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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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수(石澗水) 물이 좋아 “덕우물”로 부른 덕정리

1. 덕정리의 위치와 유래 덕정리는 고창읍 18개 법정리 중 하나이지만 다른 법정리에 비해 그 면적이 대체로 좁은 지역이다. 고창읍사무소에서 서북방향 면도 105선을 타고 약 3km쯤 가다보면 고창읍 도산 방향에서 부안면 소재지로 가는 군도 13호선이 맞닿은 곳. 그 삼거리 지점이 덕정리의 중앙 “덕우물” 마을이다. 2013년 5월말 현재 덕정리의 총면적 8.19k㎡중 대지(垈地)와 도로 등을 제외한 남은 면적은 5.59㎢인데 그 중 전 1.39㎢ 답 4.16㎢이며 임야 0.04㎢로 비교적 산보 다 농경지가 많은 평원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마을의 위치를 볼 때 동쪽에는 율계리와 접하고 서쪽에는 죽림리, 남쪽에는 주곡리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북쪽은 신월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덕정리의 변천과정을 보면 구한말 1895년(고종 32년) 이후까지 고창현 산내면 관할에 덕정 리, 석탄리, 제내리가 각각 독립되어 있었다. 1914년 3월 1일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고창군, 흥덕군, 무장군이 고창군에 통폐합되면서 덕정리, 석탄리, 제내리가 고창군 오산면에 편입되었다. 다시 1935년 3월 1일 고창군의 17개 면이 14개면으로 통폐합되면서 석탄리, 제 내리가 고창면 덕정리에 통합. 법정리가 되었는데 2013년 5월말 현재 덕정, 석탄 2개의 행정 리로 나뉘고 제내마을은 석탄마을의 자연마을로 오늘에 이르는바 마을의 구성과 그 유래는 다 음과 같다.

1) 덕정마을 덕정마을은 고창읍의 진산(鎭山) 방장산 벽오봉에서 기맥(起脈)한 간용(幹龍)이 서북방으 로 행진하여 덕고개 아래 옥녀봉(玉女峰)을 이루었다. 손사(巽巳)로 낙맥(落脈)한 지맥(枝脈)은 관은정(冠銀亭) 고개너머 이당산(尼堂山) 을 높이 세웠으니 사실재(沙瑟峙)로 가는 지맥에서 구산봉의 일부가 을진방(乙辰方) 으로 나가면서 덕정마을로 그 용이 내려 왔다. 마을

좌측으로

구을산(九乙山:군솔밭)

이 느려있고 우측으로 “양류등(楊柳嶝:버 댕이등)”이 휘감고 있으니 마을 형세가 마치 누워 있는 소(와우:臥牛)의 형국으 로 비유되지 않으랴. 풍수상 보는 이에 따라 그 견해쯤 각각 다르겠지만.... 풍수 지사들의 하는 말이다. “덕우물”이란 마을

덕정마을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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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칭도 처음에는 원어음인 “더그물”로 발음을 하였는바 마을의 유래는 1982년 고창군에서 발행한 “모양성의 얼”에서 그 지명 유래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됨을 볼 수 있다.

“1398년(태조 7년) 안씨가 자리를 잡고 그전 고려말에는 진씨가 들어왔으며 조선조에 조 씨등이 마을을 이루었다. 최초에는 역촌으로 부르다가 말에 먹일 물과 초지가 풍부함으로 ” 덕우물“로 바꿨으며 행정구역 변경으로 덕정으로 개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습에 젖은 마을출신 고로들은 입촌 성씨 순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陳氏~田氏~宋씨~曺氏~丁氏~李氏 순으로 설명하며 석간수 물이 좋아 덕우물(덕정)이라 부르 게 되었다는 것을 뿌리 깊게 인식하고 있다.

2) 석탄마을 석탄마을은 덕정마을 앞 약 0.7㎞쯤 떨 어진 들녘 건너편에 있다. 마을 앞에는 고 창천(川)이 흐르고 마을의 지세(地勢) 역 시 이당산(尼堂山)에서 사실재(沙瑟峙)로 가는 지맥(地脈) 중 분기(分枝)한 지맥에 서 율계와 덕정 사이의 간용(幹龍)의 기운 을 받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좌측에 석탄정 바위의 소나무 숲과 마을 우측의 배롱쟁이 바위숲이 비보(裨補)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특 히 마을을 향하여 사방(四方)에서 뻗어 내 린 9개의 산 능선을 풍수상 구룡(九龍)이 라 하였으니 풍수에서는 이 지역을 일컬어 구룡롱주(九龍弄珠)라 했다. “아홉의 용들이 한 개

의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세” 즉 석탄정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닌지... 석탄마을은 고창읍사무소에서 서쪽으로 고창천의 제방을 따라 설치된 군도 101호선으로 약 3㎞쯤 지점에 석탄마을이 있다. 마을의 유래에 있어 1988년 10월 이 마을 회관 신축시 기록 된 것으로 보이는 구절에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우리 마을 석탄(石灘)은 방장(方丈)을 조산

(祖山)으로 마을앞에는 숱한 역사를 간직한 ‘돌여울’이 흐르기에 ”석탄“이라 명명했다”라는 내 용이 기록되어 있고 또 “모양성의 얼” 지명유래편에는 “마을 양쪽에 두 개의 조그만 바위산이

있었다. 옛날에는 바다로써 큰 배가 많은 양의 곡식을 싣고 들어옴으로써 부자가 되리라는 말 에 들어온 배를 다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곳에 큰 정자나무를 심어 ”석탄정“이란 정 자를 짓게 되니 마을 이름을 석탄으로 하였다. 그리고 마을을 이룬 것은 1630년 인조때 고흥 류씨(高興柳氏)들이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석탄정은 설립 자 류운(柳澐)이 35세 당시(1581년 선조 14년) 설립한 기록이 있고 마을 고로(古老)들도 같은 내용으로 제언함으로 석탄정 설립이후 약 50여년 후부터 석탄 유운의 장남 경홍(慶弘)으로부 터 입향 설기 된 마을로 고로들의 설명이 타당성이 있다.

3) 제내마을 제내마을 역시 덕정마을 좌측의 구을산 아래쪽 능선에 있다. 이당산(尼堂山)에서 사실재로 가는 지맥 중 율계와 덕정으로 발달하는 두 능선 계곡의 구을산 쪽 중턱에 형성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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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마을보다 덕정마을이 근거리에 위 치했음에도 석탄 행정리에 속한 것은 마 을크기(인구, 가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도 있지만 실상은 그 마을의 산계(山系) 와 수계(水系)가 제내 쪽에서 석탄방향으 로 연계되었기에 석탄 행정리에 속한 자 연마을이 된 것 같다. 고창읍 사무소에서 서북방향 면도 105선을 타고 가다가 덕정 마을 약 100m 남기고 우측방향의 마을길 로 들어간다. 이 마을이 설기된 것은 1700년경 여산 송씨 만징(礪山宋氏 晩徵)이 처가(妻家:고

제내마을전경

창읍 석탄 고흥류氏) 따라 정읍 입암에서 입거하여 주변마을 훈장으로 근근부지하며 3대까지 살았다. 그러나 4대째 내려오며 손자가 7명이 출생됨에 이후 가세도 늘고 자손이 번창해짐으 로 덕우물 마을 및 주변에 분가 세거하게 되었다. 한편 1880년경은 서원옥(徐源玉:릉참봉)이 이웃 율계마을에서 입촌 부호를 이루고 살았다. 저수지가 축조된 것은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 인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추정) 당시 마을양쪽 능선 사이에 제방을 쌓아 당시 논(28마지기 가량)이 저수지가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점방(경방)골로 불려오다가 마을이 형성되므로 그때 부터 방죽안으로 부르게 되니 한자어인 제내(堤內)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유래가 있다. 그 러나 근세의 수리시설 발달로 1994년 고창군청 주관 제내지구 경지정리 사업으로 저수지는 없어지고 경지 정리된 논만 남아있다.

2. 자연환경과 지명 1) 덕정리의 자연환경 덕정리 자연환경은 비교적 산보다 논과 밭이 많다. 앞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 벽오봉에서 뻗어 내린 산맥이 서북쪽으로 향하여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루며 마을의 배산(偝山)인 이당산(尼堂山)을 이루었다. 마을이 형성되게 된 산계(山系)를 보면 그 이당산 지 맥에서 덕정 제내마을까지는 고도가 높지 않은 완만한 구릉(丘陵)을 이룬 지세로 법정리인 신 월, 경방 능선을 거쳐 덕정마을까지 고만고만하게 이어온 산계(山系)이고 수계(水系) 역시 마 을 동쪽으로는 이당산에서 발원한 물이 경방, 율계 뒷능선의 골을 적시며 제내 마을 앞 “(점

