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치환
기록
시집
1
2
3
4
2
언어
치환
기록
시집
들어가며
<언어 치환 기록 시집>은 국립 한경대학교 2021년 시각디자인 1 수업의 일환으로 학우들이 제작한 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아카이빙한 시집이다. 시를 적을 때 느꼈던 감각들을 타인에게 전달할 때, 우리는 대부분 텍스트 로 시를 말하게 된다. 글자와 글자의 흩어짐과 모임이 시의 몸을 만들고, 우리는 그 몸을 보며 그 안에 담긴 뼈의 골격, 피, 근육과도 같은 시의 의미를 읽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 우리는 꼭 텍스트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 시집은 그런 생각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시를 전달하는 언어를 텍스트에만 국한하지 않고, 유무형의 각기 다른 언 어로 치환한 뒤 이를 함께 담는다. 이를 통해 텍스트가 아닌 언어에서 방대한 양의 시들이 각각 어떻게 고유 한 모습으로 독자에게 읽혀지는 지 실험해보고자 했다. 텍스트 언어를 기계 시스템의 자동 더빙 시스템에 넣어 음성 언어로 변환
을 하고, 그 음성 언어를 다시 3D 프로그램에 넣어 그래픽 언어로 변환하
는 과정에서 처음 시를 쓴 이가 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감정은 과연 퇴색되었을까? 증폭되었거나, 그대로일까?
그 답은 <언어 치환 기록 시집>을 읽는 독자의 해석에 달려있다. 우리는 시를 담는 그릇만을 바꿨을 뿐, 본질은 그대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모쪼록 시스템의 체계 안에서 다른 언어로 표현된 시의 새로운 면을 접하 며 텍스트 언어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5
[언어 치환 기록 시집] System Guide <언어 치환 기록 시집>은 텍스트에서 존재하던 시의 언어를 청각적으로 변환한 뒤, 그 음성 데이터로 시각적 언어 그래픽을 추출한 기록 시집으
로, 시를 표현할 수 있는 제한되지 않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 한 시가 독 자에게 여러 감각으로 읽혀질 수 있도록 제작한 시집이다. 텍스트 언어
HKNU DESIGN VISUAL DESIGN - 1의 시의 텍스트를 아카이빙한다. 소리 언어
텍스트 언어를 컴퓨터 AI 자동 더빙 기능을 사용해 음성 파일로 추출한다. 목소리의 성별은 시 주인의 성별을 따른다. 그래픽 언어
추출된 음성 파일을 3D 프로그램의 소리 인식 기능 포맷
을 사용해 지정된 규칙에 맞게 파일을 넣었을 경우 해당 시 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라인 그래픽이 무작위로 그 려진다.
규칙사항 1. 3D 프로그램은 C4D를 사용한다. 2. 플러그인은 motion drop과 sound effect를 사용 해 변수를 음성그래픽을 제작한다.
3. 그래픽 도출할 때는 반드시 개인적 해석을 배제한 채 시의 연 수, 음성의 시간적 길이 등 객관화 된 변화 요소를 사용해 값의 변화를 준다.
4. 낭송음의 크기, 높이, 빠르기 등 소리 데이터에 의 해 전체적인 그래픽 형태가 결정된다..
5. 각 연마다의 음성 변환 그래픽을 기록하나, 마지막 에는 시의 그래픽을 통합한 전체 그래픽을 제시한다.
언어 치환 그래픽 도출 과정 HKNU DESIGN VISUAL DESIGN - 1의 시의 텍스트를 아카이빙한다. 텍스트 언어를 컴퓨터 AI 자동 더빙 기능을 사용해 음성 파일로 추출한다. *음성 더빙 '네이버 클로버 더빙' 사용, 여성 보이스인 '아라'와 남성 보이스인 '민상' 사용.
한 시의 음성 파일을 연 단위로 끊어 나눈다. 한 연의 음성 파일을 C4D 프로그램을 사용해 연의 길이, 음성의 높낮이, 길이등의 값에 따라 자동으로 그래픽을 추출한다.
추출한 그래픽을 시각적으로 변화된 요소가 적절하게 보여지는 앵글에서 랜더링한 뒤 이미지를 내보낸다.
끊어 나눈 그래픽 이미지를 해당 시와 같이 시스템 규칙에 따라 순서대로 배치한다.
이미지의 가장 마지막 순서에는 각 연마다 도출되었던 그래픽을 전부 합 한, '하나의 시'를 의미하는 그래픽을 기록한다.
7
배장민
먹구름
우리의 바다
첫눈
가로등
잔야(殘夜)
1
5
2
6
3
7
4
먹구름 1
가득하다
화색빛 연기가
허하게 빈 공간에 2
연기는
턱까지 들이차 숨을 뱉어도
쉬이 나오지 않는다 3
물을 밴 솜 마냥 축 늘어져
눈을 감아 꼭 쥐어짜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4
어두운 지금이 지나면
더 어두운 내일이 온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5
매일이 무뎌지면 내일도 무뎌진다 네모도 무뎌진다 세상도 무뎌진다
6
떨어지지 않으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무뎌진다
7
허하게 빈 공간에 회색빛 연기가 가득하다
11
1
2
3
4
5
우리의 바다 1
보이지않는 수평선에 태양같은
너를 두고 온다 2
떠오르는 구름같은 추억들은
네 옆에 두고 3
노을빛 사랑이
4
짙었던 마음을
깊은 바다 속에 잠기면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물결처럼 흘러가게 5
수평선 끝에 너를 두었다
13
1
5
2
6
3
4
첫눈 1
찬바람을 머금은 너는
2
텁텁한 더움이 너를 볼까
따듯하게 내리운다 손으로 애써 가리운다
3
하이얀 설렘은
먹먹하게 다가오며
가리지 못한 온기는 뿌연 방울을 만든다 4
나부끼는 마음을 조각내어 날리며
지나가지 못한 계절을 보내운다 5
색바란 나뭇잎 위로
6
아득히 멀리서
너는 티없이 내린다 찬바람이 불어온다
15
1
5
2
6
3
7
4
8
가로등 1
한 줄기의 불빛은
2
어둔 길 속에 길을 잃을까
넘어지지는 않을까 3
지나가는 이 없어도 제 몫의 빛을 환히 밝힌다
4
셀 수 없는
봄이 지났고 하나의 빛은
어둠을 밝혔다 5
깜빡거린다
그제서야 보았다.
기둥에 붙은 전단지를 기둥에 적힌 낙서들을 기둥에 있는 상처들을 6
이제서야 보인다
검은머리 속 흰머리가 손등위 잔주름이
7
눈이 부셔 쳐다보지
8
희미해진 오늘에서야
9
희미한 불빛이 미소짓는다
10
불빛은 오늘도 나와 걷는다
못했던 한 줄기의 빛을 눈을 마주쳤다
17
9
10
19
1
2
3
4
5
잔야(殘夜) 1
시간이 내뱉은
2
아무도
푸른 숨결
본 적 없는 숲 마냥 푸르다
3
닿으면
변해버릴까
내쉬는 마음마저 조심스럽다 4
당신께 보낸 푸른 숨결이
머물다 갈 수 있게 5
오늘도
붉은 마음을 밀어낸다
21
백보람
대화의 골든타임
무게
부서지며 조각나기
- (1) - (2)
1
5
2
6
3
7
4
대화의 골든타임 1
대화에도 골든 타임이 있다
2
내 마음은 이렇다
3
골든타임을 넘어서면
4
내 감정조차 주체하질 못하겠는 데
어느 순간을 지나 서면 설명하기도 호소하기도 싫어진다 얘기하고 싶다가도 맥이 탁.
이런 겁 많은 핑계가
수술대에 올려놓질 못한다. 5
이미 죽어버린 감정은 하나둘씩 쌓이다
땅을 파고 묘지를 만들겠다. 6
죽어버린 감정들이 하나 둘 묻히면 너의 눈동자 속
텅 빈 내가 보인다. 7
죽어가는 영혼들과 단절된 대화.
25
1
5
2
6
3
7
4
8
무게
1
그렇지만 항상 그랬듯
2
지나가겠거니
3
이겨내는 것보다 버티는 것에 가깝지만 일단은 지나가도록
하루하루 조금만 울어야 된다 4
돌이켜 생각했을 때.
5
그때 참 힘들었지 하며
6
과거의 나에게 보낼 눈물을 남겨두는 것처럼.
7
마음이 촉촉해질 만큼만 아림을 느끼고서는
8
웅크려 누운 내 몸이
참아야 한다.
자꾸만 쪼그라드는 것 같다. 한없이 작아지는 내 몸과 한없이 커져가는 세상.
9
이렇게 무거운 마음을 짊어 사느라
10
시시포스의 삶을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단단해져야 한다고 하는구나
27
9
10
29
1
5
2
6
3
7
4
부서지며 조각나기 1
오늘도 부서진 내 조각들을
2
집으로 돌아와
3
붙이면 붙일수록
품에 쓸어 담고 제 몸에 붙인다
다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이 눈물인지 파편인지
구분도 못하고 4
그저 조용히 다시 쓸어 담고 쓸어 담고 붙인다
5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지만
6
비둘기 먹이로는 싫어서 자존심을 부리며 주워 담는다
7
더 이상 조각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늘어가는 균열에
무너져가는 균형과 나를 좀 먹는 균.
31
1
2
- (1) 1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역사’라 부르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우주’라는 공간으로 정의한다면, 내가 그 한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그 우주에 존재하는 행성 하나를 파괴할 수도, 또는 새로운 행성 하나를 창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행동하나라도 말 한마디라도 그 가능성을 짐작하여 행동해야 된다. 2
인간관계란 어떤 누구든 그 가치관이라 불리는 우주 속에서 지나가는 소행성 조각일 수도 있고,
흘러가는 은하수 일 수도 있다.
그 우주에서 잠깐 동안 머무른다 할지라도 서로가 품고 있는 우주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소중하게 느껴야 한다.
마치 내가 글을 써서 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우주를 엿보도록 하는 것처럼.
