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곳곳 프로젝트 여기저기 출판사는 서울에 곳곳에 숨어 있는 10개의 동네를 선정했다. 신중을 기울인 끝에 선별된 이들 동네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와 오래된 역사를 가진 장소를 한데 어우르고자 하였다. 때로는 엉뚱하고, 고급스럽거나, 소박하기도 하지만 이 안내 책자에 등장하는 다양 한 장소들은 늘 흥미 진진하며, 무엇보다도 그 도시만의 얼과 혼을 담고 있는 곳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주기를 감안했을 때, 취재가 진행되는 시점과 안내책자가 출판되는 시점 사 이에 기존에 소개된 장소가 문을 닫기도 하고, 새로운 장소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미리 안내 하는 바이다. 이러한 변동 사항들은 독자들이 스스로 고쳐 나가면서 책자에 반영하면 될 것 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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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답서 청계천 셰답장이들이 전하는 그들의 고향 나샛탁 지음/ 꽁뒤 + 아무개 옮김
오깨끗 나순백 장스팀 노얼룩 송결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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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김칫국물 묻은 흰 블라우스를 입고 찾아가고 싶어지는 책이다. 셰답해주소! 순예진
셰답동 역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봐라. 더불어 빨래에 관한 팁도 들을 수 있으 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을똥
일상에서 접하는 청계천 주변에 조그맣지만, 역사가 묻어있는 이런 동네가 있다 니.. 여러분도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앙증
동이름이 재미있다. 내용도 재미있다. 외국인도 반한 책. 중국인
각 장별 칼럼이 궁금해 지는 그런 책. AJ
근현대사 책에 들어가도 알맞을 듯한 완벽서을 갖춘 책이다. 고교교과서집필진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방기문 6
셰답!!! 여행책의 교과서!!! 폴 버튼
어떻게 보면, 일상적일 수 있는 내용을 참신하게 표현했고, 여행책자이면서 빨래 개론서 같은 느낌이 좋다. 토니
셰답의 얼과 정신이 느껴집니다. 셰답족보를 보니 대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오랜 셰답의 역사가 깃들은 책! 호지웅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도시를 정리하는 새로운 방법. 빨래의 도시 셰답동 에서 묵은 때를 다 벗기고 싶다. 세균맨
계속 보게 되는 마성의 책이다! 크리스토퍼 놀람
시리즈 중에 가장깔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꼭 읽어보길 바란다. 닉 부이차차
책의 구성이 깔끔하고, 각 장마다 마지막에 있는 칼럼들이 흥미롭다 W 7
작가 나샛탁 세답동 빨래명가 나씨가문의 직계종손. 큰아버지가 청계천 초창기
세답조합
의 회장, 한마디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 나씨가문은 6.25전쟁 발발 당시 대부분의 세답집이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도 청계천에 남아 군인들 빨래를 도맡은 몇 안되는 가문. 전쟁으로 번창하게 된 후에 자신들이 번 돈을 다시 청계천에 돌아온 사람들과 가난한 정부에 기부하여 청계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나씨 가문은 청계천 셰답장이들의 터와 문화를 보존한 공로를 인정받아 3대째 세답조합의 회장을 역 임, 나샛탁씨가 4대로서 다음 후계자로 유력. 어릴 때 후계자 수업을 지독하게 받 은 덕분에셰답동의 역사에 빠삭하고 누구보다 셰답동에 애증의 감정이 큼. 사춘기 때 부모님이 가문의 대업을 이으라고 들들 볶아대는 바람에 잡시 엇나가서 셰답동 을 떠나 가출을 한 적도 있지만 다른 동네에서 고생을 직살나게 해 본 덕에 돌아와 서는 누구보다 셰답동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셰답동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 저서로는 < 좋은 빨래란 무엇인가>, <나씨가문 빨래설명서>가 있고 단 두권의 책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청계제일세탁소에서 여느 세답소 사장들과 다를 바없이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셰답조합 100년 전에 청계천에서 처음 세답산업을 일으킨 셰답장이 후손들이 만든 세탁소 상 업조합. 셰답동 안에서 권력이 막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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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꽁뒤 꽁뒤의신기한세상 대표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재학중 듣도 보도 못한 여행 메뉴얼 개발에 관심이 생겨 <꽁뒤의신기 한세상> 여행브랜드를 창립, 대박 상품을 출시 하겠다며 이곳저곳 방랑하며 살고 있다. 대학 때 만난 아무개와 셰답동에 관해 연구하던 중 아무개의 지인 나샛탁씨에게 셰답서를 옮기는 일을 제안 받았다. 현재 셰답 서의 마지막 장을 끝내고 신상 여행상품을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나있고, 전혀 돌아 올 생각이 없어 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가출신고를 해 놓은 상태이다.
아무개 아무개는 SNS에 2만명의 팔로워를 갖고 있는 유명인사다. 하지만 아무개의 정체를 아는사람은 많이 없다. 아무개에 대한 개인 신상정보는 아는사람이 없다. 아무개는 주 로 일상을 수필이나 사진, 그림으로 기록하 는 작업을 한다. 아무개에게 있어 영감을 주는 것은 내가 겪는 일상이 아닌 다른사람 의 일상을 겪는 것이다. 아무개는 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그 사람을 약 3개 월동안 미행하는 작업을 한다. 집도 그 근처로 옮겨서 이사하여 다른사람으로써의 인생의 일상을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 셰답동도 아무개에게 있어 작업의 대상이 된 흥미로운 동네다. 공동 옮긴이인 꽁뒤와 함께 셰답동에 대한 탐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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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많이들 셰답동에 오셔서 절 보셨겠지 만, 청계제일세탁소 사장 나.샛.탁 이라고 합니다. 전에 <좋은 빨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다른 빨래에 대한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 는 분들도 계셨지요. 그래서 <나씨가문 빨래설명서>라는 책을 썼더니, 이 것도 역시 깜짝 놀랄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 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번에는 우리 나씨가문뿐만 아니라 셰답동의 다른 가문 빨래고수들 5명과 함께 그들만의 비법을 모아 서 책을 만들어 볼까 했는데, 셰답동 주민들 사이에 서 셰답동에 관한 책을 집필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빨래 비법들이 사실 우리 셰답동의 조상 님들이 한 세기동안 갈고 닦으신 모든 것이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셰답동 주민들의 협력에 힘입어 <셰답서>를 쓰게 되 었습니다. 이 책이 아무쪼록 댁네의 쾌적한 빨래 환경 조성에 더욱 도움이 되길 바라고, 여러분들이 알지만 잘 몰 랐던, 셰답동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유익한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10
이 책의 사용법 이 책은 셰답동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싶어하는 셰답인, 그리 고 셰답동의 실태를 알고 싶어하는 셰답인이 아닌 사람을 위 한 설명서입니다. '청계천이 흐르는 동네가 셰답동이다'라든지, '명동이 셰답동 인지, 셰답동이 명동인지..'라는 식으로, 셰답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떠들지만 제대로 된 것은 없습니다. 셰답동에 가게 되면, 음 우선 청계천에 앉아서 해가 질 때까 지 물구경이나 좀 하다가 어두워지면 명동에 가서 옷쇼핑이나 하러가지요. 그렇지만 셰답동은 그저 유명한 냇가가 흐르고 옷이나 구매 하러 가는 동네가 아닙니다. 셰답동은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아온 동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셰답동의 전형은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 속은 어떨까요? 이책을 읽다보면 여러분은 드디어 진정한 셰답인의 마음을 조 금은 이해하고 다음에 셰답동에 갈 땐 그저 같은 곳만 가서 생각없이 기웃거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분명 셰답서를 읽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빨래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 있는 기이한 현상도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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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의 글 4 작가/옮긴이 소개 작가의 말 8 1장 셰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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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도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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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앙빨래유통국 column_1 '냄새 제거, 등잔 밑이 어둡다'-오깨끗
2장 질감
1 예술 2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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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건축 column_2 '스타킹, 아직도 사니?!'-나순백
3장 기억과 일상
1 나씨가문 족보 2 나샛탁씨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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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셰답동 사람들셎 column_3 '다림질을 할 때 왜 물을 뿌릴까?'-장스팀
4장 색 68
1 축제 2 음식 3 놀이 column_4 '얼룩을 빼는 여러가지 방법' 노얼룩
5장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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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imn_5 '빨래 건조에서 각의 중요성' 송결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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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셰답동
14 셰답동
우리가 말하는 셰답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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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답동 지도
셰답 빨래 지구 제1청계천의 1구역과 제2청계천 2구역으로 나뉜다. 70년대 이전 에는 모두 세탁소와 주거가 결합 된 형태였으나 현재는 세탁소만 을 용도로 하는 건물들이 늘어나 고 있다
복개된 제2청계천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제 1청계 천을 복개하고 제 2청계천을 만 들었으나 70년대 다시 복개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패션 중심 지구 광복 이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일부 명동에 포함되었던 지역이 라 아직도 명동이라고 불린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동북아 패션을 선도하는 지역으로 셰답 동의 빨랫감 원천지이기도 하다
16 셰답동
제1청계천 2005년 복원된 모습. 셰답동 사람들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빨래 프랜차이즈 지구 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최초로 세탁소 가 하나의 기업, 프랜차이즈 시스템이 도입 된 곳이 바로 셰답동이다. 빨래 프랜차이즈 들의 본사가 모여있는 지구다. 동네 세탁소 만큼 질 높은 세탁을 하진 않지만 많은 사람 들이 싼 맛에 애용하고 있다.