방:占方) 골”로 흘러 석탄 들판으로 유입되고 있다. 다시 마을서편으로는 속칭 “웃드랭이골”계곡에서 발원한 봉곡천 농수로가 신동, 당촌 앞 들 판 중앙으로 흘러 역시 죽림마을 앞으로 유입되는 지형조건을 갖고 있다. 총체적인 지형조건 을 설명하면 덕정리는 타 지역에 비하여 크고 작은 산이나 철요(凸凹)가 없는 단순한 지형지 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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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의 지명 버댕이등 : 버댕이등은 덕정마을 서쪽이며 옛날엔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던 마을의 서 편 능선이다. 풍수상 마을의 우백호(右白虎)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버드나무는 한 그 루도 없다. 폐교된 전 서초등학교 건물과 덕정 보건지소, 서부교회 등의 건물이 있는 능선 이다. - 조양목 님 ○ 버댕이들 : 버댕이들은 덕정마을 앞쪽의 버댕이등 전 서초등학교 앞 들녘의 평원지역 을 말한다. 덕정리의 경지면적 중 약 절반 이상이 이곳 들녘에 있다. -정병한 님 ○ 군솔밭 : 굴솔밭은 한자어인 구을산을 말하며 현재도 유일하게 소나무가 아닌 편백이 무성히 자라고 있는 덕정 마을의 동쪽의 산이다. 풍수상 좌청룡(左靑龍) 역할을 하고 있고 제내마을쪽에서는 서남쪽에 위치한 능선의 산으로 이당산 줄기에서 구을산까지는 새을자 (乙) 모양의 산봉우리가 아홉 번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산이며 덕정, 제내마을에 분포되 어 살고 있는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선조 묘소가 있는 산이다. - 송하현 님 ○ 뙤곙이 나무갓 : 덕정리의 지형적 환경은 단순한 편이어서 마을 뒤쪽 서편 덕정마을에 살고 있는 조규택의 조부모 등 묘소가 있는 약 600평 가량의 평전(平田)의 위치를 말한다. - 안성철 님 ○ 뒷밭터 : 뒷밭터 역시 덕정마을 뒤편의 주령 주위에 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묘소 8기가 있는 약 200여평의 위치 주변을 말한다. - 안성철 님 ○ 소시암골 : 덕정마을 뒷등 아래 북편으로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제실이 있는 아래쪽 논 귀퉁이 골의 옛날 작은 우물이었던 들판이다. - 조양목 님 ○ 만수동 : 창녕 조씨의 입향조 홍성(弘聖)공외에 입향전후의 윗대 어른들의 제사를 모 시기 위해 설립한 제실(율수재:聿修齋)이 있는 곳으로 소세암골 위쪽의 지역이다. - 안성철 님 ○ 방연대 : 방연대는 덕정마을 뒷 편이며 고수면 은사리에 살고 있는 죽산 안씨(竹山 安 氏)의 선산묘소 6기가 있는 지대로 지형지세가 날고 있는 “소리개”의 형상으로 비유하여 놓을 방(放)자와 솔개연(鳶)자를 붙여 부르는 지명이며 마을 뒤 주령 주변 한 켠을 말한다. - 정병 한 님 ○ 배롱쟁이 :

석탄마을 서쪽에 있는 일명 바위섬의 평전으로 옛날엔 백일홍나무

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지역의 방언인 배롱나무를 “배롱쟁이”로 불려오던 지대이다. 특이한 것은 덕정지구 경지정리 할 때 논으로 정리를 할 수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풍수 상 전래되어 온 “배”의 후미로 인식되어 보존해야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 지금까지 보존 되고 있으며 현재는 백일홍보다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한 지대이다.

- 문동인 님

3) 시대적 변모된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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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내 저수지 제내마을 1994년

앞에는

제내지구

저수지가

있었다.

경지정리사업(총면적

98,098㎡)시 논으로 정리되어 없어졌다. 지금의 덕정으로 가는 105선 도로변인 율 계마을쪽 능선과 제내마을쪽 능선사이의 100여m에 제방을 쌓은 저수지가 있었는 데 저수지에 물이 만수위된 면적은 논 약 28마지기(약 5,600여평) 정도의 면적이라 한다. 저수지가 축조된 시기에 대하여는 정확 제내저수지

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지역 제내.

신월마을에 살고 있는 고로(古老)들의 알고 있는 속설(俗說)에 의하면 “제내방죽은 임진난때

축조된 것”으로 전래(傳來)된다는 것이다. 이 속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로는 1760년(영 조 36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고창현의 인구, 인물, 지리, 풍속 등과 특히 제언(堤 堰:방죽:저수지)조에는 산내면 관내에 3개의 제언(방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경방동 제(京方洞堤)가 있고 주위 743척(尺) 수심 5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방동은 지금의 신월리의 경방마을을 의미한다. 그 외 1793년에 편찬된 나주진관 고창현 읍지(羅州鎭管高敞縣邑誌)에는 경방동이 아닌 점방동제(占方洞堤)로 표기되고 재군북7리(在郡北7里)로 주위 1080척 수심 5척 으로 기록되어있다. 지금도 제내마을 앞에서 신월리의 경방 마을까지를 경방골 또는 점방골로 그 명칭이 불려지고 있고 경방마을 주위의 지리적 여건상 저수지의 축조흔적이 없는 것을 고 려하면 제내 저수지가 경방제 또는 점방동제임이 일치되고 있기 때문이다.(송국현) 오산면사무소 터 덕정리는 1935년 3월 1일 이전까지는 고창군 오산면 관내였다. 그 면사무소 소재지가 덕정 마을이고 지금의 최동순(50세)의 집터가 오산면사무소가 설치된 장소였다. 덕정마을에 인구, 가호가 융성했던 시기에는 주위에서 오산면을 일컬어 “덕정면”이라 호칭한 때도 있었다고 한 다.(정병한)

○ 하인정 터 하인정(何人亭)은 1880년경 제내마을에 이주하여 부호를 이룬 서원옥(徐源玉:참봉)이 세운 정자(목조 3간 마루 중앙침실)이다. 정자가 세워진 위치는 제내마을 앞 저수지 건너편이다. 하인정이 세워진 시기와 배경 등이 제내마을과 연관되어 있어 기록하게 된다.

“이천서씨 족보 문헌편에” 는 하인정기(何人亭記)가 있다. 1916년대 후반 3월에 노우(老 友) 기우만(奇宇萬)의 근서(謹書)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략하면 “하인정의 연방죽

(蓮堤) 위를 오르면 작은 봉우리가 있어 정자터로 드났으니 하인서침랑원옥(何人徐寢郞:참 봉의 별칭, 源玉)이 새로 정자를 신축하였는데 항상 존경하는 벗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이 이 정자의 이름을 하인정이라 명명(命名)한다. 이 연제(蓮堤)에 임하여 정자를 이름함은 연꽃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니 염계주돈이(濂溪周惇頤)의애연설(愛蓮說)에 다 이렇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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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으니 하물며 말단에 있는 하인(何人)이 소층이 진정한 참된 사랑을 보고 이같은 마음을 바꾸지 않겠는가? 이와같이 바라 보고 기대하는 마음은 후인들도 다 같은 마음이다.....” 라는 내용의 글 구절인 바 제내 저수지로 존치(存置)되고 있을 때는 연꽃과 모란이 수면을 덮을 정도였다는 고로(古老)들의 제언이며 1950년 6.25 직 후까지 정자는 있었지만 수복이 될무렵 뜯겨졌다고 한다. - 서춘수 님 ○ 서초등학교터

서초등학교 부지

덕정마을 서편(버댕이등) 끝자락에 서 초등학교(당시 서국민학교)가 있었다. 1967년 11월 24일 당시 덕정리 및 주변 학구에 살고 있 는 주민들이 일체가 되어 “고창초등학교 덕정분교” 설립 계획을 세우고 당시 윤재은을 추진위 원장으로 선출하여 기금모금 중 학구주민 모두 십시일반 기금이 기부 되었는대 그 중 서삼현 벼 17석(당시 벼 1석:54kg 2가마) 송호연 10석 조양목 5석 서도현, 이의철, 각각 7석이 기부 되니 16필지 밭(약 3,000여평)이 학교부지로 정해졌다. 당시 고창교육청에서는 학교교사 슬라브 2층 408평을 신축하고 1968. 3. 1 고창초등학교 덕정분교로 명명

학생수 203명(4학급)으로 개교하여 관리 중 1970년 3월 1일 고창 서초

등학교로 승격된 후 학생수 579명으로 늘기도 했다. 그러나 산업화에 따른 농촌 이탈현상 이 늘고 인구가 감소 되므로 학교 설립이후 30년만인 소되니 더 이상 관리 할 수 없어

1998년 2. 28 학생수 36명으로 감

폐교된 역사가 있다. - 황진희 님

○ 물레방아간 터 석탄마을 동편(석탄정 바로 옆)에 물레방아간이 있었다. 물레바퀴를 돌려주는 물의 수원 (水源)은 고창천의 윗보와 성두골에서 발원한 냇물이다. 석교앞 들을 적신 물은 바로 석탄 들을 적셔 다시 고창천으로 유입되는 물인데 그 물을 이용한 절구통 물방아간이다. 동력원이 미비했던 50~60년대 초까지도 물레방아는 석탄, 덕정, 제내, 율계 마을의 필수 의 용도로 사용되었고 반경 2~3km 주변마을에서도 그 물방아로 곡식을 찧어가던 방앗간이 다. 대중가요의 노랫말같은 옛 추억이 묻어난다는 방앗간이었다며 그 옛날을 회포하는 석탄 마을 고로의 설명이다. 도시의 산업화와 농촌의 기계화 영농으로 농기계 사용이 활발해지자 1988년 봄철(당시 고창농조 덕정지구 경지정리 417hr) 사업이 시작되니 그 때까지 석교천과 고창천의 윗보, 아랫보를 설치, 농사를 짓던 석탄마을 동편 들녘은 농수로 시설이 완비되니 석교천 물길은 엉뚱한 학전마을 위쪽으로 흐르게 하였고 물방아 수차를 돌리던 옛 물길도 종적이 감추어져 지금은 찾을 길 없어 지형이 변화되었다는 설명이다. - 문동인 님 ○ 마을앞 강변 석탄마을 앞을 흐르는 고창천변은 지금과 같은 완고한 제방은 없었다. 자연에 의한 낮은 둔덕의 천변이어서 많은 비가 내려 홍수가 나면 논두렁 등 방천이 나고 물은 석탄마을까지 범람하여 피난을 가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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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전 여름장마 때의 일이다. 고창천 이 범람하여 석탄마을이 물에 잠김으로 주민 모두가 석탄정으로 피난을 했는데 미처 보리 타작이 되지 않은 보릿대 벼늘 이 통째로 떠내려 가던 피해도 있었다며 지난날을 술회하는 고로의 설명이다. 주민 의 숙원 사업으로 1965년경

