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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와의 대담對談

정 원 걸

“내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에 대해 놀랐나요?” 의자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마시던 우유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책상은 새것으로 눈이 내린 듯 새하얫다.

“아니, 별로...... 그래 조금은.”

짧은 순간, 심경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약 3초간 심장이 두근거리다가 이내 정상을 되

찾고 있었다.

“난 단순한 의자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의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고 있어.”

짧게 말하고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갈증이 났다.

창 밖을 내다보니 별이 떠 있었다.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별이 숨어들고는 했다.

“뭔가 고민이 있나요?” 의자가 물었다.

“글세......”

의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내가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단순한 의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내게 모두 털어 놓으라구요.

의자는 매우 함축적이고도 깔끔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군더더기가 없다.

의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파도가 잠잠해지듯 잦아들었다.

“만약에 말이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게 된다면 모든 걱정은 소멸해 버릴까?” 의자는 난감한 듯 했다.

“ 음― ”

꽤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무인도에 떨어지는 거야.” “어느날 갑자기?”

“무인도에서 밤이고 낮이고 야자열매를 먹는다고 생각해 봐.”

나는 의자의 팔뚝 부분을 만지며 말했다. 의자는 기분이 좋은지 흰 암고양이처럼 목을 갸

르릉 거렸다.

“미안합니다, 습관이 되어버려서...... 당신과 만나기 전엔 어떤 고양이 군과 곧잘 대화하곤 했었거든요.”

나는 두어 번 잔기침을 했다. 의자가 충분히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

다.

“그러니까......” 의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뭔가 고민이 있다는 말이군요.”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 무렵, 내게는 친하게 지내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다.

말을 다 듣고 난 의자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게도 고양이 군이 있었다는 얘길 했던가요? 꽤 친했다던......”

“들은 것 같아.”

“잠깐 그 고양이 군 얘길 해드리죠.”

의자의 말에 의하면 고양이 군은 당시 3살로, 꽤 성숙했던 모양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의자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고 한다. 고양이 군은 나무였던 의자의 근처를 자주 지나다녔다.

어느 날, 나무였던 의자는 곁에서 소변으로 영역표시를 하던 고양이 군에게 말을 걸었다.

“자넨 이름이 뭔가?”

고양이 군은 한번 노려볼 뿐, 별 말 없이 유유히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나무는 어디까지나

나무인 것이다.

그러나 나무에게는 오랜 연륜이라는 것이 있었다.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 고양이 군이

들릴 거라고 예측했다.

“안녕? 반가워.”

고양이 군은 흠칫 하는 듯 했지만 익숙한 솜씨로 소변을 보고는 재빨리 지나가 버렸다.

“나는 나무라고 부르지.”

나무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고양이 군은 소변을 보다 말고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고양이 군이라고들 불러요.” 고양이 군은 꼬리를 치켜 세우고 어깨를 경직시킨 자세로 몸을 풀고는 다시 어딘가로 사라 졌다. 나무는 오후의 나른한 바람에게 고양이 군에 대해서 물었다.

“그 얼룩무늬 고양이 말이지......”

바람은 느릿한 말투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나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람이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파리들이 웃음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었지?”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오른 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받쳤다.

“보통의 고양이들이 그러하듯이, 고양이 군도 혼자가 된 거죠.” “외로웠겠군.”

“그런거죠.”

의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누구든 외로운거니까......”

“고양이 군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는겁니다.” “그렇겠지.”

“아무튼 그렇게 해서 고양이 군과 나는 꽤 친해졌지요.”

고양이 군은 주기적으로 나무를 찾아와서 소변을 보고는 이동로를 따라 돌아가곤 했다. 그

것이 의자가 한 이야기의 끝이었다.

“당신은 고양이 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의자가 물었다. 순간적으로 의자 답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소변을 습관적으로 보는, 다소 냉소적인 고양이 군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네만......” 의자가 빙그시 웃었다. 어렴풋이 의자의 미소가 밤의 한 가운데에서 빛났다.

“어떻게 본다면, 정보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삐그덕거림 같은 것 말인가?”

“바로 그런 거죠,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조금의 문제는 있게 마련이죠.” 의자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저도 나무가 의자로 변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그렇다면 결국엔......”

나는 턱을 만지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정보의 양이 이해의 폭을 넓힌다는 거군.” “인정하긴 싫겠지만, 결국엔 양의 문제죠.”

“정보가 쌓이면 자연히 깊이는 생기게 마련이지.” “알고보면 아주 간단한 거죠.”

나는 다시 턱을 괴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불빛들이 점등하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웠다. 집 앞을 흐르는 작은 하천을 건너 차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다. 밀

집된 주택가 사이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들은 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가로등 아래

를 걷다보면 여기가 2000년대의 거리인지 1900몇 년도의 거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현재는 잊혀지는 거다.

