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기슭 양지에 깃든 마을, 교촌리 신휘관
고창읍 교촌리 신월리 죽림리 덕정리 도산리
1. 마을의 개관
성두리
율계리 석교리
월곡리
1) 마을의 위치
교촌리
주곡리
읍내리 덕산리
월암리
석정리
교촌리는 고창읍의 법정리 중 하나이지만 실상 읍소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청 앞 중앙로에서 제일아파트로 가는 4차선의 월곡로를 따라가다 보면 동서대로의 삼거리가 나온
노동리
내동리
다. 다시 동서대로를 휘돌아 성두 앞 삼거리까지 그 삼거리에 이어 읍 방향 모양성로의 끝 고 월산리
화산리
창읍사무소까지, 그 일원이 모두 교촌리이기 때문이다. 좀 더 설명을 하면 방장산(640m) 벽오봉에서 서쪽을 향해 구붓구붓 이어오는 산굽이를 내 려오면 동서대로의 지하도가 나온다. 고개를 들고 쳐다보면 우뚝 솟은 속칭 ‘필봉’이 보이는 데 거기서부터 높고 낮은 산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멈춰버린 산, 성산(聖山)에 닿는다. 필봉에 서 성산기슭까지 안겨 있는 마을들이 법정리의 교촌리이고, 그 중심이 교촌마을이다. 교촌리는 북동쪽으로 성두리와 월곡리에 접하고 서쪽은 석교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읍내리와 접한다.
2) 마을의 구성 법정리 교촌리는 아홉 개의 행정마을로 나뉜다. 교촌(校村), 입석(立石), 교신(校新), 성덕(成德), 교흥(校興), 청룡(靑龍), 청남(靑南), 청하(靑河), 용주(龍珠)의 행정마을에는 9명의 이장이 선임되 어 주민의 편의를 돕고 있다. 고창의 마을 제4집…011
아홉 마을은 교촌마을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교촌마을의 동쪽에 입석, 교신마을이
불렸다. 조선 후기 행정지명을 개칭할 때는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리’가 되었고, 그
있고, 남쪽에 교흥, 성덕마을이 있으며 서쪽에 청룡마을이 있는바, 그 마을 안에 있는 청하아
후 1950년대 후반기에 리 참사제도가 없어지고 행정분리 조정할 때도 ‘교촌’이라는 단위마을
파트와 청남아파트를 단위 마을로 분류했고 연이어 용주마을이 있다.
이름으로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교촌리에는 고창초등학교와 고창고등학 교, 고창여고가 있어 마을이름에 딱 맞춘 듯하다. 더불어 고창군청, 고창군의회가 소재(所在)
3) 마을의 유래와 변천과정
하고 있어 공무원들의 전입지이자 학생들의 하숙처가 되어 연이어 마을이 번창해졌다. 또한
교촌리의 유래에 앞서 고창현(高敞縣)의 연혁(沿革)과 변천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
근거리 읍내 주변에 상업차 들어와 살고 있는 유동인구가 많은데, 잠시 거주하다가 전출하는
영조36년(1760)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를 보면 고창현에는 8개의 면(面)이 있었다. 천북
경향이 있어 지금까지 계속 뿌리내리고 정착한 성씨는 없다. 그래도 그 중 장씨, 김씨 등은
면(川北面), 천남면(川南面), 오서면(五西面), 오동면(五東面), 고사면(古沙面), 수곡면(水谷面), 산내면
약 3대 정도 살고 있다. 마을주민은 대체로 모두가 각성바지로서, 집성촌이 아닌 것이 특이한
(山內面),
마을로 공무원, 상업, 기타 직업 등으로 2012년 5월 1일 현재 158세대 354명(남 172, 여 182)이
대아면(大雅面)이다. 고종36년(1899)에 발행된 『고창군 읍지(高敞郡 邑誌)』의 인구현황을
보면 천북면은 124호에 568명(남 299, 여 269)이고, 천남면은 82호에 331명(남 194, 여 137)의 약
살고 있다.
세의 인구를 가진 면 관내였다. 경술국치의 한일합방 이후인 1912년에 발행된 『구 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
(2) 입석마을
고창 읍내 역시 고창천(高敞川)을 중심으로 남쪽은 천남면, 북쪽은 천북면
입석마을은 고창읍사무소에서 동북 방
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행정지명을 조정할 때는 천남, 천북면이 고창면으로
향 약 400m 지점, 속칭 필봉(筆峰) 산봉
합병되었다. 그 때 천북면의 북문리(北門里)와 성덕리(成德里), 그리고 화평리(華坪里)가 교촌리
우리 아래 능선 따라 형성된 ‘쎄월’이란
에 합병되어 교촌리가 더 확장되었다. 현재의 각 마을유래와 명칭의 변천과정 및 토착성씨 인
마을이다. 1900년 초경 마을 앞의 농토
구현황은 다음과 같다.
에 농사를 짓기 위해 산 능선의 높은 곳
政區域名稱一覽)』에는
에 시나브로 한집 두집 입촌하여 살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1) 교촌마을 교촌마을은 고창향교가 있는
풍수상 초승에 비치는 눈썹처럼 가느
마을로, 고창읍사무소에서 북쪽
다란 조각달 형국이라는 뜻에서, ‘세월(細
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다. 애
月)’이라
초에 고창향교는 월곡리 학당
것이 ‘쎄월’이다. 한편 마을 뒤의 산봉우
동에 있었으나 장소가 협소한
리가 송곳처럼 뾰족한 데서 ‘추동(錐洞)’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는 공식적인 마을이름은 아니
데다 누습(漏濕)하여 선조22년
고 외부인이 풍수상 부르던 명칭일 뿐 문헌상엔 필봉 아랫마을로 기록되어 있어 어떠한 상황
(1589)에
에서인지 지금까지도 마을에서는 ‘세월’또는 ‘쎄월’로 부르고 있다.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
다. 따라서 그 때부터 마을이 설
교촌마을 전경
불리는데 이를 좀더 세게 부른
입석마을 표지석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행정지명을 조정할 때 이웃 화평리 일부가 흡수되기도 하였
기된 것으로 보아 약 400여 년
고 1990년대 중반 행정리 명칭을 교정할 때, 당시 마을 앞 들 가운데 고인돌 2기가 있어 ‘바
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우백이’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문화유산을 부각시키며 통상 불리는 것에 의미를 두어 ‘세월’
당초 마을명칭은 기록에 보이지 않으나 향교는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문묘(文 廟)향사와
012
그 고을의 교육기관으로 많은 교생(校生)들이 공부하는 곳이라 하여 통상 ‘생교’라
이 아니라 ‘입석(立石)’마을로 개칭하였다. 세월마을 역시 기존 목조가옥이 양옥으로 개축되 고 군청 앞 4차선의 중앙로가 개설되면서 옛 마을 앞 ‘바우백이’ 들녘의 정취는 온데간데없 고창의 마을 제4집…013
이 사라졌다. 우후죽순처럼 고창실내체육관, 아로마아파트, 태성빌라, 삼우연립, 성산리치빌,
간 도시화될 것을 예상하지만 주민 모두가 전입하여 생활하는 관계로 상업, 공무원, 기타 등
대성맨션, 성북교회 등 대형 건물과 상가 등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도시로 탈바꿈했다. 세월
의 직업으로 정착 성씨 없이 각성바지로 2012년 5월 1일 현재 147세대에 522명(남 259, 여 263)
마을에도 뿌리내리고 정착한 성씨는 없다. 장국신(당 92세)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인 1900
살고 있다.
년 여름 고창지역에 대홍수가 나서 살던 집(교촌리 성덕마을)이 물에 떠내려가 그 때 이 마을로 왔다고 한다. 입석마을도 모두가 각성바지로 상업, 공무원, 직장인, 기타 노동 등의 직업으로
(5) 교흥동 마을
2012년 5월 1일 현재 205세대에 561명(남 282, 여 279)이 살고 있다.
교흥동 마을은 고창읍사무소가 소재한 마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이전까지 는 천북면 북문리(北門里)였으나 이후 천북면이 고창면으로 통합될 때 함께 교촌리에 통합되
(3) 교신마을
어 오늘에 이른다.
교신마을은 고창읍사무소에서 동북 방향 약 500m 지점의 당초 월곡리 앞 농경지와 구릉
교흥동은 원래 고창초등학교 앞 중앙로를 경계삼아 고창천변의 강변뜸 마을로 몇 호 안
지로 허허벌판이었는데, 1994년 2월 고창군의 월곡 택지개발 조성사업지구로 선정되면서 생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1930년대에 읍사무소 앞 모양성로인 신작로가 개설되고 양쪽 길가
겨난 마을이다. 택지 조성공사는 예정대로 1998년 11월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상가와 주택
에 상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의 형태를 갖추었다. 당초 고창면의 읍동시(邑東市, 고창면의 동쪽에
그리고 공원까지 갖추고, 같은 월곡지구 택지개발지역 내의 4차선의 월곡로가 개설되어 도로
있는 시장)가
를 경계로 동쪽은 월곡리 하월마을, 서쪽은 교촌리 교신마을로 분리되었다.
