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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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 눈을 뜨면 보이는 마을

삶은 어두울 지도 모른다. 또한 점점 어두워 지고 있는 현 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현대의 도시는 밤에도 엄청나게 밝은 야경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어둡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들은 마을, 이 웃이라는 개념을 점점 포기했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의 칠 흑 같은 삶 속에서도 빛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빛은 오히려 주변이 어둡기에 더욱 밝게 빛난다. 마을의 삶과 빛을 끝까지 간직한 사람들은, 일과 돈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밤시간에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 겨 밤에 가장 밝게 타오른다.

낮이 아닌 밤이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공적 인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바밤바

야동 눈을 들면 보이는 마을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지음

밤에 자유로운 도시의 분위기가 풀어나가는 흥미로움이 나 를 끌어들였다. Midnight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지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밤이 그렇다. 어둠을 밝게 비춰 보이게 하는 그들의 세상에 초 대하는 책이다. 어두war

값 10,000원 03980

9 791186 188095

ISBN 979-11-86188-09-5

여기 저기

여기저기출판사


야동 눈을 뜨면 보이는 마을

삶은 어두울 지도 모른다. 또한 점점 어두워 지고 있는 현 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현대의 도시는 밤에도 엄청나게 밝은 야경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어둡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들은 마을, 이 웃이라는 개념을 점점 포기했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의 칠 흑 같은 삶 속에서도 빛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빛은 오히려 주변이 어둡기에 더욱 밝게 빛난다. 마을의 삶과 빛을 끝까지 간직한 사람들은, 일과 돈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밤시간에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 겨 밤에 가장 밝게 타오른다.

낮이 아닌 밤이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공적 인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바밤바

야동 눈을 들면 보이는 마을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지음

밤에 자유로운 도시의 분위기가 풀어나가는 흥미로움이 나 를 끌어들였다. Midnight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지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밤이 그렇다. 어둠을 밝게 비춰 보이게 하는 그들의 세상에 초 대하는 책이다. 어두war

값 10,000원 03980

9 791186 188095

ISBN 979-11-86188-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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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 눈을 뜨면 보이는 마을

삶은 어두울 지도 모른다. 또한 점점 어두워 지고 있는 현 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현대의 도시는 밤에도 엄청나게 밝은 야경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어둡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들은 마을, 이 웃이라는 개념을 점점 포기했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의 칠 흑 같은 삶 속에서도 빛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빛은 오히려 주변이 어둡기에 더욱 밝게 빛난다. 마을의 삶과 빛을 끝까지 간직한 사람들은, 일과 돈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밤시간에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 겨 밤에 가장 밝게 타오른다.

낮이 아닌 밤이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공적 인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바밤바

야동 눈을 들면 보이는 마을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지음

밤에 자유로운 도시의 분위기가 풀어나가는 흥미로움이 나 를 끌어들였다. Midnight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지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밤이 그렇다. 어둠을 밝게 비춰 보이게 하는 그들의 세상에 초 대하는 책이다. 어두war

값 10,000원 03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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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향

이삼숙

1999년 출생. 고등학교 재학. 외할

1968년 출생. 중학교 중퇴. 이 마

아버지가 중국인이신 고향양의 아

을에서 나고 자랐고, 어렸을 적 시

버지는 고향양이 태어나기 전에 돌

장의 일을 돕다가 결혼함. 전업 주

아가셨고, 어머니는 돈을 벌러 나간

부였다가 지금은 가업을 물려받아

다는 말을 남기시고 실종. 소녀가장

호떡장사(이家네 호떡)를 5년째 하

이라는 명목으로 나오는 국가보조

고 있음. 입구에 가장 가까운 목에

금이 제법 큰 데다가, 집 자체에는

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손님도 많

빚이 없어 마을 사람들 중에서는

은 편이고, 시장 전체를 훤히 볼 수

중간 정도는 되는 삶을 살고 있다

있는 자리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고 한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시장 전체의 이야기도 잘 안다. 시

의사가 되어 지금의 가난을 대물림

장 상인들과 친하긴 하지만, 특별히

하지 않는 것과 가난한 마을 사람

술을 즐기지 않고 늦게까지 장사를

들을 돌봐 주는 것이 그녀의 삶의

하기 때문에, 상인들과 어울리지 않

최종 목표라고 한다.

아 시장과 그 안의 삶에 대해 객관 적인 진술이 가능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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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의 말

사실 우연한 기회에 우리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찾아왔고, 우리는 그저 우리가 아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뿐이 다. 그러나 분명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무언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은 사실이다. 우리들은 가방 끈이 길지 않다. 우리의 부모도, 우리의 할아버지 할 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시장에서 자랐고, 시장에 의해 키워졌으며, 우 리의 ‘날’들은 모두 시장에서였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들만의 이야 기였을 뿐이었다. 누가 우리 중에 펜을 들어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내 주었겠는가?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그럴 여유는 없다. 그렇 기에 우리는 이 분들에게 정말로 특별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 작가의 말조차도 대필해 주고 있는 내 앞의 우리 이야기를 써 주시는 분들이 웃고 있다. 그 사실에 도 감사한다. 우리들의 삶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니 우리와 우리의 위로 이어져온 세대들은,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삶 은 우리를 늘 조여왔다. 찢어질 듯한, 그리고 대를 이어 줄 수 밖에 없는 가난이라 는 멍에는 수많은 어머니들의, 또 아버지들의 마음들을 난도질했고 그런 삶이라도 연명하려면 죽어라 일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포기하지 않 은 즐거움을 찾는 일에도 죽어라 열심이었다. 옥죄어오는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도 행여 꺼뜨릴까 조마조마 했던 마음 속의 불씨들을 밤이 되면 한데 모아 모닥불로, 화롯불로, 거대한 들 불로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았고, 죽지 않을 이유를 서로에게서 찾아가며 살아왔다. 그 삶에 대해서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가방 끈도 짧고 그리 대단한 사 람들도 아니지만, 어찌 보면 억척스럽게 살아온 인생에서도 분명 자신들에게 허락 된 행복들을 찾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일의 한 발을 내디딜 힘을 얻으 셨으면 좋겠다. 또한 가끔은 우리 마을에 밤에 찾아오신다면 우리의 색다른 모습 을 보시고 같이 즐거우실 수 있으시리라 8


