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A: I Breathe Poetry #3, Spring.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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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기록 : 그려내기


사과 유민재 사람 마음이란게 김건우 사랑니 강지인 사실 전주언 사진첩 정현진 사탕의 맛 전주언 상기 한서현 상처 김건우 새벽 김예원 새벽 정현진 생체실험 심지혜 섬 한수민 소독 한서현 소라집 현승욱 손편지 한유진 순두부 신국현 시든 꽃을 버리며 한서현 실밥 한수민 아버지 이진아 알 수 없는 류승희 어떤 오후 4:30 김주현 어른이 마음 김주현 얼음 최윤화 엄마 김지운 엄마와 나 김현아


여름길 고국희 여름의 가닥 이승미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최혜민 연기 강지인 연필 자국 이진아 옷걸이 김지운 욕심 한수민 용기 한서현 우리의 바다 배장민 위로 유민재 유실물 보관소 이주희 이 별 김현아 이곳은 어른이 보호구역... 이주희 이른 오후 김예원 이별 이주희

Full Index 000


달고 맛난 사과 아삭아삭 달고 맛난 사과 나에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의미

단맛 이 혀끝에 닿으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시원한 과즙 이 입속에 퍼지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 단맛은 나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 지친 나를 생각해 손수 깎아주시던 사과 한 접시 가족 모두 도란도란 앉아 먹던 사과 한 접시 그 마음이 달았다 는 것을 왜 이제 안걸까

누가 알까 그 사소한 순간이 그리도 감사할 줄

그 단 맛의 의미가 고작 미각일 뿐 이었던 나이 사소한 순간을 감사할 줄 아는 나이 가 되었다 그 의미를 이제서야 깨달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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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유민재


사람 마음 이란게 있다가도 없으면 그게 허전하더라 너가 밉다 밉다 말해도 전혀 미운게 아닌데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내 마음 이 그러지 말라 외치는데 내 몸 은 왜 그런걸까 그때 널 상처 주려는게 아니었는데 너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사람 마음이란게 있다가도 없으니까 보고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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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란게” 김건우


아프다

아니 어쩌면 아프지도 나지도 않는다

작은 구석 속 자리 잡은 하얀색 무언가 무시하려 했지만 발길을 붙잡는다

참고 왔던 마음 이 터지기 시작한다. 평소 하지 않던 전화도, 눈물도 흘려본다

하지만 남 앞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익숙해질 때가 되었는데 그러지 못한다

낯간지럽다

낯이 살의 표면인 듯 내 몸을 틈새시장 처럼 감싸고 있다

안기고 싶지만 혼자 가 편해졌다 그 누구에게도 내 맘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16


이렇게 힘들지만 난 네가 좋다

“사랑니” 강지인

짧은 만남 을 뒤로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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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알약 이 목구멍을 넘어갔을 때 눈물 이 났다 내 아픔이 가족의 아픔 이 된 것을 알았을 때 눈물이 났다 엄마가 내게 알약을 잘 먹지 못한다고 꾸지람하며 물약 을 주었을 때 딸기 맛이 좋다고 오렌지 맛이 좋다고 싱글벙글 하던 어린 내 가 미워보였다 사실 부러웠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 을 알기에 눈물이 났다 사실 아프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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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주언


습관 처럼 휴대폰 속 사진첩 을 누른다 누르자 마자 화면을 가득 채운 너와 함께한 시간들 사진첩에는 온통 너와의 시간들 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보석 처럼 너와의 시간들은 눈이 부시게 빛이 나며 반짝 이고 있다 나의 소중한 보석들 오늘도 나는 휴대폰 속 보석함 을 누른다 습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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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 정현진


사탕 하나 에 동네 한 바퀴를 뛰어 놀던 달콤함 이 사탕 하나에 넘어지고 아파했던 신 맛 이 사탕 하나에 사랑의 맛 을 봤던 달콤함이 사탕 하나에 잃어버리고 미워했던 신 맛 이 사탕 하나에 다시 일어서 달리던 달콤함 이 모든 것은 사탕 속에서 굴러가는 하나의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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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의 맛” 전주언


한문장에 담긴 힘 은 생각을 표현 할 수 있는가 한마디에 담을 수 있는 감정 은 왜 더 슬픔을 자극하는가 ‘기억이 사라져 갑니다.’ 누군가에는 아닐 수 있다 나는 이문장을 듣고 어떤 단어가 기억을 주는가 왜 나는 슬픈 생각이 드는가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는 어떻게 애절함을 가지는가 힘을 경험할 수 있었다 목소리 와 기억 은 거대하다 나는 힘 있는 감정 을 가지고 기억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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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한서현