1930년대에 교흥동 강변뜸으로 옮겨졌다. 시장터가 된 곳은 지금의 공공도서관에서 고창 문
지금의 문화의 전당 주위에 있었는데 시장이 열리는 날짜는 매월 8, 18, 28일이며
택지가 개발되기 이전엔 입석마을 앞쪽 들녘 일부는 ‘한서평’이라는 상전옥답(上田沃沓)의
화원까지의 구간이며 시장이 열리는 날짜는 매월 3, 8일로 지금과 같았다. 시장이 생기면서
논이었다. 지금은 상가 및 주택은 물론 공공기관인 고창군 법원, 고창군 선거관리위원회, 고
인구가 늘고 고창초등학교 앞까지 주택이 건축되자 1950년대 하반기에 교촌리와 분리조정
창우체국, 군산지방해양수산청, 고창해양수산사무소, 라온교회, 행복한 교회 등의 건물들이
해 교흥동으로 마을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현재 교흥마을에 고창교육지원청, 고창문화원, 공
숲을 이루고 이 마을 역시 도시화되어 창상세계(滄桑世界)라 할 만하다. 이 마을도 모두가 신
공도서관, 원흥맨션, 연합신경외과의원, 일광기념관 등의 건물이 도시 형태를 갖추었으나 뿌
규 전입한 주민들로 공무원, 상업, 기타 등의 직업으로 각성바지가 2012년 5월 1일 현재 167
리내려 정착한 성씨는 없고 공무원, 상업, 기타 직업의 각성바지가 2012년 5월 1일 현재 160
세대에 517명(남 263, 여 254) 살고 있다.
세대에 239명(남 108, 여 131)이 살고 있다.
(4) 성덕마을
(6) 청룡마을
성덕마을은 고창읍사무소에서 동쪽 방향 약 800m 지점의 중앙로 아랫뜸 고창천변에 위치
청룡마을은 고창읍사무소에서 서북 방향 약 500m 지점에 있는데, 공교롭게도 풍수상 청
한 마을이다. 마을주변이 농경지일 때 농사일 관계로 한집 두집 들어와 집을 짓고 살면서 마
룡등 아래에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1960년대 식량난에 허덕일 때, 오갈 데 없는 걸인 및 부
을이 형성되었다. 1900년대 이전부터 성덕리로 명시된 마을이지만 마을 중앙에 4m 간격의
랑아들의 와굴(窩窟, 본거지)이 청룡마을의 북서쪽 산허리에 있었다. 그 당시 ‘희망촌’이란 이
마을길이 있어 동쪽은 월곡리 성덕이고, 서쪽은 교촌리 성덕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름을 걸고 움막 짓고 집단생활을 했다고 한다. 청룡의 길지를 찾아 정해졌다는 설이 있었으
1일 행정지명을 정리할 때 분동하여 교촌리에 흡수되면서 같은 성덕마을이면서 행정상의 어
나 1970년대 후반까지 있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때 이후 지금의 청룡마을에 건물이 들어
려움도 있었다. 그 후 1994년 2월 고창군의 월곡택지개발 조성사업과 근래 2011년부터 시공
서면서 마을이 조성되어 1970년대 이후 시가지 조성계획이 수립되고,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중인 농어촌 뉴타운 조성사업으로 주택이 건설되고 있어 간접적 영향을 받아 주변이 개발되
1990년 1월 청룡1동으로 분리되었다. 그 후 1997년 4월에는 청북동으로 분리되더니 신흥주
고 있다. 또 고창문화원 앞 도로변의 동백아파트, 태양연립, 대흥연립, 신축중인 뉴캐슬빌 연
택단지가 만들어지면서 2003년 8월에 기존의 주택지역이 청룡동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른
립주택 등으로 성덕마을은 한층 더 개발됐다. 현재는 약간의 농지와 나대지가 남아있어 불원
다. 청룡동에는 국조단군(國祖檀君)을 모신 성전(聖殿)이 있어 매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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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015
행되고 임진, 정유왜란 때 순절한 김해김씨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또 원불교 고창교당과 청
도 하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마을 가옥 바로 옆에 묘(墓) 1기가 있으나 무연고로 논쟁의
룡사 사찰이 있고 장산파크빌라도 있으나 정착된 성씨 없이 공무원, 상업, 직장인, 기타 직업
대상이 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으로 각성바지가 2012년 5월 1일 현재 84세대에 228명(남 112, 여 116)이 살고 있다.
1970년대 이후까지도 몇 집 안되는 ‘뜸’에 불과했으나 1980년대 중반에 고창여자중·고등 학교가 옮겨오면서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청룡동으로 행정분리가 되었다가 다시 청용2동으
(7) 청남마을
로 분리되었다. 그 뒤 2003년 8월에 용주동으로 개칭이 되었다. 이 이름은 청룡이 여의주를
청남마을은 고창읍사무소에서 서북 방향 약 500m 지점의 청룡동 안에 있는 진흥하이츠2
물고 있는 형국이란 뜻이다. 고창여중·고 학생들의 수가 늘자 고창여자중학교는 1999년 말
차아파트를 청남마을이라 한다. 그리고 교촌리에서 1990년에 분리된 청룡동이 고창읍 시가
경 학교 이웃인 100m 지점의 백석마을로 따로 옮겨갔다.
지 조성계획에 따라 산허리를 잘라 유진청하아파트 가, 나, 다 단지가 건축되었고 이에 진흥
소반촌의 김범순은 그 조부(김평보) 때 입촌하여 3대를 살고 있어 토착민으로 볼 수 있으
하이츠 2차단지 등이 조성되면서 별안간 비대해진 마을의 운영을 감당키 어렵게 되자 1997년
나 집성촌을 이룬 것은 아니어서 토착 성씨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무원, 상업, 직장인,
에 유진청하아파트와 함께 진흥2차아파트를 청북동으로 분리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8월
기타 직업으로 각성바지가 모여 2012년 5월 1일 현재 94세대에 290명(남 139, 여 151)이 살고
행정구역 분구조정시 진흥2차아파트만 청남동으로 분리하였는바 공무원, 상업, 직장인, 기타
있다.
직업으로 각성바지가 살고 있다. 2012년 5월 1일 현재 88세대에 301명(남 137, 여 164)이 살고 있다.
2. 마을의 자연환경과 지명
(8) 청하마을
1) 자연환경
청하마을 역시 청룡동 안에 있는데, 유진청하아파트 가, 나, 다 동의 건물과 건물에 따른 상
고창의 대표적인 산은 역시 방장산이다. 그 명산(明山)인 벽오봉에서 기봉한 산줄기는 여러
가 2동을 청하동이라 한다. 청남동과 같이 교촌리에서 분구가 된 청룡동이 고창읍 시가지 조
갈래로 나뉘지만 그 큰 가닥은 거침없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면서(眠鼠)골 능선을 거쳐 덕
성계획에 의거 유진청하아파트와 진흥2차아파트 등의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갑자기 비대
고개에 달한다. 한 가닥은 관운정 고개에서 사실터 방향으로 틀고 한 가닥은 교촌마을 성산
해진 행정체제를 조정하기 위해 1997년 청북동으로 아파트 단지를 떼어 분구하였으나 다시
(聖山)을
2003년 8월 행정구역 분구조정시 유진청하아파트와 상가 등을 포함하여 청하마을로 분리하
필봉(筆峰, 마을에서는 ‘템봉’으로 부름)을 이룬다. 필봉에서 기봉한 능선이 갈비뼈처럼 굽은 채 능
였다. 공무원, 상업, 직장인, 기타 직업으로 각성바지가 2012년 5월 1일 현재 157세대에 512명
선을 따라오다가 성산에서 멈춰 선다. 그 성산을 두고, 보는 이에 따라 다 다르게 말하는데,
(남 245, 여 267)이 살고 있다.
대체로 교촌마을 뒷산의 형세를 통틀어 평원와호국(平原臥虎局, 들판에 배부른 채 누워있는 호랑이)
이루기 위해 가로로 뚫린 동서대로(東西大路)의 지하도(地下道)를 지나오며 우뚝 솟은
으로 풀이하고 있다.
