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사창마을사원고(최종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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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여운이 깃든 사창리 -

1.

사창리

개요 (社倉)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있는 리(里)로, 사창, 진목, 신점촌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산의 기운이 휘감는 형국을 한 마을의 초입에는 오래된 당산나무 들이 서 있다. 제관이 홀기(笏記)에 따라 제를 지내는 모습이 선연하다. 마을 앞 들에 풍 장굿의 아련한 여운이 깃든 듯하다.

그림 1 사창마을 입구의 마을 표지석.

그림 2 원사창의 마을회관. 경노당으로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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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社倉里)는 본래 조선 말기까지 흥덕면 이서면(二西面)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조

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하여 사창(社倉), 신점(新店) 및 일서면의 진목정(眞木亭) 일부 를 병합하여 그 중심마을 ‘사창’의 이름을 따 ‘사창리’라 하였다. 그리고 고창군 벽사면(碧 沙面)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3월 도령 제1호에 의거하여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되었다. 즉,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령에 따라 신점촌과 진목 일부를 병합하여 벽사면(碧沙面)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면폐합령에 의해서 지금의 부안면 사창리가 된 것이다. 부안면 남동부에 위치한 사창리는 부안면 면소재지에서 남쪽 3.5km 지점에 위치한다. 사 창리에서 가장 큰 자연 마을이 ‘원사창’이다. 신점촌(새점촌이라고도 함)은 원사창 앞 군도 (郡道) 13호선 ‘전봉준로’를 따라 부안면 면소재지 방면 약 200m 지점에 위치한다. 진목 은 원사창에서 전봉준로 건너 동남쪽으로 약 20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현재 사창리는 사창 1구인 원사창과 사창 2구인 진목으로 크게 구성돼 있다. 자연 마을 이름으로는 사창, 새점촌[新店村〕, 질목쟁[眞木亭〕등이 있다. 기타 사창터, 서 당터, 서당제, 사창제, 진목방죽 등이 있다. 사창리의 크기는 총 2.06㎢, 그 가운데 밭이 0.3㎢이고 논은 0.49㎢이다.

그림 3 진목경노당의 모습.

2) 마을의 유래 ‘사창’이라는 지명은 예전에 사창(社倉)이 있었던 것에서 연유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 다. 오래 전에 마을의 숯굴산 아래에 많은 곡식을 저장하는 큰 창고가 있었다는 전언이 있다. 큰 창고는 사창(社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숯굴산 아래에 있었다는 사창터는 확 인되지 않고 있다. 사창이란 조선시대(1451년경) 각 지방의 사(社, 행정단위로서 현재의 면과 유사함)에 두었 던 곡물 대여 기관을 말한다. 춘궁기에 곡식을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아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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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적 성격을 띤 일종의 빈민 구호제도로서, 의창·상평창 등과 같이 3창(三倉)의 하 나로 불렸다. ‘진목(眞木)’이라는 지명은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가 한때 살았다고 한 데서 붙 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증산교 계통의 경전에도 강증산(姜甑山)이 순창 회문산에 있 을 때 제자들과 함께 고창 사창리를 찾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진묵대사의 행적이 설로 전 해진 까닭에 강증산이 사창을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신통력과 이적(異蹟)을 많이 행했던 진묵대사는 일정한 주처 없이 천하를 주유한 승려였다. 변산의 월명암(月明菴)이나 전주의 원등사(遠燈寺), 대원사(大元寺) 등지에서도 한때 살았다. ‘점촌’은 현재 원사창에 포함돼 있으나 옛날에는 원사창의 북쪽 둔덕을 가리켰다. 산사람 이라 불리는 이들이 질그릇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 점촌이었다. 근래까지만 해도 질그릇을 구운 토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새점촌이라고도 하는 ‘신점촌’은 원사창에서 북쪽으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한때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점촌이 질그릇을 구웠던 곳인 만큼 신점촌은 점촌에서 떨어져 나온 마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신점촌에 는 미곡종합처리장과 오리농장 등이 들어서 있다.

2.

환경

사창리를 중심으로 북으로 상등리가 인접하고 동으로는 흥덕면 법지리가, 남으로 운양리 가 인접해 있다. 마을을 이어주는 옛길인 ‘원길’이 이어질 듯하다 끊어지고 끊어질 듯하다 가 이어져 있다. 숯굴산과 대삿봉의 기운이 마을을 감싸 안는 형국이다. 이름 하여 꿩이 알을 품는 복치형(伏雉形)이다. 복치형의 핵심 명당을 ‘꿩방’이라 불렀던 듯하다. 1)

