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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가질 순 없다 건축가는 명작을 꿈꾼다. 땅은 허락하지 않는다. 벽은 밤마다 무너진다. 그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과 아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 둘 다 가질 순 없는가? 연극 ‹건축 마스터 마놀레›, 모스크바 타간스키 극장, 2011


인텔리겐치아 2614, 2015년 6월 1일 발행

임재일이 옮긴 루치안 블라가의 ≪건축 마스터 마놀레≫ 총독 (뚱뚱하고 키가 크고 멋스럽다. 깜짝 놀 란 시동을 향해 몸을 돌린다. 숨이 차지만 성 당을 우러러보며) 그래, 얘야, 아무 말도 안 하는구나? 시동 창건자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각하. 총독 네가 만약 내 입장이라면, 창건자 입장 이라면? 시동 모르겠는데요. 제 생각엔 마놀레를 칭 찬할 것 같습니다, 총독 그뿐이야?


시동 다른 어떤 말을 할까요? 만약 제가 각하 였다면 마놀레를 성인 반열에 올리기 위해 역법의 성인 중 한 분을 물러나게 할 것 같은 데요. -«건축 마스터 마놀레(Meșterul Manole)»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 지음, 임재일 옮김, 162쪽

이들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가? 건축 마스터 마놀레와 그의 석공들이 막 완 공한 성당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당을 만들라는 총독의 지시에 따라 세워진 것이다. 이 성당의 이름이 뭔가? 아르제슈 수도원이다. 루마니아 중세 왕들


의 지하 분묘가 있는 신성한 곳이다. 동방정 교회 건축물의 백미를 엿볼 수 있는 주요 유 적지 중 하나다. 블라가가 이 수도원에 얽힌 전설을 극화했다. 수도원의 전설이란? 우리나라 에밀레종이나 무영탑에 얽힌 설화 비슷한 것이다. 아르제슈 수도원이 인신 공 희를 통해 완공되었다는 내용이다. 서양의 인신 공희는 어떤 식인가? 마놀레와 석공들은 총독의 명에 따라 성당 공사에 착수한다. 7년이 지나도록 성당 벽조 차 세우지 못한다. 사제는 마놀레에게 인간 을 제물로 바치라고 충고한다.


왜 벽조차 세우지 못했나? 종일 벽돌을 쌓아 올려도 밤사이 땅이 요동 치면 벽면이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공사를 잘못한 것 아닌가? 아니다. 정밀한 측정으로 기초공사를 계속 보완했지만 소용없었다. 지친 석공들은 떠 나려 하고 총독은 사자를 보내 완공을 재촉 한다. 그래서 인신 공희를 결심한 것인가? 그랬다. 마놀레는 공사장에 필요한 물과 음 식을 들고 제일 먼저 도착하는 여인을 희생 물로 삼자고 제안한다. 이들의 아내, 누이 또 는 연인이 될 것이다.


누구였나, 그녀는? 그의 아내 미라였다. 마놀레는 아내와 건축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결국 미라를 성 당 벽에 가둔다. 그날 이후 땅이 잠잠해졌고 성당 공사도 마무리되었다.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하들이 그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공사를 지연시키고 공사비를 착복했다는 구실을 내 세워 마놀레의 처형을 요구한다. 총독 역시 마놀레의 능력을 경계한다. 다른 영주의 명 으로 더 아름다운 성당을 지을 수도 있기 때 문이다.


마놀레의 선택은? 아내의 넋을 기리기 위해 종을 울리려 올랐 던 성당의 종탑에서 투신한다. 전설에서는 석공들과 함께 종탑에 갇힌 뒤 날개를 만들 어 뛰어내렸다가 떨어져 죽는다. 블라가는 전설을 어떻게 변용했나? 13세기 설화에 15세기 발라치 공국 시대를 중첩시켜 보여 준다. 인신 공희가 신의 계시 를 받드는 사제를 통해 이루어지게 함으로 써 종교적 신비감을 더했다. 블라가는 이 작 품에 루마니아의 사상과 문학의 정통성을 담았다.


