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암동 隱暗洞 김재희 ㅣ 임다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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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곳곳 프로젝트 여기저기 출판사는 서울에 곳곳에 숨어 있는 10개의 동네를 선정했다. 신중을 기울인 끝에 선별된 이들 동네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와 오래된 역사를 가진 장소를 한데 어우르고 자 하였다. 때로는 엉뚱하고, 고급스럽거나, 소박하기도 하지 만 이 안내 책자에 등장하는 다양한 장소들은 늘 흥미 진진하 며, 무엇보다도 그 도시만의 얼과 혼을 담고 있는 곳이다. 빠 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주기를 감안했을 때, 취재가 진행되는 시점과 안내책자가 출판되는 시점 사이에 기존에 소개된 장소 가 문을 닫기도 하고, 새로운 장소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미 리 안내하는 바이다. 이러한 변동 사항들은 독자들이 스스로 고쳐 나가면서 책자에 반영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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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청계산 중턱에는 숨겨진 마을이 하나 있다. 숨겨졌다는 말에 걸맞게 이름 또한 은 암(隱暗)동이다. 은암동은 과거 조선이 건국 되면서 고려의 뜻을 따르던 이색을 비 롯한 고려의 유신들이 세운 마을이다. 은암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부와 완전한 단절을 이루어 냈고 지금 우리는 과 거의 은암동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은 현재 우리를 과거 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은암동을 연결 시켜 주는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일기를 기반으로 묘사된 마을은 바깥과는 무관하게 동떨어져 살아왔다. 조선이 건국되고 또한 멸망하고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는 동안 은암동 사람들 은 자기들끼리 살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일이 600년동안 가능했는지는 모르 겠지만 어찌되었든 외부와는 완전히 별개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서는 그녀의 나이대에 따라 목차를 분류하여 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마을 이 처음 세워졌을 당시부터 현재까지,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지금 예순의 할머니가 되었을 때 까지. 꾸준하게 그녀는 일기를 써왔다. 은암동의 처음을 함께하고 은암동과 함께 성장한 그녀만이 은암동의 모든것을 알 고 있다. 그녀의 일기를 제외하고는 은암동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책에서 그녀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이 매 우 흥미롭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으며 우리에게 신세계를 경험시켜 준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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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지난 2월 큰 인기를 얻으며 종영한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는 몇 백 년을 살아온 외계인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신분 세탁을 한 도민준이라는 인물이다. 만약 도민준과 같이 실제로 몇 백년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믿겠는가? 놀랍게 도 이 책의 작가 염다희가 그러하다. 염 다희는 나이를 일반사람들보다 훨씬 느 리게 먹는다. 1390년생으로 지금까지도 살아있으며 현재는 60대까지 나이를 먹 었다고 한다. 그녀는 은암동에서 처음으 로 태어난 사람으로 외부와 분리·단절 되어 발전해 오던 미스테리한 마을 은암 동의 모습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지 켜봐온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남들과 다르게 나이를 먹었기 때 문에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 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가 은암동에서 살 아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 아가고 그리고 또 떠나갔다. 600년 동안 그녀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그녀는 잊 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일기를 써가며 그녀의 사람들을 기억하려고 애썼고 그런 일기가 그녀의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수 백 년 동안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살아왔고 또한 600년간 그녀의 삶이었던 은암동을 모두 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써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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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나는 기억합니다. 1390년부터 2014년까지 나의 인생을 함 께 해온 은암동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우리 부모님부터 제일 예쁘던 나이에 만난 그 사람과 비록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친구가 되었던 아이, 마을을 일구어 나가던 어르신들, 매일 밤 은암동을 나가고자 했던 청년, 그들을 나는 잊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일기를 통해 그들 을 계속해서 남겨 놓을 것이고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그 들이 남아있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과거의 은암동은 비록 지금 찾아 볼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나의 책 을 통하여 그 시절 은암동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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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방법
이 책의 작가는 노화가 천천히 진행되는 인물로써 은암동의 역사와 삶을 함께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작가의 나이의 흐름의 따라 점차 변화하고 발전해 나 가는 은암동을 느낄 수 있도록 작가의 나이에 따른 서술과 기억에 의존해 집필되었 다. 은암동은 고려 시대때 처음 생겼고 계속해서 개척해 땅을 넓혀가 그 지도가 계 속 변화되어 왔다. 이 작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마을의 역사도 한 사람의 인생처 럼 처음 생겨났을 때는 작가의 유아기 때로 막 태어난 아기처럼 은암동 또한 막 생 겨나 마을로써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들을 볼 수 있다. 이때의 기록으로는 사진보다 는 아이의 생각 위주로 서술 된다. 이제 마을의 기본 틀을 구체적으로 잡아가는 시 기로 작가의 아동기에 해당된다. 아동기 때는 실수도 잦고 호기심이 왕성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시기이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은 있어 다양하게 시도하려 하지만 경험이 없어 시행착오를 통해 기본적인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제 마 을의 기본적인 틀은 거의 갖추었다. 온전한 마을이 되려면 아직 해결해야 할 것 들 이 남아있다. 이제는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갖춰 가는 시기로 청소년기에 해당한 다. 아직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며 생각이 많고 계속 아프면서 다투면서 성장 하는 중이다. 따라서 마을도 사건사고가 많고 분쟁이 발생하며 구체적인 것들을 잡 아가는 시기 은암동만의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 그리고 성년기는 마을의 개척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안정을 찾고 모험을 하지 않는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노년기는 앞의 모든 것들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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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응애를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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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동의 시작 이색의 묘 경계항아리 25
미운 7살
항 솥 밥터 담 낙엽과 은행잎 게임
질풍 노도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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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 모듬 곤지신
사회 초년생, 첫 걸음을 떼며 43
나무 깎기의 장인 철 가공 장인 땅 개척 장인
제 2의 53 심리적 격동기 닿지 않는 닿아 있는 머물러 있는 흐르는 하늘과 맞닿은
곳 곳 곳 곳 곳
지천명에서 이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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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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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은암동
은암동 11
12 은암동
은암동
