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Amsterdam Historische Banden Boek (Korea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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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암스테르담 역사적 관계


한국 - 암스테르담 역사적 관계 이 책자는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Stadsarchief Amsterdam)가 암스테르담 인비지니스 (amsterdam inbusiness), 암스테르담 마케팅(Amsterdam marketing)과 협조하여 제작한 것이다. © 2013. 글: Marielle Hageman 번역: 김은주, Elmer Veldkamp 이 책자를 펴내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 Henry Oude Egberink/ fotografie.opzolder.com; Prof. Dr. Boudewijn Walraven, Universiteit Leiden; James Kim; 이준열사기념관 송창주 관장; 최영미, Kees Brouwer, Mijke Heldens, Zlatka Siljded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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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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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이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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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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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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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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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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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6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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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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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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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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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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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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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쿨투라

34

하이네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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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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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의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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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술원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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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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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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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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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년 쯤에 힐리스 요스텐 사흐만이 암스테르담에서 발간한 하멜의 ‘보고서’의 표지. 네덜란드 왕립 도서관 소장.


머리말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또래의 아이라면 누구나 네덜란드사람 헨드릭 하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1653년 8월 16일 암스테르담의 배 스페르웨르호가 제주도 해안에 서 난파된 이후, 하멜과 그 외의 네덜란드 선원 약 30명이 13년 넘게 한국에 살았다. 그래 서 그 당시의 한국사람들은 금발에다 콧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네덜란드 사람들을 알아가 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조국에 대한 이야기에도 열 심히 귀를 기울였다. 또한 네덜란드사람들도 점차 한국과 한국사람, 한국말과 한국문화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 헨드릭 하멜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17세기 중순에 처음으 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하멜의 ‘보고서’로 한국은 세계에 알려졌고, 유명한 암스테르담의 지도에 나오는 한국의 형태는 점점 현실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때 부터 이미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한국사람들과 무역하는 것 그 이상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와 같이 공유된 역사가 배경이 되어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과 네덜란드 사이에서 는 활발한 무역관계가 형성되었다. 네덜란드는 현재 한국에 수출하는 나라 중에 세번째 로 규모가 크고, 한국에 있는 네덜란드 회사는 40여개로 세번째로 큰 투자자이다. 반대 로는 한국에서 유럽으로 수출하는 10%가 네덜란드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특 히 암스테르담 수도권으로 오는 한국회사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1966년에 한국이 코 트라(KOTRA)의 첫 유럽 영업소 소재지로 암스테르담을 선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네덜란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작은 나라인데도 세계경제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 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이래 암스테르담과 서울은 서로 교류각서를 체결했다. 암스테르담 수도권은 유럽의 가장 중요한 교차점 중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이 지 역은 그 역할에 맞는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그 결과로 암 스테르담 주변에는 한국회사가 이미 약50개나 소재하고 있다. 한국의 국외 거주자 들은 암스테르담을 집처럼 편하게 느끼고, 암스테르담의 친절하고 여유있는 분위 기, 대중교통수단, 가게와 시장 그리고 그 외의 설비(예를 들어 한국인 학교와 한 국인 교회)를 칭찬하고 있다. 또한 암스테르담은 한국회사들에게 아낌없는 응원 과 격려를 보내고, 한국사람들을 따뜻하게 환영하는데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책자에서는 한국과 암스테르담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풍부한 과거를 조금이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이 공유된 과거는 현재의 관계를 형성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멋진 미래를 약속해 줄 것이다.

암스테르담 시장 Eberhard van der L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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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린스호텐(저자)의 ‘기행집(Itinerario)’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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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이(Core) 섬들 네덜란드 사람들은 한반도에 발을 딛기 전부터 이미 그 신비로운 나라가 궁금했었다. 그 나라에 대해서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6세기 말에 얀 호이헨 반 린스호텐(Jan Huyghen van Linschoten) 이 네덜란드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 대해서 쓴 글 에서 였다. 당시 배로 아시아로 나가는 사람들은 주로 포르투갈 사람들이었는데, 이 배 에 네덜란드사람들도 가끔씩 타게 되었다. 린스호텐은 고아(Goa:인도에 있는 포르투갈의 중심적 기지)의 대주교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거기에서 아시아에 대해 많은 공부 를 했다. 그가 수집하는 대부분의 정보는 디르크 헤리츠 폼프(Dirk Gerritsz Pomp)라는 또 한명의 네덜란드 사람한테서 오는 것이었다. 폼프는 1585년 쯤에 포르투갈의 배를 타 고 중국과 일본을 방문했었는데, 이런 이유로 “차이나 딕(Dirk China)”이라는 별명을 얻 었다. 여행 중에 일본섬 쓰시마 동서쪽에 있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린스호텐은 그의 아시아에 대한 지식을 두 권의 책으로 발표했다. 1595년에 암스테 르담에서 발간된 그의 “여행기” (Reysgheschrift)를 통해 네덜란드 사람들은 한반도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저자 는 일본 동서지방의 사람들이 “코오라이 (Cooray)”라는 지역의 사람들과 무역을 한 다고 했다. 거기에는 항구도 있고, 비바람 이 치지 않은 작은 만(灣)도 있다고 했다. 린스호텐은 믿을만한 소식통이 있어서, 많 은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그 땅 을 탐험해 본 적이 있거나, 배로 간 적이 있 는 뱃사람들한테 그 나라로 향하는 통로에 대해 자세한 정보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말도 타는 크 고 높은 섬(사실은 반도)이라고 했다. 포르 투갈 사람들은 이 섬을 코레이의 섬들(As Ilhas de Core)이라고 불렀지만, 린스호텐 은 이 큰 반도의 이름이 “차오시엔”, 즉 “조 선”이라고 했다. 북서쪽에는 작은 섬들이 있 는 작은 만(灣)이 있고, 항구가 있지만, 물 이 깊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과는 대조적으로, 일년 후에 발간된 여행일정(Itinerario)이라는 책 에서 린스호텐은 일본 북쪽에 있는 코레이

섬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그 땅이 어느 정도 넓은지, 어떤 사람들이 사 는지, 그리고 어떤 무역물품들을 사들일 수 있는지도 그에게는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판화가 테오도르 드 브레이(Theodor de Bry)가 1598년에 그린 린스호텐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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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네덜란드 사람들은 16세기 말부터 아시아를 항해하고 있었고, 한반도에도 관심이 있었다. 하지 만, 네덜란드 사람이 한반도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조선인이 먼저 네덜란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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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에서 1598년 사이의 임진왜란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일본사람들은 많은 조선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나가사키에 데리고 갔다. 1597년 이탈리아의 상인 프란체스 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는 다섯명 이나 아주 싸게 사들였다고 쓰고 있다. 그 는 그 중 한 명을 제자로 삼아 유럽에 데리 고 갔다. 카를레티는 이 조선인에게 “안토 니오 코레아”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을 지어 주고, 귀국하기 전에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 했다. 바로 이 안토니오 코레아가 네덜란드 를 방문한 첫번째 조선인이다. 1610년 이후 교황은 안토니오를 선교사로 한반도에 보냈 지만, 그는 조선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 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이탈리아에서 결혼하 고, 1626년에 그 곳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은 드 레이프(De Rijp)라는 암스테르담의 북 쪽에 있는 마을의 출신인 얀 얀스 벨테브레 이(J.J. Weltevree)였다. 그의 푸른 눈과 하 얀 얼굴, 그리고 한국 자료에 의하면 배까 지 내려오는 금발 수염 때문에 눈에 뛰는 사람이였는데도 조선에서의 생활을 잘 꾸 릴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말도 배우고, 조 선인 여성과 결혼도 하고, 슬하에 두 아이도 두었다. 조선인들은 그의 이름 “얀”을 조선 식으로 바꾸어 “박연”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조선인들은 특히 서양의 화기(화약 의 힘으로 탄알을 쏘는 병기)에 대한 지식 에 관심이 있어서, 박연은 화기를 만들고 대 포를 주조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게 되었 다. 그 외에는 일본, 중국출신의 난파된 선원 과 난민들을 감독하는 일 등도 맡게 되었다.

