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A: I Breathe Poetry #1. Sprin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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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AHA 시로 숨쉬기 I

breathe poetry

기대, 산책, 벚꽃, 담배, Room 깨진, 머리먼지, 널, 신발 속 모래, 시, 새벽 하늘이 참 예쁘다 향기, 물과 기름, 하루 끝, 소중한 것에 대하여, 신호등

제1호 2018 봄

휴식, 여행, 안녕, 미련, 별

햇살, 새벽 2시의 어떤 곳에서, 우연, 나쁜 피, 야경 쇳덩이, 번개, 강아지구름, 안개 속, 돌아가는 길, 무제 꿈, 우성 열성, 물, 뇌, 일주일을 뺀 하루 병아리, 네모의 꿈, 네모의 꿈2, 콩 먹기 싫어, 갑자기!

2018.04.19, 달리, 티타임, 잡생각, 서랍장 고양이 털, 햇살, 손가락 거스러미, 식물, 꿈 시시한 사실, 서른, 스마트폰, 귀이개, 찬바람, 음료수 한방울 돌멩이, 그림자, 알람소리, 발자국, 버스 안에서

2016년 6월 쯤 이후, 다이어트, 불꽃놀이, 봄에도 눈이온다, 검은새벽,

교복, 한강, 라일락, 저마다 할 뿐, 앨범 노란 계절, 틈(시간의 공백), 알람, 새우 감바스, 날씨 버드나무, 봄, 시골의 밤 공기, 목련, Song of Nostalgia 우리동네, 꽃, 숨, 물짝물짝, 엄마, 버스 다리 꺾인 새, 협상 실패, 불, 분주한 밤, 관심 갖기, 붉은 유혹 눈, 콧물, 웃음, 치킨, 수염, 그림자 무게, 안부, 감정, 봄, 일기장, 새벽

시각디자인1 시(侍)로 숨쉬기 과제물 아카이브

종이상자, 2018년 4월 24일 새벽 3공 7층 발코니

교통카드, 필기노트, 당왕동 룸메들, 핑계, 앞머리 몸과 물, 밤바다, 쌀쌀함, 꿈과 꿈, 나침반 그리움, 꽃, 버스, 외로운 일, 기록, 비, 시를 노래하기까지, 열정 하늘, 익숙함, 못, 꿈, 군만두 물고기 인간, 2시 2분, 춘삼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 쓴다, 입 물결, 미술관 옆 동물원, 구원, 나의 바다, 프리지아 초롱이, 돈까스 치명적인 스릴러, 뿌리, 사과, 행복에 대해서 삼월, 밤, 거문고자리, 눈, 포말 잠, 딴짓, 바다, 몽상, •

국립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

거울, 꿈에서 온 편지, 종이에 관하여, 김호피, 가장 이기적인 관계



본 프로젝트는 2018년도 1학기 국립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 수업에서 김나무 교수의 지도로 진행하였으며, 시각디자인의 실천적 중요성을 탐색하고자 학술·연구 활동을 넘어 향후 실제 홍보와 판매, 유통에 대한 계획도 있음을 밝힙니다.



