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수동 코끼리의 코와 꼬리
여기저기 출판사
방방곳곳 프로젝트
여기저기 출판사는 서울에 곳곳에 숨어 있는 10개의 동네를 선정했다. 신중을 기울인 끝에 선별된 이들 동네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와 오래된 역사를 가진 장소를 한데 어우르고자 하였다. 때로는 엉뚱하고, 고급스럽거나, 소박하기도 하지만 이 안내 책자에 등장하는 다양 한 장소들은 늘 흥미 진진하며, 무엇보다도 그 도시만의 얼과 혼을 담고 있는 곳이다. 빠르 게 변화하는 도시의 주기를 감안했을 때, 취재가 진행되는 시점과 안내책자가 출판되는 시 점 사이에 기존에 소개된 장소가 문을 닫기도 하고, 새로운 장소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미 리 안내하는 바이다. 이러한 변동 사항들은 독자들이 스스로 고쳐 나가면서 책자에 반영하 면 될 것이다.
지은이 / 최성수(23)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재학. 책을 쓸 당 시엔 휴학을 하고 여행을 다니며 인생 을 즐기고 있었다.
지은이 / 정환웅(22)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재학. 학군단 56기 예비 후보생 학교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며, 경험하고있다. 10년후에 나의 모습을 기대한다.
낙서된 동네. 사진과 글에서 낙서소리가 들린다. - 강민수 들려주진 않았지만,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H.Y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한국을 방문한 채로 환수동을 바라보았다. - 하은수 예술적인 사진과 함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서술방식으로 책의 재미를 더한다. - 이양승 페이지마다 작은 이미지들이 좋다. - J.Cutter 책 디자인이 다른 책보다도 다양하다. - 신택용 기존과는 다른 감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 –A.J - 김철수 사진의 구도와 글의 조합이 색다르다. - 공자
맹인모상 [盲人摸象] 불교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비롯된 말이다. 옛날 인도의 어떤 왕이 진리에 대해 말하다가 대신을 시켜 코끼리를 한 마리 몰고 오도 록 하였다. 그리고는 장님 여섯 명을 불러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 보고 각기 자기가 알고 있 는 코끼리에 대해 말해 보도록 하였다. 제일 먼저 코끼리의 이빨(상아)을 만진 장님이 말 하였다. “폐하 코끼리는 무같이 생긴 동물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코끼리의 귀를 만 졌던 장님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폐하. 코끼리는 곡식을 까불 때 사용하는 키같이 생 겼습니다.” 옆에서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장님이 나서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둘 다 틀 렸습니다. 제가 보기에 코끼리는 마치 커다란 절구공이같이 생긴 동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코끼리 등을 만진 이는 평상같이 생겼다고 우기고, 배를 만진 이 는 코끼리가 장독같이 생겼다고 주장하며, 꼬리를 만진 이는 다시 코끼리가 굵 은 밧줄같이 생겼다고 외치는 등 서로 다투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이에 왕은 그 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코끼리는 하나이거 늘, 저 여섯 장님은 제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코끼리로 알고 있으면서도 조 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 진리를 아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라.” 이 우화는, 진리를 알기 위하여는 바른 눈과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 하기 위한 것으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만 이해하고 고집하 려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남의 말에 쉽게 따르는 것도 좋 지 않지만, 자기 주장만을 계속 고집하는 행위도 옳지 않다는 교훈이다.
1. 나는 뉴욕의 브롱스 지역에서 태어났
나는 뉴욕의 브롱스에 위치한 Helena 고
다. 사실 이것도 맞는지는 모르겠다. 살
아원에서 자라왔다. 공립 고아원이다 보니
아오는 동안 나의 출생지에 대해서 깊
많은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항상 아이들에
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 이목이 집중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뉴욕의 브롱스 지역에서 태어났다
같이 뛰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몇몇 아이
고 한다. 그것도 내가 자라온 곳에서 가
들은 나를 괴롭히곤 했다. 이유를 나는 알
르쳐줘서 알게 된 것이다. 태어난 곳
지 못했다. 그냥 그때는 ‘내가 뭔가를 잘
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못 했나’ 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달 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뉴욕의 브롱스 지역에서 태어났다 고 기억하고 있다. 고아원에서 자란 나
나는 뉴욕의 브롱스에 위치한 공립고아원
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
에서 자라왔었다. 고아원에서 나는 모두의
다. 어릴 적에는 나의 세상이 다르다는 것
관심을 받고 자란 것으로 기억한다. 어릴 적
을 모르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에는 어
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언제나 나의 눈
린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같이 뛰어 놀면
앞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손이 있었
서 자라는 줄 알았지만, 5살에 나는 나
고, 그 손들은 항상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나
의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들은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손이었 다. 흑인 할머니의 손도 있었고, 히스패닉 의 대학생 누나의 손도 있었고, 백인 어린 아이의 손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고 따스한 손이 나를 이끌었고, 어느새 나 는 고아원을 나와 새로운 세상에 와 있었다
2. 나는 백인가정에서 자라왔다. 고아원을 벗어나서 나는 맨하튼으로 이사했 다. 나의 부모님은 남들이 상류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배우셨고 금 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또한, 언제나 나를 많이 배려해주셨다. 나는 좋은 환경의 백인 가정에서 자라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유명한 대학을 나 오셨고, 집안 또한 소위 명문 집안이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부족함 없이 자랐고, 입 양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랑은 받으면서 자라왔다. 그리고 나에게 개 인 가정교사도 붙여주셨다. 그 가정교사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3. 나는 시각을 사랑한 귀머거리다. 시각을 통 나는 귀머거리다. 부모님께서 나에게 하나
해서 세상을 바라본 나는, 모든 기억이 시각
하나 알려주셨지만, 바쁘실 때가 종종 있어
으로 이루어져있다. 어릴 적 나를 잡아주던
그때마다 나에게 개인가정교사가 생기곤 했
하얗고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녹은 것
다. 부모님과 가정교사는 나에게 내가 어떤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람들의 손이라든
상태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
가, 유년시절에 살던 맨하튼에, 대리석처럼
었던 걸로 기억한다. ‘소리’라는 것이 나
하얀 색으로 칠해져, 마치 그리스의 조각상
에겐 부재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에 움직일 것처럼 세세하게 새겨진 천의 결 처럼 세세한 조각들이 새겨진 벽과 14세기
나는 소리를 모르는 귀머거리다. 어머니도
중세시대의 예수와 12제자의 형태가 성서에
가정교사도 아버지도 항상 나에게 소리라는
나오는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것처럼 생생
걸 알려주시려고 노력하셨다. 하지만, 항상
하게 조각된 큰 나무 문이 현관문이었던 집
소리가 뭔지 몰랐다. 태어날 때부터 소리라
이라든가. 저녁이 질 무렵의 서쪽하늘의 붉
는 것을 몰랐던 나는 항상 시각과 후각이 세
은 해와 같은 진하고 강렬한 색을 띈 아버지
상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소리라는 개념
의 자동차라던가. 시각은 나에게 언제나 삶
은 나에겐 이론으로만 존재하고 상상으로만
의 전부였다.
