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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주제, 인과응보 선한 씨는 선한 열매를, 악한 씨는 악한 열매를 맺는다. 당연한가?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는가? 因果應報는 누천년의 이야기 주제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재효 영정, 김영철 그림, 2006


인텔리겐치아 2620, 2015년 6월 4일 발행

신재효가 짓고 김창진이 옮긴 ≪박타령≫ “어찌 다 이내 박통 모두 다 몹쓸 통, 첫 번 통 상전 통, 둘째 통 걸인 통, 셋째 통 사당 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세간을 다 뺏기니 온 집안이 아주 허통, 우세를 하도 하니 처자들이 모두 애통, 생각 하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절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어서 써세 넷째 통, 이는 분명 세간 통, 그 란하면 미인 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내 신수(身數)가 아주 대통(大通), 어찌 그리 신통(神通), 뺏뜨려라 이내 죽통, 흥보 보면 크게 호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 «박타령(金昌辰)», 신재효(申在孝) 지음, 김창진 옮김, 143~144쪽

누가 메기는가? 놀보다. 앞서 연 박에서 선소리꾼이 사설을 잘못 메겨 방정이 나왔다며 네 번째 박을 타 며 놀보가 노래한다. 앞서 탄 박에서는 무엇이 나왔나? 조상의 상전이 나와 놀보 조상이 도적질해 간 것을 갚으라 했고, 걸인들이 패거리로 나


와 놀보 할아버지가 빌려 간 돈을 내놓으라 했다. 또 사당패도 돈을 뜯었다. 가세를 탕진 할 지경이다. 뒤에 탄 박에서는 무엇이 나오나? 상인(喪人)들이 각 청으로 울고 온다. 놀보 는 “전답(田畓) 문서 전당(典當)하고, 돈 삼 만 냥 빚을 얻어 상행(喪行) 치송한다.” 놀보의 박은 왜 그 모양인가? 그는 “절각(折脚) 기다리면 놓치기 가려(可 慮)하니 ‘울려놓고 달래리라’, 제비집에 손을 넣어 제비 새끼 집어내어 그 약한 두 다리를 무릎 대고 자끈 꺾”었다.


제비로 인해 생긴 앙화인가? 그 때문만이 아니다. 워낙 놀보는 “소경 의 복 똥칠하기, 배 앓는 놈 살구 주고 (…) 애 밴 계집 배통 차고, 우는 아이 똥 먹이기”를 다 반사로 저지른다. 그 악행이 이루 말할 데 없 는 인물이었다. 인과응보인가? 너무 뻔한 결론 아닌가? 당연하기에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100년 전 에도 통하고 또 지금도 통하는 진리다. «역 경»에서는 “선을 쌓는 집에는 경사로움이 있다”고 했고 «서경»에서도 “천도(天道)는 선에 복(福)하고 음(淫)에 화(禍)한다” 하지 않았던가.


최근 들어 흥보를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 놀보를 ‘유능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보는 견 해가 있다. 맞는가? 원문을 읽지 않고 줄거리만 가지고 추측해 서 빚어진 오해다. 작품을 다 읽어 보면 그렇 지 않음이 불을 보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흥보와 놀보의 캐릭터는 어떤 것 인가? 흥보는 놀보에게 쫓겨난 뒤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품팔이를 하며 목숨 걸고 매품까지 판다. 부지런하고 책임감도 강한 가장이다. ‘놀보’는 이름에서부터 나타나듯 ‘놀 사람, 노는 사람’이다.


≪박타령≫과 ≪흥부전≫이 다른 것인가? 같은 얘기다. «박타령»은 신재효의 소설 판본 제목이다. 1873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왜 신재효 본을 옮겼나? 1860년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판본 다 음으로 오래된 이본인 데다 내용도 좋다. ≪박타령≫에 다른 판본에는 없는 무엇이 있 는가? 그 전의 판소리 사설은 광대들이 만들어 거 칠었다.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잘못 쓴 한문 구도 많았다. 구성도 놀부를 혼내는 데 중점 을 두었다. 신재효는 중인(中人)의 시각에서


좀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흥부와 놀부의 우애에 중점을 두었다. 신재효가 누구인가? 조선 후기 판소리 연구가(1812~1884)다. 중 인에 천석꾼이어서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판소리계에서 그는 무엇을 했는가? 판소리 명창을 후원했다. 판소리 <춘향 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를 개작했다. 판 소리가 양반도 즐길 수 있는 민족문학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셈이다. 판소 리의 이론적 체계도 모색했다. 여자가 판소 리를 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창진이다. 초당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다.