1부 박현지

6

오세형

12

정승은

18

신수철

26

손나현

34

장소은

40

김동환

51

조하영

57

윤정민

62

고민지

67

정경호

72

최서연

77

신미경

84

박희빈

89

2부

3부

정연문

94

이홍교

102

오훈택

108

윤지우

115

이승의

122

김민혁

128

이원비

134

김진희

140

조수현

148

한유림

154

정유진

164

전희선

184

김재원

204

이성희

224

최란

244

김수인

264

4부

5부



박현지¶ 오세형¶ 정승은¶ 신수철¶ 손나현¶ 장소은¶

편 집 :오 훈 택


박현지 … 꿈¶ … 우성 열성¶ … 물¶ … 뇌¶ … 일주일을 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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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은 꿈이 지나갔다. 한 장면이 잊혀 지질 않는다. 마지막 꿈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할머니가 문제를 내었다. 그쪽이 맞추면 우리 쪽이 죽고 못 맞추면 살 수 있다. 질문 새와 종소리가 동시에 울릴 때 손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은 무엇일까? 딸랑 답은 봄이 오는 소리. 순사들은 돌아갔지만 어머니는 죽었고 손자도 죽었고 할머니와 나만 남았다. 나는 울었고 오열했다. 일어났는데 탈진했고 그 꿈의 기분이 잊혀 지지 않았다. 봄이 오는 소리가 나에게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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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열성 나는 말한다. 나의 화에 대해 말한다. 친구는 듣는다. 나의 화에 대해 듣는다. 나는 후회한다. 화를 낸 것에 후회한다. 친구는 후회한다. 그 일에 참았던 것을 후회한다. 우리는 바보야 너무 화내고 너무 참아 조금 융통성 있게 살아야지 약속 그래도 나는 화가 난다 화를 내야한다 친구는 화가 난다 화를 내기 시작한다. 결국 참는 사람은 없어진다. 나는 화내서 후회하고 친구도 화내서 후회 한다 다시 참아보도록 노력 할래 하지만 참아지지 않는다. 참는 건 더 힘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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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나에겐 웅덩이가 있다. 크기도 작고 깊이도 낮아서 찰박하고 발장구를 치면 사방팔방 튀겨버린다. 개울 같은 사람 바다 같은 사람 겉은 파도가 치고 흘러가는 수면이 보이지만 너무 깊어서 되려 속은 잔잔하다. 돌을 맞으면 다 튕겨서 주변에 피해를 주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돌을 잡아먹는 바다를 동경한다. 머리는 공허할 만큼 깊지만 주체가 안 되는 웅덩이가 얕은 만큼 파인 곳도 많아 메워줘야 할지 더 파야할지 나의 웅덩이 위에 서있다. 발장구, 발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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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뇌를 상상한다. 뇌의 세포가 뇌를 상상하도록 상상한다. 뇌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겠지? 상상하는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을 안다면 내가 생각한다고 인지하기도 전에 뇌는 그 생각을 하고 생각해준다. 뇌 상상 상상 뇌 상상 오늘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했더니 간파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또 뇌가 먼저 생각하겠지. 오늘의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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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뺀 하루 그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 공간은 내가 가진 걱정들을 잊어버리는 날 그렇게 바빴던 나의 일상도 일시정지가 되었고 오로지 낮과 밤으로만 이루어진 무념의 세계 나에 대한 생각은 깊어가고 세계에 대한 생각은 깊어가고 생각의 대한 생각이 깊어져가는 밤 나에게 집중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따뜻하고 아쉬운 밤 나의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이며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올 거잖아 갔다 와, 라는 말에 그제야 발걸음이 떨어지고 안녕히 계세요가 아닌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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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형 … 돌멩이¶ … 그림자¶ … 알람소리¶ … 발자국¶ … 버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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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 나를 품었던 따스한 온기를 뒤로 한 채 끝나지 않을 듯한 비탈로 떨어진다 한 여름, 아지랑이 일렁이는 태양은 내 몸을 감싸 나를 어지럽게 만들고 한 겨울, 옷깃을 여미게 한 매서운 바람은 내 살을 깎아 나를 초라하게 만들고 내가 안겨있던 바위보다 무겁게 내리는 비는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지만 영원할 것 같던 비탈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들이 만들어낸 내 몸의 굴곡은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흔적이 되어 오롯이 나 하나의 모습으로 기억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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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몸을 뒤집은 하늘에 드리운 어둠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애써 어둠을 등지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가는 어린 소년의 등 뒤에서 깊어진 어둠과 맞닿은 불빛이 꼿꼿이 몸을 세운 채 차갑게 식은 길위에 쏟아진다 완전히 자라지 않은 머리위로 내려온 불빛은 그 안에 갇혀있던 어둠을 밖으로 몰아내 아침이 되면 다시 마주할 차가운 공기가 좇아올 수 없는 곳까지 데리고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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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소리 아직 눈꺼풀이 내려앉은 이른 아침 조금의 시간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 완전히 달아오르지 못한 태양 빛이 내 얼굴을 감싸고 지난 밤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들어온 서늘한 바람이 내 몸을 흔들어 눈 앞에 보이는 한 줄기의 햇살과 손 안에 들어온 서늘한 공기가 내가 느끼는 환영이길 바라며 다시 한 번 잠을 청하네 아직 눈꺼풀이 내려앉은 이른 아침 조금의 시간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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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쏟아진 빗물을 담아낸 모래위로 발걸음을 옮기면 물을 머금지 않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너의 흔적이 서서히 눈 앞에 드러난다 내 시선이 너의 발자국을 담아내고 너의 눈이 내 시선을 따라오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선명해진다 이미 새겨진 흔적이 이끄는 곳으로 앞으로 새겨질 발자국이 가리키는 곳으로 설레는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나는 어느새 너의 곁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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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서 매일 아침 50번 버스에 올라 하나의 길을 지나는 시선의 오고감을 바라본다 새로 산 넥타이를 고쳐매는 남자는 첫 출근의 설렘을 품은듯 하고 창가에 앉아 고개를 떨구는 학생은 오늘 있을 시험의 불안함을 외면하는 듯 하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자리를 내어준 여자에게 선한 미소를 띄우고 키가 작아 벨을 누르지 못하는 어린 아이는 옆 자리에 앉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언제나 같은 길을 지나는 50번 버스는 그 시선의 오고감을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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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은 … 몸과 물¶ … 밤바다¶ … 쌀쌀함¶ … 꿈과 꿈¶ …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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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물 잠옷을 벗자마자 입혀진 쌀쌀함이 익숙한 뜨거움에 쏴아아 녹는다. 높고 작은 창틈으로 들어온 노란 햇살. 거울 속에 몸과 물을 부드럽게 칠한다. 욕실 문틈으로 옅게 들려오는 'Reverie'. 방금 다녀온 몽(夢)처럼 희뿌연 물안개. 몸을 만지고 부서져 먼지가 된 물줄기. 물먼지들은 춤을 추며 하늘로 떠오른다. 어느새 구름이 되어 몸을 내려다 봤더니 몹시 그리워져 눈물비가 되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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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 그 날, 바다를 한참 바라봤다. 빠르게 일렁이는 물결 위 춤추는 불빛들을 바쁘게 눈에 담았지만 그림으로 그려낼 순 없었다. 컴컴함 속 불빛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떠올랐다. 사랑하는 그가 세상 검은 부분만큼 보고 싶었다. 모든 건 변할 수밖에 없는 걸까. 모든 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건 변화하고 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건 변한 적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사라질 수 있지만 애초에 보이지 않았던 건 사라질 수도 없었다. 진심은 검은 눈동자에 비춰진 적이 없기에 잊으며 살 순 있어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거였다. 오늘, 우리는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덜 소중한 것과의 거리를 지켜낸다. 볼 수 없는 것을 잡기 위해 볼 수 있는 것에 엉켜 붙다가 볼 수 있는 것만 온통 남겨진 길. 볼 수 없는 것은 그 길에 멈춘 채 간다. 내일, 이 사막에서 바다를 찾기 위해 지도를 햇볕에 태우기로 했다. 바람은 내가 그린 발자국이 흩어지게 할 것이다. 길은 밤하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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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함 ‘고마워’라는 따뜻한 눈웃음에 반해 하루 종일 생각나던 늦은 가을이 있었다. 초겨울 밤, 작은 등 두 개만 켜진 독서실에서 둘만 남아 공부하던 날이 있었다. 음악을 바꿔 들을 때, 선생님 몰래 과자를 줄 때, 얇은 교복 안에 쌀쌀한 설렘이 있었다. 한겨울 밤에도 비 오는 날에도 맑은 낮에도 매일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친구가 있었다. 연갈색 나무껍질 향기가 쇠왕관을 쓴 분홍 향기를 쌀쌀맞은 말과 함께 선물 하던 때가 있었다. 서투른 어색함이 싫어서 피했던 날들과 때늦은 미안함에 까끌거릴 때가 있었다. 쌀쌀한 날이면 여전히 분홍색 향기가 나지만 연갈색 향기는 삼 년 째 곁에 아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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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꿈 하나뿐인 오빠야가 나오는 꿈을 꿨다. 제주도 바다 옆 둘만 사는 집. 길고 넓은 창 세 개, 얇은 흰색 커튼. 밖엔 짚으로 만든 새집이 있다. 자다 깨니 바람이 갑자기 많이 분다. 오빠야한테 창문을 닫아 달라고 했다. 바쁜지 피곤한지 네가 닫으랬다. 냉정한 느낌이었다. 태풍이 부는 것 같아 무서웠다. 창문 앞으로 가서 용기 있게 무사히 닫았다. 처음엔 무서워서 바깥 창문만 닫았는데 불안해서 다시 열고 안 창문까지 모두 닫았다. 오빠야는 지켜보고 대견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고서는 이제 학교에 가야했다. 오빠야랑 나는 둘 다 고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혹은 중학생. 오빠야는 교복을 입고 나가면서 “오늘 뭐 약속 있나?”했는데 내가 “없다. 약속.”해도 자꾸만 못 들었다. 7번을 넘게 다시 말한 것 같다. 바뻐 죽겠고 지각할 것 같은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내 목소리를 못 듣는다. 갑갑했다. 오빠야가 먼저 준비하고 나가며 나중에 놀자고 했다. 오빠야가 놀러가자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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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급히 학교 갈 준비를 했다. 마치고 오빠야랑 놀이 공원을 갔다. 잠이 슬슬 깨면서 친구랑 놀이 공원에 가 있는 듯하다 꿈에서 깼다. 꿈을 찾아간 나를 보며 오빠야도 이제 용기를 냈다. 꿈에서처럼 우리는 잘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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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 머리 뒤 칠판에 사각사각 더듬이를 그리고는 깔깔댄다. 눈썹을 억지로 찡그리는 척하다 이내 참지 못하고 웃으셨다. 나침반을 선물 받고 눈을 감는다. 복식호흡을 하며 말씀을 듣는다. 방향을 잃을 때마다 이 나침반이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하셨다. 어느 날, 어린 마음들이 옆 반 선생님께 장난스럽고 버릇없게 군다. 전해 들으시곤 여린 빛이 들어오는 어둑어둑한 방에 데려가셨다. 빗자루를 가져오라는 말에 겁에 질려 빗자루를 가져온다. 바지 단을 걷으시고 창 아래를 짚은 채 빗자루를 거꾸로 드셨다. 휙- 탁! 휙- 탁! 하는 소리에 놀라 울면서 잘못했다고 그만하시라 한다. 종아리에 붉은 선들이 선명해질 때쯤, “잘못 가르친 내 잘못이다.” 우린 연고를 드린다. 죄송하다고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쪽지와 함께. 고약한 파도 같던 우리를 따뜻한 가을날의 바람처럼 어루만져 주셨다. 가을이 가고 찬 겨울이 온 지금, 열두 살 담임선생님과의 추억을 나침반 삼아 드넓은 바다를 항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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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철 … 시시한 사실¶ … 서른¶ … 스마트폰¶ … 귀이개¶ … 찬바람¶ … 음료수 한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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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사실 어딘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금세 닿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쉬어도 괜찮을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쉬쉬하고있던건 세상엔 쉬운게 하나 없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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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서른까지 두살 남았다 어른까지는 한참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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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든다 손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무게감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능숙하게 손가락을 놀려 즐겨쓰는 어플을 찾아 켜 부지런히 눈동자를 움직이며 형형색색의 빛을 잡아내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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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이개 가려운 곳을 찾아내 긁어내려 했건만 좀체 시원해지지 않고 되려 아파지기만 한다. 그 아픔이 시원함으로 바뀔때면 이번엔 반대쪽 귀가 가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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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따뜻해야할 이불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 그냥 무시하려다가도 자꾸 신경쓰여 바람이 새어나가는 곳을 발로 더듬더듬 찾아내어 기어이 그 틈을 메우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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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한방울 목이 말라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를 뽑았다 칙탄산 빠져나가는 소리 보글거리는 음료를 양껏 마시고 쓰레기통으로 버리려니 캔안에 남은 음료 한방울이 신경쓰인다 남김없이 마시려 한참이나 사투를 벌이고 나서 웬지 아쉬운 마음으로 빈 캔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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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나현 … 2018.04.19¶ … 달리¶ … 티타임¶ … 잡생각¶ … 서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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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터벅터벅 걸어간다 무슨 근심이 그리 많은지 한껏 찌푸린 얼굴들이 잔디밭 위를 헤집는다 달려오는 강아지를 보고 이내 그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나무들은 저마다 한껏 푸르름을 내뿜는다 지저귀는 새소리는 텅빈 운동장 안을 고요하게 채운다 햇살 한줄기가 내 머리위에 걸터앉는다 잠깐 지나가다 앉은 벤치에서 봄의 행복을 느낀다 하마터면 지나칠뻔한 벤치에서 봄의 행복을 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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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너의 작은 손길에 나의 눈이 떠지고 손을 뻗어 부드러운 털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흩날리는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여전히 너는 문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철컥 현관문을 열면 스르륵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켠다 너의 잠을 깨운것 같아 괜히 미안해진다 바쁜날이 많아질수록 미안함은 배가된다 어느새 내 마음 속 깊이 새겨들었다 오늘도 괜히 너의 존재가 내게 다가와 미소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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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 인내의 시간 점점 진해진다 향과 맛이 깊게 우러난다 물의 맑음이 찻잎으로 물들 때 즈음 피어오르는 연기에는 얕은 뜨거움이 느껴진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는다 입술부터 느껴지는 뜨거움이 서서히 깊은 향으로 스며든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하루에 온기를 불어넣어준다 다시한번 온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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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한다 두 장쯤 읽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 맴돈다 생각을 그만두고 다시 글자를 읽어나간다 이번에는 또 다른 생각이다 또 한번 같은 글줄을 읽는다 시선은 계속해서 글줄을 따라간다 그러다가 아차한다 글을 읽은게 아니라 글자를 읽었다 괜히 한숨을 쉬어보고 책을 잠시 덮어둔다 팔을 괴어 책상에 엎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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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장 겉에서 보면 반듯하고 깨끗하기 그지없다 바라만 보고 열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위해 꾸역꾸역 넣어놓았다 나는 기억도 못하는 무언가를 혼자 가득 안고있다 드르륵 서랍을 연다 어디둔지 잘 기억도안나는 귀걸이 한짝을 찾기위해 마구잡이로 어질러져 있는 그것들 위로 손을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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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은 … 무게¶ … 안부¶ … 감정¶ … 봄¶ … 일기장¶ …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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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따듯한 말은 그 무게가 가벼워 너와 나 이리저리를 지나 사뿐히 내려 앉는다. 차가운 말은 그 무게가 무거워 발 아래 이리저리를 치여 누군가의 시린 상처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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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내게 소식을 전해주거든 민들레 홀씨와 함께 날려보내주세요. 그 마음이 홀홀 불어와 내게 싹 틔울 수 있게 당신에게 소식을 전하거든 내 노오란 민들레를 고이 넣어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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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물이 끓는다. 처음에는 미동도 없더니 물이 끓는다. 작은 기포들이 어디서 나타나 옹기종기 서로 끌어안고는 제 몸을 띄워 올라간다. 몸이 끓는다. 이제서야 알아챈 내 감정의 기포가 올라 몸이 끓는다. 내가 몰랐구나, 넌 이렇게 작게 작게 그 몸집을 키워 내 위로 올라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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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저 멀리

바람이 다가와 내 머리를 한번 쓰담곤 떠나갔다. 방금전 저 노오란 개나리를 껴안고 온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너가 껴안고 온 햇살내음이 내 몸 깊숙히 스며들 즈음에 다시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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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연필심은 제 몸을 꾸욱 눌러 종이에 안긴다. 종이는 연필심이 제 몸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온 몸으로 끌어안는다. 혹여 누군가의 비밀이 이 고요한 밤 몰래 뒷굼치를 들곤 제 곁을 떠나갈까봐 연필심과 종이는 온 몸을 다해 제 안에 담긴 글을 포개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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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내 창문커튼의 색이 푸렇게 물들어져 갈때 내 생각은 밤하늘의 색보다 짙어져 간다. 그럼 네 생각은 저 별보다 밝게 빛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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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김동환 조하영 윤정민 고민지 정경호 최서연



