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연대 The Black Regiment
여는 글
이 책은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여성과 관련된 사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여성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시간순으로 나열한다. 여성들에 대해 알 수 없던 우리들, 지워진 여성들을 캄캄한 밤하늘과 같은 검은색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하얀색은 지워짐과 동시에 희망의 색이 된다. 페이지를 넘기며 흑에서 백으로 점점 밝아지는 책은 과거에서 현재로 올수록 선명해지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여는 글
5
제 1장 어디에도 없는 여성들 Ⅰ 신여자 1)김일엽 2)나혜석
13
Ⅱ 제주해녀항쟁 1)대표5인
33
Ⅲ 호주제폐지운동 1)이태영
43
Ⅳ 동일방직노동운동
57
Ⅰ 부천서 성고문 사건
73
Ⅱ 변월수 사건
83
Ⅲ 김부남 사건
91
제 2장 여성만 남은 사건들
Ⅳ 김보은 김진관 사건
103
Ⅴ 신교수 사건
115
제 3장 가해자만 남은 사건들
제 4장 어디에나 있는 여성들
Ⅰ 100인위원회
127
Ⅱ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139
Ⅲ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153
Ⅳ 미투운동
165
Ⅰ 봄알람 #여자들의_봄을_위하여
183
Ⅱ 비웨이브 #MY_BODY_MY_CHOICE
195
Ⅲ 전국디바협회 #여자도_게임하기_좋은_세상 207 Ⅳ 불꽃페미액션 #우리는_음란물이_아니다
217
참고문헌
228
마치는 말
235
분명 역사 속에는 존재하는데 역사책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여성들이다.
Ⅰ 신여자 Ⅱ 제주해녀항쟁 Ⅲ 호주제폐지운동 Ⅳ 동일방직 노동운동
제 1장 어디에도 없는 여성들
“개조! 이것은 5년간 참혹한 포탄 중에서 신음하던 인류의 부르짖음이요, 해방! 이것은 수천년 암암한 방중에 갇혀 있던 우리 여자의 부르짖음입니다.”
제 1장 어디에도 없는 여성들
Ⅰ 신여자 1920년 3월∼ 6월 최초로 여성이 만든 여성잡지로서 당시 대표적인 신여성인 김일엽이 편집주간이었고, 신여성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신여자》는 의욕적으로 ‘신여자’를 내세우며, 여성운동과 여성의 사회의식을 북돋우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김일엽 나혜석
14
“개조! 이것은 5년간 참혹한 포탄 중에서 신음하던 인류의 부르짖음이요, 해방! 이것은 수천년 암암한 방중에 갇혀 있던 우리 여자의 부르짖음입니다.”
Ⅰ 《한국여성사》 선사 시대에서 개화기 까지의 한국 여성의 생활과 지위를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학술적으로 구명한 최초의 여성사 서적이다.
Ⅱ 《여성해방론》 유교적인 가부장제 하에 열악한 삶을 살았던 여성의 근대적 해방의식은 1920년 자유주의적 남녀평등 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양성관계의 수립을 주장하는 ‘신여성론’ 으로 발전된다.
《신여자(新女子)》는 1920년 3월에 창간되었는데,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나온 여성잡지이다. 흔히 김일엽(金一葉)이 발행한 것으로 전해 오지만, 판권장 을 보면 발행인은 Mrs. Billings, 편집인 김원주(김일엽 Ⅰ 의 본명)로 되어있다. 《한국여성사》에 보면, “김일엽은 1920년 3월 이화학당에서 자금을 댄 《신여자》라는 국 내 최초의 여성잡지의 주간으로 활약하면서 시와 소설 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작품의 창작보다는 ‘여성 Ⅱ 해방론’을 누구보다도 부르짖었다”고 했다. 이로써 미 루어 보면 《신여자》 창간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고, 발 행인 빌링스는 이화학당의 주요 인물임을 알 수 있겠다. 필진을 보면, 무기명이 더러 있고 양백화(梁白華)·이동 원(李東園)을 제외하고 다 여성들이다. 《신여자》의 창간사는 김일엽이 썼는데 그 몇 구절을 옮 긴다. 그때의 김일엽은 24세였다.
15
“개조(改造)! 이것은 5년간 참혹한 포탄 중에서 신음 하던 인류의 부르짖음이요, 해방(解放)! 이것은 수천 년 암암(暗暗)한 방중에 갇혀 있던 우리 여자의 부르짖 음입니다. (중략)때는 왔습니다. 온갖 것을 바로잡을 때가 왔습니다. 지루한 전쟁의 몽몽(蒙蒙)한 포연(砲 Ⅲ Ⅳ 煙)은 걷히어 지구의 암야(暗夜)는 밝았고, 평화의 서 Ⅴ 광이 새로 비치어 새로운 희망 아래 새 무대가 전개되 었습니다. (중략)아아, 새로운 시대는 왔습니다. 모든 헌것은 거꾸러지고 온갖 새것을 세울 때가 왔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개조할 때가 왔습니다. 모든 비(非) 모 든 악(惡)이 사라질 때가 왔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개 조하여야 될 때가 왔습니다. …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 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 조하려면 가정의 주인 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하략)” 또 김일엽은 1920년 4월 《신여자》 2호에서 일명 ‘신여 자 선언’이라 불리는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을 발표했다. “…우리의 요구하는 바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겠습 니까?… 몇 세기를 두고 우리를 냉혹하게도 압박하고 Ⅵ 우리를 극심하게도 구속하던 인습적 구각(舊殼)을 깨 뜨리고 벗어나서, 우리 여자가 인격적으로 각성하여 완 전한 자기 발전을 수행코자 함이외다. 남자들은 이를 이르되 파괴라 반항이라 배역(背逆)이라 하겠지요. 그 렇지만 보십시오. 고래로 우리 여자들을 사람으로 대 우치 아니하고, 마치 하등동물같이 여자를 몰아다가 남자의 유린에 맡기지 아니하였습니까?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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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포연砲煙 총이나 포를 쏠 때에 나는 연기. Ⅳ 암야暗夜 1. 앞이 잘 보이지 아니하게 어두운 밤. 2. 절망적인 처지나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Ⅴ 서광曙光 1. 새벽에 동이 틀 무렵의 빛. 2. 기대하는 일에 대하여 나타난 희망의 징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Ⅵ 구각舊殼 낡은 껍질이라는 듯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옛 제도나 관습 따위를 이르는 말.
Ⅶ 신여성新女性 1.개화기 때, 신식 교육을 받은 여자를 이르던 말. 2. 개화기 때, 서양식 차림새를 한 여자를 이르던 말.
하므로 우리는 신시대의 신여자로 모든 전설적·인습 적·보수적·반동적인 일체의 구사상에서 벗어나지 아 요, 사명이요, 또 존재 이유로 삼는 것이올시다.(하략)” 이 ‘신여자 선언’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신여성운동에 Ⅶ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신여자’, ‘신여성’이란 말이 크게 퍼졌고, 젊은 여성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자기도 신여성이 되리라는 꿈을 안고 넓은 바깥세상으 로 뛰쳐나온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신여성의 대 표처럼 꼽히면서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많이 오르내린 사람들이 다름 아닌 서양화가 나혜석, 소설가 김명순, 수필가 김일엽 등이다. 그녀들의 생애는 행복보다는 불행으로 점철된 것이었 지만, 그녀들의 이야기가 빠지면 ‘한국 여성사’가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행적은 전설처럼 오늘날까 지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그 신여성, 대표 세 사람의 인생행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17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金一葉, 1896~1971≫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자,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시인 겸 수필가이다.
김일엽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연희전문에서 화학교수로
양친을 모두 잃는 어려움을
재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후
겪었으나, 다행히 70이 넘은
행보를 보면 이른 나이에 결혼한
외할머니의 뒷바라지로 1913년
것이 의외일 수 있으나, 가난과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학업에
외로움을 어린 시절부터
매진할 수 있었다. 이후 1918년 뼈저리게 겪었던 만큼, 안정적인 3월 20일 이화전문을 졸업했다. 울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 그런데 김일엽은 이해 미국유학
아닌가 싶다.
을 마치고 연희전문 교수로 있는 결혼 후 1919년 남편의 원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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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독신남 이노익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동경영화학교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에 유학하였고 이때 허영숙,
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을
이광수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졸업한 이노익은 1915년부터
신체장애가 있었던 중년 남편과
결혼생활은 심각한 정신적
《신여자》를 발간하면서
충격을 안겨주었고 결국 이혼
김일엽은 나혜석, 박인덕,
으로 끝이 났다.
신줄리아 등과 함께 ‘청탑회’라는
1919년 김일엽의 일본 유학에는
신여성 모임을 결성하여
남편의 원조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동갑내기 신여성 나혜석의
가졌다. 《신여자》는 여성에
영향이 컸다. 나혜석은 1914년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당시 동경유학생 학우회의
여성잡지로 총 4권이 발간되다
Ⅰ
기관지였던 《학지광》에 ‘이상적
그친 잡지이다. 이 잡지는
부인’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나혜석의 《여자계》와 달리
있으며, 1917년에는 일본여자
여성의 의식개혁을주장하는
유학생들의 잡지였던 《여자계女
급진적인 내용이 많았다.
Ⅱ
子界》의 주간으로 맹활약하고
《신여자》시절 김일엽의 문학
있었다. 나혜석의 활약은
활동의 백미는 평론이라고
현해탄을 넘어 고국에까지 전해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졌고, 당시 여성들의 선망의
《신여자》창간사를 쓰면서
대상이 되었다.
여성의 자각과 해방을 부르짖었다.
1년 동안의 일본 체험을 가지고 돌아오자마자 김일엽은 1920년
김일엽은 《신여자》 활동 이후
2월 《신여자》라는 여성잡지를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일본
창간하여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으로 건너갔다. 김일엽과 남편 김일엽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노익은 1921년에 헤어졌다.
것은 1920년 《신여자》를 창간할 1921년 김일엽은 동경에서 때부터의 일로 그 뒤 1933년
조선의 여성 복식 개량을
불교에 귀의하여 입산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때까지 약 13년간 창작활동을
이 문제를 두고 나혜석과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에 남긴
벌이기도 했다. 남편과 헤어진
작품은 소설이 16편, 시가 35편,
뒤 김일엽은 규슈대학 법학과에
평론이 40편에 이르고 있는데
재학 중이던 오다 세이조와 연애
이들 많은 부분이 《신여자》를
하여 임신을 하였다. 그러나
발간한 뒤에 발표되었다.
오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좌절 되고 오다 세이조의 친구 집에서
19
아들을 낳았다. 이 무렵 실의의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나날을 겪는 중에 만난 사람이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시인 노월 임장화이다.
『나의 정조관』 중에서
두 사람은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1923년경에 조선으로 김일엽의 주장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들어와 동거에 들어갔다. 김일엽은 임노월의 사상인
Ⅲ
‘신개인주의적 예술지상주의’가
조선여성들이 한 남자의 노리개로 팔리는 모욕적인
자신의 피폐해진 영혼을 구원해 착오에서 깨어나야 하고, 무능한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인형에서 탈피하여 남녀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임노월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는 동시에
김일엽을 구원해 줄 수 없었다.
인격자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임노월은 일찍 결혼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보수적이고
한 상태였다. 결국, 김일엽은
여성을 집안에만 가둘 줄만 아는
임노월과의 관계를 청산하였고, 조선 남성을 향한 그녀의 대범한 이후 그녀의 삶은 방황의
외침이 시작된 것이다.
연속이었다. 이 무렵에 발표한 것이 바로 1927년 1월 8일
조선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나의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일엽은
정조관’이다. 이 글은 당시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던지며
미친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비난과 환영을 동시에 받았다.
되는데 그가 바로 백성욱이다. 백성욱은 식민지시대 불교 중흥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자면, 운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불교인이다. 김일엽의 자서전인
20
Ⅳ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청춘을 불사르고》에 따르면,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김일엽은 백성욱을 그가 불교
생각해 왔습니다. 정조를 잃은
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에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만났고 그로부터 7~8개월에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걸쳐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고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욱은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이 다하였다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는 편지만 남기고 떠났다.
사랑했던 백성욱이 돌연
끊을 것을 선언했다.
떠나버리자 김일엽은 극심한
김일엽을 불교계로 이끈 만공은
심적 충격을 받았다.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한
백성욱과 헤어져 방황하던
대선사이다. 김일엽은 1933년
김일엽은 이미 불교에 상당히
만공의 문하에 들어가 “일엽이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어려서는 연꽃처럼 되었고 성품도 백련과 기독교가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믿었지만, 이제 시련의 상처로
되었도다”라는 법문을 하사받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구원해
완전히 속세를 떠났다.
줄 수 있는 것은 불교였다. 백성욱과 헤어진 뒤 1929년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와 같이
재가승인 하윤실과 곧바로
민족개조라는 커다란 뜻을
재혼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
가지고 여성의 자각을 부르짖은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
1920년대를 대표한 문학가이자
신자였던 남편은 그녀의 생각과
신여성이다. 남성으로부터의
달리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해방, 부모로부터의 해방, 기존
남편은 그녀의 영혼에 큰 자극을 가부장적 윤리로부터의 해방이 주는 인물이 못되었다. 그녀는
그녀가 부르짖은 여성해방의
다시 한 번 결혼을 깨버렸다.
기본 골자였다. 봉건적 유습이
세속에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1920년대에
위안이 되는 것은 없었다.
사회를 향하여 신문지상을 통해
이제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정신적 정조관이 더 중요하다는
불교로 향하고 있었다.
주장을 펼쳤던 김일엽. 다시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김일엽은 이혼 이후 수덕사에
주장을 더욱 구체화시키며
머물면서 만공선사 문하에서
인물들을 통하여 그것을
출가 준비를 하였다. 이후
실천시켜나간 김일엽. 그러나
그녀의 삶은 수도승으로서의
마지막에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삶이었다. 직지사, 서봉암,
있는 것은 불심이었다.
마하연을 거쳐 1935년 서울 안국동 불교여자선학원에서 수행하면서 용맹정진하였다. 아울러 세속과 모든 인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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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계시 (啓示)》 《나는 가오: 애연애화》 《어느 소녀의 사》 《혜원》
《꽃이 지면 눈이 시려라》 《두고간 정》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일엽선문》
《순애의 죽음》 《자각》 《사랑》 《단장》 《영지》 《희생》 《헤로인》 《파랑새로 화환 두 청춘》 《자비》 《애욕을 피하여》 《50전 은화》
수필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청춘을 불사른 뒤》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 《수덕사의 노을》 《청춘을 영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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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羅蕙錫, 1896~1949≫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나혜석은 1913년 진명여학교를 했다. 그러자 남자 유학생들 졸업하고 동경여자미술학교로
사이에서는 나혜석 이야기가
유학을 떠나, 1918년 졸업하고
꽃을 피웠다. 누구는 말하기를,
귀국하여 정신(貞信)여학교
“갸름하고도 둥그스름한 흰
미술교사를 지냈고, 1919년 3·1 얼굴에 서글서글하고 빛나는 운동에 참가했다가 5개월의
매력적인 눈동자를 굴리며,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서 몇번의 슬기로운 표정을 띤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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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를 가졌고, 일본에서
머금은 혜석의 얼굴을 바라만
두세번 특선을 할 정도로 그는
보아도 남자들의 가슴은 설렛던
유명했다.그가 동경에 온 해에
것이다.”라고 했다. 또 한
동경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길모퉁이의 담벼락에는 ‘장차
‘이상(理想)적 부부’라는 글을
내 아내는 나혜석’이라는
발표, ‘진(眞)의 연애’를 주장
낙서까지 붙을 정도였다.
Ⅰ
《신여자》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판화/ 1920
《신여자》 저것이 무엇인고, 판화/ 1920.4 ‘저것이 무엇인가. 시속 양금(바이올린) 이라든가. 앗다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두 양반의 평) 그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들었다면 쳐다나 보아야 인사나 좀 해보지. (어느 청년의 걱정)’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소설을 쓰고 신문 만평을
사람같이 좀 되어 봐야만
그렸다.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할 것이 아니오?
정책을 일본인들에게만 특혜를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만
주고 조선인은 차별하는 것을
할 것이 아니오?
계모가 본처 자식들을 학대하는
미국 여자는 이성(理性)과
것으로 희화, 풍자하다가 검열에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걸리기도 했다. 나혜석은 ‘여자도
불국(佛國) 여자는 과학과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림을 그리며 여성인권 향상을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위해 힘썼다. 봉건적·인습적
여자다운 여자요.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글들을 써서 사회적 비난과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를
냉대를 받기도 했다.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悲運)은
이 무렵 그의 집안에서는 그에게
너무 참혹 하오 그래.”
결혼을 강요하였고, 3·1 운동
- 1917. 학지광 4 월호
당시 김우영이 그의 변호를 맡아 주면서 그와 가까워졌다. 그는
1920년 2월 김일엽 등과 함께
결혼을 오래 망설이다가 김우영
〈신여자〉를 창간하고 필진으로
에게 자신에게 과거에 남자가
참여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곧
있었음을 밝히고, 그래도 김우영
폐간되었다. 그해 7월 국내에서
이 이를 인정한다 하자 다시
Ⅰ
Ⅱ
간행된 《폐허(廢墟)지》의 동인이 조건을 제시하는데, 김우영이 되었다.그는 직접 《폐허》 동인을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Ⅱ
구성해 김억, 오상순, 염상섭,
《폐허廢墟》 일제 강점기의 문예 동인지로, 소설, 시, 논설 등을 주로 싣고, 당시의 사회상, 생활정보에 대한 것도 싣던 종합잡지이다.
김일엽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결혼을 승락하게 된다.
《폐허》지는 민족의식을 고취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했고,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1년만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폐간되었고, 그는 모교인
별거하게 해줄 것
이화전문학교의 미술강사로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출강하면서 다른 언론사에 칼럼
세워줄 것
등을 기고하였다.이후 여러 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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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의 주변에서는 이런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조건은 말이 안되는 조건이라며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결혼을 포기하라 하였으나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주변의 권고를 듣지 않고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나혜석의 조건을 받아주었다.
