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등록번호 52-3290000-000047-01
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堂 甘
당감행복한마을 주민 인터뷰집
당 감 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감행복한마을 주민 인터뷰집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발간사
파란만장한 시대를 건너온 당감동 토박이들의 맨얼굴 당감동은 우리나라 현대사와 부산의 역사를 모두 품고 있습니다.
당감동은 해방 후 돌아온 동포와 한국전쟁 당시 부산을 찾은 피란민 을 품어준 곳입니다. 원주민과 이주민은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 는 못 산다.’고 했던 당감동에 터를 닦고 나름의 희망을 향해 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발산업의 중심에 부산진구가 있었고 산업일 꾼들의 주요 거주지인 당감동이 있었습니다. 젊은 청춘들은 당감동에서 꿈을 꾸었고 그들의 꿈을 먹고 마을은 번성했습니다. 고된 노동의 출퇴 근길이었지만 통닭 골목과 시장의 먹거리들이 생활 속 소소하지만 확실 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이 되어 주었습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따뜻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산업구조의 변동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마을은 변 화의 물결에 휩싸여 저마다 생애의 파란만장波瀾萬丈을 간직한 채 더러는 떠나고 더러는 토박이로 남았습니다.
이 책은 ‘당감행복한마을’과 인근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과거와 현재를 그들의 목소리로 기록한 책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지금의 당감 동, 나아가 지금의 부산을 만들어 낸 역사의 기록이며 과거와 현재를 돌 아보고 미래의 방향을 설계하는 데 꼭 필요한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소박한 기록을 통하여 이웃을 챙기고 배려하며 살았던 당감동 시민들의 심성과 어려움을 극복한 공동체의 미덕을 발견하여 읽는 이의 수고로움에 값하기를 희망합니다. 책을 엮는 데 참여해 주신 당감동 시민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18년 만추 부산진구청장 서 은 숙
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발간사
#당감동 연대기 08 주요통계 10 행정구역 변화 11 당감동 사전 12 당감행복한마을 주민 인터뷰 범위 16
#마을의 기원 생의 의지가 만들어 낸 당감동 파노라마 _ 신희일 22
#피란민이 정착한 곳 깨끼 바느질로 터전을 만들고 세대를 잇다 _ 이복술·문미영 38 세월은 사람을 홀로 두지만, 할매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_ 김꽃분 58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삼대의 기억이자 한반도를 종단한 역사의 맛 _ 계임옥 78 시간이 걸려도 뿌리는 내리고, 고향은 탄생한다 _ 노병수 94 60년 토박이 일생, 끈질기게 마을을 살리다 _ 송창근 108
당감행복한마을 주민 인터뷰집
#신발공장이 많았을 때 빛나는 기억을 안고서, 지나간 시대를 지키다 _ 김영화 128 그래 있다 본께네, 세월이 가뿐 거지 _ 노영원 144
#당감시장 이웃을 보면 그저 마음이 동한다 _ 최용분 164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을의 기억을 쌓다 _ 공석장 176 명근 씨네 첫 번째 가족사진 _ 하명근·김형자·하진철·하성민 186 삶의 마지노선에서 정착의 세계로 _ 손종기·신경희·손지윤·손용준 200
#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가난이란 모진 풍파 속에 서로를 붙들다 _ 장방보·김선이 222 기약 없이 시작한 세월, 멀리서도 돌아오는 종착역을 만나다 _ 남현숙 236 오래된 골목에서 시작하는 인생의 꿈 _ 양진호 246 추억이 모이면 역사, 사람이 모이면 그곳이 마을이라네 _ 김은아 260 청년이 만드는 고향의 서사시 _ 노영우 274
용어사전 자료출처
* 인터뷰 내용은 구술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되, 읽기 쉽게 단어와 문장을 다듬었습니다. * 익숙하지 않은 지역말, 전문용어, 옛말은 주황색으로 표기해 두었고 뒤편 용어사전 에 뜻을 옮겨 놓았습니다. * 사진과 글은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발행처 문의 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당감동
堂甘洞
당감동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의 법정동이다. 행정동으로 당감1·2·4동으로 나뉜다. 당감3동은 2013년 2월부터 당감1동에 합병되었다. 조선시대 동평면의 당리마을과 감물리마을을 1914년에 합친 것이 당감동이 되었다. 당감동 고무나무골의 오래된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직선을 그어 북쪽은 과거 의 당리였고, 남쪽은 감물리였다고 한다. 당리는 마을에 오래된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 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감물리는 현재의 당감천을 옛날에는 감물내·감물천이라고 부 른 데서 유래한다.
[부산진구청 홈페이지]
8
#당감동 연대기
1914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 두 마을이 당감동으로 합쳐짐
1970
당감1동에서 동평동(현 당감4동) 분동
1993
동양고무 생산 공장 폐쇄
1936
부산 동래군에서 부산부 부산진출장소로 편입
1972
당감시장 정식 시장 등록
1994
태화고무 신발 생산 중단
1944
가야역 마구간 설치
1973
당감골목시장 개장 당감4동 백양용사촌 형성
1996
태화고무공장 부지에 태화아파트 건립
1947
㈜태화고무공업사 설립(서울)
1978
서면삼익아파트 건립
1997
동양고무공장 부지에 화승삼성아파트 건립
1948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들이 철도 관사 및 인근에 정착
1979
당감1동에서 당감1, 3동 분동, 동평동이 동평1, 2동으로 분동
1998
부산진구청사. 부전동에서 부암동 진양고무 부지로 이전 부산 국제 중·고등학교 개교 / 백양터널 완공
1950
한국전쟁 발발 후 피란민들 집단 이주
1982
동평1동이 당감4동으로, 동평2동이 부암3동으로 개칭
1999
당감주공아파트 건립
1951
당감 1, 2동으로 분동 ㈜태화고무공업사 당감동으로 피란 후 조업
1987
당감동 화장장 폐쇄
2004 개성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52
통신기지창, 문현동에서 당감동으로 이전 당감국민학교 개교, 당감교회(현 남도교회) 설립
1988
동서고가로 착공
2007
당감새시장 전통시장으로 등록
1954
거제도에서 온 피란민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 매실보육원, 수정동에서 당감동으로 이전
1989
화장장 자리에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 이전 한국 신발·피혁연구소 준공
2013
당감1, 3동 행정동 통합
1957
화장장이 아미동에서 당감동 644번지로 이전
1991
한국과학영재학교
2014
(구)당감1동 주민센터 활용 ‘당감행복마루’ 개관
1963
동양고무가 초량동에서 당감동으로 이전 진양화학 설립
1992
진양화학 신발 생산 중단 동평현 성지 남쪽, 고려시대 성곽 발굴
2015
당감동 행복마을 만들기 도시활력 증진 사업 추진
부산상업고등학교,
거주지 유형 2016 부산진구청 정책통계지도 / 통계청
#당감동 주요통계
12,751
※ 2016년 기준 현황 자료
3,050
768
행정구역 부산진구청 통계연보 / 행정지원과 구
분
아파트
면적 (㎢)
통
반
당감1동
2.44
30
162
당감2동
0.86
10
59
당감4동
0.87
17
99
연립 및 다세대 주택
사업체 현황 부산진구청 통계연보 / 기획조정실 24.5% 19.7% 14.9%
인구통계 부산진구청 통계연보 / 행정지원과
11.9%
※ 2012년 자료는 1,3동 합동 전이기 때문에 당감1동은 1,3동 취합한 결과임
2012
2013
2014
(단위:명)
2015
6.3%
당감1동
13,880 14,809
13,580 14,431
13,293 14,210
13,033 13,977
당감2동
5,422 5,510
5,263 5,397
5,141 5,305
4,965 5,121
5,237 5,440
합계 고령화 지수
(65세 이상)
7,132 7,210
7,012 7,056
6,679 6,848
53,417
52,206
51.116
51,042
6,452(11.8%)
6,800(12.7%)
7,162(13.7%)
7,398(14.2%)
7,748(15.2%)
2000 33.2
2005 35.6
38.8
도매 및 소매업
516
숙박 및 음식점업
390
운수업
312
협회 및 단체, 기타 개인서비스업
제조업
140
교육서비스업
118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3.5%
91
부동산업 및 임대업
3.1%
82
건설업
3.2%
83
예술, 스포츠 및 여가관련서비스업
0.9%
23
금융 및 보험업
0.7%
19
사업시설관리 및 사업지원
0.7%
19
전문, 과학 및 기술서비스업
0.3%
9
출판, 영상, 방송통신
0.3%
7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
※ 당감동 신발 및 신발부품제조업 현황
(단위:나이) 2010
4.5%
6,601 6,754
54,663
평균 나이 부산진구청 정책통계지도 / 통계청
평균치
6,812 6.937
639
165
5.4%
2016
14,242 15,147
당감4동
단독주택
2015 41.8
당감1동
2016 42.2
사업체
(종사자수)
14개 (79명)
당감2동 6개 (29명)
당감4동 27개 (170명)
총합계 47개 (278명)
11
#당감동 행정구역 변화
1956년 당감동 지도 ⓒ부경근대자료연구소 김한근
당감동
동평동
당감1동 당감1동
당감2동
당감2동
1914년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를 합쳐 당감동으로 개칭
1951년
당감1, 2동으로 분동
당감1동에서 동평동 (현 당감4동과 부암동)으로 분동
부암3동
동평2동
당감4동 당감3동
동평1동 당감3동
당감2동
당감2동
당감1동에서 당감3동 분동, 동평동이 동평1,2동으로 분동
당감4동 당감1동 당감1동
당감1동
1979년
1970년
1982년
동평1동이 당감4동으로, 동평2동이 부암3동으로 개칭
당감2동
2013년
당감1, 3동 행정동 통합
12
#당감동 사전
김지태산 김지태(1908~1982)의 집안은 부산에서 12대를 살아온 토박이였고, 재력도 상당했 다. 김지태는 삼화고무와 조선견직을 경영 하였고 자본가로서만이 아닌 정치인으로 서, 지역 언론의 창달자로서, 지역인재를 육성한 사회사업가로서 근대 부산을 대변 했다. 김지태산은 현재 동일아파트 3단지 부지에 있던 산으로, 김지태 집안의 소유라 서 ‘김지태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갈 곳 없 는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들을 내쫓지 않고 살도록 해주어 고마운 마음에 김지태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허가 건물이기 때문에 주말 공무원 감시를 피해 이틀 만에 뚝딱 집을 지어놓았 다고 한다. 그렇게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 다가 재개발 과정에서 주민들은 이곳을 떠 났고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13
ⓒ부산일보DB
부산육군통신기지창과 삼익아파트
화장장과 극락다리
1950년대 당시 부산에는 병기기지창, 통
당감동 시립화장장은 1957년 12월 서구
신기지창, 항만사령부 등 다양한 보급부대
아미동에 있던 것이 당시 민가가 없는 산언
들이 있었다. 당감동에는 부산육군통신기
덕이었던 당감동 644번지로 이전해온 것
지창이 위치해 있었다. 1952년 문현동에서
이다. 동네 사람들은 당감동 화장막이라 불
이전되어 왔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국방부
렀다. 부산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화장시설
에서 이 자리를 징발하였다고 한다. 기지창
이었으니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올랐고 장의
주변에 살던 주민들은 군인들 나팔소리에
차 행렬은 길이 닳도록 이어졌다. 동네 아이
맞춰 일어나고 잠들었다. 기지창 철조망 개
들이 장의차를 볼 때엔 재수 없는 날이라고
구멍을 통해 몰래 들어가 기지창 내에서 쑥
침을 세 번 뱉고 깨금발로 세 번 뛰어 액막
을 캐기도 했다고 한다. 총을 멘 군인이 무
이를 했다.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지나는 다
서웠지만 그들의 옷을 세탁을 해주거나 국
리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극락교는 지금의
수나 우동 같은 음식을 팔고, 군수물품 상
당감4동 주민센터 바로 위 사거리에 있었으
자를 얻는 등 군부대로 인해 또 먹고 살 수
나, 1991년 복개 공사와 함께 영원히 자취
있었다.
를 감추었다. 30년 세월을 이어오던 화장장
군부대가 나가고 이곳에는 1978년 서면삼
은 시설의 노후와 부지 협소, 당감로의 만
익아파트가 들어섰다. 당시는 부산에 아파
성적 교통체증, 환경오염 문제점 대두와 민
트가 처음 들어서기 시작한 때였고, 고층
원 발생, 그리고 부산상고의 이전 부지 확정
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기에 주민들에게는
등으로 1987년 11월 30일에 폐쇄되었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위화감의 대상이기도
그곳에는 현재 개성고등학교가 들어서 있
했다. 재개발 논의가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멋스러움이 남아있는 아파트다.
14
ⓒ부산진구청
당감천과 우물
당감초등학교
당감천은 백양산 남동쪽 사면에 위치하고
당감초등학교는 부산진구 당감1동에 있는
있는 선암사 뒤편 백양폭포와 옥수천 등에
공립초등학교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
서 발원하여 당감1, 2동을 지나 동쪽으로
년 4월 1일 당감국민학교로 개교했다. 이후
꺾이어 흐르다가 부산진구 당감동 536번지
부암초등학교(1972), 동평초등학교(1976),
에서 동천과 합류하는 지류이다. 하천의 총
당평초등학교(1985)로 차츰 분리했다.
길이는 2.9km이다. 지금의 당감동 일대에
1996년 당감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흐르는 당감천을 옛적에는 감물내, 감물천
1997년 병설유치원을 개원했다. 교훈은
이라고도 불렀다. 지금 최상류 일부에서는
‘슬기롭게 공부하고 창의적이며 건강한 어
유수를 찾아볼 수 있으나 중·하류는 전 구
린이’이다. 교목은 은행나무로 강한 의지력
간이 복개되어 하천이 도로로 변하면서 옛
과 기상을 상징하고, 교화는 장미로 순결과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옛 부산육
사랑,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군통신기지창 인근 하천은 규모가 커서 그
2004년까지 45~47개 학급을 유지했고,
주변을 하천반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당감
졸업생은 약 280여 명이었으나 2005년부
1치안센터 앞에는 폭포였다고 한다. 장군새
터 매년 급속도로 학급수가 줄어 2018년
미, 참새미, 큰새미라는 우물이 세 개 있어
현재 특수학급을 포함하여 20개 학급이 편
동네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되었다. 날
성 운영 중이다. 졸업생 또한 2009년부터
이 가물고 모진 가뭄이 찾아와도 물이 마르
200명 이하로 줄었고 2015년부터는 졸업
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생이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현재 6학년 학생 수는 66명이다. 젊은 세대가 떠나고 고령화와 출산율 하락 등의 현상을 직접 확 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5
조차장 (부산철도차량정비단)
버스노선
부산철도차량정비단은 부산진구 당감동과
당감행복한마을 인근의 버스 정류소는 당
범천동에 있는 철도 차량 정비를 담당하는
감1치안센터, 당감초등학교, 당감사거리,
한국철도공사 시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당감시장 정류소 네 곳이다. 이곳을 지나는
는 세 군데의 정비단이 있는데 부산, 대전,
버스와 노선은 다음과 같다.
고양에 있다. 부산정비단은 디젤전기기관차 중정비와 더불어 KTX 경정비를 담당하고
17
감천 ↔ 국제백양
23
감만동 ↔ 선암사
44
반여3동 ↔ 당감동
가야역은 일제 강점기 전쟁 물자 수송의 필
88
태종대 ↔ 당감동
요성에 의해 1944년 조차장으로 영업을 시
124
구산동 ↔ 서면
작했다. 1945년 광복 후 일시 폐지했다가
129-1
반송 ↔ 신라대
138-1
장림 ↔ 용당
141
송정 ↔ 당감동
다. 광복 후 조차장에 딸린 철도 관사가 비
160
구포3동 ↔ 전포동
어있을 때 이곳에 귀환 동포가 먼저 들어왔
167
동서대 ↔ 동아대학병원
고 이후 피란민들이 인근에 와서 정착해 살
169
당감4동 ↔ 신만덕
있다. 일반차량기지는 범천동에 위치해있 고 고속차량기지는 가야차량사업소와 일체 화되어 가야역에 있다.
1947년 12월 1일 부산 조차장역으로 조차 장 및 검차 사무소를 신설하여 영업을 재개 했고, 1955년 가야역으로 역명을 변경했
았다.
169-1 구포3동 ↔ 서면 179
회동동 ↔ 국제백양
16
#당감동 당감행복한마을 주민 인터뷰 범위
함경도 마을
당감시장
당감행복한마을
황해도 마을
17
당감행복한마을 주민인터뷰는 도시 활력 증진사업의 대상지인 당감행 복한마을을 중심으로 이북동네, 구 시장과 당감시장 인근에 거주하거 나 가게를 하고 있는 주민을 대상으 로 진행했다. 이 지역은 당감동에 사 람이 들어와 마을이 생기게 된 초기 의 역사를 담고 있는 지역이며, 오랜 기간 정착해 살며 옛 기억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이 많은 곳이다. 당감시 장은 당감동의 모든 정보가 오가고 주민들이 교류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당감동의 옛 기억 을 찾아내고 현재를 살아가는 주민 들의 모습을 기록하기로 했다.
18
당감 스토리
# 태화고무 주변
#마을의 기원
19
20
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1950년 12월 3일 당감동 항공사진 ⓒ 부산시
조선시대 동평면의 당리마을과 감물리마을을 1914년에 합친 것이 당감동이 되었다. 당감동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대부분이 논밭으로, 100여 세대가 채 안 되는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촌마을이었다. 주변에는 가야역 및 철도 조차장, 마구간 등이 있었 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일본에서 귀환한 동 포 상당수가 일본인들이 살던 철도 관사와 마 구간 인근에 정착을 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 하고 나서는 피란민들이 밀려들었다. 피란민 수 일본에서 부산으로 귀환하는 귀환 동포 ⓒ 미국국립문서관리청(NARA)
용소는 급격하게 늘어난 피란민의 수를 감당하 지 못했고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피란민들은 그 주변에 움집을 짓고 정착하였다. 그들은 비
바람만 겨우 가릴 정도의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곳이 당감초등학교 뒤편과 당감동 235, 248, 292번지 일대 수천여 세대에 걸친 피란민촌, 일명 이북동네이며 일부 집들 은 그 당시의 형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기원
부암동에서 가야 방향으로 바라본 당감동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일찍이 철도부설을 통해 교통의 요지가 되었던 부산진구는 이 입지적 조건에 기초하 여 20세기 근대 공업화 과정에서 부산의 중심 공업지대로 자리 잡았다. 피란민들이 살 고 있던 이북동네라 불리는 곳 일대에도 부산공업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동양고무, 태화고무, 진양화학 등 부산의 대표적인 고무공장들이 설립되고, 고무공장에 필요한 노 동자들이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대거 이주해 왔다. 그로인해 1960년대부터 당감동 인 구가 급증했다. 피란민들이 살던 판자촌과 움집은 상품을 파는 가게나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숙소로 변신하였다. 비좁은 판잣집은 이웃집을 합쳐 2층, 3층으로 올리고,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세를 놓았다. 잘나가던 부산의 신발산업은 1990년대 들어와 사양산업이 되었다. 고무공장들은 하 나둘 사라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공장노동자로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면서 당감동의 인구도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당감동에는 여전히 마을의 시간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구시장 골목에는 컵라면 몇 개 올려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을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이어지고 있다.
21
생의 의지가 만들어 낸 당감동 파노라마
신희일
1940년생, 63년째 거주 <LG전자대리점> 운영 역사는 모두가 주목하는 무대에만 있 지 않다. 도시의 후미진 골목에도 그 흔적은 남아있다. 당감동은 대도시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일상의 한 꺼풀을 들춰내면, 민중들의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반세기 한반도의 역사가 뭉 근히 배어 있다. 해방 소식을 듣고 조 국을 찾은 귀환 동포들이 몰려든 곳이 며, 살길을 따라 끝없이 남쪽으로 내려 온 피란민들이 발길을 멈춘 곳이자, 시 골에서 상경한 어린 노동자들이 사회 의 첫발을 디딘 곳이다. 그들은 판자를 붙여 벽을 세우고 신문지로 벽과 천장 을 발라 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저마다 의 삶을 이어붙였다.
24
당감 스토리
#마을의 기원
가전제품이 불티나게 팔릴 때 : “1년에 선풍기 한 3천 대, 여름엔 하루에 2백 대, 3백 대 파는 건 장난이지”
_ 이 마을에 언제부터 사셨어요? 나도 여기가 고향은 아니야. 밀양에서 못 사니까 부모님이 당감동에 1956 년도에 왔어. 그러니 한 60년 살았어.
_ 부모님들은 여기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부모님들은 할 게 있나, 시장에서 장사 했어.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당감시장 관리를 했어. 그래서 내가 시장에 대해서 잘 알아. 상인 회장 님은 의용촌, 상이용사였어. 나는 청소꾼이야. 나도 못 먹고 사니까 해야지. 스물한 살 때부터 관리를 하다가 20대 후반쯤 나왔지.
_ 또 무슨 일 하셨나요? 가게 했는데 40년 넘었지.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물건만 받으면, 파는 건 걱정 없지. 1년에 선풍기 한 3천 대, 여름엔 하루에 2백 대, 3백 대 파는 건 장 난이지. 조립하는 걸 감당을 못했지. 그 당시 차도 없어서 픽업차 타고 했지.
옛날에는 우리 가게 옆 옷가게까지 전부 우리 가게였어. 도로 확장될 때 앞 에 열 몇 평 나가버렸어. 36평이었다고. 지하실 창고 6~7개 있었어. 그때 왜 그렇게 많이 팔 수 있었냐면 팩토링 했거든. 팩토링이 뭐냐면 은행에서 제품 을 사는데 돈을 빌려주는 게 있어. 홍길동이 물건을 산다고 하면 홍길동이 앞으로 돈을 빌려주는 거야. 전자제품 보급 정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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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죠? 동네에서 사는 사람, 인터넷에서 사는 사람 제각각이지. 돈 안 남는다. 우 리 직원이 20년 근무하고 있다. 옛날에는 차가 7대, 8대고 직원이 한 열 몇 명씩 됐는데 지금은 직원하고 내뿐 아니가. 큰 제품은 배달 안 한다. 회사에 연락하면 전국에 배달이 되니까. 마트나 하이프라자에서 한들 가격이 같아. 3만 원 아니면 4만 원 남는 거야. 우리 직원 월급 나오면 되는 거지. 잘하고 있다.
_ 구의원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밖에 안 했어. 3대 때니까, 1997년부터인가? 우리는 월급도 없을 때야. 수당 한 70만 원 받고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지역을 위해 노력했다.
#마을의 기원
마을의 형성 : “당감동은 귀환 동포들이 제일 먼저 왔어. 갈 데 없으니까 철도 관사에 살았어”
_ 이 마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아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란 시절에 당 감동에 마을이 형성된 거로 알고 있는데 마을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나요? 원 당감동은 동평현이라. 당감4동에 가면 동평 현감이 살던 데도 있어. 당 감동은 피란 시절 때부터가 아니고 귀환 동포들이 제일 먼저 왔어. 귀환 동 포들이 해방되고 이 지역으로 왔어. 일제시대 때 철도역, 가야역이 생기고 그때부터 조차장이 있었어. 여기가 철도청 조차장이라. 조차장은 기차가 나 갔다 오면 점검하고 고치는 데라. 여기에 철도 관사가 있었어. 철도에서 일하 던 사람들이 자고 그랬던 곳이 철도 관사라는 거야. 귀환 동포들이 와서 갈 데 없으니까 관사에 살았어.
귀환 동포가 어떻게든 밥 먹고 살라고 할 때에 6·25가 터졌다. 전쟁이 터지 니까 피란민들이 많이 왔다고. 함경도에서 거제도 거쳐서 이리 들어오는 사 람, 직송으로 오는 사람. 옛날에 어른들 말로 함경도 아바이들이 이 동네에 왔는데, 와서 보니 살 수가 없잖아. 철도 관사도 자리가 없고. 그 옆에 터 조 금 남은 데 나무 같은 거 그냥 가져와서 집을 만들고 산 거야.
의식주가 해결돼야 되는데 먼저 잘 데가 해결돼야 된다. 6·25 때 이 지역에 육군통신기지창이 생겼단 말이야. 삼익아파트가 육군통신기지창이야. 산 너머에 공군보급창이 있고. 전쟁 때 물자가 많이 들어오니까 그 물자 상자를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니고, 철조망 너머 던져주면 훔쳐갖고 왔지. 지붕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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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때는 종이에 기름칠한 루핑이라는 게 있어. 루핑도 훔쳐다가 같이 이어서. 그래서 여기서 정착을 하고 살았어.
그때 못 묵고 못 살았지. 정말 비참했어. 당감시장 뒤에 가면 우쨌든 한 끼 라도 때우기 위해서 원조물자 나오는 거 가지고 와서 강냉이죽, 우유죽 같은 거 끊여 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죽 한 그릇 얻어먹고 하루 때우면서 살았지. 또 저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양키 물건들이 이쪽으로 많이 유입됐지. 내가 한국전력에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아는데, 부산진중학교에서 길이 쫙 났 지? 그 중간 길에 집들이 좀 있지? 거기 이쪽이 미군 부대 그 사이에 양색시 가 살았다. 양색시들이 많이 사니까 양키 물건들이 많이 나왔어. 우유, 약품 이런 게 많았어. 우리 애들도 키울 때 그랬어. 그때는 국산 우유가 없었어. 비 락우유는 있었는데 그게 시원찮단 말이야. 국제시장, 깡통시장 가서 사든지, 아니면 범전동 양키촌에 부탁을 해서 사야 돼. 술 먹는 사람들은 양주도 사 오고.
시장의 기원 : “ 피란 내려온 사람들이 우쨌든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떠돌아 팔고 했던 데가 구시장이었어”
_ 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경상도 사람들은 그래 장사할 줄 잘 몰랐고, 함경도, 평안도서 내려온 사 람들이 우쨌든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떠돌아 팔고 했던 데가 구시장이었
#마을의 기원
어. 요새 같이 의자가 있나. 똑 베트남같이 쪼마난 거로 테이블하고 옆에 의 자 놔두고 앉아서 국수도 묵고 그랬어.
당감시장은 옛날에 상이용사 간부들이 조금 모아가지고 정구지밭하고 있 는 국유지를 점령하면서 시장을 만들었어. 그때 상이용사들이 목재 건물로 시장을 지었어. 지붕을 이을 때는 루핑도 없어가 하야리아 부대에서 나오는 큰 깡통을 쪼개서 끼어놓고 탁탁탁 쳐서 연결한다고. 깡통을 전부 연결해서 지붕을 이었다고. 참말로 그 시대에는 그게 아주 좋은 거야.
그리고 중간에 골목시장이 형성됐어. 그쪽 사이에 피란민들이 많이 살았 어. 철도에 일하는 분들이 낮에 우동도 사먹으러 나오고, 그때 이주자들이 골목시장을 만들었어. 나중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당감새시장이 생겼고.
_ 고가도로와 시장 쪽이 옛날에는 하천이었다가 복개된 곳이라고 들었어요. 한 1970년도 넘어서 복개한 거야. 당감시장 골목에 남도교회 앞쪽으로 있 지? 그 옆에까지 큰 하천이라. 하천이 커. 큰길 복개는 동서고가로 공사할 때 한 거고. 그거는 복개가 제대로 된 거고. 시장 쪽은 옳은 복개가 아니야. 432m 중에서 한 180m 정도만 데크로 되어 있고 그 외에는 석축 쌓은 거야. 그 옆에 협성아파트 도시가스가 올라갔어. 석축 사이로 물이 줄줄줄 흘러나 오면 흙이 다 빠진다 아이가. 그런 지반이거든. 그러면 도시가스도 위험하고. 언젠가 고쳐야 돼. 그리고 당감1치안센터 앞에 옛날에는 폭포가 있었다고. 옛날 어른들이 하는 말씀이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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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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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소한 옛이야기 : “지리학적으로 좋은 데야. 사람 살기 좋고, 양지 바르고, 교통 좋고”
_ 작은 집들이 되게 많아요. 옛날에 여기서부터 동평현 쪽으로 요 앞에까지 당감동 253번지라 캤다고. 그게 전부 국유지였어. 한 1968년도에 각자 불하를 시켜줬어. 판자촌 짓다가 ‘아무개야, 고거 내 안 줄래?’ 하면 ‘어어 형님 하이소’ 캤던 부분이 10평, 20평 이 정도지. 이렇게 불하를 해서 쪼그마하게. 그래서 큰 평수를 못 가지고 있지.
하천 가에 공동변소가 있었어. 고가도로 놓고 도로 복개를 하면서 변소를 철거하려고 하니까 안 돼. 사람들이 안 그래도 집 작은데 변소 지을 데가 있 나. 골머리를 앓는 와중에 변소에 불이 난 거라. 변소가 없으니까 제일 만만 한 게 초등학교야. 당감초등학교까지 막 달려가서 볼일 보고 가는 거야. 나 중에 정화조가 발달하니까 집에다가 정화조를 묻고 변소를 쪼그마하게 만 들고, 1층에 장판 멋진 거 깔고 붙이고 이러면 냄새 안 나는 거야.
#마을의 기원
_ 할머니들 이야기 들으니까 옛날에 그물 만드는 부업도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삼해어망이라고 부암동에서 어린이대공원 쪽으로 가면 어망공장이 있었 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 거기에 아줌마들이 뜨개질하는 모양으로 그물을 엮는다고. 그런 걸 많이 하고 다녔다고. 지금도 그 당시에 그물 했던 분들이 원양어선 배에 그물 꼬여서 터진 것 출장 나가면 하루에 일당 10만 원에 한 다. 그때 그 아줌마들이 제주도까지 출장 간다더라. 회사는 여기는 없고 어 디 있는지는 모르겠어.
_ 살기 좋은 당감동? 지리학적으로 살기 좋은 데야. 여기가 사람 살기 좋고, 양지 바르고, 교통 좋고. 엄청나게 좋다캐. 옛날에 여기 화장터가 있을 때는 당감동이라고 하면 전부 ‘당감동 화장터’ 이랬는데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딴 데 안 가. 서면 가 깝제, 직장 좋제. 또 큰 사고가 안 나. 1959년도 사라호 태풍 때 암만 비가 많 이 와도 이 지역은 물이 넘치는 데가 없어. 지형이 높아. 사라호 태풍 때 나도 여기 살았는데. 돌이 휭 날라 댕겨서 겁이 나긴 했어도 괜찮았어.
#동평현 #가전제품 팩토링 #구의원 #귀환 동포 #범전동 양키촌 #시장 #253번지 #공동변소 #어망공장 #사라호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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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이 정착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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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부두의 피란민 (인터넷 자료)
당감동은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피란민들의 삶을 간직한 곳이다. 또한 그들의 생활습관이 남아있는 지역으로 정체성이 뚜렷했던 곳이다. 피란 세대는 이 제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당감동에 정착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마을의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지금은 마을이라는 틀 속에서 주민으로서의 동질감과 연대감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당감동에 정착한 피란민의 유형은 몇 가지로 나뉜다. 우선 1951년 1·4후퇴 당시 내려온 피란민들이다. 함경도 사람들은 흥남부두에서 미 군의 LST(수송선)를 타거나 개인선박을 이용해서 거제도에 도착했다. 거제도에서의 삶이 녹록치 않자 이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지고 부산에도 대거 유입되었다. 그리고 피 란민 집단 이주 계획의 일환으로 당감동에 있는 철도청 땅에 건물 150동을 건설하고, 1954년 8~9월에 300세대를 이주되기도 했다. 한편 황해도 사리원 철도공무원들이 열 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역 도착 후 이들은 당감동으로 보내져 그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가족이나 고향 사람의 소식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에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 출신의 피란민들이 당감동으로 모여들어 피란민 거주지는 더욱 확장되었다. 당시 당감동 피란민 수용소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피란민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 합 법적으로 주거 공간을 마련할 수 없자 많은 피란민은 빈 공터만 보이면 판잣집을 짓기 시
#피란민이 정착한 곳
작했다. 판잣집의 환경은 열악했다. 크기도 작을뿐더러 재료가 판자 부스러기나 미군 부 대에서 나온 박스로 만든 것이었으니 겨울이면 창문도 온전치 않아 찬바람이 들이쳤다. 집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귀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땅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이웃에 다른 피란민이 오면 자신이 잡은 자리를 내어주기 도 했다. 물론 그 부지는 철도 부지였고, 건물은 무허가 건물이었다. 나중에 불하를 받아 자기 소유로 만든 집도 있었다. 피란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일을 했다. 남자들은 철도와 미군 물자 재 활용 유통사업소에서 노무자로 일하거나 이후 부산육군통신기지창에 시험을 쳐서 문관 이 되기도 했다. 고향 친구나 이북 사람들의 부탁으로 미군 부대 등에 취직하기도 하였다. 여성들은 구시장 주변에서 장사를 했다. 많은 피란민들이 모여들면서 보육시설과 교회가 등장했다. 전쟁 직후 수정동에 설립한 매실보육원은 1954년 5월 당감동으로 이전해 왔 으며, 남도교회, 당감제일교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등이 전쟁 중에 설립되었다. 피란민들은 부산의 여기저기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만들었다. 피란 와서 먹고살기 위 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터는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 는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에게 또 다른 가족이자 울타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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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깨끼 바느질로 터전을 만들고 세대를 잇다
이복술
1932년생, 65년째 거주
문미영
1961년생, 33년째 거주 <예단사랑> 운영 이복술은 흥남부두에서 군함에 몸을 싣고 전 쟁터를 빠져나왔다. 10명이 넘는 가족들과 남쪽 바다에 닿았다. 장사라도 해야지 싶어 된장이며 꽁치를 떼 왔지만, 도무지 손님들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보다 못한 이복술의 어머니가 일일 이 장사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렇게 10 년을 건어물 장수로 살고, 한복집을 열었다. 이불 홑청도 박고, 깨끼 바느질로 정성스럽 게 지은 한복을 팔았다. 그러다 문미영을 며 느리를 맞이하고 함께 한복집을 꾸린 지 33 년째다. 그래도 며느리에게 바느질을 가르치 지 않았다. 바늘을 잡고 밤을 새우던 시간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문미영도 시어머니의 그 마음이 그저 고맙다. 두 사람은 삶의 터전을 2대째 이어가는 게 자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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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이 정착한 곳
이복술 할머니 이야기 흥남에서 거제, 거제에서 부산으로 : “식구들이 많이 내려왔거든. 10명이 넘었는데 방 하나에 이리저리해서 살았어.”