루치안 블라가는 누구인가? 서방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루마니아 작 가 중 한 사람이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시인이자 극작가다. 그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나? 1930년대에 실존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영향 을 받아 30여 년 동안 문화와 정신세계를 연 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루마니아 문화의 정 체성과 사상 기반을 다지려 노력했다. 어떻게 살다 갔나? 1895년 란크럼에서 태어났다. 1937년에 루마 니아 한림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문학인으로서 자유를 박탈


당한 채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다. 1956 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지만 루마니 아 공산 정부가 이를 저지했다. 그 영향으로 1961년에 사망할 때까지 서정시만 쓴다. 그 러나 이마저도 당국에 의해 출판을 금지당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임재일이다. 파리8대학에서 공연학 박사 학 위를 받았다.


둘 다 가질 순 없다 건축가는 명작을 꿈꾼다. 땅은 허락하지 않는다. 벽은 밤마다 무너진다. 그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과 아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 둘 다 가질 순 없는가? 연극 ‹건축 마스터 마놀레›, 모스크바 타간스키 극장, 2011


건축 마스터 마놀레 루치안 블라가 지음 임재일 옮김 2015년 5월 15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220쪽, 16,500원


작품 속으로

건축 마스터 마놀레


나오는 사람들

총독 마놀레 미라 스타레츠 보구밀 가만 석공 1, 옛 목동 석공 2, 옛 어부 석공 3, 옛 수사 석공 4, 옛 강제노역자 석공 5 석공 6 석공 7 석공 8 석공 9 시동(侍童) 아이와 인부들 사자(使者)와 두 창기병 기타 창기병


세 명의 마차꾼 귀족들 수사들 여인들 평민들 농노들

배경: 아르제슈(Arges) 강 하류 루마니아 전설 시대


1막

건축 마스터 마놀레의 집. 그의 작업실. 불붙인 아주 많 은 초들이 테이블과 식기장 위, 창틀 위 곳곳에 놓여 있 다. 앞으로 지어질 성당의 나무로 된 조그마한 모형이 테 이블 위에 세워져 있다.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스타레 츠(Starets)1) 보구밀이 앞에 놓인 것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는 이따금씩 눈꺼풀을 급하게 깜박거린다. 동화에서 나온 듯한 인물인 가만(Gàman)−긴 수염을 땋았고, 양 가죽을 덧댄 것 같은 두꺼운 털옷을 걸친−이 불안감에 휩싸인 채 구석에서 자고 있다. 가끔씩 그는 흥분해서 거 친 숨결과 한숨 소리를 동시에 내뱉는다. 건축 마스터 마 놀레는 테이블에 앉아 한 움큼의 양피지와 설계도에 몸 을 기울인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민하며 쉼 없이 설 계도를 자로 재고 있다. 밤이 깊어 간다.

1) 동방정교회에서 성령의 빛으로 가득 찬 수사를 의미하며, 그는 완벽 으로 향하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1장 마놀레, 보구밀, 가만

마놀레 (낙담한 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도와주세요, 스

타레츠 신부님. 하지만 다르게, 제발요! 어느 누구도 쫓아올 수 없는 다른 조언으로 말입니다! 몇몇 장애 물과 반대 세력,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어떻게 요? 보구밀 (아무도 떼어 놓지 못할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단조

로운 목소리로 군말 없이) 그럼 이 측정을 그만두게! 마놀레 측정은 제가 아는 한 결코 요술이나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이성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걸 막아 줄지라도 눈은 여전히 그걸 믿도록 하고 있죠, 그걸 말입니다…. 보구밀 …측정하는 걸? 보게, 자네가 이 견고한 삼각형으로

측정을 시작한 지 7년이나 됐어. 신자여, 자넨 일을 더 진척시키고 싶지 않나? 마놀레 또 다른 뭘 해야 하나요? 보구밀 자네에게 그걸 말해 줬잖아. 마놀레 그거요, 못합니다! 저는 못한다고요!


