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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한국문학 4/10 동화

산길로 걸어서 와라 식민지와 광복, 전쟁과 참혹의 한가운데서 희망을 찾는 문학이 있었다. 들릴 듯 말 듯하게 동화가 쓰여졌다. 잿더미 속에서 움트는 새싹이 얼마나 순수한지, 그 순수함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어린이는 언제나 어른의 내일이다.

부산 남구 감만동으로 피란 와 있던 아이들. 1951년 6월 미군 병사가 찍은 사진이다.


인텔리겐치아 2642, 2015년 6월 18일 발행

그는 텅 빈 부엌에 멍하니 서 있다가 꿀단지 앞 으로 걸어갔다. 예전처럼 꿀을 찍어 먹으려고 단지를 내렸다. 그때, 착착 접은 하얀 종이가 사뿐히 부엌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워서 펴 보 니 어머니의 글씨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무 도 없을 때 집에 돌아올 것을 예상하시고, 꿀 단지 밑에 비밀 편지를 넣어 놓으셨던 것이다. 어머니가 연필에 침을 묻혀 꼭꼭 박아 쓴 글씨 가 눈물 속에 들어왔다. 네 소식 몰라 답답. 난리가 심해서 피란 간다. 네가 집에 올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오는 대 로 외가로 와라. 신작로는 위험하니 산길로


걸어서 와라. 급할 때는 부처님을 찾아라. 어미 씀. -<소년병과 들국화>, «남미영 동화선집» 남미영 지음, 정선혜 해설, 83~84쪽

<소년병과 들국화>는 극렬한 전장에서 낙오된 인민군과 연합 군 병사가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남미영 동화선집 남미영 지음 정선혜 엮음 사륙판(128 *188mm) 2013년 6월 10일 출간 무선제본, 158쪽 12,000원


작품 속으로

소년병과 들국화


밀고 밀리던 전쟁이 잠깐 멈춘 고요한 아 침.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느티나 무를 향해 한 병사가 열심히 기어 올라가 고 있었다. 병사는 총을 가슴에 껴안고 몸 을 납작 엎드린 채 배와 무릎으로 기어 올 라가고 있다. 고개를 들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 적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 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총알이 비 오듯 쏟 아지던 언덕이었다. 며칠간 밤낮없이 계속 된 전투로 병사의 부대는 모든 것이 떨어 지고 말았다. 총알도 떨어졌고 포탄도 떨 어졌고, 식량도 바닥이 났다. 후방으로부


터 보급품이 올 때까지는 몇 시간이 걸릴 지 며칠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병사의 부대에 총알 이 떨어진 때와 비슷한 시각에 적진 쪽에 서도 총 쏘기를 멈춘 것이다. 적군은 왜 전 투를 중단했을까? 적군이 다시 공격해 올 시각은 언제쯤일까? 병사의 임무는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병사의 총에는 총알이 딱 하나 들어 있 었다. 그것은 부대에 남아 있는 마지막 총 알이었다. 그는 총을 바짝 가슴에 끌어안 았다. 적군이 나타나면 이 총으로 적의 가 슴을 쏘아 자신의 목숨을 지켜야 했다. 여기저기에 병사들의 시체가 보였다.


아군의 시체도 보였고, 적군의 시체도 보 였다. 풀잎을 흔드는 산들바람에 피 냄새 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언덕 여기저기에는 들국화가 무 리 지어 피어 있었다. 흰색 들국화, 보라색 들국화가 바람에 한들거렸다. 마치 ‘전쟁 이란 사람의 것일 뿐, 꽃들하고는 아무 상 관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 때 마다 들국화 향기가 병사의 코를 간질였 다. 그래서 병사는 깜빡깜빡 전쟁의 무서 움을 잊고 고향에서 친구들과 놀던 때를 회상하곤 했다. 병사는 흰색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철 모의 위장망에 꽂았다. 다행히도 병사가


언덕 위까지 오르는 동안 한 방의 총알도 날아오지 않았다. 병사는 재빨리 느티나무 둥치에 몸을 숨기고 다람쥐처럼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무성한 나무 잎사 귀에 몸을 숨기고 망원경으로 적의 부대가 있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덕 아래는 고요했다. 오늘 새벽까지 불을 뿜던 적의 대포는 잠자듯 엎드려 있 고, 적의 병사들이 따발총을 가슴에 안고 쓰러져 자고 있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병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의 광경으로 보아서는 적이 쉬고 있는 것 이 분명하지만, 언제쯤 다시 공격해 올 것 인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병사는 적군