불멸의 주제, 인과응보 선한 씨는 선한 열매를, 악한 씨는 악한 열매를 맺는다. 당연한가?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는가? 因果應報는 누천년의 이야기 주제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재효 영정, 김영철 그림, 2006


박타령 신재효 지음 김창진 엮음 2012년 5월 21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184쪽, 14,500원


작품 속으로

박타령


놀보가 흥보를 내쫓다

아동방1)이 군자지국2)이요 예의지방3)이라. 십실지읍4)에도 충신(忠臣)이 있고, 칠세지아5)도 효제(孝悌)를 일삼으니 무슨 불량(不良)한 사람이 있겠냐마는, 요순임금6)에 사흉7) 이 있고, 공자님 당년(當年)에 도척8)이 있으니, 아마도 일 종 여기9)는 어쩔 수가 있느냐. 충청·전라·경상 삼도 월품10)에 사는 박가(朴哥) 두 사 람이 있으니,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인데, 동부동모(同

1) 아동방(我東方): 우리 동쪽 나라. 중국에 대해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 2) 군자지국(君子之國): 군자의 나라. 3) 예의지방(禮儀之邦): 예의의 나라. 4) 십실지읍(十室之邑): 열 집으로 이루어진 마을. 곧 썩 작은 동네. 5) 칠세지아(七歲之兒): 일곱 살 아이. 6) 요순(堯舜)임금: 요(堯)임금은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夏)나라를 세운 어 진 임금. 순(舜)임금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한데다 능력도 뛰 어나 요임금에게서 나라를 물려받은 어진 임금. 7) 사흉(四凶): 순임금 때 나라를 해친 네 명의 악한 사람. 8) 도척(盜跖): 죄 없는 사람을 날마다 죽이고 사람의 간을 먹었다고 ≪사기 (史記)≫에 기록된 사람.

9) 여기(沴氣): 요사스럽고 독한 기운. 10) 월품: 두 물건이나 지역이 맞닿은 자리. 어름.


父同母) 소산(所産)이되 성정(性情)은 아주 풍마우지불상

급11)이였다. 사람마다 오장육부(五臟六腑)로되, 놀보는 오장칠분 것 이 심사보 하나이 왼편 갈비 밑에 병부12) 줌치13) 찬 듯하여 밖에서 보아도 알기 쉽게 달리어서 심사(心思)가 무론사 절14)하고 일망무제15)로 나오는데, 똑 이렇게 나오것다. 본명방16)에 벌목하고, 잠사각17)에 집짓기와 오귀방18) 에 이사(移徙) 권코, 삼재19) 든 데 혼인하기, 동네 주산20) 팔 아먹고, 남의 선산(先山) 투장21)하기, 길 가는 과객(過客) 양반 재울 듯이 붙들었다 해가 지면 내어 쫓고, 일년 고로22) 11) 풍마우지불상급(風馬牛之不相及): 소와 말이 서로 상대하지 않듯이 사이 가 멂. 12) 병부(兵符): 왕조 시대 때 군사를 일으키는 일을 신중하고 정확히 하기 위 해 왕과 지방관이 미리 나눠 가지고 있던 신표(信標). 발병부(發兵符). 13) 줌치: ‘주머니’의 사투리. 14) 무론사절(毋論謝絶): 말할 것도 없이. 15) 일망무제(一望無際): 한 번 바라보기에 아득히 멀고 넓어 끝이 없음. 16) 본명방(本命方): 병난(病難)을 조심하라는 간지(干支)의 방위. 17) 잠사각(蠶絲角): 집을 지으면 망한다는 성수(星宿). 18) 오귀방(五鬼方): 병마(病魔), 재난(災難)이 있는 불길한 방위. 19) 삼재(三災): 전란(戰亂), 질병(疾病), 기근(饑饉). 또는 화재(火災), 물난 리, 태풍(颱風). 20) 주산(主山): 도읍·마을·무덤의 뒤에 있는 산. 21) 투장(偸葬): 몰래 시체를 묻음. 암장(暗葬).


