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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희망을 말한다. 절망은 무엇을 말하나? 희망하면 절망도 희망이 되는가? 오즈번의 대답은 “노”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말로 얻을 수 없다.

연극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영국 로얄코트 극장,1956


인텔리겐치아 2627, 2015년 6월 9일 발행

고근영이 옮긴 존 오즈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앨리슨 지미가 엄마에 대해 뭐라고 한 줄 아 세요? 늙고, 뚱뚱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나쁜 년이라고 했다고요. “엄마가 죽어 땅에 묻히면 벌레들이 큰 잔치를 벌일 거”라고 했 죠, 아마. 대령 그랬구나. 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니? 앨리슨 오, 그인 아버지에 대해선 그다지 신 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사실, 아버지를 조 금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이가 아 버질 좋아하는 이유는 아버지를 동정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말이 아버지에게 상 처가 될 거란 걸 충분히 의식하면서) 아빠가 “에드워드 왕조의 황무지에 남겨진 채, 도대 체 왜 태양이 다시 빛나지 않는 건지 모르겠 다며 한탄하는 억센 풀 한 포기” (살짝 머뭇 거리며) 같다며 불쌍하다나요. -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 존 오즈번 (John Osborne) 지음, 고근영 옮김, 145쪽

지미가 앨리슨의 남편인가? 그렇다.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 혼했다. 왜 반대했나? 출신이 달랐다. 지미는 노동계급, 앨리슨은


당대 영국 상류층이었다. 어머니는 결혼을 막으려고 사설탐정을 시켜 지미를 감시한다. 결혼해서는 잘 사나?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엘리슨이 말한 다. 빈털터리 지미가 그녀를 이용한다. 앨리 슨의 지인들을 찾아가 술과 음식을 대접받 았고 협박도 일삼는다. 그럼 왜 결혼한 것인가? 지미가 복수를 위해 자신과 결혼했다고 앨 리슨은 생각한다. 무엇에 대한 복수인가? 기득권에 대한 복수다. 지미는 앨리슨을 인


질처럼 다룬다. 상류층에 대한 비난을 멈추 지 않는다. 갈등은 계급투쟁처럼 보인다. 하 지만 이것은 동족 투쟁이기도 하다. 어떤 동족들인가? 기성세대에 맞서 ‘성난 목소리’로 변화와 혁 명을 요구하는 지미,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 드는 앨리슨. 지미는 앨리슨의 무기력한 태 도를 향해 분노한다. 이 시절 영국에서 왜 지미가 나타나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미국에게 세 계 지배의 패권을 빼앗겼다. 기득권층이 책 임질 일이었지만 그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여전히 기득권에 연연한다. 젊은이


들은 참전 후유증인 경제난에 시달린다. 기 득권층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점점 더 깊어 진다. 지미는 그런 영국 젊은이의 표상이다. 앨리슨은 지미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는가? 동요하지 않던 앨리슨도 끝까지 버티지는 못한다. 지미가 집을 비운 사이 짐을 챙겨 떠 난다. 임신한 몸이었다. 지미는 어떻게 되는가? 앨리슨의 친구로 지미와는 앙숙이었던 헬레 나가 엘리슨의 자리를 채운다. 지미를 사랑 하게 된 것이다. 앨리슨에게 편지로 이 사실 을 알린다.


임신한 앨리슨은 어떻게 하는가? 몇 개월 뒤에 유산한다. 그러고는 지미와 헬 레나를 찾아온다. 화를 내지도 않고 비난하 지도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를 방해해 미안 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헬레나가 앨리슨의 그런 태도를 비난하고 떠난다. 앨리슨과 지미는 어떻게 되는가? 앨리슨은 아이, 곧 희망을 잃고 좌절을 겪는 다. 이것이 지미가 앨리슨에게 그토록 깨우쳐 주고 싶어 했던 감정이었다. 둘은 좌절감을 공유하며 진흙탕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진흙탕으로의 귀환이 이 극의 결론인가? 이 극은 도덕적 결론을 끌어내거나 현실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좌절과 각성 을 통해 환상을 걷어 낸,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을 보게 한다. 자발적으로 변화 의지를 갖도 록 하는 것이다. 영국 연극계는 이런 오즈번 의 야심에 격렬한 공감을 보낸다. 얼마나 격렬했나? 관객의 인식 변화를 통한 사회 개혁을 목적 으로 하는 사회극 운동이 시작된다. 사회극 운동은 이후 20여 년간 영국 연극계를 이끌 었다. 이 작품에 대한 관객 반응은? 노동계급의 지리멸렬한 삶을 극사실적으로 그려 낸 이 작품을 보고 불쾌감과 피로감을


느꼈다. 몇몇은 극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런 관객 반응은 오즈번이 원 하던 바였다. 오즈번이 관객에게 원한 게 뭔가? 추상화된 현실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을 경 험하길 바랐다. 그래야 스스로의 문제를 붙 들고 씨름할 계기와 동력이 생긴다고 믿은 것이다. 듣고 싶지 않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을 경험한 관객은 구경꾼이 아니라 능 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했다. 존 오즈번이 누구인가? 이 작품으로 영국 연극계에 활기를 불어넣 은 극작가이자 배우다. “the first Angry Young


Man” 곧 최초의 성난 젊은이가 되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고근영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한다. 현대 영미 희곡을 연구한다.


