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한국문학 2/10 단편소설
말할 수 없는 것만 남은 현실 전쟁과 비극이 소설이 된다. 저항과 비판이 글을 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만 남은 현실. 무서웠다. 다만 죽음을 느꼈을 뿐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인텔리겐치아 2638, 2015년 6월 16일 발행
무서웠다. 민수는 이 속에서 단지 무서웠을 뿐이다. 그리고 죽음을 느꼈을 뿐이다. 이 이 상 무엇이 있었던가. 그 소름이 돋치는 공포 와 떼쳐버릴 수 없는 불안과 덮쳐누르는 것 같은 강박관념 외에 무엇이 있었던가, 애초에 우리에게 목적이 있었던가, 또 그 알량한 목 적이 있었다면 지금 그 따위가 뭐 말라비틀어 진 것이냐. 그저 밑으로 찾아드는 듯한 피로 만이 지금의 나의 전부다. 그런데 이 맹랑한 작자들은 나에게 목적을 대라는 것이다. -<철조망>, «초판본 강용준 작품집», 강용준 지음, 권채린 엮음, 54쪽 <철조망>은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내면세계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묘사합니다.
초판본 강용준 작품집 강용준 지음 권채린 엮음 2010년 3월 15일 출간 사륙판(128 *188) 하드커버, 208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철조망(鐵條網)
새카만 빛갈이 부윰한 빛을 받아 몇 번인 가 상하로 흔들거렸다. 그 흔들림을 인기 척이 따랐다. 인기척이 끝나고 일순 무엇 인가 요란한 소음이 정지됐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쪽 모퉁이가 환히 열리면서 강렬한 후랏슈의 사광(射光)이 쏵 날아왔다. 그 강 렬한 사광 안쪽으로 검은 그림자가 둘 나 타났다. 민수(敏洙)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 츠렸다. 어느새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굴욕 이었다. 민수는 또 개구리를 생각한다. 놈들이 내두르는 강렬한 후랏슈의 사광을 뒤집어 써야 할 때마다 민수는 어처구니없게도 레
이다망을 생각하고 도마대 위에 가 볼품없 이 쭈구리고 앉은 개구리의 굴욕을 감내해 야 하는 것이다. “개새끼, 여전하군!” 도무지 이건 악마의 음성이었다. 죽음의 화신처럼 그림자들은 이렇게 시커멓게 나 타나서는 서늘하도록 괴성을 토하군 한다. “개새끼!” 놈들은 한 번 더 내뱉듯 던지고는 이어 들어온 구멍으로 되돌아 나갔다. 놈들이 돌아간 뒷굼치로 어둠이 확 몰켜왔다. 한숨이 푹 나왔다. 그러자 약간은 곪았 던 종기가 터지는 기분이 되면서 텅 빈 듯 한 해이감과 함께 민수는 그대로 눕고 싶 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치도 않은 수작이었다. 꼼짝달삭할 수도 없게 그는 결박당해 있는 것이다. 깊은 체념이 요량해 볼 수도 없는 피곤을 동반하고 피부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이어 그 희뿌윰한 체념은 다시 몸속 깊숙히서부 터 솜처럼 피어오르면서 또 한 번 그의 온 몸을 재처럼 사그라들게 하는 것이었다. 결박이라는 어감 탓인지 몰랐다. 그러나 좀 주책없는 수작이지만 희뿌연 체념이 온 몸에 찬찬히 배어들자 민수는 다소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허공을 향 해 눈을 들었다. 어둡다. 새삼스럽게 어둡다는 느낌이었 다. 축축한 토방, 끈적한 공기, 만지면 묻
어날 것 같은 새카만 빛갈, 절망이 이런 것, 칠흑 같은 어둠이 절망… 순간 민수는 어떤 절박한 사념에 짓눌리 면서 후두두 몸을 떨었다. 지하실, 여기가 바루 놈들의 비밀 지하실 이고, 자기는 지금 여기에 감금당해 있다 는 무서운 자각은 어쩔 수 없이 민수를 불 안과 공포에 떨게 하면서 어떻게 수습해 볼 수도 없는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었다. 그리고 막연한 것 같으면서 실은 후 벼내듯 또렷한 괴로움이 아프게 의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괴로움. 민수는 괴롭다. 미칠 듯이 괴롭 다. 떨쳐버릴 수 없는 이 무서운 불안과 초 초와, 도무지 어떻다고 형용할 수조차 없
는 극심한 허탈이 조금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미치게 괴롭힌다. 괴로움과 감당해 낼 수 없이 중압해 오는 강박관념과 새카 만 빛 어두움, 그리고 결국은 가 닿고야 마 는 죽음, 아, 죽는다. 죽는 것이다. 새카만 어둠, 어둠이 내린다. 진득한 엿가락처럼 죽죽 이어져서는 자꾸 내려 뻗는다. 밑에 는 골탄이다. 엿가락이 내린다. 지글지글 골탄이 끓는다. 개구리! 골탄이 자꾸 끓어 오른다. 개구리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골 탄 속에 빠져 바둥댄다. 뛰어오른다. 새카 만 허공을 무작정 뛰어오른다. 팔둑만 하 게 굵은 엿가락이 개구리를 사정없이 내리 친다. 개구리가 발악한다. 자꾸 뛰어오른 다. 드디어 기진맥진한다. 뒷다리가 파르
르 떤다. 잠간 사이를 두었다가 파들파들 떨던 뒷다리가 그대로 힘없이 쭉 뻗어버 린다. 죽음, ‘으왓 핫하하하…’ 홍소, 와그 르르 쏟아져 나오는 홍소, ‘으흐… 흠… 으 흐…’ 순간 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괴상한 신음을 토했다. 그와 동시에 쿵 적괴(積塊) 가 내려앉는 붕괴감을 느끼면서 또다시 그 는 가늠해 볼 수도 없는 허탈에 빠져버렸 다. 차라리 그것은 갈기갈기 찢어내는 괴 로움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득한 무 엇, 꺼룩한 액체가 가득 차서 흐느적흐느 적하는 모습, 그렇게 막연한 실신 상태가 얼마쯤 지난 뒤였다. 무엇인가 우쭐해지는 긴장과 함께 세찬 강타(强打)를 느끼면서 빠끔히 열린 의식이 처음 본 것은 또 죽음.
그리고 자조가 있었다. 좀 전까지! 기껏해야 하루밤 하루낮, 주 책없이도 민수는 커다란 자부심 때문에 숨 이 가빴었다. 책임자라는 자부심, 적색 캠 프를 전복시키고 철망 안에서나마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나선 결사대 의 책임자라는 자부심이 어떤 스릴까지를 느끼게 하면서 한껏 흥분에 떨게 하는 것 이다. 그리고 무엇엔가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려는 못난 갈망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것을 그는 구태어 떨쳐버리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삶을 버린다. 그러 나 우리가 흘린 피의 자국은 영원히 남아 마르지 않으리. 성실한 인간의 가슴속에 이름 없는, 그러나 참된 인간의 기록으로
새겨 길이 남으리.’ 그러나 그것 역시 도장된 하나의 자만심 일 뿐, 뭐 누구를 위한다는 그 인류의 숭고 (?)한 사상은 애초에 없었다. 밤이었다. 우중충하게 늘어선 감시대와 전초선의 전류 장애물처럼 얼기설기 가설 된 철조망이 무엇인가 기분 나쁜 예감을 자아내며 어설프게 드러나 있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의 감시병들이 진 한 덩어리로 오뚝오뚝 서 있는 모습이 보 이는 외에는 소금기 섞인 쌀쌀한 섬 바람 이 한층 삭막한 기분을 돋구는 새카만 밤 뿐이 있었다. 가끔 바람이 끊기면서 차디찬 정적이 흘 러갔다. 정적이 지나가면 다시 새카만 어
둠이 좍 깔려 왔다. 그런 밤을 어처구니없게도 비장한 흥분 에 싸여서 민수는 걷고 있었다. 어느 콘세트 모퉁이에 이르자 그는 잽사 게 라이터를 켜서 시간을 본다. 二시 一○ 분 전, 그림자는 다시 새카만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빨려 들어간다. 여단부 콘세트까지 다다른 민수는 무엇 때문인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이 섬뜨륵 했 다.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이었다. 여단부 뒤, 쏘푸라이 천막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그는 우선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아무 기척도 없다. 여단부를 담당한 결사 대원이 보이지 않는다. 여단부에는 五명의 대원이 배치되어 있
었다. 여단부란 표면적으로는 최고 행정단 위이지만 놈들의 조직체 내에서는 하나의 우상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인원도 적게 배치했었다. 민수는 또 한 번 주위를 살폈다. “기영이?” 대답이 없다. 기영이란 가장 나이가 어 리대서 막난이로 불리는 동지로서 연락 책 임을 맡았었다. 어찌된 셈판일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각 二시. 민수는 동북쪽 모퉁이 콘세트 를 바라봤다. 신호가 없다. 민수는 또 한 번 비수를 맞은 사람처럼 섬뜩한 기분이었다. 초조했다. 二시 二분. 신호가 없다. 안타
까웠다. 동북쪽 모퉁이 콘세트 위에서 라이터 불 빛이 세 번 깜박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러면 날쎈 청년만으로 구성된 삼십 명의 돌격대원은 놈들의 비밀 당본부를 포위할 것이었다. 뒤이어 민수 자기는 초비상을 선포해야 한다. 그때는 이미 놈들의 초병은 결사대원들 에 의해 처치된 뒤일 것이고 요소마다 결 사대원들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날이 밝 으면 이미 딴 세상이 될 것이다. 괴뢰기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태극기가 날릴 것이다. 철조망을 뚫고 나가 거×도를 해방시킨 다는 놈들의 수작이 진짜 쓸개 빠진 수작
임이 증명될 것이고, 그날 작전 계획을 위 해 오늘 요목마다 콘세트 위에 온 종일을 뻗대고 서서 지나가는 유엔군의 병력, 기 동력, 자비 등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 놈 들의 감사병의 수작이 마냥 웃음거리밖에 안 됨이 드러날 것이다. 놈들의 전 세기적 인 살인은 이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자유 속에 안도의 숨을 누릴 것 이다. 그리고 나는 자유의 영웅으로 한껏 추대되리라. 아하, 참 맹랑한 수작이다. 민수는 또 한 번 동북쪽 모퉁이 콘세트를 바라봤다. 역시 신호가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루 전에, 놈들에게서 훔쳐온 사다리를 처마 밑에 숨겨놓고 시커먼 어둠만이 도사
리고 앉은 콘세트 밑에서, 그러나 하얗게 웃던 남규를 민수는 분명히 보았었다. 그 때 그는 무엇인가 화끈하게 몸이 달아오르 며, 왜인지 애처롭다는 생각과 눈물이 나 오도록 감사한다는 생각을 함께 품었었다. 그런데 왜 콘세트 위에서는 신호가 없는 가. 민수는 언뜻 二○호 막사를 생각했다. 남들이 다 잠든 이 밤을, 노교수 박창설 선 생은 젊은이들의 성공을 빌며 잠 못 이루 리라. 어디선가 바삭 소리가 난다. 싸늘한 밤 바람이 콘세트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종이 쪼각을 날리는 소리다. 민수는 다시 주위를 살펴봤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봤다. “기영이?” 여전히 대답이 없다. 순간 민수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히면서 신경이 쭈볏하고 곤 두섬을 의식했다. 획하고 날아든 불안 같 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념을 그때와 마찬가 지로 떨쳐버렸다. 마지막으로 기영이를 만났을 때 이게 거 사까지는 마지막 상면이라는, 좀 쎈치해지 려는 자신을 나무라면서 민수는 뜨겁게 기 영이의 손을 꼭 잡고 웃어주었다. 그런데 기영이가 외면을 했다. 도시 지나치리만큼 쾌활하던 기영이다. 그랬었는데… 그러나 뭐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신
호법과 마지막 임무를 부여하고는 이어 자 리를 떴던 것이다. 너무 긴장해서 그럴 테 지… 아직 철이 없어서… 몇 시간 후면 거 사해야 할 것이기에 그런데까지 신경을 쏟 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대서가 아니라, 별 근거도 없이 자기 부하를 의심한다는 것은 책임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자책이 더 앞섰 었다. 그러면… 그러면 도대체 어찌 됐단 말이냐. 순구 놈이… 아니면 그 수상한 그 림자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민수는 다시 남규를 생각했다. 어찌 됐 을까. 二시 七분… 아, 그때였다. 라이터 불빛 이 한번 깜박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 번 째까지 깜박이던 불빛은 중도에서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다시 불빛은 깜박이지 않 고 만다. 민수는 고만 하늘이라도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토하면서 머리를 감쌌다. 이제 모 든 것은 확연하게 가려진 것 같았다. 끝장 이라는 생각이었다. 얼마를 지났다. 민수는 감쌌던 머리를 들어 후닥닥 일어났다. 그리고 놈들의 비 밀 당본부께로 달려갔다. 무작정 달려갔 다. 무작정 달려다가 생각하니 자기는 그 곳에 배치된 대원들을 직접 지휘하려는 거 라고 판단이 내려졌다. 민수가 놈들의 비밀 당본부까지 거의 이 르렀을 때였다. 무슨 요란한 웃음소리에 그는 멈칫 섰다. 대여섯이나 됨직한 놈들