존재하는 그런 존재였고, 마치 네스호에 산 다는 공룡과 같은 존재와 같았다.
나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귀머거리다. ‘ 소리’라는 개념이 없는 나에게는 시각이
나는 다른 사람들과 사는 세상이 다른 귀머
전부였다. 유년기를 벗어날 때쯤, 본 모든
거리다. 여타의 귀머거리들과 비슷한 상황
것들과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
이겠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학교를 가지 않
고, 그것은 나에게 끝없는 즐거움을 선사해
게 되었다. 물론 귀가 들리지 않아서다. 대
주었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 크나큰 존
신 집에서 학교에서 배울 것들을 배우기로
재가 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 예를 들어,
했고, 가정교사와 어머니에게 많은 것을 배
크리스마스 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36색 크
웠다. 산수, 그림, 단어를 좀 더 체계적으
레파스를 사다 주시면 그것의 기쁨이라던가
로 배우기 시작했지만, 나는 유독 시각적인
처음으로 개를 키우기 시작할 때의 그 순간
것에 굉장히 호기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림
과 같이 감정적인 것조차도 나는 그림을 통
책을 좋아한다거나 사진 혹은 그림 같은 것
해서 나를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나
에 말이다.
의 소통방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4. 나는 그림쟁이다. 내가 나 외의 사람들과 소
나는 그림을 통해 대화하는 그림쟁이다. 그
통을 하는 방법은 그림을 그려서 나의 감정
림을 통해 솔직한 이야기를 펼치면서 어느
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
새 나는 그림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표
다. 또한, 남들의 기분을 가장 잘 알아듣는
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림들을 모아서 이
방법도 글 혹은 그림이었다. 그림을 통해서
야기를 만들어 전달할 줄도 알게 되었다.(사
감정의 전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귀가
실 그것은 순전히 당시의 내 기준이었을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은, 나에게 단점이자 장
도 모른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모
점이 되어버렸다.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어
르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
서 그림으로 나의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지
억한다.) 그림교사와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만,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느낌을 표현하길 즐기
주었기 때문이다.
다 보니 어느덧 나의 소통 능력과, 그림에 대한 애착을 어머니께선 인정해주시고 좀더
나는 그림을 좋아한 그림쟁이다. 내가 배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라고 권유하셨고, 나
운 말은 그림이 전부였다. 물론 글자라는 것
는 그림을 전문으로 배우는 학교에 들어가
과 글이라는 것은 귀가 들리지 않더라도 배
게 되었다
울 수가 있기 때문에 배우긴 했지만, 나에 게 있어서,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 았다. 글은 솔직하지 못하고 마음 속 이야기 를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 림을 통해서 나는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이나 기억들을 표현하는 것에 점차 익숙해 지면서, 그림에 의미를 두기 시 작하고 점차 더 많이 배워가는 듯 하였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그 사람의 감정을 추측하고 느끼는 것을 좋아 했으며, 그런 감정의 교환을 즐거워하며 그 림을 배워왔다.
김명국 [달마도] 1643년경 / 국립중앙박물관
5. 전문학교를 다닌 지 어언 5년이 지나 15살
달마도에 나오는 달마대사는 매우 신비롭
이 되어서 동양화라는 것에 푹 빠지게 되었
게 느껴졌는데 가장 인상을 깊게 준 것은 바
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냥 흰 바탕에 검
로 달마대사의 표정이었다. 찡그려진 눈썹
정 묵으로 그려진 그림이 동양의 신비로움
과 눈 옆의 깊은 주름이 마치 큰 일을 닥쳤
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한 두 번 흰 종
을 때 근심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과도 같았
이에 검정색으로 따라 그려보았지만, 그 느
다.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표정을 보면 같
낌이 나지 않아서 그냥 감상을 하면서 넘겼
이 찡그려지면서 안 보게 되지만 그때의 나
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저런 동양화를 찾
는 동양화의 화선지 위의 검정 그림이 너무
아 보다가 딱 한번 나에게 너무 묘한 매력을
나 묘한 매력을 주었기 때문에 그 찡그려진
주면서 동시에 신선함을 주었던 그림이 바
표정을 보면서 한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 한국의 달마도 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더 알아보고 싶어서 찾기 시작하 였고, 한국이란 곳을 처음 알게 되었고, 찾 아보기 시작하였다.
뉴욕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6. 2014년 10월 현재 나는 뉴욕의 JHK공항에
이 책을 쓰는 이유는 사실 별 이유는 없다.
서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고
단지 내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여행방식
있다.. 사실 두려움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이 조금은 특별하다는 것이다. 나만의 소통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15살의 나이에 처음
방식인 그림으로 대화하는 방식을 여행방식
관심을 갖기 시작한 동양화에서 출발한 한
에 적용한 것이다. 즉, 한국인에게 내가 느
국에 대한 상상은 몇 년이 지난 지금 이 여
끼길 원하는 감정이나 이미지가 나타난다
행을 만들어주었다. 우연하게 접하게 된 한
고 여기는 그림을 보여주고 그 후에 떠오르
국에 대해서 많은 그림과 이야기를 찾아보
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
고 꿈을 꾸면서 기다려왔던 여행이 지금 시
는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작하고 있다. 내가 글로 접근하고 알게 되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될 수 있지만, 그 곳
것과 직접 여행을 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은
의 사람들이 느끼는 그대로를 가장 가깝게
많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상당히 들뜬 마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음으로 있다. 첫 외국 여행이 한국이기 때문
요번에 중점적으로 여행하는 곳은 한국에서
에 더욱 특별하기도 하다.
유명한 예술 동네로 유명하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되고 있다. 나의 첫 여행은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된다.
