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背山臨水)의 마을 용수리(龍水里) 경수
1.
위치와 연혁
용수마을은 공음면소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저수지가 있고 마을 뒤로는 정산(正山)과 옥녀봉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싸고 있다. 그 형국이 마치 용의 꼬리와 같다고 해서 용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해발 300m 미만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지금은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군락 을 이루고 있다. 산마루 능성이에 오르면 영광군 대마면까지 보이는 질펀한 들녘이 조석으로 매우 아름답다.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인 1650년대 말쯤에 안동김씨(安東金氏)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했고 그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 용은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없을 때에는 아주 빈곤하게 살다가 청천마을에 저수지를 막고서부터 용수마을이 부유하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용수리가 속한 공음면은 삼한(三韓)시대에는 마한(馬韓) 땅으로 모노비리국에 속 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국의 상노현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 때인 경덕왕 16년에 개명된 장사현의 속지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태종 16년(1416년)에 이르기까 지 그대로 이어 왔으나 태종 17년에 서해연변의 방위체제 구축을 위해 무송현(茂松 縣)과 장사현(長沙縣)을 무장현(茂長縣)으로 통합할 때에 이곳은 와공면(瓦孔面)과 동음치면(冬音峙面)으로 나뉘었다. 구한말인 건양원년(1896년)에 칙령 제36호에 의 해 고창, 무장, 흥덕군이 전라북도에 편입될 때에도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강 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통폐합령에 의해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편입 될 때에 와공과 동음치의 양면이 합병되어 공음면(孔音面)이 되었다. 이때 12개 법 정리가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용수리는 용수, 석정, 청천, 계동, 보천, 이렇게 다 섯 마을의 법정리가 되었다.
2. 마을 주변의 지명과 유래
석정마을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의 물이 한여름에도 시원하기 이를 데 없고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다친 사람 이 이 물을 마시면 아픔이 가시고 감쪽같이 낫는다고 하여 약수터로 소문이 나 있 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석정(石井)이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 샘 물도 수돗물의 보급으로 옛 정취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마을사람들은 아직 도 그 샘물의 물맛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석정마을 앞에는 수령이 300년이 된 팽나무가 있는데 둘레 3m, 높이 17m로 촌 중(村中) 소유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잎이 부분적으로 피면 비가 적게 오고 전부 피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 이 나무에 쇠붙이를 대면 액이 범한다 하여 보호하고 있다. 용수마을 뒷산에는 절터가 하나 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그 절터에서 나온 조그마한 사리탑 하나가 고즈넉하게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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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정마을 샘물
지난번 원광대학교의 신순철 교수 일행이 학술조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동학군의 일차 봉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학의 지도자들이 피난지 (정감록)로 잘 알려진 용수마을에 집결하여 산 너머 구수마을에서 일차 봉기를 하기 위하여 사전모의를 하던 곳이 바로 이곳 절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다. 왜냐하면 지금은 마을 앞 도로가 포장이 되어 교통이 나은 편이나 그 옛날 동학혁명 당시에는 외딴 시골 마을로 외지에서 찾아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고창의 전봉준 장군 외에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의 세 거두가 선운사 도솔암 마 애석불의 비문을 탈취하기 위한 사전모의를 하던 곳도 이곳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동학관련 문헌자료는 찾을 수 없고 다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마을 김경회 이장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공음면 신대리 일원에는 전봉 준 장군과 일가인 천안전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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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름드리 팽나무와 밭을 매는 할머니