1627년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으로 조선 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세명은 본래 아우 벨켈크(Ouwerkerk)호라는 네덜란드 동인 도 회사의 배를 타고 암스테르담에서 출발 했는데, 대만으로 향하던 길에 빼앗은 중 국의 정크를 타고 항해하고 있었다. 그들 이 물을 길으러 한반도 육지에 올라간 사 이에, 중국사람들은 다시 정크의 지배권 을 잡고 세명을 놓아두고 떠나 버렸다. 조 선인들은 이 세명의 네덜란드 사람들을 생 포해서, 군대에 입대시키고, 조선에서 벗 어날 수 없게 했다. 약 십년 후에 그 중 의 두명은 만주와의 전투에서 전몰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네덜란드 사람

1653년에는 제주도에서 서양인 몇 명이 표 착되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박연이 보 내졌다. 그곳에서 박연은 17년 만에 네덜 란드말을 다시 듣게 되었는데, 어느 조선 인에 의하면 옷깃이 눈물로 흠뻑 젓었었다 고 한다. 박연은 네덜란드어를 오랫 동안 쓰 지 않았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네 덜란드어를 구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었다 고 한다. 박연은 남은인생을 조선에서 보 냈지만, 선원들은 나중에 네덜란드에서 그 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래서 그의 고향 인 마을 드 레이프의 대교회 옆에는 현재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1991년에는 서울에도 그것과 동일한 동상이 세워졌다.


드 레이프에 있는 웰트브레이의 동상(미술가 엘리 발투스(Elly Baltus)작). 사진: Henry Oude Egber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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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7세기에 조선과 무역하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 뿐이었다. 쓰시마 섬의 영주는 일본 정부 당국으로부터 조선과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해서, 가까이에 있는 부산항을 통 해 무역을 하고 있었다. 1609년부터 일본과 무역을 하고 있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 사의 임원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최대한 빨리 조선과 무역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일본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장 쟈크 스펙 스(Jacques Specx)는 1610년 3월에 후 추를 쓰시마로 보내어 거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시험해 봤다. 그러나, 조선의 엄격한 규칙과 규정도 있었을 뿐만아 니라, 쓰시마섬의 영주도 자신의 이익 을 위해 허락해 주지 않고 있었던 것 도 있어서, 이 일은 거의 무리에 가깝 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스펙스는 혹시 다른 방법으로 조 선의 실크와 가죽 그리고 약재 등을 얻을 수 있는지를 조사하 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하

고 말았다. 1610년 12월 18일에는 네덜란드 의 총독인 마우리츠(Maurits) 왕자가 일본 천황에게 편지를 보냈다. 네덜란드와 조선 의 거래를 틀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 이었지만, 그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동인 도 회사는 계속해서 노력했다. 네덜 란드가1620년대에 중국 해안 탐험 단을 준비할 때에는 한반도 해안 도 탐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1622 년에는 네덜란드의 배 “드 혼트 (De Hond)”가 일본으로 가는

암스테르담의 배는 세계 곳곳으로 무역을 하러 나갔다. 하지만 한국의 항구를 방문하지는 않았다. 1686년에 윌름 반 드 벨드(Willem van de Velde)가 그린 그림을 본따서 만든 1771년의 그림.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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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조선의 영해에 들어가 버렸는데, 이 것은 공식적으로는 항해의 실수 때문이었다 고 한다. 조선은 바로 36대 군함을 보내고, 온갖 무기를 동원해 네덜란드 사람들을 내 쫓았다. “드 혼트”의 선장은 그 후로 다른 배들에게도 조심하도록 경고했다. 그런데 도 1636년 탐험가 마테이스 콰스트(Matthijs Quast)는 코레이라는 나라를 알보라 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의 군함과 부 디치자, 바로 180도로 배를 돌려 떠났다. 그 다음해인 1637년에는 동인도 회사의 선 두들은 조선의 사절단이 일본 천황을 만나 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 히라도의 상 관장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조선인들 이 무엇을 가지고 왔었는지, 그리고 천황에 게 어떤 것들을 달라고 했었는지, 그들의 나 라가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 혹시 금광과 은

광이 있는지, 누구랑 무역을 하는지, 그리고 외국인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 해 물어봤다. 그런데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이상 조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난파한 핸드릭 하멜(Hendrik Hamel)이 쓴 조선에 대한 글이1668년에 세상에 알려지 게 되면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도 드디어 조선에 대한 정보가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 다. 동인도 회사의 선두들은 바로 “거기서 혹시 무역이 가능한 지”가 궁금했다. 일본에 서 알아본 결과, 조선인들은 주로 농업, 어 업을 하는 사람들로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 을 싫어 한다고 했다. 또한 네덜란드와 밀 접한 무역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과 중국 은 네덜란드가 조선에 진출하는 것을 달가 워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는 조 선과의 무역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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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하멜 1653년 8월 16일, 암스테르담의 배 스페르웨르(Sperwer)호는 동인도 회사를 위해 타 이완에서 일본으로 항해 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당시의 네덜란드어 이름은 퀠파 트 섬 (Quelpaerts Eiland)) 남쪽 바다의 암석에 부딪쳤다. 선원 64명 중 36명이 살아 남았고, 그 중 이 배의 회계사로 일하던 호르쿰(Gorinchem)시 출신의 헨드릭 하멜이 나중에 저술한 보고서를 통해 조선에서 어떻게 지냈는지가 알려졌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처음에는 본인들이 무인 도에 도착한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 나 갑자기 천 명 이상의 조선의 병사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난파된 선원들은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꼈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 었었다. 조선인들은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 하고, 도움을 주었다. 며칠 후 네덜란드 사 람들을 시내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제 주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말이 안 통해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한 두달 후에 황금색 수염을 기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1627 년부터 조선에 있었던 네덜란드 사람 박연 (벨트브레이)이었다. 그의 네덜란드어는 약 간 어색했지만, 통역자의 역할을 맡아 주었 다. 표류한 선원들은 드디어 “우리는 암스 테르담에서 온 네덜란드 사람이다”며 얼른 일본으로 떠나고 싶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 다. 하지만 곧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그냥 가 게 해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네덜란드 사람들을 한양으로 데리고 가 서, 왕의 호위병을 시켰다. 다행히 스페르 웨르호의 짐의 일부분을 다시 받을 수 있어 서, 그것을 팔아 집과 따뜻한 옷을 구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몇번이나 탈출하려고 했다. 그 중 두 명은1655년에 중국에서 온 사신(使臣)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은 투옥된지 얼마 안되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전라남도 강진의 병영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는 병영지사를 위해 일도 하고, 궁핍한 삶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도 하고, 외국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조선인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것으로 약간의 용돈도 벌었다. 식량난이 계속되자, 1663년에는 남은 22명의

요하네스 스티흐터가 1668년에 로테르담에서 발간한 하멜의 ‘보고서’에 나오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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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사람들을 세 곳으로 분산시켰다. 그 중 12명은 해안지역 좌수영으로 보내지고, 5명은 순천으로, 또 다른 5명은 남원으로 보내졌다. 그 후 13년이 지나서 하멜과 그 외 일곱명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배를 구해 일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나가사키의 지사는 그들을 해방시키기 전에 많은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네덜란드의 무역 배를 놓치고, 일년 후 1667년 10 월이 되어서야 일본을 떠날 수 있었다. 그

당시 조선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 사람은 총 여덟 명이였는데, 일본의 중재로 그 중 일곱명은 네덜란드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하지 않은 한명은 얀 크라스 반 도르트 (Jan Claes van Dort) 라고 사람이었는데 조선을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조선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그는 더이상 기독교도도 네덜란드 사람도 아니게 되었다고 했다. 하멜과 그 외의 네덜란드사람들이 조선을 떠나고 난 후에도, 조선은 이백년 넘게 외국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땅이었다.

제주도 남쪽 해안 서귀포에는 현재 스페르웨르호의 모형이 있는데, 하멜과 네덜란드에 대한 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거스 히딩크 전시실도 있다. 사진: 라디오 네덜란드 세계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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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보고서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서양의 서적으로는 처음으로 조선을 다룬 책이 발간되었다. 회계 사 핸드릭 하멜이 아직 일본에 있을 때 동인도 회사가 그에게 맡긴 보고서이며, 난파한 스 페르웨르호의 다른 선원들과 함께 십삼년 동안 조선에서 경험한 것들을 적은 것이었다. 하 멜은 이렇게 동인도 회사의 지침에 맞추어, 먼 나라의 정보수집을 도와 줬다. 하멜은 본인 이 직접 겪은 모험과,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자세한 기술도 첨부했다. 이 보고서는 아시아 을 관할하는 총독에게 제출되었다. 그 후 복사본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인도 회사의 임원 들에게 보내졌고, 1668년에 자료로 보관되었다. 그 사이 몇 개의 출판사가 이 원고를 손 에 넣어, 하멜이 네덜란드에 귀국하기도 전 인 1668년에 그의 “표류기”를 발간했다. 그 중 가장 빨리 움직인 것은 암스테르 담의 인쇄업자 야콥 반 벨센(Jacob van Velsen) 이었다. 그 해에 빠른 속도로 1쇄, 2쇄본을 출판했고,그 책은 그림도 없고 조 선에 대한 기술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 만, 서둘러 책을 펴 낸 것은 정확한 판단이 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테르담 의 출판인 요하네스 스티흐터(Johannes Stichter)은 조선의 기술을 포함한 버전을 출판했다. 표지와 본문에는 여덟 개의 목 판화도 넣었다. 하지만, 조선의 그림이라기 보다는 유럽적인 인상이 강했다. 일년 후, 암 스테르담의 유명한 인쇄 업자 힐리스 요스텐 사 흐만(Gillis Joosten Saeghman) 은 “표류기” 를 3판까지 발간했다. 사 흐만은 인기 있는 여행기 를 재판하는 것으로 성공