환수동의 오래된 동네의 돌담벼락. 전통적인 돌담벼락이다. 이곳에 옛날 환수동 사람들은 낙서를 하고 놀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아이들이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사이 다른 아이들이 낚서를 해서 자리를 뺏을까 염려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환수동 어느 골목길의 낙서. 어린아이가 낙서장으로 쓴것으로 보인다. 한자를 연습하려고 쓴 것인지 계산연습을 하려고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둘 다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이 있고 나서 외국인 화가가 환수동에 와서 작품활동을 하고, 이 지 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준 것은 이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대 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외국인 화가가 그림을 가르쳐 주었을 때, 환수동 주민 들은 돈이 먹고 살기에 바빴지만,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전쟁 직후였던 터라, 종이는 커녕 연필도 구하기 힘든 처지였기 떄문 에 그림을 배운 아이들은, 색이 나는 돌을 들고, 담벼락에 낙서를 하면서 그림 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기집 담벼락에 낙서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아 이들이 점차 그림 그릴 곳이 사라지자 옆집 담벼락을 연습장으로 쓰게 되었다. 담벼락의 개수는 한정이 있어 서로 담벼락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사 람 그림 위에 낙서를 하고 감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게 되었다. 이 와 같은 아이들의 낙서 문화가 점차 일종의 놀이로 변하게 되어서 오늘 날 벽에 영역을 표시하여 벽 따먹기 놀이가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삿짐’이라는 옛날 크루의 스티커로 추측이 된다. ‘1998년도의 그룹’
작은 낙서 크루에서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ADT’와 ‘CESCO’
‘CCTV 녹화중’이라는 크루가 차지한 벽으로 관리가 되지 않아서 종이를 써 붙였다.
환수동에서는 낙서하는 것이 일상이자 전공이기 때문에 동네에서 작은 낙서모임이 전문적으로 성장하여 큰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ex) ‘ADT’& ‘CESCO’
각자에 맞게 해보고싶은걸 그려보세요
각자에 맞게 해보고싶은걸 그려보세요
각자에 맞게 해보고싶은걸 그려보세요
각자에 맞게 해보고싶은걸 그려보세요
각자에 맞게 해보고싶은걸 그려보세요
벽 따먹기 놀이 1. 4~5팀이 나오게 팀을 설정한다. 2. 지정된 벽 (대략, 10~14개)에 자신 팀 표시를 하면 된다. (단, 다 른 팀의 표시를 지우고 표시가 가능하며, 지정된 벽 하나당 하나의 표 시만 가능. 그리고 서로의 표시는 비공개로 진행을 한다.) 3. 일정시간이 지난 뒤 가장 많은 벽에 구역 표시한 팀이 승리
벽이 없을 때 1. 먼저 2인 1조로 팀을 나눈다. 2. 각 팀 당 2장의 종이를 준다. 3. 종이에 자신들 만의 표시를 한 뒤 사회자에게 보 여주고 본인들이 원하는 곳에 붙이도록 한다. (단, 종이를 접거나 찢거나 하는 것은 실격으로 간주.) 4. 붙인 팀은 다시 사회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5. 모든 팀이 종이를 붙인 후 모든 팀에 팬을 2개씩 나눠준다. 6. 정해진 시간 동안 상대방의 종이를 찾아 표시 를 지우고 자신의 표시를 해두면 된다. (단, 자기의 팀이 숨긴 종이를 지키고 있으면 안됨) 7.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각 팀들은 종이를 수거해온다. 8. 가장 많은 표시를 남긴 팀이 우승
사랑의 벽화 연인들이 이 벽화를 옆으로 하고 걸어갈 때 영원을 약속하면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손 꼽히는 아름다운 벽화로 유명하다. 벽돌 벽과 너무나 잘 어울리게 그려진 벽화
동네에서 4계절 내내 아름다운 벽 봄에는 꽃이 피는 것처럼 보이고, 여름에는 빗물에 흐르는 것처럼 보이고,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것처럼 보이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연인들이 환수동에서 오면 사진찍는 명소
잉어 계단 남아선호사상이 있었던 때 제주도에 가면 ‘돌 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처럼 이 잉어 계단을 오르면 아들을 가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미신이 있었다.
기획된 프로젝트 마을의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거리에 벽 전체를 꾸밈
환수동에서는 벽화와 같은 문화가 발달했는데, 특이하게 그림장인보다 다른 장 인이 유명해졌다. 1950년대 전쟁 이후에, 담벼락에 낙서를 하면서 그림을 그렸 다. 나무로 그릴 수가 있었고, 나무 탄 것으로 또한, 그릴 수도 있었다. 어린 아 이들은 어머니가 아궁이에서 밥을 할 때가 되면 항상 부엌 옆에 있다가 아궁이 에서 나오는 타고 남은 나무를 들고 밖으로 나오곤 했다. 그 나무를 들고 벽에 낙서를 하는데 그것은 양이 적고 한정적이어서 많은 아이들이 쓰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매우 귀중했기 때문에 힘이 쌘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었 다. 힘이 없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나무가 타버린 재료가 아닌 다른 도구를 찾 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 길 어디에나 있는 돌이었다. 길거리 에 있는 어느 돌을 가지고 벽에 긁어서 낙서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아이 들이 돌을 쓰다 보니 어느덧 돌을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애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 아이들은 어떤 돌을 쓰면 어떤 색이 나오고 어느 벽에는 어떤 색이 나오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 돌들의 색과 특징을 알게 되었다. 그런 아이들은 점차 인기가 많아졌고, 동네에서 인정받는 한 집단이 되기 시작했다. 어느 샌가 그 아이들을 자신의 무리에 합류시키기 위해 타고 남은 나무를 제공하는 경우까 지 발생하기도 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전쟁후의 어려운 살림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종이가 많 이 도입되고 많은 가구에 공책이 보급되면서 담벼락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어 낙 서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나무와 돌을 잘 알던 아이들은 점차 찾 는 아이들이 줄기 시작하였고, 어느새 남의 집 담벼락에 낙서만 하는 개구쟁이 들만 남게 되어, 돌에 대해서 잘 아는 아이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쓰지 않으면 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암암리에 환수동에서 나무장인, 돌 장인으로 불리 고 있다. 아는 사람들만이 아는, 그리고 추억이 생각날 때 다시금 떠오르는 존 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장인은 돌을 긁을 때의 질감만 가지고도, 그 돌이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시절이 그립고 다 시 돌아가서 벽에 그림을 그리던 시대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미술작품 삽니다.’ 예술가 마을 답게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사려는 사람이 많다.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것을 싸게 샀다가 유명해지면 파는 사재기꾼들이 주로 산다.
‘작업중입니다.’ 집 안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으면 작업중이란 뜻으로 방해하지마세요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은밀한 우편함’ 학창시절에 좋아하는 이성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 기 어려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환수동에서는 편지를 병 안에 넣고 이성의 집 담벼락에 두는 것이 고백하는 방법이다.