33
1
- (2) 1
너무 소중해서 눈물이 난다
잃을까 봐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이렇게 소중한 순간을 간직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소중해서 눈물이 난다 나의 감수성이라는 호수에서 유일하게 별을 낚는 그대
별을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영원히 나의 호수에서 쉬다가요
35
이주희
만개한 다음날
내 사랑을 그대에게 드려요
나에게 닿은 너는 10년 전 너에게
이별
1
2
3
4
5
만개한 다음날 1
햇살의 스케치 위로 구름은 예쁜 수채화를 그렸지만 그걸 감상하는 내 표정은 어쩐지 슬픈 날 고개를 푹 숙이고 전시장을 빠져나갈 때
어디선가 나타나 어깨를 토닥이는 꽃잎은 활짝 웃으며 좋은 하루 되라고 말해준다 2
떨어져 버린 꽃잎들은 슬프지도 않은 건가 만개한 다음날 바로 저버리는 운명을
어쩜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지
살랑이는 치마까지 꺼내 입고 봄의 옆에서 걷고 있다 3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도
4
여름의 등쌀에 떠밀리기보다
나는 왜 웃음이 안 나올까 스스로 걸어가기로 한 벚꽃처럼
마음의 무게중심을 봄에 남겨둔 채로 새 여름을 향해 떠날 수 있다면 난 더 이상 슬프지 않을까 5
우산이 없는 나에겐 그래도 장마보단
봄비가 더 참을만한데
39
1
5
2
6
3
4
내 사랑을 그대에게 드려요
1
나는 구름에게 말했어
하늘은 어디에나 이어져 있으니까
내 목소리가 너에게 닿게 해달라고 2
구름은 대답했어
나는 이 세상의 길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에게 닿는 길은 너만이 찾을 수 있다고 3
그래서 난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입술에 머금고 후 불어서
민들레 홀씨와 함께 봄바람에 날려보냈어 4
마음으로 향하는 길을 찾게 되면 그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
매일 밤마다 달빛을 머금고 널 지켜주길 바라면서 5
홀씨에 깃든 내 이야기가
6
꽃이 피게 되면
너에게 닿으면 꽃이 될까 그날이 오면
나랑 지평선 끝까지 날아가자
41
1
5
2
6
3
7
4
나에게 닿은 너는 1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겹쳐진 그 고요한 순간에
너의 세계를 엿보았다 2
한걸음 디덨을 때
흐린 새벽하늘에 뜬 초승달을 보았다 나의 세계와 비슷한 새벽 공기였지만 하늘 빛깔만은 달랐다
그래서 더 걷고 싶었다 3
두 걸음 디덨을 때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쓸쓸한 강을 보았다 희미한 달빛에도 윤슬은 반짝이고
그 반짝임만큼 강물의 온기는 따뜻했다 4
세 걸음 디덨을 때
강물 옆 벤치에 앉아있던 너를 만났다
너는 나에게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나의 세계에 파란빛이 새어 들어왔다 5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투명한 물 한 컵이라면 찰나는 물방울 하나보다 작을 텐데 그 작은 존재에 색이 입혀진다면
6
물속으로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자신의 빛깔을 퍼뜨리듯이 찰나는 영겁이 되어
물 한 컵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7
너가 나에게 닿은 순간부터
나의 시간이 온통 파란빛을 띄는 것처럼
43
1
2
3
4
5
10년 전 너에게 1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슬픈 사람들 슬픔을 겪은 만큼 사랑을 알고 있고
슬픔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2
숨겨진 예쁨을 보기 위해선
3
그 길에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고통스럽겠지
내가 가진 아픔이 만든 가시밭길을 지나야 한다 고통스러워 찡그린 내 표정도
상처투성이가 된 발도 보고 싶지 않을 거야 4
잊지 마
가시밭길 끝에 다다르고 비로소 눈물이 멈추면
눈물 자국 아래에 감춰진 사랑스러움이 보인다는 것을 그건 언제나 네 안에 있었다는 것을 5
사랑스러운 사람아
아픔까지 사랑할 용기를
아픔을 품고 살아갈 용기를
45
1
5
2
6
3
7
4
8
이별 1
인간과 별은 같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세상이 우주공간이고 내가 별 중에 하나라면
전 이제 갓 산개성단을 벗어나서 우주여행을 시작하겠죠 2
구상성단에 놀러 가서
무릎을 베고 우주여행 얘기를 듣는 시간이 참 좋았는데 이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서 발걸음을 떼기가 어렵네요
3
저 하늘의 별도
반짝였던 추억들도 당신도
4
왜 빛나는 것들은 언젠가 빛을 잃을까요
5
우주 가이드에는 은하의 빛이 점차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고 쓰여있지만 그 당연한 일이 지금까지는 당연하지 않았으니까 이 어둠이 나는 더 무서워요
6
잊혀진다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지만
잊지 않겠다는 맹세는 누구나 쉽게 했을 것이고 곧 나도 그렇게 하겠지요
7
별이 지게 되면 반짝임은 사라지지만
우주공간에 자신의 조각은 남기고 떠난대요
떠날 수밖에 없다면 나에게도 무언가 남겨주세요 저는 그게 작별 인사였으면 좋겠어요 8
구상성단으로 가는 길을 잊지 않도록
47
김지운
되풀이
엄마 노을
작은 우주
1, 4
1
5
2
6
3
7
4
8
되풀이 1
나의 모난 부분이 너를 할퀴었을 때
비로소 내 형태를 자각했다. 2
너는 내게 너무도 부딪혀
어느 하나 맞물릴 수 없게
요철없는 동그라미가 되었다. 3
네가 굴러 내게서 멀어질 때
4
동그라미가 되어야지
5
반복해서 되뇌었다
모난 나는 그때 다짐했다. 동그라미가 되어야지
누구에게도 생채기 조차 내지않도록 내가 나를 깎아내렸다.
6
그렇게 나를 깎아서
동그라미가 될 줄 알았다.
너무 깎아냈는지 속이 파여
더 길고 뾰족한 내가 되었다. 7
처음보다 더 가시같은 내가 되었다.
8
다시 다짐했다.
9
동그라미가 되어야지
10
다시 나를 깎았다.
그렇게 난 또 다른 너를 할퀴었다.
동그라미가 되어야지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더 열심히 깎아냈다.
11
결국 난 형태를 완전히 잃었다.
들쑥날쑥 깎이고 패여 어디에도 설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51
9
10
11
12
12
이제야 깨달았다.
모난 나를 깎아내린 것은
결국 또 다른 너를 할큄과 다를게 없다는 것을
53
1
엄마 1
철없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무조건적인 사랑에 뻔뻔하게도 너무나 당연한 줄 알았어요 설령 내가 날카로울 때도
오히려 평소보다 멀쩡해서
상처난 줄 모르고 그렇게 무심했어요 그런데 이제 알아버렸어요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그렇게 차근차근 알게 되어버렸어요 모질게 어렸던 내 모습이 다시금 떠오를 때마다
온종일 마음으로 울었어요 이 모습을 보인다면
먹먹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질까, 어리광 한번 부려볼까 싶었는데 난 또 어리석었어요
그대에게 미안해서 울고있는 내 마음을 보는 그대는
내게 상처받을 때보다
가슴이 더 넝마가 되어버린다는걸 미처 늦게 깨달았어요
참 바보 같은 자식인데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날 매일 안아줄까요
그만 어리석고 미안해도 미안해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꼭 알아줘야해요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55
1
5
2
6
3
7
4
8
노을 1
뉘엿뉘엿 해가 저물때
2
아직 잎도 나지 않았는데
조심스레 네 옆에서 창 밖을 바라봤다. 저물어가고있는 해를 보았다고 어떻게 이리도 따뜻할까.
3
온기를 느꼈을 때쯤, 해는 거기서 멈췄다.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멈춰있다. 4
이상하기도 하지,
분명 밤은 찾아오는데
한동안 그렇게 질듯 말듯 해는 머물러 있었다. 5
오늘도 당연하게 해를 보았다.
6
분명 나는 보았는데
보았는데 사라졌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7
이상하기도 하지,
아침이 올때가 됐는데 아침이 오지 않았다.
8
어제와는 달리 온종일 그늘이 드리워
9
온기를 다 뺏겼을 때,
나를 차갑게 했다.
그 때 알고야 말았다.
여태 난 혼자 있었다는 걸 어느 순간 네가 떠나
더이상 곁에 없다는 걸
57
9
59
1
작은 우주 1
너의 눈에 내가 보여
맑은 시냇물에 비춰진 것처럼
너무나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보여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졌어
휘어진 너의 두 눈 안으로 내가 사라졌어 밤도 아닌데 반짝이는 너의 초승달에 나는 잠식 돼 버리고 말았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입꼬리가 올라가서 날 계속 꺼내주지 않는거야 그런데 있잖아,
거기 날 영영 두어도 좋을 것 같아 그 곳에서만 존재한다해도 우주를 걷는 것만 같이 한없이 벅차오르는 걸
날 오래 머무르게 해줘
영영 거기서 머무르게 해줘
61
1
5
2
6
3
4
1, 4 1
홀로 우두커니 앉아
밥 한술 뜨던 자리에 넷이 앉아있다.
2
홀로 덩그러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자리에 넷이 누워있다.
3
적막했던 공기에
소란스런 소리가 섞여
마음을 하염없이 시끄럽게 한다. 4
난 이런 시끄러움이 좋다.
5
난 이런 소란이 좋다.
6
난 이제 적막이 싫다.
63
이진아
자장가 할머니 꽃가루 아버지
연필자국
1
5
2
6
3
4
자장가 1
너의 곱슬한 머리도 분홍빛 피부도 까만 눈동자도
동그랗고 커다란 코도 2
모두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모습이다
3
너의 냄새까지
알면서도 바보같이 실수하는 모습까지 내가 좋다 치근대는 행동까지
4
모두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모습이다
5
너보다 못난 나여도
네가 내 옆에서 행복하다면 다리가 저려와 아파도
너의 무게에 어깨가 아파도
너를 위해 기꺼이 내 옆을 내어줄테니 6
아무 걱정 없이
내 옆에서 잠들어라
67
1
2
3
4
할머니 1
당신이 조금 덜 예뻤다면
2
내 기억 속 당신이
나는 지금 당신을 잊었을까 언제나 찬란하고 아름다워서 그모습을 못 잊어
아직 당신 안에서 헤엄치며 밤마다 그리워하는지 3
헤엄치는 나의 손 짓 하나, 발 짓 하나
4
매일밤 당신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데
모든것의 목적지는 당신이다 무엇을 잃는지도 모르는 채 나를 찾아달라며 밤마다 밤마다
또 당신을 찾는다
69
1
5
2
6
3
4
꽃가루 1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나리는 꽃잎이
언제나 두근거렸다 2
잊었다 생각했는데 살랑 부는 바람에
어김없이 흔들렸다 3
당신이 나를 만지는
그 따뜻한 손길 하나에
나는 또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4
당신 생각이 날 때 즈음엔
언제나 코끝이 새큰 아려와 크게 앓았다
5
그런데 생각해보니
흔드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이 내가 아니겠는가 6
그대는 항상 그 모습으로 남길 바란다 나는 그런 그대가 좋아 하염없이 흔들릴테니
71
1
5
2
6
3
7
4
8
아버지 1
내가 걸을 길을 평탄히 만들어 주었고
2
힘이 들 때는 짐을 덜어줬고
무서운 길은 앞에서 손을 잡아 주었다 슬퍼하는 날이면 함께 아파했고
행복할 땐 나보다 당신이 더 기뻐 눈물을 흘려준 날도 있다 3
그런 당신이 귀찮아
4
나를 위해 흘려주는 눈물이 무거워
5
언제나 내 곁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자 떼를 쓰기도 했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린 적도 있다 그늘이 되어주던 당신은 쉼터가 되어주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다 나의 세상이다
6
그런 나의 세상에 지금
해가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받아들이기가 나는 아직 힘들다 7
아버지
당신이 보여주신 대로 당신께 돌려드릴 테니
8
나의 그늘 아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73
1
5
2
6
3
7
4
8
연필 자국 1
너를 좋아하는 만큼 꾹꾹 눌러 담아 너를 적었다
2
하얀 종이에
3
온 마음을 꼬박 담아 적었다
4
크게 앓고 난 후
5
너를 너무 세게 눌러 써
6
흰 종이에 이젠 너의 흔적이 다 남았다
7
깨끗하게 모두 지우고 싶어
너를 가득 적어냈다
너를 지웠다
연필 자국이 남았다
네가 좋아 쓸 때보다 더 힘들게 지워냈다
8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고
9
그런 종이가 너를 더 생각나게 해
10
그런데 이상하지
종이만 너덜너덜 상했다 까만 물감으로 칠해버렸다 종이는 상했고
이제 아무것도 그릴 수 없게 까맣게 칠해졌는데도 11
아직도 너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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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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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단비
바다를 생각한다
구룡성채에는 빛이 들지 않는다 fragile breakfast
누군가
낡은 이불에 바치는 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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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생각한다 1
나는 문득 바다를 생각한다. 누구의 것도 아닌,
다만 흩어지고 모여드는 짠 푸른바다를. 2
나는 바다를 좋아해.