이 요란하게 웃으며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 다. “동무, 하하하 미안하이, 하하하…” 민수는 정신이 없었다. 꼭 무슨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동무 하하하, 용감한 결사대원들은 고 만 다 귀순했단 말야, 하하하… 어때? 이제 동무두 귀순해 보지, 핫하하하…” 민수는 묵중한 쇠망치로 얻어맞은 사람 처럼 머리가 띵 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마 지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귀순이 비위에 거슬린다면 체포라 해두 지. 콩나물 솎아내듯 쏘옥쏘옥, 핫하하… 벌써 전에 핫, 핫, 핫… 병졸 잃은 장수 신 세라 그 놀아나는 꼬락사니라니… 꼭 불을
뒤집어쓴 쥐새끼 뛰어 돌아가듯 하는군, 핫하하, 미안하이, 핫하하하… 으왓… 핫 하하하…” 그 요란한 홍소가 두 어깨를 무지하게 내 려친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와드득 떨 려나는 무서운 전률을 전신에 느끼면서 그 때 우쭐해지는 긴장과 함께 빠끔히 열린 의식이 처음으로 본 것은 죽음! 죽음이었 다. 또 그 죽음과 함께였다. 그는 그 죽음 과 함께 어떤 가능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새카만 어둠이 들어찬 막사 안에서 바람에 문이 삐걱 열리며 일순 하얗게 벌어지는 틈새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민수는 단도를 빼 들었다. 그러나, 다음 찰나, 그는 그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게 아니라 놈들에게 비호같이 달려들어 마 구 놈들의 가슴을 푹푹 찌르고 있었다. 그 리고 또 얼마가 지났는지 몰랐다. 그가 의 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놈들의 비밀 지하 실에 와 있었고, 그리고 움치고 펼 수도 없 이 결박당한 채 무서운 환각과 악몽이 수 없이 교차하는 속에서 하루낮 하룻밤을 보 냈던 것이다. 유동하는 실내의 공기를 따라 촛불이 흐 느적흐느적했다. 촛불이 흐느적거릴 때마 다 이상한 음영이 어른거리면서 바로 맞은 편 의자에 버티고 앉은 살갗이 검은 사나 이가 얼굴을 흉하게 찌그러뜨리곤 했다. 살갗이 검은 사나이 옆으로는 선병질의
조그마한 사내가 살빛이 검은 사나이와 묘 하게도 대조를 이루면서, 그러나 그것이 도무지 어색하지가 않는, 그런 자세로 옹 송그리고 앉았고, 이 두 사내를 중심하고 좌우로 우락부락한 장정 대여섯이 몽둥이 를 들고 잔뜩 성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토방에는 울퉁불퉁한 자리마다 아직 검붉은 피가 고여 있고, 필시 그 피의 임자가 분명한 시커먼 덩어리가 한쪽 구석 지에 아무렇게나 쳐박혀서 누더기 같은 것 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물건 둘레로 는 금방 사용한 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부 러진 몽둥이며 쇠꼬치며, 장두칼 따위들이 여기저기 질서 없이 널려 있었다. 이런 주위의 음산한 분위기와 함께 검은
사나이의 얼굴이 꼭 유령같이만 보인다. 민수가 이곳에 끌려와 이 유령같은 사나 이 앞에 꿀어앉은 것은 아마 그가 놈들의 지하실에 끌려오고 이틀짼가 되는 날이었 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령 같은 사나이 앞 에 볼품없이 꿀어앉은 민수는 자꾸만 후들 거려서는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감당해 내 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뭐 새삼스럽게 살기 돋친 놈들의 눈초리가 무섭다든가 또 새삼스럽게 무슨 절망이나 암흑을 정시하 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질식할 것 감은 새 카만 빛갈의 중압을 혼자서 지키며 무서운 악몽과 환각에 몸부림쳐야 했던 고통보다 는 비록 모진 고문 속에 죽어갈망정 불빛 과 입김이 있는 이쪽이 훨씬 낫다는 생각
이기조차 했었는데, 그런데 육체는 청승스 레 자꾸만 떨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제는 무엇이 무서운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은 사실이다. 무섭다는 건 살아 있는 의식이 대상을 느낄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얘기인 것이다. 이들, 검은 사나이와 조그마한 덩치의 선병질과 둘러선 장정이 지금 나의 대상인가… 그럴 수가 없다. 단 지 물건일 뿐이다. 차라리 물건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옳은 것이다. 이 건 자학도 아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무(無)다. 무(無)! 무(無) 속에 공 포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이놈의 육체는… 도대체 이놈의 육체는 어찌 됐단 말이냐. 그러기를 바란
것은 단지 나의 의지뿐이었단 말인가. 이 제 나의 육체에는 무슨 이상(異狀)이라도 생기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이 우쭐우쭐 나타나서는 부르르 몸을 떨게 하는 주위의 검은 촉수들, 검붉은 피의 시각과 후각을 마비시키는 고약한 냄새와 널린 쇠꼬치의 날카로운 고통이, 그리고 사나이의 낯짝에 어리는 그 흉측한 음영 탓인가. 민수는 목이 탔다. 바작바작 타들어 가 는 목구멍에 불이 일 것 같다. 기갈과 우심 한 고역 끝에 오는 징조일 것이다. 민수는 이제까지, 참 지금의 민수에게 있 어서는 맹랑하기 짝이 없는 강요를 당하면 서 세 차례나 주리를 틀렸다. 그리고 그사 이 물 한 방울 입에 대보지 못한 것이다. 이
리하여 그가 심한 갈증을 느끼며 얼굴을 들었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얼굴에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곤과 애원의 빛 이 애처롭도록 서려 있었다. “왜? 핫하 무섭지? 자식 그러니 대란 말 야.” 오만한 사나이의 말소리가 찡 하고 민수 의 머리를 친다. 민수의 고개가 아래로 힘 없이 떨어진다. 순간 민수는 부글부글 끓 어오르는 오물을 느낀다. 메식메식하도록 구역이 목구멍을 넘어온다. 지금 놈들은 자기들이 미처 잡지 못한 나 머지 이름들을 불어대라는 것이다. 악랄한 고문과 감언이설로서 위협하고 달래곤 하 는 것이다. 이 속에서 나는 그 내가 불러댈
수 있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놓고 고놈들과 요리조리 타협을 해보고 고놈들 에게서 야릇한 향수마저를 느껴보다가 결 국은 이 지쳐빠진 육체로서 대치하고 마는 것이다. 혹독한 고문과 바꿔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지나친 해석은 안 붙 이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 가 상기할 수 있는 언어 중에서 동지란 낱 말은 없기 때문이다.
동지− 시큰둥한 수작이다. 도리어 지금
나는 그놈에게서 구역조차 느끼고 있는 것 이다. 하면, 정도는 여하튼 고놈 때문에 내 가 당하고 있는 육체의 고통이란 맹랑한 것이 된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잔뜩 입을
봉한 채 그로 하여 보다 더 모진 고문을 겪 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고 선병질의 조그마한 덩치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고놈의 병적인 선 때문이다. 가상이가 발가족족하게 물든 그 간기가 내 배인 눈초리 때문이다. “아무래도 자네는 쿠데타의 두목으론 좀 곱게 생겼다는 인상야, 훗훗, 어때?” 이놈의 얄팍한 입술 때문이다. 야금야금 고양이가 양양대듯 하는 고 주둥이 때문인 것이다. 요놈 때문에 민수는, 지금은 상관 없는 동지들의 이름이지만 불러댈 수가 없 는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양 울거리는 고 얄팍한 선 때문이다. “왜? 보긴, 훗훗, 몹씨 불만인 모양이
군… 그렇지만 친구, 들어봐, 난 도무지 자 네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뭐 파리 한 지성인은 자기학대를 즐긴다구? 그런 뜻에서나 자네들의 행동은 이해될지, 이건 꼭 화약을 지구 불을 찾아드는 꼴이거든. 자네들이 그 역사의 필연성을 거역하겠다 는 건가, 핫핫핫, 오늘 또 하나의 영웅이 여 기 나타났군… 이봐 친구 힘줄이 꿈틀거리 는 ××의 팔둑을 고 파리한 자네의 손목 으로, 아예 글렀어 글렀어, 훗훗훗…” 요놈은 아마 갈빗대가 아니라 낫자루의 모조물이 영낙없을 것이다. “어째 말이 없어? 하아 자네야말로 그 고 귀한 동지들의 이름을 불러댈 순 없겠지. 그러나 거 뭐 딴 얘기라도 좀 해야 할 것 아
니겠어. 자유의 영웅이 되려다 고만 중도 에서 고만둔 그 비장한 소감 같은 거 말일 세, 아마 기맥히겠지, 훗훗… 도대체 자네 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민수는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목적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나? 메시꺼운 구역 외에 무엇을 남겼나…? 단 지 지금은 고통과 고문이 있다. “이 새끼가 끝끝내 입을 안 벌리는구나. 침묵으루 대항하겠다는 수작이지, 좋다. 네가 안 대도 결국은 알고 만다. 끝끝내 반 동의 새끼. 난 내 애비가 백장(白丁)이댔 다. 그래 난 백장의 새끼다. 네놈들만 보면 눈에서 불이 난다. 깎아 먹구 싶다. 이 새끼 가 거만스레 잔뜩 입을 봉하구서…”
서슬이 딩딩한 사나이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무지한 구둣발이 날아왔다. 골 이 찡했다. 귀가 윙윙 운다. 눈앞이 아뜩해 진다.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독이 맺힌 파란 눈초리에 불을 토하면서 야웅야 웅 한다. 잔뜩 겁에 지질린 쥐새끼가 그 앞 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전전긍긍한다. 이 광경을 퀭한 표정 없는 썩은 동공들이 송 장처럼 축 늘어져서는 마치 남의 일 보듯 한다. 민수는 갑자기 속이 매캐해 옴을 느꼈 다. 손끝이 짜릿해지며 파르르 떨고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무지하게 짓누르는 중압 을 털어버리듯 악을 썼다.
“차라리 어서 죽여버려라. 어서 죽여버 려. 이놈들아 어서 죽여버리란 말이다.” 민수는 몸부림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극심한 피로 때문에 더 몸부림칠 수 도 없었다. 밑으로 잦아드는 듯한 피로를 겨우 감당해 내며 이윽고 든 그의 얼굴에 는 글썽하게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왜 이래야만 되는가. 참으로 왜 이래야 만 하는 건지 민수는 알 수가 없다. 정말 민 수는 이러구 싶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다. 이건 무슨 ‘이즘’의 대립도 아니었다. 앙심 이었다. 피 묻은 앙심이었다. 비단 ××캠 프만이 아니었다. 온 섬 안의 좌익 캠프는 모두가 하나같이 설렁댔다. 걸풋하면 반동이었다. 반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가지로 사람들은 이유도 없 이 죽어갔던 것이다. 도무지 할 일 없는 족 속으로만 비치는 외부의 눈으로는 상상조 차 못하리라. 반동의 피는 물감 재료로서는 최고급이 다. 붉은 색이니까 말이다. 만들어진 프라 카드는 인간이 메고 다닌다. 인간의 피는 인간이 메야 제격일 테니 말이다. 그리하 여 인간은 굉장한 영웅, ××영웅의 칭호 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때 소위 정치 교양 은 영웅 제작 공장으로 위세가 당당해진 다. 그뿐이 아니다. 군중대회, 궐기대회, 그리고 독보회 그리고 또 당회 말이다. 얼 마든지 있다. 판에 박은 듯이 날마다 계속 되는 이 회 회 회… 회의족속들, 그리고 그
퀭하게 동공들이 썩어 물러나서 해골 같은 몰골들. 우굴우굴 끓는 지옥의 기억들이 파노라 마처럼 픽픽 눈앞을 스쳐 간다. 고 가늘고 하얀 사내. 무엇보다 먼저 떠 오르는 게 고 곱살하게만 생겨서 오히려 계집 같은 솜털이 보수수 난 하얀 사내에 대한 영상이다. 그 하얀 사내는 인중에 까 만 기미가 있어, 기미에 난 뽀얀 솜털이 발 작하듯 몸을 훔칠할 때마다 파르르 떨어나 던 모습이 왜인지 생생하게 부조되어 떠오 르는 것이다. 놈들이 캠프 내의 세력을 장악하며부터 놈들의 세력을 부식하기 위한 수단이 갖은
테로와 잔학한 살륙을 자행하던 무렵이었 다. 정치 교양 시간이었다. 언제나 저녁 식 사 전 4시부터 5시까지는 정치 교양 시간 으로 돼 있었다. ‘우리들의 영명한 영도자…’ 이렇게 허두 를 뗀 교양 강사는 ‘강철 같은 인민군’이니 ‘쏘비에트 사회주의 시월혁명’을 마구 씨 부려 대다가 언제나 ‘간악한 미제국주의자 들’로 그 지루한 교양은 다 끝나기 마련이 었다. 융통성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놈이 었다. 언제나 그 모양이었다. 겨우 덧붙여 댄다는 수작이 뭐 그것도 이제는 하두 여 러 번 지껄여 놔서 단물이 빠진 얘기지만 모범 전사 얘기다.