기대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

! 어머, 아직 12시네?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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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새벽 5시 반, 기나긴 밤샘을 마무리 짓고자 뻐근한 몸을 일으켜 자췻방 현관을 나선다 푸른 하늘 아래의 산책에는 매번 새로움이 있다 그날의 감정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걷게 한다 늘 같은 장소들을 지나가지만, 도달하는 과정은 늘 새롭다 처음 접어드는 골목길의 모든 것이 눈에 새겨진다 그리운 새로움의 향연의 끝에는, 늘 지나치는 장소가 있다 그럼에도, 처음 접하는 장소가 된다 전례없는 각도에서 바라본 익숙한 장소는 익숙한 새로움이다 나의 산책은 새로움을 찾아가는 항해와도 같다 ... 아 피카츄 떳다. 부제 포켓몬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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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는, 12달에 한번, 그 모습을 드러내는 풍선이 있다. 그 풍선에는 각기 다른 기억들이 담긴다. 누군가에겐 오래도록 남을 경관이, 다른 이에게는 사랑과 같은 추억이, 또 다른 이에게는 지난 기억들이... 초목의 부활을 알리는 계절에, 이 풍선은 그 모습을 드러내어, 점차 부풀어오르기 시작한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은,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억과 추억을 안겨준다. 그 구경꾼들은 새로운 과거의 한 켠을 간직하며, 이따금 풍선이 더 화려하고 풍성하게 부풀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는 할 것이다. 사실, 이 풍선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그러한 아쉬움이 피어날 때이다. 야속한 풍선은, 어느샌가 12달 뒤를 기약하며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만다. 마치 인간의 욕심에 가르침이라도 주려는 듯이. 길바닥에 흩뿌려진 아름다운 풍선의 조각들은, 매년 그렇게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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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거리의 골목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연기는 신호탄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각기 다른 의미에서, 타오르는 신호탄의 연기들은 골목길을, 그 거리의 상공을 메운다. 신호탄의 의미는 발화의 과정에 있다. 불을 붙인 자의 이유가 신호탄의 의미가 된다. 귀가길의 가장의 신호탄은, 그 위치를 한정하지 않으며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대학생들의 신호탄은, 대게가 삼삼오오 모여 소란스런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곤 한다. 아싸의 신호탄은, 주인처럼 구석에서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피어 오른다. 20개의 신호탄은, 한손에 쏙 쥐여지는 상자에 담겨서, 불이 꺼지지 않는 잡화점에서 4500원에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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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 들어서서부터, 아래로,

슬리퍼

구두

구두

구두

현관

고개를 들어서, 오른쪽으로,

흰티

흰티

흰티

흰티

흰티

빨래건조대 그 건조대 너머로, 작은 침대 하나, 그 침대 맡에, 우뚝선 3칸 짜리 책장,

패미콤

슈퍼 패미콤

닌텐도 64

게임큐브

게임보이

스위치

동양근대사 서적

타이포그래피

책장에서 왼쪽으로,

노트 노트

수첩

책상

사전

펜꽂이 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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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서 왼쪽으로, 3칸짜리 옷장,

자켓

코트

양복바지

셔츠

넥타이

져지

5

7

2

3

4

면바지 흰티

니트

수건

이불 TV

옷장의 왼쪽, 촌스런 녹색 플라스틱으로

속옷/양말

만들어진 3칸짜리 '내쇼날 서랍장'과 4대3 브라운관 TV,

케이블 생필품 그 왼편으로, 주방,

찬장 개수대 팬 냄비

모자

수저

가스렌지

주방 용품

조미료 향신료

주방에서 왼편으로, 방 크기에 걸맞지 않게 아담한 냉장고, 냉장고 왼편으로, 그 왼편으로, 다시 처음 보았던 좁디 좁은 현관.


물결

나는 물결이 좋다 물결이라는 단어가 전해주는 어감과 물결과 함께 들리는 소리와, 햇빛에 반짝이는, 잔잔히 주변을 비추는 물결이 좋다 물결은 나의 시선을 가져가 함께 물결친다 물결을 주욱 보고 있으면 내 마음속 바다도 잔잔해진다

조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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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

미술관 옆엔 동물원 철수와 춘희가 만난 갈림길의 교차점 노란 우산 맥주캔에 꽂아 놓은 장미꽃 감자튀김과 애플파이 달과 중력 캠코더 손가락으로 만든 프레임 스탠드 불빛과 빗소리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질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건지 몰랐다.’ X세대 사랑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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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사랑해 내 과거 나의 슬픔도’ 이 문장을 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나의 부끄러운 과거들과 나를 잠식했던 슬픔과 고통을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 걸까 나도 언젠가 나의 그 슬픔도 사랑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너무도 따뜻했다 위태로워만 보였던 그녀와 실제로 마주하자 그녀는 너무도 단단하고 강인하고 용기 있는 멋진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요새 말을 할수록 허름함을 느낀다. 부끄럽다. 못난 나를 사랑하고 구원할 사람은 결국 나인데


60

나의 바다

내 모든 그리움의 대상은 바다 바다가 처음에 내 눈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무너졌다 바다가 없어 아무 데도 오갈 곳 없는 배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과 어둠 내 머릿속은 늘 바다 파도가 넘실댄다 해변의 모래가 되어 파도와 함께 휩쓸려 사라지고싶다


61

프리지아

나는 프리지아가 좋다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가장 슬펐던 생일에 친구들이 프리지아 꽃다발을 주었다 그저께는 또다른 친구가 프리지아를 건네줬다 그냥 봄이 와서 줬단다 내 주변에는 나에게 프리지아를 선물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프리지아의 꽃말을 찾아보니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란다 내가 가장 힘들때 받았던 프리지아 꽃들 슬픈 과거들과 이별하고 새로이 시작하라는 의미들이었을까 집에 도착했을때 화병에 꽂아놓은 프리지아가 활짝 피어있었으면 좋겠다


윤정민

62

교복

길에서나 버스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유독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입을 수 없어서 돌아가고 싶어서 돌아갈 수 없어서 그땐 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어른처럼 보이고 싶었는지 그땐 몰랐다 그때 내가 듣던 '제일 좋을 때다'라는 어른들의 말을 내가 하게 될 줄 이렇게 빨리 어른이 될 줄


63

한강

합정에서 당산 2분도 채 안되는 시간 달리는 지하철 안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도 이때만큼은 고개를 들어 밖을 본다

언제는 뭉게구름이었다가 또 언제는 잿빛이었다가 또 언제는 주황빛 노을

매번 달리 보이는 한강의 하늘 오늘은 또 어떤 하늘일까 고개를 들게 되는 시간


64

라일락

멀리서부터 알았다 그 자리에 네가 있을 줄 멀리서부터 풍겼다 코 끝을 간지럽히는 달달한 향기 그 향기를 맡고서 너를 찾았다 역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연보라빛 얼굴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65

저마다 할 뿐

어렴풋이 들린다 친 구 와 의

이 야 기

노 트 북

키 보 드

소 리 소

소 리

조금 신경 쓰일 뿐 그 이상 궁금해하진 않는다 나도 사

내가 무엇을 하는지 또

그 들 이

무 엇 을

저마다 할 뿐

하 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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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5,984장 지금 내 앨범의 사진 수 나는 사진 정리를 잘 하지 않는다 누군가 보기라도 할 때면 필요 없는 사진은 좀 지우라고 했었다 글쎄, 이상하게도 그것들을 정리하기 아쉽다 가끔 열어보면 나를 그때로 데려다준다 얼마나 좋았길래 얼마나 들떴길래 같은 장면을 저리도 많이 찍었었을까 그렇게 오늘도 지워내지 못한다


휴식

버스 안에서 실컷 낮잠 자고 내려서는 파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으면 한다 볕도 딱 적당하게 좋아하는 노래 하나 들으며 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세상 좋겠다

고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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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여행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도 뭐하는 거냐고 다그침을 고스란히 받아듣는 일이 다반수인 하루들 속에서

여행은 언제 머물렀는지도 모르는 짧디 짧은 찰나들이 쌓여 긴 무게들을 그 길어짐을 스스로가 내려 놓을 수 있는 잠시 피해도 좋은 순간으로 이끌어간다


69

안녕

돌아갈 날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처음 훌쩍 떠났었을때는 아쉬워서 어쩔 줄 모르며 안녕 하고 마음 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을 기약할 줄 안다 떠나고 또 떠날수록 아쉬움을 달래며 다가올 것들을 맞이 할 수 있는 조금의 성숙을 담아간다


70

미련

후회없이 미련없이 사는 것

참 어려운 것 같다. 이미 떠나가버린 일을 홀로 추억하는 것 지난 일을 후회할지 말자 하며 다시 이렇게 쓰는 것

아직은 부족하고 미숙한 나      적어도 미련한 미련이 되지 않도록     되뇌이는 미련


71

아주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추운 겨울 밤 코에서 머무는 진한 풀냄새와 까만 밤하늘의 수많은 별빛들은 강한 추위도 달아나게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따뜻한 봄이 오길 기대하면서도 내일의 추운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경호

72

거울

거울로

나를 본다 다본 를나

당신의 입으로

에창리유 한주마 며으걸

나를 본다 다았보 를나 로으빛눈 의가군누

나의 언어로 나를 본다 다본 를나 로리소 의나 내가 주는 눈빛으로 내가 전달하는 온도로 누군가는 나를 본다 어떤 색으로 어떤 온도로 어떤 눈빛으로 나는 보정되었을까 다시, 거울로 나를 본다 절대 스스로 나를 볼 수가 없다


73

꿈에서 온 편지

너의 눈을 떨어뜨리고 두 귀를 마취시켰다 온 몸의 신경을 잔잔케 하고 작은 손가락 마디까지도 무겁게 한다 때로는 뜨거운 곳에 가끔은 신나는 곳에 데려간다 아주 멀리 데려가기도 매우 가까운 곳에 데려다 놓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너는 매우 하얗다 낯선 곳에 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시간을 역행해도 너는 모험했다 어떤 색을 입더라도 너의 색으로 바꿨고 몇번이고 태어났으며 너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나에게 너는 동화속 주인공이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해석되었다 너는 나를 깨어나고 나서야 발견한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너를 잘 알고있다 나는 정확하게 너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이다 가장 작은 일부이며 스스로와 가장 가까운 뿌리이다 나에게 있어 너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너 스스로이다


74

종이에 관하여

책상 위, 몇장의 이면지와 많은 영수증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들은 오늘 분명히 버려질 예정이다