이 깨어난 후에 다시 동정을 살펴보아야겠 다고 마음먹었다. 병사는 망원경의 초점을 좀 더 멀리 맞 추어 보았다. 적의 부대를 지나 멀리 보이 는 마을 쪽으로 초등학교가 있고, 초등학 교 뒤에 면사무소가 있고, 면사무소 옆에 소방서의 높은 망루가 우뚝 서 있는 마을. 그 마을 한복판에 늙은 감나무가 한 그 루 서 있는 기와집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 리 찾아보아도 망원경에 잡히는 것은 불타 버린 마을의 황량한 풍경뿐이었다. 병사의 눈이 뿌옇게 흐려 왔다. 그 마을은 바로 병 사의 집이 있는 고향 마을이었기 때문이 다.


병사는 오늘 아침에 위험한 정찰 임무를 자청했다. 지원하는 그를 보고 다른 병사 들이 말했다. “너는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어려. 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생을 죽게 만든 형처럼 가슴이 아플 거야.”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다. “이번 일에 나보다 적격자는 없시오. 난 저쪽 지리를 손바닥의 손금처럼 훤히 알고 있시오. 나를 보내 주시라요.” 그래서 그는 정찰대로 뽑히게 되었다. 정확하게 한 달 전, 병사는 그의 고향 마 을에 갔었다.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던 병 사의 부대는 그의 고향 땅까지 밀고 올라


갔다. 그러나 곧 다시 밀리기 시작해 지금 의 이 언덕을 경계선으로 사흘째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 살아 계시기만 하시라요. 꼭 만 나러 가겠시요.” 병사는 가슴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손에 들고 중얼거렸다. 병사의 목소리는 떨리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다시 고향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한 달 전에 고 향 마을로 달려가 그의 집 대문을 들어섰 을 때, 아버지가 쓰시던 사랑채는 폭격으 로 폭삭 내려앉았고, 뒤꼍의 감나무는 포 탄을 맞고 허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안채만은 고스란히 그대로였다. 그는 어머니 생각을 하며 부엌문을 열었 다. 부엌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끔했다. 어머니가 잠깐 우물에라도 가신 양, 평소 그대로였다. 시렁에 가지런히 얹혀 있는 놋그릇이랑 사기그릇들도 평소 그대로였 다. 그리고 어머니가 꿀을 넣어 놓으시던 노란색 사기 항아리도 시렁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그는 학교에 갔다 오면 늘 어머니를 부 르며 부엌문을 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거나 설거지를 하시다 가 빙그레 웃으시며 일어나, 솥에서 알맞 게 쪄진 감자나 고구마를 꺼내 주시곤 했


다. 어느 날, 일찍 집에 돌아온 그가 부엌문 을 열어 보니 어머니가 안 계셨다. 배가 고 프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시렁에 얹혀 있는 꿀단지를 내려서 안에 든 노란 꿀을 검지로 꾹꾹 찍어서 빨아먹었다. 물론 어 머니가 아시면 야단을 맞을 일이었다. 어 머니가 항아리 속에 넣어 두시는 꿀은 형 제들이 체했거나 아버지가 약주를 많이 잡 수신 날 비상약으로 쓰는 가정상비약이었 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그는 어머니 몰래 가끔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곤 했었다. 그는 텅 빈 부엌에 멍하니 서 있다가 꿀 단지 앞으로 걸어갔다. 예전처럼 꿀을 찍


어 먹으려고 단지를 내렸다. 그때, 착착 접 은 하얀 종이가 사뿐히 부엌 바닥으로 떨 어졌다. 주워서 펴 보니 어머니의 글씨였 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무도 없을 때 집에 돌아올 것을 예상하시고, 꿀단지 밑에 비 밀 편지를 넣어 놓으셨던 것이다. 어머니 가 연필에 침을 묻혀 꼭꼭 박아 쓴 글씨가 눈물 속에 들어왔다. 네 소식 몰라 답답. 난리가 심해서 피란 간 다. 네가 집에 올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오는 대 로 외가로 와라. 신작로는 위험하니 산길로 걸어서 와라.


급할 때는 부처님을 찾아라. 어미 씀.