환수동에서, 특히 예술가들이 많은 지역을 가보면, 계량기처럼 보이는 것들이 몇 개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전부터 환수동에서는 작품을 표시 하는 역할을 해왔다. 우선 큰 형태의 박스가 대표작들의 개수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 박스 안에 적혀있는 작은 숫자들은 그것들의 가격을 나타내준다. 어떻게 보면 그 예술가의 현재 위치를 말해주는 점이기도 하다. 환수동에 많은 작가들이 모여서 살다 보니 수많은 작업실이 존재하고 수많은 작품 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을 여행하던 사람들은 작품을 찾으러 다닐 때 너무 많은 것들이 있어서 한눈에 보기 어려워 이러한 방식을 환수동의 예술가 모임에 제의를 했는데, 그들은 굉장히 환영하면서 이 방식을 따르기로 했고, 1960년대부터 이러한 박스들이 예술가들의 집 앞마다 붙어있다. 만약 당신이 환수동을 여행하다가 계량기처럼 보이는 저 박스를 발견한다면, 예술 가의 작업실이므로 들어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또한 계량기를 보고 예술가에 대 한 정보를 어느 정도 엊고 들어가 볼 수 있으니 박스를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 본다. 단, 집중하고 있는 예술가는 당신이 들어온 것을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있 다는 점은 명심하시길.
‘바람이 분다’ 바람이 잘 부는 날을 알기 위한 것 안에 들어 있는 물의 양이 다르다.
‘거리의 의자들’ 마을이 언덕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힘이 들면 누 구든 쉴 수 있게 의자가 놓여있다. 또한 풍현과 수하가 집집마다 순례하다가 쉬다 가라는 의미로 집 앞에 의자를 두었다.
환수동의 거리를 걷다보면 집 앞에 화분들이 놓여있는 것을 쉽 게 볼 수 있다. 그 화분들은 주위 사람들이 선물로 두고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집에나 화분 이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 주로 예술쪽으로 아직 인정받 지 못한 작가들 집 앞에 화분들이 많이 놓여있다. 그 사람들에게 화분을 선물받는 의미는 화분에 있는 꽃이나 나무처럼 아직은 작고 다른사람들이 쳐다 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 성장하면 크고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예술이 되라 는 의미로 선물해준다.
매주 화요일. 환수동은 시끄러워진다. 결혼한 부부들이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워진다. 환수동에는 매주 화요일 부부들이 싸움을 함으로써 서로에게 맺힌 감정을 풀어내는 시간은 갖는다. 그 싸움에는 특정하게 방식이 정해진 것은 없다. 하지만 대게 모든 부부는 치고 받 고 싸우기를 한다.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은 서로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데에 매우 도움이 많 이 된다고 환수동 주민들은 말한다. 무조건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관례적으로 매주 서로 속을 털어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조용히 말로 넘어가는 소수의 부부들도 있다. 매주 화요일마다 부부들이 서로의 속을 털면서 싸우는 관례는 아주 특이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바로 쓰레기를 화요일저녁에서 수요일 아침까지 버리는 문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로부터 전날 부부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있다. 쓰레기가 차분히 정리된 상태로 봉투에 가지런히 묶여져서 버려졌다면, 99%의 확률로 그 부부는 서로 화해를 했다는 뜻이 된다. 즉, 마무리를 잘해서 서로 웃으면서 쓰레기를 정리했 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만약 쓰레기가 지저분하게 버려져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 부부는 아직 화해를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수요일 버려진 쓰레기는 정리된 정도와 형태로 이 부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어 서 로 이웃에게 조심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끔 이를 속이기 위해서 아닌 척 하는 부 부들도 있지만, 대게는 솔직하게 한다. 수요일에는 항상 쓰레기가 나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요일에는 청소하는 문화가 생기게 되 었다. 그 문화는 좀더 확대되어서 서울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환수동의 사람들은 바람을 즐기고,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그들은 바람과 자유로움 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물인 새를 사랑하고 신성시한다. 그래서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새들은 환수동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들이다. 더구나 환수동에 서 새를 보는 일은 흔하지 않다. 일주일에 한번 보는 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 다. 그래서 환수동에서 ‘나 완전히 새됐어’ 라는 말은 아주 운이 좋았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신성시 되는 새를 먹는 것은 환수동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 는 일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먹는 조류가 있다면 그것은 닭이라고 한다. 이유는 날 지 못해서라고.
환수동에서 고양이는 육지동물 중에서 가장 아끼는 동물이다. 네발 동물 중에서 가 장 자유로운 동물이기 때문. 길 곳곳에 고양이를 위한 음식을 두기도 하지만, 종종 자유로움에 대해 무책임하다며 비판하는 타지에서 환수동으로 온 사람들은 고양이 의 밥을 주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여 이 동네에서 많이 일어나는 싸움의 원인이 되 곤 한다.
개는 옛날부터 목줄을 채워서 키우는 문화가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동물이라는 인 식이 강해서일까? 환수동에서는 개를 비교적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묶여서 자라는 개는 유독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지역별로 특징이 있는 욕 중에서 ‘목줄을 개처럼 묶어버릴 놈’ 이란 말은 심한 욕 중에 손가락 안에 꼽히기도 했다. 또 비슷한 어감 의 또 다른 욕은 ‘개 목줄에 묶인 인생이나 살아라’라는 말로 자유롭게 살지 말 아라 라는 뜻이다.
