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과 애경의 마을 서동진
1.마을의 위치와 유래 법정리인 신림면 벽송리는 행정리인 벽송리와 서월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중 벽송리의 자연부락은 용교동과 사실터마을이 있다. 서월리의 자연부락은 평월리, 대포리, 세터, 서 당촌이 있다. 본래 흥덕군 일서면의 지역으로서, 벽송, 오월리, 또는 오동촌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직동, 세월리, 평월리, 서당촌, 덕림촌, 용교동의 각 일 부와 이서면의 신림촌, 마산리의 각 일부 지역을 벽송리로 병합이 되었다. 이후 고창군 벽사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벽사면이 폐면됨에 따라 고창군 신림면에 편입이 되었 다. 1)벽송리 신림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3㎞ 지점에 1650년경 천안 전씨가 터를 잡아 입촌 하였 다. 이후 흥덕군 일서면의 지역으로서, 벽송, 오월리 또는 오동촌이라 불렸다. 조선조 제21대 영조 때 효자 송와(松窩) 전덕수(全德秀)(전배수-全培秀)의 8대조(代祖)) 가 마을 뒷산에서 시묘 살이를 하고 있을 때 묘 근처의 소나무들이 송충이로 인하여 죽 어가므로 애통하여 울었더니, 갑자기 까치와 까마귀가 날아와 벌레들을 잡아먹었다. 서기 1764년경 이곳을 지나던 흥덕현졸(興德縣倅) 안집이 이 소리를 듣고 마을이름을 벽송(碧 松)으로 고치게 하였다. 마을주민들은 천안 전씨 · 창녕 조씨 · 여산 송씨 등이 살고 있 다. <그림>벽송마을 전경 2)용교동 벽송리의 두 번째 쯤 생긴 마을로, 벽송리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15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되었다. 마을 앞에 수랑 논과 샘물이 솟아 마을과 마을을 건널 때 불편하여 다리를 설치한 것이 유래가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수랑 논은 끊임 없이 샘물이 솟아서 주민들은 이 샘물을 이용했다. 주민은 여산 송씨 · 려양 진씨 · 남원 양씨 · 함평 노씨 · 수원 백씨 · 청주 한씨 · 등이 살았으나, 이후 천안 전씨도 정착하였다. 이 용교동의 지형은 구룡농주(九龍弄珠) 형국이 다. <그림>용교마을전경 3)사실터 일명 대강리(대흥리)라고도 한다. 벽송리에서 약 3㎞ 쯤 서쪽으로 두엄바위 밑과 원 치산 아래 형성된 부락이다. 일제 때 원치산 한천동에 김두연씨가 임야를 개간하여 과실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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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고 주거지를 옮긴 것을 시작으로, 8.15해방 후 유석준씨가 두엄바위 아래 장인 되는 신기엽씨가 조성한 감나무 과수원을 인수하고 관리사를 건축하여 이주 하였다. 이후 일 제 말기에는 보천교의 신도들이 10여 호 넘게 살았다. 지금의 사실터는 서해안 고속도로 개발과 인구감소가 되었다. 지금은 상행선과 하행선 휴게소와 농축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4)서월리 벽송리에서 동북쪽 500m 지점에 서월리는 1077년경 은진 송씨 · 전주 이씨 · 양천 허씨 가 터를 잡아서 입촌 하였으며 아산면 운곡 10리 운양 10리 점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을 이 커지면서 1900년경 평월리와 서당촌으로 불리다가 다시 1945년 광복 후 서당촌과 평월리의 자연부락에서 한 자씩을 따서 서월리로 개칭(改稱) 하였을 뿐 아니라 대포리와 세터도 통합되었다. 주민은 여산 송씨 · 신평 송씨 · 평산 신씨 · 전주 이씨 · 동복 오씨 · 주씨 · 한씨 등이 살았다. 마을 유적으로는 철원 주씨 주대현의 처 밀양 손씨가 효열을 하여 정려각을 세 웠다.
<그림>서월마을전경 <그림>서월마을표지석전경
5)서당촌 용교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큰 서당이 있었다. 6)평월리 대포리 북쪽 길가에 있는 마을로서 세터를 지나 지형이 운중반월(雲中半月)형국이다. <그림>평월마을전경 <그림>평월마을표지석전경
2.벽송마을의 입향성씨와 유래 천안전씨로서 시조는 섭(聶)이고,
입향조는 철명哲命이며 생몰년대기는 미상이다. 그리
고 입향년대기는 조선중기(서기 1650년경)이고, 입향지는 벽송리이다. 입향유래는 충남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에서 중해(仲海)가 신림면 유점으로 낙향하였고, 그 후손 철명이 신 림면 벽송리에 이거 14세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계 : 제 45세 철명 · 극신 · 성공 · 창석 · 덕수 · 치흥 · 명순 · 필찬 · 병숙 · 영 봉 · 의식 · 용우 · 철중 · 종복이다. 1)전씨 본관의 유래 전씨의 본관은 시조 전섭이 백제건국에 동참하여 백제개국 십제공신에 녹적되었고, 환성 군(환성은 천안의 고호임)을 수봉한 것이 천안전씨의 득관에 유래가 되어 전해오고 있다. 전씨의 기원은 백제개국 원년인 단기 2316년(계묘:서기 기원전 18년)에 시조 환성군 전 섭(全聶)의 창기한 이후 2000여 년 동안 동족동성동본으로 우리나라 성씨순위 21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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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한다.
3. 벽송마을의 인물과 행적 1) 효자 전덕수(全德秀)1724. 5. 11~1784. 3. 19.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윤옥(潤玉)이며 호는 송와(松窩)이다.