미공법 제

480호에 의한 저개발국 잉여농산물 무상 원조 계획에 고창천 제방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제방이 설치되기 전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노거수(팽나무, 버드나무 등 수령 약 300여년 추정)가 10

석탄마을 앞 고창천

여주가 서 있었다. 제방공사시 잘리고 또 는 묻혀 없어져 마지막 남은 옛 모정자리 뒤편의 버느나무도 4년전 태풍으로 중등이 부러지니 앙상한 채 서 있는 형태는 연륜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고창천 냇물을 건너면 행정구역상 주곡리이지만 논농사는 석탄마을 사람들의 소유가 많다. 홍수가 나면 80여m의 하천을 건너지 못하고 발등만 굴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주민의 숙원이 또 이루어졌다. 2012년 생태하천 사업 의 일환으로 넓이 7m, 길이 62m의 시멘트 콘크리트 교량이 설치되어 친환경 농촌마을로 발 전할 것이라는 고로들의 설명이다. - 류제준 님

3. 마을의 입향성씨 1) 덕정마을 덕정마을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80여 세대가 살던 큰 마을이었다. 특정 성씨(姓氏)만 이 집성을 이룬 것이 아니고 따라서 여러 성씨가 들어와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며 길게는 수 백년씩 함께 세거한 마을이다. 전래되는 성씨 입향 내역을 보면 당초에 여양 진씨(驪陽陳 氏)가 마을을 설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양 진씨의 시조 진총후(陳寵厚)공은 고려 예 종 조에 상장군 겸 신호위 대장군 여양군(上將軍 兼 神虎衛 大將軍 驪陽君)의 작위를 받은 분 이다. 현재 덕정 마을에 입향 했던 여양 진씨는 1450여년경 입향한 11세손 진세일(陳世一)공 이며 입향 이후 7~8대손까지는 융성 했던 가문으로 전해진다. 마을 원로들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입향조 이하 선조들의 묘소가 마을부근 이당산(尼堂 山) 기슭에 있는데 묘역의 시설과 규모를 볼 때 당시의 가세(家勢)를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는 자손이 절손되어 거주자가 없다. 현재 덕정 마을에는 여 양진씨가 1세대 살고 있다. 그러나 입향조의 직계후손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50여년전 부안군에서 이거해 온 사람들도 안타까운 것은 90세의 노모(老母)와 50대 농아(聾啞)부부 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입향 순서에 의한 창녕 조씨의 입향 내역이며 마을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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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포 및 인구 현황은 별표와 같다. 덕정마을 성씨 분포 및 인구 현황 2013.7.20. 현재 昌

靈 全 礪 慶 利 楊 慶 南 陽 漢 延 光 蔚 長 高 羅 驪 金 竹 樂

관향성씨

城 州 山 州 川 州 州 陽 根 陽 安 山 山 興 興 州 陽 寧 山 安

21

丁 李 宋 李 徐 崔 崔 房 咸 趙 李 金 金 高 高 羅 陳 金 安 吳

氏 11 13 13

氏 5 6 8

가구수 49 인구 남62 여61 123

氏 4 4 4

氏 5 6 4

氏 3 3 3

氏 2 4 3

氏 3 4 4

氏 1 2 2

氏 1 3 3

氏 1 3 1

氏 2 2 2

氏 2 2 2

氏 氏 氏 1 1 1 2 1 1 4 1

氏 1 1 1

氏 1 1 1

氏 1 1 2

氏 1 1 1

氏 1 1 1

氏 1 1 1

○ 창녕 조씨 덕정마을에 입향하여 세거하는 성씨(姓氏)중에는 창녕조씨가 11세대로 제일 많다. 창녕조 씨의 시조는 조계룡(曺繼龍)공이며 신라 진평왕여의(眞平王女)의 사위이다. 품계는 보국대 장군 상주국 대도독 지휘 제군사 태자태사(輔國大將軍 上柱國 大都督 指揮 諸軍事 太子太 師)로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의 작위를 받은 분이다. 문헌상으로

나타난

입향내역을

간추리면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의

충순위공(忠順衛公)

조국경(曺國卿 33세손)공의 직계 후손인 조홍성(曺弘聖 39세손)공은 생부 조하식(曺夏植) 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1739년 전남 화순군 동복면 외와리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같은 시 기 덕정 마을에 살고 있던 같은 밀직사공파의 후손이면서 계승할 아들이 없던 지평공(持平 公)의 후손 족숙한진(族叔 翰鎭 38세손)공 앞으로 젖먹이 갓난아이(조홍성)을 양자로 입양 함으로 훗날 덕정마을에 입향 세거케 되는 입향조가 된다. 덕정 마을의 창녕조씨는 입향조 홍성(弘聖)공의 장남(錫周)후손들로 대종손(泳正)까지 8 대를 이어온 대 씨족이 되었다. 그러나 입향전 생부(生父)측의 가계를 보면 홍성공의 차남(得周)은 대종손(梁根)까지 9 대로 번창하고 있어 같은 형제의 손(孫)들이면서 충순위공계와 지평공계로 나뉘어 있다. 한편 홍성(弘聖)공의 양부 한진(翰鎭)공은 증조명도(曾祖 命燾)공 때부터 덕정마을에 세 거한 씨족으로 실제 창녕조씨의 입향년대는 홍성공 위로 3대가 더 빠른 년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창녕 조씨의 가계(家系)도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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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寧曺氏 密直使公派 忠順衛公系와 持平公系 33世

34世

35世

國卿 - 震男 - 成立

36世

37世

38世

漢弼 - 爾恒 漢平

46世

47世

34世

35世

邦祐 - 大洋 - 㯳

36世

得周 - 錫厚 - 恒承 - 秉晉 홍현앞으로

48世

37世

43世

충순위공계

弘聖 錫周

양자입양

- 珽煥 - 喜豊 - 南鎬 - 永鎰 - 準根 33世

42世

지평공계

爾瑛

弘賢 45世

41世

양자입양 爾璟 - 夏植

44世

40世

翰鎭앞으로

漢翊

忠順衛公

39世

38世

39世

40世

41世

42世

43世

命烈 命杰 命燾 - 厚德 - 翰鎭

持平公

命勳

弘聖 弘賢

錫周 得周

鉉良 - 達承 - 秉善 鉉洪 鉉彦

44世

45世

46世

47世

- 永煥 - 喜碩 - 文鎬 - 泳正

○ 영성 정씨 영성정씨의 도시조(都始祖)는 덕성(德盛)공이며 당국인(唐國人)으로 무종조 대승상 대양 군(武宗祖大丞相大陽君)의 작위를 받은 분이다. 서기 890여년경 신라 문성왕조(文聖王朝)시 전남 압해도(押海島)에 적거(適居)한 이래 오성군(筽城君)과 금성군(錦城君)을 두었다. 장자인 오성군이 절손되자 금성군이 승계하여 그 후예(後裔)가 靈城, 義城, 羅州, 昌原 등 4파로 분관(分貫)된다. 덕정마을에 세거중인 정씨는 영성정씨이며 정진(丁晉)공을 시조1세로 한다. 11세손 선양 정 희맹(善養亭希孟)공을 중시조로 하여 16세손 필신(弼臣)공의 손자 명복, 명상(命復, 命 祥) 형제 중 명복의 2남 영노(英老 19세손)공이 1830년 상하면 수동에서 출생, 숙부(명상) 앞으로 양자 입양하고 1850여년경 이웃 신월리에 먼저 입거한 장형 연고 따라 덕정마을에 입향 오늘에 이르며 대종손(鍾淳)까지 6대째 살고 있다. 가계의 도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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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城丁氏 善養亭系 18世

19世

弼臣 - 就光

20世

21世

命復

時老

命祥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27世

鉉昇

永根 - 逸秀

鉉九

永皓

權秀 -炳澣

大聲 - 鍾淳

永俊

東秀

一聲

福秀

海聲

英老 英老

英老를 命祥앞으로 양자입양

○ 경주 이씨 경주이씨는 도시조(都始朝)가 알평(謁平)이며 신라 좌명공신 아찬(佐命功臣阿餐)의 관작 을 받은 분이다. 중시조인 소판공거명(蘇判公居明)공을 1세로 하여 17세손 익제 재현(益齎 薺賢)공의 후손인 36세손 규채(圭彩)공이 해리면 나성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經典, 四書)를 두루 읽고 20세에 이르자 시문육체(時文六體)까지 정통(精通)한 수재였 다. 과거시험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실패한다. 당시 부패 만연된 실상에 회의(懷疑)를 느껴 출세를 포기하고 1870년경 덕정리에 입향 세거하게 되었다. 6명의 아들을 두어 자손이 번 창했으며 그 중 넷째 아들인 종국(鍾國)은 자수성가하여 속칭 “천석지기”라는 대부호를 이 루기도 했다. 현재 현손(玄孫) 광재(光宰)까지 4대째 계승되고 있다. 경주이씨 圭彩 家系表 34世

