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여울문화마을 주민대백과
부산광역시 영도구 · 영도문화원
흰여울문화마을 주민대백과
들어가며
주민들의 기억으로 재현한 마을의 역사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마을, 송도를 마주 보는 절경이 아름다워 제2송도라 불리던 마을, 봉래산에서 내려오는 물 줄기가 많아 지반이 약하고, 언덕이 가팔라서 집을 지을 수 없었던 마을. 흰여울문화마을의 옛 모습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 다. 1950년대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형성되어 마을이 만들어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곳을 지키고 살았던 사 람들의 생애는 역동적인 근대사 일부를 이루고 있다. 역사기록이 모든 역사를 담지는 못한다고 보았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 애와 기억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지금껏 살고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난 시대를 생생하게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스스 로 ‘소소한 역사’라고 말하는 주민의 삶은 곧, 마을과 시대의 역사인 것이다.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과 풍광마저 아름다운 이 마을은 부산에서 꼭 한번 들러보고 싶은 여행지가 되었다. 아파트 에 사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골목골목이 낯설고 신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을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면 그 속에 스며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이 어떻게 이 가파른 절경과 함께 살아왔는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최근 ‘흰여울문화마을’로 알려졌지만, 윗세대에게는 ‘이송도’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마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마을 이름을 ‘이송도’라고 썼다. (정식 표기는 ‘2송도’다.)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사람의 기 억은 상황에 따라서, 개인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대로 기록했다. 주민의 입말을 살리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약간 글을 다듬기도 했다. 지금도 많이 쓰이는 지 역말은 두고 잘 쓰이지 않는 지역말에만 설명을 달았다. 주민들의 거주기간은 흰여울문화마을과 인접한 신선동, 영선동, 대 평동, 남항동 거주기간을 모두 포함해 표기했다. 이 인터뷰는 2016년에 진행되어 책자로 발간된 바 있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수량이 부족해 더 많이 공유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재발간의 첫 번째 이유이다. 2년이 지난 지금 마을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마을을 찾는 이들이 더 늘 었고 마을의 모습과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변화는 필연적일지 몰라도 마을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변하지 않는다. 마을을 찾는 이들이 이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온몸으로 말해온 삶을 기억해 주기 바라는 것이 재발간의 두 번째 이유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흰여울마을의 문화자산이 될 것이다.
목차
마을주민 구술기록
02
들어가며
06
흰여울문화마을 들여다보기
17
1장 먹고 살려고 이리로 왔지
18
김송죽
30
송순옥
42
한상원
52
박기선
62
이종석
72
최도범
84
기억 속 키워드 1
87
2장 내 살던 고향은
88
강연식·정숙희
98
손윤자
108
진순여
118
차미경
128
구미연·신기현
140
김양미
150
한타관
158
기억 속 키워드 2
161
3장 흰여울문화마을에 산다
162
김성희
172
윤미아
180
송정옥
190
김병호
200
김갑숙
210
김옥례
222
이안순
232
기억 속 키워드 3
234
기억이 남아 있는 그곳
238
자료출처
흰여울문화마을 들여다보기
6
이름의 유래
흰여울문화마을의 행정동명 변천사
흰여울문화마을의 세칭 이송도
영선(1885) ⇨ 영선리(1896) ⇨ 영선정(1925) ⇨
지금의 보건고에서 동산아파트에 이르는 길 좌·우 해안가
어영정(1944) ⇨ 영선동4가(1947) ⇨ 영선2동(1959)
에 있던 마을을 ‘제2송도 마을’이라 불렀다. 암남동 송도 (松島)가 해송 군락의 동산을 위시한 아름다운 해안 마을
1885년 절영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동명을 지을 때 삼
인데 서로 마주하는 이 마을을 바다경치로 두 번째라면 서
신산의 하나로 동해에 있는 전설의 섬인 영주에서 瀛 (바
럽다는 뜻에서 제2송도(松島)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애초
다 영), 신선이 사는 봉래산 산기슭이라 仙(신선 선)을 따
이곳은 참나무 군락지였으나 왜인들이 벌목한 후 곰솔을
‘영선’이라 이름하였다. 1896년에는 행정체계가 8도에
심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사람들에게 ‘이송도(2송도)’라고
서 13도로 개편되면서 동래부 사하면 관할 하에 ‘영선리’
불리고 있다.
가 되었다. 당시 영선리의 영역은 현 봉래동, 신선동, 남항 동, 대평동 일대였다. ‘영선리’는 1925년 ‘영선정’으로 이 름이 바뀌고 1944년 영선정은 6정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흰여울문화마을
중 ‘어영정’이 현 영선 1, 2동에 속한다. 광복 이후 어영정
‘흰여울’은 순우리말로서, 봉래산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바
은 영선동이란 이름을 다시 찾게 된다. 이때 영선동 4가가
다에 굽이쳐 내릴 때 하얗게 물거품이 이는 모습을 보고
현재 흰여울마을에 속한다. 1959년 동제개편으로 영선동
붙여진 이름이다. 도로명 주소로 개편되면서 ‘흰여울길’이
3, 4가는 합쳐져 영선2동이 되었다. 흰여울마을은 영선2
라는 도로명으로 사용되었다. 2011년 영도구청에서 폐공
동의 10, 15, 16통에 해당하는 구역이다.
가를 리모델링하여 창작공간을 만들면서 ‘흰여울문화마 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7
인구변화
영선정 인구변화 (1920 ~ 1930)
다. 그때부터 영선동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한다.
영선정
한국전쟁 동안 부산은 임시수도(1950-1953)였고, 특히
(현 봉래동, 영선동, 신선동, 남항동, 구 대교동 1,2가, 구 대평동)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
계
1920
3,652
4,772
5
8,429
1925
4,264
8,184
22
12,470
던 흰여울마을에 피난민들은 공동묘지와 벼랑 등 열악한
1935
5,319
16,592
22
21,933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짓고 살았다. 말 그대로
출처 : 양미숙, 1920·1930년대 부산부의 도시빈민층의 실태와 그 문제(2006)
1.4후퇴를 계기로 많은 피난민이 내려왔다. 공동묘지만 있
벼랑 끝까지 내몰린 삶이었다.
영선2동 인구변화 (1960 ~ 2015)
통계청의 1960년대 이후 인구자료를 보면, 이때 1975년 영선2동 인구가 22,033명으로 정점을 찍 는다. 계속되는 산업화로 농촌에서 부산으로 인구가 몰리는 때였다.
영선 2동 (명)
1960 1966 1970 1975 1980 1985 1990 1995 2000 2005 2010 2015 16,757 17,870 20,70422,03319,340 19,295 18,026 15,078 14,042 12,115 10,623 9,591 자료 : 통계청
“그때는 남항초등학교가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어요. 신도시나 그렇게 하지. 오전반이 12반까지 있었다니 까. 근데 한 반에 또 몇 명이냐면 60명이다.”
- 김양미 님 인터뷰 내용 중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 등 3개 항구를 열게 되었다. 개항장을 중심
그러나 1975년 이후 점점 사람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으로 일본인 중심의 도시가 만들어지는데, 부산부가 그런
아파트 건설과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용호동, 만덕
지역이었다. 일본인들의 영도 이주도 늘어났다. 영도 전체
등으로 흩어지거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주하는 등 여러
를 거대한 요새로 만들려고 하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
가지 이유가 있다. 영선2동의 주민은 1975년 22,033명
때문에 영선동은 군마 주둔지가 되었다. 공업이 성장하고,
에서 2015년 기준 9,591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65세
도시 개발을 위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농민들은 일자리를
이상 인구는 약 20%가량으로 젊은 세대가 줄어들고 평균
찾아 도시로 이주했다. 급여는 형편없었다. 도시 중심을
연령이 높아지고 있다.
차지한 일본인들에게 밀려 조선인들은 외곽으로 내몰렸
8
주거환경
주거형태의 변화
❷
한국전쟁 전후 ❶
판잣집, 토담집, 천막
한국전쟁, 산업화, 농촌인구의 유입 등으로 늘어난 인구에
1960 ~ 1970 ❷
무허가 주택 영선아파트(1969년) 미니아파트(1977년)
비해 집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부산의 인구는 100만을 ❸
재개발, 새마을 운 동으로 무허가 주 택 재개발
넘어서고 있었다. 1962년 경제개발 5년 계획이 시작됐다. 이 계획에는 많은 인구를 수용할 주택공급과 아파트단지 개발이 있었다. 원도심지인 중구, 남구, 서구, 영도구 등에 주택공급이 이루어졌다. 영선아파트와 미니아파트도 이때
❶
지어졌다. 1969년에 영선아파트, 1977년에 미니아파트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쏟아진 피난민들은 도시
가 세워졌다.
외곽으로 밀려났다. 아무 것도 없는 땅 위에 그들은 직접 집을 만들었다. 구하기 쉬운 돌로 담을 쌓아 돌담집을 만
❸
들거나, 레이션 상자, 합판, 판대기, 천막천, 가마니 등으로
지금의 슬레이트집과 시멘트 블록집들은 새마을사업
판잣집을 만들었다. 현재 영선아파트가 있던 곳에는 공동
때 지어졌다. 1975년 새마을사업으로 영선2동 3번지
묘지가 있었는데 묘지 위에 비닐이나 슬레이트를 덮어 집
(29,947㎟)가 도시재개발지구에 포함되었다. 당시 지어
으로 삼기도 했다.
진 집들은 부산항의 가시권을 고려, 지붕은 청이나 녹색, 벽은 연노랑, 연녹색 등으로 칠했다. 새마을사업으로 일부 재개발되었으나, 흰여울마을의 80% 정도가 무허가 건물 이다. 마을사람들은 불하(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개인 에게 판다는 뜻)를 받으려고 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 어 렵다. 한때 무허가 불법건축물을 신고해 인정받는 양성화 도 몇 가구만이 혜택을 받았을 뿐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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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이리로 왔지
영도는 한국전쟁 당시 이북 흥남부두에서 거제도를 거쳐 부산으로 피 난 온 사람들,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시절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 아 온 사람들이 많다. 흰여울마을 이주민 1세대들이 겪었던 어려웠던 시절의 경험을 들으며, 마을의 옛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1 장
김송죽 송순옥 한상원 박기선 이종석 최 도범
17
함경도에서 피난 와서 거제도에서 삼 년 살다가 부산으로 왔죠
김송죽
1941년 함경도 출생 1951년 거제도로 피난 1954년 영도 영선동으로 이주 1963년 결혼, 이송도로 이주 허리가 아파서 누워 있는 시간이 많 아 집에 주로 계시는 김송죽 할머니 는 평생 일을 하신 분이다. 가정을 돌 보지 않았던 남편 때문에 힘들게 자 식 키우며 살아오셨단다. 손톱에 물 든 붉은 봉숭아꽃물이 아득한 상처 처럼 보인다. 스물 셋에 시집 와서 한 마을, 한 집에서 계속 살아오는 동안,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는 게 어려워가지고 공부를 못했어 나는 시집와서 평생 여기서 살고 있거든예, 스물세 살에 여기 시집을 와가꼬 지금꺼지 여기 살고 있어요. 초라하게. 땅도 내 땅이 아니고, 건물만 내 건물이에요. 등기 안 되가 있어서. 스물 셋에 시집와서 이때까지 있었으니, 지금은 오십삼 년 됐나, 칠십 여섯이니깐. 오십삼 년 됐네. 햇수로 오십사 년째 됐네. 시집오기 전에도 남항초등학교 앞에 그 밑에 파출소 있는 데 거 살았어예. 원래는 고향이 이북이고, 함경도에서 피난 나와 가지고 거제도 나와서 한 삼 년 살다가 부산으로 왔죠. 거제도로 피난 갔다가 부산 오셨다는데 영도에 그런 분들 많지요? 많지. 거제도로 피난 와가지고 거서 한 삼 년 살았나? 내가 열 살에 피난 와 가지고 열세 살에 여기 부산으로 왔나? 근께 초등학교 삼 학년 밖에 안 나왔어요. 전쟁통에 초등학교 삼 학년도 옛날에 교회가 있었거든. 고아원. 그 교회 학교. 삼 학년인데도 이제 사오 학년 공부를 배았고 그랬는데. 것도 졸업도 못 했어예. 사는 게 어려워가지고. (부끄러워 하시며 웃음) 워낙 아버지도 나이가 있고 동생들도 많았고 내가 맏이고 이래 되다보니까는 좀 사는 게 어려워가지고 공부를 못 했어. 어릴 때부터 집안일 많이 도우셨겠어요. 나야 마 고생 말도 못하지. 아버지 따라서 물장사도 해봤고. 장사가 안 되더라고 나는. 장사 할 때부터 했으면 큰 장사꾼이 됐을 텐데. 장사가 안 되더라고. 내가 그 집에 가서 물건을 팔면 그 집에는 물건 잘 팔리는데 나는 장사가 안 되는 기라. 시장에서도 장사해봤고 그랬는데 안 되더라고. 우리 영감 스물세 살에 만나가꼬 우리 첫 아아를 스물다섯에 낳았거든. 남편을 잘못 만나가꼬. 초빼이를 만나가꼬. 진짜 시집와서 내 고생을, 고생을 느무, 집을 전전해서 식모살이 내 그 짓을 하고 살았어.
구호병원에서 우유 가져와서 죽 끓이 먹고, 팔아 묵고, 비타민도 팔아 묵고 시집 와서 이 집에서 계속 사신 건가요? 응. 이 집에서 내~ 살았지. 내가 올라왔을 때는 이집이 돌집, 돌담집이었거든. 개량하라 해서 보루꼬로 지은 건데, 근데 이게 그때 당시에는 평수가 작으니까 등기가 안 되가지고 이래 살았는데, 등기를 하라할 때 등기를 했으면 되는데 시부모들이 살고 있으니까 나는 몰랐지 전혀. 지금 생각하니까 내가 바보짓을 많이 했어. 내가 등기를 못 해가꼬. 그래 집이 건물만 내 집이지 땅은 국가 땅인 기라. 일 년에 땅세 두 번 낸다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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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봤자 아무 그것도 없어. 시부모 두 분, 시동생 둘, 딸아 그꺼지. 우리 영감 할배랑 일곱 식구 살았는갑다. 이 집은 그때 그대로인가요? 살기는 좀 어땠나요? 방 한 칸 정도 나간 택이지. 그때도 방 두 칸이었는데 돌담집이 되논께 두꺼워서 방 두 칸이 건물 그 자첸데, 개량하면서 지금 우리 집이 틀어졌잖아요. 이렇게 빼딱하게 틀어지면서 방 하나 정도 우리 주방 정도 나간 택이지. 뜯기가꼬 나간 게. 온돌방은 온돌방인데 불을 땔 수가 없어. 불 때면 마, 막구들 놔논께 연기가 온천지에 나오고 그랬다. 그때는 이 집이 방 두 칸이래도 온돌방이 아니고. 그래도 그래 살았는데. 물이 여기 그때 참 귀했었어. 이 동네가 물이 귀했어. 중리 저기에 아카시아 휴게실 있는데 아침에 샘에 가서 물 길어다가 먹고 이랬어. 아침에 동이 갖고 나래비 서면은 하루 종일 물 몇 동이 이 오기 힘들어요. 우리 영감 술초빼이라 월급 제대로 안 가져오재. 술 좋아하재, 노름 좋아하재. 이러니까는 만날 월급 타서 내 손에 쥐어준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나는 받아 본 역사도 없고. 아아 하나 놓고 살다보니 아아는 아픈데 병원에 가야 되는데 병원비도 안 주재. 아아는 아파서 설사를 해서 줄줄 하재. 젖은 작재. 그래가 우유래도 타서 되면 젖이 불는다 아이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젖을 있는대로 다 짜버렸어. 수건으로 짜는데 그 젖비린내 얼마나 나노. 짜고 또 물로 씻어가꼬. 간호원들이 젖을 마 푹푹 짜거든. 안나오나 싶어서. 그래가꼬 우유를 탔어. 표를 탔어. 얼매나 무섭게 하는지. 간호원들이 못됐어. 일주일에 한 번 타면은 찹쌀가루라는 기 또 나오거든. 우유에 같이 타 믹이라고. 아아가 우유를 안 먹으니까는. 그 우유를 가져와서 우리 죽 끓이 먹고, 내가 팔아 묵고. 또 비타민이 나오거든. 비타민도 팔아 묵고. (씁쓸하게 웃음)
신발 공장, 공사판, 식당 뒷설거지에 아파트 청소일을 하다가 젊었을 때는 무슨 일들을 하셨나요? 나는 젊어서부터 허리 다리가 안 좋더라고. 안 좋아도 그래도 젊은 혈기니까 마 그냥 여사로 생각하고 일하러 댕기고. 나도 안 해본 짓이 없어요. 별짓을 다 해봤어요. 근데 공사판에 일하러 댕기면서 골병이 들었어요. 돈 좀 많은 그 맛에 일 다니느라. 그러니까 남는 거는 골병밖에 없는 기라. 공사판에 노가다 일을 하러 그때는 하루 삼만 오천 원씩 받고 일을 하고. 그저 젊은 혈기에 일을 하고 밥도 제대로 묵도 못하고 새벽에 기 나가고 밤중에 들어오고 이랬는데. 차라리 큰 식당 같은데 들어 가가지고 주방장으로 돌았으면 괜찮았을텐데 뒷설거지 하는데 있다가, 공장생활 했다가 이러니까는 옳은 그기 없고, 신발공장에 다녔거든 내가. 사상, 가야 그쪽에 댕기는데, 그러니까 차 타고 오고 가는 시간이 두 시간이 넘는 기라. 차가 밀리고 이라면은 내가 아침에 1) 1951년 피난민들을 위해 정부는 부산의 적십자 병원과 철도병원을 구호병원으로 지정하여 의료서비스와 우유 등을 제공했다. 21
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믹일라고. 대신동 구호병원1)이라고 조그맣게 있었어. 거 가서 우유를 탈라고 새벽에 가가지고 아아 젖 먹을 때
22
여덟시 반 출근이면 여기서 일곱시 되면 나간다고. 나가면은 차 기다리재. 그러다보면 집에 오면은 여섯 시 반에 마치고 저녁에 집에 오면은 아홉 시 되는 기라. 만날 밤중에 나가고 밤중에 들어오니까는 동네 사람도 잘 몰라. 신발 공장에는 얼마나 다니셨어요? 다니기는 오 년을 다녔는데, 회사가 망했는 기라. 업자 밑에서 띠가꼬 하는 일이 되논께는. 하다가 세원2) 같은 큰 회사 거 띠가꼬. 우리는 뭐 했느냐면 신발창, 바닥에 하는 거 카피하는 거, 풀칠하고 그런 거 했거든. 지하에서 하니까 공기가 엄청스레 안 좋은 기라. 그래 처음에는 들어갈 때는 신발 냄새가, 진짜 고약하고 오래 다니다 보니까 냄새를 하도 맡아 놓니까 그 다음에는 별로 모르겠는 기라. 큰 신발 업체가 망하는 바람에, 회사도 망하는 바람에 한 사 개월 치 월급을 못 받았어요. 그 돈을 받을라고 쫓아 다니도 결국은 못 받고 말았고. 그러다보니까는 인제 너므 집으로 댕기다가 식당을 댕기 봤다가. 그래가꼬 그때부터 할 수 없이 노가다를 나가기 시작했는 기라.
우리 막내가 세 살 때인가. 마흔 몇 살 때까지 다닜어요. 영감쟁이 놀고 있재 하니까는 아아들 데꼬 살라 하니까 안 되겠더라고. 노가다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집 짓는 데 공사판에. 공구리치고 막 일하는 데 댕기는데, 지금으로 치면 공구리3) 가지고 붓고 하지만은 그때는 우리가 모래 자갈 올리가꼬 공구리 치고 그랬거든. 우리는 물 올리고, 모자라면 모래도 올리고 자갈도 올리고. 그래도 살아봤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것도 못 보고 이래 살고. 요즘은 허리 수술하시고 집에만 계시나요? 내가 안 번 지가 십삼 년 됐는갑다. 다리 허리가 너무 아프니까. 퇴행성 관절이라 무릎이 하도 아프니까 쪼글치고 앉지를 못하는 기라. 결국은 병원에 다니면서 주사도 맞았고. 무릎에 염증이 생겨 채이니까. 무릎이 팅팅 부어가꼬. 오그리고 앉지를 못하는 기라. 그래가꼬 물 몇 번 빼고 이러다 보니까는 넘의 밑에 일하면서 내가 자꾸 아프다고 그거 할 수도 없어서, 반장 보고 이야기하니깐 많이 아프면 조퇴해줄 테니깐 그냥 일하러 댕기라 그래도 그게 사람이 양심이 있지. 너무 많이 아프니깐. 여기 반도보라에 일했거든. 처음에 해동병원에 삼 년 근무하고 있다가. 한 달에 두 번 노는데. 내가 삼공일4)날 놀면 상대편이가 첫 공일날 놀고 그 자리까지 내가 청소를 다 해주야 되는 기라. 그래하다 보니까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든가 제사 있다든가 무슨 잔치 있다든가 하면 가 볼 수가 없는 거라. 그래가꼬 안 되겠는 거라. 반도보라는 일요일날마다 노니깐. 아파트 일이 병원보다 더 힘들더라고. 이십오 층꺼지잖아요. 세 라인이니까 칠십오 층이 되는 거라. 그러니깐 왁스 2) 1976년 설립된 부산지역 대표적인 신발 제조 회사 3) ‘콘크리트’의 일본 발음 4) 세 번째 일요일 23
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몇 살 때 다니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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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해야지 대청소해야지. 일요일마다 놀아도 더 고달픈 거라. 그라고 보니깐 무릎이 자꾸 아프기 시작하고. 대청소할라 하면 무릎이 아파도 내 자리는 내가 해야 되는데, 칠십오 층을 일년 열두달 내~ 해야 되는 기라 돌아가면서. 너무 힘이 들고 다리가 너무 아프고 해서. 그래도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칠십 살까지는 해야 되겠다는 자신을 가지고 일하러 다닜는데 몸이 안 따라주더라고. 그래가꼬 결국은 여기서 저기 일하러 다니는데도 세 번 쉬어가고 아침에 대충 해놓고는 옥상에 가가지고 내 혼자 울고. 너무 아프니깐. (눈물) 그러다가 결국은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사표 내고 나와가지고 병원에 이십오 일 동안 입원해 있었어요. 다리가 너무 아파가꼬. 밖에 나가 일하던 사람이 집구석에 못 붙어 있겠더라고. 갑갑증이 나고. 친구가 장사하는 매장에 가자 그러더라고. 그래 거 가가지고 몇 번 다니다가 안 되겠다 싶어가꼬 부산역 있는 식당에 갔는데. 오후 네 시 가가지고 밤 열 시까지 하는데,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지도 못하고 내~ 서서 일 하는 거라. 주방 일을. 그런데 주방 천장이 우리 주방 천장 매로 얕든데 가스불을 열 몇개 키니까 더워서 사람이 마. 난 또 유달시리 땀을 많이 흘리거든. 땀이 물처럼 줄줄줄. 옷이 만날 이래 젖어 있고, 열이틀 일했는데 내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그래가 또 도짓는 기라.
그때부터 집에 있으면서 병원에 다니면서 이라는데. 물 빼고 나서 누가 그라더라고. 카레 있잖아요. 먹는 카레. 카레 그거를 갖고 막걸리에다 개 가꼬 무릎 여기다 붙이면은 무릎에 물 고이는 게 가라앉는다고 그리 해보라고 하더라고. 카레 일 킬로 사가지고 처음에 막걸리에 해가 붙이니까 한 삼십분 되면은 고춧가루 뿌린 거는 일도 아니라. 이 살이 막막,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어. 너무 아파가꼬 화닥거리고. 그래도 한 시간을 참아야 되는 기라. 막걸리가 열이 나니까 부글부글 게더라고. 그래서 인제 막걸리 말고 소주에다 개 가꼬 한 시간 있다 띠면은 여기가 벌겋게 성이 나가지고. 그랬는가 가라앉았어예. 그러자 인제 우리 친구들도 무릎이 아프다 그래가지고 여름이니까 저기 평상에 같이 앉아가지고 붙이고. 그 사람들은 못 참는 기라. 한시간을 참아야 되는데. 나는 억지로 참고 그래가지고. 하고 나면은 여기가 벌겋게 달싸가지고 이랬는데. 그리 해가지고 물 고이는 거는 없어져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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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카레 가루를 소주에 개어 아픈 무릎에 붙이면 좋다하더라고
우리 친정 아부지가 울기도 마이 울었어 남편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중신을 해가지고. 우리 친정 아부지 하고 우리 시아버지 하고 옛날에 없는 사람들이 벌이 뭐 있노. 자유당 시절 때 지게 짐 지고 이라는 거. 우리 친정 아부지는 구루마를 끌고 댕기다가 살기가 어렵다 보니까 구루마 다 팔아가꼬 지게벌이를 하다 보니까 거기 지게꾼이가 한 대여섯이 되는 기라. 거 앉아서 모여가 놀다가 짐이 있으면 지고 오는데 그러다 보니까 우리 시아버지하고 알게 됐는데. 우리 시아버지 평생 말이 없는 거라. 그런께나 사돈을 보고 우리 친정 아부지가 딸을 줬는 거야. 내가 어디가 물어보면은 전실 자식이 있는 데를 시집을 보내라 하더라고. 내가 팔자가 그만큼 좀 세니까는 고런 데를 가면은 그 팔자를 떼우고 산다고. 그래가 아부지가 전실 자식이 있는 데를 나를 줐는거라. 시아버지를 보고 나를 줬는 거야. 그런데 설마더러 술 먹는다케도 그렇게 술 먹고 가정을 모르리라곤 생각을 안 했지. 우리 친정아버지 울기도 마이 울었어. 우리 영감 죽은 지 20년이 넘었어요. 일찍 죽었어요. 결혼 전에는 어떤 일을 하고 계셨어요? 내가 넘의 집에 열일곱 살에 가가지고 스물세 살꺼지, 내 시집올 때까지 군인, 대위 집에 있었어. 그랬는데 나도 참 바보지. 그때 돈으로 이천 원씩 받고 있었어. 한 달에 이천 원씩. 이천 원씩 받고 있는데 어찌됐는냐 하면 우리집이 살기가 어려우니까 내가 다섯 달치씩 땡기서 받았어. 만 원씩. 땡기 받으니까 이 완전히 내가 그 집에 메인 사람이 됐뿟는 기라. 어디를 밖으로 못 나가는 기라. 도망갈까 싶어서. 그래가지고 다섯 달치 월급 땡기가 받아서 집에 보내주고 그럼 그 집에 사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목욕 보내주는 거. 한 달에 한 번씩 영화구경 시키주는 거. 그 외에는 밖에 내가 못 나가는 기라.
아버지가 아프다고 거짓말해서 그때서야 그 집에서 나왔다 음식을 하면은 국을 끓이든가 나물이라도 하면은 먹을 만한 거는 저거가 다 묵고 나는 김치 한 쪼가리 밖에 안 주는 기야. 근데 나는 그때 당시 김치를 못 먹었어요. 매운 거라고는 입을 못 댔어. 그래 김치 한 쪼가리 하고 밥 주면 그노무 김치는 못 먹겠는 기라. 그러면은 그때 당시 열 몇 살 먹은 아이가 밥 얻으러 댕기는 아이가 있었어. 그라믄 우리집에 밥 얻으러 오면은 아무 소리 하지 마라고 (손가락을 입에 대며) 입을 이라거든. 그라믄 김치 대가리하고 이래 모은 거는 가를 부어주고 이랬어. 밥은 내가 줄 거 없으니깐. 그때 그 가스나가 열 살인가 그래 밖에 안 되겠더라고. 밥 얻으러 소쿠리 요렇게 들고 보재기를 덮어 씌아가 밥 얻으러 댕기고 그랬어.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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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 문 앞에 와서 보고 있어. 그러면 난 김치를 부어주고 빨리 가라고 그라고 보내고. 나는 맨밥을 항상 물에다 말아 먹었어. 저거 소고기 하고 국 끓이면은 소고기 달달 볶아가지고 숙주나물 넣고 이렇게 국 끓이면은 저거 둘이 먹고. 내가 한 그릇 묵어봤자 얼마나 묵겠노. 똑 국이 남으면 놔놨다가 즈그 묵고 나는 안 줘. 국을 일절 안 주는 기라. 나물 볶은 거 먹다 남은 거는 먹으라 그러고. 참 내가 지금 같았으면 왜 그런 집구석에서 그러고 살았는가 몰라. 내가 스무 살 되는 해에 남자가 전방을 가게 되가지고 지가 전방 가는데 기어이 나를 끌고 갈라 하네. 나는 안 간다 카고 지는 자꾸 데꼬 갈라한 게. 지 맘대로 할 수 있거든. 지 맘대로 지 자유대로. 집에 한 번 가고 싶어도 안 보내줘서 못 가고, 추석 명절, 설 명절에 집에 가가지고 하룻밤도 못 자게 해. 그냥 바로 오라고. 그 집에서는 어떻게 나오셨어요? 그때만 해도 스물세 살이면 나이 많다고 난리거든. 시집 보낼라고 오라고 한 걸. 아부지가 지독하게 아프다고 하는 기라. 가망이 없을 정도로 아프다 하는 기라. 위독하다는 소리 들으니까는 어떻게 또 안 가보겠노. 양복상자에다 옷을 입던 거 주섬주섬 싸가지고 줄을 묶어가꼬 아침에 여덟 시 차를 완행을 타논께나. 부산에 대구꺼지 오니까 비가 막 부슬부슬 내리더라고. 부산에 오니까 비가 엄청서리 쏟아지는 기라. 그래 부산역에 내리가꼬 비를 맞고 버스 타고 집에 와가지고 문을 턱 여니까. 아부지가 아프기는 뭘 아퍼. 멀쩡하대. 얼마나 부애가 나는지 그 옷상자를 방바닥에다 집어던지고. 내가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그러고 울었다니까. 그러고 내가 안 갔어. 얼마나 자식 보고 싶으면은 거짓말꺼지 하고. 또 나이도 있으니까 시집. 그래가지고 시집보낸 기 이런 데를 보냈는 기라. 힘들다는 말씀 남들한테 안하시지요? 안 해. 못하잖아. 그런데 한 번씩 무슨 말하면 자꾸 하소연을 하게 되는 기라. 내가 이렇다는 그기 자꾸 말 하고 싶어. 사람 보면 그러니 내가 안 만날라고 하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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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오니까는 그때가 시계가 몇 시고. 부산에 오니까 어두컴컴하더라고. 완행이 되니까 엄청시리 시간이 긴 기라.
① 단기 4294년(1961년)이라고 적혀있다. 이송도 바닷가 모습과 당시 의복을 볼 수 있다. ② 신발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②
①
③ 가족 야유회 ④ 아들과 함께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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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⑤
⑤ 아들의 모습 뒤로 흰여울길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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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수용소에 칸도 없고 아궁이에 불때가 밥이나 겨우 해먹고 그랬어
송순옥
1947년 함경도 출생 1950년 피난으로 거제도 이주 1952년 이송도로 이주 한국전쟁 때 함경도에서 거제도로 피난 후 부모님과 함께 영도 이송도 에 정착하셨다고 한다. 고생도 많이 하고 지금은 몸도 많이 아프시다. 김 광석을 좋아해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는 직접 김광석 노래를 불러주셨던 감성소녀이다. 살고 있는 영선아파트 가 좀 더 정비된다면 이만큼 살기 좋 은 곳은 없다고 말씀한다. 송순옥 할 머니의 작은 집에는 딸들에게 줄 마 른 고사리, 말린 나물들이 집안 곳 곳에 쟁여져 있다. 남은 여생을 아파 트 빈터에서 텃밭을 일구며 큰 욕심 없이 아프지 않고 살고 싶다며 웃으 30
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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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을 거제도에 다 내라 놨거든. 거서 못 살아서 부산으로 왔지 1.4 후퇴 때 가족 모두 함경도에서 피난오신건가요? 아마 그럴 거에요. 나는 자세히 들은 적은 없어요. 우리는 일체 대화가 없어가꼬. 먹고 살기 바빠가꼬. (웃음) 피난민들을 거제도에 다 내라 놨거든. 그서 못 살아서 각자 이쪽으로, 천지로 흩어져 나왔지. 피난민들이. 그때 제일 가까운 부산 여기로 왔지. 거제도에 가정집에 헛간 같은 거를 내주라 법에 그래 되놓이 그런데서 살았지. 그래 살다가 너무 생활이 안정이 안 되가 먹을 것도 없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오빠 둘이랑 나를 데리고 와가꼬 살다가 일 년 있었나. 엄마가 동생들 데리고 와서 살다가, 언니는 영양실조에 걸려가 아파서 죽었고 열여섯 살에. 남은 식구는 고생이 말도 못해. 나이가 들어서 기억이 많이 나는 게 있더라고. 무슨 아아가 피가 막 흐르고. 갓난쟁인데. 금새 난 아안데. 피가 막 묻어 있거든. 오래 되가꼬 물어봤다. “엄마 애기가 피묻은 아아가 생각난다.” “그게 니 동생 아이가.” 우리 동생 낳을 때 내가 우리 엄마를 쫓아 댕기면서 그래~ 봤다케. 그게 나한테 충격이니까 안 잊혀지겠지. 그라고 기차 지붕에 타고 오던 그 생각. 기억이 나는 기라. 딴 거는 안 나는데. 피난 오면서 기차 지붕 위에 있었는가봐. 기차를 탔던지 그거 오던 생각만 쬐끔 나. 한강다리 넘어올 땐가 그 생각이 나더라고. 처음 왔을 때 기억나세요? 오니까 저 우에 마을 전체가 전부 다 그거였어. 피난민 수용소. 군용천막이 이래 쳐져 있고 그랬어요. 그 때 나는 너무 어려서. 여섯 살 먹었나? 일곱 살 먹었나? 모르겠네. 형제가 여덟인데 서이는 이북에서 죽고 하나는 빨갱이한테 끌려 나가고. 열일곱 살 무가꼬. 언니는 저 중국땅에서 못 나왔어. 지금 동생하고 나하고 뿐이라. 그때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어요? 아마 상황이 어찌 됐능가 몰라도 피난민 수용소에 칸도 없고 쭉 복판에만 사람이 댕기고 아궁이에 불 때가 밥이나 겨우 해먹고 이래. 일어나 보면 사람들이 다 보여 저 끝까지. 그러다 사라호 태풍 때 천막이 막 쪼개지면서 각자 집을 흙으로 돌로 지어가 살았지. 그때는 먹을 게 없어, 버릴 것도 없고 그때는. 뭐 좀 가지면 갑질할라는 세상인께. 우리 같이 힘없고 순박한 사람들은 못 살았어. 거 나와서도 좀 치악스럽고 머리가 비상한 사람은 잘 살았고. 먹는 게 다 거서 거고 사는 게 빠듯해논께 눈만 뜨면 쌈질이고. 주로 이 동네가 그런 사람이 많이 살았지. 양아치보다 더 못하게 살았지. 집이라고 쪼깨 그라믄 바람만 불어도 다 날아가고 물 줄줄 새고. 이 구석 저 구석 비 안 새는 쪽으로 가서. 지금 생각하면 음악가면 작곡은 했을 기다. 여는 양철 다라이 놔두고 비가 통통 떨어지면 안 떨어지는 구석에 들어가서 자고 그랬어. 이불이나 많나, 이불 하나에 식구 다 들어가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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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거기를 곤두박질하고 그래 놀았어 어릴 때는 뭐 하고 노셨어요? 어릴 때는 티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여가 공동묘지였거든. 애들은 놀데가 어딨어. 무덤 거기를 곤두박질하고 그래 놀았어. 할미꽃이 천지인데, 무덤가에 할미꽃이 말로 못했거든. 그 할미꽃 뜯어가 놀고. 밤 되면 ‘빠다꼬 놀이’라고 있어. 지금 생각하면 숨바꼭질이랑 한가진데, 동네 애들이 다 모이가꼬 열 명이면 열 명, 스무 명이면 스무 명 똑같이 반으로 갈라가지고 가위바위보 해가지고, ‘짱께이뽀’ 그랬다고, 일본말로. 그래가 반쓱 갈라가지고 그때는 애들이 어리석어논께 어리버리한 아아들은 이쪽으로 밀고 그래도 좀 똘똘한 것들은 저거끼리 몰고 이래가지고. (웃음) 이긴 사람이 숨는 거야. 숨으믄 무덤이 파진 그 안에. 그때는 겁나는 줄도 몰랐어. 무덤을 파가 간 사람이 있거든. 파가서 송장 태워가 없앤 그런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에 가서 (몸을 웅크리며) 요~라이 박히가 있고 이랬거든. 지금 같으면 기절한다. 이라다가 한 사람이 나가서 저 짝에 돌아가서 “여깄다!” 그러믄 소리 있는 쪽으로 가는 기야. 그러다 들키면 “빠다꼬!” 이란다고. 또 ‘다스꼬이’라는 놀이를 깡통에 돌 넣어가 차는 거. 그라고 말놀이, 공기놀이 그런 거 많이 했어. 진짜 우리 무지 말괄량이 같이 그랬다. 바닷가에서도 많이 노셨지요? 그때는 남자 여자 구분 없이, 바닷가에 가가꼬도 수영복이 있나 뭐 있나. 까만 빤쯔 하나하고 그기 운동복이었거든. 우에는 아무것도 안 입고. 5,6학년이나 된기 그랬다니까. 우리가 그래 헤엄치고 동네 애들이랑 막 놀았어. 그날도 놀고 있는데 내가 그때 6학년인데 키가 제법 컸어. 친구 오빠가 군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바닷가 내려왔어. 내가 뭐 어짜고 하면서 거기 서가꼬 친구들보고 막 (소리치며 놀고 있는데). ‘하아~.’ 그리 보드만, “순옥이 이리 와봐! 다 큰 기집애가 옷도 안 입고!” 그때 갑자기 부끄러워 미치겠드라고. (웃음) 그 다음부터 위에 옷 입고 수영했어. 저 밑에 바닷가 백련사 밑에 그때는 자갈이 없었어. 태풍 때 자꾸 밀려와서 그랬지. 우리 어릴 때는 자갈이라곤 없었어. 모래 이런 거는 없었고 근까 해수욕하다 파도 치면 여가 다 다치고 피가 철철 나고 그래도 우리는 그걸 보통으로 치고. 험했어. 지금은 지형이 달라져가꼬 물도 얕아졌지만 그때 당시는 참 깊었어. 지금은 모래가 차고 많이 얕아졌대. 그래 친구들은 해수욕을 다 잘 하든데 내만 못해. 물에 빠지고 물 디기 먹고는 물에 한번 빠지면 물이 무서워서 못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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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송순옥
했어. 마당에서 이래 잡고는 마 끄티 사람을 치면 그 사람은 죽고 하는 거. 자치기도 하고 깡통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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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학교 다니던 길 기억하세요? 여기 남항초. 어릴 땐 학교 가는 길이 참 멀지. 지금은 몇 발 안 되지. 그때는 먹을 게 제대로 있나, 춥기는 어찌 그리 추운지. 옷이 안 따시니께 더 추웠고. 그때 겨울은 되게 추웠어요. 그래가 고무신을 신고 가다 돌부리에 받히가 길은 좋나? 온데 돌이고. 이 길은 아니고 흰여울길 있지예. 저 밑에 맏머리샘 있는 그쪽으로 꼬불꼬불 그리 갔다니까. 미군들 쓰던 철판으로 된 슬레트 지붕같이 골이 파진 반달같이 지어진, 그 쓰다가 버리는 그 안에서 공부를 했어요. 죽을 것만큼 힘들었어요. 더워가지고. 육 분단까지 있었나? 애들이 많아노니께 찜통 한가지였어. 한반에 오육십 명 됐어요. 이 학교도예, 햇수로 치면 한 삼 년 과정이나 배웠나. 월사금 못 내서 맨날 쫓겨 나왔어. 집에 와보이 부모도 없고 아무도 없는데, 물 것도 아무것도 없는 거 아는데 집에 오면 뭐 하겠노. 여기 해동고등학교 있었거든. 그 앞에서 내~ 놀다가 책가방 가지러 가면 선생님한테 또 매 맞고. 내 그놈의 선생 이름도 안 잊아뿐다. 김○○. 피난민 애들 주라고 배급이 나와. 그런데 전부 잘 사는 아아들 갈라줘. 우리는 안주고 그랬다. 그때는 그만큼 비리가 그랬어. 그 선생이 특히나. 부잣집 애들 밝히고. 우리처럼 못 살고 회비를 찌카주는 갑드라고. 가들은 노배기1) 불러내가 풍금치면서 노래를 시키고 우리는 멍하니 구경하고. 어릴 때 자주 먹었던 음식 기억나세요? 수제비도 해 먹고 빵도 해 먹고. 그때 많이 해 묵은 거는 국수밖에 더 있나. 국수를 주로 많이 해 먹었지. 없는 서민들은 맨날 국수 해 먹고, 수제비 해 먹고 그랬지. 그때는 말분가리2)도 없어서 못 먹었는데. 밀가루에서 걸러서 걸러서 제일 하빠리 버리는 거. 그런 것도 사람들이 막 먹고 했는데 정말로 못 먹겠드라. 밀가루도 그때는 일등급, 이등급, 삼등급 이리 있었는데 쭉 내려가면서 급이 있었지. 갈수록 밀가루 냄새가 나면서 누렇고 이래. 못 먹어 어릴 때 불렀던 노래 기억나세요? ‘아 목동아3)’ 아일랜드 민요 부르고. ‘(노래 부르며) 해는 져서 어두운데~’ 그런 가곡을 많이 불렀지. 어릴 때는 가곡을 많이 했는데 요새는 가곡 부르는 애들이 없어.