송와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
고 장지물색을 골몰하던 중 꿈속에 한 노파가 가리키는 곳이 집 뒤 온남-정이었다. 이곳 은 오좌로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곳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소나무를 심어 3년 시 묘 살 이를 하셨다.(전북도지, 향삼강록에 상세하게 기록 됨) 이후 마을 이름을 오월(梧 月)리에서 벽송(碧松)으로 고치게 되었으며 효행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후손 9 세손-전 배수) 2) 효자 전기원(全基源)1856. 5. 4~1930. 1. 1.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인숙(仁淑)이며 호는 취송(翠松)이다. 취송은 부모님 섬김이 지성 이었을 뿐 아니라, 충효의 뜻과 함께 형제끼리 우애가 돈독하였다. - 전북도지. (현손-전 병오) 3) 효자 전영봉(全泳鳳)1859. 8, 24~1924. 1. 20.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대홍(大洪)이다. 대홍은 정성과 효도로 부친병환을 날이면 날마다 봉양하는 절차에 따라 예를 다 했다. -전북도지, 흥성지 효행편. (현손-전 종복) 4) 효자 전영좌(全泳佐)1861. 12. 27~ ?. 1. 15. 본관은 천안이고 초휘가 종학(鍾學)이며 자는 선범(善範)이다. 선범은 어려서부터 부모님 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선범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병환을 백방으로 알리어 치 료를 하였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에 슬픔이 크지만 분가한 몸으로 노 모에게까지 정성을 다해 대소변을 받아냈다. 이후 병세가 깊어지자 손가락을 단지해 연 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묘살이 까지 정성껏 하였다.-흥성지 효자편. (후손 현손-전 제 헌) 5) 효자 전용채(全容彩)1921. 3. 14~1998. 4. 21. 본관은 천안이고 호는 효벽(孝碧)이다. 효자 전용채는 효와 애로 부모님을 섬겼다. 그러 나 가세 불운하여 셋째로써 부모상을 당했다. 그리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효행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흥성지 효행편. (후손-전 기홍) 6) 효열부 탐진안씨(耽津安氏)1853. 8. 11~1914. 5. 22. 천안인 전인호(全仁鎬)의 처로, 시부모를 모시고 시집 온지 10년도 안되어 남편 상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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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탐진안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어머니께서 어린 새끼를 어찌 양육할 까하였다. 그 후로 앞 못 보시는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지극으로 키우고 효도하니 참으로 고금에 드문 효부라 감탄했다.- 선국삼강록, 향삼강록, 흥성지 효부편. (6세손-전 기홍) 7) 열부 여양진씨(驪陽陳氏)1903. 5. 26~ ? 천안인 전영열(全泳烈)의 처로, 여양진씨는 청상으로 수절하며 타인과 동기 앞에 슬퍼하 는 기색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오리려 친척들을 위로하니 절개와 정절의 미열은 고금에 드물었다.-흥덕향지 열부편. (손-전 용택) 8) 효열부 하동정씨(河東鄭氏)1866. 5. 17~1814. 5. 9. 천안인 전영유(全泳維)의 처로, 하동정씨는 결혼 한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의 병이 깊었다. 이에 백방으로 약을 구해 극진하게 간병을 하였다. 부인은 온갖 정성으로
뱀탕과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 약으로 대신하였다. 이후 미음 죽으로 2년여를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소생 없는 청상으로 종자(全星植)를 사자로 드리고 시부모 섬김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에 향리에서는 효부와 열부라 칭찬하였다.- 흥성지 효부편. (현손-전 종명) 9) 열부 의령남씨(宜寧南氏)1902. 7. 15~1988. 9. 28. 천안인 전래식(全來植)의 처로, 의령남씨는 성혼 후 얼마 안 되어 남편 상을 당하니 나이 젊고 소생이 없었다. 이에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하고 목도 메고 물에도 빠졌으나 집 안사람들이 구출하여 예를 다하였다. 그 후 상장을 치르고 50여년 후, 상위에 조카(전용 술)를 입후하여 가도를 일으켜 세웠다. 이에
향리에서는 효부와 열부라 칭탄하였다. 이
후 사적을 기린 열녀 행적비가 벽송리 뒤에 있다.- 흥덕향지 열부편에 상세하게 기록 됨. (증손-전 종관)
<그림>의령남씨 열녀비전경
10) 열부 안동권씨(安東權氏)1930. 3. 22~ 2010. 12. 26 천안인 전용판(全容判)의 처로, 안동권씨는 6.25동란 때 혈육 한 점 없이 청상으로 수절 하였을 뿐 아니라, 조카(전극중)를 입양하여 집안을 일으키니 동기와 조상 앞에 절개를 지킨 삶이었다. 이후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어 효 · 열기적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 다.- 흥덕향지 열부편. (손-전 지용) <그림> 안동권씨 열녀비전경 11) 전 종식(全宗植)1893. 9. 7~1950. 8. 16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태화(泰化)이며 호는 담광(澹光)이시다. 담광은 성품이 자상하여 자녀교육을 위해 1937년 서기봉(徐基奉)선생을 모셔다가 공부방을 만들었다. 이후 주위 의 권고를 받고, 1942년 독학당에 해암리 주태엽(周泰燁)씨와 간이학교를 공동으로 설립 하였다. 그 이후 1947년 신림보통학교에 이관 후, ‘신림보통학교벽송분교’로 운영하였으 나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하여 폐교가 됐다. 문중재각 축조과정에서 부지 물색하는데 어려움을 당하자, 벽송리 산42번지의 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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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8㎡)를 종산과 재각건축부지로 쾌척하였다. (현손-전 승민)[1~11/전흥중] 12)근촌 백관수(1889~1951) 서당이 두 곳이나 있는 벽송마을에서 공부한 학생 한 분을 소개한다면 근촌 백관수가 있 다. 성내에서 이곳까지 유학을 온 근촌은 독립운동과 언론, 교육, 정치가이인 인물일뿐더 러 이 마을의 김해 김씨 규수를 맞아 결혼도 하였다. 근촌은 생각과 행동이 대범할뿐더러, 확실한 국가관으로 보는 사람에 맞추어 계몽(啓蒙)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근촌은 벽송리에서 공부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제는 한문만을 배워서는 외세를 이길 수 없다고 설득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머리를 깎자.