외상 사경23) 농사지어 추수하면 옷을 벗겨 내어 쫓기, 초상 난 데 노래하고, 역신24) 든 데 개 잡기와 남의 노적(露積) 불 지르고, 가뭄 농사 물꼬 빼기, 불붙는 데 부채질, 야장25)할 제 왜장하기26), 혼인발에 바람 넣고27), 시앗 싸움28) 부동29) 하기, 길 가운데 허방 놓고30), 외자31) 술값 억지 쓰기, 전동 다리32) 딴죽치고33), 소경 의복 똥칠하기, 배 앓는 놈 살구 주고, 잠든 놈께 뜸질하기, 닫는 놈께 발 내치고, 곱사등이 잦혀놓기, 맺는 호박 넌출 끊고, 패는 곡식 모개34) 뽑기, 술 먹으면 후욕하고35), 장시간36)에 억매흥정37), 좋은 망건38)

22) 고로(苦勞): 고된 노동. 23) 사경: 새경. 옛날 농가에서 머슴에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외에 따로 연말에 주는 보수. 24) 역신(疫神): 천연두를 앓게 한다는 신. 25) 야장(夜葬): 밤에 무덤을 쓰는 일. 26) 왜장하기: ‘왜장하다’는 ‘괜스레 큰소리로 떠든다’는 뜻. 27) 바람 넣고: ‘바람 넣다’는 ‘다 되어가는 일에 훼방을 놓는다’는 뜻. 28) 시앗 싸움: 남편의 처와 첩 사이의 싸움. 29) 부동(附同): 어울려서 한통속이 됨. 30) 허방 놓고: ‘허방 놓다’는 ‘남이 빠지도록 일부러 땅을 움푹 파다’는 뜻. 31) 외자: 값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일인 ‘외상’의 뜻으로 쓴 말인 듯. 32) 전동다리: 병들어 떠는 다리. 33) 딴죽치고: ‘딴죽치다’는 ‘자기 발로 남의 발을 걸어 당기다’는 뜻. 34) 모개: 곡식의 이삭이 달린 부분. 모개미와 비슷한 말.


편자39) 끊기, 새 갓 보면 땀대40) 떼기, 궁반41) 보면 관을 찢 고, 걸인 보면 자루 찢기, 상인42) 잡고 춤추기와 여승 보면 겁탈하기, 새 초분43)에 불 지르고, 소대상44)에 제청45) 치기, 애 밴 계집 배통 차고, 우는 아이 똥 먹이기, 원로행인46) 노 비47) 도적, 급주군48) 잡고 실강이질, 관차사49)의 전령50) 도 적, 진영교졸51) 막장 뺏기, 지관52) 보면 패철53) 깨고, 의원 35) 후욕(詬辱)하고: 꾸짖어 욕함. 36) 장시간(場市間): 시장 바닥. 37) 억매흥정: 남에게 억지로 물건을 팖. 38) 망건(網巾): 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에 두르는 그물 모양의 물건. 39) 편자: 망건을 졸라매기 위해 말총으로 띠처럼 좁고 두껍게 짠, 망건의 아 랫부분. 40) 땀대: 땀을 받기 위해 갓 안쪽에 붙인 띠. 41) 궁반(窮班): 가난한 양반. 42) 상인(喪人): 초상(初喪)을 당한 사람. 43) 초분(草墳): 송장을 이엉 따위로 덮어둔 것. 44) 소대상: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인 소상(小祥)과 2년 만에 지 내는 제사인 대상(大祥)을 아울러 이르는 말. 45) 제청(祭廳): 제사를 지내는 대청(大廳) 또는 장사 지낼 때 무덤 옆에 제사 지낼 수 있도록 베푼 곳. 46) 원로행인(遠路行人): 먼 길 가는 나그네. 47) 노비(路費): 노잣돈. 여행하는 데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돈. 48) 급주(急走)군: 지난날 각 역에 배치되어 급한 심부름을 하던 병졸. 49) 관차사(官差使): 지난날 관아에서 보내던 사령. 50) 전령(傳令): 전하여 보내는 훈령(訓令) 또는 고시(告示).


