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깊은 삶 전쟁에서 남들처럼 죽지 않으면? 삶보다 죽음이 더 익숙해지면? 그러고 나서도 살아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지금에 없는 것을 보는 것, 일찍이 없었던 것을 아는 것, 장차 있을 것을 만드는 것이다.
전후 치열하게 쓰다 26세에 요절한 고석규. 이근명 그림 © 커뮤니케이션북스
인텔리겐치아 2666, 2015년 7월 3일 발행
남송우가 엮은 ≪고석규 평론선집≫
나는 전쟁보다 이 여백의 지배를 사실 불가 피하였던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하늘에 대한 우리들의 전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남과 같이 피살되지 않은 경우가 어찌하여 나에겐 그다지 신랄한 것이였던지. 죽음보 다 더 어려운 목숨의 체험이란…. -<여백의 존재성>, ≪고석규 평론선집≫, 고석규 지음, 남송우 엮음, 8쪽
피살되지 않은 나의 사유는 어디를 향하는가? 인간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고석규의 대답은? 여백의 존재성이다. 여백의 존재성이란? ‘지금에 없는 것을 보는 것, 일찍이 없었던 것 을 아는 것, 장차 있을 것을 만드는 것’이다. 무에 대한 유, 죽음에 대한 생명의 투쟁인가? 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허물어진 폐 허를 경험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존재를 발 견하려는 강렬한 열정이다.
여백의 논리, 출발점은? 죽음에 버금가는 생존의 체험에서 비롯된 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고석규는 한국전 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으나 부상으로 먼 저 월남했다. 전장에서 경험했던 죽음과 극 한의 실존 상황이 여백의 존재성으로 승화 된 것이다. <여백의 존재성>은 어떤 글인가? 고석규 비평의 토대다. ‘L에게’라는 편지글 형식을 차용해 릴케의 예술론에 다가서려는 힘든 몸짓이다. 여백과 릴케는 어떤 관계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
기 위해서는 영혼의 창이 필요하다. 그곳에 먼저 릴케가 있었다. 릴케의 여백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는 로댕의 조각을 연구하며 영혼의 창을 마련했다. 결과가 ≪로댕론≫이다. 이 책 에서 로댕의 조각을 ‘소리 없는 소리’라고 썼다. ‘소리 없는 소리’를 통해 고석규는 어디로 가 는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나아간다. 릴케에 게는 상징된 미의 창조였던 여백이 그에게 와서는 실존의 부재를 통한 존재 확인으로 바뀌었다.
존재 확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노자가 말한 시지불견(視之不見),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에 닿는다. 그곳에서 무명 (無明)이란 결국 유(有)의 체계이며 의미의 체계임을 확인했다. 고석규는 어떤 글을 썼는가? 1952년 부산대학 국문과에 적을 두면서 공식 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 창작 에 몰두했지만 갈수록 시 비평 쪽으로 관심 이 기울어졌다. 1950년대의 현실에서 시 장 르가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의 가능성 으로 비평을 모색한 것이다. 26세의 젊은 나 이에 요절하면서 평단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 었다.
어떻게 부활했는가? 1990년대에 고석규의 유고 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이 출간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 다. 1996년에는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 해 고석규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국면 전환의 모멘텀은? 김윤식 교수가 논문을 여섯 편이나 썼다. 고석규의 면모를 총체화했고, 1950년대 한 국 문학평론사에서 고석규의 위상을 회복 시켰다. 이 책은 어떤 글을 선별해 엮었는가? 고석규의 예술론 모색의 일환인 <여백의 존 재성>과 <지평선의 전달>, 예술론에서 논
의한 이론을 바탕으로 이육사, 윤동주, 소월, 이상을 다룬 실제 비평인 <시인의 역설>과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시의 본질을 천 착한 <현대시와 비유>를 실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남송우다.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죽음보다 깊은 삶 전쟁에서 남들처럼 죽지 않으면? 삶보다 죽음이 더 익숙해지면? 그러고 나서도 살아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지금에 없는 것을 보는 것, 일찍이 없었던 것을 아는 것, 장차 있을 것을 만드는 것이다.