그렇게 뱉고 나면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만 같아,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바지락 같은 나의 생을 멀리 던진다. 3
제 아무리 껍데길 쓰고 힘을 줘봤자
4
나는 깊은 곳에 가지 못하고,
고작 모래를 머금고 사는 삶.
나는 먼 지평선에 도달하지 못하고, 나는 바닷물 하나 마시질 못하고,
나는 가라앉고 가라앉고 가라앉고 가라앉는데. 5
바다가 있다기에 바다를 좋아한다.
6
울고 싶은 밤엔
누군가의 눈물을 녹인,
바지락들의 바다를 떠올린다.
8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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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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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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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성채에는 빛이 들지 않는다 1
때론 이 집이 내 세계였으면 했어.
2
다 식은 국을 휘휘 저으며 A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빛이 들지 않는 얼룩진 창. 퀴퀴한 먼지 냄새.
갈라진 벽의 냉기 따위가 A의 낯선 언어 위로 부유한다. 3
나는 말의 의미를 상기한다. 어째서?
구룡성채에는 오래도록 빛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오래전 A를 밤낮없이 울게 만든 시시한 이유이기도 했다. 4
이곳을 떠나자.
5
A는 먼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멀리 가는 거야. 먼 곳.
형형색색의 무덤 속에서, A는 말했다. 6
그렇게 말하는 A의 눈은
역사 속 스러진 슬픈 영혼의 마지막 인사 같기도 해서, 나는 A가 이미 이곳에 없음을 느낀다.
7
세계의 세계가 아득한 A의 옆에서 손을 놓칠세라 눈을 굴리던 아이의 모습을 한 나는, A가 말한 세계를 찾지 못한다.
8
가지 못한 곳들이 고층의 건물 밑에서
9
때론, 이 방만이 내 세계였음 했어.
10
높디 높은 구룡성채의 빛들지 않는 단칸방 구석의 식탁에서,
11
가지마.
아귀처럼 울렁인다.
식어버린 아침밥을 먹던 어느 날 A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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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는 A에게 부탁한다. 나는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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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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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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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
8
fragile breakfast 1
씁쓰름한 추억을 녹인 커피 한 잔.
사라지지 못한 응어리가 덧 발린 토스트.
마르고 마른 눈물 같이 짜디짠 베이컨 두어 조각. 2
먹는다.
3
다만 차가운 응시로,
먹어치운다. 오래도록 감기지 못할
피로한 두 눈과 코와 입으로. 4
마시고, 씹고, 삼킨다.
5
이 마을에서 저기 개울 너머의 작은 마을까지 아침을 배달해 준다는 소년은
부지런히도 내게 비극의 맛을 알려주고, 6
나는 부서지기 쉬운 시간의 쪼가리를 씹어대며
7
소화시킨다.
8
누군가의 비애를 씹어 넘긴다.
9
그러니까 이것은,
끊임없이 삼킨다.
지나간 티비스타의 지나치게 사적인 매일이자,
이 작은 마을의 오랜 아침 관습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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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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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누군가 1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다음 끼니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고, 누군가는 다음 끼니마저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누군가는 화가 나고, 누군가는 퍽 즐겁고,
누군가는 귀가 간지러우며, 누군가는 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삶의 유한함에 대해 유식한 척을 하고, 누군가는 그저 조용히 응시하며,
누군가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덧없어 웃고,
누군가는 그런 누군가를 보고 으스대지 말라며 핀잔을 주고, 누군가는 달려가고,
누군가는 멈추어 서 있고,
누군가는 죽은 위인의 전기를 읽고, 누군가는 새로운 역사를 쓰고, 누군가는 피가 나고,
누군가는 시간이 없고,
누군가는 시간이 너무 많고,
누군가는 간신히 버스를 타고,
누군가는 지나친 정거장을 보며 안타까워 하지만, 2
누군가는,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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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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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이불에 바치는 시 1
2
낡은 이불은 소중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소중해서, 때론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그다지 마음 쓴 적 없음에도. 차가운 물에 벅벅 닦고 닦아도,
저 망할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
소중한 것 따위는 만들어선 안 되는 것이라는 허무한 생각이 나를 잠식한다. 3
사라져가는 낡은 것에, 시키지도 않은 마음을 줘 놓고 그 낡은 시간 위에 내가 벌여 놓은 크고 작은 실수들을 마주한다.
난 단 한번도, 이 이불을 사랑하려 한 적이 없었다. 4
그건 소중한 것들을 억지로 만들려 하는 나의 오래된 나쁜 습관이었다. 한 터럭도 애틋하지 않은, 언제고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들을 좋아했었단 말야, 라고 투덜대며 끌어안는다.
5
내 존재의 한 입맛을 확인하려 애쓴다.
6
이 잔꽃무늬 이불이 버려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슬프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것이라고 마음먹은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지는 마음에 눈물이 어느새 비죽, 흐르고 만다. 7
그렇기에 지금도 나는,
고작 그 얼룩이 뭐라고 이불이 헤질 때까지 비누로 빨고, 빨다가
거의 사라졌지만 희미하게 남은 얼룩에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화를 내며 이 시를 쓴다. 8
마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면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그 보잘것없던 것조차도, 바래지는 순간에는 나의 일부분이 되어 존재가 떨어져 나가듯 피곤해진다.
9
그래서 낡은 이불 따위가 문제라는 것이다.
10
낡은 이불도, 관광지의 엽서들도, 두툼하게 쌓였던 낡은 영수증들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지만,
9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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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은 더 이상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11
하지만 그럼에도 불현듯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은 자꾸만 생겨 날 테고, 나는 계속 준 적 없는 애정을 빼앗길 테고, 사랑한다 여긴 모든 것들은 사라질 테고, 아무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를 것이다.
12
조그마한 기분은 젊은이의 노래 가사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13
낡은 이불의 희미한 얼룩 자국과 함께.
그렇지만 이 역시 잊을 것이다.
95
유민재
사과 노을
마음가짐
위로 노력
1
2
3
4
5
사과 1
달고 맛난 사과
아삭아삭 달고 맛난 사과
나에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의미 2
단맛이 혀끝에 닿으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시원한 과즙이 입속에 퍼지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3
그 단맛은 나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
지친 나를 생각해 손수 깍아주시던 사과 한 접시 가족 모두 도란도란 앉아 먹던 사과 한 접시 그 마음이 달았다는 것을 왜 이제 안걸까
4
누가 알까
5
그 단 맛의 의미가 고작 미각일 뿐 이었던 나이
그 사소한 순간이 그리도 감사할 줄 사소한 순간을 감사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의미를 이제서야 깨달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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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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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을 1
온 세상을 비춰준다
이 세상에 지친 나를 비춰준다 아주 찬란히도 물들여준다
2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내 마음 따듯하게 위로라도 받듯 숨고 싶었던 내 마음
당당해지라고 이야기하듯 어루만져준다 3
저 황홀한 빛은 온 세상을 비춰준다
4
상처받은 내 마음
아주 찬란히도 물들여준다 어린아이라도 달래듯
자책하고있는 내 마음
괜찮다고 토닥이듯 내 어깨를 어루만져준다 5
지쳤다는건 지금까지 내가 잘 해왔다는 것 아, 노을처럼 황홀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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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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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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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가짐 1
돌뿌리에 넘어져 다치면
2
'내가 왜 넘어졌지'
넘어져 다친만큼만 아파하면 된다. '왜 하필 돌뿌리가 있었지'
'나는 아픈데 다른 것들은 그대로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내 삶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3
딱 거기까지인거다.
4
'다음에는 조심해야지' '돌뿌리를 치워놔야지'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있는 기회다. 내가 달라질 수있는 순간이다. 5
딱 거기까지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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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1
어떻게 매번 잘하겠어
2
노를 젓고 안젓고는 네 몫이지만
3
잘하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4
자주 무너지고
어떻게 매번 견디겠어 바다를 주관하는 건 네 몫이 아니야 네가 너를 기뻐했으면 좋겠어 자주 넘어져도
자꾸 일어나려 애쓰는 너를 대견히 여겼으면 좋겠어 5
조금 슬퍼보이면 어때 조금 지쳐보이면 어때 너만 그런게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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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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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1
'보고싶어요' 했을 때 '보고싶어요' 라고
2
이 사람에겐 다신 '보고싶어요' 같은 말은
답이 오지 않으면 결심하게 된다. 하지말아야지 하고.
그 다음 말로 하려던 '사랑해요' 같은 건 더더욱 할수가 없고. 3
감정의 높이를 맞추려고 애를 쓴다. 상대가 그 선을 넘지 않으면
그 선을 혼자 넘을 순 없지 싶다. 이것이 나의 가장 솔직한 마음. 4
하지만 사랑은 줘야 받을 수있고 나누어야 나눠지는 것. 한번 더 용기를 내어 노력하자. 이 시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표현해보세요.
107
김현아
몸
그 여름 어느 토요일
그림자
엄마와 나
이별
1
2
3
4
봄 1
땅에서 본 유채꽃에서 하늘에서 본 벚꽃에서
봄의 향기로움이 보여서 2
노란빛 물결에서 분홍빛 빗물에서
당신의 눈물이 보여서 3
으스러지는 노란 아지랑이에서 희미한 분홍 서리에서
당신의 뿌예진 시선이 보여서 4
봄이면 당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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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그 여름 어느 토요일 1
월요일의 두려움과
금요일의 들뜸을 잊은 채 토요일을 맞이한다.