한 사람이었다. 하멜의 “표류기”에 이미 가 지고 있었던 동판화를 삽입하는 것으로 이 야기를 좀더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그런 데 사흐만은 동판화에 코끼리 그림이나 악 어 그림까지 넣었고, 여기에 맞추어 본문 도 약간 편집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하멜 에 대한 불신감을 품게 했고, 20세기가 되어 하멜의 원고를 다시 확인해 보고서야 그 의심을 풀 수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하멜의 조선 이야기 에 관심이 많았다.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며, 학자 였던 니코 라스 위츤 (Nicolaas Witsen)은 스페르웨르 호의 두 선 원을 직접 만났고, 그 가 1692 년에 쓴 “ 북동 오랑 캐 (Noord en Oost Tartarye)” 라는 책에

2003년은 ‘하멜의 해’로, 하멜이 난파되어 한국에 표류한 지 350년이 되는 해였다. 하멜과 네덜란드에 대한 (동화)책이 몇 권 발간되었다. 사진: 라디오 네덜란드 세계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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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대한 내용도 다루었다. 여기에 조 선어 단어 리스트도 첨부했다. 이 두 책은 수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에서의 조선의 인 상을 결정했다. 하멜의 보고서는 불어, 독 어, 영어로 번역되어, 조선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세기까지는 하멜의 보 고서가 조선에 대한 유일한 유럽의 책이 었다. 현재 하멜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

다. 그의 책은 1930년대에 유명한 역사학 자 이병도가 불어판과 영어판을 바탕으로 처음으로 한국어로 번역했다. 번역한 내용 은 한국문화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 는 “진단학보”에 발표되었다. 2003년에 는 처음으로 하멜의 원고를 바탕으로 한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다. 그 외에는 하멜 의 모험에 대한 텔레비전 방송이나 동화책 등이 있다.

사흐만은 자신이 발간한 하멜의 ‘보고서’에 코끼리와 악어의 삽화를 넣었다. 네덜란드 왕립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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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은 실로 세계적인 도시였다. 암스테르담의 배는 동서남북으로 항해 해 나갔고, 외국의 물건 뿐만 아니라 곳곳의 지식도 가지고 돌아왔다. 암스테르담은 이렇 게 해서 지도 제작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만든 지도나 지 구본, 또는 지도책을 사면, 최신 정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품질이 아주 좋았다. 유럽의 지도 중에 ‘코레아’라고 나와 있는 가장 오래 된 예는 페트루스 플란시우스(Petrus Plancius)가 1594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제작한 세계지도이다. 이전에도 한반도가 나와 있는 지도가 두개나 있었지만, 아직 나라이름이 지어진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7, 18세기부터 조 선이 지도에 점점 자세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선왕국이 섬인지 반도인지 암스 테르담의 지도 제작자들에게 명확하지 않았 다. 17세기초에는 대부분 프란다스의 영향 력 있는 지도 제작자 아브라함 오르텔리우 스(Abraham Ortelius)를 따랐는데, 그가 세 계의 극장(Theatrum Orbis Terrarum)이라 는 지도책에서 묘사한 조선은 고드름 모양으 로 보이는 길고 좁은 섬이었다. 이 그림은 포 르투갈 선교사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

다. 암스테르담의 지도 제작 창립자인 프란다 스 지도 제작자 요도쿠스 혼디우스(Jodocus Hondius)는 17세기 초에 한국을 비슷하게 묘사했는데 정말 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는 주를 붙였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가장 중요한 지도 제 작자는 윌렘 얀스 블라우(Willem Jansz Blaeu)와 그의 아들 요안이었다. 요안 블라 우(Joan Blaeu)는 1655년에 유럽에서는 처

1606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요도크스 혼디우스의 지도에는 한국은 길다란 모양으로 나와 있다. 혼디우스는 한국이 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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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으로 중국의 지도책(이탈리아의 예수회 수 사 마르티노 말 티니 (Martino Martini)의 신 중국 지도책 (Novus Atlas Sinensis))을 출판했는데, 그 안에는 조선의 지도도 포함되 어 있었다. 말 티니는 중국에 서 선교사를 하 다가 1653년 말에 암스테르 담으로 왔는데, 동인도 회사에 그가 가지고 있 는 정보를 제공 하는 대신 100 레리그스달더( 당시의 주화)를 받았다. 그의 지도는 중국 자 료를 가지고 만 들어 진 것이어 서, 그 전의 지 도보다 훨씬 실 제 상황에 가까 웠다. 조선은 더 넓게 나와 있었고 남쪽에는 풍마섬, 바로 제 주도가 있었다. 1662년에 요안은 말티니의 지도를 역사상 제일 큰 지도책 아틀라스 마 요르(Atlas Maior)에 포함시켰다. 그 후로 암 스테르담의 지도 제작자들은 대부분 말티니 의 조선지도를 기준으로 했다.

난파된 선원 하멜의 보고서 덕분에, 1668년 에는 조선의 새로운 정보가 암스테르담으 로 들어와 지 도 제작자들에 게도 가게 되었 다. 그래서 지 도상의 조선은 점점 넓게 묘 사되기 시작했 다. 그런데 제 주도에 대해서 는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 도 있었다. 섬 의 이름이 가 끔은 퀠파르트 로 나와있기도 하고, 풍마로 나오기도 해서, 두 섬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 는 지도 제작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프 랑스의 그라비 어 화가 장 바 티스트 부르기 뇽 당빌(Jean Baptiste Bourgignon d’Anville)은 1737년 에 헤이그에서 한국이 그나마 잘 묘사된 지 도를 출판했다. 그도 아마 한국의 자료를 사 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 는 한국이 지도에 나타난 것은 19세기가 되 어서 였다.

1737년 헤이그에서 발간된 프랑스 조각공 장 바티스트 부르기뇽 당빌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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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년에 처음으로 요안 블라우가 ‘신중국지도책’에 발간한 마르티노 마르티니의 지도. ‘아틀라스 마요르 (Atlas Maior)’에서 (제2판, 16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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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독일사람 필리프 프란츠 본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는 1823년부터 1829년까 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의사로 일본에서 일했다. 시볼트는 일본을 연구했지만, 부산항 에 무역하러 다니는 일본사람들한테 정보를 얻기도 하고, 한국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 기도 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낚싯배와 작은 배로 떠다니다, 뱃길에서 벗어 나서 일본해안에 표류되는 한국사람들도 매 년 있었다. 그 럴때는 바람 이 다시 방향 을 바꿀 때까 지, 한국교류 의 책임자인 쓰시마의 지 사가 설립한 “한국 집”이 란 곳에 머물 렀다. 그곳에 서 얼마 떨어 지지 않은 나 가사키 해안 에 데지마 섬 의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는데, 시볼트가 한국사람들을 관 찰하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한국사람들 은 집에 돌아 갈 수 있을 때까지 몇 달씩 기 다려야 할 때가 많아서, 그 사이에 배도 수리 하고, 여러 가지 수공도 하고, 장기와 바둑도 두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가사키에 한국사람 들이 들어올 때마다 시볼트는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고 한국사람들을 만나서 한국에 대 해 알아보려고 했다. 그가 나중에 쓴 글을 보 면, 한국은 유럽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나 라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828년 3월 17일에 시볼트는 몇 명의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사람들의 초상

