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유적과 자연경관이 수려한 삼인리 김원식
1. 삼인리 삼인(三仁)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고창읍에서 서쪽으로 지방도 796호선을 따라 약 7km쯤 가다보면 아산면 면소재 지에 당도하게 된다. 면소재지에서 선운사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북쪽으로 약 12km쯤 더 가면 삼인(三仁)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아산면 17개소의 법정리 가운데 하나인 삼인리에 속하는데, 동쪽은 고 창읍, 서쪽은 심원면과 해리면, 남쪽은 무장면, 북쪽은 부안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창군 석곡면 삼인리였던 것이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대아면(大雅面)과 산내면(山內面) 그리고 벽사면(碧沙面)을 병합하여 아산면이 생 겨났고, 그 후 1933년 읍면 폐합에 의해 석곡면(石谷面) 일부가 아산면에 편입되 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 가 있어 선운사 창건 당시(577년)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 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 창건 당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 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석상, 중촌, 삼인 세 마을을 삼인(三仁)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설기 당시의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김씨, 강 씨, 박씨, 이씨, 최씨, 오씨, 류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으며 76세대(농가 10, 비농 66)에 160명(남77, 여83)명이 살고 있다. 마을 앞 장년평 뒷산 산자락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인초등학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교되어 삼인학습장으로 활용 되고 있다.
<그림 1> 삼인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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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의 자연환경 이 마을은 마을 뒷산인 경수산 자락을 따라 인이골을 뒤로 하고 마을 전면에는 구황봉이 높게 솟아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또한 도솔천에서 사철 흐르는 선운계곡 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어 옛날에는 풍천장어가 노닐던 천혜의 고장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산세가 수려하고 오염되지 않아 이곳에서 재배되는 작설차와 복분 자는 전국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여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상품이다.
3) 마을의 유적과 관광자원 (1) 선운산 도립공원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선운산은 1979년에 선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도립공원 안에는 천년고찰인 선운사와 부속암자인 도솔암, 참당암, 동운암, 석상 암이 현존하고 있다. 선운산과 경수산 도처에는 기암괴석이 경관을 이루고 수림이 울창하여 절경을 이룬 가운데 천마봉, 낙조대, 만월대, 선학암, 봉두암, 사자암, 용 문굴, 진흥굴, 삼천굴, 천왕봉, 여래봉, 인경봉, 구황봉, 노적봉 등 명소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또한 동백나무 숲과 장사송, 송악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봄이면 동백, 여름에는 선운계곡의 시원한 물줄기와 그늘이 있고 가을이면 도솔계 곡의 꽃무릇과 단풍이 있어 계곡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겨울이면 설경이 너무나 도 아름다워 선운산 도솔계곡 일원이 명승지(제54호)로 지정되었다.
<그림 2>
선운사도립공원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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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인리 성지(三仁里 城址) 우리나라에서 성의 역사는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한 고조선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기조선전(史記朝鮮傳)』에 평양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한서조선전(漢書 朝鮮傳)』에도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2세기 무렵에는 상당 히 발달된 성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성곽들은 삼한시대 이후에 급속 한 발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설립되면서 왜구에 대비 하기 위하여 군(郡)과 현(縣)의 치소(治所)에 기존의 성곽을 보수하거나 읍성을 새 롭게 축성하는데 이 성은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으로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것은 아니었고 원 시적 형태의 목책(木柵)이었는데 더 견고하고 항구적인 성곽을 만들기 위하여 토성과 석성, 전축성(塼築城)으로 발전되어 왔다. 적군의 접근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 아래 로 해자(垓字)가 만들어졌고, 성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측 면에서 공격하는 치성(雉城)을 만들었다. 또한 성위에서 방어하는 군사를 보호하 기 위하여 성 위에 여장(女墻)을 쌓기도 했다. 이런 성곽들에는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 군과 현의 치소에 있는 읍성, 그리고 전 략적 요충지에 있는 산성이 있었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둘러 쌓은 퇴뫼형과 산과 산 을 이어서 쌓은 포곡형으로 구분된다.
남북한을 통틀어 3천여 개소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남한에만 1,800여 개의 성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그러나 수많은 전란과 중소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성곽은 무너 지거나 멸실되어 버렸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정도다. 삼인리 성지는 축성 당시 토성으로서 연장 1천100간(약 2km)이었으나 거의 붕괴되어 약간 융기된 성의 흔적만 남아 있다고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기록되어 있다.「문화유적총 람」하권에는 토성으로 전체 길이는 1,080m이나 모두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 어있어 정확한 축성 연대를 알 수 없고 다른 기록들도 찾아볼 수 없다.