(9) 용주마을 용주마을은 당초에는 소반촌이란 작은 마을인데 조선 후기까지 천북면 교촌리에 따른 ‘뜸’
(1) 산
이었다. 고창읍사무소에서 서북 방향 약 500m 지점인데, 풍수적으로 풀이하자면 청룡동에
교촌마을의 뒷산인 성산(해발 125m)은 비교적 높게 보이지만, 평온하면서도 장엄하게 보이
서 볼 때 불쑥 머리를 내민 용두형국(龍頭形局)이고, 다르게는 용두 앞에 간단히 차려진 소반
는 산이다. 산 능선을 따라 방장산 쪽을 쳐다보면 필봉(해발 150m)에 닿는데, 필봉 역시 우뚝
형국(小盤形局)으로도 보인다. 지금은 휴먼시아아파트 개발로 없어졌지만 소반촌 앞 들녘 약
하여 한번쯤 오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 능선을 돌아서 입석마을을 향하면 속칭
300m거리 논 가운데에 불쑥 ‘섬’처럼 올라온 집 한 채의 터가 있어 이를 말한 것이라 했다.
‘앞동산(꽃동산으로도 불림)’에 이르는데 마을 중앙에서 뒷산을 바라보면 둥그스름한 형태의 산
또 옛날 반룡원(盤龍院)의 지세 형국과 연계된 명당(明堂)터로 알려져 있어 먼 옛날의 이야기이
세가 마치 병풍을 쳐 놓은 듯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풍수상으로는 이견(異見)이 많은데, 맹호
지만 많은 사람들이 투장(偸葬,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을 했던 지형이기
출림국(猛虎出林局, 호랑이가 숲을 나오는 형국)으로 부르기를 갈망하는 산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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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골
샘이 있고 특히 물이 있어야 마을이 형성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교촌마을은 지금의 향교 주
교촌마을 중앙의 필봉을 바라보면 들녘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곡도 아닌 골짜기가 있다.
변이나 옛 군수 관사 터의 어린이집 주변보다 마을 샘이 있는 이곳이 마을 중앙으로 보인다.
마을에선 대개 ‘안골’이라 부르는데 약간의 논과 밭, 집터가 나뉘어 7~8두락 남짓씩 있다. 지
안골에 집터가 있었던 것도 지금의 샘과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금은 논에도 뽕나무며 기타 작물이 심어져 있기는 하지만, 농사일은 소일거리 삼아 하는지라
입석(쎄월)마을의 마을 샘은 마을 중앙 최주환 씨 집 앞에 있었는데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관리는 허술하다. 그런데 안골 집터 대밭 어구에 약간의 찰흙이 있어 60여 년 전만 해도 마을
15년 전에 메워져 샘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소반촌마을의 마을 샘도 2000년도 중반까
아이들이나 이웃 아이들이 갖고 놀았다고 한다. 그 흙을 파다가 구슬을 만드는 등 아이들 사
지 있었으나 이후 마을이 개발되면서 도로에 묻혀 없어졌다.
이에 꽤 인기가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환갑을 넘긴 사람들이나 알 뿐, 아는 이 없는 옛이야 기라고 한다(김형남 님).
3. 마을의 인문환경
(3) 고개
1) 학교
교촌마을 안골에서 필봉 쪽의 능선 중 낮은 대목을 ‘템봉재’라고들 부르는데, 성두, 상성,
(1) 고창초등학교
옥동마을 사람과 교촌마을 사람들이 서로 오갈 때 그 고갯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고창초등학교는 교촌리 281-1번지,
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형남 님은, “지금은 소나무와 잡목이 무성하여 고갯길을 찾
교촌마을에 있다. 2012년 4월 28 오후
기 어렵지만 1960~1970년대까지 해도 그 고갯길을 오가는 이가 많았다”라고 말한다. 특히
2시 학교 운동장에서 2,000여 명의 동
땔감 사정이 어렵던 시절에는 방장산의 면서골, 산소골, 덕고개 등지에 교촌마을 사람들의 지
문들이 모인 가운데 조병채 총동창회
게를 짊어진 나무꾼들의 큰길이었다는데, 지금은 그 위치조차 찾기 어렵다.
장, 엄기덕 교장 주관으로 100주년을 맞는 기념식 및 100주년 기념탑 제막을
(4) 마을 샘
한 바 있다. 개교 이후 학교 명칭 등이
교촌마을에는 오래된 마을 샘이 있다.
여러 번 바뀌었는데, 변동사항은 다음
규모는 가로 164cm, 세로 160cm, 높이
과 같다.
80cm로 시멘트 사각틀을 세운 샘이다.
1912. 5. 1 고창공립보통학교로 개교
샘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
1938. 4. 1 고창제일공립 심상소학교로 개칭
으나 마을이 형성된 후부터 샘이 있었던
1941. 4. 1 고창군 공립초등학교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역사를 가늠할
1945. 9. 24 고창국민학교로 개칭
때 향교가 설립되면서 마을도 형성된 것
1981. 3. 9 고창국민학교병설유치원 개원
으로 추측하더라도 약 400여 년은 되지
1992. 3. 1 도산국민학교와 통폐합
않았을까. 지금은 상수도 시설로 샘물을
1994. 3. 1 고창동국민학교와 통폐합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 마을에서는 오래
교촌마을 마을 샘
고창초등학교, 앞에 보이는 것이 백주년 기념탑이다.
1996. 3. 1 고창초등학교로 개칭
된 샘을 없앨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1998. 4. 1 고창서초등학교와 통폐합
렇게나 방치할 수도 없어 샘틀에 덮개를 씌워 빗물과 기타 오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 놓았
2006. 3. 1 50학급(1615명), 병설유치원 3학급 79명 편성
다. 옛것을 보존하려는 의지와 지혜가 엿보인다. 뿐만 아니라 어느 마을이나 마을 한가운데
2012. 5. 1 현재 1,236명(남 652, 여 584) 44학급, 교직원 89명, 교장 엄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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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019
(2) 고창여자고등학교
2) 관공서
고창여자고등학교는 교촌리 295번지, 용주마을에 있다.
(1) 고창군청
개교 이후 변동사항은 다음과 같다.
고창군청은 고창읍 교촌리 275-3번지 교촌마을에 있다. 고창군은 전라북도의 6시 8군의
1945. 12. 16 고창고등여학교 개교 및 제1회 입학식
하나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창, 무장, 흥덕 세 고을이 병합되어 생긴 명칭이다. 그 연
1949. 4. 1
고창고등여학교를 고창여자중학교로 6년제 개칭
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55. 4. 15
고창여자고등학교 교명으로 개교 및 입학식
1956. 2. 2
고창여자고등학교 설립 인가. 보통과 1학급. 고창읍 교촌리 75번지
마한시대 : 모로비리국
1960. 5. 6
고창읍 읍내리 125-9번지로 교사 이전
백제시대 : 모 량부리현, 송미지현, 상로현,
1986. 11. 28 고창읍 교촌리 295번지로 교사 이전 2012. 5. 1
현재 학생수 650명, 학급 24학급, 교직원 50명, 교장 정순월
상칠현 통일신라시대 : 고창현, 무송현, 모양현, 장 사현, 상질현
(3) 고창고등학교
고려시대 : 고창현, 무송현, 장사현, 장덕현
고창고등학교는 교촌리 246번지 교촌마을에 있다. 1918. 4. 1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마스토미 야스자에몬(桝富安左衛門)이 기독교회를 교실로 교주 겸 교
조선시대 :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 1895 : 고창군, 무장군, 흥덕군
장자격 오산학당 설립
1914. 3. 1 고창군(8개면), 무장군(16개면),
1919. 4. 14 사립 오산학교 설립인가(개교기념일)
고창군청 전경
흥덕군(9개면)을 고창군으로 통폐합하면서 17개면으로 조정
1922. 2. 2
운영난으로 폐교에 이르자 고창군민대회에서 인수결정
1926. 12. 6 현 위치에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청사 신축 이전
1922. 6. 3
사립고창고등보통학교 개칭인가. 고창 읍내로 이전
1935. 3. 1
17개 면을 14개면으로 조정
1925. 6. 20 본관 2층 준공 290평
1955. 7. 1
1읍 13면(고창면이 읍으로 승격)
1937. 9. 25 전주신흥중학교 전교생 편입. 10학급 완성
1991. 3. 26 지방의원선거 초대 군의원 15명 선출 의회 개원
1938. 3. 15 사립고창중학교로 개칭
1993. 10. 23 현 군청 청사 양옥으로 신축
1944. 3. 31 사립재단이 전라북도에 이관. 고창공립중학교로 개칭
1995. 6. 27 제1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민선군수 선출
1951. 9. 1
학제개편으로 고창고등학교로 승격, 중학교 분리 병설운영
1998. 6. 4 제2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민선군수 선출
2012. 5. 1
현재 학생수 660명, 24학급, 교직원 67명, 교장 서제휴
2002. 6. 13 제3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민선군수 선출 2006. 5. 31 제4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민선군수 선출 2010. 6. 2 제5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민선군수 선출
고창군은 1945년 광복 이후 제1대 군수부터 1995년 6월 30일, 제40대 군수까지는 관선군 수 제도였고 1995년 6월 27일에 제1회 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제41대 군수부터 2010년 6월 2 일 당선된 제45대 이강수 군수까지, 민선군수이다. 고창군은 1실 13과 2직속기관 3사업소와 고창고등학교 전경
020
1읍 13면 189리 563분리 1,380반이며 공무원 정원 691명이 행정업무를 보고 있다. 고창의 마을 제4집…021
(2) 고창군의회
1998. 10. 27 삼인종합학습원 개원
군청과 같은 건물에 있는 고창군 의회는, 군민의 의결기관으로 입법, 감사기능의 역할을 맡
2010. 9. 1
조직개편으로 전라북도 고창교육지원청으로 명칭 변경
고 있다. 정례회와 임시회로 나누어 진행하고 군민과 소통하고 신뢰받는 열린 의회 운영을 지 향하고 있다.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제20대 교육지원청장으로 박찬문 교육장 관리 하에 2과 6담당의 기구로 교육전문직 교원 11명과 교육행정직 53명 계 64명의 정원으로, 유치원(공사립 포함) 22학교에 32학급 423명, 초
1991. 3. 26 지방자치제 부활에 따른 군의회 의원 선거로 15명 선출 의회 개원
등학교 21개 학교 176학급에 2,574명, 그리고 14개 중학교(공사립 포함) 84학급, 1,967명의 학
1993. 10. 23 군청 청사 신축으로 4층에 의원 의사당 시설 이전
생을 관리하고 있다.