세상에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희망을 말한다. 절망은 무엇을 말하나? 희망하면 절망도 희망이 되는가? 오즈번의 대답은 “노”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말로 얻을 수 없다.

연극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영국 로얄코트 극장,1956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존 오즈번 지음 고근영 엮음 2015년 5월 20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240쪽, 18,000원


작품 속으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나오는 사람들

지미 포터 클리프 루이스 앨리슨 포터 헬레나 찰스 레드펀 대령

모든 사건은 영국 중부지방(The Midlands)에 있는 포터의 원룸 아파트에서 일어난다.

시대: 현재

1막: 4월. 어느 이른 저녁. 2막 1장: 2주 후. 2장: 다음 날 저녁. 3막 1장: 몇 개월 후. 2장: 몇 분 후.


1막


(영국 미들랜드1) 지역 중소 도시에 위치한 포터의 원룸 아 파트. 4월 어느 날, 이른 저녁. 커다란 빅토리아풍 연립주택의 맨 위층에 자리한 상당히 큰 다락방. 천장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상당히 날카로운 경 사를 이루고 있다. 오른쪽 벽 아래쪽에는 2개의 낮은 창문 이 있다. 이 창문들 앞으로 어두운 오크빛 화장대가 놓여 있 다. 가구는 대부분 단순하고 낡은 것들이다. 오른쪽 벽 안쪽

1) 버밍엄(Birmingham), 울버햄프턴(Wolverhampton) 등 전통적인 공업지역이 자리한 영국 중부지방을 말한다. 이 작품의 초연이 이루 어진 1956년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의 헤게모니를 미국에 넘겨준 데 대한 정치적 패배감은 물론,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투입한 데 따른 심각한 경제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에 따른 영국 중산층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주된 정서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이, 영국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그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영국 의 제국적 확장을 가능케 한 중부지방을 지역적 배경으로 한 것은 필 연적인 귀결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지미 포터는 이러한 좌절감과 패배감에 시달리던 당대 영국 젊은이들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다. 당시 영국의 무기력한 상황에 대한 저항으로 끊임없이 화를 내며 주변 젊 은이들에게 열정을 갖고 다시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그에게서 당대 젊은이들의 표상을 발견한 평자들은 1950년대 젊은이들에게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n)” 세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후 작품 해설에서 더 자세히 전개할 예정이다.


에는 2인용 침대가 놓여 있는데, 이 침대는 뒤쪽 벽면을 거 의 다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책장이 빼곡히 들어 서 있다. 침대 앞쪽에는 묵직한 서랍장이 있는데, 그 위로 책, 넥타이 등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고, 낡을 대로 낡은 커다란 장난감 곰 인형과 부드럽고 복슬거리는 털로 뒤덮인 다람쥐 인형이 놓여 있다. 왼쪽 벽 뒤쪽으로 문이 나 있고, 그 앞쪽으로 작은 옷장이 있다. 왼쪽 벽 대부분은 직사각형 의 높은 창문으로 채워져 있다. 햇살이 잘 드는 이 창문은 층계참에 거의 맞닿아 있다. 옷장 아래로는 가스난로가 있 고, 그 옆에 서 있는 식료품 수납장 위에는 휴대용 라디오가 놓여 있다. 중앙에는 투박한 식탁과 세 개의 의자가 있고, 그 양옆에는 앉은 자리가 깊숙이 팬 두 개의 낡은 가죽 안락 의자가 있다. 막이 오르면, 지미와 클리프가 각각 오른쪽, 왼쪽 안락의자 에 앉아 있다. 둘의 상반신은 펼쳐 든 신문 뒤로 가려져 있 어서, 관객들에게 보이는 것은 신문 아래로 뻗어 나와 있는 다리뿐이다. 두 사람 모두 신문을 읽고 있다. 그들이 앉은 자리 옆이나 사이사이로, 일간 신문과 주간지들이 어지럽 게 흩어져 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키가 크고 마른 체구의 지미는 스물다섯 살 남짓한 젊은이로, 매우 낡 은 트위드 재킷과 플란넬 바지를 입고 있다. 그가 피우는 파