- 전국 욕 문화 사전 발췌
풍현교를 믿는 곳에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문화가 존재하는데 그건 바람에 영혼이 담겨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풍현이 바람의 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람을 성스럽 게 여기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환수동 사람들의 사는 문화를 보면 금새 알 수 있 다. 가장 대표적인 문화로는 집 밖에 옷을 걸어두는 문화다. 사실 서울의 다른 동네 에서는 옷을 집밖에 거는 것은 단순히 말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곳 환수동 사람들 은 다른 의미로 옷을 너는 것이다. 옷을 입고 있으면 자신의 때와 나쁜 마음들이 옷에 묻게 되어서 더러워 진다고 생각 하여, 이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그 방법으로 옷을 바람에 너는 것이 다. 햇빛이 쨍쨍 내린다고 해서 절대 옷을 말리지 않는 것이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다 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햇빛이 쨍쨍 내린 때에 옷을 내놓은 집은 찾기 힘들 다. 바람이 잘 불지 않기 때문. 오히려 흐리고 어두운 날에 빨래가 밖에 더 나와있는 것을 보면 확연히 환수동 특유의 문화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파트의 실외기는 사실 환수동의 오래된 전통이다. 지금은 비록 에어컨에 실외기에 의해 대 체되었지만, 원래 하늘의 신인 천상에게 올리는 경의와 위안의 표시이다. 강의 신인 천수에겐 3명의 딸과 1명의 막내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아들의 이름은 수하였다. 어느 날 수하는 아버지의 부탁을 듣고 하늘의 날씨를 주관하는 신인 천상에게 찾아갔다. 비 의 양이 적어 비를 더 내려달라고 하였고, 천상은 알겠다며 그의 딸 풍현에게 도와주라 명을 했다. 풍현은 이름과는 다르게 굉장히 지혜롭고, 아름답기로 모든 신들에게 정평이 나있었 다. 듣기만 하던 풍현을 실제로 처음 본 수하는 풍현에게 반하게 되고, 그녀에게 교제를 제 의하였고, 풍현 또한 수하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던지라 승락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그 둘 의 관계는 깊어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지혜롭던 풍현도 결혼을 하다 보니 자신의 일에 가끔 소홀하게 되어, 강의 물이 적어져 물고 기들이 잡히지 않게 되었다. 어부들은 강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안아서 물고기의 수가 줄 어든 것으로 판단하고 강에 많은 술을 부었고, 지나가던 수하는 그때 술의 맛을 알게 되어 점차 술을 찾게 되었다. 이후 알코올 중독에 걸려 풍현을 억압하고 폭행을 하기 일수였다. 그러기를 몇 년, 속으로 참아가던 풍현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이 사실이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알게 된 천상은 분노를 참지 못해서 수하를 벌하였고, 그 벌로 수하가 관리하던 한강 주변의 사람들의 모든 집에 바람개비를 달게 되었다. 갇혀 지내 던 풍현을 기리기 위해서 자유롭게 날아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 바람개비들이 현대에 와서 아파트에 달려있는 실외기형태로 바뀌었다.
‘종교 건물’ 환수동에서 건물 옥상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같은 종교 건물이다. 옥상에 있는 것은 바람계측기로 바람의 신인 풍현을 받아 드린다는 의미이다. 환수동을 여행하다 한번쯤 들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교도소??’ 이 건물은 출입금지 구억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확실히 어떤 건물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교도 소로 추정된다. 마을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 이지만, 이 곳은 풍현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만들기 위해 교화시키는 곳이라고 한다.
김일중씨는 환수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여보소! 직원분! 내 궁금한 게 있소”
에 하나이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여러 가
김일중씨는 손님을 찾는 소리에 냉큼 달려
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유력한 이야기 다
갔다.
음과 같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2001년, 환수동에 유명회사인 G사의 매장
“혹시, 이 G회사 풍현교에서 지원하는 회
이 생긴다고 입 소문을 탔다. 평소, 아르바
사요?” 손님은 곧바로 물어보았다.
이트로 전전긍긍하며 살던 김일중씨는 대리
풍현교를 믿고 있던 김일중씨는 직장이라는
점에 채용이 필요하지 않은 지를 알아보았
생각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대답했다.
다. 마침 매장에서는 손이 부족하여 인원을
“아닙니다 손님. 무슨일이시죠?”
더 추가하기로 생각하던 찰라 김일중씨가 나
아무 말없이 조용히 눈 앞에 있는 에어컨
타난 것. 타이밍을 잘 맞춰서 나타난 김일중
의 실외기를 지긋이 10초간 바라보고 있었
씨는 대기업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G사에 입
다. 이윽고 그는 혼자 조용하게 혼잣말을 하
사하게 된다.
듯 말했다.
G사의 매장에 취직을 하게 된 김일중씨는,
“참, 풍현교 마크처럼 생겨서 재수없게 생
열심히 G사의 물건을 팔게 된다. 사실 그전
깃네.”
에 직업이 없이 허덕이던 터라 일중씨는 더
언뜻 풍현교라는 말을 들은 김일중씨는 무
욱이 열심히 일을 했다.
슨말인지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센터에서 흔히 볼 수 있
“저, 손님? 뭐라고 말씀하신건가요?”
는 작업복의 차림을 한 40대의 건장하고 튼
한동안 침묵을 하던 손님이 대답했다.
실해 보이는 한 사내가 매장에 왔다. 김일
“풍현교 재수없다고, 저 실외기보니까 풍
중씨는 이 사내가 별다른 사람이 아닐 것이
현교 마크랑 비슷해가지고 점마도 재수없게
라 생각하고 평상시 손님들에게 대하듯 다
생긴거 같다고 말했수다.”
가갔다.
손님의 말을 들은 김일중씨는 화가 났지
“무엇을 도와드릴 까요?
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손님과 대화를 이
손님이 대답했다.
어갔다.
“아, 그냥 구경왔수다”
“이 제품은 풍현교와 무관한 상품입니다.
김일중씨는 별 다른 생각하지 않고 필요하
손님께서 풍현교를 싫어하시더라도 제품은
면 부르겠거니 하고 기존의 하던 일을 하기
따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손님은 대뜸 화내기 시작했다.
10분 후, 그 손님은 김일중씨를 찾기 시작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너는
했다.
그냥 이 상품들 팔면 그만이면서 참 말이 많
아? 그냥 내 마음대로 할꺼니까 넌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해!” 김일중 씨는 손님의 어처구니 없는 태도 에 가만히 있기로 결심했지만, 계속되 는 손님의 투정과 혼잣말이 풍현교를 믿 는 그의 마음에 거슬리기 시작하여 한마 디를 하였다. “손님 이러지 마시죠. 제품은 제품이고 종교는 종교입니다 그렇게 무관한 것을 연결해서 매장의 분위기를 나쁘게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혼잣말을 계속하던 손님은 이내 붉어진 얼굴을 휙 돌리면서 김일중씨의 멱살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일중씨는 손님 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를 맡으면서 생각 을 했다. ‘아, 이 사람 술에 단단히 취했구나. 단 단히 잘못 걸렸네.’ 손님은 멱살을 잡으면서 역정을 내기 시 작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냐고! 내가 풍현교가 싫다는 데 그걸 왜 네가 난 리야! 점장 나오라고 해!” 김일중 씨는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손님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손님은 김일중 씨의 의도와 다르게 계속 역정을 내고 있 었고, 김일중씨를 잡고 있던 멱살은 점점 더 쌔게 조여왔다. 주변의 다른 손님들과 직원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김일중씨를 잡고 있는 멱살을 풀기 위해 부단한 노력
을 했고, 성난 손님을 침착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이미 만취된 상태로 화가 난 손 님은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참지 못한 손님은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김일중씨의 얼굴을 치고 욕설을 하기 시작했 고, 결국 경찰이 오면서 그 사건은 일단락 마 무리가 되었다고 한다. 경찰이 와서 사건처 리를 할 당시 김일중씨에게 어떻게 할 것인 지 물어 보았을 때, 김일중씨는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한다. “풍현교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라 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용서할 따름이지 요” 이윽고 김일중씨의 일화는 마을 전체에 퍼지 면서 풍현교의 영웅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 일로 인해 김일중씨는 어금니가 나가서 군대를 가지 않게 되었다나 뭐라나..