공공시설 셰답동 사람들은 같은 세탁업계에서 종사하 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환이 필수다. 학교나 동사무소, 성당같은 공용건물 에서 자주 집 회를 가지고 서로 교류한다
셰답동 지도 17
동의 경계가 생긴 배경 셰답동을 명동이라고 잘못 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하 건대 명동은 광복 후 1955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에 붙여진 이름이고, 셰답동은 훨씬 나중인 1988년, 많은 한국인들은 올림픽의 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셰답동 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 역사적인 해라고 할 수 있다. 셰답동은 서울시 빨래특구로 서 다른 동과는 다르게 동 주민 대부분이 빨래 업계에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고 셰 답장이들이 어느 정도 공무원의 성격을 띄게 되면서 이들의 세금을 다르게 관리함 과 동시에 셰답장이들끼리의 원활한 일 분배를 하기 위해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서의 필요성이 거론되었다. 그래서 그 해에 우리의 오랜 은어인 셰답이라 이름짓 고 어엿한 동으로서 서울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명동의 일부와 충 무로, 필동, 세훈상가지구 일부를 포함하여 셰답장이들의 분포에 따른 경계를 띄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우리 셰답동은 더욱 단결하고 역사와 문화를 보존, 발전하는 마 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셰답동의 경계선
18 셰답동
셰답? '셰답하다’는 ‘빨래하다’의 옛말. 청계천의 빨래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에겐 혼마치 때문에 패션을 선도하는 지역으로 여겨졌지만, 조선 인들 사이에선
‘셰답거리 셰답하러 청계천에 가거든 셰답하다 셰답하소 눌러앉을 모냥이로세’ 라는 노랫말이 유행일 정도로 일거리가 없는 조선인들이 혼마치에 사는 일본인들 의 옷을 빨아주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동네로 유명했다. 일본인들이 떠나고 나서 그들의 억압과 수탈의 상징인 혼마치의 화려한 옛모습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조선이 남과 북으로 나뉘는 변화의 물결이 찾아오지만 제2청 계천 셰답촌만은 오롯이 그 자리를 지켜 남한 최고의 빨래터로 명맥을 유지한다.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빨래들을 도맡기도 한다. 일제시대부 터 지켜온 명성이 한국전쟁 때 미군, 중공군에게까지 인정받아, 전후에도 값싼 임 금으로 최상의 빨래를 맡길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중국, 미국 등지에서 오는 대량의 빨랫감들을 받게 된다. 셰답촌 주민들이 밤낮없이 일한 덕에 전후 폐허가 된 땅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량의 달러가 모이게 되었고, 한국사회에 급격한 경제성장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셰답촌은 80년 질풍노도의 한국사에서 한국인의 근면성과 검소함의 표상이 되었고,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고한 어느 외국의 신문에선 ‘셰답의 기적’ 이라고 칭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날 셰답촌 후손들은 과거에 그들의 선대가 한국사회에 새긴 공적들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저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근면했던 선조의 지혜를 잊지 않으며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청계천의 아랫물길이 지나는 자리에 남아 “셰답하소~!!”라고 힘차게 외친다.
셰답동 지도 19
셰답의 역사 조선총독부는 당대 일본 최대의 백화점
본인들은 더욱 조선 진출에 박차를 가
인 미쓰코시(현 신세계)에게 권유를 했
하게 된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 러
다. 경성의 남촌에 조선에 거주하는 일
시아, 유럽 등지에서도 미쓰코시를 거
본인을 위한 최고급상점가를 형성하려
점으로 동북아시아 패션사업이 이루어
는 계획이었다. 당시에 을지로를 중심
졌을 정도이니 그 규모는 비할 바 없
으로 한 대규모 시전이 있긴 하였지만
다. 지조를 최고 덕목으로 아는 조선인
모든 거래가 정찰제가 아닌 흥정이었기
들마저 이젠 같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에, 조선인들에게 최초로 자본주의 사
시전에 가지 않고 오로지 미쓰코시에
상을 도입하여 수탈정책의 이념적 발판
서 일본인들처럼 양복을 사 입기 위해,
으로서 역할을 해내리라 기대한 것이
‘돈’만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가는
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한다. 미쓰코시
것이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더 이상 기
백화점 조선지사는 혼마치(지금의 명
존의 거래방식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상
동)의 상징적인 곳이 되었고, 양질의 의
황이었고, 이제 조선 전체의 경제 체제
류를 조선에서도 구입할 수 있게 된 일
가 자본주의 원리로 돌아가는 데에는
혼마치. 지금의 명동
20 셰답동
미쓰코시 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1904년 일본에서 최초로 개점한 백화점이며 주로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이었다. 1905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총독부의 권유를 받고 조선에 진출하였다.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
족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미쓰코시로
다. 그러나 미쓰코시가 명실상부 경성
서는 당초 조선총독부와 함께 혼마치를
의 최고의 부가 밀집하는 랜드 마크가
조선 최고의 상권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되어 가던 때는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
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가뜩이나 북
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에 한
촌이 날이 갈수록 쇠퇴해져 자꾸만 가
축을 담당하던 때였으므로 조선의 지배
난한 조선인들이 남하하는 바람에 혼마
를 더욱 공고히 하고 나아가 경성을 대
치가 있는 남촌에까지 영향을 끼쳐, 마
륙 침략의 중심적 병참기지로 육성하고
냥 고급스럽고 깔끔했던 예전 분위기가
자 하던 때이다. 따라서 군수물자의 신
흐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
속한 이송을 위한 교통로의 확보가 필
촌이 다행히 완전히 장악되지 않고 유
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도성의
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청계천이 북촌과
중앙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남촌을 가로지르고 있던 덕분이었다.
도로를 확장함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충
청계천은 일본이 도입한 자본주의에 희
역사 21
생된 조선인들의 밀도가 정상을 넘어서
치의 위쪽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형
는 수위에 이르고 있었다. 만약 청계천
상을 띠게 되었다. 혼마치는 다행히 더
이 복개되어 청계천에 모여 살던 조선
럽고 가난한 조선인들로부터 거주영역
인들이 다시 갈 곳이 없어진다면 이들
을 침해받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 조선
은 당연히 남촌으로 내려와 혼마치에
인들이 혼마치에 구걸하러 내려오지 않
서 노숙하며 돈을 구걸하고 살 것이 뻔
게 하기 위해 미쓰코시를 중심으로 대
한 실정이다. 이 엄청난 조선인 노숙자
량 유통되는 옷감들의 빨래를 청계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쓰코시 조선지
조선인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때부
사장은 조선총독부와 쉽지 않은 모험에
터 청계천은 조선에서 가장 긴 빨래터
나선 것이다. 바로 혼마치 바로 위쪽에
로 명성을 쌓아갔고 현재까지 그 명성
북촌 조선인들의 남하를 막아줄 최후
이 이어져 청계천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의 보루로서, 또 하나의 청계천을 만드
귀하디 귀한 옷감들을 세탁하는 고급
는 것. 이는 미쓰코시가 조선지사를 폐
세탁 일번지가 되었다.
쇄해버리겠다고 끊임없이 조선총독부 를 압박한 결과 얻어낸 희망이었다. 그 동안 미쓰코시가 일본정부에 낸 세금 은 경성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일본정부는 전 쟁을 준비하느라 점점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고, 청계천 복개 공사에 이어지는 미쓰코시의 매출감소 는 몇 푼이라도 모아야하는 지갑에 동 전 한 알이 빠져나갈 정도의 구멍이 생 긴 격이라 볼 수 있다. 총독부는 당장의 공사비용을 감수해서라도 제2의 청계 천을 만들기 위한 공사에 착수했고, 청 계천에 살던 조선인들이 값싼 노동력으 로 대거 투입된 덕분에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금새 미쓰코시가 있는 혼마 22 셰답동
연보 미쓰코시 조선지점 도입 을사조약
1905
북촌 양반들의 몰락 혼마치의 번영
세답촌 형성 조선인들의 구걸 전설적인 각설이, 왕초
만주사변 군수물자 운송계획
1931
제1청계천 복개 제2청계천 개발계획
1935
제1청계천 조선인 이주
1936
6.25
1950
청계천 조선인 피난 나씨가문이 지켜낸 세답촌 나씨가문 재산기부
중앙빨래유통국 설립
1955 역사 23
셰답조합 1대회장 '나도참'
1956
2대회장 '나도요'
1960
'새마을 빨자' 운동 나도요 전성시대
제 2청계천 복개
1970
3대회장 '나 물'
1980
동이름 '셰답동'으로 개정
1988
셰답 황금기 <빨랫방석에 오르다>
셰답의 기적 빨래 대가들의 시대
IMF 금융위기
1997
셰답지구 빨래량 급감소 '세제절약, 비누쓰기' 운동
금융위기 이겨내다!