1995. 6. 27 제1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제2대 의회 개원 15명 1998. 6. 4 제2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제3대 의회 개원 14명
(4) 고창우체국
2002. 6. 13 제3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제4대 의회 개원 14명
고창우체국은 고창읍 교촌리 360번지 교신동에 있다. 고창우체국은 전북지방 우정청의 소
2005.
고창군 의회 청사 신축(지하 1층, 지상 3층, 558평)
2006. 5. 31 제4회 전국 동시지방선거 제5대 의회 개원, 10명 비례대표제 실시
속으로 우편, 우편환, 우편대체, 우체국 예금 및 우체국 보험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이며 그 연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10. 6. 2 제5회 전국 동시지방선거 제6대 의회개원 10명 1905. 6. 6
현재 군의회 의장은 이만우 의원이다(2012년 5월). 군의회 기구는, 의장, 부의장과 운영, 자치
고창현 천남면 서부리에 고창 임시 우편소 개소
1909. 11. 1 고창우편 전신취급소 개칭
행정, 산업건설 3개의 상임위원회 등이 있고, 공무원은 의회 사무과장 1명과 의회운영전문위
1924. 12. 21 고창 읍내리 238번지에 신청사 이전
원, 자치행정전문위원, 산업건설전문위원 등 14명이 배치되어 있다.
1949. 8. 13 고창우체국으로 개칭 1971. 12. 15 고창전신전화 분실 신축 자석식-공전식으로 변경
(3) 고창교육지원청
1977. 7. 1
직제개편 서무, 우편, 전신·전화 기술계로 편제
고창교육지원청은 고창읍 교촌리 76-4번지 교흥동 마을에 있다. 고창교육지원청은, 21세
1983. 1. 1
고창우체국과 전신전화국 분리
기를 선도하는 창의, 인성을 겸비한 인재육성과 교육공동체 추진 그리고 배움과 나눔의 행복
1988. 9. 15 청사신축 준공(지상 3층, 지하 1층)
한 학교운영을 위해 지, 덕, 체, 기가 조화된 슬기로운 한국인’을 교육지표로 삼고 있다. 연혁
2002. 8. 19 고창읍 교촌리 360번지에 신축 이전.
은 다음과 같다. 1949. 12. 31 법률 제 86호로 교육법 공포
고창우체국은 제27대 강상호 우체국장 관리하에 2과 1실이며 일반국 4개국, 출장소 1개소,
1952. 8. 25 고창군으로부터 구 일인소학교(舊日人小學校)에 청사 이전(고창읍 모양동 183-2)
별정국 9개국과 객실 26개를 보유한 선운산 수련원을 운영하며 일반직, 기능직, 비정규직 등
1964. 1. 1
시·군단위 교육자치제 부활로 교육구청을 교육청으로 교육감을 교육장으로 개칭
124명이 우정업무를 관리하고 있다.
1980. 9. 9
신청사 준공(부지면적 4,575㎡ 연면적 1,552㎡ 건축면적 474㎡)
1991. 3. 26 법률 제4347호 지방자치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교육학예에 관한 사무를 시·도교육청으로 이관(전라북도 고창교육청으로 명칭 변경) 1991. 4. 23 대통령 제11801호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1996. 3. 1
022
전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5) 고창등기소(고창군 법원) 고창등기소는 고창읍 교촌리 359번지 교신동 마을에 있다. 관내 주민의 부동산(토지, 건물) 및 상법, 민법, 특수법인의 등기사항을 공시 관리하는 기관으 로 설치 및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고창의 마을 제4집…023
1916. 11. 15 광주지방법원 고창출장소 설치
는 기관으로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22. 7. 1
전주지방 법원 고창출장소 개칭
1947.
전주지방심리원 고창등기소로 개칭
1895년
1948. 6. 1
전주지방법원 고창등기소로 개칭(현재)
1914. 3. 1 고창면 설치(고사면, 외양면, 내양면 합병)
1977. 1. 1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 고창순회 심판소로 개소
1935. 3. 1
1983. 9. 1
전주지방법원 정주지원 고창순회 심판소로 개칭
1949. 7. 4 법 률 제32호 지방자치법 제정으로 읍면에 면의회 의원 탄생. 1952・1956・1960년도까지 계승되
1995. 1. 1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 고창순회 심판소로 개칭
1995. 9. 1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 고창군법원 개원(현재)
1955. 7. 1 고창면이 고창읍으로 승격
1998. 11. 7
현 위치에 지하 1층, 지상 2층(연건평 941.24㎡)
1978. 9. 7 신청사 준공
로 특정일에만 정읍지원판사가 참여한다. 소액사건 및 협의이혼 등 재판을 하는 법정이다.
행정구역 개편(오산면의 도산, 주곡, 죽림, 신월, 덕정, 고창면에 편입)
었고, 읍면장은 의회의 간접 선거로 선출
1987. 1. 1
건물을 신축하였고 강사신 소장 외 3명의 공무원이 관리중이며 2층에는 고창군법원 법정으
조선시대까지는 천북면, 천남면 지역
행정구역 개편(고수, 봉산, 동암마을 편입)
2002. 7. 1 행정구역 개편(71개 행정리 → 70개 행정리) 2003. 9. 9 행정구역 개편(70개 행정리 → 85개 행정리) 2010. 1. 29 행정구역 개편(85개 행정리 → 90개 행정리)
(6) 고창군 선거관리위원회 고창군 선거관리위원회는 고창읍 교촌리 358번지 교신동에 있다. 고창군 선거관리위원회는
김이종 읍장의 관리하에 총 53명의 직원이 배치되어 주요 기구로는 총무담당, 주민생활지
헌법에 의한 정당법에 근거하여 각종 선거관리, 정당사무관리, 정치자금 사무관리와 민주시민
원 담당, 재무담당, 민원담당, 산업경제 담당, 건설도시 담당, 환경미화 담당 등 7개 담당으로
정치교육, 선거정치제도 연구 등의 주요 업무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구성, 읍 행정을 관장한다.
1963. 2. 7
전북 제9지역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 창설
3) 정부재정지원 기관
1971. 1. 26 전북 제10지역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로 개칭
(1) 고창문화원
1973. 1. 20 전북 제6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로 개칭
고창문화원은 교촌리 70-1번지 교흥동에 있다. 고창군민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보급을
1981. 2. 26 전북 고창군 선거관리위원회로 개칭(정읍군-선거구, 고창군-개표구)
통하여 지역 주민들의 문화생활의 질을 높이고 지역문화 창달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되었으
1987. 11. 7 고창군 선거관리위원회로 개칭
며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2000. 2. 16 고창군 부안군 선거구 통합(고창군-선거구, 부안군-개표구)
고창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정읍지원 판사이고, 사무국장 유창진 국장의 관리하에 공 무원 6명이 배치되어 선거관리업무를 관리하고 있다.