모범 전사 얘기란 이렇다. 노을이 비끼는 저녁이었다 한다. 저녁을 끝낸 포로들이 철조망에가 나붙어 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야비한 수작이나 지 껄여 대며 괜스리 즐겁지도 않은데 시시덕 거리고 자자하게 웃어대고 할 무렵이었다 한다. 또 한편 그 청승스럽게 다감한 친구들은 공연히 눈물이 글성해서 아늑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먼 마을 초가나 하늘가에 시 선을 던진 채 서글퍼서 서글퍼서 찔끔대던 무렵이었다 한다. 모범 전사도 이들 새에 끼어서 멍하니 밖 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앞으로 새카만 깜둥이와 소위 요란하게 차려입은
양공주님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야, 이 베락 맞아 뒈질 계집년아, 멋을 못해 똥갈보 짓을 해. 저 새카만 부르도꾸 한테 그래 그걸 쩍쩍 벌려, 앳, 툇퇴, 하하 하…” 차라리 시비도 못될 이따위 값싼 수작으 로 스스로의 어느 아쉬운 욕정을 애무하던 모범 전사는 깜둥이 겨드랑이 밑에가 거마 리처럼 달라붙어 간다기보다 차라리 대룽 대룽 매달려 가듯 하는 그 양공주님의 뒷 모습에서 점점 굳어가는 자신의 시선을 느 껴야 했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동란 때 헤어지고는 영 소식을 모르던 자기 아내더 라나. 그때부터 그 청년은 모범 전사가 됐다는
것이다. 반동을 열둘이나 잡았다는 것이 다. 교양 강사는 열을 뿜었다. “동무들, 우리들의 아내, 우리들의 누나 동생들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무참히도 유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무들…” 좀 모자라고 우둔한 놈은 한참 열이 오 르고 흥분이 최고조에 달하면 고만 자기의 처지를 망각하고 웃음뽀를 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동무들 철통같은 우리 인민군은 최후까지 조국을 사수합니다. 죽으믄 죽었 지 절대루 포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 고도 얼마가 지나서야 자기의 언동에서 모 순을 자각하고는 엉뚱스럽게 반동이니 회 색분자니 하며 시뻘건 두 눈알을 굴리는
것이었다. 이런 교양 강사 밑에서 백을 헤아리는 얼 굴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멍청한 눈 들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 눈 들이 아니라 그저 마지못해 떠 있는 그런 눈들이었다. 퀭하게 동공이 썩어 물러나서 해골 같은 몰골들, 민수에게는 이런 표정 없는 숱한 몰골들이 흡사 시체만 같아 소 름이 끼치는 것이다. 그래 인간이 이런 것 이냐, 요 앙큼하게 뽀얀 안개의상으로 살 덩이를 감싸고는 아웅하는 위선자들아, 그 래 신의 아들이라는 인간이 겨우 이따위 냐. 그들에게는 생리적인 갈구, 좀 더 정확하 게 말해서 밥이라는 것, 그들의 머리속에
는 그러한 분(糞)의 원료를 목이 타게 찾는 욕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건 인간 이하의 대웁니다. 동무들, 우 리는 배가 고픕니다. 놈들의 잔인무도한 소행을 우리는 인민의 이름으로 폭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협정인가에는 그렇게 돼 있 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어디 개 나 짖느냐, 다. 그럴 것이 취사부 뒤 개구멍 으로는 쌀가마니가 쇠고기가 돼 들어오는 걸 그들은 봤기 때문이다. 놈들이 밤마다 야식하는 것을 그들은 봤던 것이다. 집에 서는 구경도 못하던 영양이 그렇게나 많다 는 그 갖가지 통조림들이 빵끼나 물감으로 바뀌어 들어오고, 담뇨와 사지쯔봉이 광목
통으로 변해 들어오는 걸 그들은 봤다. 그 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된다는 것, 그뿐 이 아니다. 신묘한 개구멍으로는 별별 게 다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기한 것 이 여자라는 물건이다. 불 안 땐 굴뚝에 연 기 날까, 그래 그렇게 물건들이 들어와서 는 며칠씩 놈들의 암컷 노릇을 해주고 나 간다는 것이다. 놈들의 정치 교양이란 게 별것이 못된 다.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이 지겹다. 아무런 의욕도 없는 것이다. 애당초 그들은 포로 라는 이름조차 잘 몰랐다. 또 포로가 될 그 런 끔찍한 죄를 자기들이 저질렀는지 어쩐 지조차 모른다. 그저 끌려 나왔고 그리고 는 포로가 됐다. 살겠다고 그 고난의 길을
나섰다가 이국인에게 무조건 붙잡혔다. 소 위 피난민이라는 사람들, 처음 그들은 자 기들의 경우는 애매하다고 분해했다. 좀 슬프긴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없 다. 슬프지도 분하지도 않다. 그저 지겹고 권태롭고 그리고는 밥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내는 좀 달랐다. 유난히 얼 굴이 곱살하게 생겼다든가, 인중에 녹두 알만 하게 난 까만 기미가 하얀 바탕이어 서 더 인상적이었대서가 아니었다. 7막사 에서 4막사로 이동 온 지 불과 이삼 일밖 에 안 되는 민수에게도 대번에 알 수 있었 다. 그만치 그 사내는 여느 사람들과 같이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다구 별나게 생기가 돈다는 얘기도 아니다. 언뜻 보기에 그 사
내는 여간 조용하지가 않았다. 눈마저 절 반 내리감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극히 무표정해 뵈는 그 사 내의 얼굴에 픽픽 스쳐 가는 초조의 그늘 이라든가, 웬만한 소리에도 이상하리만치 훔칠훔칠 놀라곤 하는 것이라든가, 그때마 다 고 까만 기미에 난 뽀얀 솜털이 파르르 떨어나는 모양이라든가, 겉으로 내쉬는 게 아니고 속으로 들이쉬는 그 찾아드는 깊은 한숨이라든가가 그저 심상치가 않다기보 다 보는 사람마저 호흡을 가쁘게 하는 것 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여느 사람에게까지도 느껴지리만큼 외향적인 것이 아니고 어디 까지나 내향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
나 드러나는 것이 아닌 반면 뼈속까지 스 며드는 심각한 데가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뒤따르는 어떤 불안 때문에 긴장돼 있던 탓도 있고 인원 조정이란 표 면적인 이유야 있었다지만 하필 남규는 남 겨두고 자기만을 4막사로 따로 떼놓은 놈 들의 처사에 신경이 예민해 있은 탓도 있 기는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이었다. 그 사내가 들 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 사내 는 나타나지 않았다. 막사 안에는 별별 추측이 다 돌았다. 필 시 죽었을 거라는 것이다. 또 어떤 측은 철 조망을 넘어 탈출했을 거라는 것이다. 물 론 이런 얘기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추측이
그러했을 따름이고 또 입 밖에 내설한 얘 기도 아니다. 게다가 인원 파악의 직접 책 임자인 책임자 동무의 침묵은 그런 의심을 부쩍 돋구었다. 그날 점심때였다. 바닷가에까지 나가 용 변을 버리고 온 어느 친구가 한 말이었다. 물론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귀뜸으로 한 소리였는데, 그것이 하나둘을 건느는 사이 막사 내에는 그 친구의 말이 쫙 퍼졌 다. 그 사내의 대가리가 ‘허니 바께쯔’ 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있었다는 것 이다. 본래 그 용변 통은 비밀관원이 메게 끔 지목이 돼 있었는데 고만 감독의 불찰 로 말미암아 그 친구가 그 용변 통을 멨더
라는 것이다. 그 감독병의 낭패한 얼굴로 도 그것은 틀림없었다는 것이다. 또 그날 저녁이었다. 제8막사에서 웬 청 년이 자결을 했다. 막사 내는 보다 더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 하얀 사내와 간밤에 자결한 사내는 필 시 같은 패일 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내가 고만 잡혀가 그 지경이 되자 그 청 년은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입 밖에 낸 소린 아니고 각자 의 추측이 그러했을 따름이다. 또 어디서 굴러 들어온 소식인지 몰랐다. 그 청년은 삼 년 동안이나 ‘아오지’ 탄광에서 고생을 했고, 그사이 쭉 은신했다가 9·28 수복 당 시 치안대장을 지냈다는 것이다. 그 기미
가 까맣게 곱살한 사내도 그때 다소 동조 를 했는데, 본시 그 마을 부농의 망내로 태 어났던 그 사내는 몸이 그렇게 가냘프듯이 마음까지도 너무도 가냘프고 고왔다는 것 이다. 그러나 부농의 핏줄이라는 사실 하나만 으로도 반동은 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한 마을에 살던 빨갱이가 밀고 함으로써 요사이에 와서야 드러났다는 것 이다. 그런 소문이 어느 정도로 신빙성이 있는 지는 직접 목격한 바가 아니니 알 수는 없 다고 넘겨버리자. 그런데 치안대장이라면 민수에게도 집히는 게 있다. 9·28때 민수도 치안대장을 지낸 일이
있다. 요행 그 청년처럼 ‘아오지’ 맛은 못 봤지만 꼬박 四년이라는 세월을 숨어 살아 왔다. 소극적이요 미온적인 그의 회의적인 성 격이 필요하면 피마저 불사하는 소위 놈들 의 혁명성에 부합될 수 없었던 게 탈이었 다. 소시민 근성, 인텔리 근성, 그것이 좀 더 발전하면 회색분자로 되고 심하면 반동이 라는 그 어마어마한 렛델. 하마터면 민수도 그 청년처럼 그렇게 산 속에 묻혀 한 개의 산인(山人)으로서 아니 면 어느 컴컴한 지하실 속에서 혹은 어느 숨 막히는 지붕 밑에서 못내 죽어갔을지 몰랐다. 6·25만 없었던들 말이다.