보구밀 해야만 해. 마놀레 어제 아치형 천장이 무너져 내린 건 중량 초과 때문

이 아니었어요, 신부님도 확인할 수 있죠. 제 기초공 사는 모래의 변덕스러움에 있지 않아요. 수백 번 재 봤죠. 높이, 깊이 등을…. 한 치 실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계산이 정확했고 그 계산대로 바위를 잘랐죠. 네 측면과 아치도. 그게 남향이나 북향이 되도록 말 입니다. 보구밀 그럼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 있나? 가만히 있겠네. 마놀레 보구밀 신부님, 도와주세요! 보구밀 마놀레, 계산한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야. 반대로 저

기 진실의 왕국엔 모든 게 계산돼 있지, 악마 뿔과 그들의 긴 유황빛 꼬리도. 거기선 숫자가 주인이야. 모든 계획, 아치형 천장, 시노드2)나 대형 건물의 주 인이지. 자네의 가증스러운 양피지에 있는 진홍빛 징후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어떤 것들이 엉켜 있고 다른 어떤 것들이 꾸불꾸불하게 둘둘 말려 있는지. 각각의 수치는 악마가 비웃는 표시인 거야. 거기서 불룩하게 튀어나온 그 수치는 전혀 의심할 여지 없

2) 시노드(Synode): 동방정교회에서의 상설주교회의를 뜻한다.


이 맘몬3)의 발톱인 거지. 그건 너무 야위고 마른기 침으로 초췌해진 스카라오츠키4)처럼 괴짜스러운 거야. 달리 말하면 우린 그게 통치권에 기대 의기양 양해하는 몰로크5)의 표시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결 국 벨체뷔트6)의 표시처럼 그게 파렴치한 검은 깃발 위에 놓여 있는 거야. 내 수염을 보게, 난 노인이지만 예전에 어부였을 때 단 한 번도 수를 세 보지 않았다 는 걸 생각해 봐. 아니면 이게 단지 천국에서 벌어지 는 일처럼, 내가 하나를 말하면 셋을 생각하게 된다 든지. 성령을 걸고 맹세하지! 천국에서 수를 세는 건 성스러운 날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덜 심각한 죄이지 만, 분명한 건 여섯째 계율을 무시하는 것보다는 더 비난할 만하단 거지. 마놀레, 자네에게 말하는 거야. 사람들이 부정 탄 날에 절대 그곳에 나를 붙들지 못 할 거라는 걸! 마놀레 (위협하는 태도로 일어선다.) 누가 제 벽을 무너뜨린

3) 맘몬(Mammon): 시리아의 황금신을 뜻한다. 4) 스카라오츠키(Scaraotzki): 연못에 사는 우두머리 악마를 뜻한다. 5) 몰모크(Moloch): 아이를 제물로 바쳐 모시는 셈족의 신을 뜻한다. 6) 벨체뷔트(Belzébuth): 지옥의 악마 신을 뜻한다.


건가요, 스타레츠 신부님? 보구밀 자, 마놀레, 보게! 자네 위협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지금 이상한 조짐이 보이는 왼쪽으로? 모든 행운이 쓰러져 가는 오른쪽으로? 그 위협이 높은 곳이나 낮 은 곳에 사는 능품천사7)를 향하고 있나? 마놀레 사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보구밀 신부님, 사방으

로요. 불길한 게 여기저기서 와서, 제가 모든 걸 다시 시작하도록 하고 있죠. 수많은 족쇄더미 속에 무너 져 버린 의욕이 과연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짧은 침묵) 보구밀 (깊이 한숨짓는다.) 어느 날 저녁, 난 아르제슈 강가

를 산책하고 있었지. 풍랑이 심해서 물이 거품에 휩 싸인 채 포효하고 있었어. 그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내 앞에 갑자기 어떤 관이 나타났지. 그리고 또 다 른 관, 거기에 또 다른 관이, 모두 다섯 개가 말이야. 열 개, 더 많이, 무수히 많은 관들이 떠내려 왔지. 나 무 기둥들이 거대한 제재소를 향해 뗏목으로 운반되 는 것처럼. 그건 환영이 아니었어, 내가 본 게 진짜라

7) 능품천사(能品天使): 구품천사 중 제 6계급에 해당한다. 만물의 유 전과 기적을 주관한다.


