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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역사

1918년 3월 8일 스페인 독감의 첫 환자 발생

스페인 독감은 1918년에 발생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말한다. 20세기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크게 유행했던 바이러스로 전 세계 인구 의 3~6% 에 달하는 목숨을 앗아가며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 불린다. 이 독감으로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사망한 환자수만 약 5천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약 1500만명이 사망한 1차세계대전의 사망자의 수보다 3배나 많은 숫자이다. 한국에서는 총 인구 1670만 명 중 44% 인 약 740만 여명이 감염되어 14만 여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 스페인 독감을 '서반아 감기' 라 불렀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추수를 못할 만큼 상여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 팔도의 민심이 흉 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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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독감의 최초 발생지는 미국 캔자스로 첫 발생자가 확인된 이 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미군 병사는 열과 두통을 호소하 며 의무실을 찾았는데 이 환자를 시작으로 하루만에 같은 증상을 호 소하며 의무실을 찾아오는 병사가 500명으로 불어났다. 독감의 증상 은 극심한 근육통과 두통 그리고 급격한 체온 상승과 심한 기침으로 폐출혈까지 이르게 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명명된 이유는 스페인세거 이 독감에 대한 보도를 처음으로 깊게 다루면서 붙여지게 되었다. 독 감의 확산으로 전 세계는 감염자들을 격리하고 공공 의료를 통제하 는 등 긴급조치를 취했지만 일손과 병원시설, 약이 부족하였고 면역력 이 약한 노인과 어린 아이들이 가장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당시 백 신도 없었고 약효가 검증된 예방약도 없었지만 1919년 겨울 갑자기 독감이 사라지면서 언제 다시 발발할 지 모르는 바이러스의 공격에 공포는 지속되었다.

1883년 3월 6일 태극기, 대한민국 정식 국기로 채택

1883년 3월6일, 고종의 명으로 처음 제작되었던 태극기가 정식으로 조선의 국기로 채택이 되었다. 태극기의 도안은 고종이 직접 한 것으 로 알려졌는데 고종은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 이라는 서적 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 는 글을 보며 국기 제 작을 계획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의 태극기는 백성을 뜻하 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되 게 하여 국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하지만 붉은색의 동그라미가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해 반홍반청의 태극 무늬로 다시 정하고 그 둘레 에는 조선의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려 넣는 것으로 최종 문양이 결 정되었고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기 로 사용되었다. 이후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태극기' 라 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며 태극기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독립운동과 만세 시위에 사용되며 우리 민족의 항일 정신을 담은 상징이 되었다.

20세기 최대 토목 공사 중 하나로 꼽히는 후버댐은 1936년에 완공되 었다. 후버댐의 높이는 221.4m 길이는 379m로 네바다주와 아리조 나 중의 경계인 블랙 협곡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 완공되었을 때는 '볼 더댐(Boulder Dam)'으로 불렸지만 미국 31대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 를 기념하기 위해 1947년에 '후버댐' 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후버댐 은 1931년부터 1936년까지 5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댐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인력만 무려 2만 1천여명으로 건설 과정에서 112명의 인 부들이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댐 건설의 과정은 협곡의 벽을 폭 파해 콜로라도 강의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8천여명의 인부들 이 협곡 바닥의 바위를 치우는 것부터 시작되었으며 단단하게 짓기 위해 일자형이 아닌 구부러진 중력댐의 형태로 만들었다. 1931년 연 간 40억 kwh의 전력을 생산하는 후버댐은 미국 서부 콜로라도 강의 잦은 범람을 막아주고 주변 농토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1959년 3월10일 티베트 봉기

'티베트 봉기'는 중국 공산당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들 이 들고 일어난 반중국, 반공산주의 봉기를 말한다. 당시 중국은 티 베트 내의 불교 저항 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했는데 수도원을 폭파하 고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잡아가는 등 티베트 사람들을 향한 억 압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결국 1951년 티베트는 중국의 압력하 에 17개의 항목에 합의하는 서류에 서명을 해야 했다. 티벳과 중국 양측이 베이징 시에서 체결한 이 조약에는 중국과 티베트 양측의 정 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담 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에서 달라이라마를 납치하여 베이징으로 소환하려 한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고 이를 불안하게 여긴 티베트 사람들 과 중국군과의 긴장감을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달라이라마가 1959년 3월10일 중국군이 개최한 중국 전통 춤 공연 초청을 수락하 자 루머는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공연이 열리는 '노블 링카'로 대규모의 인파가 달라이라마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렇게 1959년 '라싸교전'이 시작되었다. 조약을 맺은 후였음에도 불 구하고 중국은 티벳의 역사적 장소와 수도원 주변으로 무기와 포병 대를 대거 배치하였고 티베트의 수도사와 시민들은 19세기 소총과 대포로 무장하면서 대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티베트의 첫 발을 기 다리고 있던 중국군을 향해 달라이 라마는 협상의 서신을 계속 보냈 지만 중국군은 전쟁을 위한 준비 상태에서 티베트의 선제 공격을 기 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하고 중국쪽에서 첫발이 터지면 서 '라싸교전'이 시작되었다. 이 교전은 재래식 무기로 대항하던 티베 트 인들에게 역부족인 전쟁으로 이틀만에 종결되었고 교전으로 인 해 티베트인 약 86,000명이 사망했다. 또 라싸의 주요 사원과 절은 폭격에 의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약탈까지 이어져 역사적 유물 들도 사라졌다. 교전이 시작되면서 달라이라마는 라싸를 탈출하여 인도로 망명했고 티베트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십칠조협의'의 파기 를 선포하면서 중국과 대립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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