내손이 어릴 때 나는 나무를 심었다 여러가지의 순수함을 단 한장의 편지에 눌러 담았다

어린손은 자라나 더 큰 완벽을 추구한다 완벽하기 위해 다시 쓰며, 필요하지 않은 곳에도 썼다 여러번은 버렸으며 반드시 필요하다면 더 썼다

밥을 먹고 계산을 한다 돌아서는데 영수증이 나온다


75

김호피

작은 발을 움츠리고 문 앞에 앉아있다 표정에는 반가움이 잔뜩 묻었다 신발을 벗고 큰 걸음을 옮기자 작은 발은 지긋이 큰 걸음을 따른다 표정에는 기다림이 잔뜩 묻었다 작은 손은 큰 손을 안는다 가장 따뜻하게 만져달라 손짓한다 표정에는 간절함이 잔뜩 묻었다 품에 안겨 시간을 보내고는 달아난다 기다리게 한 내게 심술이 난 모양이다 표정에는 미움이 잔뜩 묻었다 호피의 표정에는 다양한 마음이 묻었다 미움, 질투 그리고 실망 안쓰러움과 배려 그리고 용서 김호피는 항상 나를 편든다


76

가장 이기적인 관계

어쩌면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인 당신께 완전하기를 바랐고 노력하는 당신을

칭찬하지 않았다

나에게 당신은 형이자 동생이며 친구이자 누나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께

항상 어린이다


최서연

77

삼월

겨울 티를 벗지 못한 바람이 시려 눈을 감는다 갈 곳을 잃은 손은 길거리에 핀 흰 꽃을 쥐었다 날개 자욱을 덮는 머리카락 생각조차 지울 듯 흐르는 바람 소란스러운 적막 속에 아이는 울지 않는다 이른 아침 보라색 시선이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죽음은 온전한 슬픔이자 물기 안개 낀 새벽의 공기중에 슬픔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숨을 쉴 수가 없다


78

어둑한 방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비춘다 예민하게 불타오르던 하루들이 이제 재가 되어 떨어지는 시간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보고싶은 이름들을 쓰자 손을 잡아오는 희미한 감정들에 빠져드는 거라면 떨어지고 싶었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서

그만 생각해 잘자


79

거문고자리

손 끝이 맞닿은 그 모양 그대로

당신은 어디서나 상실하고 그리워하고 외로워하고 후회하고

그러나 울지 않는 것은 쉬워도 슬퍼하지 않는 것은 힘들었겠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이 또한 너무 늦었기에 끝내 말하지 못한다 네가 울지 않기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모든 것들을 사랑해버린다

미안해.


80

눈이 오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서 봄과 겨울 사이 스며드는 계절에 너의 모든 것을 널리 펼치라고

흰 것은 어쩌면 비어있고 슬플지도 몰라 네가 배운대로

하지만 나는 너에게서 희망을 본다 이상은 푸른 빛이라고 하고 삶은 붉은 빛이라고 하지만 너는 나에게 언제나 흰 색이다


81

포말

물거품이라는 말은 물이라는 말과 끝이라는 말인데

물병에서 떨어지는 곳에 물고기의 입이 있는 건

물이 그곳에서 죽어 사라진다는 뜻일까

물거품이 되고 싶었던 너는 물결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물음이 입가를 맴돈다



3부

신미경

박희빈

정연문

이홍교

오훈택

전희선

윤지우

83


고양이 털

나는 어디에서나

너와 함께 다닌다 너는 항상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왜인지 물어보면

너는 대답할 수 없겠지

집은 물론이고

밖에서도 너와 함께 있다

이제는 네가 없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렇게 좋은지

너는 떨어질 생각도 안 한다

아무리 밀쳐내도

다시 내게 돌아온다 왜인지 물어보면

너는 대답할 수 없겠지

그래도 인사해 본다 안녕 고양이 털아

신미경


우리 집은 햇살이 잘 들지 않는다

살면서 햇살이 필요할까? 생각을 했는데 없으니 가끔 느끼고 싶어 밖에 나간다

가끔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는 게

햇빛 들지 않는 실내에서 계속 자는 것보다 좋은 느낌이 든다

인간은 잠을 안자면 죽는데

그 ‘잠’이 햇살보다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식물은 햇빛으로 광합성을 하는데

그 말인즉슨 햇빛이 없으면 죽는다 태양이 지구보다 먼저 생겼는데

생명이 태어나면서 태양을 필요로 한 걸까 태양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태어난 걸까

햇살

신미경

85

85


10년도 넘게 내 손끝에 자리 잡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일부분이니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 있다

멍청히 있다가 문득 고개를 내리면 손가락은 손가락을 뜯고 있다 손가락은 손가락을 뜯고

손가락은 손가락 때문에 아파한다

붉은 속살이 나올 때까지 끝장을 본다

아니 사실 피를 볼 때까지 끝장을 본다

10년도 넘게 아픔에 익숙해지니 그렇겠지 피를 보는 게 싫다

내 무의식의 행동이 싫다

손가락 거스러미 신미경


너희도 생각을 할까?

너희도 영양분을 섭취하고 번식을 하는데 너희도 생각을 할까?

너희도 살아있고 채집을 하는 순간 어느 때부터 죽어 가는데 너희도 생각을 할까?

너희도 분명히 물을 마시고 햇볕을 쬐고 땅으로부터 지지하고 살아가는데 너희도 생각을 할까?

너희도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틀린데 너희도 생각을 할까?

너희에게 질문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묻고 싶다

식물

너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니?

신미경

87

87


자주 꾸는 꿈이다

턱이 너무 아파서 다물 수도, 벌릴 수도 없는 꿈

꿈을 꾸는 동안에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하지 못하는데 이미 꿈속에선 익숙해져서 또 아프네

이 생각이 먼저 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꼭 내 인생 같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항상 꾸는 꿈인데

내 인생을 바탕으로 꾸는 꿈인가보다

신미경


병아리

초등학생 때 키웠던 병아리

스무살때 좋아했던 병아리 캐릭터 요즘 하고 싶은 타투도 병아리 어쩌면 나는 병아리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몰라 멍청한 눈이 좋아 복슬한 털이 좋아

조그만 부리가 좋아

멍청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복슬한 털에 파묻혀

박희빈

조그만 부리로 재잘거려줘

89

89


네모난 창문으로 보는 네모난 풍경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근데 있잖아

엄마가 알려주신 네모는 매일 달랐어 따뜻한 손가락으로 보인 네모는 부드러운 살결과

다채로운 피부의 색이 보였어

네모의 꿈

어쩌면 그게 네모의 꿈일지 몰라

박희빈


나중에 강아지를 키운다면 이름은 네모로 할래

네모가 새끼를 낳는다면 이름은 세모가 될거야

세모는 네모의 일부니까

네모의 꿈2

박희빈

91

91


찰밥에서 콩 골라내기는 식은죽 먹기

유부초밥 속 콩 골라내기는 새발의 피

행여 입에 들어갔더라도

흠집 하나 없이 뱉어낼 수 있어 단백질은 고기로 채우면 돼 비타민은 과일로 채우면 돼 감 놔라 배 놔라

오늘도 평화로운

먼 나라 이웃나라

콩 먹기 싫어 박희빈


팔꿈치에 혹이 났다.

한 번도 아픈 적도 불편한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러니까 무슨 일인지

왜 그러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중요하다 여기지도 않던 곳에 갑자기 이러니까

오늘은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갑자기!

왈칵 쏟아질 것 같다.

박희빈

93

93


그리움

내가 슬퍼지면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라고 한다.

정연문

그게 날 더 슬퍼지게 하는데.


웃음은 전염이 된다고 한다.

내가 너를 보고 웃게 되는 것은 아마.

너가 웃음을 닮은 탓인가 보다.

정연문

95

95


버스는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다. 버스는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게으름을 피운다는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외롭기 때문이다.

버스

정연문


취향, 성격, 생각, 환경.

시간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한다.

익숙한 가게가 없어지기도. 익숙한 관계가 없어지기도. 시간에 따라

우리의 주변은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시간에 따라

모든 건 잠시 공전하던 것 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었다.

시간을 따라 가는 건

굉장히 외로운 일이다.

정연문

외로운 일

97

97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한다.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기억하려 할수록

기억하기 어렵기까지 하다. 방금 꾸고 난 꿈처럼.

공부를 하며 필기를 하고,

장을 보기 위해 메모를 하고,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한다.

누군가는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한다. 방금 꾸고 난 꿈처럼.

기록

정연문


비는 시를 쓰는 데에

덧없이 좋은 소재이다. 감성적이기 때문인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인가. 고요해지는 거리 때문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인가. 젖은 흙의 냄새 때문인가.

햇살보다 높은 희소성 때문인가. 변덕스러운 하늘의 재채기에 사고가 나기도.

예쁜 꽃들이 사라지기도.

거리로 나서지 않게 되는 것도. 그렇기에 장사를 일찍 접기도. 그럼에도 누구 하나

크게 성내는 사람은 없다. 알기 때문이다.

이 불행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정연문

99

99


시를 노래하기까지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말.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잔인하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워 주위를 둘러봐.

우린 얼마나 많은 고찰과 관찰을 반복해야 하는가.

내가 보고 듣고 배운.

너가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같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꼭 다르게 느껴야 하는가. 같은 시어, 같은 점을 쓰는데 다르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너의 것이 느껴지지 않아도

이해를 해야 하는가.

나를 표현하는 게 맞다고는 해도

정연문

그게 와닿지 않으면 소용이 있는가.


네모 눈들까지 감기고 나서야. 움직임이 바빠지는

먼지들의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고 있는 형광등. 천장과 마주한다.

아- 뜨거웠던 불꽃이여. 빛을 잃고, 연기만

뿜어대는 이유가 무엇이냐.

열정

정연문

101

101


아침에 일어났다

아침에 눈을 떴다 사실은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냥 눈만 떴을 뿐 세상에는

눈만 뜬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본 것이 아니라 그냥 눈만 뜬 거다

이홍교


코가 답답하다

코가 답답할 땐 코를 풀면

무척 시원하다 코 속 깊숙이

숨어있던 것들이

빠져나와서 그런가 보다 가슴이 답답하다 가슴속 깊숙이

숨겨놨던 것들이 빠져나오면

코를 푸는 것처럼 시원할까

콧물

이홍교

103

103


누가 그랬다더라

웃으면 복이 온다고 슬퍼도 웃고

화나도 웃고

짜증 나도 웃었다.

그래서

복은 언제 오는데?

웃음

이홍교


애들이 다 너가 좋다더라

나도 한때는 널 좋아 했어

근데 미안

이젠 너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너를 아무나 좋아해서 그런가 봐

치킨 이홍교

105

105


난 수염이 싫다

까끌 거리는 놈들

정말 나쁜 놈들이다 나쁜 놈들은

뿌리를 뽑아 버려야해

수염 이홍교


보이는 게 싫어서

무서워서

그래서 항상

네 뒤에 서있었다.