자연환경

전봉준로를 기준으로 동쪽 평야 지대가 진목이고 서쪽 산간 지대는 원사창이다. 원사창 의 좌향은 대체로 남향과 동향으로, 마을의 서쪽이 대삿봉과 숯굴산이다. 원사창에서 남쪽 으로 솟은 산은 ‘숯굴산’이고 북쪽으로 솟은 산이 ‘대삿봉’이다. 대삿봉에는 큰대삿봉과 작 은대삿봉이 있다. 대삿봉 일부 등성이를 ‘자갈밭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숯굴산은 ‘숯굴’이라는 지명에서 따 온 듯하다. 일제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숯굴산 언저리에 는 5,6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역시 ‘숯굴’이었다. 숯굴을 ‘동장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때 장군이 살았던 곳이라서 동장자라 했다는 것이다. 대삿봉은 시누대가 밀집 서식하여 대삿봉이라 불렀을 것이다. 자갈밭등은 산 언저리 밭이 자갈밭이라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숯굴산과 대삿봉 사이 계곡을 ‘서당골’이라 하며, 서당골의 작은 저수지를 ‘서당제’라 불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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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 ‘서당재골’, ‘서당터’, ‘서당재’ 등이라 불렀다. 옛날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도 서당 터로 보이는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서당골을 ‘성당골’이라고도 하 나 성당골일 경우에는 성황당이 있던 곳으로 보아야 하는데, 성황당 자리는 아닌 듯하다. 서당제 바로 아래에는 근래에 축조된 저수지 ‘사창제’가 있다. 서당제나 사창제 모두를 사창제라 부르기도 한다. 서당제에서 시작되는 개울은 서출동류로, 원사창의 중심지를 흐 른다. 개울은 앞들의 개골창과 연결돼 있다. 원사창과 진목을 가르는 서출동류 형국의 내〔川〕를 ‘개골창’이라 한다. 개골창 인근의 들을 멍에방청, 미루나무둠벙, 똥뫼냇갈 등이라 했다. 개골창을 포함한 사창리 ‘앞들’을 대 체로 용호초리라 불렀다. 이외, 신점촌의 유풍미곡종합처리장 인근을 안골, 독논, 시암골, 구레 등으로 불렀으며, 진목의 사창 교회 앞들을 간쟁이라고 불렀다. 앞들 너머에는 방장 산에서 시작되는 내가 신림면을 거쳐 남출북류의 형국으로 흐른다. 사창 사람들은 이를 ‘진경변’ 또는 ‘갱밴’이라고 불렀다. 신점촌의 유풍미곡종합처리장 부근은 예부터 물이 많았다. 그래서 ‘질구덩이’이란 이름으 로 불렸다. 진흙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점촌에서 질그릇을 굽는 데 사용했던 진흙은 이 질구덩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는 ‘독보’라는 보와 같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바위 인근을 대체로 독보라 하였다. 숯굴산과 대삿봉으로 오르는 길 초입에 공터가 있는 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꿩방’이라 하였다. 꿩방은 원길 옆의 둔덕과도 같은 공터이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큰 행사에 앞서 서 꿩방을 찾아서 굿을 쳤다는 것은 일종의 ‘경건 의식’을 의미한다. 꿩방이라는 이름은 마을 청년들이 ‘꿩치기’ 놀이를 하는 터라는 데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 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꿩이 알을 품는 형국〔[雉形]이라는 데서 비롯된 이름임이 분 명하다. 꿩은 산과 들을 의미하고 알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나 집을 가리킨다. 따라서 바람이 막 히고 물이 돌아 흘러서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꿩방은 일종의 명당이다.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찾아서 경건한 의식과도 같은 마을굿을 한 이유는 꿩방이 마을을 풍요롭게 해주는 명당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사창 의 풍수를 ‘귀는 흔하고 부는 흔치 않는 형국’이라고도 말한다. 복추형과 관련된 해석으로 보인다. 전봉준로와 맞닿은 원사창 초입의 마을회관 바로 뒤에는 오래된 팽나무 세 그루가 있다. ‘아랫당산나무’다. 아랫당산나무에서 남쪽으로 약 180미터 떨어진 곳이 ‘웃당산나무’다. 아 랫당산나무와 웃당산나무로 불리는 팽나무의 수령은 약 100년 정도. 원래 아랫당산나무는 현존하는 팽나무보다 수령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500년을 훨씬 뛰어넘는 수령의 팽나 무가 아랫당산나무였는데, 1960년대에 고사하였다. 아랫당산나무 아래에는 당산젯돌과 연자방앗돌이 보존돼 있다. 전 이장 이호근이 흩어져 있던 젯돌과 방앗돌을 원래의 위치에다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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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아랫당산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는 마을의 노인들.

그림 5 아랫당산나무 아래의 연자방앗돌.

2)

인문환경 사창제 사이의 마을길이 원래 마을을 잇는 길(원길)이었다. 상등리 구현마을에서

출발하여 사창리(꿩방)를 거쳐 운양리까지 이어진 길이 ‘원길’인 것이다. 근래에 마을 앞 전봉준로가 나면서 원길 일부가 유실되었다. 아랫당산나무 옆에는 마을회관과 우국정(優國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원래 누정이었던 우 국정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다가 2001년에 현 모습으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마을회관 겸 경로당은 2009년에 아랫당산나무 바로 옆에 건립되었다. 원사창의 설기 연대는 고려시대로, 설기 성씨는 흥덕조씨(興德曺氏)다. 흥덕조씨는 창녕조 씨로, 고려시대에 지금의 점촌에 입촌하였다. 뒤이어 파평윤씨(坡平尹氏)가 원사창에 터를 잡았다. 윤씨들이 사창리에 입촌한 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이다. 현재 사창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성씨는 흥덕조씨와 파평윤씨 외에도 전주이씨(全州李 氏), 청송심씨(靑松沈氏), 오씨, 고씨, 양씨, 백씨, 최씩, 신씨, 박씨 등이다. - 5 -