신학문을 배우자. 마을 사람들에게 설득하였으나, 정작 따르는 사람이 없
자 한탄하며 마을을 떠나갔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 때는 유세차 마을을 찾아와 하는 말씀이, “이곳은 내 꿈이 잉태한자리요. 내가 글을 읽고 뛰놀던 곳이요.
내처가가 있는 곳입니다. 내가 떠난
후 항상 잊지 못했으나 이제야 찾아오니 죄송하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하시면서, 마을 분들의 이름과 ‘댁호’를 한분 한분 부르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벽송리 사람들은 이런 오지에서 공부한 백관수선생을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 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이곳 출신들이 국가공무원이나 일반회사에 근무하는 분들 이 많은 편이다.(이용술님)
4.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벽송리의 지석묘【묘】 벽송리의 587-1에 청동기시대 지석묘는 서해안고속도로 상행 선 고인돌 휴게소에서 남쪽으로 약 100m 전방의 논둑에 지석묘의 크기는441×417×153 ㎝로서, 평면형태는 방형, 단면은 장방형을 띠고 있다. 장축은 북동-남서방향이며 5개의 지석이 확인된다. 이미 도굴이 이루어져 하부가 움푹 파헤쳐진 상태이다. 현재 이 주변에 서는 몇몇 석재들이 눈에 띄지만 논에 묻혀 있어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다. ☞밀양손씨 정려각【각】벽송리의42-1에 밀양손씨 정려각은 서당촌마을 진입로 우측에 위치한다. ‘광무8년 6월(1904년)’에 세워진 호조참판 주대현의 처 밀양 손씨의 정려각으 로, 정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정려각 안에 는 밀양 손씨의 효열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고, 3개의 정려각 현판이 결려있다. 현재는 담장이 무너지고 외문만 남아 있다. <그림> 밀양손씨 정려각전경 ☞유물산포지원삼국【유물분포지】벽송리의 1049번지에 원삼국 유물산포지는 서당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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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북쪽 해발 48m의 저평한 구릉지대에 위치하는데, 구릉의 동쪽과 서쪽은 각각
몽사
와 인삼밭, 묘목밭, 대규모의 수박밭 등이 조성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삭평이 심한 상태 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은 연질 타날문토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
5.벽송리의 지명과 유래 ☞한세정【우물】드렁잇골의 구렁진 곳에 있는 샘으로 크고 깊은데 물이 대단히 차 여름 에는 목욕터로 유명하다. ☞광산김씨 묘소【묘】평월리에서 서쪽으로 200m 지점에, 다른 지역의 광산김씨 묘소를 최근에 옮겨 조성되었다. <그림> 김주항과 김대의 묘전경 ☞당산-보【보】벽송 서쪽에 있는 보다. ☞동을랑-제(서전제)【못】서당촌 앞에 있는 못으로, 임진왜란 때 공사를 맡아하던 이의 이름을 붙여 ‘동을랑’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서당촌 앞이 되므로 서전제라고도 한다. ☞둔-터【들】벽송 남쪽에 있는 들로서 임진왜란 때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웠다 하고, 큰 장수 골과 작은 장수 골의 논 밑에 있는 약 50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큰 장수 골【들】큰 장수 골에 있는 20여마지의 논을 말한다. 본래 이곳의 논들은 약 80마지기였으나 지금의 장수제를 막아 위의 논을 큰장수 골 논, 장수제 밑 40여 마지기 의 논을 방죽 밑 논이라고 한다. ☞두룡골 논【들】황새 골과 나들이의 사이에 200마지기의 논으로 드렁이처럼 길게 뻗 은 들을 말한다. ☞당산리들【들】당산나무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당산리라고 하고, 그 앞에 있는 100여 마지기의 논들을 말한다. ☞뒷들논【들】서당마을 밭쪽에서 사실터 쪽으로 이어지는 100여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드렁잇-골【들】둔터 동쪽에 있는 들로서 지형이 드렁이와 같은 형국이다. ☞물방앗-뜸[수침]【마을】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앞 내에 물레방앗간이 있었 다. ☞방죽밑 논【들】동월랑재 밑에 200여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산직-뜸[산직촌]【마을】새-터 옆 산 밑에 있는 마을로서 산지기가 살았다고 한다. ☞산직-촌【마을】산직 뜸. ☞삼일-치¹【마을】사실-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삼일-치²【고개】사실-터 마을이다. ☞새-터【마을】평월의 북쪽 길가에 새로 된 마을이다. ☞서울【마을】서당촌과 평월리 사이에 있는 벽송리에 있는 마을이다. ☞수-침【마을】물레방앗 뜸 ☞신-평【들】벽송 서쪽에 새로 된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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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굴【골】벽송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고 신평 위가 된다. ☞신평굴-잔등【등】신평굴에 있는 작은 산등성이고 높이가 55m 쯤이다. ☞오동-촌【마을】벽송리. ☞오월-리【마을】벽송리. ☞전씨 재각【터】계당령에서 서쪽으로 자라머리나 반달 같은 산등이 있는데, 좌측으로 한조-등이고 우측으로는 고작-등이다. 동쪽으로 두 산맥이 뻗는데 한쪽은 고작-등이고, 한쪽은 용교동을 두른 백일홍-등이다. 자라머리-터에 자리한 전씨 재각은 서쪽으로 들이 있고, 이 들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고창읍과 부안면을 경계하고 있다. 재각에는 천안 전씨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곳의 지명은 승판-곡이었으나, 1900년경 에 승판-등으로 변경되었다. <그림>전씨문중사람들 <그림>천안전씨위패전경 ☞전씨 묘소【묘】벽송마을회관에서 북쪽 100m 지점과 용교앞에 천안전씨 묘소가 있다. <그림>천안전씨묘소전경 <그림> 용교앞 천안전씨묘소 전경 ☞전씨-비【碑】벽송마을에서 동쪽 130m 마을입구에 천안전씨 세천비와 효열비 · 열녀 비가 있다. <그림> 세천비와 효열비 · 열녀비전경 <그림> 세천비좌측전경 <그림> 세천비우측전경 ☞자라-바위【마을】화등산보 아래쪽에 있는 바위로서 모양이 자라와 흡사하다. ☞장석지-보【보】벽송리에서 800m 남서쪽으로 장석굴 쪽에 있다. ☞자라-보【보】자라바위 위에 있는 보다. ☞자라-골【골】벽송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황새골논【들】황새등 밑에 100여마지기의 논을 말한다. ☞화등-산【산】벽송 남쪽에 있는 산으로서 진사 김씨의 묘가 있는데 화등과 같은 명당 이다. ☞화등산-보【보】화등산 아래에 있는 보다. ☞화등-산【산】화동산 위 와 중복 ☞필봉-등【산】승판곡과 벽송동의 사이에 서남간에서 동북간으로 뻗은 산등으로 마치 붓의 모양과 흡사하여 이름 지어졌다. 전씨 문중의 선산으로 제각이 있고 그 산 끝자락 에는 마을회관이 있다. ☞보동계유적비【碑】부송리와 벽송리의 마을입구에 있는 유적비 이다. 인근 마을사람들 이 두레를 조직하여 모심기 두레,