청계천 복원사업 셰답동 영광의 시대
24 셰답동
2004
중앙빨래유통국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셰답동 지구에
거친다고 생각하면 된다. 셰답동은 패
는 패션상가들과 셰답지구가 공존해 왔
션상가에서 손님에 의해 더럽혀진 옷들
다. 당연히 옷감들의 유통네트워크가
을 세탁하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역할
형성되게 되었다. 그런 옷감 유통네트
외에도 수도권의 모든 대량유통 옷감
워크의 기지가 바로 중앙 빨래 유통국
과, 고급옷감을 세탁하는 곳이 셰답동
이다.
이다.
옷감유통네트워크는 다음과 같다.
이런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교통이
의류사업가들이 엄격한 큐레이팅을 통
정리될 필요성을 느낀 의류사업가들과
해 동대문에서 옷을 고른다. 선별된 옷
셰답장인들은 우체국과 같은 중앙빨래
을 동대문에서 대량으로 생산해 낸다.
유통국이라는 장치를 만들어 효율적으
생산된 옷은 셰답지구로 넘어와 세탁이
로 관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되고, 의류상가로 넘어가게 된다. 즉 옷
셰답공무원들은 중앙빨래유통국에서
가게로 들어오기 전에는 항상 셰답동을
일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빨랫감 배달 부들은 누구보다도 옷감을 안전하고 소 중하게 운반할 줄 아는 운송업자들이 다. 거리에 큰 차들이 들어서기 힘들어, 오토바이로도 대량의 옷감을 운반할 줄 아는 빨랫감 배달부들은, 아침 4시부터 세답동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하루의 세탁업의 시작을 알려주는 소중한 사람 들이다. 명동우체국에 중앙빨래유통국이 편입 되고 쌍둥이 빌딩이 건설되었다. 옷감 이 빨래국에 신고되면, 셰답공무원들이 옷을 분류하고 빨래 유통원들이 출동한 다. 25
column_1 냄새제거, 등잔 밑이 어둡다 많은 고객님들이 문의해주신 질문중에 유독 셰답동에서 한 빨래가 향이 독 보적인 이유가 궁금하다이다. 그건 당연하다. 우리 셰답동의 세답소들은 거의 대부분 시중에 파는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그 세제와 섬유유연제의 대체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부분의 셰답 소 사장들은 아마 심기가 불편해질 것이다. 특유의 향은 그 셰답소의 개성 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개성을 잃으려고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마시라. 그 향들의 정확한 배합율 대신, 집에서도 충분 히 향을 낼 수 있는 간단한 비법을 공개하겠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게 빨래에서 자꾸 냄새가 =나는 이유는 좋은 향기를 쓰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매우 틀린 말이다. 사실 좋은 향기가 나는 비법은 나쁜 냄새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다. 일반인들이 빨래할 때 별 생각 없이 하는 부분 이 바로 수질이다. 좋은 물을 사용한 빨래는 좋은 향기가 날 수 밖에 없다. 극단적인 예로 똥물에서 빨래를 하는 것과 일급수에서 빨래를 하는 것의 차이는 보나마나 뻔한 것이 아닌가.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 요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셰답동 사람들은 같은 서울의 수도를 쓰긴 하지 만 수질에 매우 예민해서 물의 냄새가 바뀌었다고 서울시청에서 시위를 한 적도 있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좋은 물을 쓰는 방법이 있느냐. 당연히 있다. 우선 집 근처에서 돌을 주워온다. 이때 돌을 주워올 때 주의 할 점은 쉽게 깨지 지 않고 단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래써야니깐. 또 주우러 가기 싫을 테 니! 그리고 세탁기에서 물이 나오는 동안 옷들 위에 깨끗하게 씻은 돌을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날은 비교를 위해 섬유유연제를 잠시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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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둬라. 더 확실하게 물 냄새를 비교하고 싶다면 세제도 쓰지 말것. 향기가 바뀐 것은 직접 실험해보면 알 것이니 더는 말하지 않겠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건조시간이다. 건조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도 안되 고 너무 짧아도 안된다. 너무 짧으면 세균이 번식하고 너무 길면 옷감의 향기들이 날아가 버린다. 공들인 빨래를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 별거 아닌게 사실 제일 중요하다는 건 삶의 진리이기도 하다. 빨래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우리 조상들은 100년 간 가장 좋은 빨래에 대해 연구해오신 분들이다. 그 분들은 각각의 개성이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지킨 것이 바로 저 두 가지이 다. 질 좋은 빨래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장 물을 바꾸고 말리는 데 좀더 공을 들여라. 마트에서 더 비싼 섬유유연제, 세제를 사는 것은 밑 빠진 항 아리에 물 붓는 격일 뿐이다. 오깨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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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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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에나 그 도시의 질감이 있다. 도시의 질감은 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셰답동의 보이지 않는 질감. 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것들. 셰답 동은 같은 서울이라도 뭔가 다른 공기와 물이 흘러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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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빨래는 예술이다 셰답동이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빨래 명당을 고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 이었을까. 바로 주민들의 남다른 예술철학 덕분이 다. 셰답동 주민들은 옛날부터 예술을 빨래에 대입시키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 고 있었다. 미(美)를 생산하기 위한 창작활동 수단 으로 빨래를 이용한 인류는 일제시대 셰답촌 조선인들이 최초였을 것이다. 그 당시 셰답촌 셰답장이들은 그들의 영혼과, 청계천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 었을 때, 비로소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 닌 옷감으로 재탄생될 수 있다고 믿었 다고 한다. 그러한 장인정신이 세월이 흘러 빨래 는 인간 노동의 숭고함과 창조의 미학 이 깃든 행위로 칭송받게 되었고 오늘 날 셰답동의 빨래장이들은 아티스트로 서 대우를 받을 만큼 이 동네에서는 빨 래가 곧 하나의 행위예술이다. 그래서 셰답동에서는 빨래장이들의 모 습을 마음껏 지켜보고 사진을 찍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 술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니.
30 질감
셰답 빨래제 당시 옛 빨래 코스프레를 하는 여인들. (위) 옛 어머니들이 모여 빨래를 하던 빨랫돌무리. (아래)
예술 31
종교 셰답동은 청계천을 사이에 끼고 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해서 세답지구가 발 달을 했고, 남쪽으로는 명동으로 알려 져 있는, 패션거리가 자리잡고 있다. 청계천변에는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 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을 청계천 을 복구할 때, 청계신을 모시기 위한 성 소로써 꾸며진 것이다. 사실 서울 어디 에도 셰답동 만큼 독자적인 종교는 없 을 것이다. 사실 이것을 종교라고 하는 것은 살짝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 왜 냐하면 그들에겐 단순히 신앙심을 바탕 으로 한 정신적 지주 역할 만을 얘기하 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 슨 다른 동네엔 없는 셰답동만의 특별 한 종교는, 오랜 세월 실제로 셰답동의 삶을 지탱해온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 다. 그 존재란 바로, 청계천. 다른 지역 사람이 보기엔 그저 입지조건이 훌륭 한 물줄기이고, 그 유명한 ‘셰답의 기 적’을 일궈낸 필수적인 요건이었던 것 정도만 알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셰답 동 사람들에겐 가히 조물주와 같이 여 겨지고 있을 정도로 신성하고 절대적인 셰답 기도길. 사람들은 벽에 머리를 마주대고 청계 천의 신에게 기도 드리는 풍습이 있다.