한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그는 남편인 김우영에게 간략
할 것이다.”
하고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릴
《동명지》 1923년 2월 4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대의
그러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명문가문임에도 결혼식은 단촐
당연히 여기고 자녀에 대한
하였다. 신혼여행지는 전
맹목적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남자친구인 최승구의 묘지
풍조에 염증을 느낀 그는 그 뒤
였다.이는 당대에 큰 화제였다.
‘어미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조건을 수용한 것과 전 남자친구의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존재 때문에 남편인 김우영은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공처가, 애처가라는 비아냥과
깨달은 나는 몸이
함께 놀림감과 뒷담의 대상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되었다. 김우영은 약속대로
무엇인지 떨어지는
아내의 첫사랑 묘소에 참배
소리가 완연히 탕 하는
하고,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두
것 같이 들리었다.
사람의 첨단 신혼여행은 한동안 어머님 나 죽겠소,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훗날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
모델이 되기도 했다.
팔짱끼고 섰던 부군 “참으시오” 하는 말에
1920년부터 그는 일본 유학을
“이놈아 듣기 싫다”
하고 온 김일엽 등과 함께 개화
내 악 쓰고 통곡하니
신여성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내 몸 어이타가
1923년 그는 첫 딸을 출산한 후 이다지 되었던고.”
26
그는 잡지 동명지에 출산과
‘어미된 감상기’, 1921년 4월
자녀 양육을 감동적이라고
그리고 그는 ‘모성은 본능이
표현하였다.
아니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스페인 항구〉
그는 모성이 아이들을 기르면서
경성역에서 열차를 타고 평양,
생기는 감정이며 그것이 얼마나
신의주를 거쳐 펑톈에서 남만주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철도로 갈아타고 하얼빈으로
세세하게 서술하며 알린다.
갔다. 하얼빈에서 시베리아횡단
그러나 모성애는 강요된
철도로 모스크바를 거쳐 한 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의하면 ‘아이를 낳는 것,
〈스페인 해수욕장〉 1928, 정월
〈파리 풍경〉 1927~1928, 정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 너무
스위스에게 개최된 군축회의
고통스럽다, 하지만 조선사회
총회를 참관하고, 벨기에,
에서는 여성들의 고통을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이해하지 않고 거룩한 것이니
노르웨이 등지를 관광했다.
너희가 참아라, 라는 식으로만
나혜석은 여행지에서 박물관과
이야기한다’ 라고 공공연히
미술관에 들러 이름만 들었던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출산의
대가들의 작품을 직접 목격했다.
고통을 남자들은 이해하려
유럽과 미국 등지의 여행은 그의
하지 않는다, 남자가 임신을
사상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하지 않으니 모른다고 지적한다. 주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그리고 사회가 여성에게 어머니
파리에 체류하며 프랑스의
역할, 모성애를 일방적으로 강요 인상주의 화법을 배우게 된다.
〈무희(캉캉)〉 1927~1928, 정월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성의
그리고 그는 유럽에서 보고 들은
신화는 없다”고 이야기하자
것을 그대로 대중에게 그대로
수많은 남성들의 비난에
소개하였다.
부딪히게 된다. “우리가 여긔서는 여자란
〈자화상〉
나혜석은 1926년 일본정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로만
외교관신분이던 남편 김우영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에게 여비가 지원되었고, 함께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세계일주여행에 올랐다. 그러나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듸다.”
의열단에 비밀리에 송금을 하던
‘구미만유하고 온 여류화가
것이 조선총독부 형사에게
-나혜석씨와 문답기’
포착되어 곤혹을 치루기도 한다. 그러나 해외여행은 다행히도 취소되지 않는다. 나혜석 부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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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인 것을 학실이
작품을 가리켜 불미스러운 작품
깨다랏다. …그리하여 나는
이라는 인신공격이 가해진다.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적은
그의 이혼고백장은 남성중심
것이 갑 잇난 것으로 보고
사회에 대한 항거였다.그러나 이
십고 나뿐 아니라
글을 발표한 후 그에게
이것을 모든 조선 사람이
쏟아진 것은 동조와 공감보다는
알앗스면 십흐다.”
비난과 조롱에 가까웠다. 글과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예술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Ⅰ
<삼천리> 1932년 1월호
Ⅰ
표출하고 세상과 맞서려 했던 그는 세상과의 계속된 불화를
그는 유럽 여행을 마치고
겪게 된다. 그는 정조를 잃은
귀국한 후부터 여행기
여자에게 가해지는 걸레라는
‘구미유기’ 등을 통해 영국
단어에 대해서도 남자에게도
참정권 운동을 소개하였다.
걸레라는 말을 써야 되지 않느냐
국민이 정치와 정책에 참여하고
며 반발하였다. 또한 한 사람의
이를 결정하는데 의견을 표출
말만 듣고는 사건의 진실을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며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참정권을 외쳤지만 외면당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문학.그림 모두 최고의 기량을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발휘했던 그는 ‘이혼’이란 딱지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하나에 예전의 명성을 일시에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잃게 된다. 당시 대단한 화제를
빼앗으려고 합니다.(중략)
모았던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고, 조선남성들 보시오. 재기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했음에도 돌아온 건 냉소와
참으로 이상하고,
질시가 전부였다. 그가 이혼녀
잘나건 못나건 간에
라는 점과 외도를 했다는 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자유연애를 주장한다는 점을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들어 비난하였다. 그의 남편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김우영이 외도했다는 점은 언급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되지 않고 그의 외도만이 비난의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대상이 된다. 매일신보에는 그의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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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三千里》 1929년부터 발행된 일제 강점기의 대중잡지이다. 나혜석의 ‘우애결혼, 시험결혼, 이혼 고백서’ 가 담긴 잡지이다.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내 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 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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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나혜석전집》 《나혜석 작품집》
《인천풍경》 《조조, 목판》 《개척자, 목판》
《나혜석 자서전》 《첫사랑의 무덤으로
소설
신혼여행을 떠나다》
《규원(閨怨)》
《이혼 고백서》
《현숙(玄淑)》
《자유 연애》
《경희(瓊嬉)》
《해인사 풍광》
《정순》 《희생한 손녀에게》
그림 《자화상》
《원한(怨恨)》 《어머니와 딸》
《파리 풍경》 《무희》
시
《나부 1》
《냇물》
《나부 2》
《사(砂)》
《선죽교》
《노라를 놓아주게》
《스페인 해수욕장》 《스페인 국경》
수상
《해인사 홍류동》 《이화원 풍경》 《중국인 촌》 《수원 서호》 《수원성》 《염노장, 여승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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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3등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제 1장 어디에도 없는 여성들
Ⅱ 제주해녀항쟁 1931년 12월∼ 1932년 1월 1930년대 접어들어 심각해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제주도 해녀들의 생존권 수호를 목적으로 시작한 적극적 항일 운동이다. 약 17,000여 명이 참여하였고 시위 횟수가 약 230여 회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 운동이었다.
해녀 5인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 김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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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1931년에 해녀 조합 측에서 하도리 해녀들이 캐낸 감태 와 전복의 가격을 강제로 싸게 매기려 하자 이에 해녀들 이 강력 항의하였다. 거센 항의에 부딪힌 해녀 조합 측 은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실행 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하도리 해녀들은 해녀 조합의 무성의한 태도에 반발하여 직접 투쟁에 들어가기로 결 의하였다. 1931년 12월 20일에 하도리 해녀들은 회의를 열어 해녀 조합에 대한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확정하 고, 즉각 해녀 조합 사무소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했다. 경찰의 제지를 염려하여 발동기선을 타고 제주읍으로 향했으나, 폭풍으로 배가 나아가지 못해 첫 번째 시도 는 수포로 돌아가, 본격적인 해녀 투쟁은 다음 해로 넘 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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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32년 1월 7일에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세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해녀들 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 보따리를 매고 하도리에서 시위 행렬을 지어 세화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부근 마을에서 모인 해녀들까지 합세하여 해녀 조합에 대한 성토를 하고 제주읍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이 평대리 구좌면사무소에 다다르자, 구좌면 장이 나서서 요구 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함에 따라 오후 5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구좌면장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해녀 조합에서는 채취물에 대한 지정 판매를 강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해녀 조합의 지정 판매에 불만을 품어오 던 구좌면과 성산면의 해녀들은 각 마을별로 회의를 여 는 등 해녀 조합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마침 해녀 조합에서 정한 지정 판매일인 1월 12일은 제 주도사 겸 제주도 해녀 어업 조합의 조합장이었던 다구 치[田口禎熹]가 새로 부임한 뒤 순시하러 구좌면을 통 과하는 날인 동시에 세화리 장날이었다. 따라서 구좌 면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 정의면(현 성산읍) 오조리·시흥리 등의 해녀들은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 고, 이 기회에 제주도사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기로 결의하였다. 해녀들은 세화장에 모여든 군중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 고,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항쟁의 의지를 다지는 연설 을 차례로 하였다. 자동차에 탄 제주도사 일행은 모여 있는 시위대를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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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탄 제주도사 일행은 모여 있는 시위대를 발 견하였다. 시위대에 놀란 제주도사 일행은 구좌면 순 시를 포기하고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집 회를 중단하고 차에 탄 제주도사를 에워쌌다. 해녀들 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 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라고 외치며 달려들 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제주도사는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 하기로 하였다. 이에 해녀 측에서는 지정 판매 반대, 해 녀 조합비 면제, 제주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 인 배척 등의 항일적 성격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직접 제주도사와 담판을 벌였다. 마침내 해녀들은 5일 이내 에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해결해 주겠다는 제주도사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제주도사가 돌아간 이후 일제는 무장 경관대를 출동시켜 1932년 1월 23일부터 1일 27 일까지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수십 명의 청년들을 연 행하였다. 심지어 전라남도 경찰부에서 응원 경관까지 파견되자 이에 각 마을 해녀들은 심하게 반발하였다. 1월 26일 우도 해녀들은 주동자를 검거하러 온 배를 에 워싸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월 27일에는 종달리 해녀들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됨으로써 비로소 해녀들 의 저항은 진정되었다. 해녀 항쟁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 항하였던 항일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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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부춘화(1908~1995), 김옥련(1907~2005), 부덕량(1910~1939), 김계석(1913~?), 고순효(고차동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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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 항쟁은 부춘화,
‘여성 중심의 첫 생존권 투쟁’이자
김옥련, 부덕량, 김계석, 고순효
일본의 수탈에 저항했던 ‘항일
등 5인의 해녀 대표가 이끌었다.
운동’이었지만 사회주의 색채가
이들은 사회주의 계열 비밀결사
있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며 70
조직인 혁우동맹 산하
여년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 이곳에서 야학을 통해
현재 제주 항일기념관에 모셔진
민족 교육을 받았다.
제주의 독립유공자는 모두 161명. 이 가운데 여성 독립
1929년 하도리에는 제국주의
유공자는 고수선, 최정숙,
일본의 부당한 착취와 억압에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등 5명이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민족의식
전부다. 이들 외에 다수의 학자
과 함께 항일 정신을 키워갔던
들로부터 제주여성선각자이자
부인회·소녀회 등의 여성 단체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조직돼 있었으며 당시의
있는 강평국(1900~1933),
부인회장과 소녀회장이 바로
김시숙(1880~1933), 현호옥
부춘화와 김옥련이었다.
(1913~1986), 김진현(1910~?), 이경선(1914~?) 등에 대한
1932년 1월7일 세화오일장에
작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모인 잠녀 수백명은 “너희들이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총칼로 대항하면 우리는 죽음
고차동(고순효), 김계석 역시
으로 대항한다” 등을 외쳤으며,
현재 이름만 남아있다.
5일 뒤인 12일에는 잠녀 1000여 명이 세화리 오일장에 모여들어
일제 강점기 시작된 우리나라
순시차 방문한 제주도사의 차를 최초의 기부문화 운동인 가로막고 호미와 창을 휘두르며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일제의 수탈에 저항했다.
이끌며 여성의 힘을 각인시켰던 제주 삼도리부인회나 제주
이후 수십명의 해녀들이 구속
함덕리국채보상기성회에 대한
되자 이들 5인은 모진 고문에도
기록은 ‘독립기념관’에서 확인할
자신들이 주모자임을 스스로
수 있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밝히며 동료들을 석방시키는데
관심이 미미하다.
앞장섰다. 이렇듯 잠녀항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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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고 여성을 한낱 남성의 소유물 내지는 가족의 구성요소로만 간주한다.”
제 1장 어디에도 없는 여성들
Ⅲ 호주제 폐지 운동 1920년 3월∼ 6월 호주제(戶主制)는 가족 관계를 호주(戶主)와 그의 가족으로 구성된 가(家)를 기준으로 정리하던 2007년 12월 31일 이전의 민법의 가(家) 제도 또는 호적 제도를 말한다. 이는 호주를 중심으로 호적에 가족집단을 구성하고 이를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남계혈통을 통해 대대로 영속시키는 제도였다.
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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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고 여성을 한낱 남성의 소유물 내지는 가족의 구성요소로만 간주한다.”
여성운동에서 호주제 폐지만큼 긴 투쟁의 역사를 가진 이슈도 드물 것이다. 지난 3월 2일 국회 에서 호주제 폐 지를 뼈대로 한 민법개정안이 통과된 순간으로부터 장 장 5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호주제 는 일제 통치의 잔재임에도 해방 이후 신민법 제정 과 정에서조차 이를 바꾸지 못한 탓에 오늘날까지 여성 차 별이란 불명예스런 상징이 되어 왔다. 호주제 폐지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1950년 대 초 신민법 제정 당시의 논란과 맞닥뜨리게 된다. 1953년 여성계 대표들은 법전편찬위원회에 남녀평등 을 이념으로 하는 헌법정신에 맞게 민법을 제정해 달라 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1957년에는 국회 공청회에서 가족법상의 남녀차별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청원서와 호소문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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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58년 2월 공포된 신민법은 호주제를 비롯한 남녀 성차별적 조항에 대한 개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 은 것이었다. 그 뒤 1979년, 1989년 두 차례 가족법이 개정되어 호주의 권리와 의무 조항이 대폭 삭제되고, 친족 범위가 부모 양계 각 8촌까지로 조정되었다. 하지 만 핵심적 성차별 조항인 호주제는 최근까지도 그 존폐 논란이 계속되어왔다. 두 차례의 가족법 개정으로 이혼하는 여성의 재산분할 청구나 시집간 딸에 대한 상속권 인정 등 경제적 성차 별이 어느 정도 해소됐고 호주의 실질적 권한도 상당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호주제의 핵심인 남성우선적 호주 승계순위나 자녀의 부가(父家) 입적 및 아내의 부가(夫 家) 입적 조항, 부성(父姓)강제조항은 우리 사회의 남 성중심 문화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즉, 호주제 는 국민 각자가 가족을 구성하고 가족원의 지위를 정 함에 있어 국가가 법을 통해 강제적으로 남성에게 우선 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헌법이 정한 개인의 존엄과 남 녀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부정해온 것이다. 이이효재, 조한혜정, 고은광순, 이유명호, 오한숙희…. 지금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런 네 글자 이름들이 1997년 처음으로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과 함께 발표됐다.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여성 연합에서 매년 여는 한국여성대회에서 저명인사 170명 이 자기 이름에 부모의 성을 함께 쓰겠다고 밝힌 것이 다. ‘부모성 함께 쓰기’는 어디까지나 뿌리깊은 부계혈 통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시작된 ‘문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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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이구경숙이라고 합니다. 어머 니 성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상대방 으로 하여금 ‘엄마 성을 따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그토록 친밀 하면서도 아버지의 성만 따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의구 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부모성 함께 쓰기는 이런 대부 분의 사람들에게 다른 상상을 해보도록 자극하는 문 화운동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은 수 십 년에 걸친 두 차례의 가족법 개정에 이어, 본격적으로 호주제 폐 지운동에 다시 불을 당기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99년 4월, 여성연합을 비롯한 4개 단체는 호주제의 문제점과 대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 를 계기로 인터넷과 PC통신은 물론이고 언론매체에서 찬반토론이 또 다시 거세게 벌어졌다. 처음엔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통해 꾸준히 지지세력을 늘려온 데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합리적 토론이 이루어지 면서 호주제 폐지론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여성연 합은 이를 기회로 99년 하반기에 호주제폐지운동본부 를 설치하고, 전국 50여 개 회원 단체들과 함께 호주제 로 인한 피해 사례를 전화로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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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연들이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혼인신고 를 하러 갔다가 남편이 자동적으로 호주가 된다는 설 명을 듣고 호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혼인신고를 않겠노 라 다짐했다는 신혼주부의 불평은 애교스러운 것이었 다. 오빠와 이혼한 올케가 재혼을 앞두고 있는데, 아이 성을 새 아버지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호주가 아이 의 장례를 치르고 사망신고를 해야 한다고 해서 빈 관 을 놓고 장례를 치르며 한참을 울었다는 기막힌 사연 도 있었다. 2000년 여성연합은 호주제 폐지운동을 중점사업으로 정하고, 사이버 호주제 폐지운동, 국정감사 모니터링 등의 활동을 벌였다. 호주제가 여성 만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전체의 문제이며 우리 사회가 성평등 민주사회 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다른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를 발족시켰다. 개별 여성단체들도 단체 특성에 맞게 다양한 활동을 꾸 준히 전개했다. 여성연합의 경우 매년 전국적으로 문화 캠페인을 열고 언론과 저명인사들의 입을 통해 일반인 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사이버상의 지지여론 확 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보수적인 국회를 바꾸기 위 해서는 먼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대선, 총선과 같은 큰 정치적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각 당에서 호주제 폐지를 공약으 로 채택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2002년 대 선에서는 한나라당을 포함해 모든 당의 대선 후보들이 호주제 폐지를 공약으로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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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3일 헌법 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낸 호주제 위 헌소송 또한 호주제 폐지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 요 전략의 하나였다. 이 소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 사 모임이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위헌소송 제기 자체 가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였고, 5년에 걸친 긴 싸움 끝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결 정이 국회에서의 민법 통과를 가속화시켰음을 말할 필 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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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많은 분들이 여성의 지위가높아졌으니 축하한다고 말합니다.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여성이 새롭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다만 ‘제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李兌榮, 1914~1998≫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며, 한국가정법률 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가정 폭력 상담 해결, 유교적 인습에 저항하였다.