‘신비의 돌’ 산을 올라가다 보면 중턱에 이상한 돌 하나가 있다. 멀리서봐도 빛이 나는 이 돌은 길을 잃은 사람에게 등대같은 존재이며, 스스로 빛을 내는 돌이 신비하 여 사람들이 이 돌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고 믿 고있다.
‘나무에 묶여있는 띠’ 하얀색 띠는 풍현교민들의 영역임을 의미한다. 빨간색 띠는 풍현교를 반대하는 종교들의 영역이다.
수하의 얼굴을 석고로 본 딴 것이다. 석고안에 CCTV가 들어있어 범죄예방을 하면서 수하가 집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바람이 부는 날이 좋은 날인 환수동은 10월 이후가 동네 주민들이 좋아하는 계절 이다. 하지만 날이 추워질수록 바람은 점차 쌔지기 마련이다. 환수동 사람들은, 특 히 풍현을 믿는 사람들은 추워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 바람을 맞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단지 감기에 걸리지 않을 v정도로 추운 정도만 좋아한다. 그래서 추워지 면 반바지를 입는 사람들은 사라지지만, 신발은 슬리퍼 신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 한다. 환수동의 골목길을 돌아다녀보면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왕왕 보인다. 이 사 람들은 대부분 풍현을 믿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 중에는 안 믿지만 편하기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길을 가다 보이는 슬리퍼 신은 사람을 본다 면, 붙잡고 물어봤을 때 10중에 9는 풍현교를 믿는 사람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환수동에 산지 오래된 노인들의 대부분은 풍현교를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람 맞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환수동에서 가장 유명한 신발 가게
목이 긴 신발을 신은 젊은이들
젊은이들 중에 환수동에서 믿는 종교인 풍현교의 풍현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하며 풍현교를 믿지 않는 이들이 많다. 흔히들 말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 항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풍현교를 믿지 않는 젊은이들은 바람맞는 것을 즐기 지 않는다. 그래서 겨울에 슬리퍼 신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특히 풍현교를 극구 반 대하는 젊은이들 중에서 일부는 아예 목이 긴 신발을 신기도 한다. 만약 길을 다니 다가 목이 긴 신발을 신은 사람을 본다면, 풍현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 방할 것이다.
풍현교의 죄수복
파란색의 옷은 언뜻 보면 죄수들의 옷처 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 환수동의 제사 복 이다. 환수동에선 파란색이 바람을 가져다 줄 것 같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바람이 한 점 없는 날이거나 기간이 되면 환수동의 사람들은 풍현이 노하여 바람을 주지 않는 다고 생각을 한다. 그와 동시에 풍현의 마 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여러 행사들을 벌이 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풍현에게 올리 는 제사다. 제사를 지낼 때 먼저 제사장은 제사복을 입는데 그 형태는 현재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죄수복과 상당히 유사하다. 사실 모 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죄수복처럼 보이기 도 한다. 하지만, 제사복의 색은 우선 하늘 과 파란색 그 중간의 색으로 은은한 맛이 있다. 정말인지 푸른 하늘을 보는 듯한 느 낌을 받는다. 제사복을 입은 제사장은 이제 제사단위로 올라가서 여타 다른 민속 신앙과 같이 제 사를 지내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 사단의 높이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다. 바람이 많이 필요하다면 좀 더 높게 쌓 을 뿐이다.
제사를 지낼 때, 소를 종종 제 물로 바치곤 한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는 농경문화이기 때문에 소를 굉장히 중시 하였는데 그것은 환수동에서도 마찬가지였 다. 그래서 소를 제사에 올린다는 것은 그만 큼 바람이 불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만큼 바 람이 필요하단 뜻이고 그만큼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기 싫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소로 제사를 지내고 나면 그 소를 다 시 가마솥에 넣고 끓이는 데 이 끓인 것이 조선까지 이어지는 전통이 되고 이것이 후 에는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설렁탕 이외 에도 많은 음식들이 이 때의 제사에서 유래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육개장이다.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식들, 특히 생체 반찬들을 고기와 함께 한 솥에 널고 끓이는데 그것이 육개장의 기원이라고 한다. 사실 그 맛은 현 재 우리가 먹는 육개장의 맛과 상당히 유사 하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옛날의 음식 맛을 보고 싶다면 육개장을 먹어보길 추천한다.
음식 체험
환수동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식에는 여 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정 기(정도전의 조카)가 가장 즐겨먹던 3첩 반 상이 잘 알려있다. 우선 3첩 반상은 기본적 인 밥, 국, 김치, 장 외에 세 가지 찬품을 내 는 반상이다. 밥은 일반적인 쌀밥을 즐겨 먹 었다. 국은 설렁탕을 즐겨 먹었는데, 그것 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설렁탕과 같은 것이 다. 물론, 이때에는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끓 이던 그 제사 음식이었을 뿐이었다. 정기는 봄에 삼촌인 정도전을 쫓아 선농단에서 태 조가 지내는 제사를 구경갔다가, 선농단에 서 만드는 설렁탕을 먹고 난 뒤 굉장히 좋아 하며 즐겨 먹었다고 한다. 김치는 지금 우리 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일명 ‘저’라 고 한다. ‘저’는 지금의 김치와 가장 다 른 점이 고추가루가 없다는 것이다. 즉, 백 김치와 굉장히 비슷해 보이는데, 사실 백김 치와도 상당히 다르다. 무채 미나리 잣 배 밤 마늘 생강 따위를 배추 속에 켜켜이 넣 는 백김치와 달리 소금물에 절일뿐이다. 장은 일반적으로 간장을 두었다고 한다.
이는 요즘에는 설렁탕의 간을 할 때, 소 금으로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간장으 로 간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외에 3 개의 반찬에는 일반적으로 생채나 숙채, 구이나 조림, 장아찌나 마른반찬이나 젓 갈 중에 해서 3가지를 놓게 되어있다. 특히 정기는 생채와 구이를 매우 좋아했 는데, 복어와 미나리를 생으로 무쳐놓은 것을 즐겨 먹었다. 그 위에, 참깨를 뿌려 서 먹었는데, 그 맛은 일품이라고 한다. 구이로는 남산 근방에서 흔히 먹던 구 이인데, 육적을 기름 간장 계란 파 마 늘 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운 것으로, 그 맛은 떡갈비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음악 카페’ 안에서는 음악이 연주되는 가장 감미로운 카페로 동네사람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찾아옴
‘식물원 카페’ 카페인지 식물원인지 헷갈 릴 정도로 카페안을 식물원으 로 꾸며놓아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단팥 빙수’ 동네에서 빙수가 유명한 카페이다. 그 중에서 단팥빙수가 가장 특별하 다. 단팥죽을 얼려만든 빙수로 한 번 맛을 보면 다시 올 수 밖에 없 다는 카페이다.