김매기 두레,
길쌈 두레, 풀베기 두레를 하여 농사를
짓는다. <그림>보동계유적비전경
6.마을의 유래와 이야기들 1) 벽송마을 당산제 인간이 살면서 토테미즘 사상에 의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먼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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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부터 마을 사람들의 삶과 안전을 당산할머니에게 의지하여 선 한자는 복을 받고 악 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마을 제전 행사로 당산제를 모시게 되었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은 당산할머니를 제일로 정하고 행사를 준비했다. 마을 전주민이 7일전부터 일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위주로 식사를
하고 나쁜 일은 듣지도 보지도 않
았다. 주민 모두가 몸가짐을 청결하게 다스렸다. 이때가 되면 제수를 마련하기 위하여 농 악을 울리고 제수 물품을 모으고 보통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지정된 우물을 정하여 청 결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떠온 물로 밥과 제물로 장만하여 제물을 만들었다. 당일 제주는 당해연도 신기복덕을 가려서 꼭 운세에 맞는 사람을 골라 시켰다. 당산전일 밤은 마을 전주민이 집집마다 불을 켜고 참여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뜻에서 농악을 쳤다. 그리고 마을 주변을 초경 중경 야경에 걸쳐 전주민이 3바퀴를 돌았다. 지금 도 제물을 올리고 행사를 마무리하는 습관이 지금도 연례행사로 내려오고 있다. (전선례 님) 2) 서기봉선생(무안출신)을 모시고 1937년 여름 어느 날, 마을모정에 길손이 찾아와 좀 쉬어가자고 청했다. 허락하고, 마을 주민들은 길손의 해박한 이야기에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이때 전경중씨 조부 전종식 어른이 우리 집에서 유숙하고자 청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신학문과 애국정신이 넉넉하여 연유를 묻고,
우리 마을에서 어린아이들을 공부시켜 줄
것을 청했다. 이에 쾌히 승낙하여 바로 공부방을 마련하였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사람까지 공부를 시키다보니 인근 사람들까지 몰렸다. 이에 공부방 확충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상의한 끝에,
서당촌 주태엽씨 소유의
산에 간이학교를 1942년에 세웠다. 교육 내용은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목표로 해 오다가 1947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신림보통학교에 이관됐다. 이에 신림보통학교벽송분교로 운영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사변으로 폐교되었다. 그 이후 학교건물을 뜯어다가 평월리 물래방앗간을 지었다. 서기봉선생을 두고 벽송리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벽송리까지 온 분이 아닌가 하고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용술님) 3) 4부자가 6.25때 학살당하다 이재풍, 이강철, 이호철, 이인철씨가 6.25때 학살을 당했다. 이재풍은 신림면 초대면장이 었고 이강철은 이재풍의 큰 아들로서 경찰이었다. 6.25때 인민군은 우리 정부공직자들을 인민재판내지는 즉결처분하였다. 그 당시 숨어있던 이재풍 가족은 자수하면 살려주겠다 는 회유를 믿었으나 결국 그 가족들을 학살됐다. 그러나 영철씨(79)와 융철씨(73)는 나이 가 어려서 살았다. (송한섭님) 4) 두엄바위(범 바위) 신림면 벽송리와 아산면 운곡리를 경계로, 서산 중심봉우리에 있는 이 큰 암석은 멀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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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달리는 버스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투구를 쓴 장군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밤에 보면 호랑이 같기도 하여 범 바위라고 불린다. 바위엔 솔개와 부엉이를 비롯한 새들의 둥지가 있고. 바위 아랜 살쾡이, 너구리, 호랑이 굴도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달래, 칡, 산나물을 캐러갔다가 호랑이가 먹다 남은 고기를 가져다 먹었다고 한다.(전극중님) <그림> 두엄바위전경
5) 빈대절-터 서산에 자리한 부안면 백운리 쪽의 절터로, 그 모양이 빈대의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일설(一說)에는 절에 빈대가 서식(棲息)하고 있어 스님들이 시달림을 받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는 구전(口傳)이 있었다. 그곳에는 벽송리를 길지로 여겨 정 착한 천안 전씨
후손인 운자 록자로부터 그 후손 창자 향렬까지 10여 내외분의 묘소가
모셔져 있었으나, 서기1900년 경(年頃) 지금(只今)의 학조동(鶴鳥洞)(한조등(鷴鳥嶝-황새 골))과 승판등(承判嶝)으로 모두 이장(移葬)이 되었다.『향토소고』전경중 6) 백일홍-등(嶝) 용교동의 뒷산을 말한다. 옛날 그 곳에는 백일홍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하고,
작은 마을도 있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이 근처에 방죽이 있었는데, 샘
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또한 근거는 없으나 다만, 동으로 뻗은 산등성에는 큰 고분이 여러 기가 있었음을 볼 때 호족들이나 부호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일 홍-등 서쪽 용교동 뒷산에는 천안 전씨 소문중의 산소가 있다.『향토소고』전경중 7) 서산 호남산맥의 방장산이 서쪽 관은정을 지나 원치산과 사실터를 지나는 2㎞의 산맥이다. 그 리고 서산 아래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서산에는 6.25전까지만 해도 새 절이 있었으며 이 절은 빈대절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 그 밖에 두엄바위, 큰골, 작은골, 대우게, 넉덜, 배운재(백운재), 화실봉(동학란의 전적지)이 있다. 당산리에서 서산 넉덜로 좌우경계를 따라 신림면 벽송리와 부안면 운양리로 나눤다. 그 리고 서산의 정상을 경계로 아산면과 경계를 이룬다. 8) 온남-정 벽송 뒤 서쪽 산 밑에 있는 샘으로, 조선조 영조 때 효자 전덕수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 여 묘자리를 찾고 있던 중 노인의 현몽에 따라 이 샘을 발견하고 샘 위쪽에 묘를 썼다. 그리고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이 온남정은 옻나무가 자생하고 촌락이 생기면서 칠목정이라 불리던 것이 전씨들의 묘역 으로 단장되어 있다. 서산에서 온남정을 보면 호롱불처럼 보여 화등-산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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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양조장-터 평월리경노당에서 남쪽으로 70m 지점에 이기춘씨가 1970년대에 운영하던 양조장이 있 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