1) 노박 : 늘, 항상이라는 강원도 정선 지역어 2) 제분 과정에서 밀가루를 빼내고 체에 남은 부산물을 다시 분쇄하여 입자도에 따라 다시 분리하는데 여기서 밀기울과 등외 밀가루 중간의 크기를 가진 것들을 말분이라 부른다. 3) 아일랜드 민요 35
먹고 살려고 왔지 _ 송순옥
안내는 아아들은 따로 앉히고. 사, 오, 육 분단은 부자, 잘 사는 아아들. 그때는 수시로 그 애들 엄마들이 와서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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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버스 다니는 길 도로는 옛날에 다 공동묘지였다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스무 살에 결혼하실 때까지 일을 하셨어요? 옛날에 이 동네에는 오렌지라는 것을 많이 했어. 이렇게 세모꼴로 된 거. 어릴 때 좀 무봤을 걸. 비니루 요렇게 된 거. 지금 생각하면 환타하고 맛이 똑같아. 그걸 오렌지라 했거든. 옛날 토백이로 산사람들은 그거 안한 사람이 없어. 동네에 많이 했어. 새벽에 만들어가꼬 이고 국제시장에 팔러갔지. 영선아파트에는 언제부터 사셨어요? 남편이 보수동서 쭉 살다가 영도 봉래동으로, 봉래동에서 계속 살다가 청학동에서 살다가 동삼동에서 살다가 그랬어. 내가 여 살은 지가 한 이십팔 년. 아파트가 한 오십 년 됐어요. 제일 오래되었지. 그런 걸 아직도 놔놓는다는 거는 기가 찰 노릇이다. 지금 버스 다니는 길 도로는 옛날에 다 공동묘지였다고. 산길이 요래요래 있었고. 사람들은 저 아래 글로 다니고. 요 산길로는 낮에 다니고 밤엔 안 다니고. 다니는 사람은 있었지만 간이 없어졌지. 아파트 지으면서 다 없앴지. 그래가 무덤 파가라 공고 붙고. 아파트가 거의 없을 땐데 영선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어땠어요? 여기 시범아파트잖아. 부산에 아파트가 없을 땐데. 잘 살아야 저런 데 드가나 싶어서 옆에서 지어도 여기를 한 번도 와본 적도 없고. 사람이 좀 그렇잖아. 내보다 좀 낫다 싶으면 거리감이 생기가꼬. 새마을 운동한다고 사람들 불러내가, 그때는 삼천 원 받고 일했나 이래. 하루 일당.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와. ‘엄마야, 저 잘사는 사람들은 머하로 오노, 머하로 공사오노’ 이랬드만, 난중 알고 보니 우리보다 더 못한 데라 여가. 지금 영선아파트 살기는 어떠신지요? 무섭지. 밤 되면 아무것도 없어. 삼 층만 올라가도 귀신 나올 것 같다니까. 화장실이 고장이 나가꼬. 우리 꺼는 이쪽 편에 있거든. 없어서 저쪽으로 간다 아이가4). 그란께 누가 집에 아아라도 오면, 내가 우리 아아들 못 오라 한다아이가. 화장실 땜에. 요즘 아아들 저런 화장실 보면 기절한다고. 뭐 퍼세식은 아니라도 변기에 앉아가꼬 물 내리가는 그런 것도 아니거든. 이 집을 세를 주고 딸네집 가서 한 칠 년 있었나. 그러다 왔거든. 온 지가 한 오 년 되네. 다 고장 났드라고 그게 제일 불편해. 남의 집을 넘어서 갈라 하니. 명절 때는 이 집을 지나가는데 자존심 상해 죽겠는 거라. 그래가 화장실이 없어가 저 사격장 쪽으로 가고 그란다. 사람들 많으면 화장실 다닥다닥 붙어가꼬 진짜로 안 좋다. 4) 영선아파트는 복도 중간에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집마다 한 칸씩 배당되어 있다. 37
먹고 살려고 왔지 _ 송순옥
큰 사람은 다니기도 하고 간이 작은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은 못 다니고 그랬어요. 공동묘지는 요거 지으면서
김광석도 좋아하고 김건모도 좋아해요 취미생활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세요? 친구라고 딱히 없어. 여기가 원래 육십 세대가 살아야 맞는데 지금 십오 세대도 안돼. 십사 세대가 사나. 그것도 혼자인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그래 밖에 안살아. 사시는 분 중에 내 또래만 있어도 괜찮겠어. 이야기하면 젤 나이가 근소하게 차이 있다 해도 칠십여섯이제. 칠십여덟, 칠십아홉, 구십, 팔십 이래. 솔직히 대화가 좀 안되지. 요새도 저길 가거든. 영도사회복지관. 영도병원에 있던 자리. 그때 내가 우울증이 많이 와가 약을 먹을 때라. 한날 복지사가 설문조사를 하자는 거라. “아줌마 우울증 있어요?”, “내 우울증 있는 거 어째 압니까?” 그런 사람을 구하러 댕긴대. “그런 사람을 찾으면 물어봐야 될 거 아이요. 와 그냥 가요?” 그래가지고 재작년부터 그 팀에 들어가가꼬 내~ 이래 논다. 첫해도 모이고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내~ 모여 놀드만. 올해는 상반기 하반기 나눠가지고 9월 달부터 이제 하네. 복지관에서 뭐 재미있는 거 하시는데요? 모여가지고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노래도 하고. 노래 같은 건 잘 안 하고. ‘쌀과 보리가 자란다’ 노인네들 움직이라고 뭐 만드는 거. 어제는 게임을 많이 했어. 딱 한 시간. 그래가 우리 집에 전화해주고 한 번씩 방문하는 그 사람이 우리 짝을 하라고 델꼬와. 같이 하라고 어제는 좀 재미있었어. 그거 말고 모임도 없고 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주로 집에 있어. 산책가거나 밖에 좀 다니시나요? 산책은 저녁 먹고 저게를 잘 가. 75광장. 걸어서 거도 잘 갔는데. 얼마 전에 누가 목을 맸어. 옆에 할마시가 웃기더라. 별로 친하도 않는데 오드마, 내 못 나오구로 할라 그러는지 내 겁 많은 거 알거든. 내 억수로 겁이 많아요. 나는 귀신도 보이고 그래가 꼼짝도 못하고 했거든. 그래 요새 겁이 나가 초저녁에도 한번 안 가봤네. 운동을 가도 겨우 간다는 기 시장바닥 가는 기지. 시장으로 내려가는 기라. 시장 내려가니까 안사도 되는데 사고. 그게 또 파이네. 한날은 버스타고 일송도5) 갔어. 일송도 다리 해놓은데 둘러가 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 있대. 그 사람한테 노래도 신청해 듣다가 그래 왔다. 세상 좋대. 노래 신청하니까. 어떤 노래 신청하셨어요? 그날 내가 돈을 안 가져가가 그 사람이 시디를 파는데 하나 팔아주야 예의인데 못 팔아주서. “담에 오면 꼭 하나 팔아주께요. 김광석 노래 하나 부탁하께요. ‘서른 즈음에’ 한번만 불러주세요.”했지. 나 생긴 거 이래도 5) 송도해수욕장 38
나는 뽕짝같은 거 잘 안 듣는다니까. 그날도 내 김광석 노래 시키드라 아이요? 재첩국데이6) 할 때. 그라니 그 사람이 “어무이, 김광석도 좋아하세요?” 이라드라. 나는 김건모도 좋아하고 그런 거만 좋아해. 앞으로 계획이 있으세요? 계획도 없어. 그날이 그날이고 뭐 이래 아프지 않고 살면 되는데 내가 이래 아프거든. 팔십이 되기 전에 죽어야 된다는 그 생각밖에 없어. 어디로 가겠어. 이 집이 안 새는 한 여 붙어 있어야지. 무너져가 없어지면 할 수 없이 갈까. 계획도 없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이고 만날 이러고 살지, 뭐. 앞으로 흰여울마을에 바라는 점 없으세요? 바라는 점 많지. 여기를 좀 활성화해달라고. 우리 영선아파트 외국 사람이 2층 버스타고 온대. 외국 사람도 많이 온대. 창피스럽다니까, 이거. 오는 사진사들 많아. 구경오는 애들도 있어. 1호동에는 무너져가꼬 막 뼁끼칠도 안하고 엉망이었는데, 구청에선가 어딘가 우선 뼁끼칠만 하고. 겉으로 보기에 형편없었어요. 1층에서 여 사는 사람을 이주를 시키던가, 안 그라믄 영도구청에서 이거를 전부 리모델링을 해주던지. 아니면 우리를 다 이주시켜서 확 헐어가 좋은 데를 짓던지. 길가에다가, 이게 참 좋다고. 영도에서 아마 없을 걸. 이 바다 보이는 이런 데가. 참 나 떠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내 죽어야 이 동네 떠나나 싶어.
6) 흰여울마을공동체가 주도하여 마을 주민들과 밥을 나눠먹는 행사 39
먹고 살려고 왔지 _ 송순옥
보면 부엌이 무너져 구멍나 있다. 이번 태풍 때 오래되니까 무너질 확률이 많아. 온데 균열이 가 있거든. 그라믄
① ② ③ 아이들과 함께. 주로 자녀들의 사진을 주셨다. ② ①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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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송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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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케키 장사하다 야간 통행금지 위반으로 영도경찰서 유치장 들어가 남은 거 다 팔고
한상원
1938년 출생 1950년 피난으로 거제도 이주 1951년 이송도로 이주 자신의 삶이 소소한 역사라고 말하 신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절 대 소소하다고 할 수 없었다. 영도에 서만 66년째 살고 계시고, 34년 동 안 통장 일을 맡으셨다. 또 지금의 흰 여울길에서 산책로로 내려가는 계단 을 만드신 분이다. 그러니 그 삶을 어 찌 소소하다고 할 수 있으랴. 한상원 할아버지는 지금도 마을에서 꾸준 히 자원봉사를 하고 계신다. 긴 역사 를 가진 분답게 자택에서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물건과 사진을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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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이북입니다. 51년도에 마을로 왔습니다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고향은 이북입니다. 육이오 사변 때 열세 살, 국민학교 오학년 때 피난 와가꼬 거제도에서 한 칠 개월 살다가 51년도에 마을로 왔습니다. 요 우에 살다가, 요게 와서 살다가 지금 육십육 년째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삼남매 데리고 나왔거든요. 그래서 누님하고 여동생은 서울서 살고 있고. 나는 여기서. 어머니가 90년도에 이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아내 분과는 어떻게 결혼 하셨어요? 다 같이 실향민입니다. 중매를 해서 만나가꼬. 우리 스물다섯, 여섯일 때지. 저 분은 원래, 우리 집사람은 당감동에 살았거든요? 어머니 친구 되신 분이라 해야지. 인연이 돼가꼬 그래 중매를 해가꼬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 집 사람도 그 당시에 60년도, 62년. 어쨌든 당감동에서 부녀회 부회장까지 맡아서 하시던 분입니다. (웃음)
본래 어머니가 요 자리 만들고. 어머니가 저 우에 옛날에 이송도, 공사하면서리 무너져 가꼬 그래서 여기 와서 살면서리. 이 집을 내가 지금 제대하고 와서 서울(파주)서 삼 년 살다 내려와가꼬 내 한 열 번 이상 집수리, 증축을 하고 그랬어요. 그 당시에는 불법 집으로 되어 놔서 여기 허가도 안 나고 그러니까 짬짬이 천천히 증축을 해가면서 집수리를 하고. 그런데 불법 집이 해결 돼가꼬 이렇게 이 동네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시 여기는 밭입니다, 밭. 여기는 우리가 왔을 적에는 집이 몇 채 없었어요. 주변이 다 수용시설입니다. 부산시에서 텐트 쳐가꼬 살다 보니까 그 당시에 태풍이 와가꼬 쪼개져가꼬 시에서 ‘그럼 돌판 집을 짓고라도 살아라.’ 이래가꼬 이짝 길 건너 여기는 다 공원묘지입니다. 이 산덩어리. 부산시에서 그 당시 객지 죽은 사람은 가마니에 돌돌 말아가꼬 전부 여기에다. 공원묘지 묘자리입니다. 신작로는 언제 생겼는지 기억나세요? 이 길은 62년도에 났고. 오십 년 넘었다고 봐야지. 미성건설에서 길을 내가꼬 그 당시에 길 나면서리 여기다 어머니가 돌판집을 무허가로 짓다보니까는 구청에서도 다 지은 집을 허물지는 못해가꼬 한쪽에는 초소가 생겼어요. 우로 올라가는. 이 길 파출소 초소가 생겼어요. 어머니가 (집의) 한쪽은 초소를 빌려줬고. 옛날에는 참 이 집 자리가 굉장히 역사 깊은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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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한상원
계속 이 집에서 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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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가 떡국장사를 하면서 여기서 터를 잡았어요 계속 기름집을 하셨던 거에요? 어머니가 여기서 터를 잡았거든요. 51년도에 거제도에서 나와가꼬 여기서 떡국 장사하면서리, 여기서 터를 잡아가꼬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에 부산시청1)이었거든요. 시청 뒤에 청과조합이 있었거든요? 청과조합 한쪽 골목에서. 여기서 떡국 해가꼬 이고 나가가꼬 주로 아침에 뱃사람들, 시장 오는 사람들 상대로 아침 식사 겸 해서 떡국 팔고 들어오고. 어머니가 그런 장사를 했습니다. 내가 일임 받은 거지. 그 자리를. 본래 제가 여거 와서 어머이가 떡국장사 그만 두고 국수, 밀가루, 국수 기계를 놓고, 국수를 뽑았거든요. 66년도. 한 이 년 했는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국수 말다가, 국수 가지러 안 들어오는 기라. 기계를 세워놓고 들어갔는데, 나가 이짝에 와보니까 요기가 높이가 아홉 자2)거든. 어머니가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가꼬 그 길로,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적3)에, 지금 인창병원 자리, 그 병원에 이송시켜가꼬 한 육 개월 있다 나와가꼬 그래서 국수장사 치우고, 쌀장사 하는 기라. 쌀장사 하다 보니까는 자꾸 사람이 주는 기라.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이제 당시 우리 쌀장사 한창 할 적에는 슈퍼에서 못 놓기로 했거든요. 어느 때인가 이게 해제 돼버려가꼬 슈퍼에서도 쌀 놓고 이렇게. 정부에서 이렇게 풀어놨는 기라. 그래서 나도 장사 치운다 하고, 사업자 등록증 반납하고. 다른 장사로 바꾸셨어요? 사람 줄 적에 떠나야 되는데 너무 미련 두고 떠나질 못하고. 고춧가루 기계를 한 번 놔봐야 되겠다. 고춧가루 기계 하던 사람이 이사를 가비린 거라. 그래가꼬 고추가루 기계 놓다 보니까는. 기계를 놓으면 손님이 있겠다 싶어서 기계 딱 놓다보니, 재개발 들어간다 해가꼬 그래서 사람들 자꾸 떠나는 기라. 그래 이 장사도 실패작이다. 금년에 문 닫을라고. 고추 있는 거 부아 놓고 기계 처분할라고. 전기요금도 나오기 바쁜 기라, 사람도 없고 이래서. 이제 나이도 많고, 나이 팔십 줄에 접어드니. 아마 내년 일월에 문 닫고 비워놓고. 집사람은 몸이 안 좋고 해서 그냥 쉬었다가 저 세상 가는 날까지. (웃음)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몰라도 젊었을 적에 좋은 거 많이 보이소.
1) 1936년에 지어 중앙동에 있던 부산시청은 1998년 연제구로 이전하였다. 2) 한자는 약 30.3cm이므로 높이 약 270cm 높이이다. 3) 침례병원은 1968년 11월부터 초량에 있다가 1999년 금정구 남산동으로 이전하였다. 47
먹고 살려고 왔지 _ 한상원
쌀장사 치운지 한 삼 년 됩니다. 사람도 없고, 쌀장사 치운 게 슈퍼마다 쌀 파니까는 그러니까 안 되는 기라. 그
여하튼 소소한 역사는 많이 갖고 있어 아버님은 계속 영도에 계셨어요? 군대 갔다 와가꼬 62년도에 제대하고. 저 경기도 파주에 누님이 그 당시에 살아가꼬 파주에서 한 삼 년 살다가. 그 당시 우리 자형이가 미군부대 이발사를 했거든요. 미군부대 운영하는 이발사 책임자로 있다 보니까 거기 들어가서 같이 일 좀 했죠. 그래가꼬 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어머니에게 경기도 올라오라 그러니까 “난 안 나간다. 난 안 간다. 여기서 못을 박을란다.” 그래가꼬 다시 내려왔지요. 여기 살면서 가장 고생스러웠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고생이야 뭐 피난 와서 아무래도 많이 했지요. 저는 군대 가기 전에 어머이가 나이도 있고 그래서 저도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아이스케키 장사, 신문 배달, 구두닦이 또 집에서 구두도 만들어 봤고. 그러다가 자꾸 세월이 변동되고 이러다보니까, 군대 갔다 오니까, 구두하던 사람들도 문 닫고 일 안 하고. 그래서 어머니가 장사를 하자 그래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안 해본 게 없네. 사는 게 목적이다. 먹는 게 둘째고. 어쨌든 ‘남과 같이 살아야 되겠다.’ 욕심으로 안 해본 게 없지요. 그러다 보니까 그 당시는 아이스케키 장사 할 때 통금시간도 있고, 야간 통금. 열 두시만 되면 통금시간 사이렌이 울리거든. 그라믄 이제 못 다니는 기라. 아이스케키 장사하다 보니 야통(야간통행금지) 위반으로 영도경찰소까지 들어가 그 안에 유치장 들어가서 아이스케키 남은 거 다 팔고. (웃음) 이런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경찰도 참 한심하다. 여하튼 소소한 역사는 많이 갖고 있어. 다 흘러간 시절이고. 여하튼간 여거 와서 노력 안 하면 몬 사는 줄 알고, 또 여기 떠나면 죽는 줄 알고. 그래가꼬 지금까지 여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럭저럭. 오래 살다보니 이제는 경로당 회장직까지 하고. (웃음) 오래 돼 보이는 상자가 있던데 무슨 용도에요? 파주에서 한 삼년 살다가. 그 당시에 요 통을 하나 갖고, 여기에 내려온 거야. 우리 집은 이것도 역시 역사다. 62년도에 이걸 갖고 내려왔어. 어머니가 “통 이래 갖다 놔라. 구멍가게 돈 통을 할란다.” 이래가꼬 어머니가 계속 돈 통으로 쓰셨어요. 이거 물려받은 것이 저에요. 근데 이거 알고 보면 그 당시 미군 애들 실탄통이라, 총알 통이라. 내한테 와가꼬 용도가 바뀌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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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영로산책로로 내려가는 계단, 내가 만들었지 경로당 회장하시고 계시잖아요. 회장직은 2014년도에 맡아가꼬 나도 이 동네에서 67년도에 예비군 소대장을 맡아가꼬 하다가. 70년도에 통장직을. 내 지금 이 영도에서 통장직을 제일 오래 했을 겁니다. 삼십사 년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정년퇴직을 한 지가 한 이십 년 가까이 됩니다. 통이 통합되면서리. 요 위가 지금 인구가, 세대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한 삼백 세대가 줄었어요. 그 당시에는 일 개 통에는 백삼십 세대, 백이십 세대 이리 됐는데. 지금은 영선 2동에 삽십오 개통까지 있었는데 지금 십육 개통 밖에 없어요. 그만큼 통이 줄고. 지금 여기도 옛날 삼 개 통이었는데 지금 이 개 통 밖에 안 돼. 사람이 없어요 지금 여기. 이 영선아파트도 한 개 동이 육십 세대, 사 개 동이 이백사십 세대인데, 여기 지금 삼십 세대 안 살아요. 지금 세대가 다 줄고. 이 길 밑에도 한 백 세대 이상 줄었어요.
대한노인회 영도지회에 나가서 자원봉사하고 있습니다. 운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회에서 지회장님 표창 받았고. 자원봉사는 어떻게 하시게 된 거에요? 경로당 회장직 맡다 보니까, 또 여기서 어머니가 터를 잡고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자원봉사도 많이 하게 되고, 내 솔선에서 ‘이건 내가 해야 되겠다.’ 이런 점도 있고 통장직도 하다 보니까 ‘자원봉사해야 되겠다’ 이런 것도 느껴지고. 하다 보니 그리 됐네. 옛날에 75년도에는 여기서 바닷가 내려가는 오솔길도 새마을 사업으로 계단공사하고 그랬습니다. 그거를 하는 바람에 그 당시에 부산 시장 박영수4)씨거든요. 박영수 시장 표창도 두 번 받았고. 바로 이 흰여울길 옆으로 내려가면 계단 있습니다. 새마을 사업으로 오솔길 있던 걸 계단으로 만들었어. 비만 오면 위험하다 그래가꼬 동에 가서 동장보고 “이거 새마을 사업 한다고 지원해 달라.” 그래서 지원 받아가꼬 이 계단도. 저 우에도 계단 있어요. 그래가꼬 구청에서 또 보수공사 해가꼬 이렇게. 그 때 몇 분이 동원되셨어요? 요기 인원이 한 이백오십 명 동원됐어요. 마을 주민 다 왔다 봐야 돼.
4) 17대 부산시장 1971.6.12.~1977.7.6 재임 49
먹고 살려고 왔지 _ 한상원
상장 같은 것을 많이 받으셨나 봐요.
그럼 동이랑 구청에서는 어떤 것을 지원해줬어요? 세멘이지 뭐. 세멘만해가꼬 주민들한테 조금씩 지원 받아가꼬 그래 하다 보니까 영도구청에서 재보수를 새로 다 했다 아이가. 스탠 한 건 구청에서 재보수를 해가꼬 절벽에 있는 축대는 원래 있었던 건가요? 아닙니다. 영도구청에서 새로 한 겁니다. 벼랑이 무너져가꼬요. 그 옛날에 저게 무너지기 전에는 해녀들이 바닷가에서 술장사도 하고 많이 그래 했는데, 무너지는 바람이 철거시켜 버렸다. 그래가꼬 이 공사를 했어요. 옛날 사진 가지고 계신 거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사진을 참 많이 찍고 다녔어, 놀러 다니면서.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거를 내가 감당이 안 되더라고. 버리기도 그렇고. 그러니까 지금 내 사진은 친구들하고 찍은 거는 다 없앴어요. 가족들하고 찍은 거는 있어도. 우리 시절에는 우리 것은 우리 손으로 없앤다 해가꼬 사진 많이 없앴어요. 아무래도 내가 죽으면 자식들 보관하기 힘들다고. 내 있을 적에 내거는 필요한 거만 놔두고 다 태아삔다. 언젠가는 이거 버리는 기라. ※ 2018년 현재 쌀집 운영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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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한상원
① 결혼식 날 ①
② 이 시절의 웨딩카 모습을 볼 수 있다.
②
③ 군인시절 ④ 한상원 님의 아내 분이 젊었을 때 구포에서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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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살 때지 배고파서 사람 굶어 죽고 할 때라 그렇게 어려운 세상이 있었어
박기선
1933년 전라북도 장수 출생 1970년 이송도로 이주 경로당에서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 컴퓨터 앞에 앉아 바둑을 두고 계셨 다. 과묵해 보이는 첫 인상 때문에 인 터뷰가 험난하지 않을까 다분히 걱 정되었으나, 의외로 신명나게 이야기 를 풀어주셨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 는다는 할아버지에겐 젊은이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을까? 젊은 시절 배를 타 고 태평양 너머 사모아로, 막노동을 하러 전국을 떠도셨단다. 지금은 40 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있는 내 집 안 52
방이 제일 맘 편하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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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 이유는 새끼들이라도 다믄 중학교라도 보낼라니까 고향이 어디신가요? 고향이 저기 진안, 장수, 무주 구천동. 장수 살다가 내가 여기를 언제 왔냐고 하면 서른일곱 살 먹어서 왔으니까. 여기 온 이유는 새끼들이라도 다믄 중학교라도 보낼라니까 거기선 산중에는 안 되는 거라. 새끼들 데꼬 부산에 내려온 것이 첨엔 참 고생도 많았지. 여기 오니까 발전도 아무것도 안 되어 있고, 여기 아스팔트도 안 되어 있고, 버스도 안 다녔어 여기. 시골에서 도시로 나가는 사람이 많았나요? 엄청나게 많이 나갔지. 시골이 텅텅 비고 있잖아. 내가 부산에 왔을 때 인구가 이백만 밖에 안 됐는데 지금은 삼백오십만이니 사백만이니 하는데 그게 다 시골에서 온 거야. 고향엔 가끔 가시나요? 지금은 고향엔 일 년에 한 번씩 선산이 있으니까 벌초하러. 지금은 동네 들어가면 전부 모르는 사람들이라. 타동네라.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들도 있고, 아는 사람도 있고 그랬었는데, 없어져 버렸어. 이제 여기가 고향인 거지.
코가 깨졌는지 코가 없는지 그런 것도 모르고 결혼한다고 자제분들이 몇 명인가요? 아들이 셋. 딸은 한 사십 살 먹어 죽고, 아들도 여기 안 살아. 나가서 살지. 할마이도 없고 나만 여기 살지. 혼자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혼자 된지는 한 오 년 됐지. 내가 결혼을 스무 살에 했거든, 일찍 한 것도 아니지. 스무 살 넘어가면 노총각이라 그랬어. 그전에는 결혼을 하면 여자들이 죽으나 사나 그 집에 사는 거라. 뚜드려 맞고 너네 집에 가라 끌어내도 다시 들어가고. 친정집에서도 안 받아줘.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라. 그런 세상이었어. 그땐 시집살이가 참 고됐어. 시어머니, 손윗동서 시집살이가 엄청나게 고되었어. 지금은 여자들이 혼자 되면 재혼을 안 하잖아. 그 땐 재혼하려고 발버둥을 쳤어. 벌어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그렇게 어려운 세상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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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어떻게 하셨어요? 구식이지. 구식. 한복 입고 전통혼례. 가마 타고 신부집에 가서 예식을 지냈지. 거기서 하룻밤 자고 데리고 오는 거라. 그게 전통혼례라 옛날 구식으로.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한님1)이라고 있었어. 지금 말로 상놈들. 한님이 따라 왔었어. 여자가 따라오는데 색시 보호하기 위해서 따라오는 거라. 그래서 하룻밤 자고 가. 지금 말하자면 몸종. 몸종이 있었다면 잘 사는 집이었나요? 아니 잘 살진 못하더라도 마을에 가면은 어느 성 어느 성이 다 배판2)하고 살았어, 김 씨라든지 이 씨라든지 배판하고 살았다고, 막 모여가지고 살았다고. 아무데는 김 씨가 산다. 아무데는 박 씨가 산다. 그랬었거든, 마을에 동네 종이 있는 거라. 집집마다 있는 게 아니고, 큰 부잣집엔 집집마다 있지. 동네에서 불러다 쓰는 거라. 결혼식을 한다거나 할 때 가마를 메야 할 거 아냐. 그것이 상놈들이라, 지금 말하자면, 얼마 씩 돈을 주고 불러다 썼지. 그래야 그 사람들도 먹고 살 거 아니야. 그 사람들 보통 이름을 ‘씨레기’ 랄지, ‘빗자루’ 따로 종자가 있는 게 아니고 그 선조가 대대로 양반이지만은, 살던 동네에서 못 살아서 이 동네로 이사를 온단 말이지. 그러면 이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잖아. 그럼 동네 사람들 심부름이나 해주고 하다 보니 종놈이 되뿌리는 거라. 결혼하시기 전에 할머니랑 데이트는 좀 하셨나요? 아 그런 거 없지. 지금 말하자면 연애를 건다 이러면 ‘아무집 딸은 서방질 했다’ 이런 소문이 나지. 연애가 아니라 서방질 했다 그래가지고 시집도 못 가. 결혼하는 날 처음 봤지. 코가 깨졌는지 코가 없는지 그런 것도 모르고 결혼한다고.
그 땐 군대 가면 죽기 아니면 병신 되서 나오는 거였지 스무 살에 결혼 하셨으면 아드님들 나이가 꽤 되겠네요. 오십여섯이나 일곱이나 됐어. 스무 살에 결혼해가지고 스물한 살에 군대가서 스물여섯에 제대했는데. 내가 한 육 년, 그 땐 제대가 없었지. 제대가 생긴 것이 휴전되고 나서 정규군이 생겨가지고 제대가 생겨서 1) 여자 종을 대접하여 부르는 말을 ‘하님’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원인 것으로 추정된다. 2) 터전을 잡고 여럿이 모여 산다는 의미 3) 뿔이 날 만한 나이의 송아지라는 뜻 55
먹고 살려고 왔지 _ 박기선
랄지, ‘동부레기3)’ 랄지 이름을 이렇게 짓는 거야. 부리기 좋으라고. 그때는 천하다고 그랬지. 근데 그 종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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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했지. 전쟁 때였으니까. 그땐 군대 가면 죽기 아니면 병신 되서 나오는 거였지. 그래서 군대 안 갈라고 도망가는 사람도 겁나게 많았어. 휴가도 없지, 전시니까. 그러고 이 년, 삼 년 있으니까 휴가가 생기더라고, 그 때까지 할마이도 시어머니 밑에 있으니까 시집살이 고됐겠지. 6.25 한국전쟁은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6.25 때는 촌에서 있었지. 열아홉 살 때 6.25를 겪었는데 자고 나니까 인민군들이 와 있더라고. 지금 같았으면 난리가 나고 했을 건데, 그 전에만 해도 그 때는 몰랐지. 군인들이 차로 마을로 왔길래 이상해서 봤더니 인민군이라 하더라고. 시골까지 전부 들어왔지. 그러다가 수복직후 미군들이 막 올라오면서 총을 쐈지. 올라오면서 총을 엄청나게 많이 쐈지.
아파트 생기기 전에는 수도도 없었지 돌담집이라고 알지? 돌담집. 흙으로 돌하고 쌓아서 맨든 집. 여기 전부 다 돌담집을 짓고 살았어 여기가. 여기가 공동묘지였었어. 이 집 밑에도 송장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 때는 화장이 아니고 매장했어. 전부 다. 임자 있는 것은 파 주고, 임자 없는 것은 파서 한 데다 몰아서. 그 때는 화장터가 없었어. 당시 저 당감동에 화장터가 있긴 있지만, 여기가 영도 중에서도 낙후된 편이라고 하더라구요. 발전이 제일 안 된 데가 여기라. 아파트 짓고 그럴 때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지금까지 사십 년 동안은 그대로라 이거라. 하나도 바뀐 게 없어. 사십 년 전에도 이대로 살았지. 동네 풍경이 하나도 바뀐 게 없어. 길만 좀 바뀌고 신선동 길 포장됐고, 그래도 옥상에 올라가보면 좋아. 바다가 화악 보이는 게 좋지. 아파트 생기기 전에는 수도도 없었지. 저기 함지골 가면 물 나오는 데가 있어. 거기서 떠다 먹었지. 지금도 물 나오지. 아침엔 골목골목에 간장도 팔러 다니고, 재첩국도 팔러 다니고 많이 했는데 길이 험하다 보니 울퉁불퉁하니까 그 사람들이 새벽에 나오잖아. 길바닥에 다 쏟아버리고 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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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박기선
이 동네 처음 왔을 당시 어땠는지 기억나세요?
마구로 배, 참치 잡으러 멀리 간 거야. 저기 사모아로 갔었어 젊었을 땐 무슨 일 하셨나요? 촌에서 와서 뭐 할 거 있겠어, 기술이 있어 배운 것이 있어. 노가다 했지 뭐. 그때는 먹고 살 길이 없었어. 미장 하는데 따라다니는 심부름꾼. 그것을 내가 몇 년까지 했냐면, 칠십여덟 살 먹도록 했어. 육십다섯 살만 되도 업자들이 안 시키는 거라. 보험이 안 되니까. 근데 나는 아는 소장이 다치면 자기가 책임을 지기로 하고 서약서 같은 거 써주고 일 시킨 거거든. 다 돌아댕겼지. 대한민국 다 댕겼지. 강원도도 다니고 서울도 다니고 다 댕겼지. 그래서 내가 칠십몇 살 먹도록 저 거가대교 있잖아. 거제 거기 휴게소 있잖아. 그걸 마지막으로 그만 뒀어. 칠십 여덟 살에. 그럼 미장 일만 계속 하신 건가요? 그때는 노가다도 못했거든, 노가다 하면 업자들한테 돈 많이 떼였어. 촌놈이 와서 일하니까 돈 떼먹고 가버리면 못 찾는 거라.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배를 탔어. 그래서 어디로 갔나면, 마구로 배라고 들어봤나 몰라. 참치. 참치 잡으러 멀리 간 거야. 저기 사모아4)로 갔었어. 그 땐 돈도 안 됐어. 한 달에 만이천 원. 쌀 한 가마니 사고 조금 돈 남았어. 참치배 탄 이야기를 더 해주세요. 그물로 잡거든 참치를, 배타는 선원이지. 한 번 나가면 이십육 개월 동안 못 와. 태평양에 나가서 잡았지. 태평양에서 태풍 같은 게 오면 피할 데가 없어. 옆에 배가 있으면 파도에 치여서 배가 안 보여, 그래서 위험한 거라. 차라리 옆에 배가 없으면 괜찮은데 있으면 겁이 나는 거라. 삼 개월에 한 번씩 사모아로 들어와요, 가서 고기 잡은 것을 풀고 거기서 또 한 삼 개월 먹을 것을 준비해가지고 나와야지. 참치 그것이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거든, 그래서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미국 군인들한테 배급되는 거라. 한 이십 년 정도 탔어. 배타고 갔다 오면 애들이 자라. 이십육 개월 배타고 와서 한국엔 사 개월, 오 개월 있다가 다시 나가고 그랬지. 그때는 배타기 힘들었어요. 거제나 저 밑에 사람들이 논 팔아가지고 여인숙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배타고 나가는 사람들 많았어. 그때는 뭐 먹을 게 있어. 전부 배 탔지. 영도 하면 지금도 뱃놈이라 그래. 한국에 잠깐 들어오셨을 땐 주로 뭐하셨나요? 놀지. 가만히 집에 있으면서 또 배 타러 갈 연구를 하는 거지. 그때만 해도 저기 충무동에 맨날 다방에 가서 선장들 만나러 다니고, 다방에 선장 한두 명만 오면 다방은 노나는 거라. 선원들이 자꾸 붙을려고 오니까. 4) 오스트레일리아와 하와이 중간 남서태평양상에 있는 나라 58
그때만 해도 커피 값이 비쌌었어. 그게 자릿값이지. 멀리 나가셨으니 엄청 큰 참치들을 잡으셨을 것 같아요. 한 오백 킬로 되는 놈도 있지. 엄청나게 커. 뿔다구가 이렇게 긴 것이 있어. 그것이 한 사백, 오백 킬로. 보통은 사십 킬로니 삼십 킬로니 하지. 큰 것은 엄청나게 커요. 우리가 올라타면 발이 땅에 안 닿아. 배 타는 일이 엄청나게 험하지. 배 타면 수월할 줄 알았는데 잠을 못 자. 하루 일하기 시작하면 하루 세 시간, 네 시간 이렇게 밖에 못 자. 밤낮으로 일을 하니까 잠을 못 자는 거라.
아파트 지을 적에 뼈따구만 세워줬어. 평수는 똑같은데 내부수리가 각자라 미니아파트 지을 당시 기억나세요? 한번은 배타고 갔다 오니까 돌담집들을 철거를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놈들 철거를 한다고 오면 똥물을 정부에서 일, 이, 삼 호로 번호를 매겼어. 그래서 한 집에 사십만 원 씩 융자를, 돈이 나왔어. 그래서 그거 받아서 용호동으로 간 사람들은 망했고, 저기 만덕으로 간 사람들은 잘 됐어. 발전이 되니까. 여기 살 곳이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살고, 그걸로 전세는 얻을 수 있었거든, 그때 전셋집 얻어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전세라. 전세가 자꾸 올라가니깐 그때 집 짓고 살 때만 해도 새끼들이 많으면 전세도 안 줬어. 시끄럽다고. 애들이 떠드니까. 그래서 방 얻을 때 애들 둘이면 하나다 속이고 그랬지. 지금처럼 집이 떨어져 사는 게 아니라, 한 집에 판을 막고 사니까 주인집 애들하고 싸우는 것도 많잖아. 애들이니까. 없이 살 때지. 배고파서 사람 굶어 죽고 할 때라. 미니아파트에선 언제부터 살게 되신 거에요? 여기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시에서 구십만 원 융자를 해줬어요. 그게 개인한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 아파트 지을 적에 뼈따구만 세워줬어. 기둥만. 그것이 평수는 다 똑같은데 내부수리가 전부 각자라. 방이 두 개 있는 사람도 있고, 세 개있는 사람도 있고. 구십만 원 융자를 받아서 십 년 만에 다 갚아버리고 지금도 미니아파트에 살고 있지. 지금 여기 산 지가 한 사십몇 년 됐어. 집 짓기 전부터 살아서 집 짓고 살았지. 지금은 한 일 억 가요. 이것이 지금 십구 평 오 호. 인제 안 올라. 왜냐면 요새 뉴타운 짓는다고 지금 개발한다고 하거든. 근데 안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금 안 되고 있어요. 이대로 살지 뭐하러 개발하냐고, 이대로 편키는 해. 다른 데 아파트 같은 데는 관리비도 나가고 하는데 여긴 관리비도 없고 아무것도 없거든. 주택이나 매한가지지라. 아무것도 없어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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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박기선
뿌리고 그랬어. 그래도 거 정부에서 하는 일을 이길 수가 있어? 그래서 나중에는 번호를 매겨서 철거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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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사시는 분들은 보통 어르신들이 많겠네요? 젊은 사람도 있긴 있어. 보통 나이 많고, 젊은 사람들은 벌어먹기가 힘드니까 전부 나가고 영감들만 있는 거라. 영도가 지금 노인 인구수가 많다고 뉴스가 나오는 게 그래서 그런 거라. 젊은 사람들이 떠나버리고 젊은 사람이 없는 거라. 벌어먹고 살려고 전부 나가버렸어.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여기가 내 집이다 하고 사는 거지 옛날엔 바닷가 쪽에 술집들도 많았다고 하던데요? 많았지. 술집들 저 밑에 바닷가에 쫘악 있었지. 지금 저기 산책로 있는데. 아가씨들이 술 팔고 그랬지. 다 철거해뿌렸어. 나는 가보지도 않았어. 나는 술을 안 먹으니까. 촌에서는 막걸리도 많이 마시고 했는데 끊어 버렸지. 술도 담배도 안 하고 하니까 술친구도 없지. 술 한 잔 먹고 친구하고 그런 건 없지. 건강 때문에 끊은 건 아니고 돈이 없어서 끊어 버렸지. 담배는 아예 안 피웠고.
이유는 뭐 갈 데가 없어서 오래 살았지. 돈이 있다거나 배운 게 있다거나 했으면 딴 데로 갔겠지만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여기가 내 집이다 하고 붙잡고 사는 거지. 여기서 사십 년 동안 깨복쟁이5) 친구들이 있지. 이제 친구들도 다 죽고 몇이 안 남았지만은 친하지. 친구들하곤 여기서 먹고, 장기 두고 놀고, 점심 먹고 자고 그러고 놀지. 주말엔 저 밑으로 놀러 나가고 그러지. 남항대교 밑에 사람들 많이 모이는 데 있어. 거기 가서 장기 두고 바둑 두고 하지 그것 밖에 할 게 없어. 뭐 할 게 있어.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미장한다고, 배 탄다고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으니깐, 이사는 안 갔지.
5) 벌거숭이를 뜻하는 전라도 방언. ‘깨복쟁이 친구’는 옷을 다 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함께 자란 허물없는 친구라는 뜻이다. 61
먹고 살려고 왔지 _ 박기선
여기에서만 오래 사신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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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밌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나이가 이렇게 돼부렀는가
이종석
1943년 출생 1960년 경기도 파주로 이주 1967년 결혼 1969년 이송도로 이주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싹을 보였다 는 이종석 할아버지. 통학 단장부터 산악회, 종친회, 향우회 등 바쁜 삶 을 보내셨다. ‘승주 만화방’, 야채장 사, ‘경전슈퍼’까지 이 동네에서도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하셨다. 특히나 그가 가지고 있던 장부는 당시의 영 도 물가를 알 수 있는 큰 보물이다. 여기서 새 살림을 살아야겠다던 과 거 그의 다짐이 오늘날까지 이르렀 다. 자기 인생에 대해 말하면서 자랑 스레 짓는 표정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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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학단장 말 한마디면! 고향이 어디세요? 우리는 쌍암1). 바로 순천 옆에. 선암산 혹시나 아실란가. 바로 그 밑에. 남초등학교 다녔어요. 선암사 바로 밑에서 조계산 정기를 받아가지고. 지금은 승주군이, 쌍암 전부가 순천시로 편입됐지. 그때는 학교까지 거리가 멀었거든요. 우리 때는 한 3키로 걸어 다녔어요. 학생들 모아가지고 통학단장을 했어요. 한 삼사 키로 되니까 일렬로 이렇게 다니니까. 지휘를 한 거지 한마디로. 그때 단장만 해도 지금은 말 안 듣지만, 그때는 말 한마디면 뭐. 그때 당시에는 결석을 왜 했냐면 먹고 살기 위해서. 밑에 동생들 있습니다. 애 보라고. 농사일도 하고 뭐도 하고 학교가 싫어서가 아니고. 모내기철이나 이런 때. 이유가 있어야지. 농땡이 칠려고 안 가는 건 안 되지만은. 또 6.25 사변 때 지금도 생각이 나요. 그 다섯 살, 여섯 살 때 보면 이북 사람들 와가지고 돈 같은 거 밑에 여놓으면 발로 콕 차불고 들어가고, 소 잡아 가고. 우리 행님들 때는 우리보다 십 년 넘었을 때(많을 때), 나오라 해가지고 총만 이렇게 메면은 바로 다 징집해가고. 월남전쟁 갈 때 차출이 되어서 월남전선에 갔는데 그때 당시 나는 막 제대를 했어요. 지원해서 갈 수도 있고 했는데 우리 수송병과라 못 가고2). 그래서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이렇게 살다 보니까 올해 칠십 넷이네.
부산에 왜 왔냐면, 냉장고 없던 시절 회를 먹고 한마디로 미쳐분 게지 부산은 어떻게 오시게 되셨어요? 전라남도에서 태어나가지고 열여덟 살에 시골에서 나와가지고, 경기도 파주 문산 있는데 금촌 거기서 근무하다가. 군대는 철원 가서 하고 거기서 제대해가지고 68년도에 왜관 미군부대 거 일 하다가 카터 장군3), 땅콩 장군 그 분이 우에서부터 자른다고 하더만은 밑에부터 잘라가지고 부산을 내려왔어요. 그전에 삼륜차 있지요. 68년도에 그걸 가지고 오는데 중간에 고장이 나서 경주에 가가지고 볼트 갈고. (웃음) 오니까 저녁 한 아홉 시 이렇게 왔어요. 영도 들어 왔을 때 용달차가 열 시에 왔는데 아무도 없어요. 내가 무엇에 미쳐서 왔냐면은 그때 당시 68년 때는 냉장고가 없었어요. 갈치랑 있으면은 썩은 냄시가 막 나는데, 여 보니까 회를
1) 1949년부터 전라남도 승주군 쌍암면이었다가 1985년 쌍암면이 승주군 승주읍으로 개칭되었고 1995년 순천시와 승주군이 재통합하면서 순천시에 편입되었다. 2) 해당병과가 없어서 지원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3) 미국 39대 대통령 64
잡아다가, 그 전에 왜관에서 정비 사업소 하는 사람이 퇴직을 해가지고 여 우에 살았는데 부식가게, 식당을 했어요. 먹어보니까 이른 바 한마디로 미쳐분 게지. 지금도 안 잊어분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4) 지게차 기사로 딱 하니 내가 돈을 주고 들어갈라다가, 요기 와보니까 ‘아니다. 여거 와서 새 살림 살아야겠다.’ 그래가지고 진짜 모래땅에 씨앗을 뿌려가지고, 아무것도 없이. 미니아파트 짓기 전에 한 이십 년 전에 완전히 골탄집5). 여가 전에는 공동묘지였어요. 골탄집이란 것은 우에 보면은 지금도 한마디로 뭐라고 할까. 슬라브랄까 요런 거 해가지고 우에다가 골탄 뿌려가지고 비 안 새겠끔. 시커먼거 있어. 그게 방수페인트야 그 당시에는. 그리고 물이 안 나와 가지고 함짓골 가면은 주차장이 있어요. 주차장 옆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요. 바로 옆에 가면 ‘64년 준공’ 해가지고 샘터가 있어요. 물 떠가지고 빨래하고, 먹고.
승주만화방, 야채장사. 경전슈퍼 옆에 아까 삼양슈퍼라고 했지. 지금은 안 해요. 그전에는 거기 절반을 만화방을 했었어요. ‘승주만화방’6)이라 했지. 지금 저쪽에 가면 삼양수퍼라고 요 옆에 가면 있죠? 거기서 했었어요. 그때 만화방 한다고 해서 왔는데 <여로>7) 할 때. 거의 한 사오 년 했을 겁니다. <여로> 하면서 그때 오원 씩 받았던가, 입장료. 그 때 당시는 쌀값 삼천 원 했었는데. 텔레비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불법이지 한마디로. 들어오라 해가지고 오 원씩 받고 앉아서 <여로> 보고. 그거를 하면서 돈이 안 돼 가지고 이거 가지고 도저히 못 살아가겠는 거라. 애들 학교도 못 보내요 그때 당시에. 팔백 원, 오백 원 해서 이리 주고 저리 주고 하면 돈이 남아나겠습니까. 그래서 야채 장사를 해보니까 참 돈이 되대. 69년도에 와가지고 이 동네에서 딴 데 떠나지를 않고. 그때 당시에는 내가 살기 위해서. 그래가지고 야채 장사만 가지고 안 되겠어서 슈퍼를 조그맣게 하면서도 야채장사를 했어요. 바로 밑에 빅마트자리에서. ‘경전수퍼’라 한 것은 왜냐하면은 경상도와 전라도 앞글자를 따서 가게를 내가 지어가지고 한 삼십 년 동안 그리 살았어요. 그러다가 중간에 또 용달차도 하고. 처음엔 와서 달세집을 살았는데 근면 성실 해가지고 사니까 집도 사가지고 살고. 점점 하는 일이 잘 되고.