고려 멸망 후 잠신(潛身)한 이색, 길재, 조윤 등 고려 유신들이 속세를 피 해 여러 산을 전전하며 적절한 거처를 찾던 중 발견해 은거한 곳으로 산 중턱쯤에 움푹 파여 산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아 숨어살기 적절했다. 또한 이 러한 지형은 억불숭유(有)정책을 시행하던 조선 초에 국교가 불교였던 고 려의 유신들과 백성들이 탄압을 받지 않고 주변의 관현사, 청계사 등과 같 은 많은 절을 이용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다소 좁고 얕은 형태였으나 거 주민이 늘어나면서 개척되어 전보다 넓고 움푹한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되었 다. 이러한 독특한 지형의 영향과 더불어 억불정책을 피해 외부와의 단절이 점점 심화되었다. 지형은 점점 폐쇄적인 형태로 변화해 갔고 더더욱 외부 에서 발견하기 힘들어졌다. 초기에는 자급자족이 어려워 외부와의 교류가 피치(peach) 못했지만, 개간과 함께 내부에서 상업의 촉진으로 조선 중기 이후엔 마을 내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됨으로서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 루어졌다. 따라서 국가에서도 이 마을이 존재함을 알지 못했으며 지도상에 서도 표기가 되어있지 않았다. 외부와의 단절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6.25 당시에도 전시상황임을 모를 정도로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이러한 단절은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었고 점점 빠르게 변화해가는 현대 사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기술수준 및 가치관이 과거에 머무르게 되었다. 마을 거주인구는 약 300명 정도로 굉장히 적은 편이다. 이 마을은 독특하게도 다부 일 처제를 따르는데, 과거 개척을 위해 힘을 쓸 사람이 필요함에 따라 남자의 수가 급증했고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8:2 가 되었다. 이에 따라 남성의 수에 비해 여성의 수가 너무 적어져 여성 한 명과 남성 두 명이 가정을 꾸리는 형식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부터 다부일처제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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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를 외치며 나는 은암동에서 태어났다. 은암동에서 정착하려고 하던 이색어르신을 비롯한 사람들이 마을에 집을 세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내가 태어났다. 나는 은암동에서 제일 먼저 태어 난 아기였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내가 태어난 것을 축복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몇 십년간 계속 갓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이를 굉장히 더디게 먹었다. 그 당시 나와 비슷하게 태어난 친구들과 초기 은암동의 정착에 큰 기여를 한 사람들은 오래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그들 에 대해 물질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그들은 나의 기억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이 시기의 나는 사실 많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로 그 당시를 회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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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동의 시작 산 중턱 쯤 움 푹 파인 땅이었 다. 그 당시 은 암동의 땅은 지 금처럼 넓지는 않았다. 지금의 반 정도 밖에 되 지 않았고 당장 사람이 살 수 있 을 만큼 땅이 비옥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색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함께 그 곳에 마을을 세울 준비를 했 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마을이 들어설 준 비를 하였다.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비료를 뿌리 고 좀 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 듬고 부드럽게 갈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나무를 벤다던가 하는 자연을 헤치는 행위는 거의 하지 않았다 고 한다. 1년의 시간이 지나고 은암동은 더욱 깊숙해지고 넓 어졌으며 집들이 한,두 채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1393년에는 이색의 가문을 비롯한 총 10가구의 집이 세워지고 그 곳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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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초상화
은암동 가는 길
은암동 주변 청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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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마을은 아직 사람이 살기에는 황폐했으며 자급자족 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외부에서 우리가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사오고, 작은 밭에서 먹을 것들을 길러 해먹었다. 마을에는 작은 계곡이 있었는데 그 바로 옆에 논 ,밭을 일구어 물을 바로 바로 가져다 쓸 수 있었다. 초기에는 10가구의 집만이 마을에 있었으며 이때는 마을 내에서 따로 상업을 하는 곳이 있지는 않았다.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고 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 집을 찾아가서 자신의 집에서 만드는 것과 교환하거나 그 냥 대가 없이 주고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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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동 초기 모습
이색과 고려 문신들이 조선 건국을 반대하며 청계산에 올라 살 곳을 탐색하던 중 움푹하게 들어간 동굴과도 같은 곳을 발견하게 된다. 입구는 적당히 수풀과 바위 들로 막혀 있지만 들어 가보니 그들이 살기에 충분한 정도의 평평한 땅이 있었다. 그들은 이를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 생각했고 별다른 고민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 로 그 땅을 일구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은암동의 시작이 되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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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묘
1396년, 마을의 최고 어르신이자 마을 건립 및 개척에 가장 앞장섰던 이색이 안 타까운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 다. 이색의 묘가 세워지며 마을사람 들의 슬픔 가운데 장례가 치러지게 되었다. 독특하게도 은암동 사람들 은 이색의 묘를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원래 생전 종 종 마을사람들의 근심걱정을 들어주 던 이색의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색 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걱정이나
고해성사와 비슷한 행위를 하는 장소
힘든 일이 있으면 이색의 묘에 가서 털어 놓곤 했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게 되면서 이색의 묘는 천주교에서 고해성사 를 하는 장소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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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한창 집을 짓기 시작할 때였다. 초기 은암 동의 인구수는 10가구 정도로 70~80명 정도로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모두 알고 믿고 지냈기에 집을 지을 때 굳이 담이 필요하지도 않 았고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는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 고 먹을 것들을 구하고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 기에 담을 쌓을 시간이 없기도 해서 번거로운 담 대신에 경계 항아리를 두어 영역을 표시했다.
경계항아리
그 당시에는 다들 자신의 집을 세울 영역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재료 부족으로 인 한 낮은 담장 때문에 넓은 곳에서는 옆집과 우리 집의 구분이 애매모호했다. 그 구 분을 위해 우리 집이 여기까지다 라는 표시로 우리는 집에 남는 깨진 항아리 같은 것들을 경계에 쌓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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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7살 나는 태어 난지 약 100여년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나 의 겉보기 나이는 약 7살 정도이다. 이때의 우리 마을은 정말 바빴다. 자고 일어나면 변화되어 있는 것들이 많았다. 새로운 것들이 금방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다양한 일들이 바쁘게 일어나는 시기였다. 오랫동안 비슷한 나이로 지내다보니 좋은 점들도 있다. 친구들이 내 곁을 떠나가는 건 슬프지만 남들보 다 놀이를 월등하게 잘하거나 마을의 꾸준한 변화를 계속 관 찰 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난 철없 고 호기심도 왕성했는데 초기 은암동 또한 나처럼 수많은 시 행착오들을 겪어 나가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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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7살 27
내가 좋아하는 단호박 난 오늘도 갑돌이네 항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 마을 에서 최고의 항을 고르자면 갑돌이네가 아니라 이색 아 저씨네 항을 으뜸으로 치지만 그곳은 우리가 놀이를 마 치고 돌아올 이 시간 즈음 이미 음식이 바닥났을 것이 틀림없다. 어제도 허탕을 쳤기 때문에 오늘은 얘들에게 인기가 덜 하지만 내 입맛에 맞는 갑돌이네로 달려갔다. 역시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호박 찜이 들어있었다. 넉 넉해서 반 정도만 먹고 놀이를 하러 다시 돌아갔다.