이프에서 나온 연기구름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정직 함과 악함, 부드러움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오묘한 인상의 그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뻔뻔한데다 자만심이 가득해 보 이는 사람으로, 예민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 그를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 지미처럼 지독하게, 혹은 투 명할 정도로 정직한 사람에게는 친구가 귀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성 격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다른 몇몇은 그를 그저 입이 거친 떠버리라고 생각한다. 그의 격렬한 성격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지미와 비슷한 나이인 클리프는 키가 작고, 어두운 피부에 다부진 체격으로, 풀오버와 새것이지만 심하게 구겨진 회 색 바지를 입고 있다. 거의 무기력해 보일 정도로 편안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독학한 사람 특유의 다소 우울하고 자연 스러운 지성미를 풍기는 인물이다. 지미가 사람들의 사랑 을 밀어낸다면, 클리프는 사람들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방어적인 사람들조차도 경계를 풀고 금세 자신을 사랑 하게 만드는, ‘사랑받는 법의 모범 답안’ 같은 인물이다. 모 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그의 성격은 지미와 뚜렷 한 대조를 이룬다. 왼쪽 벽 식료품 수납장 앞쪽으로 앨리슨이 다림판에 기대어


서 있고, 그 옆에는 다려야 할 옷가지들이 쌓여 있다. 앨리 슨은 이 셋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안에서도 가장 찾아내 기 어려운 음조를 연주하는 모호한 성격의 소유자다. 상류 층 가문 출신인 그녀가 만들어 내는 불안한 음색은 노동 계 층 출신인 다른 두 사람의 격렬한 협주에 압도되어 잘 들리 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품이긴 하지만 너무 낡아 지 저분해져 버린 치마와 지미의 체리색 셔츠를 대충 걸쳤는데 도 상당히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다른 두 남자들과 비슷 한 나이. 두 남자들의 너무 대조적인 신체 조건 때문인지, 그들 옆에 선 그녀는 실제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키가 크 고, 날씬하며, 피부가 검은 편이다. 골격이 긴 얼굴이 굉장 히 섬세해 보인다. 뭔가 망설이고 있는 듯한 그녀의 눈은 무 척이나 크고 깊어서, 그 앞에선 대강 얼버무리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을 수 없을 것 같다. 방은 조용하고, 연기로 가득 차 있다. 가끔씩 앨리슨이 다리미를 내려놓을 때 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4월 어느 추운 날 저녁, 하늘 에는 구름과 그늘이 가득하다. 이윽고, 지미가 읽고 있던 신문을 내팽개친다.)

지미

내가 왜 일요일마다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지? 책 서평마저도 지난주 내용이랑 다를 게 하나 없는데


말야. 다른 책, 같은 서평이라니 말이 되냐고. 그 신 문 다 봤어? 클리프 아직. 지미

지금 막 영국 소설에 대한 칼럼 세 개를 다 읽었는데, 웃긴 게 뭔지 알아? 그중 반이 불어로 쓰여 있다는 거 야. 일요일자 신문을 읽으면서 네가 얼마나 무식한 지 깨달아 본 적 있어?

클리프 전혀. 지미

뭐야, 넌 무식해! 일자무식 농사꾼에 불과하다고! (앨리슨에게) 당신은 어때? 당신은 농사꾼 따위가 아니잖아, 안 그래?

앨리슨 (무심하게) 무슨 뜻이에요? 지미

신문 읽을 때마다 자기가 멍청하단 느낌을 받진 않 느냔 말야.

앨리슨 오, 아직 안 읽어 봐서요. 지미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야. 내 말은….

클리프 그냥 좀 내버려 둬. 일하는 거 안 보여? 지미

이봐, 앨리슨도 입이 있어, 안 그래? 당신도 말할 수 있잖아, 그렇지? 당신에게도 자기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아니면 “백인 여성의 책임(White Woman's Burden)”2)때문에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돼 버렸나? 앨리슨 미안해요. 제대로 듣고 있질 않았어요. 지미

물론 그랬겠지. 늙은 포터 씨가 말할 땐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잠들어 버리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하품 을 날리며 잠들어 버리는 게 바로 포터 부인3)이지!

클리프 앨리슨 좀 그냥 놔두라고 했지! 지미

(소리를 지르며) 알았어, 알았다고. 다시 잠이나 자. 나 따위가 하는 소리에 신경 쓸 거 없잖아, 알지? 미

2) 19세기 영국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1899년 발표 한 시 <백인의 책임(The White Man's Burden)>을 빗대 말한 것으 로, 이 시는 ‘미개한 동양’을 정복해 서양 문화에 복속시킴으로써 문 명화해 주는 것이 백인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당대 영국 제국 주의 정책에 심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지미는 아버지 레드펀 대령을 따라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 서 살다가 제국 시대의 종식으로 영국으로 돌아온 대표적인 상류층 출신 앨리슨을 이런 식으로 조롱함으로써, ‘제국의 실패’에 대한 자조 는 물론, 그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할 사회 기득권층과 위정 자 계급에 대한 냉소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3) ‘포터(Porter)’는 앨리슨이 결혼 후 지미의 성을 따르면서 바꾼 성이 다. 이 대목에서 지미는 앨리슨을 ‘포터 부인(Mrs. Porter)’이라 부르 면서,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1922)에 등장하는 상류층 여성 ‘포터 부인(Mrs. Porter)’을 인용, 앨리슨을 노동 계층인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상류층 여성으로 치부하며 비난한다.