4) 1970년 5월에 설립. 현재의 한국디자인진흥원이다. 5) 골탄은 검은색의 방수용 자재로 옥상, 지붕방수 등에 사용했다. 6) 이종석 님의 고향이름을 따서 만화방 이름을 지었다. 7) 1972년 4월 3일부터 1972년 12월 29일까지 방영한 KBS 드라마 65
먹고 살려고 왔지 _ 이종석
영도에 와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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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장부를 아직 가지고 계시네요? 내가 그런 고생을 했다는 걸. 버리기 싫데. 아무것도 아닌데. 나중에 자식들한테 보여줄 것도 있고. 앞에다가 날짜를 적어 놓으니까. 생각이 나고. 근거가 되는 거야 이것이. 언제 어땠다. 적어 놓으면 그것이 ‘아 그때 그랬다.’ 거짓이라는 게 없지. 이것을 하다 보니까 글이 늘더라. 변소비가 뭐에요? 화장실 옛날에는 수세식 아니고 펐어. 옛날에 지게로 펐어. 아드님 이름인가 봐요. ‘준근이 교복’ 천팔백 원. 옛날에는 초등학교 때 교복을 입었어. 모자도 있고. 명태도 파셨고. 아주 귀중한 자료네요. 좋은걸 내어드렸다.
철없던 시절에 주고받던 연애편지 아내 분은 어디서 만나셨어요? 전남 곡성. 제대하고 나서 아니, 중간에 군에 갈 때. 누님이, 자형이 중시를 했죠. 중매를 해가지고. 시골에서 전통 혼례지. 신부 집 마당에서. 곡성 거기 옛날에 다리가 없어가지고 뗏마8) 타고 가가지고 결혼식을 했어. (이종석 님의 아내 손병순 님) 내가 스물하고, 스물다섯 때. 만나는 거는 없고, 그냥 약혼 사진 한 번 찍는 거야. 거리가 머니까 왔다갔다 할 수도 없고. 제대할 때까지는 서로가 편지를 주고받고. 군대 생활 했을 때 많이 했지. 내가 버렸을 것 같애. 지금 생각하니까 쑥스럽더라고. 그때는 철없이 막 썼는기 모아뒀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참 그때 생각도 그렇고. 좋아하지만 표현을 못 했지. 지금도 잘 하나. 도시서 살았으면 발랑 까졌겠지만, 촌에서 살았으니 아무 것도 모르고, 철도 없었고. 편지 쓴 것도 늦게 보니까 그렇더라고. 생각해봐요. 이십대 뭘 알았겠노. 그래서 결혼식 때 그냥 결혼하는 거야.
8) 큰 배와 육지 또는 배와 배 사이의 연락을 맡아 하는 작은 배 67
먹고 살려고 왔지 _ 이종석
그래서 이것을 나놔 봤어요. 자식들 한 번 보여주려고. 인터뷰 같은 건 꿈에도 생각 없고. 여러분들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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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도 하고, 종친회도 하고 이거 저거 하지 슈퍼 그만 두시고 요즘에는 뭐하세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가지고, 아침에 지킴이 있죠, 지킴이. 초등학교 앞에. 한 세 시간 가서 해주고. 우리가 힘 있으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뭘 해도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집에서 놀면은 천상 돈을 써야 되고, 몸 건강 안 하고 그러니까. 저는 생각에 어디서 무얼 해도 부지런히 한다면 먹고 살지 않겠는가. 그 생각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하니까. 젊은 분들도 그렇지만 취직자리가 바늘구멍 같이 힘드니까. 참 고생들 하십니다. 사진 보니까 다른 활동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요? 슈퍼를 하다가 3월 달에, 3월 17일 날. 이 사람들한테 인계를 했어요. 나이가 들고 젊어서부터 한 번 놀러 다녀보지를 안 해보고 하다 보니까 이제는 좀 놀아야겠다 해가지고.9) 산악회도 하고, 종친회도 하고, 향우회도 하고. 향우회를 하는데 영선동에 분원이 있어요. 영도구 내에서 지원이 있고. 하면서 올해 또 분원장도 하고, 이십 년 했습니다. 그전에는 애들 가르친다고 구경 한 번 안 다녀봤어요. 관광버스도 못 타봤는데. 지금 오십일곱 명이 유지해가지고 지금도 잘 하고. 곰배령 같은데도 우리가 일박 이일을 다녀왔는데 분위기가 좋기 때문에 찬조를 많이 냅니다. 회원들이 다 모이니까 좋은 거야. 그러니까 우리 산악회는 지금도 깨끗해요. 새마을운동을 하셨어요? 새마을을 한 십오 년 했어요. 소독도 하고. 그때 분무기 메고 다니면서 동네 소독 하고. 집사람은 한 오 년 했고. 슈퍼를 하면서 시간 좀 나는 대로 하면서. 새마을 십오 년 동안 하다보니까 누구한테 지원 안 받고 우리가 돈을 그대로 모아서 한 거고. 아버님이 활동을 많이 해서 가게는 어머님이 다 보셨겠는데요? 잘 아시네 (웃음). 보살펴 주니까 이렇게 하고. 지금은 이렇든 저렇든 간에 집에 안부인들이 좀 알뜰히 살아야 집안이 잘 되지. 달세집 살다가 전셋집 왔지마는 돈이 모이니까 재미가 있고, 또 돈도 안 쓰게 되고 그리 되대요. 살아보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현재 살지.
9) 오랫동안 운영한 ‘경전슈퍼’는 현재 다른 이에게 인계하여 ‘빅마트’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69
먹고 살려고 왔지 _ 이종석
향우회 회장도 하고 또 친목회도 하고. 이렇게 해보니까 제일 자랑스러운 거 산악회. 우리가 창립해가지고 한
살아보시니까 영도가 어떻습니까? 영도 와서 참 좋다 생각해요. 다섯 시 되면 산에 올라가고. 여섯 시 사십 분, 오십 분 내려와 가지고 밥 묵고 또 다른 일도 좀 하고. 특히나 여기가 좋은 것이 요쪽에 산이 있어서 태풍이 많이 와도 피해를 안 봐요. 남항동 저쪽으로 가면 피해를 보는데. 여기는 산이 가려가지고. 그것도 나는 복이라 생각합니다. 여기 와서 그런 피해 안 보고, 한마디로 뒷산에 가면 산 좋으니까 운동도 하고. 객지에서 나와 가지고 우리가 괄시 받아가면서, 그때 당시에는 아무 직업들이 없었어요. 68년도에는 한마디로 해서 뭐 있었습니까? 없어가지고 월남 갔다 오고 박대통령께서 해가지고 여기저기 공장을 많이 지어서 그때부터 대한민국이 많이 발전됐지. 참 재밌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가니까 언제 나이가 이렇게 돼부렀는가. 딴 데로 이사를 가려고 하니까 정이 여기가 있고, 한 오십 년 살다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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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국민학교 통학단장 임명장 ①
② 새마을회 활동 모습
③
③ 경전슈퍼와 야채장사 할 때 썼던 장부(1975년) ④ 결혼식 날
②
⑤ 용두산 공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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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경남도청 발령받아 왔어요
최도범
1941년 통영 출생 1964년 공무원 시험 합격, 삼천포시청 발령 1971년 경 남도청 발령, 이송도로 이주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오면서 여러 일을 겪었다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공직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느껴졌 다. 처음에는 위험천만해 보이는 이 송도를 벗어나고 싶었다는 최도범 할 아버지. 이제는 공기 좋고, 인심 좋은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금슬 좋은 두 분을 뵈니 이분들을 마을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서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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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거의 최고로 좋은 직업이다. 다른 기 있었나, 없는데 뭐 이 마을엔 어떻게 오시게 되셨어요? 옛날 공무원 했습니다. 공무원해가지고 사천시, 지금 삼천포지. 그때는 삼천포시고 지금은 사천시가 돼있는데 거기서 한 육 칠 년 근무를 하다가 경남도청1)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고래 오면서 71년도 4월에 여 부산으로 오게 됐어요. 왔는데 뭐 마땅한데도 없고 여기 이 동네에 집안에 아저씨 한 분이 계셨어요. 그래가지고 그 아저씨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서 부근에 방을 얻어가지고 있으라고 그래가지고 여 오게 된 거라. 한 사십육 년 그래 됐지. 경남도청은 어디였어요? 경남도청이 내나 서구 부민동. 지금은 동아대학교 거라. 거기가 경남도청 자리였지. 81년도에 창원으로 옮겨갔어.2) 창원으로 옮기 가고 그 자리는 동아대학교에서 인수를 받아가지고 거기 지금 학교로 운영하고 있지. 경남도청이 제일 큰집 아인교. 부산 직할시는 61년도에 부산직할시 되면서 도청에서 부산시가 떨어져 나가고, 그 다음에 70년대에 울산, 경남은 인자 좋은 건 다 떨어져 나가뿌고 저 농촌지역 서부 경남, 중부 경남. 골치 아픈 것만 있는 기라. 그래가지고 지금 창원에 도청이 81년도에 옮겨갔거든? 부산시를 마감하고 갔는데 거기도 지금 인구가 창원하고 마산, 진해 이래 인구가 백만 이상 넘은께, 다시 또 떨어져 나온다는 말도 있고. 경남도청 직원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도청에 오는 것도 함부러 몬 왔어요. 시험을 쳤어요. 도청을 올라카면은 시험을 칩니다. 시험을 쳐가지고 합격을 해야 오는 기라. 아무리 해도 올 수가 없어요. 그런 케이스가 하나 있고 그 다음에 도지사가 오케이 카는 아아들은 올라갔다꼬. 해서 두 케이스 밖에 없어요. 우리는 도지사도 모르고 별로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네. 오로지 내 노력해가지고 노력의 대가를 받아올라고. 그래 받을 때에 촌에 동료들이 박수를 치고 회식을 해주고 격려했어요. 하기 힘들거든. 자리가 보장이 돼요. 저 가면은 자기의 전문 분야도 발휘할 수 있고. 자기 능력껏 발휘할 수 있고. 그래가 올라왔잖아요. 올라와가지고 열심히 하다보니께 우에 사람들이 인정도 해주고. 아아들 공부도 시키고. 해가지고 지금까지 온 거지 뭐. 컴퓨터가 없던 시절 일은 어떻게 하셨어요? 자로 잘 긋고 분도기, 분도기라고 안 하나 동그라만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인자 가르방3) 긁으면은 1) 경남도청은 일제 강점 전략으로 1925년 진주에서 부산 부민동에 이전되었다. 1983년 창원으로 다시 옮겨갔다. 2) 1983년인데 연도를 착각하신 듯하다. 74
공무원들 전부 가르방 긁었거든. 가르방 긁으면 요기다 차카착 해가지고 쓰고. 얼마나 썼던지 지금도 여가 완전히 못이 백혔대니까. 만년필. 그 다음에 G펜, 점펜 갖다가 가에다 이리 꼽아가지고 잉크 찍어가지고 썼잖아요. 공무원 전부 다. 기입용지는 있지. 각 지면 앞에 기입용지가 있는데 뒤에 을지는 전부 써야 되는 기라. 내용은 안 쓰면 안 되지. 그 뒤에 타자기가 나왔어. 공병우 타자기4)라꼬 해가지고. 근데 요새 같이 자판이 그리 된 게 아이고 아주 복잡해. 그래가 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어 몬해. 그래가 상고 나온 아가씨들, 학생들 야들한테 또 배운 기라. 그래가지고 한 과에 그런 애들 한 둘씩 또 채용을 해야 돼. 임시직으로 채용해가지고. 가들이 우리가 원안을 작성해주면 즈그가 쳐가지고 형식을 만들고.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 그때는 전부 다 썼거든. 공병우 타자 없어지고 전동타자기 나오고. 컴퓨터 나오고. 그 당시는 무슨 회의서든지 연말 돼가지고 업무보고 같은 거 이런 거 만들라 하면은 할 수가 없는 기라. 책을 만들어야 되거든. 그라면은 그때는 인쇄소가 대성황을 이루었어요. 도청 앞에 있는 인쇄소가 한 스물 몇 갠가 됐거든. 이 사람들이 최고라. 경남도만 하는 게 아이고 부산시도 있고, 서구청도 있고, 중구청도 있고 마이 있잖아요. 전부 하는데 인쇄소 사장한테 커피 드리고 뭐 이래 사정을 해야 맡아주는 거라.
그때 원양어선 안 타면은 공무원. 그 다음에 공무원 중에서도 교직은 사범학교나 나오면은 초등학교 내면 백 프로 된께. 거의 최고로 좋은 직업이다. 다른 기 있었나, 없는데 뭐. 그때만 해도 중공업이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래가지고 박 대통령 쿠데타 일으켜가지고 울산에 공업단지 만들고, 창원에 공업단지 만들고, 전국에 공업단지 만들고 그래가지고 우리가 밥 먹고 살았지. 그 앞에는 공무원 아이면은 배 선원. 아무 것도 없었어. 그 다음에 농사짓는 거.
화장실이 제일 문제였고, 물이 제일 문제였고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얘기 좀 해주세요. 여기 와보니께는 처음에는 정이 안 들었어. 각지에서 모여가지고 여기 보면은 6.25 때 흥남부두에서 배타고 거제를 갔다가 피난민들 여객선 타고 부산으로 오게 됐거든. 그 다음에 전라도 지방에 있는 사람들. 그 다음에 제주도에서도. 그때 못 살았어. 여러 사람들이 특히 거제도 사람들이 많이 왔고. 그래가지고 여기 짬밥이 됐지. 없는 사람끼리 닿은께네, 그래도 큰 분쟁 없이 같이 잘 지냈어요. 원만하이. 지금도 사는 사람도 있고 돌아가신 분도 많고 이사 가신 분도 많고 그렇지. 3) 인쇄도구로 양초를 바른 종이를 ‘가르방(쇠판)’ 위에 올리고 뾰족한 펜으로 긁어 롤러로 검은 잉크를 묻혀 인쇄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4) 1940~50년대 개발되고 만든 세벌식 타자기. 만든 이의 이름 따 ‘공병우 타자기’라고 불렸다. 75
먹고 살려고 왔지 _ 최도범
공무원 일 엄청 힘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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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이 동네가 아주 우범지대야. 그리고 여 밑에 바닷가 여 쪽에도 보면은 술집이 저~ 이래 나열해 있어가지고 술 묵고 해가지고 내가 우리 집 마흔 여덟 살 먹는 우리 집 아들하고 딸 지금 마흔 다섯 살 먹는 딸하고 둘이를 데꼬 왔는데, 야~ 여기서 과연 생활할 수 있겠느냐. 돈이 없으니까네. 그때 우리 월급 하는 기 육천 원 받았어요, 육천 원. 65년도에 육천 원 받았는데 내가 한 육칠 년 근무하고 여 왔을 때 한 팔천 원 정도 받았어요. 그 돈 가지고 아아들 공부시키고 생활하고 또 뭐 이리 작게 써야 되고. 생활할라믄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근께 시내로 못 나갔어요. 그래가지고 집사람하고 내하고 싸움도 많이 있었어. 내는 나가자, 영도에서 나가자. 우리 집사람은 지금 이런 판에 나가가지고 어디 방 한 칸도 못 얻는데 안 된다. 그래 여 살게 된 거지. 지금까지 살게 된 거지. 그래 아직 여 취약했어요. 처음 왔을 때는 집도 아니고 엉망이야. 우엔 슬레트 그 다음엔 루핑 집 뭐 이런 거 해가지고 비만 막하가지고. 우리 집 여도 세 가구가 살았다니까. 이 집은 어떻게 지었어요? 집이 스레이트가 돼가지고 박영수 부산시장5)이 불하줬다꼬. 이 지역이 국유지라. 국유 돼가지고 자기 불하를 받아가지고. 처음엔 돌담을 해가지고 견디고 비만 막아가지고 그래가지고 살았지. 여기 사시면서 출근하기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엄청나게 불편했어요. 그때는 이게 중리 쪽으로 길이 안 났어. 그때 한창 공사하는 중이었고. 종점이 처음에 저 밑에 보건고등학교. 거기가 종점이었는데 쪼끔 길을 내는 바람에 곡각지. 여기 인자 남부 여객이 올라와가지고. 목욕탕도 없고 아주 불편했지. 그러니 뭐 목욕할라 하면 남항시장을 안 가면은 저게 남포동 나가든지 그리 해야 되고. 차가 없으니까 요새 같이 차가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고 버스가 십 분, 이십 분에 한 번씩 다니께네. 걸어서도 내가 출근을 많이 했어요. 고생 많이 했지. 동네에서 기억나는 일이 있으세요? 여기 처음에 와가지고 제일 애로사항이 뭐냐면은 물이 없었어요, 물이. 아비규환이라. 오시는 길에 보셨는지 모르지만 우물이 하나 있어요. 이기 지금은 안 쓰고 방치되어있는데, 이게 유일한 식수라. 그 당시에는 길 우에 집이 없었거든요. 공동묘지 해가. 공동묘진데 아파트가 그중에 생기고 오염되기 때문에 물을 못 뭈는데 그 당시에는 이 물을 살라꼬 양철로 만든 물동이 해가지고. 저~기 줄로 섰다고. 최고 끝발 좋은 사람이 통장이라. 통장이 물 관리를 하는 거지. 근데 여자 분들이 서로 한 동이 더 받을라꼬 물싸움 하거든요. 통장이 들고 차버린다고. 그 물통을. 차버리면 이기 지금은 밑에 담이 쫙 있지만 전에는 담이 없었어요. 차뿌면 저 5) 17대 부산시장 1971.6.12.~1977.7.6 재임 77
먹고 살려고 왔지 _ 최도범
사는 거 만치 그걸 해가지고 분할을 해서 불하를 해줬다꼬. 그래가 우리가 불하를 받았어요. 삼십 만 원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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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앞까지 떨어지삐는 기라. 여자들이 울고불고 애로사항이 많았는데. 그래가지고 이기 70년대 그때는 수도가 들어왔지. 70년대 한 후반, 중반쯤 됐는가. 수도 들어온 다음에 인자 해결됐어. 화장실도 없어가지고 제일 문제가 화장실이었어. 여 보면 군데군데 공동화장실이 많이 있어. 그것도 보면은 수세식이 된 것도 아닌 기고. 밑에 변을 쌓아 노면, 받아가지고 있으면은 차가 와가지고 뽑아가지고 가고 그라믄 우리가 돈을 얼마씩 내고. 이래보이 화장실 가고 싶은데 화장실이 딱 정해져있지, 줄로 서가 있는데 아 실제로 변을 서가지고 본 사람도 많아요. 그런께 애로가 많아가지고. 화장실이 제일 문제였고, 물이 제일 문제였고.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켜가 독재군사정권이라 해가지고 우리가 욕은 했지만은 그래도 이 양반이 이걸 또 해주는 바람에 우리 지역으로 봐서는 화장실도 해결됐지, 수도 해결됐지. 그 다음에 중리하고 로타리 도로 나는 바람에 교통 해결됐지. 참 그래 지금은 완전히 일등 동네가 됐어요. 그때는 여기서 중리로 가는 길이 없었나요? 지름길. 그기 인자 지금 이리 도로가 있는 게 아이고 여 밑에 가면은 우리 흰여울길 요래 가면은 15통 해가지고 길을 확장시킨다 아입니꺼. 70년대, 60년대 후반 그때부터 길이 나가지고. 공직에 오래 계셨으면 다른 데로 이사를 가셨을 것 같은데요. 내 한 번도 안 했어요. 내가 옮깄으면요 지금보다는 많이 내가 나아졌겠지. 여기에 보면 이 동네에 이미 떠난 사람도 있지만은 전국 각지에서 모이든 사람이라 돈도 없고 물 거는 없어도 서로 참 마음은 있는 기라. 이웃이 좋은 기라. 맡겨놓고 가도 누가 와서 물건 하나 훔쳐가는 것도 없고. 인심이 좋았어요. 그래가지고 다른 동네는 모르겠지만 우리 요 주위에서는 참 서로 마 음식 같은 거 하면은 오라 캐가지고 같이 묵고 같이 하고. 그래하다 보이께네. 행아 동상, 언니 오빠 이래가지고 그리 됐지. 내는 뭐 집에 많이 없응께. 잘 모르지만은 그렇게 동네가 형성이 돼있거든요. 마이 떠났어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은 그 당시에 있던 사람은 몇 명 없어요. 돌아가신 분도 많고 다른 데 자식들 따라 나간 사람도 많고. 사는 거지, 뭐. 그래서 내는 그 당시는 그랬는데 지금은 후회 없어요. 공기 좋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동안에도 자유자재로 그렇게 하면서. 우리 아아들도 “아이구, 아버지 어머니 그거 정리하고 즈그한테 오이소.” 하면 “싫다. 느그는 느그대로 살아라. 우리는 마 여기 좋다. 느그 엄마가 지금까지 사십몇 년 사십오륙 년 동안 여 살았는데 안 갈라하는 걸 내가 억지로 갈 필요도 없고.” 또 거 가면은 친구도 없고 하니까 우리 친구들이나 일 있으면은 불러가지고 가면 되고. 그래 그래 사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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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려고 왔지 _ 최도범
저리 올라가는 길 있거든요. 그리 올라갔다꼬. 그 길이 제일 좋은 길이라. 지금 쭉 연결돼가지고 영선사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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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데모도 마이 했지요. 대세가 흘러가기 때문에 안 할 수 없었고 어릴 때 이야기 들려주세요. 그때는 학교 다닐 적에 규율부장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학구파들은 열심히 하는 놈은 공부하고 중간에서 이것도 아이고 저것도 아인 놈도 있고, 안 그러면 학생들도 주먹 이런 거 해가지고 학교에서도 요즘 같으믄 전부 다 고소당하고 전부 다 교도소 가야 될 사람이라. 이런 팀들이 모여가지고 또 잘 돌아가더라꼬. 학교 때부터 내가 공부를 쪼끔 했거든요. 잘하진 몬해도 상위 클라스에는 들어갔기 때문에 선도부도 하고 잘 지냈지 뭐. 초등학교는 통영서 다니고 그 다음에 중학교는 삼천포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통영서 또 다니고 그 다음 대학은 여 부산 와서. 그래가지고 61년도에 졸업해가지고 지원해가 군에 갔지. 대학 다니실 때 4.19혁명으로 시국이 어수선 할 때였네요. 그때 우리 데모도 마이 했지요. 처음에 마산에서 일났그든. 김주열6)이 최루탄 맞아가 눈알 이리 화염병도 없었고 책가방에 돌멩이 옇어가지고 지금 중부서 앞에 가가지고. 어떤 데는 파출소고 어디고 다 던지고. 참 그런 세월도 보내고 그랬지. 그 당시는 대세가 그래요. 다 흘러가기 때문에 안 할 수 없었고. 우리는 나라를 건지야 되겠다는 구국정신 이런 거 가지고 했거든요. 남학생들이 마이 얻어 묵었는데. 여학생들이 주먹밥 해가지고 뒤에서 쿡쿡 쑤신다고 그래가 보면 보게또에 옇어주거든. 그래가지고 하나씩 묵고. 그래 길가에서 드러누가지고, 대학에 번지고 서울로 올라가지대.
집사람이 선견지명이 있어요. 그래가 많이 업고 다닌다.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결혼은 중매결혼을 했어요. 내가 사천시청 쪽에 근무를 하는데 주위에 있는 분들이 소개를 하더라고. 공무원 하다 보면 좀 온순하지. 우리 집사람 소개를 해가지고 나한테 와가지고. 우리 집사람은 처가는 참 잘 살았거든요. 옛날 촌에서 이장도 하고 사업을 많이 하고 이런께네. 월급쟁이한테 와가지고 참 많이 고생했지. 지금은 한 번씩 얘기 나오긴 나오지만은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참 잘 한 것 같다. 후회는 없어요. 둘이서 여행도 다니고. 산에도 다니고. 눈 뜨면 별 할 일 없음 산에도 가고. 편하게 지냅니다.
6) 의거 학생.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채로 발견되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7) 4.19혁명의 도화선이 마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표현하시는 듯 하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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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고 마산서 터지고 나서 인자 부산서 나온 거지. 그래가지고 마부산 항쟁7)이 된 거 아니요. 그 당시는
어머님하고 사이가 엄청 좋아 보여요. 우리 집사람이 참 여기 와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내가 고생을 많이 시킸다고. 우리 그때 처음 와가지고 60년대는 사십 만, 오십 만 삐 못 받았어요. 아, 사천 원 오천 원. 한 달 하숙비가 보통 삼천 원 내지 사천 원 했다꼬. 그럼 사천오백 원 이리 받으면은 내가 쓸 수 있는 돈 한 오백 원 삐 없어요. 엄청나게 고생했지. 처음에 와가지고 여 부근에 세를 주고 있었지. 방 한두 평 쯤 되는 그런 방에 애 둘이 너이서 살았다고. 그 당시는 가스도 없고 뭐 없기 때문에 연탄아궁이 해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연탄가스를 마시가지고 몇 번 그랬어요. 여 병원도 없으니 우짜노. 동네 사람한테 사람 죽는다 하니께네 막 와가지고 김치국 믹이고 이래가지고 살리기도 하고. 병원에 델꼬 가기도 하고. 우리 집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여기 있는 주위 사람들 마 다 취약하게 살았어. 내가 1999년도에 퇴직을 했거든요. 지금 십몇 년 됐는데. 십오 년 됐나. 그때 연금 안 받았으면은 일시금 받아가지고 사업한다 하고. 그때는 이자 옇어놓는기 오히려 연금 받는 거보다 더 나았어요. 이자가 비쌌기 때문에. 요즘은 다 내려 가버리고 깡통 아입니꺼. 우리 집사람이 선견지명이 있어요. 내는 일시불 받아가지고 집도 하나 좋은 거 하나 사고 그때 사, 오천만 주면 집 좋았거든. 집도 한 개 사고. 뭐 이래가 아파트 있는 데 가서 편하게 살자. 우리 집사람이 집이 문제가 아이고 우리는 몸을 생각하자. 몸을 생각해가지고 사는 게 안 좋겠느냐. 그래 내가 가만 본께네, 공무원 한 내보다도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식이고. 그리한 기 지금 참 잘한 거지. 내가 그래가 많이 업고 다닌다. 산에도 같이 다니고. 그래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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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키워드 1
부엌 한 칸, 방 한 칸 하꼬방 한국전쟁 발발 이후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 여 겼던 흰여울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멍석을 나누어받아 바닥에 깔면 그 자리가 내집 을 지을 자리였다고 한다. 부엌 한 칸, 방 한칸짜리 ‘하꼬방’을 지었다. 빈땅에 돌담 을 쌓아 집을 지었다. 판잣집도 많았는데, 폐지나 나무판지에 페인트칠을 해서 벽을 만들었다. 레이션 상자, 합판, 막천, 가마 니 등으로도 만들었다. 지붕은 루핑이라 부르는 검정 기름을 칠한 종이로 만들었다 고 한다. 깡통을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어 서 이어붙여 지붕을 만들기도 했다. 지붕 을 슬레이트로 한 집은 좀 잘 사는 집이었 다고 한다. 당시 집들은 지붕이 낮은 경우 가 많았는데, 전문업자가 아니라 일반인이 자기 집을 직접 지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주민의 키가 약 160cm인데, 고개를 숙여 야 했다고 할 정도라니 지붕이 얼마나 낮 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닥은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았다. 많은 판잣집이 흰여울 벼랑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고 한다. 산은 물론이고 해안가까지 판잣집이 없는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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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머리 샘, 우물, 함지골
공동묘지 터 위에 지어진 아파트
“길 입구를 맏머리라고 했는데 거기 있는 샘이라고 ‘맏머
“거기 전부 공동묘지였어. 아파트 짓는다꼬 그
리 샘’이라고 불렀어. 허드렛물인데, 꾸들꾸들해. 비누가
위에 지은 집들을 철거할 때 거기 살던 사람들
잘 안 풀어지는 물. 먹지 못하는 물, 막 쓰는 물이야. 그래
이 멀리 안 갈라고, 가마니 하나 치믄 화
서 빨래터였지. 지금은 샘이 덮이면서 그 물줄기가 도랑
장실이었는데, 거기 똥 퍼다 관리자들 다 둘
쪽으로 흘러들어갔어. 물줄기 하나는 지금 해녀탈의실로
러 씌우고. 그래 난리를 직있다니까.”
호수를 빼가지고 해녀들이 쓰고 있어.” 지금도 영선아파트 뒤쪽에는 오래된 무덤을 볼 “마을 통장이 우물을 관리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주는 그야.
수 있다. 이 공동묘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사람이 많으면 한 동이 주고, 사람이 없으면 두 동이 주는
묘지였다. 손윤자 님의 말에 따르면 어려웠던
그야. 한 달에 얼마씩 주믄 표를 줘. 통장 승질이 얼마나 못
시절이라 길에서 죽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
됐는지 자기 기분에 조금 뒤틀리믄 들고 차뿌는그야. 우리
고, 이들을 이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오갈
는 식구가 많아서 한 동이 가지고 안 되니까 물동이 헹구고
데 없는 사람들이 무덤 위에 집을 지어 살았다.
버리는 물을 사람들한테 달라고 했어. 그러면 통장이 “이
영선아파트와 미니아파트는 이 공동묘지 터 위
개간나!” 하믄서 차뿌는 거야. 이북 사람인데 무서워가꼬.
에 세워졌다. 1962년 경제개발 5년 계획이 시
퍼뜩 뛰 나오는 기라.”
작되고, 주택공급정책으로 아파트단지개발이 활발해졌다. 영선아파트가 1969년에, 미니아
“목장원에 가가꼬 물 길러가 팔고, 목장원만 갔나, 해양
파트가 1977년에 지어졌다. 영선아파트는 영
대학교까지 안 갔나. 저짝 중리랑 동삼동까지도 빨래하
도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다. 복도 가
러 갔었다.”
운데 공용화장실이 있다. 지금은 30가구도 살 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후에 지어진 미니아파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그렇게 많았다고 했지만, 정작
트는 뼈대만 만들어져 있고, 방 갯수라든지 위
마실 물은 부족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직접 파서 만든
치 등은 집주인이 정해서 각자 시공했어야 했
우물은 주로 빨래터로 이용되었고, 식수는 함지골이나 봉
다. 그래서 사는 사람에 따라, 공사한 업자에
래산으로 올라가야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 집구조가 제각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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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마을 토박이거나 아주 어릴 때 이곳으로 이사 와서 토박이와 다름없이 사는 이주민 2세대의 이야기를 담았다. 부모세대에게서 물려받은 생활 력, 관계, 삶.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인생의 가치를 찾아볼 수 있다. 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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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강 연식·정숙희 손윤자 진순여 차미경 구미연·신기현 김양미 한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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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칠 때 파도 세 번 치니까 집이 한 개 그냥 없어지대
강연식
1947년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노사리 출생 1953년 이송도로 이주
정숙희
1955년 영도 신선동 출생 영도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영 도에 사는 두 분이이지만, 영도에 관 한 기억은 조금씩 다르다. 영도에 사 는 사람도 알지 못할 재미난 이야기 가 가득했지만, 살아온 세월의 씁쓸 함도 곁들여져 있었다. 욕심 없이 열 심히 살고자 하는 두 분의 작은 소망 을 들으면서 그 순박함과 성실함을 88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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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만나 결혼한 인연 지금까지 고향은 어디세요? 정) 우리 친정은 신성동이고 여는 시집이고. 영도를 못 벗어나고 있지. 근데 우리는 영도가 좋은데 다른 사람은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영도가 얼마나 공기도 좋은데. 시내도 가깝고. 남포동도 가깝고. 남편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정) 내 말 하면은 소설 쓴다 할 거예요. 나는 두 번 보고 결혼했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직장을 다니지를 안 해노닌까, 집안에만 있어. 공부가 짧다 보니까 집에서만. 밥만 해묵고 있어 나는 사회를 몰라. 시집 와도 근처 친구들은 사귀고 보면은 “와 그래 순진하노.” 이런 말을 많이 했어요. 인자 쫌 때깔 벗어본 게 한 십 년 정도 됐다고나 할까. 지금도 우리 아저씨도 그렇고 둘이다가 마. 그래 이래밖에 못 살고 있잖아. 그래도 고마운 거는 우리 자식들이 잘 커줘서 그거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즈그가 앞길 다 잘 사나 못 사나 내 폐 안 끼치고 가는 것만 해도 이것도 감사한 일이다 이래 생각하고 살아요. (외출 중이었던 강연식 할아버지 귀가 후) 어머님 두 번 만나고 결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강) 한 번 만났지. 선을 보자 해가지고. 선을 봤는데. 그래 보고 나는 그때 인자 다른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되나요? (웃음) 강) 내 있는 그대로 한다꼬. 선을 보고 한 달 지나면은 보통 잊아뿌는 거 아니가. 한 달 지났는데 처녀를 한 번 봐놓고 말이 없노 이 말이라. 제일 큰 처형이 됐지. 저 언니지. 그러다가 그때 우리 모친이 몸이 안 좋았어. 안 좋아가꼬 실제로 한 때는 이 다 치워버리고 수도원에 갈라꼬 마음 먹었거든. 결국은 내 접고 두 번 만나가 두 번째 만날 때는 엄마 아부지도 오지 말고 처녀만 보내라 해가 만나가꼬, 된다 안 된다 해가 한 달만에 결혼해뿠거든.
※ 두 분의 성을 따 강), 정) 으로 표기함. 90
깐주메 주으러 가자 초등학교는 어디서 다니셨어요? 정) 나는 여기가 아니고 영도국민학교, 우리 아저씨는 영선국민학교. 옛날에 골목골목 댕기가 영도초등학교 다니고. 그때는 골목이 참 많았잖아요. 내려올 때도 그라고 샛길로 또 들어가고 이래가 다닜고. 이 동네는 이 분이 훤해요. 영선초등학교 나왔을 기구만. 영선 내나 그 울로가 영도초등학교. 그때는 초등학교 얼마나 많았는데. 우리 다닐 때는 십사 반까지 있었어. 강) 영선초등학교 십삼 회 같으면은 영도국민학교는 사십오 회가 되거든. 남항초등학교는 십육 회, 십오 횐가 이래 될 거야. 영도초등학교는 옛날부터 우리 한국 사람만 댕기꼬.1) 영선초등학교는 옛날에 일본 놈들이 하던 학교가 가고 난 후에 하니까 늦고 미군부대가 돼가 있다가, 미군부대가 철수하고 학교가 되다보니까 그래 된 거라.2) 정) 맞아 맞아. 영선초등학교 “왜놈학교다” 이 말은 했다. 없어졌지 아파트 짓는다고.
강) 학생 시절 그때는 무슨 학생 시절이 있노. 밥 먹고 학교 갔다 와가꼬 집에 일 거들고 그런 거지 뭐. 요새 같이 제 시간이 어디 있노. 용돈 해봐야 일 년에, 명절 때 백 원 이백 원 받으면 끝이고. 그때 용돈이 어디 있노. 없지. 옛날에 심한 태풍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강) 우리 쪽 언덕 욜로 내려가서 언덕으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했다고. 지금은 못 내려가지만은 그때만 해도 그리 경사가 많이 안 했고. 사라호 때 파도 치가꼬, 밑에 그때는 술집도 많았거든. 술집 많았는데 사라호 때 사라졌지. 바닷가 요 우에 전부 다 언덕까지 있었다. 쭉 전부 다. 그래가꼬 태풍 우에서 보니까 파도 세 번 치니까 집이 한 개 그냥 없어지대. 파도가 너무 세니까. 술집삐 아이고 전부 다 싹 쓸었거든. 집이란 집은 흔적도 없었다. 그래 요 줄로 내라주가 사람 잡고 올리고. 집은 떠내려가도 사람 살아야 될 거 아이가. 그래가 올리고 그랬다고. 그때 내 중학교 일 학년 때니까, 아침 밥 묵다가 아홉 시에 밥 묵다가 지붕 날라가가꼬. 여가 인제 부엌방인데 입구에 밥 묵는데 천장이 날라가뿠는 거라. 천장 날라가네. 숟갈 들다가 이 방으로 들어왔지. 아침 여덟시부터 태풍이 불었거든. 요번 태풍 맨치로. 59년 음력 8월 추석 날. 추석 아침 여덟시부터 불어가꼬 마 열두시 되니 1) 1908년에 ‘옥성학교’로 설립된 영도초등학교는 1920년 「학교비령(學校費令)」에 따라 한국인 학교는 한국인이 비용 부담하도록 해 영도 주민의 기부금으로 신축교사를 마련했다. 2) 1910년에 개교해 일본인 2세들만 받아들인 영선 제4심상소학교는 해방 직후 부산에 진주한 미군이 병사로 쓰고 있었다. 미군이 물러나 그 건물을 비우자 영도 유지들이 인수하여 영선국민학교가 탄생하였다. 2002년 남항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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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은 어떠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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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뿌대. 웬만한 집 다 날라가뿌고 없고. 요새같이 스물 평, 서른 평 있는 게 아이고 다섯 평 막 이래가 여섯 명 이래 살았거든, 한 집에. 그래 살았는데, 인자 자기 집을 찾으려니 찾을 수 있나. 요새는 길이 좋지만은 길이 전부 다 이렇거든. 차도 못 댕기는 길이라. 그렇다 보니께네 한 집만 찾으면 돼. 우째 찾냐면, 부엌만 찾으면 되거든. 부엌만 찾으면 우리 솥단지 있고, 요래 가 요만큼 들다보고. 자갈 치우면은 요만큼 나오거든. 한 집만 찾으면 그 다음 집이 또 찾아지는 거라. 그래가 니 집 내 집 찾는 거라. 안 그럼 절대 못 찾아. 뭐 밀어뿌고 흔적이 있음 되는데 없잖아. 자갈로가 딱 막하뿠는데. 이런 걸 아는 사람 없다. 여 밑에 내려가면은 ‘대신통조림’이라고 있었거든. 옛날 일본말로 ‘깐주메’라 하거든. 깐주메는 일본 말로 깡통, 통조림을 깐주메라 칸다꼬. “그래 깐주메 주으러 가자.” 해가 가니께네 하수구에 있재. 거의 다 사라호 파도에 싹 실어갔다꼬. 집이 한 개도 없어졌뿠는 거라. 남항동 상가 저거는 그때 둑도 없고 돌담만 좀 있고 말았거든. 그래 싹 실은께 니 집 내 집도 없는 거야. 그래가 하수구에 손 넣으면 깡통, 깐주메라. 그기 잘하믄 소고기 들은 게 있고, 과일 들은 것도 있고 이런 거라. 그때 소고기 통조림이 크거든. 한 개 하면 재수 아이가.
예전에 수돗물이 없을 때는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정) 어르신이 산물을 줬어. 한 할아버지가 물 팔았어. 한 달에 얼마씩 받고. 그럼 동이마다 물을 채워야 될 거 채우고. 그때는 세탁기가 없었잖아. 물 나오면 빨리 물 줄 때 씻쳐야 된다고 손빨래 많이 하고 했지 그때는. 그럼 배달을 오신 건가요? 정) 아니야. 그 할아버지가 호스를 이래가 물을 줬어요. 받아가지고 빨래하고. 우리는 길가가 돼나노이 다라이 놓고, 거서 빨래해가 물 다라이씩 부우면 되잖아. 그래 살았지. 지금은 사십 년이니까네. 뭐 초등학교까지는 그래 했겠나, 안 했겠나. 다른 데는 물이 없었나요? 강) 그래. 해봐야 우에 내려가는 옛날 샘이거든. 지금은 파이지. 옛날에는 물이 귀할 때는 여서 줄로 선다 아이가. 아아들이나 엄마나 줄 서 있다가 잠 오면 교대로 해가꼬, 자기 순번 오면은 물이 마이 나오나? 쫄쫄쫄쫄 내리가 요만큼 웅덩이 요만한데 밥그릇 갖고 펀다 아이가. 그라믄 한 세 동이나 받고 나면은 다른 사람 교체를 하거든. 그 사람 또 두 시간 세 시간 기다려야 될 거 아이가. 내 밥그릇 표 아니까 자꾸 땡기가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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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우에 산제당에 물지게 지고 그까지 간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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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에서 십 번, 구 번, 팔 번 이렇게 되는 식으로. 그러믄 새벽에 아다리 될 때가 있고, 새벽도 물 퍼고. 저 우에 산제당이라고 있다고. 복천사 옆에 가면 산제당 있어. 제 지내는 덴데, 거도 물 받는 데 두 군데 있거든. 물지게 지고 그까지 간다 아이가. 거는 물이 쫌 마이 나오니까. 중간에 물로 빼내가 요 밑에 더 작게 나오지. 요가 자리가 한 다섯 명 이후가 되면 못 받거든. 그러면 올라가지고 높은 데 가가꼬 여서 봉래산 중턱쯤 돼. 그거 자리가 지금 다 없어졌겠지만은. 그때 봉래산에 나무가 없어. 6.25 전쟁 끝나고 내려 온 이북 사람들 불 땔 게 없으니까 전부 생소나무 짤라 불로 때다 본께 산이 완전 벌거숭이 됐지.
석빙고 원조가 광복동 전화국 옆이거든. 아침 여덟시부터 줄 서가꼬 사 묵거든 예전에 마을에서 주민들이 오렌지 주스 만들어 팔았다고 하던데요. 강) 아아, 주스. 주스. 그게 비닐주스를 해가지고, 여서 삼거리에서 중리 쪽에 넘어가면은 길 밑에 울로 보면은 오렌지를 만들었거든. 통에다가. 주사기 바늘로 쭈여가꼬. 요래 봉지로 딱 해가 여기 찍어오거든. 찍으면 그거 봉지를 사가 오거든. 집게도 사고. 그것도 비싸니까 찍었다고 그것도. 사람들이 가정집에 열선만 있으면 찍어진다 아이가. 비닐이니까. 두 장 합해가 딱 찍으면 형태 나오거든. 그래가꼬 끝을 바늘로 찔러 가지고. 앞에 차면 뽈록해지잖아. 그러면 거 인두로 딱 지진다꼬. 지지면은 비닐은 붙으니까. 그때 비니루말고 빤짝 종이 있재. 셀로판지. 셀로판지는 강하잖아. 그걸 대고 딱 하면은 열이 손가락 뜨거운께 장갑이나 해가지고 딱 하믄 올라붙는다꼬. 그럼 안 새거든. 그래가 이고 팔고 했지. 그게 오렌지라. 오렌지를 그런 식으로 만들었다고. 물에다가 수돗물 끓이는 게 아이고 산물 해가지고 맛만 들인다 아이가 시원하게. 그래가 가가면은 안 찹으니까 얼음 통에 담가가 가면 시원하잖아. 그 쭉쭉 빨면 나오잖아. 빵꾸 내니까. 비닐 봉다리니까. 우리 요새 같으면 하드 같이 얼음이지 뭐. 그땐 얼음이 안 나왔거든. 그 당시 다른 간식들은 뭐가 있었나요? 강) 그때 달걀 아이스케키 있었다꼬. 똥그란 거는 달걀, 계란 아이스케키라고 있다. 통에다 돌리면은 얼음에다가 소금 옇고 하면은 빨리 굳어지거든, 얼어지거든. 그래가 판다꼬. 길가 놔놓고. 그러면 색깔 노란 물이면 계란 아이가. 계란 케키라 한다꼬. 달걀 같이 요래 생깄어. 딱 요만하이. 그래가 그기 두 개로 붙이가꼬 나중에 물에 한 번 얼어가지고. 그걸 하나씩 사 묵고 했다꼬. 우리는 그런 거 형편이 안 돼 안 사 묵고. 그래 쫌 커가꼬 광복동에 가면은 지금 석빙고3) 나오제 석빙고. 지금도 있잖아. 원조가 광복동 전화국 옆이거든. 일 층짜리 집이라. 거 물라꼬 우리 여덟시부터 가 줄 서가꼬 사 묵거든. 한 개 이십 원. 열 개면 이백 원 아이가. 친구 3) 단팥과 우유, 물을 혼합해 얼려서 판매했던 아이스크림. 부산 광복동 점포에서 시작되었다.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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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 된다꼬. 딱 삼각형이라. 그래 사각짜리가 삼각 하면 두 개 나오잖아. 요래가 딱딱딱딱 찍어논다 그라믄
한 대여섯 명 가가 오백 원 주고 줄 선다. 그 자리 차지하면 안 가는 거라. 왜 안 가냐면은 열 개만 시키면 되는데, 열 개 먹고 또 열 개 주라 하거든. 아예 그 자리 안 비키준다꼬. 말씀하시다 보니까 재밌는 일들이 떠오르시나 봐요. 강) 근데 누가 하면은 생각이 난다꼬. 안 하면 모르고. 그러고 그기 일이 년 전도 아이고 적어도 사십 년, 오십 년 전인데. 오십 년, 육십 년 전 이야기 아이가. 내가 칠십 넘었응께네. 그라믄 그거를 기억하는 사람 몇이나 있겠노. 이 동네도 옛날 보면 길이 한 세 배나 넓어졌거든. 이 가운데까지 다 우리 집이라. 우리 집 전부 다 피난민들 와가꼬 움막치고 살고 요만한데 다섯, 여섯 살았어. 이 방 한 개 같으면은. 밥을 지어서 길가 내놓고 깡통에다가 밥 해묵고. 냄비 하나 있으면 몇 년은 가거든. 그 길가 솥단지가 그거 밲에 없으니까 고거 놔놓고 나무나 아무거나 주서야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봉래산 나무 한 개 없는 거라. 짜르다 보니께네. 우짤끼고 먹고 살아야 되니까. 먹는 거는 없응께네, 저 짝에 자갈치나 시장 가면은 고기 배 따고 내삐리는 거. 그런 거 주서 먹을 수밖에 없고.