은암동의 항 (항아리의 옛말) 먹고 남은 음식 또는 간식거리들 예를 들면 감자나 고구마 남은 밥, 반찬 등으로 채우고 짚으로 아가리를 막아둔다. 이는 은암동의 인심과 정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인 예이다. 항에는 언제나 다양한 음식들로 채워져 있어 배고픈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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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간식거리들
맛있는 갑돌이네 무국 오늘 저녁 메뉴는 무국인 것 같다. 밥터 쪽으로 무 를 들고 가는 갑돌이네 어머니를 보았기에 무가 들어간 요리임에 틀림없다. 갑돌이네 어머니는 요리를 참 잘하 신다. 우리 어머니는 가끔 정말 맛없는 요리를 해주시기 도 했는데... 난 나중에 꼭 갑돌이네 어머니 같은 요리 실력을 지니고 싶다. 솥 밥터 은암동 초기에는 집집마다 가마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구수도 적어 마을중앙에 큰 가마솥 두 개를 놓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집집마다 반찬을 조금씩 가져오고 다 같이 하나의 대가족처럼 마을 중앙의 터에 모여서 식사를 했는데 이곳을 마을 주민들은 밥터 라고 불렀다. 하지만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다 같이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자 밥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신당이 위치하게 되었다. 밥터의 음식과 당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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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맹이를 주우러 동네 한바퀴 오늘은 우리 집의 담장을 올리는 날이다. 우리 가족 모두 모여 재료를 구하러 마을 외곽을 돌아 다녔다. 마 을이 처음 생겼을 때는 대부분의 집에 담장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인구도 늘어나고 마당에 텃밭 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의 경계는 필요하다는 마을 회의 결과로 요새 담장을 올리는 집들이 늘어났다. 이색 아저 씨 네는 반듯한 기와로 담을 쌓았는데 우리 집은 돌맹이 로 쌓은 낮은 담 위에 새로 구한 재료를 얹어 담을 쌓는 다고 한다. 담이 생기면 너무 어색할 것 같다. 옆집 갑돌 이 네에 가려면 돌을 따라 돌아서 가는 게 불편할 것 같 아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더 크면 자기 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을 것 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라고 한다. 오늘은 힘든 날이 될 것 같다. 이색어르신 집 기와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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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동의 담 은암동 초기의 담은 필요하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며 서로 믿고 의지하면 서 살아서 매우 낮고 마당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함 이였다. 하지만 인구수가 증가 하면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게 되자 점차 담의 높이를 높여 나갔고 오늘날의 형태 가 되었는데 한줄, 한줄 올리다 보니 재료도 마감 방법도 조금씩 달라 층이 생긴듯 한 이 같은 형태가 되었다.
다양한 재료로 쌓은 담장들
은암동에서는 집을 들어가 보지 않아도 담만으로도 이 집이 마을에서 어느 정도 위계에 있는 사람이 사는 곳인지를 알 수가 있다. 이색네 담은 은암동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기와를 겹겹이 쌓아 담을 올렸다. 하지만 평범한 가정집에서는 주변 청 계산에서 구하기 쉬운 돌맹이들을 쌓아 올리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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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복이네를 이긴 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뭐 가장 잘하는 놀이라 해도 되겠지만) 단풍 찾기 게임이다. 이 게임을 잘하는 자는 친구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산다. 나는 이 게임에서 틀린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무적이라 팀 정할 때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가 난다. 오늘도 고집쟁이 권재가 날 영 입하려고 오랫동안 우기고 버텨서 결국 평화를 위해 권 재 편에서 게임을 했다. 난 권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 말이다. 칠복이는 어제 날 영입하려고 이색네 항에서 고기 몇 점을 가져왔는데 권재는 한 번도 나에게 먹을 거 아니 하다못해 돌맹이 하나라도 주워 준적이 없으면 서 우기기만 하니까 점점 싫어지는 것 같다. 여하튼 오 늘도 내가 속한 팀이 승리를 했다. 칠복이네에게 미안했 다. 하지만 갑돌이는 거짓말만 하면 바로 바로 얼굴에서 티가 나서 나한테 늘 당한다. 오늘 승리의 주역도 갑돌 이다. 언제쯤 날 능가하는 아이가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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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과 은행잎 게임 - 팀은 두 팀으로 나뉜다. - 각 팀은 낙엽과 은행잎을 받는다. - 팀 내에서 낙엽을 가진 사람과 은행잎을 가진 사람을 정한다. - 팀 내에서 거짓말을 할 세 사람을 정한다. 이 사람들은 무조건 거짓말을 하게 된다. - 각 팀은 번갈아 가면서 5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 질문을 통해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누가 낙엽과 은행잎을 가지고 있는지 맞춘다.