필자의 말

그들은 그저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였다. 머리에 스쳤던 어떤 생각이 있기 전 까 지는 말이다. ‘저들의 밤은 어떨까?’ 그것이 매일 보던 그들을 달라 보이게 하 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역에서 내리면 항상 보이는 그네들. 그 옆 으로 있는 시장의 사람들.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았을 때, 우리는 그 까마득한 깊 이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결코 말을 조리 있게 잘 하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교양이 넘치거나 멋진 사람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들은 깊었다. 우리는 따뜻한 방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그들은 찬바람이 부는 시장에서 물건을 팔 지라도,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보다 훨씬 안락했다. 그들의 삶 을 들여다보면서 동행한 며칠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우리들이 함께했던 시간 동안, 우리가 이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아니, 우리는 하나다. 이제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공유한다. 우리는 꿈마저 공 유하고 꿈에 대한 아련함과 꿈에 대한 열망과 꿈에 대한 행복을 공유한다. 이 글을 읽게 될 독자 여러분들도 같은 경험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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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죽은 움직임............................... 마을이 가장 어두운 시간................ 드러나는 마을............................. 야동의 시작............................... 가장 야한시간............................. 눈물, 보석처럼 별처럼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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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AM .................................2:00 PM .................................7:00 PM .................................8:30 PM ................................10:30 PM ................................11:59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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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마을의 모습

14 6:00 AM


죽은 움직임

4시 58분. 여고향양은 기상한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알람이

울리기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밖이 이미 시끄러워진 탓이다.

이것은 고향양이 후에 알려준 사실이었지만 이미 고향양의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부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소리들 속에서 곤히 잘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시간이면 고요함만이 지배할 법 하지만, 이 마을만큼은 그렇지 않다. 뭔가 쇳조각들이 부딪혀 챙챙 거리는 소리, 육중한 것이 굴러가는 소리, 트럭이 움직이는 소리 등 수많은 소리가 이미 마을 전체에 배경음악으로 깔려있다. 그러나 사람의 목소리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묵묵히 자기 할 일들을 할 뿐이다. 여고향양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세수를 하고 동생들이 먹을 아침밥을 챙길 뿐이었다. 고향양은 한참 후, 준비를 모두 끝내고 학교로 출발할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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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야 겨우 나에게 입을 떼어 마을의 아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침의 마을 사람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만, 생기가 없어요. 마 치 움직이는 시체 같달 까요, 기게 같달 까요. 말을 걸어도 대답하 질 않구요. 저도 마찬가지였겠지만요. 다들 그냥 살기 위해서, 움직 여지는 대로, 프로그램 된 대로 움직이는 거죠. 저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어른들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마을의 어른들은 누군지 못 알아보겠을 정도로 표정도 없이 움직이시는 분들도 많아요.

덤덤하게 말하는 태도가 오히려 마음을 더 아프게 하여 아무런 말 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같이 걸어갔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표 정을 짓고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고향양은 고등학생이라고 느껴지 지 않았다.

여고향이 마을을 응시하는 모습

16 6:00 AM


그 후 계속 걸어간 아침의 거리에서, 고향양은 마치 그곳의 수많은 흑백의 물체들 중에 움직이는 단 하나의 컬러 물체 같았다. 이곳의 분위기에 적응해갈 때쯤, 고향양이 다시 입을 떼었다. 조금은 상기 된 목소리였다.

어? 삼숙이 이모다! 아마도 불러도 대답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저분 이 삼숙이 이모에요. 장사하실 때랑 장사 끝나고는 나이에 비해 정 말 예쁘신 이모신데 지금은 저도 적응 안 될 정도로 지쳐 보이시네 요. ‘이가네 호떡’이라는 호떡집을 운영하시는 이모신데, 장사가 엄청 잘돼요. 시장 2번입구 들어서자마자가 이모 자리거든요. 장사 가 너무 잘돼서 몇몇 분들 빼고는 시장 상인들이랑은 별로 친하실 겨를도 없지만, 저는 호떡을 자주 사먹어서 이모랑 친해요 헤헤. 단 골손님들 얼굴하고 이름, 근황 같은 것들을 이모는 모르는 게 없어 요. 제가 갈 때마다 호떡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내 며느리가 되면 가르쳐준다고 하시더라고요. 거 참 아들은 저보다 나이도 한 참 많은데. 가족들끼리만 전수되는 비법이라 어쩔 수 없대요.

이삼숙씨를 보고 신난 고향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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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숙씨는 내가 마을에 처음 왔을 때 호떡을 사 먹으며 이미 알게 된 사람이었지만, 아는 사람을 보고 신난 고향양이 설명하도록 내 버려 두고 듣고만 있었다. 그곳에서 고향양의 목소리라도 없으면, 또다시 마을의 무미건조한 배경음악만이 내 귓가를 맴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향양은 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신이 나 서 계속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기 최상남 아저씨도 보이네 요! 저기 지금 김이 올라오는 집 이 아저씨의 순대국집이에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대 요. 이름은 상 남자 같지만 실은 엄청 가정적이세요. 장사가 잘 되는 날이면 저 집 아이들이 좋 아하는 빈대떡하고 만두를 사 들고 집에 가시는데 그 모습이 최상남씨의 모습

얼마나 귀여우신지 몰라요. 그 렇지만 지금은 절대 말 걸지 마

세요. 순대를 썰던 칼이 날아들어올지도 몰라요. 저기 이 시간에도 인사를 받아줄 무리들도 보이네요. 어느 샌가 우리는 시장을 벗어나 있었고,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 취가 풍겨왔다. 멀리 앞에, 고향양이 가르키는 곳에는 비루한 차림 의 한 무리가 있었는데, 나는 이내 그들이 노숙자들이라는 것을 알 아 챌 수 있었다.