(3) 삼인종합학습장 아산면 삼인리 81번지에 있는 삼인종합학습장은 폐교된 삼인초등학교부지와 교실 로 사용하던 건물을 재활용하여 1998년 10월에 개장되었다. 학습장 시설로는 충․효․선실과 해양탐구실 등 14실과 방갈로 21개소를 비롯하여 조각공원, 시비동산, 캠프장이 있다. 2004년에는 삼인발명창안교실을 새롭게 개관 하여 20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인성, 창의, 발명교육의 산실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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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삼인종합학습장
(4) 선운자기(禪雲瓷器) 선운자기는 고려시대에 이 고장에 크게 번성했던 자기소(瓷器所), 도기소(陶器所) 의 영향을 받은 고려청자를 비롯해 조선조 말의 주병, 사발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을 전승되어 왔다. 선운자기의 명인 청사 김종환 씨는, 한국청자의 최종 주자인 최남성으로부터 사사를 받은 고수면 동곡요의 명인, 동곡 류하상 선생 문하에 젊 은 나이에 입문하여 73년부터 도자기법을 전승받아 90년도에 선운사 근동에 선 운자기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국내외의 각종대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입상하였고 동남아와 호주, 뉴질랜 드 등 한국작가 초대전에 다수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그 명성이 자자하여 95년도 에는 특산품지정업체로 지정되었고 98년도에는 전라북도 최고 명품업체로 지정되 었다. 김종환 씨는 현재 한국 신미술 초대작가와 한국 미술연구회회원으로 활 중 이다.
<그림 4> 선운자기와 도예가 김종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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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작설차(雀舌茶) 작설차는 이 마을의 특산품 중에서도 명품으로 꼽히는 진귀식품이다. 선운사에 들 르면 작설차를 찾아야 하고 작설차 맛을 보지 않은 선운사 관광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 작설차이다. 지금은 다른 지방에서도 작설차를 대량으 로 재배하여 이제는 어디를 가나 작설차를 맛볼 수 있지만 이 고장의 작설차 맛 을 따를 수가 없을 뿐더러 그 감칠맛이란 중국차 이상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굳이 작설차라고 이름한 것은 차(茶)나무의 어린잎이 참새 혀끝만큼 자랐을 때 채 취하여 만드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 주위에서 자생하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곡우절(穀雨節) 전후에 채취하여 구증구포, 다시 말해서 아홉 번 찌고 아홉 번을 말려서 만드는 작설차는 전통 다기(茶器)에서 그리 뜨겁지 않은 물에 우려낸 다음 조금씩 음미하면서마신 다. 그 때 혀끝에 감도는 맛은 탄성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림 5> 작설차 사진
4) 마을의 전설과 풍속 (1) 당산제(堂山祭) 당산(堂山)은 신역(神域)에 설치한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기에 제사 를 올려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비는 동제신앙(洞祭信仰)의 유적(遺 跡)이다. 또한 당산은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하였으며 성역의 상징이기도 하 였다. 마한시대에도 당산이 있어 죄지은 자가 이곳에 들어가면 잡지 못했다는 기 록이 있다. 선사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청동제기에 그려진 당산과 솟대 그림은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당산의 역사는 자그마치 2천 5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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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산은 일반적으로 당산나무(堂山樹), 당산석(堂山石),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신주를 세워두는 누석단(屢石壇)과 당집(堂宇)으로 이루어지나 고창지방에는 당산나무와 당산석간(堂山石竿)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인리 당산은 수년 전까지만 하여도 수령이 몇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중촌 마을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정월달에 겨울 한철 농한기에 쉬었 던 이완된 생활을 걷어 젖히고 이제 입춘(立春)이 머지않았으니 한해의 농사를 시 작한다는 결심의 뜻으로,
또 한편으로는 마을의 질병과 재앙이 없으라고, 그리고