2
어제의 후회가 없고 내일의 불안 없이
고요하게 여유롭다 3
나를 향해 달려오는 햇빛은
머리숱 많은 비자나무에게 가로막혀 찬란하게 부서지며 그늘이 된다
4
창문 밖엔 연두빛 풀잎소리가 맴돌고
5
시원한 바람만 걸러 느끼며
짠 바다 내음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달기만한 수박을 먹으며
가만히 마음 속 나의 여름을 담아본다
113
1
2
3
4
5
그림자 1
내가 불안해하면
2
바람을 불어
너는 그저 같은 곳을 바라봐줬으면 내 마음 흔들지 말고 햇빛을 비추어
눈부심에 앞을 가리지 말고 3
지나간 시간에 있었던 공간에
나지막한 한 구절로 남아 있어 줬으면 4
만약 네가 추억 속 한 구석에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에
깊고 긴 한숨 속에 숨어있고 싶다면 5
기꺼이 영원한 술래가 될테니 무섭지 않게 외롭지 않게
차라리 침묵의 그림자가 되어줬으면
115
1
5
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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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
엄마와 나 1
나는 여기에
2
도착하는 택배하나
3
냉장고를 채우고
엄마는 어디에 밥, 반찬, 샴푸, 로션까지 한 보따리 화장실을 채우고 화장대를 채우고
4
내 공간을 채운다
5
시간이 지날수록
6
빈 옆자리
7
가만히 주위를 둘러본다
나를 채운다
눈에 띄는 비어있는 것들 공허한 마음 엄마가 채워준 나를 본다 엄마가 보인다
8
엄마는 여기에 나는 어디에
117
1
2
3
이별 1
어두운 밤
길가를 밝히는 수많은 달 너와 함께 걷는 골목길
헤어짐 끝에 마지막 별빛 그 빛 아래 선 우리
행복을 참는 네 눈동자 바람이 감은 네 목소리 재 없이 타버린 마음
억지스럽고 훈훈한 결말 2
창을 뚫으니 새어나온 차디찬 한숨 문을 여니 보이는 아득한 수평선 거울에 비친 비극적 영혼 들켜버린 애써 숨긴 진심
3
고속도로 갓길에 세운 좌표없는 희망 어렴풋이 짐작하는 하루살이의 하루
점점 곱게 문드러지는 또렷한 네 모습
놓치지 않으려 휘젓다 찾은 여전한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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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
튤립
사진첩
잠이 오지 않는 밤
종이 새벽
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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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튤립 1
날카로운 칼날이 흐르는 계절이 지나
2
솜털같이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3
안녕,
따스한 손길이 나를 감싸는 계절이 왔다 길을 걷다 만난 화려한 무리들
너네는 무슨 비밀 얘기를 하길래 그렇게 다들 모여있니
4
사이좋은 꽃잎들
내 질문은 들은채도 않고
자기네들끼리 비밀 얘기하기 바쁘네 5
사이좋던 꽃잎들
날이 더워지면 다들 싸웠는지 서로를 멀리하네
6
나는 너네가 비밀얘기 할 때가 제일 좋아
7
나한테 말 안해줘도 되니까
사이좋게 비밀얘기 해주면 안될까 다들 멀어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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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첩 1
습관처럼
휴대폰 속 사진첩을 누른다 누르자 마자
화면을 가득 채운 너와 함께한 시간들 사진첩에는 온통
너와의 시간들 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보석처럼 너와의 시간들은
눈이 부시게 빛이 나며 반짝이고 있다
나의 소중한 보석들 오늘도 나는
휴대폰 속 보석함을 누른다 습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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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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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잠이 오지 않는 밤 1
잠이 오지 않는다
아까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때문일까 잘 시간을 놓친 탓 때문일까
어제 너무 많이 잔 탓 때문일까 2
잠이 오지 않는다
잠아, 너는 참 모순적이야
네가 오면 안될 땐 네가 오고 네가 와야 할 땐 네가 안오네 3
밤에 네가 오면 반갑고
4
심심할 때 네가 오면 나는 너와 함께 하고
5
잠이 오지 않는 밤
아침에 네가 오면 반갑지가 않아 할 일이 많을 때 네가 오면 네가 참 밉다 잠아, 네가 오면 반갑게 맞이할게 얼른 나에게 와 주겠니
6
오늘 같은 날엔 오늘 같은 밤엔 오지 않는 네가 네가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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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2
6
3
4
종이 1
우리집 내방 한 쪽 벽에는
테이프로 고정시켜놓은 종이 한 장이
붙어있다 테이프의 작은 도움 하나만으로 2
종이가 벽에서 떨어진다 천천히
휘날리며 3
너는 떨어졌다
마치 그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여유롭게
비행하듯이 4
나에게는 도움이
5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너에게는 압박이 되었구나 무거운 압박에서 겨우 벗어난 너를 자유를 만끽하는 너를
너를 다시 어둠으로 몰았구나 6
이제 나는
너에게 빛을 주려 한다
다시는 어둠이 찾아오지 않도록 너를 놓아주려 한다
이제는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129
1
2
3
4
새벽 1
수많은 감정들이 살고 있는 곳 그 곳은 깊고, 묵직하며, 황량하다
2
그 곳에는 비가 내리고 얇은 빗물은
천천히 언덕 위로 흐른다 3
촉촉해진 언덕 위가 다 마를 때까지 그 곳에서의
헤매임은 지속된다 4
언제쯤 끝이날까
131
최윤화
나의 모든 것은 길을 잃다
얼음
나의 이유는 착각
1
2
3
4
나의 모든 것은 1
나의 침묵은 무시가 아닌 기다림이다
2
나의 감은 두 눈은 외면이 아닌
떠올리기 위함이다 3
나의 찡그린 얼굴은 못마땅함이 아닌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4
변명 같은
나의 모든 이유는
오직 너만을 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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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길을 잃다 1
내 마음에는
문지기가 없어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2
내 머릿속에는
청소부가 없어서
질서 없이 얽혀있다 3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들여보낸다 4
그것을
잊기 위해
또 다른 기억을 들여보낸다 5
결국 나는 그것들에 둘러싸여
길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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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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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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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
4
8
얼음 1
관심과 사랑이라는
2
동그란 눈으로
3
가끔은
4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5
그렇게
호기심이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두려워집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난
얼어붙었습니다. 6
그런 날
차가운 냉장고 속에 넣지 말아 주세요
내버려두지 말아주세요 7
얼어버린 나를 위해
따스한 담요를 덮어주세요 뜨겁게 품어주세요
8
나를 녹여주세요 나를 꺼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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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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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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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나의 이유는 1
내가 눈물이 많은 이유는
2
내가 고민이 많은 이유는
3
내가 웃고 있는 이유는
4
내가 고통을 참고 있는 이유는
5
내가 노력하는 이유는
6
나의 이유가
누군가를 위해 대신 슬퍼해 주기 위함이며 누군가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해주기 위함이다 누군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누군가의 못다 한 꿈을 이뤄주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위함이라면 그걸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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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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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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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
착각 1
너와 내 시간은
2
너의 말과 행동을
3
빠르게 흘러가는
4
너의 의미를
5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왜 다르게 흘러갈까 왜 이해해주지 못할까 저 시간을 잡아보려 해도 알아내려 해도 이런 나를
원망해도 좋다 미워해도 좋다 6
하지만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7
너의 눈을
8
너의 몸짓을
9
너를 다 알고 있다는
10
내 모든 착각이
보고 있으면 보고있으면
착각을 하곤 한다 네가 될 수 있길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14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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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인
거품
사랑니
연기 이불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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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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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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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품 1
매일 같이 보는
2
형식이 없다
빈약한 뭉게구름 규칙도 없다
자유롭게 사방으로 퍼진다. 3
왜일까
오늘따라
유독 정이 간다 4
이렇게 오래 빤히
5
다가가고 싶지만
쳐다본 적이 있는가 알 수가 없는 미래에 용기 낼 수가 없다
6
아찔한 끌림과 묘한 분위기가
공간의 적막함을 채운다 7
익숙함이란 이런 걸까
한 마디 말을 못 해보고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8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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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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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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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
사랑니 1
아프다
2
아니 어쩌면 아프지도
3
작은 구석 속 자리 잡은
나지도 않는다 하얀색 무언가
무시하려 했지만 발길을 붙잡는다 4
참고 왔던 마음이 터지기 시작한다. 평소 하지 않던 전화도, 눈물도 흘려본다
5
하지만 남 앞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익숙해질 때가 되었는데 그러지 못한다
6
낯간지럽다
7
낯이 살의 표면인 듯
8
안기고 싶지만
내 몸을 틈새시장처럼 감싸고 있다 혼자가 편해졌다 그 누구에게도
내 맘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9
이렇게 힘들지만 난 네가 좋다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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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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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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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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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1
지구는 다양하고 재밌는
2
세상에서
연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는 맛이
가장 무서운 것처럼 연기도 똑같다 3
그중 뜨끈한 연기는 잠들어 있던 감각을 달콤하게 깨워 준다
4
맛있는 냄새 따뜻한 온도 정겨운 공기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5
자욱한 연기는 나에게 곧
절정에 이르게 한다 6
변해가는 사회의 공기 차가워진 시선들
잔상으로 남았던 연기들은 점차 사라져 간다 7
하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연기들이 결합하고 해체하고
나눠지면서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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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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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이불 1
그는 내 맘속에
2
아무런 말도 표현도 못 한다
3
텅 빈 방안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이루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좋다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변함없는 모습으로 언제나 반겨준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은 눈이 부셨고
나의 사랑, 나의 전부가 되었다 4
찬바람이 조금씩 들어오는 창틀 사이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본다 날 두고 떠나진 않을까 늘 두렵다
5
한동안
침묵이 시간을 지배한다
오늘도 난 그의 품속에서 잠들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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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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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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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1
쓸쓸한 하늘을 바라보며
2
바람이 불어와
생각에 잠긴다
두 눈을 감으면
울림은 더욱 선명해진다 3
무지의 세계에 온 듯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아니 안 해야만 하는
공허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4
13, 16, 19, 22 . . .
5
지금과 다른 과거의 일상들이 그리워진다 오르막길이 있던 학교와
교복 대신 즐겨 입었던 체육복,
에어컨과 담요를 동시에 사용했던 공간들 그때만의 공기가 그리워진다 6
이제는 갈 수 없는 지난날이지만
영원한 꿈으로 남아
일기장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159
신국현
작(昨)몽
디오라마
밤을 그리다
객지에서 쓰는 편지
내가 갈 길 161
1
2
3
4
5
작(昨)몽 1
모두가 잠드는 조용한 밤
2
하늘이 검게 물드는 밤
3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어둠에서
마지막 가로등이 켜집니다 눈앞의 불을 꺼봅니다
한치앞도 볼 수 없는 적막한 어둠에서 나는 나의 오랜 벗을 만납니다
4
기나긴 밤, 그와 나의 이야기는 어둠 속 빛나는 달을 만들고 달빛 아래 초목들을 밝히어
청록빛의 푸르름을 만듭니다 5
어느새 달은 지고
마지막 가로등도 꺼져갑니다
163
1
2
3
4
5
디오라마 1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없다면 이곳은 없습니다 이곳이 없다면 나도 없습니다
2
작은 유리관 속
3
이 작은 세계가 내가 알 수있는 세계의 끝이라면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이 세계는 내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4
작은 유리관 너머
5
나는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만
나는 알고 싶습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그 곳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165
1
밤을 그리다 1
떠오른 달이 대지를 비치면
공상속 풍경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요한 밤 아무도 몰래
백색의 종이와 흑색의 흑연을 꺼내어 은연한 달을 벗삼아
달빛에 노래진 종이에 한 획을 긋습니다.
167
1
5
2
6
3
7
4
객지에서 쓰는 편지 1
세상의 끝에 다녀왔습니다.
2
시동하는 철마에 몸을 맡기어
3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골수는
눈을 감고 있자면 고향이 생각납니다. 목마른 아들을 적시는 식수가 되었고 선홍빛 열매를 맺은 과수는
배고픈 아들을 먹이는 식수가 되었습니다 4
세상 어디에서도 그곳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5
받은것 분에 넘쳐
6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도
7
그곳이 그립습니다
다 돌려 드릴순 없지만 변함없이 아름다울 그곳
169
1
5
2
6
3
7
4
8
내가 갈 길 1
무한의 길을 걷다보면 흐려진 초점 앞,
내앞엔 두개의 길이 놓입니다 2
주위엔 적막만이 함께하고
넓은 땅 위 서있는건 오직 나 하나 뿐
그 누구도, 어느것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습니다. 3
나의 길은 어디인지
4
저 하늘의 구름은 그가 가는 길이
5
나 또한 그와 같이 바람에 몸을 맡기어
6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7
하지만
8
이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어디인지 알고 있을까요
알 수없는 길을 향해 흘러갑니다. 당신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171
김예원
Blue
날아오르다
새벽 물
이른 오후
173
1
2
3
4
Blue 1
시원하고 산뜻한
공기를 들이 마신 듯이
파랗다 못해 눈이 부시다 자유로운 바람에 몸을 맡긴 듯이
깃털처럼 가볍다 2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의 연장선처럼
넓고 곧게 뻗어져 있다
투명함이 차곡차곡 쌓여
농도 짙은 푸름이 비친다 3
손끝에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차갑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하다
깜깜한 어둠 속을 닮아
정적을 깨기 두려울 정도로 고요하다 4
때로는 따뜻하며 때로는 차갑다
175
1
2
3
4
5
날아오르다 1
다른 사람을 어루만져 주느라 바빴던 손끝으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발끝으로 2
오롯이 본인만의 공간에서
환하게 내리쬐는 빛을 받으며 주위를 둘러싸는 선율을 따라 아주 찬란하게
3
손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무리 외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발밑 풍경이 점점 흐릿해질 만큼 아주 높이
4
흘러버린 세월들은 저 먼 곳에 두고
날카로운 눈빛들에게 보란 듯이 5
꿈꿔왔던 그 순간처럼 날아오르다
177
1
2
3
4
5
새벽 1
어둠이 삼켜버린 방 안
작은 빛 하나에 의지한 채 방안 곳곳을 눈에 담는다
2
시끌벅적하던 낮의 소리들은 어디로 갔는지 고요하다 못해 숨이 막힌다
3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 시선이 멈춘 곳은 천장
뚫어져라 쳐다보자 천장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4
아무런 형태도
움직임도 없는 곳 그 공간 속에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진다 5
꼬리의 끝이 보일 때쯤 다시 돌아온 방안은 시간이 멈춘 듯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조용하다
179
1
5
2
6
3
4
물 1
손에 힘을 한껏 주고 한 움큼 잡아봐도 잡히지 않는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2
냄새를 맡으려
코에 가까이 가져가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3
물은 형태조차 투명하고
4
그 물속에는
냄새조차 투명하다 내가 담겨있고 시간과 공간이
그리고 소리가 담겨있다 5
물속에 담긴
그 수많은 것들은 심하게 일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6
투명함이 만들어낸 왜곡은
그 속을 들여다보기 더 어렵다
181
1
2
3
4
5
이른 오후 1
무심결에 쳐다본 햇빛에
2
온기를 머금은
눈이 저절로 찡그려진다 따뜻하고 포근한 향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3
손으로 해를 가리고 올려다 본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쨍하다 4
넓고 넓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하늘은 오늘도 기꺼이
해의 배경이 되고
구름의 배경이 된다 5
살랑거리는 초록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이른 오후의 그림이 된다
183
심지혜
잔향 결핍
200이 45가 되기까지 반가워
생체 실험 185
1
2
3
잔향 1
너와의 식사에서는 바질 향이 나는 것 같다. 우리 중 누구도 바질을 먹지 않았는데도. 낯설지만 향긋한 바질 향으로 기억되는
너와의 식사에는 어색한 웃음이 있었다.