화와 그들의 옷이나 생활용품, 배등을 그리 기 위해 두 명의 화가를 데리고 갔었다. 시 볼트가 그들의 나라와 문화 에 대해 최대 한 많은 정보 를 수집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는 36명의 난파한 한국사 람들 중에서 가장 교양있는 사람들을 골라 서 만나게 했 다. 상인 두 명 과 한문, 국어, 유교, 윤리를 가르치는 선생 님 한 명, 그리고 행상인 한 명, 선장 한 명이 었다. 그 외에도 시볼트가 옷의 다양함을 확 인할 수 있도록 선원과 배의 도우미도 왔었 다. 시볼트는 감사의 표시로 한국사람들에게 천 몇 두루마리와 술 몇 병을 선물했다. 한 국사람들도 답례로 그에게 얼마 없었던 소유 품을 주었는데, 그 중에는 작은 상도 있었고, 도자기와 족자 같은 것도 있었다. 또한 그들 은 한 명 씩 옷이나 보석류등도 주고, 한국 어, 중국어로 글을 써 주기도 했다. 시볼트에 게는 그들의 지식과 세련된 예의가 인상적이 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쓰고 있었던 얼 굴만 나오는 털모자도 마음에 들었다. 날씨 가 추운 지역에서는 아주 유용하고, 다른 곳

1832년에서 1852년 사이에 레이던에서 발간된 시볼트의 일본과 그 주변나라를 다룬 ‘니뽄’에 실린 한국 어부가족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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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배울 만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시볼트는 네덜란드의 대학도시 레이던으로 귀국하고 나서, 일본과 그 주변의 나라들을 다룬 “니뽄(Nippon)”이라는 대작에서도 그 가 일본식으로 코오라이(Kooraï)라고 부르 며 한국에 대해 수집했던 정보를 포함시켰 다. 한국과 한국사람들의 생활습관, 언어와

글에 455개의 한국 단어를 첨부했다. 이 책 은 레이던에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 키게 했고, 현재까지 레이던대학에 한국학과 가 존재하고 있다. 시볼트가 네덜란드에 가지 고 돌아온 한국 물건들 중에 일부분은 현재 레이던시의 민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박물관의 한국 컬렉션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칼 후베르 드 빌뉴브(Carl Hubert de Villeneuve)가 나가사키에서 그린 그림을 본따서 만든 한국 상인(商人)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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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이 1885년에 봤다고 생각되는 암스테르담의 담광장과 궁전 (J.M.A. 리케 작).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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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광객 한국이 1876년에 서양인들에게 문을 열어 준 후부터는 개혁시대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 다. 그 개혁자 중 한 명이 유길준이었다. 1881년 그의 나이 25살에 한국사람으로서는 처음 으로 일본에 현대 교육을 받으러 간 사람 중의 하나였다. 2년 후에는 미국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는데, 미국에서 수학을 공부하려고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다시 조국으로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유럽을 여행했다. 여행 중인 1885년에는 암스테르담과 그 외 몇 군데 도시를 방문했다. 유길준은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한국관광객이 되었다. 유길준은 한국에 돌아가자 마자, 갑신정변 에 지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자택에 연 금되었다. 이런 상황에 처이게 된 그는 서 양에서 경험한 일과 그곳에서 관찰한 유용 한 정보를 “서유견문”이라는 책에 적었다. 그가 쓴 문장은 아주 현대적이었다. 그 당 시에 널리 쓰여지고 있던 한문 대신 국한 문혼용체를 사용했다. 이 책 안에서 유길준은 네덜란드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네덜 란드 사람들은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네덜 란드사람들은 청결한 것을 좋아하고, 길거 리와 집 청소를 열심히 한다고 썼다. 또한, 운하에 떠다니는 쓰레기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외국사람들 안에서는 네덜란 드 사람들의 “청소열광”이 가끔 화제가 되 고 있다고 했다. 암스테르담에 대해서는 중요한 항구도시며, 네덜란드의 가장 큰 도시라고 했다.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돌 을 다른 곳에서 가지고 와야 하는데도 집 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길도 다 포장 되어 있었던 것에 대해 유길준은 놀라움 을 표현했다. 강이 도시를 종횡하고 있다 고 썼는데, 이것은 아마 암스테르담의 운 하를 말한 것 같다. 이 운하를 건너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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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삼백 개가 넘고, 배가 지나갈 수 있 게 열리기도 한다고 했다. 중심지에 있는 궁전(17세기에 암스테르담 의 시청으로 지어짐)도 유길준의 인상에 남았다. ‘하얀 돌로 된 깨끗하고, 훌륭한 건물이다. 안이 금과 보석으로 빛나고 있 는 것도 아니었는데, 창문은 빛이 나고 방 은 깨끗해서, 청결의 아름다움이 최고에 달했다. 어떤 방은 부드러운 색깔의 페인 트로 칠해지고, 또 다른 방은 데생이 들어 있는 실크로 안감을 댄 것이었다.’ 그리고 유길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스테르담 의 다이아몬드 가공 작업도 빠짐 없이 언 급했다. ‘현대 유럽의 모든 나라가 다이아 몬드를 원하지만, 이 아름다운 보석을 다 룰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 모두가 이 도시 에 가공을 부탁하러 온다.’ 1894에서 1895년까지 유길준은 한국을 근대화 시키려고 하는 ‘친일’ 정부를 위해 서 일했다. 이 시기에 그의 저서를 출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얼마 안되 어 망했고, 권력이동때문에 일본으로 망명 해야 했다. 1907년에 특사를 받아 귀국했 고, 1910년 이후로는 일본 합병 반대운동 의 인솔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한국의 개혁가이자 여행자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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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추억 19세기 말부터 한국으로 향하는 서양인들이 점점 늘어났다. 네덜란드의 잡지 “지구와 민 족 (De Aarde en haar Volken) ”은 사진이 많이 들어 있고, 여행자와 탐험하는 과학자들 의 이야기가 가득 들어 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폐쇄된 나라로 세계의 다른 문화의 영향 을 전혀 받지 않고 있었던 한국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비로운 나라였고, 잡지에서 자주 주 목을 받았다. 이 잡지에서는 여성 여행자들의 이야기도 만나 볼 수 있었다.

1907년 ‘지구와 민족’에 실린 필리프손 라더스마(J. Phillipson-Radersma)의 논문 ‘한국의 여성’에 수록된 한국여성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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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귀족 출신의 본 슈미트 아우프 알 텐슈타트 (A. von Schmidt auf Altenstadt) 여사는 1904년에 ‘한국과 중국 여행의 추억’ 을 “지구와 민족”에 발표했다. 또 한명의 네 덜란드 친구와 함께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건너가, 한국을 횡단하고 서울에 갔다가 오 는 여행 중에 신기한 일들이 아주 많았다. 예 를 들어 한국의 식사습관(상어고기가 진미) 과 담뱃대의 인기가 놀라웠다. “담뱃대가 없 는 남자는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이다. 이 생활용품은 길이가 20센치에서 1미 터정도이며,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옷의 어 딘가에서 삐져나오고 있다”고 썼다. 흙과 동 그란 돌로만 지어진 한국의 집도 그녀를 깜 짝 놀라게 했다. “이런 집은 두 부분으로 나 누어져 있다. 각 부분은 몇 개의 방이 있는 데, 한 방의 면적은 겨우 2평방 미터정도이 다. 그런데,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 워낙 많 아서 한국에서는 잠을 자는데 도대체 잠자리 가 얼만큼 작아도 되는지 해결되지 않은 의 문이다.” 1907년에는 필리프손 라더스마(J. Philipson-Radersma)부인이 그때까지 많 이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의 여성’에 대한 글을 “지구와 민족”에 발표했다: “그들의 생 활이 바깥 세상과 차 단되어 있는 것은 완벽 하게 지금까지의 한반 도와 같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 이 주장한 것 처럼 한국 사람들이 자기 부인에 게 함부로 대한다는 뜻 은 아니라고 했다. “그 들은 이와는 반대로 부

인에게 보기 드물 정도로 배려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 특히 임신을 했을 때, 여성을 다 음 세대의 어머니로서 충분히 평가하고 있 다”고 썼다. 영국 작가 루이사 조단 밀른 (Louisa Jordan Miln) 여사는 그녀의 저서 “이상 한 코리아”(Quaint Korea)에서 한국여성 과 외부 세상과의 분리에 대해 한 장을 썼 다. 이 책은 1904년에 신문기자 사무엘 칼프 (Samuel Kalff)가 번역해서 암스테르담에서 “폐쇄된 나라 한국”(Korea, het ‘Gesloten Rijk’)으로 출판됐다. 칼프는 이 책은 특히 그 당시를 설명해 주는 아주 의미 있는 책이 라고 설명했다.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 쟁은 요즘 매일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사 람들은 한국이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인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큰 역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안에서의 한 국의 역할을 생각하면, 한국에 상당히 오래 있었던 이 영국 작가의 저서는 확실히 현실 적인 가치가 있다.” 칼프가 여기서 언급한 전 쟁은 한국이 마지막에 희생된 러일전쟁이다. 칼프가 1908년에 “지구와 민족”에 번역해서 발표한 ‘한국의 철도여행’을 봐도, 한국은 시 대가 바뀌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은 현대화되어 가 는 중에 있었고, 철도공 사는 그 작업 중의 하나 였다. 하지만 안타깝게 도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행객은 철도길 곳곳의 땅이 꺼져, 2주일이나 늣게 화물열차를 타고서 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 었고 했다.