안하게 됐네. 클리프 소리 좀 지르지 마. 신문 읽고 있잖아. 지미

신경 쓸 게 뭐 있어? 어차피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주 제에.

클리프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 지미

넌 너무 무식해.

클리프 그래. 나 못 배웠어. 그러니까 이제 입 좀 닥쳐 줄래? 지미

우리 아내님께 설명해 달라고 부탁해 보면 어떨까? ‘배운’ 분이시거든. (앨리슨에게) 맞는 말이잖아, 그 렇지?

클리프 (신문 뒤에서 지미를 향해 발길질을 하며) 내버려 두

라고 했다! 지미

다신 안 그러는 게 좋을 거다, 이 잘난 웨일스 깡패 자식아. 안 그럼 네 귀를 다 뽑아 버릴 테니!

(지미, 클리프가 들고 있던 신문을 낚아챈다.)

클리프 (몸을 앞으로 숙이며). 제−발, 나 조금이라도 더 나

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 중이니까 협조 좀 해라, 이 끔찍한 인간아. 내 신문 내놔! (신문을 향해 손을 뻗 는다.)


앨리슨 오, 제발 클리프에게 신문 돌려줘요! 생각을 할 수가

없잖아! 클리프 그래, 신문 이리 내놔. 앨리슨이 시끄러워서 생각을

할 수가 없다잖아. 지미

생각을 할 수 없다니! (클리프에게 신문을 던진다.) 저 여자는 지난 몇 년간 생각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다 고. 안 그래?

앨리슨 그래요. 지미

(주간지를 집어 들며) 배가 고파지는데.

앨리슨 말도 안 돼, 벌써요! 클리프 원래 빌어먹을 돼지 같은 인간이잖아요. 지미

난 돼지가 아니야. 그냥 음식을 좋아하는 거지. 그뿐 이라고.

클리프 좋아한다는 말론 부족하지! 음식에 집착할 때 보면

넌 거의 색마(sex maniac) 수준이라고. 두고 봐, 넌 언젠가 <해외 토픽>에 등장하는 걸로 인생 종 치고 말 테니. ‘제임스 포터(25)는 “빌더스 암(the Builder's Arms)”이라는 술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작은 양배추 한 통과 콩 통조림 두 캔을 추행한 혐의를 인 정하고 지난주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피의자는 자 신의 몸이 한동안 좋지 않은 상태였으며, 당시에는


잠깐 정신까지 잃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습감시원 경력과 사회적 약자 계층으로서의 지위 를 고려해 선처해 달라는 전언을 남겼습니다.’ 지미

(웃으며) 오, 그래, 그래, 그렇지. 난 먹는 게 좋아. 사 는 것도 좋아하지. 그게 그렇게 거슬리나?

클리프 근데 당최 그렇게 먹어 대는 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

겠단 말씀이야. 넌 전혀 살이 찌질 않잖아. 지미

나 같은 사람들은 살이 찌질 않아. 전에도 내가 얘기 했던 것 같은데. 우린 모든 에너지를 남김없이 태워 버리지. 이제 알았으면 내가 신문 읽는 동안 닥쳐 줬 음 좋겠어. 차나 좀 더 끓여 오든지.

클리프 맙소사, 너 혼자 한 주전자를 거의 다 마셨잖아! 난

겨우 한 잔 마셨다고! 지미

빌어먹을! 그냥 좀 더 끓여 와!

클리프 (앨리슨에게) 내 말이 틀렸어요? 나 겨우 한 잔 마신

거 맞죠? 앨리슨 (고개를 숙인 채로) 맞아요. 클리프 거 봐. 앨리슨도 겨우 한 잔 마셨어. 내가 봤지. 마구

마셔 댄 건 바로 너라고. 지미

(주간지를 읽으며) 난로에 주전자나 올려.

클리프 네가 올려놔. 내 신문도 구겨 놓은 주제에.


지미

이 집에서 신문은 물론, 그 어떤 것이든 제대로 대접 할 줄 아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다른 신문을 집어 들며) 이 신문에 편지를 보낸 어떤 여자애는 남자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면 그 사람이 더 이상 자길 존중 해 주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이라는군. 멍청한 년.

클리프 내가 한번 만나 봐야겠네. 다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지미

누가 이딴 걸 사 온 거야? (신문을 집어 던진다.) 그 윗동네 신문은 아직 다 못 본 거야?