1950년대만 하더라도 원사창에 약 8,90호, 진목에 5,60호 정도가 있을 정도로 그 세가 컸다. 최근에 이장과 함께 파악한 사창의 세는 사창 1구에 43호 70여 명, 사창 2 구에 31가구 60여 명에 이른다. 2010년 어느 조사 자료에 따르면, 사창리는 모두 86가구 168명(남 79명, 여 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원사창은 웃돔 또는 웃갓(윗마을)과 아랫돔 또는 아랫갓(아랫마을)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원사창과 진목이 서로 대비되기도 하였다. 교육열에 있어서는 원사창이 앞섰지만 진 목은 풍류를 즐기는 여유를 지닌 마을이라는 평가가 있다. 우국정(優國亭)의 북쪽 50여 미터 떨어진 구릉지대가 점촌이다. 일제 말기까지만 하더라도 질그릇을 굽던 곳이었다. 사창의 어느 부자(富者)는 질그릇을 굽는 산사람들에게 적지 않 은 자금을 투자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점촌에서 질그릇을 굽던 토굴은 확인할 수가 없 다. 점촌에서 전봉준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150m 가량 가면 신점촌이다. 현재 신점촌에는 미 곡종합처리장과 오리농장 등이 들어서 있다. 신점촌에는 1940년대에 건립된 줄포 난산의 김해김씨 제실이 아직 남아 있다. 제실은 한국전쟁 당시 좌익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숫굴산과 대삿봉 사이의 저수지인 서당제는 일제 말기에 축조되었다. 서당제 아래의 사창 제는 한국농어촌공사가 1996년에 축조한 저수지로, 수혜 면적은 42ha이다. 마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마을 내부의 이념적 갈등으로, 그리고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하여 그 세가 급격히 줄었다는 게 마을 노인들의 전언이다.

3.

인물

사창리의 인물로는 일제시대에 보성전문에 전 재산을 희사한 안함평 여사와 전북대학교 총장 서리까지 오른 조정만 박사 등을 들 수 있다. 이외, 사법고시 출신의 이기섭(李基燮) 변호사도 사창리 출신이다. 이기섭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 해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변호사협회의 추천으로 판사에 임용되기도 하였던 이라고 한다. 1)

여사

평생을 광주리 장사와 주막을 하면서 모은 전 재산(논 16,000평, 밭 약 9,600평 등)을 1936년에 보성전문학교에 희사한 안함평(安咸平, 1879∼1937)은 사창리 진목에서 살았 다. 그의 출신은 사창리가 아닌 듯하며, 그가 왜 진목에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지 사창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진목의 초입에 상당한 규모의 집에서 혼자 살았다는 점과 적지 않은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안함평은 이 지역에서 지주 반열에 들었 던 부자였음이 분명하다. 인촌 김성수는 안함평이 희사한 재산을 박물관 여속 및 민속품 수집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당시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전 재산을 희사한 안함평에게 생활비를 보내주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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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하자 부안면 용산리의 공동묘지(현 고창군추모공원)에 안장하였다. 안함평이 살던 집은 진목의 사창교회 부근이었다고 한다. 규모가 있는 안함평의 집을 찾 아가 세배를 했다는 윤창수(85세)는 안함평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1988년 6월 22일에 고려대학교 박물관 팀은 용산리에 묻혀 있는 안함평의 유해를 천안의 공원묘지로 이장하였다. 그 해 6월 25일에는 안함평의 묘비명까지 세웠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남창 손진태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의 일부 공간에 민속품을 정리하 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안함평의 희사금을 토대로 유물을 본격 수집하여, 현재에는 국보 3 점과 보물 2점, 국가지정 기록물 2건 등을 포함해 고고·역사·민속·미술에 이르는 10만여 점의 유물과 기록물 등을 소장하고 있다. 안함평은 이후에 고려대학교 박물관 유공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민속품실에는 지금도 안함평의 희사금으로 수집된 의식주 전반에 걸친 다양한 민속품이 소장, 전시되어 있다. 『동아일보』는「敎育朝鮮의 一好事 -安咸平女史의 特志」(1936년 3월 14일자)라는 사설 에서 안함평의 희사는 ‘여성의 근대 교육에의 참여’라는 취지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찬사 를 아끼지 않았다. 안함평은 이외에도 부안공립보통학교(富安公立普通學校)의 학년 연장에 따른 교사 증축 및 제반 시설 구입을 위해 당시 50원을 희사하기도 하였다.

그림 5 안함평의 사진이 실린 1936년 당시의 기부와 관련한 『동아일보』 기사 전문.