고, 어떤 힘이 그렇게 믿게 해 주었지. 마을에서 아이 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여인들의 가슴에서 더 이 상 젖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남자들은 침울 해하고, 바람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문을 전해 주 지. 자네의 성당 벽은 몹시 괴로워하는 유령의 몸부 림 때문에 무너져 내린 거야. 어느 날, 그 유령들이 묘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땅에 단 한 구의 시신 도 남아 있지 않도록 아르제슈 강에 관들을 띄워 놓 은 거야. 일주일 내내 천여 개의 관들이 테가 벗겨진 나무통이 내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강으로 떠내려 왔어. (한숨을 내쉬며) 마놀레, 난 잘 알고 있네. 자네 성당 이 세워지는 걸 방해하는 건 유령이 아니라는 걸 말 이야. 달리 말하면 그건 그들 위에 있는 더 무시무시 한 힘을 가진 것들이지. 마놀레 스타레츠 신부님, 저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습니

다. 신부님께 이미 말했잖아요! 보구밀 나도 자네에게 말했어. 그럼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자네가 희생을 치르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내가 편히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게. (그가 일어선 다.) 떠날 시간이군!


자정에 여인들이 주술을 청하기 위해 초를 끄러 강 으로 내려왔지. 그게 있었다고 한다면 말이야. 하지 만 주술은 없었어. 자넨 건축 모형 위에 성스러운 초 를 밝혔잖아, 항상 헛수고였지만. 이제 방책은 하나 밖에 없네, 신자여. 자네도 알잖나. 마놀레 오래전에 ‘너는 절대로 죽이지 못할 거야’란 어떤 문

구가 바위에 새겨졌죠. 그 후 어떤 벼락도 그걸 지우 지 못했죠. 보구밀 기도하지. 자넬 위해 기도하겠네. 비록 나는 비천한

죄인이지만, 자네가 그 문구로 난관을 헤쳐 나가도 록 말일세. 마놀레 (울부짖으며) 그런데 그들을 보내는 이가 누군가요?

아니면 무엇인가요? 보구밀 그건 물도 불도 아니야, 바로 능품천사지. 그들은 무

한한 우주에 맞서 자신들이 괜찮다 싶으면 시간의 영역을 벗어나곤 하지. 우린 여기서 그들을 생각하 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곳은 첫 번째 암흑같이 깊숙 한 곳이야. 우린 그들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엄청난 무질서 속에서 배회하도록 하는 건 우리야. 말해 보게, ‘주님, 주님’ 하고! 마놀레 주님, 주님, 왜 당신은 저를 버리셨나요?


보구밀 내가 이곳 수도원을 내려갈 때면 석양이 자신만의

홍조를 내게 내리쬐지. 그래서 난 한밤중이 지나서 야 떠난다네. 매일 땅에 가까워질수록 들판에 핀 엉 겅퀴가 내 수염을 빗질하지. 내 작은 방에서 기도해. 거기서 기도하지, 내가 나선 길 위나 곳곳에서 말이 야. 자넬 위해서, 성당을 위해서, 자넬 위해 동쪽에 서 떠오르는 별을 위해서. 어떤 건 여전히 부족하지 만 우린 절대 그걸 포기 못하지. 가만

(공포에 사로잡혀 위로 튀어 오르다가 짓눌린 채 비 명을 지른다.) 마놀레, 마놀레, 마놀레! (아주 조용 히) 마놀레! (점점 더 큰 목소리로) 이제야 열쇠 없는 문이 열리 는군. 어떤 능품천사가 소리를 지르며 나오고, 날개 돋친 한 여인이 창공으로 몸을 던지는구나. 그리고 그게 이젠 벽돌이 되고… 또 이젠 뼈와 머리가 되지. 크게 부릅뜬 두 눈과 오글쪼글해진 이마, 마치 모든 게 암담하고, 모든 게 부정 타 버린 것처럼! 아−아

−아우, 그게 뭘까요?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

옵소서! 세상 위로 하늘빛 천이 찢어지지! 슈−슈− 슈룹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늪을 만들고! 봐, 그들이 서로 문지르는 것과 감추어진 턱으로 부수는 돌들을


말이야. 가장 깊숙한 곳에서 광기의 바퀴가 삐걱거 리며 돌지. 그리고 거기 조금 더 먼 곳에서 우리를 향 한 저주가 풀리지. 뭘 기다리는 건가요? 뭘 원하는 거죠? 제정신이 아닌 능품천사의, 무위의 저주가 시 신의 입을 한가득 채우기 위해 산과 바위를 가루로 빻아 주지. 모든 게 혼란 그 자체야. 모든 게 현기증 나지. 그리고 밤이 시작되고 밝아질 때처럼 구슬프 게 울고 위태로워지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 소서!