이태영은 1914년 평안북도
두 아들과 평등하게 가르쳤다.
운산군 북진읍에서 이흥국과
1931년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
김흥원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모교인
이태윤, 이태흡 등의 형제가
평양 정의여고의 교사가 되어
있었다. 탄광을 운영하던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 후
아버지 이흥국은 그녀가 첫돌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로 겨우 넘겼을 때 사고로 인해
부임하였다. 평양여고 교사 재직
사망하였고 어려운 환경에서
중 평안북도 출신 독립운동가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겸 기독교 운동가 정일형과 만나 집안 살림을 혼자서 꾸려가야
결혼했다. 정일형은 후일 미군
했지만, “아들 딸 가리지 않고
정의 관료로 있다가 해방 후
공부 잘 하는 아이만 끝까지 뒷
정치에 투신했으며, 정치인
바라지하겠다”면서 딸 이태영을 이윤영의 친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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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한국가정법률상담소韓國 家庭法律相談所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법률구조기관이다.
1952년에 치러진 제2회 고등
처음에는 호주제 폐지와 동성
고시 사법과에 합격, 사법시험
동본 금혼령 폐지로 시작하여
역사상 첫 여성 합격자가 되었다. 점차 범위가 확장되었다. 당초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태영
이어 그는 가족법 개정 운동을
의 판사 임명 제청을 건의했지만
주도하여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야당 인사 정일형의 아내라는
이를 이끌게 된다.
사실과 봉건적 여성관으로 인해 대통령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호주제도가 국민 개개인의 이태영은 판사 대신 변호사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점과
개업을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여성 변호사가 된다. 김병로는
조장한다는 점을 지적하여
여러 번 건의했으나 아직 여성
매번 위헌 심판과 헌법 소원을
판사는 시기상조라는 이승만의
청구하였다. 또한 호주제도가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에 호주가 사망하면 장남으로 이태영은 변호사 사무실을
상속되어, 어머니나 누나 등의
개소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가족도 장남보다 위계서열이 낮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
1952년부터 각종 청원서와
제기하였다. 그의 호주제도에
진정서를 통해 가족법개정운동을 대한 위헌심판이나 헌법소원은 시작하였다. 그가 변호사
초기에는 법원에 채택조차
사무실을 개업하자, 최초의 여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변호사라는 점 때문에 ‘법과
청구한 결과 법원에서 그의
인습에 눌려 우는’ 여성들이
호주제 위헌 심판 청구와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호주제에 대한 헌법소원을
이를 계기로 1956년 여성법률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번번히
상담소(현재 한국가정법률
기각시켰다. 아들을 1순위로
Ⅰ
상담소)를 열었다. 이후 30여
하는 호주승계제도는 아들이
년간 “법조계 초년생이 뭘
딸보다 더 중요하다는 관념과
안다고 법을 고치려 하느냐”,
아들이 어머니나 누나보다도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킨다”라는 상위 개념에 놓이는 악습이라고 법조계 비난과 싸워가며 가족법
지적했다.
개정 및 호주제 폐지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를 위해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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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녀의 생전에는 호주제
그가 호주제 폐지 주장을
폐지를 보지 못했지만 이후의
시작한지 51년만에 호주제에
여성운동가들의 꾸준한
대한 수정이 시작되고, 그가
동참으로 결국 1999년 5월
폐지운동을 시작한지 53년만에
여성단체연합의 주도로 호주제
호주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폐지운동본부가 발족되고, 바로 대한민국의 여성단체들이 유엔
1962년 가정법원 설치 운동을
인권이사회에 호주제도의
시작, 그 해 정부에 가정법원
인권침해성에 대한 이견을 제기, 설치를 제안하였으며 1년만인 그 해 11월 5일 호주제도의
1963년 가정법원을 기존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폐지 권고 법원에서 독립적으로 설치하는데 결의가 나왔으며, 2000년 9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22일 호주제 폐지를 위한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
시민연대가 발족하여, 호주제
법정대학 교수가 되어 1971년
폐지 국회 청원이 시작되었다.
까지 근무하였으며 법학 외에 여성 참정권 등의 과목도
2003년 1월 9일 여성부는 호주제 개설하여 가르쳤다. 1963년 폐지 및 ‘가족별 호적편제’도입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의 한
방안을 추진하였고, 2월 16일
사람으로 위촉되어 1977년까지
참여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역임하였으며, 이후 이화여대 호주제 폐지를 ‘12대 국정과제’로 법정대 교수 겸 법대 학장이 되어 선정하였다. 2003년 9월 4일
1971년까지 재직했다.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고, 같은 1966년 8월 여성법률상담소를 해 11월 20일 헌법재판소의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가정
호주제 첫 공개변론이 시작됐다. 법률상담소로 이름을 바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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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5차에 걸친 공개
여자 외에도 가정폭력에
변론 후, 2월 3일 호주제 규정
희생되는 남자 피해자들도 구제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의
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가족법
헌법불합치를 판결내렸다.
관련 상담과 이혼 관련 상담,
이로서 2005년 3월 2일 호주제
가정폭력 피해자 구제 등
폐지를 골간으로 하는 민법
남녀 모두의 권익을 위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인권운동을 하였다.
1976년에는 한국가정법률 상담소로 다시 이름을 바꿔 공익법인이 되었다. 그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한 것은 ‘여권운동은 인권운동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신념하에 이루어야 할 여성권익 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이었다. 그의 운동은 호주제 폐지, 이혼 때 재산분할청구권과 부모친권, 동성동본불혼제 등의 ‘가족법 개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오랜 노력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나타났다. 또한 여성 운동에도 참여하여 이우정, 공덕귀 등과 함께 여성 인권 운동, 여성 노동자 구제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밖에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 회원, 세계여자변호사회 회원으로도 위촉되었고, 범여성가족법개정촉 진회 부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가족법 개정 운동과 여성 운동 외에도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의 무료 변호와 무료 변론을 서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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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서울가정법원과 서부, 남부,
이태영, 호주제 폐지 공론화
북부 법원에 소송 접수)
‘부모성 함께쓰기’ 선언(이효재
서울지방법원 북부· 서부지원,
외 170여 명 동참)
호주제 관련 조항 위헌심판
1997년 3월 9일 1998년 9월 1999년 4월 26일
‘호주제폐지시민모임’ 발족 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가정
1999년 5월
법률상담소·대한여한의사회· 호주제폐지시민모임 등, ‘현행
1999년 11월
제청 결정 국제연합경제사회문화적권리 위원회, 한국 정부에 ‘호주제’ 우려 표명
호주제도의 문제점과 대안
정부,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마련을 위한 토론회’ 개최
개정안’ 국회에 제출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폐지
법무부·대법원, 호주제 폐지 후
운동본부 발족
호적제 대신할 신분등록제도
2000년 7월 2000년 9월 2000년 11월 2001년 4월
국제 연합 인권 이사회, 호주제 폐지에 대한 권고사항 결의 여성계, 호주제 위헌소송을 위한 원고인단 모집
2001년 5월 2004년 6월
1항), ‘호주의 정의’(778조), ‘처의 부가 입적’(826조 3항)
발족(137개 단체 참여)
대해 헌법불합치 선고
국민 2만 6천 156명의 서명을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 국회 통과
청원서’ 국회에 전달(소개 의원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를 위한
한명숙·이미경·박근혜 의원)
제반 여건 마련 후 개인별
2005년 3월
호주제 규정한 민법 조항에 2008년 1월 1일
헌법재판소, ‘자의 입적’(781조
등을 규정한 민법 조항에
받아 ‘호주제 폐지에 관한 국민 2005년 2월
국회에 제출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연대’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연대’, 2005년 1월 25일
‘본인 기준의 가족기록부’
신분등록법 시행
대한 위헌소송 제기(이혼 여성의 자녀입적관련, 현 남편이 호주로 되어 있는 것을 무호주로 변경하기로 한 사례를 택해 총 13건을 55
“주동자가 따로 없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다.”
제 1장 어디에도 없는 여성들
Ⅳ 동일방직 노조운동 1978년 2월 21일~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70년대 노동운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전형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일방직사건은 단순한 노동운동차원을 넘어 생존권적 요구조차 억압하는 유신체제에 대항한 반유신 민주화운동이며, 인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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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자가 따로 없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다.”
1930년대 일본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였던 동양방적 인 천공장에 뿌리를 둔 동일방직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섬유회사였다. 이 회사에는 일찍이 1946년 노조가 결성 되었는데, 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이었지만 1972년까 지 23대에 걸친 역대 위원장은 모두 남성이었다. 1972 년 5월10일의 동일방직 노조의 정기 대의원 대회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여성 후보인 주길자가 3회에 걸쳐 위 원장을 역임했으며 회사의 지원을 받는 남성 후보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지부장에 선출된 것이다. 당시 한국 노총 산하 448개 지부의 조합원은 총 49만9천명으로 그중 여성은 12만4500명에 달했지만,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성이 다수인 사업장 에서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는 것은 지금에는 당연한 일 로 보일 수 있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한 인식이 극 히 미약한 1970년대에는 하나의 사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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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여성 집행부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지만, ‘ 얼마나 가나 보자’ 하는 분위기였지 꼭 적대적으로 대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주길자는 이전 어용노조의 부 녀부장이었지만, 지부장이 된 뒤에 노조비 지출 명세( 내역)를 공개하고, 현장 활동을 강화하는 등 이전의 남 성 지부장 집행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노조를 운영했다. 주길자 집행부의 출현은 중앙정보부의 지시 아래 일사불란하게 노동자들을 통제해오던 한국노총 섬유연맹 체제에 균열을 가져오는 사건이었다. 회사나 남성 노동자들은 1975년 초의 선거에서 지부 장 자리를 탈환하기를 원했으나, 여성 종업원의 생리휴 가, 회사 창립기념일의 유급 휴일화, 기숙사 온수시설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주길자 집행부의 총무부장이었 던 이영숙이 노조지부장에 선출되었다. 임기 3년의 지 부장에 또다시 여성이 당선되자 회사와 남성 노동자들 은 매년 선출하는 대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여 여성 집 행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노조 집행부를 교체 하려 했다. 중앙정보부는 정부에 협력적인 한국노총의 통제를 벗어나는 민주적인 노조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 다. 중앙정보부는 회사와 남성 노동자들을 부추겨 이 영숙 집행부를 와해시키려 했다. 1976년 7월23일 인천 동부경찰서에서 이영숙 지부장 을 연행해 간 가운데 회사의 지원을 받은 남성 노동자 들은 자파 대의원만으로 대의원 대회를 열어 현 집행부 를 불신임하고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임했다. 회사 쪽은 조합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기숙사 문에 못질을 했으나, 조합원들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등 기숙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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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와 농성에 들어갔다. 오후 2시 출근자들이 농성 에 합세할 기미를 보이자 경찰은 이영숙 지부장과 이총 각 총무부장을 석방했다가 작업이 시작되자 이들을 다 시 연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밤 10시 퇴근자들은 연행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밤샘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농성을 한 것이지 파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놈의 법(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이 그따위로 생겨 먹었는지 파업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이었다. 착한 노동자들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 기 위하여 교대로 8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16시간을 농 성하고 다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회사는 수도를 잠그고 전기를 끊고 화장실 문까지 잠가버렸 다. 농성이 사흘째로 접어들자 더위와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이 그 상태로 법을 지킨다고 작업장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은 “법이고 개나발”이고 가릴 것 없이 전면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노동자들이 어마어마 한 ‘불법’을 저지르자 바로 경찰이 투입되었다. 지금 우 리야 너무나 닭장차와 전투경찰에 익숙해져 있지만, 이때만 해도 노동자들이 경찰과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 었다. 여기저기서 어린 노동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남성중심 동일방직 어용노조에 여성 집행부가 들어서 고 민주적 노조로 탈바꿈하자회사·중정의 탄압이 시작 됐다. 불법 파업으로 맞선 여성들은 알몸시위까지 하 며 버텼지만 결과는 연행과 해고였다. 절정은 1978년 똥물사건이었다. 회사 지원을 받는 남성들이 여성들에 게 똥물을 퍼부었고 팔짱끼고 지켜보던 경찰은 말했 다. “이 쌍년아, 이따가 말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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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한발 한발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섰다. 경찰은 “ 주동자만 내놓으세요. 주동자만 내놓으면 여러분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라며 노동자들을 회 유했다. 노동자들은 “주동자가 따로 없다. 우리 모두 가 주동자다”라며 맞섰다. 회사 간부들은 경찰에게 손 가락으로 누구누구가 조합 간부이며 주동자라고 연행 대상자를 찍어주었다. 그때 누군가가 급박하게 소리쳤 다. “옷을 벗자! 옷을 벗은 여자 몸에는 경찰이 손을 못 댄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 벌어졌다. 20대 초반이 대부분인 여성 노동자들이 수많은 경찰과 회사 간부들 앞에서 스스로 작업복을 벗어던진 것이다. 한 여성 노 동자는 이렇게 썼다. “내가 옷을 벗다니! 그것도 많은 남자들 앞에서!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 기가 나왔는지 끔찍하면서도 놀라울 뿐이다. 부끄러 운 걸 따지자면 벗은 우리보다도 무자비한 폭력을 휘 두른 그놈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경찰은 속옷 바람으로 맞선 여성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끌어갔다. 노동자들이 끌려 간 빈자리에는 벗어던진 작업복과 주인 모를 운동화, 작업모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소동으로 70여명의 노동자가 연행되었고, 40여명이 까무러쳤다. 두 사람 은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중 한명은 오빠를 보면 경찰이라고 비명을 지르는 등 상태가 심해 5개월 뒤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동일방직은 당시 작업환경이 좋은 공장으로 알려져 있 었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일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처음 공장에 가본 사람들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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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운 정원 등 깨끗한 환경에 놀라지만,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먼저 후끈한 40도 열기에 숨이 막히게 되었다고 한다. 굉음을 내며 돌아 가는 기계 소리에 사람들은 고무로 된 귀마개를 끼고 있었고, 악을 써도 잘 안 들리기 때문에 호루라기를 불 어 의사소통을 했고, 솜에서 나오는 자욱한 먼지가 눈 과 코와 입으로 들어와 생지옥이 따로 없는 느낌이었다 고 한다. 하루 8시간 1일 3교대는 공부도 할 수 있는 좋 은 조건인 듯싶지만, 그만큼 노동 강도가 셌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일방직 입사자들이 처음 받은 훈련은 1분 에 140보라는 거의 뛰는 수준으로 기계 사이를 빨리빨 리 돌아다니는 것이었다고 한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50여명은 3월10일 장충체육관에 서 개최된 근로자의 날 기념식이 전국에 TV로 생중계 될 때 일어나 “우린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문 제 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들이 얻어터지고 머리채를 휘어잡히며 구호를 외친 바람에 생중계는 세 차례나 중단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연행되었지만 연행을 면한 사람들은 명동성당으로 가 단식농성에 들 어갔다. 단식농성 14일 만에 김수환 추기경 등의 중재 로 농성을 풀고 회사로 복귀하기로 했으나, 회사는 오 랜 단식으로 몸이 축난 노동자들이 회복할 시간도 주 지 않고 굴욕적인 사실상의 노조탈퇴 각서를 요구하고 각서에 서명하지 않자 무단결근을 이유로 126명(2명 은 자진퇴사)을 해고했다.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는 부서, 주민등록번호, 본적까지 기재한 동일방직 해고 자 126명의 명단을 ‘업무 집행에 관한 참조사항’이란 문 서로 만들어 이를 전국의 노조와 사업장에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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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른바 ‘블랙리스트’의 시초였다. 블랙리스트는 돈을 벌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었던 그들에게 사형선고 나 다름없었다. 여성 지부장이 출현하고 남성 중심의 어용 노동조합이 여성 집행부가 주도하는 민주적인 노조로 탈바꿈하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여자도 능히 지부장 노릇 을 할 수 있다, 아니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증명되었다. 여자들이 집행부가 되니까 먼저 생 리휴가도 찾을 수 있고, 월차도 돈으로 주던 걸 찾을 수 있게 되고, 화장실도 조금은 자유롭게 가게 되고, 현장 관리자들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횡포 같은 것들이 많 이 없어지고, 식사 시간도 생기게 되고, 식당 메뉴도 달 라지고, 노동자하고 사무원하고 식당이 따로 분리되었 던 것도 하나로 통합되는 등 실생활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조합원들이 너나없이 노조 사무실로 달려와 옷을 벗어던지면서까지 처절하 게 싸운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가져다준 지도부를 지 키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 대중운동사에 다시없는 눈물 겨운 지도부 보위투쟁은 지금 우리에게 왜 민주정권이 실패했는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가슴 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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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든 가해자든 모든 사건에서
Ⅰ 부천서 성고문사건 Ⅱ 변월수 사건 Ⅲ 김부남 사건 Ⅳ 김보은 김진관 사건 Ⅴ 신교수 사건
제 2장 여성만 남은 사건들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
제 2장 여성만 남은 사건들
Ⅰ 부천서 성고문 사건 1986년 6월 4일 부천경찰서의 경장이던 문귀동이 조사과정에서 대학생 권인숙을 성적으로 추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공권력이 추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권력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인한 사법부와 언론의 부도덕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또한 군사정권의 언론 통제 수단 보도 지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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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
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은 경기 부천 시 소재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라는 친지의 이름으로 취업한다. 이른바 위장취업이다. 이듬해 6월 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경기 부천 경찰서에 연행된다. 관련 사실을 거리낌없이 시인했으 므로 그 다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6일 새벽과 7일 심야 두번에 걸쳐 조사계 형사 문귀동 은 뜻밖에도 5·3인천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추궁하면 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행과 고문을 자행했다. 자 신의 성기를 고문의 도구로 쓰면서 뒷수갑이 채워진 저항불능 상태의 여성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협박했던 것이다. 권인숙은 극한적인 수치심과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며칠간 고통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던 권인 숙은 드디어 다시는 이 땅에 추악한 공권력으로부터 희생당하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중대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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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에 이른다. 조영래·홍성우·이상수 등 변호사들이 접견을 하러 찾아왔다. 권인숙은 젊은 미혼 여성으로 서의 수치심과 앞으로 받게 될지 모를 엄청난 수난을 각오해야 했다. 공권력의 추악한 타락상은 조영래 등이 작성한 고발 장에 의해 삽시간에 전국에 알려졌다(그녀는 사건 진 상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이름 없이 ‘ 권양’으로만 불렸다). 7월3일 권인숙은 문귀동을 고소 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바로 이날 그녀는 공·사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다. 문귀동은 이를 틈타 곧바로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권인숙을 맞고소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검찰은 7월16일 수사결과 발표에 서 권인숙이 성적불량자, 가출자이며 급진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 말쟁이라고 매도했다. 아울러 고소·고발장에 나타난 문귀동의 혐의는 인정되지 않아 기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국의 보도지침에 따라 각 신문의 1면은 ‘성 적 모욕 없었고 폭언·폭행만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채 워졌다. 이에 변호인단은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치의 거짓 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 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도 결 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한 편 야당과 재야가 연대해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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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책위원회’는 토요일인 7월19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에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개최 했다. 명동은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몸 싸움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다. 7월27일 서 울 성공회 집회를 시작으로 청주·이리(익산)·부산·대 전·광주로 이어졌다. 8월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 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 성하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낸다. 이 재정신청을 심리 한 서울고법은 10월31일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발장의 범죄내용 대부분을 인정했지만,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 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라는 권 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 고, 따라서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 다는 것이었다. 조영래 등은 재정신청 사건과는 별개로 9월1일 권인숙 의 변호를 위해 199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법정에 서 진실을 가릴 준비에 임한다. 12월1일 인천지법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다. 이날 선고가 끝나자 부천경찰서 성고문공동대책위는 “싸움은 이제 부터다. 성을 도구화한 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라 군사 독재와 그 하수인임이 드러났다”며 방청객과 함께 어 용 재판부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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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2월 항소심 법정에서 분노는 폭발했다. 민가협 회원 이중주(민정당사 점거사건로 구속된 서울대생 이기정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권인숙의 진술을 도중에 막는 것을 보고 격분,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 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고 고성으로 항의했다. 법 원 정리에게 끌려나가던 중 그녀는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외쳤다. “이 더러운 군사독 재의 시녀들아.” 이틀 후 그녀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신성한 법 정을 모독한 죄였다. 구치소에 입감되는 순간, 그녀는 외쳤다.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이 엄마가 너희 곁으 로 왔다. 권인숙 재판부 하고 싸우다 들어왔다. 엄마 가 왔으니 같이 더욱 힘내서 싸우자.” 복도 양쪽 방에 서 함성과 환영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 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 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 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 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 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 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변론 요지서) 대법원은 6월 항쟁 이후인 88년 2월9일 끝내 재정신청 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은 89년 6월 사건 발생 3년 만 에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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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22살 처녀가 폭력적인 정치권력 과 정면으로 대결해 결국 승리한 사건이었다. 군사정 권의 총체적 부도덕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국내외에 알 린 지극히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권력의 수족으로 전 락한 검찰과 경찰, 이들을 원격조종하는 정체불명의 공안당국, 당근에 길들여진 언론, 불의한 권력 앞에 한 없이 나약한 사법부 등등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민족모순이 먼저냐, 계급모순이 먼저냐는 운동론으로 분열돼 있던 진보진영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여성문제는 격렬한 정치투쟁에 가려 져 있었으나, 이 사건은 이후에 활발한 페미니즘 담론 을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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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아니라면 내 혀를 깨물고 죽겠어요. 진실을 밝혀주세요. 진실을 밝히는 것과 내 목숨을 바꾸겠어요.”