은행잎과 단풍잎
팀을 나눠 논의하는 모습
5가지 질문하는 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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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시기 은암동 에서의 200여년이 흘렀다. 난 여전히 10대에 머무 르고 있지만 말이다. 이 시기의 나는 모두들 흔히 말하는 무 서울 게 없는 ‘세상의 중심은 나다‘ 주의의 청소년 이였다. 나의 마을 은암동 또한 격동의 시기를 보내며 나처럼 거칠고 무섭게 성장을 했다. 가장 많은 개척과 갈등과 동시에 큰 성 장을 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외적인 부분에서는 큰 틀을 잡아 가면서 늘어난 인구수에 맞게 영역도 넓어졌고 내적인 부분들 도 점차 갖춰져 나가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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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시기 37
현모양처의 꿈을 꾼 날 오늘은 이 동네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아주머니 댁 으로 요리를 배우러 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요 리를 배우는 날이다. 어렸을 때부터 갑돌이 네서 배우고 싶었지만 갑돌이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기 때 문에 그 분에게 요리를 배우신 다른 집에서 배우게 되었 다. 내가 배울 요리는 엽전 모듬 이라고 불리는 최고의 야참이다. 난 몸이 그다지 튼튼하지 못해 어른들이 땅 개척 작업에 끼워주지 않으셔서 야참을 먹어 본적이 없 지만 옆집 아저씨가 극찬을 하시는 요리라 기대가 많이 된다. 실은 요즘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서 맛있는 요리들 을 많이 배워서 그에게 가져 다 주고 싶다. 그 아이를 생 각하며 정성을 다해 요리를 했더니 칭찬을 계속 받았다. 난 요리에 소질이 있는 편 인거 같다. 이러다가 밥터 에 서 다들 내 요리만 찾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그런데 요즘 밥터 에서 밥을 먹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 내가 어 릴 때 만해도 매일 세끼를 먹었는데 요새는 사람들이 너 무 많아 밥터가 너무 북적거리고 반찬을 싸오지 않는 사 람들이 늘어나자 밥터 에서 밥을 먹는 걸 다들 불편해 하는 분위기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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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모듬 엽전 모듬은 김치전과 깻잎전 그리고 산딸기주로 이루어진 야참모듬입니다. 은암동 사람들이 땅을 개척해 나아갈 당시 하루 일과를 끝내고 마을 사람들 끼리 모여 먹었던 야참이었고 요즘은
깻잎전
특산품처럼 되었습니다.
- 하얀 것을 물과 섞는다.
< 레시피 >
- 푸른 것을 하얀 것에 뭍힌다.
당시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께서는 제게
- 까만 것에 노란 것을 두른다.
만드는 방법을 이와 같이 알려 주셨습
- 주금 덜 푸른 것을 까만 것 위에 올
니다.
린다.
김치전
산딸기주
- 하얀 것을 물과 섞는다.
- 딱딱한 산딸기를 부드럽에 흐르도록
- 빨간 것과 하얀 것을 섞는다.
만들어 준다.
- 까만 것에 노란 것을 두른다.
- 한 생명이 생겨 날 수 있는 시간동안
- 조금 덜 빨간 것을 까만 것 위에 올
숙성시킨다.
린다.
- 부드러운 다른 술과 섞는다.
질풍노도의 시기 39
소원을 말해봐 이맘때 쯤 되면 비가 잘 오지 않고 개척하기 딱 좋 은 날씨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마을 사람들이 분 주해 보인다. 아마도 개척 전에 곤지신께 지내는 제사 를 할 모양이다. 그럼 오늘은 축제처럼 맛있는 음식들 과 다 같이 신나는 놀이도 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작년 이맘때쯤엔 음식 을 한참 먹고 있는데 비가 와서 개척하는 날도 미뤄지고 마을에 비상이 걸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이번엔 마을 어르신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다. 곤지신께 더 정성을 다해야 개척하기 알맞은 환경을 유지 시켜 줄 테 니 나도 오늘은 마을 친구들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참 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난 개척 공사에 꼭 함께 해 보고 싶다. 오래 전부터 나의 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옆 집 순식이가 한번 참여해본 적이 있는데 닷새 정도 일하 다가 앓아누웠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 그럼 이제 그만 곤지신께 제사도 지내고 소원도 빌러 가야겠다. 몇 년 전부터 나의 소원은 하나다. 어서 커서 개척공사에 참여 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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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신을 믿는 민간신앙 [정의]
어느 곳이든 땅속에는 신이 있으며 그 신은 곤지신이라 하여 달력이 없는 은암동 사람들은 매해 첫 눈이 오는 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곤지제라고도 한다. 곤지신 에게 마을의 행운이나 장수, 풍요를 비는 풍속. [변천]
초기 땅을 개척할 당시에 무너져 내리는 사고로 인해 인명피해가 잦았었다. 피해 가 없도록 기원하며 개척을 하기 전 날 제사를 지냈는데, 이 후 개척이 완료되고 나서는 일 년에 한번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명칭유래]
곤지신(坤地神)은 땅의 신과 같은 의미이다. [제사방식]
기본적으로 땅을 물로 적시는 행위로 제사를 시작한다. 이는 은암동 초기 개척할 때 딱딱하게 굳어있던 땅을 물로 적셔 부드럽게 만들어 주던 행위에서 유래했다. 질풍노도의 시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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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생 첫걸음을 떼며 약300년이 흐른 지금 난 드디어 성장을 멈추었다. 지금 나 의 나이는 약 30살이다. 예전의 나를 돌아보니 성급하고 섣부 른 실수들을 종종 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들은 줄고 안정 적인 무언가를 해보려 한다. 나에게 시간적 여유는 충분해서 마을에서 인정받는 장인에 도전해보려 한다. 직업을 가지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해서 나의 재능과 한계를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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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은암동
사회 초년생, 첫 걸음을 떼며 45
장인으로 가는 길 원래 어릴 적부터 신기해 하긴 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신기한 정도였다. 별로 흥미가 있던 일 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개척 장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해 이일을 배워 보기로 했다. 은암동 초기 에는 일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요즘은 그전만큼은 아 니지만 그들을 찾는 단골들이 있어 일은 끊이지 않는다 고 한다. 나무 깎기의 장인을 우리 동네에서 깎재 라고 부른다. 그들이 매일 방안에서 나무만 깎고 섬세한 일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에 예민하고 깍쟁이 같다고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그들을 무시하는 표현이기도 해서 장인 들은 매우 싫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다. 그러나 이제 부터는 절대 깎재 란 표현을 쓰지 않고 자긍심을 가지고 이 직업에 몰두 해야지 하는 굳은 의지 를 다지고 시작했다. 오늘은 첫날이라 칼은 멀리서 쳐다 만 볼 수 있었다. 칼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그에 따른 쓰임과 특징을 모두 알기 전까지는 칼을 만질 수 없다고 한다. 보통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4,5년 씩 걸리기도 한다니 그 개수와 특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가게 한다. 오늘은 목표를 3개만이라도 정확하게 알고 가는 것으로 세웠다. 열심히 배워야겠다. 없기에 주변 곤지인 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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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깎기의 장인 은암동은 산 중턱에 있고 폐쇄적 성격이 강한 마을이라 대부분의 가구들이 청계 산의 나무로 만든 것들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무 깎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서 장인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초기에는 땅 개척을 하면서 나무도 많이 베서 재료 도 많고 수요도 많아서 많은 이들이 나무 깎기를 했으나 나무가구의 수요도 줄고 개척을 많이 안하게 되자 재료구하기도 어려워져서 장인의 수가 급감했다. 지금은 한 가족만이 남아 대대로 나무 깎기를 하고 있는데 은암동 나무 깎기의 특징을 고 스란히 담고 있다. 은암동 만의 나무 깎기의 특징은 나무에서 버릴 부분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무 재료가 귀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쓰레기 발 생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쓰레기가 발생하면 그것을 매립해야하는데 은암동 에 는 여유 부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해야한다. 가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은 아이들의 장난감을 만들거나 잔가지들은 불쏘시개로 쓴다고 한다. 가공되지 않은 나무 은암동 주변에 청계산에는 나 무가 많지만 거친 표면을 가 진 나무가 대부분이다. 이러 한 나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장인들의 가공이 필요하다.
