왜 나온 거야? 나를 사랑하려는 게 아니라면

왜 나온 거냐고? 엘레나 누가 그런 말을 했어? 그건 그렇고, 너는 왜 나를 그

렇게 사랑하는 거지? 네가 나를 차 버리고 다른 여자


들과 꺼져 준다면 네 발에 키스를 퍼부어 줄 텐데. 너 는 나를 지나치게 숭배하지. 오직 나만을. 한 번쯤 끝장 낼 필요가 있어. 연출가 (남자 3에게) 나는? 너 내가 기억나지 않니? 홀랑 빠

져 버린 내 손톱들이? 너 아닌 다른 여자들을 내가 어 떻게 알기나 할까? 내가 너를 왜 불러냈을까? 내 원 수 엘레나, 내가 너를 왜 불러냈을까?6) 훌리에타7) (남자 3에게) 저 사람이랑 꺼져 버려! 그리고 내

게 숨기고 있는 진실을 고백해. 네가 고주망태가 됐 든 변명을 둘러대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네가 그 남 자에게 키스하고 그 남자와 한 침대에서 잤다는 거 야. 남자 3 엘레나! (날렵하게 병풍 뒤로 숨는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수염을 뗀 채 나타난다.) 남자 38) (연출가를 때리며) 너는 항상 말을 해, 항상 거짓

6) 지문에 충실하면 여기서 연출가는 남자 3에게 이 대사를 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연출가는 엘레나에게 대사를 하고 있다. 이 의도적인 실수는 무엇일까? 소외효과에 대한 로르카의 집착! 7) 물론 엘레나가 대사를 하고 있어야 한다. 8) 남자 3이 연이어 대사를 하고 있다. 이것도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로르카의 원고는 완결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류로 생각할 수도 있


말을 하지, 일말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고 너를 박살 내고 말겠어. 말들

자비를! 자비를!

엘레나 백 년 동안 두들겨 패 봐라 내가 너를 믿나. (남자 3,

엘레나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다.) 백 년 동안 내 손가락을 쥐어뜯어도 내 입에서는 신음 소리조차 나지 않을 거야. 남자 3 누가 이기나 보자고. 엘레나 그야 항상 나지.

(하인이 나타난다.)

엘레나 여기서 나를 꺼내 줘. 너한테 하는 말이야. 데려가

달라고! (하인이 병풍 뒤로 갔다가 같은 자세로 나온 다.) 데려가 줘! 아주 먼 곳으로! (하인이 그녀의 두 팔을 잡는다.) 연출가 이제 시작할 수 있겠군. 남자 3 네 마음대로.

고, 이 작품에서 로르카가 구현하고 싶었던 실험성-모든 전통적 연 극 기법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말들

자비를! 자비를!

(말들이 자신들의 긴 트럼펫을 분다. 인물들은 자기 자리에 얼어붙어 있다.)

(막이 천천히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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