존재가 바로 이 청계천이다. 청계천에 서부터 셰답동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지 금까지 이 동네의 생명수와 같은 역할
32 질감
을 해 온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북악산 과 인왕산, 남산의 물들이 모여 동쪽으 로 흐른다는 이유로 한강과의 합의 이 치를 따져 귀한 물로 여겨졌고, 한양이 들어서게 된 주요한 배경 중에 하나였 다. 한양이 생겨난 이후부터 청계천은 쭉 ‘돈’이 모이는 자리로서, 조선의 살림을 책임진 물이었다고 해도 과하 지 않다. 일제시대 일본인들까지 이를 고려해 청계천 아래, 남촌에 자리를 잡 기 시작했고 서쪽으로 상업의 중심지인 혼마치(현 명동), 그들의 주된 거주지로 동쪽의 신마치(현 충무로)를 두었을 정 도이다. 일본인들이 한양에 진출하고, 자본을 풀기 시작해 조선인들 사이에 거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남촌으로 몰려들었지만 매 정한 일본인들은 무지막자하게 조선인 들의 집을 허물고 저항하는 자들은 형 무소로 보내 내쫓아버렸다. 조선인들은 점점 더 쫓겨 일본인들의 영역의 경계 인 청계천까지 내몰렸고 일본인들이 청 계천에 나타나기만 하면 필사적으로 청 계천다리 밑에 숨는 스킬을 발휘한 덕
청계천 기도길의 대표식물, 버드나무
에 간신히 더 이상의 내쫓김은 막을 수 있었다. 이제 청계천 다리 밑의 조선인
종교 33
들은 하루하루 살기 위한 투쟁을 해야 만 했다. 남촌 일본인들에게 집도 빼앗 기고 사랑하는 가족도 잃었다. 삶의 희 망을 잃은 이들이 유일하게 가진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청계천 의 물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이 들의 절망과 마지막 삶의 의지가 청계 천의 물줄기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고 청 계천 다리 밑의 조선인들은 그 물을 바 라보며 다시 하루를 시작하였다. 매일 청계천 물로 몸을 씻고 빨래를 하고 청 계천 물가에 자라는 나무들을 땔감으로 쓴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음식을 구하 지 못한 날에는 청계천 가장 윗물을 떠 다가 먼저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어느새 청계천 물에 자 신들의 간절한 소원들도 띄우기 시작한 다. 이들의 염원이 드디어 통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들이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 해 이들에게 제 2의 청계천을 만들어 준 것에서부터이다. 일본인들은 청계천 조선인들이 생계활동을 위해 남촌에 내 려오는 걸 방지하려고 그들에게 혼마 치의 어마어마한 빨랫감들을 일거리로 청계천 기도길의 대표식물, 연보라 들국화
주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조선인들 이 물가에 길게 앉아서 빨래하는 모습
34 질감
은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장관을 이루 었다. 누구하나 더 많은 빨랫감을 가지 려고 싸우지 않았으며, 모든 걸 청계천 에 감사하며 청계천이 가르쳐준 ‘더 불어 삶’을 실천한 덕분이었다. 이 때 문에 청계천 조선인들 모두가 살림이 넉넉해지기 시작했고, 이들에게 청계천 은 더욱 각별한 존재가 되었다. 일본인 들은 물론이고 조선인들마저 외면한 이 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삶 을 일으킨 청계천은 청계천조선인들에 게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고 그들은 자 식들에게도 청계천이 자신들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고 항상 청계천에 감사하며 살 것을 가르 쳤다. 그 가르침을 여전히 되새기며 살 아가고 있는 후손들이 셰답동 사람들이 다. 셰답동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아 버지, 어머니의 한이 서려있는 청계천 을 떠나지 않고 가업을 이으며 살아갔 다. 전쟁이 끝나 일본인들이 떠난 지 오 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원래 청계천은 여전히 땅 밑에 묻혀져 있음에 셰답동 주민들이 서울시에 대대적으로 청원하 자 서울시장은 ‘셰답의 기적’에 대 한 보답으로 원래 청계천을 복구시켜주 게 된다. 그리고 청계천의 옛 물줄기가
청계천 기도길의 대표동물, 백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날, 셰답동
종교 35
주민들은 공사현장으로 모두 자기 조 상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하염없이 눈 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들에겐 오랜 세 월 기다려온 마음의 고향을 찾은 순간 이었던 것이다. 청계천이 완전히 옛자 리를 되찾고 난 후 서울시민들은 도심 속 명소로만 청계천을 알고 휴식을 위 해 찾아오지만, 셰답동 주민들만이 그 옛날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래왔던 것처 럼, 청계천을 신성시 하고 자기 조상들 을 살린 것처럼 자신들도 지켜줄 것이 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청계천에 자 연물은 모두 청계천의 물이 키워낸 것 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로 장난삼 아 그것들을 건드리거나 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물에 녹는 종이에 적어 띄울 때에만 청계천 물가 의 식물들을 뽑아 종이에 꼽아 띄운다. 그러니 만약 청계천에서 물가에 꽃을 띄우거나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셰답동 주민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36 질감
꽁뒤와 아무개가 직접 셰답동 주민 들처럼 벽에 기도를 드려본다.
천변을 따라 걷다보면 벽에 머리를 맞대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종 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청계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셰답동 사람들만의 방식이다. 또 소원지를 접어서 버드나무잎이 나, 들국화를 꽂아 물에 띄우는 사 람들도 볼수가 있다. 자칫 생태계 오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종이는 수용성 종이이다. 청계천변을 걷다보면 연보라색 들 국화와 버드나무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걷다보면 흔한 오 리말고 커다한 백로가 있는것을 가 끔 볼 수 있다. 셰답동 사람들은 버 드나무, 들국화 그리고 백로가 청 계신의 정령이 생명으로 나타나 있 다고 믿는다. 이들은 청계천 종교의 상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원지 에 상징물을 꽂거나 그려넣곤 한다.
종교 37
셰답동 건축
찌그러진 가로등 셰답동의 가로등은 60,70년대 밤낮없 이 일하는 셰답동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인프라였다. 어두운 밤에도 다음날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빨래 유 통원들과 공구 상가 사람들 때문에 셰 답동 골목은 서울의 어느 골목보다도 ‘밝은’길이었다. 하지만 빨래 유통 원들의 교통수단이 트럭이나 오토바이 로 대체되고, 강남권 개발과 용산전자 상가의 부상으로 철공소들이 점점 문을 닫자 가로등의 불빛도 같이 꺼지고 말 았다. 찌그러지고 먼지가 낀 채로, 이젠 아무도 이들을 켜주지 않지만, 누구보 다 열심히 하루를 마치고 시작하는 사 람들을 밝혀준 삶의 등불이었던 찬란한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듯 옛모습 그대 로 시간이 멈춰있다.
38 질감
작은 공간 매니아들의 천국 셰답동 사람들은 유난히 초소형 공간 을 좋아한다. 계단 밑에 굳이 작은 공 간을 터서 조명 가게를 차려놓는가 하 면, 한 평도 채 안될 정도로 작은 세탁 소를 지어놓고 사람들이 혹시 집인 줄 모르고 함부로 건드릴 까봐 ‘기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까지 써 붙여 놓 았다. 넓게 탁 트인 옥상 공간이 있지만 또 굳이, 좁고 어두운 흡연실을 따로 만 들어서 그 안에서 위안을 찾는다. 셰답 동이 옛날처럼 땅값이 비싼 동네가 아 닌데도 이런 작은 공간에 집착하는 광 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심지어 미 친 거 아닌가 싶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셰답동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이 동네에서 좁은 공간도 마다 하지 않고 귀한 터를 잡았던 청계천 조상들을 잊 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거지가 된 수많은 조선인들이 청계천으로 모여 들었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엄청나게 좁은 땅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자식 들 또한 몸을 겨우 눕힐 정도의 공간에 서 나고 자랐고 이들은 전혀 불편하다 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가 청계 천의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풍조가 답습되어서 오늘날 셰답동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서
건축 39
만 진정한 평화조차 찾을 수 있다고 믿 는 듯 하다. 그러니 세답동에 가서 초소 형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게된 다면 자랑스러운 청계천 조선인의 후손 이라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40 질감
건천로 제2청계천은 일제시대 군수물자의 이
장 번화하는 길목에 ‘물이 말라버린
송을 위해 청계천이 복개된 후 청계천
길’이라는 뜻에 건천로라고 새긴 추
조선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이자, 대
모비를 세워놓았다.