전후 치열하게 쓰다 26세에 요절한 고석규. 이근명 그림 © 커뮤니케이션북스
고석규 평론선집 고석규 지음 남송우 엮음 2015년 7월 6일 출간 사륙판(128 *188) 무선제본, 247쪽, 20,000원
작품 속으로
고석규 평론선집
여백의 존재성
L에게! 시간에 뒤쫓기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끔 정지된 공간 을 눈여겨봅니다. 그것은 볼수록 움직여 가는 어떤 내재의 화면이올시다. 그 화면에는 무수한 물상들이 위치하고 있 습니다. 구름과 비둘기와 시내와 과수원들이 그리고 방카 와 보초와 철망과 주검들이 무슨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각기 마련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정적에 싸여 있습니다. 정적! 그렇 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음운도 들을 수 없는 것이나 사실 그 들의 침묵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독한 위치와 경건한 자세를 바라볼수록 정적 이란 다만 들을 수 없는 소리에 절로 상태 한 것입니다. 그 들은 저마다 소리와 같은 파문을 던지며 저 무한한 공백 속 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떠나기 위하여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들려올 듯한 그들의 환한 울림, 그것은 차 라리 이름 할 수 없는 빛깔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보일 수 없는 내부에서 자꾸 흘러가는 빛깔의 고민이 있 을지언정 왜 빛깔은 저 여백의 하찮은 부면(部面)에 자기를 물들이는 것입니까. 한결같이 밝은 빛과 보염하게 울리는 빛과 또는 얼룩진 빛과 그 밖의 많은 빛문(紋)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빛깔이란 우리들 눈으로 가리지 못할 조화 속 3
에 이루워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것들은 모다 괴 로워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적은 하나의 표현이올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빛 이올시다. 빛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한한 것입니다. 저 많은 빛깔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직관적이며 신비적이며 또 원시적인 것입니까. 이 화면의 여백에 엷고 강한 감동을 남 기면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자세를 열심히 볼 것입니다. 그 리고 그들의 주변에 일어나는 ‘정적의 소리’를 그들의 영원 한 흐느낌으로 들을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처참하여지는 공간에 저마다 그리고 있는 이 밝고 어두운 고민을 우리는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눈이란 독실한 영혼 의 창이며 광야에 일어나는 여명과 같습니다. L여! 이것은 릴케가 나에게 알린 사상이올시다. 나는 릴 케의 존재성이 얼마나 이 ‘들리지 않는 소리’를 위하여 괴로 워하였는가를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데 아름다움이 따로 있다고 남과 같이 말할 순 없습니다. 스스로를 넘을려는 유용의 힘을 위한 충동에 따 라 자기 작품에 아름다움이 걸어 올 수 있는 어떤 조건의 존 재를 믿을 따름입니다. 나의 사명이란 이 조건을 밝히는 것 과 그러한 조건을 내기 위한 힘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 어렴풋한 부유의 인상이 떠오릅니다. 빛깔 같은 선조(線 4
條)가 그 부유되는 층적 간에서 가끔 비쳐 나올 듯합니다.