_ 피란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우리는 흥남 비료공장 옆에 살았는데, 거기는 농사라는 게 없고 직장 다녔 지. 우리 오빠들은 사무 계통으로 일하러 댕겼지.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피란 왔어. 어딘 줄도 모르고 배 타고 오니까나 거제도 내려주더라고. 거기 가 어딘가도 몰랐는데, 옛날에 학교 댕길 때, 지리, 역사 배울 때 거기 나왔거 든. 거제도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라고 할 때 여기 어디냐 물어봤지. 거제도 장승포라 하더라고. 피란 나올 때 열아홉 살에 나오니까나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일학년 들어가서 그래 하니까 사람들 앞에서 말할 줄도 몰라가지 고. (웃음)
피란 나온 사람들을 연초국민학교에다가 막 넣어 놓으니까 사람들이 막 바글바글하거든. 학교에서 밤새우고 새벽에 피란 온 사람들을 각처에다가 배치를 시키더라고. 주위에 아무도 없고 골짜기에 들어가야 초가집이 한 대여섯 채 있고, 한참 더 가면 또 그런 골짜기와 집이 있더라고.
거제도 사람들 인심이 얼마나 고운지 피란민이라고 구별 안 했어. 그때 12 월이니까 되게 춥잖아. 자기네 아래채에 데려다가 있으라 하면서 불도 뜨뜻 하게 넣어주고 곡식이랑 물건들 다른데 이동시키고, 거기서 살아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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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우리는 식구들이 많이 내려왔거든. 10명이 넘었어. 내가 둘째. 우리 피란 나올 때 나까지 여형제 너이, 남형제 너이. 아버지, 엄마, 며느리까지. 거기 방 은 하나래도 뭐 이리저리 해서 거기서 살았어.
거제도 사람들이 우리가 배급으로 주는 거 갖고 먹고살기 힘드니까 싹도 갖다 주고, 된장도 갖다 주고, 보리쌀도 갖다 주고 참 잘하더라고. 남의 신세 를 자꾸 질 수는 없고 하니까 우리 오빠 둘이 부산에 와서 자리 잡고 나서 우리가 부산 왔지. 부산이 어딘지도 몰랐지. 그래가 내가 직장 구한다고 했 는데 나이가 얼마 안 되니까 너는 밥해라, 했지. 아버지하고 오빠들이 나무 를 얻어왔는가, 사 왔는가, 나무를 갖고 하꼬방 집을 지었더라고.
_ 원래 있던 집을 구하신 게 아니라 지으셨네요. 없어. 그때 여기에는 집이란 게 없고 저기 안동네 들어가면 기와집이 몇 개 씩 있었지. 여기는 이북사람들이 많이 흩어져서 하꼬방부터 지었어. 그래갖 고 내 집이라 하고 여기서 산 게 65년 된 거우다.
결혼과 장사의 시작 : “우리 어머니가 먼저 부전시장에 가서 된장, 꽁치, 김 그런 거를 사다가 주면서 팔아라 하면서리”
_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열아홉 살에 피란 나왔는데 결혼을 스물 너이에 했지. 우리 아저씨도 이북
#피란민이 정착한 곳
에서 나온 사람이었지. 철도부대에서 만 5년 만기제대를 했더라고. 그 사람 고향은 이북 문진인데 혼자 나왔어. 누가 중매해서 결혼한 거라. 옛날에 부 모들이 멋대로 살게 안 하거든. 결혼 시켜서 오빠들이 집도 얻어주어서 살림 시작했어.
_ 가게는 원래 이 자리에서 시작하셨어요? 아니야. 가게는 요기 안쪽 시장에서 건어물, 식료품 장사를 했어. 살길이 없으니까 우리 엄마가 그러더라고, 신랑이 직장이 없으면 여자라도 장사해 서 밥 먹고 살아야 한다고. 그때 우리는 스물 너이니까 부끄러워서, 사람 둘 만 서 있어도 부끄러워서 못 나갔지 않아. 어머니가 “아이고야 그래선 안 된 다. 무슨 장사라도 해야지” 했어. 우리 어머니가 먼저 부전시장에 가서리 된 장 같은 거, 겨울이니깐 꽁치 같은 거, 김 그런 거를 사다가 주면서리, 팔아라 하면서리. 요 안에서 며르치니 뭐니 그것부터 시작했다고. 한 10년 가까이 했지. 그래서 저 밑에 하꼬방 집이 나오는 거 보고, 하나 사갖고 내 집이다 하 고 산 거라. 그래하다가 이불도 시작했지.
_ 장사를 친정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거네요.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방법을 아셨을까요? 어머니는 나이가 있으니까. 그때는 피란 나온 사람들이 그런 장사래도 안 하면 살길이 없지 않아. 내가 스물 너이에 결혼해갖고, 스물다섯에 애기 낳 았거든.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일할 때는 애기도 업어주고, 장사를 가르쳐 주더라고. 그러다가 아저씨가 철도부대에서 나와 갖고 부대 문관으로 시험 쳤는데 사람들이 억수로 많이 왔더래. 그중에 혼자서 붙은 거라. 머리가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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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람이. 거기는 오래 있었지. 자기 세상 뜰 때까지 문관직만 하다가 세상 떴다. 마흔아홉 살에.
_ 삼익아파트 있던 자리의 통신기지창 말씀하시는 거죠? 통신기지창이 아니고 저 거제리 군수창에 있었어. 여기보다는 거기가 큰 데라.
_ 건어물 장사 10년 하고 그다음에 한복집 하신 거예요? 예. 그다음에 한복집을 했어요. 미싱만 할 줄 알면, 그때는 피란 와갖고 집 집마다 다 살기 힘든 사람들이니까 이불 홑청 박아달라고 하면 그런 것도 박아주고. 한 가지만 해서 안 되거든. 들어오는 대로 닥치는 대로 다 했지. 한복집이라고 한복만 하면 안 되지. 박아주는 그것도 얼마씩은 받거든.
#피란민이 정착한 곳
_ 건어물과 한복을 팔아서 자제분들 키우신 거네요. 지금은 아들, 며느리와 같이 장사하시는 거고. 내가 하다가 인제는 힘이 모자라니까. 며느리가 시집온 지가 30년이 넘으 니까네. 내가 하는 걸 보고 지도 눈이 있으니까 빨리 깨우치고 하대. 요새는 내가 뒷받침해 주지. 치수 같은 것도 적어주고. 집에 가만있으면 뭐하노. 그 래서 뒤치다꺼리를 해주면 지가 좀 수월하지.
_ 피란 오신 분들끼리 서로 교류가 있었나요? 피란 나온 사람들 그때는 여기 많았지. 살기 힘드니까나 모두 서울, 대전 온 각처에 살기 위해서 돈벌이하기 좋은 데로 다 가버렸지.
_ 옆집에 건어물집에 계신 할머니도 피란 오셨고, 며느리와 가게를 하시더라 고요. 할머니는 옆에서 콩나물도 파셨어요. 우리 동생이에요. 우리 동생도 국민학교 댕길 때 피란 나왔지. 충청도 사 람하고 결혼한 거라. 신랑이 요 통신부대 군인이라. 충청도 시골에서 농사지 었거든. 우리가 장사하는 거 보니까, 지는 새빠지게 농사짓고 땀 흘리고 해도 우리 장사하고 비할 때는 장사가 좀 수월하게 보였나 봐. 촌에서 땀을 흘려 가면서리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 뜨거운데 밭매고 하니까, 그거 안 해본 사 람인데 힘들거든. 그래 그게 부러워서 “언니야, 나도 이런 장사 하면 좋겠다” 그러더라고. 그럼 나와서 장사해라 했지. 토대도 하나도 없는데 우리 형제들 이 도와줘갖고 시작해서 잘 살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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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이 정착한 곳
며느리 문미영 님 이야기 한복과의 인연 : “어머니께서 바느질하면 고생한다고 하지 말라 하셨어요”
_ 결혼 후에 한복집 일을 바로 하신 건가요? 예. 스물다섯 살에 시집왔어요. 시집오니까 어머니가 장사하라고 그러더라 고요. 젊은 나이에 하기 싫죠. 시집에 들어온 거니까, 어머님 도와드리는 목 적으로 시작해서 33년째 장사를 하고 있네요. (웃음) 저도 결혼하고 보니까 시근도 빨리 든 것 같아요.
_ 결혼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옛날에는 대한조선공사 설계실에 있었어요. 지금 영도 한진중공업 거기 있었어요. 시집와서 “뭐 필요하세요?” 소리조차도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 어. 한복을 맞추러 오는 손님은 한복에 눈길이 가고, 이불을 사러 오신 분은 이불을 봐요. 처음에는 못했는데 이제는 지켜보다가 ‘손님이 이불을 보시구 나’ 그러면 “이불 필요하세요?” 하고 물어보죠. 지금은 선수죠. (웃음)
_ 바느질이나 한복집 일들이 성격에 맞아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문) 저희 어머님은 바느질을 하셨어요. 저는 어머니께서 바느질하면 고생 한다고 하지 말라 하셨어요. 옛날에는 인구도 많고 어머니께서 너무 힘든 거 예요. 이 힘든 걸 며느리한테는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10년, 20년 해서 한복 바느질 못 해요. 절대로. 20년은 지나야지 어느 정도 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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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나요. 감사하죠. 그 대신 이젠 바느질한 걸 보는 건 도사죠. (웃음) 한복 원단 을 전부 우리 집에서 다 하고요. 우리 집은 기술자가 있어요. 친척분이. 그분 에게 맡기는 거죠. 제가 만약에 다 하게 되면 손님을 놓치는 경우도 많아요. 어쩔 수 없어요.
(이) 바느질하면 고생이지. 아침에 일찍 입겠다고 하면 밤새 잠 못 자지 않 아. 그러까나 배우면 맘대로 움직이기 힘들지. 요새는 그런 거도 삯만 주면 쉽게 할 수 있으니까 옛날하고는 다르고.
한복집의 변화와 변하지 않는 것 : “아직까지 예단이불은 손으로 해요”
_ 옛날에는 이불을 다 지어서 했었죠? 그때도 혼수는 지어서 했어요. 솜은 타서 오고, 아주머니들이 속통도 하 고 손으로 다 했어요. 일반 이불은 공장에서 나오는 게 있지만 아직까지 예 단이불은 손으로 해요. 그래서 비싸요.
_ 요즘도 예단이불은 무겁게 만드나요? 아니요. (웃음) 옛날에는 주택가가 춥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두껍게 했고, 그때는 솜을 타는 가공이 안 좋았어요. 지금은 기계가 많이 발전하고 가공 이 좋다 보니까 똑같은 목화솜이라도 가볍고 따뜻해요 그래도 화학섬유보 다는 자연 섬유, 누에 꼬치 명주솜, 목화나무 목화솜 그게 최고예요. 저도
#피란민이 정착한 곳
그거는 권하고 싶어요.
_ 결혼해서 오셨을 때랑 지금 가게 모습이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많이 다르죠. 그때만 해도 자그마하죠. 이 동네 자체가 보통 8평, 7평, 4평 이에요.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평수가 커졌지만 제가 시집올 때도 가게가 한 서너 평정도? (인근 가게를 가리키며) 전부 저 정도였어요. 많이 발전한 거 죠. 처음에 조그만 데서 시작해서.
_ 혹시 옛날부터 쓰던 물건이 있나요? 오래된 건 없는데 요거 있어요. (선반에서 물건을 꺼내 보여주며) 요거는 33년이 넘었어요. 가위집. 우리나라 건데 요즘은 가위집이 이렇게 안 나와 요. 수입품이 얄궂게 나왔어요. 이게 너무 오래되다 보니까, 제가 이것만큼 은 간직하고 있어요. 시집오니까 어머니 가게에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 이 손자수로 만든 거예요. 너무 이뻐서 제가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까워서 가위도 못 넣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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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에 대한 생각 : “ 우리 어머니가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세 번은 새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 세요”
_ 예전에는 명절 때면 한복을 많이 했을 텐데, 풍경이 많이 다르죠? 많이 다르죠. 저희가 제일 아쉬워하는 부분이에요. 한복이 사실은 그다지 고가가 아니에요. 너무 거품이 많아요. 70~80년대, 80~90년대 지나면서 시내에 세가 굉장히 올라 버렸어요. 한복 단가 차이는 사실 별로 안 나는데 세 사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까 고가가 된 거예요.
그리고 제일 아쉬운 부분은 신부가 한복을 대여한다는 거예요. 우리 어머 니가 항상 그런 말씀을 하세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세 번은 새 옷을 입 어야 한다고 해요. 한 번은 애기가 태어나서 배냇저고리, 두 번째로는 신부 가 시집갈 때, 그리고 세 번째가 돌아가실 때 수의 옷이에요. 요즘은 신부들 이 대여를 많이 하잖아. 그것도 한복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럴싸한 큰 매장을 하면서 달세가 많이 나가니까 그만큼 많이 부르는 거예 요. 우리 집은 대여 잘 안 해요.
_ 한복이 평소에는 잘 안 입게 되니까 그런 거 같아요. 그런 것도 있어요. 옛날에는 외출할 때 한복 입고 나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도 신부는 새 옷을 입는 게 나아요. 우리 어머님이 또 그러세 요. 너무 가볍게 모든 걸 다 돈으로 처리하다 보니까 이혼이 많은 거라고. 저 도 결혼하니까 밥 세 끼 해야 되죠, 장사해야 되죠, 연년생 머스마 둘이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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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죠. 너무 힘든 거예요. 그 대신 결혼식 할 때 우리 엄마, 오빠 전부 힘들게 사돈끼리 보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이혼을 하겠노 싶은 생각이 들 때 있어 요. 옛날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더라고. 요즘은 너무 가벼워요. 그 래서 나는 한복 이야기하면 가슴이 아릿해요. 얼마든지 맞춰 입을 수 있는 걸 너무 고급화시키다 보니까 못 맞춰서 입는구나. 우리 집 맞춤은 저거 30 만 원 밖에 안 해요. 속옷 전부 다 포함해서요. 우리 집 오면 100% 다 해요. 싸고 이쁘니까.
_ 어머님은 아까 사람이 태어나서 세 번은 새 옷을 입는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은 이야기인가요? (이) 옛날 할머니들이 빌려 입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면 다행인데, 이혼했던 가 뭐 했던가 하면 그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절대로 옷 그 런 건 돈이 없어도 빚을 내서래도 해 입히더라고. 그게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 이에요. 근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 몰라.
_ 한복도 유행이 빨리 바뀌나요? 빨리빨리 바뀌는 편은 아니지만, 유행이 좀 가요. 한복도 시대적으로 따라 가 줘야 해요. 그런데 기본은 있어야 되죠. 우리 깃이라든가 선에서 기본적 인 건 있어야지. 개량은 필요해요. 우리 집 같은 경우는 추석, 설날에 애기한 복들. 옛날에는 참 잘 됐어요. 지금은 추석이라고 몇 벌 못 팔아요. 학원에서 재롱잔치를 위해서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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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시장의 옛 모습 : “시장이라고 하면 골목도 좁고 엉덩이도 부딪히고. 옛날이 더 좋아요”
_ 당감시장에서 옛날엔 잘 되다가 지금은 없는 업종 같은 게 있나요? 옷가게가 많이 없어졌어요. 사이트에 들어가면 옷을 얼마든지 살 수 있잖 아요. 그리고 앞전에만 해도 반찬가게가 없었어요. 그런데 반찬가게가 활성 화되고 하시는 분들이 다 부자예요. 반찬가게가 제일 잘되고 식육점, 과일가 게가 당감동에서 잘 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제가 봤을 때는 그래요. 아마 다니다 보면 느끼실 거예요. 주로 먹는 거잖아요. 그리고 여기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 많고, 외국인들도 있고.
_ 외국인들이 많이 사나요? 옛날에 한 80. 90년 때만 해도 사상 쪽에 외국인이 제일 많았어요. 그러 고 한 2000년대 지나서 구포나 김해 쪽으로 갔어요. 왜냐면 방이 싼 쪽으로 외국인들은 다닐 수밖에 없어. 지금 러시아 사람도 있고, 중국 사람도 있고, 많아요. 달세가 싸니까 여기로 넘어오는 거예요. 우리도 산 쪽으로 찾아가 듯이 외국인도 그래요. 산 쪽으로 찾아다녀요. 직장에서 가깝다면. 현재 당 감동에 외국인들이 딴 데 보다 많이 늘었죠.
_ 당감시장은 옛날 본시장이고 여기 앞은 골목시장인데 한복집은 어느 시 장으로 들어가요? 지금 딱 요 라인만, 사각만 본시장이예요. 우리는 새시장으로 되는 거예 요. 여기 골목 라인만 본시장. 여기 들어오는 호떡집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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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는 전부다 바깥 시장이에요.
_ 골목시장 바깥쪽은 도로를 넓힌 거라고 하더라고요. 도로를 넓히고 깨끗하게 정돈 하는건 저희 입장에서는 좋죠. 근데 시장스 럽진 않아요. 아무래도 시장이라고 하면 약간 골목도 좁고 엉덩이도 부딪히 고. 옛날이 더 좋아요. 우리 가게 앞은 아직 추석이나 설날 되면 비좁고 그래 요. 엉덩이도 부딪히고 그래요. (웃음) 정감 있어요.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바람 : “상인들이 다 같이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보듯이 계속 봤으면 좋겠어요”
_ 이 한복집은 언제까지 유지가 될까요? 장사는 안되지만 나는 2대라는 게 참 뿌듯해요. 33년 동안 할 줄 몰랐어 요. 우리 어머님은 60년 가깝고. 내 아들도 직장생활이 힘들다면 하라고 하 고 싶어요. 누군가는 가야 돼요. 지금 경기가 어렵다고 해서 접어버리면 곤 란하죠. 우리 집 같은 경우는 대여도 하고 맞춤을 하죠. 맞춤하는 이유가 나 혼자 살고자 하는 게 아니라 치마, 저고리 하시는 분도 있거든요. 그 기술자 를 살려야지. 깨끼 바느질은 세 번 바느질해요. 한 번 박고, 두 번 박고, 세 번 박음으로 해서 깨끼 바느질이에요. 그냥 두루룩 박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걸 하는 기술자들은 키워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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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좋은 얘기네요. 할머니도 옛날에 손으로 세 번씩 박고 하셨겠네요. 미싱은 안 쓰셨나요? 힘들죠. 손톱이 다 닳아요. 손바느질 세대는 우리 어머님 젊었을 때까지. 미싱이 들어와서 너무 신기한 거예요. 손으로 하면 몇 날 며칠 걸렸어요. 미 싱으로 하면 선을 딱 잡고 일자만 곱게 간다면 너무 잘 되는 거예요. 미싱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많이 바뀌었죠.
_ 당감동에서 어떤 건 이어져갔으면 좋겠고 어떤 거는 변화했으면 좋겠다 하 는 게 있으세요? 당감동 인구가 그래도 아직까지 많은 편이고, 딴 시장보다도 큰 편이고, 문 닫은 가게가 별로 없어요. 타지방에서 혼수 하러 간혹 오시면 놀라세요. 이 렇게 큰 시장은 처음 봤고, 물가도 너무 싸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정이 많아 요. 아직까지 당감동 시장은 덤도 있어요. 물건을 사면 끼워주고 하는 건 있 어요. (웃음)
아파트가 들어서고 하니까 빈집이 많아요. 저녁에 들어가면 골목이 무서 워요. 우범지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행히도 요즘 골목에 외 등을 많이 달아놨더라고요. 시에서 그건 참 잘했어요.
변화보다는 쭉 이랬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 빈 가게가 없다는 것도 감사 하게 생각하고, 사람들 찾아주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여기서 더 욕심 을 부리는 건 무리죠. 바라는 점은 상인들이 다 같이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보듯이 계속 봤으면 좋겠어요. 그다음 날 셔터가 안 올라가면 ‘저 가게 내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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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장사가 옛날만큼 안 되지만 그래도 가게 문 열고 아침에 모닝커피 마시고 그것만 해도 감사하죠. (웃음)
#피란민 #흥남부두 #거제도 #건어물 장사 #한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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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사람을 홀로 두지만, 할매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김꽃분
1937년생, 69년째 거주 구멍가게 운영 꽃분 할매는 흐트러짐이 없다. 지난 기 억들이 마치 어제처럼 또렷하다. 당감동 에 도착한 때는 겨울이었다. 1·4후퇴 때 전쟁을 피해 여덟 식구가 무작정 남쪽으 로 내려왔다. 보름만 있으면 다시 돌아 갈 줄 알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넘 긴 게 벌써 70년이 훌쩍 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피란길에 쌀 대신 벽걸이 시 계, 모기장, 요강을 실었다. 어머니는 타 박했으나, 모기장은 새벽이슬을 훔쳐 주 었고, 벽걸이 시계는 끝없는 시간을 견 디게 해줬으며, 요강은 모두를 살게 했 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버지의 지혜로움 에 그저 웃음이 난다. 추억은 그게 전부 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날이 고생이었 다. 하꼬방에서 불볕더위와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지만, 맹렬하게 살고자 했고, 할매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평생 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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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서울 거쳐 부산으로 “기차 대가리 하나, 큰 방통 하나를 타고 피란 왔어요”
_ 언제 부산으로 오셨어요. 피란 나오기는 열네 살에 나오고 본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 거기서 나왔 어요. 이북에서 우리 아버지들이 기관차 조역으로 있었거든. 국군이 밀려올 때에 일부는 진남포 쪽으로 내려갔고, 우리 가족이랑 아버지 동료 가족들은 기차 대가리 하나, 큰 방통 하나를 타고 이불하고 쌀 몇 되씩 싣고 피란 왔어 요.
기차 타고 서울 와서 내리니까 단체로 왔다고 국민학교 두 칸을 내주더라고. 그때 알랑미 쌀을 배급으로 주더라고. 국군이 후퇴하면서 한강 건너온다니까, 그 기차 타고 부산으로 왔어. 본 역에서 내려가지고 하룻밤 자고, 그때는 여기 가 당감동이라는 건 모르고 조차장으로 가라해서 여기 오니까 그때 보리가 요 만하게 나오고 있더라고. 여기 집도 없고 저 안동네에 몇 집 있고. 그때 수용소 를 하꼬방으로 짓더라고. 서울 사람부터 자리가 오고, 이북 사람은 자리가 나 중에 오던데, 뒤쪽으로 움막을 파가지고 볏짚으로 지붕을 엮어서 주더라고.
이북에서는 문맹자를 없이 한다는 문맹자 퇴치라는 게 있어가지고 할마이라 도 자기 이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여기와선 학교 못 댕기지. 학교만 댕겼으면 살기가 괜찮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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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추억 : “저 요강 아니었으면 우리가 다 우짤 뻔했어요”
_ 피란 올 때 기억나는 이야기를 더 해주세요. 피란 나올 때 딴 사람들은 다 쌀을 싣는데 우리 아버지가 보름만 있으면 온다, 쌀은 닷 되만 실어라 하고, 벽걸이 시계, 모기장, 요강, 펜치, 망치 그런 거를 실어. 우리 엄마는 쌀을 한 톨이라도 더 싣지 어쩌자고 그러냐니까, 모 르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있어, 그래. 벽시계를 방통에다 걸어놓더라고. 방 통 안에 등이 있길 하나, 비좁게 들어앉았어. 시계를 보면, 몇 시 됐다, 그래. 남자들이 어데 쯤 가면 밥을 할 테니까 쌀을 꺼내 놔라 그러면 여자들이 깔 고 앉아서 온 쌀자루에서 쌀을 꺼내고, 남자들이 우물 있는데 내려가서 밥 을 해. 우리 아버지 망치하고 펜치를 갖고 나가서 나무를 쪼개서 그걸로 불 을 때더라고. 요강을 또 가져오니까 그땐 서른 몇 살 된 엄마들이니까 애들 이 다 작잖아. 차가 출발했는데, 엄마 오줌 매려와, 똥 매려와, 마 난린 기라. 안에서 눠가지고 방통 문 열고 쏟고, 우리 친정아버지 넘의 아들 똥 눈 거 차 대가리에 가서 물 받아서 부셔갖고 오고. 요강이 10분도 쉴 새가 없더라고. 그래 사람들이, 아이고 아무개 아버지는 어쩜 요강 가지고 나올 생각을 했 냐고, 저 요강 아니었으면 우리가 다 우짤 뻔했냐고, 그래.
여기 내려와서 집이 없으니까 찬 데에서 자야 되잖아. 부산역 본 역 앞에 서 우리 아버지가 망치를 가지고 어디 가서 나무를 몇 개 잘라서 땅에다가 박더니 모기장을 치더라고. 딴 사람들은 아침에 이불이 이슬에 다 젖잖아. 근데 우리는 모기장이 이슬을 가려줘서 이불이 하나도 안 젖더라고. 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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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가, 다 내가 이유가 이래서 가져왔지 않나, 그러는 거야. 모기장 도 매일 쓰다가 착착 싸서 놔뒀더만은 오래되니까 팍삭팍삭 삭아서 가루가 됐더라고. 그건 버리고 요강은 아직 있어요. 저기 다락 구석에 놔났어.
_ 피란 와서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셨어요? 철도 공무원이니까 철도 일을 하셨나요? 그렇진 않고. 여기 통신부대라고 있었거든요. 맨 처음에 나왔을 때는 통신 부대가 없고 요 앞에 철도에서 더 들어가면 미군 부대 물품 재고들이 있었거 든. 여기서 노무자들 많이 써. 거기에 노무자로 많이 다녔지. 그러다가 통신 부대 생긴 다음에 우리 아버지가 시험 쳐서 문관으로 댕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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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물려던 땅에서 70년 : “땅을 내가 먼저 잡았어도 옆에서 같이 살자 그러면 뚝뚝 떼 주고 그랬지”
_ 피란 왔을 때 보리가 있었다면 누가 농사를 짓고 있던 땅이었던 건가요? 농사를 지었겠지. 거기에 수용소 지어 살다가 각자 집을 짓고 살면서 나중 에 땅을 불하받았지. 원래는 전부 철도 땅이더라고. 불하 안 받은 사람들은 지금도 땅세를 1년에 얼마씩 내고 있어요.
_ 옛날에 살던 집은 어땠나요? 그전에는 판잣집을 짓고 루핑라고 골탄 묻힌 종이 두꺼운 거 있죠? 그걸로 지붕 씌우고 살았지. 살다가 차차 보로코 쌓고, 슬레이트 넣고 살았지.
수용소 지을 때 건물만 지어놨지 칸칸은 안 막아줬거든. 한 칸씩 주니까 이불 보따리, 옷 보따리로 막는 거지. 이 우에까진 못 막아지지. 일어서서 말 하면 옆방이 다 보이겠지. 그러다 차차 수용소가 없어지면서 돈 버니까 수용 소 자기 자리에다가 집을 다 고쳐 짓게 된 거지.
올 때 빨리 있으면 일주일, 오래 잡으면 보름이면 갈 거라고 한 것이 70년 이 됐나. 그니까 땅을 내가 먼저 잡았어도 아는 사람이 와서 옆에서 좀 같이 살자 그러면 뚝뚝 떼 주고 그러면서 살았지. 그래서 집들이 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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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깨끗하고 많았던 곳 : “국수 삶아서 건져놓고, 빨리 우물에 가서 물 길어서 오이냉국 타먹고 그랬지”
_ 여기 와서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처음에 땔 나무도 없잖아. 여기 큰 길이 반은 도로, 반은 개천이었거든. 물 귀할 때는 거기서 쌀 씻어서 밥해 먹고, 빨래해 입고, 저녁에 애들은 나가서 목욕하고. 어른들도 저녁 되면 다 거기 나가서 목욕했어요. 여자들은 요 밑 에 남자들은 저 위에. 까만 비누가 있었어. 그 까만 비누가지고 빨래하고 머 리도 감고 그리 살았어.
_ 여기 물이 깨끗했을 것 같아요. 물이 깨끗했죠. 선암사부터 내려와서 장마가 지면 윗동네 사람들 오만 살 림이 다 떠내려오고. 비가 멎고 나면 선암사 쪽에서 모래가 개천으로 많이 나오는 거라. 그러면 가서들 자리를 잡는 거라. 여기는 내 자리, 여기는 니 자 리 해갖고, 그 모래를 퍼 놨다가 나중에 팔고.
_ 먹는 물은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그때는 수도도 없잖아요. 바가지 우물이 있어서 깡통으로 물 길어다 먹고. 우물이 저~기 안동네도 있었고, 요 위에도 있었고, 삼익아파트 뒤에도 있었 고. 그때는 여름에도 찬 물이 어데 있노. 국수 삶아서 오이냉국에 타 먹을라 해도 길어놓은 물은 미지근하잖아. 국수 삶아서 소쿠리에다 건져놓고, 빨리 물동이 가지고 우물에 가서 물 길어 와서 오이냉국 타 먹고 그랬지. 그때는 얼음이 어디 있고, 냉장고가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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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그때 물 한번 길으러 가면 깡통에다가 끈 달아서 가지고 갔어. 우물 이 넓으면 사람들이 많으니까 물이 딸려. 어떨 땐 한 공기밖에 안 나와. 깡통 끈이 막 뒤죽박죽이 엉켜서 풀고 막. 수도도 맨 처음에 나올 때는 한 집에 하 나씩 안 놔줬어. 두 집, 세 집에 하나씩 나오고, 시간제로 나왔지. 전기도 계 량기를 한 집에 달아갖고 거기서 연결해서 세 집씩 쓰기도 했지.
구시장의 시작과 쇠퇴 : “다라이 들고 와서 쭉 앉아서 팔기 시작하니까 여기가 시장 줄이 된 기라”
_ 구시장 골목이 꽤 길어요. 길지. 우리 왔을 때는 이 골목에 이쪽으로는 일본 사람들이 살던 관사였다 고. 일본 사람들이 말 키우는 집도 있고, 관사도 있고 이랬는데 피란민들 다 들어서갖고 다 헐렸지.
_ 구시장은 어떻게 생긴 건가요? 우리가 저쪽 앞쪽 수용소에서 살다가 여기에 하나둘 나왔지. 사람이 먹고 살아야 되니까 요만한 다라이에 두부도 갖다 파는 사람, 새우젓 같은 거 이 런 거 전부 다 가지고 여기들 쭉 앉아서 팔기 시작하니까 피란민들이 그걸 조금씩, 조금씩 사다 먹으니까 여기가 시장 줄이 된 기라. 여기서부터 저 위 에까지 쌀장사도 생기고, 약방도 생기고. 우리는 저 짝에 수용소에서 살다 가 이리 나와 갖고 이 집을 짓고 이 앞에서 장사하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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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어떤 장사를 하셨어요? 맨 처음에는 부식이지. 한동안은 그만뒀다가 우리 친정아버지가 피란 와 서 일찍 돌아가셨어. 한 3년 있다가 가셨어. 동생들이 쫄망쫄망하고 그래서 고생을 많이 했어. 엄마랑 가게 같이 하다가 나중에는 엄마는 저 짝에 시장 에 나가서 하고, 나는 집에서 삶아 팔고 하는 거 손질해서 시장에 내다 주고 그랬지.