규모 빨래터 발생지로, 조선인들의 애 환이 서려있는 장소이다. 하지만 60년 대 후반 제 2청계천에 근대화의 바람 이 불고, 빨래터에도 기계세탁이 들어 서게 되고 철공소, 공구상가 등 각종 기 계산업들이 들어설 자리가 필요해졌다. 제 2청계천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과 자신들의 생활영역을 섞이지 않게 하 려고 만들어낸 장치였지만, 일본인들이 떠나고 사실상 제 2청계천은 빨래터에 물 공급원으로서의 역할만이 남았을 뿐 이었다. 하지만 점점 근대적인 세탁방 식이 도입되자 이마저도 필요성이 떨어 지고 서울시에서는 그 옛날 일본인들이 원래 청계천을 복개했던 것처럼, 산업 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제2청계천마저 복개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청 계천 조선인들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마 지막 터를 없애는 것에 격분하였고 서 울시에 대대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제 2청계천마저 무참히 복개 되었고 셰답동 주민들에겐 또다시 보금 자리를 잃은 것만 같은 기분에 치욕스 러운 역사로 기억된다. 셰답동 주민들 은 제 2청계천이 있던 자리, 오늘날 가
건축 41
Column_2 스타킹, 아직도 사니?! 셰답동에는 집에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섬유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모든 종류의 섬유를 가장 완벽히 세탁할 수 있는 기술 자들이 초밀집해 있는 곳이 셰답동이니 말이다. 이러한 까다로운 섬유들중 에 단연 으뜸이 스타킹재료이다. 아주 섬세하게 집에서 조금씩 문질러 빨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실패하고 셰답동을 찾는다. 옷 꽤나 입는 사람들 에게 한번 입은 스타킹은 빨자니 찢어질까 고민이고, 안빨지니 발 찌린내 를 참아즐 수 없다. 그러니 언제나 해결책은 셰답동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나마 셰답동에서 해결이 가능하단 걸 아는 사람도 스타킹 하나 빨자고 셰 답동에 우편을 부치느니 하나 사는 게 낫다고 느낄 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 을 해보라. 그렇게 해서 평생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스타킹들을 사야만 하는 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섬유들이 낭비되고 있는지! 그래서 나는 쓰레기를 줄이자는 취지 하에 셰답동 스타킹빨래 장인들만 안 다는 그 비법을 살짝 전수하려고 한다. 스타킹빨래 장인들이 너무나 많은 업무량을 줄이고자 발벗고 나서서 집에서도 간단히 실천할 수 있는 팁들을 공개했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빨래는 무조건 비벼야 때가 빠진다는 것 이다. 매우매우 틀린 말.. 스타킹같이 얇은 면 소재는 사실 간단한 거품세 척만으로도 충분히 청결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거품세척 하는 방법에서 약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우선 주둥이가 넓은 우유병이나 커피병 등을 이용해 미지근한 물을 반쯤 채운다. 그 병에 가루비누를 적당량 풀어주고, 스타킹을 넣고 마구 흔들어 준 후, 행구면 끝! 물론 병뚜껑은 닫고 흔드는 거 잊지 말 것. 마지막으로 행구는 물에 식초한방울을 넣구 행궈주면 냄새 또한 완벽히 제거할 수 있 다. 나순백
42 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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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기억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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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답동 사람들의 기억과 일상. 셰답동을 대표하는 나씨가문이 살아가는 모습과 일 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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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씨 가문 족보
나전설
나세수
나빨래
나정갈 나세정
나샛탁
백 정 백 색 백세주 백세제 나발래 나세닥
백청순
백청명
나 물
46 기억과일상
나세답
나정리
오표백 오개긋
오순백
사탁기
오하얀 오 백
나 결
오팔래
나솃탁
나 청
오청소
나진수
나씨가문 47
나씨가문 저택(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냥 작은 집.). 우리 일상의 단면이다.
48 기억과일상
우리 집구경
우선 우리 집을 소개하겠다. 우리집을 소개하는 것은 우리집이 가장일 반적인 셰답동 가옥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셰답동의 주택구조를 대신 설명하겠다. 과거 서울시가 전쟁터였고, 변변한 사회 기반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 부터, 우리들은 군인들의 빨래를 도 맡아가면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세탁소들이 강가에 붙 어있곤 했다. 7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집 즉, 셰답제일세탁소 는 셰답동의 가장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형식의 가옥이라고 할 수 있 다. 셰답동 집들은 보통 가게와 작업실과 사는 집이 한꺼번에 붙어있 다. 1층에는 가게가 있고, 지하실은 물세탁작업실로 사용하며, 옥상은 건조공간으로 사용한다. 수도시설이 정비되지 않았을 시절에는 물가에 직접나가서 빨래를 했었다. 조상님들은 더 효율적인 빨래를 위해 지하 실에 손바닥만한 구멍을 뚫어 수동 파이프로 물을 길어 올렸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셰답을 하려면 집이 물가에 붙어있어야했기 때문에 서로서로 양보하다보니 집들이 납작해졌다. 그리고 수도의 공급은 지 금까지 공간의 제한에 억눌려왔던 셰답사람들의 욕구를 폭발시켜주는 계기가 되어, 셰답사업지구가 팽창하는 시기가 되었다.
나씨가문 49
지하 1층 평면도 GL -1000mm
50 기억과일상
지하1층 지하1층은 물세탁작업실로 주로 사용된다. 대형 드럼세탁기는 S전자사 에 의뢰해 특별주문 제작한, 세답동에만 보급되는 세탁기다. 섬유의 종류 에 따라 다른 움직임을 취해준다. S사의 버블샷도 아이디어 협력을 통해 개발한 발명품이다. S전사사의 세탁기관련 부서의 요직에는 세답동 출신 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의 후원아래 요긴한 발명품을 많이 만 들어 내었고, 특허신청 빈도도 높은 대한민국의 인재들이다. ※셰답동 젊은이들은 어릴적부터 자주셰답에 대한 동네교육을 잘 받아서, 우리의 기술을 보존해야한다는 강 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셰답 고유기술 R&D와 특허보존 및 개발을 위해 몸을 사리는, 멋진 청년들이다.
각설하고, 지하실에서는 각종 물세답을 하며, 섬유에 섬세한 손길을 전한 다. 지하실 한견에는 약품제조실이 있어 그곳에서 실험을 통해 우리집만 의 세제를 개발하기도 한다. 전통이있는 셰답동 세답집이라면 조상님으 로부터 물려받은 세제 노하우들이 하나씩은 꼭 있다. 셰답인이라면, 빨래 의 핵심포인트인 세제연구개발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우리들은 그렇게 세제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판매를 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그런의미에 서 우리아들(나세닥)은 H대학교 화학공학과를 갔고, 둘째아들(나발래)은 H대학교 생활과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나는 H대학 생활과학과 겸임교 수로 출강중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집을 관통하는 코어엘리베이터가 있다. 보통 물빨래는 지하실에서하고, 건조실은 꼭대기 층에 있기 때문에 매번 계단을 오르내 리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는 집을 리모델링할때 한구석을 통째로 뚫어서 도르레를 설치해 옷감을 위아래로 나르곤 했다. 나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도르레를 떼어내고 현대식으로 미니엘리베이터를 설 치하셨다.
나씨가문 51
지상 1층 평면도 GL +2000mm
52 기억과일상
지상 1층 1층은 손님들을 맞는 공간이 있다.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은 그리 클 필 요가 없다. 손님이 앉아있을 의자와, 카운터, 그리고 판매하는 세제 진열 대가 필요한 정도다. 세답이 완성된 옷감들은 맞이방과 구분되어있는 안 쪽방에 진열되어있다. 건조가 끝나면 옷감들은 이 방에 모여 다림질을 한 다. 다림질을하고 비닐커버를 씌우면 비로소 완성이 되는것이다. 이곳에 옷을 정렬해 둔다. 1층 가게 입구에는 분홍색 세라믹 돼지 상을 걸어둔 다. 돼지는 가게의 번영을 상징하기 때문에 세답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돼지를 종종 걸어두곤 한다. 하지만 우리집 돼지는 특별하다. 일년에 1번 있는 셰답동 축제인 셰답빨래제 빨래대회에서 선보이는 기술이 최고인 5 인에게는 특별한 돼지 상이 주어진다. 이 돼지가 걸려있는 집은 빨래잘하 기로 소문난 셰답동에서도 으뜸가는 가게라고 할 수 있다. R&D가 철저 한 가게 인것이다. 우리집은 그런 돼지 상을 걸고 있다. 이렇게 1년에 5 개의 가게들이 돼지상을 진열해 두고 있다. 돼지 상이 걸린만큼, 더 섬세 하고, 더 고급스러운, 인센티브가 많이 걸려있는 작업을 의뢰받는다.
나씨가문 53
지상 2층 평면도 GL +5000mm
54 기억과일상
지상 2층 2층은 말 그대로 우리 생활공간이다. 비좁지만 나름대로 부엌과 3개의 침실이 있다. 셰답동은 사람들도 한국인이기에 보통사람들과 같은 음식 을 먹는다. 아이들이 더 많은 집은 3층의 건조실에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청계천가 에 면해있는 전통주택들은 협소한 편이라, 집들이 위로 증축된 형태를 많 이 관찰 할 수 있다. 우리 아버지 같은경우는 집을 물려주시고 다른집으 로 이사가셨다. 더 이상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는 신물난다 하시며...
※우리동네사람들이 먹는 특별한 음식이 있다.
-양푼이 오니기리 과거 셰답동 거지들이 겨우 구한 찬밥덩이를 소금과 간장발라 불에 구워먹었 다는 그 양푼이 오니기리. 귀찮을 때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꼬치음식 셰답 패션거리쪽에는 과거부터 꼬치를 들고다녀야 진정한 패션을 완성할 수 있었다. 축제가 되면(셰답빨래제), 사람들이 꼬치에 끼울 음식 한 두가지를 들 고온다. 그러면 그것을 뷔페식으로 하나씩 개인 꼬치에 끼워 불판에 가서 함 께 익히며 담소를 나눈다.