35世

36世

李集大 - 道榮 - 圭彩

37世

39世

40世

鍾錡 鍾鎭

덕정 入鄕祖

38世

- 得雨 - 相鉉 - 光宰

鍾瑛 鍾國 鍾發 鍾琇 - 得雨

鍾鎭앞으로 양자입양

2) 석탄마을 석탄마을도 1970년대 후반까지는 30호에 근접한 마을이었다. 석탄마을을 설기한 성씨는 고흥류씨인데 류씨의 시조는 류영(柳英)공이며 신라호장(戶長)의 작위를 받은 분이다. 16세 손 석탄류운(石灘柳澐)공이 1564년 18세 당시 서울에서 죽계공(竹溪公)인 아버지(柳春英) 따라 고창 주곡마을에 남하했다. 석탄 류운공의 나이 35세 당시인 1581년 석탄마을 동편에 석탄정을 건립하고 노년기(老 年期)를 맞이한다. 주곡마을에서 석탄정까지는 거리상의 불편을 느끼던 중 석탄공의 장남인 경홍(慶弘)이 1630년대에 석탄정 서편에 집을 짓고 마을을 설기 함으로 고흥류씨들의 집성 촌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도 25~6세대가 살았으며 대부분 류씨의 인척(姻戚)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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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17가구가 살고 있다. 현재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류제준은 석탄공의 12대손이다. 석탄입향조 慶弘의 가계표 15世 16世 春英- 澐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慶弘 - 汝檜 - 星煌 - 植 - 錫鵬 -宗烈 - 秀玉 - 志演 - 泳基 - 東善 慶元

석탄공

27世 28世

南錫 - 濟俊 - 汀相 文錫

석탄입향조

東仁

29世

석탄마을의 성씨 분포 및 인구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석탄마을의 성씨 분포 및 인구 현황 2013. 7. 20 현재 관향성씨 계 10 가구수 17

高興

南平

晉州

咸陽

光山

竹山

濟州

金海

善山

扶安

柳氏

文氏

鄭氏

朴氏

金氏

安氏

高氏

金氏

金氏

金氏

7

1

1

2

1

1

1

1

1

1

인구

남14

6

1

1

2

1

1

1

32

여18

7

1

1

3

1

1

1

1 1

1

1

○ 남평문씨 문씨의 도시조(都始祖)는 문다성(文多省)공인데 고려조에 삼중대광 삼한벽상공신 남평개 국백(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南平開國伯)으로 시(諡)는 무성(武成)이다. 중시조인 문익(文 翼)공은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로 풍산군(楓山君)이며 시(諡)는 경절(敬節)인데 이 중시조 를 1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간다. 12세손 익점(益漸)공은 보문각 집현전 제학(寶文閣 集賢殿提學)으로 강성군(江城君)인데 목화씨를 처음 들여온 분이다. 22세손 송엄도기(松嚴 道器)공이 임진란에 창의(倡義)하고 경기도 이천 대왕리(大旺里)에서 고창 상하 기산으로 남하한 입향조인데 30세손 장규(章圭)공의 8대조이다. 31세손 금호 대영(錦湖大榮)공은 章圭공의 아들로 1860여년경 경기도 여주에서 계 처가 (繼妻家)인 고흥류씨 연고로 석탄마을로 입향하여 36세손(晙虎)까지 5대째 살고 있다. 남평文氏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27世

錦湖大榮 가계표

28世 29世

道器- 泰明- 晟錄- 益龍 - 世奉 - 尙潤- 以仁

鳳輝

30世

31世 32世 33世

章奎-大榮

34世

35世 36世

昌灄-喆洙- 東銶 昌圭-桂洙- 東錫 昌植-良洙- 東寅-炳坤-晙虎

章浩 麟輝 敬輝 聖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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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진주정씨 입향내역이다. 진주정씨(晉州鄭氏)는 정예(鄭藝)공을 시조 1세로 하며 고려통합

벽상삼한공신

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壁上三韓功臣光錄大夫門下侍中平章事)의

작위를 받은 분이다. 13세손 황(璜)공은 시(諡:忠莊)이며 그 후손인 31세손 기원(箕源)공이 1880여년경 성송 괴치마을에서 처가 고흥류씨(妻家高興柳氏) 연고따라 석탄마을로 입향하여 증손(鎭圭:34세 손)까지 3대째 세거하고 있다.

3) 제내마을 제내마을은 덕정마을 동편에 있으며 마을을 설기한 성씨는 여산 송씨(礪山宋氏)이다. 시 조 송유익(宋惟翊)공은 고려 진사여산군.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高麗進士礪山君銀靑光祿大 夫樞密院副使)의 작위를 받은 분이다. 13세손 병사중기(兵使重器)공이 경기도 양주에서 우 거하고 임란후 15세손 수(鐩)공이 정읍으로 이거한 후 증손인 18세손 육영재만징(育英齋晩 徵)공이 1700년대 초경 정읍 입암 진산에서 계 처가(繼 妻家)인 석탄마을 고흥류씨 연고따 라 훈장으로 들어와 제내마을을 설기한 입향조이다. 지금은 각성받이가 들어와 살고 있으나 1970년대까지도 송씨들이 10여호 이상 살았다. 만징공의 직계 29세 손이며 11대대종손(鉦範)까지 그 일가의 수가 마을 주변 및 각지에 살 고 있다. 송씨의 계보를 도식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여산 宋氏 晩徵 가계표 13世 14世 15世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27世 28世 重器-繼河-鐩- 善後 東圭

29世

晩達-台龍 晩吉-成龍

井奎 晩榮 晩徵 致龍 廷龍-曄-世儆-濂道-相大-鎭泰-元勉-周會-國顯 鋼儀-釘範 海龍

제내입향조

龍儀 秉儀

제내마을 성씨 분포 및 인구 현황 2013. 7. 20 현재 광향성씨 계 7 가구수 10

礪山

慶州

全州

昌寧

樂安

河陰

晉州

宋氏

李氏

李氏

曺氏

金氏

奉氏

姜氏

3

1

1

1

1

1

2

1

2

인구

남 5

3

1

16

여11

3

1

1 1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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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물과 行誼 인물과 행의편은 바른 행실과 품행의 길을 취하며 살다간 과거의 인물과 현존 인물편으로 나누었다.

1) 과거의 인물 ○ 이규채(李圭彩, 1845~1914) : 자(字)는 성백(性白)이고 호는 묵와(默窩)이며 본관은 경 주(慶州)이다. 익재 이재현의 후손이고 성헌(醒軒) 도영(道榮)의 아들이다. 1845년 해리 나산리 (羅山里)에서 출생했고 어려서부터 마을 서당에서 공부했는데 무리에서 뛰어나니 가정에서 집 안을 일으킬 자식이라 기대가 컸다. 1853년(철종 4년) 9살 때 부친상을 당하자 상주 노릇을 어른처럼 하였고 이후 모친의 격려로 공부에 열중하여 경전과 사서를 두루 읽었다. 1864년 20세에 이르자 시문체(時文六體)까지 정통하여 여러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출세할 것을 단념하고 모친을 봉양하며 가사를 돌보면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876년 32세때 흉년이 들자 의청모곡소(擬請募穀疏)를 올려 진휼청을 설치하고 세금을 감면할 것을 주장했다. 1878년 34세때 무인추왕금곡서재만음(戊寅秋往金谷書齋謾吟)시를 지었고 1881년 37세는 “신사정월재도련당” “사월사일고주소작”(辛巳正月再到蓮당四月四日沽酒小酌)등의 시를 지었 다. 1882년 38세 때는 “의청행균전소”(擬請行均田疏)를 올려 균전제를 시행하고 토지 겸병을 금하도록 주장했다. 46세 때는 “답류옥윤복일(答柳玉潤福一)서를 지었고 49세 때는 서울에 올 라가

계사춘도경등남산감음(癸巳春到京登南山感吟)과

한식일여중제우회음(寒食日與中諸友會

飮) 등의 시를 지었다. 1906년 62세때는 성균관에서 각 지방에 돌리는 문목을 보고 한통의 문장을 지었는데 문도들이 제출하여 일해(一解)에 선임되었다. 그 해 12월에 면암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만면암 최선생(挽勉菴崔先生) 시를 지어 조문했다. 1907년 성균관의 복시에 나가지 않고 백수로 지낼 것을 결심하고 학문에 전력하며 모여드는 문생들에게 강학하며 여생을 보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음식을 전폐하고 마침내 병이 발생하여 신음하다가 1914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 저 서로 묵와집(默窩集) 4권 2책이 있다.(1권 시, 2권 소, 3권 잡저, 4권 서, 기, 찬, 상양문, 축 문, 제문 등)