Ⅱ 변월수 사건 1988년 2월 26일 신성학(남·19)과 권순준(남·18·학생)이 변월수를 성추행한 사건 및 변월수가 이를 방어하고자 추행범의 혀를 깨물어 절단케 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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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아니라면 내 혀를 깨물고 죽겠어요. 진실을 밝혀주세요. 진실을 밝히는 것과 내 목숨을 바꾸겠어요.”
1988년 9월. 88서울올림픽을 며칠 앞두고 온 나라가 설렘으로 가득했던 가을. 한 여성은 그 누구보다도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119일의 구금에서 풀려나 안 동 교도소 문을 나선 그녀는 울부짖었다. “진실을 밝혀주세요. 진실을 밝히는 것과 내 목숨을 바꾸겠어요. 공소장이나 판결문은 사실과 전혀 달라 요. 너무 억울하고 분해요.” 이 여성의 이름은 변월수. 일명 ‘변월수 사건’으로 불리 는 이 사건은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인 성차별적 인식 이 사법부의 편견으로까지 이어진 사건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 사건은 2년 뒤 ‘단지 그대가 여자라 는 이유만으로’(감독 김유진·주연 원미경)라는 영화 로도 제작될 정도로 대표적인 성차별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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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이렇다. 가정주부 변월수씨가 새벽 1시 귀가를 하던 중 청년 2명이 음부를 만지고 강제로 키스하자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케 했다. 가해 청년 부모는 ‘ 화냥년’이라고 비난하며 변씨를 고소했다. 당시 이 부 모는 잘린 혀가 담긴 알코올 병을 꺼내 보이며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변씨는 1심 선고공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죄’를 적용,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가해자 측 변호인은 ‘주부가 술을 마시고 늦은 시간에 귀가했다’, ‘가정불화를 일으 키는 문제가 많은 여자였다’는 등 사건의 중심에서 벗 어나 변씨를 부도덕한 여성으로 몰아세웠다. 판결문 또한 검사와 판사의 남성주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했 다. 상가가 밀집돼 있고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니 여 성이 공포에 질려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 이 그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변씨 개인의 재판이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걸린 재판이나 다름없었다. 여성신문은 이 사건과 관 련한 갖가지 억측과 뜬소문을 바로잡고 사건의 진상 을 밝히기 위해 입체적이고 다각적인 현장 취재에 나 섰다. ‘2천만 여성이 분노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변 씨와 남편 김순일씨의 인터뷰 기사를 포함해 현장 취 재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피해자 변씨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진실과 목숨을 바꾸겠다” 며 “공소장과 판결문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호소했 다. 그녀의 남편 김순일씨 또한 변씨의 무죄 석방을 위 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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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성계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구형에 변씨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하고 나섰다. 여성의전화에서는 여성폭력 추방을 위한 긴급 시민 대 토론회(‘강간에 대한 정당방위도 죄인가’)를 개최하는 등 변씨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여성의전화 는 대구 지역 여성단체, 여성단체연합 등과 힘을 합쳐 승소할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조창영·강기원 변 호사 등도 무료 변호를 자청,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공동 투쟁을 벌였다. 결국 변씨는 항소심에서 승소, 무죄판결을 받았다. 대 구 고등법원 형사부는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정조와 신체의 안전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엉겁결에 추행범의 혀를 물어뜯게 된 것이라면 피고인 변월수의 이 같은 행위는 그 자신의 성적 순결 및 신체에 대한 현재의 부 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원 심을 파기,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기존의 판례를 뒤엎고 여성의 성과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보호 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 귀중한 선례를 남겼다. 당시 여성의전화 공동대표였던 노영희씨는 “이번 승소는 성 폭력을 추방하는 승소 판례로 여성운동사에 오래 기억 될 것이며 변월수씨 개인의 승리를 넘어 전체 여성의 승 리”라고 전했다. 이화여대 장필화 여성학과 교수는 여 성신문에 ‘안동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기고문 에서 “이 사건은 강간이 살인, 강도 등과 같은 중형으 로 간주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판결은 사건 의 상황이나 피해자의 인적 상황 등에 대한 주관적 판 단이 중시되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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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님, 만일 또다시 이런 사건이 제게 닥친다면 순순히 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여자들에게 말하겠습니다. 반항하는 것은 안 된다고, 재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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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제 2장 여성만 남은 사건들
Ⅲ 김부남 사건 1991년 1월 30일 김부남 사건은 어린이성폭력 피해자 김부남씨가 21년전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찾아가 살해한 사건.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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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1970년대 대한민국에는 ‘어린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윤리가 강하 게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남존여비, 남성 중심의 사고와 관행이 팽배해 수많은 ‘여자 어린이’가 유·무형의 차별과 희롱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 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홉 살 김부남이라는 여자 어린이였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녀의 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늘 이웃집 송씨 아저씨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남 어린이가 혼자 물을 길으러 갔고 집에 있던 35세 송백권씨가 ‘심부름 좀 시킬 테니 잠깐 들 어오라’며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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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안방에 들어간 부남이를 덮 쳐 강간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죽을 것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던 부남이에게 송씨는 “오늘 일은 아무에게 도 말하면 안 된다. 말하면 너도 죽고 네 부모와 오빠 도 다 죽는다”라고 위협했다.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 지만 자신과 가족에게 더 나쁜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 한 부남이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제 대로 걷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하며 질문하는 가족과 이웃, 학교 선생님에게는 ‘그냥 좀 다쳐서 아픈 데 괜찮아요’라며 얼버무렸다. 그렇게 10일 정도가 지 나자 하체의 상처는 거의 아물고 걷는 것이 전처럼 자 연스러워졌다. 하지만 부남이는 다시는 물을 길으러 송씨네 집에 가 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사정하다가 부모에게 혼나는 일이 잦아졌다. 지나치게 화장실을 자주 찾고 밤에 오 줌을 싸며 툭하면 멍하니 정신 줄을 놓는 등 이상 행동 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누구도 따 뜻하고 친절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왜 그러는지 를 물어보지 않았다. 부남이는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 고, 친구와 놀이나 대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 게 늘 불안하고 우울한 외톨이로 초등학교 생활을 마 쳐야 했다.당시에 많은 가난한 집 딸들이 그랬듯이, 김 부남 어린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척이 소개 한 서울 어느 부잣집 가사 도우미 일자리를 얻어 상경 했다. 주인집 가족은 친절했지만 어린 나이에 낯선 서 울, 그것도 남의 집에 와서 하루 종일 밥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면서 지내는 삶은 고달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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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짐승 같은 이웃집 송씨 아저씨에게 당했던 악 몽 같은 사건 현장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 유일한 위안 이었다. 하루 종일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번 돈은 고 스란히 고향집 부모에게 보내져 남자인 오빠의 학비 로 쓰였지만 부남이는 불평도, 불만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운명이고 자기 몫의 삶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춘기를 넘어 청소년기가 되면서 세상을 조 금씩 알게 되고 방송 등에서 접하는 남녀 관계 모습이 김부남씨의 상처를 후벼파며 삶 전체를 뒤흔들기 시 작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당한 그 일이 어떤 범죄 이며 무슨 의미를 갖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민감 한 10대의 감수성과 오랜 기간 남의집살이를 해온 데 따른 마음의 상처에 더해진 성폭력 피해 후유증은 김 부남씨의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김부남씨는 스무 살이 되면서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 고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부모는 그 당시 대개의 부모들이 그랬듯 중매쟁이를 통해 부남씨의 상대를 찾아 결혼을 시키게 된다. 결혼과 함께 남들처럼 ‘평범한 행복’이 찾아올 줄 알았 던 김부남씨. 하지만 아홉 살에 당한 성폭행 피해는 여 전히 현재 진행형이었고 남편의 손길이 마치 강간범 송백권씨의 더러운 그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 해도 부부 관계를 할 수가 없었다. 당황하고 분노한 남편에게 어렵게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남편은 이해 도, 공감도 하지 못했다. 10년이 넘게 지난 일이고, 어 린 나이에 겪은 일을 왜 아직 극복하지 못하느냐는 의 문과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남편은 처갓집으로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리며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 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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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하소연했고, 부남씨 가족은 처음으로 성폭행 피 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남씨 부모는 딸을 데리고 가까운 대도시 병원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의 사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중얼거리며 이야기하다 가도 머리가 아프다고 회피하는 등의 증상을 근거로 ‘ 정신분열증’ 진단을 내리게 된다. 이후 한 달간 통원 치료를 받았지만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결혼 두 달 만에 이혼을 요구한 남편의 뜻을 받아들여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 었다. 이후 두 번째 결혼에도 유사한 문제가 반복되며 불화와 갈등을 겪게 된다.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과 문 제의 원인인 아홉 살 때 당한 성폭행에 대한 처벌 방법 을 찾기 위해 밤새 법률 서적을 뒤지며 고소 준비를 하 는 부남씨에게 남편은 ‘공소시효가 지나서 소용없을 것’이라며 다 잊으라고 말리기만 했다. 경찰을 찾아 문의를 해도 ‘공소시효도 지났지만, 강간 은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인데 이미 고소 기한인 6개월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는 답을 듣게 되자 부남씨는 절망하게 된다. 아 홉 살 어린 나이, 자신이 당한 피해가 어떤 의미를 가 진 것인지도 몰랐고, 누구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몰랐던 피해자의 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는 ‘ 가혹한 법’이었다. 분노와 좌절에 빠진 부남씨의 이상 행동과 상황에 맞 지 않는 부적절한 반응들은 다시 ‘정신분열증’ 진단으 로 이어져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만들었 다. 첫 결혼과 달리 두 번째 결혼에서는 남편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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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갖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때마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떠올라 소리를 지르고 남편을 밀쳐대는 발작 증세가 더 심해질 뿐이었다. 결국 남편과의 불화는 심해져만 가고, 가정 경제도 파 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 강간 피해 때문이라고 생각한 김부남씨는 자신을 성폭행한 송백권씨를 향해 폭언과 협박을 퍼부어보았지만 상황 은 나아지지 않았다. 송씨는 자신의 범행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며 김부남씨 의 오빠를 통해 40만원을 합의금조로 내밀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실의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피해자 김부남씨를 위해 진실을 찾고 정 의를 구현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웃집 아저씨 송백권씨로부터 강간 피해를 당한 지 20년이 지난 1991년 1월30일, 김부남씨는 경찰이나 국가가 포기한 강간범 처벌과 ‘정의’ 실현을 스스로 해 내기로 작정했다. 더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삶이 망가져 미룰 수가 없었다. 시장에 나가 부엌칼과 과도 를 사고 낡은 손가방을 잘라 칼집을 만들어 허리띠 양 쪽에 찼다. 송씨가 밤이면 문을 모두 잠그고 열어주지 않기 때문 에 해가 지기 전에 찾아가야 해서 길을 서둘렀다. 김부 남씨는 송씨의 집으로 찾아가 문밖에 서서 ‘할 말이 있 으니 친정집으로 오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송씨는 ‘이 미 40만원 주고 합의 봐서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왜 또 그러느냐’며 마구 욕설을 퍼부어댔다. ‘집으로 오는 것 이 겁나면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하자’는 김부남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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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에 송씨는 ‘미친 여자’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응수했다. 김부남씨는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가 코트 자락을 제치고 부엌칼을 뽑아들었다. 중풍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였던 송 씨는 소리를 질러댈 뿐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 였다. 김부남씨는 송씨의 성기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찌르고 휘두르고 또 찔렀 다. 송씨의 필사적인 마지막 방어 행동에 부엌칼을 빼 앗기게 되자 김씨는 주저 없이 허리춤에서 과도를 꺼 내들고 다시 하복부 쪽을 향해 마구 공격했다.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 소리에 놀란 이웃 주민들이 달려와 김 부남씨를 뒤에서 붙잡고 칼을 뺏으려 하자 김부남씨 는 온 힘을 다해 칼을 뺏기지 않으려 애썼다. 김부남씨의 송백권씨 살해 사건 혐의를 입증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지켜주지도 못 하고 강간범을 처벌해주지도 않는 법을 대신해 아동 성폭행 피해자가 스스로 나섰다는 점과 아동 성폭행 피해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는 사실 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김부남씨가 법 정에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라고 진술 했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피해자의 가해자 살해 행 위의 처벌 여부와 정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1991년 8월26일 1심 법원은 김부남 피고인에 대해 ‘원 래 가지고 있던 내성적이고 정신분열증인 성격이 아홉 살 때의 강간 경험으로 인하여 더욱 정신분열성인 성격 으로 발달되었고, 이러한 치명적인 경험이 적절히 치유 되지 못하여 결혼 후에도 정상적인 성생활이 어려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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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이혼으로 충격을 받게 되면서 증상이 악화되었 다. 아홉 살 때의 강간 경험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로 발전하고 이상한 행동, 부적절한 정서, 흥미의 결 여, 심한 사회적 고립과 위축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잔 재형 정신분열증 환자로, 이 사건 범행 당시에도 이와 같은 증상이 갑자기 발현되면서 억제할 수 없는 충동 에 의한 행동의 장애를 보였던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다만 범행에 사용된 칼 두 자루의 구입 경위와 칼집을 만든 경위 등 그 범행의 계획성, 범행 당시에 1차 식칼 을 뺏기자 과도로 재차 피해자를 가해하는 등의 범행 방법과 수단, 그 범행 동기와 경위, 시간과 방법 등을 논리 정연하게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 등을 종 합할 때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 어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심신 상실’의 상태가 아 니라 감형의 대상인 ‘심신 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인정 했다. 법원은 징역 2년 6개월(살인죄 최저 형량인 5년 의 절반)을 선고하고 그 집행을 3년간 유예하면서 1년 간의 치료 감호 명령을 내렸다. 항소심과 대법원 최종 심에서도 항소와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그대 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지방지에 조그만하게 보도가 되었고, 이해 4월 10일, 전북지역의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김부남씨 의 무죄석방을 위한 활동의 필요성이 논의되면서 〈김 부남 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 다. 대책위는 김부남씨 면회와 가족면담, 공동변호사 구성, 공판 참관,판사 면담, 기자회견 등을 통한 각 언 론사 홍보, 서명작업, 후원회구성과 기금마련 활동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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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성폭력 피해에 관한 사회적 인식전환의 필요성과 성폭력관련특별 법제정을 촉 구하는 활동도 함께 하였다. 이 사건은 어린이성폭력의 후유증을 극명하게 보 여준 사례이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짐 승을 죽였다”라는 김부남씨의 절규는 당시 성폭력 의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고, 성폭력은 몇몇 운이 나쁜 여성의 문제라는 일반인들의 척박한 인식전 환에 크게 기여를 했다. 전주지역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김부남 사 건 대책위원회〉의 활동은 우리나라 성폭력 추방운 동에 박차를 가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다. 