실로 그건 난장판이었다. 사람들은 시뻘 겋게 눈알을 홉뜨고 돌아가는 미친개였다. 질서와 계통을 벗어난 인간 속성이란 어쩌 믄 개새끼만 못했다. 어제까지 요조숙녀이던 그 여인이 오늘 아침은 자식과 지애비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그 허허한 폐허 위에 오두만히 엎디어 목 놓아 울면, 어느 낯선 총검이 가랭이를 들치고 오줌을 싸 고… 그 숱하게 많은 인간의 고귀한 언어 들로 장식된 전쟁이란 결국은 이런 것이었 다. 짓눌려 오히려 조용하게만 살아온 민 수에게 그여히 불을 질러놓고 만 것이 이 러한 전쟁이란 용어의 속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아무렇
게 배설해 버리기에는 아직도 그에게 분별 이 남아 있다. 타다 남은 옛집, 십 년을 자기 집 머슴으 로 있었다는 그 영예로 하여 고스란히 땅 과 집을 이어받았던 순구 놈을 봉창에서 피투성이로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그놈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못했던 것도 모르건대 그 분별이라는 감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다. 그 순구 놈을 만 났다. 그놈이 포로가 됐을 줄은 꿈에도 몰 랐다. 게다가 그놈은 작업복이 아니라 인 민군 차림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놈들의 패거리였다. 처음 순구 놈을 변소께서 보았을 때 민수 는 무엇인가 가슴이 섬찍해서 이어 외면해
버렸었다. 그래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 다. 순구 놈도 마친가지였다. 처음은 퍽 당 황하는 눈치더니 이어 모른 척했다. 그렇 다고 그놈이 자기를 못 알아본 거라구 단 정할 수는 없었다. 틀림없이 그놈은 저만 치서 자기의 행적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놈은 통 볼 수가 없 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때부터 민수는 덮누르는 것 같은 불안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섬찍해서 돌아보면 웬 수상한 얼굴이 반드시 시야에 포착되곤 한 다. 이상한 일이었다. 민수가 눈길을 돌리 면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 수상한 눈길이 그의 시야에 와 닿는 것이다. 그리
고는 둘이 다 똑같이 외면해야 하는 것이 다. 신통히도 행동이 일치했다. 다만 그 수 상한 놈은 어디까지나 태연자약한 데 비해 이쪽은 지나치게 놀라야 한다는 것. 그리 고는 부리나케 막사로 달아나군 했다. 꼭 무슨 가위 들린 사람 같았다. 처음은 착각이거니 했다. 불안한 신경 때문이거니 했다. 물론 착각일 경우도 있 었다. 무슨 죽음 같은 강박관념에 훔칠 놀 라 몸을 돌리면, 차라리 거기에 끔찍한 죽 음 같은 형적도 없을 때, 그때 그 감당할 수 없는 허전함 속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는 것, 그것은 죽음 이상으로 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기도 했던 것이 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는 동안 그 수상한 얼 굴이 늘 같은 얼굴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수상한 얼굴이 바로 놈들의 감시원임을 쉽 게 알 수 있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게다가 별 이유도 없이 7막사에서 4막사로 이동됨 으로써 불안은 버쩍 더 했다. 이제 그 사내의 죽음이 도무지 심상치가 않다. 언제 자기에게도 뻗칠지 모르는 죽 음의 손길, 그놈은 소리 없이 다가와서는 뒷덜미를 움켜쥘 것이다. 그 밑에서 자기 는 꼼작도 못하고 반동이라는 구실하에 간 단히 처리될 것이다. 그 가련하도록 곱살 하기만 하던 사내, 까만 기미의 사내처럼 머리는 머리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갈갈이 찢기어서는 ‘허니 바께쯔’에가 들려 바닷
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질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내일이 계속될 것이다. 무서웠다. 민수는 이 속에서 단지 무서 웠을 뿐이다. 그리고 죽음을 느꼈을 뿐이 다. 이 이상 무엇이 있었던가. 그 소름이 돋 치는 공포와 떼쳐버릴 수 없는 불안과 덮 쳐누르는 것 같은 강박관념 외에 무엇이 있었던가, 애초에 우리에게 목적이 있었던 가, 또 그 알량한 목적이 있었다면 지금 그 따위가 뭐 말라비틀어진 것이냐. 그저 밑 으로 찾아드는 듯한 피로만이 지금의 나의 전부다. 그런데 이 맹랑한 작자들은 나에게 목적 을 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상관없
는, 그러니까 댈 아무런 이유가 없는 동지 들의 이름을 불러대라는 것이다. 민수는 머리를 들어 사나이를 올려다봤 다. 검으티티한 낯작에 개기름이 번지르르 내 배었다. 도무지 완만하게 움직이는 놈 의 동작에는 초조의 그늘이 없다. 떡 벌어 진 앞가슴과 까진 이맛배기에는 여유와 자 만이 꽉 내돋았다. 사나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좀 말을 해봐, 이 새끼야.” 그러자 민수는 갑자기 무엇인가 찌껄이 고 싶은 충격을 느꼈다. 놈의 낯작에 꽉 배 어 도는 자만과 여유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불안했다구 말할 수 있읍니다. 그뿐입
니다. 그리고 할 얘기가 있다면 단지 지금 은 피로해서 모두가 다 데데해 뵌다는 것 뿐입니다. 애초에 목적 같은 건 없었읍니 다. 그 밖의 얘기라면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읍니다.” “이 새끼가 뭐 여태 생각했다는 게 겨우 그거야.” 타바코를 말며 살갗이 검은 사나이가 별 루 아무렇지도 않다는 낯작이다. 그래두 담배는 피워야겠어서 양놈이 준 타바코는 물고 앉았다고 민수가 좀 뚱딴지 같은 생 각을 하는데, 조그마한 선병질이 무릎에 깍지를 끼고 의자에 비슷이 기대앉았다가 발딱 일어나며 야유쪼로 지껄였다. “이봐 친구, 그러나 그건 우리 탓이 아니
야. 불안한 건 우리가 아니구 자네들이었 으니 말야. 그건 너무 내용이 초라하네. 차 마 그 고귀한 이름들을 댈 수 없거든, 거 무 슨 비장한 소감 같은 걸 말씀해 보시란 건 데, 훗훗.” 민수는 순간 머리를 들었다. 사내가 교 활하게 웃고 있다. 민수는 살이 오르는 것을 느낀다. 온 신 경이 째릿하게 캥겨 왔다. 순간 덮쳐누르 는 오열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의 식했다. 욱하고 피가 솟구치며 방금이라도 달려들 듯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민수는 사내에게 대드는 대신 입을 열었 다. “그렇습니다. 이쪽은 불안했구 그쪽은
폭군처럼 오만했다구 말할 수 있읍니다. 날카로운 발톱을 곤두세우고 고양이 새끼 가 살금살금 따라옵니다. 공포와 초조에 질려서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쥐새 끼가 있읍니다. 우리들은 쥐새끼고 당신들 은 고양이 새낍니다. 하아, 참 말씀 잘 하셨 읍니다. 그러니까 생각납니다. 피, 피 때문 입니다. 화끈했읍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 릅니다. 그저 화끈했읍니다. 나는 뜨끈한 감촉을 느꼈읍니다. 내 두 손아귀에는 끈 적한 피가 가득 고여 있었읍니다.” “이치가 뭐 이젠 돈 거이 아냐.” 살갗이 검은 사나이가 눈을 크게 떴다. 덩치가 조그마한 사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둘러선
장정들은 허리를 꺾고 벽에가 기댄 채 지 루하다는 표정이다. 민수는 자꾸 씨부리고 있었다. *** 고 하얀 바탕에 까만 기미가 인상적이던 사내의 겹도록 불쌍한 모습이 자꾸만 삼삼 히 떠올라 민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 금 본 꿈 탓인지 몰랐다. 소복을 한 기미의 하얀 사내가 공회당 앞 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웬일인지 공회당 앞에 세워 있는 깃대에는 하얀 기가 매어 있고, 시들해진 마늘밭을 둘러친 수수깡 바자가 뙤약볕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신도 없이 버선발인 하얀 사내는 살그마 니 깃대 밑에가 꿀어앉는 것이었다. 그리 고는 미이라처럼 박은 듯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오정의 햇볕이 하얗게 내려쪼이고 있었 다. 인적도 없고, 호흡이 정지된 듯이 맑고 샛하얀 오정을 마을 저쪽 초가집 지붕에서 는 암탉이 한 마리 목을 길게 뽑고 해괴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 해괴한 울음소리 가 멎자,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바루 닭 이 울고 난 골목을, 필시 마을 사람들은 분
명한데 쇠통 기억이 없는 얼굴들이 우 − 밀려 나왔다. 그들은 수수깡 바자를 지나 공회당 앞으로 갔다. 미이라처럼 앉아 있 는 하얀 사내 앞에 이르자 그들은 누구나
없이 훔칠 놀라며 우쭐들 섰다. 맨 앞장섰 던 사람이 웨쳤다. “송장이다.” 그들은 고 만 얼굴이 흙빛이 되어 오던 길로 비실비 실 쫓겨 갔다. 누군가가 먼저 달아나기 시
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우− 겁에 질린 함성을 올리며 오던 골목으로 뺑소닐
쳤다. 그때 그들이 사라진 쪽과는 다른 이쪽 모 퉁이에 쭈구리고 앉아 눈앞의 광경을 히죽 히죽 바라보고 있던 뒷배 왈패 녀석이 웬 생각인지 불쑥 일어섰다. 왈패 녀석의 눈이 공회당 앞에서 번쩍 빛 난다. 녀석은 처음은 좀 망서리는 눈치더 니 이윽고 히물히물 웃으며 공회당 앞으 로 마치 장난치듯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꿀어앉은 하얀 사내를 꾹 찔렀 다. 순간 하얀 사내가 썩은 토막 넘어가듯 쓸 어졌다. 하얀 사내는 죽어 있었던 것이다. 고 가엾도록 하얀 사내가 갈기갈기 찢기 어 죽어가다니. 계집처럼 곱살하기만 하던 그 사내에게 무슨 죄가 있었던가. 세상에 태어난 죄? 원죄? 단지 그것이 원죄 때문이 라면 너무 인간이 허무하지 않은가, 억울 하지 않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건 고 하얀 사내가 아니고 그리고 그의 의지로 그가 이 세상에 삐져나온건 아니기에 말이다. “으흐흐… 흠.” 바루 옆자리의 김 선생이 가느다랗게 신 음을 토했다. 그사이 이질로 고생하던 김
선생도 아마 잠을 못 자나 보았다. 막사 안은 시커먼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 었다. 무슨 짐승의 신음소리 같은 불규칙 한 숨소리가 그래도 산 사람들이 잠자고 있다는 희한한 느낌을 줄 뿐 눅눅하고 찬 공기가 마냥 진한 어둠이었다. 함석 그대 로의 천정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밖 에는 늦가을의 바람비가 뿌리고 있었다. 이윽고 김 선생이 조용히 일어나 나간 다. 또 변소엘 가나 보았다. 왜정 때 일본 어디서 대학을 나왔고 해방 후는 평북 어 디서 청우당 당수를 지냈다는 김 선생은 모든 행동이 지극히 조용하면서도 어떤 범 할 수 없는 자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김 선생이 변소에서 돌아올 때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용변을 끝내고 김 선생이 콘세트 모퉁이 를 돌아 나오고 있는데 무슨 검은 그림자 가 나타나더니 다짜고짜로 뒤통수를 내리 치더라는 것이다. 순간 김 선생은 비명을 올렸으나 그놈은 별반 서두르지도 않고 유 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더라는 것이다. 자리에 누운 김 선생은 무척 고통이 심한 모양이었으나 오히려 기이하리만치 조용 했다. 막사내는 여전히 캄캄했다. 누구하 나 기척도 없었다. 오직 그 짐승의 신음소 리 같은 숨소리가 그래도 산 사람들이 자 고 있다는 희한한 느낌을 줄 뿐이었다. “민수군?” 이윽고 잦아드는 듯한 소리로 김 선생이
입을 열었다. 이어 김 소위 얘기를 했다. 바위 하나 없는 민숭민숭한 산이 꽤 높았 다 한다. 고지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일개 소대가량의 중공군이 밑을 향해 맹화 력을 퍼붓고 있었다 한다.
마바지의 콩 볶듯 하는 소리. 쾅− 수류
탄 터지는 소리. 이어 와르르 쏟아지는 흙 비. 그 밑에서 공격 중이던 국군 2중대 3소 대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대로 십 분만 더 계속되면 소대는 여지없이 전멸할 것이 다. 머리를 땅에 박은 채 3소대는 진퇴양난 이었다. 스륵스륵 근거리를 날으는 탄도는 아슬 아슬하도록 생명을 위협했다. 이 하사가 정수리를 얻어맞고 벌렁 자빠졌다. 박 일
등병이 가슴을 움켜쥐고 폭삭 주저앉았다. 일분대장 최 하사가 물큰 치솟는 흙더미와 함께 쑥 상반신을 드러내더니 머리만이 저 만치서 따로 디굴디굴 굴렀다. 마침내 대 원들의 심리는 부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겁보 조 하사란 놈이 한쪽 팔을 움 켜잡으며 부상을 가장하고 비실비실 물러 나기 시작했다. 3분대 부분대장 놈이 소대 장의 눈치를 살폈다. 대원들은 여지없이 분산 직전의 그 혼란에 빠져 있었다. 김 소 위는 권총을 빼들었다. “비겁한 놈은 쏜다—” 이런 경우 후퇴는 전멸을 의미한다는 걸 그는 그의 오랜 전투 경험으로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평안도 출신인 김
소위의 이름난 결패로도 이미 저락된 대원 들의 사기는 건질 수가 없었다. 난처했다. 이대로 전멸할 것이다. 김 소위의 눈에서는 불이 번쩍했다. 그
는 벌떡 일어났다. 하늘을 향해 탕− 권총 을 갈겼다. “살래믄 전진하라!”
막사 내는 여전히 캄캄했다. 눅눅하고도 이상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천정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쏴아 바람이 콘세 트 지붕을 핥으며 지나갔다. 민수는 가슴이 뒤설랬다. 뻐근하게 호흡 이 가빠왔다. “민수군?” 조용했던 김 선생이 까므라드는 소리로
다시 민수를 부른다. 이어 민수는 더듬는 끈적한 감촉을 느꼈다. 손이었다. 민수는 김 선생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 그는 무엇인가 속이 화끈했다. 이윽고 김 선생의 손을 가만히 풀어놓은 민수의 손바 닥에는 뜨끈한 피가 고여 있었다. 피, 이튿 날 아침 김 선생은 써늘히 죽어 있었다. 김 선생의 죽음은 민수에게 보다 더 다급한 절박을 느끼게 했다.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이 제 마지막까지 쫓겨 왔다는 절박한 감정, 그리고 여기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그러 면 마지막이라는 아찔한 현기가 있었다. 여기서였다. 민수는 여기서 두 갈래의 가능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무엇을 가려
볼 여유도 없이 커다란 인력에라도 끌리듯 한 갈래의 가능을 향해 민수는 돌진해 갔 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 진정한 의지였는 지 그런 건 모른다. 단지 이것만은 분명하 다. 그때 심정으로 비겁할 수만은 없었다 는 것이다.