_ 시장 일대는 장사가 제법 됐을 거 같아요. 그전에는 크게 했지. 부식도 팔고 했는데 이제는 마트가 많이 생기고, 내 나이도 먹고 그러니깐 문 닫아 놓긴 뭣하니까 심심풀이로 하고 있어요. 공장 많았을 때는 이미 많이 없어지고 드문드문 있었지. 구멍가게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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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람, 남편 : “결혼해서 살면서 우리 영감이 많이 도와서 살았지. 나한테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_ 좀 커서는 직장을 다니셨나요? 직장은 얼마 안 다녔어. 집에서 그저 엄마 장사하는 거 돕고, 직장생활은 저 위에 베 짜는데 쪼금 다니다가 그만두고. 먹고살기야 그저 힘들지. 우리 엄마랑 나랑 열심히 벌어서 남동생은 대학 나오고 나머지도 고등학교까지 는 다 시켰어. 저희들은 다들 밥 벌어 먹고살아요. 내가 결혼해서 살면서 우 리 영감이 많이 도와서 살았지. 우리 동생들 다 공부시키고 그랬지. 저 영감 이 나한테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_ 몇 살 때 결혼하셨어요? 스물 서이. 중신해가지고. 조병창, 지금 풍산금속 됐잖아요. 우리 영감이 거기 있었거든. 우리 고향에서 아버지 밑에 있던 사람이 거기 있었어. 그 사 람이 중신했지.
_ 그때는 신혼여행 없었죠? 그때는 신혼여행이 없고, 다 구식으로 했어. 그래도 우리는 서면 원앙예식 장에서 했고, 시발택시라는 게 있었어. 요렇게 야트만한 거 신랑신부 타는 게 있었어. 서면서 결혼식을 하면 대신동 공설운동장 돌아가지고 자갈치 시 장으로 해서, 제 2부두, 제 3부두로 해서, 조방 앞에서 동래 온천장으로 가 서 금강원 한 바퀴 돌고, 신랑 집으로 가지. 그게 보통 택시보다 비싸. 얼마 있다가 없어졌어. 신랑 집에서 신부 우인들 몇 명, 신랑 모임들 대표 몇 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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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피로연 하는 거라. 저기 방안에 걸린 게 우리 결혼사진이거든. 그래도 우 리는 한복 입고 면사포 쓰고 했어.
_ 요즘 이산가족 상봉도 많이 하는데 만날 분 없으세요? 친척은 우리 삼촌 하나 있는데, 우리 삼촌도 늙어서 안 계시겠지. 우리 영 감 쪽으로는 많지. 영감 살았을 때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안 하더라고. 우리 명단이 가면 저쪽에 있는 형제간들한테 지장이 많다 이거라. 형제들이 월남 해서 반동분자 가족으로 몰리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 살아 있다는 걸 알면 동생들이 더 고통을 받는 거라. 그래 우리 영감이 신청을 안 하더라고.
당감동 살이의 기억 : “꿀꿀이나 먹는 거를 사람이 먹는다 해서 꿀꿀이죽이라고 했지”
_ 병원은 있었나요? 아프면 어디 가셨어요? 맨 처음에는 병원이 없다가 한 1년 있다가 시장에 구세병원 하나 있었고, 여기 동제병원, 여짝으로 가면 유성병원 하나 있었고. 약방 같은 건 한 두어 개 있었고. 이북에서 좀 배운 사람들이 병원을 차려 갖고. 구세병원 그 영감 님이 나이 제일 많았고, 여기 유성병원에는 통신부대 군의관으로 있었던 양 반이라 참 좋았어요. 수술하거나 그러지는 않고 그저 감기몸살 같은 거 진 찰해갖고, 맹장이 걸렸으면 빨리 서면으로 가라고 보내주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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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옛날 사진을 보니까 미군들 옷도 빨아주는 세탁소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도 있었지. 많았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옷 입고 댕기다가 걸리면 또 뺏기고. 미군 부대 국방색 옷을 사면 그걸 퍼뜩 까만 염색을 해서 입었지. 이 걸 자꾸 파고들면 곤란하다니까는. (웃음) 거기 댕기는 사람이 어째 슬쩍 해 와서 헐케 파는 거지. 옷이 질기니까 입던 거 재 놓으면 훔쳐 오는 사람도 있 고, 싸게 뒷구녕으로 팔면 누가 사서 딴 사람한테 팔고. 그것만 전문으로 사 고파는 사람들 있잖아. 하야리아 부대 말고 여기 미군 부대. 담요도 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국방색 담요들. 또 쑥색 내복이 춥다고 앞에 겹단이 돼 있어. 등허리하고 앞에. 그 인기 좋았어요. 잘 팔렸어.
여기 미군 부대 미군들이 먹던 깡통에 오만 거 다 들었지. 햄도 들었고, 콩 도 들었고. 미군들 버린 깡통에 조금씩 남는 거 그걸 가지고 와서 솥에다 쏟 아서 끓여가지고 한 그릇에 얼마씩 팔고. 꿀꿀이죽이라고 팔어.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거 사다 한 그릇씩 먹었어. 영양가는 많잖아 그게. 꿀꿀이나 먹 는 거를 사람이 먹는다 해서 꿀꿀이죽이라고 했지.
철도에 기관차가 그때는 석탄을 때잖아. 석탄 다 타고나면 곡수가 돼서 숯 이 돼서 나와. 그러면 우리들이 깡통 가지고 나가서 숯을 주워 다가 불피워 서, 냄비에다 밥해 먹고 그렇게 살았어.
#피란민이 정착한 곳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 : “난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_ 같이 피란 왔던 친구가 있나요? 이제 몇 명 없어. 같이 피란 온 우리 친구는 여기 네 명 같이 살고 있지. 사 리원서 살던 아이는 두 명이 있고, 사리원에서 30리 떨어져서 황주라는 데 살던 아이가 하나 있고, 거기에서 또 30리 가면 흑교라는 데서 나온 아이가 또 하나 있고. 해 질 무렵에 나오면 여기서 매일 만나지.
_ 여기 되게 오래 사셨잖아요. 여기서 계속 사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난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여기서 이웃들끼리. 우리 아이들은 다 김해에 있거든. 아휴 난 거 가보면 답답해서. 여기 좋아요. 바깥 나갈 수도 있 고, 서로 노나 먹기도 하고, 아프면 와서 디다 보기도 하고 좋지 뭐. 근데 이 제 옛날 사람들은 많이 없어지고 지금은 각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라. 옛 날카만 못하지.
※ 구술자의 요청으로 본명과 얼굴 사진을 쓰지 않았습니다.
#피란민 #황해도 사리원 #기관사 아버지 #요강 #수용소 #개천 #우물 #구시장 #시발택시 #병원 #꿀꿀이죽 #고향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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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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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감동에는 북한 고유의 맛과 모습을 나름대로 이어가고 있는 유명 냉면집이 네 곳 있 다. 그리고 골목을 다니다보면 피란민이 운영한 냉면, 밀면집이었던 흔적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지역에는 세 곳의 유명 냉면집이 있었다. 모두 이북에 서 피란 온 주민들이 만든 냉면집이지만 각각의 맛과 개성이 다르다. <본정냉면>은 전 주인의 고향인 함경북도의 동네 지명을 딴 것이라고 한다. 함흥식 비 빔냉면, 평양식 물냉면을 메뉴로 표기해 놓고 판매하고 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지금의 주인이 동생과 연구를 하면서 타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맛집이 되었다. 음식에 사용하는 채소도 직접 키워 자신 있는 맛을 내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특이하게 대표적인 여름 음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밀면은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 동안만 판매하고 있고 그 외에는 냉면을 주로 판매하고 있다.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사리원> 입구에는 ‘50년 전통의 3대째 맥을 이은 밀·냉면 전문점’이라는 문구가 있 다. 1·4후퇴 때 황해도 사리원에서 부산으로 피란 온 할머니에 이어 딸과 외손녀(현주 인)로 대를 이은 냉면집이다. 냉면과 밀면 이외에도 육수를 활용한 어북쟁반, 수육, 빈대 떡, 육개장, 갈비탕 등을 판매한다. 겨울에는 잠시 휴식기를 가지는데 마을 사람들이 미 리 육개장, 갈비탕과 같은 음식을 주문해 놓는다고 한다. <흥남냉면>은 이름에서부터 이북 냄새가 물씬 난다. 이 집에서는 물냉면과 비빔냉면 구분이 없다. 비빔으로 먹다가 육수와 양념을 기호에 맞게 추가하면 물냉면으로 변신하 는 독특한 형태다. 대를 이어 따님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냉면, 밀면, 갈비탕, 육개장 으로 메뉴가 단순하다. 이 세 개 냉면집과는 외떨어진 <시민냉면>은 신발공장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당감 동으로 들어왔다. 이북 출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냉면 제조 기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가게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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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의 기억이자 한반도를 종단한 역사의 맛
계임옥
1960년생, 59년째 거주 <사리원> 운영 계임옥의 외할머니는 전쟁의 포화 속 에서 10명의 식구들과 부산에 닿았다. 황해도가 고향이었던 할머니는 한복 을 짓고, 냉면을 팔아 8남매를 건사했 다. 자식들은 그 솜씨를 물려받아 냉면 집을 냈다. 당감동 253번지 사람들이 이북의 냉면을 즐겨먹는 이유다. 갓 뽑 은 메밀면은 계임옥의 외가 사람들이 황해도에서 가져온 기억이자, 그녀를 키운 유년의 맛이다. 육수 주전자를 들 고 심부름 다니던 아이는 집안의 역사 를 품고 동네를 지키고 있다. 냉면 한 그릇은 비단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 떠 나온 고향과 새로운 터전이 꾹꾹 눌러 진 역사의 맛이다.
당감 스토리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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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냉면집 <사리원>의 기원 : “할머니가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라.”
_ 사리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게는 언제 생겼어요? 할머니가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라. 우리 엄마 가족이 팔남매예요. 할머 니, 할아버지까지 10명이 피란 내려왔는데 먹고 살 길이 없잖아요. 우리 할 머니가 솜씨가 좋았어. 한복 같은 것도 지어서 입고 처음에는 그런 걸 했다 하더라고. 근데 그게 힘들고 벌이도 안 되고. 음식 장사를 하면 굶지는 안 하 겠지 해서 시작한 게 냉면집이라. 몇 년도인가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하여 튼 피란 내려와서 시작한 게 식당 음식점이야. 음식점 하다가 자식들 다 크 고, 아들, 며느리하고도 같이 했지. 서면에서 삼촌이 할 때는 서면로터리에 서 전포동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공구골목이라고 거기서 했는데 골목으로 쏙 들어가면 바로 집이야. 입구에서 우리 할머니가 내~ 앉아가지
계임옥의 외할머니(왼쪽 사진)와 부모님(오른쪽 사진). 계임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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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고 빈대떡 굽고 있었거든. 할머니가 앉아계시면 왠지 다 맛있어 보이는 그런 거 있잖아. (웃음) 거기서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다. 옛날에는 삼촌도 냉면집, 셋째 삼촌도 냉면집, 이모도 냉면집을 다 했어요. 이제 다 돌아가시고 또 자식들이 다 크고 돈 벌고 하니까 접고. ○○ 백화점 에 가면 ‘사리원 냉면’이 있어요. 거긴 삼촌 아들이 입점을 했어요.
_ 어릴 때 할머니가 하시던 냉면집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어릴 때 기억은 잘 안나요. 할머니가 조방 앞에서도 했거든요. “옛날에 조 방 앞에도 사리원 있었는데.” 하는 손님들이 있어요. 냉면 심부름도 많이 했 어. 엄마가 “가서 냉면 좀 갖고 와라” 하면 냄비 들고 차 타고 갔어. 그때 차비 가 5원인가, 6원인가 했거든. 냉면을 많이 먹고는 자랐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냉면을 많이 먹어요. 어쩔 때는 하루 두 번을 먹어요. 손님들이 질리 지도 않냐고 해요. 근데 맛있으니까 먹는 거지, 내가 좋아하니까. 냉면 장사 하기 전에는 내가 냉면을 그렇게 좋아하는지를 몰랐거든. 근데 어릴 때부터 먹었던 맛이 있어서 그런 거 같애.
_ 당감동에 있는 사리원은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나요? 여기 말고 시장 밑에 우리 집이 있어. 거기서 엄마가 했었거든요. 지금은 내가 거기 살고 엄마 아버지는 강원도 계세요. 나이가 들고 힘드니까 엄마가 못했어. 몇 년 공백 기간이 있다가 내가 받아서 하게 된 거지. 우리 식구들이 다 냉면을 좋아하는데 우리 동생이 냉면집 해보자고 했어. 사실은 우리가 냉 면이 먹고 싶어가지고. (웃음) 엄마 장사했을 때 매일 먹었거든. 삼겹살 삶아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가지고 냉면에 턱턱 걸쳐가지고 먹고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집 메뉴에 수육이 있는 거예요.
할머니는 그 밑에 밑에 집. 옛날에 할머니 할아버지 살았던 집이 바로 옆 에야. 새로 집을 지어가지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그 집하고 우리 집하고 연결이 되어있었어. 집이 딱 붙어 있어서 골목을 만들었다 아이가. 집안에서 왔다갔다 할 수 있게끔.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는 할머니 많이 도와줬지. 오봉 배달도 많이 갔다 이 러거든. 나도 어릴 때 할머니 배달 가면은 육수 주전자 들고 따라도 갔고. 옛 날에는 쇠젓가락 안 쓰고 나무젓가락을 썼어요. 당감동에 나무젓가락 공장 이 있었어. 젓가락 사오는 심부름을 많이 했다니까.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 데 본정냉면 사이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어디 있었어.
_ 이 가게는 몇 년 정도 되었어요? 만 십년 됐어요. 옛날 엄마가 하던 냉면 기억이 나서 찾아온 사람이 그 전 동네로 왔는데 없잖아요.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어디로 가면 있다고 가르쳐 줘서 오는 사람도 있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사리원 간판보고 “혹시 여기 사 리원이 거기 사리원입니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계속 오시는 분도 있 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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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도가 있는데 당감동 지도야. 배달 때문에 주문을 해가지고 만들었 는데 어느 한부분이 새카맣더라고. 보니까 우리 동네야. 253번지. 사람이 제 일 많은 거라. 다다닥 붙어가 있는 거라. 왜 내가 여기로 온 줄 알아요? 엄마 가 장사하던 자리는 전부 노인네들 밖에 없어.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여기 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잖아. 근데 그 노인들도 이제는 많이 없어요. 다 돌아가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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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째 이어지는 맛 : “나도 우리 집 냉면이 제일 맛있어”
_ 할머니가 하시던 걸 그대로 이어가고 계신가요? 옛날에는 이북에서는 동치미로 하거든. 비싼 소고기로 육수를 못 내잖아 요. 동치미 국물로 겨울에 먹고 했대요. 할머니는 밀면은 안 했어요. 지금 서 면 삼촌도 밀면을 안 해요. 함흥식하고 평양식 두 가지만 하는데, 평양식은 메밀로 하거든. 그게 물냉면이야.
나는 혼자 모든 걸 다해요. 할머니 손맛을 내가 그대로 받아서 하는 거지. 할머니가 가르쳐준 그대로 엄마가 배우고 나도. 손님들이 맛있다고 하니까 음식을 바꿀 필요는 없어요. 손님이 이거 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 참고로 할게요.” 말은 그렇게 하지. 그 손님 입에 내가 음식 을 못 맞추거든. 손님이 내 음식에 입을 맞춰야지. 내가 손님 입에 음식을 못 맞춰요. 그럼 장사 못해요. 그리고 나도 우리 집 냉면이 제일 맛있어. (웃음)
_ 레시피가 정리되어 있나요? 비법 공개는 가능하신가요? 레시피 있죠! 비법은 크게 없어요. 양념의 양, 고기 얼마큼, 뼈 얼마큼, 얘 기는 해줄 수 있어요. 미원 들어가거든요. 미원 안 들어가면 육수 양념장 맛 이 안나요. 양념은 공개를 할 수 있는데 내가 공개한들 못해요. 얘기 한 대로 해도 맛이 똑같이 안나. 어떤 사람들은 손맛 차이라고 하거든.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_ 육수는 어떻게 내시나요? 소뼈. 냉면에 들어가는 찬 육수 있잖아요. 소고기 하고 소뼈를 끓여가지고 육수가 나면은 고기는 건져내고 뼈를 더 고아요. 그리고 육수를 다 퍼내면 뼈만 남잖아요. 뼈를 더 푹 고아내면 곰국처럼 되거든. 그걸로 갈비탕, 육개 장 그리고 냉면집에서 나오는 뜨거운 육수로 쓰는 거지. 잡내 안 나고 하니 까. 어차피 육수 내면서 고기도 삶으니까 그걸로 갈비탕, 육개장 만들어요.
_ 요즘에는 기계로 하는데 그때는 면을 뽑으려면 뭘로 했나요? 그때도 기계가 있었지. 지금은 탁 눌리면 쫙 내려오는데, 옛날에는 반죽 내 려오는 부분에 쇠 같은 게 달려 있거든. 그거를 딱 끼워가지고 사람이 잡아 댕기면 저기서 쭈욱 내려와 가지고 면이 나와. 남자 아니면 못하지. 여자는 힘이 들어서 못하고. 요즘에는 반죽기가 있으니까 반죽 배합만 잘해 놓으면 기계가 다 해줘. 옛날에는 다 손으로 반죽 했잖아. 그러니까 힘들었지. 그거 지금도 이야기 하시는 분 있어. “아이고, 옛날에는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가 잡아 댕기고 이랬는데. 지금은 딱 하나 눌리면 되네.” 하고. 옛날에는 진 짜 남자 아니면 냉면 못했어.
_ 가게 차리실 때 그릇이나 기계를 새로 다 구입 하신 건가요? 엄마 하던 거 가져온 것도 있고, 새로 구입 한 것도 있고 그렇지. 그릇을 보 관해놨으니까 써야지. 그니까 우리 냉면 그릇이 다 오래된 거잖아요. 요즘에 저런 거 잘 안 쓰잖아. 엄마 때부터 쓰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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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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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시절 이야기 : “아버지가 거제포로수용소에 몇 년 있었잖아”
_ 이북 사리원에서 피란오신 할머니가 계시던데, 그분 아버지가 철도에서 일 을 하셨고, 동료들이 함께 피란을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할머니랑 사장님 의 어머니가 친구라고 하시더라고요. 엄마 친구들 여기 많아요. 같이 왔는지 안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할 아버지가 기관사였어. 기관사였기 때문에 편하게 내려온 거야. 기차 타고. 당 감동에는 오래 사신 분들은 엄마 나이대 같으면 우리 집을 다 알아.
_ 아무래도 여기는 이북 분들 많으시니까 그분들이 손님으로 많이 오지 않 았나요? 당연하지. 면도 많이 뽑아가고. 특히나 고아원 같은데.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는 한 반에 고아원 애들이 너무 많았거든. 버글버글 했다. 요기 매실보육원 있잖아요. 그 애들은 전부 당감초등학교에 다녔었거든. 그러니까 진짜 고아 원 애들 많았어. 거기 가면 밀가루 같은 거 많으니까 밀가루 가지고 오면 면 을 뽑아주는 거라. 뽑아서 그거 들고 가가지고 거기서 국수처럼 퍼먹고.
_ 어머니 고향은 사리원이고, 아버지는 고향이 어디인가요? 아버지는 평북. 수안 계씨인데 평안북도 어디라고 이야기 들었는데 이름이 좀 어렵더라. 아버지가 열여섯 살에 전쟁터지면서 인민군으로 입대를 한 거 지. 그리고 우우 내려오다가 포로로 잡혀서 거제 포로수용소에 잡혀 들어간 거지. 포로수용소에서 죽을 고비 몇 번 넘겼다하대. 몇 년 있었잖아. 포로 석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방 하면서 일부는 다시 북으로 넘어가고 일부는 남고. 아버지는 형제가 오형 제라 하더라고. 아버지는 안 넘어 갔다하대. 포로수용소에서도 공산당을 반 대하는 파가 있고 지지하는 파가 있었는데 공산당을 반대하는 파 사람들이 밤 되면 하나씩 없어진대. 감시를 해도 그런 게 너무 많았다 그러더라고.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 안 하셨는데 앞전에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가 고 싶다 해서 갔어.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버지가 이야기를 쫙 하시는 거 야. 나는 처음 들었어. 미군 장군 이름까지 기억을 다 하더라고. 전쟁 상황을 인형으로 만들어 놨는데 똑같다 그러더라고. 그때 이야기를 아버지가 억수 로 자세하게 해주대. 아버지가 흉터가 있어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전쟁 때 총 맞아 가지고 생긴 흉터라고 이야기를 해서 그런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게 반공이라는 문신이 되어 있었대.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반공이라는 문신을 새겼는데, 포로 석방하고 아버지는 군에 입대를 했어. 군대에서 이거를 지워 준 거야. 거제포로수용소 마지막 코스에 체험관이 있더라고. 입구에 들어가 니까 총 쏘고, 폭탄 터지고, 집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엄마하고 아버지 하고 못 들어가시는 거라.
_ 포로수용소의 기억은 전쟁이 남긴 비극이네요. 아버지는 나이가 어렸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좀 있었다고 하더라고. 어리니까 할 말이 어디 있노라면서 봐준 것 같아. 포 로수용소 나와 가지고 처음에는 갈 데가 없잖아요. 나라에서 피란민들 어디 로 가라고 일정 장소를 정해준대요. 같이 우우 가서 살다가 몇 번 옮겨 댕겼 는데 나중에는 각자 알아서 가라고 했대요. 그런데 아버지는 갈 데가 없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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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홀홀단신으로 어디에 아는 사람이 있나. 그래서 다른 사람이 군에 들어 간다 하니까 자기도 들어가려고 했는데 군에서 나이가 안 된다고. “여기 아 니면 나는 죽는 거 밖에 없다. 나 들어가야 되겠다.” 졸졸졸졸 가는 데마다 다 따라 댕기니까 억지로 들어간 거야. 옛날에는 그런 것도 좀 있었던 모양 이야. 그렇게 들어가서 군 생활을 오래 했어. 중사로 제대를 했거든.
아버지 군 생활 할 때 많이 옮겨 다니니까 우리 할머니가 내를 많이 데리고 있었어. 그러다가 광안리에서 조금 살았거든요. 광안리에서 여기까지 통근 차 아버지하고 같이 타고 왔다가 나는 학교 가고, 공부 끝나고 나면 또 부대 들어가서 헌병들하고 놀다가 아버지 마치면 또 트럭 타고 가는 거라. 왔다 갔 다 하고 삼익아파트 전체가 통신기지. 제법 넓었어요. 군부대였어요.
_ 아버님이 북에 남겨두고 오신 가족들을 찾으려고 이산가족 찾기에 참여 하지는 않으셨어요? 예전에 처음 이산가족 찾기 할 때 했거든. 했는데 못 찾았어. 이번에도 신 청했다고 하더라고. 근데 신청이 엄청시리 많은 거야. 그런 사람이 너무너무 많으니까 하늘의 별따긴 거라. 그러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 위주로 많이 한다 더라고. 아버지는 팔십다섯. 아버지가 가족도 없이 혼자 외로우니까 자식을 많이 낳았다더라고. 우리는 그걸 모르잖아. 마음은 ‘아, 그랬구나’ 하는데 그 깊이까지 모르죠.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당감동 사리원의 미래 :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문이 잠겨있으면 좀 미안하잖아”
_ 장사는 언제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하세요? 해가 바뀌면 체력이 요만큼씩 떨어져, 자꾸만. 옛날에는 육수 솥 불에 올 려 있는 거, 가득 들어 있는 걸 들고 여기서 저까지 왔다 갔다 했어. 지금은 못해요. 자꾸만 양이 줄어드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힘들어서 못 하겠다, 자 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거라. 바쁘면 또 잠시 잊어버려요. 이제 조금 선선해 지고 손님이 덜하니까 괜찮은데 여름에 바쁠 때는 진짜 미친다. 근데 장사 내가 그만두면 다른 데 가서 또 하게 될 거 같아요. 냉면집은 힘들어서 못하 겠고 그냥 갈비탕 육개장 그런 거. 그런데 내가 힘들어서 이 가게를 해야 되 나, 말아야 되나 생각하다가도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문이 잠겨있으면 좀 미 안하잖아.
#피란민 2세 #사리원 냉면 #거제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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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걸려도 뿌리는 내리고, 고향은 탄생한다 노병수
1954년생, 65년째 거주 8통 통장 노병수의 아버지는 황해도 사람이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목숨 을 걸고 왔지만, 당감동에 정착하기까 지 세월이 더 필요했다. 아버지는 가족 을 이끌고 전국을 다니며 일자리를 찾 았다. 그래도 노병수는 당감동이 고향 이란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 미군이 버린 음식물을 모아 꿀꿀이죽을 끓여 다 먹으면서도, 한 입 베어 먹고 버린 빵을 건지는 날은 그저 재수 좋은 날이 었다. 그러다 당감동에 고무공장이 들 어서며 전라도에서도, 경남에서도 노 동자들이 밀려들었다. 거리에 사람들 이 떠내려갈 정도로 많았다지만, 그때 가 인심 좋고 모두가 먹고살 만했던 때 라 기억한다. 지금은 통장으로 일하며 고향을 지킨다는 것을 각별하게 생각 하고 있다. 아버지가 뿌리내려준 곳에 서 자신의 길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노병수의 기쁨이다.
당감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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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피란민이었던 부모님이 했던 일 :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나무를 사서, 나무젓가락을 만들었어.”
_ 부모님께서 피란민이라고 하셨죠? 아버님이 황해도 송화군 출신이셨어. 두 분은 이북에서 결혼하셨겠지. 1·4후퇴 때 황해도 초도라는 섬으로 갔다가 배 타고 군산으로 갔다가 부산 으로 피란 오셨지. 부산으로 아버님 형제 두 분도 따로 내려오셨는데, 작은 아버님은 못 찾고 있다가 한 16년 만에 탄광에서 일하시는 거를 찾았어. 탄 광에서 일하다 보니 진폐증에 걸려가지고 얼마 못 살고 돌아가셨고. 혈육이 라고는 아버님 쪽으로는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어. 외가 쪽으로는 돌아가시 고. 이모님, 작은 이모님, 외삼촌 살아계시고. 부모님이 피란 나오시고 부산 에서 내랑 여동생 둘이 태어났지. 동생이 내보다 네 살, 일곱 살 아래고.
_ 부모님은 여기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아버님이 처음에 미군 부대 55보급창에 다니셨다 하더라고. 미군 부대에 있을 때는 그래도 먹고사는 게 좀 괜찮았나 봐. 근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걸 그만두시고, 목수 일을 조금 하신 것 같애. 그래가지고 객지로 다니셨 어. 내 태어날 때 나무젓가락 만드는 거 하다가 아버님이 객지로 나가니까 그 당시는 그만두고 따라갔지. 여러 군데 다녔어. 파주도 갔다가 인천도 갔다 가 대전도 갔다가. 고향은 부산이면서 그때 한 7, 8년 객지를 돌아다녔어. 대 전에 있을 때도 워낙 못 살았어. 결국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2학기 때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가지고 정착을 한 거지. 그때 여기에 고향 사람들도 많이 계시고, 우리 집안사람 전부 다 부산 이쪽에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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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나무젓가락을 다시 만들었지. 한 77, 8년까지도 나무젓가락을 만든 걸로 기억이 돼. 근데 나무젓가락 그것도 나뭇결이 좋아야 되거든. 나 뭇결이 안 좋으면 젓가락이 옆으로 째지든가 똑바로 안 째져. 나뭇결이 똑바 른 걸로 사다가 만들어야 결이 짝짝 해가지고 띠면은 똑바로 딱딱 떨어진다 고. 하야리아 부대에서 군수물자를 나무로 포장을 해가지고 들어오거든. 가 보고 결 좋은 거만 사다가 집에서 그 길이만큼 잘라가지고 나무젓가락 만드 는 거지. 기계로 깨끗이, 매끈하게 다듬어야 돼. 사람들이 쓰다가 가시 같은 거 박히면 안 되잖아. 양쪽 다 하는 게 아니고 입에 들어가는 한 부분만 깨 끗이 다듬어야지. 또 그것도 걷으러 다니는 사람이 있어. 그 집에서 종이에 끼워 포장해가지고 판매를 하겠지.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어려운 시절의 먹거리 : “어머니가 이북 만두를 큼직큼직하게 해주시더라고”
_ 다른 지역을 다니실 때 기억나는 일이 있으신가요? 힘들었지. 그래도 그때 추억이 제일 많이 생각나는데. 그때는 우리 집 옆 에 미군 부대가 큰 게 있었어. 거기 보면 꿀꿀이죽이라고 있어. 미국 사람들 먹다가 남은 음식 그걸 드럼통에다 모은 데가 있어. 나름대로 깨끗이 걸러 서 모아. 그거 사다가 끓여 먹고 살고 그랬어. 그만큼 어려웠어. 요새 젊은 사 람들은 아마 그걸 이해 못 할 거야. 미국 사람들이 먹다 남은 찌끄레기 보면, 담배꽁초, 휴지, 뭐 이상한 잡동사니들이 많이 들어있어. 저 나름대로 그걸 거른다고 해도 먹다 보면 그런 게 들어있더라고. 재수 좋으면 한 입 베어 먹 고 버린 빵, 고깃덩어리 같은 거. 근데 그게 영양가가 있긴 있었는가 봐. 그걸 먹고도 살았으니까. 부산에도 하야리아 부대 있으니까 꿀꿀이죽을 먹고 산 사람들이 있더라고.
_ 부모님께서 이북음식을 자주 해주셨나요? 만두. 어머니가 이북 만두를 이렇게 큼직큼직하게 해주시더라고. 여러 가 지 속이 들어가는데, 닭고기도 들어가고 돼지고기도 들어가겠지. 지금 생각 하면 맛은 있었어. 손님들이 와서 한 번씩 빚어주면 우리 집안사람들도 그렇 고 맛있다고 잘 자시고 했으니까. 그 말고는 크게 이북음식이라고 해서 먹은 기억은 없는데. 또 그때는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었지. 칼국수, 수제비. 그게 주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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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감동의 과거와 변화 : “주먹 꽤나 쓴다는 친구들, 술집들 두루두루 먹고산 거야”
_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당감동의 모습은 어땠나요? 그때는 지금하고 천지 차이지. 고가도로 그런 거는 아예 생각도 못 할 거 고. 포장도 안 되어 있었고. 포장되고 한 게 한 30년 조금 넘었을 거야. 길이 좁았어. 그러고 지금은 복개가 되어있지마는 복개도 안 되어 있고. 버스도 간 간이 다녔는데 버스 다니면 먼지 풀풀 날리고. 당감1치안센터 밑에 보면 폭포 수가 있어서 거기서 목욕도 했어. 그때는 여기 큰 물난리 나면 돼지도 떠내려 오고, 닭도 떠내려오고. 하천 쪽으로 공동화장실이 있어가지고, 사람들이 표 주고 가서 볼일 보고 그랬어. 표가 그때... 2원 50전인가 그랬을 거야 아마. 옛 날에 전차 타고 다닐 때 전차비도 2원 50전인가 한 거로 기억나는데.
_ 고무공장이 하나둘씩 들어오면서는 당감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어요? 그때는 진짜 경기가 좋았어. 요 근교에 고무공장이 많으니까. 옛날에 당감 동 이쪽으로는 집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방 한 개, 부엌 하나만 만들어놓으면 금방금방 나갔어. 자취하는 사람들 때문에 방이 없어가지고 난리 났었어. 특히 고무공장 할 때는 전라도 쪽에서 사람들이 엄청 부산으로 많이 왔어. 동양고무 이게 있으므로 해서 일하는 사람들도 먹고살았지만, 소위 말하 는 지역에서 낸데 하는 주먹 꽤나 쓴다는 친구들도 먹고살았고. 그때는 좀 어두운 시절이었잖아.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끼고 있는 거야. 안 그러면 와서 자꾸 행패를 부리니까. 일도 안 하는데 그냥 직을 하나 주는 거야. 그러고 조그만 하청 공장 같은 것도 하나 하라고 챙겨주고 그래했지.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그러니까 두루두루 먹고산 거야.
_ 공장 많았을 때 술집도 엄청나게 잘됐다고 하더라고요. 아가씨들 놔놓고 하는 술집이, 도로 복개하기 전에는 당감입구 온병원 그 쪽 편으로 쭉 그런 집이 많았어. 당감동 여기도 많았고. 서면에 술집이 많으 니까 당감동에 술집 나가는 아가씨들이 상당히 많았어. 술 먹고 그런데 들 어가면 주머니 다 털리고 나오는 거야. 그런데 가면 전부 예쁘게 보이고. 남 자들 원래 그렇잖아. 그러다 보면 있는 대로 다 뺏기고 나오는 거야. 불과 한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큰길가 밑으로 몇 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한 군데도 없을 거야. 인구도 많이 줄어들고, 일자리가 없으니까 전라도 사람들은 자기 고향으로 다 가고 그랬지. 내가 알기로는 동양고무가 아마 93년도에 문을 완 전히 닫았을 거야. 문을 닫고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파트가 제일 먼저 들어 선 게 삼익아파트인데, 들어선 지가 한 40년 되었을 거야.