클리프 어떤 거? 지미

일요일에 나오는 신문들 중에 상류층이 보는 신문 이라곤 딱 둘뿐이잖아. 지금 네가 읽고 있는 거랑 이 거. 이봐, 그거 이리 주고 내 거 가져가서 읽는 게 어 때.

클리프 좋아. (신문을 바꾼다.) <브롬리 주교> 칼럼까지

밖엔 못 읽었지만. (앨리슨에게 손을 뻗으며) 괜찮아 요? 앨리슨 괜찮아요. 고마워요. 클리프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 놔두고 잠시 앉아 쉬는 게

어때요? 피곤해 보여요. 앨리슨 (미소 지으며) 얼마 안 남았어요. 클리프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다가, 손가락을 입속에 넣는


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야, 그렇지 않냐? 지미

그렇다고들 하더군.

(앨리슨과 눈이 마주친다.)

클리프 이 사랑스럽고, 먹음직스러운 손 좀 봐. 음, 한입 뜯

어 먹어 버려야겠다! 앨리슨 그만둬요! 당신 셔츠를 다 태워 버리기 전에! 지미

역겨운 짓 그만하고 그 손가락 놔줘. 브롬리 주교가 뭐라고 했는지나 말해 봐.

클리프 (앨리슨을 놔주며) 오,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수소폭

탄 생산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원조를 해 주자는 아 주 감동적인 호소문을 날리셨더군. 지미

그래, 그거 참 감동적이네. (앨리슨에게) 어때, 내 사 랑, 당신도 감동했나?

앨리슨 음, 당연히요. 지미

이것 좀 봐, 심지어 내 아내까지도 감동받으셨다는 군. 주교에게 기부금이라도 보내야겠는걸. 어디 보 자, 주교님이 또 어떤 말씀을 하셨나. 어쩌고저쩌고 중얼중얼. 아, 알겠다. 당신께서 가난한 사람이 아닌 부자들만 지지한다는 사람들 비난에 단단히 화가 나


셨군. 주교님은 모든 사회계층을 똑같은 눈으로 바 라보고 계신다네. 그리고 “이런 근거 없는 비난은 노 동 계층의 지속적이고 악의적인 노력으로 양산되고 있다!”시는군. 글쎄올시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려고 고개를 들지만, 클리프는 계속 신 문을 읽고, 앨리슨은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지미

(클리프에게) 이 기사 조금이라도 읽었나?

클리프 뭐라고?

(지미, 두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지미

(앨리슨에게) 이 칼럼을 당신 ‘아빠’가 썼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 안 들어? 어때?

앨리슨 뭘 썼다고요? 지미

내가 방금 읽어 준 이 칼럼 말이야.

앨리슨 우리 아빠가 왜 그런 걸 써요? 지미

어쩐지 당신 아빠가 할 법한 얘기인 것 같아서 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앨리슨 그런가요? 지미

브롬리 주교가 당신 아빠의 필명인 건 아닐까? 어떻 게 생각해?

클리프 저 자식 말 신경 쓰지 말아요. 또 시비 걸기 시작했

어. 저 녀석 특기잖아요. 지미

(재빨리) 어떤 미국인 전도사가 주최한 대규모 집회 에 참여했던 여자 기사 읽었어? 신에 대한 자신의 사 랑인지 뭔지, 그걸 증언하러 앞으로 나가려다가 수 많은 인파에 치여서 갈비뼈 네 대가 부러지고 머리 를 걷어차였다지, 아마. 너무 아프다며 미친 듯이 소 리를 질렀지만, 거기 있던 5만 명 인파는 “전진하라, 기독교 병사들아”를 외치는 데 열중하느라 그 여자 가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는군.

(반응을 기대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지만, 어떤 반응도 없다.)

가끔 난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단 말 이야. 차는 어떻게 됐어? 클리프 (아직도 신문을 읽으며) 무슨 차? 지미

주전자 올려놓으라고!


(앨리슨이 지미 쪽을 본다.)

앨리슨 차 더 마실래요? 지미

모르겠어. 아니, 필요 없어.

앨리슨 클리프, 차 좀 더 마실래요? 지미

아니, 클리프도 필요 없대. 그 다림질 얼마나 더 하고 있을 거야?

앨리슨 곧 끝나요. 지미

제길, 난 일요일이 싫어! 언제나 똑같이 우울하다고. 우리에게 발전이란 건 없을 거야. 안 그래? 언제나 같은 일상뿐이야. 신문을 읽고, 차를 마시고, 다림질 을 하지. 그렇게 몇 시간만 더 지나면 또 한 주가 끝 나는 거야. 우리의 젊음이 이렇게 사라지고 있다고. 그거 알아?