그러나 그때 그의 부대는 사기충천해 북 진하는 길이었고, 사령부에서는 이제 며칠 안에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일러 주었기 때문에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가족의 소식을 알려고 남쪽 군대에 지원 한 일, 이제 며칠 후에 전쟁을 끝내고 어머 니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어머니의 편 지 끝에 간단히 적어서 꿀단지 밑에 다시 넣어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세가 불리 해지면서 그의 부대는 후퇴하게 된 것이


다. 그가 올라온 반대편 언덕을 한 병사가 풀숲에 몸을 숨기고 기어 올라오고 있었 다. 총을 가슴에 껴안고 배를 땅에 대고 무 릎으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나무 위에 있는 병사와 피부색이랑 눈동자의 색 깔이랑 머리카락의 색깔이 같았다. 다만, 입고 있는 군복의 색깔이 조금 다를 뿐이 었다. 나무 위의 병사는 퍼런색 군복에 퍼 런색 철모를 쓰고 있는데, 그는 누런색 군 복에 누런색 헝겊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누런 군복의 병사도 언덕을 기어 올라오 며 병사들의 시체를 보았다. 아군의 시체


도 보았고 적군의 시체도 보았다. 그는 전 쟁터에 오기 전까지는 중학교에서 소년들 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래서 이런 풍경들을 보니 몹시 슬퍼졌다. 분노 하듯 눈을 부릅뜨고 죽어 간 병사, 누군가 를 부르듯 팔을 머리 위로 뻗은 채 죽은 병 사, 온몸이 피로 뒤범벅이 되어 죽은 병 사…. 어떤 음악도 이런 장면들을 사라지 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런 군복의 병사가 좀 더 올라가니, 언 덕 여기저기에 들국화가 피어 있었다. 보 라색 들국화, 흰색 들국화가 바람에 한들 거리고 있었다. 들국화를 보니 작년에 갔 던 소풍이 생각나서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날 그는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생전 처음으로 사랑 고백을 했다. 몇 달 동안 은 근히 좋아하던 동료 여선생의 머리에 들국 화 한 송이를 꽂아 주며 싱긋 웃었을 뿐인 데, 정말 그뿐인데 그녀는 몇 달 후에 그의 약혼녀가 되어 주었다. “하나님,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그녀 앞 에 다시 나타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누런 군복의 병사는 중얼거리며 그녀가 즐겨 입던 블라우스처럼 연보라색이 도는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군모에 꽂았다. 들 국화 옆에는 산딸기 덤불도 있었다. 초록 색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빨간 산딸기에는


투명한 아침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 다. 병사는 얼른 딸기 한 알을 따서 입속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딸기 즙이 빈 배 속에 흘러들자, 잠자고 있던 허기가 후다닥 깨 어났다. 병사는 허둥지둥 주위의 딸기들을 따다가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정신없이 딸기를 먹다가 그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 다. ‘여기는 위험하니, 따 가지고 가서 저 느 티나무 위에서 먹어야겠군.’ 병사는 풀숲에 몸을 웅크리고 딸기를 따 서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누런 군복 위 로 빠알간 딸기 물이 배어 나왔다. 주머니


마다 딸기가 가득 찼을 때, 병사는 다시 기 어오르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 도착한 누런 군복의 병사는 재빨리 느티나무 아래로 기어가 다람쥐처 럼 나무둥치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는 나뭇잎이 무성한 큰 가지에 걸터앉아 맞은 편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새벽 녘까지 불을 뿜던 대포는 자는 듯이 엎드 려 있고, 소총을 껴안은 적의 병사들은 여 기저기 쓰러져 자고 있었다. 왜 쉬고 있는 것일까? 언제쯤 다시 공격 할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보 았지만, 피아노 건반이 아닌 전쟁터의 상 황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좀 더 멀리 있는 적군의 후방까지 볼 수 있다면 무언가 좀 더 알아낼 수 있지 않을 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좀 더 높은 가지 로 올라가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꼼짝 마!”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가 고 개를 젖혀 위쪽을 보니 한 병사가 나뭇가 지에 걸터앉아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차가운 총구가 그의 관자놀이에 선뜻 닿았다. 퍼런 군복에 퍼런 철모를 쓴 것만 보아 도 적군임이 분명했다. 누런 군복의 병사 는 몸이 후들후들 떨리었다. “총 이리 내고, 머리에 손 얹어!”