(몸을 떨면서 두 사람이 가만을 바라본다.)

마놀레 악몽 속에서 우리의 멋진 늙은 문지기가 먼 세계의

진상과 행적을 엿보고 있군요. 보구밀 발밑에 있는 식물들이 그를 불태우는군, 마치 개들

을 위해 끓이는 우유 사발 위를 걸을 때처럼. 가만

(흥분한 채) 하나가 솟−구쳤어, 길게 포도덩굴 아래 서. 우! 그곳에서, 그건 ‘히히히’ 하는 웃음소리 같아! 능품천사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지, 그들은 ‘히이힝’ 하고 말 울음소리 같은 것도 낼 줄 몰라! 이 름이나 세례도 받지 않은 채, 그들은 전투용 파성추


처럼 구름을 관통하고 있어. 얼굴은 형체나 크기도 없지. 별명은 치욕스럽고 몹시 불쾌해. 그들은 십자 가의 이름을 따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억제되지 않는 갖은 증오만을 쏟아내지.

(몽상적인 상태로 가만이 몸을 뒤흔든다. 덧댄 털옷에서 모 래와 흙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그는 끝없이 을씨년스럽 고 음산한 소리로 땅의 중심부가 솟아오르는 소리를 흉내 낸다.)

아, 아, 아우! 그것이 안쪽을 긁어내. 아우, 저기, 먼 곳에서, 산 아래를! 그리고 우리 발밑에 있는 왕국에 서도 우−우−우−울−울부짖어! 아, 아우! (그가 놀라서 몸을 뒤흔든다. 털옷에 달려 있던 보석 들이 양피지 위에 떨어진다.) 능품천사가 이를 덜덜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지, 그 부정 탄 것들이! 오, 성당 벽을 지탱할 사람이 아무도 없나요? 내 등으로 떠받쳐야겠군. 그게 흔들려, 벽 이. 땅이 매서운 열기 때문에 부르르 떨고. 그건 탄 생으로 인한 전율이 아니라 붕괴로 인한 전율이지! 부−부르르, 부루루! 유린당한 개구리의 울음소리,


이 세상에 있는 개구리들이지. 건너편에는 위엄 있 는 능품천사가 있고! 푸후−읍! 아아, 가증스러운 굴 림대! 개굴−개굴−개굴! 보구밀 그를 건초더미 곳간에 눕히는 게 어때? 매일 밤 공포

심을 불러일으키는군. 마놀레 소매를 잡아당기거나 성스러운 양초 기름을 그의 상

처 위에 뿌려 주세요. 보구밀 코 가까이에 눈을 두 개씩이나 갖고 있는 게 유감스

럽군, 하나라도 멋진 문지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가 단지 안에서 손가락을 적셔 가만의 얼굴에 뿌 려 준다.) 밤마다 이렇게 해야 하다니 끔찍하군. 어 떻게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 지. 정신 차리게, 가만. 가만

(깨어나며) 오, 오오! 주님!

보구밀 아이들이나 연약한 여인네들이 지금 자네 모습을 보

지 않은 게 다행이군. 맹세코 말이야! 그들이 불손한 성 요한을 붙잡아 두어야 하는데. 자, 가만, 일어나 게! 세례 받지 않은 자들과 손을 맞잡고 우리 주위에 서 주술의 원무를 추게. 가만

(아주 불행한 아이 같은 목소리를 내며 손을 이마와 머리로 가져간다.) 오, 오, 저런, 가엾은 영혼, 내 영


혼이여. 가련한 심정, 내 심정이여! 오, 오, 오! 주님, 저희를 구해 주소서! (자리로 돌아가서 털썩 주저앉 더니 곧바로 다시 자기 시작한다.) 마놀레 (보구밀에게) 오늘 밤 보초병들이 평소보다 일찍 벽

이 무너졌다고 알리러 올 겁니다. 오오, 스타레츠 신 부님, 이 붕괴의 환영에 전율하지 않으려면 세라핌8) 의 꿋꿋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매번 그 능품천사가 커다란 새들이 천둥 때문에 겁에 질리듯 우리를 의 기소침하게 만드니까요. 보구밀 (어둠 속에서 들으며) 천상의 눈이 우리를 감시하지!