“피− 뭐 비겁할 수는 없었어?” 민수는 퍼뜩 머리를 들고 사나이를 올려
다봤다. 사나이가 교활한 웃음을 입언저리 로 흘리며 빈정대듯 내려다보고 있다. 사나이가 또 타바코를 꺼내 문다. 완만 하게 옮겨 가는 사나이의 몸짓에는, 그 몸 짓 구석구석이 자만과 조소가 꽉 묻어 다 닌다. 사나이가 타바코에 불을 당긴다. 이 어 훅 내뿜겨졌다고 여겨지는 순간 민수는
정신이 아찔함을 느꼈다. 담배 연기가 얼 굴을 확 덮씌우고 흩어진다. 어느새 또 민 수의 두 손끝이 파르르 떨고 있다. 온몸의 피가 팽팽하게 죄어든다. 그와 함께 그는 또 자신도 모르게 씨부리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는 정의 를 위하여 피를 바쳤다. 시시한 얘깁니다. 결국은 종이 한 장의 차이지요. 오히려 그 런 수작이 자기를 배반하는 수가 많습니 다. 저두 가끔 스스로− 본연의 자기를 벗
어날 때는 주책없이도 그 따위 망념에 빠 지군 합니다만… 바루 그날입니다. 뭐 큰 일을 한다구 참 볼품없이 흥분하고 있었으 니까요. 뭐 다 시시한 얘깁니다. 우리 솔직 합시다. 얘기하겠읍니다. 가만히 앉아서
개죽음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뿐입니다.” “하하하…, 뭐 개죽음을 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수작이다? 왓하 하하…, 개새끼!” 놈의 살 오른 수작이 끝났다구 의식되는 순간이었다. 눈앞이 번쩍하며 입에서 주루 루 피가 흘러내렸다. 귀가 왕왕했다. 아찔 했다. 팔과 머리와 어깨에 무지한 몰매가 그저 나려진다고 의식하며 그때 민수는 먼 데서 뽀얗게 몰아오는 우박을 생각하고 있 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엄벙덤벙 떨 어지는 핏방울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이제 본격적인 고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자 신을 찬찬히 주시하고 있었다. “민충이 겉은 새끼, 하룻강아지 범 무서
운 줄 모르구… 여기가 어딘 줄 알구 함부 루 찌껄여. 이 새끼가 그저 내버려 두니까 이건 제 세상이야.” 참 스스로 판단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만 용임에 틀림없었다. 지금 미루어 생각건 대, 아무리 태연한 체하려도 도무지 떨쳐 버릴 수 없는 그 무서운 공포와 어떻게도 이겨낼 수 없는 괴로움 때문에 자꾸만 후 둘거려지는 스스로의 초라한 몰골을 이렇 게 주책없는 수작으로 대신하고 있었나 보 다. 무지한 몰매가 한 차례 지나갔다. 사나 이가 지껄였다. “개수작은 그만 하구 이제부터 묻는 말 에 솔직히 대답해, 살고 싶거든 말야. 다른
건 다 집어쳐두 좋다. 뒤에서 네놈들을 조 종한 놈이 누구야? 네가 최고 지휘자는 아 니야. 분명히 뒤에서 조종한 놈이 있어. 그 놈이 누구냐 말야?” 그때 민수는 까맣게 잊었던 박 교수를 기 억해 냈다. 어쩌면 그렇게 잊고 있었는가. 그토록 세밀한 데까지를 돌봐주던 박 교수 를, 또 그렇게 우리들의 성공을 빌었을 박 교수의 존재를 너무 잊고 있었다는 가책이 었다. 이어 아직은 박 교수의 신분이 안전 하다는 안도에 잠기면서 자신도 모로게 후 한숨이 나왔다. ‘고맙다.’ 민수는 이 순간 무엇인가 한껏 성스러 움 같은 것을 느꼈다. 백발이 성한 그 노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 불행한 노인. 그 젊은 동지에게는 물론, 만일을 염려하 여 박 교수의 존재만은 남규만을 제외하고 는 비밀에 붙여두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구 스스로 다졌다. “이 간나아 새끼가 무시기 또 이따우 표 정이야… 별 수 없지. 말하지 않으믄 말하 게스리 만들어놓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둘러섰던 장정 하나이 씨근덕거리며 들 었던 몽둥이로 마구 짓제기기 시작한다. “고맙다는 수작이디? 그래 이것도 아마 고마울끼다.” 불룩거리는 장정의 매질이 멎자 살갗이 검은 사나이가 이렇게 씨부리며 옆엣놈에
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옆엣놈이 준비했 던 가시 철판을 내놓는다. 수백 개나 되는 가시가 파란 날이 되어 뾰죽뾰죽 살을 돋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것들은 하나하나 날아와서는 그의 심장에 폭폭 백히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수백 개 나 되는 괴로움이 그의 심장에서 살을 찌 르는 것이다. 순간 민수는 어쩔 수 없이 그 앞에서 참 을 수 없는 괴로움 때문에 몸을 떨었다. 이 놈들은 이제 나를 저 위에 올려 세울 것이 다. 그리고 나는 살을 도려내는 아픔 때문 에 소용도 없는 악을 써야 할 것이다. 놈들 은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서 하나의 인간이 지어낼 수 있는 마지막 추태를 보며 조롱
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민수 는 또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훗후, 몹씨 떠시는군. 어때? 불어보지. 애무하게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잖아? 자 네 신분을 내가 보증하지. 그러니 안심하 구 말해보란 말일세.” 순간 민수는 엉뚱하게 이치가 뭐 장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시하 다는 생각을 했다. 온통 시시하고 장난같 이만 여겨진다. 결국은 모두가 다 시시하 고 데데하다는 방기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것들이 사람의 목숨을 파리 날리듯 하니 하아, 참 시시하다. 시시하고 우습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민수는 웃음을 딱 멈췄 다. 무엇인가 노리께하게 목구멍을 넘어오
는 게 있다. 허탈한 웃음이 야릇하게 일그 러지면서 입가로 번지고 있었다. 민수는 이를 악물었다. 악문 입술 새로 빨간 피가 쪼르르 흘러내렸다. 민수는 눈 을 감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못판 위 에 선뜻 올라섰다. 순간 민수는 눈앞이 암암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었다. 하나두 아프지 않다. 진하다. 진한 빛이 흔들린다. 진한 빛이 파상을 이루면서 아래로 구비친다. 주홍빛 진한 커텐이 창문을 핥으며 지나가 는 바람에 흐늘흐늘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 습이다. 자꾸 흘러내린다. 흘러서 주홍빛 비단은 화려하게 쌓여 오른다. 침대, 아내. 살눈섭이 긴 아내가 화려한
침대에 누어 그 풍만한 육체를 애무한다. 그것은 가능하다. 살눈섭이 긴 아내가 오늘 그 어느 쿠린내 나는 이방의 사내와 피부를 맞대고 화려한 침대에가 누어서 얼 마든지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 그 것은 가능하다. 그리하여 ××의 딸로 얼 마든지 추앙될 수 있듯이 오늘 이렇게 혹 독한 고문 속에 죽어간대도 결국은 한 개 의 이름 없는 포로로서 물거품 꺼지듯 하 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 라는 것,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단 말이 다. 야, 얼마든지 가능하단 말이다. 야, 야. 민수는 마침내 비칠거리기 시작했다. “음! 지독한 놈이군. 그래 그여히 못 불 겠다는 수작이구나, 좋다.”
돌연한 민수의 도전에 잠시 당황한 놈들 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말이 없더니 이윽고 검은 사나이가 씨부리며 비칠거리 는 민수를 가시 철판에서 끌어 내렸다. 그 리고 또 옆엣놈에게 눈짓을 하며 내뱉듯 씨부렸다. “이치 무덤 속을 한 바퀴 선회시켜, 정신 이 좀 들게스리.” 그러자 옆에 섰던 장정 둘이 민수를 일으 켜 세운다. 다리가 푸들푸들 떨렸다. 민수는 놈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질질 기 듯 한곳으로 끌려 나갔다. 조그마한 사내 가 뒤따라 나섰다. “아, 참 먼저 소개할 친구가 여기 있었군,
훗후, 어때? 알만 한가?” 조그마한 사내가 한쪽을 가리키며 교활 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민수는 처음 놈 의 소리는 아랑곳없이 놈들의 지하실이 예 상 외로 규모가 크다는 생각을 하며 무엇 인가 무시무시한 전률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민수의 눈은 마치 인 력에라도 끌리듯 한쪽으로 쏠려 갔다. 시 선이 가서 멎은 지점에 아직도 애티가 가 시지 않은 조그마한 젊은이가 두 무릎을 꿇고 죽은 듯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애티가 가시지 않은 조그마한 젊은이 의 뒷모습에서 두 시선이 멎자 민수는 어 딘가 낯이 익다고 지각적으로 느꼈다. 그 리고 다음 순간 그러한 느낌은 무서운 전
률로 뒤바뀌면서 우구구 치밀어 오르는 분 노 때문에 그는 이를 우드득 갈았다. ‘기영이, 이놈 네가 밀고했구나!’ 그러나 그 소리는 처참한 오열로 기껏 입 속에서 맴돌았을 뿐 말이 되어 나와지질 못했다. “그런데 이봐, 이 순진한 친구가 뭐 양심 의 가책을 받는대. 자기가 유다라나… 자 기가 예수를 판 유다라구, 훗훗… 그런데 자네들 둘 중에 누가 진짜 예순가? 그 남규 라는 친구하구 자네하구 둘 중에 말야, 핫 핫핫…” 놈의 캐득거리는 웃음이 멎기가 바쁘게 무릎을 꿇고 앉았던 젊은이가 몸을 뒤틀며 눈을 들었다. 눈에는 살기가 돋혀 있었다.
살기가 돋힌 눈이 조그마한 덩치의 사내를 쏜 채 움직이질 않는다. 파아랬다. 그 살기 가 파랗게 돋힌 눈이 이윽고 풀려 나가기 시작할 때는 어느새 애원과 회환의 그늘이 비참하리만치 가련한 모습으로 대신 그 자 리에 번져가고 있었다. 젖은 두 눈망울이 조그마한 덩치의 사내 를 떠나 민수에게로 시각을 옮겼다. 네 개 의 눈망울이 복잡한 혼선을 이루다가 한 점에서 부딪쳤다. 불이 번쩍했다. 그렇게 한순간이 지났다. 젖은 눈망울이 아래로 감겨졌다. 다 감겨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었다. 젊은이가 앞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지 며 으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악을 쓰듯 악을 쓰듯 했다.
“핫핫하하하… 이제 그렇게 복잡한 표정 두 소용이 없구, 더욱이 추태는 안 부리는 게 좋겠구, 그만 일은 다 끝났는데, 핫하. 이봐, 젖내 나는 젊은이, ‘유다’의 죄를 덜 어주기 위해 내가 대신해서 더 말을 해주 지. 예수님 들으라구, 훗후. 이 ‘유다’의 아 버지를 국군 헌병이 총살했다는 거야. 치 안대원의 거짓 밀고로 말미암아 국군 헌병 이 즉석에서 총살시켰다는군. 그래 그 보 복을 했다는 거지, 훗후후… 처음부터 자 네들을 배반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는 거 라. 그런데 거사를 하루 앞둔 날, 철조망 밖 으로 총 멘 헌병이 지나가드라나. 헌병을 보자 그때 죽어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도 못 견디게 떠올라 자기를 괴롭히더라는
거야. 정신이 아득해지드라나, 핫하. 그래 참을 수 없었던 거지. 애초에 자네들은 거 사 시간 십 분 전까지는 용변을 빙자하고 다 막사를 빠져나와서는 각자의 책임 부 소로 가게스리 돼 있었잖아, 그런데 우리 는 이미 두 시간이나 전에 자네들의 거동 에 대비할 준비가 다 끝나 있었거든. 적어 두 한 시간 전까지는 각 막사마다 당원들 이 배치돼 있었단 말야. 그리구 나오는 놈 은 다 붙잡았지. 또 자네하구 남규라는 친 구하구는 꼭두춤을 추이다가 현행범으로 멋지게 체포할 수도 있었구, 훗후, 이게 다 이 참을 수 없었던 순진한 젊은이의 덕이 지, 훗훗후후후…” 민수는 그대로는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
다. 민수는 몸을 비꼬며 안까님을 쓰며 그 대로 비칠비칠 기영이를 향해 걸어 나갔 다. 그러나 두 발짝을 채 옮겨놓지 못해 그 는 둘러선 장정에게 제지되어 다음으로 끌 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때?” 조그마한 사내가 또 웃었다. 이십 명 남 짓한 동지들이 거의 반죽음이 되어 거기 쓰러져 있었다. 비린내가 풍겼다. 비린내를 풍기며 악을 악을 쓰며 그들은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한쪽에서 물을 찾았다. 물을 찾는 사람 의 몸에는 아직도 피가 옷을 배어 자꾸 흐 르고 있었다. 바루 그 옆자리에 곤두 박힌 몸뚱이는 이따금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이쪽에 나 자빠진 사람은 거품을 내뿜으며 혀를 빼 물고 있었다. 눈은 잔뜩 치떠져 있었다. 하 나같이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민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슬프지도 않다. 무섭지도 분하지도 않다. 무엇이 자꾸만 흔들거린다. 이윽고 그 흔들림을 타고 길게 번지는 소리가 있다.