클리프 (신문을 집어 던지며) 뭐라는 거야? 지미

(심드렁하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다들 엿 먹으라 고, 너도, 너희 둘, 그리고 세상 모두 다!

클리프 영화나 보러 가자. (앨리슨에게) 어때요? 앨리슨 난 안 될 것 같아요. 지미는 가고 싶어 할 거예요. (지

미에게) 영화 보러 갈래요?


지미

가서 앞줄에 앉은 얼간이들이 내 일요일 밤의 즐거 움을 망치는 꼴을 지켜보라고? 정중히 사양할게. (사이) 프리스틀리4)의 이번 주 칼럼 읽었나? 이런, 대체 내가 이런 걸 왜 물어봤지? 네가 읽었을 리가 없 는데 말야. 난 내가 왜 그런 빌어먹을 신문에 매주 9 펜스씩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 말고는 아무도 그걸 읽지 않는다고. 아무도 그런 거슬리는 신문을 읽고 싶어 하지 않거든. 안락하고 나태한 자기만의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희 둘이 날 곧 그런 세상으로 데려다주겠지. 그건 지금 내가 여기 앉아 있다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 야. 언젠가 너희 둘은 날 미치게 만들고 말 거야. 맙 소사, 아주 약간의 인간다운 열정이라도 가진 사람 들을 만나기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해 왔는지 너희가 알까! 순수한 열정,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 야. 흥분에 가득 찬 따뜻한 목소리로 ‘할렐루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4) 영국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프리스틀리(J. B. Priestley)를 말한다. 자 유주의적 사회주의자(liberal socialist)로서, 1940∼1950년대 영국 사회문제에 관한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이 돋보이는 칼럼을 썼다.


몸짓으로 자신의 가슴을 탁 친다.) 할렐루야! 나는 살아 있다! 좋은 생각이 났어. 이런 게임을 해 보면 어떨까? 인간인 척, 우리가 정말 살아 있는 척해 보 는 거야. 잠시 동안이라도 말야. 어때? 우리 인간인 척해 보자.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이봐, 협조 좀 해 줘. 뭔가에 열정을 가진 인간을 만나 본 지 너 무 오래됐다고. 클리프 그 사람이 뭐랬는데? 지미

(앨리슨을 더 다그치려는 걸 방해받은 데 발끈해서) 누가 뭘 말했다는 거야?

클리프 프리스틀리 말이야. 지미

맨날 하던 소리지 뭐. 그 사람은 아직도 저 여자 ‘아 빠’처럼 더 이상은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황무지에 서서 에드워드 왕조의 석양을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5) 도대체 그 바지에 무슨 짓

5) 이때 “황무지”는 작게는 앨리슨의 아버지가 주둔해 있던 인도를, 크 게는 영국이 점령했던 모든 식민지를 의미한다. (이 작품의 기본 정 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T.S.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의 제 목과 중첩되는 단어 사용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넘겨줘야 했던 세계 지도국으로서의 패권에 대한 상실감과, 2 등 국가로 밀려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던 영국인들의 정치적


을 한 거야? 클리프 무슨 소리야? 지미

지난주에 산 거 아니야? 네 바지 좀 보라고. 당신은 도대체 이 작자가 자기 바지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겠어?

앨리슨 당신도 참 단정치 못해서 큰일이에요, 클리프. 그 바

지는 끔찍하다고요. 지미

새 바지 사느라 돈깨나 써 놓곤, 그렇게 야만인처럼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있다니! 넌 도대체 내가 돌봐 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 거야? 응? 어떻게 살 거냐고?

클리프 (웃으며) 글쎄, 나도 모르지. (앨리슨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앨리슨 그 바지는 얼른 벗는 게 좋겠어요. 지미

그래, 벗어 버려. 내가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니.

앨리슨 마침 다림질 중이었으니 내가 다려 줄게요. 클리프 좋아요.(바지를 벗기 시작한다.) 주머니만 비우고

요.(열쇠, 성냥, 손수건을 꺼낸다.) 지미

성냥 좀 줄래?

클리프 오, 제발. 그 오래된 파이프를 다시 피울 생각은 아니

패배감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겠지? 온 방에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고! (앨리슨에 게) 저 냄새 끔찍하지 않아요?

(지미, 성냥을 집어 파이프에 불을 붙인다.)

앨리슨 신경 안 써요. 이제 익숙해졌는걸요. 지미

익숙해지는 게 앨리슨의 특기거든. 저 여잔 죽고 나 서도 천국에서 다시 눈뜨자마자 5분 만에 그곳에 적 응해 버릴걸.

클리프 (앨리슨에게 바지를 건네며) 고마워요. 담배 좀 줄래

요? 지미

주지 마.