나씨가문 55
지상 3층 평면도 GL +8000mm
56 기억과일상
지상 3층 3층은 건조공간이다. 지하실에서 물빨래를 하여 탈수 된 옷감을 건조시 키는 과정이다. 섬유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건조법을 요구한 다. 건조는 빨래의 완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섬세한 손길이 필요 하다. 잘못 말렸다가는, 섬유가 잘못된 건조수축을 하기 때문에, 옷을 순 식간에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건조실에는 아버지와 내가 발명한 여 러가지 건조용품들이 있고, 햇볕이 드는 한 켠에 옷들이 걸려 있다. 과거 에는 옷들을 널 때 지붕위에 행거를 달아서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셰답 동을 멀리서 바라보면, 도심에 구름 하나가 살포시 앉은 모양이었다. 하 지만 지금은 공해로 인해, 열심히 한 빨래 위에 다시 먼지가 앉으므로 외 부건조는 잘 하지 않는다. 비좁은 우리집에서 가장 넓고 볕이 많이 드는 공간이 건조실이다. 층고가 높은쪽에 바닥판을 하나 더 달아서 휴식공간을 하나 더 만들기도 했다. 주로 건조과정을 기다리면서, 차를 마시거나, 독서를 한다. 집집마다 널려있는게 건조대와 옷걸이이다. 나는 어릴적, 아버지 몰래 건 조대 쇠파이프를 들고 나와,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했었다. 옷걸이는 잘 구부려 무기를 만들기도 했고, 친구들과 훔쳐온 음식을 꽂아 먹는 꼬챙이 로 쓰기도 했다.
나씨가문 57
셰답동 사람들 셰답동엔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는지 알아보자. 독자적인 역사만큼 독특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셰답동이다. 다른 동네에선 볼 수 없는, 셰답동의 일상을 이루 는 특별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1 세답장이들 빨래인들은 세탁의 장인이다. 1950년대에는 천변에 둘러 앉아 빨랫돌 위에 빨랫 방망이를 가지고 옷감을 빠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전쟁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 은 만큼 물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독자적으로 우유로부터 비누를 추출해 내 는 법을 개발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옷을 빠는 여러 방법을 연구했다. 빨래인들은 그렇게 모피, 면, 모, 등 섬세한 섬유를 세탁하는 세탁전문가게를 대물림 받아 운영
58 기억과일상
한다. 그 중 일부 자기들만의 노하우를 대중화 시킨 세탁업계의 부호들도 있다. 가 령 구린토피아는 청계제일세탁소의 소장(현재 셰답세탁사업회 회장)의 할아버지가 사업을 키워내어, 현대의 인스턴트 개념에 알맞게 쉬운 빨래를 도입한 것이다. 또 한 손수 비누를 만들고, 향을 내기 좋아했던 사람들은 수제비누, 섬유탈취제만을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연구실을 세탁소 아래에 차린 사람들도 더러있다. 그렇게 독 일의 유명 자본가에게 판권을 넘긴 브랜드가 PoRSIL 이다.
2 의류사업가들 일제시대, 혼마치, 지금의 명동에서 패션붐을 처음 일으켰다. 일제강점기 수뇌부 일본인 공무원들, 사업가들, 친일파 등 당시 부를 누렸던 사람들의 패션의 중심지 가 명동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쑥대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동은 다시금 의류 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세계, 롯데백화점을 필두로 최신 유행의 옷들이 진열된다. 의류사업가들은 동대문에서 생산되는 거대한 스펙트럼의 의류들을 선별하는 과정
셰답동 사람들 59
을 거친다. 이 사람들은 이 과정을 큐레이팅이라고 부른다. 한 달 뒤의 패션을 내 다봄은 물론, 10년 뒤의 패션도 예측할 수 있는 안목의 큐레이팅을 통해 백화점이 채워지고, 명동 가게들이 채워진다.
2 패션피플들 셰답동에는 독자적인 패션을 추구하는 패션피플들이 있다. 멋진 옷을 입은사람들 을 보려면, 흔히들 압구정이나, 동대문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압구정이 젊은이들 사이의 최신 유행을 엿볼 수 있다면, 동대문은 조금 더 실험적인 스타일의 사람들 을 만나볼 수 있다. 셰답동의 패션피플들은 하이패션의 극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다. 셰답동의 패션피플에겐 무언가가 있다. 이들은 옷감을 보는 남다른 안목과 청 결을 향한 극도의 집착으로 광복 후 60년 세월 동안 자기들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만든다. 청계천에 처음으로 세답사업이 이루어진 이래로 셰답동 사람들의 깨끗한 옷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곧 삶에 대한 강렬한 투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환 60 기억과일상
경 속에서 자란 셰답동의 7080 세대들이 최초로 시도한 것이 바로 백백패션. 다른 동네에선 청청패션이라고 해서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었다면 셰답동 사람들은 이 것을 응용해서 깨끗함의 상징적인 색인 하얀색으로 백백패션을 만들어냈다. 하얀 색 바지에 하연셔츠, 하얀자켓이 셰답동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고패션이다. 일주일 에 한번씩 표백을 해야 때가 타지 않고 매일 다림질은 기본이다. 집에 있는 다리미 의 종류에 따라 옷의 각의 달라지기 때문에 백백패션 이야말로 7080세대 중에 좀 잘 나가는 집안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좋은 수단이었다. 때문에 7080년대 셰답동 에서는 매일매일 스팀다림질 때문에 연기가 가실 일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셰 답동에서는 흰색 옷을 다른 동네보다 유난히 즐겨입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들이 바로 셰답동을 대표하는 패피들이라 보면 된다. 흰색 옷은 여전히 다루기 까 다롭기 때문에 셰답동에서 부와 성실함의 표상이므로 때 한점 묻지 않은 각 잡힌 흰색 옷을 입은 사람과는 무슨 일이든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갓 빨은, 각진 흰 옷을 입은 거리의 남자.
셰답동 사람들 61
3 셰답공무원들
세답동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하루의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셰답동 지구에
세탁업의 시작을 알려주는 소중한 사람
는 패션상가들과 셰답지구가 공존해 왔
들이다.
다. 당연히 옷감들의 유통네트워크가
. 명동우체국에 중앙빨래유통국이 편입
형성되게 되었다.
되고 쌍둥이 빌딩이 건설되었다. 옷감
옷감유통네트워크는 다음과 같다.
이 빨래국에 신고되면, 셰답공무원들이
의류사업가들이 엄격한 큐레이팅을 통
옷을 분류하고 빨래 유통원들이 출동한
해 동대문에서 옷을 고른다. 선별된 옷
다.