‘지구와 민족’은 1865년에서 1940년까지 출판되었는데, 엑조틱한 나라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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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기념관 1907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목적은 세계평화를 이루 는데 공헌하는 것이었다. 비서양의 나라로서 유일하게 참석한 일본은 한국이 이 회의 에 초대 받지 못 하도록 했다. 2년 전에 일본은 한국에게 을사보호조약에 서명하게 했 고, 한국은 그 이후로 독립된 외교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왕은 세명의 특사단을 헤이그로 보냈다. 그들의 역할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불법적으로 점 령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 특사단 세 명은 모두 이씨 성이었 다: 리더인 이위종, 이상설, 그리고 재판장인 이준. 그들은1907년 두 달에 걸쳐서 기차 로 러시아에서 헤이그로 왔는데, 6월 말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만국평화회의 는 이미 2주일 전부터 개최중이었다. 한국 특사단은 회의 입장을 거부 당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선언문을 발표 했고, 매일 평화회의를 보도하고 있었던 평 화회의신문 (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은 그 이후 몇 주 동안 한국의 특사와 그들의 임무에 대해 주목했다. 게다 가 이 신문은 한국사람들이 본인들의 이야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 사진: Mijke Held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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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할 수 있도록 모임을 개최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몰려왔다. 그 덕분에 한국 특사단은 국제사회에 자신 들의 조국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릴 수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동감했지만, 공식적으 로 반응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 정부


는 고종을 폐위 시켰다. 아들인 준종이 즉위 하자 마자, 세 명의 특사가 한국에 돌아오면 처벌하라고 했다. 이로부터 삼년이 지나, 한 국은 완전히 일본에 ‘합병’되었다. 한국특사단은 헤이그의 와헨스트라트 (Wagenstraat, 거리의 명칭)에 있는 호텔 드 용(Hotel De Jong)에서 묵었다. 거기서 7월 14일에 갑자기 이준이 사망했다. 네덜란 드 신문에서는 뺨의 농양이 사망의 원인이었 다고 알려졌고, 일본신문에서는 일본의 스파 이어서 살해당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런데 특 사단의 리더인 이위종은 이준은 한국의 불 행한 운명을 우려해서 죽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계속 살고 싶지 않다며 아무것 도 먹지 않은채 벌써 며칠을 보냈다. 이위종

에 의하면 이준의 마지막 말은 “우리나라를 도와달라. 일본인들이 우리를 짓밟고 있다.” 였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에게 이준은 순국열 사가 되었다. 이준의 무덤은 처음에는 헤이 그에 있었는데, 1963년에 유골을 한국으로 옮겨 장엄하게 이장되었다. 이준이 죽은 옛 호텔 드 용의 건물에는 현재 이준 열사 기념관이 있다. 1995년에 한국의 사업가 이기항과 그의 부인 송창주가 설립 한 것으로, 이 기념관은 이준 열사와 평화에 바치는 것이며, 이준열사가 직접 쓴 문서와 그 당시의 신문기사가 전시되어 있다. 2007 년에는 한국사람들이 이준열사를 기념하여, 그가 백년 전에 걸었다고 생각되는 역에서 호텔까지의 길을 걸었다.

1907년에 네덜란드를 방문한 한국 사절단 세명: 이준, 이상설, 그리고 이위종. 사진: Wereldkroniek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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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북위 38도를 경계선 으로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국의 관할 하에 두어졌다. 본래의 계획은 남북을 다시 통합시켜 하나의 민주주의적인 나라로 만드는 것 이었다. 그러나 1950년에 북한의 공산주의 정부는 한국까지 정복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군대가 남쪽으로 쳐 들어왔는데, 네덜란드는 동맹국 으로 한국의 편에 섰다. 미국의 주도 하에 UN군이 중재을 위해 한국 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처음에는 군 함만 보냈다. 그런데 한국에 직접 가서 도와 주고 싶다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주네덜란드

미국대사관에 연락을 했다. 그래서 8월 초 암 스테르담에서는 한국을 위한 의용대 설립을 목적으로 사립위원회가 창립되었다. 당시의 ‘ 드 테이트(시간) ’라는 신문은 “이 위원회에 는 이미 수백명의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하러 가려고 미국대사관에 왔고, 네덜란드 주관의 군대(네덜란드군)로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수 천명이 될 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결국 네덜란드의 총리 윌름 드레이스(Willem Drees)는 미국의 자극을 받아 육군을 한국 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군사임무의 참 가가 임의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8월에는 북한의 침략을 멈추고 싶어

부산 당곡 평야에 있는 유엔의 묘지. 여기에는 117명의 네덜란드 군인들의 묘가 있다. 사진: Kyle Lude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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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보란티어 참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신청자가 몇 명 밖에 안 될 줄 알았지만 약 2000명이 신청했다. 그 중 건강검진을 통과 한 약 600명이 육군의 특수전 부대로써 한 국전쟁을 위해 설립된 유엔 네덜란드 참전부 대(Nederlands Detachement Verenigde Naties)의 구성원이 되었다. 첫 부대는 636 명의 네덜란드 사람으로, 1950년 10월 26일 에 주더크루스호(Zuiderkruis)를 타고 한국 으로 출발했다. 이 배는 마리누스 덴 아우덴 중령(Marinus den Ouden)의 지휘하에 있었 다. 그 때는 미군이 이 미 북한군 을 많이 후 퇴시킨 후 여서, 네덜 란드 사람 들은 전쟁 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었 다. 하지만 때마침 10 월에 중국 은 북한을 도와 주려 고 수십만 명의 군인 을 투입했 고, 네덜란 드 군인들은 11월말에 부산에 도착하자 마자 전선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참전하게 된 가장 격한 전투는 원주, 인제, 그리고 특히 횡성전투였

다. 1951년 2월 12일 밤에는 한국군인으로 변장한 중국군인들이 네덜란드의 전투사령 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한국군인으로 위장한 그들은 일단 네덜란드 군인들에게 탄약을 빌 린 후, 그 탄약으로 네덜란드 군인들을 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밖에서는 다른 중국군인들 이 박격포로 공격해 왔다. 이 공격으로 열 다 섯 명의 네덜란드 군인이 죽었는데, 그 중에 는 덴 아우덴중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군인은 총 5000여 명에 이른다. 그 중 122명이 전사하고 (지금 까지 네덜 란드가 참 전한 평화 임무 중 가 장 많은 사 망자), 3명 이 행방불 명되었다. 부산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에 서 전사한 117명의 네 덜란드 군 인들의 무 덤이 있다. 1953년 7 월 27일에 는 휴전 협 정이 체결되어, 1954년 말에는 살아남은 모 든 네덜란드 군인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1961년에 한국과 네덜란드는 공 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네덜란드는 여전히 한국의 동맹국이다.

1951년 8월 22일, 스히폴 암스테르담 국제공항에 도착한 한국 참전부대의 네덜란드 군인들. 사진: Ben van Meerendonk / Algemeen Hollands Fotopersbureau. 국제사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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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판지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암스테 르담의 종이 도매회사 프로스트 엔 브란트 (Proost en Brandt)는 한국과 무역할 기회 를 찾기 시작했다. 프로스트 엔 브란트는 18세기에는 주로 성경, 기도문 그리고 경 전문서 등을 다루는 출판업으로 시작했는 데, 그 사이에 종이, 판지, 알루미늄 호일 등의 현대적인 도매회사, 공장으로 성장했 다. 암스테르담의 중심지에 있는 작은 사무 실에서 프로스트 엔 브란트는 유럽의 중요 한 종이 제조자들과 접촉하며, 세계의 곳 곳에 종이를 수출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이 암스테르담 회사는 성장중인 한국의 시 장을 보고, 수출확장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프 로스트 엔 브란트와 여러 한국회사와의 서 신은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에 보관되 어 있다. 1955년에는 서울의 한국연합무역상사 (Korea United Trading Corporation)가 먼 저 프로스트 엔 브란트에 연락을 해서, 한국 의 대표회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했 다. 이 한국회사는 주로 신문과 출판물을 만 드는 종이에 관심이 있었다. 그 당시의 프로 스트 엔 브란트는 종이를 부산으로 밖에 배 달할 수 없었다. 동해안에 있는 인천으로 가 는 유럽의 운반회사가 아직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스트 엔 브란트는 그 해에 서울의 또 다른 회사, 즉 안중린 엔트프 라이징사(Aan Chung Lin Enterprising Co.)한테 연락을 했다. 주소는 네덜란드 무역정보국한테서 받았다. 한국회사로 여 러 가지 종이 수입에 관심이 있는 회사라 는 정보도 받았다. 프로스트 엔 브란트는 이와 같은 한국 연락책을 통해 경쟁회사 에게 이기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좋은 무역량을 키워갈 수 있도 록, 한국회사에서 경쟁회사의 활동과 가 격에 대한 정보를 늘 찾고 있었다. 1958년에는 서울의 남성인더스트리얼사 (Nam Sung Industrial Co. Ltd)에서 일 하는 한국사람 두명이 암스테르담을 방문 했다. 그들은 프로스트 엔 브란트의 사무 실이 있는 루스란트(Rusland)에서 얼마 안 먼 고급호텔 둘렌(Doelen Hotel)에 머 물렀다. 교섭 결과, 프로스트 엔 브란트는 남성인더스트리얼사를 한국의 독점 대표 로 임명했다. 이 회사의 임무는 수입 가능