湖南人物誌, 고창의 儒學편

○ 조병진(曺秉晉, 1850~1935) : 자는 기원(字 起元) 호는 남천(南川)이며 본관은 창녕(昌 寧)이다. 죽림(竹林) 수문(秀文)의 후손이고 증 통훈(贈 通訓) 항승(恒承)의 아들이다. 1845년 고창읍 덕정리에서 출생했고 품성이 강직하고 담박(淡泊)하여 분외(分外)의 명리를 구(求)하지 아니하고 은거자정(隱居自靖)했다. 일찍이 자책(自責)하기를 “復讎에 立忠節하고 救難에 與義 兵이라” 했으며 경학(經學)에 전심(專心)하여 학문이 깊었으며 원근에서 도학자(徒學者)가 분 집(坌集)하여 문하에 근칙지사(謹飭之士)가 배출했다. 유고(遺稿)가 있다. 고창 鄕校誌學行편) ○ 문창규(文昌圭, 1872~1933) : 자는 원삼(字 元三) 호는 남강(南岡)이며 본관은 남평(南 平)이다. 강성군 익점(江城君 益漸)의 후손이고 大榮의 아들이다. 1872년 고창읍 석탄리에서 출생했고 경당(敬堂) 류상준(柳相浚)의 문인으로 풍의(風儀)가 괴걸(魁傑)하고 재지(才智)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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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過人)하여 경사(經史)에 밝고 서도(書道)에 일가를 이루었다. 효를 타고나 13세 모상(母喪) 에 열지(裂指)하여 수일의 명을 더하고 16세에 초시(初試)를 하고는 도이(島夷:섬나라의 오랑 캐)가 창궐(猖獗)하여 정시(廷試)에 응하지 않았다. 선덕을 소술(紹述)하여 힘써 행하고 온후공 겸하여 아들과 조카들을 예의로 가르쳤으며 고종(高宗)이 빈천(賓天)하자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수월(數月)의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유고(遺稿) 약간권(若干券)이 전하고 유적비문(遺蹟碑文) 을 정홍채가 찬했다. 고창 鄕校誌 學行편 ○ 문성수(文垶洙, 1904~1977) : 자는 광국(光國) 호는 오헌(梧軒)이며 본관은 남평(南平) 이다. 강성군 익점(江城君益漸)의 후손이며 남강창규(南江昌圭)의 아들이다. 1904년 고창읍 석 탄리에서 출생했고 천품(天稟)이 영매(英邁)하여 일찍이 신동의 말을 듣고 필법(筆法)이 정예 (精銳)하여 7세에 쓴 “일심(一心) 2자를 사람들이 탄복했다. 11세에 추포 류정석(秋圃 柳正錫) 문에 나아가 학문의 깊은 뜻을 터득하여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고 수신에 법도가 있고 제 가(齊家)를 예로 하며 접인(接人)에 신의가 있었다. 성(性)이 지효하여 사친(事親)에 지체(志體) 를 구양(俱養)하고 상을 당해서도 애훼(哀毁)가 넘치고 날로 알묘(謁墓)하여 우설(雨雪)에도 폐 하지 아니하니 향도(鄕道)가 칭송했다. (校誌 學行편) ○ 조이승(曺履承, 1823~1894) : 자는 순지(字 順之) 호는 덕헌(德軒)이며 본관은 창녕(昌 寧)이다. 죽림 수문(竹林秀文)의 후손이고 영정석후(影井錫厚)의 아들이다. 1823년 고창읍 덕 정리에서 출생했고 자품(資禀)이 괴위(魁偉)하고 강의(剛毅)하여 어버이 섬김에 감지(甘旨)를 궐(闕)함이 없었고 형제우애하여 유무를 함께 했다. 일찍이 문단(文壇)에 참여했고 만년에 성 리학을 강구(講究)하여 조예(造詣)가 깊었다. 명리를 구하지 아니하고 동오(東塢) 조의곤과 상 사(上舍) 류동식과 함께 날로 창주했다(교지 文行편) ○ 조진환(曹鎭煥, 1899~1989) : 자는 한명(字 漢明) 호는 덕봉(德峰)이며 본관은 창녕(昌 寧)이다. 죽림수문(竹林秀文)의 후손으로 농암 병권(農菴秉權)의 아들이다. 1899년 고창읍 덕 정리에서 출생 충후(忠厚)한 자품(資禀)에 겸허(謙虛)의 덕이 있어 과언신행(寡言慎行)으로 인 망이 높아 高敞鄕校 齋長에 전성(全誠)을 다하고 충신독경(忠信篤敬)으로 후진의 모범이 되어 향당(鄕黨)이 추중했다. 校誌文行편 ○ 류지심(柳志深, 1830~1885) : 자는 치욱(字 致郁) 호는 노은(魯隱)이며 본관은 고흥(高 興)이다. 충정공 탁(忠正公 濯)의 후손으로 사은직장, 규(思隱直長 奎)의 현손이다. 1830년 출 생하여 票性이 청담(淸澹)하여 학업에 독실하고 사친(事親)에 성효(誠孝)하여 지체(志軆)를 구 양(俱養)하고 곤계(昆季:형제간)에 우애하며 자질(子姪)을 의방(義方)으로 훈계하니 향린(鄕隣) 고가(古家)의 풍이 있다 칭송했다. 교지 文行편 ○ 조석후(曺錫厚, 1800~1851) : 자는 중삼(字 重三) 호는 영정(影井)이며 본관은 창녕(昌 寧)이다. 죽림수문(竹林秀文)의 후손으로 증통정이조참의(贈通政吏曹參議) 득주(得周)의 아들이 다. 1800년 고창읍 덕정리에서 출생하여 품성(稟性)이 강정(剛正)하여 세상권세에 아부하지 아 니하고 오직 경학(經學)에만 전심하여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과 도의교(道義交)를 하였다. (校誌 儒行편) ○ 조정환(曺珽煥, 1876~1915) : 자는 탁여(字 琢汝) 호는 석곡(石谷)이며 본관은 창녕(昌 寧)이다. 죽림수문(竹林秀文)의 후손으로 남천 병진(南川秉晉)의 아들이다. 1876년 고창읍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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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에서 출생하여 품성이 후중명민(厚中明敏)하고 금서 류준철(錦西柳浚喆) 문하에서 수학하 여 학식이 풍부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편히 모셨으며 심지가 충직(忠直) 근검하여 자만 (自慢)이 없고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의(義)와 선(善)이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고 정당한 물질 (物質)이 아니면 취하지 아니하며 오직 의(義)로 면정(面政)을 다스리니 사람들이 청렴결백(淸 廉潔白)함을 칭송했다.(校誌 儒行편) ○ 유지연(柳志演, 1828~1901) : 자는 덕유(字 德裕) 호는 직암(直岩)이며 본관은 고흥(高 興)이다. 석탄운(石灘澐)의 8세손으로 1828년 출생 타고난 성품이 관후하여 종족에 돈목(敦睦) 하고 爲先에 돈독(惇篤)하여 문중유사로 다년수고하였다. 전원(田園)에 숨어 농사에 힘쓰고 분 수외에는 원치않고 오직 술선(述先)과 유후(裕後)에 주력하여 사람으로서 떳떳한 도리를 다하 였다. (校誌 儒行편) ○ 류태선(柳泰善, 1894~1953) : 자는 파일(字 和日) 호는 석사(石沙)이며 본관은 고흥(高 興)이다. 사능직장(思陵直長) 규(奎)의 6대손으로 1894년 출생 천성이 영명(英明)하여 책을 읽 거나 고인(古人)의 선행과 격언을 들으면 수년이 지나도 잊지 않았다. 사친(事親)에 성효(誠孝) 하여 매사를 복명(服命)하고 봉선(奉先)에 탄성(殫誠)하여 제전(祭田)과 석의(石儀)를 갖추었으 며 제가(齊家)에 법도가 있고 처세(處世) 접인에 신의를 지켰다. (校誌 儒行편) ○ 문장규(文章奎, 1821~1877) : 자는 영진(字 永振) 호 죽헌(竹軒)이며 본관은 남평(南 平)이다. 충선공 익점(忠宣公 益漸)의 후손으로 1829년 태어났다. 천자(天資)가

순수(純粹)하여

효우(孝友)를

돈독(敦篤)히

행하고

부환(父患)에

열지(裂

指)하여 피를 입에 넣어드려 7일 연명을 하고 상을 당해서도 조석으로 곡묘(哭墓)하여 3년 을 하루같이 했다. 재예(才藝)가 초범(超凡)하여 일찍이 노사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 사(經史)에 밝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어 士林이 추중(推重)했다. (교지 孝行 편) ○ 정영호(丁永皓, 1882~19630 : 자는 자현(字 子賢) 호는 우석(愚石)이며 본관은 영성 (靈城)이다. 11세손 진사 희맹(進士希孟)의 10세손인 선릉 참봉 현승(宣陵參奉鉉昇)의 아들이 다. 1882년 고창읍 덕정리에서 출생 품성(稟性)이 강직하고 재질(才質)이 있어 가학(家學)으로 수학(修學)하였으나 詩文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묘표, 상양문(墓表, 上樑文) 등의 서체(書體) 가 남아있어 70~80대 노인층의 칭송이 자자하다. ○ 조희태(曺喜太, 1949~1995) : 호는 삼재(三齋)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학산두환 (鶴山斗煥)의 아들이며 1941년 고창읍 덕정리에서 출생했다. 고창중·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학교에서 ROTC로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다. 요직을 거쳐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35사단 단장을 역임하고 육군본부동원부장 재임 중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생을 마쳤다. 무궁화훈장과 천수 장, 삼일장, 대통령 표창장을 수상하는 등 공로가 지대한 장군으로 고향발전에도 일익을 했기 에 군민의 칭송을 받았다.