을 동대문에서 대량으로 생산해 낸다. 생산된 옷은 셰답지구로 넘어와 세탁이 되고, 의류상가로 넘어가게 된다. 즉 옷 가게로 들어오기 전에는 항상 셰답동을 거친다고 생각하면 된다. 셰답동은 패 션상가에서 손님에 의해 더럽혀진 옷들 을 세탁하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역할 외에도 수도권의 모든 대량유통 옷감 과, 고급옷감을 세탁하는 곳이 셰답동 이다. 이런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교통이 정리될 필요성을 느낀 의류사업가들과 셰답장인들은 우체국과 같은 중앙빨래 유통국이라는 장치를 만들어 효율적으 로 관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셰답공무원들은 중앙빨래유통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빨랫감 배달 부들은 누구보다도 옷감을 안전하고 소 중하게 운반할 줄 아는 운송업자들이 다. 거리에 큰 차들이 들어서기 힘들어, 오토바이로도 대량의 옷감을 운반할 줄 아는 빨랫감 배달부들은, 아침 4시부터 62 기억과일상
수레배달부(위)-근거리 운반을 담당 오토바이배달부(아래)-중거리 운반을 담당. 서울시 중구 까지만
셰답동 사람들 63
5 셰답동 거리취침자들 셰답동엔 노숙인들이 많다. 모든 노숙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노숙인들 에는 북촌 명문가 출신의 자제들이 많이 있다. 노숙인들은 대부분 북촌 한옥 강제 매각의 희생양들, 역사의 전환기에 기존 기득권층의 몰락의 산물이다. 셰답은 북촌 에 면해 있고, 골목이 많고, 번화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몰락한 사대부들이 내려 오기에 안성 맞춤인 동네였다. 살아있는 역사/역사의 직계후손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이들이 바닥에서 생활하는 이유는,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야하며, 침대와 같은 사대 문물에 대한 거부의식 때문이다. 이들은 자존심이 매우강하며, 단지 거리취침 을 하는 사람들일 뿐, 동냥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거리를 집 삼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64 기억과일상
전 후
셰답동 사람들 65
Column_3 다림질을 할 때 왜 물을 뿌릴까? 우리는 다림질을 할 때 물을 뿌린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림질을 할 때 뜨 거운 다리미를 사용한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옷이 잘 안다려 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스팀을 내뿜으면서 다리는 다리미, 세탁소 다 리미는 초강력인것 같다. 누구보다 깔끔한 성격인 당신은 멋지게 각진 옷 을 입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런 당신을 위해 지금부터 문과생도 이 해할 수 있는 간단 명쾌한 '다림질 할 때 물뿌리는 이유'에 대해 설명 하겠 다. 대부분의 섬유는, 셀룰로오스나 폴리에스터로 구성되어있다.결정성이 높은 셀룰로오스와 PP의 고분자 사슬은 웬만큼 가열해도 구부러지기 어렵다.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섬유가 분해될 우려가 있다. 셀룰로오스나 폴리에스 터 고분자 섬유는 열에의한 유동적 변형이 크지 않은 분자들이다. 이때 이 분자들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물이다. 그렇게 물은 주름을 만든다. 가소화에 사용된 수분은 다릴 때 증발되는데, 물은 증발할 때 많은 열을 빼앗아 다려진 부분을 급속도로 냉각시킨다. 이 냉각에 의해 가소화 에 사용된 수분을 방출하고, 섬유는 다시 딱딱해지므로 생긴 주름이 빳빳 하게 유지된다. 즉 섬유는 온도와 습도에 의해 절묘하게 변화를 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숯불 다리미로 가족들의 옷을 다렸다. 분무기도 없 었던 당시 어머니들은 입술과 양 볼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입에 물을 머금 고 뿜었다. 그리고 숯불로 달궈진 팬으로 정성스럽게 다리셨던 겄이다. 당 시의 어머니들도 이미 유의 절묘한 변화를 알고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스팀
66 기억과일상
67
4장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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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답동 사람들의 즐거움을 이야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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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답빨래제 가족운동회 아침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회가 열 리고, 오후에는 어른들과 가족운동회가 셰답동에서는 일 년에 한번, 가을에 세 탁축제가 2일 동안 열린다. 사람들은 출신고등학교인 계성여자고등학교에 모여서 축제 및 대회를 연다. 셰답빨래 제는셰답세탁사업회에서 주관하는 것 이다.(現셰답세탁사업회 회장은 100년 간 빨래를 해온 뼈대 있는 청계제일세
열린다. 집집마다 음식을 만들어온다. 잡채, 만두, 주먹밥, 야채볶음, 소세지, 과일 등등을 긴 테이블에 쭉 늘어놓는 다. 셰답동 전통대로 기다란 꼬챙이에 먹고싶은 음식을 골라서 꽂아 넣어 먹 는다. 오후에는 집집마다 내놓은 상품 들로 경품추첨을 한다.
탁소 사장인 나다^^) 첫째날은 집집마 다 음식을 도맡아 해와서 나눠먹으며 가족운동회를 열고, 둘째 날에는 대회 의 핵심인 빨래대회가 열린다. 셰답세 탁사업회 청년들과 셰답부녀회가 회의 를 통해 프로그램을 짜고, 행사를 진행 한다.
축제 때 먹는 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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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대회 이 날은 외부인들도 참관할 수 있는 열 린 행사다. 제한시간을 걸어두고 미션 을 수행한다. 미션으로는 빨래 많이하 기, 기름, 김치, 초콜릿, 벤젠 등 지우기 어려운 것들을 지우는 미션 등이 있다. 외부참관인들은 주로 주부들인데, 미션 을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집안일의 한 수를 배워가기도 한다. 이 미션을 승리 한 빨래인 10명에게는 특별한 상품이
다함께 공용빨래를 하는 아낙들
주어진다. 바로 셰답빨래거리의 마스코 트인 빨래돼지를 그 다음 축제때까지 가게 앞에 둘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빨래돼지는 그 세탁소의 빨래 능 률 그리고 R&D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 는 효과적인 마크가 된다. 한 해동안의 장사가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 문에 빨래인들에게는 셰답빨래제에 자 존심을 건다.
빨래대회에서 주는 돼지상
축제 71
음식 구운양푼이 오니기리 북촌에 살던 사대부 조선인들이 비참한
다. 찬밥 오니기리를 굽게 되면 누룽지
몰락을 맞이한 후 청계천으로 이주했을
같이 고소한 식감 때문에 물리지 않고
때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은 음식을 담
오래오래 먹을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을 양푼과 옷 몇 벌 뿐이었다. 당장 먹
바로 구운 오니기리를 양푼에 넣어두면
고 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어
양푼이 음식의 온도를 오래 유지시켜주
쩔 수 없이 남촌에서 양푼을 들고 구
는 특성 때문에 매끼마다 굽지 않아도
걸을 다녀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조선
되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청계천 조
인들이 구걸하러 다니는 꼴도 보기 싫
선인들만의 식문화로서 구운 양푼이 오
어서 자기끼리 음식을 절대ㅈ 주지 말
니기리가 탄생한 것이다. 그 후로 구운
자는 법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양푼이 오니기리는 셰답동 사람들이 찬
집단이나 모두가 같은 생각일 수는 없
밥이 생길 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에 잠
는 법. 개중에 마음 여린 일본인들은 한
기며 자주 해먹는 간편 음식이 되었다.
때는 사대부까지 지냈던 이들이 구걸 을 하러 다니는 모습이 안됐다고 생각 해서 이들에게 조금씩 음식을 나눠주게 된다. 음식을 주는 일본인들은 그래도 조선인들보다는 먹는 음식이 차별되어 야 한다고 생각해서 좋고 맛있는 음식 이 아닌, 먹다 남은 찬밥으로 만든 오니 기리를 양푼에 담아주었다. 이들로서는 최선의 선행을 베풀었던 것이다. 조선 인들은 그래도 그것을 고맙게 여겨 찬 밥으로 만들어서 딱딱한 오니기리를 아 껴먹었다. 이들은 딱딱하게 굳은 오니 기리를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 법으로 오니기리를 불에 굽기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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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1 먹다남은 찬밥을 꺼낸다.
2 찬밥 속에 참치, 마요네즈 등 그날 섞 어 먹고 싶은 음식을 아무거나 넣는다.
3 밥을 둥그런 모양으로 빚은 뒤 김으 로 일부분을 감싼다.
4 김이 붙은 주먹밥에 양념간장을 겉에 얇게 발라준다
5 프라이팬 위에 버터를 두른 뒤, 주먹 밥을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양푼이 주먹밥
음식과 놀이 73
꼬챙이음식
셰답동 사람들은 꼬치음식을 잘 먹는
개성에 따라 입맛에 따라 꼬챙이 달린
다. 꼬치에 별에 별 음식을 다 끼워 먹
것은 제각각이다. 감자를 회오리모양으
는다. 이 꼬치음식은 빨래를 하며 먹는
로 썰어서 꽂기도 하고 오뎅을 주름지
음식이다. 빨래를 하다보면, 손은 세제
게 꽂는 사람, 과일, 아이스크림 등 다
와 잿물에 퉁퉁붓고, 물바다가 된 작업
양한 음식들을 꼬챙이에 껴서 들고 다
실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란 여간
니는 게 곧 자기 표현인 것이다. 꼬챙이
찝찝한것이 아니다. 그리고 찌개같은
에 낀 음식을 다 먹고 나서도 꼬챙이를
정식식사를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바로 버리지 않고 잠시 들고 다니는데,
일이다. 냄새가 베니까. 그래서 셰답동
이것이 음식이 아닌 꼬챙이가 진짜 목
사람들은 냄새가 심하지 않은 주 식사
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광경이기도 하다.
와 후식까지, 기다란 꼬치에 끼워서 작
다 먹은 꼬챙이를 들고 명동을 거니는
업실로 가져간다. 화학약품이 묻은 손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
이지만 끝부분만 잡고 후딱 배를 채울
날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면 되는 일이다.
셰답동에는 예전의 혼마치로 화려함의
여담이지만, 우리 아들은 고3때 남들
극치를 자랑한 상업의 중심지, 명동이
은 밥먹으러 나갈때, 꼬치를 먹으며 엉
있다. 한때 혼마치가 유행의 최첨단을
덩이 붙이고 공부해서 대학을 잘 갈 수
걸었던 동네였던 만큼 일제가 사라진
있었던거 같다.
이후 예전에는 비할 바 못되더라도 여 전히 사람들의 인식 속에 북적이는 혼 마치, 명동이 숨 쉬고 있다. 명동을 거 니는 사람들은 옛날의 혼마치를 거닐던 사람들이 그랬듯, 누구보다도 주목받고 싶고,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 한다. 그러한 수단으로 명동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꼬챙이. 사람들은 모두 한 손에 꼬챙이를 쥐고 걷고 있다.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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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챙이 음식을 먹는 사람
음식과 놀이 75
놀이 세탁기 문뚜껑열기놀이
주었고, 아이들 역시 이것에 대한 충격
청계천에서 손빨래를 하고, 어느덧 세
으로 놀이를 만들었는데, 바로 빙글빙
탁기가 들어오면서 세탁의 문화는 발전
글 돌다가 기왓장을 부수는 놀이다. 세
하기 시작했다. 세탁기는 위에서 빨래
탁기에 들어가 충격을 먹었을 막내의
를 넣는 방식에서, 수평방향으로 넣는
상황을 재현하고, 막내가 힘있게 뚜껑
드럼세탁기가 도입되었다.