‘에스프레소’ 많은 카페들이 있지만 그 중 에스프레 소로 가장 유명한 카페이다. 이탈리아 에서 커피장인이 와서 맛을 보고 굉장 히 좋아했다고한다.
‘스테이크’ 이 동네에서 유명한 스테이크 요 리점이다.
‘생과일 쥬스’ 직접 재배한 과일을 갈아 만든 생과일 쥬스로 동네에서는 유명한 카페이다.
‘한식의 현대화’ 한식의 퓨젼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음식점이다. 2층은 음식점이고, 식사 를 한 뒤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전통 차를 마실 수 있다.
‘como 카페’ 개인 작업을 할 때는 보통 집에서 하지 만 팀 작업을 할 때는 주로 카페에서 한다. 이 como카페는 팀 작업을 할 수 있는 큰 스터디 룸이 있다.
‘맥주 카페’ 이곳의 하우스 맥주는 서울에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초콜릿’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으로 주로 선물로 이곳의 초콜릿을 많이 준다. 가장 인기있는 초콜릿은 ‘Ferreru Rocher’로 초콜릿에 아몬드를 올린 초콜릿이다.
‘남산 돈까스’ 환수동 뒤에 있는 남산에 돈까스로 유명하여 돈까스집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들이 줄을 서있다.
‘병원’ 환수동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이다.
‘옥정 중학교’ 이 동네 출신의 음악 & 예술가인 ‘이옥정’ 여사가 세운 미술전문학교이다.
‘예술 센터’ 환수동사무소에 위치한 예술 센터로 무료로 배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미술관’ 환수동에 있는 사립 미술 전시관 한국의 유명 건축가인 정기용이 설계 한 미술관으로 건축적으로도 유명한 건 물이다.
‘만화의 집’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JEY스튜디오는 환수동에 있는 작업 스튜디오 중에 가장 유명한 스튜디오이다. 이곳은 한 명의 예술가가 작업을 하는 곳이 아니라 3명의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는 곳이 다. 맨 처음에는 한 명의 예술가가 작업을 하던 공간이었 다가 우연히 다른 사람과 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면서 어느덧 3명이서 쓰는 작업실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국판 트로이카라고 말하곤 한다.(트로이카는 런던에서 유명한 3명의 예술가가 만나서 이루어진 팀이다.)
주한 아랍에미리트 대사관
영국 대사관
이집트 대사관
가나 대사관
환수동의 골목은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 막다른 길, 고리길, 쌍고리길, 이음길, 계단길, 갈고리길, 돌음길, 축대길, 가지길, 사다리길, ㄷ자길, 샛길, 능선길, 십자 가길, 빨래길, 화분길, 평상길, 의자길…. 보고 겪은 사람 마음대로 이름 붙여도 좋 겠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골목 이름 하나하나에 조금씩 관 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 곳에 살지 않아도 아끼는 마음이 생겨난다. 때로는 이 집이라면 한 번, 살고 싶은 집 들도 눈에 띈다.
외국의 도시를 방문했을 때계단이 많고 차도 다니기 어려운 동네에 대하여 우리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곳의 조화로운 경관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오히 려 고생을 마다 않고 비용을 지불해 가며 여행을 하고 온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 간 살아오며 만들어낸 것들의 가치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흥미롭고 진솔한 삶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북아현동의 골목과 집들도 이들 동네와 다르지 않 다고 생각한다.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있던 것들을 잘 두면서 ‘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려고 했는지, 아니면 ‘살기 편한 단지’를 만들기 위해 있던 동네를 없애려 했는지, 이 단순한 차이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미래는 우리 손 에 달려 있다.
환수동 뒷산의 풍경
환수동에는 전해지는 민간신앙이 있다. 삼 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환수동 근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풍현이라는 신을 믿는다. 풍현이라는 신에 관한 이야기는 다 음과 같다. 강의 신인 천수에겐 3명의 딸과 1명의 막내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아들의 이름은 수하 였다. 어느 날 수하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환수동에 비가 오지 않게 되자, 하늘의 날씨 를 주관하는 신인 천상에게 찾아갔다. 비의 양이 적어 비를 더 내려달라고 하였고, 천상 은 알겠다며 그의 딸 풍현에게 도와주라 명 을 했다. 풍현은 이름과는 다르게 굉장히 지 혜롭고, 아름답기로 모든 신들에게 정평이 나있었다. 듣기만 하던 풍현을 실제로 처음 본 수하는 풍현에게 반하게 되고, 그녀에게 교제를 제의하였고, 풍현 또한 수하의 모습 에 호감을 느끼던지라 승락하게 되었다. 시 간이 지나 그 둘의 관계는 깊어져 결혼을 하 게 되었다.
수하와 함께 이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 래로, 짓기 시작한 농사는 언제나 풍요롭게 잘 되었다. 또한, 강이 마르지 않고 범람하 지도 않으면서 살기 적절한 곳이 되었다. 원 래 수하를 믿고 섬기던 사람들은, 풍현이 함 께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더 풍요롭게 살게 되자 그녀를 더욱 기리기 시작했다. 그의 의 미로 바람개비를 집집 마다 걸어두고 그녀 에게 감사의 표시를 해두었다고 한다. 풍현 을 믿는 민간신앙 덕분에 이 지역의 사람들 은 풍현을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 하고 있다. 모든 여자들은 풍현과 같은 얼 굴을 갖기 위해서 외모를 가꾸었다. 믿는 신이 여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의 지 위가 높아졌고, 조선시대에 유교가 확립되 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는 많은 지도자는 여 성이었다.