2) 현존인물 ○ 이희우(李喜雨, 1935~ 현재) :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1900년 고창읍 덕정리 20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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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이종발(李鍾發)의 아들로 출생했다. 1953년 고창 초.중.고를 졸업하고 1955년 전주교육 대학을 졸업했다. 1955년 초등학교 교사에 임용되었고 1972년 초등학교 교감 1988년 교장으 로 승진 재직 중 1997년 정년으로 퇴임했다. 포상으로 황조 근정훈장을 수상했다. ○ 문동호(文東皓, 1935~현재) :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1935년 고창읍 덕정리에서 문성 수(文垶洙)의 아들로 출생하여 고창초.중.고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으며 고창여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퇴임했다. ○ 이상기(李相基, 일명 상현 1947~현재) :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1947년 고창읍 덕정리 167번지에서 이득우(李得雨)의 아들로 출생했다. 1966년 고창초,중,고를 졸업하고 1970년 전 북대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공군장교임관(조종사) 복무 중 1976년 대위로 전역했다. 1979 년 중등학교 교사에 임용되었고 1982년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 1985년 교육학석사학 위를 취득했다. 2003년 중학교 교감 2006년 교장으로 승진 재직 중 2009년 정년퇴임했다. 포 상으로 교육부장관상 및 녹조근정 훈장을 수상했다. ○ 서제휴(徐濟烋, 1949~현재) :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1949년 고창읍 덕정리 153번지에 서 서국현(徐國鉉)의 아들로 출생했다. 1969년 고창초.중.고를 졸업하고 1976년 전북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89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중학교 교사에 임용되었고 2005년 교장으로 승진 재직하다가 고창고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2012년 정 년퇴임했다. 포상으로 장관상 3회 및 홍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 문동연(文東然1943~)은 ROTC 육군 중위로 전역 공무원에 임용되어 전북보건 환 경 연구원 원장 역임 후 정년퇴임했다. ○ 정병갑(丁炳甲1947~) : 1997년 고창군 신림면장 2000년 성내면장 역임 후 2003년 고 창군청 축산과장 2004년 산업경제과장을 역임하고 2009년 정년퇴임했다. ○ 이상규(李相圭, 1948~현재) :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1948년 고창읍 덕정리 167번지에 서 이득우(李得雨)의 아들로 출생했다. 1967년 고창초.중.고를 졸업하고 1969년 전주교육대학 을 졸업했다. 1980년 전주대학교 문학박사 학위취득. 현재 부산 영산대학교에서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포상으로 황조근정 훈장을 수상했다. ○ 송건의(宋鍵儀 1953~ 현재) : 본관은 여산이고, 고창초·중·고를 졸업하였다. 1979년 심 원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2008년 고창군 부안면장을 거쳐 지역전략과장을 역임하였다. ○ 문병식(文炳植 1970~현재) : 1994년 전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 의학박 사학위를 취득했다. 내과전문의로 경기도 부천에서 개인의원을 개원 운영하고 있다. ○ 송하현(宋河顯 1955~) 사무관 : 2003년 고창군 성송면장, 2007년 신림면장, 2008년 고 창군의회 사무과장을 역임하고 현재 민원봉사과장에 재임 중이다. ○ 송진의(宋津儀 1958~) 사무관 : 2006년 고창농업기술센터 농촌개발과장을 역임하고 현 재는 기술지원과장에 재임 중이다.

5. 마을의 문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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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석 (1) 成均博士 黙窩先生 講學碑 “성균박사 묵와선생 강학비”는 덕정마을 중앙 마을샘 위에 있다. 대한제국 말기 광무황제 11년(1907년)에 실시한 국가고시 경의문대(經義問對:四書五經의 문장을 문답식으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것)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박사 8 급 (成均博士八級: 당시 조정의 관아(官 衙) 구조는 宮內府, 議政府, 元帥府 등 3 府 113 관아가 있고 성균관은 의정부 산 하기관)의 첩지를 학부대신으로부터 받았 다. 문인(問人: 선생의 제자 및 문하생) 과 사숙인(私淑人: 학문이 뛰어난 인물을 마 음속으로 존경하며 따르는 지식인)등 200 여명과 고창지역 유학자 鄭泓采가 읽고 감탄했던 내용을 비문을 지어 1975년 5월 에 세운 비석이다. 한편 강학비 옆에는 문인과 사숙인 崔 載壽외 200여명의 명단이 수록된 비석이

효부 나주임씨 기행비

또 있다. 묵와선생이 小學契를 설립하여 4시절 강학을 하여 왔으나 선생 타계한 후 강론이 중 단되므로 아들 鍾國이 유지를 받들어 계속중 庚寅年 6.25 전란을 겪고 폐지되었다. 손자인 得 雨가 계곡등 기금을 충판(充辦)하여 강학비 옆에 사숙인 金永杓가 비문을 지어 이듬해인 1976 년 3월에 세운 비석이다.

(2) 孝婦羅州林氏 紀行碑 “효부 나주임씨 기행비”는 덕정마을 뒤 서편 등의 석제 비각안에 세워져 있다. 효부임씨는 덕정마을 창녕조 鎭煥의 妻로 나이 16세에 전남 장성군 북이면 오산리에서 출가해 왔다. 3男 6女의 자식을 출생시켰고 궁핍했던 가세도 안정시켰다. 불행하게도 媤父가 疾患으로 여러날을 신음하자 백방으로 정성을 다하였다. 병세가 위급하자 裂指注血하여 삼일을 延壽케 하니 원근 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長壽하여 91세로 1988년 2월 하세할때까지 동기간에 우 애가 깊어 鄕坊士林이 천양했다. 2002년 2월 조선대학교 교수 李南鎭이 비문을 짓고 장남 圭澤과 사위 柳濟久가 비 를 세웠다.

(3) 辛酉生九老契 紀念碑 “신유생구노계 기념비”는 덕정마을 모정옆에 세워 있다. 덕정마을을 중심으로 그 근동에 살고 있는 9명의 뜻이 맞는 동갑내기 朴貴聖 등 1921년생(辛酉生) 들이 창계하여 모임 을 갖다가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계원 나이 43세 당시인 1964년 최초 창계 되었고 기념비를 세운 것은 62세 당시인 1983년 3월 15일 계원 1인당 정조 2가마 2斗씩 헌금한 74 만여원의 비용을 들여 金永杓가 비문을 지어 세웠다. 2013

성균관박사 묵와선생 강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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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현재 계원 생존자 없으며 계원의 아들 曺敬鎬외 4명이 모임을 갖고 있다.

(4) 通訓大夫 行 靑巖道察訪 高興柳公 諱澐 遺墟碑 “통훈 대부 행 청암도 찰방 고흥류공 휘 운 유허비”는 석탄마을 석탄정 입구의 담장밖 碑閣 안에 세워져 있다. 1850여년대에 춘추관 수찬관이던 曺錫元이 지은 비문이다. 柳澐은 1547년 윤 9월 18일 출생하였고 성장하여 나이 18세때 고창 주곡으로 南下했던 사유 등을 기록하여 1862년 5월에 세웠다. 또한 유허비 바로 앞에는 약 1m 간격으로 비석 3基가 나란히 서있다. 원래 비석이 세워진 위치는 고창읍 주곡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었다. 2008년 도로 확포장 공사로 철거할 형편이 되 자 후손인 柳濟久 당시 “석탄정 보존회장”이 3기 모두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5) 石灘先生南下遺蹟碑 “석탄선생남하유적비”는 石灘을 號로 작호한 사유와 청암도 찰방의 관직을 제수받고도 병 들어 아프다는 핑계로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열중하며 살아온 사연 등을 기록한 내용이다. 후손 永善이 비문을 짓고 胤錫, 翰錫, 浩錫 등 25인의 후손 성금으로 1955년에 세운 비석으로 좌측에 있다.

(6) 禦侮將軍 水軍萬戶柳東仁先生 忠義碑 “어모장군수군만호류동인선생충의비”는 석탄 류운의 세 아들(慶弘, 慶元, 東仁) 중 막내아 들이다. 1577년 출생하여 1603년 武科에 오르고 이어 발포수군만호 재임중 1624년 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안현(鞍峴)에서 승전한 공로와 당상관인 어모장군의 관직 제수된 내용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학박사 李家源이 비문을 짓고 후손 鳳錫, 䄵錫 등 후손 30여명의 성금으 로 1980년에 세운 비석이며 중앙에 있다.

(7) 孝子副護軍柳公遺墟碑 “효자부호군류공유허비”는 수군만호 류 동인의 장남(汝杰)의 효자碑다. 1601년 출 생하여 부모에 孝를 다 했다. 父母 사망후 에는 묘소에서 3년을 각각 시묘를 했기에 마을 이름도 侍墓洞이라 불린다. 나이 80 이 넘어서도 父母제사에는 추워도 목욕재 계를 했기에 고을에서 조정에 薦을 올렸으 나 사양한 인물이다. 1681년 특별히 노인 을 우대하는 “優老之恩”을 받았고 품계는 절충장군에 이르렀다. 1960년 후손 永善이 석탄 선생 조대비

비문을 지어 세웠으며 右側에 있다.

(8) 石灘先生釣臺碑 “석탄선생조대비”는 석탄정 동편 담장밖 에 있다. “釣臺”는 한자어의 발음과 같이 여울에 낚시를 담그고 고기를 낚는 낚시터 통훈대부 행 청암도찰방 고흥유공 휘운 유허비

를 말한다. 그러나 이곳 조대비는 석탄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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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석탄정을 짓고 청암도 찰방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淸波에 마음씻고 그 마음 다듬는데 뜻을 두었으나 “조대”의 본 뜻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진지한 내용이 담긴 비 석으로 후손들이 先祖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末伏날에 지역선비와 어우러져 漢詩와 시조 를 읊으며 하루를 보낸다. 1971년에 “조대계”가 발족되었고 전 성균관 부관장 崔根德이 碑文 을 지어 세웠다.