의병으로 전사한 남정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손을 점지해달라는 염원까지도 곁 들여 제를 올렸다. 줄다리기 후에는 당산에 줄을 감아올려 그날의 축제와 기원을 일 년 내내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인리와 석상마을이 1979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개발붐을 타고 닥나무 가공시설과 당산나무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마을 전체가 상가와 숙박시설로 변해버려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5) 마을의 전통과 생활환경 옛날에는 선운사 앞 들녘 농토가 비록 절 땅이기는 하나 소작농으로 땅을 벌고 한편으로는 닥나무를 재배하여 종이를 만들어서 팔고 마포와 모시 베를 생산하여 나름대로 끼니를 잇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사람 거의가 상업에 종사하고 10여 가구만 논 10여 두락과 밭 50여 두락에서 채소를 재배하여 반찬거리나 하고 있다고 한다.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정월대보름 당산제와 칠석날에 음식을 준비하여 농악을 치 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데 근래에 와서 이곳이 관광지로 변 하면서 그런 풍습들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관광객이 뜸한 비수기에 날을 잡아 단체관광을 하는 등 사라져가는 마을 공동체의식을 되살리고 있다고 한다.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25일에 열리는데 주요 안건이 있을 때는 임시총회를 열기 도 한다. 그리고 공지사항은 대부분 마이크로 방송하여 전달한다. 마을조직은 최희성 씨가 이장을 맡고 있으며 새마을 지도자에 김형석 씨, 부녀회 장에 이봉순 씨, 노인회장에 은재수 씨로 조직되어 있으며, 마을 경로당은 2005 년도에 정부지원으로 건립하여 마을회관과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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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경로당 전경
2. 삼인리 석상(石床)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석상마을은 아산면 17개소의 법정 리 중 하나인 삼인리에 속하는데, 1981년 7월에 삼인에서 분리되었 다. 이 마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가 있어 선운사 창건 당시(577년)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이름을 석상(石床)이라고 한 까닭은 석상암 뒤에 평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 가 있어 ‘평상바위’의 이름을 따서 석상이라 하였으며 석상리에 속하는 중촌은 속 설에 의하면 중이 많이 산다고 하여 중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설기 당시에는 절에 딸린 땅에서 농사짓고 닥나무를 재배하여 한지를 만들어 팔 아 생업을 유지하며 살았으며 70년대까지만 하여도 마을 앞 장년평에 농토가 많 아서 농사일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1979년에 이 지역이 도립공원과 관광지로 지 정되면서 호텔과 여관이 들어서고 상가가 형성되면서 주택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중촌마을에 대여섯 가구만 남게 되었다. 이삼년 전만 하여도 석상암으로 가는 길가에는 초가집이 늘어서서 초가마을로 불 리며 관광객과 사진작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선운사에서 스님들이 평생수행과 교화에만 전념하면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승려노후 수행마을을 조성하기 위하여 지난해 6월에 착공하여 금년 가을 에 준공할 예정으로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는 노스님들이 기거할 주택 외에도 차문화 체험관과 외국인 체험관, 석상마을회관, 법당, 물리치료실, 도서관, 정자 등이 들어서는데 얼마 전(8월 18일)에는 차문화 체험관이 준공되었고 마을회관과 외국인 체험관 등은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설기 당시의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김씨, 유씨, 이씨, 전씨, 정씨 등 여러 성씨가 50세대 (농가 10, 비농가 40)에 80명(남 38, 여 42)이 살고 있다. <그림 7> 석상마을 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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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의 자연환경 경수산을 뒤로한 석상골을 따라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능선 남사면 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은 마을 전면에는 구황봉이 높게 솟아 있고 도솔천 맑은 물이 사 철 흘러가고 있어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또한 석상리와 석상리에 속하는 중촌마 을 전체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선운사와 선운사에 속하는 산내 암자가 산재되어 있어 불교문화유적의 보고(寶庫)를 간직한 천혜의 마을이기도 하다.