18 6:00 AM


독박이 아저씨 안녕하세요! 늙은 노숙자에게 밝게 인사하는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그 둘이 친 근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겠거니 하고 잠자코 있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고향양은 나에게 그에 대해서 설명했다. 저분은 나독박 아저씨에요. 수염이 길고 주름도 많아서 마치 도인 처럼, 또 나이도 많아 보이지만 실은 사십 대 초반밖에 안되셨어요. 나이를 듣고는 당황했다. 그러 나 이내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 고 수긍했다. 아저씨도 옛날에는 이 마을에 조그마한 집을 가지고 계셨어 요. 그러다가 이 지역의 재개발 열풍이 불었고, 들어오는 압력 에 못이겨 그 집을 팔고 남은 돈 으로 근근이 생활하시다가 결국 나독박씨의 모습

일확천금의 꿈을 가지고 도박에 손을 뻗치셨죠. 전 재산을 탕진

하시고 지금 저런 생활을 하고 계세요. 아, 걱정마세요 본인은 이런 이야기 그닥 창피하게 생각하시지도 않고 이제는 마을 사람들 모 두 아는 이야기니까, 아저씨한테 이야기했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 시지는 않을 거에요. 술을 좀 그만 드셔야 할 텐데 자꾸 술을 드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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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큰일이에요. 그나마 아주 조금 있던 돈도 이제 바닥나고 있을 텐 데…… 아 그런데 음…… 아저씨는 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말해도 되나 싶긴 한데요, 아마 아저씨는 마을사람이 아니니 까 괜찮을 거에요. 이따가 밤이 되면 아저씨의 비밀을 알려 드릴께 요.

그게 무엇인지 당장에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때 마침 고 향양이 교문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런 이 야기를 정리하면서 카페에서 시간도 때우고, 마을을 배회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고향양의 점심시간은 어떨까 하고 생각 했다. 아마 고향양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들을 수 있으리라.

20 6:00 AM


고향양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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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6: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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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가장 어두운 시간

정신 없던 아침이 가고 점심시간이 왔다. 그렇지만 아침 종일 한 아저씨와의 대화는 퍽 즐거웠다. 사실 늘 무미건조한 아침을 혼자 등교하다 보면, 마을의 아침 분위기에 내 기분까지 휩쓸려서 우울 했으나, 오늘은 밝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그런 아침을 보내고 와서인지 점심 시간에도 그렇게 밝지는 못했다. 늘상 그랬던 것이지만 더 침울해졌다. 밖은 더욱 심할 것이다. 시장의 점심시간은 내가 잘 아니까. 시장의 아 저씨, 이모들은(혹은 내 또래에 일찍 장사에 뛰어든 아이들 까지도) 장사를 하느라 모여서 밥을 먹지도 못하고 각자 싸온 음식으로 얼 른 허기만 달래는 식으로 혼자 식사를 하신다.

24 2:00 PM


고향양 또래의 상인이 점심을 혼자 점포에서 떼우는 모습

여기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 행복이다.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나도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실제 로 우리 마을에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시장 일을 돕는 아이 들도 많으니까. 사실 나도 우리 집안의 조금 더 나은 생활과 동생들 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라면, 또, 나중에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 을 벌어 놓으려면, 시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게 훨씬 현명한 선 택일 수도 있다. 이기적인 나의 꿈 때문에 여기에서 공부하고 있다 는 사실을 생각하자 동생들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오늘 내 가 싸온 음식은 훈련병(나는 급식을 신청할 돈이 없다. 교복을 살 돈도 없어서 허락을 받고 사복을 입는 처지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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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

잘 기억나지 않는 엄마에 대한 기억의 일부이다. 엄마가 가르쳐준 음식이다. 훈련병에 엄마의 얼굴이 겹치며 정신 없이 먹고 있는 나 에게 음식에 대해 설명해 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마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중국에서 도피해온 상인들과도 교류가 생겼는데 그 때 생겨난 것이 훈련병(訓戀餠: 그 리워함을 가르치는 전병)이었대. 중국의 상인들1세대는 고향을 모 르는 자신들의 2세대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르쳐주고, 자신 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전병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들에게는 생 활을 하기 위한 돈도 빠듯하여 전병은 꿈에만 그리고 있었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상인들이 합심하여 전병을 위한 재료를 각자 상 점에서 십시일반 하여 중국 상인들에게로 가져다 주었고, 이에 감 동한 중국 상인들이 중국의 전병을 한국식으로 만들어 상인들이 다 같이 나누어 먹은 데서 유래된 요리가 이 훈련병이야. 엄마는 훈련병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때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

26 2:00 PM


았다. 다만 아주 구슬픈 노래 한 가락만을 부를 뿐이었다. 이제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아. 엄마. 이 요리는 우리 마을 그 자체구나. 흐 릿하지만 선명하게 귓가에 엄마의 노래 가락이 흘러 들어왔다. 창 밖의 하늘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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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구는 한탄으로 고향의 얼굴들을 흘려낸다. 만주에서 도망하던 삶을 생각하며 이쪽으로 저쪽으로 마음을 쓸어 내린다. 마음만은 부드럽던 고향의 얼굴들. 그들의 기억은 조각으로 가슴속에 박혀있다. 홍단이 잘 어울렸던 그녀도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곳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내 안에 들어왔 기에 마음을 추스른다. 한 번 고난을 견뎌내면 언젠가 고향사람들도, 이곳 사람들도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28 2: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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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 노래는 이 요리의 요리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고향 양은 나에게 알려주었다.

흐르는 물로 감자를 씻는다.

넓게 밀가루 반죽을 편다.

감자를 깐다. 넓게 핀 밀가루 반죽에 감자를 채 썰어 올린 다.

당근을 채 썰어 감자 사이사이에 조금씩 넣는다.

30 2:00 PM


대파나 단무지를 준비한다. 다시 이것도 썰어서 밀가루 반죽에 올리고 반죽을 싼 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후 구 워내면 중국사람도, 한국사람도 좋아하는 전병이 완성된다.

후에 먹어본 고향양의 훈련병은 가히 일품이었다. 고향양에게 정말 이대로 만들면 이런 맛이 나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한가지 팁이 있 다면서 귀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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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0 PM


훈련병은 요리사의 눈물이 한 방울 들어가야 간이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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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하늘을 쳐다보고 나서 밖을 보니, 독박아저씨가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저만치 보였다. 그 앞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M 호텔. 아저씨는 아저씨에게 헐값에 땅을 팔도록 압박하고서 거의 뺏다시 피 한 땅을 투기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세운 그 호텔이 밉지도 않은지, 삶은 계란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이따가 가다가 훈련병 남 은 것 좀 드리고 가야지. 그 옆 호텔의 레스토랑에서는 힘들게 사는 것이라고는 모를 사람들이 호화롭게 밥을 먹고 있다. 다 먹지도 못 할 것을 뭘 저렇게 많이 차려 놓는지.