_ 여기 은해분식에 자주 계시던데, 이곳도 그 당시에 생긴 분식집인가요? 여기는 거의 마지막에 들어왔고, 요즘은 동네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 야. 나도 가끔 밥 먹으러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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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놀던 곳 : “친구들끼리 누가 간이 큰가 내기한다고 화장막에 간 적도 있거든”
_ 화장막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화장하는 거 많이 봤지. 시신도 많이 보고. 그때는 안치소라 해봐야 그냥 허름한 움막 같은 게 있어서 거기다가 시신을 안치해놨다가 부검을 해야 되 면 꺼내서 화장장 옆에 의사가 와서 부검하고. 의사들이 해부 할 때 보면 술 을 먹더라고. 그 사람도 사람이니까 맨정신으로는 못 하는 거야. 해부해가지 고 꼬매는 것도 보통 수술할 때 그런 개념이 아니고 그냥 듬성듬성 하는 거 야. 그래서 화로에 화장하고. 화로에 보면 큰 구멍이 있어. 화장이 잘 되게 막 휘젓는다고. 그런 것도 사람들이 뒤에 서서 보고 그래 했거든. 친구들끼리 비 부슬부슬 오고 할 때 누가 간이 큰가 내기한다고 화장막에 가고 그런 적 도 있거든. 근데 진짜 무섭지. 더군다나 비 부슬부슬 오는데 지나갈라 해봐 간이 오므라들지. 아무리 젊은 혈기라도. 그래도 갔다 오고 하는 애들이 있 긴 있어.
_ 어릴 때 또 어디에서 주로 놀았어요? 주로 선암사 쪽으로 소풍을 많이 갔어. 멀리 가면 어린이대공원 가고. 그 때는 크게 애들이 어디 갈 데가 없잖아. 그러니까 선암사 가서 점심밥만 먹 고 1~2시 되면 내려오는 거야. 김지태산. 김지태 씨 가족묘지가 거기 있었어. 그때 집들은 없었고. 지키는 사람 한 집만 있었어. 사람들이 물론 올라가기 는 하는데, 놀러 가고 그런 거는 아니고 그냥 애들이 놀이 삼아 올라갔다 내 려갔다 하는 정도였지.
#당감동이 간직한 고향의 맛
_ 여기 샘물들이 여러 개 있었다던데요. 물 떠다 먹고 하는 데가 몇 군데 있었어. 매실보육원 지나서 동일아파트 밑 에 바가지샘이라고 야트막하게 물이 나오는 데가 있었어. 그 물 떠다 먹고. 고목나무 가는데 여기에도 우물이 있지. 아직도 그 우물터가 남아있을 거야. 거기서도 떠다 먹고 한 기억이 있고. 그거 말고도 우물은 많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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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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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시절 : “지금 생활 수준은 많이 높아졌지마는 그때만큼 쓸 처지가 안 돼”
_ 그럼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나는 74년도 군대 갔다 와서 회사 다녔지. 처음에 온천장에 있는 플라스 틱 사출 업체 3년 좀 더 다녔나 그렇고. 그러고 나서 동양고무도 조금 다녔 지. 한 3년. 그라고 샌드위치 판넬 시공하러 다녔어. 주로는 큰 공장 같은데. 아마 한 8, 9년 다녔지. 근데 그거는 일이 꾸준히 있는 게 아니고, 일이 한 번 끝나면 어떤 때는 보름도 놀아야 되고, 20일도 놀아야 되고 그러니까 돈벌 이가 안 돼.
_ 통장은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통장 일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앞에 하시던 분이 정년이 돼서 그만두시게 되었거든. 할 사람이 없는 기라. 그때 그분이 반장이라도 해서 일 좀 도와 달 라 해서 했는데 사람이 없으니까 내한테 떠맡기는 거지. 벌써 15~16년 됐는 데 나도 내년 6월 되면 손을 놔야 해. 나이가 다 돼서. 근데 통장을 하면 돈 이나 혜택을 많이 받는다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근데 우리는 솔직히 한 달 수당 20만 원 받아. 혜택 받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동네 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그런 개념도 가지고 있어야 돼. 안 그러면 힘들어. 못 들을 소리도 듣고 그래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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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현재 당감동의 분위기가 과거와 어떻게 달라진 것 같나요? 그때를 많이 그리워하지. 경기가 좋았으니까. 지금은 그때 비하면 생활 수 준은 많이 높아졌지만 사람들 체감하는 게 못 따라가니까. 그러니까 옛날 생각을 많이 하지. 그때는 참 진짜 흥청망청 쓰고 했는데. ‘지금 생활수준은 많이 높아졌지마는 그때만큼 쓸 처지가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지. 지역에는 제조업체가 있어야 돼. 뭘 만드는 회사가 있어야 거기서 사람들이 일을 해가지고 경제를 창출해나가는데. 전부 소비 위주로 되다 보니까 그런 걸 더 많이 느낄 거야.
_ 당감동이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으시면 한 말씀 해 주세요. 당감동이 어떻게 보면 살기가 괜찮아요. 지대가 조금 높아서 그러는데, 서 면 시내도 가깝지. 그러니까 살기가 좀 괜찮은 것 같애. 여기 재개발이 되고 아파트를 짓게 되면 나는 당감동을 떠나야 돼. 내가 태어나고 살던 고향이니 까 좀 더 화목한 곳이 되고, 발전이 좀 많이 됐으면 좋겠고. 또 요새 젊은 사 람들이 결혼도 늦고 애도 안 낳고 하다보니까 학생 수가 자꾸 줄어들어서 내 모교가 언젠가는 폐교가 될 지도 모르는데 그게 좀 안타깝고. 딴 거는 뭐 크 게 없어.
#피란민 2세 #미군 부대 #나무젓가락 #꿀꿀이죽 #이북만두 #고무공장 #화장막 #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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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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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토박이 일생, 끈질기게 마을을 살리다
송창근
1961년생, 58년째 거주 <대성설비> 운영 송창근은 당감동에서 태어나 60년 가 까이 살고 있다. 긴 세월을 ‘지겹도록 살았다’는 말로 대신한다. 오랫동안 마 을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살고 있는 이유이지만, 가끔 유난히 느리다 는 생각이 든다. 생계의 고비는 굽이굽 이 이어졌다. 산동네에서 돼지를 키워 팔고, 시내에서 물건을 떼와 난전을 벌 이기도 했다. 한때 번성했던 고무공장 마저 차례대로 문을 닫고 마을에는 다 시 적막이 찾아왔다. 송창근은 ‘재주가 메주’라며 떠나지 못했다지만, 그가 있 어 당감동 사람들은 때에 맞춰 집을 지 어 올렸고, 작은 살림을 꾸리며 이제껏 살아왔다. 그것이 60년 토박이가 마을 에서 사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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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정착한 나의 고향 : “아버님이 이북에서 1·4후퇴 때 내려왔어요”
_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름은 송창근. 나라 송 자, 거들 장, 뿌리 근, 송창근입니다. 원래는 이 동 네에서 태어났어요. 잠깐 다른 데서 살긴 했는데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습니 다. 61년도에 태어났으니까 56, 7년 살았어요. 지겹도록 살았죠. (웃음) 동네 는 참 영세한 동넨데, 발전이 요정도 밖에 안됐으니까. 타 지역 가면 아파트 다 들어서고 하는데 이 동네는 유달스럽게도 안 되는. 동서고가도로가 있으 니까 더욱더 안돼. 또 재개발 한다고 해도 떠날 사람이 없죠. 전부 영세하게 사니까. 7평, 8평, 10평 되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 떠나봐야 그 돈 가지고는 못산다니까. 그래서 재개발 반대하는 사람도 많죠.
_ 부모님들은 여기에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이북에서 1·4후퇴 때 내려왔어요. 우리 아버님은 평안도에서 내려와서 엄 마를 만났죠. (인근 지역을 가리키며) 여기가 옛날에 일본 마구간이라. 피란 민들이 내려왔는데 정착할 데가 여기 밖에 없어가지고. 쪼그만 마구간. 3평, 4평인데 쪼매 쪼매해요. 옛날에는 산에서 보면 땅을 새끼로 칸을 나누었는 데, 땅은 정부 땅인데 내꺼다 이래가지고 살다가 정부에서 토지 허락 맡으라 해서 내 땅 되는 사람들이 태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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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 살, 세 살 때는 먹을 게 없었어요. 너무 어려웠거든. 감자도 못 먹을 정도로 어려웠어요. 사람들이 돼지 키워 팔아가지고 살았어요. 내가 평화중 학교 나왔는데, 전포동 산만디. 요즘은 동중학교로 바뀌었어요. 차비가 그 때만 해도 얼마였냐면 25원, 20원 할 땐데, 그 돈이 없어가지고 걸어갔다가 걸어올 정도였으니까 엄청 어려웠지. 잘사는 사람은 잘살았겠지만, 보편적으 로는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야죠.
_ 부모님들이 이북에서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당감동에 황해도 마을과 함 경도 마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황해도는 ‘아바이촌’이라고. 쭉 올라가면 시장 중간에 길이 있죠. 거기 건 물이 황해도 아바이촌이라. 거기 우우 모여가. 지금은 2, 3층 지어가지고 사 는데 옛날에는 거기도 판자촌이라. 거기서 건물 새로 지어가지고 사는 사람 들 제법 많아요. 아직 사는 사람 있을걸요.
_ 부모님들은 피란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옛날에는 철도에도 노동자들을 많이 쓴 모양이라. 직원이 아니고 하루 정 도 해가지고 보급품 날라주고 하는 이런 노동자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크 게 돈은 안 되고, 계속 하는 게 아니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밖에 없었으 니까. 저기가 철도 정문이었는데 일부러 문을 딱 만들어놨고.
_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가사도 하고, 짐승 키우다가 도저히 안 돼서 장사를 오래 했어요. 지금은 나이가 연로하다 보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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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성했던 마을 : “뭐든지 먹는장사는 잘됐죠”
세월이 지나니까 먹고살 만하지 당시는 많이 어려웠어. 그때 조금 지나니 까 진양고무 이런 데로 사람들이 외지에서 막 들어오고 이래.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이 발전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살 정도가 되니까 공장이 떠나버 리고 사람도 자연스럽게 떠날 거 아닙니까.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은 외지에 서 들어와서 장사하는 사람들, 장사가 괜찮아서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 많아 요. 거의 한 30, 40%는 정착해서 사는 사람이 많아요. 안 그러면 떠난 사람 도 많을 거고 그렇죠.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여기가 전부 술집이 었거든. 동양고무가 활성화되니까 술집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고. 사 람이 많다 보니 장사가 잘되다가 공장이 다 떠나고 나니까 빠질 사람 다 빠 지고. 당감1동에는 거주자가 몇 명 안 돼요. 옛날에 당감1동 거주자가 애들 까지 포함해서 3천 명도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갔죠. 지금 은 1, 3동 합쳤어요. 옛날에는 그래도 통수로 따지자면 24개 정도 됐는데 지 금은 17통 정도 밖에 안 돼요.
_ 아까 사람 많을 때 술집이 많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술집 이외에도 어떤 장 사가 잘되었나요? 뭐든지 먹는장사는 잘됐죠. 주로 통닭집, 두루치기 같은 거, 채소장사, 뭐 든지 장사가 잘돼. 인구가 많으니까 일단은 생활은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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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들어왔으니까 실생활 관련된 건 거의 장사가 잘됐어요. 임대 장사도 잘됐어. 쪼매난 방에도 들어와서 살 정도니까.
통장의 일 : “잘해 봐야 본전인데 내가 뭐 하러 열심히 일했는가 몰라”
_ 통장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나 살기도 다 바쁜데 남 일들을 살피고 이 러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그거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은 해요. (웃음) 노무현 정권 때 기초생활 수급 자(제도)가 생겼죠. 김대중 정권이었나,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때는 커트 라인이 까다로웠거든요. 이 사람은 꼭 타가지고 생활을 유지해야 되는 상황 인데, 안 되는 사람들이 참 많았죠. 자식들 빈둥빈둥 놀고 능력이 안 되는데, 자식 때문에 걸리는 못 받는 이런 것들. 그러면 마음이 딱해서. 그때 당시에 는 내가 많이 나섰죠. 할매들도 자식들 다 있다 아입니까. 자식이라는 명분 때문에도 돈 못 받고 내~ 파지나 주우러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런 사람들 그래도 한 달에 40, 50만 원씩 들어오면 편하게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들 도와준 거죠. 잘해 봐야 본전인데 내가 뭐 하러 열심히 일했는가 몰 라. (웃음) 그래도 사람들이 내한테 고맙대요. 50%는 좋아하고, 50%는 미 워하고 그래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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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한 통에 인구가 몇 명 정도 되나요? 2백 명 정도. 원래 진구청에서 규정하기를 한 통에 한 3백 명 이상이 되어 야 정상인데, 이 동네는 인구가 없어 놓으니까 2백 명에서 2백, 한 20명 되 나, 그 정도였으니까. 사람이 많이 빠져나갔고 여자들이 애를 안 낳아요. 1년 에 당감초등학교 입학생이 3명밖에 안 됐으니까. 1년에 3명, 7명, 10명도 안 돼요. 한 4, 5년 정도 전 내가 통장 할 때. 지금도 애기들이 많이 없어. 길을 다녀보면 거의 못 보죠.
_ 그러면 잠시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돌아오기도 하셨는데, 주로 어떤 일을 하셨어요? 나도 배운 게 없으니까 노동판, 건설업계 자주 다녔죠. 이런 일도 하고 저 런 일도 하다 보니. 요즘에 정착해서 좀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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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건축사 : “우리 동네는 10평 미만인 데가 참 많아요”
_ 이 동네에서도 공사를 많이 하셨겠어요. 많이 한 편이죠. 왜냐면 평수가 작으니까. 우리 동네는 10평 미만인 데가 참 많아요. 8평, 7평, 심지어는 4평짜리도 있을 거고. 화장실만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거든요. 근데 그런 집은 보수를 못 하는 거라. 1층에는 식당, 원룸, 2층에는 방. 70년도 때에는 아들(아이들)이 어리니까 부모하고 한방에서 살았는데 성인이 되니까 딸들이 부모하고 같이 못 살 거 아입니까. 방을 만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돈을 가지고 어디 가서 살 수도 없는 상황이 고.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라. 집을 지으려면 허가를 내야 되는데 허가가 안 되는 거라. 허가되면 사방 1미터씩 줄여야 되는데 줄이면 집이 나 옵니까? 7평이면 한 4평밖에 허가가 안 되는데. 그러니까 강제로 짓는 거라. 무허가로 지어가지고. 이 동네 80~90%가 무허가 건물로 지었는데 그때 당 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 돈을 가지고 나가서 집을 살 수는 없는 상황이고. 당시 80~90년도 이 정도까지는 이 지역이 특별 무슨 지역 이라 해가지고 눈감아주고 건축물 이래 지었는데. 그때 당시에 집을 전부 다 고쳤죠. 88올림픽 그때 경기가 한참 좋았잖아. 노태우 때, 그때 집을 그래 많 이 지었죠. 그때 당시만 해도 공사비가 좀 헐었죠. 1평당 백몇십만 원씩 그랬 으니까.
그때 이후로는 많이 없죠. 이제 여기는 재개발이라는 타이틀로 묶여 버리 니까 집을 안 고치고 안 짓네. 지금 이 동네가 많이 낙후되어 있잖아. 요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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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에는 쓰레뜨 집이 거의 없고 전부다 2층으로 올리가 지었고, 요쪽은 재개 발 때문에 거의 안 짓고 쪼매 수리만 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고. 언제 재개발 이 될런가는 모르고.
_ 한창 공장이 많을 때는 방이 많았고,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살았다고 하더 라고요. 옛날에는 쪼만쪼만 해서 동양공무, 진양고무 있을 때는 세입자들 월세 쪼 매주고 살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70년대, 75년도 그때 참 많았고, 88 년도 지나가지고 공장들 문 닫았다 아입니까. 문 닫고 나서 빠져나갔죠. 그 건물 다 부숴서 2층, 3층 지은 거지. 반송에서도 니도 내도 짓자 해가지고 지 은 사람들 많을걸요. 그런 거로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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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마을 : “점심때 되면 김치하고 밥 가지고 와서 같이 묵고 하는 데가 참 많아요”
_ 여기서 태어나시고 오래 사셨잖아요. 말하자면 선생님은 여기가 고향이신 데, 고향하면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특별한 건 없어요. 재주가 메주라고 특별히 나가겠다는 생각도 안 해봤고. 다른 사람들은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 10명이면 8명 성공해가지고 들어오 는 사람 많은데, 나는 꼭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거든요. 대충대 충 살려고. 욕심 없이 그냥 편하게 살려는 생각이죠.
_ 어릴 때 친구들하고는 뭐하고 놀았어요? 다방구하고, 제기차기하고, 팽이하고. (웃음) 여기가 전부 노는 터였는데 골목골목 누비면 다 노는 터였죠. 골목이 모르는 곳이 없어요. (웃음)
_ 동네에 자랑거리가 있나요? 여기가 원체 못난 동네라가지고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웃음) 그나마도 지 금은 어느 정도 정착이 돼서 고치고 잘 살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람이 어딨어. 다른 데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가지고 많이 계시거든요. 노인 네들 이래 모여가지고 살거든. 그나마 괜찮다고 봐야 됩니다. 노인네들이 살 기가 더 좋아요. 왜냐면 노인네들 얼마나 외롭습니까. 아파트에 가면 혼자 지 겹고 갈 데도 없고. 여기는 그래도 점심때 되면 김치하고 밥 가지고 와서 같이 묵고 하는 데가 참 많아요. 아침에 꼭 모여서 커피타임하고 그런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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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 2세 #마구간 #버스비 20원 #통장 #동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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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공장이 많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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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고무 ⓒ 부산진구청
부산의 신발공장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고무공장으로 둥지를 틀기 시작하여 광복 후에는 신흥 공장들의 설립이 줄을 이었고, 부산은 한국전쟁 이후 신발산업의 메카로 부 상했다. 부산지역에 신발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주원료인 고무가 항만을 통해 수입되었고, 고무배합에 있어 온화한 날씨가 필수적인 점, 그리고 부산이라는 대규 모 소비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 장을 가동하는 데 물이 많이 필요하여 주로 하천 주변으로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때 신 발업체의 이름을 모두 ‘○○고무’라고 했던 것은 애당초 간단한 고무배합 기술에다가 고 무원단을 빼내는 롤러만 있으면 생산이 가능한 고무신이 주력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당감동 일대에도 태화고무(말표), 동양고무(기차표), 진양화학 3개의 신발공장이 들 어섰다. 당감동은 땅값이 싸고 많은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공장의 입지조건으로 적절 했다. 1970년대 신발 물량이 대폭 증가하면서 신발업체들은 생산라인을 늘리고 공장을 확장했다. 전라도를 비롯한 외지의 많은 노동자들이 당감동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신발산업 전성기 때 출·퇴근 시간대면 공장 주변 도로가 인파로 가득해 사람들에게 밀려서 올라가고 내려와야 했다. 의식주와 관련한 모든 가게들이 한 세월을 구가했었고, 사람이 많으니 안 되는 장사도 없었다고 한다.
#신발공장이 많았을 때
그러나 공업도시 부산을 대표했던 부산진구의 활기찬 분위기도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위축되 었다. 1980년 동명목재의 해체가 그 신호탄이 되 었고, 1990년대 초 신발산업의 합리화 조치는 결 정타가 되었다. 남아 있던 공장들도 급격한 소비도 시화 추세 속에서, 도심의 비싼 땅을 처분하고 땅값 이 싼 외곽지대나 부산 근교의 양산, 김해, 울산 등 의 공업단지로 터전을 옮겨갔다. 화승으로 상호를 바꾼 동양고무공장이 폐쇄되면서 화승삼성아파트 가, 태화고무공장 자리는 태화현대아파트가, 진양화 진양고무 ⓒ 신발산업진흥센터
학 자리는 부산진구청과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그야 말로 상전벽해, 옛 모습을 떠올리기조차 어렵게 되
었다. 현재 당감동에는 소규모 공장만이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마을 곳곳에서 신발 소일거리를 하는 어르신들을 볼 수 있다. 명절 전후의 풍경 명절 전 시장에선 사람들에게 떠밀려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향에 챙겨갈
당감동 화승삼성아파트자리에 있던 동양고무(1978년)와 숙녀샌들 광고(1972년) ⓒ 부산상공회의소·신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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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당감시장에서 모두 해결했다. 회사에서 버스로 고향까지 데려다 주기 때문에, 시골인 고향에서는 선물을 살 상황이 안 되었다. 회사차량 5대가 모 지역으로 간다고 하면 올 때는 10대가 돌아왔다고 한다. 차량은 명절을 보내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새로 모집한 인력들까지 싣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만큼 일거리가 많았고 공장들이 앞다퉈 인 력들을 불러 모으던 때였다. 월급날 풍경 월급날에는 부암동·당감동 일대가 흥청거렸고, 회사로 통하는 폭 15m의 당감로는 늘 만성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외상값을 받으러 온 가게 주인들이 줄을 이었고, 당감동 뿐만 아니라 서면 일대에 어마어마한 돈이 풀렸다고 한다. 청춘들의 셋방살이 지금이라면 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공간도 칸칸이 내놓기만 하면 무섭게 세가 나갔다 고 한다. 하숙을 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가구와 주방용품 등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엄마처럼 월급까지 관리해 주는 하숙집 주인을 만난 노동자들은 당감동을 떠나서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한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간식거리 월급날뿐만 아니라 평소 술 한 잔 할 때 즐겨 찾는 곳은 통닭집이어서 현재의 당 감사거리 위쪽으로 통닭거리가 형성되었다. 현재도 ‘팔복통닭’과 ‘희자네 닭두루치 기’가 유명한 맛집으로 남아있고, 당감골목시장에도 통닭집이 꽤 있었는데 아직까 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복돌네’의 인기는 여전하다. 이외에도 시장의 ‘은해분식’과 ‘할매순대’도 서민들의 생활에 양념이 되는 간식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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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기억을 안고서, 지나간 시대를 지키다 김영화
1954년생, 당감동 30여 년 거주 신발공장 <영심> 운영 김영화는 부산의 대표 고무공장을 두 루 섭렵한 44년 차 베테랑 신발 노동 자다. 부산은 1960년대 이후 고무와 신발 제조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는 데, 이는 저임금 노동력의 집결지와도 같은 말이었다. 건빵을 물에 불려 먹으 며 배고픔을 달래고, 고무 냄새를 이겨 내며 한 달 월급으로 1만 6천 원을 받 았다. 그래도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 저축을 하고, 동료들과 술 한 잔 나눌 수 있어 그저 값진 기억으로 남아 있 다. 한때는 가수가 꿈이었고 멋진 청바 지와 청재킷을 입는 멋쟁이로 불리었 던 그가 이제는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 이다. 하지만 세상은 서둘러 지난 시대 를 정리하려 한다. 1세대의 후광도 마 지막 세대에게 보내는 박수도 없다. 하 지만 그는 여전히 작업대에 선다. 그 빛나는 기억을 모조리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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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를 꿈꾸며 고무공장 다니던 청년 : “가수 되려고 지구레코드사 학원 나갔어요”
_ 고향이 어디세요? 어떻게 부산에 오시게 되었는지요? 고향은 진주입니다. 열아홉에 부산에 왔습니다. 돈 벌러 왔죠. 처음엔 연 산동에 있는 낚시공장 몇 개월 다녔어요. 몇 개월만 다니다가 신발공장, 삼 화고무로 왔죠. 당감동에서는 한 30년 살았어요. 여기 주공아파트에 살다가 지금은 동래로 이사 갔습니다.
_ 삼화고무만 다니셨나요? 아니죠, 저는 삼화고무 다니면서 학원 다니고 진양고무로 왔죠. 한 1년 다 녔어요.
_ 학원이라고 하면 신발 관련 기술을 가르쳐주는 학원인가요? 그런 학원이 아니고 가수 되려고 오아시스하고 지구하고 있었는데 지구레 코드사 학원 나갔어요. 조방 앞에 있었어요. 삼일극장 밑에는 오아시스, 지 구는 진시장 맞은편 부산은행 조금 위에 보면 3층에 있었어요.
_ 삼화고무와 위치가 되게 가까웠겠어요. 노래를 잘하셨나요? 삼화고무하고는 가깝죠. 걸어서 다니고. 노래를 잘했다기보다는 취미가 있고, 조금 한 편이죠. (웃음) 5시에 마치면 가서 연습하고 그랬어요. 근데 그 게 잘 안되대. 김해에서 다니는 친구는 가수가 됐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 네. 그래 한 1년 하고 진양고무로 가서 공 찬다고 축구부 했어요. 주일에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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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공장 동료들과 야유회.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김영화이다. 김영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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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되면 5시부터 공차고. 진양고무도 한 1년밖에 안 다녔어요. 그러고 나서 화승, 동양에서 한 3년 가까이 있었고. 진양고무는 거의 포화, 고무화를 했는데 냄새가 많이 나요. 그 당시는 케미, 구두 이런 게 많이 없었고, 진양고무 안에서 우리 생활필수 품 다 만들었거든. 다라이다 뭐다 안 만든 게 없었어요. 신발은 그 중에서 클 뿐이지. 그런데 그 당시에 동양고무에 케미가 새로 창설이 됐어요.
_ 동양에 3년 일하셨고, 그다음엔 뭐하셨나요? 퇴사하고 기술이 좋으니까, 하청공장이 스카우트해갔죠. 동양고무 뒤편에 삼영산업이라고 있었어. 삼영이 화승 최고의 하청공장인데, 케미로서는 최 고 1순위야. 그 사장님이 양화, 구두 계통으로 최초의 개발을 하신 분이에 요. 신발 쪽에서 먼저 케미를 개발하고 만든 분이고. 그래서 그쪽으로 갔어 요. 삼영에서도 한 2~3년 있었죠. 당감동에서 직장생활 하다가, 마지막에는 화승 뱅가드, 소가죽으로 하는 공장을 하고 있었죠.
_ 신발 만드는 데도 여러 포지션이 있잖아요? 삼화, 진양, 동양에서 각각 어 떤 역할을 하셨어요? 삼화에서는 이제 졸업하고 왔으니까 추진, 입·출고 했어요. 진양고무에서 는 검사과에서 근무했고. 제품 나오면 하는 품질검사죠. 화승에서는 제품이 나오면 마지막에 밑창을 부착하는 게 있어요. 그걸 접착이라고 하는데. 그 기술을 익혔죠. 삼영에서 반장부터 하다가, 뱅가드 공장에서는 공장장으로 제법 오래 했어요. 뱅가드를 나와서 직접 제가 제조공장을 차렸죠. 뱅가드는 가야공단에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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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동에 뿌리를 내리고 : “‘백양회’라고 당감동에서 신발 제조하는 분들 모임이 있는데, 매년 연말에 봉사 하고 있어요”
_ 어쨌든 이쪽 부근으로 일을 하셨네요. 그렇죠. 부산진구에서 다 했죠. 당감동 여기는 현재도 크든 작든 제조공장 이 한 25개 정도 있어요. 그러고 봉제는 한 60~70군데 될 거예요. 부산에서 가내공업으로는 당감동이 최고 많다고 봐야죠. 그다음에 신암, 범천동 쪽에 거기가 많고, 교통부하고, 그다음이 가야.
_ 신발에 바느질하는 부업을 당감동 할머니들이 하시는 걸 봤어요. 그거는 골프라고 하는데 할머니 신발, 그거를 이 공장들이 줘서 가정집에 서 족당 얼마 해서 부업 하는 거죠. 그것도 책임지는 오너가 있어서 각 집에 쭉 나눠주고. 예를 들어서 공장에서 10원 주면 3원 묵고, 7원을 주는 거죠. 다 되면 싹 거둬가지고 오고.
_ 당감동 공장들 숫자는 어떻게 다 아세요? 실제 오래 종사를 했기 때문에 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내가 또 제조를 어릴 때부터 일찍 시작했어. 30대 초반에 시작했으니까 거의 다 알 죠. ‘백양회’라고 신발 제조하는 분들 모임이 있는데, 매년 연말에 돈 모아서 동사무소에서 어려운 분들 파악하면 쌀이나 필요한 걸 준비해서 봉사하고 있어요. 한 15년 가까이 됐어요. 돌아가신 분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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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어떻게 공장 하시는 분들이 함께 봉사할 생각을 하셨어요? 신발업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주위에 있으니 알죠. 아니까 모여서 단체를 만들어서 어떤 모임보다는 표가 나게끔 봉사를 하자고 했죠. 연말마다 돈 모으는데 평균 한 천만 원 가까이 하죠. 처음에는 동사무소 직원보고 물품 을 나눠주라 했는데, 그 뒤부터는 우리 회원들이 직접 합니다. 그 뭐라 합니 까, 사랑의 열매, 매년 타고 그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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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공장 옛 풍경들 : “월급날 되면 가게 주인들이 공장 정문에 외상 술값 받으러 줄을 섰어요”
_ 지역에 좋은 기여를 하시네요. 그 옛날에 공장 다니실 때 당시에 당감동의 풍경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그때는 여기 화승 앞에 통근 주차장이 있어요. 옆에 파출소고, 삼익아파 트 자리는 군부대였어요. 위로는 전부 논입니다. 논 바로 옆에 연지로타리 넘 어가는 산고개가 있고. 월급날 되면 공장 정문에 장부 들고 외상 술값 받으 러 줄을 섰어요. 시장부터 길옆에 가게 주인들이 전부 다 나오는 거예요. 그 러다 보면 길이 밀리죠. 시장 골목 위쪽 큰 길이 더 하죠. 그 당시는 밑에 당 감시장은 사람이 많이 안 끓었어요. 위에 시장에 통닭집이 많으니까 원체 저 쪽으로 사람이 많이 끓었죠. 또 월급날 다음날에도 돈 못 받으신 분들이 통 근 차 앞에 그리고 정문 앞에 쫙 서가 있어요. 그럼 먼저 튀는 사람, 잡히는 사람, 잡혀서 회사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 그때는 100% 외상으로 먹었어 요. 다 그랬죠. 그 당시 월급이 만 6천 원 받았나? 그러니까 돈이 참 가치가 있었고 그런 돈을 받아서도 적금이나 저축 먼저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면 은행에 줄을 서죠. 통장을 몇 개 더 만들고, 집에 부모님들한테 보내고 그랬 죠.
_ 월급이 16만 원 아니에요? 만육천 원. (웃음) 80년대는 한 10만 원대 됐죠. 80년대는 동양고무 해도 10만 원 단위고 70년대에 그렇게밖에 못 받았어요. 개발에 기술이 있으면 한 2만 5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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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아, 그런 차이도 있네요. 사장님도 저축하셨어요? 예. 저도 큰 저축보다는 그 당시에는 젊었으니까 일부 저금하고, 친구들하 고 술 많이 먹었죠. 그리고 일요일 되면 80년대는 등산, 그 당시에는 등산 많 이 갔어요. 열차 타고 여행으로 등산 많이 다녔죠. 특히 많이 간 게 경주. 열 차 타고 가면 정말 좋죠.
_ 금은방이 그렇게 많았다 하더라고요. 당감동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특징 들이 있었나요? 회사에 다니면서 한 부서 사람들이 모임, 낙찰계처럼 돈 얼마씩 내서 반지 맞추고 하니까 금은방이 엄청 많죠. 그러고 양화점도 많았고. 당시에는 양 화점에 안 가면 구두를 못 사죠. 가구점은 요 시장 안쪽으로 몰려 있었죠. 여기는 없는 게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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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그런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에피소드 이야기해 주세요. 화승 같은 데는 안에서 모델 뽑아서 연말 카렌다를 했죠. 그리고 가을에 는 단풍놀이 가고 부서별로 봄놀이 가고. 일요일 되면 공을 차는 부서들 모 여서 돈 걸고 내기도 했죠. 부서장들 앞서서 그런 걸 많이 했죠. 특히 휴식시 간, 점심시간에는 동전 가지고 짤짤이를 최고 많이 하고, 그다음 돈치기. 남 자들은 거의 한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한해 한 번씩 사내 노래자랑.
_ 달력 모델은 남자, 여자 모델이 다 있나요? 보통 여자들만. 여성들이 좀 잘 생겼다 하면 거의 검사입니다. 옷 자체도 다르고, 부서 관리하는 부분이 다르죠. 보통 그런 사람들이 많이 해요. 일 반 막일하는 사람은 할 수 없고. 사실 원체 사람이 많으니까. 남자들은 30% 안 될 거예요. 여자들이 한 70%. 여성들이 그만큼 많으니까 누가 예쁜지, 누 가 좋은지 사실 잘 몰라요. 부서마다 작업복 색깔이 다르고, 모자, 가운이 다릅니다. 구별하기 힘들죠. 그 당시는 그럴 수밖에 없었죠.