3) 마을의 유적과 관광자원 (1) 선운사(禪雲寺)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는 선운사는 변산반도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경수 산과 소요봉 사이를 흐르는 주진천 어구에서 약 2km쯤 올라가면 도달하게 된다. 보물과 천연기념물 등 20여 점에 달하는 많은 문화재와 관광자원이 풍부한 선운 사에는 진흥굴, 용문굴을 비롯하여 천마봉, 낙조대, 사자암, 도솔계곡 등 비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창건설화도 많이 있다. 선운사가 어떻게 창건되었는 지, 선운사 창건설화를 들어보자. 어느 날 죽도포에 돌로 만들어진 배 한 척이 떠다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배 를 끌어 올리려고 했으나 배는 꿈쩍도 하지 않고 바다 쪽으로 자꾸만 떠내려간다 고 했다. 이 소문을 듣고 검단선사가 달려가 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오기에 배 위 로 올라가보았다. 배 안에는 금옷 입은 사람이 옥으로 만든 부처와 삼존불상을 품 에 안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품에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본래 연못이었던 지금의 절터를 메워서 절을 짓게 되었는데 이때 진흥왕 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100명을 보내 절 짓는 일을 돕게 했다. 진흥왕과 선운사에 관련된 설화는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 굴과도 연결된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 동굴 에서 수도하였는데 어느 날 그의 꿈에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났다고 해서 이굴을 열석굴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운사에는 조선 숙종 39년(1713)에 소요대사의 후학인 호월자(현익대사) 가 기술한『대참사 사적기(大懺寺 事蹟記)』1책과, 조선 정조 18년(1794)에 임우상 이 기술한『대참사 법당기』2책 등, 사적기 3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사적기에는 선운사 창수 승적기를 머리로 한 선운사내의 모든 불보(佛寶)와 불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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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요사(寮舍) 등과 산내 암자에 대한 창건과 수리 등 선운사의 연혁과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를 보면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의운국사가 신라 진흥왕의 시 주를 받아 창건하였고 고려 충숙왕 16년(1329)에 중수하였으나 조선 선조 30년 (1597)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진되고 어실(御室)만 남아 있던 것을 광해군 5년 (1613) 봄에 당시 무장현 태수 송석조가 행호선사와 원준대덕 두 대사로 하여금 전각을 다시 세우도록 하여 5년에 걸친 대 역사 끝에 지어진 건물들이 지금에 이 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운사는 창건 당시 암자가 89채, 요사 189채, 24개의 굴에서 3천여 승려가 참 선하며 수도하던 대가람(大伽藍)이었으며 수많은 선승과 각자(覺者)를 배출한 명 찰이었으나 한때 억불정책과 정유재란을 맞으면서 웅장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선운사 본당과 동운암, 석상암, 도솔암, 참당암 등이 남아 있다. 하지만 수 많은 고승과 선사를 배출한 명찰답게 천사백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인근 정읍의 내장사와 부안군의 내소사, 개암사를 비롯하여 고 창, 부안, 정읍, 임실, 순창, 군산과 서울·경기 일원에 5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호남의 거찰이다.
<그림 8> 선운사 전경 사진
<그림 9> 선운사 주지 법만스님
(2) 도솔암(兜率庵) 도솔암은 도솔천 내원궁과 나한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원궁의 지장보살좌상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지장보살좌상은 보물 제2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운사에 모셔져 있는 금동보살좌상과 거의 같은 크기와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 불상은 고 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도솔암 서쪽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인 나한전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나한전에는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 오른편 바위 벼랑 쪽에 있는 속탈(俗脫)의 360계단을 오르면 넓은 암반대 석이 펼쳐지고 바로 내원궁(內院宮)이 자리한다. 내원궁이란 이름은 미륵보살이 살고 있는 도솔천에 내원궁과 외원궁(外院宮)이 있는데 미륵은 이곳 내원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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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문다는 경설(經說)에서 유래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 건물은 전라북도 문 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물 안에는 보물 제280호인 고려시대의 지장보살좌 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10> 도솔암 전경