현존하는 사리탑에 대한 이장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이 사리탑은 높이 1m 20 cm 정도의 아담한 탑으로 아래 부분의 탑신이 손으로 들어갈 만큼 훼손되어 있었 다. 이 탑은 동학란 후 폐쇄된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공음면장을 하 던 사람이 이 탑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자 집으로 옮겨갔다가 집안에 자란(自 亂)일 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떡시루를 빚어놓고 빌었다는 이 야기가 있다. 그 뒤 다른 이가 또 한 차례 옮겨갔다가 또 한 번 어려운 일을 당하고 다시 현 위치에 모셔놓았다고 한다. 용수마을 뒷쪽에 있는 정산은 서당(書堂)산이라고도 하며 산마루 귀퉁이에 왜정 말기 파놓은 굴이 두 개가 있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 미군의 가막도 상륙을 대비하 여 이곳을 최후의 거점본부로 삼아 결사항전하려 하였다고 한다(KBS 2TV 방영). 가막도는 지금 1종 국가 어항으로 개발되고 있고 수심이 18m나 된다. 따라서 2013 년 구시포 어항이 완공되면 구시포를 통해 우리나라 인근 어항으로의 물류뿐만 아니 라 중국 상해, 홍콩 등 환황해권 경제 및 교역의 관문으로 새만금 간척지와 함께 떠 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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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경회 이장과 사리탑
뒷산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어서 동학을 주도하였던 분들과 영광 군 대마면에서 이곳에 래왕을 하였던 함평이씨 문중의 접주 이대극(李大克)이라는 분이 이곳 절터에 수시로 들렀다고 한다. 이대극 접주에 관한 기록은 전라남도 영광 군 영광읍 육일정(六一亭) 공원 마루에 있는 이화 삼(李化三) 장군 추모비에 나와 있다. 내용인 즉, 이대극 장군은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그 이듬 해인 1906년(丙牛年) 봄 이화삼 선생을 부장(副將)으로 하여 영광군 대마면 마치산(馬 峙山)에서 기병하였다. 1907년 9월 오산(鰲山)에서 기병한 기삼연(奇三衍)장군과 고창 문수산(文殊山)에서 합진(合陣), 무장, 고창, 법성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고 1907년 10월 장성 유탕전(流湯戰)에서 일군(日軍)을 대파하였다고 한다. 이후 무장전투, 고창석곡전투, 불갑산전투, 고산전투 등 수십 차례에 걸쳐 일군을 격 파하였다. 무장 장자산전투와 백산(白山)전투에서도 전과를 올렸으나 1909년 4월 3 일 일본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용수마을 원로들은 한목소리로 공음면 용수마을 뒤 절터가 접장들의 모의 장소라 고 말하고 있다. 현재 용수마을 이장인 김경회 씨는 용수마을의 입지조건과 위치를 설명하며 당시 이대극이란 인물이 용수마을로 찾아왔다고 하는데 아마 동학과 관련 하여 중책을 역임했던 인물로 추정된다고 구술하고 있다. 이대극은 구술자 김경회 씨의 백모님과 당숙지간이었다. 그는 서자 출신으로 기골 이 장대했다고 하는데, 손화중 포의 접주였다. 당시 접주들이 모여서 회의하였다는 절터는 서당산에 있는 암자(菴子)로 현재 폐사되었으며 폐사 후 남은 재목으로 공음 면 면사무소 부속건물(숙직실)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사리탑과 절터만 남아 있다.
일어난 배경에는 삼정(三政)의 문란(紊亂)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발 호가 있었다. 또한 이조 말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퇴락한 이씨왕조 세력과 민씨 일 가 외척세력 간의 정권다툼도 그 배경이 되었다. 두 세력 간의 권력다툼으로 청일전 쟁이 터지고, 여기서 청나라가 지면서 일본의 국내정치개입이 본격화된다(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일본의 강제에 의한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임). 이후 일본은 조선 제국의 국권을 수탈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민비가 내려보낸 관군세력과 함께 동학군의 진압작전을 펴나가게 되었다. 1894년 말 동학혁명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의 치명적인 패배로 경향각지로 흩 어지게 되었으며 동학혁명에 가담한 수많은 농민군들이 붙잡혀 참수되었다. 그들의 일가 친척 또한 무사하지 못하였고, 갖은 수모와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 중 한 분이 김영래(金永來) 선생으로 호는 진범(眞範), 본관은 김해김씨이다. 1857년 11월 11일 출생하여 동학군으로 가담하여 전봉준 장군의 무장기포와 창의 문 포고에서부터 행동을 같이하였다. 그 뒤 대소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나 1894년 말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한쪽 팔이 잘린 채로 장렬하게 전사하여 자손들이 등에 업고 와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기일은 12월 27일이고 묘소는 용수리 산 100 번지 양지 바른 곳에 있다. 다른 한 분은 김정권(金正權) 선생으로 본관은 김해김씨이다. 