특히 김 부남 후원회는 이후 성폭력예방치료센터(1994년 개소)의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어린이 성폭력피해자 김부남씨 사건은 다음해에 일어난 김보은. 김진관사건과 함께 성폭력특별법을 제정 하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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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후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20년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더 이상 밤새도록 짐승에게 시달리지 않았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Ⅳ 김보은·김진관 사건 1992년 1월17일 ~1998년 7월 16일 김보은,김진관 사건은 그 동안 금기시되어왔던 근친성폭력의 엄청난 실상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전년도에 일어난 김부남사건과 함께 우리나라 성폭력에 대한 인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덧붙여 1993년에 제정된 성폭력 특별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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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후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20년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더 이상 밤새도록 짐승에게 시달리지 않았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1992년 1월17일 자정 무렵, 충북 충주시에 있는 한 가 정집에서 경찰서로 다급한 ‘강도 신고’ 전화가 걸려왔 다. 인근 파출소에서 경찰이 출동했을 때 강도는 이미 사라지고 방 안이 온통 어지럽혀져 있는 가운데 집주 인인 듯한 성인 남자가 속옷 바람으로 여러 군데 칼에 찔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방 안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 워 있었다. 이미 사망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신고자 인 대학생 딸은 겁에 질렸는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 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 았다. 울지도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곧이어 응급구조대와 형사들이 도착해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 현장 조사가 실시되었다. 잠시 후 출동한 현장감식반은 지문과 족적 등 증거 수집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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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여러 차례 칼로 찌르고 온 방을 뒤져 금품을 훔쳐간 강도가 여대생 딸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 다는 점, 심야에 강도가 들었는데 베란다나 창문 등 외 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는 점, 사망한 피해자에 게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고, 돈을 노린 강도답지 않게 다짜고짜 자고 있는 피해자를 여러 차례 찔러 ‘확실하 게’ 살해한 점 등이 일반적인 강도 사건 현장과 달랐던 것이다. 흉기와 집 안 여기저기에서 발견된 지문 중 가족 아닌 사람의 것이 확인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조회 결과 피해자의 딸과 같은 대학에 다니는 ‘김진관’이라 는 21세 남자 대학생이었다. 사건 이틀 후인 1월19일, 경찰은 김진관을 체포한 뒤 피해자의 딸인 김보은양을 불러 아는 사람인지 확인하려 했다. 체포된 김진관을 본 김보은양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일으켜 세 워주기 위해 다가간 형사에게 김보은양은 “제가 그랬 어요, 제가 범인이에요”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후 김보 은양도 체포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학교 가 는 시간만 빼고는 집 안에 꽁꽁 묶여 지내다시피 했던 김보은양은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는 캠퍼스 생활이 너무 좋았다. 특히, 학교 행사에서 우연히 만난 친절한 남자친구 김진관군은 처음으로 세상이 따뜻하고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김진관군도 상냥하고 겸손한 김보은양과의 만남이 너 무 좋았다. 둘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에 대한 호감이 우정으로, 우정이 연정으로 바뀌어가 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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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둘 사이가 가까워지고 행복감을 느낄수록 보 은양의 가슴 한쪽에서는 어둡고 무거운 그 무엇이 마 치 암 덩어리처럼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보은양이 진관군에게 털어놓았다. “진관아, 미안해. 그동안 숨겨온 사실이 있어. 난 더러운 여자야. 난 너 한테 어울리지 않아.” 아주 힘겹게, 눈물과 함께 천천 히 털어놓은 보은양의 고백은 충격 그 자체였다. 9살 어린 나이부터 12년 동안 함께 사는 의붓아버지에 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내용이었 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가슴속 응어리를 알게 된 진 관군도 보은양의 아픔과 슬픔, 고통을 공감하며 오열 했다. 둘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밤새도록 울었다. 진 관군은 보은양에게 ‘괜찮다’고 했다. 지나간 과거는 과 거일 뿐 서로 사랑하며 앞으로 잘 지내면 되는 것이 아 니냐고 했다. 진관군의 참사랑에 감동하면서도 의붓 아버지에게 짓밟히고 더렵혀진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던 보은양은 한사코 헤어지자고, 자신을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진관군은 그런 보은양을 설득했다. 진심 어린 진관군의 다짐과 설득에 보은양도 마음을 열었다. 둘 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 지만 어두운 과거보다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현재와 미래’, 즉 여전히 보은양을 성적 노리개로 여기며 소유하고 있는 의붓아버지가 남자친구의 존재 를 인정하고 교제를 허락하며 자신을 놓아줄 것 같지 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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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굳게 먹은 진관군과 보은양은 함께 보은양의 의붓아버지 김영오씨를 찾아갔다. 간절하고 애절하 게 눈물 어린 호소를 했다. 둘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 고 서로 아끼고 의지하며 교제할 테니 둘 사이를 인정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김영오씨는 완고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자꾸 그러면 둘 다 죽여버리거나 잡 아넣어버리겠다’라며 겁박했다. 젊은 연인이 상대하 기에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 총무과장이었던 김영 오씨는 너무 강하고 노회했다. 진관군은 보은양에게 ‘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고 그동안 김영오가 저지른 모 든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보은 양은 ‘아버지는 검찰 간부라서 경찰도 손대지 못한다. 소용없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어린 시절 너무 무섭고 아파서 경찰에 신고해보았지만 집에 찾아와 김영오씨에게 꾸벅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경 찰관들을 보며 좌절했던 경험도 얘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검찰은 그 누구도 건드리 지 못하는 성역’이었다. 아예 ‘대검찰청 예규’에 법무부 소속 직원의 범죄 혐의는 오직 검찰만 수사할 수 있다’ 고 명시하기까지 했을 정도이다. 두 사람은 절망했다. 근친 강간범이 이미 대학생이 되어 연인을 만난 의붓 딸을 옥죄며 통제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가 막강한 검찰 간부 신분이다 보니 경찰도, 그 누구도 구하거나 도와줄 수 없는 암담한 처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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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좌절감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갈등과 고민, 망 설임 끝에 끔찍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근친 강간범 김 영오를 살해하고 강도로 위장한 뒤 ‘자유를 찾자’는 계 획이었다. 그러나 살인 범행은 성공했지만 강도 위장 은 실패해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김영오가 김보은양 의 의붓아버지가 된 것은 보은양이 일곱 살 때 보은양 어머니와 김영오가 결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 2 년간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보은양이 아홉 살이 되던 때부터 김영오의 성폭행이 시작되었다. 한두 번 이 아니었다. ‘의붓아빠’의 탈을 쓴 짐승 김영오는 수시 로 어린 보은양을 성폭행했고, 처음에는 보은양 엄마 몰래 은밀하게 성폭행을 했지만 한 번 들킨 뒤로는 아 예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성폭행을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엄마와 어린 딸을 동시에 성폭행하는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김영오는 보은양이 열두 살이 된 이후 로는 생리 중에도 성폭행을 했고, 목욕을 하고 있는 중 에도 밀고 들어와 성폭행을 했다. 거의 매일 성폭행을 했던 것이다. 때로는 음란 비디오를 가져와 보여주며 그대로 따라 하기를 강요하는 등 온갖 변태적이고 가 학적인 성행위를 요구했다.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 워 경찰이나 지인에게 알리려 시도하기만 하면, 김영 오는 식칼과 쥐약을 가지고 와 ‘다른 사람에게 한마디 만 뻥긋 하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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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직원으로 지역의 권력자였던 김영오는 실제로 모 녀를 죽여버리고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고 무마해버 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12년간 김보은양 모녀 는 짐승 같은 김영오에게 지배당한 채 성적 노리개로 능욕당하고 짓밟히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 다. 아들의 체포 소식은 김진관군 부모에게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 누구보다 착하고 순해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해치치 않는 성격인 아들이 ‘살 인’을 저질렀다니,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경찰서 유 치장을 찾아가 아들을 면회하고 담당 형사를 만나 전 후 사정을 알게 된 진관군의 부모는 충격을 딛고 아들 을 도울 길을 찾았다. 그때 떠오른 것이 1년 전에 발생했던 아동 성폭행 피해 자 김부남씨의 가해자 송백권 살해 사건이었다. 당시 에 김부남씨를 위해 성명서를 발표하고 거리로 나서며 몸을 아끼지 않고 발 벗고 나섰던 ‘한국성폭력상담소’ 를 찾아가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라며 도움을 호소 했다. 곧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지원 단 체와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어 ‘김보은·김진 관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2명의 무료 변호인단도 구성되었다. 대책위원회와 이들은 또 1년 전 발생한 김부남 사건과 연계해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성폭행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성폭력특별법’을 제정 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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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으로 가득 찬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 호인단은 “막강한 권력자인 검찰 간부 가해자에게 항 거할 수 없고 경찰 등 외부의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 태에서 지속적인 성폭행과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김보은양과 그녀를 도운 김진관군의 행동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에 해당해 무죄이다” 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정당방위’를 인정하 지 않았다. 1년 전 김부남 피고인의 경우와 달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정신장애로 인한 심신 미약도 인 정하지 않았다. 1992년 4월4일 1심 법원은 두 사람의 살인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김진관 피고인에게 징역 7년, 김보은 피고인에게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피고측은 즉시 항 소를 제기했고 항소심은 김진관 피고인에게는 징역 5 년의 실형을, 그리고 김보은 피고인에게는 징역 5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오랜 세월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라는 정상을 참작한 것이다. 1992년 12월22일 대법원이 피고측의 상고를 기각해 형량은 그대로 확정 되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이들에 대해 특별 사 면을 단행해 김보은양은 사면 및 복권되었고, 김진관 군은 잔여 형기의 절반을 감형받았다. 김진관군은 1995년 2월17일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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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교수가 조교 재임용을 미끼로 성희롱을 일삼았고, 직위를 이용해 은밀한 접근을 계속했다.”
제 2장 여성만 남은 사건들
Ⅴ 신교수 사건 1992년 4월 ~1999년 6월 25일 서울대 화학과 우 조교가 교수였던 신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었다. 6년간의 법정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신 교수가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판결이 나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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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교수가 조교 재임용을 미끼로 성희롱을 일삼았고, 직위를 이용해 은밀한 접근을 계속했다.”
이 사건은 한국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의 화학과 교수가 기기담당 조교에게 성희롱을 하여 한국 사회 에서 많은 논란이 된 사건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처음 으로 성희롱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서 세 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2년 5월 29일부터 서울대 화 학과에 기기담당 조교로 취직한 우조교는 출근을 시 작한 초기 2,3주간 신 교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을 겪어야만 했다. 신 교수는 기기교육을 빙자하여 키 보드를 치고 있는 우 조교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대거 나, 속삭이듯 말을 하고, 반팔 소매옷의 팔위를 잡는 등 업무상 불필요한 고의적인 신체접촉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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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조교는 신교수의 이러한 행위에 점차 불쾌감을 느 끼고 정신적인 큰 부담감을 갖게되었다. 우 조교는 신 체접촉을 모면하기 위해 긴팔을 입는다거나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며, 불쾌 감과 거부의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나 신교수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성희롱을 했고 93년 6월 우 조교를 재 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우 조교는 부당한 조처에 대해 해결을 바라는 진정서 를 대학에 보냈으나 우리 나라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 는 서울대학교 당국은 진상조사는 커녕 아무런 대답 도 없었다. 우 조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 전화 등 여성단체에 자신이 당한 성희롱에 대해 상담 을 하였으나 현행법으로는 부당함을 해소할 방법이 없음을 확인하였을 뿐이었다. 결국 93년 8월 억울함을 알리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이게 되었다. 이 대자보를 본 총학생회와 대학원 자치협의회, 여성문제동아리 협 의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진상조사 결 과 우 조교의 피해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학교당국은 묵묵부답이었고 오히려 신교수 는 93년 9월에 우 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피해자이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우조교는 명 예훼손에 대한 대처방법을 변호사 상담하면서 자신이 당한 내용이 전형적인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며 외국 에서는 이미 법적으로 규제책이 제도화되어 있음을 알 게 되었다.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성단체 와 서울대 학생들이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 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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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3년 10월 가해자인 신 교수와 대리감독자 로서의 감독을 소홀히 한 서울대 총장, 서울대학교 설 치운영자로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5,000만원의 배상 을 요구하였다. 이는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한국 최초 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서울민사지방법원은 1994년 4월 신 교수의 행동을 ‘성 적접근 및 언동’ 이라고 표현하며 우 조교가 주장한 사 실관계를 모두 인정했다. 재판부는 “성적 자유 및 인간 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근로조건에서 일할 권리를 침해 했다”는 판단 아래 신 교수에게 총 3,000만원을 배상 하라 명령했다.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생소 했던 당시 거액 배상 판결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 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4번의 판결을 거치며 6년을 끌게되고 대법원은 피고인 신 교수가 500만원 을 물어야 한다는 확정판결로 매듭지어졌다. 우 조교 사건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아직까지도 1심 판결서 나왔던 높은 배상액을 기억하 는 이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돈이면 해결된다’는 잘못 된 인식도 함께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사회생활 4년 차인 김모(27)씨는 “남직원이 여직원들 앞에서 심하게 야한 농담을 하자 팀장이 ‘너 3,000만원이 있냐’며 비 웃더라”고 털어놨다. 또 안씨는 “물론 돈 액수가 남성 들이 일정 선을 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희롱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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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만 드러나는 사건들은 사라지고 가해자에게 주목하는 사건들만 남았다.
Ⅰ 100인위원회 Ⅱ #__계 내 성폭력 Ⅲ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제 3장 가해자만 남은 사건들
“성폭력 사건마다 음모론 운운!!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진보는 필요 없다.”
제 3장 가해자만 남은 사건들
Ⅰ 100인 위원회 2000년 7월~ 2003년 10월 2000년 7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활동한 익명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여러 대학 총학생회, 노동조합, 사회운동 단체에서 벌어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 사건을 조사해 16명의 성폭력 가해 혐의자를 ‘운동사회 성폭력 가해자 명단’ 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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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마다 음모론 운운!!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진보는 필요 없다.”