의자는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창 밖의 불빛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

었다.

*

꽤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 였다. 거리는 비현실적으로 밝았다. 벚꽃 잎이 지기 시작하고 있

었다. 햇빛이 도서관의 유리창에 부딪쳐 작렬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걷는 것을 중단하고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벤치는 햇볕으로 인해 따뜻해져 있

었다. 정오의 햇살은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햇살은 누구에게나 공 평하게 분배되고 있었다. 햇살이야말로 평화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평화는 지속될 것 같 았다.

정오의 햇살은 빠르고도 지속적으로 흩어졌다. 이내 정오가 지났고 몸은 충분히 따스해져

있었다.

걷고싶다고 생각했다. 길은 어디로든 이어져 있었다. 걷다보면 누구든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꽤 운이 좋은 날이 될 것이다.

도서관 앞을 지나서 체육관 쪽으로 걸어가려 할 때였다. 도서관 건물의 모퉁이로 갈색의

생물 하나가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보니 그것은 갈색의 숫 고양이 였다. 고양이는 마침 영역표시를 하는 중이었다. “고양이 군?”

그러자 고양이는 흠칫 몸을 추슬렀다. 내 말에 꽤 놀란 모양이었다.

“당신이 의자의 새로운 친구로군요, 반갑습니다.”

고양이 군은 또박또박하고 예의바른 어투로 말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귀여운 구석도

있어보였다.

“정보의 차이지.”

나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양이 군은 핥는 것을 멈추고 나

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고양이 군의 곁에 앉았다. 오후였고 도서관 주변이긴 했지만 지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보의 차이라고 했나요?”

고양이 군이 말했다. 고양이 군의 음성은 비올라처럼 낮고도 묵직했다.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지.”

고양이 군은 앞발로 눈 언저리를 비볐다.

“사실일지도 모르죠.”

고양이 군은 짧게 말하고 하품을 했다.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나는 딱딱하게 물었다. 그러나 고양이 군의 하품은 꽤 길었다. 어떻게 보면 무척 피곤한 듯 해 보였다.

“질문 자체가 잘못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 보셨나요?” 나는, 쇠 망치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지?”

*

의자는 대답이 없었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고 가로등도 점등되어진 상태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문제니까요.” 의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답은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는 거죠.”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가 말했다.

“결국엔 그런거였나......”

“확실히 그런거죠.”

의자는 확인 시켜주듯 말하고는 침묵했다.

*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말은 차가웠다. 가슴이 아팠다.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약 100퍼센트라면, 지금 헤어진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닫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답답했다.

“다시 만날때 까지 건강해.” “그래... 너도......”

“결국엔 그런거였지.”

*

의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의자는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나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것이 의자의 역할이었다. 누구에게든, 그런 존재는 필요하다.

“고양이 군을 만났어, 꽤 귀엽던데.”

의자는 미소지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의자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건 정말이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멋진 표정이었다. 의자가 다시금 희미하게 웃었다.

“시간이 모든 걸 치료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의자는 그 순간의 정적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정적

과 친해지기로 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지나갔다.

“어떻게든 되겠지, 혼자가 되든 ......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 사이의......” “기다려 보는 거죠.” 의자가 말했다.

“마치 내가 당신을 만난 것처럼.”

나는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되고 원목이 되고 의자가 되는 과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실제의,

‘의자’라는 사물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넌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군.”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으니까요.”

의자는 평소처럼 말했다. 1퍼센트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

고양이 군을 만난 건 다음날이었다. 고양이 군은 습성대로 도서관 모퉁이에 소변을 보는 중이었다.

“안녕?”

인사하자 고양이 군이 내 다리에 몸을 비벼댔다.

“혹시,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어?”

내가 묻자 고양이 군은 날카로운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크게 하품을 했다.

“아는 게 없어요, 제로라고 해도 될 만큼.”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 군이 퍼센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

금했다.

“퍼센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고양이 군이 느리게 내 주위를 걸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걸음

걸이였다.

“퍼센트란 존재하는 것의 수치죠, 즉 존재 이유에요.” “존재 이유.”

나는 낮게 되새겼다.

“도서관에서 익힌 지식이죠.”

역시 고양이 군, 이라고 생각했다.

*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자판기에서 스프라이트를 손에 든 순간이었다. 낯익은 이미지

하나가 시야에 들어와 있다고 느꼈다. 자세히 보니, 교양 과목을 같이 듣는 여학생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당신의 퍼센트군요.” 의자의 음성이었다.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요, 그리고 퍼센트는 당신에게 달린 거죠.” 고양이 군이 담을 끼고 지나갔다.

“...... 나의 퍼센트일지도 모르지.”

잠깐 중얼거리고는, 몇 퍼센트 였을지 알 수 없는 장소를 벗어났다. 고양이 군이 담벼락에

바싹 붙어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정오의 햇살이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