그 어색한 웃음 속에 가려진 설레이는 마음을 너는 알고 있었을까. 2
우리가 애매하게 닿을 듯한 거리에 서있었을 때, 나는 딸기향을 맡았다.
상큼하지만 달콤한 딸기향은
너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3
너의 향기는 언제나 약하고 부드러웠다. 진하지 않은 너의 향기처럼
너 또한 진하게 남아있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나에게 남은 건 너의 잔향뿐
187
1
2
3
결핍 1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결핍의 상태
2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고
이렇게 빈곤한 상태에서 시를 쓰다. 정신이 풍족하지 못하다.
결핍의 끝을 달리고 있는 나는 솔직해질 수가 없다. 나의 연약한 상태를
자신 있게 드러낼 수가 없다. 3
잠을 못 자서 감성이 잠잠하고
밥을 못 먹어서 이성이 먹먹한 것일까. 오늘도 나는 뱃속의 천둥을 무시한 채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결핍을 맞이한다.
189
1
200이 45가 되기까지 1
너의 숫자가 줄어드는 동안
없어지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다.
수북이 쌓여있던 단단한 설산 같은 모습이
이제는 파스락 꺼져버리는 비닐 떼기 같다. 너를 생각하며 말했는데,
이제 보니 이건 나의 모습과 닮았구나.
191
1
반가워 1
오전 5시 17분.
1분마다 하늘의 색이 달라지는 시간 아침을 준비하는 해는
내가 반가워 이렇게 매일 아침 나에게 달려오는 것일까 그런 너를 보며, 나는
차마 네가 반갑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어둠은 다가오는 해를 막아보려 하지만 결국 해는 이긴다.
어둠과 해의 씨름에 나는 그저
바뀌는 하늘색을 바라보는 구경꾼.
193
1
생체 실험 1
사람은 갑자기 쓰러질 수 있다. 이 한 문장을 증명하려는 듯이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더 해야 쓰러질 것인가. 한계점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이 느껴지지도, 딱히 내키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한계점이 찾아내기 위해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남은 기간은 1주일
1주일 안에 얼마나 더 많은 자극을 주어야 할까 1주일 안에 과연 한계점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195
한수민
욕심 실밥 트랙 섬
태몽 197
1
5
2
6
3
7
4
8
욕심 1
욕심에게
내가 이상하냐 물으면 맞다고 대답한다
2
반복되는 물음에도
3
계단 위 조명만
4
빛줄기가 우리 사이를 가로질러 갈 때
5
우리는 똑같은 감정을 들고
6
콘크리트 냄새에 파묻혀
7
계속 의문을 품으며 계단을 내려간다
8
계단 끝에서 욕심은
똑같은 말만 대답한다 방향없이 어질러진다
다른 곳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득해 질 때 쯤
실소하며 휘청거리다
삐걱삐걱대며 사라졌다
199
1
5
2
6
3
7
4
8
실밥 1
실밥을 꾹 즈려밟고
2
뒤돌아보면
3
기다란
4
남아있는 건 지고 있는 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림자가 생긴다 그 깨끗한 눈으로
신발 밑창을 뚫어지듯 쳐다본다 5
유리창에는
6
점점 스며오는 어둠은
붉은빛이 흘러넘치지만 입을 크게 벌려
먼지 한 톨도 남지 않게 빨아들인다 7
그제서야
8
잘 숨겨둔 채
정신이 퍼뜩 든다 다시 뒤돈다
201
1
5
2
6
3
7
4
8
트랙 1
방바닥에 누워
2
문 틈사이로 수많은 발자국을 관찰한다
3
발자국은 바삐 움직이며
4
누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할지,
5
잘 닦인 트랙은 반짝거려
6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7
뻐근한 목덜미만 만져대다
8
누가 저 허름한 나무문을 열어줬으면 좋겠다
9
나는 아직도
10
출발선 뒤에 서 있다
내기할래?
틈새로 새어 나온다
소리를 질러본다
203
9
10
205
1
5
2
6
3
7
4
8
섬 1
날개를 겨우 파닥거리는
2
우두커니 혼자 앉아
3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4
비치는 것도 없는데
5
정신을 뺴놓고 보고 있노라면
6
어떤 당신이 날 기다릴까
7
나를 엮어
8
당신에게 건너가
9
슬며시 말을 걸고
10
당신이 좋으시다면
11
저에게 건너와 주세요
12
나의 섬에서 기다릴 테니
비행기에서
검은 화면
손으로 눈을 가려봅니다
그렇게 하세요
207
9
10
11
12
209
1
5
2
6
3
7
4
8
태몽 1
맑디맑은 강에
2
손목이 잠길 때쯤
3
담가보면
4
스쳐 가는 보석들
5
정신없이 쓸어 담다
6
유난히 새빠알간
7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처럼
8
마치 자신을
9
그렇게 너는 내 안에 들어왔으니
10
푸르른 잎은
11
너를 품어 가을을 키울 거야
루비 반지 하나
끼워 맞추라는 듯
노을을 맞아 땅의 이불이 되고
211
9
10
11
213
한서현
소독 용기 상기
시든 꽃을 버리며
파랑 215
1
소독 1
자기야 나 왔어, 너의 소독약
꼬박 30일을 다쳐왔으면
하루 정돈 치료해도 괜찮잖아 먹고싶었던 것 있어? 사고 싶었던 것은?
시간을 사고 싶다고?
어쩌지 그건 못사는데
그대신 놀 날이 왔을 때 제대로 놀 수 있도록 준비는 해줄 수 있어
이번 한달은 많이 다치지 말고 너를 위한 시간
1시간이라도 가져보는게 어때?
217
1
2
3
4
용기 1
지나간다
나의 하루들이
그것을 나는 일상이라고 부른다
나의 일상이 아닌 우리의 일상은 어떤가 새로운지 특별한지 가장 보통인지 2
아침 8시 10분 힘겹게 눈을 뜬다 햇살 같은 너의 모습에
나는 이상을 찾아갈 용기를 얻는다 3
"오늘도 사랑스럽네."
4
한번 더 울리는 알람에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다. 자고 있는 니가 깰까봐
서둘러 너의 옆에서 알람을 재웠다 나가기 전 작은 포옹에
나는 현실을 찾아갈 용기도 얻는다
219
1
상기 1
한문장에 담긴 힘은
생각을 표현 할 수 있는가
한마디에 담을 수 있는 감정은 왜 더 슬픔을 자극하는가 '기억이 사라져 갑니다.'
누군가에는 아닐수 있다 나는 이문장을 듣고
어떤 단어가 기억을 주는가
왜 나는 슬픈 생각이 드는가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는 어떻게 애절함을 가지는가 힘을 경험할 수 있었다
목소리와 기억은 거대하다
나는 힘 있는 감정을 가지고 기억을 들어본다
221
1
2
시든 꽃을 버리며 1
벌이 되는 순간
나는 꽃집에 들어가 꽃다발을 주문한다
달콤한 프리지아 꽃가루를 흘릴까봐 두려워 조심조심
달콤함을 잃을까봐
항상 최고를 준비한다 2
벌이 되는 순간
나는 달콤함을 잃은 너를 시들어버린 마음을 자연스러운 시간을
억지로 잡아야 할까
아니면 이제는 보내줘야할까
223
1
2
3
파랑 1
나를 잡아주던 너의 손
그 손이 따뜻해 빨강으로 물들었어
오늘은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던 너 내 손은 파랑으로 가득차
마음까지 파랗게 물들어 버렸어 2
내 옆을 채워주던 너의 자리
그 옆자리가 든든해 노랑으로 채워졌어 오늘은 옆자리에 함께하지 않은 너 내 의자는 파랑이 스며들어
마음까지 파랗게 물들어 버렸어 3
나와 함께하던 행동
너는 나랑 파랑으로 물들여
225
한유진
거리두기 바다 졸음
마스크 손편지
227
1
2
거리두기 1
마주 앉아 서로를 그리는 날이
품에 안아 서로를 다독이는 날이 점 --점 ---- 점 ------------------- 점 저만치 멀어져 다가갈 수 없다.
2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어
마음 한가득 끌어안고 싶어라.
한달음에 달려가 눈맞춤 하고 싶어라.
229
1
2
3
4
바다 1
반짝하고
부딪히는 빛에 살짝하고
손 내밀어 인사하면 왔구나 하고
잘게 바스라져 쏟아진다. 투명함에 내 마음 비춰 파랗게 물들어간다. 2
철썩하고
일렁이는 물길에 움찔하고
뒷걸음치면
걱정말라 하고
한발짝 뒤로 물러난다.
하얀 거품 위로 내 마음 올라 온기에 데워진다. 3
그리곤
잔물결 위
내 마음 띄어 헤엄한다. 4
지금
어떤 소리가 들려?
231
1
2
3
4
5
졸음 1
깜깜한 밤
2
꿈뻑꿈뻑
어둠과 내려앉은 눈꺼풀 눈의 무게가 더해질 때쯤 꾸벅꾸벅
떨궈지는 고개
이 때다 싶어 밀려오는 나른함에 휘청휘청 3
잠결에
4
먼동이 트는 새벽빛
한 번 쿵 하고 번쩍 든다. 꿈의 느낌이 멀어질 때쯤 아침 해 떠오르고
5
빈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에 깜빡깜빡
언제 그랬냐는 듯 달아난다.