옛날에 정밀 기계 기술자 되면은 딸은 그냥 준다 카는 거라 젊을 때 무슨 일을 하셨나요? 강) 우리 집안 사정에 의해가꼬 고등학교에 못 가고, 요새 말로 직업전선이지. 그래 댕기다보니까 우찌하다보이 기술자 되고 이런 거지 뭐. 딴 게 없어. 별 갈챠주는 거 없고. 옛날에 철공소 일을 배울라 하면 하나 하나 가르쳐주는 게 아이고 학교 같이, 학원 있는 것도 아이고. 막 맞아가면서 이래 배우는 거야. 근데 머리 좋으면은 빨리 배우는 거고, 머리 나쁘면 늦가 배우고. 그때는 정밀기계, 아이지 완전 허드레 기계라도 제일 좋은 기계지. 옛날에 그 기계 기술자 되면은 딸은 그냥 준다 카는 거라. 그만큼 기술이 좋은 부품이거든. 돈도 제일 많이 받고. 다른 기술에 비해가꼬. 그래 했는데 우리가 배울 때만 해도 내는 육 개월 만에 기계를 잡았거든. 보통 이 년, 삼 년 걸리는데. 그렇다 보니께네 어른들 퇴근하고 가면은 내 혼자 한 번씩 해보고. 요새는 기계 좋으니까 하나하나 딱 모터부터가 한 개씩 돌아가는데, 여는 기계 스위치 올리면은 다섯 개 다 돌아가거든 기계가. 벨트로 돌리니까 방앗간 맨치로. 그렇다 본께네 사장이 안 가면 몬 했다. 그래 또 야단맞지. 그러면 “한 개만 해 보께요” 해가꼬 그래 한기 넘보다 하나씩 하다 보니까 좀 빨리 기술자 된 거고. 그러다 본께네 넘보다 돈을 쫌 더 받죠. 그때 한 달 해봐야 오백 원 밖에 못 받았거든. 오백 원도 안 될 거야. 쌀 한 말이 육백 얼마 했으니까. 그거 갖고 다섯 식구 살아야 돼. 작게 묵고 어쩔 수 없고. 낮에 밥 물라 하면 내가 제일 우에 되다 보니까, 밑에 동생들 서이 있었거든. 그렇다 보니께네 밥을 묵어도 점심은 무러 몬 오고. 점심 무러 간다하고 한 바꾸 뺑 돌고 그래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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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도 하셨나요? 강) 처음에는 양복에 댕기다 철물점 갔는데. 양복점 댕기고 영도다리 넘어가는데, 야통(야간통행금지)이 있었거든. 못 넘어오잖아. 그때 보통 열한 시까지 일 하면은, 짧은 다리로 여까지 올라면은 한 삼십 분 걸리거든. 광복점에서 영도다리 올라믄 십 분만 있으면 넘어 와. 영도다리 오면 우째도 오거든. 골목골목 해가지고 오는데. 그기 참 힘들지. 힘들어도 그라고부터 돈이라는 거는 박정희 정권 잡고 화폐개혁4)하고 해가꼬, 돈이 막 금방 백 원짜리 이백 원짜리 되고 막 이렇더라고. 그래 살기가 그만큼 힘들었지. 십 분의 일로 줄았잖아. 오백 원을 오십 원으로 만들어놓고 십 분 줄아다 보니께네. 수입이 적다 보니까 집안 살림은 별 차이 없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근데 그래그래 하다가 기술자 되니까 쫌 나은데. 넘보다 한 번 더 받아야 되니까 넘보다 빨리 눈 돌리가믄서 한 개 더 배와야 되거든. 그러다 보니께네 돈도 십 원 더 받고. 거기 회사서 마음에 들었는가 보통 석 달에 한 번씩 올리주는데 오십 원씩, 백 원씩 올리주는데, 나는 한 달에 오십 원씩 올리주드라고. 그것만 해도 그게 얼마고. 넘보다 좀 더 받았단 이야기지. 그러다보이 넘한테 지기 싫고. 그리 살다가 장가가고 나이께네 그거도 뒷전 돼버린 기지. 가정 있고 하면은. 수입은 어느 정도 되는 거니까. 그래도 뭐 쪼금쪼금 차이 나지. 일 잘 하는 사람, 의해 가꼬 사회에 열 개 만들 거 스무 개 만들면 돈 더 줄 거 아이가. 하여튼 별 거 없어. ※ 2018년 현재 개인 사정으로 타지역으로 이주함.
4) 정책적 혹은 경제적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화폐가치를 조절. 여기서는 1962년 화폐개혁을 일컫는다. 97
내 살던 고향은 _ 강연식·정숙희
못 하는 사람. 지금도 마찬가지고. 요새 뭐 컴퓨터 두드리면 답변 나오지만 옛날엔 그기 아이거든. 본인 실력에
언덕에서도 돼지 키우고, 닭 키우고, 채소 갈아 묵고 이랬어요
손윤자
1955년 이송도 출생 손윤자 어머니는 마을 토박이로, 강 인하고 생활력 강하지만 눈물 많고 정도 많은 분이다. 많은 어려움 속에 서도 네 명의 동생과 네 명의 자식 들을 씩씩하게 키워내신 그녀에게선 남다른 포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한 밤에 공중화장실에 갔다가 난리가 났던 이야기에는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그 시절의 애환이 묻어난다. 지 금은 잠시 이송도를 떠나 아랫동네 에 살고 계시지만, 이 마을의 햇볕 좋 은 옥상과 이웃이 그리워 언젠가는 98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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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동생 너이 있는데 결혼을 하겠어요 이 마을 토박이라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제가 열한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또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니도 있고 오빠도 있고 그런데, 다 출가하고 나니까, 밑에 우리 동생만 넷이 남았는거라. 형제가 구남매라. 구남매인데 위에는 다 가버리고 우리 다섯 명, 내 밑에 너이. 다섯 명이 엄마 아버지하고 살다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라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래가지고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내가 그냥 가사 일은 다했지. 내가 시근이 빨리 들었지. 그래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열네 살, 열다섯 살 때 영선아파트 짓고 신선아파트 짓고 할 때 벽돌 이고. 하여튼 그래가꼬 생활해 나왔는 기라. 남편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엄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 다 흩어져뿟는 기라. 미니아파트가 공동묘지였어. 흙담 해가 지은 집도 있고 막이 쳐진 집도 있고 거기 달세로 가게 생겼어. 큰방 주인이 지금으로 말하면 롯데백화점 뒤에가 제주도, 여수 다니던 뱃머리였어. 터미널이었어. 거기서 제주배가 들어오면 다마네기, 고구마빼떼기1), 밀감, 계절에 따라서 받아가꼬 장사하는 사람이라. 근데 그 배에 아바이가 기관사로 실습 나왔어. 참 착하니까. 우리 작은방에 참한 각시가, 처이가 하나 있는데 동생들이 있다 이래 얘기했나봐. 자기는 와서 나를 많이 봤나봐. 자기가 보니까 좋다 그랬대. 큰방 주인이 말을 하는데 누가 동생 너이 있는데 결혼을 하겠어요? 나는 겁이 나서 안 할 거다면서 우리 동생들이랑 살아갈 거라고. 진짜 고생 많이 하고 살았거든. 그런데 자기를 한 번 보자. 주인아줌마가 자꾸 자기를 추스르는 거지. 절대 그런 사람 아니니까 겪어봐라, 사귀 봐라. 그 해 설이 돌아왔어. 그래가꼬는 자기 집에 한 번만 가자는 기야. 가서 자기 모든 것을 알고 가정도 알고 그러면 내가 이제 믿어줄 거 아니냐. 그래 갈라 하니까 내가 옷이 있나? 신이 있나? 하루살이 형편없이 동생들이랑 살아가는데. 옷도 해주고 즈그 집에 데리갈라고. 신도 사 주고 그래. 그 신 신고 집에 따라 갔다. 와노니 할 수 없이 부부가 된 거야. 그래가꼬 살은 기라. 남편분이 정말 좋으신 분이시네요 그렇게 키워도 “야, 처제야.” 이 소리 한번 안 하는 기라. “처제요.” 했지. 불쌍하다고. 자기 밑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딱 데려와 가꼬 동서하자고 선보이고. 돈이 없으니까 방 하나. 저 아래 우리 집이 있어. 방이 여러 개라. 먹는 거는 같이 먹고 돈 벌어 집 구해가꼬 나가라 하고. 시집가서도 우글우글 정신없이 살았어요. 내가 우리 아바이 보고 “늘 우리가 키웠으니까 그래도 밥술이라도 묵고 살도록 맺어줘야 하지 않겠나? 좋은 사람 좀 1) 고구마를 삶아서 잘라 말린 것 100
선택해 보세요.” 하면 자기 밑에 사람 좀 보고, 착하면 우리 동서하자 해서 동생 서이는 다 우리 아바이 밑에 있는 사람들을 제부를 삼았어. 하나는 지대로 나가가꼬 연애를 해서 살고 있고. 우리 아바이는 내가 눈물을 보이면 내 살아온 게, 말은 없지만 아는 기라. 내가 속이 상해 눈물을 보이면 억수로 가슴 아프게 생각해. 아직까지 “이 여자야.” 이런 큰소리도 못 들어 봤네. 내가 또 그런 소리 듣게끔 안 했고.
집에서 무조건 부업을 다 했는 기라 결혼하고 나서도 일을 하셨어요? 안 해본 일이 없지 다 해봤지. 나가서는 못 하고. 식구가 많으니까. 수 놓는 거, 옛날에는 시집갈 때 카텐, 집안에도 딱 걸고. 옷 걸고 하는 햇대포2)하고, 비게잇, 방석 수도 많이 놓고. 세타 수, 세타를 옛날에 편물해가꼬 많이 짰잖아요. 십자수를 세타에 놓은 거라. 그 십자수도 하고. 또 신발이 스리빠, 그물슬리퍼가 많이 나왔어. 그물도 많이 짜고 부업으로 밤, 마늘 까고 도라지 까고. 놀지는 않았어요. 계속. 우리는 애들, 동생들이 많으니까 이게 박히가 있는 기라. 내 머리에. 동생 넷과 아이들까지 키우면서 어려운 점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제가 아들 둘, 딸 둘이 있어요. 다 출가했지. 인제 우리 동생들이 있으니까 애들 키우는 거는 문제가 없는 기라. 애들 아빠 배가 들어와. 이틀까지는 괘안은데 삼일만 지나면 우리 동생들이 자기 형부 눈치 볼까봐. 보면 어짜꼬 싶어가지고. 항시 그런 세월을 살았는 기라.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은 동생이 여럿이니까 키우는데 별 문제도 없었고. 우리 동생들이 자라서 조금씩 커나가니까 그렇게 애를 멕이는 기라. 나 정말 고생했어. 우리 동생들이 밖에 나가 내 눈에 안 보이면 내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막 이랬어. 우리 동생들 시집보낸다고 제주도 제부는 제주로 가서 잔치 시키고 이라다 보니까 정신없이 살았어요. 그니까 세를 이리갔다 저리갔다, 집 준비한다고 이 집 준비 하나 하면 저 집 준비해야 되고 이라니까. 인자 그리 해놓고 나니까 내가 벌써 육십이 넘었어요. 진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제는 좀 놀러도 다니고 하세요? 이제는 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전신이 아프고 그렇습니다. 아직은 놀러도 못 가봤고. 아바이 배 탈 때, 이 마을에서 굉장히 놀러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이제 살기가 괜찮으니까. 관광차가 아침으로 두 대 세 대 떠나고 날마다 떠나도 저는 관광을 못 다닜어. 왜? 늘 우리 아바이가 우리 동생들, 우리 자식들 때문에 저 2) 옛날 옷장 역할을 한 큰 천. 걸어둔 옷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덮어둔 보자기라고 한다. 101
내 살던 고향은 _ 손윤자
내가 집을 떠나면 안 되는 기라. 집에서 무조건 부업을 다 했는 기라. 많이 했어요. 나는 뭣이라도 해야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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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가서 고생하고 파도를 넘어 죽냐 사냐 벌어오는 돈 아닙니까? 그 돈을 가지고 내도 외로우니까 계도 많이 넣었어. 계에서 여행을 가도 나는 못 간거야. 아바이는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거기 가서 흔들고 논다는 게 그 정신상태가 틀렸다 싶어서. 곗돈으로 가도 못 다닌 거야. 죄의식 때문에, 내보낸 사람 때문에. 그라기 때문에 한국이 어디가 어딘가 모르는 거라. 이제 애들이 결혼해서 우리 엄마 너무 너무 고생했다고 ‘외국 가세요, 어디 가세요’ 자꾸 뭘 끊어가 이래도 아직까지 못 갔습니다. “야야, 난 한국도 어디가 어딘지 모른다. 아직 외국 안 갈 거다.” 즈그가 어디로 데려가고. 요번에도 강원도 한 번 갔다 왔고. 그래서 아직 외국도 한 번 못 가봤고 살아온 게 그렇습니다.
우리 집에 도둑놈이 왔다 옛날엔 흰여울길이 지금하고 많이 달랐나요? 절벽이라 이게. 중간 중간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거든요. 그런데 수영하러 내려가다 떨어지고, 놀다가 했지. (흰여울길 담을 가리키며) 이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집 와 가지고도 여서 살았는데 아바이가 빨리 안 들어오는 거라. 어머나, 행여 여 떨어졌을까 싶어서 밤늦게 나와 후라쉬로 비차 보는 기라. 떨어진 사람이 있는가. 그래 살은 곳이 여기입니다. 그래가 저만큼 언덕이 있었는데 위험해가 담을 쌓은 거 아입니까. 저 밑에가 전부다 횟집이었어. 요 밑에 아가씨들 델다 놓고 회 장사 했어. 언덕이 자꾸 무너져가꼬, 아가씨들 자다가 죽고 하는 기라. 그래서 다 철거를 시켰어. 지금 사람들 산책하는 절영해안산책로가 다 횟집이었어요? 반도보라 입구에서 저 끝까지 횟집이었어. 그래가지고 횟집에 회 먹고 나무젓가락 버린 거 주어가지고 불태우고. 요래 말리 가꼬. 그래 살았다 아입니까. 아고 말도 못합니다. 이 길(흰여울길)도 지금보다 넓었는데 자꾸 무너지니까 좁아졌지. 이게 비가 많이 와 언덕이 무너질라 하면 구렁이가 올라오는 기라. (팔목을 손으로 감싸며) 이따만한 구렁이, 배암, 요 밑에 배암이 많이 있어요. 지금도 있지예. 구렁이가 나오면 비탈 아래를 이래 내다보잖아요. 저런데 구렁이가 죽죽 감기가 있어. 그러면 얼마 안 있으면 언덕이 난리가 나는 기라예. 꼭 그런 거는 지키더라고요4). 본대는 언덕에도 살았지. 무너지니까 그나마 안전한 요쪽에만. 이 밑에도 돼지 키우고 닭 키우고 막 이랬었어요. 그라고 절벽 내리가가꼬 편편하니까 호박 심고, 채소 갈아 묵고, 닭 키워 묵고, 돼지 키우고 이랬다고요. 3) 보듬어 4) 구렁이가 나타나는 것이 비탈이 무너져 사고가 생기는 징조였다고 한다. 103
내 살던 고향은 _ 손윤자
떨어지고 했어요. 저 바닷가에서 올라와가지고 아듬어3) 가지고. 그때 병원이 어디 있습니까? 된장 바르고
집안에 화장실도 아무도 없었어요. 사람이 다리만 놓도록 해놓고. 와, 함석이라고 아는가 모르겠다. 양철이라고 그걸 어덕5)으로 내려가게끔 해놓고 우리가 큰 거를 보면 어덕으로 바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잖아요. 인분이 바로 내려가는 기라. 정화조 파고 그런 거 없었지. 그 다음에 발전이 되가꼬 도라무6) 묻어 가꼬. 바닷가로 인분 흘러가면 안된다 이래가꼬. 아이들 키우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아이 키울 때 기억에 남는 거는…. 변소가 공중변소니까. 공중 화장실이니까. 여기 살다가 내가 집을 사가 갔는데, 저녁에 자다가 동생들이 공중화장실을 가는데. 잠질에 아아들이 집을 못 찾아오고 다른 집으로 간 거야. 성수 엄마라고 살았는데, 그 집에 간 거야. 옛날에는 문풍지, 옛날에는 종이로 바르는 문이거든. 그 집에서 인제 우리 동생이 들어가니까. ‘성수 아빠, 도둑놈 왔소.’ 이런 거야. 아아는 우리집인 줄 알고 열고 들어갈라니까 안에서 도둑놈 왔다고. 문에 그늘이 보이니까 문고리를 잡고 안 열어 주는 거라. 그러니까 아아가 다부7) 나오면서 그 집 신발을 지구자꾸8)로 한짝한짝 이래 끌고 우리 집으로 온 거야. 그래가 아침에 보니까 신발이 지구자꾸로 있는데 남의 신발이라. “우리 집에 도둑놈이 왔다, 도둑놈이. 신발을 한짝 한짝 거꾸로 신고 갔다.” 그렇게 우리집에서도 난리가 난 거라. 우리는 화장실 가서 안 들어오니까 애 찾으려고 동원령이 다 되었다니까. 이집에 갔다 오는 줄은 모르고. (웃음) (시동생이 함께 살 때) 자다가 보니까, 문풍지 문 밖에 잠그는 문이 있는데 누가 이걸 열라고 잘그락잘그락 이라는 기라. 내가 아바이 한테 “보소, 도둑놈 왔소.” 자기도 가만히 들어보니 잘그락잘그락 하거든. 사알 일나더니 도라이버로 문풍지를 뚫고 문을 팍 열어 뿌는 기라. 우리 시동생 화장실 갈라고 문 열라고 서 있으니까, 안에 문 열은 형님도 놀래가 넘어지고, 밖에 시동생도 놀래가 ‘와-!’ 하고 넘어지고. 마, 시상에 그런 지경이라니까. 화장실 때문에. 마을 중간 중간이 화장실이었거든. 그래 가꼬는 스물몇 가구 씩 쓰는데, 구멍을 세 개 네 개 이리저리 뚫는 거야. 급하면은, 문을 열면 안에 있는 사람 놀래가 일어나고 이 지경이었어. 사람이 다리만 놓도록 이래 해놓고.
5) 언덕의 지역말(경남, 전라, 충남) 6) 드럼, 일본식 발음 7) ‘다시’와 ‘되돌아’ 두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 경상남도 일부지역에서 사용한다. 8) ‘지그재그’라는 말인 것 같은데 ‘짝짝이’를 넣어 읽으면 의미가 통한다. 104
갯바람과 볕이 좋아 장맛이 좋은 곳, 다시 오고 싶어요 여기서 사시다가 왜 아랫마을로 이사 가셨나요? 여기 지네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손지들이 올 수가 없는 기라. 지네 때문에 물릴까봐. 이제 간 지 삼 년 되었습니다. 그래가꼬 갔는데 우리가 여기서 옥상 쓰고 좋은 공기 마시고 살다가 거기는 공기도 틀리고 손자들이 오면 경비실에서 조용히 하라하고 이래요. 세 놓은 집이 비면 다시 오고 싶어요. 첫째는 애들이 많으니까 된장도 담아주고, 고추장도 담아주고, 김장도 해야 되고. 이런 데서 그런 거 하기 너무 좋습니다. 옥상에서 갯바람 맞아가꼬, 장도 억수로 맛있고 그러는데 아파트는 볕을 봐도 속에서 보는 볕이니까. 이런 데서만큼 안 좋고. 그래서 항시 미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개인적인 계획이나 꿈이 있으신지요? 손지들 커가는 거 그게 꿈이고. 아바이하고 잘 살다가 죽을 때 되면 아들들, 딸들 다 전수해주고 갈 내 살던 고향은 _ 손윤자
거고. 그렇지 뭐, 별달리 그건 없습니다. 안 아프고 더 욕심 안 지기고 이것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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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송도 바닷가 뒷쪽으로 횟집을 하던 건물이 보인다. ①
②
③ 새마을 어머니회 활동 모습 ④ 젊은 시절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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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결혼식 날 집 앞에서
내 살던 고향은 _ 손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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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빈터에서 엄마가 천막 짓고 내를 낳았대
진순여
1954년 이송도 출생 진순여 어머님은 동네일을 척척 해 내시는 통장이다. 지난 시절에는 여 러 가지 장사로 가정을 지켜냈고, 지 금은 통장으로서 마을을 위해 애쓰 고 있다. “우리 아저씨가 너무 잘하 니까 그래도 고맙다. 사랑이란 그런 거야.”라며 지금이 오히려 더 신혼 같 다고 소녀처럼 웃으셨다. 그 사랑이 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어졌다. 인 터뷰 당시 집안일로 바빠 사진촬영 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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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교회 자리에서 태어났다 이송도에서 태어나셨어요? 원래 여기서 태어났지. 저 밑에 금성교회 자리. 피난 와 가꼬는 사람들이 상공회의소라 하지? 영도다리 옆에. 그기 피난을 너무 많이 받다 보니깐은 영도로 들어가라 해가지고 들어온 데가 요 금성교회. 피난 온 사람들 천막 속에 다 살았지. 자꾸만 불어나니까 식구 많은 집 가마니 몇 개, 없는 집 가마니 몇 개 이래가꼬, 가마니로 딱딱딱딱 주가꼬.1) 여기는 전부다 산이었거든. 낮은 산. 그런 산이 되다 보니까 전부 다 갈아가꼬, 터 잡아가꼬 지은 집들이라고 여기가. 교회 빈터에서 엄마가 천막 짓고 내를 낳았대. 그래서 나는 천막 속에서 엄마가 낳았다는 걸 알지. (웃음) 내 어렸을 때는 모르겠지만 크면서도 이렇게 이층집이 어딨노. 낮은 집이고 오두막집이고, 옛날 돌담집. 학교도 여기서 다니시고, 일도 여기서 하신 건가요? 여기서 다하고, 여기서 시집가고, 시가집도 여기고. 우리 아저씨도 남항초등학교. 아들 손자까지도 같은 남항초등학교 선후배간이고. (웃음) 우리 집이 엄마 아버지가 참 양반이라. 갈라 묵는 거 좋아해. 우리 아버지 습성이 옛날에는 그 우에 구두닦이도 많았거든? 구두 닦으라고 아침에 가면은 그 구두닦이 하나, 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게 꼭 아버지 신발을 닦아줘. 그라믄 아버지는 “밥 좀 주라.” 하는데 그냥 밥만 덜렁 주면 아버지한테 혼나. 꼭 상을 놔아 가꼬 밥을 줘야 돼. 김치 한 개를 주더라도 상에 놔야 줘야 돼. 걔들이 항상 우리 집에 왔다갔다 하면서 아버지 구두를 꼭 닦아주고. 우리 식구들이 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친구들도 우리 집에 모이는 그런 것도 있겠지. 배고프다 하면 밥도 주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우리 집을 동네 총각들이, 우리 딸 여섯이거든, 딸이 여섯이래도 아무도 “니 좋아한다.” 소리 하는 남자가, 총각이 없어. 두려우니까. 감히 몬 건너볼. 세월이 흘러가지고 지금 서로 만나면은 “내 니 그때 좋아했는데” 이런 소리 한다. 그런 것들이 늙으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야. 언니들은 “그때 좋아했으면 말하지! 왜 말도 안 하노!”
물길을 피해 생긴 집들과 골목들 예전에는 흰여울길이 큰 길이었다고 하던데요. 신작로 생기기 전에 글로만 댕겼어. 지금 쪼막쪼막한 집이 얼마나 많노. 빡빡하게 내려갔어. 그 밑으로 점빵집 있지요? 흰여울점빵. 거기도 반찬가게, 부식가게 그런 게 촘촘히 있던 데라. 그러고 중간 중간에 골목에도 구멍가게. 할매들 촌에 가면 구멍가게 하듯이 그런 것들도 여기 다 있었다고. 신작로가 생기면서, 여기 큰길이 1) 당시 가마니를 나눠주고 가마니를 깐 자리에 거주하도록 했다고 한다. 110
생기면서 사람 댕기는 게 안 되니까 다 문을 닫은 거지. 옛날에는 구멍가게들 천지로 있었어. 언덕 축대있는 데 있재. 쪼막쪼막 다 있었어 집들이. 여기에 보면 전부다 골목이잖아. 지금은 골목이 어느 정도 분별이 돼가 있는데, 옛날에는 그냥 들어가면 골로 절로 빠져나가는 길이 다 있어. 요만한 길도 골목으로 댕기는 거야. 길을 잃는 사람도 있었겠네요. 옛날에는 여기가 좀 별난 동네거든. 신작로가 생기면서 쪼끔 까불까불하는 청년들이, 우리 아저씨 또래나 그 우에 또래나 이런 사람들 껄렁껄렁한 사람들이 패싸움 같은 거 많이 했잖아. 그렇게 해가꼬 신고 들어가서 경찰 온다 하면은 밑에 다 내려가면 아무도 몬 잡어. 어디 가서 잡을 거야. 몬 잡아. 골목골목 그게 다 도랑이라. 물 내려가는 도랑. 빨래터고. 요기도 예전에는 빨래터야 요 밑에. 도랑이 이렇게 있으면 길이 얼마나 좁겠노. 요 좁은 길로 일로 댕기다가 복개를 하면서 좀 이래 넓어지고 한 거지.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그렇게 많았단 말이에요? 그럼 그걸 피해서 집을 지었네요. 흘러내리니까 여 밑에 지반이 약하다 보니까 허물어지는 기라. 지금 축대 저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 아무도 없대. 똥그란 거. 동글동글하게 쭉 있어. 담쟁이 나무들도 덮어가 있고, 변호인 집 앞에도 동글동글. 그 담쟁이 덮어 안 있드나. 그것이 축대라. 거 쌓고부터는 이게 안 허물어지는 거라. 내가 전에도 그랬지만은 시집을 일찍 갔거든? 일찍 갔는데 맨날 여름만 되면 우리 집이 허물어져 가는 꿈을 꾸는 거라. 그때는 파도가 와가꼬 실려 가는 거라. 옛날에는 물이 그리 많이 흘러가도 저장되는 곳이 없으니까 물이 귀했어. 딱 이 동네만 물이 귀했어. 김장 할 때 바닷가에서 배추를 절여 놨다가 그서 씻고 올라와. 씻고 올라 와서 집에 와서 두레박 새 물로 한 번 헹궈가꼬 김장 담그고 했지.
고맙다. 그런 거지 뭐. 사랑이란 그런 거야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결혼은 내가 많이 일찍 했지. 스무 살 때. 그때는 스물세 살 정도 되면 다 시집을 갔어. 스물두 살, 스물세 살, 조금 일찍 간다하믄 스무 살 요렇게. 다들 일찍 갔어 그 시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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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진순여
그렇지. 산이 낮은 동산이라도 물 저장할 곳이 없으니까 비만 오면 무조건 흘러내려뿌는 거라.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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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게 된 사이세요? 우리 아저씨가 놀러온 거지. 나도 그래도 처녀 때는 좀 예뻤다? (웃음) 우리 친구하고 앉아 노는데 그냥 들이대서 그렇지. 어릴 때부터 같이 크니까 우리 언니들 보고 처형이라 안 해 잘. 누나 그러고. 우리 언니들도 ‘순복아, 순복아’ 이라고 그래. 지금은 말은 제부라 하지만. 그만큼 만만해. 우리 아저씨가 너무 외롭게 큰 사람이 되다 보니까 식구 많은 우리를 너무 좋아한 거야. 그런데 우리 언니들은 ‘저게 감히 진씨 집 딸을 건드려.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할 정도로. 그런데 지금은 우리 아저씨가 너무 잘 하니까 그래도 고맙다. 그런 거지 뭐. 사랑이란 그런 거야. (웃음) 맨~날 내가 싫다 해도, 맨~날 우리 집에 놀러를 오니까. 지금도 좋으세요? 지금 아들 둘 다 장가 보내고 영감 밖에 없으니 지금이 신혼 같애. 시집살이 내~ 했지, 넉넉한 살림 몬 살았지, 맨날 묵고 살기 바빠 가꼬 장사한다고 돌아 댕겼지. 지금 아무일도 안 하니까 지금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영감탱이 저래 딱 아파뿌네. 지금도 내~ 둘이 있으면서 “우리 둘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잉”하고. 내 살던 고향은 _ 진순여
(웃음) 애들이 어떻게 살든 상관 안 하고 사는 것이 시상 편한 기라.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 어떤 장사를 하셨어요? 우리 아저씨가 원래 직장이 없었어. 나도 남의 직장 생활도 안 해봤어. 안 해봤는데 먹고 살라카니까 할 수 없는 기라. 애들 키울려고 할라믄. 그래서 내가 우유 장사도 했고, 테크노과학고등학교2) 찻집 있잖아 초록색. 거기에 옛날에 ‘골목 안 분식집’이라고. 내가 우유 장사를 했는데 그 집 아저씨가 좀 큰 데로 갈라하면서 내한테 넘겨줬어. 그때만 해도 삼백에 얼마로 가게를 했으니까 “나 돈이 없다.” 이랬드만, 그 아저씨가 내를 신임을 했는가 어쨌는가 “그라믄 일단 맡고 천천히 주라.” 이래가꼬 맡아가 핸기, 그 점빵이 뒤에 방이 또 있어. 방이 있는데 점빵만 이렇게 딱 얻어가꼬는, 그기에다 다락을 넣어가지고 우리가 다락에서 살았어. 인자 앞에는 가게하고 다락 놓고. 애들하고 다락 놓고 방 쪼깨난 거 하나 넣고. 이래가꼬 살면서 뒷집이 이사가면서 그 뒷방까지 우리가 얻어가꼬. 분식집을 거기서 한 십 년 했어. 우유 장사를 한 십 년 정도 하고. 처음에는 우리 아저씨 보고 가게를 맡겼지. 그때는 분식집 안 하고 점빵만. 옛날에는 근대화 슈퍼마켓 이래가꼬 작은 슈퍼들 있었잖아. 그럴 시기에. 아주 오래됐지. 처음에는 구멍가게. 나는 우유 하면서 구멍가게를 내가 아저씨한테 시켰어.
2) 지금의 부산보건고등학교. 113
우유 장사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내 앞에 하는 애가 어느 날 허리가 아파서 내보고 대신 좀 해 달래. 리어카만 좀 끌어 달래. 그래서 “내가 어떻게 그걸 끄노. 나 그거 몬 한다.” 이러니까 도와줄 테니까 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하도 사정을 하니까 내도 불편한 기 끌어줬어. 끌어주니까 얼굴이 붉었다가 푸르렀다가. 리어카 끄는 것도 기술 없으면 안 되거든. 다섯 박스 이래 옮겨가는데 그것도 내가 몬 끌겠는 거야. 내가 지금은 뚱뚱하지 빼빼했거든. 삼 일 하면 고만해야지, 일주일 하면 고만해야지, 한 달 하면 고만해야지 했는데 걔가 “조금만 더 도와줘, 조금만 더 도와줘.” 하는 바람에.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가만 본 게 내가 잘하거든. 잘하니까 “니가 해라.” 이라는 기야. 소장도 본께 일을 잘 하거든. 그러니까 “그럼 해보소.”이라는 기라. 그래서 시작한 기. 누구 말마따나 하루 입금이 몇 천 원하는 입금이 나는 십만 원 이상 넘게 판매를 한 거야. 나는 완전히 동네를 점령을 해버린 거야. 그때만 해도 매일우유가 막 차고 왔거든. 독점을 하고 있었어. 가만 보니 성질나. 갈 때마다 서비스 줬잖아. 무슨 우유였어요? 해태우유. 해태우유가 벨로 인기가 없었어. 매일우유가 있었지. 그래서 매일 가서 서비스를 막 들이댔잖아. 오늘 다섯 개면 내일 열 개, 모레 가면 열다섯 개. 난중엔 롱우유(해태 롱우유)까지 완전 냉장고 점령을 해버렸어. 그래서 그 사장이 “니 참 잘한다. 니 참 장사술 좋다.” 그러니까 “이래 안 하면 몬 사는데요.” 우유장사를 하면서도 교육을 받았지,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으니까 머리에 딱 들어왔는 거야. “내 여기 미쳐야 되겠다. 안 미치면 내가 이기서 물러난다.” 싶어가꼬. 누가 돈벌이를 해주는 사람이 있나. 내가 묵고 살아야 되는데. 다른 장사는 어떤 것 하셨어요? 핫도그, 옛날에 십 원짜리 동글동글 핫도그. 성모성당 그 밑에 옛날에는 큰길이었어. 그기사 사람이 팔딱팔딱 했거든. 가만 보니까는 장사를 해야 되겠는데, 가게 홀이 쪼깨난 게 있어서 그기서 핫도그 장사를 했어. 십 원짜리 핫도그 장사를. 동네 아줌마한테서 핫도그 하는 걸 배웠어. 지금은 붕어빵 같이 옛날에 빠다빵이란 게 있어. 집에서 숙성 시키가꼬 반죽하고 이랬거든. 나도 보는 게 있었으니까 그런 걸 할라고 했지. 내 어릴 때도 우리 집에서 장사를 많이 했으니까. 핫도그 장사는 잘 됐어요? 잘 했지. 뭐라도 열심히 하면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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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제같고 내 부모같은, 그게 동네사람이지 원래 아버님이 통장 하시다가 어머님이 이어 받으신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지. 우리 아저씨가 생전 같이 장사만 하다가 장사가 자꾸만 안 되는 거야.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걸 찾으니까. 그래가꼬 인자 경비 보러, “거서 노나 여서 노나 노는 건 똑같다. 거서 노소.” 하니까 이놈의 통장일 때문에 일을 몬 하는 거야. 아니 통장 월급 꼴랑 얼마 된다고 일을 안 갈라고 뎀비냐고. 원래 젊었을 때부터 남의 직장 일은 안 했어. 그냥 내랑 같이 어울려서 장사 하고. 그래 살다 보니까 둘이 맨날 이십사 시간을 사십 년을 붙어 있었어. 그기 있어본 사람은 그냥 있는갑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안 했다가 있으면은 깝깝한 기라. 배타고 들어온 사람은 몬 있는다 하대. 난 괜찮아. “그럼 내가 통장일 봐줄게 가소.” 놀아도 거서 놀믄 그기는 돈이라도 나올 거 아이가. 내가 이 지리를 훤히 아니까 누구집 이라믄 ‘아 그 집.’ 하고 다 찾아가거든. “내가 조사 다 해줄게.” 그래가꼬 간 거지. 하다 보니까 나이가 육십오 세 넘으니까 퇴직을 해야 되고. 그래서 “다음 통장 할 사람 있음 해라.” 했는데 없는 기라. 그래 가꼬 내가 “다른 사람 젊은 사람 있으면 시키라.” 이래도 없다 그러는 거야. 그럼
통장 임기가 따로 있나요? 없고. 만 육십오 세면 퇴직해야 돼. 내가 지금 육십네 살이다, 그럼 일 년 하고 퇴직해야 돼. 근데 지금은 통장이 젊은 사람 구하지 육십 넘는 사람은 안 구하거든. 정년퇴직이 짧으니까. 되도록이면 젊은 사람. 사십 대 통장들 있어. 젊은 아아들. 집에 있으면서 요새는 애들이 할라 그래. 아파트가 제일 쉽거든. 함에 넣어주면 고만이여. 이놈의 동네는 일일이 찾아가야 해. 두드리니까 이게 팔이 아픈 기라. 두드리고 발로 차고. (웃음) 그런데 그 권한이 통장이기 때문에 하는 거라. 아니면 몬하지. 조사하러 오면은 누가 문 열어주나? 안 열어주지. 통장이니까 두드리고 차고 해도 말 몬 하지. “아따, 문 좀 열어주소.” 해싸면은 통장이라 하면은. 또 다 아니까. 이웃집을. 보다시피 할머니들 다 반가워하잖아. 나는 이 동네 오래 살았던 할머니들 다 내 부모 같고, 내 형제간 같고. 진짜 남의 서방이라도 내 오빠 친구들 같으면 내 오빠들 같고 그렇잖아.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고 무시하는 사람 없었어. 내가 말하면 다 그렇게 들어줬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들어주고. 그게 동네 사람이지. 내가 오늘도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참 시작을 하기는 잘 했구나. 그런 일이 없었으면 우리 흰여울마을이라고 어디 떴겠나. 우리가 시작을 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기까지 온 것 같구나 하지. 첫 국밥데이 할 때는 도마, 통, 김치 딱 내려놓으면 할매들이 썰어주고 다 했거든. 김치가 모자르면 집에서 갖고 와서도 대주고 했다고. 아직까지 그런 인심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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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진순여
내가 하는 거지 뭐. 내가 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 지금 이 년 차 되는 거지. 앞으로 가면 삼 년 차고.
① ② 이송도 바닷가의 술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①
②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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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집 앞에서. 현재의 흰여울길 중간 지점이다. ③
④ 휴가나온 오빠 사진. 흰여울길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내 살던 고향은 _ 진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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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엄마하고 전차 타고 대신동으로, 동래 온천으로 목욕 갔지
차미경
1957년 이송도 출생 위로 언니 둘, 오빠 둘이 있는 늦둥 이로 태어나 차 씨 집 막내딸로 불 렸다는 차미경 님. 한눈에도 사랑받 고 자랐다는 걸 알 수 있는 분이었 다.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딱 어울 리게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신다. 평생 밝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셨고, 그 렇게 살아온 만큼 솔직하고 당찬 성 격을 지니셨다. 마을의 옛 모습을 하 나하나 기억하고 말씀해주시는 모습 을 보니 시대의 이야기꾼을 만난 기 118
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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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기마대도 보고, 전차도 탔어요 성함이랑 몇 년생인지 알려주세요. 호적은 58년 3월 24일. 근데 본은 57년생 2월 1일. 차미경. 본래 2월 1일이 영도 할머니 바람 올리는 날이거든. 영도 할머니가 내려오는 날이야. 전해 내려오는 전설. 영도 할머니가, 그런 게 있어요.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비가 오면은 며느리를 데꼬 내려왔다 하고, 바람이 불면 딸 데꼬 오는 날 날씨가 틀려. 바람 불고 비 오고 이런 거. 그런 게 있어.1) 바람의 여자네요. (웃음) 그럼 태어날 때부터 영도에서 사신 거예요? 예.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내가 열한 살 때 이사 왔어요. 그때는 경찰들이 말을 타고 다녔어요. 군화 검은 거 신고 말 타고 순찰을 돌았다니까. 그래서 기마대2)에서 아저씨들이 아침 되면은 훈련을 하지. 정렬해가지고 군대식으로 이렇게. 길가에 낮에 보면 아저씨들이 순찰 다녀 요새 폴리스처럼 이렇게 순찰 다녀. 그런 거 다 보고 자랐지. 그게 몇 년돈데 기마대가 있었어요? 내가 그때 기억하면은 한 일곱 살 쯤 되면은 몇 년도고? 내가 태어난 게 57년이니까 64년도 땐데. 그러니까는 영도 오래 안 있는 사람은 모르지. 내 보고 거짓말한대. 나이도 그래 안 되는데, 나 절대 거짓말 하는 거 싫어하는데. 전차 타고 댕겼대도 거짓말이래.3) 아, 타고 댕겼다고. 대신동으로, 동래로 엄마하고 온천에 타고 갔다고. 내가 몇 년도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릴 때는 전차를 타고 다녔어. 대신동 하고 동래 온천, 목욕 갔지. 그때만 해도 목욕탕이 많이 없었으니까. 지금 저쪽에 영선주민센터 있는 주유소가 대영탕, 목욕탕 자리야. 옛날에 우리 어릴 때. 내가 자라서는 대하탕. 윗로타리. 그리고 지금 여 유성탕. 그러고 해수탕. 저 밑에 요새 해수랜드로 개업했지.
어릴 때부터 차 씨 집 막내딸, 이렇게 통했어 학교도 이 동네에서 다니셨나요? 여기 남항초등학교. 요새 많이 발전했지. 다른 데는 없어지는 학교도 있다 카지만은. 우리 언니 1) 2월 초하루날 영동할미가 내려올 때 바람이 불면 딸을, 비가 오면 며느리를 데리고 온다는 전설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라 한다. 2) 부산승마협회가 1963년 제2송도 경찰기마대에서 창설되었다는 기록으로 기마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나이보다 젊게 보여 오해를 많이 산다고 한다. 1968년에 전차운행이 중단되었으니, 기억이 맞는 걸로 보인다. 120
오빠야들이 다 수재야. 나는 쪼끔 농띠라도. 언니 두 분, 오빠 두 분인데. 이남 삼녀. 막내이. 그래서 어릴 때부터 차 씨 집 막내딸. 이렇게 통했어. 마흔세 살에 우리 엄마가 내 낳았대서 우리 언니가 식겁했다던데. 우리 엄마 아빠가 할아부지 같으니까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비 오면은 우리 엄마가 우산 갖고 오잖아. 할머니 오셨대. 그때만 해도 요새하고 틀리서 오십 넘으면은 할머니 같애. 그래서 놀리 먹는 거야. “할머니 아이다. 우리 엄마다.” 중학교는 남여중. 지금 영선중학교로 변했지? 남여중 십팔 회 졸업. 그때만 해도 마지막 수순이야. 시험 치고 들어가는 거. 그때 박지만이 때문에 추첨한다 했잖아. 그전에 우리가 들어간 거야. 평준화. 박지만이 공부 못 해가꼬. 그런 말이 유언비어가 떠돌았어. 그럼 고등학교도 이쪽에서 나오신 건가요? 아니지. 아 인자 또 뽀록나겠네. 남여상 치가꼬 떨어지가꼬 저 쪽에 동래, 사직동. 지금 동래여상 일 회야, 일 회. 우리 언니한테 혼났지. 꼴짜기 공부하러 댕긴다고. 그때만 해도 국제여객 10번4)있었어.
아까 다니시던 학교 얘기했는데 이 밑에 보건고등학교가 뭐에서 뭘로 바뀌고 이런 얘기 아시나요? 아 그렇지 그거 알지. 보건고등학교가 우리 학교 댕길 때만 해도 금성여상. 그라기 전에는 연세대학교 전신이야. 6.25 동란 이랄 때. 그라고 나서는 한성여대. 지금 경성대 전신이 한성여대예요. 지금 대연동에 있는 경성대학이 한성여대가 발전해서 경성대학이 된 거예요. 그러다 금성여상이 그랬고, 금성여상 다음에 뭐고. 그 뒤에 뭐 많이 바꼈던데? 테크노고등학교? 테크노고등학교 있고. 지금 보건고등학굔가? 금성여상 댕기기 전에 또 뭐 한 개 있던데. 영도여상! 영도여상이다, 영도여상. 그라고 테크노고등학교, 지금 보건고등학교지. 한국전쟁 때 연세대가 여기에 있었다고요? 옛날 시절에 연세대학. 피난 온 사람들이 서울대학 다니고 이런 사람들이. 임시지. 그니까 목장원 뒷장으로 연세대학 부지가 있잖아. 그때 문인들 이런 사람들은 저 쪽에. 지금 없어질란가 모르겠다. 백조 다방이라는 클라식 다방이 있었어. 지금 광복동 입구. 그쪽으로 보면은 문인들이 왔어. 그래서 우리도 청년 때는 그쪽으로 많이 갔지. 쌔미가 하는 ‘무아’ 음악실이 있었고. 또 황금 다방. 그때만 해도 요새 같지 않게 디제이들의 인기가 대단했어. 그래서 그 디제이 보러 많이 가지.5) 그라믄 자기 얘기 틀어주면은 되게 좋아하고 또 썸씽도 생길 수 있고.