보면 침 도적질, 물 인 계집 입 맞추고, 상여(喪輿) 멘 놈 형 문54) 치기, 만만한 놈 뺨치기와 고단한 놈 험담하기, 채소밭 에 물똥 싸고, 수박밭에 외손질55)과 소목장인56) 대패 뺏고, 초라니 패57) 탈짐58) 도적, 옹기 짐 작대 차고, 장독간에 돌 던지기, 소매 따기 도자속금59) 고무도적60) 끝61) 먹기와 다 담상62)에 흙덩이질, 계골63)할 제 뼈 감추기, 어린아이 불알 발라64) 말총65)으로 호아매고66), 약한 노인 엎지르고, 마른

51) 진영교졸: 진영(鎭營)은 작은 부대, 교졸(校卒)은 거기에 딸린 장교(將校) 와 나졸(羅卒). 52) 지관(地官): 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 53) 패철(佩鐵): 지관(地官)이 몸에 지니는 지남철(指南鐵). 54) 형문(刑問):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 55) 외손질: 슬쩍 훔쳐 넣는 일. 56) 소목장인(小木匠人): 나무로 가구나 문방구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장인. 소목장. 57) 초라니 패: 기괴한 계집 모양의 탈을 쓰고 떠돌아다니며 놀이를 보여주고 먹고살았던 광대 무리. 58) 탈짐: 부인의 머리를 예쁘게 꾸미기 위해 꽂는 비녀의 하나. 59) 도자속금(盜者贖金): 도적이 죄를 씻기 위해 바치는 돈. 60) 고무도적: 잔 도둑. 61) 끝: 물건 값의 나머지 얼마를 마저 치르는 돈. 끝돈. 62) 다담상(茶啖床):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차린 상. 63) 계골(計骨): 이장(移葬)을 하기 위해 유골(遺骨)의 뼈를 세는 일. 64) 바르다: 껍질을 벗기어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집어냄.


항문 생짜하기67), 제주병68)에 개똥 넣고, 사주병69)에 비 상70) 넣기, 곡식밭에 우마(牛馬) 몰고, 부형 연갑71) 벗질하 기72), 귀머거리 욕하기와 소리할 제 잔말하기, 날이 새면 행 악질73), 밤이 들면 도적질 평생에 일삼으니, 제 어미 붙을 놈이 삼강74)을 아느냐, 오륜75)을 아느냐. 굳기가 돌덩이요, 욕심이 족제비라. 네모난 송곳으로 이마를 부비어도 진물 한 점 아니 나고, 대장76)의 불집게로 불알을 꽉 집어도 눈도 아니 깜짝인다. 65) 말총: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 66) 호아매고: 헝겊을 겹쳐 바늘땀을 성기게 꿰맴. 67) 생짜하기: 사내들끼리 행하는 성적(性的)인 일. 비역질. 68) 제주병(祭酒甁): 제사(祭祀)를 지내기 위해 빚은 술을 담근 병. 69) 사주병(蛇酒甁): 뱀을 넣어 담근 술을 넣은 병. 70) 비상(砒霜): 비석(砒石)에 열을 가하여 승화시켜 얻은 결정체로서 독성 (毒性)이 있음. 71) 부형 연갑(父兄年甲): 아버지나 형뻘 되는 나이. 72) 벗질하기: 벗으로 삼아 터놓고 지내기. 73) 행악(行惡)질: 모질고 나쁜 행동을 하는 짓. 74) 삼강(三綱):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임금과 신하, 부 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군위신강(君爲 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75) 오륜(五倫):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부자유친(父子 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76) 대장: 대장간.


흥보의 마음씨는 제 형과 아주 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존경하며, 인리77)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신의(信義) 있어, 굶어서 죽을 사람 먹던 밥 덜어 주고, 얼어서 병난 사 람 입었던 옷 벗어주기, 늙은이 짊어진 짐 자청(自請)하여 져다 주고, 장마 때 큰물 가에 삯 안 받고 월천78)하기, 남의 집이 불이 나면 세간살이 지켜주고, 길에 보물 빠졌으면 지 켜 섰다 임자 주기, 청산(靑山)에서 백골(白骨) 보면 깊이 파고 묻어주고, 수절(守節) 과부(寡婦) 보쌈하면 쫓아가서 빼어 놓기, 어진 사람 모함하면 대(代)로 나서 발명79)하고, 애잔한80) 놈 횡액81) 보면 달려들어 구완하기, 길 잃은 어린 아이 저의 부모 찾아주고, 주막의 병든 사람 본가에 기별 전 키, 계칩불살82) 방장부절83) 남의 일만 하노라고 한 푼 돈을 못 버니, 놀보 오죽 미워하랴.