<

여사의 기부 관련 신문기사 원문>

普成專門에 寄附 學校에선 獨立財産으로 永久記念事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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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敞의 安咸平女史 근래에 경향을 물론하고 교육 사업을 위하야 다대한 재산을 희사하는 인사가 뒤를 이어서 나타남 은 충심으로 찬하할 현상인데 또 ○○운 기쁜 소식이 있다. 高敞郡 富安 社倉里에 사는 安咸平 여사는 자기의 전 재산인 연 수입 正租 80석이나 받는 논 16,000여 평과 밭 9,600여 평이란 적지 아니한 재산을 보성전문학교를 위하여 내놓았다 한다. 동 여사는 방금 58세의 부인으로서 일찍이 홀로된 후로 사고무친한 외로운 몸으로서 수중에 있는 약간의 금을 기초로 오직 근검절약하여 섬 약한 여자의 손으로 티끌모아 태산을 이루는 심으로 전기의 재산을 모았는데, 이것은 실로 여사의 땀과 눈물로 이룬 결정인 동시에 여사의 전 재산이라 한다. 여사는 슬하에 자녀가 전무하고 쓸쓸 하게 오직 여생을 지내오든 바 세간에 흔히 있는 일과 같이 양자를 하여 이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 다 이것을 사회에 바치어 공공사업에 쓰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그 전 재산을 들여서 이제 보성전문학교를 위하여 제공하게 된 것이다. 동 교에서는 그 여사의 특지를 감사하는 동시에 이것 을 경상비에 쓰지 아니하고 재산을 영구히 보존하면서 고수입으로 매년 그 특지를 기념할만한 시 설을 하여서 동 여사의 이름을 영구히 기념하리라고 안여사의 금번 미거에 대하여 일반 인사의 칭 송이 많다한다. 안여사의 기부 후의 심경을 들어보면 “이번 기부의 계획은 수년 전부터 있었으나 약소한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말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진즉 발표할 용기가 없었으며, 기부가 너무 약소하여 오직 부끄러울 뿐이외다. 그러나 학교 당국에서 약소타하지 아니하시고 받아주심에 대하 여 감격하외다.” (『동아일보』1936년 3월 13일) 富安公普에 寄附金 遝至 전북 고창군 부안공립보통학교의 다년간 숙제이든 학년 연장 문제가 동 지방 유지들의 열렬한 운 동으로 해결되어 4월 1일부터 실시됨에 ○○교사 중축과 제반 설비에 대하여 동 면 내 유자 제씨 의 희사가 답지한다는데, 지난 8일까지 희사된 금액과 씨명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李○昇 700 원, ▲李○淵 200원, ▲崔南烈 200원, ▲金年洙 100원, ▲安咸平 50원.” (『조선중앙일보』1936년 5월 13일자)

2)

박사와 마스토미 장로 출신의 조정만(趙正萬, 1906∼1992)은 일본대학 공학부를 졸업(전자공학 박사)하

고 서울대학교 교수, 전북대․건국대 공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에는 전북대 총장 서리를 역임하였다. 1992년 3월에 자택인 서울시 서초구 반포 4동에서 86세의 일기로 타 계, 사창리 선영에 묻혔다. 조정만은 기독교 장로인 마스토미 야스사에몬( 富安在衛門)의 도움이 있었기에 공부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호남기독교 100년사-전북편』에서 조정만과 마스 토미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 강점기의 고창과 부안, 김제 지방 사람들은 일본인 마스토미를 ‘성자승부선생’이라 불렀다. 어 째서 식민 지배하에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왜놈’이라 하지 않고 ‘성자승부선생’이라 불렀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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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공학에 크게 공헌한 조정만은 마스토미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만일 마스토미가 호남에 오지 않았다면 조정만의 존재는 끝내 고창의 사창리의 가난한 농촌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조정만은 1906년 고창군 오산면 사창리의 빈촌에서 출생하였다. 13세까지 마을에서 운영하는 서 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마스토미가 설립한 오산학당 부설 기관인 오산강습소에 편입학하여 6개월 간 강습 과정을 마쳤다. 이후에 마스토미가 설립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지원하였으나 기초 실력이 약하여 불합격하고 말았다. 이후 고창고보 부설 고창고등강습소에서 1년을 이수하고 고창고보 2학년에 편입한 조정만은 사창 리의 집에서 고창읍내까지 8km의 먼 거리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고창고보 1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조정만은 마스토미가 준 장학금으로 일본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에 진학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서 울대학교 공과대학 창설에 공헌하였으며, 그 후 이리공과대학(현 전북대 공과대학)을 창설하는 데 기여하였다. 더불어 조정만은 실력을 인정받아 초대 이리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호남기독교 100년사-전북편』(김수진, 쿰란출판사, 1998), 297~298쪽)

,『마스토미 장로 이야기』(김충렬 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에 의하면, 마스토 미와 그의 부인 데르코는 1920년대 전북의 고창, 김제, 부안 등지에서 조선의 독립, 교육, 농업, 선교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는 것이다. 마스토미에 대한 이러한 우호적인 평가와는 달리 마스토미는 일제가 한국의 식민지화를 촉진하기 위한 전위 조직(이토히로부미가 조직했다고도 함)에 속한 인물이었다는 견해도 있어, 향후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어쨌든,『경향신문』(1995.12.16)의「일본인에 국민훈장 모란장 / 오산학당 설립 故 마스 토미 / 고창개발사업에 공헌 인정」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한국 정부가 고창군 부 안면에 오산고등학당을 설립한 마스토미의 공로를 인정해 마스토미의 딸에게 대신 국민훈 장 모란장을 수여하였다는 것이다. 조정만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스토미 외에 홍종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홍종 철은 부안면 소재지의 홍해농장주로서, 마스토미와 긴밀한 이었다. 원래 마스토미가 설립 한 농장이 홍해농장이었고, 농장 관리인이었던 홍종철은 마스토미를 이어 농장주가 되었 다. 홍종철과 동북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홍순범이고, 홍순범의 아들이 현 국회의원 홍영표이다.