이 양조장은 2000년경에 임리로 이사를 하였으나 지금은
그 마저도 중단된 상태다. 이기춘씨는 양조장으로 번 돈을 마을과 신림중학교에 장학금 과 땅을 기증했다. 그래서 평월리와 신림중학교에 이기춘의 공적비가 있다.(송기홍님) <그림>이기춘 공적비전경 10) 칠성바위 승판등에서 벽송리로 내려오는 산등성이에 큰 바위가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마을 의 천륭(天隆)에 있는 큰 바위가 바로 칠성바위라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를 영험하게 믿고, 그 곳에 가서 기도를 올리거나 제(祭)를 지내며 소원을 빌었다. 그리하여 득남을 하면 그 이름을 쇠바위 또는 바위 석(石)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7. 마을 현황과 생활상 1) 백송리의 인구와 마을조직 (1)벽송리 인구현황(2013. 5) 마을명 벽송 서월
세대 49 62
총인구 87 121
남 46 57
여 41 64
(2)벽송리 마을조직(2013. 5) 마을별 벽송 서월
이장 진백규 송한섭
지도자 김락봉 김신철
마을 조직체 부녀회장 안효남 김삼순
개발위원장 이용술 송기홍
(3)벽송리 역대이장 현황(2013. 5) 마을별 벽송마을 역대이장 벽송리 2000~2001 2002~2003 2004~2005 2006~2007 2008~2009 2010~2011 2012~현재 서월리
조희문
조희문
조희문
진백규
전일중
진백규
송한섭
김석순
김석순
송한섭
송한섭
송한섭
2)마을 환경과 성씨별 거주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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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백규 송한섭
(1) 마을 환경 벽송리의 크기는 총면적 389.7㏊이며,
그 가운데 답 97㏊, 전 53.4㏊, 임야 162.8㏊,
대지 8.2㏊, 기타가 68.3㏊이다. 벽송리는 서산 사실터에서 동쪽으로 평월리까지 약 5㎞안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산맥 은 곧 높아 방장산과 서산으로 이어져 있고, 그 산봉우리 위로 하늘이 지붕을 이루고 있 다. 마을의 길마다 굽이굽이 들고 나 옛길을 유지 하고 있으나, 서해안고속도로와 23번 국도 옆으로 상가들이 계속 늘고 있다. (2)성씨별 거주현황 -벽송리와 서월리의 성씨별 분포도 벽 강 고 김 노 남 박 서 손 송 유 이 안 임 전 조 진 허 송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리 2 1 5 1 1 2 1 2 2 3 3 1 1 18 3 2 1 서 강 공 기 김 나 문 박 백 송 신 안 양 오 유 안 이 장 전 정 조 주 한 허 홍 황 월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리 1 1 1 12 1 1 2 1 4 5 1 1 3 6 1 4 1 2 2 7 2 2 1 1 1
(3)벽송리 거주자 전종주(농업,49세) 손관문(농업,41세) 박금순(가사,78세) 전효진(학생,18세) 전혜정(학 생,16세) 전재영(학생,12세) 박계순(가사,73세) 진년수(농업,86세) 전극중(교감,59세) 전 지용(학생,19세) 전용일(농업,84세) 조연임(가사,80세) 전석중(농업,73세) 김남임(가사,76 세) 고임순(가사,78세) 서금성(농업,49세) 박문숙(농업,46세) 서성원(유치원,3세) 조인녀 (가사,78세) 전치중(농업,46세) (원리화,27세) 전현우(유치원,3세) 전용학(농업,78세) 이영 숙(가사,68세) 이정순(가사,70세) 김옥순(가사,78세) 전용백(가사,92세) 이경숙(가사,80세) 강덕순(가사,80세) 유재열(농업,74세) 박영희(가사,70세) 이용술(농업,74세) 전선례(농 업,72세) 전용윤(농업,73세) 김순자(가사,69세) 전중선(농업,42세) 전종열(농업,72세) 박 순복(농업,62세) 전용규(농업,85세) 김금순(가사,80세) 전용훈(농업,78세) 유순례(가사,75 세) 노순녀(가사,85세) 전용필(농업,80세) 이종이(가사,77세) 송금순(가사,78세) 김하연(농 업,84세) 김귀남(가사,78세) 김락봉(49세,농업) 윤혜정(41세) 김은섭(유치원,7세) 임종연 (농업,70세) 송기수(농업,76세) 양양례(농업,65세) 김송자(농업,70세) 유우순(가사,76세) 진백규(농업,64세) 변봉순(농업,60세) 조희문(농업,73세) 주정님(농업,67세) 전상용(농 업,54세) 안효남(농업,48세) 전아람(회사원,25세) 전다영(회사원,23세) 전은주(대학생,21 살) 전다은(고등학생,19세) 김홍술(농업,64세) 지영애(농업,60세) 강영대(농업,60세) 김영 애(농업,57세) 조기동(농업,86세) 심일순(가사,76세) 조상호(고등학생,19세) 조형호(고등 학생,17세) (4)대포리 거주자 정운수(농업,78세) 백행기(농업,72세) 나정순(농업,67세) 조맹년(가사,91세) 김신례(가 사,85세) 조선순(농업,77세) 송기홍(농업,68세) 김삼순(농업,64세) 오창용(농업,72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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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례(농업,67세) 조한근(농업,80세) 문막내(농업,74세) 김석순(농업,70세) 신영자(농업,64 세) 조덕행(가사,59세) 조권행(가사,52세) (5)서당촌 거주자 송한섭(농업,70세) 유용숙(농업,67세) 강춘례(가사,81세) 봉순임(농업,93세) 유삼순(노 업,79세) 신동하(농업,73세) 윤옥자(농업,73세) 이후옥(가사,78세) 유채순(가사,91세) 정 난순(가사,77세) 김동균(건설업, 59세) 공정학(건설업,48세) 김재봉(농업,80세) 김송월(농 업,65세) 나복례(가사,81세) 이재호(가사,79세) 한범석(농업,65세) 김공순(농업,62세) 김 문식(농업,53세) 전순례(농업,50세) 김옥순(가사,85세) 오향택(농업,72세) 김순복(농업,73 세) 신동곤(음악,45세) 김용옥(농업,79세) 전점례(농업,76세) 황정순(농업,80세) 장재엽(농 업,81세) 안옥주(귀농,55세) 김경애(귀농,51세) 김문식(농업, 54세) 전순례(농업, 52세) 이재호(농업, 79세) 김옥순(가사, 84세) (6)세터 거주자 박태순(농업,75세) 김옥순(농업,68세) 송재운(농업,81세) 김금자(농업,75세) 송진열(농 업,65세) 신경순(농업,64세) 유재길(농업,57세) 강해경(농업,55세)양성만(농업,74세) 최순 자(농업,70세) 조영환(건설업,73세) 조희만(건설업,50세) 변미자(세무서,45세) 허명석(가 사,80세) (7)평월리 거주자 김성환(농업,76세) 박순자(농업,73세) 이길순(농업,75세) 김수용(농업,65세) 김순애(농 업,44세) 김기수(농업,72세) 강상례(농업,44세)정정수(농업,77세) 김복덕(농업,80세) 한문 현(농업,86세) 공정님(농업,78세) 오문상(도자기,58세) 이영숙(도자기,53세) 기도금(농 업,75세) 김신철(농업,44세) 신영복(농업,86세) 문순례(농업,80세) 유이순(농업,76세) 김 순덕(농업,84세) 유금순(농업,76세) 주보영(농업,53세) 조해군(임업,72세) 조순앵(임업,72 세) 조상자(농업,70세) 김영준(농업,50세) 유병록(농업,38세) 정신애(농업,32세) 주관영(농 업,60세) 김분진(농업, 57세) 주보영(농업, 54세) (8)벽송리 출향인사 진년수는 1927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의무대위와 예비군중대장을 지냈다. 