나독박씨와 호텔 레스토랑

34 2:00 PM


호텔과 주변으로 있는 아파트에 있는 널찍한 광장 같은 공간이라도 좀 개방해주면 좋으련만, 새로 고용된 건장한 아파트의 경비원들에 게 쫓겨난 노숙자 아저씨들은 한데 모여 쪼그려서 밥을 먹는다. 독 박아저씨에게는 호텔이 있는 자리가 더욱 특별할 수 밖에 없다. 나 는 독박아저씨의 눈빛에서 가끔 그것을 느낀다. 그곳은 비록 재개 발되어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지레짐작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렸 지만, 독박아저씨의 추억과 즐거웠던 한때가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 곳이었다. 요새는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한때 독박아저씨와 같은 생 각을 가지고 있던 아저씨들이 밤이면 저곳에서 술판을 열어서 예전 경비할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자신들의 추억이 어려 있는 공간에서 술 한잔도 못하게 한다고 억울해 하는 아저씨들에게 아파 트 주민들과 호텔의 지배인은 따뜻한 말 한마디 전할 생각조차 없 었다. 그들은 그대신 늙은 경비할아버지를 건장한 경비원으로 바꾸 는 것으로 응수할 뿐이었다. 그런 걸 알리 없는 마을 꼬마들은 그 옆에 자리한 낡은 계단에서 놀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예뻐하던 아 이들이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잔뜩 구겨져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탁 풀어졌다.

마을이 가장 어두운 시간 35


36 2:00 PM


시선 앞으로 계단이 펼쳐져 있다. M호텔 옆으로 있는 유일하게 재개발되지 않은 낡은 긴 계단으로, 이질적인 모습이 우리 동네의 아픔을 그대로 반영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내가 평소에 예뻐 하던 아이들이 놀고 있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호텔 옆을 지나가면서 어떤 실루엣을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 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 이 마을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에게 그 길을 지나가게 허락했으리라. 그 실루엣은 분명, 학생의 것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분명 학생의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가 설수록 그 실루엣은 점차 허리가 굽고 키가 줄어들었다. 나는 그것 이 내가 그저 잘못 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실루엣 이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있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나는 실루엣의 주인을 굳이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기로 했다.

마을이 가장 어두운 시간 37


38 2:00 PM


이 마을의 모두는 기억과 생각, 느낌을 공유한다

마을이 가장 어두운 시간 39


40 2:00 PM


계단 옆으로 보이는 공허한 대지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는 호텔이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일대는 신식 아파트가 세 워지네 마네 하고 매일 아저씨들과 용역 업자들간의 다툼이 있다. 우리 마을은 점차 사라져갈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아저씨들은 이제는 더 싸울 힘도 없이 지쳐가 시는 듯 하다. 늘 분명 호기롭고 거친 말투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 시지만, 분명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른 눈을 하고 계셨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해드리며 힘을 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없 었다. 이 계단 하나라도 내가 지킬 수 있을까? 아주 어렸을 때 불러 보던 영자, 태식이 그 이름들과 함께 놀던, 당시 나에게 세상 그 자 체이던 이 계단을.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것. 사실 열심히 공부한 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공부라도 하 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열심 히 공부하는 것도 이런 낮에는 불가능하다. 먹고 살려면 낮에는 시 장에서 일하는 수 밖에 없다. 잠을 쪼개어 밤에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호현당에서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얼른 어머니께서 가져오라고 하신 물건을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데 여러 감상에 빠져 있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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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는 마을

해가 넘어가고 마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러나 우리 마을

의 그림자는 다른 마을의 것과는 다르다. 유난히도 키가 작은 가로 등. 우리 마을 사람들처럼 왜소한 그것. 누가 달았기에 그렇게 작은 것일까 알 만한 그것이 불을 밝히면 우리 마을에는 다른 마을과 다 른 아주 긴 그림자가 생겨서, 필요 없는 부분들이 어둠에 잠겨 버 린다. 우리 마을에게 불빛은 꺼지지 않는 꿈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 실 우리들에게 불빛을 밝힌다는 것은 사치이다. 기름을 사거나, 이 제 보급되기 시작하는 전기라는 것으로 가로등을 밝히는 것은 우리 들의 삶에 비견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불을 밝 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 시간에 잃어버린 우리들의 삶을, 우 리들의 행복을 보상받고 싶어서였을까? 우리 마을의 어른들은 희 미한 불빛이라도 서로 서로 모아서 밝게 만들어, 다른 마을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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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고 잘 시간에 모여서 우리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우리 마을은 고단함 까지도 그 어둠에 잠시 던져 놓고 반짝반짝 하나씩 피어나는 불빛 아래에서 점차 생기를 찾는다. 마감을 하는 아저씨 와 이모 들의 일이 끝난 후를 이야기하는 얼굴들은 마치 시험이 끝 난 우리들 같다. 그때만큼은 우리들도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밝은 얼 굴로 무얼 하며 놀지 그리곤 한다. 우리가 해방되었을 때 표정을 매 일 마감하시는 아저씨, 이모들에게서 볼 수 있다는 것도 나는 작은 행복 중에 하나로 여긴다. 일종의 대리 만족이랄까. 셔터를 닫는 소 리는 아침의 챙챙거리는 소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빠른 장단 의 음악소리같이, 또 마치 살아있는 시장이 기분좋게 가르릉 거리 는 소리 같이, 생동감마저 느껴지는 소리로 다가온다. 그렇게 큰 규 모는 아니지만, 불빛의 생명이 닫는 곳까지만큼은 살아 움직이는 마을은 드디어 그 형태를 완전히 드러낸다. 저주스러운 햇빛 아래 에서는 흑백이던 사물들이 드디어 채색되어 고유의 색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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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우리 마을은 비로소 빛을 내어 드러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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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건만 그 실루엣은 나를 알아차리고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굳이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 그 실루엣은 가까이 다가와서 이삼숙씨가 되었다. 오늘은 내가 뭘 놔두고 와가지고 장사를 좀 일찍 접을 수 밖에 없어 서 돌아다니던 차에 잘 만났네요. 지난번에 우리 가게 호떡을 전부 사면서 마을의 건물들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죠? 건축과 학생이시 라면서. 물어봤던 거 지금 알려드릴게. 저기 저 딱 봐도 특이한 건 물 보이시나요? 내가 시선을 돌리자 이삼숙씨는 다시 말을 이어가셨다.