내 모습이 싫어서

무서워서

그래서 항상

네 뒤에 서있었다.

내 앞에는 항상

네가 서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림자

내 앞에 서있던 네가

나랑 같은 기분인 걸

알았을 때도

그때도 항상 그랬듯이

뒤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홍교

107

107


여러가지 모양의 퍼즐조각이 이리저리 나뒹군다.

크기, 모양 전부 제각각이다.

정확한 이미지가 그려질 듯 말듯하다. 안개가 자욱한 도시다.

2차원을 넘어서 3차원 4차원에 공간이 펼쳐지려한다.

떠오른 조각의 파편은 섬광처럼 번쩍이며 다른 조각들을 가리지만

그 열기는 금방 식어버리고 금방 사라진다. 조각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머릿속을 헤엄쳐 다닌다. 미꾸라지를 잡으려 하면

다른 조각들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 서로 다른 조각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들.

끊임없이 채워지는 조각들.

그 속에서 완성해야만 하는 퍼즐.

2016년 6월 쯤 이후 오훈택


왜 이렇게 돼지가 되어버린 걸까.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한다. 3시간이 지났다.

나의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행복하지도 않다.

어차피 이럴 거 그냥 먹을걸.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냥 살아가야지.

다이어트

오훈택

109

109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을 가지고

가볍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바다로 향한다. 깜깜한 바다 하늘 위를 도화지 삼아 화려한 흔적들을 수놓는다.

불꽃놀이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 모두 넋을 놓고 바라본다.

그 순간만큼은 바다의 울음소리,

서늘한 모래, 무거운 바람을 무시한 채

오로지 그 화려함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 화려함은 곧 더욱 더

깜깜한 어둠 속으로 점차 소멸한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무함과 함께 바다의 울음소리, 서늘한 모래,

무거운 바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을 가지고 가볍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바다로 향했지만

내가 도망쳐온 것들이

오훈택

뒤늦게 찾아온다.


따뜻함과 쌀쌀함이 공존하는 날씨 잠깐에 따뜻함에 속아

하얀 꽃들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잠깐인 줄 알았던 겨울의 냉기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하고

비, 바람과 함께 더욱 쌀쌀해져 간다. 뽀송뽀송한 꽃과 이파리들은 느껴보지 못한 추위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조금만 지나면

따뜻하고 포근한 봄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갓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추위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추위를 이기지 못한 것들은

4월에서 3월, 2월, 1월로 다시 돌아가 그들이 느껴보지 못한

한겨울 속 새하얀 눈이 되어

하늘에 흩날리며 흙과 물 위에 따뜻한 이불을 덮어준다.

봄에도 눈이온다

오훈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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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세상 모든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나의 모든 감각에 닭살이 돋는다.

내 주위 모든 소리가

이 순간만큼은

모두 검게 느껴진다.

검은새벽

오훈택


나의 모든 것을 들킨 순간 나는 버려졌다.

그렇게 죽음을 기다렸고

죽임은 나에게 멀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따뜻한 온기가 나를 감쌌고 멀어져 가던 의식을 붙잡아주었다.

누구일까 왜 나를 여기서 꺼내려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답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온기에 대한 감사일 뿐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존재만으로

따뜻한 온기가 되었다는 것을.

나 또한 따뜻한 온기가 되었다는 것을.

종이상자

오훈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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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반짝반짝

며칠간 미세먼지로 가득했던 밤하늘을 대신해서

오늘은 도시가 전체가 반짝인다

하늘을 대신해서일까

그 모습에 감동한 밤하늘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린다

반짝임으로 가득한 세상 반짝반짝

2018년 4월 24일

새벽 3공 7층 발코니

오훈택


잊지 말자고 다짐해도

내 일상이 바쁘다고 자꾸 잊어버린다. 난 벌써 22살인데,

그 친구들은 아직도 18살.

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그 아이들의 시간은 멈춰만 있다.

벚꽃이 피어있던 2014년 4월 16일

설레임을 가득안고 웃음소리로 가득 찬 배. 친구들의 밝은 모습을

그대로 빼앗아간 바다.

노란 계절

젊은 청춘을 가져간 바다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평하다. 여전히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 얼굴만 보면

괜스레 눈물이 흐른다. 노랗고 따스한 봄은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과 함께 찾아왔다.

모두의 시간이 흘러가는 지금도

그 친구들의 시간은 멈춰있다.

윤지우

115

115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틈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

그 여백을 그대로 놔둘지 그 여백을 적당히 채울지 그 여백을 가득 채울지 오로지 나의 몫 흘러 가는대로

하고 싶은대로

해야 하는대로

오로지 나의 몫

공백을 채워간다는 건

가치를 세워간다는 것

틈(시간의 공백) 윤지우


아무리 말을 건네도 대답이 없다.

이렇게 초조한 나에게

아무 응답을 주지 않는다.

계속 나의 말을 안 들어 주는 너 참 밉다. 얼마나 달달하고 다정하게 얼마나 구슬프고 애달프게

어떻게 불러야 될까?

어떻게 불러야 날 봐줄까? 반복되는 나의 부름에도

여전히 넌 외면한다.

반복되는 나의 외침에도

여전히 넌 너의 일에 취해있다.

그럼에도 항상 난 부른다, 널.

알람 윤지우

117

117


새우 감바스

널 만나기 5분 전

난 생각만 해도 행복한 웃음이

얼굴에 머무른다.

어떤 표정으로 널 봐야 좋을지 어떤 리액션으로 널 맞이할지

기다림 속 설레이는 고민만 머릿속에 맴돈다.

언니 덕분에 만나게 된 너.

언니가 맺어준 우리의 만남. 내가 좋아하는 향에 내가 좋아하는 색을

입고 나온 너.

처음엔 달달하게,

그 다음엔 살짝 느끼하게,

때론 날 살살 녹여버리는 너.

다양한 매력을 가진 너에게

푹 빠져버린 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계속되는 너의 유혹에

나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모른다. 마지막까지도

날 정신 못 차리게 하던 너.

윤지우

벌써 또 보고 싶네, 너.


참 변덕스럽다 너

하루도 빠짐없이

날 고민스럽게 만드는 너

너의 감정기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본다

따스한 미소로 웃어주다가도

갑자기 펑펑 울어버리는 너

짜증난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어버리는 너

이런 너의 기분을 맞추는 건 수학문제보다 어렵지만 변덕스러운 너가

날보고 해맑은 아이처럼 웃어주면 바보같이 나도 같이 웃어버린다

날씨

윤지우

119

119



한유림

조수현

김진희

이원비

김민혁

편집 이승의

4부

정유진


이승의

우리 동네

오랜만에 찾은 동네는 변한 것이 없다.

초등학교의 도색이 바뀌고 삐까번쩍한 상가들이 생기고 새로운 아파트들도 생기고 집 앞의 개천은 물이 말라버렸지만, 우리 동네는 변하지 않았다.

등교할 때 맡았던 냄새도 화요일마다 서던 장의 인심도 방음벽을 수놓던 장미와 담쟁이도 올챙이를 잡던 그 개천도, 나의 기억과 함께 살아 꿈틀댄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모든 것이 익숙하고 반가워.

내가 살아온 날들을 느낄 수 있는 곳. 흘러간 모든 시간 속의 나로 가득 찬 곳.

122

시간이 흘러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승의

내가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사실 나는 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정말 예쁘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내가 너에게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 건 부끄러워하며 건네는 너의 표정이 좋아. 꽃잎처럼 붉어진 너의 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어.

내가 너에게 꽃을 보러가자고 했던 건 한 철 폈다 지는 짧은 순간에 너를, 우리를 담고 싶었어. 너와 함께 보는 꽃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

나에게 꽃을 선물해줄래? 꽃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꽃보다 예쁜 너의 모습을 보고싶어.

나의 기다림 끝에 꽃과 함께 돌아와 줄래?

123


이승의

매일 밤 너와의 통화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항상 늦게 자는 나를 오늘은 꼭 기다리겠다며 먼저 잠드는 너.

잠에 취해 웅얼이는 사랑 고백과 이윽고 들려오는 너의 숨소리.

도로롱 도로롱. 코 고는 소리가 싫지 않아. 이 시간에만 들을 수 있는 너의 깊은 숨소리.

가장 순수하고 간지러운 소리. 안정된 숨소리를 가만히 듣노라면 마음이 안정된다. 살아 있음을 느껴. 소중함을 느껴.

수화기 너머로 너의 새벽을 공유한다. 오래오래 듣고 싶어. 오래오래 엿보고 싶어.

124

아, 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승의

물짝물짝

물짝물짝 햇빛이 물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너는 '물짝물짝하다' 했다. 너는 물짝이는 강을 참 좋아했어.

나는 너의 감성을 좋아했고 순수함을 좋아했어.

우리가 다른 곳에 있더라도 너를 당장 볼 수 없더라도 물짝이는 강을 보며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며 너를 떠올려.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너를 닮았다.

125


이승의

엄마

엄마 사실 엄마에 대한 글은 쓰고 싶지 않아요. 엄마라는 말을 쓰면 마음이 너무 저릿하고 슬퍼요. 엄마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런가요?

엄마 사실 엄마를 그리고 싶지 않아요. 어렸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그늘이 보여서 그리다가 울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예쁘지만요.

엄마 사실 엄마를 찍고 싶지 않아요. 한 컷의 사진으로 찍고 보면 더 보고 싶어져요. 그래도 제 컴퓨터에 엄마 사진이 얼마나 많은데요. 힘들 때 사진 보고 몰래 울었어요. 엄마는 모르겠죠?

엄마 사실 저는 언제까지나 어린애고 싶어요. 엄마의 사랑을, 희생을 계속 모르고 싶어요. 엄마라는 두글자가 자꾸만 슬퍼져요.

그렇지만 슬퍼도 계속해서 부르고 싶어요. 언제까지나 저를 지켜주세요. 언제까지나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126

엄마, 엄마, 엄마


이승의

버스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창밖을 바라본다.

전화를 받으며 급하게 걷는 저 아저씨. 궁금해. 어디를 가는 걸까.

아이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는 젊은 부부. 무엇이 그렇게 행복한가요?

각자의 사연이 궁금하다. 목적지가 궁금하다. 감정이 궁금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저 아이. 당신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쳐지나요?

나는 행복한가요? 나는 어디를 가고 있나요?

버스가 덜컹인다.