클리프 난 더 이상 그 파이프 냄새를 견딜 수가 없어. 담배라

도 피워야겠어. 지미

의사가 담배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클리프 오, 제발 닥치라고 해. 지미

좋아. 궤양에 걸린 건 내가 아니고 너니까. 피워, 피 우고 계속 아파하는 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난 이제 포기했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신경 써 주 는 것도 지쳤어.


(앨리슨은 클리프에게 담배를 건네준다. 둘 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앨리슨은 다시 다림질을 시작한다.)

생각하는 사람도, 신경 쓰는 사람도 없군. 신념도, 확신도, 열정도 없어. 언제나와 같은, 그저 그런 일 요일 저녁일 뿐이지.

(클리프, 스웨터와 속바지 차림으로 다시 의자에 앉는다.)

들어 줄 만한 콘서트가 있나 모르겠네. (≪라디오 타 임스≫를 집어 든다.) 야, (발로 클리프를 툭툭 친다.) 차 좀 더 끓여 와.

(클리프, 짜증이 가득한 신음 소리를 낸 뒤, 이내 다시 신문 을 읽는다.)

오, 그렇지. 본 윌리엄스6)의 공연이 있네. 이거야말

6) 본 윌리엄스(Vaughan Williams)는 영국 민요와 튜더 시대 음악을 기 본 테마로 한 곡을 주로 만들어, 가장 ‘영국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작 곡가다. 지미의 ‘영국다움(Englishness)’, 혹은 영국 전통문화에 대한


로 특별한 거지. 강렬하면서도 단순한, 영국적인 뭔 가가 있다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절대 애국자가 될 수 없을 것 같긴 해. 누가 그랬잖아, 그러니까 뭐냐, 영국인들은 음식은 파리에서 가져오고−웃기는 소 리지−정치는 모스크바에서, 도덕은 포트사이드7) 에서 수입한다, 뭐 그런 얘기 말이야. 누가 한 말이었 지? (사이) 하긴, 네가 알 리가 없지. 인정하긴 싫지 만, 난 저 여자 아버지가 인도에서 수년간을 보내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옛날 에드워드 왕의 군대는 자신들의 작고 단순한 세상을 꽤나 매혹적으로 보이 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거든. 집에서 만든 케이크와

강한 애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7) 포트사이드(Port Said)는 수에즈 운하의 지중해 편에 위치한 항구다. 19세기 말부터 영국이 실질적인 통제권을 가지고 운영하던 수에즈 운하는 인도와 함께 영국 제국주의 성공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주도권이 급격히 약화되고, 미국 과 소련의 냉전을 중심으로 세계의 힘이 재편되자, 이집트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해 운하의 통치권을 회수할 계획을 세웠고, 이 연극이 초연된 지 몇 달 뒤에 그 통치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Suez Crisis) 에서 영국이 사실상 미국의 압력으로 패배하면서, 영국 제국주의는 완전히 패배로 끝났음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크로켓, 밝은 생각, 밝은 유니폼 같은 것들로 한껏 치 장하면서 말이지. 한여름, 따스한 햇살 속에서 보내 는 여유로운 한낮, 얇은 시집 한 권, 기분 좋은 바스 락 소리를 내는 리넨, 거기서 풍겨 나오는 빳빳한 풀 냄새 같은 것들이 만들어 내는 아늑한 풍경! 그 얼마 나 낭만적인 그림이야. 물론 위선적인 풍경이기도 하지. 때때로 비도 왔을 게 분명하니 말이야. 하지만 그게 거짓이든 아니든, 나도 그 시절이 가 버렸단 사 실이 안타깝긴 해. 자기 세상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 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의 세상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 단 걸 안타까워하는 게 은근히 즐거운 일이거든. 아, 또 감상적이 돼 버렸네. 아무튼, 이 ‘미국 시대’8)에 살아간다는 건 참 우울한 일이야. 물론 미국 사람이 아닐 경우에 그렇단 말이지. 아마 우리 자식들은 전 부 미국인으로 살아가게 될걸. 일리 있는 생각이지, 안 그래?

8) 앞선 주석에서 언급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세계 지도국으로서 위 상을 미국에 넘겨준 영국인들의 상실감이 “미국 시대”라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언급된 장면이다. “미국 시대”의 시작은 곧 “영국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클리프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친다.) 일리 있는 생각이냐고 묻잖아! 클리프 그랬나? 지미

밀가루 반죽 덩어리처럼 거기 그렇게 죽치고 앉아서 다 듣고 있었으면서. 차 좀 더 끓여 오라고 말했을 텐 데?

(클리프는 짜증 가득한 신음 소리를 낸다. 지미, 앨리슨 쪽 으로 몸을 돌린다.)

오늘 밤 당신 친구 웹스터가 오나? 앨리슨 그럴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떤지 알잖아요. 지미

흠, 안 왔으면 좋겠는데. 오늘 밤엔 내가 웹스터를 감 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앨리슨 당신하고 말이 통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면서요? 지미

맞아. 표현은 다르지만 생각은 같지. 난 웹스터가 좋 아. 신랄하고, 날카롭고, 추진력이 넘치고….