이씨 할아버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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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림자 때문에 그 음영이 두드러지며 위용을 자랑하는 석조 건물이 마을의 경계를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죠? 저건 마을에서 그 나마 부자이시던 이씨 할아버지 집이었어요. 이삼숙씨는 말 뒤에 무언가를 이으려고 했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 으로 그 말은 다시 주워 담은 듯 했다. 아마도 그가 누군지에 대한 부연이었으리라. 말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 굳이 묻지는 않았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다시 이삼숙씨가 이전과 같은 말씨로 설명을 이으셨다. 저기 마을 안쪽으로 눈에 띄는 알록달록 빨간색, 파란색 페인트칠 이 눈에 띄는 건물은 술에 자주 취하는 김씨의 집이에요. 밤마다 거

김씨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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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게 취해서 들어가는 김씨는 집으로 귀가할 땐 술에 취해 아무 집 문이나 두들기는 몹쓸 술버릇을 가지고 있는데, 부인이 집 좀 잘 찾아오라고 집에 알록달록 페인트 칠을 해 놓았다구 그러더라구요. 좀더 밝은 야광이나 노란빛으로 하면 더 좋았겠건만 그렇게 하기까 지는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에요(밝은 색 페인트가 현저하게 더 비 싸다). 내가 말 없이 그 집을 쳐다보고 있자 이삼숙씨는 집중하는 내 모습 에 설명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신 듯, 계속 말을 이어가셨다. 저기 창고처럼 생긴 것도 집인데, 솔직히 우리 생활을 여실히 보여 주는 집이죠. 저 집 식구들한테 집을 건축가한테 맡기는 건 꿈같은 소리구, 식구들끼리 집을 짓기 시작해서 2대에 걸쳐 지어서 겨우 완성한 집이 마치 창고와 같은 집이 된거죠. 멀리 보이는 집 앞의 고물상에서 주워온 우편함은 마치 침공을 당 한 것처럼 이질적이었으나, 이런 부조화가 오히려 집에 정감을 주 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서 마을 전체로 시선을 옮겼다. 과연 마을은 마을의 핵심적인 자리들에 위치한 빛 에 의해 생긴 그림자와 건물에 의해서 그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내 고 있었다. 괜스레 나까지 뿌듯하여 마을의 경계에 뚜렷하게 위용 을 자랑하고 있는 한 고건물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건 호현당이에요. 우리 마을은 그걸 빼면 설명이 잘 안된다구 보시믄 돼. 우리 마을에 있는 건물이라고는 생각이 들질 않을 정도 로 위풍당당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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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나쁘실까 눈치를 보긴 했으나 고개를 주억거릴 수 밖에 없 을 정도의 마을과 대조되는 위용에 살짝 끄덕했다. 마을 사람들의 꿈과 희망… 어찌 보면 미련. 그런 것들이 다 담겨 있는 곳이라 저런 모습을 할 수 있는 거죠. 저도 어렸을 때는 저기 에서 공부했어요. 우리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거든요. 그녀의 미소 사이로 보이는 눈가의 주름.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번 도 쉽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상스럽지 않은 말씨를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짐작이 갔다. 그 러면서 바라본 호현당은 아까보다 더욱 높아 보였다. 해가 지고 있 음에도 호현당이 있는 쪽은 오히려 아침보다 더 환한 듯 하여 그 존 재에 대해 신경을 쓰고 난 후로부터는 계속 시야에 어른거렸다. 감 상에 잠시도 젖어 있을 틈 없이 시장 쪽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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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7:00 PM


8시 30분. 이제, 장난(場亂)으로 마을이 움직일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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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의 시작

이 시장의 건물들이 특이하게 생겼다고 생각 안 해요? 장난이 무언지 궁금하여 시장 쪽으로 발걸음 하던 중이었다. 또 고 개를 주억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시장의 건물은 이상하게 기하학 적인 건물들이 많았다. 그 옛날 우리 나라에 기하학에 입각해서 설 계를 한 사례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건 다 장난 때문이에요. 우리 마을 시장은 길을 따라 건물들이 들 어선 게 아니라 건물을 따라 길이 난 거거든요. 건축을 공부하는 나로써는 더욱 기괴한 이야기였다. 이삼숙씨가 일 러준 이야기를 대략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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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는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된 놀이가 있다. 바로 장난(場亂: 시장을 어지럽힘)이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이 마을의 시장의 상인들 중 형편 때문에 관아에서 규제하는 물품들을 팔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역 시 마찬가지로 삶이 힘들어서 한국으로 밀입국하여 장사를 하던 중 국 상인들, 한국의 독립 운동가를 도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물 건을 팔던 상인들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정부의 규제와 감시를 피 하여 장사를 해야만 했던 사람들이 유독 이 마을에는 많았다. 그러 나 정부 차원에서도 낮에 경찰이나 관리들을 파견하지는 못했는데, 한양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왕의 귀에 들어가서 애당초 이러한 것들이 생기도록 관리를 소홀히 한 자신들에게 불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워서이고도 했고, 둘째로 시장이 경찰과 관리들로 마비가 되면 이 마을이 운영 되는 것에 큰 차질을 가져올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러한 이유로 경찰과 관리들은 시장이 문을 닫을 시점에 파견되었는 데, 이를 피하기 위하여 상인들이 계책을 고안해낸 것이 장난(場亂) 의 시초였다. 상인들 모두가 시장을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형성한 뒤, 밤이 되면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고 각자 정해놓은 방향으로 일사 분란하게 뛰는 것이다. 관리들이 이유를 물어오면 술값을 위 한 내기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더 이상 그들을 멈출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상인들을 숨겨주어 그 날 시장을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원래의 장난(場亂)은 다음 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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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 입구에 있는 상인들은 맞은편 입구로 뛴다(남대문시장은 8개의 입 구가 있으므로 1번과 5번, 2번과 6 번, 3번과 7번, 4번과 8번이 짝이 다).

2. 뛰는 중에 자기 번호에서 +1한 입구의 상인들을 ‘포획’할 수 있 다(8번의 경우에는 1번입구의 상인 을 포획할 수 있다).

3. 포획 당한 상인은 포획한 상인 의 종이 되어 우선 동행한다. 포 획한 상인은 계속 자신의 목적지 를 향해 가다가 다른 상인에게 포 획 당하면 자신 또한 그 상인의 종이 된다(‘->’를 포획한 것을 나타내는 기호라고 하면, A->B, C->A 하면, C->A, C->B인 상 황이 된다).