뚜− 뱃고동 소리다. L·S·T가 다라프
를 내려놓고 어느 가부두(假埠頭)에 정박 했다. 텅텅 비어 껍데기만 남은 엉성한 몰 골들이 다라프를 타고 자꾸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뼈만 남은 소나무가 듬성
듬성한 붉은 황톳밭 길로 해서 갈밭을 지 나 저쪽까지 포로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 다. 내일이 없는 무리, 불안에 떠는 무리, 그 래두 살겠다구 터벌터벌 살겠다구 고삐를 내맡긴 채 따라가는 무리… 빌어먹을 것 들, 추한 것들, 퇴애 툇, 퇴애. 다 빠져 뒈져버려라. 씨알 없이 다 빠져 뒈져버려. 산 놈이든 죽은 놈이든 살겠다 구 버드럭시는 놈이든 모두 한목에 싹 쓸 어 화물선에 실어다가 시커먼 바닷속에 던 져 죽여버려. 공산이든, 공산의 증조할애 비든 그저 다 마구 쓸어다가 한목에 콱 꽉 죽여버려, 아, 죽여버려. 민수는 고만 기진맥진이 되어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핫, 핫, 몹시 흥분하시는군…” 깔깔거리는 놈의 웃음소리가 아득했다. …얼마가 지났는지 몰랐다. 민수가 다시 제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또다시 살갗이 검은 사나이 앞에 꿇려 앉아 있었고 여전 히 고 선병질의 사내가 그 옆에 조그맣게 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대여섯의 장정 이 벽에가 잔뜩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낯서른 그림자 가 또 하나 분 것이다. 어쩐지 그 사내는 서 리 맞은 잎새같이 풀이 죽어서 한쪽 끄트 머리에 꺼푸수수 서 있는 것이었다. 도무 지 이 지하실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가 않 았다. 그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내의 위
치가 민수의 신경을 끌었는지 몰랐다. 민수가 눈을 들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놀라듯 훔칠 몸을 움츠리며 외면한다. 눈 둘 곳을 못 찾아 허덕댄다. 민수가 이상한 친구라구 생각하는데 살갗이 검은 사나이 가 못마땅한 듯 입을 열었다. “자, 내 맘대루다. 불어대든가 쇳물을 마 시구 시체가 되든가…” 사나이의 발밑에는 뻘겋게 타오르는 숫 불이 놓여 있었다. 그 속에서 길다란 쇠꼬 치가 질질 녹아나고 있었다. 그 이쪽으로 이제는 너덜이 나서 이전의 남규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이 된 핏덩이가 딩굴어 있었다. 조고마한 사내는 시체와 쇳물과 민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교활한 웃음을 흘
리고 있었다. “용감한 친구, 어디 이것두 한번 마셔보 시지, 훗훗.” 뭐 쇳물을 마시는 게 문제가 아니다. 죽 음이 민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듯이 쇳물 을 마시고 시체가 된다는 사실이 대수로운 문제일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자기 육 체가 이 눈앞의 시체와 무엇으로 구별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 말이다. 땅 으로 그저 밀착하고만 싶은 이 기막힌 피 로와 지겨운 권태 외에 자기에게 눈꼬리만 한 의욕이라도 있느냐 말이다. 이건 너무 한다. 이따위 자기 몸둥아리를 놈들은 자 기들 임의대로 시체와 가려놓고는 여태 성 화니 말이다. 아, 시간은 왜 이리 더디냐.
이제 어떻게든 자기는 끝장이 나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민수는 사나이를 올려다봤다. 태연하다. 어쩌면 저놈은 그렇게 태연할 수 있단 말 이냐. 타바코를 가로 물고 놈은 그저 태연 하고 오만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민수는 이제 스스로 결 판 지을 수도 없이 지쳐빠진 자기 몸뚱아 리는 태연한 놈의 낯작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의 오만한 태연 스러움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대신 퍼런 살 이 돋혀날 때, 자기는 모든 끝장을 보게 되 리라. 민수는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자기 살가 죽을 마구 쥐어뜯기 시작했다.
“핫하하… 무섭지? 무서울 게다, 핫하 하…” “그래 무섭다, 무서워서 이렇게 몸이 떨 린다.” 순간 민수는 딱 동작을 멈추고 사나이를 정시했다. 두 눈에는 이글이글 불이 타고 있었다. 민수는 마구 독설을 퍼붓기 시작 했다. “만일 네놈들이… 아 네놈들이 말이다. 언젠가의 날에, 지금은 동지로서 있었던 어느 콤뮤니스트의 손에 멸망하고 죽어가 야 하리라는 그 역사의 필연성을… 그래 저 유명한 로마 스팔타귀스의 사실(史實) 을 만약 네놈들이 읽었더라면 말이다. 차 라리 그도 아니거든 네놈들이 말하듯이 영
웅적으로 나를 죽이렴. 그래서 네놈들의 살인 공적부, 아, 그렇지 인민 투쟁사군, 그 래 그 인민 투쟁사에 영웅적인 기록을 남 기려므나. 그리하여 네놈들의 후예에게 산 표본이 돼라. 성실한 인간은 굴욕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그 고귀한 인간 의 이야기를, 아, 네놈들이 이해할 수 있다 면…”
“머어−?” 놈은 젖내 나는 풋내기가 입은 제법 살았
다는 수째 깔보는 시늉이다. 또 민수 자신 도 그 따위 시큰둥한 쉰 소리가 자신의 솔 직한 고백일 수도 없었고, 더욱이 그런 신 파쪼의 독백이 자신의 본 빛이 아니라고 처음부터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러나 어
쨌든 털어놓고 나니 시원하다. 이제 됐다 는 느낌이다. 태연하던 놈의 낯작이 점점 험악하게 일 그러져 갔다. 그와 함께 이제 마지막 고문 은 다가왔다는 절박감에 짓눌리면서 민수 는 어처구니없게도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 흥분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지지직 살이 타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뒤 이어 고약한 냄새가 확 풍겨 왔다. 민수는 웃었다.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눈을 들어 본다. 사나이. 도무지 정기가 없고 그저 멀 뚱하게 광기가 서린 눈. 이건 인간의 눈이 아니다. 어릴 때 미친개를 본 일이 있다. 그 놈의 눈알이 아마 그랬던가. 고문, 무서운 고문. 한 발의 총탄에 쓰러지거나 한 몽둥
이로 급소를 얻어맞고 엇결에 자빠지는 죽 음 따위, 그건 숫제 고급이다. 무엇인가 확 실히 잘못됐다. 잘못되지 않고서야 어디 인간이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럴 수가 있느 냐 말이다. 옛 얘기에 무슨 악독한 귀신이 있어 눈알을 후벼내서는 장에 절였다가 먹 는다는 말이 있다. 간밤, 저 지구란 어느 골 짜기에서 잡아온 인간이란 동물을 시룽에 달아 매놓고 가죽을 베끼고 가위로 귀를 도려내고 작두에 여물을 썰어내듯 발가락 을 싹둑싹둑 잘라서는… 뭐 옛 얘기가 아니래도 충분하다. 어느 간악한 군국(軍國)의 병사들이 점령지의 죄 없는 노파를 잡아다가 야욕을 채우고는 그 즉석에서 들었던 대검으로 성기(性器)
를 도려냈다는 그런 얘기가 있는 것이다. 또 어느 군국의 장교는 순박한 대륙인을 잡아다가 나무 등거리에 붙들어 매놓고는 새로 배치되어 온, 아직 살인에 익지 않은 신병에게 ‘찔러!’의 훈련을 시켰다는 얘기 도 있다. 아득히 인간의 언어가 미치지 못할 음지 (陰地)의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들 주변에 는 확실히 너무 많다. 그 눈살이 찌프려지 는 이야기들이.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구태어 눈 살이 찌프려지는 어두운 이야기들을 헤집 어내서 스스로 위악(僞惡)을 가장할 필요 도 없을 게다. 또 엄밀한 의미에서 미진한 인간의 언어가 아득히 미치지 못할 이야기
들일랑 차라리 묻어두고 아예 헛된 만용은 안 부리는 게 좋다. 만용이 아니라면 한낱 채색된 언어의 희롱일 따름일 테니까 말이 다. 포악한 무리들이 순진한 청년들을 마구 학살했다. 그 밑에서 애국적인 청년들이 불붙는 정의심을 가지고 희생되어 갔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인류의 양심을 지키며 그들은 묵묵히 죽음으로 살아져갔다. 물론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어떻게 규정 하든 그건 그들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독단을 삼가야 한다. 항용 그런 독단이 실 제의 사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그릇된 판단인지는 어느 정도 인생의 경험과 양식 을 가진 사람들은 수긍해야 한다.