1963. 9. 1
고창문화원 설립(모양성 입구 구 경찰서 상무관)
1963. 11. 4
한국문화원연합회 가입
1964. 12. 24 문화공보부 법인 설립 허가 취득 1967. 7. 20 원사 이전(구 공회당 현 교육청 도서관 자리)
(7) 고창읍사무소
1969. 8. 30 원사 이전(현 읍사무소 앞 구 보건소 자리)
고창읍사무소는 고창읍 교촌리 283-3번지 교흥동에 있다. 고창읍사무소는 지방자치법 제
1992. 4. 20 신청사 준공(현 읍사무소 앞 구 보건소 자리)
117조에 의거 설치되었으며 군수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와 자치사무를 처리하
024
1999. 9. 1
현 청사 이전(전 고창등기소 건물)
고창의 마을 제4집…025
2000. 8. 28 사료관 신축 건평 340.46㎡
수록되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발행한 『패솔로지 오브 더 이어(Pathology of the ear)』라는
2012
병리학 교과서에도 논문이 수록되었다. 또한 국내 최초로 기초적 인공와우 실험을 원숭이를
현재 신청사 기공(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2.662㎡의 규모로 공사중)
이용하여 시행하였고 수많은 만성 중이염 환자를 수술하여 치료하였으며 국내에서는 희귀한 송영래 문화원장의 관리하에 3명의 직원과 500여 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문화예술의 진흥에
이소골경화증을 수술한 의학계의 선구자이다.
애쓰고 있다.
5) 문화유산 4) 마을의 인물
(1) 고창 향교
(1) 오희길(吳希吉, 1556~1625)
고창향교는 고창읍 교촌리 248-1번
자는 길지(吉之) 또는 도암(韜庵)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556년 고창읍 교촌리 필봉 아
지 교촌마을에 있다. 고려 공민왕 때
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언기(彦麒) 때 나주에서 고창으로 왔으며 금강(錦江) 기효간(奇孝
향학당(鄕學堂)이란 이름으로 학당동(현
諫)의
고창읍 월곡리)에 있던
문인으로 정여립(鄭汝立)과 교유하다가 여립이 이율곡(李栗谷)과 성우계(成牛溪)를 배척함
것을 옮긴 것이다.
을 보고는 교의(交誼)를 끊어 버렸다.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지반(地盤)이 누습(漏濕)하고 규모가 협
자 태조어용(太祖御容)과 조선왕조실록을 손홍록(孫弘祿) 등과 함께 내장산 은적암(隱寂庵) 용
소하던 차 선조22년(1589) 현감 이홍업
굴대로 옮기고 다시 아산(牙山)-강화(江華)-해주(海州)를 거쳐 영변 묘향산 보현사에 보관하여
(李弘業)이
병화를 면케 하였다.
사안지(處士安祉)와 협의하여 오희길의
선조 37년(1604)에 상소하여 치체(治體)와 진학(進學)의 요령을 말하니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으로 임명되고 선조 2년(1610) 또 상소하여 치체와 진학의 요령을 말하니 평릉도(平陵道)로 옮 겨졌다. 1618년 7월에 위성공신(衛聖功臣) 종1등(從一等)에 참여하고 1619년에 허균(許筠) 등의
부임하여 도암 오희길과 처
고창향교
세거 주택지를 양도받아 현 위치에 이축(移築)하였다. 그 후 대소병화(大小兵禍)에도 피해 없이 지금까지 423년간 유림의 정성으로 수결수보(隨鈌修補)하여 왔다.
대성전은 익공(翼工) 3칸 맞배지붕으로 정방(正方)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을 정위(正
미움을 받아 거제도로 귀양가서 1623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고로 『도암선생문집(韜庵先
位)로
生文集)』 3권 1책과 『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 8권
각 종향(從享)하고 있다. 명륜당(明倫堂)은 내삼문(內三門) 정면으로 정면 5칸과 동서 양쪽에 협
4책이 간행되어 전한다.
아산면 반암리 금암사(琴巖祠)에 배향되어 음력 9월 18일 유림이 향사한다. 살던 집터는 고
사성(四聖)을 배향하고 동서 양벽에 송조사현(宋朝四賢)과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을 각
실(夾室) 각 2칸씩 9칸이고 하층은 돌기둥으로 하고 상층은 대청으로 통하여 부강명륜지소(扶
창 향교 터로 제공되었는데 당시 향유(鄕儒)들이 중가(重價)로 가격을 치르려 하자 사양했다고
綱明倫之所)로
한다. 그리고 그 때 남긴 “내가 오늘 의관(衣冠)을 하고 금수(禽獸)를 면한 것은 오직 공부자
용하고 있다. 본 건물은 타 향교의 명륜당 양식보다 특이성을 가진 웅장한 건물로 평가받는
(孔夫子)의 덕택이다”라는
다. 동재(東齊) 4칸은 전교실(典校室)과 장의실(掌議室)로 사용하고 1칸은 루청(樓廳)이며 서재(西
명언은 아직까지도 유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다.
齋) 3칸은
사용하며 동쪽 협실 2칸은 제관 숙소로, 서쪽 협실 2칸은 제 유생의 숙소로 사
장서고(藏書庫)와 루청으로 사용중인 독립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양사재 및 사마재
(2) 장인원(張寅源, 1927~2002)
는 같은 건물의 방풍지붕이며 1997년 유림의 뜻을 모아 전사청(典祠廳) 3칸과 화장실을 이어
인동장씨(仁同張氏) 만용의 장남으로,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168번지에서 태어나 1953년 전
1999년 서소문(西小門) 1칸을 신축하였다.
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알베르트루트비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고창향교는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시킨 문화의 도장이다. 2월과
취득하고, 전남대학교 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을 거쳐 제18~19대 전남대학교 병원장을 역임하
8월 상정일(上丁日, 음력으로 매달 첫째 드는 정丁의 날)에 300여 유림이 참석 석전대제를 봉행한다.
였으며 1992~1998년까지 광주 보훈병원 원장도 역임했다.
1985년 8월 14일 지방문화재 자료 제98호로 지정된, 이 고장의 명실상부한 문화유산으로 이
독일과 영국의 이비인후과 교과서에 「고실경화증의 전자현미경적 소견」이란 연구 논문이
026
정범(李正範) 전교가 관리한다. 고창의 마을 제4집…027
<金海金氏 三代 六忠一孝四烈 도표>
(2) 단군성전(檀君聖殿) 고창 단군성전은 고창읍 교촌리
八世
222-5번지 청룡동에 있다. 1977년
九世
十世
十一世
十二世
8월, 건립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子 應馨 --- 子 福遠 --- 子 軸 -------------------------------- 子 起南 ----------------------------- 子 興立
1979년 4월에 완공하였다. 우리나
忠 折衝宣武原從一等功臣
烈 配:淑夫人潘南朴氏
라를 처음 개국한 국조(國祖), 단군
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임금이 없다가 신인(神人)이 단목(檀 木)
鮮)이라 하니 이 분이 단군이시다.”
忠 宣敎郞宣武原從三等功臣 烈 配:貞夫人咸安趙氏
님으로 받들어 나라이름을 조선(朝
烈 配:淑夫人錦城羅氏
忠 主簿宣武原從三等功臣 --- 子 淳立
--- 子 佑南
--- 子軒 -------------------------------- 子 斗南 ----------------------------- 子 德立
아래에 내려오니 사람들이 임금
忠 司僕宣武原從三等功臣
忠 部將宣武原從二等功臣
--- 子 孝立
烈 配貞夫人靈岩朴氏 --- 子 志南 ------------------------------ 系 孝立 忠 部將宣武原從二等功臣
孝 通德部
단군성전
이 말은 『삼국유사』, 『고기(古記)』를 비롯하여 모든 국사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3) 어사각(御賜閣)
단군을 국조로 받들고 제사를 지낸 것은 일찍이 고구려 때부터인데, 평양에 단군 사당인
어사각은 고창읍 교촌리 242번지
성제묘(聖帝廟)를 세워 받들었다. 고려시대에도 때때로 임금이 친히 성제묘에 들려 제사를 올
청룡동 마을에 있다. 이곳은 김해김씨
렸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관리들로 하여금 분향(焚香)을 올리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단
(金海金氏)
군을 모시는 묘당(廟堂)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 때 폐지되어 심지어 건물까지 훼철
(管)의
되었다.
문에서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
향교에서 공자(孔子)를 받들고 각 사우(祠宇)에서는 향현(鄕賢)을 받드는데, 단군을 모시는 성
삼현파(三賢派)의 파조인 관
10세손 김축(金軸)과 그 가내 일
움에서 순절(殉節)한 여섯 명의 충신(忠
전은 없어 이를 안타까이 여긴 군내의 선비들이 단군성전건립위원회(檀君聖殿建立委員會)를 구성
臣)과
하니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수천여 명이 동참하였다.