뉴어 둘렌거리(Nieuwe Doelenstraat)에 있는 둘렌 호텔 (1958년). 프로스트 엔 브란트와 교섭하러 온 남성인더스트리얼사의 대표 두 명이 여기에 묵었다. 사진: ANP.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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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쟁회사의 가격 (일본, 중국, 그 외 나 라의 회사 포함), 그 외 두 회사의 협조와 한 국에서의 종이, 판지 판매에 공헌할 수 있는 정보를 암스테르담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프 로스트 엔 브란트가 한국시장을 개척하고 싶은 마음은 이익의 폭이 아주 작더라도 반 드시 하겠다고 각오할 만큼 컸다. 이렇게 해서 암스테르담 사람들이 17세기부

터 목표로 해 왔던 한국과의 무역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고 도 경제 성장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 때 부터 한국에 투자하는 네덜란드 회사는 점 점 많아졌고, 현재 한국 지점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회사는 약40개 정도이다. 이 중에 는 기술업과 금융업 관계가 많고, 한국시장 에 진입하고 싶어하는 네덜란드 사람들도 여 전히 많다.

1958에서 1959년 사이 암스테르담 종이 수출회사 프로스트 엔 브란트와 한국의 남성 인더스트리얼사 사이에 주고 받은 서신.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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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쿨투라 암스테르담 쉘링크 음대(Sweelinck Conservatorium)에서 강의하고 있는 네 덜란드의 유명한 작곡가 톤 드 레이우(Ton de Leeuw)는 비서양 음악에 관심이 많았 다. 그래서 “뮤직쿨투라”라는 동양과 서양 이 음악으로 만나는 행사를 만들고 개최했 다. 제1회 뮤직쿨투라는 1974년 10월 20 일에서 11월 16일까지 개최되었는데, 한 국을 배경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음악도 테마였다. 이 행사는 에두아드 반 베이넘 (Eduard van Beinum)재단의 주최로 치 루어졌다. 이 재단은 1959년에 고인이 된 암스테르담의 지휘자 반 베이넘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반 베이넘 지휘자 의 음악은 세계 곳곳의 음악가가 그의 음 악을 듣고, 서로 배우기를 원했을 만큼 유

명주실로 된 현이 12개인 가야금을 연주하는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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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다. 4주 동안 브뢰켈렌시(Breukelen) 근처에 있는 쾌크호벤 (Queekhoven aan de Vecht)이라는 협회의 사유지에서 지내 면서, 동서양의 음악가, 작곡가, 음악학자 들이 모여서 각각의 나라가 음악에 어떻게 접촉하는지, 그리고 음악을 어떻게 경험하 는지를 발견해 갔다.


여기에서는 음악에 대한 설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연주해서 보여주는 등 이론과 실습이 결합된 장이었다. 한국에 대해서는 레이던 대학교 한국학과 를 창립한 한국학 연구자 흐리츠 훠스(Frits Vos)교수가 한국문화 일반을 소개하는 강 의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재미 교포 작곡 가이자 음악학자인 도날드 서(Donald Sur) 교수가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강의했다. 서 교수는 모든 예술 형태 중에 한국사람들이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많이 드러내는 것이 음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선 왕조 의 아악에 대해 광범위한 설명을 했다. 이 강의에서 음악가 황병기의 부인은 옛날에는 왕 앞에서 밖에 출 수 없었던, 엄숙하고 천 천히 진행되는 춤을 보여 주었다. 남편은 반 주를 맡았다. 다음에는 황병기 자신이 강의를 했다. 황병

기는 그 당시에도 지금도 한국에서 가야금 의 일인자이고, 한국 전통 음악인 산조의 권위있는 작곡가이다. 황병기가 뮤직쿨투라 의 무대에 올라, 서양의 음악가들과 지식교 환을 했다는것은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 가 되었다. 특히 그는 한국 민속음악과 산조 그리고 거문고, 가야금과 같은 한국 악기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음악의 녹음도 들려 주 고, 강의가 끝난 후에는 직접 가야금 산조 연주도 해 주었다. 마지막에는 한국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 자인 윤이상의 강의가 있었다. 그 때 그는 이미 독일에 살고 있었는데, 평생 조국을 위 해 노력하는 사람어었다. 최근에는 그의 이 름을 딴 국제음악경연대회가 행해지고 있 다. 뮤직쿨투라에서는 자신이 작곡한 음악 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 행사의 테마에 잘 맞추어 한국 전통음악의 기술과 서양 아방 가르드 음악의 요소를 잘 결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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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켄 1981년 12월 8일 한국사람들은 처음으로 하이네켄 맥주와 만났다. 암스테르담의 하 이네켄 맥주양조장은 1863년에 창립되어 100년 남짓되는 사이에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 하이네 켄 맥주를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하 이네켄은 한국에도 맥주를 수출하고 싶었 다. 당시의 사원 잡지(Vers van ‘t Vat)에 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리회사에서 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오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활발히 발전하고 있는 아주 현대적인 나라 이기 때문이다. 맥주 시장도 계속해서 발 전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급성장을 보여주 고 있다.”

한국사람들이 하이네켄을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은, 한국에 맥주를 수출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던 높은 수입세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이네켄은 두산그룹의 자회사인 오리엔탈 브루워리사 (Oriental Brewery Ltd., 즉 OB)와 특허권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 회사는 경기도 이천의 맥주양조장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1981년 5월에는 계약이 성사되어, 하이네켄의 직원 몇 명이 한국사람들에게 새로운 맥주의 양조 프로세스와 마케팅을 지도하러 한국에 갔다. 그 후에는 OB사의 영업부에서 네덜란드로 하이네켄 회사의 조직과 활동을 보러 왔고, 나중에는 기술자들이 와서

한국 하이네켄 맥주의 100만번째 케이스 기념축제. 이 사진은 1983년 5월에 하이네켄의 사원잡지 (네덜란드 판)에 실렸다. 하이네켄협회 콜렉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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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켄의 양조 프로세스를 연구했다. 협약을 맻은지 7개월도 안되어, 한국에서 하이네켄 맥주 병과 캔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맥주의 도입에는 CF, 신문광고, 슈퍼에서의 광고등 거대한 선전 캠페인이 동반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이네켄은 한국에서 금방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다. 한국은 그 당시 215퍼센트로 세계에서 맥주 납세가 가장 높은 나라였기 때문에 맥주 가격이 싼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특히 돈이 있는 한국사람들이 맥주를 마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이네켄은 처음부터 아주 잘 팔렸고, 그 후로도 계속 성장했다. 하이네켄 맥주는 어느새 한국의 아주 중요한 프리미엄 맥주가 되었다. 하이네켄이 한국에 들어간지 14개월 밖에 안 지난 1983년에는

양조장에서 백만개째 케이스를 생산했다는 것을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성장은 90 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지금도 하이네켄 맥주는 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2003년부터 하이네켄은 서울 본부와 네개의 지역지부로 된 현지 영업부를 두고 있다. 이 몇 년 사이에 상당한 수입증가를 보였고(일년당 평균 20퍼센트), 하에네켄은 10년 사이에 한국 최대의 프리미엄 수입맥주가 되었다. 2012년에 하이네켄은 또 하나의 암스테르담 수출품을 스폰서했다. 그것은 서울 킨텍스에서 개최된 센세이션 코리아였다. 센세이션은 2000 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처음으로 기획되었고, 현재는 매년 각종 국제 버전으로도 행해지고 있는 암스테르담의 행사이다.