그는 천천히 총을 벗어 퍼런 군복의 병 사에게 내밀었다. ‘아, 이렇게 죽게 되다니!’ 누런 군복의 병사는 가슴에 차오르는 허 망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죽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죽음 인가? 더구나 저 병사는 나와 같은 남쪽 사 람이 아닌가? 내가 북쪽 군대에 의용군으 로 끌려오지 않았다면 저 병사는 나와 같 은 편이 아닌가? 세상에 자기편의 총에 맞 아 죽게 되다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아! 하나님, 저를 한 번만 살려 주세요.’ 그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때였


다. “죽이지는 않겠어.” 퍼런 군복의 병사가 말했다. 앳된 음성이었다. “그 대신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누런 군복의 병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부대는 왜 전투를 중지했지? 언제 다시 공격해 올 거지?” “….” “대답 못 하겠어?” 퍼런 옷의 병사가 가슴을 총구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무기가 떨어졌어.” 누런 옷의 병사가 힘없이 대답했다. “…?” 순간 퍼런 옷을 입은 병사의 입술에 짧 은 미소가 스치는 것을 누런 옷의 병사는 보았다. 산들바람에, 퍼런 옷을 입은 병사 의 뺨에 돋은 보송보송한 솜털이 떨리는 것도 보였다. ‘저런, 저 병사는 무척 어리군. 꼭 피아 노 소리에 맞춰 노래 부르던 제자들 같지 않은가? 열여섯? 열일곱?’ 누런 옷의 병사는 지금 퍼런 옷의 병사 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지만 이상하게 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넌 우리 부대가 왜 전투를 중단했는지 정탐하러 온 거지? 언제 다시 공격할 것인 지 알아보러 온 거지?” “….” “죽고 싶어?” 퍼런 군복의 병사가 이번에는 총구로 어 깨를 건드렸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누런 옷의 병사가 물었다. “그야….” 퍼런 옷의 병사는 대답 대신 킥킥 웃었 다. 그런 모습이 꼭 그가 가르치던 장난꾸 러기 학생들 같았다. 그러나 입술이 하얗


게 튼 것으로 보아 갈증과 허기가 역력한 소년의 얼굴이기도 했다. “배고프지? 나한테 딸기가 있는데….” 누런 옷의 병사가 말했다. “딸기?” 순간 퍼런 옷을 입은 병사의 눈이 빛났 다. “주머니 속에 있어. 언덕을 기어 올라오 다가 땄어.” “…꺼내 봐. 왼손으로.” 퍼런 옷의 병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누런 옷의 병사는 오른손은 머리에 얹은 채, 왼 손으로 주머니에서 딸기를 꺼냈다. 누런 옷의 병사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을 펴자


반쯤 뭉그러진 산딸기가 보였다. 그때 퍼 런 옷을 입은 병사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 리가 났다. 그러나 퍼런 옷의 병사는 미심 쩍다는 듯 다시 말했다. “먹어 봐.” 누런 옷의 병사가 산딸기를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며 삼키는 것을 보고서야 퍼런 옷 의 병사는 딸기를 집어 먹었다. 누런 옷의 병사는 주머니에서 딸기를 더 꺼내어 퍼런 옷의 병사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퍼런 옷 의 병사가 딸기들을 입속으로 쑤셔 넣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먹던 퍼런 옷의 병사가 멋쩍은 듯이 말했다. “너도 먹어.”


그리고 퍼런 옷의 병사는 다시 먹기 시 작했다. 주머니의 딸기들이 다 떨어졌을 때, 두 병사는 붉은빛으로 물든 입술을 손 등으로 훔치며 서로 마주 보았다. “내 입술도 그렇게 빨개?” 퍼런 옷의 병사가 웃음을 지으며 누런 옷의 병사에게 물었다. “응, 여자 같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쿡쿡쿡 웃었 다. “이 안에 총알이 몇 개나 들어 있지?” 퍼런 옷의 병사가 누런 옷의 병사에게서 빼앗은 총을 들고 물었다. “한 개.”


“한 개?” “응.” “정말?” “응, 정말이야.” “하하하, 그거 재미있는데?” 퍼런 옷의 병사가 히죽히죽 웃었다. “…?” 누런 옷의 병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이는 도대체 이 전쟁이 재미있다는 것일까? 철부지 같으니. “전쟁이 언제 끝날 것 같아?” 퍼런 옷의 병사가 빨갛게 물든 입술로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글쎄….”