(3) 도솔암 마애불(磨崖佛)과 복장감실(服藏監室) 선운사에서 서남쪽으로 약 2.5km 가다보면 도솔암에 당도하게 되는데 도솔암에 서 용문굴로 가는 길가에는 칠송대(七松臺)라 부르는 거대한 암벽이 있고 암벽 남 쪽 중앙 면에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번지 에 소재한 이 마애불상은 1969년 5월에 처음으로 일반에게 알려졌다. 그 후 1973년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상”으로 지정되었 다가 1994년도에 보물 제 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로 명칭을 바꾸어 도지 정 문화재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 격상되었다. 국내 최대의 이 마애불은 단애부의 높이가 약 37.7m이며 마애불상은 중앙에 15.7m의 높이로 지표면 위에 새겨져 있다.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도솔암에는 상도솔과 하도솔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상도솔은 지장보살좌상을 안치하고 있는 지금의 내원궁을 가리키고, 하도 솔은 동불암을 일컫는 것이라 전해오고 있어서 1995년에 고창군에서는 동불암 터와 마애불 복장유물(服藏遺物)로 알려진 ‘비결록’을 확인하기 위하여 “동불암지 발 및 마애불실측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마애불의 복장은 지정문화재의 훼손 우려 등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개봉 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마애불 전면에서 건물지(建物址) 유적 일부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편과 청자기와편 등이 수습되었고 이 건물지는 고려시대의 건물 지로 추정된다는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554∼597)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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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하고 동불암(東佛庵)이라는 닫집[天蓋]을 짓고 명치 끝에 감실을 만들어 비결록(秘 訣錄)을 넣었다고 하는데 인조 26년(1648)에 큰바람이 불어 닫집이 무너져 부서진 조각 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몇십 리나 떨어진 곳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하듯 마애불의 바위 면에는 보호누각에 사용된 것으로 보여지는 부러진 동목재(棟木材)와 쇠못이 지금도 박혀 있다. 사람들은 이 불상이 미륵불이라 고 하여 여러 사람의 입소문을 타고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미륵신앙은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여 현실의 모순과 괴로움을 타파하고 이상 세계를 구현하리라는 구원론적 신앙으로서 당시 억압받고 있는 하층민들에게 널리 수용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불상의 배꼽 속 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었 다. 그런데 그 비결을 넣을 때 벼락 살도 함께 넣어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하였다. 1820년 춘산채지가(春山菜芝歌)라는 예언서를 쓴 이서구(李書九)가 1787년에 전라감사 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이 불상의 배꼽 속에 비결이 들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 심에 이끌려 복장 속에 있는 한권의 책을 꺼내고 말았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갑자기 뇌 성벽력이 내려치는 바람에 다시 복장에 넣고 봉하였는데 ‘전라감사 이서구가 억지로 열 다(全羅監司李西九開辨瑞)’라는 비기의 첫 머리 문구만을 얼핏 보았다고 한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2년 8월 어느 날, 동학접주 손화중이 이 소문을 듣고 지금이야말로 비결을 꺼내 민중을 구원할 이상세계를 만들 때라고 생각하고 동학 도 300여 명과 함께 도솔암(兜率庵)으로 올라가 반항하는 수십 명의 중을 결박하고 청 죽을 엮어 발판을 만들어 불상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비결을 꺼내 가져 갔다고 한다. 그 뒤 보고를 받은 무장현감은 각지의 동학군을 모조리 잡아들여 갖은 고 문을 가하면서 비결 책을 가져간 손화중과 두령이 있는 곳을 대라고 10여 일 동안 형벌 을 가하였으나 끝내 밝혀내지 못하고 전라감사에게 보고되어 주모자 3인은 사형에 처하 고 남은 100여 명은 엄장(嚴杖)을 때리고 방송하였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망해가는 나라의 쇠운과 일어서는 민중의 힘과 의지가 서려있는 얘 기라고 생각된다. 그 비결 책은 무엇이었을까? 있었다면 불경이나 불상조성에 관한 내역 이 고작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역적죄에까지 연루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을까? 마애불 의 배꼽에서 실제로 무엇이 나왔는지는 제쳐놓더라도 이 사건이 썩어빠진 세상이 망하 고 새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미륵신앙 과 동학이라는 사상적, 실천적 합류는 민중들이 오랫동안 희구해온 혁세(革世)의 불씨였 을 것이라고 도솔암 주스님이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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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도솔암 마애불
(4) 참당암(懺堂庵) 당암은 백제 때 창건된 이래로 오랜 세월동안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현재 가람은 대웅전 을 중심으로 약사전과 명부전 응진전으로 이 루어져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 28년(581)에 개창한 이후 광해군 6년 (1614)에 중창하였고 지금의 건물(대웅전)은 정조 18년(1794)에 다시 고쳐 세웠 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고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상을 봉 안하였으며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칠성탱화, 현왕탱화를 모셨다. 설화에 의하면 지금의 참당암은 본래 참당사로 선운사보다 먼저 창건되었다고도 한다. 1996년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낸『고창 선운산 도장의 성립과 전개』라는 유물유적 중심의 보고서에서는, 선운사에는 3권의 사적기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참당사사적기』에는 승정기원후 85년(숙종 39년, 1713 년), 호월자(浩月子)가 쓴 『대참사사적기』에는송사현(지금의 무장)의 북쪽에 선운산이 있는데 이 산의 서쪽에는 대참사(大懺寺)가 있으니 신라 때의 의운화상 이 창건한 도량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몇 줄 더 내려가면,도솔암 앞에 법 화굴(法華窟)이 있는데 여기는 신라의 의운화상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다. 이때 산 아래 죽도(竹島)의 포구에 한척의 석선(石船)이 와서 있는데 그 배에 범음(梵 音)이 들려왔으므로 어민들이 이상하게 여겨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면 배가 물러 가 버렸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의운선사에게 와서 알리니 선사가 제자와 더불어 포구에 이르자 그 배가 해안으로 다가왔다. 