한국어로 된 하이네켄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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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대회 1987년 4월 27일 당시의 에드 반 테인(Ed van Thijn) 암스테르담 시장은 윤보현 서울 시장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 날은 캐 나다의 알베르 르블랑(Albert Leblanc)이 암스테르담 시청을 방문한 날이었다. 캐나다 퀘벡주 마리아란 마을에서 온 르블랑은 62 세로, 자전거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었다. 서반구의 올림픽 개최 도시들을 돌면 서, 그 다음해의 제24회 올림픽 대회가 개최 될 서울을 위해 메세지를 모으고 있었다. 르 블랑은 1964년 동경 올림픽 이래 매번 자전 거를 타고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서 울은 그 일곱번째 도시였다.

1988년 9월 17일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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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테인 시장은 암스테르담 시민들을 대표해 서 서울 시장과 시민들에게 평화와 우정의 기도를 담아,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의 성 공을 비는 메세지를 보냈다. 서울 올림픽은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정확히 60년 후에 개최되는 것이었다. 1928년 제 9회 암스테르 담 올림픽 대회에는 46개국이 참가했는데, 그 당시 한국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번째로 올림픽 대 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나라였다. 기후관계 로 대회는 1988년 9월 17일에서 10월 2일 까지, 즉 가을에 개최되었다. 서울 올림픽 은 대성공이었다. 참가한 나라가 160개국에


다, 27 종목의 프로그램이었다. 그 해 네덜 란드는 147명의 선수를 한국으로 보냈다. 그 들은 총 아홉 개의 메달을 땄다: 금메달 두 개(남자 더블스컬과 여자 사이클 개인 도 로), 은메달 두개, 그리고 동메달 다섯개. 주 최국인 한국은 훨씬 많은 메달을 땄다. 올림 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는 총 401명으로 33 개의 메달을 땄는데, 그 중에 금메달이 12개 나 되었다. 반 테인 시장이 서울시장에게 보낸 편지의 복사본은 현재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에 서 보관하고 있다. 캐나다의 르블랑은 2008 년에 다시 뉴스가 되었다. 84세의 나이로, 12번째로 다시 자전거를 타고, 이번에는 베 이징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기 때문이었다. 1987년에 반 테인 암스테르담 시장이 서울 시장에게 보낸 편지. 암스테르담 시립 아카이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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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의 한국인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은 약 5600 명이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암스테르담과 그 주변에 있는 암스텔베인(Amstelveen)에 살 고 있다. 이 한국사람들의 일부분은 일이나 학업, 또는 부모 중의 한 명이 네덜란드에서 일하거나 네덜란드 사람과 결혼을 해서 네덜 란드에 와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 있는 한 국출신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네덜 란드 부모에게 입양된 이들이다. 네덜란드의 베스트셀러 작가 얀 더 할토흐 (Jan de Hartog)는 부인과 같이 이미 1968 년에 한국의 고아 여자아이 두명을 입양했 다. 그 해에 더 할토흐는 한국에서 입양한 두 딸을 데리고, 유명한 아나운서 미스 바우 만(Mies Bouwman)이 진행하는 TV 프로그 램에 출연했다. 그 방송은 네덜란드 사람들 에게 동남아시아의 버려진 수많은 아이들과 고아들을 도와 달라고 내용이었다. 그의 출 연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컸다. 방송이 끝나 자 마자, 한국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네덜 란드 사람들의 전화가 1000통이나 걸려 왔 다. 1970년에서 1988년까지 약 4000명의 한국 아이들이 네덜란드로 입양되었다. 그 후, 한국도 부유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이 흐름은 줄어들었다. 입양된 한국 아이들 중 에 몇 명은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그들은 네덜 란드사람이지만 한국사람이기도 하다. 그래

서 한국입양 출신인 사람들은 정기적인 모임 을 만들어, 서로 만나고 경험을 나누는 자리 를 만들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영구적으로 사는지, 일시적 으로 와 있는지에 상관 없이, 이 모든 한 국사람들을 위해 1993년 암스텔베인에 암 스테르담 한국인 학교(Korean School of Amsterdam)가 생겼다. 이 학교의 교훈은 “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자” 이다. 자랑스러 운 한국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언어, 역사, 문 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학교 에서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국사람들의 아이 들이 자기 나라와의 관계를 잃지 않도록, 유 치원에서 중고등학교까지 한국어로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이 외에 부모들울 위한 네덜 란드어와 영어수업도 있고, 사물놀이를 배우 는 수업도 있다. 또한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 들은 여기에서 한국어도 배우고, 자신들의 출신국가의 문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다: 한국요리, 한국전통음악 그리고 한국고전무 용 등이 있다.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현 재 약 140명이나 되고, 교사도 20명이 넘게 있다. 한국인학교는 또한 한국사람들이 네덜 란드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있도록, 암스테 르담 한인 커뮤니티의 중심적 역활도 하고 있다. 암스테르담과 암스텔베인의 시청, 주네 덜란드 한국대사관과 네덜란드 한인회도 이 학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암스텔베인의 한국인학교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소녀. 사진: Elmer van der Ma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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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술원 고려 한국무술은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 양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암스테르담에서 도 인기가 많다. 암스테르담에는 태권도, 합 기도, 그 외의 한국무술을 배울 수 있는 도 장이 몇 군데 있다. 암스테르담 동남쪽에 는 여러가지 한국무술을 가르치는 고려센 터가 있다. 거기에서는 자기 방어 스포츠인 태권도, 전통무술인 국술원, 그리고 네덜란 드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해동금도를 배 울 수 있다. 이 센터는 1978년에 유명한 무 술 사부 로빈 발리(Robbin Baly)가 네덜 란드에서 한국무술을 알려주고, 배우는 사 람을 늘려 가려고 창립한 곳이다. 그 당시 의 고려센터는 암스테르담 중심지에 있었 는데, 1992년에 암스테르담 동남쪽으로 이 전했다. 그 때 암스테르담 동남쪽의 동네는 평판이 안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난한 동 네로 범죄가 많은 곳이었고, 여러 국적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이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이웃으로 사 는 것은 다문화적인 마을이 되는 장점도 되 었지만,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센터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국무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 다문화가정의 청소년 들을 모으는데 성공했고, 그 사회적 역할도 컸다: 청소년들에게 수양을 가르쳐 주고, 자존심을 심어 주었다. 탈선할 위험이 있는 청소년들에게 고려센터는 프로젝트를 준비 시켜, 자신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일 을 찾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 사이에 고려센터는 국술원의 베네룩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본부가 되 기도 해서, 10년 후 이 모든 활동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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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센터가 좁아졌다. 그래서 고려센터는 암 스테르담시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 가 창립한 요한 크루이프 복지재단(Johan Cruijff Welfare Foundation)과 협조해서 2002년에는 암스테르담 동남쪽의 스포츠 를 촉진시키는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시작 했다. 고려센터는 새로운 건물도 얻게 되었 다. 현재 고려센터는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의 체육시간에 한국무술 입문 레슨을 제공 하고 있다. 지금은 암스테르담 동남쪽의 가


장 큰 도장이 되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수 백명의 청소년들과 수많은 어른들이 고려 센터에서 한국무술을 배웠고, 학생들은 많 은 메달은 땄다. 그 중에는 세계 챔피언도 있었다. 고려센터에 가면 즐거워서 그냥 들리는 사 람들도 있다. 고려 센터는 동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민 회관으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한국어 수업도 들 을 수 있다. 고려센터에서 한국무술 국술원을 연습하는 다양한 암스테르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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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2002년 한국은 일본과 함께 축구 월트컵의 공동 개최국이 되었다. 2001년 1월 1일 네 덜란드의 전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인 거 스 히딩크(Guus Hiddink)가 한국 국가대 표팀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히딩크는 이전 에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역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과제는 한국 팀을 적 어도 32강전으로 유도해 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은 월트컵 경기에서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히딩크는 대표팀에 게 철저한 훈련을 시켰다. 국가대표 선수들 이 월드컵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그들 의 프로축구리그 활동을 중지시켰고, 트레 이닝 캠프와 강한 팀들과의 연습 경기를 실 현시키기 위해 한국정부로부터 넉넉한 예 산도 받았다.