_ 구내식당은 어땠나요? 국수를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국수 주는 날이 있고, 밥 주는 날이 있어요. 회사에서 식권을 발행하는 데 국수면, 국수, 밥이면 밥, 식권에 적혀 있어요. 국수 먹고 싶으면 국수 식 권 주고, 밥 먹고 싶으면 밥 식권 주고. 건빵을 사서 호주머니에 넣어 가서 일 하다가 3시나 4시에 배가 고프면 그릇에다 물을 떠가지고 확 퍼지도록 놔놓 죠. 먹으면 그대로 소화되는 거죠. 건빵이 최고 싸요. 배도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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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이자 마지막 세대 : “신발은 오직 수작업 하는 것밖에 없어요”
_ 거의 평생을 신발 관련한 일을 하고 계신 거네요. 평생 시작부터 끝을 봐야죠.
_ 이 공장은 처음에 직원들 몇 분으로 시작하셨어요? 처음에는 13명, 지금은 7명이에요. 그때는 봉제도 같이했거든. 쪼그마니 한 30평에서 전부 수작업했어요. 기계를 넣을 형편도 안 되고. 지금하고는 많이 다르죠. 신발은 기계 시스템이 있어도 자동화가 안 됩니다. 브랜드들은 한 70% 자동화되는데 가격 맞추기가 힘드니까 금액이 자꾸 올라가죠. 신발 은 오직 수작업하는 것밖에 없어요.
_ 기술이나 기계를 좀 더 개선하고 개발하는 일에도 신경 많이 쓰시나요? 그건 이미 한국에서는 늦었어. 중국이나 베트남, 이쪽으로 다 기술이 있 죠. 여기서는 자꾸 없어지죠. 몇 년 가겠어요? 일본처럼 가내공업, 가족끼리 몇 사람이 모여서 하루에 몇 켤레 만드는 그런 시대가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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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공장이 많았을 때
_ 선생님이 1세대이자 마지막 세대가 되겠네요. 예 그렇죠. 이제는 모든 소재가 중국서 다 들어온다고 보면 돼요. 신발 자 체가 첫째는 인력이 없어요. 봉제공장에 가면 60대 이하가 없어요. 제조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에서 다섯 사람이 할 일을 중국은 한 50명이 붙어있어 요. 그러니까 중국서 들어오는 신발이 깨끗하고 디자인 좋아요. 두 번째는 소비가 안 됩니다. 중국산에 밀려서 판매가 안 돼요. 더 할 수가 없어요.
_ 공장을 당감동 위쪽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언제까지 이 공장이 유지될까요? 할 수 있는 만큼. 앞으로 한 10년 안 하겠소?
#지구레코드사 #삼화고무 #진양고무 #동양고무 #케미화 #백양회 #월급날 #카렌다 #마지막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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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있다 본께네, 세 월이 가뿐 거지
노영원
1956년생, 38년째 거주 <합천돼지국밥> 운영 노영원의 돼지국밥 가게에는 단골이 많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뜨거운 국 물이 필요한 동네 사람들이 그의 식당 을 찾는다. 그래서 돼지국밥집은 동네 에서 가장 늦게 문을 닫는다. 노영원의 당감동 생활은 오래되었다. 갓 스무 살 을 맞은 청년은 일거리를 찾아 합천에 서 부산으로 왔다. 그리고 몇 개의 인 연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하루에 5원을 주고 공동 화장실을 써야 하는 동네였지만, 여기서 직장인이 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태화고무에 들 어가 신발 일을 배웠고, 나중에는 베트 남 파견까지 나가면서 25년 동안 고무 냄새를 맡았다. 이제는 작은 식당을 꾸 리며 동네에서 하루를 난다. 진득한 성 격 탓에 그의 돼지국밥집이 훗날 당감 동에서 가장 오래가는 식당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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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당감동에 대한 기억 : “구시장엔 수양버들도 있고, 할머니들 농주도 담아다 팔고”
_ 부산에는 언제 오셨어요? 처음 정착한 데가 바로 당감동이셨는지요. 내가 합천에서 고등학교를 73년도에 졸업하고 74년도에 부산에 왔지. 내 친형이 부산영남상고 나와가지고 부산에 전포3동에 의용촌 마을이 있었어. 거기 있다가 내 직장이 태화고무, 가야에 있었어. 당감동에 아는 사람도 있 고 해서 당감동으로 오게 된 거지.
_ 당감동 처음 오셨을 때 동네가 어떤 모습이었나요? 그 당시에 당감동에 화장막이 있었고. 요 위에는 전부 산이었고. 통신기지 창이 나가고, 삼익아파트 들어서고. 아파트 이런 거 없었지. 또 하천 복개는 안 돼 있었고. 중간에 나무다리 놔가지고 왔다 갔다 하고. 그 위에 세멘을 가 지고 다리 만든 게 두 군데가 있어요. 물이 이쪽 시장 길 쪽으로 내려오고, 저쪽에는 무궁화아파트, 삼익아파트 쪽으로 내려가고. 그기 내려 가가지고 옛날 혜화여고 있는 데로 물이 흘러갔지. 저쪽에 폭포가 있었는데 빨래를 많이 했지. 동서고가도로 밑에도 복개가 안 되고 하천이었고. 공동 화장실, 5원 내면 소변도 보고. 돈을 받고 했었지.
_ 그때도 구시장이 있었나요? 구시장 골목은 옛날에 시장이었어. 경기 좋고 할 때 내려가면 수양버들도 있고. 할머니들 농주도 담아다 팔고. 막걸리를 농주라 그래. 그 시장은 오래 됐지. 요쪽 당감시장 생긴 게 74년돈가 아마 그럴 건데 그 앞에서부터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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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당시에는 그냥 쪼매나게, 시장 개념이 아니고 그냥 물건 갖다가 한 사 람이 파니까 옆에 같이 하다본께 시장 형성이 된 것이지.
_ 이북마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여기에 주로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이 많이 왔지. 한 2개 집성촌이 있었지. 피란민들이 엄청 많았지. 그러니까 집도 쪼매나이 8평, 10평, 12평 해가지 고. 피란민촌이다 보니까 매실보육원, 애들 봐주고 하는. 그 사람도 열심히 살더라. 그때는 함경도, 평안도 자기들끼리 싸움도 많이 했어. 피란 와서 묵 을 것도 없고 집집마다 애들도 많잖아. 그 사람들 다 열심히 하니까 잘 살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고. 북에서 온 사람들이 생활력 강하지. 지금은 돌아 가신 분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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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산업과의 인연 25년 : “베트남에 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가서 2000년도 1월 2일에 왔지”
_ 당감동 처음 오셨을 때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가야에 태화고무 모집하는 거 보고 이력서 넣어가지고 군대 가기 전에 76 년도부터 78년도 1월까지 다녔지. 처음에 와가지고는 공정을 봤지. 그때 공 정이라는 거는 컴퓨터도 없고 한 3일 치 주문을 받고, 재고를 보고 하루에 얼마나 해야 하는지 정리를 해야 해. 옛날에는 전부 장갑 끼고 복사기로 윙~ 밀어가지고 프린트해가 돌리 주고 이랬어. 그러다가 78년 2월 6일 영장을 받 고 33개월 강원도 인제에서 근무하고, 80년도 11월 8일 제대했지. 전화했더 니 또 일하라고 해서 복직을 했지. 공장장이 그 부서 그대로 하라고 해서 준 비파트 관리자로 있었지. 나는 이 아웃솔 쪽으로. 중창을 찍어내는 부서가 있고, 그걸 찍어서 가지고 오면 우리가 접착을 해가지고 다음 부서로 인계가 되지. 전부 수작업이었지.
그러다가 85년도 2월에 태화고무에서 기술직 이사가 아웃솔만 하는 공장 을 창업했어. 그게 성보산업이었어. 성보산업 사장이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있어서 교도소 모범수들이 9시, 10시 돼서 공장에서 일하고, 3시 되면 마치 고 다시 들어가고 했는데 3개월 근무하고 나면 가석방을 나왔어. 그 회사에 있다가 나는 삼락동에 아웃솔 접착하는 공장 쪼매난걸 차렸지. 하다가 자꾸 신발공장이 위축되고 공장이 빠지고 이래 하니까 그게 안 돼. 그래서 삼양 통상에 입사를 해서 해외를 나갔지. 베트남으로. 지금은 삼양통상이 매각 해뿌가 다른 업종을 하지만 옛날에 나이키 외주를 받아 주로 그걸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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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발과의 인연이 외국으로까지 이어졌네요. 베트남에 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가서 2000년도 1월 2일에 왔지. 가족 은 안 가고 내가 해외지사 베트남에 파견 나가 있었지. 베트남에는 있으면 휴 가를 1년에 다섯 번 나왔어. 3개월에 한 번씩 정규휴가가 있고. 아시아나 계 약이 되어 있었는데 정기휴가 때는 회사서 티켓팅 해주고. 그리고 구정 때 는 거기도 노니까 자비로 왔지. 그때 비행기 요금이 한 55만 원 이래가 4시간 반, 5시간 정도. 그때는 부산서 비행기가 없고. 서울 가서 타야 돼. 아시아나 가 낮에는 없고 저녁에 7시, 대한한공은 8시 반인가. 그거 타고 가면 그 나 라 시간으로 1시 반에서 2시 돼야 내리고. 전화도 불편했지. 휴대폰은 비싸 니까 회사 유선전화 쓰고. 전화 요금이 굉장히 비쌌어. 종업원들이 많다 보 니까 회사 전화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잖아.
베트남에서 더 근무할 수 있었는데, 애들도 커 가는데 조금 신경이 쓰이더 라고. 혹시 애들 엇나가면 어떻게 할까 해서. 돈을 보면 해외 근무를 해야 되 고, 가정을 보면 그렇지 않고. 결국은 애들 장래를 봐서 베트남 정리를 하고 귀국을 했지. 여기 와가지고 다른 걸 여러 가지를 했지. 신발 계통도 좀 더 근 무했고.
_ 그렇다면 신발과 연관된 일을 총 몇 년 하신 건가요? 24~5년. 한 25년 될 거야. 그래 있다본께네 세월이 가뿐 거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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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시장에서 시작한 제2의 삶 : “남한테 잘하고, 욕심 안 부리고, 여러 사람 위하는 그런 마음이 있으면...”
_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셨어요? 집사람은 고향이 전라도 보성인데 부산서 오래 살았지. 처삼촌, 고모들이 당감동 위에 동평동 살았어. 고모 집에서 하숙을 한 거지. 이래가지고 소개 받고. 중매 반 연애 반이지. (웃음) 데이트는 태종대나 한 번 가고 그런 거지. 시골서 올라오면 가는 게 태종대, 해운대, 구포둑. 그때 구포둑 포장마차 있 고. 그때만 해도 낙동강 물이 좋아가지고 고기도 많고, 고 앞에는 재첩도 있 고. 용두산 공원도 가고. 결혼을 제대하고 얼마 안 있다가 스물일곱 살에 했 으니까 내가 좀 일찍 한 한 셈이지. 내 결혼할 때만 해도 나는 경상도고 집사 람은 전라도라서 반대가 엄청 심했지. 딸 셋에 막내아들 있는데, 우리 애들 키울 때만 해도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어. 집사람도 부업을 해가지고 돈을 좀 벌었고. 지나 보면 좀 더 잘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옛날에는 직장인 이다 보니까 밤늦게 오제, 일요일 되면 또 공 차러 가뿌제. 그래 있다본께 집 에서는 잠만 자고 가고. 살다 보면 서로 맞춰 살 수밖에 없는 거거든. 그래도 지금은 장사 같이 하니까 거의 같이 있지.
_ 사모님은 어떤 부업을 하셨어요? 옛날에는 신발 부업을 했지. 남자 혼자 벌어가지고 먹고살기 힘드니까 회 사서 신발 떼 오면 집에서 꿰어주는 콜크작업이 있어. 그런 일거리를 받아와 서 아줌마들한테 나눠줬다가 다시 받아서 검사해가지고 회사에 납품시키 고. 집사람이 고생이 많았지. 그때는 식당 일도 극히 없고. 애들이 있으니까
#신발공장이 많았을 때
애들 놔놓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 어린이집도 없고. 집에서 애 보면서 전부 그렇게 다 했어 옛날에는. 그 하나 해봐야 50원 정도. 그거 해서 반찬값 벌 어가지고 먹고 살겠다고. 고생 많이 했어. 그때 남자들이 애를 봐줐나, 애들 보듬고 나가면 바본 줄 알고. (웃음) 우리도 클 때 아버지한테는 한 번 안겨본 적이 없지. 남자가 부엌 가면 그렇고. 지금은 안 그렇잖아. 그때는 전부 다 그 랬어. 그때 도와주고 했으면 좀 편했겠지.
_ 돼지국밥집은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 원래 여기서 할머니가 돼지국밥을 한 10년 정도 하고 있었어. 할머니가 그 당시에 몸이 아프니까 가게를 내놨어. 아는 사람들이 권유도 하고, 다른 경 험도 없고 해서 하던 걸 그대로 인수받았지. 내 고향 이름을 따가지고 합천 국밥. 그 앞에는 대동국밥이었고. 내가 가게 한지는 11년 됐어.
_ 시장 상인회장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장사 시작하고 본께 시장에 상인회가 있어서 내가 총무를 하고 회장도 하 게 됐지. 총무는 내가 2012년부터 하고, 회장은 14년, 15년인가 2년 임기 하 고. 지금은 안 하고. 신발회사에 인연이 워낙 많고, 사람 상대도 많이 해봤으 니까 사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게 많지. 시장 상인회 한 거는 남한테 잘 하고, 욕심 안 부리고, 여러 사람 위하는 그런 마음이 있으면 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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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_ 신발공장 다니실 때 시장에 장사도 잘되고 지금과 완전 다른 풍경이었을 것 같은데요. 어휴, 엄청 잘 됐지. 그때는 다락방이고 전부 다 차고 그랬거든. 그 당시는 재래시장 말고는 없잖아. 인구도 많았고. 지금은 나이 많은 사람들만 있다 보니까 일할 사람도 없고, 큰 마트가 들어오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차 타 고 가지. 애들 놀이방도 있제, 여름에는 시원하제, 겨울에 따뜻하니 그쪽으 로 가고. 시장에는 2천 원, 3천 원치 팔면 마트는 천 원치도 팔고. 그리고 핵 가족이 되다본께네. 옛날에는 양만 많으면 됐는데. 파 같은 거 많이 사면 집 에 가서 다듬어야지 되는데 젊은 사람들 그런 거 못 하지. 근께 손님을 좀 잡 을라 하면 시장도 생각을 좀 바꿔야 되겠지. 깨끗하게 하고. 물건도 소량으 로 팔아야 되고. 시장이 따라가야 되는 거야.
#신발공장이 많았을 때
본심이 이어지는 마을 살이 : “시장에서 우리 집이 최고로 늦게 마쳐”
_ 짧은 기간에 마을 모습이 많이 변했는데, 동네가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하나요? 요가 아직 좀 빈촌이라. 아직도 재래화장실 있는 데도 있어. 발전이 될라 면 재개발이 돼야 되고, 사람들 생활환경이 개선되는 게 필요하지. 당감1, 3 동이 합쳐지면서 당감1동 주민센터가 1층에 한 달에 2만 원만 내면 되는 헬 스장, 위에는 커피숍으로 바뀌었는데 그런 거 많이 해줘야지. 구청에서 요즘 복지를 많이 해주지. 구청이 주민을 위해서 이런 생활공간이라든지 이런 걸 많이 해줘. 주민센터 가면 노래 교실도 있고 어린이 장남감, 책도 대여를 해 주고. 엄청 잘 하고 있어.
_ 주변에 아파트가 많이 생겨도 계속 이곳에서 사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나는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 오래 살다 보니까 익숙하고, 아파트 가면 자 유롭지 않을 거 같애. 주택에서 옆집하고 잘 지내는 것도 좋고. 시장에서 장 사하는 사람들끼리도 친하지. 생일 되면 서로 챙겨주지. 요 앞에 가게 사장 님이 올해 칠순이라. 저녁 식사에 나도 초대를 받았지. 같이 가서 묵고, 노래 방도 가고. 나는 성격이 마 시골 촌놈이 되가지고 어울리는 거 좋아해.
저녁에 우리 가게에 동네 사람들이 와가지고 여기서 술 묵고 스트레스 풀 고. 아는 사람들이 오니까 문 닫고 집에 가지를 못하지. 시장에서 우리 집이 최고로 늦게 마쳐. 1시, 늦으면 2시까지 해. 저거들이 술 내다 먹고, 설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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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공장이 많았을 때
하고 이렇게 해. 구정 때 제사 지내고 큰집에 있는데 빨리 문 안 여냐고 전화 오고.
시장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상당히 좋고, 인심 좋지. 동네 사람 오면 회포 도 풀겸 한잔하고, 밥도 먹고. 도시는 먹고살라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인연 이 좀 메마를 수밖에 없어. 그러나 또 접해보면 그렇지 않아. 같이 잘 지내다 보면 사람 본심이 나오고. 본심이라는 게 원래 순하고, 대한민국 사람 다 좋 은데,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런 거지.
#마을의 옛기억 #신발공장 #베트남 파견 #돼지국밥 #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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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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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감동의 시장은 고향 잃은 피란민들의 애환이 깊게 서린 시장이다. 전쟁 이후 인구 가 늘어나면서 옛 마구간 자리에 지은 수용소 주변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당 감동의 시장들과 대비해 옛 시장이라는 의미로 구시장이 있다. 피란민들에게 가장 시급 한 것은 생계 문제였고, 여성들은 대체로 마을 내에서 장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찬, 채소, 음식 등을 파는 구멍가게와 노점들이 골목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수용 소 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달리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은 집 앞에 물건을 놓고 팔 수 있었 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골목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피란민을 상대로 한 냉면집, 막노동자 들을 상대로 한 미군부대에서 먹다남은 음식들을 모아서 만든 꿀꿀이죽 혹은 국수집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일명 꿀꿀이 골목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장은 점차 번성하여 구시장 위쪽으로 확장되었으며 1957년 무렵 이곳에 당감시장 건물이 만들어졌다. 시장 상가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도 있었지만 자본이 빈약했던 많은 상인들은 인근 골목에 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신발공장이 들어서고 근로 자들이 당감동 일대로 집중 유입되면서 시장들은 전성기를 누렸다. 공장의 호황으로 인 한 인구증가는 곧바로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주민 수가 갑자기 늘어나고 남도교회 앞 하천이 복개되면서 재래시장이 더 확장되었다. 당시 신발공장들의 월급날이 되면 시장 은 근로자들로 넘쳐났다. 이렇게 서로 인접해 있는 시장은 ‘당감시장’, ‘당감골목시장’, ‘당감새시장’ 이렇게 세 개의 시장으로 나뉘어 있다. 당감시장은 두 시장에 비해 안쪽에 위치해 있고, 그에 따라 빈 점포가 늘어나고 있어서 사실 쇠퇴 중인 시장이다. 그러나 이곳 세 개 시장은 주민들 에게 ‘당감시장’이라고 불리며 과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부산진구 내에서 손꼽 히게 큰 재래시장이자 활기 넘치는 곳이다.
#당감시장
(위에서 부터) 구시장, 당감시장, 당감골목시장, 당감새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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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보면 그저 마음이 동한다
최용분
1949년생, 49년째 거주 구멍가게 운영 최용분은 스물두 살에 경주에서 당 감동으로 왔다. 고향에서는 출세했 다고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다닥 다닥 붙은 작은 집들이 먼저 들어왔 다. 아무리 시골이어도 경주에서는 방 세 칸은 지어놓고 살았다. 당감동에 서 기와집 한 채를 발견하고, 뒤도 돌 아보지 않고 계약했다. 그렇다고 삶이 편했던 건 아니다. 그물 짜기, 나무젓 가락 만들기, 뜨개질 등 갖은 부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큰 시장에서 물건 을 떼와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러다 동 네 반장을 자청했다. 돈 없어서 병원을 못 가는 이웃을 보면 의료 지원 제도를 알아봐 주었고, 옆집 할머니가 아프다 싶으면 보호자 역할을 대신했다. 여자 라고 평생 연필 잡을 기회도 없었지만, 모르면 물어서라도 돕는다는 게 그녀 가 마을을 돌보는 방식이자 삶을 대하 는 태도이다.
당감 스토리
# 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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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시장
시집와서 살았던 당감동에서의 삶 : “촌에서는 출세했다하고 부산 가면 좋은 줄 알았다가 와보니까”
_ 당감동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어요? 경주에서 여기 올 때, 온 게 1970년인가, 스물두 살에 결혼해서 바로 왔으 니깐 50년 가까이 되었거든. 우리 아저씨 누나가 여기 살기 때문에. 누나 남 편이 상급 문관이었어. 옛날에는 친척 하나만 있으면 다 뚫고 온다니까. 그 래가 동생들을 다 끌고 내려온 거라. 오니깐 집이 전부 형편없더라고. 경주는 초가집이라도 있고 아래채 세 칸 지어놓고 그래 살거든. 그러니까 우리 시어 마시(시어머니)가 와가지고 여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니고 마을도 없고 딱 1년 만 살다가 경주 올라와야 하겠다, 이랬어. 선암사 올라가는데 전부 다 산이 고 도랑이고 그렇대. 부산이라고 왔는데 더 못하더라고. 그러다가 보니깐 기 와집이 하나 있는 거라. 그거 좋다고 샀어. 집도 따닥따닥하고 이북사람들 이 전부 장사하고 있더라고. 말도 못 걸고, 겁이 나고 무섭고.
_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옛날에 어른들이 중매해서 결혼했지. 나이 차이가 한 6년 났지. 결혼하기 전에 부산에 와 있었어. 내는 경주 있다가 일로 왔지. 결혼할 때 지프차, 문 관들 타고 댕기는 지프차 안 있나. 그게 얼마나 많이 오는지. 촌에서는 출세 했다하고 부산 가면 좋은 줄 알았다가 와보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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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당감동에 와서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경주서 왔으니깐 돈 버는 일은 몰랐다. 농사만 짓고. 경주에서는 양반, 상 놈만 찾지, 여자들은 나가서 일 안 하고 남자들만 일했지. 우리 아저씨는 문 관 하다가 그때는 문관 월급이 적었잖아. 그래서 퇴직하고 장사 한번 해 본 다 하다가 럭키 회산가 거기 쪼매 댕기다가 이 가게 하면서 물건 타다 놓고 오후에는 놀고 그래 살았지.
저 밑에서 살았는데 이 집을 총각이 판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있어서 달 라는 돈 10원도 안 빼고 다 주고 집을 샀지. 울 아저씨 몰래. 내가 간도 크제. (웃음) 여자가 마음대로 한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어. 총각이 폐가 안 좋았 어. 그 사람 의료보험 만들어 준다고 쫓아다니고, 영세민 만들어주고. 총각 은 빼빼 말랐는데 그 당시에는 형편없이 알랑미 같은 거 나왔거든. 그거를 내가 묵고 내가 쌀을 사다 줬다니까. 그 사람을 병원에 갖다 넣는다고 가평 까지 갔다.
#당감시장
구시장 골목의 옛 풍경 : “여기가 수양버들나무가 억수로 큰 게 있었어”
_ 이 골목을 지나다 보니 작은 구멍가게가 몇 개나 있더라고요 (건너편 집을 가리키며) 여기가 여인숙인데 수양버들나무가 억수로 큰 게 있었어. 재활용센터 저 집에. 옛날에 큰 술집 안 있나. 한복 입고 여자들 왔 다 가고. 저 밑에 집이 연탄 가게고, 저기가 냉면 가게고, 여기는 구멍가게, 여 기서 할배가 뻥튀기도 하고 그랬다네. 근데 우리가 와서 지은 거라. 이 위에 는 세탁소가 있었고, 저 위에는 신발가게고, 저 앞에는 철물점이고, 저기는 만홧가게하고 반찬집. 전부 가게들이 있더라고. 그랬는데 이 동네는 죽은 거 지. 젊은 사람들 다 나가뿌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사니까네. 쪼깨난 평수 팔아가 전세밖에 못 얻잖아.
고무공장 있을 때는 구멍가게에도 애들 많았는데, 쪽자 같은 것도 하고, 쥐포 같은 거, 애들 먹는 거 얄궂은 거 다 팔았다. 애들이 많아가지고 여기 길가에 쭉 누워 자고 그랬다. 요새는 애들 있어야 팔아먹지.
우리 딸이 학원을 갈라 하는 걸, 머스마는 학원을 보내고 딸애는 안 보냈 어. 장사하라고. 내가 물건을 사러 부전시장에 갈 때 가게를 봐야 되잖아. 애 들이 전부 고무 뛰기 하는데 지는 고무 뛰기 한번 못했어. 그걸 보면 안 됐어. ‘엄마, 몸빼 한 개 사다주라’ 하더라고. 몸빼 큰 거 입고 여기 들어 앉아가 책 읽고. 그래가 딸한테 못 해준 거 지금 손주한테 해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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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옛날에 신발 공장 할 때 엄청나게 장사가 잘 됐었겠어요. 잘 됐지. 여기 집이라고 생기면 다 사람이 살았지. 바글바글 했다니까네. 동양고무 저쪽에 가면 차가 몇 대나 서 있었어. 동양고무 차 몇 대나 갔잖아. 촌에 일할 사람 데리고 올 때. 진양고무, 동양고무, 태화고무 전부 그랬지. 이 제 뭐 있나. 여 이제 돈 벌어먹을 데 없다. 다 나가야 된다.
_ 물건은 주로 어디서 떼 오셨어요? 부전시장, 진시장 굴다리 밑에 하고, 자갈치 가가지고 떼오기도 하고. 물 건에 따라 틀리지. 국제시장 옆에 쥐포 같은 거 도매로 사가지고 오고, 과자 같은 거는 부전시장에서 도매가로 떼어 오고. 처음에는 그래 하다가 중간에 가서는 농심, 삼양에서 배달 오고. 요새는 대주는 거 받으려니까 남는 게 없 는 거라. 그래서 구루마 끌고 마트 가서 내가 사 오잖아. 이제 혼자 몸이니까. 애들이 물 같은 거는 차로 사다주고. 담배만 가끔 팔린다. 딴 건 별로다. 물 하고 우야다가 라면 하나씩.
_ 골목이 이렇게 좁은데 어떻게 시장이 됐을까요? 모르지. 와 보니까 이북 사람들이 전쟁 끝나면 고향에 간다고 집을 자그맣 게 해서 가게하고 살았어. 우리 집도 두 집이 살았잖아. 이 옆집에는 한 11가 구 살았어.
_ 부업은 어떤 걸 하셨어요? 지금 하는 부업은 옛날부터 하신 건가요? 나는 부업은 다 해봤지. 신발도 끌어 매봤고, 옛날에는 그물도 짜봤고. 신 발 끌어매는 건 배워가지고 잘 끌어 매. 젓가락도 해보고, 뜨개질 했지. 경주
#당감시장
서 옷 같은 거 짰거든. 우리 애들 클 때는 옷을 전부 내손으로 짜 입혔어.
아들은 삼익아파트 내가 살다가 수리해가지고 줬어. 우리 아들도 상 줘야 된다. 요새 애 셋 낳는 집이 어디 있노. 아파트 좋다더만 나는 여기가 좋다. 시장 가깝고 동서남북을 가도 1시간만 가면 다 가는 거라. 교통이 좋잖아.
_ 신발 끌어 올리는 부업은 얼마 받으세요? 한 켤레에 500원. 만 원만 벌이면 시마이(끝)다. (웃음) 어떤 때는 스무 켤 레 더 할 때도 있는데, 만 원만 벌이면 무조건 안 해. 그전에는 애들 공부시 키고 할 때는 스무 켤레도 넘기고. 애들 이것저것 해주고 차비라도 줘야 되 겠다 싶어 했지만. 인자는 마 대가지고. 아이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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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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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돌보는 삶 : “옛날에는 할매들 국수 삶아가 내 주고 했는데 요새는 없으니까 못 해주지”
_ 이웃 총각을 돌봐주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동네에서 직책 하나 맡으셨을 것 같아요. 반장했지. 통장 하라고 하는 거를 우리 아저씨 한다고 그러는데, 우리 아저 씨가 술을 좋아했거든. 우리 오빠가 이장질 할 때 술만 마셨잖아. 그래서 절 대로 못 하게 하려고 세탁소 하는 젊은 사람을 시켰어. “삼촌이 하면 삼촌이 못 하는 일은 내가 댕기면서 다 해줄게” 했어. 이제는 반장도 필요 없는데 내 가 반장한다고 했지. 14통 4반. 지금은 반장 없다. 없어. 한 오십 때부터 오십 다섯 살 이 정도까지 했지 싶으다.
_ 동네 사람들 챙기면서 사는 성격인 것 같아요. 옛날에는 할매들 한테 국수 삶아가 내어 주고 했는데 요새는 없으니까 못 해주지. 앞집 할매도 돌아가시는 날까지 내가 돌봐주고. 할매가 요양병원은 가기 싫다고 하대. 폐가 안 좋다 하는데 살아봐야 오래 못 살겠다 싶더라고. 할매한테, 딴 사람 말 들으면 몇 달 못 살고 죽고, 내 말만 들으면 1년은 넘게 더 살 거라고, 그러니까 내 시키는 대로 주는 대로 나이만 잡수면서 오래 살 아요, 했어. 그래서 1년 넘게 더 살아가 돌아가셨어. 백병원에 갔다가 다른 병원 갔다가 이렇게 병원 옮겨 다니면서 조금씩 있다가 할매 갈 때는 온병원 에 있다가 수월케 갔다 아이가.
#당감시장
옆에 할매는 잘 안 눕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자꾸 누워. 이 집에는 딸 도 셋이고 아들도 둘이나 되거든. 그렇지마는 병이 있으면 발견은 해줘야 되 겠다 싶어서 할매를 모시고 검사를 갔다.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한번 하자고 하는데 6만 원이면 된다 하대. 그래서 보니까 암이 이렇게 양쪽으로 퍼져 있 어. 사진을 찍어 가지고 내가 가지고 왔다. 아들한테 얘기해서 삼선병원 가보 라고 했어. 할매가 며느리 오면 밥을 안 먹는 기라. 내가 가서 미끄러운 국수 삶은 거 먹이면 잘 넘어가. 죽을 때까지도 며느리가 옷 갈아입히는 걸 안 하 려고 해서 내가 들어갔다 아이가. 병원에 갈 때 팬티고 옷이고 전부 새것만, 신발도 새것 가가라고 했어. 그래 병원에 가가 3일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가. 안 그래 봐라 검사한다고 끄집고 댕기면서 어른들 잡는다니까. 사진 찍어서 가니까 돈도 얼마 안 들고, 병원 입원 안 하고 오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작 은 병원에서 절차를 밟아 가면 돈도 적게 든다니까네.
_ 그런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영세민 신청도 해주고, 할머니 요양병원도 안 보내시고 다양하게 이웃들을 돌보셨는데,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건 어떻 게 아셨어요? 그래. 모르면 그냥 물으면 될 거 아이가 싶더라고. 우리 옛날에 촌에서 클 때만 해도 딸애들은 공부시키면 바람나서 나간다고 남자들은 공부시키고 우리는 공부를 안 시켰어. 오빠가 경주에서 이장하는 것 보고 배웠다 아이 가. 그리고 그게 느낌이, 안 배워도 눈으로 가 보니까 동네일을 저래하니 되 더라 하는 걸 배웠어.
#통신기지창 문관 #구시장 #구멍가게 #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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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 을의 기억을 쌓다
공석장
1950년생, 41년째 거주 시장 노점 운영 공석장은 호떡 장사로 시작해 안 해본 일이 없다. 한 철은 머리핀을 팔았고, 다음 한 철은 빵 장수로 계절을 났다. 돈 버는 데는 소질이 없다면서도 안 파 는 물건이 없고 못 파는 물건도 없다. 거리를 지키며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그의 일과이자 평생의 삶이다. 그 덕에 마을의 모든 시간을 목격했다. 여공 무 리가 빼곡하게 거리를 오가는 광경부 터, 하나둘 고무공장이 문을 닫고 사람 들이 떠나는 것까지 지켜봤다. 마을의 전성기는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 지만, 그는 동네의 목격자이자, 마을을 지키는 주민으로 거리를 지키고 있다.
당감 스토리
# 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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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시장
골목시장 주민들과의 대화 : “밤 11시까지 장사가 잘됐다 아이가. 참 아득한 옛날이야기다”
“처음에 장사할 때는 여기 동양고무가 있었고 저 밑에 진양고무도 있었어 요. 그때는 고무공장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런 공장 있을 때랑 지금이랑 장 사가 좀 틀리죠.”
“공장 있을 때는 공장 다니는 사람들만 2만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인구가 없어져 버리니까 3동하고 1동하고 합동시켰잖아. 고무공장 다 돌아갈 때는 다락방 같은 데서 세 사는 사람도 있고.”
“고무공장 한창 돌아갈 때는 당감동에 인구가 부산 시내에서 제일 많았어. 공장 떠난 거 그게 원인이야. 인도네시아 저쪽으로 많이 빠졌다 아이가. 김해 양산으로도 다 빠져 버렸어. 공장 떠나니까 젊은 사람들도 가버린 거야.”
“동양고무 있었지, 진양고무 있었지. 동양고무만 3천 명 넘었지. 그런 공장 이 다 없어져 버리니까 인구가 바로 줄어버리는 거라.”