가공된 나무 거친 표면을 가진 나무들은 장 인들의 손을 거쳐 가공된다. 이 렇게 가공된 나무들은 가구나 식기, 그릇 등 다용도로 이용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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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인의 길 그들에 대한 나의 흥미는 개척 장인이 100이라면 70 정도로 높은 편이다. 나무 깎기 장인은 처음 시작할 때는 30~40 정도였으니 말이다. 은암동 에서 으뜸은 이색네 후손들이다. 그들에게 버금가게 대우를 해주는 집단은 철 가공의 장인들이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그들에게 최상의 음식과 집 을 내어 주는 등 최고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다. 우리 는 그들을 곤지신과 통하는 사람들로 여겨 곤지인 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대접을 받는 곤지인이 되려면 수 많은 경쟁을 뚫고 그들의 제자로 30년 이상 수련을 해 야지만 가능하다. 하지만 모두가 곤지인의 자리에 오르 는 것은 아니다. 3년마다 개최되는 시험을 통해서 그들 을 3년에 한명 씩 선발한다. 하지만 요즘 곤지인이 필 요 이상으로 늘어나자 시험을 5년에 한번 으로 바꾸자 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난 곤지인이 될 만큼의 열 정이 없기에 주변 곤지인 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이다.
48 은암동
철 가공 장인 은암동은 폐쇄적 성격이 강한 마을이다. 그래서 마을에는 위계가 존재하는데 장 인들 중의 으뜸은 철 가공 장인 이라 할 수 있다. 은암동에서 철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움으로 철은 제사지내는 제기 또는 땅 개척하는 도구에 쓰이는데 두 물건 다 은암동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물건이다. 그래서 철 가공 장인은 오로지 정해진 한 집안만이 대대로 장인이 될 수 있는데 장인이 되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농사를 짓고 힘든 일을 평생 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다. 원래는 그 집 안의 자식들이 경합을 벌여 철 가공 장인을 한명 뽑는 것 이였는데 계속 같은 집안 에서 장인을 선출하다보니 철가공의 질이 떨어지자 손재주가 뛰어난 다른 집 아이 를 입양해 와 같이 경합을 벌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신분 상승을 위해 그 집안에 는 양자가 끊이지 않아 가족이 아닌 수가 늘어나 따뜻한 가정이 아닌 경쟁을 벌이 는 학교와 흡사한 형태가 되었다. 사회 초년생, 첫 걸음을 떼며 49
기쁨과 환희의 날 학수고대 하던 안 올 것 같던 날이 드디어 찾아 왔 다. 어제 밤은 너무도 기대되는 마음과 걱정들로 가득차 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고 몸 이 너무 가볍기만 하다. 남들은 이날을 20여년 정도 기 다려 왔다면 나의 경우는 남들의 10배 이상의 세월을 기다려 땅 개척 작업을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기 회를 얻게 되었다.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 이다. 나의 평생의 꿈이 이뤄지는 오늘은 아주 역사적인 날이라고도 할 수 있다.
50 은암동
오랜 나의 꿈 드디어 나의 꿈에 다 다랐다. 어릴적 나의 환상과는 다른 점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많은 이들의 끝없는 가르침과 도움으로 무사히 장인의 자리 에 오를 수 있었다.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생각과 뿌듯함 과 여러가지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누구보다 오래 간직 한 나의 꿈은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매일 강열한 햇빛과 잦아들줄 모르는 흙먼지들이 나의 건강을 위협 했고 여자로 장인의 자리까지 오른 이가 없어 챙겨주는 사람도 없이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내 성격 덕에 친구들을 사귀었고 남자들과 어울리다보 니 이때부터 술을 즐겨 마시기 시작한것 같다. 고된 노 동 후 마시는 막걸리와 새참 음식들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땅 개척 장인 은암동 에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땅 개척이다. 마을 주민들이 늘 어나면서 초기의 좁은 땅에서는 생활이 불가능 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안쪽으로 땅을 개척해 나가게 되었다. 땅 개척에는 크게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1. 개척할 땅과 방향 정하기 2. 개척할 규모와 공사기간 등 세부 사항 정하기 +감독 3. 무너지지 않게 관리하기 크게 세 가지로 장인들이 역할을 나누어 진행을 했었는데 지금은 3번에 해당하는 장인들만이 남아 있다. 사회 초년생, 첫 걸음을 떼며 51
52 은암동
제 2의 심리적 격동기 이제 나는 보통 사람이라면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며 안 정을 찾아갈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 은암동 또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마을의 개척 또한 끝이 났고 울퉁 불퉁한 마을도 정리 되었다. 마을은 크게 수로와 밭, 상업시설 과 주거지역, 종교와 관련된 곳으로 나누어져 분업이 이루어 지기도 했다.