1850년에 나서 동 학혁명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 참가하고 겨우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당시 정부와 일 제세력의 동학군 색출을 피해 이름과 성을 바꾸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피신하였다고 하니 그 신역이 얼마나 고단하였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정권 선생에게는 영관 (永官)과 영순(永順), 두 자녀가 있었는데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살면서 어떠한 혁 명단체에도 가담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용수마을의 인물로 기록할만한 분은 정휴삼(鄭休三) 선생으로, 호는 율정(栗亭) 본관은 진주정씨이다. 선생은 주역(周易)을 통달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하 며 이 분의 대표적인 예언이 앞으로는 하늘에 거미줄을 칠 것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이는 지상에 전깃줄이 생겨나서 마치 거미가 하늘에 줄을 친 것과 같음을 미 리 내다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용수리 뒷산은 정산(正山) 또는 서당산(書堂山)이라고 하는데 동학을 모의 하였던 분들뿐 아니라 6·25 전란에도 정산에 피신하였던 인근 마을주민 300~400명이 모 두 무사하였다고 한다. 청천마을은 저수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고 1700년대 초 달성배씨(達城裵氏)가 터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배씨 할아버지의 자(字)를 따서 신기(新基)
불렸으나 마을 앞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고 해서 청천(淸川)이라 부르게 되 었다고 한다. 이곳 인물로는 동학 당시 한의원을 경영하며 동학군을 도왔던 배환정 씨가 있다. 그는 영광에서 체포되어 전란이 가라앉은 다음 돈을 주고 방면되었다고 한다. 배환 정 씨는 “다시 피는 녹두꽃”에 동학혁명을 ‘다란(多亂)’으로 묘사하고 있다. 청 천마을에는 배씨들 문중(門中) 재각(齋閣)인 청천사(淸川詞)가 있다. 청천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건너온 경주배씨 달성파(達城派) 문중이 터를 잡고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다. 달성배씨의 시조는 문양공으로 지금도 경상북도 경주시에 다른 성씨의 시조와 함께 분묘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하게 된 이는 송간공(松澗公) 배세조(裵世祚) 어른이시라고 한다. 송간공은 이씨 조선 효종(孝宗)조, 1600년대 후반에 나주에서 출생하여 우암 (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숙종(肅宗)조에 조정으로부터 교 수(敎授) 직책을 하사받았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맞아 피비린내 나는 세도정치 의 폐해를 몸소 체험(體驗)한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천마을에 자리를 잡았 다. 여기에서 송간정사(松澗精舍)를 신축하고 후학들을 위해 학규(學規) 12칙(則)을 만들어 학문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청천마을에는 지금도 배씨 문중 조상들의 얼과 업적을 기리는 청천사(淸川詞)가 있다. 이곳에는 이조 말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를 지낸 모암공(慕菴公) 배승 득(裵承得)과 구한말 고종(高宗)조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의금부도사(義禁府都 事)를 지낸 은암공(隱巖公) 배후근(裵厚根)의 행장(行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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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암공 이조참판 공적비
배씨 문중 배상수(裵商洙, 83세, 전직 교육공무원) 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분들
모두 학문과 덕행이 출중하여 타의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조정의 세력다툼의 한가운데서 청천마을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부패하고 오염된 당시 조선사 회를 정화하고 계도하는 데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다고 한다. 배씨 문중에서 한일합방 이후에 활약하신 유학자(儒學者)로는 학노(學魯) 배성수 (裵聖洙) 선생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제(日帝)의 온갖 박해(迫害)와 갖은 만 행(蠻行)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 한 강직한 정신력은 달성파 배씨 문중에 오랜 세월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가 풍(家風)과 훈육(訓育)의 결과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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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천사