언어에 채색하기를 좋아하는 경박한 속 물들을 위하여 잠간 여기서 경고해 두자.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 그 어디에는 이 러한 사실도 있었다. 그 속에서 몇몇의 젊 은이들이 자기들의 길을 깨끗이 선택해 갔 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떠 밀어준 그 무엇 이 어떻게 이름 지어지든 상관할 바는 아 니겠으나, 단지 애국심이나 정의감이나 더 욱이 희생심 같은 껍데기는 아니었다. 결 코 모르고라도 이런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나의 경우만은 그렇노라, 라 고. 설사 그 이상의 어떤 크낙한 뜻이 있어 우리들의 행동에 결부된대도 우리는 그 밖 에는 도무지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우리
들의 행동에 그 뜻을 결부시킬 수도 없거 니와 또한 결부시키고픈 욕망도 없다. 반 면 살기 위한 우리들의 행동이 그 결과에 있어 한 인간의 뜻을 거역하는 배리(背理) 를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미련 없이 젊음을 내던져 간 우리들의 행동을 당신들은 그 당신들을 위한 일이 다 끝난 뒤, 그 어처구 니없이 무료한 당신들의 시간들 중에서 일 만 분의 일초 동안만이라도 우리들의 죽음 에 대한 동정의 념(念)으로 시간을 비어준 다면, 우리들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감사하여 눈물을 짓겠노라, 고. 어떤 행동 그 자체가 어떤 한 생명의 전 부일 수도 있을 때, 그 행동의 결과가 뜻하 는 어떤 의미의 가부를 따지기 전에 그 행
동의 숭고성을 인정해 줄 만한 아량을 여 러분은 가져달라, 고. 그리고 이제는 마지 막 우리들의 소망마저 깨끗이 취소하노라, 고. 그리하여 찢기고 지쳐빠진 육체는 오 직 권태와 피로만을 터득한 채 죽어가노 라, 고. 어쨌든 민수가 그 쇳물이 질질 녹아나는 시뻘건 쇠꼬치로 등덜미를 서너 번이나 조 히 지져지고 난 후였을 것이다. 깜뜨륵했던 의식이 어찌해서인지 다시 살아났다. 민수는 눈을 떴다. 그런데 눈앞 에는 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서 리 맞은 잎새같이 풀이 죽은 사내가 시뻘 건 쇠꼬치를 들고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 는 것이다. 그런 사내의 얼굴이 거의 울상
이다. 두 눈은 잔뜩 공포에 지질려서 차마 이쪽을 바로 보질 못하고 외면한 채 울고 있는 것이다. 이건 사람을 죽이는 눈이 아 니다. 사람을 죽이는 눈이 이렇게 물이 고 여서 울쌍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런 친구가 푸들푸들 떨리는 손으로 시뻘건 쇠꼬치를 집어 들고는 진땀을 뻘뻘 흘리고 서 있는 것이다. “동무, 뭘 우물거리는 거요? 빨리 해치우 지 못하구서리. 동무는 항상 미온적이란 말요. 그 따우 정신을 가지구 어떻게 인민 의 선봉이 될 수 있겠소. 혁명성이 필요하 오. 이런 기회에 적극적으루 혁명성을 기 르란 말요.” 그러나 이 불쌍한 친구는 사나이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훔칠훔칠 놀라기만 할 뿐 정작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그저 벌벌 떨 기만 하는 것이다. “못 하겠오? 동무는 이 반동의 편이오? 혁명성이 없는 당원은 반동보다두 더 악 질이오, 알갔오? 인민의 심판이 두렵지 않 소?” 하아, 민수는 묘한 충격을 느꼈다. 자네 는 그 철저하지 못한 자네의 혁명성 때문 에 오늘은 나를 도살하는 임무를 띠고 여
기 불려 나왔군. 하아− 그러니 나는 하나
두 슬퍼서는 안 된다. 얼마든지 죽을 수가 있다. 이건 참 기막힌 행운이다. “비끼오!” 살갗이 검은 사나이가 그 때까지도 잔뜩
울상이 되어서 서만 있는 사내를 더 이상 은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사 내를 한쪽으로 콱 떠밀고 쇠꼬치를 뺏어 든다. 이어 사나이는 벌어진 눈을 하고, 우 왁스레 앞으로 육박해 왔다. 그 후의 일을 민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무엇인 가 섬뜩했다는 생각이다. 그 섬뜩한 기분 은 이어 눈앞이 아릿해지며 무슨 지글지글 한 것이 그의 눈앞으로 자꾸 다가오는 것 을 보았다. 노랑빛, 빨강빛, 그리고 진한 흙 빛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마구 엇갈리고 있 었다. 형편없이 찢겨진 그의 몸뚱아리는 마침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는 실체를 이루고 있던 이 살점, 이 의지했던 뼈대까지 갈갈이 사귀를 벗어나 산산히 흩
어져서 그를 감싸고 돌다가 하나하나 자취 를 감추고 있었다. 의식은 극성스럽게 그 것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몹시 어 지러운 것 같았다. 하고 보니 어느듯 의식 은 발붙일 곳 하나 없는 무슨 회색 같은 허 허 속을 향해 무엇인지도 모르게 던져지고 있었다. 뒤이어 극심한 허탈이 왔다. 사나 이의 어깨 너머로 촛불이 아득히 멀어 가 다가 깜박하는 순간에 꺼지고 말았다. 그 리고 망망한 암흑이 깔려 왔다. 거무레한 장막이 내려 엎인 먼 둘레에는 황량한 폐허처럼, 삭막한 대기 속에 철조 망을 둘러져 있었다. 그 속을 말로서는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바람− 무덤을 파헤치고 생물을 뇌살하고 시체가 된 여인의 머리카락을 갈 갈이 날리는 불길한 바람이 엉엉 울며 어 둠에서 어둠을 타고 불어가고 있었다. 흉 한 뿔을 머리에 박은 마귀가 빠알간 혓바 닥을 들어내고 삐익삐익 울고 돌아가는 무 서운 밤을 필시 심판 날에나 있을 그런 흉 흉한 바람 같은 것이 몰아가고 있었다. 민수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곳에 와 있었 다. 그리고 괴상망칙한 모양들을 하고 지 나가는 숱한 군상들을 바라보며 별로 무서 운 것 같지도 않은데 몸은 자꾸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이상야릇한 손짓 발 짓을 하며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웅얼거리 고 웃음도 울음도 아닌 신음소리 같은 것
을 내고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상체만이 움직이는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상체는 없고 하체만이 움칠거리는 것도 같았다. 민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괴상한 그들의 행렬을 그렇게 공포에 쫓기는 살쾡이 눈을 해가지고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지켜보 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민수는 괜히 무서워졌다. 달아나야겠다는 무서운 강박감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달아 나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어깨를 툭툭 치는 사람이 있 다. “—?” 민수는 그저 입을 벌린 채였다.
‘박 교수—?’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셈판인지 몰랐 다. 박 교수가 예는 어떻게 왔으며 또 그 꼬 락서니란 무엇이냐 말이다. 박 교수가 여 자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복을 한 박 교수의 꼬락서니가 도무지 웃읍지가 않다. “나는 본래가 여자였네. 그런 걸 여적 남 자 옷을 입고 남자로 잘못 행세해 왔지.” 민수는 도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윽고 당황해하는 민수를 조용히 바라 보던 박 교수가 자네가 그렇게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며, 입가에 호젓 하게 웃음을 띠우고 그러나 빈정대듯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 저 이상한 군상들을 볼 수 있겠지? 함께 우리도 포함된 이 괴상한 군 상은 어디로부터인지도 모르게 떨어져 버 린 존재들이야. 사생아들이란 말일세. 그 런데 여기 비극이 있지. 저들은 자기들이 사생아가 아니라구 우기거든. 실은 사내인 지 계집인지조차 구별 못하면서 말일세. 이 저주받은 족속들은 어떻게 어떻게 하다 가 신 앞에 자기들이 죄를 범했고, 그래 이 제 자기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거거 든. 그런데 애초에 심판이란 그 말 자체가 달가운 것이 못 된단 말야. ‘푸로메데우스’ 를 벌하기 위해 독수리를 보낸 신이거든. 저들은 무섭지, 무섭구 불안하지.” 그리하여 저들의 흉칙한 몸짓과 괴상한
웅얼댐은 무엇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사 형수의 공포를 메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발악의 표시라는 것이다. “어, 자네도 지금 몹시 떨고 있군. 바루 그거지, 바루 그거란 말일세.” “허지만 그건 뭐…” 통속적인 얘기가 아니냐구 하려는데 박 교수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마저 떠올리면 서 한층 더 빈정대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심판은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거든.” 역시 그것도 이미 새로운 얘기가 못 된다 고 반문하자, 박 교수는 갑자기 결연한 낯 색이 되면서 “그렇다구 언제까지나 그렇게 억울하게
밑지고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진정 한 나를 찾아내기 위해서 여지까지 내가 입고 있던 사내 옷을 벗어버렸네. 그리구 찬찬히 들여다봤지. 나는 본래가 계집이었 드군.” 민수는 좀 싱겁다고 생각했다. 건 꼭 무 슨 주의자들의 얘기 같군요. 누리께한 병 색인 얼굴을 하고 한길에 나서서는 숫제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 무슨 광(狂)들의 얘 기 같군요. 꽤는 심각하시군요.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꽤는 통 속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인지 새삼스럽게 가슴이 답답하도록 온몸을 중 압하는 뚜렷한 실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헉헉 숨이 막혀왔다. 이어 목이 조여들며
심한 갈증이 몰켜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괴상한 몸 짓을 하며 돌아가던 군상들이 어디론가 살 아져버리고, 예의 그 검은 사나이가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자기의 목을 두 손아귀 로 잡아 누르고 바싹바싹 죄이고 있지 않 은가. 또 바로 그 옆에는 조그마한 덩치의 사내가 해해거리고 있고, 그 밑에서 새빨 갛게 발가벗은 자기는 그대로 목을 내맡기 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기 스스로도 여간 자연스럽지가 않다고 생각되었다. 조 금도 요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요동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요동을 해볼 생각조차 없 는 그런 자세로 목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 다. 별일이었다.
바싹바싹 목이 죄어 왔다.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영낙없이 죽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목을 죄이고 있는 게 그 살갗이 검은 사나이가 아니고 제가 제 목을 누르고 있 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곳은 예의 고문실 이 아니고 해진 뒤의 그 음산한 으스름이 깔린 황량한 벌판이었다. 저쪽에는 무슨 흉흉한 의미 같은 철조망이 쓸쓸히 쳐 있 고 그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 원시인처럼 발가벗은 자기는 오두만히 쭈구리고 앉아 열심히 목을 죄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모가지가 완전히 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자 일시에 숨이 가빠왔다. 심한 갈증이 몰켜왔다. 답답했다. 방금 숨이 끊
어질 것만 같다. 아, 나는 이제 꼼작없이 죽 는구나. 민수는 비로소 악을 썼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꾸만 자기 목을 졸르고 있었다. 안 타까운 노릇이었다. 민수는 죽을 것만 같 았다. 목에서 불이 탔다. 아− 아−.
민수는 푸−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포 박에서 풀려나오는 기분이었는지 모른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민수는 몸을 움직여 봤다. 뻐근하다. 목 이 아프다. 그러고 보니 자기의 목을 의자 다리가 잔뜩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민수는 몸을 뒤틀며 애써 일어나 앉았 다. 두 팔로 축축한 땅을 짚고 그리고 눈을
들었다. 토굴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죽은 걸 로 알고 잠들이라도 자러 갔는지 놈들의 그림자는 찾아도 없고 빈 토굴 속에 촛불 이 하나 거의 거의 애처로운 모양으로 꺼 져가고 있었다. 민수는 몸을 떨었다. 우수수 휘감겨 오 는 이 소연감. 무엇인가 음산하고 불길한 상념, 그리고 어떻게도 이름 지을 수 없는 막연한 초조 같은 것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한참이나 앉아 있어야 했다. 그는 또 한 번 몸을 움직여 봤다. 피로인 지 아니면 고통인지 그저 뻐근하게 몸은 천근이나 되는 듯했다. 참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이 지구, 그리고 오늘, 이 五○년대의
한국 땅덩이, 전쟁, 포로, 전쟁, 포로, 전쟁, 포로, 포로, 전쟁… 전쟁 포로… 아, 좀 더 시원히 뚫린 곳은 없는가. 민수는 머리를 떨어뜨렸다. 각가지 상념 이 머리를 든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의 전 설만 같은 이 이야기들, 참으로 세월은 많 이도 흘렀구나. 그리고 지금은 그저 허허 한 공허. 민수는 온갖 상념을 떨쳐버리듯 눈을 감 았다. …저 어디 고향이란 이름으로 맑게 트인 하늘이 다가온다. 복사꽃이 하얗게 내려앉은 포근한 마을이 파란 하늘을 배경 으로 둥실 떠 있고, 그리고 누이가 첫애를 배고 몸 풀러 오던 해 봄, 하두 소담해 꺾었 노라 한 웅쿰 젖뿌등에 모아 쥔 복사꽃도
그렇게 화사한 누이의 얼굴처럼 하얗게 뭉 실했던가… 민수는 여기서 무엇 때문인가 소스라치 듯 놀라며 다시 머리를 들었다. 주위를 훑 어봤다. 아무도 없다. 숨이 막힐 듯이 꽉 배 어 도는 이 질식감과, 그저 불길하도록 소 연한 공기 뿐, 그리고 뿌연 그의 안막 속으 로 가물거리며 다가오는 명멸이 있다. 마 지막 타들어 가는 촛불의 감각. 그것은 어 쩌면 촛불의 마지막 소멸 상태가 아니고 죽음 직전에, 정녕 이제는 영낙없이 돼버 린 죽음인 줄 숫제 다짐했으면서 죽음과 맞대고 겨눠야 하는, 그러나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그 생명의 조각조각이 하나하나 소각되어 가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라는
자각. 진정 그것은 마자마자 꺼져가는 생 명의 상징이다. 그래 내가 지금 저처럼 돼 버렸단 말이지. 죽어가고 있단 말이지. 비 참하구나. 저 놈의 촛불을 지레 꺼버릴 순 없는가. 지지직 촛불이 타들어 간다. 하늘거리는 불빛을 따라 검은 벽이 자잘구레하게 주름 잡힌다. 요놈, 요놈의 촛불을 꺼버리자. 순간, 촛불이 꺼졌다. 촛불이 꺼지자 민 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왜 그 랬는지 모른다. 그저 촛불이 꺼지자 아찔 해졌을 뿐이다. 촛불이 다시 살아났다. 한숨이 푹 나왔 다. 진땀이 흘렀다. 이건 또 무슨 비겁한 짓? 아니 비겁은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긴
장했을 뿐이다. 죽음이 두려운 지금의 나 는 아니니까 말이다. 민수는 두 손을 엉거 짚고 기어갔다. 눈 을 딱 감고 촛불을 꺼버렸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암흑이다. 칠흑의 밤이다. 무섭다. 속이 후들후들 떨린다. 무 엇 때문일까. 무엇인가 덮씌워지는 검은 베일, 그리고 영원히 닫쳐버린 무덤 속의 그것과도 같은 침묵. 이제는 사나이의 비 정한 목소리도 없고 죽음을 참아내는 육신 의 신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번쩍이는 살인도(殺人刀)의 픽픽 나르는 소리와 피 에 주린 동물의 핏발 선 눈들— 그 눈들이 토해내는 파란 눈불이 엇갈리는 요란한 소 리도 없다. 살아서 숨을 쉬는 생물이나 혹
은 무생물일지라도 이제는 모조리 없어져 남은 것은 침묵뿐이 그 영겁으로 이어진 침묵뿐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 침묵, 그리 고 전률. 그런데 그 전률을 가로질러 저쪽 침묵의 바다에서 가늘게 미동하며 번져오는 기미.