앨리슨 열정적이고요. 지미

바로 그거야. 웹스터가 오면 난 들뜨기 시작해.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난 그에게 범상치 않은 뭔가 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거든. 그때 이후로는 절대 느


껴 보지 못했던…. 앨리슨 네, 잘 알죠. 당신이 매들린과 살았던 그때 말이죠.

(앨리슨, 이미 다린 옷을 개켜서 침대 쪽으로 가져간다.)

클리프 (여전히 신문 뒤에서) 매들린이 누군데요? 앨리슨 오, 정신 차려요, 클리프. 당신도 매들린에 대해서

수십 번 넘게 들었다고요. 매들린은 지미의 애인이 었어요. 기억나요? 지미가 열네 살, 아니, 열세 살 때 였나? 지미

열여덟이었어.

앨리슨 지금의 지미가 있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매들린 덕분

이래요. 클리프 여자가 한둘이었어야 기억하지. 매들린이 자네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다던 그 여잔가? 지미

열 살 위였지.

클리프 요 맹랑한 마치뱅크스9) 같으니!

9)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희곡 <캔디다(Candida)>에 등장하는 인물로, 지역 교구의 명망 높은 목사의 아내 캔디다와 사랑 에 빠진 젊은 시인이다. 마치뱅크스는 캔디다를 우상처럼 숭배하면


지미

콘서트는 언제 시작하지? (신문을 들여다본다.)

클리프 (하품을 하며) 아, 너무 졸려. 내일 또다시 그 빌어먹

을 사탕 가판대 뒤에 서 있어야 하다니 끔찍하다. 너 혼자 문 열고, 난 늦잠이나 좀 자게 해 주는 게 어때? 지미

난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공장에 가서 물건 받 아 와야 하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5분 남았군.

(앨리슨이 다림판 앞으로 돌아온다. 팔짱을 낀 채 담배를 피 우며 생각에 잠겨 있다.)

너희 둘을 모두 합쳐도 그 여자 새끼손가락에 흐르 던 생기만큼도 따라가지 못할 거야. 클리프 누구 얘기하는 거야? 앨리슨 매들린요. 지미

그녀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호기심이 강했어. 그건 그냥 단순한 참견이 아니었

서, 그녀를 답답하고 위선적인 결혼 생활로부터 구출해야 한다는 사 명감에 젖어 있다. 클리프는 나이 많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여전히 우상처럼 떠받드는 지미를 이 작품 속 마치뱅크스에 빗대 풍 자하고 있다.


다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세상을 관찰하고 배우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지.

(앨리슨은 클리프의 바지를 다리기 시작한다.)

클리프 (신문 뒤에서) 그냥 차나 더 끓이는 게 나을 뻔했군. 지미

(조용히) 매들린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어. 그녀와 버스에 올라타는 것만으로도, 난 율리시스10) 와 함께 항해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클리프 웹스터도 율리시스 같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걘 그저 못생기고 쥐똥만 한 악마일 뿐이야. 지미

난 지금 웹스터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이 멍청 한 친구야. 그 친구도 꽤 괜찮은 편이지. 여자 에밀 리 브론테 같은 인간이랄까.11) (앨리슨에게) 당신

10)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Odysseia)> 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 오 디세우스의 모험담을 바탕으로 쓰인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군 이 트로이를 공략한 뒤 귀국하는 길에 오디세우스가 겪게 되는 10 여 년에 걸친 모험담을 방대한 분량의 서사시로 엮어 낸 대작이다. 역동적인 삶에 대한 지미의 갈망이 율리시스의 모험 가득한 삶에 대한 동경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친구 중에 유일하게 대접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인 물이지. 당신이 웹스터와 잘 지낸다는 게 정말 신기 하다니까. 앨리슨 맞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미

(일어나서 오른쪽 창문을 내다본다.) 배짱만 갖춘 게 아니라, 감수성도 아주 예민해. 배짱과 감수성은 굉 장히 공존하기 어려운 성질인데 말이지. 당신 친구 들 중엔 그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갖춘 사람이 없다 고.

앨리슨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지미, 제발 그만해요.

(지미, 돌아서서 앨리슨을 쳐다본다. 그녀 목소리에 깃든 피곤한 기색이 갑자기 그의 성미를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감행할 새로운 공격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는다. 무 대 가운데로 걸어와 클리프 뒤에 선 뒤 그의 머리를 내려다 본다.)

11) ≪워서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로 잘 알려진 19세기 영국 여류 소설가다. 지미가 여기서 그녀의 성을 남자인 것처럼 바꿔 말하 는 이유는, 이후에 밝혀지겠지만, 웹스터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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