100인위원회는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성폭력을 개 념화하고 사건을 공론화시켰다. 특히 운동사회의 뿌 리깊은 가부장성을 비판, 가해자 중심주의를 깨기 위 해 ‘가해자 실명공개’의 방식을 택했다. 100인위의 문제의식은 백서의 표지에서 읽을 수 있는 피켓 문구 “성폭력 사건마다 음모론 운운!! 여성을 착 취하고 억압하는 진보는 필요 없다”로 요약된다. 사회 의 변혁을 위해 운동하는 조직 안에서 여성활동가들은 성폭력에 시달렸다. 설사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사 실을 이야기해도, 협소한 성폭력 개념과 가해자 온정 주의, 특유의 조직보위 논리 때문에 ‘성폭력’으로 인정 받을 수 조차 없었다. 100인위의 가해자 실명공개는 피해자들의 절박함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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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말 100인위는 접수된 성폭력 사건 및 가해자 명 단을 진보넷 게시판 상에 공개했다. 그 파장은 엄청났 고 많은 반론이 제기됐다. 가장 주된 반론은 실명공개 라는 방식이 오히려 가해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 또 피해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성폭력을 논하는 것이 지 나치게 주관적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논쟁은 공개된 사건이 ‘성관계’이지 ‘성폭력’일 수 없다는 남성 들과, 여성의 피해경험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라 고 요구하는 여성주의자들 간 대립으로 나타났다. 100인위가 공개한 사건 가해자들은 기자, 노동조합 관 계자, 소설가 등 사회적으로, 혹은 운동사회 내에서 이 름 있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많은 가해자들은 게시 판 상에 글을 올려 자신의 가해사실을 손쉽게 부인했 다. 또한 박** 사건, 강**사건의 경우 가해자들이 오히 려 명예훼손으로 피해자 및 100인위를 역고소해, 피해 자와 100인위 회원들이 법정대응을 하느라 지난한 시 간동안 싸워야 했다. 특히 강** 사건의 경우 명예훼손 으로 형사 및 민사 고소를 했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 과가 예상되자 취하하는 등 피해자들을 이중삼중으로 힘들게 했다. 백서의 마지막에는 100인위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자 신들의 활동을 평가한 글들이 실려 있다. 운동사회의 가부장성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제기가 사건에 대한 법 적 대응에 집중되면서 개별 사건으로 환원된 결과를 낳 았다는 지적도 있고, 피해자 정체성에서 출발했기에 성 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시민’으로서의 여성을 개념 화하기 어려웠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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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위에서 발표 된 성폭력 유형들은 ‘뽀뽀해 달라’고 피해자에게 요구하거나, 피해자의 뺨을 때리고, 피해 자의 얼굴에 방뇨, 상급단체의 중앙간부를 여관에 끌 고 가려는 등 성폭행, 피해자 강간 뒤 ‘나와 잔 것만으 로 영광으로 생각하라’ 발언 등이 있었다. 노조간부 5 명, 기자 1명, 학생운동 관계자 7명, 빈민운동관계자 1 명, 출판계 1명, 문학인 1명으로 1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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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제 3장 가해자만 남은 사건들
Ⅱ oo_내_ 성폭력 2016년 10월 7일~ 2016년 10월 17일 트위터의 #오타쿠_내_성폭력 해쉬태그를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응원, 연대, 지지할 기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피해자들이 묻어두었던 일들을 폭로하면서 가해자들이 벌을 마땅히 받았어야할 일들을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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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2016년 10월 17일 트위터에서 시작된 #오타쿠_내_성 폭력 해시태그가 발단이 되었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 생존자들이 만화·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 분야에서 #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이 당했던 폭 력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운동권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 대학_내_성폭력, #가족_내_성폭력, #교회_내_성폭 력, #예술계_내_성폭력, #문화계_내_성폭력, #스포츠 계_내_성폭력, #문단_내_성폭력, #교육계_내_성폭력 등 다양한 분야의 성폭력 증언으로 이어졌다. 해시태 그가 돈지 얼마 되지 않아 주요 작가·인물들의 성폭력 사례가 차례차례 폭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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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8일, 만화가 이자혜가 미성년자 강간을 방조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가해자로 지목된 것은 음 악가 이익이다. 레진코믹스에서 『미지의 세계』를 연재 했던 이자혜 작가는 이번 일로 모든 연재가 중단되었 다. 레진코믹스는 『미지의 세계』를 구매목록에서 삭제 하고 전액 환불했으며, 핀치는 이자혜의 만화 『딥시달 링수』의 연재를 중단하고 웹툰 카테고리를 비공개로 돌렸다. 『미지의 세계』를 출판한 유어마인드는 예약 판매중이던 해당 만화의 3권을 전량 예약 취소, 시중 판매 중이던 1·2권 재고를 전량 회수·품절·폐기 처리, 4-6권의 추가 출판 계약을 파기했다. 격월 문학잡지 < 릿터> 는 이자혜 작가의 그림이 표지로 사용된 2호 (2016년 10·11월)를 전량 회수·폐기했으며, 이미 2호 를 수령한 독자에게는 표지를 교체한 2호를 교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트위터에서는 강간 가해자인 이익 이 상대적으로 묻히는 것에 대해 지적하며 ‘#성폭행가 해자이익’이라는 해쉬태그가 돌기도 했다. 이자혜 작 가는 10월 21일, 기존 입장을 바꾸어 새로운 입장문을 올렸다. 이 사건 외에도 이자혜 작가의 지인들에게 온 라인 상 괴롭힘(사이버불링)을 당했다는 증언들이 계 속해서 나왔다. 이후 트위터에서는 문단으로 불길이 옮겨갔다. 21일 오후 B씨는 과거 출판 편집자를 지낸 적이 있다고 밝 히며 트위터에 박범신 소설가의 성희롱·성추행을 고발 하는 글을 올렸다. 어두운 민낯이 드러난 후 비판의 여 론이 거세지자 박 작가는 SNS에 사과문을 올렸고 신 작 출간이 보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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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로 유명한 박범신 작가는 전직 출판 편집 자 A씨의 폭로에 의해 논란에 올랐다. 박 작가는 10월 21일 ‘오래 살아남은 것이 오욕∼죄일지라도..누군가 맘 상처받았다면 나이 든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라 는 트윗(삭제됨)과 23일 트위터에 “내 일로 인해∼상처 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어요. 인생-사람에 대한 지난 과오가 얼마나 많았을까, 아픈 회한이 날 사로잡 고 있는 나날이에요. 더 이상의 논란으로 또 다른 분이 상처받는 일 없길 바래요. 내 가족∼날 사랑해준 독자 들께도 사과드려요.”라는 내용을 올렸다. 실제 성희 롱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다. 박 작가의 신작 장 편소설 『유리』의 출판사 은행나무는 “성추문과 관련한 여론 악화로 박씨가 출간 포류를 요청해 그 의사를 존 쟁키로 했다”면서 해당 소설의 출간을 중단했다. 예약 구매자 700여명은 전원 환불된다. 다만 대만에서는 예정대로 출간됐다. 박진성 시인은 미성년자를 포함한 작가 지망생 등의 폭로에 의해 상습 성추행 의혹을 받았다. 박 시인은 자 신의 블로그에 “저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 께 사죄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의 부적절한 언행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올리고 자신의 모든 SNS 계정을 닫고, 올해 예정되어 있던 산문집과 내후 년에 출간 계획으로 작업하고 있는 시집 모두를 철회 하겠다고 밝혔다. 9월 22일에는 ‘나의 여성혐오를 고 발합니다’라는 내용의 기고문을 한겨레에 보낸 바 있 다. 이 글에서 박진성 시인은 자신의 성폭력 행적을 ‘고 백’한다. 해당 글은 이후 박진성 시인의 요구로 한겨레 에서 삭제됐으나 아카이브에 남아있다.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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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박진성 시인 관련 ‘사고’를 내어 해당 사안에 대해 조사·확인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고발 중 한 건에 대하여 2016년 9월 28일 박진성 시인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린 데 이어 2017년 10월 31일에는 강제 추행 및 강간 주장을 허위로 인정하여 고발인 중 한 명에게 무고죄를 적용,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2017년 11월 20일 박진성 시인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해당 고발인 으로 알려진 인물에게 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캡처 이미 지를 공개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며 ‘거짓말 을 했다’는 내용을 보내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문단_내_성폭력’과 관련하여 관련단체인 한국작가 회의, 한국시인협회 등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작가 들에 대해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국작가회의는 10월 24일 성명서에서 “조속하게 해당회 원들의 소명을 청취하여 절차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취 하겠”다고 밝혔다. 10월 26일, 배용제 시인이 미성년자 6명을 강간하고 금 품을 갈취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경기도 내 모 예술고 등학교 문학창작과에 재직하면서 제자들을 상대로 ‘틀 을 깨기 위해서는 탈선을 해야 한다’며 성폭력을 저질 렀다는 것으로 배 씨가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배 씨는 사과문에서 해당 행위가 마치 합의를 했다는 뉘앙스를 풍겨 비판을 받았다.배 씨는 2017년 2월 23일 아동·청 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위반(위력에 의한 미성년자 간음) 및 아동복지법 위반(성희롱) 혐의로 구속수감됐 다.하지만 배 씨는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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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경기도 안산시의 서울예술대학교 교정에 황 병승 시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트위 터의 폭로를 옮긴 대자보에는 황 씨가 강사 재직시절, 제자를 상대로 성희롱과 성관계 요구를 했다는 것과 피 해자가 정신적 충격으로 휴학하는 와중에도 활발한 활 동을 이어나갔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큐레이터 함영준 씨가 2015년 11월·12월 여성 작가를 성추행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는 페미니스트를 옹호하는 글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0월 22일 사과문을 올리고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직 사임 의 사를 밝히며 미술 관련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함 영준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일부 의혹은 부인했다. 10 월 22일, 함영준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언리미티드 에디션’ 행사의 주최사 유어마인드는 공동주관사인 일 민미술관 측과 협의하여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웹툰, 문단에서 일어난 성폭력 고발은 미술계, 음악계, 교육계 등으로 확산됐고, 여기저기서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이준규·백상웅·배용제 시인, 함영 준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A 씨, 한예종, 홍익대 미대 등으로 이어지는 성폭력 고발 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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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해자의 2차 가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경찰을 원한다.”
제 3장 가해자만 남은 사건들
Ⅲ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2017년 11월 10일~ 가정폭력 가해자의 피해자 보호시설 침입 사건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경찰에 규탄을 발단으로,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이라는 여성폭력, 가정폭력 범죄에 대한 경찰의 문제적 대응사례를 고발하는 해시태그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3일만에 20만건 이상이 리트위 되었고, 캠페인 참여 글 중 게재 허락을 받은 것들을 112라는 숫자에 맞춰 추린 자료집도 배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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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해자의 2차 가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경찰을 원한다.”
흔히 ‘쉼터’라고 불리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은 폭력 배우자로부터 격리되길 원하는 피해자와 동반 자녀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법적으로 임시보호는 최장 7일, 단기 보호시설은 최장 6개월까지, 장기 보호 시설은 최장 2년까지 머물 수 있다. 가정폭력 가해자 로부터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에, 쉼터 활 동가들은 입소자의 신상 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각 별히 유의하는 등 피해자 안전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일,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쉼터에 가정폭 력 가해자가 ‘자녀를 보겠다’며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 했다. 여성의전화 측에 따르면, 쉼터 활동가들은 입소 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경찰에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위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격리 조치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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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도착한 여성청소년계 경찰관들 은 오히려 “자녀를 보기 전까지는 한발자국도 움직이 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 냥 자녀를 보고 싶다는 것뿐이라며, 경찰관 자신도 자 녀를 둔 아버지라고 덧붙이면서 쉼터 활동가들을 매정 한 사람들 취급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피신할 동안만이라도 가해자의 위치를 옮 겨달라는 활동가들의 ‘부탁’도 거절한 경찰 덕분에, 사 건 발행 후 3시간 30분이 지난 후에야 두려움에 떨던 입 소자들은 활동가들이 가해자의 시야를 현수막으로 가 린 틈을 타서 겨우 피신했다. 가해자는 활동가들의 사 진을 찍으며 모욕했지만, 경찰은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쉼터 측은 증언했다. 가정폭력을 4대 악으로 지정해 근절하겠다고 공언한 지난 정권을 거쳐 ‘젠더폭력 방지 기본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힌 이번 정 권 하에 일어난 일이다. 그해는 ‘가정폭력을 예방하고 가정폭력의 피해자를 보 호·지원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 된 지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법에 따르면 가정폭 력은 ‘부부 싸움’이나 ‘가정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폭력 이자 범죄이며, 피해자는 가해자의 위협으로부터 안전 하게 보호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경찰이 보여준 태도를 보면, 과연 무엇이 바뀌고 변화되었는가 를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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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이하 여성의전화)는 지난 9일 ‘가정폭 력피해자 보호시설에 침입한 가해자에 무대응으로 일 관한 경찰을 강력 규탄한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후 단체는 작년 11월 11일 SNS에 ‘#경찰이라니_가해자 인줄’이라는 해시태그를 생성해 캠페인을 펼쳤다. 가정 폭력·성폭력 등 여성폭력 범죄에 대한 경찰의 문제적 대 응사례를 고발하는 운동이었다. 해시태그가 만들어지 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성의전화는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한 뒤 20만여건 이상의 트윗이 게 시됐다고 밝혔다. 여성들의 증언은 경찰의 후진적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 러냈다. 경찰은 가정폭력을 ‘사소한 일’ ‘개인이 해결해 야 할 일’로 여기거나 성폭력 피해자를 성적 대상화하 고 ‘꽃뱀’으로 몰아가는 등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가해남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듯한 태 도까지 취했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경찰이 도리어 2 차 가해를 한 셈이다. 이에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감 정이입하지 않는 경찰’ ‘폭력을 방관하지 않는 경찰’을 원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의전화는 11월 20일 부터 “나는 OO한 경찰을 원한다” 손글씨 인증샷 캠페 인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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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들은 잘못이 없다. 그것을 깨닫는 데 8년이 걸렸다.”
제 3장 가해자만 남은 사건들
Ⅳ Me_too 2018년~ MeToo 운동 (미투 운동)은 미국의 영화배우 알리사 밀라노로부터 2017년 재차 제안되어 범국가적으로 행해지는 성폭력 고발 캠페인이다. SNS의 해시태그를 통해 MeToo(metoo), WithYou(withyou) 등을 달아 성희롱, 성폭력에 대해 고발하고 피해자와 연대한다. 미투는 ‘나도 당했다’가 아닌, ‘나도 말한다’, ‘나도 고발한다’는 주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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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들은 잘못이 없다. 그것을 깨닫는 데 8년이 걸렸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미투(#MeToo) 운동’이라는 거 대한 역사적 파도를 타고 있다. 2018년 1월 29일 서지 현 검사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검찰 내의 안태근 범죄자를 비롯한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 을 촉발시켰다. 여성들의 피해 사실 폭로는 문화예술 계, 학계, 종교계, 정치계 등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중 이다. 당시 인터뷰 자리에서 서 검사는 왜 이런 폭로를 하게 됐는지 이유를 밝히면서, 성폭력 관련 사실을 폭 로한 피해자가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고 근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무엇보다 “당신의 잘못 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 사회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놓여 있다고 여겨진 고위직 검사마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피해에 노출되고, 이에 문제제기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 전반을 아래로부터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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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야기처럼 “자신이 돌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돌 고 있는 것인지” 몰라 “꾹꾹 삼키고 또 삼켜냈던” 경험들 이 오랫동안 억눌렸던 여성들의 기억을 세상으로 끄집 어내는데 기여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음모론과 진영논리에 빠져 피해자의 의도를 의심하고 평소의 행실을 따져 물 으며 피해자의 자격을 운운한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그간 저지른 수많은 가해 행위들을 성찰하기는커녕 성 폭력을 ‘성도착증’으로 병리화하거나 특정 개인을 악마 화하며, ‘터치는 있었으되 성폭력은 없었다’며,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희희낙락 정쟁에 활용하기 바쁘다. 심지 어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며 사안의 본질인 성별 권 력관계와 성차별적 구조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을 ‘페미 나치(페미니스트 나치의 줄임말)’로 몰아 낙인화하기 도 한다. ‘여자들이 문제’니 분리하고 배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문제는 여성에게 전가 되고 있다. 아직도 진행 중인 이 운동을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필자가 가장 많이 받았던 몇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운동의 ‘잠정적’ 의미를 살펴보려 한 다. 단순히 ‘개별적 감정의 분출’ 정도로 ‘오해,’ 또는 축 소하고 역사적 흐름을 역행하려는 시도가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의 ‘미투 운동’이 ‘남녀관계,’ 혹은 개인 간 발 생하는 성희롱과 무관한 ‘권력형,’ 혹은 ‘갑질’ 성폭력의 문제일까? 그저 ‘나쁜 손버릇’, ‘자제하지 못한 성욕’,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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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비도덕적 행위’, ‘성추문’, 혹은 특정 조직의 ‘특수 문제’일까? 남성지배사회에서 성별 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성 별(gender) 자체가 권력관계를 내장하고 있다. 단순히 동등하되 이분법적으로 나뉜 남성성과 여성성, ‘적절히’ 배분된 역할이 아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은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효과이며 새로운 권력관계 를 생성하는 원인이다. 남성(성)만 인간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성)은 열등한 것, 부차적인 것, 성적인 것, 심지어 ‘낮은 사회적 지위’ 자체를 의미한다. 중학교 남학생이 여성 교사를, 남성 환자가 여성 의사를 성희롱 할 수 있는 이유이다. 물론 그 남성과 여성은 성별 질서 뿐 아니라, 계급, 인종, 성적 정체성, 장애여부 등 다양 한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폭력은 기본적 으로 성별권력 관계에서 파생하지만, 다른 차별구조와 교차해 더 심화되거나 약화되기도 한다. 둘째, 한국의 ‘미투 운동’이 헐리우드 발 #MeToo 운동 의 후속, 아류, 혹은 변종일까? 그렇지 않다. 길게는 구 한말과 일제 강점기부터 진행된 동등권운동, 반식민지 독립운동, 짧게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본격화 된 진보여성운동 단체들의 형성과 반성폭력운동, 여성 인권운동, 2000년을 전후로 진보운동권 내 성폭력 문 제를 제기한 ‘100인 위원회’, 더 최근에는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 2015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진행된 ‘성폭력 필리버스터,’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 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여성운동의 오랜 역사를 먼저 봐 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돌출된 운동이 아니라, ‘관습’ 과 ‘문화’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던 차별구조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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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저항하고, 시대를 거슬렀던 시대를 거슬렀던 여성들의 역사 속에서 이번 ‘미투 운동’ 을 맥락화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여성시민들은 오랫동안 기득권, 반 민주, 독재, 부패 세력, 식민지 ‘백성 마인드’를 갇힌 ‘보 수 세력’에 저항해 왔으며, 계급부정의 이외에 다른 영 역에 무감한 ‘진보 세력’들과도 쟁투해 왔다. 진영을 넘 나들며 형성한 남성연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전진해 왔다. 서구의 여성운동에서 ‘ 물결’(WAVE)이라는 용어가 파장, 파동, 물결, 파도의 다중적 의미를 지니듯, 한국의 경우도 잠복과 돌출, 후 퇴와 전진, 흩어짐과 뭉침, 진지전과 전면전 등을 통해 파장을 일으키고 커다란 파도를 만들며 세상을 변화시 켜 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여성들에 의해 주도 되었으되 세계 를 흔든 ‘미투 운동’의 원조로 일본군 성노예제로 고통 당하셨던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을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부인에 분통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 왔다고 했던 할머니의 증언은 반세기 가까이 봉인되었 던 끔찍한 성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하며 전 세계 시민들 을 무지의 늪에서 일깨웠다. 덕분에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 또한 앞 다투어 세상에 나왔다. 가부 장제와 식민주의 지배체제 하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중층적 부정의와 싸우며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변화하던 할머니들의 모습 덕분에 우리 시민 의식은 또 얼마나 많이 성장했던가. 미국의 #MeToo 운 동과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이 이번 ‘미투 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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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선 혹은 변곡점은 될 수는 있으되 원인이 아닌 이 유이다. 셋째, ‘진보진영’ 내에서 유독 사건화가 많이 되는 이유 는 무엇일까? 보수진영이 더 ‘도덕적’이기 때문일까? 그 렇지 않다. 서구 여성운동 ‘제2의 물결’을 상기하면 답 이 나온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진보적 학생운동과 시민운동 영역에 있던 여성들은 남성혁명가들이 지향 하던 민주, 평등, 해방이라는 가치가 여성들에도 동일 하게 적용해 달라고 호소하는 바로 그 순간 부인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일상 속에서 개인이 겪는 사적인 문 제가 거대한 구조에 기인한다는 신좌파의 구호가 여성 들에게만 유독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진보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했던 ‘성혁 명’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해소하기는커녕, 더 취 약한 상황으로 내모는 상황에 분노했다. 여성을 남성 의 성적 욕망을 배출하는 ‘쓰레기통’, 혹은 언제든 받아 주는 ‘용기’로 취급하면서, 공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보 조적인 존재로 비하하고 배제하는 남성들의 태도에 격 분한 것이다. 여성들은 분연히 일어나 의식고양 모임을 구성하고 여성만의 조직을 만들며 ‘여성문제’라 치부되 던 사안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는 그래서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개별적 문제가 결 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 때문이 아니며, 여성들의 고통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 차별의 결 과이기 때문에 주요한 정치적 의제로 다뤄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해방의 주체와 대상 모두에 여성이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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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있다는 인식, 민주주의, 평등, 인권이라는 가치에서 여성은 배제되어 있다는 인식이 여성들을 페미니스트 로 각성시킨 것이다. 이들은 동등참여, 동일노동 동일 임금은 물론,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권, 성폭력, 가정폭 력, 성매매, 데이트 성폭력, 음란물, 성상품화 등을 공론 화하고 이론화하며 변혁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단순히 기계적 ‘양성평등’이나 형식적 권리 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이 아니라 뿌리 깊은 성차별 문화를 해체하고자 전 방위적 혁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보 운동권 내 성차별과 성폭력 문화가 결국 서구 역사상, 아니 전 세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대한 페미 니스트 운동의 물결을 결과한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 성 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고발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 자명하다. 그들은 진보적 가치 자체를 체화하 고 실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성차별에 무감함은 물 론, 성평등 감수성를 장착한 여성들이 애초에 진입하기 어려운 토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미투 운동’은 그래서 감히 ‘미투 혁명’ 이라 부를 수 있다. 주로 진보진영의 여성들, 페미니스 트로 각성한 여성들이 주도하는 이 운동은 아마도 한 세기 이상 진행된 한국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에서 가 장 커다란 해일이 될 것이다. 지난 대선 시기 페미니스 트들의 주된 구호인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를 상기하면 2018년 ‘미투 운동’은 성평등이 결핍된 ‘민 주주의’를 완성하고자 하기에 ‘제2의 민주화 운동’이며, 구체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래로부터 분연히 일어 난 ‘시민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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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연대를 이루고 활동하고 있는 더는 잊히지 않아야 하는 여성들이다.