4.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그 상인은 그 자리에서 머무른다. 나머 지 종들은 주인의 명령 하에 다른 상인들(자신이 포획할 수 있는 번호 의 상인들)을 잡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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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적지까지 도착한 주인의 재량 하에 종들을 불러모아 게임을 끝낼 수 있다. 게임이 끝나면, 관계를 맺 은 종들과 주인은 술자리를 갖는다. ‘종’들은 술값을 내고, 주인은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동안 종들이 주인을 보호 할 것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주인이 잡히는 순간, 다른 사람 한 명 분의 입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현명한 주인이라면 자신을 잘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들에게 다른 상인들을 잡아올 시간을 오래 줄 것을 약속할 것이다). 모든 상인들이 모여서 술자 리를 가지러 떠나면 전체 게임은 자연스레 끝난다.

과연 낮에 본 시장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곳의 상 인들은 잡는 쪽도 잡히는 쪽도 모두 즐거워 보였고, 흡사 어린 날 하던 숨바꼭질 같은 것을 하면서 천진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장 난이 끝난 이후에는 모두들 삼삼오오 모여 정리한 포장마차 근처에 서 상을 펴고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어이 영자야, 우리도 끼워주면 안돼야? 드루와 뭘 그런걸 물어보구 그래? 옆에 온 분은 이름이 어떻게 돼 요? 우리는 둘 다 술을 하지는 않지만, 그 무리에 낄 수 있었다. 오히려 이삼숙씨는 말이 없었고, 나는 한참 대화에 취해 있는 중에 초록색 소주병 너머로 한 여인의 형상이 보였고, 그 모습은 분명 아까의 그 학생의 실루엣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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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 끝나고 술을 드시는 마을의 아저씨, 이모들과 같이 자리

를 하면, 아침, 점심에는 도저히 먹어볼 수 없는 음식이 안주거리로 항상 상에 올라온다. 이게 사는 낙 이랄까. 굳이 이 길로 호현당으 로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집에 들러서 책보를 싸고 바로 호현당으 로 올라가 버릴 수도 있지만, 굳이 시장을 거치면 이런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는데 배고픈 학생이 그냥 갈 쏘냐. 어른들은 이제 막걸 리도 한잔 하지 않겠냐며 권하시지만, 술을 먹는 순간 나도 같이 여 기에 주저앉을 것 같아 정중히 사양했다. 나는 꼭 출세해서 아저씨, 이모들이 집 안 뺏기게 해줄 테니까 꼭 기다리시라요. 마음속에 맺 힌 그 말을 꾹 다물었지만 어른들은 이미 다 아시는지 기특하다는 손짓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이 시장 상인들 중 그 어느 누구랑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누구시던 지나가는 ‘우리들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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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들에게 자신들의 안주거리를 나눠주기 싫어하는 어른들은 없 다. 어른들끼리도 이다. 사정이 있어 장난이 끝난 후에도 짝이 없는 분들은 그냥 아무 모임에나 잘들 끼어 들어갔고, 모임에서도 흔쾌 히 그들을 수용했다. 장난을 기점으로 우리 마을의 야동은 시작되 었고, 모두가 하나인 즐거운 한 때가 펼쳐졌다.

잠깐이었을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싸움을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 다가 다시 그 병 너머로 본 모습은 다시 이삼숙씨가 되었다. ……시팔!

지금 그래서 느들이 잘못이 없다는 거여?!

아니 이양반아 좀… 우리가 하는기 원래 이 바닥에서 아주 옛날부터 계속 전통적으루 했던 거 아녀? 느 들 같은 것들이 들어온거구. 새루 들어왔으믄 그냥 그런가 부다 하고 장사하믄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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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왜 우리덜한테

지랄이야! 가진 것도 많은 것들이! 에라이, 간다 가!

쯧쯔쯔… 결국 싸우는구먼. 나에게 아까 이름을 물어 보았던 최영자씨가 혀를 찼다. 궁금하다 는 표정을 짓자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저기 지금 착잡한 얼굴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고 앞 건물에서 장사 하시는 김춘자씨하구 권영배씨에요. 건물서 장사하는 사람들하구 포장마차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한번 모아 보겠다구 오늘 그러더 니만, 결국 싸웠나 봐요.

권영배씨와 김춘자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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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숙씨도 거들었다. 저 둘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저런 갈등을 겪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두 세력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구요. 저 두 분도 그와 무관할 수 없는거죠. 김춘자씨는 이러나 저러나 다같 이 잘 지내면 그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권영배씨는 이들의 과 도한 호객행위와 더러운 위생상태, 통행방해 등으로 자신들이 피해 를 보고 있고, 자신들이 이에 대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더라 구요. 결국 그래서 그런 걸로 또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겠죠.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시장의 고층 건물들에는 현수막이 걸 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포장마차는 철거하라! 라고 써 있는 그 현수막의 모습은 힘든 삶에 가족 같던 존재들 마저 반목하게 만드 는 것이었다. 분명 몇 그람 되지 않는 가벼운 것이겠지만, 내 마음 을 짓누르기에는 충분했다.

현수막이 걸린 건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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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 권영배씨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도, 술판 에서 흥에 취해 있던 사람들도, 화를 삭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욕설 을 내뱉던 권영배씨도, 저 멀리서 싸우던 사람들도 그 순간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 섬세하게 귀를 파고드는 듯한 소리는 처음에는 따 뜻한 어머니의 품 같다가 이내 생각에 잠기게 했고, 조금은 슬퍼졌 다. 그 이후에 우리가 느낀 감정은(나는 나 혼자만 이런 감정을 느낀 것 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황홀한 슬픔이랄까. 술은 하지 않지만 취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곡(曲)은 어 느 새 끝나 있었지만 곡(哭)은 끝나지 않은 것만 같았고, 피리소리 가 그치고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 모두는 소리가 멈췄다는 것을 깨 닫고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방금 그건…? 언제부턴가 이 시간만 되면 저 피리소리가 들려오는데, 어디서 들 려오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귀를 기울이죠. 슬프지만 따뜻하기도 하고, 무언가 감상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마 력이 있달 까요? 저 피리소리는 마치 만파식적(萬波息笛)처럼 동네 의 모든 싸움을 잠재워요. 저 소리만 들리면 싸움을 하던 마을 사람 들도 모두 조용히 듣고, 피리소리가 끝나면 서로 그냥 각자 갈 길을 가거든요. 누구인지는 몰라도 마을 사람 중에 하나인건 확실한 거 같아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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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관련 없는 타지인들은 저 소리를 듣고도 그냥 지나가거나, 혹 은 그냥 조금 감상하거나 하는데, 마을 사람들만큼은 신기하게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하던 일을 멈춘단 말예요? 마치 마을 사람들 모 두를 위로하면서 ‘괜찮아, 괜찮아.’ 하는 것 같기두 하고요. 문득, 아침의 나독박씨가 밖에서 구걸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누더 기 한 켠에 살짝 가리워져 놓여 있던 피리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 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 던 것은 고향양이 마치 마을 사람들은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식 으로 했던 말이 걸려서이기도 했겠지만, 피리 소리의 여음(餘音)으 로 마치 이런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아서이다. 나는 노숙자 신분으로 마을에 민폐를 끼치면서 살고, 수 많은 사람 들이 내 모습을 보고 눈총을 주고 가. 아마도 냄새가 역하겠지. 이 런 나에게 마을 사람들이 위로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미안해 할 것이 뻔하지. 피리소리를 들을 때 마 다 내 생각을 하면서 미안해 할 거야.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아. 그 냥 조용히 이렇게 마을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 나로 인해 마을 사람들끼리의 분열이 잠시라도 잊혀진다면 그것으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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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야한 시간