4) 초창기 사직동-영선동 노선이었다가 지금은 연제공영차고지-사직동-동명대학교 노선으로 운행중이다. 121
내 살던 고향은 _ 차미경
디제이 보러 많이 갔지. 썸씽도 생길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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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좋아하셨군요. 응, 우리는 클라식. 어릴 때부터 공부하곤 별 취미 없어. 이런 다방면으로 공부만 빼놓고 다 잘해. 진짜 우리 만능. 스포츠, 자전거 타고 요게 75광장을 다닐 때면은 옛날이었네. 내가 되게 어릴 때는 비포장이었지. 진짜 쫍았어. 그때는 쪼깨난 자전거 타는데 다리에 빵구 많이 났어. 돌길이었으니까. 여기 해수욕장. 여기도 바위가 많아, 바위. 어릴 때 수영하면은 꼭 다쳐. 돌이 있기 때문에. 해운대 저런 데는 백사장이잖아. 근데 여기는 참 좋은데 몰라 내 고향이라서 그런가. 근데 내 기억으로는 쪼끔 웃기는 기억이 있어. 여 밑에. 색시집이 있었어. 색시집이. 술집 있었다던데.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어어, 그때만 해도 뭐라고 할까. 니나노집. 아줌마들이 이렇게 뚜드리면서 호객행위 한다카나? 기억이 삼삼해. 그때가 내가 여섯 살인가 다섯 살 하여튼 그게 진짜 맞는 거야, 그게. 지금 저 반도보라 생기기 전에는 이게 매립핸 거거든. 전부 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다니는 길은 쫍았어. 여기는 변한 게 없어. 이쪽에 벽 쪽으로 긴가민가 싶어. 어릴 때니까. 환상적인 쫌 그런 거 있잖아. 지금 이쪽에 끝에 가면은 지금은 단단하겠지만은 내 어릴 때 기억으로는 뭐라고 할까 억수 험난했어. 그 물 내려오는데가. 또 뭐랄까 전설의 고향처럼 가파르고 물이 내려오면서 뭐 이렇게 있어서 억수 무서웠어. 어릴 때 기억으로. 억수로 가파랐어 그게. 그게 물이 내려오고 그랬었지.
아이를 좋아하는 8년차 아이 돌보미 그럼 직장 어디 다니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막내라고 절대 내노면 유리는 깨진다꼬 직장 생활을 못했다는 거 아입니까. 그래서 우리 친구들이 억수로 애달파 해. 아깝다고. 그러니까 문화방송을 잡고 있지. 음악, 완전. 아무래도 방송국은 쪼끔 앞서 나가잖아. 어릴 때 고등학교 졸업하고 내가 또 막내고 엄마가 아프시니까 도와주면서 난 발목 잡힌 거지. 보기보다 착해가지고 용돈은 주겠다, 언니 오빠야들이. 엄마 아빠 도와가지고 집에 있으라고. 그런 거 있거든, 부모들은 막내이를 빨리 보내야 자기 책임을 완수한다. 그런데 스무 살에부터 선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 혼자 있다는 거 아입니까. 안 그래도 어제 아레도 말했는데 “언니, 육십 살에도 가지.” “아 됐다. 나는 마 힘 있을 때까지 아이 돌보미 (할거야).” 하고. 사람 일은 모르잖아. “나는 진짜로 육십오 세가 되면은 여기 흰여울 5) 당시 음악 다방 중 ‘무아’ 음악실이 제일 유명했는데, 부산 DJ의 주류인 쌔미(유문규)가 활동했다. 1970년 대 ‘별들의 고향’, ‘백조’, ‘에덴’, ‘오아시스’ 등 많은 음악다방이 광복동에 있었다고 한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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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짔는데 그때만 해도 술집. 아줌마들이 막 잡았대. 근데 나는 그냥 어리니까 구경 왔는데 그게 억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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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홍보하고 이러면서 사람들 속에 갈란다.” 그러니까는 “그런 것도 괜찮겠네.” 하더라 지금 아이 돌보미 일을 하고 계신 건가요? 아이 돌보미. 내 지금 일하러 가야 돼. 아이 보러 가야 돼. 아이 돌보미 팔 년 차. 인자 나이도 있고 하니까. 내가 워낙 애들 좋아해. 돌보미 하기 전에 옛날에 우리 동네 꼬맹이들 본다고 귀염둥이 놀이방이라고 간판도 달았어. 근데 그때 돈이 안 됐어. 그냥 뭐라고 할까. 냉정하게 이래야 하는데 그냥 안다는 것도 이점이 없어. 동네 꼬맹이들 다 봐주고 돈이 안 된 거야. 내가 열한 살 때 이사를 올라왔는데 우리 동네 꼬맹이 ‘석권식’이라고 있었어. 네 살짜리를 내가 그때부터 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 애를 좋아한거네. 우리 구멍가게 할 때 그때만 해도 어려운 시절이었어. 근데 우리 엄마도 참 내를 이뻐핸 것 같애.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 구멍가게에 있는 쪼꼬렛이고 밥이고 다 갖다 줘도 우리 엄마 말도 안 했다. 동네 애들 다 데꼬 와. 까자, 밥 주고 이래도 우리 엄마 안 뭐라 했어. 애를 좋아하니까. 엄마들도 그런 거 싫어하는 사람들 있잖아. 그때만 해도 잘 살지 않으면 다 돈이잖아. 그랬어. 그때부터 애 좋아했어 내가.
부모님들이 구멍가게를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가 생각할 때는 할랭이도 아인 사람이 할랭이 같애. 좀 게으른 거 같애.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 이야기 하시면, 구루마를 사줬다네, 리어카. 일을 해라고. 그때만 해도 전문적인 거 없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 리어카를 잃어버리고 왔대요. 일하기 싫어가 놔뒀겠지. 그래서 내가 우리 어머니를 참 존경해. 생활력이 억수로 강하시고 그 옛날 시대만 해도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이 재산이다 이래가지고 우리 엄마 아빠 고향이 합천인데 그때만 해도 논 팔고 밭 팔아서 영도에서 살면서 언니야 오빠야들 공부시켰지. 구멍가게는 엄마 아빠가 나이 드시가꼬 소일거리로 하셨는데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지. 그라기 전에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이라면서 안 했지. 나는 엄마 아빠 모시고. 오빠야들 언니들이 용돈 주니까. 엄마 모시고 살면서 내 취미생활 하고 여행 다닐 거 다니고. 그래서 내가 누리는 복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거 아이라니까. 여행은 어디를 다니셨어요? 엄마가 옛날 사람이잖아. 누 말마따나 밖에 내노면 깨진다는 막내이가 간다 소리도 없이 갔다가 온다. 혼자서 여행을 다녔으니 내 지금 생각하면 엄청 미안해. 애간장을 많이 끓있겠다 싶어. 고등학교 졸업하고지. 내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오고 싶은 대로. 지금은 많이 안 다니지만은 그때만 해도 뭐라고 할까 호기심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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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대로 가고, 오고 싶은 대로 오고
우리 짝은 언니 말에 의하면 역마살이 있대 내 보고. 사부작거리고 잘 다니고 모험심도 있고. 하여튼 마음먹으면 해야 돼. 그래서 갔다가 왔어. 설악산도 가고. 지금 생각하면 계룡산 동학사에도 내가 며칠 있다 왔어. 거기 여성들 사는 데야. 그거는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그때 엄마 돌아가시고 나니까 내가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이 돌아가시니까 참 의미가 없더라고. 허무하고 그래서, 아빠는 살아계시는데 진짜로 절에 가서 살라고 갔어. 근데 또 그게 아이더라고. 어려워, 어려워. 한 일주일 생활을 해봤어. 근데 스님 억수로 힘들어. 보니까 새벽에 두 시쯤 세 시나 돼서 일어나고. 근데 내가 절에 생활해도 될 것 같애. 요새 내 깨는 시간이 두시 사십 분이야.
앞으로 하고 싶은 건 많다 계속 배우고 있는 것도 있으세요? 영도문화원 프로그램이 너무 좋아. 그게 참 희한한 게 내가 필요한 거 척척척척 깔아 줘. 내가 육십오 세 되면은 스토리텔링 문화해설사 할라니까. 내가 또 자원봉사 영선 캠프 회원이거든. 거기 캠프지기거든. 또 희한하게 우리 영선 캠프에서 인재 양성한다고 우리 캠프지기들 배우는 거. 영선 캠프요? 영선 캠프에서 하는 일은. 매주 셋째 주 토요일 학생들 환경미화하면서 흰여울문화마을 경치 구경시켜주고. 그러면 사람들이 너무너무 좋아해. 시내고 전라도 쪽에서 오시는 분들이 너무너무 좋아해. 그리고 셋째 주 월요일은 어르신들 모시고 봉래산 숲길 프로그램. 독거노인들 모시고 가면 너무 좋아해. 어르신들. 경로당 같은 데 안 가시고 혼자 있는 거 좋아하시는데 모시고 올라가면 너무 좋아해. 외부 활동에 적극적이시네요. 우리가 약방 감초야. 내가 있고 없고 마이 차이가 나. 우리는 일이 되게끔 해. 결과물이 안 좋은 사람이 있잖아. 근데 내가 하는 대로 하면은 일이 쫌 잘 되고 운이 쫌 좋은 편이지. (웃음) 어릴 때 내가 쫌 촐랑거리고 이라니까 어른들이 그랬어. “미경아, 너 크면은 국회의원 해라.” 이랬어. 그래서 내가 “국회의원 그런 거 뭐 하러 하는데.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나 절대 그런 거 안 해.” 그래서 내 맘대로 지금 그리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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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목욕탕에서 씻고 나면 내 몸이 치유가 됐다 그러면 좋겠다 생각해예
구미연
1967년 영도 대평동 출생 1993년 결혼, 이송도로 이주
신 기 현 (50년째 거주)
1967년 영도 신선동 출생
1983년 유성탕 개업, 이송도로 이주 동갑내기 부부는 부모님이 지은 목 욕탕을 이어 운영하고 있다. 쉬는 날 이라, 빈 여탕 바닥에 앉아 유성탕의 역사와 현재 운영의 어려움을 들었 다. 목욕탕 주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동네와 주민의 동향을 살 피고 있었다. 동네 목욕탕의 화려했 던 시절은 가고, 북적거리던 마을은 128
이들 부부에게 추억으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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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에서 태어나 자라서 추억도 같고, 나이도 같은 남편이랑 결혼해서 잘 살아요 구) 저는 대평동이란 곳에서 태어났고, 저희 남편은 신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신선동에서 목욕탕을 작은 걸 처음 하시다가 여기 자리로 이사를 오셔서 새로 지어서 하셨지예. 남편은 목욕탕 경험이 유치원 때, 여섯 살 이때부터 시작했죠. 주민들이 관심이 많았지예. 유성탕 며느리가 누구냐 이래가지고. (웃음) 중매해 주신 분도 이 위에 사시던 어머니신데 그 어머니도 저희 어머니도 아시고 여기 목욕탕 오시던 고객님이었고 해서 서로 왕래를 하면서. 남편이 따로 살 때 고향집에 놀러를 와가지고 카운터를 좀 봐주는데 고객님이 누구냐고 그래서 어머님이 우리 아들이라고 그랬더니 그분도 제가 생각이 났던가봐예. 내려와서 “유성탕에 아들이 참 좋은 사람이 있던데 소개받아 볼래?” 이런 식으로 했는데. 저 사람이 좀 불쌍하지. (옆에 앉아있는 남편을 보면서 웃으며) 처음 선 보고 바로 결혼했으니까. 연애도 한번 못하고. 저는 그래도 결혼 적령기가 되가지고 선이라도 몇 번 보고 결정을 했지만. 이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결혼했는데 잘 삽니다. 동갑이라 잘 통하고. 유성탕은 언제 생겼나요? 구) 제가 정확한 년도는 기억을 못하겠고. 고등학교 이 학년 때 들어왔다 하더라고.1) 지금 오십이거든예. 여기 정말 아무 것도 없었거든예. 제가 영도에서 태어나고 영도에서 자라나가지고. 저 밑에 대평초등학교 다니고 중학교를 저 안쪽에 지금 태종대중학교, 그기 영도여중이었거든예. 영도여고 위에 있는 거. 학교를 버스 타고 왔다가갔다 할 때 여기는 절벽만 있었어요. 집도 거의 없었고. 어느 날 고등학교 가는 데 공사를 하더라고. 보니까는 목욕탕이 생기니까. 이 일대하고 저 동삼동 안쪽에는 목욕탕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거의 밭이었거든예. 어머니가 새벽에 문 열고 앉아 있으면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막 들린대요. 주변에 목욕탕이 없어가지고 지금은 원체 많이 생기고 그리고 집에 가스보일러 하고 목욕 시설이 다 잘 돼 있으니까. 신) 우리집 뒷편이 옹벽으로 되가 있어예. 학교 다닐 때 보면 우리 이 자리 전부 흙이고 바위로 돼가 있었어예. 비가 오면 흙탕물이 밑에 다 내리 오고. 물이 막 길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살려고 참 노력을 많이 하셨고. 선경지명이 있으셨던 거 같애예. 이 땅을 누구도 안 봤는데 남들 보면은 이곳이 땅이 되겠나 하는데 자리 참 좋다 판단하시고 사셔가지고 했는데. 이 동네 사셨다던 땅주인이 왔는데 계약금을 딱 주고 하니까 안 받는다 이라더랍니다. 그래 다시 갖고 오셨다 하더라고. 또 판다 해가지고 갔더만은 계약금 주고 다 했는데
※ 두 분의 성을 따 구), 신) 으로 표기함. 1) 유성탕은 1983년 신기현 님의 부친 신희영 님이 신선동에서 한성탕을 운영하다 이송도에서 유성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희영 님은 1938년생으로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광복 후 우리나라로 건너오셨다. 인터뷰 섭외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침 인터뷰 당일 만나 뵙게 되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130
위약금도 안 주면서 계약금 가져가라고. 땅 안 판다고 이라시더랍니다. 땅값을 조금 더 주겠다 해가지고 이 땅을 사셨어요. 땅 공사 시작하고 건물 들어서기까지 고생을 억수로 많이 하셨답니다. 구) 진짜 학교 다닐 때 여기 건물이 생긴다는 그 자체가 획기적이었어요. 그것도 목욕탕이라 하니까. 저희 친정 엄마도 목욕탕을 좋아 했거든예. 엄마하고 내 하고 여기 목욕탕을 한 번 왔던 거 같애. 어릴 때 목욕탕이 생깄다니까 한 번 가보자 하고. 여기가 내 집이 될지도 모르고 목욕을 왔던 추억이 있는. (웃음) 인연이 있는갑다고. 그때는 여기 시집오실 줄 몰랐죠? 구) 그렇죠. 우리 어릴 때는 영도에 놀이터가 한 군데 있었거든예. 지금 저 밑에 소방서 옆에 놀이터가 딱 하나 있어서 저도 대평동에서 그 놀이터에 놀러 다니고 남편도 밑으로 놀이터 놀러 다니고 그랬었어예. 우리가 우스개 소리로 “내 그네 탈 때 동전 주울려고 모래 판 게 니였제?” 막 그러고. (웃음) 초등학교 동창들이 우리는 남자, 여자 중학교 그래 갈라지잖아예. 그라면은 남자중학교 친구들 이야기해보면은 내 초등학교 동창이 있고. 재미난 거예요.
유성탕은 마을 입구잖아요. 주민센터 같은 역할도 하구요 구) 저희 목욕탕 안 하는 날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웃음) 바쁜 날은 초하룻날, 절에 가시는 날. 오늘 손님이 좀 많네 하면은 내일이 초하룻날이라든지. 그런 연관도 있고. 보름날도. 신) 옛날에는 추석 전날, 삼일 전부터 박닥박닥 그랬는데. 인자 그런 게 없어예. 명절 특수도 없어예. 구) 여기는 어른들이 계시니까 타지에서 자식들이 오고 하면은 차례 지내야 되니까는 명절 당일 아침에는 남탕에 손님이 많고예. 명절 전날 저녁에는 여탕이 많고. 왜냐하면 남자 분들 차례 지내려면 씻어야 되니까. 신) 여자분들은 낮에는 요리하고 밤에 인자 목욕. 명절 끝나고 그 다음 공휴일에도 손님 좀 있고. 다 씻고 자기들 집으로 가야 되니까. 목욕탕 이것도 재미있습니다. 구) 우리가 화요일도 계속 문 닫았거든예. 어른신들은 목욕하는 날을 정해놓고. 아침 첫새벽에 목욕을 오시는 분은 꼭 첫새벽에 오신다. 왜냐하면 낮에 와서 목욕을 하면 하루 일과가 안된대요. 그렇다고 장시간 오래 하시는 것도 아닌데도 뭔. 그기 젊은 사람들은 샤워가 습관이고 그 분들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예. 그러니까 목욕하는 날은 바쁘신 날인거야. 볼 일을 보러 나가야 되고, 목욕탕 쉬어서 목욕 안 하는 날은 집에서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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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구미연·신기현
가가 니 남편이 됐나, 가가 니 마누라 됐나 이런 식으로 되고. 결혼생활 하고, 영업 같이하고 시집살이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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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하다못해 이 밑에 병원을 가도 목욕을 하고 내려간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니까. 저희가 마을 입구잖아요. 그러니까 모르는데도 택배 맽겨 놓고 가져가고 놔 두면은 갖다놓고 가고. (웃음) 앉아 있으면 택배 누구누구가 좀 맡기라는데 이라면 누군가 몰라예. 그런데 예 그러세요 하면은 나중에 다 알아서 찾아가. (웃음) 또 농산물 같은 과일 같은 거는 몇 개씩 덜어 주고 가기도 하고. 또 우리 목욕 온 손님들이 시골에 자기 어머니 아버지 있고 이라면은 팔아달라 하는 게 있잖습니까? 여기에 앞에 쫘악 농작물, 쌀, 참기름 이런 거 갖다놓고. 이번에는 포도 한 백 상자를 팔았어예. 여기가 조금 그런 거래가 이뤄지는. 마을의 주민센터라고 봐야지. 어른들 관광 가시면 유성탕 앞에서 만나서 관광차 타고 가고 그렇지예. 한 자리에 삼십 년 있었으면 그럴만 하네요. 구) 예. 카운터 앉아 있으면 꼬맹이들 학교 왔다갔다 하면서 인사하고 지나가고. 우리집 목욕 온 손님들은 인사 나누고. 저희들도 애들을 좋아하다 보니까 오면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시키거든예. 그러면 막 말해줘요. 저하고 친구가 되듯이 좋아하고. 요즘은 제가 또 사탕을 입구에 내놓는데 어른들도 그걸 되게 저희 책임은 아니지만 참 안쓰럽더라고예.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소리가 넋두리가 저절로 나오겠노 하고. 또 하루 종일 혼자 계시는거야. 그러면은 유일하게 말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고, 내가 좀 대꾸도 해주고. “아이고 그렇지요. 힘들지요” 이라면은 말씀이 계속 나오셔예. 말을 못하고 있다가. 하다못해 사탕이라도 있으면은 입이 너무 쓰고 목도 마르고 하는데 있으니까 좋다고 하셔가지고. 정말 사탕 하나 얼마 안 하잖아예. 내놓으면 너무 좋아하시고, 호주머니 넣어 가시고 “이거 나중에 또 먹어야지, 그래도 되나?” 하시면 아, 그래도 된다고 가져가시라고. 그런 게 어른들이 있는 데는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도 정말 외롭구나. 그래서 여기 오면은 얼굴 보고 얘기하고 하는데. 그 때 되면 마음이 좋아요 저는. 그런데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막 그런 일은 잘은 없지만 그런 거 보면은 ‘하 어른들 좀 안 왔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웃음) 다치면은 정말 위험하니까. 정말 힘이 없어가지고 지팡이 짚고 오시면서도 젊은 사람들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서 넘어지는 것도 저희들 책임이라고 하고 그라는데 저희가 사실은 힘드니까 그게 걱정스러워서. 좌우지간 이래 얘기 하고 소통이 된다는 거는 좋아예. 어른들이 편하게 왔다갔다. 요즘은 딱 저희 목욕탕 문 닫고 나면은 길이 조용해예. 평일에도 저희 영업하는 날과 안 하는 날 동네 분위기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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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하시대예. 왜냐하면 어른들 하나같이 오시면 목욕 오는 것도 너무 힘들다 죽겠다 이러는데 우리는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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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물바가지가 모자랄 정도로 잘 됐어예. 요즘은 사람들이 잘 안 와예 신) 우리 목욕탕 삼, 사십 년 전에 손님이 굉장히 많았었어예. 우리 목욕탕 통 있잖습니까. 바가지. 옛날에는 샤워기보다도 전부 다 퍼 쓰는 그런 거. 요즘은 샤워기 많은데, 그 당시만 해도 탕들이 많았었어예. 조그만 거. 손님을 예상을 못하고. 옷장도 이백 개 삼백 개 만든 기억도 나는데. 손님이 많아 옷장 넣을 데가 없어가지고. 저희 아버님하고 저하고 자갈치 시장에 가가지고 파란 바구니. 요즘엔 그기 잘 안 보이던데 옛날 목욕탕에는 꼭 상비돼 있었습니다. 그 바가지를 사가지고, 옷장 하고 물바가지가 모지래가지고 몇 백 개나 사오고 그랬었어예. 그 당시에 우리 목욕탕이 참 잘 됐어예. 그 당시에 아마 부산에서 제일 잘 됐다고. 구) 왜냐면, 택시 기사 분들이 돌아다니면서 가다가 오세요. 원체 또 저희 집이 일찍 문을 여는 데가 되가지고. 우리는 그래도 세 시 오십 분 되면 간판 불을 딱 켜는데, 아버님은 세시 반에도 켰다가. 택시 기사들이 돌아다니면서 그 시간에 잘 없었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결혼하고 왔을 때도 복잡했었어예. 그 이후로 저 안에 큰 목욕탕 생기고, 또 저 안쪽으로 절영아파트 하고 이런 큰 고층 아파트들이 많이 생기면서 이쪽 사람들이 이주를 신) 그때 아마 부산 시내에서 영도 인구가 제일 많았던 걸로 기억하거든예. 그 당시만 해도 백만 이상. 백만 가량 되었었고. 인구 대비 목욕탕 개수 작다보니까는. 요즘은 근데 아파트 단지가 생기가지고 피난민들이 그리로 이주를 하시다 보니까. 여기가 빈 공간이 된다 하더라고요. 그래도 옛날만큼 그래 박닥박닥 그런 건 없어예. 지금은 여기 목욕탕 이용하시는 분들은 다 나이 드신 분들인가요? 구) 다 나이 드신 분이고. 문득 그 어머니가 요새 안 보인다 하면은 요양병원 가 계신다던지. 요즘은 초상을 치러도 다 장례식장에서 하니깐 안보여서 가족들 와서 안부 물으면 “돌아가셨어요.” 하는 그런 분도 계시고예. 원체 오래된 마을이다 보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안 보이신다 하면은 그런 소식을 많이 전해 듣지예. 신) 혼자 새벽에 할아버지가 목욕 오신다고요. 제가 혹시 잘못 될까 싶어서 내~ 왔다갔다 해예. 저 나름대로 고충도 많아예. 할아버지들이 감각적으로 떨어질 거 아닙니까. 어느 정도 뜨거운지 모르고 젊은 사람들한테는 너무 뜨거운데 몰라서 화상도 입기 쉽고. 피부가 약해가지고. 문제는 뭐냐하면, 들어 가시가지고 있으면 자기는 좀 있겠다 싶어가지고 있다가 힘이 쫙 풀어져. 그러면서 올라오지를 못하셔. 그런데 주변 사람도 전부 할아버지들 연세 드신 분들이고 이래 되가지고 못 도와주시는 거라. 그라면 인자 제가 한 번씩 들어가보면 이렇게 하고 계셔. 한쪽 다리를 올리고 발발발 떨고 있다고. 그래 몇 번씩 있었어예. 여탕에는 다행히 일하는 아주머니 계시니까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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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해갔어예. 그리고 그 안쪽으로 목욕탕이 많이 생기고 해서 흩어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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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백 척 정도 되는 배가 동시에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지요 신) 옛날 이 동네 사람들은 자갈치 시장에 고기 사러 갈 때 여기 올라와가지고 들어오는 배를 보고. 배가 만선이 되면 가라앉은 정도를 보고, 오늘 고기 많겠다 보고. 이 동네 옛날 사람들의 생활 방법이었어요. 그래가지고 고기 장만해가지고 말려가지고 먹기도 하고 이랬다고. 쌀 때 많이 사가지고. 구) 지금도 나이 드신 어른들은, 우리는 간단하게 사먹고 하지만은 자갈치 새벽시장을 가셔예. 가방 메고. 지금도 그렇게 해서 말려서 저장해서. 나이 드신 분은 아직도 그렇게 하시더라고예. 신) 물이 빠져나가는 시간 하고, 들어오는 시간 하고, 배 모양 보고 안다고. 배 모양이 육지 쪽으로 향하면 물이 빠지는 거고. 나름대로 생활 노하우. 구) 새벽에 한꺼번에 배가 쫙 나가는 거 보면은 장관이라예. 백 척 정도 되나? 그 정도는 안 되더라도 장관이에요. 웬만하면 이 동네 다 보이고 좋습니다. 길 건너서 저 쪽에서는 파도 소리가 멋지게 들립니다. 여기서 날씨 좋으면, 대마도도 보입니다. 그렇더라고. (웃음) 재밌는 이야기. 여기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랫마을이랑 윗마을 좀 다른 게 있습니까? 구) 밑에는 첫째 상가가 없으니까. 신) 한 번씩 제가 운동하러 가 분위기를 보면, 삼삼오오 모여 앉아가꼬 평상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일부러 윗동네와 구분 지을라고 한 건 아니지만, 너무 촘촘하게 붙어 살다보니까 가족 아닌 가족이 됐뿌린. 우리는 또 업체다 보니까 우리 하고는 어울리기가 안 그렇겠습니까. 운동하다 보니까는 요 밑에 우물가가 있었어예. 다 막았뿟지만 옛날 그 우물가 하고 공중화장실이 있으니까 같이 이용하고. 그러니까 가족 아닌 가족이고. 사람 많을 때 줄 서가지고 물 떠야 되고 화장실 가야되고 가족 아닌 가족이 형성될 수밖에 없을 거 같애. 여기 흰여울문화마을이라고 정류소 이름도 바뀌었잖아요? 옛날마을 이야기 또 해주세요. 신) 옛날 여기는 우범지역이라 하더라고. 제가 들은 이야기는 목욕탕 짓기 한참 전의 이야기입니다. 경찰 호각 빽빽빽 들립니다. 요 앞에 대마도 하고 가까우니까 한국서 안 나왔던 시계, 화장품 이런 거 한그 요 앞에 풀었다 그라더라고. 이 앞에 바다에서. 그라면 누가 다라이 가 와가지고 그거 이고 간답니다. 전부 다라이 이고 자기 할당량 받아 가면 경찰들 와가지고 잡으러 다닌다고 빽빽 그라고. 이 동네가 그랬다고 들었습니다.2) 2) 1960년대 밀수 관련 신문기사가 많다. 대마도 이즈하라에서 밀수품을 싣고 다양한 수법으로 화장품, 장신구, 잡화류를 밀수했다고 한다. 영도에서는 청학동, 동삼동 일대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137
내 살던 고향은 _ 구미연·신기현
신) 옛날에는 차 소음 공해 별로 없었을 때는 새벽에 저 대마도의 닭울음 소리가 났다고. 이야기가
사실인가 모르겠는데. 구) 요즘 또 어머니 와가지고는 바닷가에 가가지고 용왕제3)하고. 개개인이 음식을 해가지고. 어머니는 여기 잘 되게. 우리 어머니가 특별한 종교는 없으신데 혼자서 음식 해가지고 대야에 이고 바닷가에 내려 가가지고 기도하고. 명절 때 쯤. 정월 달 그 쯤 해서. 제가 결혼해가지고는 안 하셨는데 지금은 거의 없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그런 게 많았거든예. 저희 엄마도 그래 했던 거 같아예. 옛날에는 보통의 집에서 많이 했어. 신) 요즘은 배 타는 사람이 잘 없어예. 옛날에는 배 타가지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 영혼제 지낸다 해가지고 요만한 종지에 그 분 머리카락이 물 안에 있다 해가지고 보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천도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제 어릴 때 많이 했었습니다.
돈과 우리 영혼과는 공유할 수가 없겠더라 구) 저희 목욕탕은 바닥 안 미끄럽고 물 좋고 그래 알려졌어요. 물이 좋은 게 산물을 써예. 저희는 지하수가 내려와예. 저희 나가시4), 때 미는 분도 원체 오래 계시고, 그래서 웬만한 손님들 습성을 알지. 이 손님은 어느 정도로 밀어줘야 된다, 이 손님은 어느 정도로 만져 주야 한다 이런 것도 알고. 이 손님은 저래서 안되고, 이래서 안되고 하는 거를 전체적으로 총합을 해서. 꾸준하게 한 사람이 지켜주는 게 손님들한테도 더 낫지 않겠나 생각이 들어서 안 바꿔예. 저는 나름대로 제가 이 목욕탕이 영업은 많이 안 되도 계속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예. 애들이 다 커서 그런 건지 노후를 생각해서 그런 건지 제가 편안하게 있고 싶고 정도 많이 들고. 저희가 다른 업종의 일도 해봤지만 돈과 우리 영혼과는 공유할 수가 없겠더라. 돈은 벌겠는데 영혼이 말라 가더라 이걸 느껴가지고 그냥 목욕탕을 계속하자. 그래서 저희가 손해를 보더라도. 왜냐하면 이십사 시간 밤새도록 신경 쓰고 삼백육십오 일 하는 거는 우리 영혼이 말라가더라. 해서 그만 뒀어예. 목욕탕은 그런 거에 비하면 정말 돈은 안 되지만 사실 좋아예. 저희 마음이 편안해예. 우리 목욕탕에서 씻고 나면 내 몸이 치유가 됐다. 혈액순환이 되가지고 좋아졌다 그러면 좋겠다 생각해예.
3) 바닷가 마을에서 행하는 의례 4) 때 미는 사람을 일본어로 나가시(流し)라고 한다. 138
내 살던 고향은 _ 구미연·신기현
① 구미연 님 어린 시절 대평동에서 ② 신기현 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②
①
③ 구미연 님 어린 시절 리어카 사진관 배경으로 ④ 유성탕 옥상에서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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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그래서 좋은 거라 내를 딸처럼 생각하는 엄마들이야
김양미
1968년 출생 1974년 이송도로 이주 1994년 결혼 및 경기도 이주 1998년 이송도로 귀향 이송도에 터를 잡았던 부모님 덕분 에 어릴 때부터 이송도에서 자란 김 양미 님은 이 마을의 젊은 세대로서 마을을 아끼고 지켜나가고자 한다. 대를 이어받은 관계의 무게가 가볍 지만은 않다. 하지만 부모님이 맺어 주신 인연이라 여기고 소중하게 생 각하는 마음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마을의 젊은 엄마들 을 돈독하게 엮어주는 협동조합 활 동으로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가 140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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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아파트 안에 자기 집 식구만 사는 게 아니라 세를 줬어 여기서 태어나신 건가요? 엄마가 여기서 문방구를 하게 된 거예요. 애들을 키울 수 없으니까 우리 이모가 키우고 있다가 내가 학교 갈 때가 되니까, 엄마가 데리고 온 거지. 여기가 옛날에는 차가 이렇게 안 다니고 한 십 분에 한 대? 그렇게 지나갔어요. 찻길에서 놀다가 차가 빵빵 하면 찻길 바깥으로 나오고 그렇게 했어요. 지금과 같은 도로는 아니었나요? 그때 그 도로가 이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고 시골길 있잖아, 비 오고 차 한 대 지나가면은 다 튀고 이런 거 있잖아요. 그때는 여기도 집도 이렇게 안 돼 있고 사방공사1)가 안 돼 있었어요. 언덕이 다 흙이고. 그때 태풍 한 번 큰 거 왔었거든요? 그때 학교 가니까 애들이 결석을 많이 했더라고. 즈그 집 화장실 날라가고 집 날라가고 이래가지고 학교 몬 오고. 그때는 그랬었어요. 그럼 저 도로는 언제 지어졌는지 기억하세요? 그런 거를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네. 미니아파트 지을 때는 기억이 나거든요. 사람들이 이다 나르고. 미니아파트가 어떤 식이냐면 요즘은 아파트가 안에 세팅이 딱 돼 있잖아요. 근데 미니아파트는 기둥만 딱 있는 집이에요. 다 안 돼 있었어요. 그래가꼬 우리 친구가 화장실이 없어가꼬, 이사는 들어갔는데 집에 들어가니까 화장실이 없는 거야. 똥 누가지고 창문으로 던졌다고 하더라고. 밑에서 사람들이 욕하고 그런 얘기 내가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했냐면은 업자를 한 명 사면 그 업자가 인테리어를 다 한 거야. 주인이 “여 마루하고 요마이는 방을 만들어라.” 이라믄 이제 방을 딱딱딱딱 칸 지르고, “요마이 마루 해라” 하면 마루 딱딱 하고. 그래가지고 좀 잘 된 집 있잖아, 그럼 그 집 우루루 가는 거야. 가가꼬 보고, ‘아 요래 요래 하면 되겠네’ 하고. 근까 같은 업자가 지은 집은 구조가 똑같애요. 구조가 비슷비슷하긴 한데 쪼끔씩 쪼끔씩 달라요. 그때 있잖아, 미니아파트 안에 자기 집 식구만 사는 게 아니라 세를 줬어. 같은 아파트에 세 주는 거 이해 안 되지요? 그때는 방이 세 개가 있잖아? 그라믄 이 큰 방을 주인이 쓰고 짝은 방이 두 개잖아. 그럼 이 방주인 이 방주인 따로야. 같은 집인데요. 화장실 쓰고 부엌도 같이 쓰는데, 자기 방 안에 냉장고가 또 하나 있는 거야. 그래가지고 자기 꺼는 그 안에 넣어 놓고, 먹고. 그래가지고 문 잠가놨는데 뭐 하나 없어지면 또 주인하고 싸우고. 그런 거 많았어요. 근데 그때는 여기 집이 없어가꼬 난리였어요. 학교 갈 때 남항초등학교가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어요. 있을 수 있는 일이가. 신도시나 그렇게 하지. 여기가 신도시였다니까 그때는. 오전반 오후반 있고. 오전반이 십 1) 산사태, 토양의 침식작용 등을 방지하기 위해 실시하는 공사 142
이 반까지 있었다니까. 근데 한 반에 또 몇 명이냐면 육십 명이다. 아침에 학교 내리가면은 줄서서 내려갔어요. 얼마나 애들이 많았는지. 영선아파트 꽉 찼지. 미니아파트 꽉 찼지. 근데 웃기는 게 미니아파트 세대나 영선아파트 세대수가 똑같애요. 미니아파트가 훨씬 넓잖아. 근데 세대 수가 똑같애. 영선아파트 애들이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 완전 많이 살았어.
흰여울길에 엄마하고 딸하고 이렇게 온 팀 엄청 많아요. 진~짜 부럽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사신 거예요? 예. 저희 집에서 문방구를 우리 엄마가 오래 했었어요. 그때는 너무 정신 없었어. 애들이 너무 많으니까. 문방구 잘 됐어요. 그래서 우리가 대학까지 다 갔어요. 우리 엄마 문방구 한 거 때문에. 딸 네 명인데 세 명이 대학을 갔어요. 하나는 지가 가기 싫다 해가꼬 안 갔고. 우리 동생 미대 나왔거든요. 우리 엄마 문방구 해가지고 미대까지 보내고. 맨날 울 엄마 코피 흘리고. 왜냐면 우리 세 명이 한꺼번에 대학을 다닌 일이 있어요. 근데 흘리고. 우리 엄마가. 암이 걸려가 죽었어요. 그래가지고 이 동생이 지 땜에 죽었다고. 난리굿 지기고 그랬었다. 고생 많이 해가지고. 계속 이 마을에 사셨어요? 내가 경기도로 시집을 갔어요. 안산에 살다가 우리 엄마가 갑자기 암이라 하니까, 우리 엄마 때문에 내려왔어. 엄마를 모실 사람이 없어서. 그 길로 다 처분하고 우리 신랑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왔어. 내려 와가지고 여기 가게를 하면서. 엄마를 돌본 것도 아니지. 그때는 내 자식들도 너무 어리고. 애가 다섯 살 이랬거든요? 애 하나 밖에 없었을 때는. 근데 이기 너무 별나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애를 봐준 거야. 동네가 그래서 좋은 거라. 다 내를 딸처럼 생각하는 엄마들이야. 그러니까 아직 이 엄마들이 손자가 없는 상태에서 내가 애를 데꼬 오니까 야가 너무 이쁜 거야. 그래가 자기 집에 데꼬 가가꼬 봐주고 막 그랬어. 내가 정신없는 걸 아니까. 한 번씩 “내가 데꼬 있을게. 한나절 데꼬 있을게” 이래 캐가 봐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엄마가 결국 한 삼 년 살다가 죽었지. 수술하고. 오십팔 세에. 여기서 살다가 동생들 치워야 되고 하니까, 여기서 다 잔치하고, 아버지 환갑도 하고. 근데 또 그게 다 빚이잖아요. 행사가 여러 번 있었잖아 우리 집에. 그걸 다 치보니까 내가 부주한 것만 억이 넘더라고. 그게 시기가 있어요. 처음에는 부주, 나중에는 초상. 점점점 이제 초상인거야. 아버지 친구들, 엄마 친구들. 병원 찾아가고 그렇게 돼. 실제로 엄마가 하던 계를 또 할매들하고 내가 했어요. 엄마가 계를 하던 거를 엄마가 죽으니까 계는 태워줘야 될 거 아이가 내가 타문 거는. 그래가지고 할매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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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김양미
하나는 미대고. 둘이는 의류학과고. 돈 마이 드는 곳만 간 거예요. 뭣도 모르고. 그래가지고 우리 엄마 코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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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이 안 보이니까 “니가 봐라”, “며칠 날 할 건데” 그랬어. 하다가 안 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남겨주신 관계들을 유산처럼 이어받으셨네요. 그러니까 지금도 있잖아 엄마 친군데, 보통 엄마 친구가 병원에 입원하면 잘 안 가잖아요. 그런데 나는 애매한 거야. ‘이거 가야 되나? 안 가야 되나?’ 이렇게 되는 거야. 왜냐면 우리 엄마가 아파가지고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 엄마들이 한 번씩 뭘 다 사들고 온 거야. 그믄 그것도 내가 모름 모르지만 다 알잖아요. 근데 병원에 아줌마 있다 하는데 다음에 또 이 아줌마를 보잖아. 그믄 병원에서 퇴원하면 그게 너무 미안한 거야. 안 찾아가본 게. 그라믄 이제 또 억지로 찾아가. 뭐 하나 사들고. 빠져나갈 수 없이 다 묶어놓고 갔어, 울 엄마가.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근데 부담은 돼요. 내하고 또래 사람들하고의 계가 없어요. 내가 지금 저질러진 것만 갚아도 그거 한데, 새로운 관계를 안 만들잖아요. 애들 유치원부터 엄마들의 관계가 있잖아요. 그런 데를 안 나가 봤어요. 모임을 나갈 수가 없는 거야.
요새 외국 나가믄 딸하고 엄마하고 다니는 팀이 제일 많잖아요. 진~짜 부럽다. 여기도 보면 흰여울길에 엄마하고 딸하고 이렇게 온 팀 엄청 많아요. 근데 아버지하고 아들은 잘 안 와. 친구처럼 딱 같이 이렇게 오는 거야. 그런 거 보면은 난 또 딸이 없고, 우리 엄마는 일찍 죽어뿟고. 그게 소박한 거잖아, 그 꿈이. 있는 사람한테는 그게 가능하지만은 나는 없으니까. 그게 참 아쉬운 점이에요.
느그 아부지 덕분에 그래도 장사 잘 해먹고 살았다 아버님이 통장을 하셨다면서요? 예. 오랫동안. 그 옛날에 미니아파트 짓던 업자 있잖아요? 그 업자 중에 한 명이에요. 우리 아부지가. 미니아파트 일 호동에 쌀집 있었거든요. 쌀집 아줌마가 요번에 집수리를 했어요. 집수리 하면서 “이거 느그 아부지가 다 지은 거다.” 얼마나 기둥을 야물게 박아놨는지. 장사를 하려고 하니까 다른 데하고 구조가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불러가지고 공사를 시켰나봐. “영감재이 기둥을 을마나 야물게 해놨는지. 느그 아부지 덕분에 그래도 장사 잘 해먹고 살았다.” 그래 얘기를 하더라고. 고맙더라고 이게. 아버님이 통장 일도 잘 하셨겠어요. 민방위 나왔다고 갖다 주잖아요? 어디 가고 없어 우리 아부지는. 근데 그걸 빨리 갖다 줘야 돼. 날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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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들이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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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그게. 그러믄 또 내가 들고 나간다 아이가. 그래 다 나놔주고. 그러니까네 이 동네 사람들이 내가 통장인지, 우리 아부지 통장인지 왔다 갔다 해. 왜냐면 그 일을 내가 많이 했기 때문에. 그래서 통장 일이라면 대충 좀 알아요. 뭐를 해야 되고, 이때쯤 되면 뭐하고, 이런 거를 그때 했기 때문에. 내가 아부지를 선택할 수는 없는 거 아이가. 어떻게 하겠노. 근데 우리 아부지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통장이 되셨나 봐요. 우리 아부지가 추석에 돌아가셨었거든요? 추억 다음날 돌아가셨어. 추석에 제사거든요? 추석 다음날 돌아가셔노니까 어디 갔다가 오신 분들 있잖아. 우리 아부지가 죽은 지를 모르는 거야. 아부지가 돌아가시고 사 오 년 될 때까지도 “요새 느그 아부지가 안 보인다” 이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영도에 아는 사람이 많아 우리 아부지가. 알고 보니까 차를 마시면 자기가 먼저 나와서 계산하고 이랬다대. 그래 내가 “아휴 정신 나갔네. 우리 아부지가 왜 그랬을꼬” 그랬다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억수로 호인인데, 나가서는 호인인데, 들와서는 우리한테 너무 구박을 많이 받았지. 죽고 나면은 항상 그렇잖아. 못 해 준 것만. 죽고 나니까 안타까워 그런 게. 돌아가시기 전어회 그거는 진짜 치명적인데. 그거를 드시고, 패혈증이 와가꼬 돌아가신 거야. 어떤 사람은 죽으려고 그랬는지 이런 얘기도 있고. 근데 이제 인생이 다 그런 거 아이겠나. 우리도 뭐 얼마나 살겠어. 우리 아부지 그래도 칠십은 넘겼어요. 근데 우리 아부지 돌아가시고 나서 그 뒤에 아부지 친구들을 만났어. 아부지 친구들이 하시는 말씀이 “느그 아부지는 멋지게 살다 갔고, 그 이후에 살아봐도 별게 없다. 그렇게 멋지게 파티하고 잘 죽었다” 그래 얘기를 하더라고. 자기들은 그렇지만 우리는 아쉽지. 해외여행도 한번 같이 아부지하고 가믄 좋았을 건데. 그런 게 진짜 아쉽다.
다른 거 다 필요 없는 한마디. “나도 가까?” 점빵은 마을의 젊은 분들이 시작하신 거죠? 지금은 어떠세요? 같이 협동을 해가지고 했어요. 근데 너무 돈이 안 되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일을 찾아서 떠났어요. 직장을 구해서 나가는 사람은 계속 직장을 다니고, 나는 공부방 땜에 바쁘니까 이걸 하고. 한 명이 아직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그러면은 니가 이걸 혼자서 해 볼래?” 하니까 자기가 해보겠대. 그래서 한 명한테 전담을 했어요. 그때 점빵 통장에 백오십만 원이 딱 있었어요. 돈을 쪼끔씩 모아서 칠백만 원 가지고 저 가게를 시작한 거거든? 그래서 그 칠백만 원을 모으면 그때 다시 만나서 어떻게 할 건지, 계속 할 건지, 돈을 가를 건지 생각을 하자. 지금 어차피 돈이 섞였기 때문에 발을 못 빼 전부. (웃음) “나 백만 원 그냥 안 받을래” 이렇게 해. 근데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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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우리 아부지가 회를 먹으면 안 되는데 회를 사와 가지고. 회를 한 이만큼을 사 왔대. 그것도 전어회를.