Ⅰ 봄알람 Ⅱ BWAVE Ⅲ 전국디바협회 Ⅳ 불꽃페미액션
제 4장 어디에나 있는 여성들
“ ‘지금 다들 감정이 소진되었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 이런 생각으로 책을 쓰게 되었죠.”
제 4장 어디에나 있는 여성들
Ⅰ 봄알람 2016년 7월~
봄알람(baume a l’a me)은 여성혐오에 함께 지속적으로 대응해나갈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뭉친 20대 여성 4인이 꾸려가고 있는 출판사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출간하면서 문을 열었다.
#여성들의_봄을_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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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다들 감정이 소진되었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 이런 생각으로 책을 쓰게 되었죠.”
봄알람(baume a l’a me)은 프랑스어로 마음에 연고, 영 혼의 안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2016년 7월 «우리 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출간 하면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도서 출판사다. 이 책은 여성혐오를 주제로 한 대화에서 동시대의 여성들 이 답답하고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매뉴얼화한 실용서로, 2016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많은 독자 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여성운동의 역사를 다룬 책, 현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성평등 운동의 의미를 언어철학 적으로 분석한 책을 출간하며 문제의식을 이어가고 있 다. 앞으로 국내외 성평등운동, 소수자운동의 목소리가 담긴 책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관련 강연과 소모임 등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있다. 여성혐오에 함께 지속적 으로 대응해나갈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 을 갖고 뭉친 20대 여성 4인이 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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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_봄을_위하여
정혜윤(이하 혜윤): 안녕하세요! <봄알람>은 2016 년 5월 17일에 발생한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계기로 이민경, 정혜윤, 이두루, 우유니게 네 사람이 모여 만든 출판사입니다. 각자 작가, 마케터, 편집자, 디자이너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임이 시작됐는지 궁금하다. 우유니게(이하 유니게): 사실 <봄알람>이 설립되기 전, 저희 네 명은 모두 같은 페미니즘 페이스북 그룹에 속해있었 어요. 그러다가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모두가 분노해 있 을 때 이민경 작가가 글을 하나 올렸어요. “사건 이후, 주변의 남성들과 대화하기 힘들다는 호소가 많아졌다. 이런 여성들을 위한 대화 매뉴얼을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그 글을 계기 로 네 사람이 모이게 됐어요.
그렇게 첫 책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하, 입트페)가 탄생했다. 무려 3주 만의 일이었다. 유니게: 그만큼 충격과 분노가 컸어요. 또, 강남역 살 인사건이 일어나고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입트페>가 지금 시점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무조건 빨리 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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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텀블벅을 활용한 이유가 있나? 혜윤: 사실 처음부터 ‘책’을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요. 간단한 책자를 만들어서 여성영화제 같은 행사에 무가지로 배 포하려고 했죠.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분량이 많아져 책의 형태 가 됐어요. 그래서 제작비를 모으고자 텀블벅 프로젝트를 활용 했어요.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어요. 유니게: 3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펀딩이 성공했고, 초 판부로 5,000권을 발행했어요. 그 중에서 남은 부수는 서점에 배포를 했는데, 바로바로 판매되더라고요.
여러모로 열기가 대단했다. 유니게: <입트페>를 출간한 후, 당시 독립서점에 소 량으로 입고를 했는데, 입고 족족 팔리더래요. <입트페>가 한 권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 일요일인데도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구매했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감사했죠. 이런 현상을 보면서 ‘재인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혜윤: 사실, <입트페>를 출판하고 난 뒤 앞으로 어떻 게 해야 할까 고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민경 작가도 두 번째 책을 쓰고 싶다고 하기에 정식으로 사업자를 내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출판사 이름인 <봄알람>의 의미가 궁금하다. 유니게: 보통 많은 분들이 ‘봄알람(baume al’am)’이 순 우리말인줄 아시는데, 프랑스어가 어원이에요. 본디 ‘영혼의 안 식’과 ‘마음의 연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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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게: 우리나라 말로 해석해도 ‘봄’과 ‘알람’이 긍정적 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어떻게 해석해도 좋은 것 같아요. <봄 알람>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주는 책을 만들자’를 모토로 하고 있어요. 혜윤: 페미니즘의 봄을 알리자, 이런 뜻도 돼요.
많은 주제 중에서도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을 키워드로 독립출판을 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형적인 인식 때문에 힘들었을 것 같다. 유니게: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반 응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려 해요. 물론 몇몇 분들이 책에 대 한 서평이나 인터뷰 기사에 악플을 달기도 하죠. 그런데 그런 행위에 대해 분노할 여유가 없어요. 오히려 페미니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더 힘든 것 같아요. 혜윤: 그래서 여성혐오나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반 응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견충돌이 더 신경 쓰이는 것 같아 요. 그래서 온전히 반(反)페미니즘적인 시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죠.
그럼 <입트페>를 완판 했을 때 소감이 어땠나. 혜윤: 책에 대한 반응에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지금까 지 저희는 페미니즘이 주먹 한 줌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애초에 <입트페>를 시작했을 때도 텀블벅에서 진행 중인 페미니즘 관 련 굿즈는 메갈리아의 티셔츠가 다였어요. 그래서 이게 얼마나 반응이 좋을 지도 예상할 수 없었죠. 유니게: 그럼에도 책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인 걸 보며 많은 연대감을 느꼈어요. 소중한 경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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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게: 내가 만든 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 실이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 아서 슬펐어요.
이러한 독자들의 반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나. 혜윤: 그냥 당시의 분위기가 그랬어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 그러니까, 강남 살인사건이 시사하는 여성 들에 대한 위협이 피부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사건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장소에서, 우리가 동일시하기 쉬운 일반 여성에게 발생한 일이에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는 것도 인식 못하는 수준이었죠. 유니게: 사건 이후 여성들은 자신을 피해자와 동일시 하면서 힘들어했어요. 그만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주변의 남성동료들, 혹은 연인과 대화를 나누 다 보면 대화를 하면 할수록 상처를 받고 답답해졌어요. 결국 <입트페>의 이민경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들이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필요했던 거죠.
같은 맥락에서 <입트페>는 텀블벅에서 역대급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목표 후원금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혜윤: 일단 콘텐츠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만 큼 디자인도 중요하고요. 유니게: 후원자와의 ‘연대감’도 중요한 것 같아요. 크라 우드 펀딩을 이용해 제품을 구매한다는 건, 구매 이상의 ‘후원’의 의미도 지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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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의 의미도 지녀요. 때문에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런 좋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주변에 알리는 바이 럴로 이어지더라고요.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이하 외않페)의 경우에도 후원 마지막 날에 펀딩이 많이 이뤄졌어요. 일부 후원자들은 자체적으로 이벤트를 열어서 펀딩을 도모하기도 했고요. 감동이었죠.
이후 출판한 <외않페>에선 나혜석, 권기옥 등 역사 속에서 잊힌 여성을 캐릭터로 표현하는 시도를 했다. 유니게: 역사 속 여성인물을 페미니즘으로 표현한다는 게 굉장히 까다로워요. 그 어떤 것도 배제할 수 없는 느낌이라 고 해야 하나. 날씬한 여성만 그리면 안 되고, 젊은 여성만 그려 서도 안 되고, 나이가 많은 여성을 그릴 때 주름을 없애면 안 되 는 그런 톤앤매너를 정하기가 힘들었어요. 여성인물이 너무 획 일적인 미(美)의 기준에 부합하면 안 되니까요. 그와 동시에 조 형적인 미(美)는 갖춰야하니 통일성을 설정하기가 어려워서 고 충이었어요.
특별히 굿즈를 제작한 이유가 있나. 혜윤: 정확히 말하자면 <외않페>의 구성품으로 여성 인물 굿즈를 제작했지만, 역사적인 여성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을 기억하자는 취지에 기반하고 있어요. 유니게: 제가 처음 페미니즘 굿즈를 만들었을 때만해 도 여성인물에 주목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 같은 젊은 사람들이 쉽게 소비하고 즐기는 굿즈를 만들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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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계속 여성인물을 굿즈로 만들 건가. 유니게: 네. 여성인물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많은 여성을 그려서 간단한 설명을 첨부한 컬러링 북을 제작하고 싶어요.
지난 1년간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나. 유니게: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죠. 혜윤: 조금씩 세상이 변하는 게 느껴져요. 저는 메 갈리아 등장 이전에도 페미니스트였는데 절망감이나 무력 감이 만연해있었거든요. ‘내가 떠들면 뭐하나. 아무런 영향 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봄알람> 을 하면서 ‘내가 이만큼 말하면 그래도 이 정도는 듣는구 나.’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히려 <봄알람>을 시작하고 부터는 그런 무력감보다 페미니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 이 힘들어요.
앞으로도 계속 여성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인가. 혜윤: 네. 앞으로도 계속 여성에 대해 이야기 할 거 예요. 현재 작업하고 있는 책도 잊혀진 여성철학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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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아기 공장이 아니다. 여성은 인큐베이터가 아니다!”
제 4장 어디에나 있는 여성들
Ⅱ 비웨이브 2016년 10월~
BWAVE(Black wave)는 여성의 임신중단 결정권 을 존중하며 익명의 개개인이 모이는 임신중단합 법화 시위를 돕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팀이다.
#MY BODY MY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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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아기 공장이 아니다. 여성은 인큐베이터가 아니다!”
지난 2016년 10월부터 2018년 8월까지 16차례에 걸쳐 ‘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는 익명 여성들의 모임 이다. 비웨이브엔 대표나 운영진이 없다. 집회에 필요한 홍보, 물품구입 등을 자발적으로 돕는 ‘총대(총대를 맨 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들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형법 제269조 1항과 2항, 제270조 1항을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형법 제269조 1항과 2항은 약물 등의 방 법으로 낙태한 여성이나 낙태하게 한 자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같은 법 제270조 1항은 낙태 시술을 한 의료인을 2년 이 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다며 문 대통령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며 당선된 이상 여성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주장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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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_ BODY_ MY_ CHOICE
2016년 9월, 보건복지부는 성폭력, 무허가 주사제 사용, 대리 수술 등 8가지 유형의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한 의사의 자격정 지 기간을 현행 1개월에서 최대 12개월로 상향 조정하는 내용 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다. ‘비도덕적 진료행위’ 항목에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을 위반 하여 임신중절 수술을 한 경우’가 포함된 게 사회적 논란을 일 으켰다. 그 직후인 2016년 10월초, 폴란드 정부가 추진하던 극단적 낙태 전면 금지법(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해도 낙태를 할 수 없다는 내용)에 대해 폴란드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고 시위를 벌여 법안 철회를 이끌어낸 일이 발생했다. 얼마 지나 지 않은 10월23일, 폴란드 시위를 참고해 비웨이브가 첫 집회 를 열었다. 검은 옷을 자신들의 드레스코드로 정했다. 2016년 12월 복지부는 법 개정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들은 집회를 멈 추지 않았다. ‘임신중단’(비웨이브가 낙태를 이르는 말)은 여 전히 불법이기 때문이다. 비웨이브는 어떤 모임인가. 이: 비웨이브는 블랙 웨이브(BLACK WAVE), 즉 검은 물결 또는 검은 흐름이란 의미의 줄임말이다. 우리는 ‘휴일에는 뭐하고 놀지?’라는 고민을 하며 사는 평범한 여성들이다. 여성 단체가 아니라, 개개인 여성들이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집회 준비와 진행을 돕는 여성들의 일시 적인 모임이고, 집회 참가자 역시 특정 단체의 회원이 아니라, 조 직되지 않은 익명의 여성들이다. 서로의 이름, 나이, 연락처도 물 어본 적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집회 참가자들은 중·고등학생 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물론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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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익명으로 활동하나. 이: 우리 모임이 다른 특정 단체나 정치세력에 의해 이 용되는 것을 우려해서다.
비웨이브는 어떻게 운영되나. 김: 언제 집회를 열어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을 까 고민을 하고 일정을 정한다.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라는 이 름의 다음 카페와 공식 인스타그램, 트위터에 집회 일정을 올리 면 이 글을 본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면서 참석을 독려 하게 된다. ‘총대’들은 집회를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를 맡 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 총대들이 모이는 텔레그램 방에 초대 되고, 여기서 서로 역할을 분담한다. 현재 30~40명이 이 역할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이: 여성인권에 관심은 많았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했는 데 문득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 여성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우연히 포스터를 본 것이 계기가 돼 2차 집회에 참석했 고 이후부터는 언론 담당을 맡게 됐다. 김: 그 동안은 부당한 것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것 같 다. 2017년 초부터 집회에 참여했다.
낙태나 임신중절이 아닌 임신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태아를 떨어트린다’는 낙태 대신,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임신중단’이라는 용어를 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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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용어인 ‘임신중절’보다 스스로 중단한다는 자기결정권의 의 미가 더 부각된다는 점도 고려했다.
비웨이브의 핵심 주장은 무엇인가. 김: 여성은 사람이고 자궁이 아니다. 여성들이 더 이상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국가가 더 이상 여성을 인구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낙태한 여성과 낙태수 술을 해준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269조와 270조를 폐지하라는 것이다.
지난해 2월, 업무상 승낙 낙태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전문 의 ㄱ씨는 낙태죄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지난달 24일 헌법소원 공개변론을 앞두고 법무부가 낙태죄 폐지 요구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공개변론 요지서 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법무부는 “낙태를 원하는 여성을 폄훼할 의 도는 전혀 없었다”며 “낙태죄에 대한 논의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 라고 해명했다. 그 뒤 법무부는 의견서를 철회했다.
법무부가 제출한 의견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 법무부가 (의견서를) 제출은 하되 책임은 지지 않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권리로 보고 있음에도, 법무부는 이 를 범죄로 간주해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후진적인 시각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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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흔히 낙태죄에 대한 논의를 할 때 태아의 생명권 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비시키곤 하지만 이 프레임에 대해 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이: 태아가 인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견 해가 대립한다. 하지만 여성이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 의 여지가 없다. 김: 정부가 가족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여성의 임 신·출산결정권을 통제하고있다. 우리는 ‘3살 터울 셋만 낳고 35살 단산하자’는 슬로건과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 자’라는 표어를 기억한다. 그것들이 고작 20년 사이에 ‘엄마, 혼자는 외로워요’라는 정반대의 내용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기 억하고 있다. 비웨이브는 임신 중절약인 ‘미프진’ 수입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다. 먹는 낙태약으로 알려진 미프진은 프랑스 제약회사 에서 개발해 1988년 인공임신중지용 약물로 승인됐다. 미프 진은 태아가 자궁 안에 있게 해주는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 생성을 억제해, 임신 유지를 어렵게 만든다. 미국에서는 의 사 처방을 전제로 판매가 허용되고 있고, 유럽에서는 아일 랜드와 폴란드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92년 자체 제약회사를 설립해 미프진 복제약 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미프진은 수입금지 품목이다. 임신중절약에 대한 위험성을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이: 어느 약이나 부작용은 다 있다. 흡입식 낙태수술 은 전신마취를 동반하며, 자궁내막증·자궁천공 등의 부작용 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미프진은 마취 및 수술이 필요 없 다. 장기가 손상될 우려가 적고 내원 치료를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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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여성이 상황에 따라 수술을 하든 사후피임약을 먹 든 중절약을 먹든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우리 사회 는 여성이 선택권을 갖는걸 싫어한다.
비웨이브는 학창 시절 성교육 시간에 사용된 낙태 영상은 부정확한 정보로 낙태에 대한 죄책감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성교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1984년 미국에서 발표된 <소리 없는 비명>이라는 제목의 영상은 한국의 많은 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 교재로 사 용됐다. 나도 그 영상을 학교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 영 상 속 태아는 임신 3기(임신 24주 이후) 이후의 모습으로, 실제 임신중절 수술의 90% 이상이 임신 12주 이전에 이뤄지는 현실 과 다르다. 김: 요즘에도 낙태하면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집회 때마다 이 영상의 진실을 알리려 노력하는데, 많 은 여성들이 놀란다.