그는 흥미와 경악의 단계에서 다시 모순의 발견으로 자기의 주시를 확대시킵니다. 마노(瑪瑙)빛 선조는 적어도 ‘이당티 떼’1)를 가진 것이며 일층 명확한 원근의 위치와 영상의 고 정을 위하여서만 한 초점에서 눈을 버리지 않습니다. 층적 의 주변이 풀려 가는 오랜 고뇌 속에 폐쇄된 채, 백광과 같 은 폭상의 전망을 이어 나가는 그것은 차라리 원상에의 ‘불 가시적 동기’이며 영원의 이주가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릴케의 시는 아름다움을 모셔 오는 최고의 순결 이였습니다. 마음대로 지울 수 없는 감동의 파문을 조심히 엿듣는 일이였습니다. 릴케는 그러한 파문을 내는 물상의 주변을 하나의 심연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연은 두려운 것입니다. 어두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얼마나 밝은 어둠이였던 것입니까. 심연은 절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 나 형상에 가까운 절망은 어찌 절망일 수 있겠습니까. 마침 내 심연의 신비로운 음율을 릴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 든 본질은 이 외연의 빛깔 속에서 더 또렷한 것이였습니다. 따라서 릴케의 절망은 절망에서 떠나는 것이였습니다.
1) 이당티떼: 이당티테(identité). 동일성 또는 정체성을 뜻하는 프랑스 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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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릴케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투명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물상(Ding)은 있는 물상이 아니라 변하는 물상으로 되었습니다. L여! 나는 여기서 또 가장 귀중한 인식을 배웠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끊임없는 기적과 같이 하나의 무에 하나의 날랜 윤곽 속에… 너무나 미묘하고 귀한 까닭에 자연 스스 로가 벗어 놓은 것과 같은 윤곽의 또 다른 윤곽 속에 짙은 것 입니다.” 거장 로당의 찬란한 정복을 말함에 있어서 릴케의 눈은 얼마나 부시게 떠 있는 것입니까. 사실 로당의 ‘면(面, Oberflache)’은 처신(處神)의 고독이였습니다. 그것은 공간 속에 비공간을 마련하는 그 엄숙한 의지였던 것입니다. <다나이드>와 <카데드랄>과 <사상>과의 그 숭고한 배경을 우리는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릴케는 이러 한 ‘협력 상태’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세계 경험의 전 영역을 오늘날 우리들의 경험 범위를 넘고 있는 영역까 질 포함하여 그 모든 권상(圈相)에 따라 표상한다 할 것 같 으면 우리들이 닿을 수 없는 범위로 나타난 저 어두컴컴한 문짝 꼴[扉形]의 부분은 우리들 감각의 탐조등에 적합하도 록 가지런치 못하게 밝으례히2) 도려낸 부분과 비하여 얼마
2) 밝으례히: 발그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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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크나큰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미 알려진 것과 이미 알려지지 못한 것이 한 점에 모일 수 있는 그러한 마당 에서 그는 모든 개별성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 내부에 있어 서 ‘관계가 실재인 것과 같은 존재’를 그러한 변전을 동양의 노자는 또한 95언의 시지불견(視之不見)으로 말하고 있습 니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 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曒, 其下不 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 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 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3)
3) 노자의 ≪도덕경≫ 제14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니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얻 지 않고도 잡은 듯이 알 수 있음을 이름하여 미(微)라 하느니라. 이 셋 은 이치로 따질 수 없는 경지를 말함이니, 섞고 합하여 하나로서만 말 할 수 있도다. 위로는 밝지 않고 아래로는 어둡지 않은데, 얽힌 것이 복 잡하여 이름하여 부를 수 없느니라. 무물(無物)로 돌아간 경지이니 이를 일컬어 무상(無狀)의 상(狀)이라 하고, 무물(無物)의 상(象)이 라 하니 바로 홀황(惚恍)한 것이니라. 나는 그것의 보이지 않는 머리 를 맞고, 보이지 않는 꼬리를 따라가 옛 도(道)를 붙잡아 오늘에 있는 것으로써 거느리니 능히 옛 시작을 안 것이니라. 