“그때는 아가씨들이 이 골목에 내려갈 때 밀려가 내려갔다.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고.”
“밤 11시까지 장사가 잘됐다 아이가. 지금은 7시, 아니 6시 반만 되면 시마 이(끝)다. 왜 그냐면 그때는 야근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거든. 잔업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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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11시에 퇴근하거든. 그러니까 11시까지 된다고 장사가. 그렇게 잔업하 고 또 장 보러 오고. 퇴근하면서 뭐 사가니까 그때는 골목이 빡빡해. 평상시 에도 골목이 비좁았는데. 사람만 다니는 데지.”
“참 아득한 옛날이야기다.”
리어카 노점의 역사 : “호떡도 굽다가, 악세사리도 하다가, 빵 장사도 하다가, 과일 장사 하다가”
_ 장사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41년 했어요. 앞집에 2층에 살아요. 고향은 곡성이고 서울에 있다가 결 혼 해서 이쪽으로 왔어요.
_ 고추 장사를 계속하신 거예요? 아니요. 처음에는 호떡도 굽다가, 악세사리도 하다가, 별거 다 했어요. 빵 장 사도 하다가, 과일 장사 하다가, 그다음에 인자 고추 장사한 지는 7, 8년 됐어.
_ 업종을 왜 자꾸 바꾸신 거예요 ? 안되니까. 그때 그 시기에 맞춰가지고. 지금은 내가 지병이 있어가지고 멀 리 못 다니고 일을 못 하니까 장사가 안 되도 하는 거예요. 먹고살기 위해서. 고추 팔면 하루에 한 3만 원밖에 안 나오거든. 돈 벌려고 있는 게 아니고 다 른 노동은 못 하고 그렇다고 해서 리어카 끌고 멀리 가서 일도 못 하고.
#당감시장
_ 고추는 어디서 납품받으시나요? 주민들이 당감시장 물가가 싸다고 하시더 라고요. 부전시장. 여기가 쌀 때도 있고 비쌀 때도 있고. 왜냐하면 부전시장은 조 금 딸린다 싶으면 되게 비싸게 팔고, 쳐진다 싶으면 헐게 팔거든요. 아침에 한 번 해오면 그대로 팔거든. 장사라는 게 일정 이윤을 보고 팔거든 무조건 막 싸게, 무조건 비싸게 파는 거 아니거든. 그런데 동네 장사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할 수는 없지. 갑자기 비싸게 팔면 손님들 떨어져요.
_ 어떤 장사할 때 제일 돈 많이 벌었어요? 과일 장사가 제일. 그때는 뭐 많이 번다는 것보다도 그냥 밥 먹고 사는 거 죠. 그래도 집사람이 잘 모아서 애들 대학교 보내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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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옛날 : “시설이 많이 좋아졌는데 먹고살기는 옛날 시절이 더 좋다고 봐야죠”
_ 호떡 장사할 때는 신발공장 다니던 분들이 되게 많이 사먹었겠어요. 특히 여성 손님이 많았겠어요. 평균적으로 그렇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 그렇지. 그때는 사모님들이 많 이 일했지. 부인들이 많이 일했는데 공장이 떠나 버리니까, 아가씨들은 멀 리 가서 일할 수 있지만 가정주부들은 못 하잖아. 가정주부들은 거의 다 놀 지. 지금 부업도 많이 없어져 버렸지. 그래서 돈이 없으니까 잘 안 써. 옛날같 이 쓰는 게 좀 줄어 버리지. 그러니까 더 장사가 안되지. 옛날에는 펑펑 버니 까 쓰기도 잘 쓰고. 술집 같은데 팍팍 돌아갔는데 지금 술집 다 없어졌잖아 요. 여기 골목에 술집이 바글바글 했다. 경기가 잘 돌아가는지 아닌지 알려 면 술집 같은 데 가면 알아요. 술집 같은 데가 경기가 잘 돌아가야 되는 데거 든.
_ 옛날에 여공들이나 공장 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쪽에 많이 살았어요? 그거는 모르겠는데, 다락방 그런 데서 세를 살고 그랬거든.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데는 다 살았다고. 집이 나쁘든 좋든 간에. 지금은 아파트 아니면 세 가 안 나가. 빈집으로 다 되었잖아. 내 집도 여기 있는데 빈집이잖아요. 짜그 러질 것 같아서 못살고 빈집으로 묶어놨어.
_ 골목시장 길이 옛날에는 많이 좁았나요? 여기는 시장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 하꼬방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이 안
#당감시장
쪽으로. 길도 요만큼밖에 안 돼. 리어카길, 사람만 다니는 길. 지금은 넓어진 정도가 아니라 도로지, 도로. 여기 아기 옷 파는데 오래됐어요. 거기는 아버 지 때부터 있었어요. 그때는 시계점, 금은방이었지.
_ 당감동이 옛날하고 비교해서 뭐가 바뀌었나요? 옛날보다는 시설이 많이 좋아졌죠. 집들도 보면 새 건물도 많이 짓고 아파 트 많이 들어오고, 길도 넓어지고 많이 좋아졌는데 그래도 먹고살기는 옛날 시절이 더 좋다고 봐야죠. 고추 팔면 많이 벌 때는 하루 3만 원 벌어. 그러면 본전 빼고 갈 때도 있고. 장사라는 게 수입이 일정하지 않거든.
#골목시장 #고무공장 #리어카 노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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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근 씨네 첫 번째 가족사진
하 명 근 (아빠) 김 형 자 (엄마) 하 진 철 (첫째 아들) 하 성 민 (둘째 아들)
16년째 거주
<서울떡집> 운영 모든 장사가 쉽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떡집은 가족 장사나 마찬가지다. 일손 이 중요하다 보니 대목에는 온 가족이 달라붙어야 겨우 물량을 맞추고, 손님 을 기다릴 때는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 야 한다. 그들에게 당감동은 그래서 더 각별하다. 단칸방으로 시작한 살림은 이제 어엿한 이층집으로 늘어났고, 장 사하느라 졸업식도 제대로 못 갔지만 두 아들은 유명 대학에 나란히 입학했 다. 부모에게는 자부심으로 남은 곳이 자, 자식에게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는 곳이다. 가게를 비울 수 없 어 변변한 가족사진 하나 없던 하명근 씨네 가족에게 첫 번째 가족사진이 생 겼다.
당감 스토리
# 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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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감시장
※ 하 : 하명근 (아빠) 김 : 김형자 (엄마) 철 : 하진철 (첫째 아들) 민 : 하성민 (둘째 아들)
관계로 이어오는 가게 : “떡을 잘해서라기보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_ 가게 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김 : 2003년도에 개업했어요. 떡집 하면서 당감동으로 왔죠. 천안에 있다가 왔습니다. 제 친정이 부산이에요. 하 : 저희 처가가 주례에 있고. 저는 진주가 고향입니다. 이렇게 물어보니까 맞선보는 것보다 더 떨립니다. (웃음)
_ 친정이 가까워서 당감동으로 오신 거예요? 김 : 부산에 오고 싶었어요. 왜냐면 우리가 부산에 살았으니까. 굉장히 오고 싶 었는데 구하다 보니까 당감동으로 오게 된 거죠. 근데 와서 보니까 당감동 에 아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친척들하고 아시는 분이 많았어요. 하 : 친가나 외가나 지금도 보면 명절에 가까이 있는 고모나 처남이 와서 많 이 도와주고, 처제도 부산에 다 있어요. 친가 쪽으로 봐도 우리 나이대 는 형제가 많잖아요. 김 : 애들 아빠는 팔남매고 우리는 오남매고 다 부산 살아요. 이렇게 엮이 고, 엮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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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같은 동네에 아는 분들이 많은 게 사는 데나 장사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 시겠어요. 김 : 그런 것도 많았지만 애들이 학교생활을 워낙 잘하니까 좀 많이 알려졌 어요.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잘하니까 ‘공부 잘하는 그 애 집’ 이렇게 알려지게 되더라고요. 둘 다 당감초등학교 나왔어요. 하:첫 째는 과학영재학교를 나와 가지고 카이스트 가있고. 둘째는 부산대 갔어요. 김:과 학영재학교 엄마들이 여기 도움을 주잖아요. 이렇게 인연이 된 거예요.
_ 장사하시느라 아이들 돌볼 시간이 없었을 텐데,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네요. 하 : 애들 엄마가 잘하니까. 내는 떡만 열심히 하고. (웃음) 애들 엄마가 잘 챙 겼어요. 제가 사실 경제적으로는 아이들을 못 챙겨줬어요. 애들 엄마가 많이 힘들었는데도 일하면서 틈틈이 챙겨줬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하 다 보니까 가족들이 함께 풀리더라고요. 사람이 그런 게 있잖아요. 더불 어 살면서 떡보다는 어떨 때는 친밀감이 중요한. 학교 엄마들이 와가지 고 소개해 주고, 가족들도 많이 살고 하다 보니까 사실은 떡을 잘해서라 기보다. (웃음) 그런 쪽으로 도움을 많이 받고, 힘이 되고 이러다 보니까 가족들이 다 잘 된 것 같아요. 김:한 칸짜리 방에 살았어요. 여기는 일 하고, 저기는 자고. 그러다 이 집을 산 거죠. 지금 1층이 가게고 2층에서 살아요.
#당감시장
_ 그러면 처음에 왔을 때는 지금 가게 자리가 아니었네요. 하 : 그 옆에, 옆에 두붓집 건물이었어요. 지금은 그 집이 고깃집이에요. 그 자리에 있다가 저희가 집을 사게 되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거죠. 김 : 여기 한 10년 전에 길이 나면서 그 집을 사가지고 왔죠. 소방도로로 넓 혔어요. 하 : 일이 풀리다 보니까 이렇게 착착 되더라고요. 그게 내가 감사하게 생각 하는 거죠. 종교는 없지만 항상 뭐든지 ‘감사합니다’ 하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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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 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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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가족 이야기 : “작은 것들이 살살 모이다 보니까 힘이 나고, 일은 어려워도 이리 사는 거예요”
_ 성격도 되게 밝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단골도 많이 있을 것 같고요. 하 : 처음에는 떡집이 많이 없어서 잘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떡집이 많이 들 어오고 어려워지잖아요. 그라면서 애들이 공부를 잘해서 도움을 주고, 애들 엄마가 잘 챙겨주고 하니까, 큰 건 아니지만 작은 것들이 살살 모이 다 보니까 힘이 나고, 일은 어려워도 이리 사는 거예요. 그리고 집사람이 적극적으로 하는 성격이에요. 여기도 잠시 와가지고 사진만 찍고 간다 길래 나는 그것만 생각하고 왔는데. (웃음) 그러면서 가족이 집사람 덕 분에 좋은 경험을 하는 거죠. 김:나 는 우리 애들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고, 사진도 없고.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지 싶어서. 가게를 하게 되면서 학교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못 가요. 항상 애들 아빠가 가게 보고, 제가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그래서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가족사진이 없어요. 하:애 들 졸업식이 있어도 제가 일을 하다 보니까 못 갔어요. 업이 이렇다 보 니까 그런 쪽으로는 챙길 생각도 못 했죠. 제가 사진 찍은 거 보면 전부 쉬는 날 산에 간 거밖에 없거든요. 백양산에 가서 찍은 사진. 근데 가족 사진이 없는 거라. 집사람하고는 갔는데 애들 하고는 못 간 거죠.
_ 등산을 좋아하시나 봐요. 하 : 제가 일을 이렇게 하다 보니까 시간이 잘 안나요. 일요일 같은 경우는 떡 을 해주고 쉬거든요. 1, 3주 휴무를 하는데 멀리는 못 나가겠고 집사람
#당감시장
하고 목표를 세워서 부산에 있는 산을 다 돌자 했어요. 장산은 한 세 번 을 돌았고, 영도부터 부산에 있는 산은 안가본 곳이 없어요. 낮지만 체 력적으로도 맞는 것 같고. (웃음) 높은 산은 못 타겠고. 올해는 아들하고 백양산 가서 해돋이 사진만 있습니다. 시간이 나면 집사람 바람 한번 쐬 어 주고 좋은 데를 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
_ 아드님들은 어떠세요. 부모님들이 장사해서 좋은 점이라든지 단점이라든 지. 철 : 누가 이런 경험 해보겠습니까. (웃음) 친구들 만나면 떡집 하는데 이름 이 ‘서울떡집’이라고 하면 부산에 있는 서울떡집이냐고 잊어버리지를 않 더라고요. 또 애들하고 얘깃거리도 있고. 아빠가 말해준 대로 학교 선생 님들이 떡을 시켜주기도 하니까 ‘떡집 아들’이라고 불립니다. 친구들한 테도 기억에 남고, 재밌게 지내고 있습니다. 민 : 떡 좋아하는 애들 있으면 친하게 지내고 하다 보니까 되게 좋은 것 같아 요. 어릴 때 학교 갔다 오면 냉장고에 얼려 놓은 거, 못 파는 거 전자레인 지에 돌려서 간식으로 주셨어요.
_ 아드님들이 떡을 많이 드셨겠어요. 부모님을 많이 도와주나요? 하 : 사실 명절에 사람 구하기 어렵거든요. 어릴 때부터 해마다 한 번도 안 빠 져 먹고 아들들이 도왔는데, 큰아들은 KTX 타고 와서 가방 내려놓고 그때부터 팔기 시작한 게 어제 문 닫을 때까지 밤샘 했어요. 잠을 못 자 다가 김해에 있는 할매 보고 이리 잠시 온 거거든요. 둘째는 이틀을 연 달아서 잠도 못 자고. 아들들 덕분에 추석 잘 넘겼죠. 애들도 엄마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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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까 도와주는 거고. 우리뿐만 아니고 다른 떡집도 다 똑같아요.
서울떡집 이야기 : “아빠가 아주 꼼꼼하게 일해요. 아주 ‘썽질’ 날 정도로”
_ 가게 이름은 왜 ‘서울떡집’인가요? 하 : 장사를 많이 안 해봤지만 이름이란 게 참 중요하더라고. 나는 옛날부터 항렬 따지고 이러지는 않거든. 그런데 살다 보니까 이름은 한번 지어놓 으면 바꾸기도 어렵고 참 소중하다는 걸 느꼈어요. 아무래도 불리기 쉽 고, 기억에 오래 남는 거. 특별한 것도 있지만 좀 은은하면서 오래가고. 그런 생각에 이름을 지었는데 나쁘지는 않더라고. 부산이라고 ‘부산’을 넣으면 너무 흔한 것 같고, 그렇다고 머리가 너무 좋아서 창작해서 지어 낼라 하니 그것도 안 맞고. (웃음) 하다 보니 우연찮게 서울이 괜찮더라 고요. 김:근 데 사람들이 떡집을 갑자기 찾을 때 제일 기억이 나는 게 서울떡집인 것 같아요. 114 문의도 엄청 들어오거든요. 떡집을 찾을 때 당감동에 서 울떡집 있냐고 114에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대요. 손님들한테도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114에서 떡집을 묻는데 여기를 연결해줬다, 이런 경우도 많았어요.
_ 그게 언제쯤인가요? 요즘에도 114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나요? 김 : 옛날에 그랬지. (웃음) 요즘에는 스마트폰, 인터넷 통해가지고 주문해요.
#당감시장
_ 명절 이외에 떡이 많이 나가는 때가 있어요? 김 : 초하루 보름부터 무슨 행사 있으면 떡은 안 빠지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한 번씩 리듬을 타면서 팔리는 시기가 있어요. 쌀도 항상 재여 있으니까 먹고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그렇다고 아주 큰 돈 버는 건 아니고 노력한 만큼 들어오긴 하는 것 같아요.
_ 떡집은 몇 시에 여세요? 많이 나가는 종류는? 김 : 여는 시간은 주문받는 거에 따라 틀리죠. 주문이 일찍 있으면 3시, 4시 에도 일어나고, 판매만 해야 될 경우에는 조금 늦게 일어나고. 저희 집은 영양 떡이 많이 나가요. 소포장이 되어 있는 게 얘네 학교도 그렇고 다 른 학교에서도 되게 많이 찾더라고요. 유치원도 그렇게 먹기 좋게 나가 요. 백설기가 나가도 작게, 먹기 좋게, 애들 쥐기 쉽게.
_ 다른 떡집과의 차별성, 비법 이런 게 있나요? 김 : 애들 아빠가 성실하죠. 아주 꼼꼼하게 일해요. 아주 ‘썽질’ 날 정도로. (웃음) 하 : 집에 가서 안 싸울 정도만 얘기해야 된다. (웃음) 김 : 자기 맘에 안 들면 과감하게 엎어버려요. 나는 그냥 주자고 할 때도 있 는데 애들 아빠는 자기 맘에 안 들면 엎어버리고 그래서 많이 싸울 때가 있어요. 성격이 좀 곧아요. 하 : 내가 보기와 틀리게 성질이 안 좋습니다. (웃음) 여럿 있을 때는 웃지만 맘에 안 들면 싫다고 그래요. 장사하면 사실 유들유들하게 넘어갈 땐 넘 어가고 이래야 좋은데 그런 성격이 안 되다 보니까 솔직히 장사할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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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니죠. 근데 그게 저는 편하더라고요. 처음에 아닌 건 아니라고 해 요. 제가 비록 떡을 하고 있지만, 아이들한테 그렇게 가르치고 생활해 요. 애들 엄마는 좀 피곤하지. 이 자리를 빌려서 미안하게는 생각합니다. (웃음)
당감동에 대한 이미지 : “어릴 때부터 지내왔으니까 향수 같은 게 있어요”
_ 당감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까요? 철 : 여기가 그래도 제일 오래 살았고, 집이고 하니까 향수 같은 게 좀 있죠. 어릴 때야 부산에서 벗어날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대전에서 지내고 있 고, 서울에 올라갈 일도 종종 있어요. 당감동은 시장통의 그 느낌, 정감 영도에서 등산(왼쪽 사진), 부산의 정중앙 표지석 앞에서(오른쪽 사진). 하명근 제공.
#당감시장
있고, 시끌시끌하고, 사투리도 들리고 그런 느낌이 좋더라고요. 어릴 때 부터 지내왔으니까 향수 같은 게 있어요. 김 : 저는 얘가 과학영재학교를 당감동에서 다녔잖아요. 학부모회에 가면 제가 당감동에 산다는 게 되게 자랑스러웠어요. 당감동에 사는 사람도 여기오나,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거든요. 이 학교는 제주도에서도 오거 든요. 제주도 엄마들이 당감동에 있냐, 유명한 데를 알려 달라 이럴 때 당감동에 산다는 게 되게 자랑스러웠죠. 하 : 우리가 떡모임을 할 때 저보다 연령대가 훨씬 높은 분들은 화장터니 뭐 니, 미나리밭이 어떻고 그러거든요. (웃음) 나는 미나리밭 몰라요. 그것 보다는 우리가 당감동 살면서 어른들 말을 귀담아들어 보면, 부산의 중 심이라 살아가는데 편리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재난도 없고. 어르신 들이 외지에 이사를 갔다 해도 일부러 장 보러 오시는 분이 한두 분이 아니에요. 내 떡만 사러 오는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여기가 뭔가 좋은 게 있거든요. 저도 어떨 때는 시장도 현대화되고 발전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죠. 그리고 당감시장 하면 마트와는 다르게 포근함이라고 해 야 되나 정감이 많은것 같습니다.
#떡집 #공부 잘하는 집 #소방도로 #등산 #떡집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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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노선에서 정착의 세계로
손 종 기 (아빠) 신 경 희 (엄마) 손 지 윤 (딸) 손 용 준 (아들) 22년째 거주
<영심이 어묵> 운영 신경희는 가난에 쫓겨 당감동에 찾아 들었다. 태어난 지 반년도 안 된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산꼭대기의 셋방에 짐을 풀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20만 원, 지금도 또렷한 삶의 마지노 선이었다. 그 뒤로 공장에서 하루를, 시장에서 이틀을 났다. 생계에 쫓기느 라 자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셋방에서 아파트로 옮겨와 아 이들에게 방 하나씩 내줄 수 있게 되었 다. 두 남매가 태어난 보람산부인과는 여전히 동네에 있고, 시장에 부는 칼바 람이 매서워도 이곳에서 계속 살아볼 생각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삶은 이어진다는 걸 누구보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감 스토리
# 당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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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시장
첫 가족사진 : “가족들이 모일 시간이 없어요”
_ 오늘 촬영하시고 나중에 가게 여시는 거예요? 오늘은 문 안 엽니다. 사진관 가서 찍어도 되는데 가족들이 모일 시간이 없어요. 오늘 같이 추석에는 사진관도 문 안 여니까.
_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있나요? 가족사진이 하나도 없어요. 어릴 때 애들 한 명씩 찍은 거는 있는데 가족 네 명이 모여서 찍은 게 하나도 없어가지고. 애들 쪼그만할 때는 성지곡수원 지 이런 데 가가지고 찍은 게 하나씩 있는데 그것도 이제 한 명씩은 다 빠져 있어요. 왜냐면 누군가 한 명이 찍어야 되니까. 네 명이 다 모여 있는 건 거의 없어요. 그래서 거실에다가 걸어놓을라고. 집에서 제사하면 손님들도 오고 이러니까.
_ 추석에는 어디 다녀오셨어요? 어제 아침에는 시어른들이 우리 집에 와서 제사 지내고 가시고, 조금 있다 가는 가야에 있는 친정에 가요. 어제 하루 만에 다 치렀어요. 시골 아닌 게 다행이에요. 가야 갈 때 버스 두 번 타고 가야 되는데 어제는 네 명이 다 모 여서 택시 타고 갔어요. 가야는 가기가 힘들어. 한번 만에 가는 버스가 없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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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_ 삼익아파트 사신다고 들었는데 사진 속 장소는 어디인가요? 거기는 삼익아파트 오기 전에 셋방 살던 주택 앞 골목이에요. 영남빌라 안 쪽에 살 때. 십오 년 됐어요. 그때는 우리 딸이 어릴 때니까 더 이쁘잖아. 크 니까 내 엄마 못생긴 윤곽이 자꾸 나오더라고. 어릴 때 진짜 이쁘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옆에는 동생이 아니고 우리 딸 어릴 때 남자친구. (웃음)
옛날에 살던 집 앞에서 손지윤 양과 이웃집 동생. 신경희 제공.
#당감시장
마을과 시장의 변화 : “ 김지태산에 살던 사람들이 시장에 많이 내려왔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덜 내려오 죠”
_ 당감동에 사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 22년 됐지. 첫째가 6개월 안 돼서 왔으니까. 그때 셋방 살았어. 100에 20 만 원짜리. 산꼭대기에요. 지금도 그런 방 찾을 수 있어요. 갈 데가 없어가지 고 당감동으로 왔죠. (웃음) 친구가 한둘이 있었어요. 맨 처음에 친구 집에 세를 얻어 온 거죠. 아무래도 연고자가 한두 명은 있어야 오기가 쉽지. 장사 한 지는 15년 됐고.
_ 처음 오셨을 때와 지금 동네가 어떻게 바뀌었나요? 동네는 좀 많이 변했죠. 왜냐면은 아파트도 들어섰으니까. 그때 김지태산 에 판잣집이 많았거든요. 그때는 그쪽에는 못사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입니 다. 못사는 사람들일수록 재래시장으로 많이 오거든요. 김지태산에 살던 사 람들이 시장에 많이 내려왔는데 지금은 다 가고 아파트 들어서니까 그때보 다 덜 내려오죠.
_ 김지태산에 있던 판잣집들이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나세요? 15년 전쯤이었나. 공사를 하다가 중단하고 한 10년 가까이 있었어. 건물 짓다가 중단하고 한참 몇 년 있다가 동일아파트가 들어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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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판자촌이 없어지면서 시장에도 영향을 미친 거네요. 손님들이 30% 줄었다 봐야 돼요. 그때는 못사는 사람들이 천 원, 2천 원 들고 콩나물 사고 많이 했거든요. 근데 아파트 들어서고는 차 몰고 마트를 많이 가요. 급한 거만 조금 사지. 홈쇼핑, 인터넷 영향도 있고.
#당감시장
작은 신발 공장마저 사라지다 : “내가 일했던 곳들 거기 다 문 닫았어요”
_ 아들, 딸은 이 동네가 고향인 셈이네요. 고향이죠. 보람산부인과에서 났어요. 그때는 동양고무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섰을 때야.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이미 아파트가 다 되어가지고 내 친구 가 입주했으니까.
우리 애 어릴 때 신발공장을 다녔는데, 저기 지하에 염색, 나염 공장 이런 데 갔거든요. 지금 내 아는 사람이 하는 신발공장도 다 문 닫았어요. 아는 언니 남편이 신발공장 했거든. 그리고 내가 일했던 곳들 거기 다 문 닫았어 요. 내 생각에는 중국이나 양산 쪽으로 많이 갔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옛날에는 ‘사상하면 프로스펙스 신발 공장’ 이렇게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없지. 우리 어릴 때는 프로스펙스 세일 한다고 하면 가족들 다 데리고 갔어 요. 친구들도 가고.
_ 큰 공장은 없고, 작은 공장들만 여러 개 있었나요? 신발을 다 만드는 게 아니고 지하에 이런 공장에서는 나염을 한다든지 중 간 단계의 일하는 데가 몇 군데 있었어요. 부암동 영남빌라 쪽 하고, 화승아 파트 올라가는 쪽 지하에도 있었고. 주택이나 좀 작은 상가 지하에 서너 군 데 있었어요. 문 닫고 마누라는 간병인으로 가고 남편은 비슷한 데 기술자로 가고. 아니면 남자는 페인트 배우고, 여자는 아파트 청소일 도와주러 가고. 그런 사람 많아요.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세 집 정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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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묵 장사 이야기 : “비싸게 팔면 손님 다 떨어지기 때문에 비싸게 팔도 못 해요”
_ 아버님은 무슨 일 하세요? 같이 장사한다 아입니까. 그러니까 가족이 모일 기회가 없는 거죠.
_ 어묵 어떻게 만드시는지 알려주세요. 반죽를 받아서 튀겨요. 다 그게 있어요. 회사마다 반죽이 다 되어가지고 나와요. 생선을 직접 사가지고 처리를 하려면 가게도 넓어야 되고, 기계도 몇 억짜리 들어와야 되고. 그런 거는 큰 공장에서 하죠. 생선을 들여와서 반 죽을 치대가지고 가게에 배분을 하는 거죠.
_ 어묵 가격이 옛날보다 좀 올랐어요? 다 올랐죠. 올라도 당감동은 비싸게 팔면 손님 다 떨어지기 때문에 비싸 게 팔도 못 해요. 백 원 비싸게 팔았다가는 가게 앞에서 온갖 난리 지기는데. (웃음) 나도 어디 가서 이 집에 5천 원 하고 저 집에 6천 원 하면은 똑같은 메 이커면 5천 원짜리 가게에 가요. 메이커도 틀리고 그러면은 100원 비쌀 수 도 있고, 똑같은 메이커라도 솔직히 이집 저집 하다 보면 100원 비쌀 수도 있고, 쌀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가게 앞에 서서 난리 치는 거 보니까 나는 저 렇게는 행동 안해야지, 이 생각 들었어요. 싼데 가서 사든지 아니면은 깎아 달라고 하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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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기억하는 당감동 : “그냥 좋아요. 서면이 가까워서”
_ 부모님들이 장사하시니까 누나가 동생 돌보면서 살아왔을 것 같아요. 그냥 막 자랐어요. (웃음) 사랑 못 받고. 원래 시장에 있는 사람들 애들은 사랑 못 받고 막 자라요. 어릴 때는 내가 너무 못 해줬어요. 지금은 애들한테 신경 써야 되겠다 싶어서 용돈도 좀 주고. 애들 어릴 때는 먹고살기 바빠 가 지고 용돈도 많이 안 주고 이랬는데.
_ 따님은 섭섭한 거 있어요? 딸 : 아니요. (웃음)
_ 당감동에 사는 건 어때요? 딸 : 그냥 좋아요. 서면이 가까워서. (웃음) 신 : 서면까지 안 나가도 저녁에 마치면 요 큰길에도 뭐가 많잖아요. 우리는 서면까지 나가지는 않아요. 9시나 돼서 가게 마치면 근처에도 천구백 원 짜리 삼겹살도 있고, 먹을 거 많으니까. 두 마리 7천 원짜리 통닭집도 있 지. 내가 어릴 때 20대 초반 때만 해도 그때는 남포동 같은 데 많이 나갔 는데. 이제 일 마치면 이 근처에서 놀지. 서면은 애들만 나가고.
_ 어릴 때 동네가 어땠는지 기억이 나요? 딸 : 뭐라고 해야 되지?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갈 데도 없고. 신 : 어릴 때는 니가 돈이 없으니까. (웃음) 크니까 어디 가서 재미있게 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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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이러는데 어릴 때는 당연히 밖에 못 가지. 사람들이 생활의 질이 높아지 니까 옛날에는 일해가지고 몇천 원 들고 와서 콩나물 사고, 두부 사고 먹고살기 바빴는데 요즘은 사람들 생각하는 자체가 틀려졌지. 내 친구 보니까 해외여행도 다니고. 그래 안 비싸더라고. 요즘은 여행 다니고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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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시장
는 데 돈 쓰는 거에 대해서 펄쩍펄쩍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 문화생활 즐기고, 좋은 데 가고 그런 거 같아요. 우리 세대만 해도 어릴 때 먹고살 기가 바빠서 문화생활 즐길 여유가 없었어요. 얘들 세대부터는 결혼 안 하는 애도 있고, 결혼해도 애를 하나, 둘만 낳고. 우리 엄마 세대 때는 낳기만 하면 자기 먹을 거 갖고 태어난다 해서 그때는 많이 낳았거든. 요 즘은 둘이 놓고 치아뿌던데. 아니면 세 번째 아들 놓고 그러면 인생 승 리다. (웃음)
익숙함이 묻어있는 마을 : “애들 건강하고 그러면 그냥 계속 당감동에 살 생각입니다”
_ 삼익아파트는 옛날에 통신기지창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삼익아파트가 지은 지 사십 년 됐는데 재건축하자고 몇 년 전부터 계속 말 이 나오는데 진행이 안 되고 있어요. 삼익아파트 이사 올 때 그때도 된다고 했거든. 내년에 된다고 합디다. (웃음) 지금 12년이 넘었는데도. (웃음) 아는 언니가 부동산 하는데 “니 죽기 전에는 안될 거니까 기대하지 마라.” 하더라 고요. (웃음) 우리 아들이 살 때는 되겠지.
#가족사진 #김지태산 판자집 #신발공장 #어묵 장사 #딸의 기억 #삼익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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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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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산, 저 아파트 사이에 호랑이가 울고, 여우가 캐앵 캐앵, 노루도 뛰 댕기 고. 밭이고 논이고 두렁으로 댕기고 그랬는데”
“ 여기는 장소가 좋고, 위치가 좋아. 온 각처로 차가 다니고. 시장 좋고 여기 참 좋은데, 병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여기가 참 좋은 데라.”
“ 당감동이 옛날에 똥감동이라고 했다. 왜냐면 여기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 했다. 비만 왔다하면, 철퍽, 철퍽 여기 허리까지 올라오 고. 이 동네는 전부 다 똥동네다, 똥동네. 밭이고 논이고 똥을 퍼다가 전부 논에 다 붓고.”
“ 과일, 사과, 감. 자갈치 가서 생선 사가지고 와서 우리 집에서 팔았지. 이 근처 조그만한 집에. 구멍가게 칸칸이 질러다가 거기다가 다 얹어다 놓고. 지금은 새로 지었지. 그물도 짰지. 당감동하면 그물로 유명했지. 고기 잡는 그물. 실을 딱딱 대 주고 우리는 받아가지고 짜고 이랬지. 한 필에 20원씩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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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공장 라인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하는 아줌마들이 내가 있으면 불편해했어요. 여기 동서고가 놓기 전에는 길가에 장판, 골동품 집이 없었 고, 쪼맨 쪼맨한 방을 세 놨어요. 그래서 공장에 물건 갖다 주는 일만 하고 여기 방을 하나 얻어서 용접해주고, 자전차 고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갑 작스레 집을 짓는다고 비우라는 거라. 그때 한 게 쓰레기를 했어요. 종량제 되기 전에 가정 쓰레기 수거하는 거 있잖아요. 구청에 있는 친구가 한번 해 볼래 해서.
파출소 밑에 고물상부터 그 위에 시장까지 내 구역이었어요. 요 앞에 쓰레기 버리는 차 통 두 대 대놓고 거기다가 버리면 되는 거라. 새벽 세 시 반에 일어 나서 집사람이랑 둘이서 일하고, 끝나면 지는 공장에 가고, 내는 여기 오고. 또 내가 용접하는 일을 하니까 건설업자들을 많이 알게 되는 거라. 여기 작 은집들 새로 짓고, 고치는 건축 많이 할 때, 철대문 만들어주라, 철계단, 빨 랫대 만들어주라 해서 계약이 되면 나무고 뭐고 잡동사니를 내가 다 꺼내야 되는 거라. 저 통이 있으니까 마음대로 실으면 되는 거라. 그러면 몇 십만 원 버는 거죠. 돈은 추접은 데서 생기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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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은행에서 근무할 때는 목요일 쯤 전기 때문에 쉬는 날이 있었어요. 그 날은 은행 창구가 터져나갈 정도였어요. 아침에 전부 머리 묶으라고 하고, 그 날은 전투지. 월급 처음 타서 적금 넣으러 오는 여공들, 두세 번 넣고 돈이 없으니 해약하는 사람. 요새같이 번호표 뽑고 그런 게 아니고 불렀어요. ‘몇 번 손님 누구씨’ 이렇게.”