을 열고 나왔을 모습을 상상하며 기린 놀이이다. 이것은 많은 버전으로 바뀌
다른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어
어, 빙글빙글 돌고 벽에 다각형그리기,
린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는데 적격으
원판에 점찍기 등으로 발전되었다.
로 생각되는 곳이 세탁기이다. 드럼세 탁기가 처음 나왔을 때, 셰답동에서도 처음으로 드럼세탁기를 들여온 집은 청계제일세탁소다. 그 집은 셰답동에서 도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만큼, 큰 집을 가진 셰답최고 부잣집이었다. 당 시 그 집에는 5살, 7살짜리 형제가 있 었는데, 친구들을 불러모아 숨바꼭질을 하는 중, 막내가 드럼세탁기에 기어들 어간 것. 그 드럼세탁기는 일반용이 아 닌 대용량 빨래용으로 일반 세탁기보다 입구반지름도 넓고 깊이도 깊었다. 막 내는 결국 발견되지 못하고, 일부 빨랫 감과 함께 돌아가다가 숨져 죽고 말았 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셰답동 사람들에 게 새로운 충격으로 안전의식을 제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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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1 벽에 과녁을 그린다.
2 깍두기를 가위바위보로 정하고 사회를 보게 한다..
3 4~5명의 술래가 출발선에 서서 분필을 들고 코끼리 코를 쥔다.
4 깍두기가 시작을 외치면 그자리에서 술래들이 코끼리코를 쥐고 제자리에서 20 바퀴를 돈다.(이때 옆에서 제대로 도는지 확인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다같이 회 전횟수를 센다.
5 먼저 돌고 가장 빨리 과녁에 분필로 정확하게 찍는사람이 우승자다.
6 꼴찌에게는 다른 술래들 집을 돌며 빨래를 널어주는 심부름을 한다.
음식과 놀이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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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놀이 79
Column_4 얼룩을 빼는 여러가지 방법 대수롭지 않게 얼룩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얼룩은 옷에 있 어 상처다. 얼룩은 잘못 다루면 옷을 영영 망치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얼룩을 지우려고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김칫국물을 없애려고 얼룩부분만 꼬집에서 비벼대기도 했을 것이고, 산성이 높은 식초를 뿌린적 도 있을것이다. 그것은 사람에 비유하면 잉크가 피부에 묻어서 살점을 파 낸 격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얼룩지우기에 왕도는 없다. 지금부터 셰답동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얼룩 빼는 방법 몇가지를 소개 해 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셰답동에서 수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개발 된 방법들이며, 외부에서는 고도의 과학상식과 주부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 람들만이 아는 방법들이다. 자주 물어보는 질문들이 있는데, 직업군별로 베스트 3를 꼽아 알려드리겠다.
CASE1
김장을 끝내고 김칫국물로 뒤덮힌 옷
당황하지 않고 스펀지에 탄산수와 소주를 1:3비율로 섞은 세정액에 계란 을 한개 깨트려 넣는다 그리고 30분 담가두었다가, 일반적인 세탁기 물빨 래를 한다. 이때 계란을 넣은 세정액에 소금을 살짝 뿌려주면 계란 비린내 를 상큼하게 잡을 수 있다.
CASE2 물감
인테리어 시공업자/미대생이 벽페인트 작업하며 묻은 아크릴류
아크릴 위에 비트를 뿌리고, 썩은 복숭아를 갈은 즙과 소주 2잔, 그리고 샴 푸 5번 누른 것을 넣어 함께 비벼준다. 비빌때는 주먹을 소라빵 모양으로 만든 뒤 중간마디 면을 맞대면서 문지른다. 혹시 거친섬유 속 페인트가 사 라지지 않았다면 썩은 복숭아 갈은 즙에 계란 노른자를 올려 비벼준 다음 이쑤시개로 구멍속을 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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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3 고깃집 사장님, 알바생 그리고 고기를 먹은 우리들의 웃통 기름을 빼려면 이 두가지를 기억해라. '기름으로 기름을 깨워라' + '계면활성' 옷을 중탕시켜 가열하여 40도 까지 올린다. 돼지 비계를 굽는다. 돼지 비 계를 집게로 집어 기름때 묻은 곳에 지긋이 눌러준다. 옷이 식기전에 반드 시 계면활성 세척제와 썩은 복숭아를 과육채로 넣어 비벼준다. 기름위에 기름을 더 묻히는 이유는, 기름은 식으면 미끈하게 굳은상태로 섬유위에 기절해 버린다. 기절한 기름을 깨우는 방법은 온도를 다시 높히고, 같은 성 질을 가진 유지를 바르면 그 부착력으로 인해 기름이 섬유 위에서 떨어지 게 된다. 썩은 복숭아는 섬유 속속에 있는 기름성분을 알칼리성으로 녹여 준다, 노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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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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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개된 제2청계천. 셰답동의 빨래역사는 제 2청계천에 묻혀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차가 달리는 도로로 변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셰답동 사람들 에게 이곳은 여전히 셰답장이들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제2청계천이다.
제2청계천 83
84 흔적
제2청계천 85
세탁기 안쪽에서 옷과 마찰을 일으키는 섬유 톱니바퀴.(위) 대형세탁기 동력장치(아래)
86 흔적
제2청계천 87
88 흔적
제2 청계천의 물길을 덮은 자리. 아래로 물이 지나가고 있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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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청계천이 끝나는 곳, 과거 미쓰코시 백화점.
90 흔적
column) 빨래건조에서 각의 중요성 각에 살고 각에 죽는 셰답동 패피들은 새하얀 옷에 날이 선 각을 잡아냈 을 때 희열을 느낀다. 나는 셰답동 패피들의 복고풍 창시자로서 비록 세탁 소에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작업복까지 흰색을 고집할 정도이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이 가장 많이 질문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다림질로 그렇 게 확실하게 라인을 잡을 수 있냐는 것이다. 사실 초심자가 하기엔 다림질 이란게 사실 굉장히 만만하지 않은 작업이다. 셰답동에서도 자식들에게 빨 래기술을 가르칠 때 다림질은 맨 마지막에 시킨다. 그만큼 다림질이야말로 장인의 정신과 손길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이다. 마치 화가가 붓의 강약에 온 정신을 집중하듯이 다림질장인은 한 시도 다리미에서 정신 을 분산시키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행여 셰답동 패피의 각을 따라해보 자고 다림질에 시간을 투자해봤자 갈길이 먼 것만 깨닫게 될 테니 맘을 접 어두자.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그런 각을 전혀 시늉도 못해보는 것은 아니다! 다림 질이 각의 완성이긴 하지만 일반인들이 대충 걸어 말리는 건조단계에서도 조금만 손을 거쳐도 충분히 각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건조할 때 각을 잡는 것은 세균이 번식하지 않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빨래 를 말릴 때 옷을 제대로 펴서 널어 놓지 않으면 옷이 접힌 부분에 제대로 햇빛이 닿지 않아 세균이 자리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옷 감에 세균이 번식하기 시작하면 옷색깔이 변질 될 수도 있고 피부가 예민 한 사람들은 바로 피부이상증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말리는 과정 에서 소홀하면 일상에 치명적일 수도 있다. 각도 살고 깨끗한 건조를 하기 위해 기본적이지만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바로 세답동 패피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는 항목들이다. 빨래와 빨래 사 이에 5cm 간격을 두고 건조하기. 이때 긴옷과 짧은옷, 두꺼운 옷과 얇은 옷을 순차적으로 걸어놓아야 옷끼리 더욱 접촉하지 않고 공평하게 햇빛을 나눠 갖는다. 티셔츠나 스커트는 앞뒤가 붙지 않도록 면적이 넓은 옷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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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널고 소재가 두툼한 바지나 청바지는 빨래 집게나 하의용 옷걸이로 바 지의 허리부분을 벌려 통풍이 잘 되도록 해서 건조시킨다. 이때 후에 다 림질을 안해도 되는 꿀팁은 바로 '빨래집게'에 있다. 각을 잡고 싶은 부분에 빨래 집게를 집어 놓는다. 물론 원하는 각 대로 잡아 주어야 겠지. 비록 다 림질을 할 때 만큼 끊어지지 않는 선을 잡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집게로 잡아준 부위는 나중에 빨래를 갤때 확실하게 선을 이어 줄 수 있으니까 직 접 시도해보면 꽤나 쓸모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송결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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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답동 출간일 2014년 12월 15일 지은이 고은지, 노소정 출판사 여기저기 주 소 서울시 성동구 성덕정 3길 10-1 herethere.kr ⓒ 고은지, 노소정 2014 본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