전용익은 192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교장을 지냈다. 전권중은 193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전매서장을 지냈다. 전경중은 1932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중등학교교장을 지냈다. 전용국은 193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대령으로 재대했다. 이용술은 193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교감을 지냈다. 유홍종은 1937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대령으로 재대했다. 전일행은 193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군청과장과 면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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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기는 194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재대했다. 전흥중은 194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부면장을 지냈다. 전용조는 194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재대했다. 전극중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중등교감을 지냈다. 전풍중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민식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경찰서에서 경위로 근무하고 있다. 전성룡은 195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중등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용배는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근로복지공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선식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관세청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관중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해병원사로 재대했다. 전선일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행정학박사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대중은 195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농협지부장을 지냈다. 전종석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대령과 교수로 근무했다. 전현식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사무관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종봉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대학교에서 영문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양윤선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달중은 1956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울산미원주식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금중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한전군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용빈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법원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관중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준위로 근무하고 있다. 서영환은 195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의류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진중은 1960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안중은 1959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범중은 1959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크라운베이커리(주)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요중은 1960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삼익악기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구태은 1962년 벽송리에서 출생하여 육군소령으로 재대했다. 전재현은 1962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사법고시를 합격 변호사를 하고 있다. 전윤중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요찬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원사로 근무하고 있다. 전성중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생중은 1963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포항제철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모중은 196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대성전기(주)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재정은 1964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농촌진흥청 국립종자원연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재완은 196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공학박사이다. 