127


조각. 하나는 추억이다. 조각. 하나는 슬픔이다. 조각 하나는 아픔이다. 조각. 하나하나는 이제 하나가 아니다. 산 산 조

128

각.

김민혁

깨진


먼지는 확산한다.

김민혁

머리먼지

내 머리 속에서 확산한다. 먼지는 쌓인다. 내 머리 속에서 쌓인다. 생각은 확산한다. 내 머리 속에서 확산한다. 생각은 쌓인다. 내 머리 속에서 쌓인다. 먼지가 많아질 때, 생각이 많아질 때, 내 머리 속에서 하얗게 퍼져간다. 멍... . . . 그렇게 생긴 머리 먼지

129


널 부르는

밤에

널브러진

130

머릿속

김민혁


아무것도

김민혁

신발 속 모래

아닌 것이

귀찮게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나보다.

131


시는 공간의 언어이다.

우리가 쓰는 한 글자 한 마디에 공간이 있다.

눈은 그 공간을 걸어다닌다.

입은 그 공간을 표현한다.

마음은 그 공간을 느낀다.

그 공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시를 이해한다.

내 눈은 그 공간을 온전히 걷지 못한다.

내 입은 그 공간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내 마음은 그 공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나는 아직이다.

나는 시를

132

이해하고 싶다.

김민혁


해가 오늘의 할 일을 다해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김민혁

새벽 하늘이 참 예쁘다

달이 차올라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깜깜한 밤이 다 지나도록,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해가 떠올라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그렇게 새벽, 이른 아침, 누군가는 보지 못할 아름다움을 마주한다.

새벽 하늘이 참 예쁘다.

이 맛에 밤을 새나?

133


다리 꺾인 새

발끝으로 서서 그 늪지대를 들여다보면 분홍빛 뭉치가 있다.

너는 가느다란 다리로 분홍빛 뭉치를 지탱하고 서 있다. 가운데가 툭 불거진 것이 마치 다리가 꺾인 것 같다.

너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에게. 너의 작은 발로 뿌옇고 어두운 늪지대 속을 자근자근 밟는 것에 집중한다.

너는 관심이 없다, 낮은 울타리에. 그저 부지런히 새카만 늪지대 속에서 먹이를 캐는 것에 집중한다.

너는 관심이 없다, 바깥세상에. 이 낮은 울타리 밖 세상을 무시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걸까.

134

아니면 다리가 꺾여 나갈 수가 없는 걸까.

이원비

낮은 울타리 위를 들여다보면 늪지대가 있다.


협상 실패

분명히 나는 일어나려 했다. 이놈을 먼지 털 듯 털어낼 수 없어 이놈과 협상을 하려 했다.

이원비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을 뿌리치려 했다.

협상 테이블을 차리고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으니 이 녀석도 어느새 내 맞은편에 앉아있다. 딱 한 시간 만이다. 더 이상은 안 돼. 혹시나 못 일어날까 시계도 맞춰놓고 협상이 시작된다.

큰일이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다. 계속해서 날 옭아맨다. 어서 벗어나야 하는데... 어쩌지? 이 녀석과 얼마나 같이 있었던 거지?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본다. 아뿔싸. 분명 알람이 울렸을 텐데 왜 못 들었을까. 찰거머리 같은

135


불이 치솟는다. 물도 뿌려보고, 밟아도 보고. 알아서 꺼질 때까지 기다려도 보고. 불이 자꾸만 커진다. 계속해서 내 안의 화를 삼켜 몸집을 불린다. 이 이상으로 불이 더 커지면 나 혼자로는 이 불을 잡을 수 없을 것 같다. 분명 내가 만든 건데 붙잡기가 힘들다. 순식간에 몸뚱이를 불린 불은 이제 내 주변을 잡아먹는다. 이젠 두렵다.

136

얘가 이러다 나까지 삼켜버릴까봐.

이원비

자꾸만 커져가는 이 불길을 잡아본다.


분주한 밤

까만 비단을 펼쳐놓은 듯 그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원비

밤은 까맣고 고요하다.

낮 동안 시끄러웠던 것이 언제 일이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조용해진다.

그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나는 분주해진다. 수줍음이 많은 밤의 여신이 분주히 까만 비단을 짤 때 나는 깨어있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 불빛 을 밝히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

타닥타닥.

문득 뒤돌아 창밖을 바라보면 어느새 비단은 걷히고 아침 햇살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137


관심 갖기

너와 나 사이엔 투명한 벽이 있어. 우릴 가르는 벽이 서 있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눈다. 분명 우리는 반가운데, 표현하지 않는다. 너랑 나 사이는 단순하다. 한 가지 단어로 설명이 가능한 관계. 너랑 나 사이는 복잡하다. 우리가 과연 몇 가지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관계일까. 짧은 만남 후에 우리는 다시 헤어진다. 헤어지는 순간에는 인사도 없다. 우리는 당연한 인사치레도 필요 없는 사이다.

너와 나 사이의 투명한 벽을 허물 수 있을까?

138

서로에게 관심 갖는 것이 어색하다.

이원비

분명 우리는 가까운데,


붉은 유혹

그 현란함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

이원비

새빨간 버튼을 누르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하나만. 꼭 하나만.

그러나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또 다른 세계로 날 이끈다.

분명 뿌리칠 수 있지만 못 이긴 척 발을 들인다.

시계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저만큼 달려가 있다.

또 속았다. 왜 그랬지. 야속하다.

오늘도 끝을 알면서도 다시 그 버튼을 누른다.

작은 네모 상자가 날 유혹한다.

139


쇳덩이

뜨거운 것들은 얼마나 빠르게 몸안을 가득 메우던지

피부 안쪽을 긁어대고 정수리 위로 넘치는 것을 어디에 옮겨 붙을까 나는 장님이 되어 익숙한 곳을 찾는다 뜨거운 손은 때묻은 쇳덩이에 닿아 한번 부르르 떨더니 허겁지겁

140

그 차가운 것을 껴안고야 만다

김진희

배에서 끓으며


그리고 나누어 주겠지 제 안의 것들을. 결국 식어가던 몸은 쇳덩이를 마주한다 같은 온도가 되어 나를 닮아버린 그 것은 곧 다시 나를 안는다.

141


번개

우렁찬 천둥소리에 놀라는 것도 잠시, 밤하늘을 꽉 채웠을 그 찬란함을 보기 위해

당연하게도

등 뒤에서 느껴졌던 내 방만을 비췄던 빛의 상(象)만이

142

나의 찬란함이었음을

김진희

나는 창가로 달린다.


강아지 구름

동네친구들과 아파트공원에 누워 그날따라 아름답게 떠오른

한명이 구름이 강아지처럼 생겼다며

김진희

구름들을 보았다.

저희 집 강아지처럼 이름을 붙였다. 그러더니 아이들은 너도나도 강아지 구름에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초코야!" "꾸꾸야!" "똘아!" 다 자란 아이들은 이름 붙일 구름이 없는지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검은 하늘에 금방 흩어지는 작은 강아지 구름을 태운다.

143


안개 속

과거의 우리는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길.

곳곳이 비추는 햇빛을 보며 친구들과 이웃들과 또 어디서 봤을 누군가와 그 도로를 개척해 나갔다. 우리의 아들들을 위해. 우리의 딸들을 위해. 지금의 우리는 잘 닦인 아스팔트길을 걷는다. 점점 지독해지는 안개에 우리의 시야는 옆 사람들만 겨우 보일 정도로

144

한정되었다.

김진희

하지만 흙먼지 속


태어났을 적부터 안개가 있었다. 우리에겐 안개 뿐이었다. 우리에겐 우리 뿐이었다.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기엔 우리에겐 안개 뿐이었다. 우리에겐 우리 뿐이었다.

145


돌아가는 길

동물적인 본능 감정 생각 관계

으로 나는 어른이 되겠지 모든 것이 설레고 새로웠을걸. 그리고 이젠 어른이 되며 얻은 것에 익숙해지는 거야. 무뎌지고 마는거지. 거꾸로, 자아 관계 생각 감정 동물적인 본능 까지 사라진다면

146

이제 나는 흙으로 돌아가겠지.

김진희

자아


무제

부드럽게 닦아낸다. 항상 흘러넘쳐 얼굴은 붉어지지만

부드럽게 닦아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김진희

오늘도 나는 그것을

햇빛과 달빛, 별빛을 받아내며 한없이 닦아내기만을. 하지만 오늘도 그것은 묻어있다.

나는 다시 그 아이를 기다리며 그 아이를 만나면 다시 붇을 것을 알면서 닦아내기 시작한다.

147


물고기 인간

물보라 이는 공기 속에 물고기 인간 조용하다 살아간다 사는 방법을 몰라도 물고기 숨을 쉬며 살아간다 뻐끔뻐끔 조용히

물고기만도 못한 인생 살아본다 생각해본 적 있는가 조용하게 살아가는 건 고요하게 죽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뾰족한 초침 속에서 선인장은 자살했다 죽는 방법을 모르는 물고기 숨을 쉬며 살아간다 뻐끔뻐끔 조용히 자청색 하늘 위로 떨어지는 모래알 허물 벗어 쌓아둔 시간의 무덤 비늘 한 낱 얹는대도 무너질까 스러질까 사는 방법을 모르는 물고기 숨을 쉬며 죽어간다

148

뻐끔뻐끔 조용히

조수현

곰팡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2시 2분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다시 돌아온 까닭은 무정한 사람 탓으로 돌리고 어김없이 밤

초콜릿을 알약처럼 씹어 먹고

재가 내리는 계절 사랑은 얼었고 연인은 온기를 탐한다

조수현

술잔은 거울처럼 깨진 채로

살과 살이 닿은 날카로운 감각

점멸하는 노란 등 3분을 알리는 종소리 손톱달 내린 손바닥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가로등을 맞으며 춤을 춘다 먼지처럼

149


춘삼월

꽃피는 춘삼월엔 죽는 사람이 많다고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살아 있는 시체가 즐비한 땅에 비가 내리치는 하늘에 피고인이 죽은 법정에 수신인이 사라진 편지에는

한밤에는 태양이 뜨고 여름에는 잿가루 같은 눈이 악몽을 내거는 교주 눈동자는 진실을 말하지 기름이 떨어진 라이터 연인은 사랑을 잃었고 잠든 꽃은 수줍게 떨어진다 화사한 죽음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 물고기는 뛰어오르고 저당 잡힌 생 그 안에서 적는다 비로소 아, 봄은 차가운 계절