233
1
5
2
6
3
7
4
마스크 1
단단히 묶여
2
대화를 막고
떨어질 생각이 없나 보다. 마음을 막고 감정을 막고
3
커다란 방패에 압도되어
꼼짝을 못한다. 4
옥죄어
숨 못쉬게 하는 못된 마음
아슬하게도 매달려
포기할 마음이 없나 보다. 5
먼발치에
가리면 안 보일라 가리면 안 다칠라
6
못된 마음에 거리를 두면 나아질까
일단 가리고 본다. 7
언젠가
나아지겠지
가까이 마주할 수 있겠지
235
1
2
3
4
5
손편지 1
내가 사랑한 계절에 눌러 담아 보내온 이야기 한 장
2
한자한자
써 내려간 글 줄이 미워보여도
색바랜 종이 잡아놓고
괜히 한 번 더 곱씹어본다. 3
빈자리
느껴지지 않을만큼
너와 나로 빼곡했고 4
하나 하나는
잉크 진하게 박혀 진한 울림이
머물다 가거든 5
다시 돌아올 계절에 내 마음 전할래요
237
이명재
할일 혐오 노인 비움 너 239
1
2
3
할일 1
오늘의 할 일을 다 못한 채 잠자리에 든다 이것부터 했어야 했는데
아. 그것도 했어야 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2
성급하게 달려오는 생각은 이내 잠을 쫓아내 버렸네 아. 잠은 들 수 있을까
별별 기억과 생각의 폭포수는 자기를 봐 달라고 아우성 3
냉장고의 울음소리 윗집 아저씨 발걸음이 귓가에서 끝없이 메아리친다 아. 자지 말걸 그랬나
그렇게 아침이 마중 나와 있다
241
1
2
3
4
혐오 1
싫었다
내 자신이 내 얼굴이 내 머리가 내 마음이
모든 게 싫었다 2
싫었다
일도 못 하는
공부도 못하는
어울리지도 못하는 아무것도 못 하는 그게 싫었다 3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까만 기운이
내 마음을 집어삼킨다 내 마음은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옥죄었다. 4
지난 삶의 기록을 되짚는다 어떻게 이겨냈던지
목록 속 하나를 어물쩡 해본다
243
1
2
3
4
노인 1
한 노인이 길가에 앉아 있네
황망하고 의욕 없는 표정으로
슬피 슬피 우는 것처럼 보인다 2
노인도 푸르름이 있었을 터인데 반짝이는 욕심도 있었을 것인데 슬피 슬피 우는 것처럼 보인다.
3
길가에 버려진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추어진다
멈춰선 난 겹추어 본다 모습을 4
똑같이 늙겠지
똑같이 불쌍해 보이겠지
245
1
2
3
4
비움 1
삼켜버릴 수 없어서
삼키기엔 너무 버거워서 조각을 버렸다
2
시험이 생각나서
삼키지 못한 죽음이 생각나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 생각나서
3
버리고 났더니
생각은 덜 난다 버리고 났더니
4
모두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후회도 된다 아 남겨둘걸
247
1
2
너 1
네가 문득 떠오른다 갈생 목소리 도톰한 피부
노랗고 따스한 입술 부드러운 조명 너의 냄새
모든 것이 그립다 2
있다가도 없다가
없다가도 다시 나타나는 너의 깜빡임에 매일같이 떠오른다
너의 모든 걸 다시 느끼는 꿈을 꾸곤 한다
249
현승욱
봄바람
토룡 불씨
드르렁 소라집
251
1
2
3
봄바람 1
부드러운 비단처럼
누구보다 스르륵 다가오는 환영받는 존재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을 알린다 2
그 간지러운 손길에
어린 존재들은 고개를 내밀어 따스러움을 온몸으로 반긴다
3
반가운 날개짓이 그리워질 즈음에
그것은 그렇게 찾아왔다 영락없이 찾아왔다
253
1
2
3
4
5
토룡 1
아무것도 보이지않는 차가운 우주속에서 토룡은 움직인다
2
죽음만이 존재했던 공간에 숨길을 만들고
핏줄을 만들어낸다 3
비로소 숨을 내쉬면서
생명을 품어내기 시작한다 용은 더 깊은곳으로 모습을 감춘다
4
아무도 용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것이 남긴 생명만이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5
그렇게 그들은 사라지고
그들을 탄생시켰다
255
1
5
2
6
3
7
4
불씨 1
작은 불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졌다
2
처음의 그 불은
나를 따뜻하게 몸을 품어주었다
3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추위가 피부 위를 주욱
갈라지나갈때면 4
그 불씨는 나를 위해
5
굳은 날씨가 계속 되던
더욱 타올랐다 어느날
강한 바람에 못이겨
나의 쉼터에 재를 뿌리자 6
화가 난 나는
7
그 불씨는 이제 사라지고
그 불씨가 얄미웠다 나에겐 남은 것은
그가 살아생전 태웠던 육신의 재뿐이다
257
1
2
3
4
드르렁 1
이른 저녁에 시동거는 소리가 티비소리와 함께
문틈을 비집고 귀를 때려박는다 2
무엇이 저리도 분한지 당장이라도 꿈속에서 물어뜯겠다는 기세로 울려퍼진다
3
유일하게 몸져 누워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무의식 속에서도 싸워가는 당신
4
언재부터 당신은 싸워왔던 건지
오늘따라 그 소리가 더 애뜻해 보인다
259
1
2
3
4
5
소라집 1
오래된 옷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다들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지만
2
작은 소라게는
옷을 던져버리기 두렵다 연약한 나의 몸을 지켜낼 수 있을까
3
거대한 아가리가
찰나의 순간을 덮친다
다시 단단한 갑피속으로 숨어버린다 4
커다란 소라게는
아직 작은 소라를 버리지 못했다
5
그의 몸을 대부분 덮을 수 없지만
자기 자신만 모르기 때문이다
261
고국희
나비
나는 보았다.
무제
여름길
거북이의 눈물 263
1
2
3
나비 1
하얀 것이 나리었다. 여린 풀밭 위에서 작은 들꽃 안으로
바람 따라 나리었다. 2
노란 것이 떨어졌다. 파란 하늘 앞에서 아롱 냇물 아래로
물결 따라 떨어졌다. 3
하얀 꽃잎 날리듯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도 같이 나빌레라
모두 놓고 나빌레라.
265
1
2
3
나는 보았다. 1
나는 어제 길에서 새깃털을 보았다. 금방 떨어진 듯 보송하고
그 모양새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나는 어제 길에서 새깃털을 보았다. 2
나는 오늘 길에서 죽은 새를 보았다. 금방 살아 움직일 듯 보송하고
역동적으로 꺾인 관절이 부자연스러운 나는 오늘 길에서 죽은 새를 보았다. 3
나는 매일 길에서 고양이를 보았다. 느긋한 털들이 보송하고
죽임으로 이어지는 호기심이 부자연스러운 나는 매일 길에서 고양이를 보았다.
267
1
무제 1
문득 떠나고 싶을 때
내 마음에 파도가 밀려올 때 그것이 나를 집어 삼킬 때 나는 눈을 감아버린다. 하지 않을 말만 한다. 계속해서 되뇌인다. 그만두고 싶다고. 도망가고 싶다고. 보다 먼 곳으로 보다 먼 곳으로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잠겨
발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몽롱하게 가라앉아
심해 속을 부유하며 빛이 들지 않는
그런, 그런 곳으로
다시 위로 올라가면 파도에 부서질까 햇살에 흩어질까
야위어버린 나의 아이는 끊임없이 도망간다.
269
1
2
3
여름길 1
햇살이 보인다.
청량한 나뭇잎 사이를 파고들어 파란 그림자를 남긴다.
아스팔트 바닥에도 나무가 피었다. 2
바람이 들린다.
함께 걷는 사람의 잇사이를 거닐어 따사로운 음성을 보낸다.
맞닿은 두 손에서 감정이 밀려온다. 3
지금 이대로, 영원을 빌어본다.
순간에게 바라건대, 지금처럼만 살아가자. 오늘의 조각들이, 산란하는 별가루들이 어여쁘게 맞물려, 별처럼 빛나길.
271
1
2
3
4
5
거북이의 눈물 1
참을 수 없을 때 왈칵 쏟아질 때
억누를 수 없을 때
계속해서 떨려올 때 2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내 눈물 마셔줄
나비조차 없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3
잘만 참던 숨소리는 자잘하게 떨려오고 꾸며내던 목소리도
때가 지나 쉬어간다. 4
내가 저 바다에 살았다면 내가 저 냇가에 살았다면 밤새 목놓아 울더라도 들리지 않을텐데
숨을 따른 물거품만
터뜨리면 괜찮을텐데 여기서 울게되면
이 눈물이 보일텐데 내 신음이 들릴텐데 내 절망이 들킬텐데 5
내 눈물 마셔줄
나비조차 없는데 내 눈물 마셔줄
나비조차 없는데
273
최혜민
묻는다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팔나의 기다림 머리카락
35040 그리고 24 275
1
2
3
묻는다 1
하얀 눈송이가 토독
나의 어깨에 나의 손끝에 그리고 나의 발 아래에
무자비하게 나를 묻는다 2
나를 묻어두고 너는 어디로 갔는지
흐트러진 벚꽃잎에 묻혀 하염없이 너에게 물었다 3
흐린 비가 나리는 날 나의 가슴에 너를
우리의 추억 속에 너를 기약도 없이 묻었다
277
1
2
3
4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1
하나의 바람이 코 끝을 스친다 지붕 밑 그림자 불빛 아래에서
남아있는 숯향이 살갗에 부딪힌다 초록빛 춤사위가 나를 에워싸며 2
웃음소리가 잠시 머물다 간다
소리 없이 앉아 바라보던 그네에 맨발로 차가운 조약돌을 밟는다
뭉개진 글자들이 귓가를 속삭이며 3
먼지 쌓인 창고에 햇살이 드리운다 잔잔한 공기 서툰 인사를 건네며 달콤한 얼음이 흙으로 스며든다
품 안에 들어찬 추억을 마주하며 4
숨과 함께 삼키던 맥주 한잔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나무 사이 내리막을 달리던 두 개의 페달 빛나던 나의 여름
279
1
2
3
4
5
찰나의 기다림 1
너는 항상 소나기처럼 기별도 없이 내렸다가
안녕도 없이 떠나는구나 2
젖어버린 땅의 크기를 몰랐을테지 고개를 떨구어 바라보지 않으면
마알간 하늘에 가리어 버렸을테니 3
작은 빗방울이 어찌 그리 척척하게 차오르는지
그 무게를 나 또한 몰랐으니 4
어리석은 나는 또
마르지 않은 마음을 흔들며 그 하늘에 기대보는구나
적셔질 땅 위를 걸어보는구나 5
가랑비라도 좋으니 기척 없이 찾아와 소리 없이 그치길
281
1
2
3
4
5
머리카락 1
얼굴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나의 볼을 간지럽힌다 알아주길 바라는 듯 떼어낸 자리가
슴슴하게 나의 솜털을 일렁이게 한다 2
발에 밟히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할 말이라도 있는지 나의 걸음을 멈춰세운다 지치지도 않고 달라붙은 모습이
먹먹하게 나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3
옷의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가
묵직한 필통 속 연필 사이사이 숨어있다가 여기에는 없다가도 저기에는 있는 것이다
4
하수구를 막아버린 머리카락 뭉치는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채 추욱 늘어져있다 꾸역꾸역 삼킨 이 마음이 들킬까
질펀히 천장을 등지고 엎드려 얼굴을 포갠다 5
아무리 걷어내도 뱉어내는 눈물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나를 쥐고는 일년 밤낮 없이 걸리적거린다
283
1
2
3
4
5
35040 그리고 24 1
시간들 속의 네가 선명하게 숫자를 그리며 차오른다 35040 그리고 24 나의 시간이었다
2
네가 잊었다는 그 시간에
나는 흐르지 못한 채 가만히 스쳐가는 잔상을 붙잡고 그렇게 앉았나보다
3
누군들 그러고 싶었겠는가
말이라는 건 결국 변하기에 35040 그리고 24
숫자만이 대신한다 4
네가 채우던 숫자 속에
삐뚤빼뚤 낱말을 새긴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음을 5
두 눈을 가리고 서서
온몸을 풍덩 빠뜨린다 처음부터 다시
숫자를 세어본다 그려본다
285
김건우
절벽에 핀 그 꽃은 나는 가질 수 없네
8통하고도 37알 거리두기
사람 마음이란게
상처 287
1
절벽에 핀 그 꽃은 나는 가질 수 없네 1
그 꽃을 본 그 날도 나는 똑같은 하루를 지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장소에서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힘든 순간이 찾아와 고개를 든 순간에
달빛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보이는 꽃이 하나 있었습니다. 절벽에 핀 그 꽃은 너무 아름다워 넋을 놓았습니다. 그날부터 나의 하루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내 손을 쭉 뻗으면 닿을 듯 안 닿을 듯
그런 이름 모를 꽃을 항상 찾아갑니다.