이에 의운이 그 배 안으로 들어가 보 니 옥축대장과 석가모니불상, 가섭(迦葉) 아난(阿難)등 십육나한상이 배 안에 나 란히 있고 또 금인(金人) 한 사람이 오른손에 옥으로 된 돗대를 잡고 비단으로 된 돗을 펼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상아로 된 수주(數籌)와 금자(金字)로 된 보인(寶印) 을 잡고 배위에 서 있었다. 의운이 그 사람에게 육지에 내려 불상 등을 봉안할 것 을 의논하려 했으나 마땅한 도량을 정하지 못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 나서 의운에게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왕(于闐國王)이다. 부처님의 경(經)과 상(像) 을 봉안할 성지를 찾기 위하여 해동(海東)의 여러 산을 편력하던 중 이곳 선운산 에 대참(大懺)의 승기(勝氣)가 있고 용당이 세워질 신령스러운 서기가 하늘을 뻗 쳐 있음을 보고 이곳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여 이 경상을 봉안케 하라’고 하였다. 이에 의운은 금인에게서 불경과 불상 및 나한 상 그리고 아주(牙籌)와 금자보인을 받아 이 산 가운데에서 불대장을 길이 봉정할 도량을 점쳐서 진흥왕의 대시를 얻어 가람을 개창하니 이것이 지금의 참당사(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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堂寺)이다.”라고 하여 대참사의 창건 연기설화를 말해주고 있다. 그 말미에는 각 전각의 창건연원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에 화주가 누구인지 시 주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림 12> 참당암 전경
(5) 석상암(石床庵)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석상암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두 차례의 중 수가 되었으며, 최근 2006년도에는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법당 부근에 있는 큰 바위가 평상처럼 생겼다 하여 ‘석상암’이라고 이름 하였다고 한다. 석상암은 법당과 칠성각,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다. 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규모는 119㎡(36평)이며 덤벙주초(자연석 주춧돌)에 기둥은 민 흘림 양식이며 지면에서 150cm 높이로 석축을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세웠 다. 법당의 주불은 옥으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이며 조선 영조 30년(1754)에 조 성된 후불탱화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지장탱화,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그림 13> 석상암 전경
(6) 동운암(東雲庵) 동운암은 선운사 사천왕문 앞 극락교를 건너 맞은편 산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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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운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되던 광해군 6년(1614) 에 재창(再創)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숙종 19년(1693)에 다시 중창하여 오늘 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동운암의 법당을 극란전이라 하여 ‘백목관 세음보살존상’을 봉안하였고 법당 뒤에 15평 규모의 요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그 자취마저 없어지고 인법당으로 남아 있다. 법당은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후 불탱화와 신중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그림 14> 동운암 전경
(7) 선운사 동백나무 숲 1967년 2월에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선운사 동구 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목에 수령이 약 500여 년은 될 법한 3천여 그루의 동백 나무가 오 리 길에 걸쳐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동백나무를 언제, 누가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선운사가 세워진 이후에 사찰 관계자들이 열매의 기 름을 사용하기 위하여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백꽃은 제주도와 보길도 그리고 여수 앞바다의 오동도를 시작으로 피기 시작하 여 3월 말쯤이면 다 질 정도지만 나비 등에 실려 온 봄소식이 선운사에 당도하면 동백나무 숲은 불꽃같은 빨간 꽃으로 장관을 이루는데 그 화려한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고 매혹적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한다. 선운사 동백꽃은 반쯤 져갈 때가 더욱 아름답다. 땅 위에 떨어진 검붉은 동백꽃이 그림처럼 쌓여있 는 모습은 차라리 서글픔을 느끼게도 하지만 꽃이 떨어질 때 뚝뚝 떨어지는 꽃잎 은 욕심을 버리고 깨끗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맺어진 사랑은 처음의 순수함 그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는 얘기도 전해오고 있다. 이 때가 되면 선운사와 문화원이 주관하는 동백연(冬柏燕)행사가 열리는데 전국에 서 동백꽃과 동백연 행사를 보려는 관광객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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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의 동백이 그토록 유명한 것은 꽃이 아름다워서일 뿐만 아니라 선운사의 연륜과 이곳에 인연을 묻어두고 간 사람들의 자취가 함께하고 있음이며 동백꽃에 얽힌 사랑 이야기와 동박새(冬柏鳥)의 슬픈 전설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 다. 그래서 미당은 선운사 동백꽃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선운사 골째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 보러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일러 / 피지않 했고 / 막걸릿집 여자의 / 육자배기가락에 / 작년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 그것 도 목이쉬어 남었습디다.