제 2의 심리적 격동기 53
54 은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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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지 않는 곳
닿아 있는 곳 흐르는 곳
56 은암동
머물러 있는 곳
하늘과 맞닿은 곳
level level level level level
5 4 3 2 1
하늘과 맞닿은 곳 머물러 있는 곳 집 흐르는 곳 장터 닿아 있는 곳 밭 닿지 않는 곳 수로
종교
제 2의 심리적 격동기 57
수로지킴이의 이야기를 들은 날 오늘은 수로 지킴이 를 끝내고 온 석호를 만났 다. 수로 지킴이를 하는 것 은, 수로가 깊지도 않고 크 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홀 로 24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참 쓸쓸하다고 했다. 수로 당번은 건장한 성인 남성만이 하는데, 약 6달 에 한 번씩 다시 자신의 차 례가 돌아온다고 했다. 석 호는 첫 수로 당번을 했던 날을 회상 하며 나에게 이 야기 해 주었다. 18살이 되던 해 수로 당번에 이름 이 올라갔고 19살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겨울, 첫 수로 당번을 했다고 한다. 이제 와 서 고백 하건데, 석호는 첫 수로 당번을 돌 때 숨죽이며 울었다고 한다. 마을 외부라는 것은 당시 자신에게는 참 무서운 것이었는데, 자신이 그 바로 직전에 있다는 생각 과 밤이 되자 어둠속에서 부엉이가 우는 소리만이 들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물론 이제는 조금 외로운 것 빼고는 참 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58 은암동
닿지 않는 곳
수로
초기에 이곳은 수로의 형태가 아니라
게 되었다. 수로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
초기 은암동을 지나 흐르는 청계산의
단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과 이 수
한 계곡이었다. 개척을 해 나가면서 자
로를 지키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연스럽게 은암동에 포함되는 계곡의 범
이것이 바로 수로 지킴이이다. 수로 지
위도 넓어져갔고 개척을 하면서 지도상
킴이는 마을의 성인남성들이 당번을 정
아래 있는 계곡 말고도 위에 있는 계곡
하여 돌아가면서 하게 되었다. 수로 지
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을이 넓어져 감
킴이의 역할은 혼자 작은 뗏목을 타고
에 따라 마을 곳곳에 물을 공급하기 위
수로를 따라 24시간동안 마을을 경비
하여 수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
하는 것이었다. 외부에서 짐승의 습격
였는데, 이 계곡이 수로의 해결책이 되
이나, 수로의 범람 이라 던지 불시에 나
었다. 마을 사람들은 윗 계곡과 아랫 계
타날 수 있는 위험에 경계하고 대비하
곡을 마을 경계로 둘러 빼면서 마을 끝
는 역할을 하였다. 은암동은 작은 마을
에서 만나 다시 마을 밖으로 물이 빠져
이어서 사람 수가 적기는 했지만 남녀
나갈 수 있는 형태로 수로를 만들었다.
비율이 8:2로 남성이 월등히 많아 의외
이 수로는 마을 곳곳과 밭에 물을 공
로 수로 지킴이 당번이 자주 찾아오지
급하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마을의 경
는 않고, 약 6개월에 한 번씩 차례가 돌
계가 되어 마을을 지켜주는 역할도 하
아오곤 했다.
제 2의 심리적 격동기 59
배추를 재배하는 친구 오늘은 배추를 재배하는 민섭이네를 들렸다. 요즘 당근이 잘 팔린다는 민섭이는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혼 인을 한지 이제 5년차가 된 민섭이의 아들 상훈이가 식 탐이 엄청나서 조금 벌어서는 감당 할 수 없다고 신세 한탄하던 민섭 이였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아버지께서 배추를 재배하실 땐 수로가 넉넉지 않아 물을 끌어다 쓰 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이젠 수로가 커져서 농사짓는 것 이 한결 쉬워졌다고 했다. 또한 최근에 허수아비와 가짜 매를 설치해 놓았는데 그 덕인지 배추를 건드리는 새들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친구가 잘 되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60 은암동
닿아 있는 곳
밭
밭은 지도에서 아래 부분에 위치해 있
기 때문에 땅이 농사를 짓기에 적절한
으며 수로와 바로 인접해있다. 초기에
토질은 아니었다. 해서 초기 은암동 사
는 계곡의 물을 가져다 쓰기 위하여 작
람들은 땅을 농사짓기 좋은 곳으로 만
은 계곡위에 밭은 일구었고 마을이 커
들기 위해 거름도 많이 뿌려 놓았다고
져가면서 마을 아랫부분은 거의 밭이
한다. 그래서 예부터 은암동의 밭은 냄
되었다. 밭은 마을 아래 전체 부분에 있
새가 아주 심했는데, 그래서 옛날 은암
기 때문에, 장터와 집, 마을의 중심과
동 사람들은 밭에 있는 허수아비가 무
모두 접해있다. 또한 수로 바로 위에 있
섭기도 해서 아이들을 혼낼 때 밤에 아
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를 혼자 밭으로 보내서 벌을 주기도
그래서 은암동 사람들은 종종 약속이
했다고 한다. 지금은 옛날만큼 냄새가
있을 때 누구네 밭 앞에서 만나자라는
많이 나지 않지만, 은암동 사람들은 무
식으로 약속을 잡기도 한다고 한다.
의식중에 밭은 냄새나는 곳이라고 인식
원래 은암동은 산 중턱에 위치한 곳이
하고 있다.
제 2의 심리적 격동기 61
항아리 밭
은암동에는 수로 위에 있는 큰 밭 외에도 사실 작은 밭이 마을 곳곳에 있다. 아래 에 구멍이 난 항아리를 뒤집어 구멍 위에 작은 기와를 올려 그곳에 작은 채소들을 재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물들은 마을 공용채소로 그냥 지나가다가 먹고 싶으면 채소를 따서 먹기도 했고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관리하고 재배했다.