이형주는 196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철도청 청량리 부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요성은 1968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삼성전자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재근은 1971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영등포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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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경은 1973년 출생하여 영등포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전재근의 부인이다. 송봉근은 1971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육군소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송명근은 1975년 벽송에서 출생하여 해병대중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조준범은 1963년 대포리에서 출생하여 농협중앙회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송만용은 1974년 대포리에서 출생하여 회계사에 합격했다. 오승진은 1974년 대포리에서 출생하여 원자력발전소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신동하는 1940년 서당물에서 출생하여 고창새마을지회장을 지냈다. 신동훈은 1943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육군중령으로 재대했다. 신창섭은 신동훈의 子로서, 육군중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수환은 1948년 평월리에서 출생하여 교장을 지냈다. 김연상은 1955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건설업을 하고 있다. 장준영은 1956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삼성화재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신동창은 1957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육군소령으로 재대했다. 김주수은 1958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국민은행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곽준영은 1963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한국전력거래소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송창수는 1972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경찰서에서 경사로 근무하고 있다. 이윤주는 1972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김형관은 1984년 서당촌에서 출생하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용운은 1956년 평월리에서 출생하여 면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조재운은 1973년 평월리에서 출생하여 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다. 3)벽송마을의 기관과 시설 (1) 벽송마을회관 벽송리회관은 공사비 삼천이백만원과 부지기증으로 2001년 4월19일 기공식을 갖고, 동 년 7월17일 준공식을 가졌다. 회관관리자는 진백규리장님이다. *백송리회관 건립 기념비 방장산(方丈山)너머 옛 된 해넘이 복가(福家)란 손님햇살에 모셔다 앉힌 터 육당령(陸堂 嶺)용트림이 치닫다 머무는 끝자락 포유형(苞乳形)터는 지세(地勢)가 겹겹이 껴안아 수려 (秀麗)하고 주변일터는 옥터(沃攄)로 인심마저 좋은 벽송마을이 자리하니 천추만대(千秋 萬代)의 삶의 터라 예로부터 충효(忠孝)와 석학(碩學)의 인걸이 많이 배출하는 이 터에 효심(孝心)과
애경(愛敬) 그리고 두레의 마음이 어우러질 회관(會館)이 준공(竣工)되었도
다. 온갖 어려움 이겨내고 숙원(宿願)을 이룩한 이 의지는 승화(昇華)된 화심으로 영원하 기를 기원하며 유관인사(有關人士)들의 업적을 선양후세(宣揚後世)에 귀감(龜鑑)이 되도 록 이 글을 남긴다. 2001. 7. 글. 우재 전경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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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개요 1.공사명 : 벽송리회관건축 2.시공자:전풍야 3.공사비:삼천이백만원 4.기공일:2001. 4. 19 5.준공일:2001. 7. 17 벽송리회관 건립추진위원회 리장:조희문 위원장:전용옥 총무(개발위원장):전일중 부지기증자:전길중73㎡ 전원식(효식)136㎡ 마을회(윤병일):2.445㎡ 2001. 7. 17 <<그림>벽송리의 회관과 모정 (2) 벽송모정과 당산나무 벽송모정은 벽송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100m 지점에 있다. 아마 연대기는 1900년에 지어진 110년을 현존하는 모정이다. 기둥과 서까래가 구부진채로 세워지고 올려졌을 뿐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어우러져 있다. 벽송모정 남쪽에 당산나무가 있다. 옛날의 당산나무는 세월의 흔적만 남았고, 지금의 당산나무는 1985년에 전용술씨와 서현옥씨가 식수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 공하고 있다. <그림>벽송마을의 옛모정 (3) 용교마을모정 용교마을 북동쪽 잔등에 있다. 용교모정에서 보면 서해안 고속도로와 북쪽의 변산반도, 줄포만, 갈곡천, 사실천이 보인다. 가깝게는 법지리와 벽송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림>용교마을모정전경 (4) 서월마을회관 서월마을회관은 1982년 5월 8일에 군비 2,000만원과 주민 모금 2,000만원으로 준공 하였다. 마을회관 안 팍은 마을지도자들의 경노사상의 모습이 또렷하다. 회관관리자는 송 한섭리장님이다. <그림>서월마을회관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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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서월모정 서월마을 동쪽 잔등에 있다. 서월모정에서 보면 서해안 고속도로와 북쪽의 변산반도, 줄포만, 갈곡천, 사실천이 보인다. 가깝게는 법지리와 평월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림>서월마을모정과 송한섭님 (6) 평월마을경노당 1978년도에 평월마을회관으로 건축되었으나, 지금은 경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노 당 입구에는 그 당시에 세운 ‘평월마을헌장비’가 있다. <그림>평월경노당전경 <그림> 평월모정전경 (7) 평월마을헌장비 우리들은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살기 좋은 평월리의 복지 농촌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자신들의 행복의 터전을 개척할 뿐만 아니라 천만대 후손들이 한 결같이