2) 고인돌 덕정마을 박부묵의 집 뒤편 약 80m 지 점 산등성이에 타원형으로 된 고인돌 1기 가 있다. 높이 약 50cm, 폭 1m 70cm, 길이 약 2m 정도 크기의 고인돌이 70% 정도만 노출된 채 잡초에 덮여 있다. 한편 마을 뒤 “방연대” 부근에는 사방 4~5m 가량의 대형 고인돌 1기가 있었다 고 한다. 그러나 20여년 전 토지주에 의 해 인위적 땅속에 묻어 지금은 보이지 않 는다고 한다.

3) 재각 및 정자

창녕 조씨 율수재

(1) 재각 聿修齋 율수재는 덕정리 만숫골에 있는 창녕조 씨의 재각이다. 덕정마을 입향조(39세손 弘聖)공을 주벽으로 1909년에 건축하였다. 持平公계의 祖父인 厚德공과 양부 翰鎭공 그리고 아들 錫周공, 得周공까지 4대를 奉 祀하고 있다. 한편 忠順衛공계의 증조 漢平공과 조부 (爾璟)공,

생부(夏植)공

동생(弘賢)공까지

그 후손들이 일체가 되어 봉사하고 있다. 시제일은 음 10월 20일이지만 자손들의 도시진출로 참석 부진하자 2000년부터 양 3월중 말일 일요일로 정하였다. 한편 율수 재 경내에는 “曺氏聿修齋紀蹟碑”가 세워

여산송씨 재실 모은재

져 있다. 후손인 曺邦煥(서울거주) 등 29명의 문중기금 헌성자를 기록하여 李玟秀가 기문을 지어 1988년에 세웠다. 慕殷齋 모은재는 덕정마을 입구에 있는 여산송씨의 재각이다. 당초에는 영모재(永慕齋)로 불렀으나 여산에 있는 종가의 재실이 “영모재”여서 모은재로 고쳐 부르고 있다. 제내마을 입향조(18세 손 晩徵)공을 주벽으로 약 150여년전 설립한 재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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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만징공의 증조 宋鐩공부터 손자 世儆공까지 7대를 奉祀하고 있다. 송씨역 시 시제일은 음 10월 20일이였는데 자손 들의 도시 진출로 참석 부진하자 2000년 대 초반부터 양력 3월중 말경 일요일로 시제일을 정하고 있다.

(2) 정자 석탄정(石灘亭) 석탄정은 2004. 6. 8 고창군 향토문화 유산 제6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석탄정

행정구역상으로는 석탄마을이 아닌 율 계리 341번지에 있다. 그러나 거리상의

위치를 볼 때 율계리와는 약 800여m 지점이지만 석탄마을과는 불과 200여m의 근거리에 있 다. 뿐만 아니라 석탄정과 석탄마을과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석탄정이 세워졌기에 석탄마을 이 설기되었기 때문이다. 석탄정은 1581년 석탄류운(石灘柳澐)이 건립한 정자인데 석탄마을 동편에 섬처럼 우뚝 솟은 암반위에 천혜(天惠)의 정자터로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속에 많은 정자들은 민몰(泯沒)되어 왔지만 석탄정은 후손들의 열의와 정성으로 건재하게 유지되고 있다. 지금의 석탄정도 당초에 건축된 정자는 아니다.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1830년 다시 건축된 건물이며 그 후로도 지금까지 수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석탄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가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평면 중앙에 한칸의 온돌방이 있고 사방은 마루로 장식되어 있다. 정자 안의 처마에는 조석원(曺錫元:1850 년 문과에 급제한 도승지)이 쓴 현판과 송병선(宋秉璿:1905년 을사늑약으로 자결한 충신)이 쓴 석탄정 중수기가 있고 간재전우(艮齋田愚:조선말기의 儒학자)의 시문(詩文)이 있으며 그 외 도 여러개의 시문이 기판되어 걸려있다. 석탄정 뒤에는 1981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상풍루(爽風樓)가 있고 그 옆에 상풍루 건립시 기 부한 헌성비도 세워졌으며 그 앞에 영월헌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정자 입구에는 조석 원이 쓴 류운의 유허비(遺墟碑)가 비각안에 세워져 있으며 그 뒤에 관리사가 있다. 석탄정을 건립한 류운은 석탄마을을 설기한 류경홍(柳慶弘)의 아버지로 인품이 고매하고 문장이 출중하여 선조때 청암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고창으로 남하하여 석탄 정을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정자안의 많은 시판중 유독 청암찰방 퇴임시(詩)와 서울을 그 리워하며 읊은 두편의 시가 이채롭다. 곤궁하면 이윤처럼 신야에서 밭을 갈고

困可耕莘野

한가하면 엄자룡처럼 부춘에서 누웠거늘

閒宣臥富春

어찌하여 작은 벼슬아치가 되어

如何作小吏

백년이 한평생을 그르칠것인가

誤此百年身

한편 봄날 정자에 앉아 멀리 서울을 그리워하며 석탄정 감춘(感春)이란 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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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맞은 나무들 아침산이 푸르고 수풀에 꽃이 피니 들물(野水)이 맑구나

雨樹朝山碧 林花野水明

동풍이 불어 꿈결에 맡기니

東風吹왕夢

몇 번이나 한양성에 올라갔던가

幾到漢陽城

석탄정을 세운 류운의 유작(遺作)으로 이상의 2편의 시가 기판되어 걸려있다. 또한 석탄 정 주위 경내의 소나무는 금강산에서 취종한 소나무이기에 유서가 깊다. 정자 동편에는 낚 시를 즐겼다는 여울이 있고 그 위쪽에 조대비(釣臺碑)가 서 있다. 류운의 뜻을 새겨 1971 년 여름 후손과 이 지방 선비들이 조대계를 창계하여 매년 여름 복(伏)날이면 모임을 갖고 시(詩)와 풍류로 하루를 즐긴다. 또한 石灘亭 12景이란 詩句는 석탄정이 아닌 다른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 어느때 作 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方丈新月 : 방장산에 새 달이 솟으니

台蜂落照 : 태봉산에 해 떨어지네

文殊靑嵐 : 문수산에 맑은 아지랑이

牟城春角 : 모양성에 봄소식 들리네

月溪疏烟 : 월계마을에 안개서리니

星坪嘉禾 : 성두들판 벚꽃이 아름답다

道山古松 : 도산마을 고송은

德川新漲 : 덕천냇가에 새 물결 넘치네

竹林淸風 : 죽림에 맑은 바람

蓮堤晩香 : 연방죽에 향기 가득차네

沙橋打魚 : 사계다리에 그물치니

篁郊歸鷺 : 대숲들에 해오라기(백로) 기웃거리네

이상의 석탄정 12景의 시구를 기록하였으나 作詩人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아쉬울 뿐이 다.

6. 마을의 전설과 풍속 1) 마을샘 배붙이는 이야기 덕정마을샘은 날씨가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라고 한다. 마을에 인구가 많 았던 50~60년대의 가뭄에도 샘물은 그대 로 있어 마을 이름의 글자와 같이 “德井” 이란 명칭답게 샘물이 마르지 않고 유지 되고 있어 감사함을 느낀데서 유래된 이 야기라 한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 남

덕정마을 샘

녀 어른들은 샘가에 모여 감사의 예를 올린다. 농악을 치며 “샘물 배붙이기”(이 마을의 속어 (俗語)샘물과 다른 마을샘물과의 성행위의 준말)를 한다며 밤중에 아무도 몰래 이웃 신동마을 또는 샘물이 좋은 부근 마을 샘물을 몰래 길러와 덕정샘에 물을 붓고 예를 올리며 놀이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샘물을 길어올 때 그 마을주민들에 발각이 되어 싸움이 된 적도 있고 또 시비가 된 적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몰래 물을 길어와야 된다는 이야기다. 전설이라기 보다 실제 있었던 일이어서 지금은 상수도 시설로 전설이 되었지만 덕정마을은 흐르는 냇물이 없어 지금도 부녀들의 옷가지의 세탁은 샘가에서 하고 있기에 마을샘이 정결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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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 정병한님

2) 마을애장터 이야기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여 유아 사망률이 없지만 50~60년대까지도 유아 사망률이 부지기 수였다고 한다. 유아가 사망하면 “애강치”(마을의 속어 : 유아가 사망하면 일정장소에 장사 (葬事)하는 것)라고 하여 시신을 땅에 매장할 때 지금의 성인묘처럼 그 무덤을 크게 조성하 면 좋은데 구덩이만 얕게 파고 매장한 후 흙을 덮기 때문에 “여우” 등이 파헤쳐 시신을 훼 상(毁損)시키는 예가 허다했다. 이를 막기 위해 그 아이의 시신을 “포대기”에 싸서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는 장사법을 했다는 것이다. 비위생적이지만 이 이야기도 실제 있었던 일로 덕정마 을의 “애장터(애강치 장소)”는 군솥발과 만수동 사이의 움푹한 나무갓(약간의 계곡진 산골약 칭)이였다며 술회한다. -조양목, 정병한 님

3) 석탄마을 애장터 이야기 석탄마을에도 옛날엔 애장터가 있었다 고 한다. 석탄마을 서쪽에 있는 “배롱쟁 이” 숲이 지금은 경지정리하여 논으로 변 해 적은 면적이지만 옛날에는 아카시아 나무 등 노거수와 숲이 무성히 자란 약 300여평의 평전지대였다고 한다. 마을에 어린 유아가 사망하면 아이를 강보에 싸서 그곳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는 이야기다. 특히 석탄마을은 냇가의 들 배롱쟁이 숲