저녁마다 아름답게 피어있는 그 꽃은 강해보이지만
바람 하나에 소나기 하나에도 금방 시들거 같은 여린 꽃 혹시나 누가 그 꽃을 볼까 항상 마음 떨립니다.
그럼에도 감히 내가 그 꽃을 가져갈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그 꽃을 가질 수 있다 한들 어찌할까요.
내가 상처를 주고 금방 시들거 같아 겁이 납니다.
절벽에 핀 그 꽃은 그저 아름답게 피어있고 나는 바라만 봅니다.
절벽에 핀 그 꽃은 그저 아름답게 피어있고 나는 바라만 봐도 행복합니다.
289
1
8통하고도 37알.. 1
8통하고도 37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응어리
어느덧 8통하고도 37알이나 쌓였구나 싶다.. 어느새 이렇게 늘어나버린걸까? 약이 쌓여만가는 모습을 보니 절로 한숨만 나온다.
이 약을 다 먹으면 다 나을 수 있기는 한걸까 확신이 들지도 않는다 남들 앞에서는 애써 웃음짓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이 마음의 응어리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내 밝은 모습 속 드러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
어느 한 책에서 내가 잊고 싶은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는 약을 소개해줬다. 단 한 알, 내가 가지고 있는 8통 37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한 알의 크기는 실로 커 한번에 먹을 수 없다. 그렇다. 내가 잊고 싶은 것들을 잊기 힘들 듯이
나의 마음의 응어리 또한 쉽게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8통하고도 37알,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내지 못하는 나의 응어리
291
1
2
3
4
5
거리두기 1
참 요상하다 요상해
2
뭐가 말이야?
3
왜 거리를 두는데?
4
왜 살 수 있는데?
5
정말 요상하다 요상해
아니 사람들이 요즘 자꾸 거리를 둔다 거리를 둬야 살 수 있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293
1
사람 마음이란게 1
사람 마음이란게 있다가도 없으면 그게 허전하더라 너가 밉다 밉다 말해도 전혀 미운게 아닌데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내 마음이 그러지 말라 외치는데 내 몸은 왜 그런걸까
그때 널 상처 주려는게 아니었는데 너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사람 마음이란게 있다가도 없으니까 보고싶더라
295
1
상처 1
나는 고슴도치야
나는 누구한테 쉽게 다가갈 수 없어
내가 다가가면 내 가시에 사람들이 상처받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 때문에 생긴 상처 때문에 나는 몸을 더 감싸곤 해
너도 나 때문에 상처받지말고 내 주변에서 멀리 달아나줘 나도 고슴도치야
그렇지만 난 다가갈 수 있어
내가 다가가면 사람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어 알아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 딱 이정도까지 여기까지만 붙어있자
297
박태준
눈사람
편지 패딩
추운 밤 길냥이
299
1
2
3
눈사람 1
눈사람을 열심히 만들다보면
2
한 주먹 한 주먹
눈사람 주위엔 맨바닥 뿐 소중히 뭉쳐 만들다보면
어느새 내 마음처럼 커져 3
내일이면 없어질 눈사람이지만 내 눈에 담아두리
301
1
2
3
편지 1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쓴 글자들을 보고있노라면 2
내 마음속에도 한글자 한글자
마음속 깊이 새겨진다 꾹꾹 3
이젠 나혼자 소중히 여기는 한글자 한글자
최선을 다 해 지운다 꾹꾹
303
1
2
3
4
패딩 1
이제야 겨울이 찾아왔는데
2
따뜻한 봄
내 패딩은 어디갔을까 무더운 여름
선선한 가을까지
항상 내 장롱 깊숙히
자리를 지켰던 내 패딩 3
봄, 여름, 가을 간편하게 나설 수 있던 문을
이젠 무거운 패딩없인 나갈 수 없어 4
항상 내 장롱 깊숙히 날 기다렸던 내 패딩 내가 꼭 찾아줄게
305
1
2
3
4
추운 밤 1
이 추운밤
모두가 끌어 안고
잠들어도 모자를 밤 2
내옆엔 내게 등 돌리며 누구보다 추운밤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 3
내가 할 수 있는건
덜 춥게 안아 주는 것 뿐
서로 끌어 안고 추운 밤을
버티다 보면 따스한 아침이 올텐데 4
오늘 밤은 이불을 꼭 끌어안고 잔다 너에겐 따스한 아침이 왔을까 너무 추운 밤이다
307
1
2
3
4
길냥이 1
어느날 갑자기 길냥이가
내 다리에 머리를 부빈다 그것이 못내 신경쓰여 내 품에 꼭 끌어안아 길을 나선다
2
걷다보니 꽃들이 보인다
3
또 하염없이 걷다보니
정말 이쁜 꽃들이었다
붕어빵이 솔솔 냄새를 풍긴다
길냥이와 너한입 나한입 노나 먹었다 정말 맛있는 붕어빵이었다 4
정신없이 동네 한바퀴 돌고 집에 와보니 내 품엔
시든 잿빛 꽃 한송이와
다식고 눅눅한 붕어빵이 있다
309
전주언
박
기차와 함께
사실 이해
사탕의 맛 311
1
박 1
박은 작은 내게
폭신하고 안락한 세상이였다 손가락을 세어보고
벽을 어루어볼 때 들리던
북소리가 내 마음을 울려대었다 이 폭신한 박은 곧
나를 우주비행사로 만들고
이 세상을 유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뜩 세상 밖이 보고싶어
더 큰 세상에 욕심이 났다
그 때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내 가슴을 통과하였다 박을 깨고 나온 나는 먼 우주의 먼지이자
한 티끌의 제비였다.
313
1
기차와 함께 1
멀어져가는 기차 연기 속에서 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어린아이는 해맑았고 그 어른은 슬퍼보였다
시간이 멈추었음을 바랬지만
모든 것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고
지나온 흔적 속에서만 살아있다고 생각했지만 연기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내 모습은 아무것도 아닌채로
어떤 것도 아닌채로 그렇게 살아가다
지나쳐온 사람들과 추억과 함께 기차 연기 속으로 사라져간다.
315
1
사실 1
쓴 알약이 목구멍을 넘어갔을 때 눈물이 났다
내 아픔이 가족의 아픔이 된 것을 알았을 때 눈물이 났다
엄마가 내게 알약을 잘 먹지 못한다고 꾸지람하며 물약을 주었을 때 딸기 맛이 좋다고
오렌지 맛이 좋다고
싱글벙글 하던 어린 내가 미워보였다 사실 부러웠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눈물이 났다
사실 아프고 싶지 않다.
317
1
이해 1
너를 이해한다
지독하게 들은 그 말이지만 날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해시키고자 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괴로우나 말해야 했다 큰 두려움을 가진 고래가 날 삼켜도 용기를 내야 했다
난 그들보다 더욱 소중한
내가 없는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상처를 많이 받아 고독해진 내 존재가 나에게 더욱 이해한다며 소리쳤다 행복은 나의 선택이며
힘 빠진 손을 쥐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사람은
내가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319
1
사탕의 맛 1
사탕 하나에
동네 한 바퀴를 뛰어 놀던 달콤함이 사탕 하나에
넘어지고 아파했던 신 맛이 사탕 하나에
사랑의 맛을 봤던 달콤함이 사탕 하나에
잃어버리고 미워했던 신 맛이 사탕 하나에
다시 일어서 달리던 달콤함이
모든 것은 사탕 속에서 굴러가는 하나의 윤회.