“이번 전쟁에서 어느 편이 이길 것 같 아?” “글쎄.” “난 아무도 이기지 말았으면 좋겠어. 아 니, 양쪽 다 졌으면 좋겠어.” “…?” “난 고향이 북쪽이거든. 저기 저 마을이 내 고향이야.” 누런 군복의 병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같은 편이라는 희망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소리가 가슴에서 들렸다. “그런데, 왜 남쪽 군대에 소속해 있지?” 누런 옷의 병사가 의문의 눈초리로 물었 다.


“남쪽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 데, 전쟁이 터졌어. 갑자기 전쟁이 나더니 삼팔선이 막혀 집에 갈 수가 없게 됐어. 그 래서 고향 소식을 들으려고 북진하는 군대 에 지원을 했지. 부대가 우리 동네를 지날 때 가 보았더니 식구들은 아무도 없고 어 머니 편지만 있었어. 어머니가 보고 싶어.” 퍼런 옷의 병사는 품속에서 어머니 사진 을 꺼내어 누런 옷의 병사에게 보여 주었 다. “우리는 참 이상한 운명이군. 나는 남쪽 에서 왔어.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지. 밀고 내려온 북쪽 군대가 나를 의 용군으로 끌고 왔어. 그러니 우리는 완전


히 위치가 바뀐 셈이군, 휴우∼” 누런 군복의 병사가 한숨을 토했다. 순 간 퍼런 군복을 입은 병사의 눈에 번개 같 은 빛이 번쩍했다. “좋은 수가 있시요!” 퍼런 옷의 병사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 였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그 런 바보 같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만약에 우리가 옷을 바꿔 입고 서로 반대편으로 내려간다 면, 우리는 돌아가자마자 가슴에 총알을 받을 거야. 흥!” 누런 군복의 병사가 말했다.


“그게 아니야요.” “…?” 퍼런 옷의 병사는 주머니에서 몽당연필 을 꺼내서 어머니의 사진 뒤에다 무언가를 적더니 누런 옷의 병사에게 내밀었다. “우리 집 주소야요. 만약에 이 전쟁이 한 달 안에 끝나지 않으면, 수고스럽지만 우 리 집에 가서 소식 좀 전해 주시라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 아셔도 기뻐하실 거야요.” 퍼런 옷을 입은 병사의 눈이 희망으로 타올랐다. 누런 군복을 입은 병사의 눈빛 도 서서히 타올랐다. “아저씨 주소도 적어 주시라요. 제가 전


해 드리겠시오. 아저씨도 고향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갔지죠?” 누런 군복의 병사도 어머니의 주소와 약 혼자의 주소를 적어 퍼런 군복의 병사에게 주었다. 퍼런 군복의 병사는 주소를 안주 머니에 깊숙이 넣은 후 어깨에서 총 하나 를 벗어 누런 군복의 병사에게 내밀었다. “아저씨, 이거요.” 누런 군복의 병사는 총을 받고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얘, 그런데….” 누런 군복의 병사가 주저하듯이 말했다. “아까 왜 나를 살려 주었지? 너는 나를 쏠 수도 있었는데….”


“아, 그거요? 들국화 때문이야요. 아저 씨 모자에서 꽃을 보았을 때, 총 쏘기가 싫 었시요.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 람이 없다고 어머니가 그랬시요.” 퍼런 옷의 병사가 웃을 때, 그의 철모에 꽂힌 흰색 들국화도 고개를 끄덕이듯 흔들 렸다. “그리고 들국화는 우리 어머니가 제일로 좋아하시던 꽃이야요. 어머니는 개울에 빨 래 갔다가 오실 때에는 들국화를 꺾어 옷 섶에 단추처럼 꽂고 오시곤 했시요. 그리 고 창호지 사이에 들국화를 넣고 내 방문 을 발라 주시곤 했시요. 들국화를 넣으면 방에서 향기가 나고, 또 그 향기 때문에 행


운이 찾아온다고 하셨시요….” “그랬구나… 고맙다. 너의 행운을 빈다. 어머님을 꼭 만나기를….” “아저씨의 행운을 빌어요. 고향에 꼭 돌 아갈 수 있기를 바라겠시요.”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악수를 했 다. 그리고 서둘러 느티나무에서 내려와 언 덕 아래로 걸어갔다. 퍼런 옷의 병사는 남 쪽으로, 누런 옷의 병사는 북쪽으로. 그들은 조금 전에 그들이 기어 올라왔던 언덕을 가슴을 펴고 걸어서 내려갔다. ≪시와 동화≫ 3호, 1998.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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