야자(야간 자율 학습)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 오늘밤도 우리 마

을은 역시 아름답다. 우리 마을의 아이들이 결코 성공해서 이 마을 을 탈출해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공해서 우리 마을 사람들을 잘 살게 해줘야지 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 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꼭 호현당에 들른다. 이 호현당 앞에 있는 백범광장에는 장난을 치르시고도 체력이 아직 남으신 마을 어른들 이 족구를 하고 계시고, 마을의 꼬마들이 드디어 일에서 해방된 부 모님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호현당 만큼은 경 건한 학문의 공간으로써, 마을의 경계를 수호하는 존재로써, 마을의 모든 염원을 담은 공간으로써 백범광장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옆 마 을의 위풍당당한 고층 건물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이곳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위로해주곤 했다. 옛날, 불빛이 귀했던 우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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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학교가 생기기 이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하여 모은 돈 으로 산 기름으로 이곳에 불빛을 밝히고, 수업(야학)을 했다고 들었 으나, 지금 이곳은 공부하기를 원하는 마을 사람 중 누구든지 이용 할 수 있는 24시간 독서실과 같은 곳이 되었다. 아직 못 다 끝낸 공 부를 하려고 호현당에 들어서는데, 호현당 바닥 밑에서 무언가가 반짝 했다. 평소라면 별로 관심 없이 지나쳤겠지만, 그것이 나를 끌 어당기는 느낌은 그날 따라 강했다. 그 밑에 있던 물체를 엎드려서 겨우 닿는 팔로 꺼내려 허우적댔다. 손가락에 닿는 감촉은 종이였 다.

"호..현..당.."

여고향양이 발견한 것

한자로 쓰인 글씨를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다. 그 글씨에서는 빛이 어슴푸레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이 내 하늘을 쳐다 보고 하늘이 시리도록 아름다워서라고 변명하며 눈 물을 닦아 내었다. 그 귀퉁이에 적혀 있는 유난히도 유려하고 30도 정도 기울어 있는 글씨. 분명히 삼숙이 이모의 글씨였다. 한 귀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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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는 삼숙이 이모의 글씨체가 적혀 있었다. 이모. 이모도 나와 같 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모도 학생이었구나. 이모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장에서 장사하면서도 못 배운 티가 없는 이모. 관공서 직원들이 나와서 뭐라고 해도 전혀 당 황하거나 풀이 죽은 기색 없이 현명하게 대처하던 이모. 이모의 그 런 모습들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었구나. 이모는 무엇이 되고 싶었 을까.

"호현당" 한자를 한번에 읽어내고는 뿌듯하여 속으로 생각한다. ‘한자는 이 제 쓰임이 줄어들고 영어가 뜰 것이라고 하지만, 한자를 모르고 어 떻게 기본적인 사람으로서의 소양을 쌓겠어.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동방예의지국의 기본이 되는 논어 맹자 소학 같은 책들을 안보지 는 않을 테니까 이정도 한자는 배워 놔야지. 또 나는 어차피 법대를 갈 거니까 한자를 어차피 공부해야 할 거야.’ 호현당에서 공부하 는 학생들을 위해 나누어준 종이이다. 호현당이라는 글씨가 한 켠 에 빛을 내고 있어 밤에 적은 불빛으로도 공부할 수 있게끔 한 지금 은 늙어서 선생님에서는 은퇴하신 이씨 할아버지의 아이디어였다. (이제는 선생님이 아니니까 마음껏 이씨 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부 를 수 있다). 이씨 할아버지가 학생이었을 시절, 가난한 학생들과 선 생들은 조금의 불빛을 밝힐 수단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 해낸 것이 그 당시 신 문물로 들어왔던 야광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야광 물체를 잘라 붙여서, 혹은 야광 도료를 붓이나 손가락에 묻혀 서 글자를 써서 공부를 하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여하튼 이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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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호현당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 사 실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멍 하게 야광 불빛을 응시하고 있는데, 이 씨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옛 마을 모습

삼숙이두 이제 우리 마을이 어떻게 생겨난 마을인가 정도는 알아야 제… 우리 마을은 사대문 밖에 있지만, 한양과 가깝다는 이유로 옛 날부터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것 때문에 이 마을 사람들은 새벽부 터 일을 하고 밤이 되어서야 일이 끝나는 일상을 살았어. 그치만 한 양 안 사람들에 비해 현저하게 못살았지. 그런게 여태까지 쭉 내려 오고 있는 거여. 하지만 우리들은 서로간의 교류를 포기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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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라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갔고, 그것이 풍습으로 굳 어졌지. 또, 자연스레 마을은 '밤에도 밝은'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 다. 또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두 많지. 우리 나라의 이름이 조선이었을 때, 성곽 변두리 마을에 불과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밤 에 달빛을 가장 잘 받는 요 앞 백범광장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일종의 관습처럼 굳어져 있었지. 지금도 그래요 할아버지. 끊지마 이눔아. 근데 한양에 교역을 하러 온 한 중국 상인이 마을에 머물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무식이들인걸 한눈에 알아본 거 지. 그래서 한양의 대장간에 팔기로 한 조그마한 쇠 공에 야광물질 을 발라가지고 밤에 그 구술을 들고 신선행세를 했다는 거 아녀. 그 때까지 야광이라고는 듣도 보도 못한 마을사람들은 그 상인을 정말 신선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지. 그 상인은 재미가 들려서 자신이 떠나갈 때 그 물건을 마을에 두고 떠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신물인 마냥 취급했대. 크기는 조그마하지만 무쇠로 만들어져 무게가 많이 나가는 쇠 공은 마을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게 하는 데 일조했지. 그걸 사용해서 여기 밝은 백범광장 뿐만 아니라 낮은 지 대에서도 밤에 활동 할 수 있었단다. 시간이 지나 그것이 야광물질 이라는 것을 알게 된 마을사람들은 그 물건을 신물에서 무식의 창 피함을 일깨워주는 유물로 바뀌었지. 사실 그게 마을 사람들이 공 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끔 만들어준 거지. 그게 없었으면 너도 없었 다 이말이야 이눔아. 그렇구나. 할아버지. 더 혼내도 좋으니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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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남겨졌던 야광물질을 바른 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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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처럼 별처럼 남은 것들