150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 쓴다

조수현

죽은 것들이 풍기는 살냄새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 쓴다

살아 있는 눈 살아 있는 몸 살아 있는 목소리 꿈속에서 너는 울고 있지 늘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들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것들 사랑과 사람과 살아간다는 말은 닮아서 너는 했다

조수현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게 사랑¹이라는 말을

이름 속에는 삶이 담겨 있다는데 신은 명명하고 시는 이름을 폐기한다.² 명명한 이름을 내버리는 시-인 이름을 적는 순간 끝나는 삶

¹자비에 돌란, ‘마미’ ²이원, 목소리들

151


검은 동굴 속에서 나오는 것들을 들어봐 동굴 안에는 축축한 괴물이 살고 있지 끊임없이 먹이를 갖다바치는 신도들 무참히 게워내며 화답하는 괴물 괴물이 사는 심연은 깊지 않아 따뜻한 망상 속에서 검은 괴물은 자라나 달콤한 치부를 드러내고 엉터리같은 몸짓 허황된 미소 괴물은 유쾌하지 늘 가쁘게 웃으며 죄를 삼켜봐 뜨거운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는 거야 대신 비밀은 지켜야 해 쉿

152

검은 동굴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들어봐

조수현

모두들 그 동굴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


153


파란 이불을 턱 끝까지 덮고 기다린다

언제 올지 모르는 잠을 기다린다

좋아하는 목소리를 덮고 기다린다

154

다녀갔다

한유림

눈을 뜨면 어느새


딴짓

괜히 골목길을 돌아가가고

괜히 다음 신호를 기다려본다

괜히 일상의 길을 비튼다 이 길은 내가 알면서도 모르는 곳으로 한유림

날 데려간다

155


바다

지나가다 잠시 발만 담갔다 정신 차려 눈 떠보니 온몸이 젖었다

내가 누군지

뭐 하는지

156

다 잊고 생각에 빠졌다

한유림

어디에 있는지


몽상

생각의 문을 열어 놓을게

놀러와 아무나

쉬다가 아무나

그래도 방명록은 남겨놔

그 흔적들을 엮어

한유림

생각의 무늬를 만들게

157


.

눈앞에 수많은 점들이 떠다닌다.

점과 점을 잇는다.

점과 선을 잇는다.

선과 선을 잇는다.

면과 면을 잇는다.

얽히고설켜 정신없다가도

158

눈앞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한유림

선과 면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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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163


164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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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

우리는 땅에 살고 있다. 땅에 살면서 땅을 바라보고 오직 땅이 전부인 줄 아는 우리. 우리는 고개를 드는 법을 잊어버렸다.

작은 세상 속에 나를 가두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나누지 않으며 서로에게 무관심해진 우리들. 여기서 내가 있을 자리는 어디인가?

기억해라. 우리는 비록 땅에서 떨어질 수 없지만 우리에겐 넓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더 넓은 세상이 우리의 앞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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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익숙함

너는 거기가 좋니? 응, 나는 좋아. 왜? 날아가지도 못하잖아. 안전하고 편하잖아. 하지만 자유롭지 못하잖아. 자유가 뭐가 중요해? 이렇게 편안한데.

익숙함은 사람을 날지 못하게 한다. 익숙함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은 편안함에 속아 자신의 날개를 떼어버린다.

익숙함에 속지 말자. 익숙해지기 전에는 너도 나도 모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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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못

우리 집엔 못이 많다. 거실에도 못이 있고 옷 방에도 못이 있고 자는 방에도 못이 있다.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요즘 못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 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집의 모습을 더 볼품없게 만든다 생각했다.

하지만 살면서 못이 필요하지 않은 적은 없다. 옷을 걸 때도 사용 되고 액자를 걸 때도 사용되고 무언가를 걸기위해 사용된다.

못이 많은 일을 하진 않지만 꼭 필요할 때가 있다.

못은 묵묵히 기다린다. 자신의 일을 다 하기 위해.

비록 볼품없다고 사람들이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자신을 필요로 할 것을 알기에 묵묵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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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꿈

꿈을 쫓는 어른이 되지 말고 꿈을 찾는 아이가 되자.

꿈을 쫓아 어른이 되었지만 꿈을 찾아 아이가 되자.

꿈을 쫓다 포기한 어른이 되지 말고 꿈을 찾다 너무 많아 지친 아이가 되자.

꿈을 쫓다 실망한 어른이 되지 말고 꿈을 향한 기대를 갖는 아이가 되자.

꿈을 쫓아 이끌려가는 어른이 되지 말고 꿈을 찾아 이끌어가는 아이가 되자.

꿈을 쫓는 어른이 되지 말고 꿈을 찾는 아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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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만두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여린 너. 거친 듯 부드러운 너.

넘치는 너의 눈물로 나를 아프게 하지만 그 온기로 나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너의 모든 것을 바쳐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는 너... 너로 인해 오늘 밤도 행복해지는 나...

야심한 밤, 텅 빈 마음. 너는 항상 내게 행복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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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전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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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통카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스치고 지나가는 무심한 발걸음들 속에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나는 네가 없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와 함께했었던 그들의 뒷모습이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가는데 네가 없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들이 못 박힌 듯 서 있는 나를 기다려도 네가 없기에.

꼼짝없이 붙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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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필기노트>

내가 관심을 많이 못 줬나봐 항상 있던 곳에 갔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어 걔는 아무튼 심술쟁이야

내가 좀 많이 괘씸했었나봐 그래 너 어떡하나 보자하고 혼자 숨바꼭질 하는거 봐 걔는 아무튼 개구쟁이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다 숨었니?

내가 물어도 대답 없는 거 봐 생각 이상으로 엄청 삐졌나봐 찾으려고 여기저기 다녀도 모습 꼭꼭 감추고 있는 것 봐

날은 저물어 가는데 내가 지쳐 주저앉아 이름 간곡히 불러주니 그제야 저 구석에서 슬그머니 나오는 것 좀 봐 걔는 아무튼 개구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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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왕동 룸메들>

날이 밝기 전 하나 둘 씩 들어갑니다. 쏟아지는 무게를 감당 못하고 결국 하나가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구부러진 허리를 툭툭 때리며 또 하나가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비틀비틀 알코올 냄새 풍기며 또 하나가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밖을 지킵니다.

어둠 속에서 세 개의 빛이 깜빡이다 어둠이 깊어지면 하나 둘 씩 꺼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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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핑계>

익숙한 얼굴. 익숙한 이름. 하지만 건넬 수 없는 인사.

손에 자란 손톱이 너무 길어서, 손에 들린 것이 너무 많아서, 손에 땀이 많아 찝찝해서,

익숙한 얼굴을 향해 인사할 수 없다.

입에 먹을 것이 많아서, 입안에 난 상처가 아파서, 입술이 건조하고 부르터서,

익숙한 이름을 불러줄 수 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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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앞머리>

혹시 많이 바빴니? 오늘은 허리를 옆으로 꺾었네

혹시 비가 왔었니? 오늘은 다리를 일자로 폈네

아무리 응원해도 소용이 없네 오늘은 끝까지 힘들어 하네

아무리 화내도 통하지 않네 오늘은 끝까지 제 멋대로네

야야 잠시만 침착해봐 무작정 화내면 어떻게 해

차갑게 식히고 다시 말해봐 그러면 졸래졸래 따라와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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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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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햇살

햇살은 처음 멀리 이웃집에 들린다. 옆집 나무따라, 세상의 모든 선따라 파도치며 지나온다.

햇살은 매일 세상 이야기를 그리러온다. 이윽고 내방 벽면에 노란 빛깔이 가득하면 그럴때면 나는 그 그림속에서 사랑을 듣고 외로움을 들으며 어둠을 듣는다.

세상을 그리는 물결은 참 정직하다. 저 낮은 돌멩이부터 달과 맞닿은 높은 건물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노란 그림을 그린다.

곳곳에 햇살의 손길이 끝나면 이제 저기 저 끝으로 간다. 따뜻하고 반짝이는것을 남기고 그림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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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벽 2시의 어떤 곳에서

반은 어둡고 반은 밝은 곳에 탁자와 의자 한쌍이 있었다. 밝은곳엔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은 이가 앉았고 어둠이 가득한곳엔 빛이 궁금한 이가 앉아있었다. 서로는 아무말이 없었고 고요한 길가엔 술취한 아저씨의 주정 소리만 들려왔다. 시간의 정적을 그림자만이 짙게 채웠다.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은이가 말했다. 난 네가 궁금하지 않아. 빛이 궁금한 이가 말했다. 난 네가 궁금해 나는 외로워. 가까이 가고싶어 나는 외롭지 않아. 너의 어두움이 난 싫어 반은 어둡고 반은 밝은곳엔 슬픈 대화만이 오갔다. 여전히 고요했고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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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연

나의 좁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연은

저절로 찾아오는 연속적인 바람

해가 뜨고 지듯 당연하고 당연한 일

길가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는 일도

우연히 인연이 되는일도

우연히 낯선 길에 들어서는 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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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쁜 피

처음 너를 본 날 아마 그 날이었을거야 내 세계에서 나는 냅다 달렸어 가슴이 꿈틀 하고 배가 꿈틀하고 알수없는 것이 요동쳤어 너의 하얀색 원피스는 바람따라 춤췄지. 너는 5월의 나무처럼 푸르렀고 바다처럼 파랬고 별처럼 높았어. 너의 파란 옷이 노랗게 보이고 나는 말을 잘하는 재주꾼이지만 너 앞에선 아무말도 할 수 없어. 네가 알 수 있도록 나는 노란 옷을 입었어. 그리고 나서 꿈틀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오늘도 달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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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야경

시간이 멈춘듯한 별들의 비행 춤추는 보석들 허공 한가운데 너는 날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 너만은 날 바라보고 있다. 비행을 멈춘 채 노래를 멈춘 채 너무 밝지도 않은 은은함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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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이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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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걸음을 재촉하며 길을 걷다가도 솨아아아하며 부는 바람에 당신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걸 보고 문득 시선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녹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나를 향해 인사하는 당신은 수줍은 아가씨 혹은 사자같은 터럭을 가진 백전노장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만 같다 흔들흔들 올라오라고 최면을 거는 것처럼 살랑살랑 그 속에 들어가 있노라면 여름날의 시원한 바람이 찾아와 카랑카랑한 풍경소리를 들려줄 것만 같다