“ 당감동 시장은 명절 때 추석이나 설 되면 밤 두시, 세시까지 장사했다고. 명절 에 고향가기 전에 신발이나 옷이나 과일이나 선물을 산다고. 고향에 가서 선 물을 살 수가 없는 게 고향까지 통근차로 데려다주니까. 차 3대 가서는 5대 모 집해서 올라오는 거야. 그때 호남사람들 아니었으면 공장도 못 돌아갔지.”
“ 나도 작은 신발공장을 하다가 부도가 났어도 그때 공장 댕기던 애들이 지 금도 추석, 설 되면 전화하는 애들이 있어. 어떤 부모들은 아들이 군대 갔 다가 첫 휴가를 우리 집에 먼저 왔다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부모가 기 다리는데 사장집에 먼저 오느냐고 해서 찾아오기도 했지. 밤 10시 되면 처 녀 종업원들 사는 하숙집 다 돌아. 하숙집 아주머니가 일만 시키면 되지 뭐 할라고 이렇게 관리하느냐고 그래. 그러면 ‘아주머니 우리 공장 다니다가 처녀가 잘못되면 내가 마음이 아프잖아요.’ 이랬지.”
“ 어릴 때 전라도에서 왔는데, 집에 하숙을 놨어요. 엄마가 신발공장 다니는 하숙생 돈 모으라고 월급도 관리해줬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신뢰가 있겠어 요. 몇 년 전에 우연히 하숙하던 사람을 만났는데, 하숙집 아들이라고 알아 보고 반가워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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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란 모진 풍파 속에 서로를 붙들다
장 방 보 1940년생 김 선 이 1943년생 김선이는 아버지 등에서 귀하게 자랐 다. 아버지는 김선이를 업어다 학교에 데려다줄 만큼 끔찍하게 여겼다. 이름 부르는 것도 아까워 눈으로 마음으로 어루만졌던 딸이었다. 그런 그녀가 밀 양에서 부산으로 오면서 억척스러운 6남매의 엄마가 되었다. 종이에다 기 름을 먹여 겨우 지붕을 얹은 집에 살았 다. 그래도 화장실이 있고 수돗물이 나 오는 게 호사였다. 장방보는 김선이의 남편이다. 술을 좋아해 아내의 속을 썩 일 때가 많았으나, 아이들 잘 키우려 고 중동까지 가서 돈을 벌어온 아비였 다. 미사일이 머리 위로 지나다녀도 편 지 한 통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무소 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밖에 기댈 데가 없었다. 지나가면 다 추억이라고 하지 만, 그러기엔 너무 아픈 나날이었다. 지금 여기 남은 것은 세월을 함께 넘어 온 부부라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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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게 자란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 “학교가 집 옆에 있는데도 아버지가 업어다 주고, 업으러 오고”
_ 두 분 고향은 어디세요? 어떻게 당감동에 오시게 되셨나요? 영감쟁이 고향은 경북 달성. 대구 화원예. 사촌 형님 따라 부산에 내려와서 대신동 작은집에서 컸답니다. 당감동에는 건축 일감 따러 왔답니다. 저는예, 경남 밀양. 부산에는 오빠가 당감시장에서 이발관을 하니까 가족들이 다 내 려왔고. 시장 안에 용금당 앞에 문화이발관, 당감동서 젤로 크게 했어예.
부산에서 요래 살다가 중매로 만났어요. (웃음) 결혼은 67년도인가 66년 도에. 6남매. 아들 서이, 딸 서이. 큰딸이 쉰두 살인데 당감초등학교 나오고, 손자도 당감초등학교. (웃음) 결혼하고는 시어른하고 당감동에 같이 살았어 요. 다른 데 한 번도 안 갔어요. 계속 당감동에 살았는데 이사는 몇 번 했지 예. 건축사업 잘못 돼가 셋방살이도 해보고, 처가살이도 해보고.
_ 건축 일 말고 다른 일도 하셨나요? 영감쟁이는 건축일 한 가지만 꼭 했어. 다른 거 일절 안 했어. 저는 아무것 도 안 했어요. 너무 귀하게 컸어예. 아버지께서 이름도 한 번 안 부르고 똑 ‘아 가’ 이카고. 학교가 집 옆에 있는데도 업어다주고, 업으러 오고. 그만치 귀하게 자랐어요. 근데 여기 와갖고는 무척 힘들었어요. (웃음) 클 때 아무것도 안 하 고 크다가 결혼하고 나서 생활이 안 좋으니까 조금 보탬 될라고 동양고무에 갔 는데 따라가지를 못해요. 한 1년이나 다녔나. 뭐 일을 할 줄 모르니까. 내가 못 따라가니까 눈치를 줘서 할 수가 없어예. 부업 같은 거도 일절 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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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변화의 산증인 : “옛날에 우물 퍼다 먹는 데가 많았어예”
_ 오래 사셨으니까 여기 동네가 변하는 거 많이 보셨겠네요. 많지. 진양고무 있는 로터리 전부 도랑이었는데 다리 놓기 전에 옛날에는 도랑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놀았어예. 한 11시쯤 되면 통신기지창 부대에 서 화장실을 퍼. 뭐가 떠내려와. 그래도 애들은 목욕해요. 동양고무 뒤에 옛 날에 가죽공장이 있었어예. 가죽 그거 냄새 많이 나예. 그 물에도 또 빨래 를 씻어예. 그만큼 물이 귀했어예. 부대 뒤로 하천반이라고 마을이 있었거든 예. 비만 오면 그 동네 사람들이 자갈, 모래를 건져서 부수입을 당당하게 버 는 거예. 그리고 공작창에서 기차에 연탄 떼고 남은 거 버리고 나면 또 재탄 이라고 나오는 게 있어예. 쪼끔 덜 탄 거. 곡수라고. 그것도 주워가지고 우리 가 밥 해먹고, 팔기도 하고. 당감동 여기 참, 옛날에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했어요. 비가 오면 그만치 땅이 질었어예.
통신기지창 뒤에 가면은 사각새미(샘)가 있었는데, 주변은 전부 보리밭이 었고. 그 물을 길어다 먹고 살았어예. 요서 쫌 내려가면 또 큰새미(샘)가 있 었어예. 극락다리 가는 샘이랑. 하천반에 또 새미가 있어예. 무궁화아파트 있는 자리. 그거 길어다 먹고 살았어예. 많이 길러 댕겼지. 옛날에 우물 퍼다 먹는 데가 많았어예. 부암동까지 갑니다. 물이 귀해가꼬. 또 요 밑에 가면 수 돗물 파는 데가 있어요. 동이 줄 쫙 세워놓고 한 동이 얼마씩. 그래 또 사다 먹고. 안 그러면 철도 댕기는 아저씨 따라서 공작창에 가서 얻어먹고 그래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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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앞에 당감1치안센터 있는데 그 도랑가에 옛날에 공동변소가 있 었어예. 아침이 되면 줄을 어~데까지 서예. 전부 거기 가니까. 표를 사가지 고. 밤에는 몰래 거랑에다가 볼일 보고 갖다 내버리고. 우리는 그래도 집에 수도도 있고, 화장실이 있었어예. 농사지으면 논에 물을 줘야 하니까 물이 안 나와. 농사 안 지을 때만 조금씩, 비 올 때 조금씩조금씩. 수도라 칼 수도 없어예. 비올 때는 물이 많으니까 줘예. 물이 귀하면 또 안 줘.
_ 집에 수도도 있고 화장실도 있으면 그래도 괜찮게 사신 거 아닌가요? 근데 옛날에는 쓰레뜨도 아니고 갑바도 아니고 루핑이라 카는 기름종이 로 지붕을 이은 집이라예. 다른 집에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니까 아무것도 없는거예. 물도 다 갖다 버려야 돼예. 근데 우리는 그래 있더라고예. 쪼깨 괜 찮았는데 어려워졌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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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안고 : “옛날에는 진달래꽃이 참 많았어예”
근데 옛날에는 당감파출소 앞에 다리가 없어서 징검다리로 돌을 놔났는 데, 비가 오고 물이 많으면 저~ 둘러가야 돼. 하천반 울로 공작창 기숙사 있 는데 거기 다리 하나가 있어. 그리 돌아 다녔어. 여기 마 옛날에는 길이라 칼 수도 없어예. 여기서 부암고개 갈라카면 산 하나 넘어가는 것 같애. 여기 길 다 깎아서 이렇제, 산을 넘어가야해. 부암동 주택 있는데 거기는 깡패들 소 굴이고. 무서웠어예. 다행히 공작창 정문이 고기에 딱 있었어.
김지태산 거기는 많이 크지는 않았는데, 옛날에는 진달래꽃이 참 많았어 예. 마을이 없고 논밭이었거든예. 저 위에 거기는 전부 미나리밭이고. 그래서 화장실 푸는 사람들이 거기에 구덩이 파서 똥을 갖다버려요. 우리 아이들이 진달래꽃 꺾고 장난하고 놀다가 똥구디기 빠져가 오면 그건 지지도 않아.
동양고무 뒤에 극락다리 지나가면, 화장막이 있으니까 장의사 차가 가잖 아예. 고 다리 옆에 절이 쪼매난게 또 하나 있었어예. 쪼매나이 절이라 칼 수 도 없고. 부처 하나 놔놓고. 노잣돈 놓고 지나가고. 선암사 올라가는데 거기 에 공동묘지, 화장막. 저기는 장의사 차가 지나가면 괜찮은데, 연고지 없는 사람들은 리어카에다가 태극기를 그려서 얼룩덜룩하이 담아갖고 끌고 가거 든예. 그런거 보면 억수로 무서버예. 가다가 그거 보면 돌아와삐리. 근데 장 의사하고 그런 게 하루 종일 다니잖아예. 공동묘지 가면은예, 연고지 없는 사람은 찾아가라고 그냥 궤짝 몇 개 얹어놔 놓고. 발, 신발 나온 사람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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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딸들은 학교 갔다 왔다가 놀 데가 없잖아예. 그럼 선암사 절 밑 에 가서 가재 같은 거 한 바가지씩 잡아와가 오전에 갖고 놀다가 죽으면 내버 리고. 아이들이 놀 데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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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의미 : “그때는 전부 ‘사’ 자 들어간 사람들만 삼익아파트에 산다 했거든예.”
_ 아프면 어디로 가셨어요? 당감동 안에는 병원 있었나요? 도랑 바로 앞에 시립병원이 있었는데 서면 북성극장 거기 있었고. 도랑가 에 시립병원이 있어가 병원이 도랑에서 환자들 빨래 지었잖아. 그러다가 시 립병원이 없어졌어예. 시립병원이 지금은 저짝에 있잖아. 서면에 한독병원. 거기 제일 많이 다녔어. 서면서 제일 컸었거든요. 한독병원에서는 수술도 하 고. 당감동 여기 조산소도 많이 있었다. 근데 저는 애들 다 집에서 낳았어요. 저는 병원에 한 번도 안 갔어예. 시어른하고 친정엄마가 도와줬으예. 그때는 병원 갈 환경도 안 되고. 밥만 먹으면 부잔거예. (웃음) 아아, 옛날얘기 진짜.
_ 삼익아파트 생겼을 때 아파트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갈 능력이 안 되지. 그때는 전부 ‘사’ 자 들어간 사람들만 산다 했거든예. 아파트가 서면 이런 데보다도 당감동이 제일 먼저 생겼잖아예. 거기는 꿈도 못 꾸지. 인제는 삼익에도 시장 장사하는 사람들 많이 살고 있어예. 옛날 같 으면 안 되지. 의사나 사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살았지.
_ 당감동에 고무공장 많을 때 여기 엄청 인구가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는 어땠나요? 말도 못 하지. 방세가 6개월마다 올라예. 방 한 칸에 문 하나 열면 부엌, 그 거밖에 없어예. 그런데도 6개월만 되면 방세 올리고. 나도 셋방 살 때 방세 쪼깨 올리는 건 괜찮은데, 나가라 할까 싶어서 그게 제일 겁이 나예. “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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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달에는 방세 좀 올려야 되겠는데” 그러면 “아이구야 할머니, 고맙습니 다. 얼마 드릴까요” “7만 원인데 7만 5천 원 주야 안 되겠나” “예, 할머니 고 맙습니다. 나가라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아들이 학교에 가야되는데, 꼭 할머 니가 새벽에 빨래를 씼어예. 그거 안 도와주면 또 안 좋게 보잖아예. 빨래 씻 는 거 도와 줄라믄 우리 아들은 학교 늦어가지고, 내내 빨래 씻다가, 삐꼼삐 꼼 돌아보다가. 결국에는 밥도 못 묵고 도시락도 못 싸고 가는거예. 안 도와 주면 할머니가 나가라할까 겁이 나가. 할머니 무슨 일 있으면 다 도와주야 되고 내 할일도 못 해예.
애들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 와가지고, 책 사보라고 돈도 주고 가고, 아 프면 약 지어갖고 들여보내고, 이발 시켜갖고도 들여보내고, 목욕도 시켜가 들여보내고, 여행도 데리고 가고. 아들, 딸 모두 공채로 진로 다 찾아갔어예. 선생님들이 참 많이 도와줬어예. 선생님들이 가정방문 오면 책상도 하나 없 고 애들만 오물오물 있으니까 그래도 공부하는거 보면 너무 장하다 하면서.
가장의 책임감 : “걸프전쟁 때 많이 놀래가지고 공황장애도 있어예”
지금은 부잣집 화장실만 한 거 쪼마난 거 하나 가지고 살아예. 영감쟁이가 그래도 계속 술 마시다가 이라다가는 애 공부 못 시키겠다 하면서 외국으로 날랐다 아입니까. 사우디 방위사령부 3년, 사우디 경찰대학 4년, 총 7년. 그 래가 애들 공부시키고 집 쪼매난 거 가졌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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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쟁이는 귀가 많이 어두워요. 고함을 질러야해. (웃음) 영감쟁이가 사 우디 가서 죽을 고생 많이 했어예. 걸프전쟁 때 많이 놀래가지고 공황장애 도 있어예. 사우디 경찰대학 할 때 미사일이 머리 위로 휭휭 날라 다녔답니 다. 국내에서는 전화고 편지고 일절 연락이 안 되지예. 아는 사람한테 궁금 해서 물으러 가면, 우리나라에서 다 보호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세 기 띄워갖고 다 데리고 온다, 걱정하지 마라, 하더라고예. 그렇게 고생하고 귀 국해가 가족이 아직 안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덥수구리 한 사람이 오 드만은 도와준다 카고 짐을 싹 다 갖고 도망갔더랍니다. 그 고생해서 가족들 선물해가 온 거 다 이자뿌가 병이 나서 죽다가 살아났어.
이제는 마을이 돌보는 삶 속에 :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너무 잘해줍니다”
_ 평소에는 친구들과 같이 잘 어울리세요? 당감행복드림센터에서 하는 요가 해예. 2년 다 되어 갈 거야. 잘 하지는 못 해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건강체조를 많이 하지예. 우리 경로당에서 여기에 많이 옵니다.
_ 경로당은 매일 가세요? 아니요. 다른 데 돌아댕기고 한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예. 무슨 행사 있 으면 가고. 경로당에도 화요일하고 목요일하고 요가가 있어예. 경로당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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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재밌어예. 딴 날은 교회 노인대학 가는데 제일교회 한 군데밖에 안 가 예. 제일교회는 수요일, 목향교회는 목요일, 남도교회는 금요일. 여러 군데 가면 너무 힘들어예.
_ 뭐가 제일 재밌으세요? 뭐 다. 가는 데마다 할매들한테 너무 잘해주잖아예. 노인대학 가면 잘해 주제, 경로당에 잘해주제, 요가 오면 잘해주제. 즐겁지예. 어디든지 나이 많 은 사람들 가면 입장료 안 받고 어른신들 어서 들어가라 카지. 나이 많은 사 람들한테 너무 잘해줍니다. 이리 가도 어르신, 저리 가도 어르신. 지하철 공 짜로 타지예. 너무 잘해주예.
#문화이발관 #도랑 #하천 #재탄 #장화 #샘 #하천반 #김지태산 #극락다리 #화장장 #공동화장실 #부산시립병원 #한독병원 #루핑 #삼익아파트 #셋방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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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 없이 시작한 세월, 멀리서도 돌아오는 종착역을 만나다
남현숙
1958년생, 53년째 거주 <만보당> 운영 시니어를 위한 스타트업을 하는 아들이 곧 4대 토박이 될 집이라고 소개하며 가 족사진 촬영을 신청했다. 아들과 딸은 엄 마를 위한 ‘몰아주기’ 촬영 콘셉트를 잡 고, 일부러 ‘망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엄 마를 중심에 두어 단단해 보이는 가족이 었다. 남현숙은 당감동에 기약 없이 왔다고 했 다. 부모 손을 잡고 정착한 이곳에서 쭉 자랐고, <만보당> 사장님으로 30년을 살 았다. 경제 위기에 휘청여도 누군가는 살 아남을 거 같아서 그냥 했다. 고무공장이 호황일 때는 모든 게 좋았다. 명절에 금 반지는 한 돈이고, 두 돈이고 척척 나갔 다. 옆집 가게의 그릇도 많이 팔렸다. 당 감동은 그런 곳이었다. 기약 없이 시작한 세월이지만, 그녀가 당감동에서 정붙이 고 사는 이유가 되었다. 정 때문에 멀리 서도 돌아오는 종착역 같은 이곳이 남현 숙이 생각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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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당> 당감동에 자리 잡다 : “옛날 명절에는 어른들 금반지 선물이 많았지”
_ 당감동엔 어떻게 오셨어요? 고향이 경북 선산인데 어른들 따라, 기약 없이 왔죠. 어릴 때 초등학교 입 학 전에 왔죠. 원래 아버지가 연고가 있었는갑더라고. 그러니까 왔겠죠. 저는 결혼하고 다른 데 한 5년 살다가 장사하기 위해서 다시 당감동으로 왔어요.
당감동 가게는 정확하게 88년도에 시작했고, 이 자리에서 했어요. 그전에 는 우리 남편이 금사동에서 금은방을 한 10년을 하다가 결혼하고 좀 있다가 이쪽으로 왔지. 친정이 여기라서. 88년도 그 당시에는 좀 됐는데 그러고부터 누구 말마따나 계속 내리막길이지. (웃음)
_ 예전에 고무공장이 있을 때 금은방이 잘되었다고 하셨죠? 맞아요. 엄청 많이. 인구가 많으니까 가게 수도 많았죠. 동양고무 떠나고 나서 서서히 가게도 정리되고 또 IMF 오고 가게가 많이 없어졌죠. 옛날에는 이 쪼깨난 동네에 한 30개 있었는데, 지금은 한 10개도 채 안될 거예요.
_ 그때는 주로 뭐가 많이 나갔나요? 옛날 명절에는 어른들 금반지 이런 걸 선물로 맞추는 게 많았지. 요즘은 현금으로 많이 하죠. 현금 좋아하니까. (웃음) 그리고 당감동에 그릇장사가 엄청 잘 됐지. 싸고, 쉽게 살 수 있는 그릇, 냄비 있잖아요. 그런 장사가 엄청 잘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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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발찌가 유행하는데 시대별로 유행하는 아이템이 바뀌는 게 있나요? 바뀐다는 것보다 기존 아이템이 추가되는 거지. 옛날에는 귀걸이는 있어 도 발찌라는 건 없었으니까. 플러스(+) 발찌가 되는 거지. 하나 더 늘어가는 거지. 디자인은 유행을 타지만 품목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것 같아요.
_ 단골손님이 있나요?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까 고객도 유동적이죠. 갔다가, 왔다가 하는. 젊은 사람들은 엄청 유동적이에요.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또 오는 사람 도 있고. 이제는 취향이 다양하니까.
_ 금은방 하면 IMF 금모으기 운동이 떠올라요. 그때 어땠나요? 그때 많이 했지. 그런데 우리는 장사하니까. 그런 건 잘 안되고. 그냥 힘들 었지. 그때 가게를 계속 할까 말까는 했는데 누군가는 살아남을 거 같아서 그냥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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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국민학교 학생일 때의 기억 : “우리 학교 다닐 때는 한 반에 70-80명 있었는데 3부까지 있었어요”
_ 자녀분들도 다 당감초등학교 나왔겠어요. 맞아요. 우리는 학교 바로 옆에 가게가 있으니까 좋죠. 나도 항상 가게에 있으니까. 돈은 못 버는데 지금 생각하면 장점 아닌가 싶어요. 옛날에는 부 모들이 돈 벌러 밖에 나가면 집에 애들이 혼자 있잖아. 나는 일을 해도 항상 가까이에서 애들을 볼 수 있으니까,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장점 인 것 같아요.
나도 당감초등학교 19회 졸업생, 초창기 졸업생이에요. 우리는 소풍을 선 암사로 갔지. 걸어서 올라가요. 요새 애들은 모르지. 소풍 10번 간다면 10번 다 갈 정도로 선암사에 많이 갔어요. 화승아파트 지나면 집이 없었잖아.
우리 학교 다닐 때는 3부까지 있었어요. 하루에 세 번을 나누어가지고. 숫 자가 너무너무 많으니까. 6학년 때 14반까지 있었으니까 어릴 때는 더 많았 지. 갈라지고도 14반이라니까. 그때 한 반에 70, 80명 있었는데. (웃음) 애들 일찍 오면 갈 데가 없잖아. 그때는 부모님들이 집에 있나. 요새는 한 반 아니 면 두 반에 20, 30명. 많이 줄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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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학교 모습도 많이 바뀌었죠? 들어가는 입구에 교실이 쫙 있었는데 그 교실이 갑자기 없어졌어요. 마당 에 원래 교실이 있었어요. 본 건물 그대로예요. 보수는 했겠지만. 오래됐죠.
_ 학교 운동회가 마을 축제였을 거 같아요. 그 당시엔 그랬죠. 옛날에는 다 그랬잖아. 식구들 다 오고, 잔디밭에 도시 락 싸 와서 해 먹고. 우리 학교 다닐 때 그때가 약간 변하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어릴 때는 부모들 릴레이 같은 거 다 있었잖아. 요새는 없지.
_ 어릴 때 주로 뭐 하고 노셨어요? 남자애들은 온데 밖에 쫓아다니면서 놀고, 우리는 고무줄놀이. 주로 밖에 서 그러고 놀았지. 화장막 한 번씩 놀러 갔는데, 옛날에는 시설 없는 화장막 이었어요. 여기서 뼈 절구에 두드리는 것도 다 보였어요. 애들한테 오지 말 라는 소리도 안 하고 그냥 일하는 거야. 그러면 그냥 구경하는 거지. 가면 그 냥 울어요. (웃음) 낮에 여럿이 가니까 무섭다는 것보다도 사람들이 우는 것 보면 그냥 따라서 눈물이 나. 한참 같이 울기도 하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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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당감동은 : “그냥 정붙이고 살기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_ 아드님이 시니어 관련한 스타트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기사를 보니까 사업 대상을 정하는 데서 어머님을 모델로 삼고 있는 것 같았어요. (크게 웃음) 좀 그런 거 같아요. 나한테 와서 자꾸 물어보고 가고 그런 거 있어요. 자기가 연관된 뭔가가 있기 때문에 안 했겠나, 그쵸? 어르신들도 많 고 하니까. 학교 다닐 때부터 계속했어요.
_ 세 번의 변화를 다 겪으신 세대가 아닐까 해요. 피란민 시대부터 고무공장 노동자시대, 그리고 이제 또 바뀌었잖아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기도 하고. 이 과정을 다 보셨는데 생각하시는 당감동 이미지는 좀 어떤지 말씀 해주세요. 내가 오래 살아서 그런가. 그냥 정붙이고 살기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민들이 살기에는 괜찮아요. 아파트도 있지만, 일반 주택들도 있잖아요. 각 각 그 나름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친구들하고 모이면 항상 당감동 어디서 차 타고 출발하고 올 때도 당감동에서 끝내요. 서면서 모여서 1차, 2차 해도 막판은 당감동에 와서 한 잔하고 또 헤어져요. 그런 느낌이 있어요.
#만보당 #금반지 #IMF #당감초등학교 #선암사 #화장막 #시니어스타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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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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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목에서 시작하는 인생의 꿈
양진호
1961년생, 58년째 거주 <추억속으로> 운영 양진호는 중학생 때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다. 성지극장, 천일극장, 노동극 장, 보림극장 등 부산의 극장이란 극장 은 모두 드나들었다. 그저 영화 보고 노래 듣는 게 좋았다. 젊은 시절의 그 는 신발공장에서 일하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직장을 옮겨 다녔다. 차 비를 아끼느라 걸어서 출퇴근 하는 게 다반사였다. 긴 시간을 일하고 적은 월 급을 받았다.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 었지만,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 그가 예순을 앞두고 자신만의 일 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잔뜩 듣 고 원 없이 만져보는 일이다. 평생 친 구와 모은 LP 음반으로 집 근처에 가 게를 하나 열었다. 날씨 좋은 날에는 문을 열고 음악을 틀어놓는데, 좁은 골 목길을 따라 오래된 선율이 퍼져나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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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목의 LP가게 : “젊을 때 영화도 많이 보고, 음악도 많이 듣고 하다 보니까 이 길로 온 거죠”
_ 여기에 가게가 자리 잡은 건 어느 정도 되었나요? 여기는 내 집이에요. 다 쓰러져가 는 집을 내 친구하고 내부 수리를 했어 요. 한 2, 3년 넘었죠. 나하고 집사람, 애 둘이, 모친하고 가족이 저 위에 살 고 여기가 사무실이에요. 쉽게 말하면 내 휴식공간이죠. 내가 한 살 때 당감 동으로 왔어요. 원래 고향은 경남 창녕인데 부모가 여기로 왔죠. 나는 거의 토박이죠. 당감초등학교 나왔고, 큰애도 당감초등학교 졸업했어요.
_ 선생님하고 친구가 같이 모으신 거네요. 친구가 많이 모으고, 내가 필요한 건 내가 사고. 그 친구는 지금 거의 미련 을 버렸죠. 왜냐하면 이런 업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까. 인자 너무 대다 고. (웃음) 그 친구 때문에 나도 물건도 많이 샀고. 친구는 이제 다 정리하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해요. 나하고 한 번씩 만나면 노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내보다 많이 아니까.
_ 영화 관련한 일을 하셨어요? 젊을 때는 직장생활 했죠. 젊을 때 영화도 많이 보러 다니고, 음악도 많이 듣 고 그러다 보니까 이 길로 온 거죠. 판도 그때부터 사가지고 모아놓고,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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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이런 걸 모으시고 관심 가진 계기가 있나요? 내가 영화하고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까. 어릴 때 그 당시는 시청각 교육이 없잖아요. 어린 마음에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때부터 극장 다녔어요. 부 암 성지극장, 천일극장, 부전에 노동극장, 그때 노동극장은 상호 바꾸어서 현대극장. 지금은 다 없어지고. 교통부에 가면 보림극장, 삼일, 삼성, 또 사상 에는 사상극장, 남포동에는 부영극장, 서울에는 스카라 극장. 중학교 때부 터 음악도 듣고.
_ 물건들은 어디서 구입하신 거예요? 개인 집에서 나오면 가서 사 오고. LP는 모으다 보니까 만장 넘었어요. 집 에도 한 사, 오백 장 있고. 비디오도 거의 천장 넘어요. DVD도 있고. 조방 앞 에 나가면 같은 업들이 많아요.
친구가 내보고 서울가서 교류를 한번 해봐라, 도움이 좀 될끼다 했는데 서 울은 교통이 워낙 거미줄이니까 괜히 길 잃어뿌면 곤란해요. 안 익숙해요. 전화상으로 친구가 이런 테이프가 나왔다, 그러면 내가 살 테니까 일단 지불 을 하라고 해요. 먼저 복사본인지 확인은 해야죠. 그 친구가 다 알아요. 복 사본 100개보다는 원본 하나가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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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가게 주인의 조건 : “하나 팔려고 해도 설명을 해줘야 사가는 사람이 이해하지”
_ 모으신 LP와 비디오테이프를 소개와 가치에 관해서 얘기 좀 해주세요. 내가 좋아하고 하다 보니까 팔 데도 있고. 아는 사람들이 연락해서 서로 좋은 정보를 주고, 사가기도 하고 그래요. 가요 LP 희귀한 거는 제일 비싼 게 한 3천만 원 해요. 그런 판은 그 당시에 한두 장 찍은 거죠. 신중현 씨가 작 사, 작곡한 판은 전부 고가 판이에요. 몇십만 원 해요. 카세트테이프도 ‘오아 시스’는 ‘오아시스’, ‘가요수첩’은 ‘가요수첩’ 모아 놓고 보면 또 틀려요.
테이프는 영화를 약간씩 잘라먹어요. 왜 그러냐면 저런 테이프들은 당시 에는 테이프에 시간을 맞춰요. 90분, 100분, 120분. 금성이나 삼성, 대우는 메인 프로예요. 만일 거기서 잘라 뭇다 하면 그 회사 이미지 때문에 안돼요.
이건 백만 원 넘어요. 이거도 큰 자켓은 15만 원, 20만 원 해요. 작은 자켓 이 영상필름이에요. 그게 지금 한 백만 원 넘어요. 전부 1974년도 이두영 씨 작품이고. 이 배우는 한국 이름으로는 한용철, 미국 이름으로는 찰리 셀. 그 당시에 태권도가 5단이에요. 발차기를 잘하니까 이두영 씨가 영화로 스카우 트했고.
윤정희 씨 테이프에다가 사인받은 거 있어요. 사인받고, 안 받고 가격 차 이가 좀 나요. 가수 이용복 씨 있잖아요. 그 사람도 충남 만리포에 카페 하고 있어요. 나도 판 들고 한번 가야 되는데. 이미자 씨는 사인을 잘 안 해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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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아는 동생이 판 들고 “선생님~”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까 보디가드를 통해 서 사인을 해주고.
_ 영화나 음악에 대해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하겠어요. 영화를 많이 보고 있어요. 지식을 모으려면 영화를 계속 봐야 되니까. 오 늘은 A 영화, 내일은 B 영화, 또 다음엔 C 영화 계속 이렇게. 음악도 그래요. 남진 씨가 1972년도에 ‘저 푸른 초원 위에’를 히트했고, 다음에 ‘머나먼 고 향’을 1972년도에 히트했고, 쭉쭉 이렇게 알아야 설명하지. 멍청하게 있으면 하나 마나지. 이걸 하나 팔려고 해도 설명을 해줘야만 사가는 사람이 이해 하지, 그냥 이거 얼마 이렇게만 해버리면 모르니까. 설명을 상세하게 해드려 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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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음악으로 주민과 소통하다 : “노래 틀어주면, 아~ 옛날 추억 생각난다, 그런 사람들 많아요”
_ 아까 문 열어놓고 음악 틀어놓으셨던데 평소에도 여기 계실 때는 그렇게 하나요? 기분 따라 다른데. 여기 정리 좀 할라고 할 때, 정리하는 동안 음악 좀 틀 고.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은 음악 소리 좋다고 시장에서도 소문나요. 노래 틀어주면, 아~ 옛날 추억 생각난다, 그런 사람들 많아요. 어르신들이 많으니 까 이거 누구 노래다 하면서. 아는 사람은 알고, 그냥 노래만 듣고 응응 하는 사람도 있고.
_ 음악 틀어놓으면 주민들이랑 대화도 많이 나누시겠네요. 대화보다는 자기 집에 이런 물건이 있으니까 가져가라는 사람도 있고. 얼마 줄 거냐고 하는데, 일단 물건을 보고 얘기하자고 해요. 그런데 막상 보면, 그냥 쓰세 요, 제가 쓰레기 치우는 사람도 아이고, 정 버리기 아까우면 주시던가, 그래요.