이로부터 도의 실마 리가 열린 것이니라”(이경숙, ≪완역 도덕경≫, 명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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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이념의 선택을 위한 동양화의 배경은 이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였습니다. ‘무명(無明)’이란 한결 즉자(卽自)로 부터 대자(對自)로 옮아갈 그 실현적 과정에서 더욱 완전한 유(有)의 체계입니다. 의미의 체계입니다. L여! 무엇이 우리에게 남을 것입니까. 나는 전장에서 공 포를 제압하던 침묵의 기간을 지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사 직전에 있었던 우리를 굴복시키던 위대한 강요 였습니다. 그것은 평온한 대기 기간에도 우리들의 피로와 권태를 사정없이 박탈한 것이였습니다. 나는 전쟁보다 이 여백의 지배를 사실 불가피하였던 것 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하늘에 대한 우리들의 전망이란 무 엇이겠습니까. 남과 같이 피살되지 않은 경우가 어찌하여 나에겐 그다지 신랄한 것이였던지. 죽음보다 더 어려운 목 숨의 체험이란…. “우리는 전쟁 속에 전쟁을 하고 원인 속에서 찾아 헤매었 다.” 칼 샤필로는 <시인의 심판>의 주제를 이것으로 하였 습니다. 이제 나는 또 무엇을 이야기할 것입니까. 이와 같은 샤필 로의 ‘레캬프트레이숀!’ 로당의 피비린 감동의 역사, 노자의 허무적 도기(道紀)를 그리고 나의 기적만을 이야기할 것입 8
니까. 아닙니다. 나는 다만 나의 공간으로 나보다 먼저 살아 있는 나보다 뒤에 살아 있을 그 공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즈러진 물상들의 무명한 주변에 그 눈물겨 운 여백의 저항에 나의 눈과 입과 귀와 신체의 모든 부분을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 나는 그들이 염원 한, 그리고 그들이 부정한 부재의 공간에서 어떻게 떠날 것 입니까. 그들의 부재적 아름다움! 그들의 부재적 울음을… 그것은 릴케가 생각한 물상의 정적, ‘소리 없는 소리’와 서로 하나의 의미였습니다. 바렐리는 “아름다움의 이데에는 아 름다움이 존재치 않는 것이 더 확실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악극 <암피옹>에 나타난 뮤우즈들의 이야기….
나는 보노라, 지금에 없는 것을 나는 아노라, 일찍이 없는 것을 나는 만드노라, 또 있어지는 것을
이리하여 나는 그들이 배제한 것을 그들이 부르는 것을 그들과 동일한 것을 어찌합니까. 그때 여백은 그들의 영원 한 갈망의 표적입니다. 여백이란 부재의 존재를 말하는 것 이 되므로입니다. L여! 이 젖어 내리는 얼굴을 누구에게도 나는 보일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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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월식과 로뎅의 면과 릴케의 전진 은… 내가 분명히 말할 것 같으면서도 뜻 되지 않는 이것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나와 그리고 당신이 달려가는 이 공 간의 전면에 보면 볼수록 익어 오는 소리와 같은 저 위대한 물결을 우리는 어떻게 전하여야 할 것입니까. 저 물상의 주 변에서 주변과 주변의 교착에서 불가시로 인식되는 여백의 진동을 나는 정녕 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 리 반한 혈전의 모습이올시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아득한 지대일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내가 보지 못한 그리고 느 끼지 못한 모든 것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동양의 하늘에 뼈저리게 낡아 오는 우리들 크나큰 고민도 결국은 이 아득 한 지대에서 그대로 혼미해진 것이 아니겠습니가. T. S 엘리어트의 <칵텔·파아티>에도 부재의 저항이 나타나 있습니다. ‘의인적 아리바이의 상태!’ 엘리어트는 신 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이것을 택한 것입니다. 여백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부재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 다. 우리들 부정 속에 내재되는 새로운 긍정을 위하여 L여! 우리는 다만 진실한 우리들의 작업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 입니다. 나의 이 글은 내가 생각하였던 단편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의 여백을 한동안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절박한 10
시간을 극복하는 나의 안정이라 할 것 같으면 나는 나의 불 투명한 여백과 부재의 사고에서 새로운 투명과 새로운 존재 를 다시 발견할 것이 아닙니까.
≪초극≫, 195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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