한국 보도는 처음에는 히딩크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이 네덜란드사람이 열심히 일 은 안하고, 여자친구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러나 월드컵 개막 후 팀워 크가 뛰어난 대표팀은 첫 시합에서 폴란드 를 2대 0으로 이기고, 사상 처음으로 우승 을 했다. 미국과는 동점, 인기 많은 포르투 갈과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1대 0으로 우승 을 거둔 뒤, 한국 대표팀은 16강전에 진출 했다. 그러고 나서 이탈리아를 2대 1로 이 기고, 8강전의 스페인전에서는 승부차기로 우승했다. 한국은 어느새 축구 월트컵의 4 강전에 진출했다. 한국대표팀이 4강전에서 독일과 붙었을 때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두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 게도 한국의 승리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거스 히딩크의 출생지 파르서펠트에 있는 ‘거스 박물관 (Guuseum) ’, 즉 히딩크를 기리는 박물관. 사진: Ziko van Di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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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월드컵의 결 과는 히딩크를 한국의 국가적 영웅으로 만 들었다. 히딩크는 한국의 첫 명예시민이 되 었고, 제주도 별장과 대한항공 평생 무료 이용권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다. 한국대표 팀이 4강전 진출을 실현시킨 광주 경기장 은 거스 히딩크 경기장으로 개명되었다. 또 한 네덜란드는 히딩크에게 그 해의 우수 감독상을 주었다. 이 후 수년동안 수천명의 한국 관광객들이 네덜란드 동쪽에 있는 히 딩크의 출생지인 파르서펠트(Varsseveld) 를 방문했다. 이 마을에서 히딩크의 친척 들은 ‘거스 박물관’, 즉 거스 히딩크의 영광 을 기리는 특별한 박물관을 만들었다. 히딩 크의 자택은 현재 암스테르담에 있다. 이러는 동안 한국 선수들은 네덜란드에 와 서 축구의 질에 공헌하고 있다. 네덜란드

의 1 리그에서 축구한 적이 있는 한국선 수는 지금까지 벌써 여덟명이나 된다. 한 국의 용인FC에서 축구를 하던 석현준 선 수는 2009년에 18세의 나이로 암스테르 담에 왔다. 그의 꿈은 아주 유명한 아약스 (Ajax) 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약스 청 년 팀과 같이 트레이닝을 할 수 있게 클럽 을 설득했는데, 골도 많이 넣고 눈에 뛰었 다. 그래서 2010년 초부터 아약스의 1군 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석현준 선수는 응 원단에게도 인기가 많아, 데뷔때에는 모두 가 일제히 그를 응원했다. 또한 발을 높이 내밀면서 공을 받아치는 자세를 자주 보여 주었었기 때문에 암스테스담에서는 ‘축구 계의 브루스 리(이소룡)’라는 별명을 얻었 다. 2011년 6월 석현준 선수는 FC흐로닝 언(FC Groningen)이라는 또 하나의 축구 클럽과 계약을 맺었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거스 히딩크 재단이 실현한 “드림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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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구근 네덜란드는 꽃과 구근으로 세계적으로 유명 한 나라이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구근의 약 95%가 네덜란드에서 온다. 한국에서는 약 1000명의 재배자와 약 열개의 중소기업이 매년 35천만 개의 구근을 수입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도시와 공원의 환경미화를 위 해 네덜란드의 구근을 사용하고, 그 외에도 꽃은 결혼식, 장례식과 같은 의식에서도 사 용되고 있다. 또한 지난 십년 사이에 한국에 서는 꽃축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충청 남도의 플로리토피아 튤립축제에는 매년 암 스테르담 서쪽에 있는 구근 재배지역의 꽃 을 전시하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쿠켄호프 (Keukenhof)보다도 많은 고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집을 장식하기 위 해, 꽃을 사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한국 의 재배자들은 이 꽃(특히 백합)의 일부분 은 다시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2011년에 한국이 유럽연합과 맻은 FTA협약 은 꽃과 구근의 무역에도 중요한 자극

충청남도의 국제 꽃 박람회 플로리토피아. 사진: 정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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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었다. 이전에는 구근의 수입세는 8% 였고, 꽃은 25%나 되었다. 다른 상품의 수 입세는 서서히 내려갔지만, 식물과 꽃 그리 고 구근의 수입세는 바로 폐지 되었다. 그 래서 네덜란드의 식물재배회사 중에는 한 국 수출에 관심을 가지는 회사가 점점 많아 지고 있다. FTA협약에는 무역을 간단화 시 키고, 투명하게 만드는 새로운 절차와 규칙 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식물, 꽃 그리고 구근이 한국에 수입되기 전에 적 정 기준에 달해야하는 것도 그 조건 중의 하나이다. 네덜란드의 수출용 구근은 네덜 란드 구근검사국에서 검사하고, 한국의 품 질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한다. 검사를 통과 한 구근은 한국의 온실에서 꽃으로 키우고 나서, 한국 안에서 팔거나 일본으로 수출된 다. FTA협약과 끊임없이 늘고 있는 한국사 람들의 꽃사랑 덕분에, 앞으로도 한국을 향 하는 네덜란드의 구근은 계속해서 늘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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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사 1966년 한국정부는 암스테르담에 유럽의 첫 코트라(KOTRA) 사무국(현 KTIPA) 을 설립했다. 코트라의 설립목표는 한국회사가 해외에서 무역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과 한국에서 무역을 하려고 하는 외국회사를 지원하는 것이다. 코트라가 암스테르담을 선택한 이유는 네덜란드가 한국전쟁의 동 맹국이었던 것도 있지만, 한국에게 있어 네 덜란드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이 네덜란드는 큰 나라 에 둘러쌓인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 계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코트라 암스테 르담 지부는 한국과 네덜란드에서 양국간 의 무역을 지원해 왔다. 그 때부터 한국회 사와 네덜란드회사 간의 무역은 많이 증가 했다. 자동차를 시작으로 그 후로는 ICT관 계 상품들이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많이 들 어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한국회사들

이 네덜란드에 지점을 열게 되었는데, 현재 그 수가 총 110개가 넘는다. 그 대부분은 암스테르담과 그 주변 지역에 있다. 네덜란 드에 있는 한국회사는 기술, 물류와 관련된 영업부와 유통부가 대부분이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큰 한국회사는 1999 년에 네덜란드로 들어온 LG전자이다. 이 회사는 전기제품과 통신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십년 사이에 LG는 네덜란드에서 명 성있는 브랜드가 되었고, 총 매상고도 매 년 증가하고 있다. 2009년에는 LG 전자 베 네룩스(Benelux) 영업부는 암스테르담 바 로 밑 남쪽에 위치하는 암스텔베인 코머 스 파크(Commerce Park)로 이전했다. 급 성장하는 이 회사에 걸맞는새롭고 큰 오피 스였다. SK Lubricants로 40년 전부터 한국의 가 장 큰 엔진 오일 생산회사 중의 하나인 SK 는 2010년부터 암스테르담 남쪽에 있는

암스테르담 남쪽의 비지니스 구역. 사진: Edwin van E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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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A급의 비지니스 구역으로 진출했다. 한 국에서 가장 큰 경쟁회사인 S-Oil도 마찬 가지였다. 암스테르담의 월드 트레이드 센 터는 이 비지니스 구역의 중심에 있다. SK Lubricants는 암스테르담이 유럽에서 가 지고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근처에는 대 형 국제공항 스히폴이 있고, 로테르담이라 는 큰 항구가 있는 수도권에 영업부를 두고 싶었다. 이 회사는 네덜란드에 들어온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보여 주었고, 유럽 전체에 서 안정적인 시장수요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 기아 자동차 그룹의 일부인 세계적 물 류회사 현대 글로비스, 그리고 휴대전화기 술의 새로운 응용을 전문으로 하는 통신회 사 다날도 암스테르담 남쪽에 사무실을 오 픈했다. 다날은 모바일 지불 앱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고, 한국시장의 으뜸을 자치 하고 있다. 다날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시장 에 따라갈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 미국에 지사를 개설하고, 네덜란드에도 네덜란드회

사 CS&F와 협조관계를 만들어 현재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자리를 잡았다. 스히폴 공항 주변에는 범한 판토스, 한진 해운, 그리고 대한항공 카고와 같은 물류회 사가 몇 개 있다. 대한항공도 이곳에서 사 무실을 운영하고 있고, KLM 네덜란드 항 공과 함께 암스테르담과 서울 사이를 직항 하는 비행기를 운행하고 있다. R&D분야의 좋은 예 중의 하나는 새롭고 세계적으로 중요한 DNA기술을 개발하는 생물의학회 사 마크로젠(Macrogen)의 유럽 영업부이 다. 이 외 다른 한국회사들은 암스테르담에 서 얼마 안 떨어진 도시 알메이레(Almere) 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 또한 회사가 사무실을 두기에 아주 편리한 장소이다. 이와 같은 한국회사를 비롯해서 암스테르 담 수도권의 진출과 정착과정에 대해 조언 및 지원이 필요한 새로운 회사는 암스테르 담 인비지니스 (amsterdam inbusiness) 로 연락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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