녀(烈女)에게 내린 정려각이다. 하사된
단기 4212년(1979), 단군성전은 군민의 순수한 성금으로 이룩한 우리 고장의 자랑이기도 하
한 명의 효자(孝子), 네 명의 열
공훈(功勳)으로는 선조 38년(1605) 4월
어사각
다. 본전(本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 한와이고 주초는 호박주초로 하여 두
16일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서훈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렸는데, 이를 봉안
리기둥이며 앞기둥은 돌을 둥글게 깎아 주초에서 4척을 받쳤다. 모양성로의 길 위에 ‘檀君聖
키 위해 1873년 12월에 어사각을 세웠다. 어사각은 녹권인 『단서철권』을 봉안한 정려(旌閭)로,
殿(단군성전)’이란, 넓적한 표석이 보이고 계단을 오르면 홍살문이 있으며 성전의 출입문 중앙
어사각 기(記)에 의하면 선조 임진, 정유난에 왜구가 대거 침입함으로 무장현 김해김씨 일문의
에 ‘弘益門(홍익문)’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김축은 그의 질(姪) 김두남(金斗南), 김지남(金志南)과 함께 권율(權慄)의 진(진주성)으로 달려가
단군성전 건립에 동참한 인원은 1,250여 명이며 많게는 벼 20석, 적게는 1가마씩 무려
성을 지켰지만 성이 함락되자 함께 순절(殉節)했다.
1,125석이 수합되어 성전을 세웠다. 단군성전 보존회를 조직하여 관리중인데, 현재 보존회장
또 그의 아우인 김헌(金軒)은 맏형과 두 아들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순절
은 신휘관(辛徽寬) 님이다. 매년 10월 3일이면 군수를 수헌(首獻)으로 개천절 행사를 고창의 세
했으며 축의 장남 기남(起南)은 노모 봉양을 위해 참전을 못하다가 종제(두남, 지남)들의 죽음
향교 유림 및 선비들이 봉행하고 있다. 삼짇날, 단옷날, 중굿날, 음력 10월 3일, 동짓날에는
에 복수할 것을 도모하고 종질 덕립(德立)과 함께 칼을 들고 말을 타고 달려가 싸우다 순절
추모분향을 세 향교의 전교가 하고 있다.
했다. 기남의 아들 흥립(興立)은 숙부 우남(佑南)과 함께 싸우다 역시 순절한 가문으로 김축
028
고창의 마을 제4집…029
의 부인 번남박씨(潘南朴氏)와 그의 자부인 금성나씨(錦城羅氏)는 남편의 죽음에 자결을 했고
(5) 재각
김헌의 부인 함안조씨(咸安趙氏)와 그의 자부인 영암박씨(靈巖朴氏)도 남편의 죽음에 각각 목
본 재각은 경주최씨 충열공파의 후예인 설헌공(雪軒公) 문중 소유로 교촌리 입석마을에 있
숨을 끊었으며 두남의 차자인 효립은 아버지와 종조, 종숙이 함께 순절한 소식을 듣고 조고
다. 재각은 최형주(58세)의 증조고(아호는 설헌雪軒, 1865년)와 증조비 강릉유씨(江陵劉氏)의 묘소
비(祖考妣)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했으니 청운의 높은 행보(行步)로 왕정을 협찬할 만
(쌍분)가
했다고 기록되었으며 현재 어사각에는 김축의 7세 손부 정부인(貞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 夫
종 소유의 본 건물을 매입하여 재실로 개축하였다. 조부 최연진(崔鍊鎭)은 5형제 중 다섯째이
貞坤의 妻)는
며 시조 문창후(文昌侯) 선생의 30세손이나 매년 10월 말경의 일요일을 시향의 날로 정하고
임진, 정유재란과는 관계없으나 함께 열녀로 봉안되어 있어 6충신 5열녀 1효자
가 봉안되어 있다.
있는 선산 아래에 있다. 1963년경 종조부 최우진(崔宇鎭)의 승조 효애정신으로 유화
그 후손이 모여 향사한다.
(4) 일광기념관
(6) 고인돌
일광기념관은 고창읍 교촌리
입석마을이 농경지일 때 쎄월마을 앞 논두렁길에 지금의 태양연립 뒤쪽 중앙로 주변에 고
77-15번지에 있다. 순국선열 일광
인돌 2기가 있었다. 통상 고인돌 주위를 ‘바우백이’라 부르는데, 넓적한 바위여서 앉아 놀 수
정시해(鄭時海) 선생을 모시
도 있어 특히 밤이면 젊은 남녀가 만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속칭 ‘연애바위’로도 불리던 바
(一狂)
는 국가지정 현충시설(관리번호 511-7)이다.
위인데 1990년경 월곡지구 개발과 함께 없어졌다.
일광은 정시해 선생의 아
호(雅號)인바, 선생이 구한말 의병
6) 시대별 특성
에 나서며 ‘나라를 빼앗긴 미칠 것
고창고등학교는 설립 당시 성산 아랫부분을 절개하여 교사를 세웠다. 절개된 부분 위쪽은
같은 심정’을 표현하여 파격적으로
교사 3층 높이와 거의 같은데, 일제강점기인 1941년대 초부터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일본군
지은 자호(自號)이기도 하다.
이 파놓은 땅굴이 3~4개소가 있었다. 땅굴 앞에는 성강주유소 뒤편에서 고창 향교 서쪽문까
1874년 성송면 삼태에서 태어난 일광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와
일광기념관
지 사람과 우마차가 왕래할 수 있는 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숲이 우거지고 1970년대 간 첩이 나오자 굴을 메워 버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성산은 풍수산 와호형(臥虎形)
어머니 상에 6년을 시묘하였다. 그 후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였으나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일
으로 고창고보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군이 호랑이의 입에 해당하는 곳
본에 빼앗기게 되자 스승인 면암 최익현 선생과 상의하여 의병을 모으는 소모장(召募將)이 되
을 파버렸다는 설도 있다. 한편 지금의 용주동 소반촌의 뒷산 능선이 고창여고와 연결되었
어 경상도 일대까지 누비고 다녔다.
을 때는 그 주위에도 일본군의 방공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4차선이 가로로 뚫려 전혀 흔적
1906년 병오창의를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의 막중한 직책으로 일본군과 싸우던 중 4월 20
이 없다. 또 1950년 6・25전란을 겪고 수복 후에는 고창읍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촌마
일 순창전에서 33세로 순국했다. 광복이 되고 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
을 뒷산 능선 요소요소에 고지막(高地幕)이 4~5개소 설치되어 있었고 또 전기 고압선 울타리
고,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307호)에 모셨다.
도 설치되어 겨울엔 짐승들이 감전되어 죽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단법인 일광정시해선생기념사업회(회장 라홍찬)가 결성되어 2천여 명의 고창인들이 성금을 모아 1993년 일광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매년 4월 20일은 관내 유림 및 선비들이 참석하여 추
7) 종교단체
모제를 올린다.
(1) 청룡사
일광기념관에서는 고창지역의 초·중·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생의 증손 정만기가 역사 교실을 개강하고 있으며, 부설 항일역사도서관도 열어 배움의 공간으로도 제공하고 있다.
030
청룡사는 고창읍 교촌리 244번지 청룡동 단군성전 위쪽에 있다. 청룡사는 태고종(太古宗) 의 종적을 갖고 있으며 1975년 3월 조기옥 청매화상이 창건한 사찰인데 양봉준 주지에 이어 고창의 마을 제4집…031
1983년에 부임해 온 배관용 주지가 관리해오고 있다. 배관용 스님은 당우(堂宇)를 넓히는 것
필봉(템봉)까지를 호랑이의 허리로, 그 필봉에서 꽃동산까지의 능선은 발을 펴고 젖을 주는
보다 불교 인재양성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생법회, 군법당 법회 등에 주력하고
형세라고 한다.
있다. 특히 고창, 부안지역 군부대의 포교에도 힘을 기울이고, 자비를 들여 50여 평의 법당을
그런데 그 꽃동산 아래쪽의 홍종옥(女) 씨 집 뒷동산에는 반경 5~6m 넓이의 암반이 그대
짓고 포교하고 있다. 1992년 여름 절 앞에 종각을 세웠으나 지금까지 건물다운 대웅전을 짓
로 드러난 채 깔려 있다. 이 바위가 드러난 채 사람의 눈에 뜨이면 마을 아낙들의 바람기가
지 못하고 낡은 재래식 건물에 아미타불을 주불로 좌측에 대세지보살, 우측에 관세음보살을
일어, 집을 나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아낙들의 가출을 막기 위해 그 바위에 뗏장(흙
모시고 관리하고 있다(전화 564-3735).
이 붙어 있는 상태로 뿌리째 떠낸 잔디의 조각)을
입히는 일이 마을의 연중행사였다는데,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또 바위 위에 잡초와 담쟁이 넝쿨 등이 덮혀 바위가 눈에 띄지 않는다. 땔감이 없
(2) 원불교
던 옛날에는 숲의 나무와 잡초까지 베어다 땔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뗏장을 덮는 일은 남
원불교 고창 교당은 교촌리 224-7번지에 있다. 원불교는 1916년 전남 영광 출신의 소태산
정네들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 설화와 설화에 얽힌 뗏장 입히기는, 풍수상 호랑이의 중요한
(小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에 의하여 창교된 신종교이다. 총 본부는 현재 익산시에 있으
부분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김정수 님, 80세).