나는 고슴도치 야 나는 누구한테 쉽게 다가갈 수 없어 내가 다가가면 내 가시 에 사람들이 상처 받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 때문에 생긴 상처 때문에 나는 몸을 더 감싸곤 해 너도 나 때문에 상처받지말고 내 주변에서 멀리 달아나줘 나도 고슴도치야 그렇지만 난 다가갈 수 있어 내가 다가가면 사람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어 알아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 딱 이정도까지 여기까지만 붙어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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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김건우


어둠 이 삼켜버린 방 안 작은 빛 하나 에 의지한 채 방안 곳곳을 눈에 담는다

시끌벅적하던 낮의 소리 들은 어디로 갔는지 고요 하다 못해 숨이 막힌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 시선이 멈춘 곳은 천장 뚫어져라 쳐다보자 천장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아무런 형태도 움직임도 없는 곳 그 공간 속에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진다

꼬리의 끝 이 보일 때쯤 다시 돌아온 방안은 시간이 멈춘 듯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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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김예원


수많은 감정들이 살고 있는 곳 그 곳은 깊고, 묵직하며, 황량하다

그 곳에는 비가 내리고 얇은 빗물은 천천히 언덕 위로 흐른다

촉촉해진 언덕 위가 다 마를 때까지 그 곳에서의 헤매임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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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정현진


사람은 갑자기 쓰러질 수 있다. 이 한 문장을 증명하려는 듯이 생체 실험 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더 해야 쓰러질 것인가. 한계점 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이 느껴지지도, 딱히 내키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한계점이 찾아내기 위해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남은 기간은 1주일 1주일 안에 얼마나 더 많은 자극 을 주어야 할까 1주일 안에 과연 한계점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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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 실험” 심지혜


날개 를 겨우 파닥거리는 비행기 에서

우두커니 혼자 앉아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비치는 것도 없는데

정신을 빼놓고 보고 있노라면

어떤 당신 이 날 기다릴까 손으로 눈을 가려봅니다

나를 엮어

당신에게 건너가

슬며시 말을 걸고

당신이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저에게 건너와 주세요

나의 섬 에서 기다릴 테니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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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한수민


자기야 나 왔어. 너의 소독약 꼬박 30일을 다쳐왔으면 하루 정돈 치료해도 괜찮잖아 먹고싶었던 것 있어? 사고 싶었던 것은? 시간을 사고 싶다고? 어쩌지 그건 못사는데 그대신 놀 날이 왔을 때 제대로 놀 수 있도록 준비는 해줄 수 있어 이번 한달은 많이 다치지 말고 너를 위한 시간 1시간 이라도 가져보는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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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 한서현


오래된 옷 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옷 으로 갈아입는다 다들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하지만

작은 소라게는 옷을 던져버리기 두렵다 연약한 나의 몸을 지켜낼 수 있을까

거대한 아가리가 찰나의 순간을 덮친다 다시 단단한 갑피속으로 숨어버린다

커다란 소라게는 아직 작은 소라를 버리지 못했다

그의 몸을 대부분 덮을 수 없지만 자기 자신만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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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집” 현승욱


내가 사랑한 계절 에 눌러 담아 보내온 이야기 한 장

한자한자 써 내려간 글 줄이 미워보여도 색바랜 종이 잡아놓고 괜히 한 번 더 곱씹어본다.

빈자리 느껴지지 않을만큼 너와 나 로 빼곡했고

하나 하나는 잉크 진하게 박혀 진한 울림 이 머물다 가거든

다시 돌아올 계절 에 내 마음 전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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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 한유진


순 두부는 두 부보다 부 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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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두부” 신국현


벌 이 되는 순간 나는 꽃집에 들어가 꽃다발을 주문한다 달콤한 프리지아 꽃가루 를 흘릴까봐 두려워 조심조심 달콤함 을 잃을까봐 항상 최고를 준비한다

벌이 되는 순간 나는 달콤함을 잃은 너를 시들어버린 마음 을 자연스러운 시간 을 억지로 잡아야 할까 아니면 이제는 보내줘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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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을 버리며” 한서현


실밥 을 꾹 즈려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뒤돌아보면

기다란 그림자 가 생긴다

남아있는 건 지고 있는 해 그 깨끗한 눈으로 신발 밑창 을 뚫어지듯 쳐다본다

유리창에는 붉은 빛 이 흘러넘치지만

점점 스며오는 어둠 은 입을 크게 벌려 먼지 한 톨도 남지 않게 빨아들인다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다