<그림 15> 동백꽃사진
(7)삼인리 장사송(長沙松) 선운사에서 도솔암 가는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오른편에 진흥굴이 있고 굴 앞 평평한 산자락에 수령이 약 600년에 이르는 소나무 노거수(老巨樹 )가 서 있는데 나무의 높이는 28m에 이르고 가슴높이의 둘레는 3m 이며 수간 폭은 17m에 이 른다. 이 나무는 지상 2m에서 줄기가 여덟 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큰 우산처럼 보인다.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도 불리는데 장사송이라고 이름 한 것 은 이곳의 옛 지명이 장사현이었던 소치라 하며, 진흥송이라는 이름은 이 나무 옆 에 신라 진흥왕이 수도하였다는 진흥굴이 있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1988년 4월에 천연기념물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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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장사송 사진
(8) 삼인리의 송악 선운사 입구에 있는 도립공원 선운산 관리사무소 앞 냇가 건너편 암벽에 자생하 고 있는 송악은 드릅나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로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80㎝에 이르고 나무의 높이는 15m에 달하는 거목이다. 이 송악은 내륙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꽃은 10월중 늦가을에 황록색으로 피 는데 가지 끝에 여러 개가 둥글게 모여서 달린다.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늘푸른 넝쿨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부의 섬이나 해안지역의 숲속에서 주로 자라며 동해안 쪽으로는 울릉도까지, 서해안 쪽으로는 인천 앞바다의 섬까지 도 자생하고 있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이곳이 송악이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이 된다. 남부지방에서는 소가 잘 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소밥이라고도 부른다. 이 송악은 1991년 11월에 천연기념물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그림 17> 송악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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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선운산 상사초[石蒜] 석산(石蒜) 또는 꽃무릇이라고도 불리는 상사초는 선운산 일대에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8∼9월에 활짝 핀다. 꽃이 지고난 뒤 잎이 돋아나 겨우내 푸르름을 머금
고 있다가 꽃이 필 무렵이면 잎은 사라지고 어린아이의 손바닥처럼 생긴 불은 꽃 이 피어나 꽃과 잎이 만날 수 없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은 이 꽃을 ‘상사화’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선운사 주변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도 연루되어 있다. 옛날 선운사에 젊고 잘 생긴 스님이 있었는데, 사하촌의 한 아가씨가 이 스님에게 반하여 가슴앓이를 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아가씨가 묻힌 묘 지에서 이 꽃이 피어났다 하여 상사화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석산은 한자 그대로 ‘돌마늘’로 뿌리가 마늘처럼 생겼으며 열매는 없고 뿌리로 번 식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그림 18> 상사초 사진
(10) 진흥굴(眞興窟)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향해 오르다 보면 도솔암 못 미쳐 도로 오른쪽에 진흥굴이 라 불리는 암굴이 있다. 이 암굴은 입구 높이 5m, 폭 3m의 타원형 형태를 보이 고 있는데 길이는 15m에 달한다. 진흥굴이라는 이름은,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兜率)왕 비와 중애공주(重愛公主)를 데리고 이곳 사자암(獅子岩) 앞에 있는 좌변굴(左邊窟) 에서 수도하였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 한다. 진흥왕은 승려가 된 후 이름을 법운자(法雲子)라 하고 사랑하는 중애공주를 위하여 중애암(重愛庵)과 왕비의 별호인 도솔(兜率)의 이름을 따서 도솔암(兜率庵)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일 생을 마쳤다고 전해오고 있다. 당시의 시대적,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 위덕왕 때 선운사, 대참사, 도솔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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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선운산 도량의 중추사찰을 건립하는 데 진흥왕이 시주했다는 ‘진흥왕시주설’은 후 대에 가탁된 것으로 보인다는 설도 있다. 그 내역을 다 기술하자면 너무나 지루할 것 같 아서 간단하게 『고창 선운산 도장의 성립과 전개』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아 백제와 양분하여 나누었으나 불과 3년도 되지 않았는데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한 반쪽의 한강유역마저도 빼 앗아 버림으로써 백제와 연합은 깨지게 되었고, 이에 성왕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아들 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나가 신라와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전사하고 그 아들만이 살아 돌 아와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이가 바로 위덕왕이다.
<그림 19> 진흥굴 사진
(11) 용문굴(龍門窟) 도솔암에서 낙조대 쪽으로 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산등성이 위에 용문굴이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선운사를 창건한 의운국사가 우진국에서 보내온 나한상을 모실 절 을 지으려는데 그곳에 용추가 있어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자를 시켜 내 쫓으니 이무기가 쏜살같이 달아나면서 이곳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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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용문굴 사진
(12) 삼천굴(三千窟) 선운사 창건 당시에는 89암자에 24개의 굴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이 굴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 참선 고행 정진하는 3천 신도를 수용했다는 천연동굴로 임진왜란 때는 인근 주민 3천명이 이곳에 피난했다는 설도 있으며 6·25전쟁 인민군의 빨치 산 교육장소로 사용됐다는 설도 있다. 이 굴에는 크고 작은 굴이 두 개 있는데, 큰 굴은 그 안에서 도리깨질을 하여 보리타작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높이였고 작 은 굴에서도 사람이 기거하여 한때 입구를 봉쇄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이 곳에 암자를 만들어 불공을 드리는 사람이 있다.