온나.” 일만 있으면 끌어 들여. 그래가지고 지금 유지가 되고 있고. 과일 식초를 만드신다면서요? 네. 지금 파인애플, 바나나, 자몽. 자몽은 엄청 다 까야 돼 안에를. 하루죙~일 깠어. 막 욕을 하면서 “제발 쫌, 제발 쫌 하지 마라.” 다 까가지고 또 집에 한~긋 담아놨어 지금. 11월 11, 12, 13일 축제를 해. 그때 팔라고. 우리가 협동조합은 실패했고, 단합도 실패를 했고 어떤 면에서는. 근데 점빵이라는 매개체 하나 때문에, 진정한 협동조합이 어떤 식으로 돼야 하는지 그런 거를 쪼끔씩 익혀가는 과정? 그런 과정이에요. 그때는 다시는 협동조합 안 한다 했거든. 근데 협동조합이라는 게 이렇게 하다가 보면 여기서 하나를 또 더 하는 거야. 지금 봐봐. 어떻게 보면은 사업이 사업을 낳잖아. 축제가 있으면 축제에 가서 점빵이 참여하고, 또 여기 식초사업도 하고, 또 난중에는 “그럼 내년 봄에는 젓갈을 담자.” 이랬거든. 이사 간대 전부 다. (웃음) “젓갈 담기 전에 이사 갈 거다. 절대 하지 마라” 그래. 내가 “이사 가는 사람은 뺄게 그라믄. 근데 니 있잖아, 이사 가는데 부산 안에 있으면 무조건 와야 된다.” (웃음) 근데 돈은 안 돼. 돈은 안 되는데 그런 거는 있어요, 자신감. 그런 거는 챙겨요. 한 번 해 보면, “다음에 또 뭐 있으면 해 보자” 이런 식인거야. 그 전에는 “말라꼬, 아 너무 골치 아프다.” 이랬거든? 근데 이제는 뭐 하면은 “해 보자.” 이래. 그래서 과일을 삼십만 원치 사도 눈도 깜짝 안 하는 거지. 옛날 같았으면 그거 땜에 잠 못 자고 이랬다. 같이 하는 분들은 원래 친밀한 관계였나요? 아니죠. 점빵을 우리가 인테리어를 했잖아요. 여름에 뭐부터 했냐면 벽지 뜯어내는 것부터 했어요. 벽지 뜯어내면서 곰팡이를 너무 많이 마셔가지고. 그런 거 하면서 아무래도 서로가 믿는 게 생긴 거야. 같이 고생하고. 좋은 거만 같이 하면은 절대 그런 게 안 생기거든요? 근데 힘든 일을 같이 하고, 내가 이런 걸 하는데 굳이 쟤가 안 와도 되는데 와 주고. 뭐 한다하면 “가까?” 이런 거 있잖아요. 그 말 한 마디가, 다른 거 다 필요 없거든. “나도 가까?” 그런 게 있어요 여기는. 남들이 볼 때는 즈그끼리 쑥덕거린다 이러그든? 그렇지만 그게 필요한 거라. 그조차도 없으면은 그냥 지나가는 동네 사람이지 뭐가 있겠어요. 그래하면 또 애들 입던 옷도 있잖아. “야 이거 입히겠나” 하면서 갖다 입히고. 서로서로가 좋은 반찬 생기면은 나나 묵고. 그런 거지. 고기 오면은 봉다리 넣어가지고 하나씩 다 나누고. 일단은 좋아요.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런 얘기 들으면 부럽다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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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족들과 함께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② 할머니와 함께 리어카 사진관 배경으로
②
①
③ 영도여중 시절 단체 사진. 지금은 태종대중학교가 됐다. ④ ③
④ 동삼동에 있는 사격장 앞에서 ⑤
⑤ 용두산 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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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운전하다가 퇴직하고 인자 계속 백수지
한타관
1951년 경상북도 영덕 출생 1952년 부산 감만동으로 이주 1954년경 이송도로 이주 한타관 아버님은 네 살 이후 영도에 들어와 젊은 시절 잠시 서울에 다녀 온 것 외에는 영도 밖을 벗어난 적 이 없다는 이 마을 토박이다. 버스운 전을 그만두고 즐겁게 사는 삶을 택 한 통 큰 분이기도 하다. 마을 이야기 뿐만 아니라 버스운전하면서 있었던 이야기, 군대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 서 한 시절을 보낸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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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대 하나 울러메고 대한민국 바다란 바다는 다 다녔어 고향이 어디신가요? 경북 영덕이고 내가 알기로는 두 살 때 부산으로 나왔대요. 외할머니가 조방 쪽에 있어가지고 처음에 글로 왔다가, 거기서 감만동, 감만동에서 세 살 까진가 네 살 까진가 있다가 영도로 넘어왔어요. 그 나이 같으면 토박이나 마찬가진데. 영도를 벗어난 일이 없으니까. 그 때 영도 오셔서 지금까지 여기서 쭉 사신 거에요? 요 밑에 영선 2지구 거기서 좀 있다가 거기서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있다가 지금 현재 흰여울마을 저 위에 거기서 계속 쭉 있었고 내가 성인이 되가지고 서울에 뭐 한다고 가가지고 잠깐 칠 개월 있다가 내려와 가지고 그거 외에는 어디 나간 데가 없으니까. 그래가 내가 한 서른 두 살 땐가? 그 때 버스 운전을 하다가, 지금 현재 여기 남부 7번, 70번, 6번, 9번 이거, 버스를 한 이 년 정도 하다가 천일 고속버스 거서 한 십이삼 년 있다가 퇴직을 하고 인자 계속 백수지. (웃음) 버스기사 하면서 있었던 얘기 해주세요. 차에 손님이 금품을 널쭈고 갔다 그라믄 우리가 습득을 하잖아. 그러면 우리는 그걸 안 써. 재수 없다고. 옛날에 동전 주머니 하나를 주웠는데 그거를 내가 버스 운전하는 요 위에다가 놔뒀거든, 이틀인가 삼일인가. 그거 나는 잊아뿌고 있었어. 근데 청소하는 아줌마가 올라와가지고 앞에 닦다가 그거 보고 “어? 아저씨 이거 며칠 되었는데?” “몰라, 그거 흘린 것 같은데 찾아 가라니까 안 찾아 가네” 그라고 보니까 동전이 한 천오백 원 정도 있더라고. 그래가지고 그거 갖고 가게에 가서 음료수 하나 사 마셨어. 그게 우연의 일친가 모르겠어. 그래가 내려가다가 스티카 받았잖아. 그래 가마 생각하니까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그 이후로 뭐 줏으면 오백 원이든 천 원이든 만원이든 청소하는 아줌마 주삐고 그래. 그럼 버스 운전을 몇 년을 하신거에요? 삼십일 세인가? 버스를 한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오십이 세까진가? 그거를 그만 둔 계기는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딱 생각이 나는 기라. 그때 현대중공업 데모 할 땐가? 그 때 뉴스를 듣고 난 뒤에 일 년을 계산을 해보니까 퇴직금이 우리 한 삼사 배 되더라고. 그 때가 퇴직금이 일 년 계산하면 한 팔백만 원? 현대중공업은 한 칠천만 원 되더라고. 내 목숨을 걸고 하는데 십 년을 계산을 하니까 퇴직금이 한 이천만 원 정도 되는데 그걸 가만 계산을 해보니까 남포동에 리어카 하나 살 돈이 안 되더라고. 굉장히 회의를 느끼더라고. 그래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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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고 하면 뭐 하겠노 싶어가지고 한번은 집사람한테 가가지고 “나 일 못하겠다. 나 인자 이만큼 했으니까 인자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닐 거다. 모든 경제 권한은 다 인계할 테니까.” 그라니까 집사람이 화끈하게 “통장하고 도장하고 주소.” 이라더라고. 그래 통장 딱 주고 장대 하나 딱 울러메고 부산 대한민국 바다란 바다는 다 돌아댕깄으니까. 보통 낚시하면 추자도, 제주도, 전라도 내가 여기서는 낚시를 안 해. 여기는 고기가 없어. 그래가꼬 가면 주로 돔 종류, 그거나 잡으러 다니다가 그래. 육지 와가지고 쉬는 날은 또 자전거 타고 하이킹하고 다니고.
결혼할라니까 버스기사라고 처갓집에서 반대를 많이 했지 가족은 어떻게 되세요? 지금 집사람하고 내하고 아들 둘이, 아들은 태안 거기서 일을 하고. 무슨 일 하는지는 몰라. 태안 거기서 바다를 다니면서 공사를 한다는데 내가 한 번도 본 것도 없고. 둘이서 같이 일을 해. 작은 놈은 거기 책임자를
아내분은 어디서 만나셨어요? 연애했지. 어디서 봤는데 대쉬는 내가 했지. 영화 보러 가자, 밥 먹으러 가자 그러다가 연애를 했는데. 결혼할라니까 처갓집에서 반대를 많이 했지. 왜 그렇냐 하면 내가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이 없고, 직업이 운전이다 보니까 반대를 많이 했지. 60년도 70년도까지는 운전이 직업이라 카면 딸을 서로 줬거든, 그 당시에는. 70년대 후반에 80년대 초인가 그때 내가 결혼을 했거든. 70년대 넘어서면서 그 때부터는 운전직업이 천대를 받게 됐어. 60년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운전직업 월급이 공무원보다 많았거든? 그 당시 담배가 급수가 있었거든. 예를 들어서 운전수는 최고 A급 담배를 피웠고, 회장이 한 B급 정도 담배 피우는 그 시절이라. 그만큼 수입이 많았다 이거지. 그라고 나서 매스콤을 타기 시작한 기 버스기사 성추행 사고가 많이 나고 하니까. 딸 가진 사람들이 이거는 위험한 직업이다 그래가지고. 데이트는 주로 어디서 뭐 하셨어요? 그때 데이트는 바로 요 밑에 바닷가. 안 그라면 극장가서 영화보고, 밥 묵고. 옛날에는 요기 바닷가 여기가 행락가였거든. 지금 이기 산책길 둑이 있잖아. 거기다가 기차 레일처럼 세멘을 삭 해가지고 그 때 그기 73,4년까지 있었나? 놀러가는 사람들을 아가씨들이 끄잡아 땡기가지고 술 묵고 바가지 쓰고 나오고 그랬거든. 근데 동네에서 자꾸 문란하다 해가꼬, 그거를 철거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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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한타관
맡아 가꼬. 지금 집에는 집사람하고 둘이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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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안 드세요? 술을 군에 가기 전에 많이 먹었지. 근데 군에 가서 끊게 되었지. 그때 훈련 받을 때 내무반에서 돌아가면서 술로 받아오게 되어있는데, 담 건너에 술집이 있어. “아줌마!” 하고 부르거든. 그라면 돈만큼 술하고 과자하고 날라 와. 한날 우연치 않은데 내가 술로 받아오다가 조교한테 걸렸어. 그래서 진짜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맞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 씨, 더러워라. 묵지마라면 안무면 될 거 아이가’ 하고 술을 뭐 보듯이 봤는 거라. 나는 군대 생활 진짜 고되게 했어. 탈영을 몇 번 할라켔거든. 중고참이 됐는데 그날도 취침 점호를 하는데 관물을 지적을 받았어. 그라고 아아들 교육 제대로 안 시킸다고 뺨을 몇 대를 때리더라고. 진짜 기분 나쁘대. 그래서 불침번 근무 인계를 하면서 자고 있는 고참을 깨웠다 아이가. “계급장 띠고 한 판 합시다.” 밤새도록 치고 박고 싸우는데 이기 돌로 던짔는 거라. 아직도 흉터가 있는데 벌어져뿟어. 그래서 기상나팔 불어서 “내가 인자 고만하자. 후임한테 뚜드려 맞았다 카면 앞으로 고문관으로 좀 괴로울끼다. 니 알아서 떠들어라.” 그랬거든. 그래가 내무반 들어가니까 비상이 걸렸어. 진지투입해가지고 밥을 묵는데 중대장이 나를 딱 보이 입이 이래 부어가 있는 거라. “이거 왜 그래?” 하길래. “아입니다. 배낭을 꾸리다가 총이 넘어져서 좀 다쳤습니다.” 진지투입은 전시니까 내를 사망처리를 해가지고. (웃음) 군대는 그래. 진지투입이라는 게 비상시니까. 의무대로 보낼라카면은 사망처리를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의무대 가가지고 기웠어. 그때 의무대장이 “니 고참하고 싸웠나? 거짓말 하면은 째보로 만들어 줄끼고, 바른 말하면은 고참 혼내 줄 거니까.” 해서 “절대 안 싸웠다.” 했지. 나중에 낫고 보니까 참 성의있게 기워줬어.
여기 백 채 중에 구십일곱은 전부 무허가라 옛날 이 동네 풍경이 어땠었나요? 옛날에는 여기가 전부 다 돌담집. 집을 지을 때는 여기가 공동묘지라. 영선아파트도. 전부 다 공동묘지라. 외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가지고, 집을 한 칸, 한 칸 돌 주워가지고 돌넣고 흙 넣고 돌 넣고 흙 넣고 해가지고 위에 루핑이란 거 아나? 루핑이라 카는 기 종이에다가 지금 말하는 아스콘. 도로에 까는 아스콘, 아스팔트에 바르는. 그거를 종이에다가 발라 놓으면 그기 비도 안새고 좋았어. 그 종이를 깔고 그 다음에 함석. 함석 그 위에 덮고 그러다가 돈이 좀 있으면 슬레트 얹고 그래했는데 그기 인자 집이 한 사오십 년 되다 보니까, 이 집이 자꾸 갈라져. 그러니까 돈이 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올리고 돈 없는 사람들은 증축을 못하고. 이기 전부 다 무허가라 무허가. 이 동네가 사실 무허가라. 근데 땅은 다 개인분양을 다 받았어. 건물은 여기가 불부합지가 되다 보니까, 집을 못 짓게 되가 있어. 여기 백 채 중에 구십일곱은 전부 무허가라. 이거를 옛날에 김형오 씨가, 김형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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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한타관
하니까 중대장이 담배 찢어서 붙이 논 걸 떼보니까 상처가 쩍 벌어지뿌는 거라. 그래가 일단 중대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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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국회의원. 그분이 국회의장까지 했는데 그 사람이 초선 땐가 2선 땐가 지금 저기 가면 유리건물 있지? 카페 있고, 그 집이 김형오 씨 집이라 옛날에는. 김형오 씨 와가지고 주민들 모아가지고 “한 번 우리가 그거를 허가를 받자.” 그거 해놔 노으면 내 개인재산도 보호할 수 있는 거고, 권리도 행사할 수 있는 거고, 그래 그거를 한번 해보자 케서 시작을 했어. 했는데 그 중에 구십구 프로가 다 오케이를 했어. 근데 그 중에 한 네 다섯 명이 자기가 분양 받은 땅에 건물을 짓다 보면 자기는 요만큼 건물을 지었는데, 옆집 사람이 자기 땅을 물고 건물을 올리뿌는데, 자기 땅 한 두 평이 옆집 사람이 물고 집을 지었는거라. 그러다 보니까 다음 집이 한 평 물어뿌고 다음 집이 한 평 물어뿌고, 그러다 보니까 지 땅을 찾을라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도 지 땅을 못 찾는 거라. 전부 다 그래. 그러니까 이 집이 물었으면 이집 한테 한 평 값을 주고. 뼈대 올린 그대로 해가지고 우리가 허가를 받자. 근데 이 집에서는 그 당시 공시시가나 현시가나 돈 차이가 얼마 안 나거든. 근데 이 집에서는 현시가 대로 달라, 또 이 집에서는 공시시가 대로 줄게, 서로가 옥신각신 하니까 안되는 기라. 그래 이 건물이 다 무허가가 되어 있어.
요즘에는 목욕탕 가가 목욕하고. 내일은 문화원에서 사진반. 사진반 거기 가입을 해가지고. 매주 화요일엔 사진 찍으러 출사를 하러 가고. 그 전에는 구청에 가서 전산 뭐 컴퓨터도 좀 배우고 그랬는데 지금은 사진반만 하고, 사진 찍어가 집에 와서 컴퓨터로 작업 좀 하고. 그러다 보니까 일주일 금방 가버려. 색소폰은 함 배아 볼라고. 색소폰 프로그램 있는 데가 저기 을숙도에 있는데 함 가봤거든. 영도는 하는 데가 없고, 가르쳐 주는 데는 있는데 돈을 내야 되는 거고. 저것도 돈을 내는데 조금 부담이 좀 가더라고. 저기 우리 사무실 위에 ‘소리방’, 거기 기타 등록은 받아주는데 가보니까 전부 애들이라. 거기서 낑기 앉아가지고 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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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한타관
그럼 요즘에는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기억 속 키워드 2
늦가을의 악몽, 태풍 사라호 “태풍 왔을 때, 추석이었는데 엄마 아빠들은 지 붕 날라 간다고 잡고 있고, 우리들은 인자 죽는 다고 피난가가 있는데, 주먹밥을 하나쓱 나나주 는 거야. 운동장 맨 끝에 가가 주전자에 물 마 이 길어다 오면 주먹밥 하나 더 주는 기라. 쪼 만한 기 그거 하나 더 물끼라고, 주전자 지보 다 더 큰 거 들고 가가 완전히 고생했다. 무섭기 는 또 얼마나 무섭노. 말도 못한다.” 1959년 9월 17일 추석 아침에 사라호 태풍이 상 륙했다. 강연식 씨는 아침밥을 먹고 있는 도중에 지붕이 날아갔다고 증언한다. 당시 집들은 허술 하게 지어져 있어 태풍으로 인한 피해는 컸다. 지 금의 절영산책로 자리에 늘어서 있던 술집들 또한 태풍에 쓸려가고, 인근에 살던 술집 아가씨들의 인명피해도 컸다. 사라호 이후에도 태풍이 올 때마 다 가옥과 인명 피해가 컸다. 진순여 씨는 벼랑에 축대가 생기기 전까지 태풍에 집이 쓸려 내려가는 악몽을 꾸었다고 할 만큼 태풍은 이곳 주민에게 큰 사건이었고, 공포로 기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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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한 때의 생계벌이, 오렌지 물
줄을 서야만 쓸 수 있었던 공 중화장실
“오란다 같이 생긴 거. 비니루에 물 옇어 가지고 만
“이 마을에는 옛날에 개인 화장실이 없었어요.
든 주스. 옛날 토백이로 산 사람들은 그거 안 한 사
변소 하나에 이 집, 저 집이 같이 쓰고 청소할
람이 없었다. 그거 만들어가꼬 새벽에 이고 국제시
때 같이 돈 내고 이런 개념이었는데. 지금은 환
장에 팔러갔지. 요 밑에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 쪼
경이 바뀌면서 상하수도 다 들어오니까 공중화
금 가면 중국집 앞에 버스가 왔거든. 그거 타면 시
장실은 거의 안 쓰죠. 그래도 남아 있는 데가 한
청 앞밖에 안 가. 그럼 거기서 내리가 남포동까지 걸
군데 있어요. 할매들이 한 4가구 정도 모여 사
어가는 거지. 그게 무슨 불량식품이라고 보건소에
는데, 화장실에 열쇠를 채워서 할매들끼리 쓰고
서 나와가 날마다 뺏들어가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있어.”
데 뺏들어 간다고 안 되나? 다시 하고, 다시 하고. 나중에는 “보건소 차 왔다!” 하면 전부 숨가 버리고.
1970년대 이전에 제대로 된 상수도 시설이 없
이래 뒷짐 지고 있으면 손 보자 한다. 손이 봉숭아
었을 때, 마을 골목 사이사이에 공중화장실이
물 들인 것 매로 이래 베가 있어. 식초물이 들어가니
있었다. 처음엔 절벽에 거적대기로 가려놓은 정
까. 그럼 막 도망가고 그랬어. 그래가 이 동네 사람
도였고, 이후에 공중화장실이 만들어졌다고 한
들 먹고 살았지. 쌀 사고, 반찬 사고, 아아들 공부시
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갖춰진 것은 1970년대
키고.”
이후로 추측된다.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마을에 상수도 시설이 들어오고, 집마다 화장실을 만들
많은 주민이 ‘오렌지물’을 언급했다. 오렌지 분말가
여건이 되었다. 아직도 마을에는 공중화장실의
루를 물에 풀어서 주사기를 이용해서 비닐에 담고
흔적이 남아 있다.
셀로판지로 마감했다고 한다. 당시는 빨대가 없던 시절이라 먹기 좋도록 비닐은 세모 모양이었고, 셀 로판지 부분을 떼내면 마실 수 있게 했다. 분말 비율 이 낮았기 때문에 대부분 ‘오렌지물’이라고 지칭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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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마을에 산다
출신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만, 마을의 변화를 위해 역할을 하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마을 주민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숨겨진 이야기 들도 담았다.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흰여울문화마을에서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먹고 살려고 왔지 _ 김송죽
3
장
김성희 윤미아 송정옥 김병호 김갑숙 김옥례 이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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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표는 나중에 노을 사진 전시회를 하는 거예요
김성희
1972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1998년 결혼, 이송도로 이주 흰여울길을 걷다보면 음악 소리가 들리는 작은 가게가 있다. ‘흰여울점 빵’이다. 마을의 풍경을 구경하다 잠 시 쉬어가는 곳이다. 그곳에는 김성 희 님이 있다. 자몽주스와 점빵우동 은 다 그녀의 손맛이다. 결혼해서 정 착한 흰여울문화마을에서 매일 보 는 노을이 너무 좋다는 그녀는 흰여 울점빵이 외지사람들이 아니라 여기 사는 분들이 더 행복해지는 공간이 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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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선 보러 우리 신랑이 목포로 진짜 온 거예요 목포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흰여울마을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1998년 4월에 결혼하면서. 부산에 처음 온 곳이 여기였어요. 목포에서는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시어머니가 잔치를 하러 와가지고 목포까지 단체로 머리하러 오신 거예요.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다 보니까 막 이야기를 하잖아요. 농담조로 아가씨라 하니까는 “우리 아들이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이러는 거예요. 그때 당시는 기차도 일곱 시간 반 이렇게 타야 되거든요. 그런데 진짜 온 거예요. 맞선 보러 우리 신랑이. 신랑이 너무 순진하게 보여 가지고 그래도 이런 사람 같으면, 하도 나쁜 사람 많은데 괜찮겠다 해가지고. 진짜 아가씨 때도 목포 이상을 벗어나 본 적이 없거든요. 굉장히 멀리 오게 된 거네요. 왜 멀리 오고 싶었냐면 스물일곱 살까지 그 안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어요. 왜 멀리 가보고 싶어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여기저기를 다녀봤으면 그래도 가까운 데가 낫겠다 생각 했을 건데 한번도 외지를 안 나가봤기 때문에 부산하면 왠지 왔다갔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근데 교통편도 안 좋고 그래서 후회를 많이 했어요. 또 시댁의 문화하고 우리 집의 문화하고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있었어요. 저 바다를 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배타고 가면 바로 목포로 갈 수 있겠단 생각에 초창기에 정말 많이 울었어요. 외로우셨겠어요. 아줌마, 어르신들이 주위에 거의 다 전라도 분들이세요. 영도가 옛날부터 제일 집값이 쌌고 형편이 비슷비슷한 분이 모여 살기에는 딱 바다 근처고 하니까 의외로 전라도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쉽게 친해졌어요. 그러고 어디 나돌아 다니고 이런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뭐 우울하다 이런 것도 없었고, 직업이 직업인만큼 사람 대하는 게 쉬웠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고 그런 거는 없었어요. 여기가 이 집에 숟가락 몇 개, 젓가락 몇 개고 그거는 있는 것 같아요. 이 집에 제사가 있고 없고, 뉘집 제사인지 다 외우는 것 같아. 우리 마을도 그랬는데 그 정서가 비슷해서 그래도 적응하기가 쉬웠던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없으니까 더 끈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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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기는 어땠나요? 요새 젊은 애들은 문화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생각하겠지만 전 자연이 있기 때문에 너무 좋았어요. 아이들 키울 때 중요하다 생각했어요. 여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노을질 때가 너무 좋거든요. 이런 환경 어디 없거든요. 바닷가 가서 게 잡아 보고, 고동 잡아보고 이런 체험공간이 꼭 나가서만 해야 되는데 우린 여기서 할 수 있고, 뒤에 산에 올라가는 체험도 해보고 그래서 저는 진짜 문화생활만 애들한테 고집하는 것보다 이런 자연환경에서 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정서적으로. 마을공동체 일은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하셨나요? 작년 오월부터. 여기 젊은 분들이 많이 없으신 거예요. 아는 언니가 젊은 그룹의 대표로 있는데 그 언니가 우릴 선동한 거죠. (웃음) 같이 해보자, 마을 좋아진다는데 나쁠 게 있나. 그래서 하게 된 거죠.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살았던 사람이니까, 시집오기 전부터 계속 알았던 사람이니까, 한 이십 년 가까이 알았던 사람들이니까, 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없으니까 더 끈끈하죠. 그전에는 그냥 동네 언니니까 속속들이 내 속상한 알고. 이때까지 그런 교류였지요. 아는 언니, 아는 동생. 내 속상한 일 있으면 거기 가서 다 풀고, 서로 풀어주고 풀리고 그런 관계였죠. 흰여울마을에서 우리도 공동체를 가지자 해가지고 우리 젊은 그룹들도 투입해야 안 되겠나, 그래서 하게 된 거예요. 우리 마을이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보자 그런 취지니까. 나 혼자 잘 살자는 건 아니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이 이쁘다고 생각 안 해봤거든요, 솔직히. 흰여울마을에 관심을 가지니까 앞에 바다 있고 뒤에 산 있고 이만한 데가 정말 없는 거예요.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묘박지1)인데, 바다에 배 떠있는 거 볼 수 있는 곳이 유일하게 여기 밖에 없잖아요. 그거 하나만으로도 자랑할 만하죠. 그래서 흰여울점빵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사람들이 찾아와도 충분히 쉴 수 있는, 그냥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 그래서 만들어 본 거죠. 우리는 이 자연밖에 없잖아요. 솔직히. 우리의 목적은 가게를 열심히 해서 부업을 하게끔 해가꼬 어르신들 일자리도 창출하자가 목표였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젊은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니라, 이 마을에 어르신들도 많이 계시니까 소일거리로. 요새는 백세 시대, 팔십 칠십만 되도 다 건강하세요. 그 어르신들이 우리보다 더 잘 하시는 게 많잖아요. 장 담그는 것도 그렇고 젓갈 만드는 것도 그렇고 솜씨 있는 분들이 많거든요. 특히 전라도 분들이 많고 솜씨 있는 분들이 너무 많으세요. 그런 분들한테도 일자리를 제공해주자, 그라고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점빵도 젊은 사람들하고 몇 명이 같이 투자를 해서 하게 된 거죠. 1) 선박들의 해상 주차장이라는 뜻. ‘유일한’이라는 표현은 이곳처럼 배가 떠있는 풍경을 바로 볼 수 있는 묘박지가 없다는 의미다. 165
흰여울마을에 산다 _ 김성희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하는 거지요. 토박이들도 있고 시집 온 사람들도 있고 하니까 가정사에서 속속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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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곳에서 오는 손님들하고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점빵 시작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나요? 처음에 같이 하기로 했었어요. 근데 각자 의견이 다르고. 다들 이거 해 본 사람이 없잖아요. 저도 직업이 이거 아니잖아요. 근데 이걸 하면서 문화원에서 바리스타 수업을 받았었어요. 그 계기로 차와 음료를 팔게 된거거든요. 아무 지식 없이 팔 수는 없잖아요. 문화원에서 받은 수업이 계기가 되어 음료를 팔아보자 이렇게 된 거거든요. 처음에 우리가 돈 벌자고 시작한 거 아니였거든요.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 줄 수 있는 사랑방, 쉼터 같은 공간으로 만들자 해서 만든 거거든요. 돈 벌면 더 좋고. 크게 밑지지도 않고 크게 오바하지도 않는 것이 딱 좋다. 그러니까 의견 차이가 많은 거예요. 원래는 혼자 하는 공간이 아니고 같이 돌아가면서 해야 되는데 여러 가지 여건이 안 되니까 혼자서 운영하고 있지요. 혼자 하면서 힘든 점은 없으세요? 돌아다니기 안 좋아 하는 사람이랬잖아요. 앉아서 정착하고. 손님들 다양한 곳에서 많이 오잖아요. 그 사람들 하고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주말에는 바빠서 물건 주고받고 하는 것밖에는 안 되는데, 평일에는 오시면 어디서 오셨나 물어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 지방의 살아가는 패턴들이 다 틀리잖아요. 또, 전라도에서 오셨다 하면 너무 반갑고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고. 같은 고향에서 만났다 그러면 너무 반가운 거예요. 손님들도 목포 아줌마가 여까지 오셨나고. (웃음) 힘들어하시긴 보단 즐기신다는 느낌이 들어요. 외국 분들도 오시는데 한국말 너무 잘해요. 한국말을 다 배워가꼬 오시니까 외국 분들 와도 별 부담이 없고 서로 어느 정도 짧은 이야기는 하니까 그 나름대로 재미있어요. 또 젊은 청춘남녀들이 많이 오니까 내 생활이 그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돋는 그런 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커플들이 많이 오니까 알콩달콩 하는 그런 모습도 보여주고 하니까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싶고. 요새는 남녀가 너무 이쁜 거예요. 못생긴 애들이 없어요. 점빵 이름이 재미있어요. ‘점빵’이란 게 작은 구멍가게 이런 뜻이거든요. 경상도 말로. 우리 가게가 그렇게 넓은 가게도 아니고. 처음에는 점빵이 아니고 ‘천지빼까리’라고 할라 했어요. 모든 게 다 있고 다 판다해서 할라했는데, 너무 억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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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마을에 산다 _ 김성희
힘든 건 없어요. 아침부터 열 시부터 여섯 시까지, 토·일요일도 하고. 나름대로 재미있어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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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다 이래서 ‘흰여울점빵’으로 하자 했는데 오히려 더 이슈가 되는 거예요. 점빵이란 말을 의외로 몰라가지고 점집 아니냐고 하도 물어봐서 적어놓기도 했어요. 빵집이냐 물어보기도 하고. (웃음) 전에는 바람개비가 있었는데 색깔이 알록달록 하니까 좀 점집 부위기 나서 점집 아니냐고 물어보고.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이름이네요. 그래서 한 번씩 들어와 봐요. “어 작은 카페네요.” 그래요. 요즘은 천 원짜리도 카드를 긁는 시대니까 원래 작은 점빵의 유래를 말해줘요. 그러면 거기서 카드기를 긁겠노 하고 다 이해를 하시더라고. 저는 점빵보다 천지빼까리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점빵 컨셉으로 가자 해가지고 문구점 백 원짜리 짜잔한 것도 놔놓고 팔아봤어요. 근데 그것도 우리가 다 먹게 되더라고요. 아니면 애들 오면 퍼주게 되고.
제가 직접 만들어 파는 게 좋아요 커피죠. 주로 차, 음료. 수제비누, 향초 같은 거는 우리가 수공예 수업을 하면서 배운 것들로 팔아보자 해서 팔아본 거고요. 자몽에이드는 직접 수제청을 담아요. 담아가지고 생자몽을 짜서 에이드를 만들어주니까. 다른 데서는 시럽 있잖아요. 시중에 파는 거에다 탄산수를 만들어 넣는데, 저는 제가 직접 만들어 파는 게 좋아요. 맛있다고 하니까 감사하죠. 그런데 젊은 애들이 많이 오는데, 여기 뭐 먹을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컵라면부터 시작했어요. 근데 자기 자식들한테도 그건 안 먹이고 싶잖아요. 그러면 라면을 끊여 주자 해가꼬 냄비 사가꼬 라면을 끓여 줬어. 깔끔한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우동도 시작했어요. 육수를 빼가지고 그럼 끊이자. 육수 끊이니까 국수도 할 수 있고 떡볶이도 할 수 있고. 메뉴가 자꾸 늘어 혼자 운영하기 참 힘들어요.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신가요? 할머니들이 처음에 여기 와서 장사하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없었대요. 너무 적적하시고 마을 분들이 한 분 한 분 가시면서 너무 외로웠는데 우리가 여기 와서 음악이라도 틀고, 얘기하고 하니까 북적북적 사시는 게 너무 좋대. 음악만 들어도 좋고 손님들 이야기 소리만 들어도 좋대요. 시끄럽지 않아요?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데 불편하지 않아요? 물으면 “사람 구경해서 좋구만.” 요 우에나 여기나 다 같이 친한 동네. 한 번 뵙지도 않은, 여기 온 지 일 년 밖에 안 된 어르신도 몇십 년은 본 것 같아요. 그렇게 불편함이 없어요. 몰라요, 남의 동네였음, 우리 근처가 아닌 다른 동네였음 불편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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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빵에서 주로 무엇을 파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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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없을 때는 뭐하세요? 제가 제 나름대로 사브작 사브작 하는 걸 좋아하니까 십자수나 손뜨개질 이런 거 하면 되니까. 근데 그거 하다보면 한 땀 하고 있음 손님 오고, 한 땀 하고 있음 손님 오고. 음악 듣는 거 괜찮거든요. 바다 보면서. 그전까지는 못 느꼈는데 여기 있으면서 석양이 들 때 노을이 질 때 슬픈 음악이 나온다 그러면 없던 감성이 생기는 거예요. 나만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집에서 살림을 하거나 다른 데서 일을 하면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무슨 음악 이러겠어요. 근데 여기 있으면서 나만의 여유로운 시간이 있으니까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요.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좋고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난 수제청을 담는다던지 레몬청을 담든다던지 앞으로 팔아야 할 것들을 만들면 되니까 의외로 바빠요. 보람이 크실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나면 즐거워요. 활력이 생기잖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몸은 고되도 보람은 있으니까. 근데 그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몇 명 안 되는 것 같긴 해요. 내보고 돈도 안 되는데 왜 이걸 하고 있느냐고 거. 그래서 하나라도 팔아서 “맛있네요.” 하면 기분 좋아요. 이런 소리 들으면 좋잖아요. 한 가지라도 더 제대로 알면서 하고 싶어요.
더 이상 이 마을이 안 꾸며졌음 좋겠어요. 이 자연 그대로 흰여울마을에 대한 개인적인 바람이나 이곳에서의 꿈이 있다면요? 더 이상 이 마을이 안 꾸며졌음 좋겠어요. 이 자연 그대로 진짜. 벽화 절대 그리지 말기. 벽화도 안 그리고 자연 그대로 오셔서 힐링할 수 있는 공간, 그런데로만 만들지. 뭐 돈을 들이 붓고. 다른 데는 가니까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그러지, 그 마을 멋지더라 이런 말은 절대 안하잖아요. 저는 오시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게 석양이 멋있어요. 날마다 제가 그 시간에 사진 찍어놓은 게 있어요. 노을 사진. 제 목표는 나중에 그 노을 사진 전시회 하는 거예요. 시시때때 변하는데 마을의 풍경이. 오늘같이 해가 좋을 때는 여섯시쯤 되면 진짜 땅거미 지고 어두운데 노을이 너무 예뻐요. 그건 어디서 보겠어요. 바로 집 앞에서 보는 건데. 제가 애들한테 질문을 많이 해요. 바다 색깔이 어떠니? 어떤 느낌이 드니? 그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애들도 여자애들이라 그런가 감수성이 예민한가 봐요. 애들도 기억에 많이 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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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마을에 산다 _ 김성희
하는데 그래도 외지인들 만나는 게 재미있어요. 원래 주부들이 그렇잖아요. 내 꺼 맛있다고 하면 기분이 좋은
바다를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윤미아
1975년 이송도 출생 2009년 결혼 수줍은 웃음이 고운 윤미아 님은 이 송도에서 태어나 자랐다. 디자인 전 공을 살려 ‘흰여울스튜디오’를 운영 하는 마을의 젊은 세대다. 부모님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인 ‘청송 식육점’을 운영하면서 자식들을 키 우느라 고생하셨다. 서로 서로 챙겨 주는 마을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오 172
래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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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식육점 거기서 태어났어요 태어난 후로 계속 여기 살고 계신건가요? 청송식육점 거기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님이 그전 시기 때 여기서 터를 잡기 시작하셔가지고 저를 낳고 그러셨어요. 맞벌이를 해야 해서 친정 가까운데 있고요. 신랑이 여기 와서 터를 잡게 되었어요. 일남 삼녀 중 둘째구요. 다른 형제들은 다 외지에 있고 미혼 여동생만 부모님하고 같이 있어요. 저는 2009년도 서른다섯에 결혼을 했고 지금은 애기 둘 있어요. 지금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이에요? 원래 그림을, 디자인을 전공했었거든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컴퓨터 그래픽 쪽 일을 아는 분이 소개해주셔서 하게 되었어요. 애가 생기다 보니 엄마가 아프시다 해서 애를 못 맡기고, 일을 그만뒀다가 얼마 전에 ‘흰여울스튜디오’라고 아까 보셨죠? 그거 운영하고 있어요. ‘흰여울스튜디오’는 핸드메이드 샵인데 원래 광고 쪽 일을 해서 저는 광고 인쇄물이라든지 그런 거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시작했거든요. 생활문화공동체에서 핸드메이드, 향초 이런 수업을 가르쳐 주셨어요. 관심은 있는데 선뜻 시작은 못했어요. 프로그램으로 있어서 그걸 배우고 제가 하던 것도 같이 시작을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부모님들이랑 여름휴가로 바닷가 해녀촌에 가서 수영하고 놀고 어린 시절 마을의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다른 데랑 다 비슷할 거 같아요. 여기 있는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여기 이 차선, 그때도 똑같이 2차선이었거든요. 변함이 없으니까, 여기서부터 함지골까지. 그때는 차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 때는 비포장 도로였어요. 친구들이랑 아는 언니 오빠들이랑 여름에도 좋고 겨울에도 좋고 75광장에서 놀고 그런 기억들. 그리고 이 앞 바닷가에서 수영하고 놀고. 다 논 기억들뿐이네요. 바닷가는 예전에도 똑같았어요. 위험하긴 한데 집앞이니까 그냥 동네니까 놀았던 거 같아요. 입구도 있고 저기 계단은 그대로인 것 같거든요. 그 옆에 생활하수 이런 게 내려갔는데 그건 다 정화가 된 것 같고. 그냥 바닷가였죠. 앞에 산책로 밑에 돌이 있잖아요. (흰여울길 벼랑 아래를 가리키며) 그게 이까지 다 있었잖아요. 바닷가 말고 다른 데 놀러가기도 했나요? 그때만 해도 지금 동삼동에 아파트 지어진 데 거기가 산이었거든요. 가는 길에 75광장 거기까지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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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산에 가는 거였어요. 그때는 이렇게 길이 안 닦였기 때문에 거기 지나서 부모님들이랑 여름휴가로 바닷가 해녀촌에 동네분이랑 전부 가서 수영하고 놀고. 75광장이란 게 75년도에 지어졌다고 해서, 정자 하나 있고. 75년도에는 공원이란 개념이 없으니까. 약간 미니 공원같은 그런 거라서. 거기서 차 세워놓고 세차하고 그렇게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거기 동네사람들이 같이 태워주시면 가서 놀고, 걸어서 갈 때도 있고. 거기 가서 노는 것이 멀리 가는 거였네요.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남항초등학교, 남도여중. 고등학교는 유학을 갔어요. 거의 영도여고로 가는데 서여고로 빠져서. 아무래도 중학교 가면 학교 친구들이랑 많이 어울리니까 이 동네보다는 밖에서 놀았던 기억이 많죠. 중학교 때는 남항시장에서 수업 땡땡이치고 친구들이랑 돌아다니고 그렇게 놀았어요. 우리 때는 사춘기 반항 이런 것도 없었던 거 같아요. 그냥 무난하게 자랐어요. 그때 집이 없어서 저희 가게에서 살았던 그런 친구들도 있고, 가게 방 한 칸에 애 세 명하고 부모님하고 살고. 형편이 어려웠던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때 친구 부모님들은 식육점가게 하시고 그래서 그때 괜찮게 살았어요. 그때랑 지금이랑 엄청 달라졌잖아요. 그런데 생활수준이 우리 집은 쭉 유지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부모님들이 쉬는 날 없이 달려오셨던 것 같아요 식육점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태어나기 일 년 전이니까, 74년 정말 힘들게 하신 것 같아요. 쉬는 날 없이 달려오셨던 것 같아요. 아침에 열면 거의 다섯여섯 시에 열어서 밤 열두 시까지. 처음엔 다 같이 살다가 형편이 나아져서 영선아파트, 미니아파트 살다가 식육점 건물을 지어서 이 층에 부모님이 사세요. 아마 이 동네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게일 거예요. 힘드셨지만 자식들을 공부 시킬 수 있는, 다 거기서 나오고 하시니까 나름 보람차게 하신 것 같아요. 부모님이 그렇게 바쁘셔서 좋았던 점도 있을 거고 싫었던 점도 있었을 텐데? 마을에서 잘 사는 축에 속했거든요. 일하는 사람을 들여서 집안일 해주시고 저희 외할머니가 봐주시고 그래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그다지. 고등학교 올라가 시내 쪽에 가니까 아무래도 가게도 좋은 가게들, 빵집 이런 거 많고. 남포동이 그렇잖아요? 우리가 구멍가게를 하는구나 그랬지 부끄럽지는 않았어요. 부모님이 이 동네에선 최고로 우리를 키워주셨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힘들게 하셨어요. 대목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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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사, 자영업 이런 일을 많이 하셨죠. 저희 집은 괜찮게 살았어요. 아버지가 운송업 쪽 일을 하셨고 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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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는. 지금이랑 정말 비교가 되지요. 그때는 인구가 꽤 많았으니까 다른 가게들도 비슷했어요.