가운데에 있기에 산이 멀고 마땅히 매장 할 곳이 없어 전설적인 이야기같아 비위

생적이라 하지만 50~60년대까지도 호열자 등 돌림병이 많아 젖먹이 유아 사망률은 비일비재 했다는 것이다. 일을 당하면 먼곳 산에 가지 못하고 가까운 배롱쟁이에 처리된 것이 실재라고 제언한다. -문동인님

4) 석탄마을 마을샘이야기 석탄마을에는 상수도 시설이 없었던 옛날에도 마을에 샘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유래에서 밝혔듯이 석탄마을은 풍수상 떠있는 “배”의 형국이어서 만약 마을에 샘을 파게 되면 결국 배 밑창을 뚫는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배에 물이 차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샘을 파지 못했다 는 풍수상의 이야기로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전설적인 이야기라 한다. 상수도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석탄정 주변 밖으로 나가 물을 길어와 사용했기에 마을 “샘” 이란 역사는 당초부터 없었다고 한다. 또한 제내마을 마을 샘은 제내 저수지 상류쪽에 있었으 나 경지정리할 때 저수지가 없어지면서 마을 샘도 메워져 지금은 없다. -문동인님

7. 마을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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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정 보건 진료소 농촌이 고령화되면서 건강을 최우선시 하기에 가장 긴밀하게 찾는 곳의 하나가 보건진료소이다. 덕정보건진료소는 덕정리 76-1번지 군도 13호선의 도로변에 있다. 처음 개소할 때는 1985년 10월 덕정마을 회관에서 개소가 되었다. 마을 주민의 협 조로 부지가 매입되니 1986년 11월 지금 의 위치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관할지 역은 덕정리, 죽림리, 신월리, 율계리 등 4개 법정리에 10개 자연마을이다. 이경숙 (女)소장은 개소할 때부터 줄곧 30년 가까

덕정 보건 진료소

이 근무한 여성 공직자이다. 초창기는 관내 1,300여 주민을 1일30여명씩 1차 진료와 건강상 담, 예방접종은 물론 투약관리 등 건강 지킴이로서의 주민들의 좋은 평을 받고 있다. 2003년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였고 의료환경 개선책으로 고령화되는 주민을 위해 관절염 자조관리 1530(일주일에 5회 30분씩) 걷기운동, 씽씽건강마을장려, 중풍제로, 맞춤형 방문 보건활동 등 을 기획하여 실천에 옮기고 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자는 목표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 는 이경숙 소장의 다짐에 주민들의 호응이 크다.

2) 서부교회 고창 서부교회는 덕정리 75번지 군도 13호선 도로변의 마을 서편 등에 있다. 김조자(일 명 신자 70세) 전도사의 불신자(不信者)에 신앙을 주입시킨다는 열의로 1985년 5월경 고 창 성북교회 지원을 받아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교단의 교회를 설립했다. 2007년 7월경 일신상의 일로 교회를 떠나고 후임 고철주 목사가 부임하여 예수님의 제자 로써 성의껏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정신적 성의를 갖고 20여명의 신도들에게 설교하는 교회 다.

3) 고창 고인돌 들꽃 학습원 고창 고인돌 들꽃 학습원은 폐교된 전 서초등학교를 매입하여 운동장과 교실에 야생화와 기 타식물을 갖추고 학습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5. 9. 9일 개장한 들꽃학습원은 이학성 운영 주의 기획으로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는 야생화, 분재, 수생식물, 약용식물등 자연공원의 생태 학습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2009년까지 야생화 700여종, 수생식물 50여종, 분재 30여종

500점, 석부 분경 100여점이 있어 생태학습장으로서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4) 모정 및 회관 (1) 덕정마을 모정 덕정마을 모정(茅亭)은 당초에 목조 초가 1동이 있었다고 한다. 1997. 7. 16 건물이 낡아 철거하고 정부 보조금 3,000만원과 주민부담금 약 500만원 합하여 목조 와즙 10평을 신축 오 늘에 이른다. 주민들의 기부내역을 보면 이현수 90만원, 서재섭 등 2명은 각각 50만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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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등 3명은 각각 20만원, 안성철 등 21 명은 각각 10만원, 김정호 7만원, 이상현 등 8명은 각각 5만원, 조희선 등 2명은 각각 3만원씩 총 38명 5,130,000원이 모 금되었다. 기부자 명단은 현판에 새겨 모 정 천정 중앙에 부착되어 있다.

(2) 석탄마을 모정 석탄마을 모정은 당초에 지금의 마을회 관(노인정) 아래쪽에 초가 2칸의 목조건물 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어린이들의 불 놀이로 소실되고 2003년 10월경 정부지원

덕정마을 모정

금 1,500만원과 주민부담금 10,100,000원 이 기부되어 목조와즙 7평을 완공, 오늘에 이른다. 주민들의 기부내역을 보면 당시 이장이 던 류제관 200만원, 류제철, 정태규, 류제 록, 박용남 각각 100만원, 박용길, 박용옥 각각 50만원, 류제형, 김천식, 류종상, 류 제상, 류윤상, 류영록 각각 30만원, 안인 환, 문병윤 각각 20만원, 배경순, 10만원 등 18명 10,100,000원이 기부되었다.

(3) 제내마을 모정

석탄마을 모정

제내마을 모정은 당초에도 현위치(여산 송씨의 선산 문토)에 초가2칸의 모정이 있었다. 2001년 11월 정부지원금 1,500만원과 주 민부담금 약 700만원을 들여 목조와즙 7 평을 완공 오늘에 이른다. 주민들의 기부내역을 보면 송하현, 송진 의, 김덕규, 서영학, 류제관 등 각각 100 만원 송인재, 이상열 각각 50만원 제내출 신 재경 출향인과 마을 부인들이 십시일 반 기부한 100여만원을 합하여 모정을 건 립했다.

(4) 덕정마을 회관 덕정마을 회관은 덕정리 99-1번지에 있

제내마을 모정

다. 당초의 회관은 최두환 소유 가옥(대지 120평)을 마을명의 매입하여 회관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2001년 2월 28일 가옥이 낡아 철거하고 정부보조금 3,000만원을 지원받아 주민들이 십 시일반 기부한 약 2,000만원 합하여 현 위치에 벽돌 슬라브 약 20평을 그 해 6월 28일 준공 하고 회관 및 노인정으로 활용하고 있다. 회관 건립시 기금 찬조 내역을 보면 정안수 등 23명은 각각 50만원, 조용철 등 7명은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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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만원, 신재순 등 14명은 각각 30만원, 김계순

14명은

20만원씩

58명

2,130만원이 모금되었다. 기부자 명단은 현판에 새겨 회관 외벽에 부착되어 있다.

(5) 석탄마을 회관 석탄마을

회관(노인정)은

덕정리

303~10번지에 있다. 1988년 10월경 정부 지원금 2,000만원과 마을주민의 헌성금 2,630만원을 합하여 회관이 건립되었다. 회관 건립시 모금된 기부내역을 보면 류제관 200만원, 당시 이장인 류제준과

덕정마을 회관

청년회기금 각각 150만원, 류종상, 안인화 등 각각 120만원, 문동인 등 7명 각각 100만원, 박용옥 등 2명 각각 70만원, 류 제형 등 8명 각각 50만원, 문동연 등 6명 각각 30만원, 류광수 등 13명 각각 20만 원. 임실댁 등 14명 각각 10만원 총 56명 2,630만원이 모금되었다. 기부자 명단은 돌에 새겨 회관 현관 벽에 부착되어 있다.

(6) 덕정, 석탄마을 역대 이장 현황 안성철덕정마을 이장 정병한덕정마을 거주 조양목

석탄마을 회관

덕정마을 거주

덕정마을 성 명 이정우 이윤우 최종만 정난수 조성호 이상범 조남호 정병한 서제동 안성철 류제준

기 간 1945~1950 1951~1953 1953~1966 1966~1969 1969~1980 1980~1983 1983~1988 1988~1991 1991~2009 2009~2013 석탄마을 이장

문동인

석탄마을 전 이장

류제구

석탄정 전 보존회장

류제관

석탄마을 전 이장

민길순

고창초등학교 근무

석탄.제내 마을 성 명 류제팔 김영복 류종상 문동인 류제관 류윤상 류제준 류제관 류제준

기 간 1968~1969 1969~1974 1974~1978 1978~1989 1989~1995 1993~1995 1995~2001 2001~2007 200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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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수

산경 연구가

송하현

고창군청 근무

서춘수

율계마을 거주

송국현

신월마을 거주

오정석

고창읍사무소 근무

참고문헌 “고창군 고읍지 영인본”

고창문화원

1991

“전북 전래지명총람”

민음사

1993

“구 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 조선총독부

1912

“고창향교지”

고창향교

2005

“모양성의 얼”

고창군

1982

“고창군지”

고창군

1992

“개교 100년사”

고창초 동창회

2012

“호남인물지”

김봉문

1991

“고창문헌통람”

호남문화사

1997

“고창의 유학”

고창군

1996

“고창 삼향지”

삼향지편찬위원회 1991

“석탄정지”

석탄정 보존회

2007

“회상족보반세기”

회상사

2000

고흥류씨, 남평문씨, 여산송씨, 경주이씨, 진주정씨, 창녕조씨, 여양진씨 족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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