<그림 21> 삼천굴 사진
(13) 낙조대(落照臺) 도솔암에서 용문굴을 지나 산 정상에 오르면 칠산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 닷바람과 산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선운산 낙조대의 금빛 낙조는 서해 일몰 중 으뜸으로 꼽히는데, 석양을 마쳐서 산에 오르면 구경할 수 있다. 낙조대 좌측에는 천마봉이 있다. <그림 22> 낙조대 사진
(14) 천마봉(天馬峯) 낙조대 좌측에 있는 거대한 바위 절벽으로 말이 하늘로 뛰어 오를 듯한 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천마봉이라고 하는데, 그 기상이 준엄하여 장군바위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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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봉에 올라서면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산 아래 도솔천의 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그림 23> 천마봉 사진
(15) 선운산가비(禪雲山歌碑) 선운사 입구 매표소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선운산가비’는 정역(征役)에서 돌아오 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의 애절한 사록(事綠)을 담은 백제가요로서 구전으 로만 전해오고 있었으나 제5회 동백연 행사를 기념하여 이 고장 출신인 서정주 시인이 글을 짓고 주봉관 씨의 글을 받아 1981년 5월에 고창문화원에서 세웠다 고 한다. 화강석을 거칠게 다듬어 만든 비(碑) 전면에는 선운산가가 음각되어 있 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러하다.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에 있는 선운산가는 정역(征役)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 편을 기다리는 망부의 애절한 사록(事綠)의 백제가요로서 그 유지가 남아 있으면 서도 가사(歌詞)가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이 여간 아니었는데 뜻있는 향토출신 재 경인사 주봉관(朱奉官) 씨의 뜨거운 애향심으로 천오백년의 한을 풀게 되어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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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徐廷柱) 시인의 발시(拔詩)와 정주환(鄭主煥) 님의 글씨로 제5회 동백연 때에 이 비를 세우다. 비 후면에는 ‘나라 위한 싸움에 나간 지아비 돌아올 때 지내도 돌아오지 않네 그 님 그린 지어미 이 산에 올 라 그 가슴에 서린 시름 동백꽃같이 피어 노 래하여 구름에 맞닿고 있었나니 그대 누구신 지 너무나 은근하여 성도 이름도 알려지진 안 했지만 넋이여 먼 백제 그때 그러시던 그대는 영원히 여기 숨어 그 노래불러 이 겨레의 맑 은 사랑에 늘 보태옵소서’라고 적혀 있다. <그림 24> 선운산가비 사진
4) 마을의 전통과 생활환경 설기 당시부터 이곳 사람들은 선운사에 딸린 토지를 소작하며 주로 절 일을 해 주면서 한지를 만들어 생활에 보태 쓰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선운사 앞 들에 있던 농토가 수년 전에 생태숲조성사업지구로 편입되어 농사를 지으려고 하 여도 농토가 없어서 논농사는 전혀 못 하게 되었다. 다만 10여 가구가 밭 30여 두락에서 반찬거리 삼아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40여 세대는 상업에 종사하며 살 고 있다고 한다.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정월대보름에 당산제와 칠석날에 음식을 준비하여 농악을 치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데 근래에 와서 이곳이 관광지로 변하면서 그런 풍습들은 사라져버리고 관광 비수기에 날을 잡아 단체관광을 하는 등 사라져가는 마을공동체 의식을 되살리고 있다고 한다. 마을총회는 매년 12월이나 다음해 초에 개최하고 주요안건이 있을 때는 임시총회 를 개최하며 대부분 마이크방송으로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마을조직은 이종길 씨가 이장을 맡고 있으며 새마을 지도자에 김종문 씨, 부녀회 장에 김정애 씨, 노인회장에 이춘식 씨로 조직되어 있으며, 마을회관은 선운사 승 려노후수행마을 안에 건축하고 있는데 금년 말에 준공될 예정이다.
도움 주신 분 법만스님(선운사 주지) 종고스님(도솔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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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성 님(삼인 이장) 이종길 님(석상 이장)
참고문헌 『고창 선운산도장의 성립과 전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 선운사지』 선운사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모양성의 얼』 고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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