애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니까 이사를 가야 하나 생각도 들어요 가게들이 어떻게 다 없어졌나요? 빅마트 자리도 비슷하게 슈퍼를 하셨는데 작년에 힘이 드셨는지 다 정리하시고 젊으신 분들이 들어오셔서 해요. 부모님이랑 친구 분이신데, 그 가게가 저희랑 같이 비슷하게 오래 했는데 그 가게는 사라져 버렸어요.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가게인데. 참 아쉬워요. 여기가 낙후된 지역이잖아요. 점점 낙후되니까 더 이상 유지를 못하고 아니면 돌아가시던지 나가고. 장사가 안 되니까요. 가게 유지가 안 되니까. 식육점도 마찬가지에요. 저희 가게니까 그나마 세를 안내고. 만약 세를 내고 한다면 이렇게 유지를 할 수 있을까 싶어요. 풍성했던 마을이 언제부터 경기가 안 좋아졌나요? 조금 변화를 겪기 시작하면서 여기는 그대로 머물러 있고 다른 동네는 발전하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문화나 생활환경이 좋은 곳으로 가죠. 여기는 아파트도 관리비가 없고 다들 그냥 자기 집이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외지로 나가는 분이 없고 자식들이 필요한 건 갖다 주고 이러니까 그냥 괜찮게 사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나이 드신 분들만 계신 것 같고. 저도 솔직히 나가려고 생각했었거든요. 여기서 삼십오륙 년 살아보니까 조금 불안한 감도 있고. 신랑이 부산사람이라면 몰라도 다른 지역 사람이라 부모님 있는데서 시작하려고 들어왔었거든요. 신랑이 해운대 쪽 회사를 다니는데 그쪽은 집값이 너무 비싸고 육아도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하니까.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고 해서 학원도 있었고 약국도 있었어요. 친정이 가까워서 시작을 하긴 했지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여기가 마침 개발이 된다는 말이 있어서 아, 개발이 되면 괜찮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개발이 안 되고 이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좀. 애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니까 동삼동으로 이사를 가야 하나 생각도 들어요. 아파트라고 있지만 놀이터도 따로 없고. 옛날에는 정말 뛰어놀기에는 좋은 그런 곳이었는데. 여긴 변화가 없고 그냥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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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부터 시작해서 금융위기 오고 그 뒤로부터 하나씩 나가고. 동삼동에 아파트 들어서면서. 영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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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은 다른 곳보다 많아요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무래도 깔끔함, 정리되고. 집들도 너무 낙후되어 있으니까. 정말 이 마을을 생각한다면 와서 즐길 수도 있고. 볼 것도 없고, 솔직히 바다 말고는. 여기 ‘흰여울문화마을’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문화체험하는 공간도 없고 우리가 놀만한 곳도 없고. 저희가 영도문화원 수업을 받았다 했잖아요. 그거를 받아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공간도 없고. 흰여울스튜디오를 만들어서 제가 시작하기는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문을 해주고, 이 마을을 위해서 한 사람 한 사람 모여서, 크게크게 공동체를 만들어서 해보자고 해서 만들게 되었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남편 분은 뭐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골목이 있고 하니까 경사가 지잖아요. 그런 위험함이 있으니까. 생활공간들이 갖추어져 그쪽이 문화 환경이라든지 그런 게 더 잘 되어 있거든요. 그래도 부산이고 생활수준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막상 들어왔는데, 생활수준이 떨어지니까 아무래도 그런 불만들이 있죠. 근데 그렇게 표는 안 내고요. 그런데 경치가 좋다, 나쁜 사람이 없으니까, 도둑이 없으니까, 사는 사람들은 다 좋으신 분들이니까. 챙겨주시고 이런 건 너무 좋다고 해요.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기 일처럼 그렇게 생각해 주시고. 옛날 같은 유대감은 없지만 그래도 일이 벌어지면 자기 일처럼 챙겨주시고. 아직 그런 정들은 다른 곳보다는 많아요. 아이들도 또래 친구가 없는데도 제가 워낙 오래 살아서 어른들이 다 아니까 돌아다녀도 ‘민이 왔나’ 이런 식으로 이 동네가 다 자기집이죠 뭐. 다 친근하게 대해주시니까. 어딜 가서 이런 대우를 받을 데는 없으니까. 얘네들도 어디 가서 동네 분들이 이렇게 해줄 사람이 없잖아요. 애들 하나하나 챙겨주시고 그러시거든요. 앞으로도 당분간 흰여울문화마을에서 살아가실 계획이신가요? 뉴타운이 아니라 재개발이 된다고 했으면 학교도 들어서고 새로운 생활공간이 되는 건데 그렇게만 해도, 그러면 내가 사는 공간을 굳이 나갈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환경만 된다면 여기 남아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어요. 바다를 계속 보고 살았기 때문에 바다를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어떨까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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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않으니까. 저희 신랑이 목포에서 생활을 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시골이 아니고 도시인데 차라리 목포
노을 질 때, 해 떨어 질 때 그 때가 참 멋있어요
송정옥
1958년 경상남도 양산 출생 1978년 결혼, 이송도로 이주 송정옥 님은 이곳에서 본명보다 불 교이름인 반야화로 통한다. 마을 공 동체 활동으로, 풍물강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는 자는 시간도 아 까워 하루 세네 시간만 주무신다고 한다. 인터뷰 당일 역시 서너 번 마 주쳤지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양 해를 구하는 바람에 해가 떨어질 무 렵이 되어서야 인터뷰를 할 수 있었 다. 영화 <변호인>으로 알려진 흰여 울문화마을 안내소 창밖으로 그림 처럼 노을이 물들고 있었고, 이때가 가장 멋지다고 자랑하는 그녀에게서 얼핏 스무 살의 앳된 간호사 시절을 180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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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집에서 보쌈을 해서 영도로 왔어요 영도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어요? 시집을 영도로 왔어요. 스물한 살 때. 양산에서 태어나서 영도로 시집와서 지금 39년 살고 있어요. 우리 시집에서 보쌈을 해가 갔어요. 우리 아저씨가 4대 독자에다가 시아버지가 안 계셔서.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손자 장가를 빨리 보내고 싶다 이래가지고. 내가 간호원이었어요. 지금은 병원에 캡을 아무도 안 쓰잖아요. 근데 옛날에는 캡을 다 썼어요. 근데 우연히 제 병원에 와가지고. 아마 그 전에 집안에서 얘기가 있었나봐요. 그래가지고 시집을 바로 왔죠. 우리 남편은 내를 보고 갔어요. 나도 모르게. 다음에 와가지고 자기네들끼리 이야기가 막 오가는 거에요. 그래가꼬 결혼하게 되었죠. 그럼 남편분은 언제 처음 보셨나요? 그때 스무 살 때죠. 보고 얼마 안 되가지고 내를 데꼬 갔으니까. 데이트도 나는 못 해봤어요. 학교 다니다가 간호사로 병원에 근무하니까, 우리도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까. 결혼도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에요 나는. 지금은 세월이 그렇지만 옛날에는 어른이 그거하면 가야 되는갑다 뭐 이래 생각했잖아요. 이 집이 워낙 내를 데꼬가야 된다 이래서 내를 데꼬간 거에요. 근데 인자 살다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웃음) 애를 한 둘이 놓을 때는 몰랐죠. 결혼하실 때 간호사 생활은 그만두신 건가요? 네. 4대독자다 보니까 우리 시할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손자며느리를 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노니까, 여자는 바깥에 나가면 안 된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맞벌이 주부가 되는데 그 때는 여자들은 무조건 대문 밖을 나가면 안 된다. 이렇게 아셨어요. 그래서 어른들하고 같이 살아야 되는 갑다 그래가지고 어른들을 모셨죠. 시할아버지하고 시할머니하고 다. 간호사 생활은 어디에서 하셨어요? 대동병원. 동래. 지금은 옮겼죠. 옛날에는 어디냐면 안락동에 대동병원 있었는데 지금은 저 수안동 가는데 거기 있어요. 병원 옮겨졌어요. 오래되었죠. 거의 40년이 되었으니까. 나는 군의관, 소방관 이런 걸 좀 하고 싶었어요. 봉사 쪽으로 경찰이라든가 여경들 그런 거 하고 싶었어요. 그 당시는 여경들도 잘 없었으니까. 근데 우연찮게 엄마가 간호원 한번 해봐라 그래서 간호원 생활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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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간장공장을 했었는데, 시집 왔을 때는 자리만 있었죠 78년도에 이 동네로 오셨을 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지금은 여기가 산책로 생기면서 이렇게 해놨는데 그때는 여기 언덕에도 다 집이 있었어요. 닭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고. 그때는 화장실도 푸세식보다는 그냥 천막 쳐놓고 화장실 들어가고 이렇더라구요. 완전 촌이더라고. 듣기로는 시댁에서 간장공장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저희 간장공장이 이 집이에요. 지금 여기가 터인데 뜯기뿌고 없어요. 부산시에서 텃밭을 조성해줬어요. 우리 텔레비전도 나왔어요. 여기서 텃밭을 해서 1회. 지금 수요일마다 오아시스라는 프로그램을 수요일마다 하거든예.1) 거기 보면 텃밭을 가꿔줍니다 하고 하는데 우리가 1회였어요. 김장 배추 심어놨어요. 간장공장은 한 몇십 평 됩니다. 옛날에는 물동이에 이고 집집마다 팔러 다녔으니까. 옛날에는 이름이 이고 팔러 다니는 간장이에요. 오복간장 나오고 이름 있는 간장이 나오니까 이 간장공장이 죽어 버렸는 거라. 제가 시집 왔을 때는 간장공장 자리만 있었죠. 직접 보지는 못했고, 자리 터만 있는 거죠. 옹기 같은 것만 있었지. 옛날에 우리집은 유일하게 기와였어요. 기와는 오래되고 갈라지고 하니까 비가 새가지고 판넬로 바뀌었어요. 기와도 누가 약에 쓴다고 기왓장도 얻으러 오고 그랬어요. 그걸로 뜸질 한답니다. 옛날엔 바닷가에 술집들도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옛날에는 바닷가 길 이름이 ‘오솔길’이었어요. 여기 축대가 쌓아지면서 산책로도 생기고 이래놨어요. 내가 시집왔을 때는 술집이 없어진 상탠데 이야기 듣기로는 아가씨들이 술파는 형태. 왜냐면 여기가 묘박지가 있다 보니까. 묘박지, 배 주차장. 여기 주차장에 있다 보면은 금방 나갈 수가 없어. 우리가 며칠 나갑니다 하면은 거서 며칠 나가도 된다 허락이 떨어지면 출항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배에 며칠 있어야 되니까 통통배타고 여기 와서 술 한 잔하고 다시 올라가고 그런 거예요. 아가씨들이 손님 접대하고. 지금 같으면 유흥가죠. 처음에 영도에 오셨을 때랑 비교해서 지금은 어떻게 변했다고 보세요? 동네는 좀 깨끗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처음 살 때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친숙함이 좀 멀어진 것 같아요. 왜냐면 젊은 사람들이 다 나가고 나이 드신 분들만 있다 보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거동도 잘 안되고. 1) 부산 KBS TV프로그램 <도시활력 프로젝트 오아시스>에서 텃밭 상자 분양과 가꾸기를 진행했다. 현재 종영했다. 183
흰여울마을에 산다 _ 송정옥
없는 간장공장이에요. 지금은 뭐 오복간장, 샘표간장 이렇게 있는데 그 때는 집에서 간장 만들어가꼬 물동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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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집이 있어가지고 젊은 사람들 얘기 안 들어요.
우리 마을 공동체에서 감사 일을 하고 있어요 지금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지금은 우리 마을 공동체에 감사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장부를 잘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그런 감사겠죠. 그래하고 봉사할 일 있으면 나와가지고 같이 봉사하고 그런 겁니다. 같이 어우러져가지고. 지금은 흰여울마을이라고 많이 찾아와 주시고 하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도로명이 생기면서 흰여울길이 되다 보니까 이제 <무한도전>도 왔다가고 사람들이 많이 오다 보니까, 아 이제 흰여울길도 괜찮구나, 영도도 앞으로 괜찮겠구나, 인자 뭐 그런 생각하죠. 이 동네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나요? 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2) 그래서 2층 투어 버스, 만디버스 이렇게 배치가 되어 있고. 여기도 옛날엔 이송도 곡각지라고 나왔는데, 지금은 흰여울문화마을로 방송이 나옵니다.3) 그런 게 좀 변했죠. 요즘에도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편인가요? 네네 많이 오죠. 여름 같은 경우에는 구백 명, 천 명 정도. 주말에는 이렇게 왔는데 요즘에는 한 삼사백 명 이 정도 있어요. 뭐 평일에는 이백 명 정도. 아무래도 여름에는 휴가철이다 보니까 많이 오게 되죠.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인자 앞으로 또 많이 안 오겠습니까. 갑자기 동네에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주민들이 불편한 점은 없나요? 아직까지는 감천처럼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감천 같은 경우는 미로처럼 꼬불꼬불하고 막 이렇잖아요. 흰여울마을은 골목도 있지만 바닷가 길로만 다니니까. 쓰레기, 나이 드신 사람들은 그런 게 없는데 젊은 사람들은 요즘엔 커피 들고 다니면서 얘기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놔두고 가고, 그런 쓰레기 문제가 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여기 사는 사람들도 쓰레기를 버리겠지만. 그런 게 있죠.
2) 2015년 12월 경 TV방송을 통해 흰여울문화마을이 알려지게 되었다. 3) 2016년 여름 쯤 버스정류소 명칭이 ‘이송도곡각지’에서 ‘흰여울문화마을’로 바뀌었다. 185
흰여울마을에 산다 _ 송정옥
올해죠. 요번에 <무한도전>이 온 이후에, 경찰청 수사반장. 유재석이 옷 갈아입고 여기서 도망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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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아쉽다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떤 게 있을까요? 지금 제일 시급한 게 주차장. 왜냐하면 주차할 곳들이 없으니까 굉장히 불편해 하세요. 저희들이 미안쵸. 구경을 하러 왔는데 주차할 데가 없으니까. 어떨 때는 딱지 끊겼다 그런 얘기도 하고. 그러니까 굉장히 안 좋죠. 하루 속히 주차장이 개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마을에 주택들 말고 가게나 상점들이 좀 있었나요? 중간에 구멍가게 같은 거, 쪼끄만 거 있었죠. 지금은 많이 없어졌죠. 저 밑에도 있었는데 구멍가게가 다 죽어버려 가지고. 구멍가게가 안 돼요. 요즘엔 마트가 있다 보니까. 배달이 되니까 다 배달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쪼그만한 그런 가게는 다 죽어버린 거예요. 예전에는 저 위에도 반찬 부식가게, 시래기도 삶아묵고 그랬는데 그런 가게조차도 다 죽어버린 거예요. 안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전엔 반찬 가게가 군데군데 있었죠. 급하면 사다 먹고 그랬었는데 요즘엔 워낙 발달되다 보니까.
보통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제가 하는 직업이 있으니까. 풍물강사에요. 일주일에 두 번 강사 가야 되고 제가 배우는 학원이 있어요. 이제 무용 쪽으로. 무용 가야 되제, 봉사 가야 되제, 이러니까 정말 시간이 너무 아까울 정도에요. 너무 빨리 가는 거야 진짜. 어떨 때는 잠자는 것도 아까울 정도에요. 보통 사람들은 잠을 일곱 시간, 여덟 시간 잔다는데 저는 세 시간, 네 시간 보통 자는 게 그래요. 근데 어떨 때는 세 시간 자는 것도 아까운 거라. 빨리 이때 뭐를 해야 되는데 시간이 너무 잘 가는 거에요. 일주일 금방금방 가거든요. 뭘 더하고 싶어도 시간이 부족해서 못 가는 거예요. 풍물 강사는 어떻게 시작하신 거에요? 풍물은 오래되었죠. 우연찮게 장구를 하는 모습을 봤는데 제가 빠진 거예요. 그래서 배우러 갔죠. 그게 십사 년 전인데 이십만 원 줬어요. 학원비를. 일주일에 한 번이었어요. 그 때는 제가 저녁에 장사를 할 때라 시간이 안될 때는 한 달에 한 번만 배우러 갈 때도 있고 그랬어요. 그 땐 돈이 엄청 아까웠는데 어느 날 주민센타에서 이런 걸 한다 해가지고 나가게 되가지고. 지금은 강사로 하는 거죠. 무용은 검무, 부채춤, 절에서 하는 바라. 이런 거 다 하고 그럽니다. 한국 전통무용이죠. 양정 가서 배우고 있어요. 거제리까지도 갑니다 아침에. 아침 일곱 시 되어서 여기서 나가죠. 어떤 때는 바빠요. 새벽 다섯 시에 산에 갔다가, 학원에도 갔다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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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강사, 무용. 어떨 때는 세 시간 자는 것도 아까운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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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있으면 봉사도 와야 되고 그러니까 너무 시간이 잘 가요. 일주일이 금방 가버려요. 무용은 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무용도 오래됐죠. 십 년 정도. 지금은 선생님하고 같이 공연도 가고. 절, 복지관. 구포 열차 사고 났을 때 구포역에서도 했거든요. 그런 것도 보면 볼 만 합니다. 죽은 영혼들 추모한다고 바라도 추고 살풀이도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합니다. 추모제를. 산은 어디로 가세요? 봉래산이죠. 봉래산 한바퀴 돌면 한두 시간 걸리거든요. 봉래산은 코스가 여러 군데 있어요. 많아요. 저는 밧줄 타는 코스를 좋아해요. 바위 둘러서 그런 코스를 올라가서 한두 시간 돌다가 오고 하죠.
영도 할매가 욕심이 많대요 영도 할매가 욕심이 많대요. 봉래산 정상에 가면 바위가 있는데, 영도 할머니 바위라고 하더라구요. 전에는 몰랐죠. 거기 할머니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미륵처럼 할머니 상을 했는데, 우리 영도 사람들이 돈을 벌어가지고 밖에 나가면은 전부 다 못 산대요. 왜 영도에서 돈 벌어서 밖에서 쓰냐. 해코지한대요. 해코지해서 영도 사람들이 실패해서 다시 영도로 돌아온대요. 그래서 그 미륵보살을 뿌사버렸대요. 그 자리에 보면 바위가 있어요. 그 바위를 봉래산 영도 할머니라고 모시고 저도 한 번씩 갑니다. 일 년에 한 번씩. 그리고 조내기 고구마. 조내기 고구마라는 게 옛날에는 피난민들 먹고 못살 때 초량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가지고 심어가지고. 영도산 일대 여기가 고구마 밭이랍니다. 조내기 고구마. 그래서 영도는 조내기 고구마. 관광객에게 흰여울문화마을은 언제 오면 가장 멋진지 추천하고 싶은 때가 있나요? 각자 나름 틀리겠지만, 밤 야경이 나름 괜찮지만 노을질 때. 노을질 때, 해 떨어질 때 그 때가 참 멋있어요. 너무 아침이나 이럴 때 보다는 다섯 시, 여섯 시 이럴 때. 그럴 때가 참 좋아요. 노을이 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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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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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해서 좋다고 그러는데 진짜 사람이 없어서 조용한 거예요
김병호
1991년 영도 청학동으로 이주 2001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주 2003년 이송도로 이주 현재 영도 마을의 유일한 교회인 금 성교회를 다년간 운영하고 있는 김 병호 목사는 예상보다 훨씬 젊고 에 너지가 넘치는 분이었다. 질문에 조 목조목 대답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었다. 교회 성도들은 물론, 나날이 줄어드는 지 역 주민의 생활까지 두루 살피느라 유일한 취미생활인 목욕탕에 가는 것조차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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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교회에 청빙 받아서 온 게 14년 되어가네요 고향이 어디시죠? 원래 고향이 밑에 있는 경남 고성군 하일면입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거기서 살았고, 고등학교는 진주로 나왔고, 대학은 부산에서 다녔고. 군대 생활을 6년 정도 포항에서 했습니다. 직업군인이었죠. 마을에 오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제가 원래 청학동에 전도사로 칠 년 정도 있었어요. 효성교회에서. 그러다가 제가 분당에서 부교역자 사역이라고 부목사로써 있다가 여기 담임으로 청빙1) 받아가지고 지금으로부터 십삼 년 전, 이제 십사 년 되어가네요. 여기 금성교회에 청빙 받아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건물 두 개 밖에 없었죠. 본당 하고 여기. 지금은 한 열두 개 정도. 아마 올 연말에 새로 짓게 될 겁니다. 조감도가 나왔는데 7층 건물로. 흰여울마을 사무실과 협력사역을 좀 할려고 그래요. 오시는 분들에게 영상도 틀어주면서 흰여울마을의 배경에 대해 설명도 좀 하고. 갤러리도 만들어서 사진 전시도 열고 여러 가지 다양하게 구청과 협력해서 일을 좀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오셨을 때는 마을 분위기가 어땠나요? 초반에는 여기가 많이 슬럼화, 낙후된 지역이죠. 그래도 사람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거의 없죠. 한동안은 뉴타운 개발을 한다고 해놓고 전혀 개발을 못하게 되니까 손도 못쓰고 더 어려워진 상태. 어쩌면 부산 중에서도 영도가 많이 낙후되었고, 영도 중에서도 영선동 일대가 좀 많이 낙후된 상태였죠. 경관은 어느 지역보다도 좋은 경관을 가지고 있는데. 도시가 촌보다도 못 하구나 싶었죠. 그 정도로 여건이 참 힘들었어요. 제가 분당에서 살았거든요. 천당 다음으로 좋은 곳이 분당이란 말이 있거든요. 그런 환경 여건, 주택, 주거, 교통이 좋은데 있다가 이런 데로 오니까 적응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촌에서 자라다 보니까 결국 적응은 하지만.
금성교회는 교목으로 계셨던 분이 이북 분들과 함께 개척하셨어요 성도들은 대부분 여기 지역 주민분들이세요? 지금은 한 육십에서 칠십 프로가 여기 주민이라고 볼 수가 있죠. 그 외 삼십 프로는 동삼동이라든지 시내 쪽에 있고. 여기 교회가 육십삼 년이 되었어요. 6.25 전쟁 이후에 53년도에 여기가 개척이 되었어요. 1) 부탁하여 부름. 교회에서 목사를 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192
연세대학교 분교가 여기 테크노고등학교에요. 그때 교목으로 계셨던 분이 이북 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 하셨어요.2) 영도에 교회가 한 육십 개 가까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쪽 비탈 지역에는 여기밖에 없죠. 다른 교회보다 성도 분들이 연령이 좀 있으신 편인가요? 아무래도 연세 드신 분들이 많다고 봐야죠. 그때 이북 분들이 오셔가지고 1세대는 거의 돌아가시고 지금은 2세대 분들이고 외부에서 많이 유입되게 되었죠. 현재 교회 성도님들도 많은 편이가요? 다행히 성도님들은 많이 늘었습니다. 한 이백 명 정도. 지역주민들은 많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젊은 분들은 이사 가고 그런데 외부에서 이사 오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어요. 막상 살라고 하면 비싸고. 왜냐하면 문화마을이라고 하니까. 혹시나 해서 일부러 안 팔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은 안 사는데 집은 계속 무너지고 있고. 하루 종일 여기 있어도 사람 지나가는 거 구경하기가 힘들어요. 제가 청학동에 올 때만 해도 영도 인구가 하나가 된다고 그러는데. 조용해서 좋다고 그러는데 진짜 사람이 없어서 조용한 거예요. 교회 성도님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세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다양한 분들이 많이 있어요. 고신대학교 의사 선생님도 계시고, 부산에서 알아주는 신발회사 대표도 계시고, 김비오 씨라고 김무성 씨와 같이 국회의원 도전장을 냈던 김비오 위원장님도 우리 교회 집사님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는 구십사 세 되신 할아버지만 세 분입니다. 여자는 구십일 세가 최고 많은데. 구십 세 넘은 사람이 대여섯 명 되요. 여기서 목사님으로 계시면서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다면요? 지역 주민들을 돌보게 되면서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들,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때가 제일 기쁘고 즐겁죠. 왜냐면 이 지역은 특히 도움의 손길이 참 많이 필요해요. 독거노인들이 많이 있고, 빚이 많은 사람들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을 파산할 수 있도록 해서 면책 당할 수 있도록 그런 일도 했었고 어르신들도 6.25 참전이라든지 그렇게 사셨는데 보상을 못 받아가지고, 보상 받을 수 있는 절차를 도와드리고 연금을 받게 만드는 그런 일도 있었고, 또 어르신들 일자리 창출, 일하실 수 있게 돌보는 사역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보람된 일들이 많았죠. 원래 목사는 교회의 일인데 지역주민들을 섬기는 일, 그게 좋게 소문이 나서 지역주민들이 많이 오시게 된 것 같아요. 2) 금성교회는 1953년 이북 피난민들이 개척한 교회라고 한다. 193
흰여울마을에 산다 _ 김병호
이십삼만이었어요. 지금은 십사만. 십만이 빠져버린 거에요. 십만이면 시 인구가 빠져버린 거에요. 육만이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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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보는 사람들은 좋아하고, 피해 입는 사람들은 힘들어 할 수도 있어요 마을에 관광객이 많이 오는데 지역 주민들은 불편한 점은 없는지 궁금하네요. 두 가지의 반응이 있어요. 처음엔 모두가 좋게 반응을 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 실제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좋아하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힘들어 할 수도 있어요. 아직까지는 그렇게 감천이라든가 동피랑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도 제가 볼 때는 아주 좋다고 생각을 해요. 지역이 알려지고 또 외부사람들도 찾아오게 되고 지금은 문화적인 사역공간이 좀 적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그런 일들을 좀 해보려고 하는데 당장 주차문제도 어떻게 해결이 안 되니까.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은 어떤 점들을 불편해 하실까요? 쓰레기통 이런 게 전혀 없거든요. 그런데 있으면 주민들이 더 많이 갖다 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분들이 잠을 파하게 되는 그런 경우도 간혹 있고, 세 번째로 어느 지역은 해택을 보는데 어느 지역은 해택을 못 보니까, 지원이 좀 되어가지고 대대적으로 뭔가를 하면 참 좋죠. 그러나 국가적인 예산을 그렇게 끌어당긴다는 것이 쉽지는 않고, 또 어중간하게 해서는 사실 표시도 잘 안 나고. 근데 연세 드신 분들이 다니기에는 참 힘들어요. 길도 가파르고 계단도 많고.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오기도 하지만은 실제 연세 많으신 육십 대 이후의 분들도 와서 보시고 하면 참 좋은데. 장애인들도 보러 오기엔 힘든 곳이죠. 혹시 흰여울문화마을이라고 그러니까. 장사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오는데 잘 안 돼요. 관광객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지역주민들은 거기 갈 형편이 안 돼요. 저기 위에 식당도 있고 저도 몇 번 가보긴 했는데 지역 주민들이 거기 갈 형편이 안 되는 거예요. 외부에서 와서 뭔가 해볼려고 하는데도 잘 안 돼요. 이 쪽 상권이 다 죽어버렸어요. 감천문화마을 정도 된다 그러면, 차라리 관광객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데 토요일 일요일에나 관광객들이 조금 오지, 평일에는 또 드물거든요.
목욕하는 게 취미인데 여유가 잘 안되네요 목사님 현재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아담한 사이즈의 우리 예쁜 집사람하고 아들 한 명 있습니다. 아들은 제 뒤를 이어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대학원 일 학년 다니고 있습니다. 나이는 스물다섯 밖에 안 됩니다. 올해 5월 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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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안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어요. 또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니까 저녁에 일하고 낮에 주무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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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했습니다. 한 살 많은 누나와 파격적으로. 저도 좋습니다. 일찍 장가를 보내서 내년 되면 할아버지 됩니다. 결혼하고 두 달 만에 애기가 들어섰어요. 요즘 같이 결혼을 못하는 여자들 남자들 많고, 결혼 못시키는 부모들도 너무 너무 많은데 생각 외로 좋은 며느릿감이 나타나가지고 일 년 동안 사귀다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장가를 일찍 갔기 때문에. 제가 집 사람하고 스물여섯에 갔어요. 집사람이랑 동갑내기로써. 근데 우리 아들은 일 년 더 빠르게 갔습니다. 목사님께선 일과 중에 취미생활도 좀 하시나요? 사실 취미가 있는데 취미 생활은 잘 못합니다. 목욕하는 게 취민데. (웃음) 근데 목욕탕 가는 게 시간이 아까워서 그럴만한 여유가 잘 안 되네요. 거의 새벽 네 시 쯤 일어나면 저녁 열 시 쯤 자게 되니까. 새벽기도부터 시작해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신방하고, 봉사하고 이런 일들로 하루 일과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목사만큼 편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고 얘기하지만, 제가 볼 땐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죠. 또 여기 지역 어르신들도 섬기는 사역도 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원래 고향이 바닷가 쪽에 살았어요. 걸어서 십 분이면 바닷가를 일 년에 열 번도 못 내려가는 것 같아요. 여기 십삼 년 있으면서 낚시 딱 한 번 했어요. 여기 앞에서 구경만 많이 합니다. 운동도 잘 못해요. 여기 십삼 년 살면서 봉래산도 다섯 번도 못 올라 간 것 같아요. 일 년에 한 번도 못갔죠. 이삼 년에 한 번 갔을 정도로.
영도 사람이 영도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 시스템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영도가 대표적인 고령화 도시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애들은 많이 줄었어요. 남항초등학교 학생들이 전엔 여섯 반 되었다던데 지금은 두 반인데, 한 반에 스무 명밖에 안 된대요. 전체 학년이 사십 명 겨우 된대요. 우리 시골에 있을 때만 해도 한 반에 오십 몇 명 되었었는데. 우리 교회도 애들이 없어요. 제가 올 때만 해도 애들이 골목에 조금 보였어요. 지금은 거의 천연기념물이 되어가고 있어요. 특히 부산은 신고령화 도시 그리고 오 년만 더 지나면 초고령화 도시. (웃음) 부산 중에서도 영도가 좀 심한 편이죠? 부산에서도 영도가 노인인구가 제일 많다고 그래요. 부산이 아니고 전국에서 세 번째로 많다고 그래요. 저출산도 심각하죠. 젊은이들이 여기 잘 안 살라고 그래요. 먹고 살 수 있는 직장이 여기 거의 없잖아요. 어른들은 그래도 고향에 대한 애착이 있어요. 자녀들은 그런 거 별로 안 따지고. 직업 따라서, 직장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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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있고. 옛날 어릴 때는 나가서 고동도 많이 잡고 조개도 잡아오고 문어, 낙지도 잡았는데 여기 와가지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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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군 따라서 영도의 브랜드가 옛날부터 썩 좋은 브랜드는 아니라고 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디 가서 너 어디 사냐 물어보면 영도 산다는 말을 잘 안 한다 그래요. 영도 산다고 그러면 좀 어려운 사람들, 뱃사람 또는 섬사람. 어른들은 섬을 떠나면 안 된다는 미신적인 그런 것 때문에 안 나가고 있고, 자녀들은 벗어나려고 그러고. 토속신앙의 영향이 좀 있나요? 그런 것도 좀 있죠. 그런 토속신앙들은 어차피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교회가 들어서고 많이 복음 전하고 하면서 깨진 부분도 있지만 지금도 어르신들은 이중적으로 많이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죠.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 그 외에도 다른 종교들도 여기엔 워낙 많아요. 워낙 이 지역이 토속적인 신앙이 있다 보니까. 바닷가를 끼고 있으면서 좀 개방된 사람들은 극히 드물죠. 아무래도 폐쇄적이라고 보죠.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요? 어르신들 복지비가 사실 많이 나가요. 구청 전체 예산의 오십 프로가 복지비로 나갈 정도로. 노인이 젊은 사람들이 와서 애기를 가졌다 그러면 몇백만 원 준다고 그래요. 근데 엊그제 누가 며느리가 아기를 가졌다고 그래서 이십만 원 나왔다 그래요. 애기를 많이 나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에 대해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기 머물기 힘들다는 것이죠. 젊은 사람들에 대한 투자도 많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사실은 여기 동삼동에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놨지만은 실제 외부사람들을 채용해 버리니까. 영도 사람들을 몇 퍼센트 할애해서 채용할 수 있고 영도에 정착할 수 있는 시스템 제도를 만들어야 해요. 영도도 좋은 인재들을 위해서 많이 투자는 하는데 실제로 그 사람들이 여기 안 사니까. 그런 고급된 직장도 필요하지만 여기 수준에 맞는 직장도 만들어 줘야 하는데 너무 고급인력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따라 왔지만은 여기에 과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요즘 또 교통이 얼마나 좋습니까? 해운대까지 오 분이면 가버리는데 다 차타고 거기로 가버리지 안 그래요? 빨리 주거 문제도 해결되어야 되고 직장 문제도 해결되어야 되고, 영도 사람이 영도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 시스템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실제 좋은 시설들은 만들어 놓고 인재들은 바깥으로 다 빠져버리게 되고 그런 게 쪼끔 아쉽죠. 꼭 내가 구청장 같네. (웃음) ※ 2018년 현재 금성교회는 건물을 새로 짓고 있으며 마을과의 공존을 도모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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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마을에 산다 _ 김병호
많으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젊은 세대와 아이들에 대한 지원이 힘든 거에요. 시골 같은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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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 내 목소리 듣고 야옹한다 아이가
김갑숙
1962년 밀양 출생 1964년경 영도 신선동으로 이주 1971년경 이송도로 이주 흰여울문화마을의 고양이 엄마 김갑 숙 님. 그는 집을 몇 채 갖고 있는데, 한 채는 아예 고양이들에게 내어주 었다. 인터뷰 약속 시간에 맞춰 댁으 로 찾아갔을 때 골목에서 길고양이 들을 돌보고 계셨다. 젊은 시절을 씩 씩하게 살다가 지금은 온 동네 길고 양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마을에도 다양 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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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간 흰여울마을에서 살아온 동네 지킴이 고양이들을 몇 마리나 돌보세요? 안에 있는 거만해도 여덟 마리. 바깥에 아아들은 밥 주고. 내 목소리 듣고 온다 아이가. 근데 안 줄 수가 없어요. 아까 봤지예? 고양이들, 내 목소리에 야옹한다 아이가. 언제부터 돌보셨나요? 지금부터 한 사오 년 됐네. 저 까만 기 삼세대1)입니다. 다 죽어가는 걸 살맀으예. 그냥 살릴 수 있나. 돈 어마어마 들었어. 저 집에 있는 아아들 병치레를 너무 많이 핸거라. 몇 천은 날라 가고. 보험도 안 되고. 입원 시키는 데 하루에 네 마리 사십만 원. 요만한 거를 갖다가. 한 마리 십만 원씩. 겨우 살리가 지금 이래 큰 겁니다. 이것도 놔놨으면 죽었다. 죽은 걸 보니까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여기까지 온 거라 내가. 돈은 뒷전이고 어쨌든가 이 아아들 내 안 먹어도 일단은 살리고 보자 한 기 여기까지 왔는데 사람들이 욕을 많이 해요. ‘돈을 그리 들어가면서 미쳤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예. 오늘 손님들 오신다 해서 요 밑에 언덕에 모래 걷고 물청소를 합니다2). 냄새 난다고. 그러니까 내가 몇 배로 댄 기라. 다른 데 갈 수가 없어. 이 아아들 땜에. 옛날에는 드레스 입고 놀러도 다니고 이랬거든. 진짜다. 그랬는데 지금은 아예 오라해도 “안 된다, 바쁘다” 하고 안 나가예. 술도 안 묵고. 술 안 무지데. 이 마을에는 언제부터 살고 계십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국민학교 삼 학년 땐가 사 학년 때 이리 넘어왔는데 원래는 제가 태어난 곳이 밀양입니다. 밀양 수산, 대사동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서 내가 태어나가지고 두 살, 세 살 땐가 부산을 내려 왔어예. 내가 이 동네에 지킴이 아니가. 그니까는 내가 오십다섯이니까는 한 오십 년 되네요. 신선동 동사무소 바로 마주 보는 데가 옛날에 우리집인 기라. 거서 좀 지내다가 이송도로 넘어 왔어예. 나는 신선국민학교인데 여는 다 남항국민학교. 그때는 라이벌, 적이 많았는 기라. 우리 동네 오지 마라 하는 거 옛날엔 그기 많았어요. 난 신선국민학교니까 경계를 많이 하더라고. 신선국민학교 졸업하고 영도여상3). 왜 거기를 들어갔나 하면 내가 차를 못 타예. 한 정거장만 가면은 멀미를 해서 어디 가지를 못했어예. 저 밑에 로타리까지 가는 데도 못 가서 일부러 요를 지원했어예. 고등학교 실습했던 회사를 다닜는데. 한 십 년 다니다가 그만 두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입니까. 우리 삼촌이 오라 해가지고. 그때는 친척방문이 삼 개월을 해 줬어예. 비자. 지금은 얼마나 해주는지 모른다. 1) 김갑숙씨와 같은 집에 사는 고양이들은 3대째 살고 있고, 다른 집 고양이들은 1, 2대째 살고 있다. 2) 담벼락에 벼랑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그 자리에 고양이들의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다. 3) 현재의 부산보건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79~2001년까지 영도여자상업고등학교였다. 202
운전이 자랑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랜다 어릴 때 여기 살면서 좋았던 기억 말씀해 주세요. 저는예, 여기 기억이 거의 없어요. 왜냐면은 일본을 왔다갔다 다니다가 그라고는 회사를 다니는데 나는 똑 남자 홍길동입니다. 나는 남자들 많은 데 간다. 범아공사라고 있거든요. 지금은 해체됐다 하더라고. 회사를 없앨라면은 너무 서운해가지고 지금 중앙동에 동아 뭔가 있더라. 거기 보니깐 범아상사라고 자치회를 만들었더라고.4) 옛날 그 직원들이 다 있더라고. 반가워가지고. 어디서 또 만났냐면은 자갈치 냉동고에 있었거든요. 나는 출고하러 다닙니다. 고기 빼러 다닌다고 내가. 트럭 하나 몰고. 부산 시내 냉동회사 가면은 전부 다 남자들 아이가. 또 컨테이너 아이가. 내가 또 옛날에 회사 다닐 때 컨테이너 거기거든. 컨테이너 남바 타이피터5). 물량 검수하고. 본사에 또 들어가면 부산 페리 매일 출근하고. 옛날에 그래 십 년을 회사 다닜어요. 집에 하고는 가까이 못했지. 바깥을 많이 돌아다닜으니까. 일을 하나 안 하나, 바깥의 일이든 집의 일이든 한시도 안 쉬거든. 그기 내 성격인가 봐.
나는요. 옛날에 취미가 여군 되는 거 있재. 그라고 남자들 휘어잡는 거, 태권도를 배우고 싶대. 태권도를 못 배았는 기라. 회사 다니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내가 운전을 배았는데 그때는 여자들이 운전하는 사람 없었어예. 89년도에 운전했으니까. 내 보고 욕 억수로 했다. 집에 청소나 할 것이지 차 몰고 나온다고. 지금은 운전은 내 자랑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랜다. 그만큼 오래 됐잖아. 운전 실력이라면 마 여자 같이 (두 손으로 운전대를 잡는 시늉을 하며) 이래 안 하거든. 터프하게 하거든. 다다다다 닥닥닥 이래뿌리거든 내가. (웃음) 내 차 타면 처음에는 막 손잡이 꽉 잡고 사람들이 “좀 천천히 몰아라.” 한다. “그래도 손님 탔다고 천천히 모는 건데요.” 이라고. 내 혼자 타면은 좀 와일드하게 스릴 있게 탄다. (부끄러워 하시며) 이래 앉아 이야기 하는 게 내 자랑 같네.
사람한테 치이고 당해서, 죽어가는 고양이 살리다가 마음이 가뿌대. 평생을 자유롭게 살다가 길고양이를 돌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계기가 있는 게 아니고.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사람들을 난 완전히 믿어버렸어요. 그게 탈인 거라. 그게 내 미쓰(실수)인 기라. 나는 속을 다 드러내죠. 그걸 사람들은 역이용하대. 내 맘 같지가 않는 기라. 지금에 4) 1958년 합자회사 법인공사로 법인 설립되어 검수 업무를 하는 회사. IMF 시기 부도가 난 후 1998년 임원진과 노조원들이 범아상사를 설립했다. 현재 중앙동 동아일보사 건물에 있다. 5) 컨테이너 넘버를 기록하는 업무담당자를 지칭하는 듯하다. 203
흰여울마을에 산다 _ 김갑숙
성격이 씩씩해 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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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야 사람을 좀 멀리 하자 하고 산 기. 어찌하다 보니 고양이를 갖다가 이기. 고양이가 요만한 다섯 마리가 놔놓으면 다 죽는 기라. 마 그 마음이 다 가뿌대. 데리고 왔다 아이가. 돈이 너무 물 새듯이 많이 들어서. 도저히 이래가 안 된다 싶으더만은. 그란데 아아들 내보낼라 해도 도저히 그게 안 되더라. 여름이라고 바깥에 내놓으면 저거들 들어온대이. 아까 문 열어놓고 “들어와.” 하니까 아, 들어오더라 아입니까. 저거 집인 걸 아는 기라. (싱크대 위에 겁 먹은 눈으로 앉아있는 고양이를 부르며) 재롱아, 내려온나. 괘안타. 이 아아가 요만한데 지가 스스로 왔겠어예? 아니잖아예. 우리 개가 막 짖는 거라. 바깥에서 개가 세 마리가 짖고 있는 기라. 화분 옆에 요만한 게 있는데 보니까 이거라. 누가 갖다 놨는 거라. 누가 지 발로 왔겠노. 와가지고 요 앉아 있겠노. 그래 우짜겠노. 안 되가지고 또 키안기 이렇다 또. 누군가 동물은 말을 다른 데 옯기지 않아서 좋다 하시더라구요. 내 마음을 이래 막 이야기하고 이라잖아예. 기왕에 털어놓으면, 편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게 내 마음이고. 사람은 이야기를 옮기는 기 탈인 기라. 우리는 요서 이야기 끝내버려요. 내 성격에 솔직한 이야기를 확고해도 안 되잖아. 전에 같으면 친구들 하고 여섯 명, 다섯 명이 계를 하잖아예. 딱 모이니까 고스톱을 하대. 난 안 해요. 누구 신랑은 뭐 어떻고 하면은 난 그거를 딱 회피해 버립니다. 나는 그런 걸 안 들어요. 만약 들었다 해도 그런 거 흘려버리고.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여자 친구들 하고 내 하고 차이점인 기라. 그라니까 애들이 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기라. 남자 친구들은 많으신가요? 남자 친구는 어마어마하게 많고. 만인의 애인인 기라 내가. 냉동 회사 가도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하면 사람들이 “와.” 하고 반기고. 세월이 흘러도 내 이름 아는 사람이 있을 기라고. 어느 수산에 누구 아무개 아느냐고 하면은 안다 말이야. 들어갈 때부터 내가 “(얌전하게) 안녕하세요.” 이래 하는 기 아니란 말이야. 나는 집에서 무슨 일이 있어 괴로워도 딱 거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얼굴을 활짝 펴고 웃잖아. 세월이 지나고 한 십몇 년 지나고 몇 군데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는 갑숙 씨가 참 우리한테 엔돌핀이었다.” 딱 정해져 있는 시간에 출근해가지고 일하고, 점심 묵고, 또 참 묵고, 또 일하고 이래 일상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내가 유일하게 환하게 해 주면은 저그들한테 엔돌핀. 갑숙 씨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다는 기라. 난 그걸 몰랐지. 근데 저거들이 그래 이야기를 합디다. 내 속으로 내가 그런 면도 있었는가 하고 인자는 느끼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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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요. 그기 내 스타일인데. 너무 여자가 이래도 안 되는갑대. 맞지예? 너무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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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어른들도 하나하나 돌아가시고, 내가 꼭 왕초 같애. 가족, 친지들도 여기 사시는 분이 있나요? 일 남 이 녀. 삼형제인데 우에 맏이가 언니고 그 밑에가 오빠고 내가 막내입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 안 와예. 내 나름대로 고충이 있는 거지. 근데 나는 마냥 엄마하고만 살 것 같았어예. 나는 시집 안가고 엄마하고 살 거라고 내 머리에 배긴 거라. 늘 엄마하고 동고동락했으니까. 엄마 젖을 내 여덟 살 때까지 먹었다. 하도 안 떼길래 엄마가 빨간약, 아까징기를 젖에다 발라가지고 피라 그라고. 그때부터 내가 안 먹었다 안 하나. 엄마가 내 옆에 있을 줄만 알았는데. 밖에 나가서 일하라 하면 억수로 빨리 하는데 집안일 하라면은 나는 못 하는 기라. 안 해봤으니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단지 하라면 청소 그거 좀 하지만 다른 거는 딱 엄마가 입에 넣도록 만들어 놔주니까 못하는 기라. 나는 늘 엄마랑 같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래 돌아가실 줄 생각 못 했거든. 엄마가 2000년도에 가싰으니까.
제가 유일한 지킴이입니다. 내 또래 친구들은 여기 지금 없어. 공기놀이 하던 친구들, 라면땅 하던 친구들 다른 데 시집가서 살고. 한 번씩 들어오거든. 자주는 아닌데. 가뭄에 콩 나듯이. 오랜만이네예 하고 인사하고 넘어가 버리고, 그냥 가버리고 안 온다. 내가 유일하지. 인자는 아지매들 아저씨들 하나하나 다 가고 그라니까네. 내가 꼭 왕초 같애. 오래 있다 보니까 할매들 한 분 한 분 다 가시니까네 없잖아.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분 안돼. 원래 저 옆집에서 사셨어요? 우리가 저기서 컸거든. 이 집은 경매 넘어가는 집을 샀는 기라. 저는 살고 이 층에서 제사를 지내고 여는 좁으니까는. 엄마가 그라대. 나중에 여유가 되면 밑에 집을 찾아가지고 제사를 거다 모시라고. 계단 올라가고 내리가고 하면은 불편하다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엄마 돌아가시고 첫제사 돌아오는 날에 누가 시키서도 아니고 이 집을 샀지. 요 보니까 저저 신줏단지 세존할매6) 거든예. 우에 모시다가 밑에 갖고 내리왔는 기라. 갖고 내리오면서 우에서 지내다 밑에서 지낸다고 신고식을 하고 다 했는 기라.
6) 불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가정에서 시준, 시주 등으로 불리며 모셔지는 신. 특히 ‘세존’이라는 명칭과 세존신앙은 경상도지역에 강하게 남아 있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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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릴 때 친구 분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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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 있는 단지가 그런 거였군요. 세존할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쌀을 넣어놓지. 그래 수리해서 엄마 첫제사 때 딱 하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아이가. 첫제사 때 큰방도 제사 지내기 널널하다 아이가. 사람들 그리 많이 왔는데도 좀 모지라다 싶으니까 밖에 나와가 있으니깐은 경치 좋재 마. 내가 볼 때 엄마가 마음에 든다 이래 했을 거라.