호현당에서 발견한 옛날 호현당의 수업 자료들을 보고 있는 동 안, 본 적도 없는 이씨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언

젠가 이모가 그 수업자료와 이씨 할아버지에 관련한 이야기를 해줬 었는데. 이모를 가르치셨던 그 분은 어떤 분이셨을까 늘 궁금했는 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자료를 만든 정성과 손길로 이씨 할 아버지는 나에게 말을 걸고 계셨다. 호현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불빛 이 새어 나오는 김씨 할머니의 식당에서 향긋한 냄새가 바람에 실 려 왔다. 출출함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식당 안이었다. 식당 곳곳에 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이 스며 있었다. 김 할머니께서 언젠가 이 곳은 원래 예전부터 주막이었다고 이야기 해주신 적이 있다. 장사를 위해 밤부터 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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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의 식당

곳은 떠나기 전 힘을 얻고 떠나는 발판과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현 재까지도 수익을 위해서 장사하지 않는다. 우리 마을 시장에서 팔 기만 해도 대박 날 텐데 왜 돈 벌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느냐는 질문 에 할머니는 웃으시며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이 예전에도 하나 있었 다며 똑똑한 애들은 역시 돈을 먼저 생각한다고 머리를 쥐어박으셨 다. 김말숙 언니는 질문을 듣고 내 옆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박는다. 그 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가 먹고 있던 긴 냉면처럼 풀어내기 시 작한다. 자신은 이곳에서 3대째 장사를 물려받기 위해 일을 배우는 중이라고. 이 식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였고, 지금 까지도 그렇다고. 호현당과 성터 근처에서 밤까지 공부하느라 힘든 야학도들, 일이나 구걸을 마치고 시장하게 되신 어르신들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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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이나 혹은 공짜로 음식을 나누어 주는 곳인 이곳은 당연히 적자임에도 계속 운영되는데, 재료가 떨어지면 시장 상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자신들이 파는 재료를 가져오고, 다른 모든 필요한 것은 모두들 자기 어머니를 위해 발벗고 나서 구해오 기 때문이라고. 우리 같은 식당이 쓰러지면 누가 마을 사람들의 마 음을 따뜻하게 해주겠냐고. 불빛만 있다고 마을이 밝더냐고. 고생하 는 학생들과 아저씨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하던 우리 언니. 자신을 위해서는 한 방울도 흘릴 줄 모르던 눈물을 마을 사람 들을 위해서는 밤하늘의 별만큼 흘리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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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이제 할머니다. 나도 현실을 부정하고는 있지만, 할머니이 고. 향긋한 냄새가 언니 식당으로부터 내 코로 날아든다. 정신을 차 리고 보니 식당 안이었다. 이모 아까 아침에 저 못 보셨죠? 어 고향이네! 봤긴 했는데, 아침은 이해해줘. 알잖아 . 당연하죠, 그, 저랑 같이 있던 아저씨 혹시 보셨어요? 아, 나도 아는 사람인데 이제 마을 사람 다 됐어, 아마 아직도 영자 네 무리랑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 아 이미 그럴 거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저씨도 마을을 위해서 마음 아파하시더라고요. 눈물도 흘리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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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의 모두는 기억과 생각, 느낌을 공유하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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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는 글 먼저 이 글은 모두 실존 인물이나 실제 지명, 실제와 관계된 모든 것과 관련이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글은 실제이 며, 실존 인물이고, 실제와 관계된 모든 것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이 글은 필자들이 재학중인 한양대학교 건축학부의 어떤 과목의 한 학기 프로그램, ‘방방곡곡 프로젝트’중의 일부로써 처음에 구상 되기 시작하였다. 실제 있는 정보들을 조합해서 지도상에 없는 마 을을 마치 실제 있는 것처럼 만들어 호기심을 자극하고 독자들에 게 상상력과 위트를 선사하고자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다. 이 프로젝트를 받았을 때 우리들은 조금 다른 시선으로의 접근 을 꾀하였다. ‘실제로는 어디에나 있는 마을’을 생각하게 된 것 이다.

우리는 모두 늘 살던 대로, 늘 하던 대로 흘러가는 삶을 산다. 늘 하 던 대로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보고, 전공서적을 보고, 컴퓨터 스크린을 보며, 땅을 보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삶 가운데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펼쳐진 하늘은, 분명 놀랍도록 아름답다. 이 러한 경험을 이 프로젝트에 대입시켜 볼 때, 우리는 놀랍도록 아름 다운 마을이 조금만 눈을 들어도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과연 그러하였다. 어디에나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 면,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소외 되었을 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 에 소외된 것이 아니라, 소외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지를 판단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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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기회조차 잃은 사람들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야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가 그들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 는 순간, 그 어떤 어둠 속이라도 별빛처럼 반짝이는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감과 소통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될 때, 비로 소 그들을 이해할 수 있고 어디에나 있는 야동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신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필자들은 확신하는 바 이 다. 그 언젠가 야동마을에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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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

야동 : 눈을 들면 보이는 마을 / 지은이: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 -- 서울 : 여기저기, 2015 p. ; 14.8*21 cm

ISBN 979-11-86188-09-5 03980 : ₩10000

도시 디자인[都市--]

539.7-KDC6 711.4-DDC23

야동 눈을 들면 보이는 마을 출간일 2015년 12월 15일 지은이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출판사 여기저기 주 소 서울시 성동구 성덕정 3길 10-1 herethere.kr ⓒ 구영휘 손주영 조규희 2015 본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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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P201503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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