4.

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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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날 밤이면 인근 마을의 굿패들까지, 시끌벅적하다. 치배(잽이)를 구성한 노련한 굿패들이 영기를 들고서 어울렸다. 백여 명이 디림을 하며 굿을 치니 이름 하여 합굿이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굿을 치며 하나가 되었다. 아니 하나가 되어 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했었다. 두레울력은 의무적이었다. 세벌매기가 끝나는 시점에는 마을의 부자들이 술과 고기를 준비하였다. 부잣집 머슴을 소에다 태운 굿패들이 굿을 치 면서 소를 부잣집으로 몰았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굿을 치는 이들은 소리 없이 원한을 키워갔다.

1)

당산제

정월(正月) 보름날 밤에 사창리의 사람들은 당산제를 지낸다. 정월 4일경부터 사람들은 ‘당산님 모시기 위해 쌀을 걷는다’라는 명분을 내세운 ‘마당밟기’ 를 한다. 마당밟기는 대략 3,4일 걸린다. 마당밟기를 하기 전에 먼저 ‘샘굿’을 했다. 굿패 들이 마을의 황샘, 새샘, 빈지샘, 가운데샘, 꾕방샘, 간암리샘 등을 돌면서 굿을 쳤다. 샘굿 을 마치면 집집이 돌면서 마당밟기를 했다. 부엌에서는 ‘조왕굿’을, 장독대 앞에서는 ‘철륭 굿’을, 창고 앞에서는 ‘곳간굿’을 쳤다. 마당밟기를 하는 동안에 한쪽에서는 사각의 등(초롱)을 만들었다. 높이가 30cm 정도의 사 각의 대나무살 골조에다 한지를 바른다. 바른 한지가 마르면 여러 가지 색을 엷게 물들이 기도 했다. 촛불이 켜진 수많은 등은 정월 14일부터 마을의 웃당산나무와 아랫당산나무 사이를 가득 메웠다. 형형색색의 등은 정월 14일 밤과 15일 밤의 마을을 황홀케 하였다. 정월 15일 아침이 되면 마을의 장정들은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짚을 걷었다. 짚을 걷을 때 는 젊은 굿패들(전수자들)이 치배를 구성하였다. 한 집에 서너 뭇씩 걷는 짚은 꿩방이라는 곳에 쌓아놓고 ‘줄을 디린다’, 즉 줄을 꼰다. 줄은 두 개가 되었는데, 하나는 숫줄이고 또 하나는 암줄이었다. 숫줄을 할아버지줄이라고 하고 암줄을 할머니줄이라고 했다. 숫줄과 암줄의 머리를 맞대어 놓고 줄을 만들어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줄은 약 50미터가 되고, 두께는 어른이 줄에 걸터앉았을 때 그의 발이 땅에 닿아서는 안 될 정도이다. 줄이 만들어지면 간단한 고사를 지낸다. 마을을 상징하는 영기를 땅에다 꽂아 놓고 줄에 술을 부은 다음 숫줄과 암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줄굿’을 쳤다. 줄굿을 친 후에는 꿩방에 있던 줄을 마을 앞으로 모셨다. 아이들과 청년들이 줄을 메고서 장난을 치면서 마을 중심 부를 돌아서 내려오는 과정을 ‘오방돌기’라고 한다. 줄 앞의 고에다 영기를 꽂고 고 뒤에 다는 선소리할 사람을 태웠다. 줄에 탄 이는 선소리꾼으로서 소리를 잘해야 하고, 더불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나중에 술을 한 말 정도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굿패가 앞서고 줄은 굿패 뒤를 따르면서 장난을 치다가 당산나무 앞 모시밭에 도착하면 - 10 -