억만 금을 주더라도 아파트는 안 가고 싶다. 억만 금 주면 좋지만은 흰여울문화마을이 되고나서 그 전과 다른 게 있습니까? 많이 다르지예. 흰여울문화마을 이거 일 년이 넘었나? 일 년 됐지예? 거 하기 전까지는 조용했으예. 어느 날 갑자기 시끌벅쩍 하고 조금만 뭐 하면은 행사한다 하고 이라니까 이 사는 우리는 많이 불편해예. 그라고 나는 방에 있는 시간보다도 바깥에 일을 많이 하니까는 우리 저 집에 문을 열어놓고 청소를 해야 되는데 단체로 사람들 지나가잖아. 나는 또 내 체면에, 관광객들이 오는데 냄새나면 안 되고 문을 열 수가 없잖아. 애로가 입장이라. 빨리빨리 하고 치우고 정리하고 물청소 하고 해야만이 나는 한시름 놓고 다문 테레비라도 본다는 그게 다인 기라 내 하루 일과라. 많이 불편하더라. 여기는 언제가 제일 좋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 하고 생각이 다른데. 아침이 좋아. 이른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아침에 와. 비가 올 때 그때 보면은 뭐가 억수로 기분이 묘한 거 있죠? 나는 그걸 느끼겠대. 좋대. 같은 비가 아니라. 안개가 자욱하게 비가 좍 오는 거 안 있나? 우리집 앞에는 나무가 있잖아. 엄마 집일때부터 있었는데. 난 나무가 있는 게 좋대. 또 앞집이 있는 게 아니고 확 트있잖아. 담벼락이 있고. 내가 나가서 뭘 하든. 간섭할 사람 없으니까 그기 좋은 기라. 또 아파트에는 들어가면은 딱 갇히가 있다는 그게 나는 싫대. 억만 금을 주더라도 나는 안 가고 싶다. 억만 금을 주면 좋지만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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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라. 지나가면 한참을 지나 간대이. 사람들이 많이 오더라고. 그 사람들 지나가기를 나는 기다리야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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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에서는 김영희라 그래요 젊었을 때는 굉장했죠
김옥례
1924년 서울 출생 1992년 이송도로 이주 인터뷰 약속이 갑작스레 취소되어 고민하던 중 우연히 골목길에서 인 상이 좋은 한 할머니를 만났다. 그 자 리에서 인터뷰를 제안했음에도 흔쾌 히 수락해주시고 할머니 집까지 가 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은 우 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 편집기사 인 원로 영화인이었다. 화려했던 지 난 삶과는 달리 작은 마을에서 일상 을 이어가고 있지만 지난 기억을 되 살릴 땐 아득하고 기분이 좋다고 하 신다. 한국 영화사의 일부를 마주한 운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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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동안 영화 편집을 했어요. 시부모님들을 모시다가 여기 살게 되었어요 제 이름이 민적으로 김옥례. 구술 옥, 예도 예자. 구십 세 살이에요. 영화계에서는 김영희라고 쓰고요. 저는 영화 편집을 말이죠. 한 삼십 년 이상 했어요. 내가 오십몇 살까지 했으니까. 혼자 사십니까? 아까 그 사람이 도우미인데 와줘요. 일주일에 월화수목금 닷새를 오는 거예요. 아까 그 양반이 도우미로 왔다갔다 하는데 음식 같은 것도 만들어도 주고. 한 달에 얼마를 내가 내요. 목욕도 같이 가고. 다리가 안 좋아서요, 지팡이를 짚고 교회를 나가는데 택시로 왔다갔다해야 되거든요 저는요. 교회차를 이용하라 그래도 남들 여럿이 타는데 내가 나 하나 탈라고 그래 애를 쓰는 것보다는 택시 타고 다니는 게 편할 것 같아서 택시로 왔다갔다 해.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되신 거예요? 남편이 살아계실 때 어머니 아버지 다 살아계셨거든요. 시어머니 시아버지가요. 시아버지가 아퍼서 제가 병원에서 한 달 동안 모셨어요. 돌아가시고 나는 서울로 다시 돌아가고 우리 영감은 90년도에 와가지고 인제 시어머니를 모시느라고. 그러고 있다가 내가 91년, 92년 쯤 되서 내려왔어요. 서울집을 팔고. 시어머니도 구십에 돌아가셨거든요. 내 나이가 칠십이었거든요. 참 어려웠지만은 그래도 어머니 계시니까 좋더라고요. 그랬다가 돌아가셨어요. 시부모님들이 영도에 사시던 분인가요?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 피난 와서. 원래는 집을 안 짓고 아주 형편없이 그랬는데 내가 편집하면서 돈을 보내드려서 집을 만들었어요. 삼 층을 지어놨는데 삼 층은 그 때 돈으로 이백팔십만 원 벌금을 물었어요. 그래서 인제는 완전히 허가 나고. 우리 영감이 어머니보다도 먼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딱 두 남매를 낳았는데요, 두 남매가 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다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내가 그랬거든요. “인제는 아범이 보기가 싫어요. 요번에 내가 미국을 가니까 미국 여자 하고 좋아 지내고 있는데 그걸 보니까 약이 올라서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기냥 왔어요.” 미국에서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는 아들 죽은 줄을 모르고 돌아가셨어요. 그럴 정도로 내가 어머니한테 참 잘했지. 영화계에서요, 내가 편집을 하다 보면은 가난한 것도 있고 부자도 있고 질투도 있고 뭐도 있잖아요. 이런 거로 스토리를 만들라니까 힘이 들더라구요. 이렇게 살아야 좋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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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겠다 항상 그런 게 느껴지더라고. 생활은 어떻게 꾸려가고 있으세요? 삼 층은 세 주고, 밑에 세 줬는데 보증금도 안 받고 한 달에 십오만 원씩 밖에 안 받아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이십만 원 주는 노인연금. 그걸로 살지요. 조카사위가 가끔 가다가 돈을 좀 보내주고. 그런 거로 살지요, 뭐. 노인네가 얼마나 돈을 쓰겠어요. 옛날에는 돌아다니면서 쓸 일이 있었지만. 저는 일본으로, 미국으로, 중국으로 안 가본 데 없이 다 다녀서 원은 없어요. 지금 죽어도 나는 원은 없어요. 진짜 재미나게 살았어요.
<춘향전>, <열녀문>, <동백아가씨> 다 내가 편집했어요. 지금은 다 소용 없지만요 영화일은 몇 살 때 시작하셨나요? 한 이삼 년 있다가 해방 되서 공보부로 갔죠. 공보부에서 편집하다가 그 다음에 거기서 미공보부1)로 갔어요. 피난 내려가서 있을 때 진해 가서 있다가 상남으로 갔어요. 아주 시골 그런 데로 가서 있었어요. 한 십 년을 미공보원에서 있었어요. 그랬다가 다시 올라와서 편집을 했어요. 그래 인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2) 그게 일본에서 영화제 때 편집상 탔어요. <열녀문>3) 그거 제 2회 여기서 타고. 또 하나는 여성영화인 모임에서 공로상을 타고 그래요. 그런 것밖에 없어요. 자랑할 게 하나도 없어요. 같이 일하셨던 감독님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그때는 감독들. 신상옥, 옛날일 자꾸 말이 안 나와요. 감독들 이름을 죽 알고 시나리오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영감이 시나리오고 뭐고 다 없애고. 내가 편집을 하니까 밤을 새고 들어오니까 그게 싫어가지고. 한국 영화사에서 귀한 자료인데. 진짜 그거는 놔두면 좋은 건데 갖다가 그래. 공무원으로 있었거든요. 할아버지가. 그랬기 때문에 저는 밤을 새우고 극장에 날짜 잡아 놓으면은 그 날짜에 채워줄라고 편집을 하고 막 바쁘게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걸 잘 모르시니까. 시나리오고 뭐고 다 모아놓은 걸 다 버리고.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거를 놔둬야 1) 구술자는 미공보원과 미공보부 두 가지 명칭을 다 사용했다. 미공보원이 정식 명칭이라 할 수 있다. 2) 1978년 조문진 감독 작품 3) 1962년 신상옥 감독 작품. 이 작품으로 제 2회 대종상에서 편집상을 수상하셨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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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무 살 때. 스무 살에 학교 나와 가지고 일제시대 때 조선영화사에 입사했었어요. 그래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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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될 텐데. 진짜 우연히 여러분들 만나게 됐어요. 저 여기서 있을 때 인터뷰 많이 왔어요. 많이 와가지고 교회에서 인터뷰 하고. 또 내가 수영장에 다닐 때 수영장에서 인터뷰 하고 막 그래서 그 사진들 다 가져가고.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팔십 아홉, 구십 살까지 씽씽했는데 지금은 다리 땜에 아주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그렇게 됐어요. 편집하면서 추울 때 일제시대 때 춥잖아요. 그럴 때 앉아서 찬 데서 편집을 하고 앉았으니까 힘이 들어가지고 다리 수술을 네 번이나 했어요. 편집하시는 거 좋아하셨나 봐요. 그렇게 오래 동안 하셨으니. 네. 참 좋아했어요. 그러기 땜에 지금도 이런 상도 그대로4). 편집을 하다 보니까요 뭐든지 정상적으로 딱 놔둬야 되고. 이런 걸 (식탁 위 자잘한 물건들을 가리키며) 청소도 도우미가 와서 할 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래가지고 인제는 일 년이 다 되가니까 모든 걸 알고 또 내가 나 죽을 때까지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한참 할 때는 일 년에 몇 작품인지 모를 정도로 했어요. 그래가지고 극장에 붙이는데요. 명보극장이고 어디고 다. 나를 통해서 왔다갔다 하는데. 어디든지 통하고 그랬어요. <동백아가씨>5)니 뭐니 다 내가 편집한 거예요. 젊었을 때도 인터뷰를 많이 했어요. 나 편집상 탄 게 너무 많았는데 (진열장에 놓여 있는 트로피들을 가리키며) 저것만 가지고 있는 거예요. 첫 작품은 어떤 것이었나요? <춘향전>. 내가 미공보원에 있다가 다니러 오니까 이기향 씨라는 감독이 말이죠. 편집을 해 달라고 맽겨서 내가 편집을 해주고. 영화가 제일 많이 나오던 시절 편집하셨으니까 바쁘셨을 거 같아요. 밤을 꼴딱꼴딱 새고 그랬었어요.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요. 한 작품에 편집은 완전히 끝나야 되는데 그때는 돈들이 없으니까. 그 제작자들이요 쉬었다가 했다가 뭐 했다가 편집을 그렇게 했기 땜에. 시간이 걸린 것도 있구요. 신상옥 씨 같은 분은 돈 있으니까 기냥 돌리가지고 바로 한 일주일이면 끝나고 그랬거든요. 그때만 해도 좋았는데 인제는 아무것도 몰라요. (웃음)
4) 집에는 한 쪽 방에 장식장이 있고, 영화 편집상 트로피가 진열되어 있었다. 대종상 편집상 트로피 등 3개가 놓여 있었다. 5) 1964년 김 기 감독의 영화. 영화 주제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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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은 몇 편이나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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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편집을 배우게 됐어요. 그때는 편집하기 참 힘들었어요 영화일을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거예요? 형부가 촬영 기사로 계셨거든요. 일본에서 있다가 한국에 나와가지고 한국에서 영화계 계실 때 내가 노래를 좀 했어요. 그랬더니 가수보다도 편집을 배워라 이래서 영화계 들어가서 편집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래가지고 편집을 했어요. 저 자랄 때 참 호강스럽게 자랐어요. 우리 집안이 괜찮게 살기 땜에. 그런데 결혼해가지고도 괜찮았었고. 내가 편집하는데 참 벌이가 좋았었어요. 그때 한 작품 하는데 그때만 해도 오만 원씩. 그때 돈으로 오만 원씩이면 컸어요. 그런데 그걸 갖다가 일 년, 일 주일에 다섯 작품이 들어 오면은 그걸 갖다가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돈은 그립지 않고 썼어요. 인제는 다 틀렸어. 늙어가지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게 많았었어요. 그런데도 아무 소용없어요. (웃음) 처음 배울 때, 편집하는 사람이 여성으로 유일했을 것 같습니다. 편집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다가 그때는 촬영을 하면은 만약에 강물에다가 돌을 던지잖아요. 그러면 가서 물에 맞는 거 따로따로 촬영을 한 걸 엮어서 편집을 해야 되요. 그러니까 편집할 때 음악, 거리감, 뭐 그런 게 다 들어가야 되요. 액션, 그때는 옷도 똑같은 옷이 아니라 어느 씬에 가서는 바꿔주고 어느 씬에 가서 바꾸고 이런 것이 있거든요. 그런데 조금 달라졌다 뿐이지 그래 안 하고는 의상이 그대로 가고 그랬어요. 참 편집하는 데 어려웠었어요. 지금은 아주 한 커트 찍으면은 쭉 기냥 다니면서 찍잖아요. 그래서 한 커트가 그렇게 길게 나가고 하는데 저희 때는 잠시 찍고 잠시 찍고 이걸 갖다가 다 이어서 편집을 해야 되니까. 그게 시나리오 하고 항상 맞춰봐야 하고. 감독들하고 촬영 기사하고 여러 가지 얘기도 하고. 편집 처음 배우실 때 힘들지 않았습니까? 왜요. 힘들었지요. 그때만 해도 양주남 씨란 분한테서 배웠거든요. 나는 편집을 하면은요, 조수들한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 열 여덟 콤마6)에서 몇 콤마를 해가지고 대화를 하면 된다, 뭘 어떻게 한다. 프레임 아웃 되고... 인 될 때도... 씬을 바꾸면서... 그 씬에서 다른 씬으로 넘어가면서 부드럽게 넘어가니라고 오버랍, 프레해서 두 개를 보태가지고 나가고’ 이랬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촬영으로 다 하니까. 이거 얼마나 좋아요. 우리 때는 굉장했어요. 그래서 그 양주남 씨한테서 배울 때, 몇 콤마다 몇 콤마다 그런 얘기를 안 해줘요.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저거 됐는데.” 그럴 때 내가 일을 이어가면서 아, 여기서 이렇게 하면 되겠다 자꾸만 6) 콤 마는 Frame의 일본 영화 용어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해 영화가 들어왔기 때문에 영화 현장에 일본어 용어가 많이 쓰였다고 한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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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서는 제가 제일로 처음. 그때 내가 편집할 때는 남자들도 별반 없었어요. 그런데 인제는 다들
연구가 되더라구요. 그래가지고 편집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프린타실에 들어가서 인화를 했어요. 인화 하다가 편집실에 와서 편집을 하게 되니까 인화해서 현상실로 넘어가면은 현상실에서 원판이 나오면은 그걸 인화를 해가지고 편집을 하고 그랬거든요. 가르친 제자들도 많겠네요. 제자도 있지요. 지금 서울에서 <빨간 마후라>7) 라는 영화 편집한 것이 우리 조카가 했어요. 그 애 편집을 가르쳐 줘서. 양성란이라고 나오는데 지금은 소자라고 하지 않아요. 지 이름이.
옛날에 제가 참 멋있었어요. 안 다니는 데 없이 다 돌아다니고, 원 없이 살았어요 젊었을 때 굉장히 멋쟁이셨을 것 같아요. 황정순이 최은희 다 내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신상옥 씨가 일본 갔을 때도 은희는 새까만 모자를 사다주고 나는 하얀 모자를 사다줘서 그걸 같이 이렇게 쓰고 말이죠. 명동을 돌면 ‘저기 저 여자는 화면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참 멋있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내가 참 멋있었어요. 키도 크고 몸집이 아주 이쁘고 그랬는데 인제는 다 틀렸지. 요 모양이 돼 버렸어. 남편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남자 배우들도 주변에 많지 않았나요? 처음에 누가 소개를 했어요. 영화 제작부에 있던 사람이 말이죠. 소개를 했는데 그때 그러니까 공무원으로, 과장으로 있었거든요. 그래 괜찮았었어요. 그랬다 나중에 부장이 됐는데 그때까지도 월급은 한 달에 이만오천 원밖에 안 받았어요. 공무원 돈이요. 근데 나는 한 작품에 오만 원씩이니 굉장히 그랬잖아. 우리 영감 진짜 호강하다가 갔어요. 나 만나 가지고. 그런데 제가 영화계에서 있다 보니까 영화인들 하고 결혼하면 안 되겠더라구요. 배움이 없어서. 밑에서 조수급들이 가면 안 좋더라구요. 감독이나 시나리오 쓰는 사람, 제작자들은 괜찮은데 나는 제작자들하고 감독하고, 촬영 기사 그런 양반들하고만 만나니까. 영화인들과 지금도 만나시나요? 이제는 영화인들이랑 아주 멀어져서 몰라요. 인터뷰 해가지고. 아마 그게 외국에서 상영을 했는가 봐요. 외국에서 우리 모임이 있었는데 막내가 그러는데 “언니 인터뷰 한 게 다 나오던데.” “어디서.” 그러니까 “미국에서 다 봤어요.” 그러면서 내 촬영한 거 인터뷰한 거다. 그랬나 봐요. 근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살았어. 외국에서 한
7) 1964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218
건 못 봤어요.8) 마을에 여성 최초 편집기사가 살고 계신다는 걸 여태까지 몰랐습니다. 영화계에서 김영희라 하면은 알 거예요. 다들 옛날 사람들은 나를 찾을라면 김영희라 그래야 나와요. 김옥례라 그러면 몰라요. 제가 넘어져가지고요, 여기, 여기, (손가락을 보이며) 여기 뼈가 보여서 이걸 다 기웠더니 손을 잘 못 움직여서 이렇게 됐어요. 난 참 손도 이쁘고 그랬다고. 나는 참 일을 안 해서 누구든지 곱다고 했는데 이 모양이 됐어요.
아끼지 않고 노나주고 살아요 지금도 고우세요. 집안도 참 깔끔하고 깨끗하구요. 깨끗해야 되고 그래요. 화장실도 원칙은 이리 나가서 저리 들어갔는데요. 그때도 재래식인데 다 이걸 안 할 정도로 방도 다 따숩게 해놨는데 인제 사람이 없으니까 먹을 거 하고 둘 것 하고. 그러고 살아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그리고 가끔 가다가 뭐 사서 내려 보내고 올려 보내고 앞에 집하고 세 집 노나주고 그래요. 그러기 땜에 서로 어머니, 어머니 하고 잘 해요. 내가 아끼지를 안 하니까. 내가 죽으면 소용이 없어요. 돈이라는 거. 그니까 있을 때 먹고 놀고 다니고 이래야지. 지금도 내가 어디 가자면은 지팡이 짚고라도 가거든요. 옛날 사진을 볼 수는 없을까요? 6.25 때 다 당해서 싹 가져가버려서. 서울에서 필름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것도 다 피난 내려왔다 올라가니까 다 가져가 버리고. 이북에서 편집하는 거 날 데려가려 하다가요, 내가 도망가가지고. 아유, 그때만 해도 죽을 뻔했어요. 이 동네는 사시기에 어떻습니까? 저는 돌아다니지를 않기 땜에요. 이 동네도 몰라요. 그저 택시 타고 갔다가 택시 타고 돌아오고 그러니까. 여기 와가지고 동네를 알아보지를 않고 살았거든요. 이 동네 사람들 하고 사귀고 그러지 못했어요. 어떨 때는 대화가 안 될 때가 많아요. 지금은 많이 알아들어요. 사투리.
8) 임순례 감독의 다큐영화 <아름다운 생존-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2001)를 말하는 것 같다.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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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가지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내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만큼 돈을 들였어. 그래서 인자 남이 올 때 부끄럽지
젊었을 때 생각하면 기분이 어떠세요? 그런 추억을 인제는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가끔 가다가 영화를 보면, 여기서 테레비를 보며 앉았으면요, 그때그때 생각이 나요. 기냥 앉아 있으면은 잘 몰라요. 이러다가도 혼자 가만히 앉았으면 생각이 날 때가 있어. 참 아득히 기분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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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영화 편집기사 시절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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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생을 많이 했지 단칸방에서 지금은 호텔이지
이안순
1956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 1966년 부산 남부민동 이주 1977년경 결혼, 영도 신선동으로 이주 2000년 영선아구찜 개업, 이송도로 이주 부모님을 따라서 전라도 정읍에서 부산으로 오셨다는 이안순 어머님은 사십 년 전 결혼을 하면서 영도로 이 주하셨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아구찜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는 ‘사 장님’보다 ‘이모’라고 불러주는 게 더 좋단다. 인터뷰 내내 유쾌한 말투와 표정을 보였지만, 마냥 유쾌한 삶만 살지는 않았다. 어려울 때에 비하면 지금은 호텔에 사는 거라는 긍정적 인 태도가 그녀의 삶을 꾸려오게 했 222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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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부산 간다 하니 뭣 모르고 따라왔지 고향은 어디세요?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사학년 때 부산에 내려와서 남부민초등학교 나오고. 전라도에서 어쩌다가 여기 부산까지 오게 되셨어요? 초등학교 사학년은 모르지. 부모님들이 오시니까 그냥 따라왔지. ‘부산 간다~’ 하니까 뭣 모르고 따라왔지. 온 가족이 일로 부산으로 다 왔지. 엄마, 아버지랑 형제 다. 여기 이사와가지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는 가정 형편상 못 가고. (웃음) 그 때 당시에는 다 너무 어려웠잖아. 정읍 떠나신 후에 다시 가 보신 적 있으세요? 사촌시동생이 정읍에 지금 살고 계시니까 한 번씩 가요. 우리 일 년에 한 번씩 형제 모임이 있거든예. 대전에서 한 번씩 모여가지고 구경도 하고 하룻밤 자고 그래 오거든예. 그래 가면 모든 집안 식구들 다 만나요. 처음 부산 왔을 땐 어디에서 사셨어요? 남부민동. 남의 집 세 살았지. 긍게 달세방들 전전 하다가 전세방으로 좀 있다가 마침 이 집이 나와 가지고 사게 됐지. 여기는 가게, 요 아래층은 우리 잠자는 곳. 다른 동네에서 어떻게 영도로 오게 되셨어요? 당연히 시집으로 왔지. 사십 년 됐네. 여기서 살고 저쪽에서 살고. 여 근방 이렇게 뺑뺑 돌아가지고. 신선동, 영선동. 주로 신선동에서 많이 살고 저 밑에, 영선동도 있고. 신선동 저 우에 살 때 그때는 단칸방에서 많이 살았잖아 옛날에. 그때가 좀 많이 힘들었지. 신성중학교 우에 물 나오는 데가 있거든요. 복지회관 밑에. 옛날에 그 동네 밑에서 살았는데, 화장실도 재래식 화장실. 밑에 보면 뻥~ 똥도 다 보이고 오줌도 보이고. 온 벌레들 다 보이고 그런 완전 재래식 화장실 쓰는. 옛날에는 그런 데서 살았잖아. 거기 화장실도 공용이었어요? 하모! 그때는 다 공용이었지. 판잣집 거기서 여러 가구 셋방살이 하고 그랬잖아. 단칸방, 한 집에서 열 몇 명씩 살고 그랬어요 옛날에는. 시누들도 있제, 시누가 다섯이다. 시누들도 있지 조카들도 있지. 그런 생활을 했다니까 우리가 옛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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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나 여기서 달리기 선수도 했는데, 쪼깬해도 학교 다니실 적에는 어떠셨어요? 옛날에는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촌에서 다닐 때 흰 고무신 있잖아. 책가방도 이런 게 어딨어. 보재기 이렇게 딱 싸고 다니믄 딱 이래 똘똘 뭉쳐가꼬 허리 착 메고 다니고 그랬어. 산 넘어 산 넘어. 산을 두 개를 넘고 학교를 가야 하는데, 가기 싫어가지고. 나 아직까지는 그거는 기억해. 학교 가기 싫어 땡땡이도 많이 쳤다. (웃음) 진짜야 그거는. 내가 지금도 한 번씩 생각하믄 우스워. 집은 여긴데 학교로 갈라카믄 요콤 내려와서 요래요래 한 고개 두 고개 넘어가. 그 고개를 넘어 갈라카면은 한 두 시간씩 걸려. 한 시간도 더 걸리고 두 시간은 걸려. 학교를 가믄은 쪼께 공부 몇 자를 배우고 나오믄 땡땡 종치면 가고. 그런 공부 했었어. 근데 사학년 때 전학 왔으니까. 내가 남부민초등학교 나왔다 아이가. 저쪽에 우리 마주 보잖아요. (손가락으로 송도 방향을 가리키며) 저쪽에 중간에 산 밑, 거기가 학교. 여 학교 보이잖아요. 중간에 저 조그만한, 저기가 학교인 거 같애. 우리가 한 번씩 7번이나 70번 타고 송도로 가잖아요. 칠 번 타믄은 우리 초등학교 그 앞으로 지나가요. 한 번씩 차타고 가면은 달리기 선수도 했는데. 쪼깬해도. (웃음) 간식이나 도시락은 어땠나요? 그때 간식은 없었지. 도시락도 벤또지 말하자믄. 노란 벤또 있잖아. 그때는 그 쌀이 귀해가지고. 쌀밥 보리밥, 보리밥 쌀밥 그랬잖아. 우리가 보리밥을 좀 많이 먹었지. 김치도 뻘건 김치 그건 줄 알아? 흐리부리 해가지고. 옛날에는 다 그렇게 먹었지. 고추가 흔했나 뭐가 흔했노. 옛날에는 전부다 진짜 귀하지. 근데 요새는 고추야 뭐야 전부다 흔하니까 풍부하게 먹을 수 있잖아. 옛날 생각하면은 ‘옛날에는 이렇게 안 먹었는데, 옛날에 우리 집 살 때는 이렇게 안 먹었는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잖아. 쌀 한 톨이라도. 쌀이 없어가꼬 맨 꽁보리밥만 먹을 때도 있었는데. 요새는 쌀도 거저야. 어떤 때는 아까울 때가 많아. 손님들이 먹고 남은 거 있잖아. 쪼끔 쪼끔 남은 거 깨끗한 거는 따로 모은다 나는 솔직히. 모아가지고 누룽지도 까 묵고. 되게 심하면 고춧가루 묻고 이런 거는 그냥 할 수 없이 버리지만은. 좀 덜 하고 많이 남잖아. 그런 거는 내가 누룽지로 먹어. 누룽지 먹으면 얼마나 고소하다고. 초등학교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초등학교 이후에는 그때는 힘드니까 조그만한 일이 가정공업 그런데 많이 다녔잖아. 그때 당시에는 조그만한 가게. 가게면서 몇몇이 일하는데 있잖아. 까자공장, 감빵공장 그런데 옛날에 다녔어. 솔직히 내가 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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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이안순
‘아유 내가 이 학교 다녔네.’ 그 학교도 많이 변했어. ‘아유 학교도 저렇게 변했구나.’ 이라믄서. 옛날에 나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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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작아. 작아가꼬 일 가면은 잘 안 시켜줘, 키 작다고. 어떤 집은 냉동회산데 그거를 키를 맞춰가꼬 할라면은 임마는 보로꾸 말고 나무로 타일 짜 놓은 게 있대. 그거를 디뎌 가지고 올라가서 내가 막 해야 되는 거야. 그런데 키가 작다고 그 다음 날 모가지 꽥. 그런 기억도 있었다. 그래서 많이 놀았지. 할 게 있었나 뭐. 옛날에 또 엄마들 보면은 오렌지 장사라고 있었거든. 오렌지를 만들어가지고 엄마는 가서 팔고 우리는 만들고. 아버지가 부실하니까 엄마가 먹고 살어야 되니까.
하얀 고무신 신는 사람은 부자고, 까만 고무신 신은 사람은 좀 없고 이십 대 때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그때는 공장, 보세공장 와이샤스 만드는데 있잖아. 옛날에는 와이샤스 만드는데 직원들이 많았지. 그때 당시에는 대신동 살 때니까 대신동에서 쪼금 내려오면 동대신동인가 하이튼 그 있어. 보세공장 있었던 데니까 거기서 많이 다녔지. 비메이커 공장. 그런데 많이 다녔지. 미싱도 하고 오바로크도 치고 주로 그런 일을 많이. 옛날에는 많이 그랬잖아. 타이어 고무신이 제일 질기다 이래가지고 까만 고무신, 하얀 고무신. 그때는 하얀 고무신 신는 사람은 좀 부자고, 까만 고무신 신은 사람은 좀 없고. 하얀 운동화 신은 사람은 진짜 부자고. 옛날에는 그랬어. 우리 학교 다닐 때는. 하얀 운동화 다 떨어진 거라도 신고 오면은 좀 있는. 우리 어릴 적엔 다 그렇게 컸는데 뭐. 우리 마을에는 큰 부자 아닌 이상 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았어. 작업 환경은 어땠어요? 환경 안 좋아도 우리는 벌어먹고 살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직원들이 억수로 많은데, 몇십 명이 되는데. 한 몇백 명 될거야. 무슨 부, 무슨 부, 무슨 부 다 있거든. 칼라부 있고, 오바로크 치는 데도 있고. 월급이 그때 몇만 원도 안 했을 거야. 만 얼마 정도. 자제분 태어나시고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때는 일을 못했지, 애들 키울 때까지는. 애들 초등학교 들어가고 이럴 때부터 출근 생활도 하고. 하루에 몇 시간씩. 파출부 생활하고. 그러고 애들 조금 크고, 고등학교 들어가고, 대학교 들어가고 이러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때는 완전 내가 식당 생활을 많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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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회사 마이 하지만은 그래도 보세공장, 신발공장. 그때는 말표 신발이라고, 타이어 고무신이라고 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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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제일 힘드셨어요? (웃음) 그 말 할 수 없지. 다 뻔한 거. 사람 살아가다 보면 다 뻔하지. 다 힘들었지. 그때 당시에 신성동 살 때는 세탁기도 제대로 없었지, 냉장고도 별로 없었지. 그때가 삼십몇 년 전쯤이니까 테레비가 어딨고, 냉장고가 어딨고. 진짜 그런 게 없었잖아. 단칸방에서도 빨래 같은 거 할 때 밖에 나와서 하면은 세탁기가 제대로 없었지. 부잣집 아닌 이상에는 없었지. 그럴 때 고생을 좀 많이 했지. 일 갔다 와서 밀린 빨래해야 되고. 또 반찬 다 해놓고 아침에 일하러 가야 되지. 그럴 때는 진짜 고생을 많이 했지 단칸방에서. 그럴 때 비하면 지금은 진짜 호텔이지. 옛날 같으면 이런 게 어딨어. 하꼬방 다닥다닥 붙은 데서 열 몇이서.
지나간 세월 생각하면 재미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고 아구찜 집 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십육 년 됐어요. 내가 장사하기 전에 남의 집 생활을 십몇 년 했잖아. 내가 어쨌든 간에 남의 집 다니면서 년째 했고. 복국 주방장으로 들어가 있다가 이 집을 사게 된 거야. 처음에 이거 시작할 때 복국하고 아구찜하고 같이 할라 했거든. 혼자서 그걸 해낼라니까 못 하겠더라고. 복 그거 다듬는 게 너무 힘들거든. 에이씨 요것만 하자. 아구찜만. 두 가지 못하고. 그래가지고 핸게 성공은 했지. 했다고 봐야지. 여기서 벌어서 애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했으니까. 지금은 손님이 없는 거라. 초창기에는 이거는 (아구찜 가게 안쪽 증축한 곳을 가리키며) 없었거든. 이게 생긴 지 한 이년 밖에 안 됐는데, 초창기에는 저기 밖에서 기다리고. 요즘 빨간 차 있잖아요. 이층 버스, 씨티투어. 토일은 손님들 많이 와. 여기서 먹고도 가고 그러거든요. 이 가게를 내기 위해 준비를 오래 하신 거네요. 인자 내가 배우는 건 많이 배웠지. 남의 집 다니면서. 갈비집도 다니고, 분식집도 다녀보고, 한식집도 다녀보고. 하여튼 다니기는 많이 다녔어. 남의 집 식당을 다녔잖아. 그 때는 사십 대니까 중앙동. 지금 새부산예식장 없어지고 중앙동 거기 있었는데, 그 집 사람들이, 주인들이 너무 좋아. 그 집 한 집에 십일 년 있었거든. 거기서 식당 생활을 많이 했잖아. 토일은 바로 앞에 예식장이 있으니까 잔치 손님들 받잖아. 광복동 거기서 많이 했지. 아홉시까지 출근해서 보통 저녁 열 시에 마치면 집에 오기 바쁘고. 그때 당시 일당만 하루에 사만 원씩 받았지. 주방장으로. 직장을 진짜 내 천직으로 여겼지. 그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십일 년을 다녔으니까. 한 집에 십일 년 다니면은 오래 다녔다. 그때가 진짜 좋았지. 아줌마들 몇몇이 “야 주방장! 뭐 해먹자, 뭐 해먹자.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해먹자, 두루치기 해먹자.” 그렇게 살았지. 지나간 세월 생각하면 재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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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던 고향은 _ 이안순
‘내가 저 집에 어떤 걸 배워가지고 주방장을 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있었어. 그래서 남의 집 주방장을 십일
있었고, 슬픔도 있었고. 돈도 많이도 벌었지. 굉장히 벌었는데 그 놈의 돈이 어디로 새는지. 여기 장사하면서 초창기에 돈 진짜 많이 벌었다. 많이 벌었는데 그 놈의 돈이 다 어디로 갔는고 골병밖에 안 남고 그렇네. 이 자리에서도 식당을 오래 하셨네요. 초창기에 장사할 때는 ‘내가 여기서 어쨌든 벌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또 빚도 많이 져 있었고 그때 당시에는. 빚 다 갚으면서 만 원짜리도 하나 배달, 이만 원짜리도 하나 배달 이래하면은 한참 바쁘다보면은 시간을 놓쳐버리면은 그릇을 몬 찾으러 가잖아. 그럼 그릇이 싹 어디로 가버리고 없어. 다리는 알통이 배가꼬 아프제. 그래가 내려오면서 운 적도 많았다. 돈은 많이 벌었는데 나가는 게 너무 많으니까. 빚이 너무 많이 있어노니까. 빚 갚는다고 그리 했지. 내가 참 이걸 하면서도 벌금도 많이 물어보고.1) 어쩔 수 없이 고발을 하면 구청에서 나와야 된다. 나와서 건물을 찍어가고 이래 하는데, 밑에 건물이 평수는 작아. 다 쓰러져가는 옛날 스레트 집이었거든. 바람만 불면 그 스레트가 떨어지면 여기 도로가 있잖아. 계단으로 떨어지고 막 이래. 벽도 흐물흐물 해가꼬. 그래서 내가 고쳤는데, 그것도 어찌 된 건지 고발을 해가지고 두 번이나 구청에서 나왔드라고. 거기 다 찍어가고 이래. 지금 해마다 벌금 물잖아. 그래도 나는 괜찮아. 나 죄 안 짓고 마. 도둑질 하는 것도 아이고. 세금 내라는 건 내는 거고. 나는 솔직히 이렇게 베푸는 마음으로 다 베풀고 이래 하지, 막~ 내 욕심 채우고 절대 그런 거 없어. 그러면 손님들 안 옵니다. 맛있게 해주고 그러니까 손님들이 멀리서도 오고. 여기 저 방 손님들 대신동에서도 오셨어요. 손님들이 맛있다고,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주고, 많이 그리 하더라고. 이 동네에는 우리 집밖에 없어. 남아 있는 게. 다른 데는 하다가 그만 두고. 그래도 질기게 십몇 년 가는 게 우리밖에 없어. 내 장사할 때는 절대로 미원 안 썼거든요. 남의 집 다니면서 보니까 미원을 좀 많이 쓰대. 저걸 그럼 미원 맛으로 먹지. 난 그랬거든. 김치 담글 때도 양념만 빡빡 넣는 거야. 미원은 안 써. 이 동네에 오래 사시니 어떠세요? 여기가 살기가 좋아요. 없이 살아도. 진짜 영도가 살기 좋아요. 살면서 정이 들어서 그랬는지.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물도 틀면 나오고. 요기 산우에 올라가면 산물도 나오고. 이 동네 떠나기 싫어요. 아침에 딱 올라와서 바다 이렇게 보면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애들도 키우다 보면 좋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애들 좋은 사람들 만나 시집 장가 갈 때 좋고, 또 손지들 올 때 좋고.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뭐 그렇지.
1) 흰 여울문화마을 대부분의 건물처럼 영선아구찜도 무허가 건물이다. 무허가 건물은 요식업 허가가 나지 않아 이 마을에는 식당이 거의 없다. 230
내 살던 고향은 _ 이안순
① 영도 바닷가에서 ② 아들의 어린 시절. 벼랑 축대 공사가 한창이던 때로 보인다.
②
①
③ ④ 결혼식 날 사진 ⑤ 결혼식 날 신성동 신혼집 앞에서
④
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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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키워드 3
태풍에 쓸려 사라진 바닷가 술집 “진로회사에서 바닷가에 술집을 쭉 만들 어 놨지. 해녀들 장사하는 데서부터 요 밑 에 약간 넓은데 하얀 집 그쯤까지 아래위 로 쫙 있었어. 산책로 길 쪽에 기둥을 세 우고 언덕을 의지 삼아서 뼈대 세우듯 이 쫙 올렸단 말이다. 그래가 칸칸이 만 들어 가지고 1호, 2호라고 만들어놨는 데 그것도 태풍에 홀랑 다 쓸리 갔다 아 이가, 언덕도 무너지고. 술집에서 색시장 사도 했는데 술집마다 아가씨들이 있었 던 거야. 해안산책길이랑 언덕 양쪽으로 도 집이 있었거든. 여기서 저까지 산책로 를 지나가는 남자들은 몸살 날 정도로 사 람을 잡아끄는 거야. 그때는 먹고살기 바 쁜 시절이라서 자기 노력껏 사는데 그 걸 누가 말리노? 요즘 같으면 애들 키우 는 환경에 민원도 넣고 하지만 그때는 먹 고 살기 바쁜데 누가 뭐라할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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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보건고등학교가 말해주는 또 다른 역사
주민이 살기 좋은 마을로 흰여울마을공동체
주민들과 옛 이야기를 나눌 때 자주 언급되는 곳이
2011년부터 마을에서 작은 움직임이 생겨났
다. 연세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보건고등학교 홈
다.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고령화가 심각
페이지를 참고하여 현재 부산보건고등학교 건물을
해지자 살기좋은 마을로 바꿔보자는 마을 주
거쳐간 학교들의 연대기를 살펴보았다.
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이 만들어졌다. 흰여울마 을공동체는 ‘국밥데이’를 열어 마을 주민과 함
1951년 연희대, 피난지인 부산 영도에서 개교
께 밥 먹는 행사를 열기도 하고, 흰여울안내소
1953년 휴전으로 서울 환도와 부산에 분교 설치
당번을 정해 방문객 안내를 하기도 한다. 우물
1959년 부산분교, 연세실업초급대학으로 발족
터에서는 영화상영도 한다. 최근 영도문화원
1963년 연세대학교 부산초급대학로 학칙 변경
의 생활문화공동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리
연세대학교 가정대학으로 개편
는 수공예, 목공 수업 등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
1966년 연세대학교 가정대학 서울로 이전, 한성여
다. 마을의 2세대 젊은 엄마들이 주축이 되어
자실업초급대학 신교사로 등록(현 경성대
흰여울점빵을 열자 주민들이 가끔 들러 수다
학교 법인)
를 떨기도 한다. 주민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
1973년 한성학원 대연동으로 캠퍼스 이전, 금성여
고자 하는 공동체의 노력이 있기에 오늘날 마
자종합고등학교로 개교하고, 같은 해 10
을은 자연이 사람의 배경이 되어주고, 사람이
월 금성여자상업고등학교로 학칙 변경
자연의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살만한 마을이
1974년 대신학원 산하로 법인 변경
되고 있다.
1980년 영도여자상업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1년 한국테크노과학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12년 부산보건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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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남아 있는 그곳
흰여울길에 있던 공중화장실. 할머니 네 분이 사용했으나, 현재 새롭게 단장하여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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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돌담집(돌집)은 돌과 흙을 섞어 만든 집이다.
두레박 샘터. 우물은 사용하지 않지만 주민들이 모이는 작은 공터가 옆에 있다. 현재 새단장 후 모습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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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아파트 뒷쪽에는 공동묘지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영선아파트는 부산에서 제일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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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통과하는 도로를 주민들은 아직도 신작로라고 부른다 . 한때는 흰여울길이 유일한 큰 길이었다.
현재의 부산보건고등학교 건물은 역사속에서 다양한 이름을 거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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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흰여울마을 들여다보기 이름
맏머리 샘, 우물, 함지골 •흰 여울마을 기억집 『그곳』, 흰여울마을기록단, 영도문화원 (2015)
• 『영도향토지』, 부산광역시 영도구(2003) • 부산역사문화대전 busan.grandculture.net
공동묘지 터 위에 지어진 아파트 • 한극근현대사사전
인구 • 1920·1930년대 부산부의 도시빈민층의 실태와 그 문제, 양 미숙, 지역과 역사(19) (2006) • 조선후기 영도의 공간적 특성과 경관의 조성, 양흥숙, 한국 민족문화(57), (2015)
부산보건고등학교가 말해주는 또 다른 역사 • 연세대학교 홈페이지 www.yonsei.ac.kr • 경성대학교 홈페이지 ks.ac.kr • 부산보건고등학교 홈페이지 busanhc.com
• 영선2동 인구 자료, 통계청 주거환경 •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추진을 위한 마을기초
주민구술사
자원조사 보고서』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영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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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산역사문화대전 busan.grandculture.net
연구, 정미정, 유재우, 한국주거학회 학술대회논문집, 한국
3) 사쿠라 훈민정음. 이윤옥, 인물과 사상, 2010
주거학회(2010) • 1970년대 부산지역 공동주택 입지특성, 김해번, 김준, 유재
송순옥
우,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34(2), 대한건축학회
1) 네이버 오픈사전
(2014)
2) 농업용어사전
• 『영도향토지』, 부산광역시 영도구(2003) 한상원 1) 부산역사문화대전 busan.grandculture.net
마을 기억 속 키워드 하꼬방
3) 침례병원 홈페이지 www.wmbh.co.kr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ncykorea.aks.ac.kr 부산시청 홈페이지 www.busan.go.kr/Main.bs
•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추진을 위한 마을기초 자원조사 보고서』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영도문화
이종석
원(2014)
4)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www.grandculture.net
• ‘최소한의 주택’의 사회사적 변천과 공간특성, 전남일 대한 건축학회 논문집, 대한건축학회(2011) •피 난살이 삼년의 발자취(9) 요정다방 1953. 7. 24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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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네이버 TV프로그램 정보
박기선
김갑숙
1), 3) 국립국어원 www.korean.go.kr
3) 부산보건고등학교 홈페이지 busanhc.com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ncykorea.aks.ac.kr
4) 범아상사 홈페이지 pasc.co.kr.
5) 깨복쟁이 -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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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범
6)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1) 논문 : 부산의 기억과 로컬리티 : <부산의 인물>과 <부산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송정숙(2010)
김병호 1) 한국기독공보 2014. 1. 16
손윤자 2) 인터넷 자료 종합
반야화
3) 네이버 오픈사전
1) KBS부산 홈페이지
4) 국립국어원 www.korean.go.kr 김옥례 강연식
2) 3) 5) 6) 8) 네이버 영화
1),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7) 부산일보 2016. 7. 12 「고임표 감독의 재미있는 편집이야
2) 『영도향토지』, 부산광역시 영도구(2003), 위키백과
기」
3) 네이버 블로그 참고 blog.naver.com/tingho76/220853349690 구미연, 신기현 2) 네이버 라이브러리 차미경 1) 한국세시풍속사전, ‘영등날’ folkency.nfm.go.kr 2) 부산승마협회 기록 3) 부산버스매니아 온라인 카페 cafe.naver.com/busanbusmania 4) 디지털부산역사문화대전, ‘광복동 음악다방 DJ들이 만든 부산 문화’ busan.grandculture.net 김양미 1) 물백과사전-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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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행 처 : 부산광역시 영도구·영도문화원 발 행 일 : 2쇄 2018년 12월 30일 펴 낸 곳 : 빨간집 등
록 : 2015. 11. 9 (제2015-000013호)
책임편집 : 배은희 인 터 뷰 : 방호정 안혜미 이단비 임미화 최시내 사
진 : 장영식
진
행 : 박소영
교
정 : 조동흠
디 자 인 : 이노그램디자인 인 쇄 처 : 까치원색 주
소 : 부산광역시 영도구 함지로79번길 6 영도도서관 2층 영도문화원
도움주신 분들 : 흰여울마을공동체, 마을주민 여러분
ISBN 979-11-959720-0-5 (03900)
흰여울문화마을 주민대백과
ISBN 979-11-9597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