며 1963년에 고창읍에 교당을 세웠다. 서타원, 정상원 교무의 교법으로 포교하여 일원상(一圓 相)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사은(四恩: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 사요(四要: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
(2) 당산에 오줌 눈 선생 이야기
삼학(三學: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팔조(八條: 신,분,의,성,불신,탐욕,나,우)를
교촌마을은 당산이 세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군청 민원실 쪽에서 마을 안골까지
근본으로 교화하고 있다. 특히 고창 교당은 청소년 공부방과 원광어린이집 운영, 노인복지활
도로가에 약 2m 넓이의 도랑이 파여 있어 길이 좁았다. 그 좁은 향교 앞으로 굽은 길가에 당
동 등의 봉사하는 종교단체로 더 잘 알려져 있다(전화 561-2501).
산석(북촌당산)이 세워져 있고, 또 고등학교 서편에 방죽이 있었는데 그 방죽가에 노거수 당산 (팽나무)이 서 있었으며,
(3) 고창 은혜교회
또 어린이집 부근에 당산석이 서 있었던 것을 지금의 위치에 수합하여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은혜교회는 고창읍 교촌리 116번지 입석마을에 있다. 대한예수교 침례교회의 종적을 갖
지금부터 약 8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이 당산을 수호신으로 받드는 것을 본 일본인 선생이 당
고 있으며 1994년 고창읍 읍내리 140번지에서 오용선 목사가 시작하여 1997년 지금의 위치
산을 깎아내리려는 마음에서였는지 당산에 오줌을 눴다고 한다. 그런데 그 즉시 선생의 성기(性
에 예배당을 새로 지어 옮겨온 것이 은혜교회의 처음이다. 2003년 최정환 목사의 뒤를 이어
器)가
2006년 부임한 김영욱 목사의 예배로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인간의 의지나
으로 전해져 교촌 당산의 영험함을 알려주는 설화로 해석되기도 한다(김형남 님, 66세).
붓고 몸이 아파 죽을 고비를 겪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당산신으로부터 벌을 받았던 것
노력이 죄를 이길 수 없고 참된 복음의 능력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알리고 그 능력의 복음을 만나지 못해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국내는 물론 해외 오지에서
9) 비석군
도 복음의 군사로 사명을 다하는 하나님의 교회”임을 강조하는 교회이다.
(1) 문묘중수사적비(文廟重修事蹟碑)
교촌리에는 은혜교회 이외에도 신광교회, 라온교회, 행복한 교회, 성북교회, 고창교회 등이 있으나 그 연혁 등이 소개되지 않아 담지 못했다.
문묘중수사적비는 고창 향교 앞에 서 있다. 1959년부터 1960년 봄까지 대성전을 비롯한 경내의 건물과 담장 층계 등을 수리하였는데, 유림들이 십시일반 기부한 성금으로 공사를 완 공했다. 당시 성금을 기부한 사람들의 명단이 수록되었는바, 성금은 당시 벼를 기준으로 많
8)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
게는 2석 1두에서 적게는 5두까지이며 참여한 인원수는 372명이 기록되어 있고 고창군청에
(1) 바위에 뗏장을 입힌 이야기
서 3만원, 고창읍사무소 2만원, 고창중학교 1만원과 고성김씨, 금성오씨, 연안이씨, 남원윤씨
풍수에서는 교촌마을의 뒷산 산세를 두고 ‘누워있는 호랑이’라고 말한다. 즉, 고등학교 뒷
의 각 문중에서 각 벼 10두씩 기부했다. 1960년 5월에 류호석 씨가 짓고 송성룡 씨 글씨이며,
산(성산)은 호랑이의 머리이고 고등학교는 호랑이 입에 해당한다. 마을 안골 뒷산의 능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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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심상숙 전교가 세웠다. 고창의 마을 제4집…033
문묘중수사적비
행하계비
오도암 선생 공덕비
은사 안선생 공적비
단군성전 건립 사적비
고창고보 역사 민족정신 선양비
(2) 행하계비(杏下契碑)
내역이 기록되어 있어 내용은 생략한다. 1979년 4월 단군성전 건립추진위원장 류호석의 글로
행하계비 역시 고창 향교 앞에 있다. 고창 향교의 임원(장의掌議)을 역임한 당시 생존했던 사
사적비를 세웠고 우측에는 1,250여 명의 성금기탁자 명단이 금액과 함께 수록된 건립성금비
람으로 구성된 계조직의 비이다. 은행나무 아래 모여 학문을 강론하며 인명(人命)과 음양(陰陽)
가 따로 있다.
에 대한 이치를 밝히는 것,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인간이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계원 41명 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계장은 이학녕 씨이며 임종수 씨 글로 1977년 9월에 세워졌다.
(6) 고창고등보통학교 역사 민족정신 선양비(高敞高等普通學校歷史民族精神宣揚碑) 선양비는 고창고등학교 운동장 동편에 세워져 있다. 고등학교의 설립내역, 일제치하에서의
(3) 오도암 선생 공덕비(吳韜菴先生功德碑)
자주권 확립을 위한 민족정신 선양운동의 전개과정, 5천 5백여 명의 고창군민이 교주(校主)가
오도암 선생 공덕비도 고창 향교 앞에 서 있다. ‘마을의 인물-오희길 편’에 기록되어 있어 내용
되어 민족학교로 세운 내용 등 5개 항목의 공적과, 학교건립에 공로가 지대한 양태승 선생
은 생략한다. 라홍찬 씨가 짓고 1998년 8월에 세워졌다.
외 14분의 공로를 소상히 기록하였다. 본교 10회 졸업생 한갑수가 비문을 짓고 썼다(1991년 5 월 26일 건립).
(4) 은사 안선생 공적비(隱士 安先生 功績碑)
또한 선양비 추진위원은 비석 옆에 별도의 와비를 세워 전후 면에 고창읍 이환
기 등 110여 명의 위원명단을 기록하였다.
은사 안선생 공적비는 고창 향교 앞에 서 있다. 은사(隱士)는 안지(安祉)의 아호로, 고수면 예지촌에 복거(卜居)한 사과공전(司果公詮)의 증손이다. 1589년, 고창 현감 이홍업(李弘業)이 월
(7) 강릉유씨 고창화수비(江陵劉氏高敞花樹碑)
곡리 학당동 향교가 협소하고 누습하여 옮기고자 할 때 오희길의 집터를 양도받아 지금의
강릉유씨 고창화수비는 고창읍 교촌리 청룡동 길가에 있다. 고창군에 살고 있는 강릉유씨
향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 때 은사 선생이 건축의 경영과 동역(董役)을 맡아 노심초사 완공을
씨족간에 우애하고 화목을 이룰 것을 약속하는 모임체로 당시 회장은 유영회이며 비를 세우
하니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이 쓴 중수기에 찬양의 글이 기록되어 전한다. 2006년 12월 성
기 위해 동역(董役)에 힘쓴 사람은 유차종, 유성종 씨이다. 고흥(高興) 유석승(柳石承)이 비문을
균관 유도회 전북도 본부 회장 이하영 씨가 짓고 안도연 전교가 세웠다.
짓고 1996년 3월에 세웠다.
(5) 단군성전 건립 사적비(檀君聖殿 建立 事績碑)
(8) 개교100주년 기념탑
단군성전 건립 사적비는 단군성전 경내에 있다. 앞서 다룬 ‘문화유산 (2)-단군성전’에서 그
기념탑은 고창초등학교 운동장 입구에 있다. 고창초등학교의 100주년(2012년 5월 1일)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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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035
념하기 위해 4월 28일 오후 2시에 2,000여 명의 동문들이 모여 세운 탑이다. “고창교육을 찬
학생이 장렬히 전사하고 1명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사자는 1학년 정택진, 민병욱, 2학년 이
란히 꽃피웠던 지난 100년의 그 토대 위에 미래 100년의 아름다운 교육에 대한 희망의 꿈을
운교, 3학년 김봉수, 4학년 박금석이며 3학년 유종익은 행방불명되었다.
안고 비상하는 고창초등학교”라는 문장으로 100년의 역사와 희망, 비상(飛上)을 담았다. 2012년 2월 14일 현재 98회까지의 동교 졸업생 수는 21,732명이고 “즐겁게, 바르게, 굳세 게”의 교훈으로 제24대 엄기덕 교장과 89명의 교직원이 1,236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6열사의 호국충혼(護國忠魂)의 얼을 되새기기 위해 1962년 모교 정문에 ‘충혼불멸(忠魂不滅)’ 의 탑을 세웠고 1975년 8월 15일 선운산 경내의 <자연의 집> 서편에 ‘멸공탑(滅共塔)’을 세웠 다. 자연의 집이 폐쇄되므로 2000년 4월 16일 지금의 위치에 자유, 정의, 진리의 명문(銘文)으 로 탑을 세우고 매년 현충일과 8월 15일에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9) 자유, 평화, 진리(自由, 平和, 眞理)의 탑 이 탑은 고창고등학교 운동장 동편에 있다. 동족
(10) 보호수
상잔의 피비린내 나던 6・25전란은, 처음에는 낙동강
고창 향교 대성전 경내에 은행나무 암·수, 두 그루가 있다. 고창 향교가 건립된 후에 심었
유역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1950. 9.