동서로 길게 늘어뜨린다. 정월 보름날. 초저녁부터 마을 사람들은 긴장을 한다. 사창리 인근 마을의 노련한 굿패들 이 치배를 구성하고서 마을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부안면 소재지와 인근의 용산, 오산, 배 올리(운양의 으뜸마을), 조양, 구현 등과 신림면의 보리메, 임리, 벽송, 법지 등, 흥덕면의 석교 등지의 쟁쟁한 굿패들이 굿을 치면서 사창리로 들어온다. 이때 노련한 이들로 이루 어진 굿패는 영기를 들고서 진경변(진목 앞의 내)까지 마중을 나간다. 굿패에 앞서서 횃불과 영기를 든 유소년들이 앞장선다. 두 마을의 굿패가 만나면 영기를 서로 주고받는다. 굿패가 마을로 들어와도 된다는 것을 승낙하는 일종의 의례로, ‘굿마지 굿’이라고도 한다. 15일 저녁에 사창 마을로 들어온 인근 마을의 굿패는 많게는 11개에 이른다. 굿패의 구성 원은 10명 정도, 11개 마을의 굿패가 모두 합치면 1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함께 움직 이면서 굿을 치니 가관이었다. 더군다나 남북으로 내건 100여 개의 휘황찬란한 오색등과 수많은 구경꾼들이 서로 어울리니, 장관이 따로 없다. 이렇듯 당산제는 푸르스름한 저녁부터 시작되어 어둠을 밝히는 백여 개의 등과 수많은 그 림자가 하나가 될 때 절정을 이룬다. 더불어 푸짐하게 차린 음식과 30동 이상 빚은 술을 인근의 마을 사람들과 실컷 먹고 마셨다. 10시경이 되면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줄은 동서로 길게 뻗쳐놓고 동편에는 남자들이 서 고 서편에는 여자들이 선다. 이때 동편의 줄은 숫줄이고 서편의 줄은 암줄이다. 편이 갈라 지면 암줄과 숫줄을 서로 연결하고, 영기 두 개를 땅에다 박았다. 보통 세 번을 겨뤄 두 번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데, 항상 서편의 여자들이 이겼다. 여자편 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하여 남자들이 일부러 져 주기 때문이다. 이외, 마을별 줄다 리기도 있었다. 줄다리기는 새벽 1시경이 되어야 끝났고, 이후에는 암줄과 숫줄을 분리해 각각의 당산에 옷을 입혔다. 당산에 줄을 감고서 당산제를 지낸다. 보통 할아버지당산에 먼저 줄을 감는다. 당산에다 줄을 감을 때에 한 줄씩 메고서 이동하는데, 오방돌기와는 달리 장난을 치지 않는다. 줄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고 고를 위로 향하게 한다. 줄을 감을 때 꼬리 부분을 잡고 있는 사람은 길게 원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많이 뛰어야 한다. 줄을 감고서 당산나무 앞에 간단한 상을 차린다. 세 번 술을 따르는 것으로 제를 마무리 지었다. 보통 할아버지당산에서 먼저 제를 지내지만 때에 따라서는 할머니당산에 먼저 제 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축문은 읽지 않는다. 생선과 나물, 삼실과와 술, 떡(백설기) 등을 당산나무 아래에 차려놓고 제관(祭官)과 축관 (祝官)이 홀기(笏記)에 따라서 제를 지냈다. 제관은 연장자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한다. 보통 - 11 -


13일 정도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간단한 회의를 열고 제관을 선정했다. 제관으로 뽑히면 정월 14일과 15일 이틀간은 목욕재계해야 한다. 2)

당산제

과거의 당산제는 제가 거행되는 동안에 주민들이 굿을 치면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한 해의 복을 빌었다. 근래에는 당산제를 아주 간소하게 지낸다. 금기하는 것도 거의 없다. 다만 제관만은 아직도 까다로운 금기를 준수하고 있다.(『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전 북대학교 박물관, 1984년, 137∼8쪽 참고.) 이러한 당산제는 2009년까지 이어져 오다가 2010년부터는 정월 14일과 15일 밤에 제만 지낸다. 밤 10시경에 웃당산과 아랫당산 앞에서 불을 켜고 삼실과와 떡, 술을 차려 놓고 제를 지낸다. 3) 풍장굿과 백중굿 사창에는 여느 마을과 달리 마을 공동체와 관련한 민속이 이어져 왔다. 당산제와 두레울 력, 풍장굿 등은 다른 여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전승돼 왔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과, 이후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이러한 민속의 전승은 중단되었고, 마을은 쇄락해져갔다. 『고창의 마을굿』에 의하면, 사창리의 풍물굿(마을굿) 전수자는 심봉길(심귀동이라고도 함. 쇠, 작고), 오장술(장구, 작고), 오생길(장구, 작고), 양금암(소고, 작고) 등이었다. 굿패 의 치배는 나발 1명, 쇠 3명, 쟁 1명, 장구 2,3명, 북 1,2명, 소고 3,4명 정도. 이들은 모 두 고깔을 쓰고 디림(색띠)을 하며 깃발인 영기 2개를 편성했다고 한다. 사창의 풍물굿은 주로 정월의 당산제와 줄다리기, 여름철의 풍장굿과 백중굿 등을 통해서 전승되었다. 정월의 당산제 때는 인근의 10여 개 마을의 굿패들이 모여서 함께 ‘합굿’을 쳤다. 여름에는 풍장굿과 백중굿이 왕성하였다. 여름철 김매기를 하면서는 풍장굿을 쳤다. 풍장굿은 김매기 중 마지막 세벌매기가 끝나는 시점에 거행된,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두레굿의 일종이다. 유두, 칠석, 백중 때에도 굿을 쳤다. 하지만 두레굿처럼 정기적으로 연행되는 굿을 풍장굿, 또는 풍물굿이라 하였다. 단 지 백중날 치는 굿은 유독 ‘백중굿’이라 불렀다. 이러한 굿의 모두를 ‘마을굿’ 또는 ‘풍물 굿’이라 하였다. 두레울력을 통해 김매기 할 때 마을의 전 주민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만두리 때의 두레울력은 여러 날에 걸쳐서 하지 않고 단 하루에 마무리를 짓는다. 아침에 마을 사람들 은 북과 장구, 징 등을 들고서 논둑에서 굿을 쳤다. 김매기 하던 이들은 소리로써 박자를 맞추었다. 김매기를 마친 사람들은 마을의 부잣집 머슴을 소에다 태웠다. 부잣집 머슴을 태우는 이 - 12 -