들어 보게. 솔방울이 청석돌판 위에 떨어져. 톡, 톡! 지붕을 두드리는 손가락처럼. 마놀레, 그게 초조하 게 흐르는 시간 그 자체인 것 같지 않나? 진심으로 말 하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우리에게 무뚝뚝 하고 차갑군! 자네에겐 무엇보다도 냉철한 마음, 뱀 이나 세라핌처럼 냉정한 마음이 필요하지. 산 채 감 금된 사람의 마음과 혈기 같은 게. 어떤 사슬이 자네 지성소(至誠所)의 접합부를 영원토록 붙드는 것 같

8) 세라핌(seraphim): 구품천사 중 제 1계급에 해당하는 치품천사(熾品 天使)를 뜻한다.


아. 이번을 마지막으로 자네의 근심을 떨쳐 보게, 그 러고 싶지 않나? 육신이 뭔가? 마음을 갉아먹는 거 야. 마놀레, 한번 해 봐, 면밀히 검토하지 말고! 마음 이 이 육신을 떠나도록 하게, 희끄무레하고 털 많은 벌레 무리에게 향연을 베풀고 교회의 성스러운 집단 으로 의기양양하게 들어가는 이 육신을 말일세. 그 것만이 영원토록 약속된 곳으로. 마음을 바꾸면 득 을 보게 될 거야. 마놀레, 성호를 긋게, 사람들의 마 음이 축성받은 초로 눈물을 흘리듯이 이 진리를 자 네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고귀한 희생을 치르는 것 외에는 어떤 구원도 없다는 걸! 마놀레 고독 한가운데에서 성당을 짓기 시작했죠, 그리고

끝없는 소동…. 땅속에 파묻힌 말발굽의 환호성이 제가 세운 성당 위를 밤에 뒤덮쳤죠…. 벽돌이 서로 갈라지는 곳을 파괴하는 그 아찔함. 신부님, 이미 다 른 세계를 보는 눈을 가졌는데도 끊임없이 제게 이 런 똑같은 조언만을 속삭이시는군요. 희생이라니요! 그렇다면 신부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원하지도 않 고 절대로 할 수도 없죠. 이런 암담한 책무라면, 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왕궁에서 1년 동안 형리 생활 을 하는 게 낫겠네요. 특히 제가 세운 제단 같은 걸


하느님 면전에 들어 올리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 만 좀 괴롭히세요, 스타레츠 신부님. 제 두려운 마음 은 그 어떤 것도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성당을 부탁하고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건 한 인간에게 너무 과한 거죠! 어디에 있건 전 쉼 없이 생각에 사로잡히죠. 나무를 볼 때 저는 생각합 니다, “내 현관문에 문틀이 하나 있네”. 그리고 저는 그 나무를 바라보죠. 푸른 하늘을 볼 때면 말하죠. “왜 제 계획을 축복해 주지 않는 거죠?” 그리고 일어 나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걸을 때 제가 듣는 건 아치 형 천장 아래서 울리는 제 발소리의 메아리죠. 공소 (公所)에서 저는 성당 종의 노랫소리를 듣죠. 그리 고 목초지에서 죽은 이들을 목욕시킨 강물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죠. 그게 지어지는 게 지체되고 있 어요, 제 성당요. 보구밀 신부님, 땅이 부르르 떨지 만 그게 성당에 어떠한 고통도 주지 않도록 해 주세 요. 이런 식이라면, 전들 별수 있을까요? 뭘 해 볼까 요? 그리고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모든 게 허무해져 버리는데. 매번 똑같은 작업을 미친 듯이 다시 하게 되는데 정말로 또다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이 고난을 절대 피할 순 없을 겁니다, 내일도 그다음 날


도 마찬가지겠죠. 저는 비계를 제단화(祭壇畵)까지 들어 올리지도 못할 겁니다, 절대로! 가만

(탄식하며) 오, 내 영혼, 가엾은 영혼이여!