잘 숨겨둔 채 다시 뒤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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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밥” 한수민


내가 걸을 길 을 평탄히 만들어 주었고 무서운 길은 앞에서 손을 잡아 주었다

힘이 들 때는 짐을 덜어줬고 슬퍼하는 날이면 함께 아파했고 행복할 땐 나보다 당신이 더 기뻐 눈물을 흘려준 날도 있다

그런 당신이 귀찮아 서로 다른 길 을 가자 떼를 쓰기도 했고

나를 위해 흘려주는 눈물이 무거워 못 본 척 고개를 돌린 적도 있다

언제나 내 곁에서 그늘 이 되어주던 당신은 쉼터 가 되어주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이다 나의 세상 이다

그런 나의 세상에 지금 해가 지고 있다는 것 을 인정하기가, 받아들이기가 나는 아직 힘들다

아버지 48


당신이 보여주신 대로 당신께 돌려드릴 테니

나의 그늘 아래

“아버지” 이진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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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참 신기하다. 보이지않는 미래 를 그리며 어쩜 그렇게 열심히 살까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을 만지며 어떻게 성취감을 느낄까

나는 이렇게 보잘것 없이 눈에 보이는 것 만 챙기기 급급한데 사람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나보다 성숙하기만하다.

나도 알려주면 좋겠다.

나는 왜이렇게 보잘것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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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없는” 류승희


재즈 소리 와 진한 커피 향 으로 가득찬 방 안 에서 커피 한 모금으로 내 마음을 적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어느 나른한 오후 보석 가루 몇스푼 풀어놓은 듯 눈부시게 반짝이는 윤슬 아래 낮잠을 자는 오리들

어느새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버린 유리창 너머 노란빛은 분홍빛으로 분홍빛은 보라빛으로 하늘은 점점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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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오후 4:30” 김주현


초록산 을 보면 녹차 아이스크림 일 것 같았던

뭉게구름 은 솜사탕 처럼 폭신할 것만 같았던

파레트 저 구석 갈색 물감 은 초코 맛 일 것 같았던 마음은 어디에 갔을까 어디로 간걸까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노력해봐도 같아지지 않는 그때 그 마음 아이의 마음

이제는 초록 산으로 흰 구름으로 갈색으로 보인다 그냥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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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마음” 김주현


관심과 사랑 이라는 호기심이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끔은 너무나도 두려워집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그렇게 난 얼어붙었습니다.

그런 날 차가운 냉장고 속에 넣지 말아 주세요 내버려두지 말아주세요

얼어버린 나를 위해 따스한 담요를 덮어주세요 뜨겁게 품어주세요

나를 녹여주세요 나를 꺼내주세요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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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최윤화


철없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무조건적인 사랑 에 뻔뻔하게도 너무나 당연한 줄 알았어요 설령 내가 날카로울 때도 오히려 평소보다 멀쩡해서 상처난 줄 모르고 그렇게 무심했어요 그런데 이제 알아버렸어요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그렇게 차근차근 알게 되어버렸어요 모질게 어렸던 내 모습 이 다시금 떠오를 때마다 온종일 마음으로 울었어요 이 모습을 보인다면 먹먹한 마음 이 조금은 편안해질까, 어리광 한번 부려볼까 싶었는데 난 또 어리석었어요 그대에게 미안해서 울고있는 내 마음 을 보는 그대는 내게 상처받을 때보다 가슴이 더 넝마가 되어버린다는걸 미처 늦게 깨달았어요 참 바보 같은 자식인데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날 매일 안아줄까요 그만 어리석고 미안해도 미안해하지 않을게요 58


그러니 꼭 알아줘야해요

“엄마” 김지운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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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 엄마는 어디에

도착하는 택배 하나 밥, 반찬, 샴푸, 로션까지 한 보따리

냉장고를 채우고 화장실을 채우고 화장대를 채우고

내 공간을 채운다 나를 채운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는 비어있는 것들

빈 옆자리 공허한 마음

가만히 주위를 둘러본다 엄마가 채워준 나를 본다 엄마가 보인다

엄마는 여기에 나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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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 김현아


햇살 이 보인다. 청량한 나뭇잎 사이 를 파고들어 파란 그림자 를 남긴다. 아스팔트 바닥에도 나무가 피었다.

바람이 들린다. 함께 걷는 사람의 잇사이를 거닐어 따사로운 음성을 보낸다. 맞닿은 두 손에서 감정이 밀려온다.