농사에 쓰이는 농기구
62 은암동
나의 벗, 은암동 익숙해져 있어서 몰랐던 것들이 너무 많다. 그냥 지 나쳤던 평범한 것들이 요즘 따라 새롭게 보인다. 은암동 에서만 살아 간지도 몇 백 년이 되다보니 이 마을이 친 구처럼 느껴진다. 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같이 성장하 고 실패해서 좌절하고 같이 일어나 변화한 이 마을이 내 유일한 그리고 진 정한 벗이 라는 생각이 든다. 은 암동은 나에게 살 아가는 터전이며 벗이다. 그래서 난 이 마을의 구 석 ,구석을 모두 사랑하고 기억한 다. 주거지역은 특히 가장 많이 변화하고 내가 기억하는 곳이다. 매일 같은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너무도 익숙하 지만 조금씩, 조금씩 낡고 변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늘 더디게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의 모습을 생각 하면 서 지금의 나를 보니 마치 낡은 나의 집처럼 나도 늙고 변한 곳들이 참 많다. 그래서 마냥 슬프진 않다. 모두들 가족과 친구와 함께 살고 같이 늙어 가지만 나에겐 그들 은 잠시 들렸다 갈뿐 함께 한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나 에겐 은암동이란 거대한 친구가 있기에 나의 낡은 집을
제 2의 심리적 격동기 63
머물러 있는 곳
집
주거 지역 대부분의 주거는 초기에 정 착 시에 만들어 졌다. 그래서 길들은 집 과 집 사이의 빈 공간이 되어 그 넓이 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집들의 크기 또한 다양한데 마을 초기에 얼마나 큰 집을 지을 수 있었는지에 따라 다른 것 이다. 보통의 경우 은암동은 재료를 구 하기 쉽지 않아 대대로 집을 물려주어 사용하며 필요한 곳들을 보수해서 사용 한다. 집안 구석을 살펴보면 대부분 덧 대어져 있는 흔적들을 찾을 수 있을 것
은암동의 집 은암동의 집들은 돌이 무작위로 쌓아져 있 다. 딱딱 맞추어 집을 짓기에는 재료와 기술 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그래서 기둥 또한 다
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머물러 있는 공
듬지 않은 나무를 그냥 사용했고 지붕도 짚
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을 엮어 올린 형태이다.
64 은암동
단골의 자격 자주 가는 단골가게가 생겼다. 단골이라 함은 적어도 비싼 인삼주를 보름에 두병 이상 정도는 사가 줘야 단골 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 인삼이 들어간 술이 너무 맛있다. 주변 사람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는 재미 에 원래 잘 마시지 않던 술을 요새 들어 자주 마시는 것 같다. 사람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는 일이 늘어나다 보니 다양한 이야기들도 할 수 있고 외로움도 많이 느끼지 않 아 술을 자주 찾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술을 마시게 되 면 그 후 찾아오는 공허함이 너무 크다. 이제는 술을 좀 줄여야 할 텐데 란 생각도 간혹 들지만 오늘도 그 가게 에 들려 인삼주를 샀는데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아무래도 단골이 되다 보니 아주머니께 예약을 해두어서 그런 것 같다. 옆집에는 인삼주와 아주 잘 어 울리는 다양한 안주들을 판매한다. 내가 그중 가장 좋아 하는 것은 말린 버섯에 약간의 간장으로 간을 한 버섯 포다. 어서 가서 옆집 석주랑 오늘도 신나는 술자리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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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곳
장터
쉽게 들어갈 수 있게끔 입구가 낮고 유동인구가 제일 많은 곳이다. 매일 바
은암동 장터에서 판매되는 그림
쁘게 움직이고 변화가 가장 빠르게 일 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은암동 사람들 은 이곳을 흐르는 곳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기본적인 것들을 갖추고 자리 잡은 후에 초기의 계획 없이 자리 했던 주거 지역과는 다르게 계획된 도로와 구획들로 땅 개간을 하고 만들어진 지 역이다. 이곳의 길들은 상점과 인접해 있고 소비에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초기 은암동 에서는 각각의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하고 옆집과 나누 어 쓰는 물물 거래를 통해 필요한 것들 을 조달 했지만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 서 불편함을 느끼고 세분화하여 각각 생산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 었다. 이곳에서 판매 되는 것들은 외부와의 단절 으로 다양한 물건들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은암동 에서 자체 생산 된 것 들로 이루어져있다.
66 은암동
은암동 장터에서 직접 해볼 수 있는 방아
제사장 오늘은 곤지제를 담당하는 제사장이 바뀌는 날이었 다. 이색 어르신의 8대 손자인 이순이 제사장이 되었다. 모두 마을 가운데로 모여 축하해 주며 잔치를 열었다. 순이도 자신의 자리를 자랑스러워하며 제사장이 된 것 에 뿌듯해했다. 이순의 어머니인 재희는 아들 몰래 눈 물을 훔쳤다. 이제 다 커 제사장이 된 아들이 자랑스러 워하면서 한편으론 아들을 떠나보내는 것 같아 슬픈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도 가슴 한켠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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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맞닿은 곳
종교
마을의 유일신인 곤지신 에게 행복과 안녕을 빌기도 하며 마을 사람들과 항 상 함께 한다고 여겨지는 신이다. 은암 동은 자연의 영향을 크게 받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며 외부와도 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해의 농사, 땅개척 등 에 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자연이 기에 곤지신을 모시는 사당이 위치한 종교 지역을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가 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성스러운 지역 으로 여긴다. 마을 사람들은 곤지신을 모신 사당과 맞닿은 길을 지날 때 에는 낮은 자세로 지나가며 악한 생각을 하 지 않는다고 한다. 곤지신의 사당은 아 무나 들어갈 수 없게 평소에는 한지나 새끼줄로 쳐 두고 제사를 지낼 때만 제 사장인 이색의 후손만이 그 줄을 자르 고 들어 갈 수 있다.