마놀레 가만, 탄식하게. 자네에게 계속되는 고통만을 위해

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말일세. 우리 모두, 다 같 이. 우리 행위가 올바르기 때문에 그 행위에 답하도 록 하는 건 부당한 거지. 가만, 탄식하게. 우리는 임 무를 수행하기에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네. 보구밀 마놀레, 난 가 보겠네. 천상의 무리가 자네 결정을 밝

혀 줄 걸세. 내 여정에서 첫 시련을 만나게 되면 자네 를 위해 기도하지.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서도 똑같이 하겠네. 마놀레 (보구밀을 붙들지만 이내 다시 생각에 잠긴다.) 더

계시지 그래요! 보구밀 무슨 일인데 그래, 마놀레? 뭘 생각하는 건가? 뭘 더

생각하느냐고? 자네의 어떤 수치로도 포함시킬 수 없는 그게 대체 뭔가? 잴 수 없는 게 뭐냐고? 마놀레 이 믿기지 않는 희생입니다, 스타레츠 신부님, 누가

그걸 요구하나요? 그게 하느님일 수는 없을 겁니다, 빛과 같은 마음을 지닌 분이…. 문제는 그게 피의 희 생이라는 겁니다. 불손한 힘, 깊은 곳의 그 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죠. 이 희생이 불손한 힘에 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요? 보구밀 물론 우리가 계산과 측정에 매달리는 한 자넨 진실

을 말하게 되겠지. 어느 누구도 그분이 잔인한 분이 라는 걸 상상할 수는 없어, 분별력을 잃은 능품천사 를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것처럼. 그렇지만 마놀레, 진정으로 생각해 보게. 자네 다림추로 운명의 깊이 와 높이를 잴 수 있는지? 그런데 영원불변함에 비춰 보고서 하느님과 잔인한 사탄이 한 형제였다는 건 가? 만약 그들의 이미지가 가공된 채 인간에게 가장 큰 혼란을 일으키도록 끊임없이 맞바꿔진 거라면? 어쩌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지시를 따른다든지. 들어 봐, 난 스타레츠이자 신앙인이지만 일이 어떻 게 된 건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어, 한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얘기하는 거지. 고로 우리의 어설픈 판단으로 이뤄진 모든 계산이 아주 무용해져 버렸는데, 단 한 번 판단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인생 의 가장 깊고 깊은 곳에 감춰진 비밀 속으로 데려가 는 이런 피 묻은 서약 같은 걸 여전히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얘기해 보게. 누가 이 희생을 강요하는 걸 까? 우리 질문은 모든 것에 대한 답이 검푸른 파멸에


이르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야. 바로 이런 게 자네가 내 말에서 모호하게나마 어떤 형체조차도 찾지 못하 게 만들지. 잘 자게, 마놀레. 난 자네 결정을 마지막 시련 단계에서 보게 될 걸세! (그가 마놀레 어깨 위에 팔을 올려놓고 기다린다.)

(마놀레, 말없이 잠자코 있는다.)

잘 자게, 마놀레! 마놀레 (기진맥진한 채) 조심히 가십시오, 스타레츠 신부님!

이 모든 게 어렵긴 하지만.

(보구밀, 왼쪽 문으로 나간다.)


2장 마놀레, 가만

마놀레 (테이블 앞에 서서 손을 건축 모형 위에 올려놓은 채)

이 세상 어디서나 성당의 하중을 겸허하게 떠받치는 건 땅이지. 이 나라에선 더 이상 지성소를 셀 수가 없 어. 나무나 돌로 된 것들이 마치 폭풍우 속 커다란 암 곰처럼 굳건하게 우뚝 서 있지. 그건 내게 조그마한 경이로움에 지나지 않아, 성당 벽을 연결할 제법 견 고한 석회나 갖은 마력으로 위로 솟구쳐 오르는 건 물을 지탱할 잘 다듬어진 돌을 찾는 게 말이야. 그런 견고한 돌은 어디에 있으며, 위대한 건축가는 어디 에 있는 걸까? 난, 나도 모르게 지상의 작업을 열렬 히 축복해 주기 위해 그 건축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 오, 우린 무지 속에 살고 있으며 아 마도 그게 행해지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거겠 지. 가만

(공포에 휩싸여 뛰어오른다.) 마놀레, 마놀레, 마놀 레! (천천히) 마놀레! (몸을 흔들며)


(마놀레, 슬픔에 잠긴 채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다.)