당일에 부잣집에서 잔치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굿꾼들은 잔칫집에서 본격적으로 굿 을 치기 전에 당산나무와 꿩방을 찾아 굿을 쳤다. 이는 굿을 치겠다고 마을의 신명께 신 고하는 의식의 일종이다. 이후에 부잣집으로 이동하여 굿을 치면서 함께 음식을 먹고 술 을 마시면서 놀았다.

4)

놀이

마을에서 서당제로 오르는 야트막한 광장인 꿩방에서 이뤄지는 놀이 ‘꿩치기’는 마을의 공 동체를 강화하는 놀이였다. 격렬했지만 함께 산에 나무하러 가기 직전에 하던 일상 놀이 였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서 끈끈한 공동체 의식을 확장해 나갔다. 꿩치기는 아마 ‘장치기 놀이’를 일컬었을 것이다. 장치기놀이란,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1.5∼2m 길이의 막대기를 가지고서 공을 쳐서 적진에 넣으면 이기는 놀이로, 요즘의 필드 하키와 유사하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놀이였다. 장대 길이나 형상에 일정한 규격이 있는 건 아니다. 공은 새끼로 둥글게 만들거나 나무로 둥글게 깎아서 만들었다. 사창리의 꿩치기도 새끼나 짚으로 만든 둥근 공 또는 나무를 둥글게 깎아서 불에 살짝 그 슬려 만든 공을 작대기로 상대편 골대에 집어넣는 놀이였다. 놀이가 격렬해 때론 갈비뼈 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공의 크기는 어른 주먹 두 개의 크기라고 한다. 사창리의 ‘꿩치기’라는 이름은 ‘공치기’에서 딴 것 같기도 하나, 풍수지리상 복치형에서 비 롯돼 불려진 ‘꿩방’에서 행해진 놀이라는 데서 불러진 이름 같기도 하다.

그림 7 꿩방에서 바라본 원사창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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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현재 조직․학교․종교․산업 마을처럼 사창리도 이장과 부녀회장, 새마을 지도자, 노인회장 등이 있다. 마을의 이

장은 여성으로, 나미(40세)다. 노인회 회장은 이문식(77세), 부녀회 회장은 고미순, 새마을 지도자는 윤철수 등이다. 진목에는 한때 400여 명이 다녔다는, 1965년에 설립한 동남초등학교가 있다. 사창리는 물 론 인근의 조양, 백운, 중등 등의 아이들이 다녔던 꽤 큰 규모의 학교였다. 학교는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1990년경에 폐교되었다. 진목으로 가는 초입 언덕에 사창교회가 있다. 사창교회는 원래 원사창에 있던 교회였으나 197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소속이며, 목사는 윤진열이다. 1950년 전후만 하더라도 마을에는 모시밭이 많았다고 한다. 여름철에 모시는 세 차례 정 도 수확을 한다. 벤 모싯대의 껍질을 벗기는 작업에서부터 껍질을 품칼로 품는 작업은 주 로 남정네들이 한다. 품는 작업이란 작은 칼로 껍질의 목피를 벗겨내는 것을 말한다. 목피 를 벗겨낸 깨끗한 껍질은 새끼줄에다가 걸어 말린다. 새끼줄에 걸린 연초록색의 모시껍질 이 완연히 마르면 새하얗게 된다. 새하얀 모시껍질을 무릎으로 누르고 앉아서 손톱으로 올락지(실오라기)를 가린다. 이렇게 하여 나온 모시올락지를 가지고 베를 짜니 ‘모시베’다. 이렇게 짠 모시를 장에다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도 사창리 사람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최근에 논농사(수도작)와 밭농사에서 축산농으로 전환하는 추세도 나타나고 있다. 사창 1구에는 축산농가 5호(육우 3호, 오리 1호, 양계 1호)가 있다. 사창 2구에도 축산농가 6호(육우 5호, 유우 1호)가 있다. 이외, 인 삼경작 농가 1호가 있다. 신점촌에는 만경영농법인이 운영하는 유풍미곡종합처리장이 있다. 미곡종합처리장(RPC)이 란 벼를 수확한 후 건조, 저장, 도정, 검사, 판매 등의 모든 과정을 개별 농가 단위가 아닌 대단위 자동화 과정으로 일괄 처리하는 시설을 말한다. 원래는 5호 정도가 살던 신점촌에 정미소가 운영된 것은 1974년경 김해동에 의해서였다. 김해동은 1998년경에 전봉준로 건너편 들판에 미곡종합처리장을 설립하였다. 한때 미곡종 합처리장은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중간에 소유권 이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한다. 2010년 3월에 만경영농조합법인 미곡종합처리장이 유풍미곡 종합처리장을 전격 인수하면서 유풍미곡종합처리장은 만경영농조합법인 미곡종합처리장의 고창지점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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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유풍미곡종합처리장의 모습.