77) 인리(隣里): 이웃과 이웃 마을. 78) 월천(越川): 내를 건넘. 79) 발명(發明): 죄나 잘못이 없음을 말하여 밝힘. 80) 애잔하다: 애처롭고 애틋함. 81) 횡액(橫厄): 뜻밖에 닥쳐오는 불행. 82) 계칩불살(啓蟄不殺): 경칩(驚蟄)에 겨울잠에서 깨어 막 움직이려는 벌레 를 죽이지 않음.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계칩불살 즉순인도 방장불 절 즉서인야(啓蟄不殺 則順人道 方長不折 則恕仁也)”라는 구절이 있다. 83) 방장부절(方長不切): 자라나는 풀과 나무를 꺾지 않음.


하루는 놀보가 흥보를 불러 “흥보야! 네 듣거라. 사람이 라 하는 것이 믿는 것이 있으면은 아무 일도 아니 된다. 너도 나이 장성(長成)하여 계집자식 있는 놈이 사람 생애 어려운 줄 조금도 모르고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유의유식84)하는 거동 보기 싫어 못하겠다. 부모의 세간살이 아무리 많아도 장손(長孫)의 차지될 데, 하물며 이 세간은 나 혼자 장만하 니 네게는 부당(不當)이라. 네 처자(妻子) 데리고서 속거천 리85) 떠나거라. 만일 지체(遲滯)하여서는 살육지환86) 날 것이니, 어서 급히 나가거라!” 가련한 흥보 신세 지성(至誠)으로 비는 말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형님 전에 비나이다! 형제는 일신 (一身)이라 한 조각을 버리오면 둘 다 병신 될 것이니, 외어 기모87) 어이하리? 동생 신세 고사하고, 젊은 아내 어린 자식 뉘 집에 가 의탁(依託)하여 무엇 먹여 살리리까? 장공예88) 는 어떤 사람? 구세(九世) 동거(同居)하였는데, 아우 하나

84) 유의유식(遊衣遊食): 놀고 입고 놀고먹음. 85) 속거천리(速去千里): 빨리 천 리(千里) 밖으로 떠남. 86) 살육지환(殺戮之患): 무엇을 트집 잡아 사람을 마구 죽이는 변고(變故). 87) 외어기모(外禦其侮): 밖에서 주는 모욕을 막음. 88) 장공예(張公藝):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그의 집은 9대가 함께 살았다 함. 고종(高宗)이 불러 그 비결을 물으니 참을 인(忍) 자를 써 바쳐, 고종 이 상을 후히 내렸다 함.


있는 것을 나가라 하나이까? 척령89)은 짐승이나 금란지 의90) 알아 있고, 상체91)는 꽃이로되 담락지정92) 품었으니 형님 어찌 모르시오? 오륜지의93) 생각하여 십분(十分) 통촉 (洞燭)하오소서!” 놀보가 분이 나서 상투 끝까지 올라 그런 야단이 없구나. “아버님 계실 적에 나는 생일94)시키고서 작은아들 사랑 옵다 글공부시키더니, 너 매우 유식(有識)하다! 당(唐) 태종 (太宗)은 성주(聖主)로되 천하를 다투어서 그 동생을 죽였 으며,95) 조비는 영웅이나 재주를 시기(猜忌)하여 그 아우 죽였으니,96) 나 같은 초야(草野) 농부 우애지정(友愛之情) 알겠느냐?” 구박출문97) 쫓아내니, 가련한 흥보 신세 개구(開口) 다 89) 척령(鶺鴒): 할미새. 90) 금란지의(金蘭之誼): 벗 사이의 도타운 정의(情誼). 91) 상체(常棣): 산매자나무. 여러 개의 꽃이 모여 아름다우므로 형제간 우애 가 두터운 아름다움에 비유됨. 92) 담락지정(湛樂之情): 오래도록 즐기는 깊은 정. 93) 오륜지의(五倫之義): 오륜의 뜻. 94) 생일: 힘든 일. 95) 중국 당(唐)나라 2대 왕 이세민(李世民)이 즉위할 때 형과 아우를 죽이고 왕이 되었음. 96) 중국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들인 왕 조비(曹丕)가 아우 조식(曹植) 의 글재주를 시기하여 죽였음.


시 못하고서 빈손으로 쫓겨나니, 광대(廣大)한 이 천지에 무가객98)이 되었구나.

97) 구박출문(驅迫黜門): 못 견디게 구박하여 문밖으로 쫓아냄. 98) 무가객(無家客): 집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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