후−후−후우! 비둘기가 가슴을 부풀려요! 이빨을 심하게 갈고, 나뭇잎이 불꽃을 토해 내죠! 싸움이 끝 없이 이어지고, 어둠은 서로 뒤엉키고, 돌풍이 우리 에게까지 불어오죠. 팔을 들고 무릎을 굽히세요! 주 님, 주님! 사람들이 제가 떠나길 바라던데, 그 사람 이 누구죠? 저는 여기에 머물 겁니다. 마놀레,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마놀레가 깨어난다.)

이런, 마놀레?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요! 하느님, 맙 소사! 오늘도 여전히 성당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 신감을 가져요. 누군가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 기 위해 거기에 있어요. 마놀레 그들이 밑에서부터 셌지. 맞아, 하지만 위쪽은 아니

었어. 가만

(놀란 눈으로 성당 모형을 주시하며) 이게 뭐죠, 성 24


당인가요? 머리가 이상하고 고삐가 풀리고, 케케묵 은 분들이 원하는 건가요? 쳇, 마놀레, 이 모든 생각! 혼자 묻고 답하는 건 항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요, 신통치도 않죠. 솔직하 게 얘기를 나눠요! 마놀레, 저는 나이가 더 많잖아 요…. 전 이제 죽음이 그다지 멀지 않았어요. 마놀 레, 사람들이 저를 당신 성당, 거기에 가두길 바라요.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투덜거리는 제 마음이 부드럽고 한결같은 오랜 산들바람처럼 언제까지나 주위를 맴돌도록 말이죠. 마놀레 헛수고야, 헛수고, 내 고결하고 무모한 문지기여. 잠

자리에 들든지 아니면 자네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 게. 까끄라기가 있는 숲 한가운데에서 신비한 호수 까지가 자네 자리일세. 바로 거기에 땅거미가 질 무 렵, 짐승들이 죽음의 물결에 주둥이를 적시러 오지. 자넨 나이가 많아, 몽롱한 눈이 그걸 말해 주지. 그리 고 목소리도. 자넨 백년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고 싶 은 건가? 저런, 숲처럼 좋은 내 문지기여, 커다란 희 생을 치르고 우리가 얻게 되는 건 뭘까? 우리에게 요 구된 건 참으로 커다란 희생이라네. 잠자리에 들게 나, 어서.


가만

자죠. 두 세계 사이에서 귀를 기울이며. (그는 가만히 탄식하며 구석으로 자러 간다.)

마놀레 잠자리에 들게. 편히 주무시게, 내가 지켜 줄 테니.

(그가 테이블에 앉는다.) 끝없는 공허감, 체념한 채 받아들인 쓸쓸함은 더 이 상 내게 묻지도 않는군, 공허하게 되풀이되는 절망 만이 그 위를 막고 있고. 내 혈기와 잠은 고갈돼 버렸 어. 눈을 감으면…. 오, 눈꺼풀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세상과 떼어 놓지도 못하는군. 숨어 있던 사탄 이 고함치지, “지어라!” 땅도 응수하며 내게 반박해, 제물을 바쳐라! 아, 맙소사, 모든 게 여전히 불안전 해! 여긴 물이 차가운 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 어. 저 위에서는 원칙과 법칙들이 불변하는 법에 맞 서 일어서고. 그 아래에서는 고통이 말 울음소리 같 은 걸 내기 시작하지. 계속 시도하고는 있지만, 모든 게 이뤄지도록 말이야, 꿈만 끊임없이 멀어져 가지, 실현불가능한 채로 영원히 저 먼 곳으로.

(미라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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