예술가들이 걸어다니며 손으로 직접 그린 지도
이 동네의 이름이 환수동이라는 것에는 많
두 명씩 생겨나고 다른 곳의 예술
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으로
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로 인
두 가지가 있다. 한가지 이야기는 조선 초
해 아는 사람은 아는 내실있는 미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천도를 할 당
술동네가 되었다. 이후 미술에 관
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계의 오른팔이
심이 많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
었던 정도전(鄭道傳)의 조카 정기(鄭淇)는
내 이순자 여사께서, 이곳에 서울
조선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에 재
에서 가장 큰 미술관을 짓기로 계
직하던 도중, 이성계가 천도를 도평의사사
획하고, 더 많은 예술가들이 이 국
에 명하였고, 당시 환수동 (그 당시의 명칭
립 미술관을 보기 위해 모여들고
은 알 수 없다.) 의 대주주로 추정되는 정
결국, 서울에서 커다란 예술동네
도복(鄭道復)의 아들인 정기는 풍수지리설
가 만들어졌다. 또한, 옆 동인 한
을 근거로 해서 환수동을 도읍으로 하기위
남동의 부유한 사람들이 예술투자
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정은영의 노
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재테크의
력에도 불구하고, 정도전과 많은 세력에 의
역할도 하고 있는 동네가 되었다.
해 현재 경복궁이 있는 곳이 수도로 결정
이 동네는 약 2.844KM^2 정도
이 되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곳으
고, 인구수는 약 1만5천명 정도
로 다시 수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
라고 한다. 이들 중 약 10%인 1
換(바꿀 환) 需(쓰일 수) : 다시 쓰일 땅’
천 5백 명은 미술관련 분야에 종
의 의미로 환수동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사하는 사람이고, 약 8%인 1천 2
두 번째 이야기는 옛날부터 꾸준하게 한
백 명은 음악 관련 종사자라고 한
강의 길목으로 존재하던 곳이다 보니 많
다. 기타 예술 관련 종사자까지 하
은 사람이 오갔고, 지리적 특성이 이름에
면 약 25%의 인구가 예술과 관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강이 고리처럼 끼
련된 일을 하니 과연 예술 동네
고 돌다보니 ‘環(고리 환) 洙(물가 수) :
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물길이 고리처럼 생겼다.’ 는 뜻으로 환 수동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한국 전쟁이 있고 나서 한 외국인 화가가 이곳 환수동에 와서 그림을 그리고 작품 활 동을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파블로 피 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이 여기서 그 려졌다고 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 들에게 이 외국인 화가가 그림을 희망으 로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 어느덧 사라 졌다고 한다. 그 뒤 특색이 없고 전쟁으로 힘들어하던 동네는 어느덧 예술인들이 한
이 책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 중에 분명히 ‘왜 코끼리가 나오는 걸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실 겁니다. 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맹인모상이라는 이야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굳이 책 앞에 맹인 모상이라는 이야기를 써두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맹인모상은 이 책에 있 는 이야기 중에 사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 책이 전하고 싶은 즉,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인모상이라는 이야기는 진리에 대해서 찾는 이야기이지만,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한 객 체에 대해서 각자의 입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집중을 했습니다. 한 객체를 여러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집중한 것이지요. 한 객체를 여러 방식으로 보는 방식을 책이라는 객체에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책은 일반적으 로 한쪽 방향으로만 읽습니다. 여기서 여러 방식으로 본다는 걸 감안하면, 책을 앞 뒤 양방향으로 읽는 다는 것이 되지요. 이것이 첫 번째로 이 책에 적용된 점입니다. 그래서 책의 모든 구성은 앞 뒤로 최대한 대칭을 시켰습니다. 또한 앞뒤로 읽었을 때 글에 문제가 없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한 페이지 안에서 이야기가 끝나도록 글을 쓰도록 노력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흐름상 조금 어색해지는 부분은 존재할 듯 합니다. 맹인모상에서 얻은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환수동 이 코끼리라고 가정을 하면, 여행을 하는 귀머거리 화가가 하나의 장님이 되는 것이고, 마을이 하 나의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즉, 앞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 화가의 입장을 머리 속에 새기고 환 수동을 바라보는 것이 될 것이고, 뒤에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마을에 대한 이야기(역사, 배경)를 가지고 환수동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안에 있는 환수동은 최대 한 사진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노력했지요. 이 책의 특징 중 하나가 페이지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림으로 책의 부분을 찾아간다거나 색으로 찾아가는 것이지요. 책을 읽다보면 앞뒤의 사진의 나열이라던가 색의 나열된 부분은 사실 목차입 니다. 그래서 내용 구분은 사진과 색으로 해둔 것입니다.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그림은 화 가가 보는 입장을 색은 마을의 배경으로 환수동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구분을 너무 명확하 게 해두는 것은 따로 읽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안의 내용은 서로 바꾸어놓았을 뿐입니다. 한번 더 확장 시켜서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사람이 사는 사회라던가 많은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장님처럼 우리의 생각만으로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와는 다른 생각과 관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생각해야 한 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은 다시 맹인 모상이라는 이야기로 순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만들기 시작할 때 계획한 것이기도 합니다. 각자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조금 더 남을 배 려하고 남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면서 쓴 것입니다. 저도 남을 항상 배려하고 입장 을 잘 고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염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와 동시에 제가 하고 싶은 말 이기도 하지요. 저와 비롯하여 독자들도 조금 더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이 조금 더 사 려 깊어지길 바라며...
사진이 많아 쉽게 읽힌다. - 안토니오 보니 소리를 찾는 여행. 강력히 추천합니다. - 폴 버튼 잔잔한 감동과 마지막의 반정이 있는 참신한 책 - 토니 잭슨 그림이 친절한 여행기. 아이들 정서에도 좋을 듯하다 - 정창훈 철학적인 책. 한 번으로는 부족한 책 - 마시멜로 놀랍다.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 브라운 비비 새로움이 좋다. - 오데마 페케 깔끔한 책의 구성 - 정선인
방방곳곳 프로젝트
여기저기 출판사는 서울에 곳곳에 숨어 있는 10개의 동네를 선정했다. 신중을 기울인 끝에 선별된 이들 동네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와 오래된 역사를 가진 장소를 한데 어우르고자 하였다. 때로는 엉뚱하고, 고급스럽거나, 소박하기도 하지만 이 안내 책자에 등장하는 다양 한 장소들은 늘 흥미 진진하며, 무엇보다도 그 도시만의 얼과 혼을 담고 있는 곳이다. 빠르 게 변화하는 도시의 주기를 감안했을 때, 취재가 진행되는 시점과 안내책자가 출판되는 시 점 사이에 기존에 소개된 장소가 문을 닫기도 하고, 새로운 장소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미 리 안내하는 바이다. 이러한 변동 사항들은 독자들이 스스로 고쳐 나가면서 책자에 반영하 면 될 것이다.
환수동 코끼리의 코와 꼬리
여기저기 출판사
환수동 출간일 2014년 12월 15일 지은이 정환웅, 최성수 출판사 여기저기 주 소 서울시 성동구 성덕정 3길 10-1 herethere.kr ⓒ 정환웅, 최성수 2014 본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