2)

유적 ‘사창터’가 사창리에 있었다고는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지석묘 2기는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진목 가는 초입의 소나무밭과 점촌의 인삼밭 부근의 고인돌은 온전히 보 존돼 있다. 지석묘 2기 가운데 1기는 마을 앞 소나무밭에 있고, 다른 1기는 점촌의 인삼밭 부근에 있다. 고인돌의 크기와 방향은 아래 표와 같다(『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전북대 학교 박물관, 1984년, 62쪽 참고).

지석묘

장축길이

단축길이

두께

장축방향

비고

1호 2호

390 300

278 180

88 40

남-북 남-북

진목 초입 점촌

이외, 진목 가는 길 왼쪽 들에 있었다는 고인돌은 사라져버렸다. 점촌의 ‘독보’라고 부르는 고인돌 역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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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점촌에 있는 고인돌의 모습.

‘숯굴’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이곳에서 한때 ‘동장자’(童將者, 젊디젊은 장군을 일컬음)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숯굴제를 동장자라고도 부른다. 고창에 사창지(社倉址)는 두 곳이다. 하나는 해리면 동호(冬湖) 마을의 사창지이다. 지금은 지형이 바뀌고 주변에 민가가 많아서 찾아볼 수 없다(『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전북대학교 박물관, 1984년, 157쪽 참고). 부안면에는 창내(倉內)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토성지 내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창지(倉址)가 있다. 그 정확한 위치나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3)

사창리

한국전쟁(6․25전쟁) 직전부터 사창리에는 좌익 세력이 암약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마을의 노인들은 증언한다. 전쟁이 나면서 인민군 몇 명이 사창리에 들어왔고, 사창리의 몇몇 젊 은이들은 이들에게 동조하였던 것 같다. 인민군 및 지역의 좌익 세력들이 장악하고 정치를 하던 당시의 시공간을 ‘인공(인민공화국 의 준말)’ 치하라고 한다. 인공 치하에 부안면에서도 인민재판이 있었다고 한다. 재판으로 처형당한 이는 두 명. 그 중 한 사람이 진목에 살았던 이였다고 한다. 1950년 9월경에 인민군이 퇴각하고 지방 빨치산들이 신점촌의 김씨 제실을 활동 근거지 로 삼고서 저항하였다. 흥덕 배풍산의 18전투대대와 잦은 교전을 벌였던 빨치산들은 18대 대의 진입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선운산으로 들어갔다. 선운산으로 들어간 일부 젊 은이들은 경찰의 소탕 작전으로 죽었다. 약 2,30명의 젊은이들은 18전투대대에 협조하는 우익들에 의해서 색출당하여, 부안면 지 서로 끌려갔다. 부안면 지서로 끌려간 젊은이들은 살아서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다. 유난히 민속 활동이 활발했던 사창리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마을 구성원들 간의 갈등 이 고조되었던 건, 마을의 성씨 간 헤게모니 다툼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주요 성씨가 민속과 두레울력을 통해서 마을 공동체의 운영을 주도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나갔 - 16 -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변부의 성씨들은 주요 성씨들에게 반감을 갖게 되고, 이러한 반감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좌익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주신 분 (77세, 사창리 노인회 회장 / 2011.6.18, 8.19.) 윤창수(85세, 사창리 전 노인회 회장 / 2011.8.22.) 조여의(75세, 사창리 주민 / 2011.8.23.) 김재님(81세, 조정만 박사의 질부 / 2011.8.15.) 나 미(40세, 사창리 이장 / 2011.8.17.) 이호근(48세, 사창리 전 이장 / 2011.8.17.) 장호영(40세, 유풍종합미곡처리장 직원 / 2011.8.23.) 이외 사창리의 여러 분(2011.8.15, 8.19, 8.20.)

참고문헌 고려대학교 박물관 홈페이지(http://museum.korea.ac.kr/) 『고창군지(高敞郡誌)』고창군지편찬위원회 편,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10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편, 고창문화원, 2003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고창의 마을굿』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현민 유진오 제헌헌법 관계 자료집』고려대학교 박물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9 「朝鮮後期 民庫運營의 性格과 運營權」張東杓,『碧史李佑成敎授定年退職紀念論叢』, 1990 「朝鮮後期 地方官廳의 民庫設立과 運營」金龍德,『歷史學報』133, 1992 『호남기독교 100년사 -전북편』김수진, 쿰란출판사, 1998 『마스토미 장로 이야기』김충렬,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 『동아일보』(1936.3.13) 『조선중앙일보』(1936.5.13) 『동아일보』(1988.6.20) 『경향신문』(199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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