제 고장을 기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낙원의 바탕을 만들어 주기위한 것으로 이
에 긍지를 가지고 여기 헌장을 제정합니다. ① 온 리민이 한 가족처럼 온 마을이 한집안처럼 서로 도와 즐겁게 살아갑시다. ② 노인들을 지성스리 받들고 청소년들을 슬기롭게 길러서 밝은 앞날을 창조합시다. ③ 부지런히 일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너나없이 알차게 살아갑시다. ④ 맑은 마음으로 깨끗한 거리 튼튼한 몸으로 착실한 활동 오붓하게 행복을 가꾸어 갑시다. ⑤ 아름다운 우리 마을 산천을 더욱 더 곱게 푸르고 기름지게 가꾸어서 복된 고향을 만들어 갑시다. 평월마을 일동. 1978년 8월 <그림>평월마을헌장비전경 (8) 평월모정 평월마을경노당에서 남쪽으로 100m 지점에 ‘평월정’이 있다. 2002년 10월 19일에 군비 1,000만원과 주민의 성금으로 지어졌다. <그림>평월마을모정전경 (9) 세곡사기관 흥덕에서 고창으로 가는 우측 국도 23번 80m 지점에 있는 세곡 사기관은 오문상씨가 각종 도자기와 사기그릇을 취급하고 있다. ☏ 010-4180-6623 <그림>세곡사기관표지석전경 (10) 삼성자원 신림면 벽송리 산 10번지에 있다. 고철, 비철 매입. 철거 등 각종 중고자재를 이건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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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취급하고 있다. ☏ 010-3116-4630 <그림>삼성자원전경 (11) 핸드 메이지 미용실 삼정자원에서 23번국도 70m쯤 지점에 있다. 미용실을 홍성술씨와 변순애씨가 운영하 고 있다. ☏ 564-6407
<그림>핸드 메이지전경
(12) 대동카 공업사 핸드 메이지 미용실에서 고창 쪽으로 70m쯤에 있다. 조희철씨가 각종 농기계와 차량을 수리하고 있으며, 겨레공인중개사도 겸하고 있다. ☏ 011-495-2083 <그림>대동카공업사전경 (13) 평월리 참정미소 유택진씨 부자가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010-7177-4692 <그림>평월참정미소전경 (14) 김낙봉 김낙봉과 윤혜경은 부모님을 모시고 1남을 둔 복합영농인이다. 80,000여 평의 논밭에 벼 · 포도 · 배 · 복분자 · 감나무 · 나무 · 고추 등을 부부가 경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의 소농가와 노인 농가를 챙기고 있다. ☏010-9446-5711 (15) 전종주 전종주와 손관문은 어머니를 모시고 1남 2녀를 둔 복합영농인이다. 40,000여 평의 논 밭에 벼 · 포도 · 배 · 복분자 · 감나무 등을 부부가 경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의 대 소사를 챙기고 있다.☏010-2526-4282 (16) 벽송양돈장 김홍술씨가 벽송회관에서 남동쪽으로 900m 지점에 4,000여마리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 다. ☏011-654-4725 (17) 성일농장 호암마을에서 부안면쪽으로 100m 지점에 있다. 조영권씨가 개를 키우고 있다. ☏ 010-5239-3829 (18) 대림환경 성일농장에서 부안면쪽으로 200m 지점에 있다. 대림산업은 폐기물을 취급하고 있다. ☏561-5771~2 <그림>대림환경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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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인돌수목원 대림환경에서 길 건너 쪽에 있다. 소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을 취급하고 있다. ☏ 011-652-2165 (20) 고창서해안복분자주 고인돌 휴게소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있다. 영농조합법인으로서, 송지희씨가 대표 로 있다. 고창 복분자&블루베리와인 선운은 원적외선이 방출되는 ‘황토와 천연옥으로 만 든
토굴속’에서
전통옹기항아리로
발효와
숙성을
시킨
최고급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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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564-7300. (02)558-4088. <그림>서해안복분자주회사전경 (21) 고인돌 휴게소 서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인돌 휴게소는 상행선과 하행선 있다. 상행선과 하행선의 땅 면적은 벽송리의 땅 78%이다. 그러나 상행선은 고창읍 신월리이고, 하행선은 벽송리로 되어 있다. 미래장소의 길. 시/이가림 넓고 따스한 맨가슴의 남녘 땅 여기 잠시 머물다 가는 그대여 푸르른 벌판에서 풍겨오는 흙내음과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한 아름 그대 품안에 넉넉히 담아 가시라 어찌 동트는 새벽만 찬란하다 하랴 타는 서해의 황금노을 또한 줄기찬 미래 창조의 내일을 약속하는 찬연함으로 빛나지 않은가 새 천년 역사의 길이 뚫려 우리 겨레 다시금 대약진의 발걸음이 시작 되었나니 남북 끊어진 모든 길들 한 핏줄로 이은 더불어 노래하는 평화세상 열리리라 바야호로 황해를 넘어 세계로 울려 퍼지는 21세기 첨병의 나팔소리 또 하나의 힘찬 국토의 대동맥 뛰는 소리 우리 모두의 가슴마다에 파도쳐 출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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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21일 <그림>서해안하행선휴게소전경 <그림> 서해안하행선조형물전경
▣ 자료조사에 도움주신 분 진백규(벽송리리장) 송한섭(서월리리장) 이용술(벽송리개발위원장) 김락봉(벽송리지도자) 송기홍(평월리개발위원장) 전극중(중등교감) 전흥중(전,부면장) 서금성(벽송리 ▣ 참고문헌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고창군, 2009, 『고창군 마을유래』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3, 『고창의 마을1·2·3·4』고창문화연구회 『고창성씨유래』고창문화원 『전북도지』향삼강록 『한국지명총람』전북편(상) 『문화유적분파지도』고창군 『향토소고』전경중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 2000. 『2000 가을착수 경지정리사업 예정지구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전북대학교 박물관, 1984, 『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00 가을착수 경지정리사업 예정지구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흥덕향지』열부편 『흥성지』효자편/효부편 http://blog.daum.net/differ8899/8289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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