지금 이대로, 영원을 빌어본다. 순간에게 바라건대, 지금처럼만 살아가자. 오늘의 조각들이, 산란하는 별가루들이 어여쁘게 맞물려, 별처럼 빛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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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길” 고국희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러 나간 잠깐의 외출 에서 공기에 섞인 여름의 가닥 을 알아차렸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름이 한껏 다가왔네요 올해도 역시나 여름이 찾아 오려나 봅니다 햇볕과 나무 가 이렇게나 싱그럽고 빛나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일까요 저는 그저 눈이 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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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가닥” 이승미


하나의 바람 이 코 끝을 스친다 지붕 밑 그림자 불빛 아래에서 남아있는 숯향이 살갗에 부딪힌다 초록빛 춤사위가 나를 에워싸며

웃음소리가 잠시 머물다 간다 소리 없이 앉아 바라보던 그네에 맨발로 차가운 조약돌을 밟는다 뭉개진 글자들이 귓가를 속삭이며

먼지 쌓인 창고에 햇살이 드리운다 잔잔한 공기 서툰 인사를 건네며 달콤한 얼음이 흙으로 스며든다 품 안에 들어찬 추억을 마주하며

숨과 함께 삼키던 맥주 한잔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나무 사이 내리막을 달리던 두 개의 페달 빛나던 나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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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최혜민


지구는 다양하고 재밌는 연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에서 아는 맛이 가장 무서운 것처럼 연기도 똑같다

그중 뜨끈한 연기 는 잠들어 있던 감각을 달콤하게 깨워 준다

맛있는 냄새 따뜻한 온도 정겨운 공기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자욱한 연기 는 나에게 곧 절정에 이르게 한다

변해가는 사회의 공기 차가워진 시선 들 잔상으로 남았던 연기들은 점차 사라져 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68


새로운 연기들 이 결합하고 해체하고 나눠지면서

“연기” 강지인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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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좋아하는 만큼 꾹꾹 눌러 담아 너를 적었다

하얀 종이에 너를 가득 적어냈다

온 마음을 꼬박 담아 적었다

크게 앓고 난 후 너를 지웠다

너를 너무 세게 눌러 써 연필 자국이 남았다

흰 종이에 이젠 너의 흔적이 다 남았다

깨끗하게 모두 지우고 싶어 네가 좋아 쓸 때보다 더 힘들게 지워냈다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고 종이만 너덜너덜 상했다

그런 종이가 너를 더 생각나게 해 까만 물감으로 칠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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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지 종이는 상했고 이제 아무것도 그릴 수 없게 까맣게 칠해졌는데도

“연필 자국” 이진아

아직도 너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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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게 걸려있는 그것은 항상 무엇인가 들고있다.

아래로 축 쳐져있고 한없이 흘러 내린 힘 하나 없는 무엇인가 를 올곧게 들고있다.

흔들리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다.

누가 너를 흔든다면 너는 흔들릴까 누가 너를 무너뜨린다면 너는 무너질까

그렇게 버텨라 온전히 받아내라 그렇게 꼿꼿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라

힘이 들 땐 내가 잠시 너의 무게를 덜어줄테니 그 모습 그대로 흔들리지 말아라 무너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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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걸이” 김지운


욕심에게 내가 이상하냐 물으면 맞다고 대답한다

반복되는 물음에도 똑같은 말만 대답한다

계단 위 조명만 방향없이 어질러진다

빛줄기가 우리 사이를 가로질러 갈 때

우리는 똑같은 감정을 들고 다른 곳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콘크리트 냄새에 파묻혀 아득해 질 때 쯤

계속 의문을 품으며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끝에서 욕심은 실소하며 휘청거리다 뻐걱삐걱대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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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한수민


지나간다 나의 하루들 이 그것을 나는 일상이라고 부른다 나의 일상이 아닌 우리의 일상은 어떤가 새로운지 특별한지 가장 보통인지

아침 8시 10분 힘겹게 눈을 뜬다 햇살 같은 너의 모습에 나는 이상을 찾아갈 용기를 얻는다

“오늘도 사랑스럽네.”