68 은암동
제 2의 심리적 격동기 69
70 은암동
지천명에서 이순까지 시간은 이제 600년 가까이 흘렀으며 이제 나는 흔히들 말 하는‘할머니’의 모습이 되었다. 이제는 완전히 외부와 단 절 되었던 우리 은암동이 외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조선이 사 라지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설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외 부와 이제 다시 소통을 시작했고 새로운 문물들과 사람들을 접하며 교류를 했다. 외부 사람들과 문물이 마을 내로 유입되 면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많은 혼란을 겪었고 그에 따라 마 을도 변화하고 원래 문화가 변화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지천명에서 이순까지 71
72 은암동
지천명에서 이순까지 73
낮은 손 오늘 오랜만에 경원이를 만났는데 손의 높이가 허 리 언저리에 있었다. 기분이 굉장히 안 좋은 것 같았다. 사실 경원이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경원이의 손의 높이 때문에 말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인사할 때 손의 높낮이로 기분을 표현하는 행위
작은 마을인 은암동 에서 싸움이 나면 마을 전체로 확장 될 수 있기 때문에 싸움 을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만날 때 애초부터 서로의 기분 상태를 표현한다. 손이 높을수록 기분이 좋다는 것을 의미 하며 낮을수록 기분이 좋지 않으므로 조심해 달라는 의미이다. 74 은암동
낯선 사람 오늘 장을 보러가는 길에 처음 보는 얼굴을 보았다. 사실 그 사람이 현지를 닮아 인사하려고 했다가 낯선 얼 굴이라 손을 들다가 말았다. 마을 사람 수가 많지 않아 마을 내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란 있을 수 없었는데, 외 부인이 들어오게 되면서 마을 내에서 낯선 얼굴들이 생 겨나기 시작했다. 지난 500년 동안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마을이 외 부에 노출되다 보니까 이런 일도 있는 것 같다. 아직 나 는 적응이 잘 되진 않지만, 외부인이 들어온 후 태어난 아이들은 그런 것이 어색하지 않은가 보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면 아는 척을 하지 않는 행위
은암동은 당연한 말이지만 굉장히 적 은 인원이 한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다 알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강남개발이 시작되며 발견된 은암동은 약 500년 만에 외부인이 들어서게 되 었다. 은암동 사람들은 굉장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고, 원래 서로를 보면 반 갑게 인사하던 마을사람들은 모르는 얼 굴이라는 것이 처음 생기자 사람을 봤 음에도 인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지천명에서 이순까지 75
아이스? 이제는 옛날보다는 얼음을 구하는 것이 쉬워졌다. 원래 얼음은 겨울에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젠 외부에서 쉽게 가져다 쓰다 보니까 여름에도 얼음을 먹곤 한다. 하지만 여전히 얼음을 깨물어 먹지는 못하겠다. 저번에 외부인들이 들어와 무언가를 와그작 깨 먹는 모습을 보 았는데 깜짝 놀래 무엇을 깨물어 먹었냐 물었더니 아이 스라고 했다. 아이스가 얼음이랑 같은 말이라고 하였다.
얼음을 입안에서 녹여 먹는 행위
기술 발전이 더딘 은암동은 냉장고라는 물건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만의 노하우 로 얼음을 얻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당연히 냉장고보다는 다소 까다로운 방법이었 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 얼음은 자신들이 만들었을 때 놀라워하며 입안에 넣었는 데 입안에서 얼음이 녹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최대한 얼음을 오래 먹고 싶은 마음에 절대 이로 물어 깨서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얼음을 구하기 쉬워진 요 즘도 얼음은 절대 깨 먹지는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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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없는 규원이 오랜만에 오늘은 성진이네에 가서 저녁식사를 같 이 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성진이 딸인 규원이가 성진 이 몰래 수로 지킴이가 하고 싶다며 수로 지킴이 뗏목 에 올라가려다가 수로에 빠졌다고 한다. 성진이가 단단 히 화가 났는지 저녁식사 중에 수저를 절대 들지 않았 다. 그래서 규원이도 밥을 먹지 못했고 결국 그 큰상을 나 혼자 먹었다.
어른보다 먼저 숟가락을 들지 않는 행위
은암동은 과거의 예절을 굉장히 중시하는 마을인데, 그의 단적인 예로 밥상에서 절대 어른보다 숟가락을 먼저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아이들 을 훈육할 때 이용되었는데, 잘못을 했을 때 밥상에서 절대 어른들이 숟가락을 사 용하지 않고 밥을 먹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아예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반성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렇게 은암동 에서는 직접적이지 않고 점잖은 방법으로 아이들을 훈육하곤 했다. 지천명에서 이순까지 77
상추가 다 떨어졌다! 오늘은 장터에 나가서 고기를 먹으려고 고깃 집에 갔는데 상추가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도로 나왔다. 오랜만에 고기 쌈 이야기를 하다 보니 500년 전 이색 어르신이 돌아가시던 날이 생각나서 전집을 가서 산딸 기주 한잔을 했다.
고기를 쌈 없이는 먹지 않는 행위
은암동 에서는 고기를 먹을 때는 필히 쌈을 이용해서 먹는데, 그것은 은암동 초기 에 마을이 생기는데 일조 했던 이색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원래 은암동 사람들 은 고기를 쌈에 싸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필수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데 흉년이 와 서 쌈 채소가 부족하게 되었는데,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던 이색이 쌈 채소 없이 고기만 먹다가 입에 화상을 당했는데 치료기술이 부족하던 당시에 상처가 심해서 곪았고 감염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당시 은암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색의 죽음은 마을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이 되었고 이 후 마을 사람들은 절대 고기를 쌈없 이 먹지 않는다고 한다. 78 은암동
지천명에서 이순까지 79
지금까지의 은암동을 마무리하며 이 책을 집필하게 되면서 나는 내 600년간의 일기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600년간의 일기는 양도 많고 일도 많았습 니다. 이색어르신과 함께 했던 은암동 초기부터 오늘날 얼음 이 아이스라는 것을 알게 된 때까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 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은암동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이 책을 집필하 기 위해 내 일기를 스스로 읽으며 나의 옛 사람들을 다시 기 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을 쓰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 며 옛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지금은 떠나간 사람들이지만 내 많은 친구들이 이제 이 책에 담기게 될 것입니다. 책이 많이 팔리기를 바라기 보다는 사실 나는 책이 이제 남겨져 우리를 기억해 줄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만족하고 그런 사실 에 행복합니다. 은암동은 우리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장소 입니다. 외부와 접하게 되면서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그것 또 한 은암동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은 암동도 사라지는 날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 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사라지는 날까지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책으로 은암동을 남겨 준다면 결국 은암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마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나는 오랜 생을 마 감하고 세상을 떠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 책으 로 나의 사람들과 나의 이야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집필 할 수 있도록 제안하고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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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동 출간일 2014년 12월 15일 지은이 김재희,임다혜 출판사 여기저기 주 소 서울시 성동구 성덕정 3길 10-1 www.herethere.kr ⓒ 김재희,임다혜 2014 본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82 은암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