청천마을에는 선대로부터 오래도록 보존되어 내려오는 가사(歌辭)가 있는데 그 내 용은 아래와 같다. 청천구곡(淸川九曲) 하늘이 도와 청천마을을 굽어 도는 냇물은 맑기도 하구나. 길손이 그 내력을 찾아 물의 근원을 거스르니 구름 아래 노 젓는 소리 들리는구나. 때가 되면 물 위에는 배가 뜨고 기나긴 물줄기는 하나되어라. 동구 밖엔 인적은 간 데 없고 옥녀봉 마루엔 저녁 노을에 연기가 서렸네.(第一曲) 시냇가 홀립봉은 창연이 옛 모습 그대로구나. 그리운 사람 짝사랑하여 청산의 사랑 길이길이 풍년에 깊어만 가네.(第二曲) 여울진 데 배 못 띄워 이리저리 옮긴 지 그 몇 해던가. 하늘은 간밤에 비를 내려 흐르는 물에 배를 띄었다네.(弟三曲)
하얀 바위에 낀 이끼는 수염이 달린 것 같구나. 천추에 빛나는 우리님 낙낙 황산 푸른 물에 잠겨 있네.(第四曲) 푸르른 산자락에 굽이굽이 물은 돌아 부딫치고 한걸음 빠르게 숲 속으로 가는구나. 먼 산 마루에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가만히 돌아보는 나그네 옛 마음이라네. (第五曲) 오산 물굽이에 푸른 물이 감아돌고 한가한 사람 자리에 들었구나. 갓끈을 씻는 노 래 그치고 홀로 앉아 숲 속의 새소리 한가로이 듣는다네.(第六曲) 질펀하게 이어진 긴긴 여울은 끝없는 풍물을 한눈에 보는구나. 들판을 나는 꿩 소 리에 새벽하늘 열리고 가을 물은 하늘에 닿아 차기만 하네.(第七曲) 보배 같은 맑은 물은 거울에 비추어 줄기차게 감아도는구나. 이리도 좋은 경관 누 구와 함께 할꼬 하얀 달은 맑은 바람에 스스로 비춘다네.(第八曲) 안개와 바람 한 덩어리 밝은 달은 긴긴 여울을 비추는구나. 이슬과 이슬비가 봄날 의 아쉬움이요 무릉도원이 하늘 뒤에 있다네.(第九曲)
보천마을로 가는 길 옆에 계동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달터’라고 불렸는데 1970년대 이전에는 인근 동네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마을이었다. 계동마을은 구름 속에 든 마을, 즉 운중망월(雲中望 月), 또는 어옹수조(漁翁水照)의 마을로 부안김씨(扶安金氏)가 약 150년 전 터를 잡 아 마을을 이루었다. 동쪽으로는 선녀봉과 술황골, 북쪽으로는 삿갓봉이 있고 뒷뜰에 는 가재들이 널려 있다. 서쪽으로는 정산 마루에 봉홧대가 자리하고 있어 과거 전란 시에 척후연락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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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동마을
뒷뜰에는 범접골과 함정재, 양절재와 동구뜰이 있어 논농사를 지어 왔음 을 알 수 있다. 함정재와 양절재는 동서교역을 잇는 통상교통의 요지(要地)였으며 그 옛날 서해의 소금장사와 젓장사들이 지금의 공음면과 무장면을 이어주는 이 고갯 길을 쉴새없이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계동마을은 가난 속에서도 원래 천석궁터라는 전설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그 런 대로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최근 영농현대화, 복분자 등 특용작물 재배로 농가 소득을 올려 요즈음은 부촌이 되어 있다. 구전에 따르면 정미소와 곡물 저장창고가 생겨 옛날 전설이 현실화되었다고 한다(마을 어른 김연수 씨, 79세 구술).
<사진 7> 무장에서 공음으로 들어가는 양절재
3.
전통과 생활환경
용수마을은 전통적으로 논과 밭농사를 지어 왔으나 최근에는 청보리밭에서 보리농
, 복분자 및 고구마, 땅콩농사를 짓고 있다. 저수지 북쪽에 약 9000평 정도의 뽕 나무 밭을 농어촌개발공사에서 임대하여 오디를 재배하여 수확하고 있다. 축산을 하는 가구도 두 가구 있는데 한우 20마리, 젖소 90마리 정도를 사육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용수리는 청보리밭과 연계하여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직 민박시설의 부족, 주민들의 인식부족 등으로 실제적인 성과를 내고 있 지 못하다. 앞으로는 동학기념관과 같은 사적지 복원으로 가족단위의 관광객 유치하 고, 민박 유치를 위한 주민공청회 등을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저수지 인근 야산(잉어 등)의 화원 가꾸기, 마을에 조그만 민속기념관 또 는 민속촌 건립 등도 생각해볼만 하다. 마을의 인구는 2009년 11월 1일 현재 27세대 52명으로 남자가 20명 여자가 32 명으로 여자가 12명이 많고, 대부분 60대 이후의 노인들이며 10세 이하는 없고 20 세에서 50세 사이가 5명 정도로 절대다수가 노령층이다. 용수리와 청천리에 구민회관이 있으나 농사일 등으로 사용 빈도는 많지 않은 편이 라고 한다. 역대 이장단 명단 순위 1 2 3 4 5 6 7 9 10 11 12
성 명 김연수 김하수 배지수 배석태 김하신 김동철 김병조 정대호 김하신 김재식 김경회
임명 년월일 1982. 1. 1 1984. 1.16 1985. 1. 1. 1986. 5. 1 1987. 1. 6 1988. 2. 1 1989. 8. 1 1989.11. 1 1998. 1. 1 2000. 1. 1 2008. 1. 1
사임 년월일 1984. 1.15 1984.12.31 1986. 4.30 1987. 1. 5 1989. 1.31 1989. 7.31 1989.10.31 1994.12.31 1999.12.31 2007.12.31 2010.10. 9
비고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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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천마을 앞 저수지
문헌
오지영의 동학사』, 오지영 『고창지역 동학 농민혁명사』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10 『모양성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ㅇ 도움을 주신분 배종석(91세, 용수리 석정마을) 배상수(83세, 청천마을 출생, 모암공 5세손) 김연수(79세, 계동마을) 김경회(65세, 용수마을 이장) 배동하(63세, 청천마을 출생) 배태영 (60세, 청천마을 출생) 배용태 (나이 미상, 은암공 5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