그럼 어떤 식으로 성교육을 해야 하나. 이: 임신과 출산 과정을 추상적으로만 가르치면 안 된 다. 올바른 피임 방법, 피임 종류, 부작용, 효과 등을 가르쳐주 고 임신과 출산은 여성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김: 임신이 얼마나 여성의 몸에 안 좋은지는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을 하면 뼈도 망가지고, 기억력도 나빠지고, 하혈도 상당 기간 계속되지만 이런 변화들은 알려주 지 않은 채 출산을 신성하게만 가르친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몸과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알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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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시작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은 한 달만에 23만명이 넘는 추천을 받았다. 이에 조국 청와 대 정무수석은 “현행법은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빠져있다”며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건강권 침해 가능성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말해 낙태죄 폐지에 힘을 실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 소장도 지난해 11월 인사청문회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했 듯이 일정한 기간 이내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도 가능하 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여성가족부도 지난달 정부 부처 가 운데 처음으로 ‘낙태죄 재검토’를 명시한 의견서를 헌재에 제 출했다.
헌재의 판단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이: 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 시술을 한 조산사 등을 징역에 처하도록 한 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 정했는데, 당시에도 재판관 의견이 4(위헌)대 4(합헌)로 팽팽했 다. 지금은 낙태죄 폐지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본다. 희망이 있 다고 믿고 싶다. 김: 헌재에서 낙태죄 합헌 결정이 난다면 역사에 부끄 럽게 남을 것이다. 낙태죄 위헌 결정이 나올 때가 됐다.
사회적 분위기가 변했다고 느끼나. 이: 2년전 처음 집회에 참석했을 땐 ‘너희 부모가 너 이 러는거 알고 있냐. 미친 X’이라고 말하고 가는 남성들도 있었 다. 그러나 요즘엔 대놓고 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김: 여성들의 응원과 격려가 가장 힘이 된다. 예전에 신 기하게 쳐다봤다면 요즘엔 힘내라고 지지를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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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페이머즈 (Female-gamerz)를 위해 지금의 페이머즈가 싸운다.”
제 4장 어디에나 있는 여성들
Ⅲ 전국디바협회 2016년 11월 26일~
게임 오버위치의 등장인물 ‘송하나(D.Va)’가 태어날 연도인 2060년 대한민국이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해 활동한다는 컨셉으로 전국디바협회 (전디협)이라는 이름으로 창설했다. 2016년 11월 26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촛불집회 때 공식 활동을 시작,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인한 직무정지 이후에는 성평등을 위해 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2018년1월, 페이머즈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여자도 게임하기 좋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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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페이머즈 (Female-gamerz)를 위해 지금의 페이머즈가 싸운다.”
게임 오버위치의 등장인물 ‘송하나’(D.Va)가 태어날 연 도인 2060년 대한민국이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해 활동한 다는 컨셉으로 전국디바협회(전디협)이라는 이름의 한 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게이머 단체이다. 2016년 11월 26 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 회 때 깃발을 들고 스티커, 피켓 등을 배포하는 것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인한 직무정지 이후에는 성평등을 위해 활동을 계속하 기로 했다. 2018년1월 31일, 지금의 페이머즈(FAMERZ) 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가입 조건은 딱히 없고 ‘내가 전디협이다’라고 느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한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부사장·오버워치 게임 디렉터 제프리 캐플런(Jeffrey Kaplan)은 전국디바협회에 대 해 “오버워치팀에서 키운 가치들이 유저들에게 받아들 여지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 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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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_ 게임하기_ 좋은_ 세상
이제 게이머 10명 중 4명이 여성인 시대, 게임을 소수의 오타 쿠나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게임은 지금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대중친화적인 뉴미디어 콘텐츠로 꼽힌다. 그 러나 게임 세상은 현실 못지않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여자 가 무슨 게임을...’이란 편견은 여전하고, 단지 게임을 하기 위 해 광범위한 성적 대상화와 성폭력, 조롱을 겪는 여성도 많다. 지난해 여성 게이머 ‘게구리’ 선수의 부정행위 의혹, 게임 내 만 연한 성차별·성폭력 고발 운동이 드러낸 현실이다. 분노를 넘어 “여자도 게임하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인기 온라인FPS게임 ‘오버워치’ 속 한국 여성 캐릭터, ‘디바(D.Va)’를 마스코트로 삼았다. 디바의 본명은 ‘송하나’. 프로게이머 세계 챔피언으로, 국군 특수부대 에 합류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최첨단 로봇을 조종하며 괴 수와 싸우는 캐릭터다.“만약 미래의 한국이 지금 같은 성차별 적인 국가라면, 디바 같은 사람의 등장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람이 등장할 수 있는 성평등한 2060년을 만들기 위해 지금 노력합시다.” “Feminism for future female(미래의 여성을 위 한 페미니즘)!”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게이머 연합, ‘전국디 바협회’는 그렇게 탄생했다.
전디협 소개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전디협회장: 네. 전국디바협회, 전디협은 2070년의 디 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게이머 모임입니다.당당하 게 자발적으로 자기 몸을 드러낼 수 있기를, 그렇게 드러낸 몸이 음란물로 취급받지 않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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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디협의 활동이 상당히 많은데요, 같이 활동하고 계신 스태프들이 있나요? 전디협회장: 네, 디자인 스태프도 있고 텀블러라든지 저랑 같이 여러 가지 일들을 해주시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트 위터) 계정운영 같은 경우에는 저 혼자 하고 있고요. 영어 번역 같은 경우에는 도와주시고 계시는 분이 있으셔요. 행사 기획 기 본적인 것을 해오면 그런 진행적인 것들은 같이 회의해서 같이 행사 진행한다든가 그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보면 지부 계정들도 있던데, 실제 전디협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요? 전디협회장: 그 지부 계정들이 사실 좀 뻥카에요. (하 하하) 예전에 ‘지부’ 계정들 보고 아 여기 대구지부, 전주지부 있 다. 전디협 꿘(운동권의 비하적 표현)이다. 그런 말들이 있었어 요. 그냥 말이 ‘지부’라고 하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땐 되게 그럴싸해 보이는데, 진짜 전국 지부 같은 건 아니고요. 시위 물 품 같은 굿즈를 만들어서 무료배포 하는데 지방분들은 가지고 싶으셔도 받을 수가 없잖아요. 그럼 대구 지역에서 물품 배포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집하고, ‘대구지부’라고 붙이고 한 건데, 전 디협 뭐뭐 지부 그런 식으로 되어서… 오해를 많이 받고 있어요. 네 근데 지부는 그런 식으로 허울 좋은(하하).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활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전디협회장: 실제 활동하고 있는 건 거의 수도권에서 회원들하고 같이 독서모임도 하고, 행사도 같이 나가고 그래요. 활동 회원은 저희가 시즌제로 움직이고 있어서 정확한 추산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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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디협에서 제작하는 굿즈가 굉장히 예쁘다. 제 가방에도 달려있다(하하). 굿즈 제작은 어떻게 진행되나. 전디협회장: 맨 처음에 만든 굿즈는 제가 혼자서 저 자 신을 한계까지 갈아서 만든 것들이었어요. 두 번째는 조금 알려 져서 디자인 도움 주시는 분이 나타나 주셔서 예쁜 거 만들 수 있었어요. 굿즈 제작하는 건 다 사람을 어떻게든 갈아 넣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고 있고요. 지금은 디자인 스태프분이 계셔 서 과중한 업무를 혼자 처리하고 계십니다. 업무가 많다 보니까 저까지(디자인 전공도 아닌데) 동원되어서 물건을 만들고, 어떻 게든 어떻게든 예쁜 거를 만들어서 활동비를 벌고 있습니다.
굿즈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쭤보지 않을 수 없는 굿즈가 있는데요. 모두가 보지는 못했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 야잠 공구는 하실 계획이 있나. 전디협회장: 그 야잠 공구(공동구매) 이야기는 제가 한 게 아니었거든요? 사실 다른 분이 따로 진행하고 계시는데, 이번 논란이 있고 나서 저희 쪽에서도 진짜 해야 하나 싶기도 하 고.. 근데 지금 일이 너무 많아서 하기는 어려울 거 같기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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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야잠 논란’은 디바 캐릭터를 넣은 야구잠바 공동구매를 진행하려던 트위터 유저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부 반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블리자드 소유물인 오버워치 게임 캐릭터인 송하 나(디바)의 저작권 침해 가능성을 가지고 전디협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논란이 ‘투명야잠 논란’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야잠 은 아직 제작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전디협은 예상치 못한 인 지도 상승을 경험했다. 또 이어 블리자드의 제프 카플렌이 직 접 전디협을 언급한 영상이 공개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굿즈 제작 말고도 오프라인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는데, 전디협이 활동하는데 오프라인 정치 활동에 있어 그 기준이나 방향 같은 것들이 있는가. 전디협회장: ‘미래의 여성을 위해서 활동한다’는 게 굉 장히 포괄적이잖아요? 미래의 여성을 위해서 할 거는 임신중단 권도 있고, 성차별 없고, 유리천장 문제도 그렇고요. 디바가 있 으려면 디바의 부모가 있어야 하고, 그 디바의 부모에 부모가 있어야 하니까 ‘미래의 여성’을 위한다는 슬로건 안에서 그러니 까 그것에 되는 활동을 모두 하고 있기는 해요. 너무 기준이 넓 은가 싶기도 합니다. 제가 원래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라서 하나 에 집중하는 게 잘 안되더라고요. 정 안되겠다 싶으면 하나에 집중을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재미있어서 여러 의제에 미래의 여성을 위한다는 그 안에서 목소리를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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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반라 사진만 음란물로 분류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는 성적 대상’이라는 전형적인 성적대상화이자 여성혐오.”
제 4장 어디에나 있는 여성들
Ⅴ 불꽃페미액션 2016년 3월~
불꽃페미액션은 대한민국의 20대 페미니스트 모임이다. 2016년 3월 농구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만나 여자농구팀을 꾸리기로 하고 '불꽃여자농구팀'을 시작했다가,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온오프라인 상에서 적극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에 나섰다.
#우리는 음란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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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반라 사진만 음란물로 분류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는 성적 대상’이라는 전형적인 성적대상화이자 여성혐오.”
불꽃페미액션은 서초경찰서 항의행동, 대검찰청 앞 항 의행동, 우리는 기자회견女인가, 밤길걷기(달빛시위), 천하제일겨털대회, 가짜페미파티 등의 활동을 진행했 다. 페미니즘 고전영화 소모임이나 페미니즘 책읽기 소 모임도 진행한다. 2016년 10월 15일 열린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를 공동 주최했다. 불꽃페미액션은 2018년 5월 26일 월경페스티벌 <어떤 피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에서 #free_the_nipple을 취 지로 한 포토존 행사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진행하였고 26일~29일에 거쳐 현장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하였는 데, 페이스북 코리아가 이 중 #free_the_nipple과 관련 한 게시물을 나체/성적행위에 관한 게시물로 분류하여 삭제하였다. 이에 불꽃페미액션은 6월 2일 페이스북 코 리아 사옥 앞에서 토플리스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해당 게시물은 3일 복구되었다. 219
#우리는_ 음란물이_아니다
2018년 5월 페이스북코리아는 이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상의 탈의 퍼포먼스 사진이 ‘음란물’이라며 지우고 계정 1개월 정지 처분을 내렸다.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들은 이에 항의해 지난 1 일 서울 강남구 페이스북코리아 사옥 앞에서 상의 탈의 시위 를 벌였다. 이들은 “여성의 반라 사진만 음란물로 분류하는 것 은 ‘여성의 신체는 성적 대상’이라는 전형적인 성적대상화이자 여성혐오”라고 밝혔다. 페이스북코리아는 6월 2일 해당 사진 들을 복원하고 사과했다. 경찰은 이들의 시위가 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언론 보도가 이어졌고 ‘불꽃페미액션’은 주 말 동안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지난 6월 4 일, 이날 시위에 참여했던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가현, 검은, 선 물, 시원, 한솔, 해나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부근에서 만났다.
여러분의 ‘찌찌해방’ 시위 직후 페이스북이 삭제했던 사진을 복구하고 사과하였다. 일동: (환호하며) 우리가 승리했다! 선물: 경찰도 우리 시위가 공연음란죄·경범죄 처벌 대 상이 아니라고 밝혔더라고요. 기분이 너무 좋아요. 우리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 여성운동이 한 걸음 진보한 느낌입니다. 한솔: 우리가 선례를 남긴 기분이에요. 모든 여성들이 당당하게 자발적으로 자기 몸을 드러낼 수 있기를, 그렇게 드러 낸 몸이 음란물로 취급받지 않기를 바라요.
이번 시위를 어떻게 추진하게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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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 남성의 나체는 ‘인간의 몸’이고, 여성의 나체는 ‘성 적 대상’으로 여겨지는 데 항의하는 퍼포먼스였죠. 지난달 월경 페스티벌 때 첫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했어요. 화기애애한 분위 기 속에서 진행했는데,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바로 삭제 된 거예요. 회원들이 분노해 5월30일 시위를 열기로 하고, 다음 날 언론에 취재요청서를 보내고 그 이튿날 시위를 했습니다. 시원: 뭐야 이게? 야, 우리 까자! 하고 아주 빠르게 진 행됐어요. 해나: 저는 시위 당일에 급히 동참하게 됐는데, 가는 길 에 ‘우리 연행될 수도 있다’라는 카톡을 받았어요. 그걸 이제 말 해주면 어떡해?(웃음) 가현: 차라리 연행될 걸 그랬어. 분노의 ‘다 같이 까기’ (상의 탈의) 운동이 시작됐을지도(웃음) ‘가슴 해방’ 운동의 역사는 길다. 1960년대 미국에선 브래지어 태우기 운동이 있었다. 2000년대 한국 페미니스트들도 여성 의 자유로운 몸을 억압해 온 브라를 벗어던지는 ‘노브라 선언’ 을 했다. 2014년 한국여성민우회가 연 ‘이것도시위’ 참가자들 은 서울 홍대 거리를 행진하며 브라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벌 였다. 최근 한국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탈코르셋’ 운동이 퍼 지면서 노브라 운동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불꽃페미 액션의 이번 시위처럼, 다수의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퍼포먼스 를 해 높은 사회적 관심과 반향을 끌어낸 사례는 드물었다.
‘불꽃페미액션 덕에 용기가 난다’ ‘나도 오늘 노브라로 나간다’ 등 호응이 적지 않은데요(이날 인터뷰 장소에서도 이들을 알아본 시민이 ‘응원한다’며 격려했다). 선물: 감사합니다! 이 맛에 여성운동을 하죠! 검은: 저희 어머니는 제게 ‘자랑스럽다’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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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 직장 동료가 제게 ‘기사 뜬 거 봤다’고 해서 좀 놀랐 는데, 비난하거나 비웃는 사람은 없었어요. 가현: 근데 페이스북에선 ‘쟤네 미쳤나 봐’하던데. 검은: 맞아. 페북 악플 삭제하다가 정신이 삭제될 뻔했어. 한솔: 하지만 너무 1차원적인 공격이라서 저는 별 타격을 받지 않았어요. 검은: 악플 유형이 너무 전형적이에요. 장애인 혐오, ‘얼평’, ‘니애미’ 등 부모 드립.... 선물: 저희 엄마는 ‘여성운동 그만하면 안 돼?’ 하시더라고 요. 그래도 돈은 보내주셨어요 (웃음)
악플 탓에 충격도 컸을 것 같아요. 가현: 사실 내면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제 뒷모습 사진을 보고 ‘등살 접혔다’, ‘셀룰라이트 봐라’하는데 당연히 상처받 죠. 내가 좀 날씬했다면 우리가 덜 욕먹었을까? 선물: 뱃살 사진을 캡처해선 ‘이거 설마 뱃살이냐?’라고 하 고, 일베에선 ‘이런 얼굴이니까 페미하지’라는 글도 봤어요. 만약 내 가 날씬했더라면 ‘왜 예쁜 애가 페미하냐’ ‘예쁘니까 얼굴 공개했다’ 했겠지? 해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저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다 른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댓글들을 보면 익숙한 자기혐 오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서 우울했어요. 가현: 얼굴을 드러내면 ‘남자 아니냐’ ‘수염 봐라’ ‘찌찌해방 아니고 뱃살해방 아니냐?’ 따위의 댓글이 달리고, 얼굴을 가리면 ‘왜 가렸냐’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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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얼굴 왜 가리냐’라니 너무 화나요. 왜 멋대로 평 가하지? 상의 탈의 시위 중 마스크를 착용한 분들도 있었는데 저는 얼굴을 드러냈거든요. 그랬더니 제 사진 보고 ‘얘는 얼굴 깠으니까 인정한다’ 이래요. 졸지에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하게 됐습니다(웃음). 시원: 소수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시위하도록 압력을 받는 사회는 소수자 혐오가 굉장히 심한 사회라고 봐야죠. 검은: 우리 시위 사진을 보고 ‘딸쳐야지’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정말 소름 돋았어요. 선물: 그건 진짜 성희롱이잖아. 검은: 제 SNS 계정으로 ‘잦박꼼’(여성 성기에 남성 성기 를 삽입하면 꼼짝 못한다는 뜻의 은어), ‘보전깨’(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의 성기에 전구를 넣고 깨버린다는 뜻의 은어), 염산 테러 예고 등 협박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청와대 홈 페이지엔 ‘불꽃페미액션 사형 청원’도 올라왔더라고요. 눈물이 났어요. 나는 왜 이렇게 미움받아야 하지? 진짜 혐오와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누군데. 가현: 심각한 모욕을 당해도 고소하기가 망설여져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여성 시위 참가자들을 겨냥한 악성댓 글이 많았잖아요. 저를 포함해 여러 피해자들이 민변 여성위원 회와 함께 댓글 작성자들을 고소했는데, 힘만 들고 결과는 별로 였거든요. 한 명만 벌금 30만원 나오고 대부분 불기소 처분, 기 소유예로 끝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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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는 글
우리는 아직도 과거 속 여성들을 모두 만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계기로 과거 여성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미 그녀들을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캄캄한 어둠 속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빛으로 나올 그날을 기약하며 이 책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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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연대 The Black Regiment
초판
2018. 10. 19
지은이
이숙영
디자인
이숙영
편집
이숙영
서체
Sandoll 명조,
AGaramond BoldOsF
국립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 출판창업프로젝트 ⓒ모든 권리 소유. 필자의 동의 없이 이 책에 실린것을 임의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