나는 또 홀린 것 처럼 어딘가 날아가 버리고 싶은 몽롱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솨아아아하는 저 바람을 타고 파도치는 당신의 머리칼을 타고 하늘을 헤엄치는 모습을 그린다

눈을 뜬 나는 풍성한 머리칼을 뽐내는 당신을 그저 허무하게 올려다 볼 수 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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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흩날리는 수많은 벗꽃은 시야를 황홀하게 장식하는 마치 동화처럼 화려한 광경

벚꽃이 흩날리는 것인지 흰나비가 날아가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계절

사람이 미치는 계절도 봄이더라 마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물들고 어딘가로 날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내 곁을 나도는 벚꽃과 흰나비처럼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내가 놀랄만한 곳으로 데려가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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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밤 공기

밤 공기에는 밤의 모든 내음이 섞여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비 비린내 섞인 시골의 흙내음 처마에 걸어놓은 구수한 메주 냄새 우리 집 덕구의 구릿한 개똥 냄새 총총히 밤하늘을 수놓은 별 들리는 것은 귀뚜라미와 매미 그리고 맹꽁이 소리 뿐인 평화 그 자체

어둠속에서 달이 우아하게 빛난다. 우아하게 달에게 이만큼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계속 바라보고 싶어지는 선명한 빛 마치 밤에 홀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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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서늘한 땅을 녹이는 땅에 핀 따스한 별 부드러운 연노랑색은 햇살에 부서져 유리처럼 반짝거린다

우아함을 담은 당신은 상냥하고 아름답기만한데 사람들은 왜 탐스럽게 핀 너를 보고 앞서서 지는 모습을 걱정하는가

아름다운것을 아름다운것 자체로 보지 못하고 걱정만 찾으려 애쓰는 사람이여 그들의 시간은 떨어지는 모래시계의 모래와 같아 영원히 온전하게 가질 수 없는 것 그러기에 아름답고 그러기에 가치있다

하염없이 잎은 떨어져가고 다시 재회하려면 앞으로 또 1년 그저 그 짧은 순간을 되도록 가슴 깊이 새길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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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of Nostalgia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가 있다 처음 들었을 때의 기억 함께 들었던 사람과의 기억 그 시절의 나

추억의 조각이 노래에 박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 잊혀질때즈음 우연히 길을 걷다 흘러들어와 갑자기 들이닥친 향수 조각에 긁혀 돌연 눈물이 나기도 씁쓸해 하기도 어쩌면 미소를 주기도

슬픈노래라도 웃음이 나거나 신나는 댄스곡이라도 가슴을 애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당신이 담은 기억에 따라 음악의 이미지도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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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최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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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롱이

오랜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첫 자취를 시작했다. 된장국이 먹고싶어 장을 보고 왔다. 집에 돌아올 땐, 아무도 없겠지.

하지만 지금,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메마른 긴 생머리와 생기없는 푸석한 피부. 힘 없이 늘어진 몸뚱아리 제 색을 잃은 채 비틀어진 뿌리들. 볼품없는 몰골이지만 넌 나의 룸메이트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신발장 위에 놓아, 매일 무의식 중에도 너를 볼 수 있게. 가끔 심심한 날에는 너의 팔을 잡고 함께 춤을 출 수 있게. 날씨 좋은 날엔 같이 바깥에 바람쐬러 갈까?

넌 나의 게으름에서 탄생했지만, 널 미워하지 않을거야. 게으름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일상에 지쳐 힘이 들때 나는 기분 좋은 너의 이름을 부른다.

초롱이, 넌 나의 기분좋은 게으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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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돈까스 치명적인 스릴러

왜 이렇게 맛있는거야 겉은 바삭한 튀김옷을 입었다. 아니 이건 바삭하다못해 파삭하다. 이빨과 이빨이 맞닿을때마다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바스라지듯이, 두꺼운 책속에 끼워놓은 꽃잎들이 부서지듯이 튀김옷들이 춤을 춘다 내 입속에서. 그렇게 튀김옷을 공략하면 그 안에 있는 고기들. 수분을 머금어, 한겨울 솜이불같은 폭신함과 부드러움. 겉과 속이 다른 돈까스를 눈을 감고 한 입 먹어보면 눈물이 나올것 같다.

돈까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없어선 안되는 치명적인 음식. 이름만 들어도 짜릿한 그 이름. 돈.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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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뿌리

침대에 누워 가만히 흰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온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멍해진다. 늘 긴장상태였던 팔 다리와 얼굴, 그리고 머릿속 뇌까지 힘이 풀어지며 정신도 놓게 된다.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인가. 아님 내가 꿈 꾸고 있는건가. 당장이라도 꿈을 깨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갈 것 같다.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비사벌 아파트 12동 105호. 말귀 못 알아먹는 어린 남동생과 하늘같던 엄마, 아빠. 늘 놀이터에서 함께 놀던 3명의 단짝 친구들. 그 때의 내 세상의 전부였던 것들. 지금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늘 잊고 살았던 것들. 나의 삶에서 뿌리였던 것들.

새 잎과 열매만을 바라보고 사는 꿈같은 지금.

나의 뿌리는 어디로 갔나. 잎과 열매는 세상 밖으로 나아가겠다고 이렇게 발악하는데, 뿌리는 어디로 갔나.

뿌리로 돌아가야한다. 뿌리를 찾아야한다. 늘 발악하는 잎사귀와 열매를 잠시 내려놓고 지금은 뿌리를 찾아야한다. 나의 숨, 나의 전부였던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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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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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릴적부터 사과를 차암 좋아했다지. 빠져든다 볼수록. 매일 봐왔던 사과지만, 볼 때마다 늘 새로운 그 얼굴. 특히 웃을때 솟아오르는 광대와 살짝 보이는 고른 이가 내 입가에도 미소 짓게 만들지. 사과가 웃으면, 나도 좋아. 그 싱그러운 웃음소리 잊을 수 없어. 향긋한 계절의 향기 그득 담은 사과의 얼굴.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의 웃음을 닮은 사과의 미소.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세상 어디에도 만끽할 수 없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사과의 얼굴, 미소, 향기.

나중에 내가 우울해져 눈물 흘릴때면 사과나무를 심어 사과의 얼굴을 볼테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과의 얼굴. 늘 항상 붉은 두 볼에 담고 있는 얼굴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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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복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언젠가 책을 읽다가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구절을 읽고 한 대 얻어 맞은것처럼 멍해졌다. 여태까지 행복에 살고 행복에 죽으며 행복에 집착하고 있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도 행복이라 하며 살았건만.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것은. 행복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것들을 버리라는 것. 늘 짐처럼 달고 살았던 집착들과 늘어진 후회들, 그리고 뒤따른 변명과 자책감. 이 짐짝들을 버리고 가벼워지자. 행복하지 않아도 돼. 우울하면 뭐 어때. 우울하다는 것은 나쁜것만은 아닌것같다. 살기위해 고민하고 있단 흔적. 더 나은 내가 되기위한 노력의 길. 행복하지 않아도 돼. 늘 웃고있지 않아도 돼. 가끔 우울할때면 울기도 하고 짜증이 날때면 화도 내고. 꼭 행복하지 않아도 돼. 나를 꽁꽁 싸매고 있던 감정의 족쇄를 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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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김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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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기

낯선 이의 옷에 내 기억이 묻어있네요. 은은한 섬유유연제의 향은 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향이 좋던 친구의 교복 냄새가 느껴져 그때의 분위기가 떠오르네요.

낯선 이의 향수에 내 추억이 묻어있네요. 좋아하는 향수를 뿌린 남자친구를 안았을 때, 목덜미에서 은은히 나던 향기가 생각나 저절로 미소가 나네요.

처음 보는 당신은 낯설지만, 당신의 향기는 낯설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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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과 기름

차가운 물은 너, 기름은 나. 널 밀어내고 쳐낸다.

따듯한 물은 너, 기름은 나. 너와 함께 흘러내려 가고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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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루 끝

분명 행복한 하루였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 안에서 깜깜한 천장을 보고 있으니 우울함이 밀려온다.

고요함 때문일까 아니면 하루를 알차게 보내지 않았다는 미련일까 행복함 뒤에 밀려오는 허무함일까

마음은 너무 모순적이다. 어째서 행복은 오래갈 수 없는 걸까 더욱 우울해진 마음으로 잠을 잔다.

그날 밤 꿈에는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초원에서 나는 갈색 산을 바라보고 있고 낙엽들이 굴러가고 있었다. 아주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꿈은 언젠가 깨기 마련이고 하루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어제는 분명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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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고양이들을 사랑한다. 나의 기지개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총총 걸어와 머리를 비비는 고양이들을 사랑한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나를 발견한 후 짓는 남자친구의 미소를 사랑한다. 두리번 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남자친구의 미소를 사랑한다.

겨울을 지나 여전히 춥지만 조금 따뜻해진 날씨에 잠에서 깨어나 열심히 먹이를 줍는 청설모를 사랑한다.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먹이를 주워, 볼에 한가득 챙겨가는 청설모를 사랑한다.

봄이 올 때마다 정문에 심는 튤립을 사랑한다. 금방 시들고 사라질 걸 알면서도, 빨갛고 노란 색감들이 내 눈을 호화롭게 만든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사랑한다. 익숙함이라는 권태를 잊게 해주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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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중한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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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호등

빨간불이 되었다. 모든 차는 멈춰 초록 불을 기다린다. 골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고 고요한 바람 소리만 들린다.

주황불이 되었다. 초록불이 된다는 설렘에 먼저 악셀을 밟아 갈 준비를 하는 사람, 핸드폰을 하느라 신호가 바뀌는지도 모르는 사람, 모두가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

초록불이 되었다. 골목은 다시 모래바람이 불고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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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시로 숨쉬기

기간

2018.5~2018.6

수업

시각디자인

발행일

2018년 6월 15일

지도 및 진행

김나무

디자인

표지 및 간기면

오세형

내지

김동환, 오훈택, 전희선, 정경호, 정유진

참여학생

고민지, 김동환, 김민혁, 김수인, 김재원, 김진희, 손나현, 박현지, 박희빈, 신미경, 신수철, 오세형, 오훈택, 윤정민, 윤지우, 이성희, 이승의, 이원비, 이홍교, 장소은, 전희선, 정경호, 정승은, 정연문, 정유진, 조수현, 조하영, 최란, 최서연, 한유림 © 국립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 & 저작자 이 책에 수록된 글과 디자인의 저작권은 국립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와 해당 저작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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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몽 ,다바 ,짓딴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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