_ 이 골목 보니까 세탁소도 있고, 미용실도 있고 여러 가게의 흔적들이 있던 데 옛날에는 번성했던 골목인가요? 예. 당시 이 집은 쌀집이었어요. 이제 재개발하는데 업체가 들어와서 조합 원들 모집을 하고 있어요. 이 집을 팔라고 하는데 나는 팔 생각 없다, 이 짐 다 어디로 갈 거라, 이사비용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남의 집 가서 또 세 주고 그럴 필요가 없다, 이랬어요. 나도 내 집 있는 게 낫지. 남의 집 가서 싫은 소 리 들어가면서 할 필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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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당감동에 대한 추억 : “친구들이랑 철도기지 안에 들어가서 시커먼 꿀인가 그걸 막 찍어 먹었어요”
_ 어린 시절 생각나는 거 있으세요? 학교 다닐 때 우리 부모들이 장사했어요. 리어카 끌고 하루하루 생계를 하 다 보니까 골병들었죠. 그 당시엔 전부 노점이죠. 다라이 놔두고 팔고. 그 당 시 국수 하나면 칠 남매 먹고. 짜장면 한 그릇에 100원씩 했는데. 남의 집 앞에서 야채 같은 것 팔고, 돼지국밥집도 하다가 모친이 물혹이 생겨서 그거 빼는 바람에 식당 팔고 이제는 집에서 살림하고 계세요. 집사람하고 나하고 일하고. 내 친구들도 그냥 여기서 살고, 또 저기도 살고, 남도교회 뒤에도 있 고. 나도 이사를 많이 했어요. 처음에 저쪽 통신기지창이라고 거기 살다가 여기 시장으로 이사 와가지고 시장에서 또 앞으로 이사하고. 한 네 번 이사 했어요.
또 옛날에는 선암사 화장막이라고. 어릴 때 거기 돌아다녔는데 거기가 공 동묘지였어요. 여기 당감동은 훤히 잘 알죠. 당감1파출소가 옛날에 폭포였어 요. 바로 그 밑에 폭포물이 떨어졌어요. 거기서 수영하다가 빠져죽은 사람도 있고. 어릴 때 국민학교 친구들이랑 철도기지 안에 들어가서 시커먼 꿀인가 그걸 막 찍어 먹었어요. 철도 안에 도라무통에 있는 꿀. 그게 달달 하거든요.
_ 기름 같은 거네요. 몸에 안 좋은 건데 먹었던 거네요. 그때는 다 먹었으니까. 철도 넘어가서 또 찍어먹고. 그 당시에는 그렇죠. 몸 에 안 좋은 건지 그 당시에는 몰랐죠. 그래가지고 들켜서 욕 들어 먹고. (웃음)
#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_ (사진을 보여주며) 예전 부전천에 집들이 모여 있는 사진인데 옛날에 살던 곳도 비슷했나요? 네, 그렇죠. 이게 저쪽이네. 통신기지창. 이게 하천반이네. 내가 살 때 요래 살았어요. 거기도 그 당시에 빨가벗고 수영하고 그랬어요. 보니까 기억이 납 니다. 옛날에 우리가 그쪽에 살았어요. 세월이 너무 흘러가지고.
_ 선생님은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하셨어요? 그 당시에는 신발공장에 다 다녔죠. 동양고무, 진양화학. 그 당시에는 돈 한 푼 더 받을라고 옮겨 다녔어요. 월급이 10만 원인가, 16만 원인데. 그때가 84년도다. 군대 제대하고 나서 바로 일을 했으니까. 그 당시에는 전부 걸어서 출퇴근했어요.
범천동 인근 부전천과 당감천 합류지점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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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음악, 영화와 함께 : “하루는 요거 하고 그다음 날 저거 하고, 손이 많이 가요”
_ 여기 계시면 계속 바쁘시겠어요. 물건들과 기기들 관리하려면. 하루는 요거 하고 그다음 날 저거 하고. 사람도 밥 안 먹으면 배고프잖아 요. 기계도 한 번씩 돌려주고 닦아주고 그래야 오래가지, 그냥 놔놓으면 다 썩어버려요. 우퍼 스피커는 여기서 쾅쾅 울리죠. 이런 것들은 지금 잘 없어 요. 그리고 카세트, CD 플레이어, EQ, LP 플레이어. 저런 게 손이 많이 가요. 잔고장은 내가 수리도 하고.
_ 가족들은 선생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집사람은 잘 모르죠. 우리 모친도 신경 안 쓰니까. 속된 말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나도 나이도 먹었고, 내가 스스로 밥벌이는 다 하니까.
#LP #비디오테이프 #주민들과음악으로소통 #재개발 #도라무통 #하천반
추억이 모이면 역사, 사람이 모이면 그곳이 마을이라네
김은아
1970년생, 45년째 거주 <할매순대> 운영 작은 집이 다닥다닥 모여 있던 자리에 는 높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인 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시장은 어 느새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다. 40년간 자리를 지켜온 할매 순대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동네 수양딸 김은아가 그 맛을 이어가고 있다. 언제라도 푸짐한 순대 한 접시는 지난 시절을 소환해, 우리에게 인심 좋게 부려 놓는다. 시장 통 음식이라도 추억이 모이면 역사가 되고, 좁다란 시장 골목도 사람이 모이 면 그곳이 마을이 된다. 한 접시의 온 기는 주린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 람들의 기억을 모아낸다. 이제는 그녀 가 당감동 시장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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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고향 당감동 “아들하고 선생님까지도 대를 이어서 보는 거라”
_ 당감동에선 얼마나 사셨어요? 초읍에서 태어나서 다섯 살 땐가 당감동에 넘어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 요. 동평초등학교, 동평여중 이래 나왔어요. 내가 4회. 지금 우리 큰아이가 군에 갔는데, 걔가 고등학교 입학하니까 내 중학교 때 수학 은사님이 그 학 교 계시더라고. 그러니까 선생님까지도 대를 이어서 보는 거라. (웃음) 저도 학교 다닐 때 좀 활발한 성격이라 졸업한 지는 꽤 돼도 친구들이라든지 선 생님들이 저를 기억을 좀 많이 해요. 그래서 알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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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 가게와의 인연 : “그 할머니가 남 말고 꼭 나한테 줘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더래요”
_ 순대 가게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나는 순대 가게 하리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여기서 하시 던 할머니가 계셨는데, 제가 손님이었어요. 그 할머니가 굉장히 유명하신 분 이에요. 우리 아이가 어릴 때 찾아오면 할머니가 잘해줬어. 우리 아이를 예 뻐하고. 그러다가 한 7년 전에 할머니가 연세가 있으시니까 순대 가게 그만 한다고 저보고 갑자기 하라는 거예요. 그래 내가 황당해가지고, “예?” 이랬 어. 할머니 옆에는 그림자 같이 붙어있는 며느리가 있었거든요. 근데 그 언 니가 이걸 안 한다고 했어. 그래서 그 할머니가 남 말고 꼭 나한테 줘야 되겠 다고 생각이 들더래요. 옛날부터 무슨 인연인지는 몰라도 그래 정이 많이 가 더래요. 그래서 내가 우연히 물려받게 되었는데 그 계기로 시작한 게 한 7년 되었어요. 어머니가 40년 하시고. 그 어머니는 고향이 강원도인데, 서른아홉 부터 시작하셨대요. 부산에 오셔가지고 정착하기 시작한지가 어머니도 한 50년 되죠. 그 인연으로 그 어머니하고 저하고는 엄마와 딸 사이가 된 거죠. 수양딸이에요, 수양딸. 건강하세요. 바로 요 앞 골목에 살아요.
_ 그 어머니도 이 자리에서만 장사를 계속 했었던 건가요? 그렇죠. 여기가 옛날에는 좁은 골목이었거든요. 이 건너편 집 한 채가 뜯겨 서 좀 넓어졌어요. 소방도로가 새로 난 거죠. 옛날에는 그냥 골목. 아주 좁은 골목이었어요.
#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_ 그 어머니 장사하실 때부터 오시는 손님들도 있으시고요. 대를 이어서 다 오죠, 여기는. 그 어머니가 워낙 오랫동안 하셨고, 대를 이 은 단골들이 많아요. 순대 맛도 맛이지만 어머니가 고수하는 장맛이 있거든 요. 내가 그걸 물려받았어요. 된장 맛이 저희 집은 참 좋다 그래요.
_ 순대 가게 하기 전에 따로 하는 일은 없었나요? 다른 일들 많이 했었어요. 저도 살면서 우여곡절이 많다보니. 직장생활도 했었고, 장사도 했었고. 옛날에는 돈을 벌어보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그럴 때 마다 돈이 도망가더라고. 30대 후반 되니까 뭐라해야 되노, 욕심이 좀 버려 지대요. 그냥 내 그릇만큼 노력하면서 살자, 이래가지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다보니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애요.
_ 당감동을 취재하다 보니까 토박이 분들도 되게 많고, 떠났다 돌아오신 분 들도 많더라고요. 어릴 때 친구들도 보면 시집갔다가 결혼생활을 딴 데서 했는데, 우리 나이 쯤, 40대 되니까 당감동이 부르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오고 싶대요. 그 래 다 들어왔어요. 들어온 애들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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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서민들의 먹거리였던 순대 : “그 할머니는 역사에요, 역사.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_ 옛날부터 동네에 변화가 많았잖아요. 피란시절도 있었고, 고무공장 엄청 많을 때는 전성기였을 테고요. 맞아요. 고무공장 많을 때 70년대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도 당감동 경기 가 굉장히 좋았어요. 시장에 다라이만 하나 가지고 나와도 다 팔고 가는 그 런 시대였는데. 요즘 명절날 북적거림이 제가 어릴 때 느끼는 평일 북적거림 보다 못 해요. 그만큼 인구가 많이 빠져나갔어요. 또 여기 동일아파트가 생 기면서 빈민촌들 있잖아요, 재개발되면서 싹 뜯겨나갔잖아요. 근데 거기 서 민들 모여 살던 데가 있을 때는 시장이 참 많이 활성화됐어요. 그 서민들이 없어지고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고 하니까, 젊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맞벌 이하는 부부들이 많으니까 재래시장을 찾기 보다는 퇴근길에 마트를 이용 한다든지 그러니까. 우리 당감시장은 재래시장이래도 참 괜찮은 시장인데 많이 죽어가고 있어서 그게 좀 안타까워요. 우리 시장도 주차공간이랑 공공 시설이 조금만 잘 되어 있어도 젊은 사람들 올 수 있는데 아직까지 공동화 장실이 없거든요. 그래서 당감동 재래시장 발전을 위해서 높은 사람들이 힘 좀 써줬으면 좋겠어요. 주차장이랑 공공화장실. 그러면 정말 이렇게 멋진 시 장이 맥이 안 끊기고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게 제일 큰 바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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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사장님이 어릴 때도 이 순대를 맛을 보셨겠네요. 그때도 굉장히 인기가 많 던 집이었나요? 네.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것 중에 이 할머니 순대가 제일 인기가 많았어요. 진짜로. 우리 할머니가 전국에서 유명해요. 저는 할머니가 물려 준 걸 운 좋게 받은 거고. 원래 할매는 역사죠. 이전에 하던 할머니는 그 옛 날에 한 3, 40년 전에 공장에서 일을 하고 나온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 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의 추억이 다 있는 거예요, 그 할머니한테. 그러니 까 그 할머니는 역사에요, 역사.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관계로 이어지는 가게 : “저는 가족이 별로 없는데 손님들이 다 가족이에요”
(인터뷰 도중 손님이 와서 주문을 하기도 전에 ‘얼마치 주면 되는 거지?’라고 무심하게 이야기 한다.)
_ 오시는 분이 뭘 주문 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전 다 알아요. 제가 기억력이 있잖아요. 저도 저 자신을 보면 깜짝깜짝 놀 랄 정도로 기억력이 탁월한 편이거든요. 그게 뭐냐면 사람에 대한 관심하고 애정이에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그냥 순대 팔아서 돈 많이 벌어야 되겠다 는 생각보다, 이 사람들하고 사귀는 재미가 굉장히 쏠쏠하거든요. 얼마치인 지, 어디 가져가는지 미리 다 알아서. (웃음) 그리고 어느 집 개가 먹을 거는 껍질 까주고. 개 것까지 미리 챙겨주는. (웃음) 제가 좀 재밌어요. (웃음) 그래 팬 층이 다양해요. 특별한 능력 같애요, 특별한 능력.
_ 순대는 연령층이 따로 없잖아요. 남녀노소 다. 제가 7년 쯤 됐으니까, 그 왜 뱃속에 있던 애가 초등학교 들 어간 애도 있거든요. 그 애기 엄마들이 열 달 동안 순대를 잘 먹고 애가 태어 났잖아요. 돌 지났는데 그 애가 똑같이 먹어요. 잘 먹어요. 뱃속에서 먹었던 걸 기억하더라고. 그런 애들은 또 다른 집 꺼는 안 먹어, 우리 집 꺼만 먹어 요. 개도 그래요 개도. 우리 집 순대를 알아본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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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세 시부터 세 시 반 정도가 제일 바쁜 시간인가 봐요. 맞아요. 저도 뭐 큰 욕심 없이 하니까. 옛날 어머니들처럼 아침 일찍 나와 가지고 밤늦게까지 손님을 기다리는 장사는 아니거든요. 그냥 제일 많이 활 동하는 시간. 제가 손님을 막연히 기다리는 장사가 아니라 손님한테 몇 시에 서 몇 시까지 영업합니다, 이걸 박아놨기 때문에 저도 다른 일을 하면서 이 일도 할 수 있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안 받고 즐겁게 하고 있어요. 저는 가 족이 별로 없는데 손님들이 다 가족이에요.
_ 가게 이름이 있나요? 가게 이름이 없어요. 그냥 할매분식. ‘당감동 할매순대’ 이러면 다 알아요. 어느 아가야가 내한테 순대 사러 와서 가짜 종이돈, 천 원을 주는 거예요. (웃음) 사람이 외롭게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 하잖아요. 저는 손님 층이 다 양한데 하루 종일 웃다가 보면 시간도 금방 가죠. 사람도 많이 알죠. 우리 친 구들이 뭐라 하냐면, 연예인이라 그래요. 저 꼬마도 순대 간만 먹고 컸어요. (가게를 찾아온 아이에게 손짓하며) 지율아, 지율아 들어 온나. 엄마 온다, 들어 온나.
_ 순대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꽤 있네요. 많아요. 진짜 많아요. 어떤 애들은 오돌뼈 먹는 애도 있고 어떤 애들은 허 파만 먹는 애들도 있고 웃겨요. 어떤 꼬마는, 야시 같은 애가 있어요, 딸 세 명 중에 첫째 딸이 저거 엄마한테 “(꼬마 목소리로) 엄마 나 커서 순대장사 할 거야.” (웃음) 제가 요즘에는 칠십오 세 이상은 경로우대로 순대를 조금 더 주 고 이러거든요. 할머니 손님 이름도 내가 알면 이름 부르고 막 그렇게 해요.
#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_ 사장님 자리 옮기시면 안 되겠습니다. 여기서 계속 하셔야겠어요. 아휴 저는 절대 안 옮기죠. 저는 욕심 없어요. 정말로. 딱, 여기가 딱 좋아 요. 1인 기업. (손을 휘저으며) 혼자 앉아서 모든 동선이 움직이는 공간.
_ 쉬는 날은 언제인가요? 제 마음인데. 한 달에 한두 번 쉬어요. 두 번. 장사도 보통 다섯 시 반에서 여섯 시 되면 마쳐요. 주말이 더 재밌어요.
_ 당감동이 어떻게 발전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제 직업에 굉장히 만족하고요. 사람들하고 이렇게 부대끼고 알아가 는 게 굉장히 행복하고요, 이 직업이. 그리고 이 행복한 직업을 계속하기 위 해서 시장에 사람이 많이 와야 되잖아요. 당감시장에 많이 오게 할 수 있는 거는 다른 게 아니라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고객 분들이 와서 편안하게, 스트 레스 안 받고 편안하게 올 수 있도록 주차공간 있잖아요. 그게 정말 시급하 거든요. 주차공간이랑 공중화장실. 난 그게 빨리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도 행복하게 오래오래 한 40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_ 사장님도 할매 되실 때까지 하실 건가요. 그렇지, 그렇지. 정년이 없어요. 건강만 따라준다면. (웃음)
#당감시장 #수양딸 2대째 #할매순대 #손님이 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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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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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만드는 고향의 서사시
노영우
1979년생, 40년째 거주 <이태리식당 당감> 운영 노영우의 고향은 산이고 개천이었다. 여름이면 가재 잡고, 산길을 걸어 학교 다니던 때가 눈에 선하다. 첩첩산중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감동의 새내기 사 장 노영우의 기억이다. 산 밑에서 태어 난 소년은 서울과 일본으로 떠났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논과 밭은 사라지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자리했다. 노영우는 식당 간판을 내걸 고 귀환을 알렸다. 모습은 변해도 누군 가에게는 새롭게 시작하는 터전이 된 다. 그래서 고향은 힘이 세다. 당감동 에서는 청년의 삶도 고향을 말하는 한 편의 서사가 되고, 따라 부르고 싶은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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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고향으로의 귀환 : “가게는 8개월 정도 되어 가네요”
_ 가게는 언제 열었어요? 올해, 3월 말 정도 열었으니 이제 8개월 정도 되어가네요. 아직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거의 1년 정도 가게 자리를 찾으러 다녔어 요. 부산대라든지, 서면, 전포동, 남포동 다 가봤는데 여기다 하는 곳이 없더 라고요. 그러다가 우연히 인테리어 사장님이 당감동을 추천하셨는데 제가 사는 동네인데, 제가 젤 잘 알지 않을까 싶어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다시 둘 러봤는데 이 자리가 눈에 들어왔죠. 이곳을 임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는데, 다음날 알아보니 정말 부동산에 나와 있더라고요. (웃음) 인연이다 싶었죠. 그렇지만 임대료나 상권의 가격은 서면이나 전포동과 크게 차이가 없긴 했어요.
_ 다른 지역과 임대료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여기에 가게를 열어야겠다고 생 각한 이유가 있을까요? 당감동 주민분들은 서면이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적인 특성 때문인지, 당감동 안에서 외식도 하고 모임도 가지시는 것 같더라구요. 친구들 중에 당 감동 사는 친구가 있다면 친구들이 다 당감동으로 모인다는 이야기도 있더 라고요. (웃음) 생각보다 유명한 맛집도 많은 편이고요. 제 고향이기도 하고, 이태리 음식을 파는 곳이 잘 없는 것 같아서 가족들과 함께 올 수 있는 이태 리 식당을 만들면 저에게도 의미가 있고 당감동 주민분들이 좋아하지 않을 까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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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하는 감성 기록 프로젝트
_ 그러면 어릴 때는 저기 위쪽 아파트 단지가 많은 쪽에 사셨어요? 네. 태어난 곳은 지금의 국제백양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저 위 아파트단지 있는 곳이 다 산이었어요.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판자촌이나 슬라브집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저는 거기 판자촌에서 태어 났어요. 그 후 지금의 개성고등학교 근처에 아버지가 이층집을 장만하셔서 이사하게 되었고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생활하다가 요리를 배우러 서울로 떠나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자식들 다 나가니까 큰집이 필요 없을 거 같아서 이층집을 파시고 작은집으로 옮기셨어요. 저도 다시 부산으로 올 줄은 몰랐 는데 서울에서 살다 보니까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일본으로 : “화덕피자가 뭔지도 몰랐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_ 그러면 몇 년 동안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 서울에 있었던 거네요. 한 5년 정도. 일본에 워킹홀리데이로 갔다가 세타가야다이타라는 고급동 네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곳에서 화덕피자를 처음 먹었어요. 그때 당시에 화덕피자가 뭔지도 몰랐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지 금도 거기서 먹었던 화덕피자보다 맛있는 피자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때 의 기억이 강렬해서 이태리 요리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찾아보니, 이태리 요리학교인 일꾸오꼬 알마(Ilcuoco Alma) 분교가 서울에 있더라고요. 그곳에서 마스터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6개월 정도 이태리 요리
#당감동에서 만난 사람들
를 배웠죠. 그 뒤에 서울의 이태원이나 목동, 서래마을, 강남 압구정동에 위 치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계속 요리를 했어요. 그러다가 부산에 돌아왔 고, 이렇게 부모님도 계신 고향에서 제 가게를 열게 되었네요.
_ 원래 요리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그 피자를 먹기 전엔 솔직히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일본을 간 이유는 뚜 렷하게 제가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간 것이었는데, 우연히 그렇게 인연이 되었 던 것 같아요. 남자치곤 꼼꼼하고 세심한 편이고 해서 제 성향에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아버님이 예전에 중국집을 하실 정도로 요리 솜씨가 있 었던 걸 보면 조금 타고난 것도 있는 것 같네요.
_ 처음에 가게 만들려고 공사할 때 주민들이 되게 신기해 하셨을 거 같아요. “당감동에 이런 곳이?”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조금은 올드한 분위기 가 느껴지는 밥집 골목에 이런 인테리어를 하다 보니 눈에 띄는게 사실이니 까요. 남녀노소 가족들이 모두가 편하게 와서 즐길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 의 예쁜 가게였으면 하고 인테리어에 조금 신경을 썼어요. ‘당감동에도 이런 세련된 가게가 있어’라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가게가 되었으면 좋겠 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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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집 ‘당감’ : “‘이태리 식당’은 단조롭다 싶어서 지역명을 찾아보게 되었어요”
_ 가게 이름이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내가 사는 동네 이 름을 가게 이름으로 브랜드화했다는 점에서. 전 주방일만 했기 때문에 이름 짓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주위 친구들의 아이디어와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남녀노소가 들었을 때 기억하기 쉬운 이 름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영문이나 이태리어도 생각을 했었는데 세련 된 느낌은 있어도 좀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태리 식당’으로 했고, 조금 단조롭다 싶어서 ‘당감’이라는 지역명을 찾아보게 되었어요. 부산진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니 설명과 한자가 나와있더라구요. 집 당(堂), 달 감 (甘)인데, ‘맛있다’는 의미의 갑골 문자 ‘감’이 있더라고요. ‘맛있는 집’ 그러면 우리 가게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 뜻과 함께 지명도 되니 이거다 싶었죠. 프랜차이즈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종종 있어요.
_ 주변 상인들이나 마을 분들이랑 안면은 많이 텄나요? 더 많이 이야기도 나누고 조언도 구하고 해야 하는데, 영업시간도 다르고 하다 보니 쉽진 않네요. 그래도 올여름에 냉면집인 사리원 사장님과 이야기 도 나누고 대구탕집 사장님도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저희 가게가 이 골목에 생겨 좀 더 환하고 젊은 사람들이 다니게 되어 좋다고 격려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하죠. 가게 앞에 아울렛 사장님도 종종 식사하러 오세요. 다들 친절하게 반겨주고 격려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죠. 다들 이 골목이 좀 더 살아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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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전에 한 번 들렀을 때 보니까 손님들이 끊임없이 오는 거 같던데요. 여기가 번화가가 아니고 주택가이다 보니까 손님들이 몰릴 땐 좀 몰리고 한가할 땐 많이 한가한 편이에요.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는 것 같고요. 아무 래도 오픈 초에는 관심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오픈 초기보다는 조금 잠 잠해지긴 했네요. 그래도 런치메뉴도 생겼고, 계속 메뉴도 업그레이드하면 서 변화를 주면 계속적으로 많은 분이 찾아주실 거라 생각해요. 요즘 워낙 에 자영업이 힘들고 문을 닫는 가게도 많을 정도로 경기가 안 좋으니 사실 걱정이 되긴 해요. 그래도 진심을 다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 보여드리며 손 님이 오시길 기대해보려고요.
_ 홍보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블로그에 글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특별한 홍보는 못 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으로만 소식을 전하고 이벤트를 알려드리곤 하죠. 인스타나 블로그에 리뷰 올려주시는 분들을 찾아가서 감 사 인사를 전해주는 정도예요. 당감동 동네 상권이다 보니 홍보방법이 제한 적이에요. 여기 실리면 좀 홍보되려나요? (웃음) 가게 오셔서 만족스럽게 식 사하신 분들이 홍보해주시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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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마을 : “친척분들이 하숙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_ 어릴 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당감동에 대한 기억이라든지 친구들하고 뭐 하고 놀았는지, 뭐 먹고 놀았는지 등등. 집이 산 근처에 위치하다 보니 자주 백양산에 올라가서 놀았어요. 친구들 이랑 가재 잡고 물고기 잡고, 개구리도 잡고, 놀았던 거 같아요. 불을 피워서 가재도 구워 먹고, 개구리도 구워 먹고요. (웃음) 여름에는 개천에서 물놀이 도 하고 미꾸라지도 잡았어요. 동네에서 친구들이 많이 모이면 만구야라는 놀이도 했고요. 겨울에는 구슬치기, 딱지치기, 고무치기를 하며 놀았죠. 그리 고 가끔은 여자아이들이랑 고무줄놀이도 했고요. (웃음) 전 당감동에서 초, 중, 고를 나와서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버스로 통학을 해 본 적이 없어 요.
저의 부모님은 전라도분이신데, 부모님의 친척분들도 당감동에 많이 사셨 던 거로 기억해요. 옛날에는 전라도에 공장이 없어서 신발공장이 많은 부산 으로 전라도 분들이 일을 하러 오셔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는 동네분들이 화승이라는 신발공장에 많이 다니신 걸로 기억하 고요.
_ 그러면 부모님들이 신발공장에 다니기 위해서 여기로 이사를 오신 건가요? 저희 부모님 같은 경우는 그렇진 않은데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요. 옛날에는 하숙하는 집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저희 작은아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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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집을 운영하셨어요. 하숙하시는 분들은 주로 다른 지역에서 신발공장 에 다니기 위해 부산에 오신 분들이라고 들었어요. 저희 어머니도 옛날에 화 승이라는 신발공장에 다니셨어요.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형하고 누나는 다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은 결혼해서 서울에서 살다가 부산에 오셨 어요.
_ 판자촌이 있었을 때 수도는 들어왔던 때죠? 제가 태어난 곳은 수도가 아니고 산에서 흐르는 물을 아버지가 수도관으 로 연결했어요. 겨울에는 얼어서 물을 못 쓰고,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어요. 상수도가 없었고 산에서 물 내려오면 호스에다 몇백 미터 연결해서 물을 사 용했죠.
_ 본가가 이쪽에 있고 하니까 당감동이 정서적으로 친근할 것 같아요. 그렇죠. 친근감이 있죠. 근데 사회생활 하다 보니까 서울 가고, 지방 갔다 가 결국에는 다 고향으로 오는 거 같아요. 고향이 젤 좋고 편안하고 친구들 도 있고 그런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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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을 위한 바람 : “제가 맛이 없는데 고객들이 맛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거든요”
_ 가게는 주택을 개조한 것으로 보여요. 옛날 집인데, 옛날에는 담이 있었는데 없앤 것 같고, 화장실이 밖에 있는 게 좀 아쉽죠. 비가 오면 손님들이 비를 맞고 화장실을 가야 되고 그런 부분 이 단점이거든요. 제가 구하기 전에 원래 다른 고깃집이 있었어요. 다 뜯지 는 않았고 테라스 정도만 살려놨어요. 테라스에 있는 나무는 원래 있었던 거 고. 다들 나무가 참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늘도 있고.
_ 주방 일은 혼자 하나요? 요리하는 직원 한 명 더 있어요. 주로 그 직원이 피자를 담당하고 제가 파 스타를 요리하는데, 한 번에 파스타가 여러 개가 나가야 하면 바쁘고 신경이 많이 쓰이죠. 항상 똑같이 좋은 맛을 내야 하는데, 여러 개를 동시에 만들려 고 하다 보면 맛이 조금이라도 차이가 날까 봐 신경쓰게 돼요. 홀은 신경을 못 써서 아쉬워요. 그래도 다들 동네 분들인데, 직접 얼굴 보고 감사 인사 드 리고 싶은 마음인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_ 이 가게에서 자신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요? 최대한 조미료를 쓰지 않고 좋은 재료로 요리를 하려고 직접 시장에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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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고 있어요. 동네 장사다 보니 저렴하게 메뉴를 구성할 수도 있는데, 그 렇게 되면 저렴한 식재료를 사용해야 하고 음식 맛이 없을 수밖에 없어요. 아무래도 재료비를 아낄 수밖에 없거든요. 맛이 없으면 제가 팔기 싫어요. 크림소스 같은 것도 다른 곳에서도 많이 쓰는 저렴한 식물성 크림을 쓸 수 도 있고, 비용이 반값이에요. 하지만 제가 간을 볼 때 먹기가 싫은 거죠. 케 이크 가게를 가면 옛날 크림 케이크인데 느끼한 맛 있잖아요. 그게 식물성이 고, 생크림 케이크의 깔끔하고 신선한 맛, 그게 동물성이거든요.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요. 그리고 파스타의 기본이 되는 스톡(육수) 같은 것을 직 접 끓여서 써요. 조개스톡이나 치킨스톡을 시판 파우더나 큐브를 사용하지 않아요. 그걸로 요리하면 다들 차이를 잘 모른다고 하는데 제 입에는 맛이 없더라고요. 치킨스톡은 기본 5~6시간을 끓여야 해서 정말 이렇게 직접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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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내는 가게는 많이 없을 거예요. 그래도 아직은 그 방식을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맛이 없는데 손님들이 맛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거든요.
_ 어느 가게도 그렇지만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한자 리에서 오래 하면 좋을 거 같고. 그런 의미에서 마을에서 이런 것들이 개 선되면 좋겠다든지 바람 같은 게 있나요? 정말 오랫동안 한곳에서 사랑받는 가게가 되고 싶어요. 당감동도 점점 젊 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좀 더 젊은 사람들이 하는 특색있는 가게 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옛날에는 길 건너 보다는 이 골목이 더 장사가 잘 됐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술집들이 생기면서 상권이 옮겨갔다고 하더라고 요. 그래서 지금은 당감동 하면 술집 많은 곳, 이런 인식이 있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개성을 가지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가게들이 많이 활성 화되었으면 좋겠어요.
#고향 #화덕피자 #이태리 식당 #맛있는 집, 당감 #고무공장 #하숙 #판자촌 #청년 #지속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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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사전 ※ 참고: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오픈사전, 패션전문자료사전, 주민설명.
《지역말》 거랑: ‘내’(川)의 방언(경상, 충청). 곡수: ‘ 코 크 스’의 경상도 사투리로 주민들은 완전히 타지 않고 남은 석탄의 부산물을 주민들이 곡수 또는 재탄이라고 불렀다고 함. 대다: ‘되다’의 방언(경남, 전남). 머스마: ‘사내아이’의 방언(강원, 경남, 전북, 충청). 며르치: ‘멸치’의 경상도 방언. 알랑미: ‘안남미(인도차이나 반도의 안남 지방에서 생산하는 쌀)’의 잘못. 정구지: ‘부추(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의 방언(경상, 전북, 충청). 쪽자: ‘달고나’의 사투리. 《전문용어》 방통: 컨테이너형 기차화물칸. 조역: 법 률 철도청에서, 역장을 보좌하고 역장이 없을 때는 그 직무를 대행하는 직위. 또는 그 직위에 있는 사람. ≒역무조역. 솔: 「밑창·발바닥 창」의 총칭. 밑창은 아웃솔(outsole)과 인솔(insole)로 나눌 수 있으며, 농구 화 등 특수 기능화의 경우 미드솔(midsole)을 포함해 제작하기도 한다. 포화: 캔버스 운동화 류의 신발. 케미화: 비닐 계통의 화학재료로 만든 신발. 《옛말》 문관: 법률 군인의 위계(位階)나 군적(軍籍)을 가지지 않은 관리. 시발택시: 1950년대에 운행되던, 지프차를 개조한 택시.
자료 출처
도서 『내사랑 부산진 그 세월의 흔적을 찾아서』, 부산진구, 2010년 『재미있는 부산진구 숨은 이야기-니 이 이바구 들어봤나』, 부산진구,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2016년
논문 차철욱·공윤경,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정착과 장소성: 부산 당감동 월남 피란민마을을 중심으로」, 석당논총, 2010년, 제47호 : 279-321쪽
사이트 한국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부산광역시 홈페이지 http://www.busan.go.kr 당감초등학교 총동창회 http://www.danggam.co.kr 개인 블로그 자료 http://content-type.tistory.com/1530 https://blog.naver.com/kimhr91/90189415411
기사 부산일보, 2018. 07. 12. 31면 [선장과 함께하는 도시 항해] 12. 당감시장~동평초등학교 : 실향민의 상처 보듬은 도시 속의 섬
당감 감성 기록 프로젝트 당신을 기억하는
《당감행복한마을 주민 인터뷰》 유튜브 채널에서 인터뷰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발 행 처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발 행 일 : 2018년 12월 10일 펴 낸 곳 : 빨간집(등록 : 2015. 11. 9. 제2015-000013호) 자문 및 감수 : 김한근(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동길산(시인), 박광호(당감행복한마을만들기 주민협의회 회장), 조말선(시인), 차철욱(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자료제공 : 김한근, 동길산, 부산진구청 책임연구 : 배은희 연구보조 : 김경호, 염수정, 홍은성 사
진 : 최우창
영상촬영 : 이연승 녹
취 : 이아림
원고집필 : 허소희 디 자 인 : 이노그램디자인 인 쇄 처 : 까치인쇄 주
소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시민공원로 30 (부암동) 부산진구청
도움주신분들 : 당감행복한마을만들기 주민협의회 발간등록번호 : 52-3290000-000047-01 ISBN 979-11-959720-6-7(03900) ⓒ2018. 빨간집 출판사
부산광역시 부산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