그리고 옭− 옭− 저 우람한 기세는 먼 데 서 소용돌이치며 밀려오는 바다의 밀물 소 리? 귓밥을 울리는 저 괴상한 소리와 무슨 꽹과리 소리와 길게 여음을 달아놓는 이상 한 웅얼댐은 원통하게 죽어간 원귀들을 달 래는 무녀(巫女)의 주문 소리? 민수는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잠시라도 잊게 위해 그는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께 를 속으로 가늠하며 기기 시작했다.
두어 번 손과 무릎을 옮겨놓았다. 숨이 찼다. 숨을 돌리려고 잠간 기기를 멈추고 주춤하는데 무엇인가 거치적거리는 게 있 어 집어 들었다. 팔둑만 하게 굵고 길게 생 긴 놈이었다. 이건 몽뚱이구나. 이건 내 등 살을 때리던 몽둥이. 너는 나와 인연이 깊 은 놈, 그래 인연이 맺힌 너를 내가 한번 만 져주지도 않고 그냥 갈 수야 있느냐. 민수는 몽뚱이를 어루만졌다. 필시 네 몸뚱아리에는 내 지릿한 등어리의 땀이 배 었을 게고 피가 묻었으리라. 그리고 그 이 전에 간 내 친구들의… 민수는 또 기어갔다. 이건 도람통을 짤 라 베른 칼이군. 내 살을 도려낸 칼. 이건 쇠꼬치, 다 내 피와 살을 나눈 내 친구들이
군. 응, 이건? 그렇지, 이건 다리고, 이건 머 리고, 이건 귀고, 그런데 왜 귀가 하나뿐이 냐? 아, 참 하나는 짤라버렸지. 그놈들이 짤라버렸지. 한 손으론 귓날을 잡아 늘이 고 한 손엔 파란 칼을 들고 남규야, 네 귀 하나는 놈들이 싹둑 짤라버렸지, 그렇지? 이건 입이고, 유리판에 옥을 굴리듯 유창 한 네 음성이 굴러 나오던 그 입이고. 이건 가슴, 배, 그리고 이건? 오, 그렇지. 아직 순 결한 처녀성을 지녔다던, 그것으로 하여 너는 사내새끼가 되고, 그 너의 처녀를 위 해서는 한번 써먹지도 못한 채 오히려 지 금은 그것으로 하여 지레 죽었지. 누구의 죄도 아니었다. 누구의 죄라고 단정할 수조차 없는 그 무엇인가의 죄. 그
죄의 보수를 하필 네가 치르다니… 바보, 바보, 이 밥통아, 말을 해, 원통하다, 고. 어 이 친구, 동지, 아, 남규, 그렇지 남규야— 민수는 다시 일어나 앉았다. 쥐어진 그 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순간 눈 에서 불똥이 튀며 심장이 뒤설레왔다. 이 상한 흥분이 뜨겁게 온몸을 감싸왔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질없는 생각 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 다. 너만은 못한 일을 나는 해야지. 기어이 살아야지. 살아서 어떻게 한다고? 그런 얘 기는 이제 그만 하자. 살아야 하는 것이 아 직은 죽지는 않았다는 나의 마지막 의무라 고는 말하지 않으마. 그 엄청난 얘기를, 산 다는 것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숙명이라면 나는 인간의 한에서만 살고 싶 을 따름이야. 죽으면 구데기 밥으로 썩어 버릴 인간. 나는 이제 그게 분할 따름, 비 웃지는 말아줘. 그토록 죽어지기를 원하던 내가, 그러나 우리는 이제 신의 얘기는 집 어치우자. 벌써 전에 송장이 된 신. 아, 그 렇지만 원통하이… 민수는 다시 기기 시작했다. 습기에 배 인 축축한 토방을 한참이나 기었다. 그러 다가 무슨 묵중한 감각에 멈츳 섰다. 내밀린 손이 그것을 벽임을 알아냈을 때 그만 무너지는 듯한 공허와 함께 민수는 다시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져야 했 다. 이것이 나의 극성스런 희망에 대한 겨 우 보답이었구나. 그 장황스런 변명에 야
멸스럽게도 반격해 온 보복이었구나. 절 망이다. 종말이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끝내 나는 놈들이 다시 나타나기 전에 나 스스로가 목숨을 끊어야 되게 마련이었구 나. 민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안타까움에 몸부림쳤다.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머리 를 땅에 쳐 박은 채 엉엉 울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났는지 몰랐다. 민수는 어느새 벽을 끼고 자꾸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는 또 출 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멈칫 섰다. 극히 엷은, 어둠에 익어버린 사람으로 극 히 조심해서 살피지 않으면 분간하기 어려
운 엷은 명암의 구별을 그는 맞은쪽 모퉁 이에서 가려내고야 말았다. 필시 다른 지 하실과 이어지는 통로의 입구이리라. 새로운 기운에 복받친 민수는 그쪽을 향 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김없었다. 민수는 조금씩 전진했다. 한참을 지났다. 발갛게 촛불이 켜진 지하 실이 나타났다. 다행이 놈들은 없었다. 그 나이 어린 동지가 잠이 들었는지 한쪽 구 석지에 시체처럼 쓰러져 있을 뿐 토굴 속 은 숨이 막힐 듯이 조용했다. 민수는 다시 기어갔다. 그 저주받은 어 린 동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지런 히 들려오는 숨소리가 평화스럽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으리만치 숨소리는 평화스
럽기만 했다. 민수는 칵 눈물이 솟았다. 왜인지 몰랐 다. 무작정 슬프다고 생각했다. 한없이 슬 프고 분했다. 마구 짓부셔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흥분이 가라앉으 면서 솟구쳐 오르는 울분을 눌러야 했다. 민수는 다음 통로를 잡아들었다. 전진함 에 따라 상체가 위로 뜨는 품이 그는 통로 는 위로 경사가 진 듯했다. 이내 민수는 이 게 밖으로 통하는 마지막 통로라는 직감에 사로잡히면서 온 신경이 한 곬으로 집중되 는 걸 느꼈다. 등골이 바싹바싹 캥겨왔다. 입구가 가까워짐에 따라 어렴풋이나마 훤해옴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민수는 입구에 육박했다. 그곳이
바로 놈들의 비밀 당본부가 있는 콘세트라 는 것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눈독 을 들여온 터이니까. 그러나 민수는 또 다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의 보초가 서 있는 것이었다. 미제 담요로 투박하게 만들어 입은 인민 군복에다 가량없이 긴 평창의 인민군모의 놈은 머쓱하게 상자 같은 것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놈은 컴컴한 주위의 그 응큼한 분위기처럼 무엇인가 서늘한 감을 느끼게 했다. 놈의 등 뒤 약 십 메터 밖으로는 이중 철조망이 둘려져 있고 그 이중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몽둥이를 든 놈들의 동초와, 총 멘 국군 동초가 어둠 속에서 무슨 유령 처럼 서성대고 있는 게 보였다.
민수는 상자 놈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 다. 그러자 그는 왈칵하고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민수는 어떤 긴장감 같은 것이 선뜩 스쳐가는 것을 의식하면서 온몸 의 피가 끓어올랐다. ‘이놈을—’ 피값이나 하자는 앙심이었다. 그러나 민 수는 이내 결국은 그것도 무모한 짓이라는 뉘우침에 사로잡히면서 누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급소를 내리친다 하자. 어 림도 없는 수작이다. 건강한 놈의 완력을 당해낼 수도 없으리라는 채산 때문이 아니 다. 죽여서 무슨 뾰족수가 생기겠는가 말 이다. 마냥 그것은 공연히 인접 보초만을 건드리기가 십상일 것이고 애꿎은 자기만
이 또다시 붙잡히게 될 것이다. 섣불리 벌 집만 터뜨리는 격이 되어서는 말이 아니 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민수는 안타 까웠다. 초조로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마치 죽은 사람의 모가 지가 데룩하고 굴러나듯, 상자 놈의 모가 지가 거들먹했다. 그때 저 목 너머 어느 마 을에서 횃닭이 울었는지는 모른다. 아뭏든 상자 위의 보초 놈이 졸기 시작했다. 민수는 놈이 어느 정도 잠이 깊기를 기다 려 옆으로 바싹 몸을 숨기면서 흙을 한줌 쥐어 놈의 앞으로 확 뿌렸다. 후닥닥 놀라 고개를 든 놈은 눈을 휘번득이며 두리번두 리번 주위를 살피더니 얼마가 못 되어 곧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기맥힌 일이었다. 그 서슬에 어쩌면 그 렇듯 묘한 생각이 떠올랐던지 몰랐다. 민 수는 또 한 번 흙을 뿌렸다. 놈은 고개만 들 었다가는 또다시 잠 속에 묻히고 만다. 이 번에는 땅으로 내려앉아서는 상자에 등을 기대고만 자리를 보는 것이었다. 민수는 또 흙을 뿌렸다. 놈은 이번에는 게슴츠레 눈만 떴다 만다. 이러기를 여러 번, 막판에는 놈은 시끄러웠던지 아니면 쥐새끼라도 설치는 걸로 알았던지 거들떠 도 안 보는 것이었다. 민수는 이를 깨물었다. 이미 감각도 아 픔도 없었다. 위기일발의 그 아슬아슬한 전진, 실로 필사의 전진, 필사의 노력이었
다. 민수는 기어이 놈의 앞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이어 기를 쓰고 콘세트 모퉁이 까지 돌아 나왔다. 민수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신이 없었다. 이 모든 행동을 무슨 뚜렷 한 의식을 가지고 해냈는지 어쩐지 모르겠 다. 그저 그래야 했을 뿐이라는 생각뿐이 다. 민수는 다시 기어갔다. 마침내 그는 마 지막 콘세트까지 다달았다. 그는 숨을 죽 였다. 이제 저 철조망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그러면 그것으로 일은 끝난다. 그 뒤의 일 은 자기로서는 관여할 바가 못 된다. 아마
무한한 시간이 열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한한 시간 속에 인간의 갈등은 또 계 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 침 뱉 을 인간의 갈등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 편모라면 그것도 또한 그런대로 내버려 두 자. 내게는 단지 철조망이 있다. 철조망 앞 에서 나는 단지 초조할 따름이다. 조만간 날은 밝아올 것이다. 반면에 놈 들의 동초는 촌분의 틈도 주지 않고 서슬 이 푸르러 서 있다. 무엇보다도 철조망까 지의 십여 메터 거리를 놈들의 동초가 달 려들기 전에 거의 기능을 상실한 지금의 내 육체가 달려가 철조망을 넘어낼 것 같
지도 않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놈들의 동 초에게 붙잡혀 다시 놈들의 밥이 될지도 모르는 것, 혹은 또 불의의 탈영자로 간주 되어 국군 동초의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 르는 것. 그러나 그것도 역시 그대로 내버려 두 자. 민수는 지금 콘세트 모퉁이에가 살쾡 이처럼 엎디고 철조망을 조그맣게 노리고 있는 것이다. 철조망으로 뚫린 조그마한 가능을 노리며 무서운 긴장을 느끼는 것이 다. 그때였다. “야, 늬 불 있나?” 윗쪽 동초 놈이 아래쪽 동초 놈에게 건 네는 수작이었다. 몹씨 클클했던 모양이었
다. “늬 담배 있나?” 그러자 아랫 놈이 교환 조건을 붙인다. 이윽고 두 놈은 담뱃불을 당기노라 맞붙 여 섰다. “이 간나야 이래라.” 한 놈이 버럭 짜증을 낸다. 밤이슬에 젖 은 성냥이 잘 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민수는 화닥닥 일어섰 다. 그리고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철조망 을 타고 올랐다. 발이 째지고 손이 찢어졌 다. 피가 흘러내렸다. 정신이 없었다. 아득 했다. 무엇인가 떠들썩하고 왁자지껄한 소 동이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얼마를 타고 올랐는지 몰랐다. 갑자기 손이 파르르 떨
리며 온몸에 경련이 일어왔다. 경련이 어 느 한 고비에서 발을 멈추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피시시 맥이 풀리며 민수는 그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서넛의 검은 그림자가 방금 철조방에서 굴러 떨어진 시체를 둘러싸고 웅성대고 있었다. 한 놈이 씨부렸다. “미욱한 새끼, 제레 뛔야 베루디디 원 벨 수 있갔다구, 하, 하, 하.” 다음 놈이 말을 받았다. “양놈이 털도망은 잘 테뒀디.” “참 이런 때 털도망은 히한하대니끼니.” “하하하하…”
“하하하하…” 어둠은 여전히 깔려 있었다. 황량한 폐허처럼 여기 철조망은 그렇게 둘려져만 있는 것이었다. <사상계>, 1960. 7. 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