한번 더 울리는 알람에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다. 자고 있는 니가 깰까봐 서둘러 너의 옆에서 알람을 재웠다 나가기 전 작은 포옹에 나는 현실을 찾아갈 용기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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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한서현


보이지않는 수평선에 태양같은 너를 두고 온다

떠오르는 구름같은 추억들은 네 옆에 두고

노을빛 사랑이 깊은 바다 속에 잠기면

짙었던 마음을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물결처럼 흘러가게

수평선 끝에 너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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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바다” 배장민


어떻게 매번 잘하겠어 어떻게 매번 견디겠어

노를 젓고 안젓고는 네 몫이지만 바다를 주관하는 건 네 몫이 아니야

잘하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네가 너를 기뻐했으면 좋겠어

자주 무너지고 자주 넘어져도 자꾸 일어나려 애쓰는 너를 대견히 여겼으면 좋겠어

조금 슬퍼보이면 어때 조금 지쳐보이면 어때 너만 그런 게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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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유민재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그 가치를 모른다고 한다 어쩌면 잊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잊었기 때문에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건데 기억은 이기적이라서 사라져버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며 핑계를 댔었지

내 안에서 잊혀진 처음이라는 그 단어 하나 잊지 않겠다는 그 말 한마디 그때 봤던 그 사람 어딘가에 잘 있을까

새로운 걸 가지기보다 가지고 있는 걸 지키는 게 더 어렵단 걸 너무 늦게 알았지 잊혀진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큰 가방을 가져가야 할까

그 보관소에서는 폐기처분을 안 했으면 좋겠어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잊게 된다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순간조차 잃어버릴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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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 보관소” 이주희


어두운 밤 길가를 밝히는 수많은 달 너와 함께 걷는 골목길 헤어짐 끝에 마지막 별빛 그 빛 아래 선 우리 행복을 참는 네 눈동자 바람이 감은 네 목소리 재 없이 타버린 마음 억지스럽고 훈훈한 결말

창을 뚫으니 새어나온 차디찬 한숨 문을 여니 보이는 아득한 수평선 거울에 비친 비극적 영혼 들켜버린 애써 숨긴 진심

고속도로 갓길에 세운 좌표없는 희망 어렴풋이 짐작하는 하루살이의 하루 점점 곱게 문드러지는 또렷한 네 모습 놓치지 않으려 휘젓다 찾은 여전한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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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 김현아


모두는 눈앞에 단단히 버티고 있는 건반으로 빨간불이 되기 전 연주를 끝내야 하는 과업을 받았다

초록불이 켜짐과 동시에 카운트다운 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건반을 밟으면서 내는 요란한 소리 를 들으며 건반 밖에 내가 서있었다

이 신호등은 숫자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내 머릿속에도 악상은 분명히 있고 다른 이들도 각자 좋아하는 음악이 있을 텐데

연주를 시작한 사람들은 발아래에 있는 것이 건반이라는 사실보다 어디로 흐르는지도 모를 시간 때문에 본인들이 내고 있는 소음을 듣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걸까

나는 내 앞에 주어진 건반으로 86


천천히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음악을 즐기며 연주하고 싶은데 빨간불이 켜진다면 난 그대로 건반 안에서 죽게 될까

시간 속에서는 왜 아름다운 선율보다 부담감이 더 크게 들리는 걸까

그저 불협화음 속에서 음악을 찾아야 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걸까

아직도 나는 어른이 보호구역에 서있다 건반 맞은편이 보인다

“이 곳은 보호구역, 전방 1미터 앞 횡단보도입니다” 이주희

망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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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결에 쳐다본 햇빛 에 눈이 저절로 찡그려진다

온기를 머금은 따뜻하고 포근한 향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손으로 해를 가리고 올려다 본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쨍하다

넓고 넓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하늘 은 오늘도 기꺼이 해의 배경 이 되고 구름의 배경 이 된다

살랑거리는 초록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이른 오후의 그림 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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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오후” 김예원


인간과 별은 같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세상이 우주공간이고 내가 별 중에 하나 라면 전 이제 갓 산개성단을 벗어나서 우주여행을 시작하겠죠

구상성단에 놀러 가서 무릎을 베고 우주여행 얘기를 듣는 시간이 참 좋았는데 이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서 발걸음을 떼기가 어렵네요

저 하늘의 별도 반짝였던 추억들도 당신도

왜 빛나는 것들은 언젠가 빛을 잃을까요

우주 가이드에는 은하의 빛이 점차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고 쓰여있지만 그 당연한 일이 지금까지는 당연하지 않았으니까 이 어둠이 나는 더 무서워요

잊혀진다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지만 90


잊지 않겠다는 맹세 는 누구나 쉽게 했을 것이고 곧 나도 그렇게 하겠지요

별이 지게 되면 반짝임은 사라지지만 우주공간에 자신의 조각은 남기고 떠난대요 떠날 수 밖에 없다면 나에게도 무언가 남겨주세요 저는 그게 작별 인사였으면 좋겠어요

구상성단으로 가는 길을 잊지 않도록 제가 당신을 잊는 것이 너무나도

“이별” 이주희

어려워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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