321
임유진
일기
나의 무덤
기억 미움
기억이 기억으로 덮힌다
323
1
2
3
일기 1
그날의 날씨
함께 이야기했던 내용 계속 걷는 산책로 허기짐과 웃음
그리고 한강의 반짝거림 작은 탄식들까지 2
우리는
소중했던 그때를
언제까지나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3
영원히 가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이렇게 글이라도 적어본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더라도 흔적을 남겨놓아
자취라도 느낄 수 있게
325
1
나의 무덤 1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스쳐가는 많은 무덤들
그들은 어떤 인생을 살다가 그곳에 잠들어있는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누군가 당신을 기억해주는가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의 기억 속에서 잠에 들까
327
1
2
3
기억 1
떠났음에도 흘러갔음에도
2
작아진 후에야 나는
주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기억 엄마 잃은 아이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찾아 헤맨다 3
그리고 천천히 녹여 삼킨다
329
1
미움 1
환한 웃음으로 나를 대하는 네가 싫다
내가 뭐라고 나를 서슴없이 믿는 네가 싫다
네가 있으면 나의 어둠이 더욱더 짙어지는 것 같아 네가 싫다
괜히 옆에 있어 나의 어둠이 너에게 물드는 것 같아 네가 싫다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네가 싫다 그래서 싫다, 내가
331
1
2
3
4
기억이 기억으로 덮힌다 1
그날을 기억해
울렁거리고 씁쓸함이 입안 가득 담기는 짠 내에 절여진 쾌쾌한 감정
2
네가 나에게 온 뒤로 흔들렸던 그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림으로 3
햇빛에 말린 것처럼
4
기억이 기억으로 덮힌다
조금은 보송해진 그 날의 기억
333
장서영
나무 두유
이인증
눈 대신 마음
다채로운 검정 335
1
2
3
4
나무 1
나무들은 햇볕이 두려운가 보다
옆 나무가 따가운 햇볕에 타버릴까 곁에서 사라질까 두려운가 보다
그래서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내어 가려주고 싶은가 보다 2
모두가 한마음으로 뻗은 가지와 잎사귀에
3
따가운 햇볕은 샘을 내며 가버리고
햇볕은 나무를 비출 틈이 없었다 서늘한 바람이 찾아오면
나무는 가지와 잎을 살랑이며 말한다 4
우리가 뻗어낸 가지만큼
아니 그보다 더 깊게 뿌리를 내려
햇볕보다 센 태풍이 오는 날에도 함께하자고
337
1
2
3
4
두유 1
하얗고 보드란 털에
까만 콩 같은 날 바라보는 눈
지금 내 배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너 2
털이 삐죽삐죽한 것이
민들레 같다고 생각했지만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아가 버릴까 내 곁에서 영영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생각을 멈췄다 3
오랜 만남의 시간보다
너와 함께할 수 없음에 오는 슬픔의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잘 알기에
우리의 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 영원할 수 없다면,
영원보다 딱 하루만 더 주길 바란다 4
널 잃는 내 생각이 멈추듯
네가 내 곁에 머무는 시간도 멈추길 영원보다 하루만 더 내 곁에 머물길
339
1
5
2
6
3
4
이인증 1
익숙함에 속아 보지 못했던,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런 것들
2
어느 날,
나에게 낯섦으로 다가와
내 마음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그동안 모른 채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
눈을 통해 들어와 뇌를 마구 쥐어뜯었다 3
작년부터 있던 길가에 튤립도
언제부터 있던지 모를 나뭇잎에 매달린 열매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4
나를 좀 봐달라며
나는 언제나 여기 있었다며 누군가의 시선이 머물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5
또 다른 눈이다
낯섦에만 뜨이는 눈
나를 흔드는 것들을 다시 보자
익숙함이 소중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6
이제 나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341
1
2
3
눈 대신 마음 1
나는 너에게 선물을 보낸다
너에게 직접 갈 수가 없어서
얼굴을 마주하며 내 마음을 전할 수 없어서 2
나 대신 선물이 너에게 닿을 수 있게
항상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너에게 전해질 수 있게 눈 대신 마음이 널 볼 수 있게
나중에 너와 다시 만날 때가오면
널 만나러 갔던 나의 마음이 다시 돌아와
나 대신 보았던 너의 모습을 얘기해 줄 수 있게 3
너에게 보내는 내 마음이 더 커지고 많아지면 마음이 해줄 얘기가 더 많을 것 같아서 네 생각에 잔뜩 부푼 내 마음은 오늘도 널 만나러 간다
343
1
2
3
4
5
다채로운 검정 1
검정색 펜을 들었다
내 생각을 쓰고 싶어서
지금의 내 감정을 기록하고 싶어서 나라도 내 얘기를 들어줘야지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펜을 잡았다 2
펜을 들고 글씨를 써 내려가자 검은색 글씨들이 모여
종이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새 종이에는 글씨들의 춤으로 가득 찼다 3
남이 보기엔 흰색과 검정색뿐이지만
4
다채로운 춤이 모여
나에겐 무지개보다 더 다채롭다 내 마음과 종이를 이어주는
무지개빛 다리를 놓아주었다 5
춤추는 무지개빛 다리는
나만의 세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345
조재희
-(1) -(2) -(3) -(4) -(5) 347
1
-(1) 1
서로의 눈빛만 봐도
그날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향기에 취해 서로를 들여다 보니 깊은 심연에 빠져 서로를 찾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괴물로 변해버린 너를 보며 망설이다 너의 손을 꺼냈다 그동안 내다보지 못했다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고
나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길 온갖 두려움과 욕망에 묻혀 울부짖는 그대를 감싸
천천히 잔잔하게 재웠다
349
1
-(2) 1
들숨에
그대가 코를 깊이 찔렀고 날숨엔
그대를 온몸으로 느꼈다 반복된 호흡에
깊어지는 생각이 누르는 되감기를 멈추지 못해
한번만 더 느껴보자고 반복된 숨소리에
벌써 마지막 트랙
내 BGM은 그리움
351
1
-(3) 1
거친 흙투성이의 단단한 껍질을 바라만 보다
짖눌린 무게감에 망가져버렸다
또 한번의 껍질을
저 밑 흙바닥에서 주워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다 깨져버렸다
다시 한번의 껍질을 들어올려 모양새를 다듬어주었더니 빛이 나고있었다
353
1
-(4) 1
허기진 시간을
달래러 오늘도 떠났다 도착 시각은 없는데 돌아오는 길은
너무 늦지는 말라는 메모를 꾹꾹 접어
깊숙히 넣으려는게
꾹꾹 마음을 눌러서 돌아간 그 곳엔 나는 어제였고
너는 오늘이었다
355
1
-(5) 1
마지막 페이지의 마침표를 끝으로 완성된 비망록은 떠나보내
타오르는 재가 되어 사라지는데
그대를 태우지 못해 나 오늘도
밤새 흔적을 남겼다
357
류승희
sweet morning rose
나
알수없는 카메라 swear
359
1
2
3
4
sweet morning rose 1
달콤하고 설레는 포근한 향기
2
수많은 향기 중 너를 선택했다.
너를 만나기까지 작은 노력들을 했다. 그 중 내가 너를 소중하게 여긴 이유는
네가 나에게 주는 생각과 마음때문이다. 3
따뜻하고, 설레고, 포근하고, 달콤한 두통보다는 편안함을
우울보다는 은은한 행복감을 4
나의 작은 노력과
너의 몸을 태우는 희생으로
이런 일상 속에서 헹복함의 조각을 찾아낸다.
361
1
2
3
4
나 1
옷걸이에 잘못 걸린 옷 비어버린 텀블러 깨진 유리컵
줄이 없는 기타 구멍난 양말 2
옷을 다시 걸고,
텀블러에 물을 채우고, 새 컵을 꺼내고,
줄을 갈아 끼우고,
실로 구멍을 이어주고, 3
나도 부족할 수 있고 나도 고장날 수 있고 나도 우울할 수 있고 나도 슬플 수 있고 나도 지칠 수 있고
4
이겨내고,
나를 아끼고,
주변을 아끼고,
작은 행복을 찾고,
363
1
2
3
4
알수없는 1
사람들은 참 신기하다.
보이지않는 미래를 그리며 어쩜 그렇게 열심히 살까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만지며 어떻게 성취감을 느낄까 2
나는 이렇게 보잘것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챙기기 급급한데
사람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나보다 성숙하기만하다. 3
나도 알려주면 좋겠다.
4
나는 왜이렇게 보잘것 없이
365
1
2
3
4
카메라 1
순간을 포착한다는건 마법과 같다,
2
찰칵
3
소중한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건
4
나는 저주받았다.
기억할 수 없는 순간을 저장하는 마법의 주문
축복이자 저주이다.
내가 저주받았음을 깨닫고,
물 속 깊이 사라져버린 나의 소중한 것들을 떠올렸다. 일렁이기만 하는 나의 것들을 보며 이를 악물고 나는 주문을 외운다
36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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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wear 1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고싶다.
2
우리는 왜 좋아하지않는 것을 하며 살아야할까 하기싫은건 하고 싶지 않다.
억지로 꾸역꾸역 해내다보면
어느새 어른들처럼 내가 해야할 일을 하고있다. 3
해야할 일을 하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되버린 것이 좋아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나의 잘못일까
작은 나에게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감정을 알려준 누군가의 잘못일까 4
이제서야 무서움과 두려움의 소리를 걷어내고
5
지금 나는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목소리를 낼 용기가 생겼나 했는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나조차 속이고 있는 나의 잘못일까
작은 나에게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감정을 알려준 누군가의 잘못일까
369
이승미
뜨거운 아메리카노
인간관계
0420
자스민
여름의 가닥 37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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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뜨거운 아메리카노 1
집에서는 자주 커피를 내려 마신다.
한 잔의 커피를 위해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는 과정이 기껍다. 어제의 커피는 좀 더 즐겁고, 오늘의 커피는 좀 더 차분하다.
2
많았던 잡념들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3
씁쓸한 것들은 영영 미뤄두고 싶다.
머그잔 속에 침전된 원두가루처럼.
커피의 마지막 한모금을 마시지 않고 커피잔을 밀어두는 것처럼.
373
1
2
3
인간관계 1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지만
2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지만
3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데도
한순간에 파편이 되는 첨예한 것 한순간에 무엇보다 시려지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375
1
0420 1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차를 따라 달린다 폐 속까지 시린 서늘한 새벽 공기
내 뒤로 풍경이 어떻게 스쳐 지나가는지 뒤돌아 볼 새도 없이
겨우 따라잡았다 싶다가도
다시 멀어지고 엎치락뒤치락
갈수록 풍경을 어루어 볼 새가 적어지는 것에
나는 그만 새벽부터 한탄했다
377
1
2
3
4
자스민 1
원래도 꽃을 좋아라하지만
요즘 들어 길가의 이름 모를 꽃에도 눈과 마음이 가곤 합니다
2
며칠 전 프리지아에 대한
3
수수한 향과 색들의 꽃보다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요? 화려한 것들에 끌린다고 여겼는데
며칠 전 우연히 들른 향초 가게에서 단번에 나의 향수를 마주쳤습니다
어릴 적부터 베란다에서 느끼곤 했던 나의 향수, 나의 자스민.
그 길로 저는 양손에 가족의 향기를 담뿍 쥐고 돌아왔습니다 4
어느덧 나의 작은방 한켠에 자리 잡은 나의 가족, 나의 자스민.
379
1
여름의 가닥 1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러 나간 잠깐의 외출에서
공기에 섞인 여름의 가닥을 알아차렸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름이 한껏 다가왔네요
올해도 역시나 여름이 찾아 오려나 봅니다 햇볕과 나무가 이렇게나 싱그럽고 빛나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일까요 저는 그저 눈이 부셨습니다
381
김주현
경주마
노오란 기억 어른이 마음
나비
어떤 오후 4:30
38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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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마 1
나는
달린다
앞만 보고 달린다 무작정 달린다 일단 달린다 2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까지 가야할까
얼마나 더 가야할까 3
나는 가야한다
원치 않아도 가야한다 언젠가 도착하겠지
언젠가 멈출 수 있겠지 그곳에 4
어디로 가야할까 목적지를 잃은채 나는
오늘도 내일도
달려간다
38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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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오란 기억 1
계절이 바뀌고
날이 많이 따뜻해졌네요
우리의 온도는 같은가요? 오늘은 비가내려요 2
내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게
막 쏟아져 내려요
우리의 날씨가 같은가요? 3
두 뺨이 젖고
마음도 젖네요
하늘도 우리의 마음을 알까요? 4
알아주세요 잊지말고
기억해주세요
나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여기 남아있다는 것을 5
알고있어요 잊지않아요
나 기억할게요
오래 기억할게요 그대를
38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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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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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른이 마음 1
초록산을 보면
2
뭉게구름은
3
파레트 저 구석 갈색 물감은
녹차 아이스크림일 것 같았던 솜사탕처럼 폭신할 것만 같았던 초코 맛일 것 같았던
마음은 어디에 갔을까 어디로 간걸까 4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노력해봐도
같아지지 않는 그때 그 마음 아이의 마음 5
이제는
초록 산으로 흰 구름으로
갈색으로 보인다
그냥 그렇게 보인다
38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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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나비 1
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어디선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반겨주는 너
다정한 눈 인사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2
서로의 마음을 읽은걸까
어떤 말들을 주고 받지 않아도 조금은 다른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만의 언어로 주고받는다
3
서로를 느끼고
지그시 바라본다 서로의 살갗을 부벼본다
4
아무런 대가 없이
다가와주는 네가 좋다 사랑을 채워주는
네가 너무도 좋다
걱정 근심 잊게해주는 너에게 너무 고맙다
391
1
2
3
어떤 오후 4:30 1
재즈 소리와
진한 커피 향으로 가득찬 방 안에서 커피 한 모금으로 내 마음을 적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2
어느 나른한 오후 보석 가루 몇스푼 풀어놓은 듯
눈부시게 반짝이는 윤슬 아래 낮잠을 자는 오리들 3
어느새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버린 유리창 너머 노란빛은 분홍빛으로 분홍빛은 보라빛으로
하늘은 점점 눈을 감는다
393
언어 치환 기록 시집
한경대학교 시각디자인 1 A.H.A. 시로 숨쉬기 2021
표지 디자인
고국희, 이주희, 임단비, 조재희
지도 교수
김나무
발행일
2021. 08. 29
편집 디자인
고국희, 이주희, 임단비, 조재희
© 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 HKNU
이 책의 모든 저작권은 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에서 소유하고 있습니다.
배장민 02백보람 03이주희 04김지운 05이진아 06임단비
01
유민재 08김현아 09정현진 10최윤화 11강지인 12신국현
07
김예원 14심지혜 15한수민 16한서현 17한유진 18이명재
13
현승욱 20고국희 21최혜민 22김건우 23박태준 24전주언
19
임유진 26장서영 27조재희 28류승희 29이승미 30김주현
25
한경대학교 시각디자인 1 A.H.A. 시로 숨쉬기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