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1982년 8월 20일 고창군청에서 보호수(고유번호 9-14-1)로 지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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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는데, 산간오지였던 고창은 2개월 늦게 11
세워 놓은 표지판에는 수령을 491년(2006년 기준)으로 기록했다. 표지판이 잘못된 것으로 여겨
월 말경 11사단 13연대 6중대가 입성하여 수복이 되
진다. 향교가 건축된 연대는 1589년으로 그 때 심었다 하더라도 2012년 현재 423년이기 때
었다. 그러나 이것도 고창 읍내의 일부였고, 군부대
문이다. 나무의 둘레는 약 5m, 수고는 30m인데, 수나무는 건강이 양호하여 여름이면 푸르름
가 경찰에 치안을 맡기고 철수하자 산간오지에는 공
을 과시하고 있으나 암나무는 15~16년 전부터 건강이 쇠진해져 잎이 푸르질 않다.
비들의 출몰이 극심하였다. 이 때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예하 학도의용군이 발
4. 마을의 조직과 행사
족되었고 고창중학교에도 학생지대가 편성되었다. 문수산, 방장산 등은 공비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공
1) 마을의 당산제
비들은 민가를 약탈해 공비 소탕작전이 실시되는데,
교촌마을의 당산은 세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은 향교 앞 서쪽 길가
이 때 학생지대가 참여했다. 1951년 8월 25일 선운
에 높이 1m, 넓이 50cm 가량의 화강암 석주로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안골에서 흐르는 도랑
산 작전에 120명의 학생이 투입되어 작전 중 5명의
자유, 평화, 진리의 탑
물이 실개천이 되어 약 2m 넓이로 군청 앞까지 파여 있어 길이 좁은 편이었다. 그 좁은 길가 에 당산석이 서 있었기에 40여 년 전 트럭에 받혀 두 동강이가 났다. 할머니 당산은 고등학교 운동장 서쪽에 있는 방죽 부근의 팽나무였는데, 학교에서 그 주변을 정비하면서 방죽도 메워 버리고, 당산나무도 없애버렸다. 아들 당산 역시 마을 앞 중앙 삼거리 주변에 당산석과 팽나 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나무를 베어버려, 당산석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 10월경, 고창읍 오거리 당산제가 부각되면서 잘 다듬은 형태의 돌에 ‘진 북화표(鎭北華表)’라는 명문을 음각하여 그 옆에 두 동강이 난 할아버지 당산과 아들 당산도 수합해 함께 지금의 당산석을 세웠다. 이 당산은, 풍수상 와호형(臥虎形)의 호랑이 입에 해당 하는 고등학교 뒷산(성산)의 기운이 마을에 피해를 줄 수 있어 이를 제압하고자 세워진 것이
은행나무 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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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암나무
다. 설날이 되면 농악을 치면서 당산을 다독이고, 정월 초하룻날 밤이면 당제를 지냈다. 근대 고창의 마을 제4집…037
들어서는 마을 이장의 주관으로 정월 초사흗날 낮에 생기복덕(生氣福德)한 사람을 제관으로
발 조성사업이 마무리되면서 기존 농수로 기능을 상실한 구거(溝渠, 인공수로)와 도로부지 일부
뽑아 당제를 지내고 있으나 예전처럼 농악소리 등은 들리지 않는다.
를 정리한 땅에 세웠다가, 2000년 4월부터 마을기금 1,000만원과 군 지원금 2,000만원을 들 여 적벽돌 슬라브 약 27평을 건축해 사용 중에 있다. 그러나 근래 들어 물이 새자 오정애 이장의 주선으로 2012년 5월 군 지원금 700만원을 들
2) 마을회관 및 노인정 운영 (1) 교촌마을 마을회관
여 슬라브에 팔각 기와지붕으로 교체해서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는 건물이 되었다. 마을회관
교촌 마을회관은 마을 중앙 삼거리에 있다. 교촌마을 이장은, 옛날 마을회관은 광복 이전
및 마을 경로당으로 사용 중에 있다.
에 지어져 그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은 건물이었는데, 1960년대 새마을사업 때도 마을회관 구실을 했다고 한다.
(4) 청룡마을회관
지금의 건물은 1985년경 당시 이명세 이장이 국회의원의 후원금 300만원을 지원받아 옛
청룡마을회관은 교촌리 681-59번지에 있다. 회관이 있는 곳은 1960년대까지 고창읍의 쓰
건물을 철거하고 시멘트 벽돌 슬라브 20평을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건물 역시 지
레기 하치장이었던 곳이다. 1972년경 쓰레기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나서, 당시 한창이던
금은 고가(古家)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 후 1995년 9월경 서울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이 마을
새마을사업 바람을 타고 마을 주민 자력으로 건축한 26평의 건물이다. 1993년 3월경 동 건
출신 김만균 씨가 자비를 들여 2층에 조립식 14평을 증축하였다. 김만균 씨가 2층을 마을에
물의 서편 창고 1칸과 사무실 1칸을 마을 주민이 갹출한 비용으로 정비하여 청룡 경로당을
기증함으로써 2층은 마을회관으로, 1층은 마을 경로당(회장 서형수)으로 사용 중이다.
설립하였다. 그 후 1993년 7월 고창군의 지원금 2,000만원으로 재보수하였다. 마을회관과 경 로당(회장 조기열)으로 쓰고 있고, 현재 56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2) 교신동 마을회관 교신동 마을회관은 교신동 소공원에 있다. 2010년 12월 고창군에서 5,000만원의 예산으로 공원 내의 부지(교촌리 459번지)에 공원관리소 운영 목적으로 적벽돌 18평의 슁글지붕으로 건
(5) 청하마을회관 청하마을회관은 청하아파트 제3동 101호에 있다. 2009년 군지원금 5,000만원으로 25.7평 을 매입해서 회관 겸 경로당으로 사용 중에 있다.
축했다. 그러나 관리소의 기능을 잃고 교신마을에 무상 위탁함으로 교신마을 마을회관 겸 경로당 으로 사용 중이다.
3) 마을의 모정 (1) 교촌마을 모정 교촌마을 모정은 교촌리 <고창 어린이집> 앞 도로변에 있다. 2009년 3월경 고창군 주관 교
(3) 입석마을회관 입석마을회관은 교촌리 307-9번지 킹마트 바로 앞에 있다. 1998년 12월 월곡지구 택지개
촌마을에서 입석마을 입구까지 약 60여cm의 좁은 길을 6m 폭으로 확·포장 공사를 했는데, 그 때 육모정(2.0m×5m 기와집)을 건축해 마을민의 휴식공간으로 쓰고 있다.
(2) 입석마을 모정 입석마을 모정은 고창초등학교 동쪽 어린이 놀이터 주위에 있다. 모정은 2.24평(기와집 육모 정)으로
2009년 8월 1,650만원의 예산으로 고창군에서 건축했다. 모정의 천정에 걸려있는 현
판의 문장이 이채롭다. “입석 방장정 건립기 - 방장산 아래 입석마을 주민 숙원사업인 모정 건립을 위해 부지 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중 고창교육청에서 지역민과 화합하여 함께 할 수 교촌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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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석마을회관
있도록 고창초등학교 내 일부 부지 배려가 있었기에 본정이 건립되었으니 주민은 물론 학생 고창의 마을 제4집…039
들의 편안한 쉼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노라. 건립 당시 고창군수 이강수, 교육장 오재영, 학교장 박종은, 읍장 오영택, 노인회장 송준식, 이장 오정애, 도편수 최배홍. 2008년 6월 7일
도움 주신 분
군 지원금 이천만원”이라 쓰여 있다. 현판에서 말한 소망처럼, 놀이터를 찾는 학생과 마을주
정규윤 전 고창부안선거관리위원장
민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 서형수 전 고창 6・25국가 유공자회 지회장
(3) 청하마을 모정 청하마을 모정은 청하아파트 위쪽에 있다. 2010년 고창군에서 1800만원의 예산으로 팔각 정 기와집 7평 가량을 건립, 마을민의 여름철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김노수 산경연구가 염양선 고창군청 근무 민길순 고창초등학교 근무 오정애 입석마을 이장
(4) 청룡마을 모정
주만성 교촌이장
청룡마을 모정은 옛 모양파출소 앞에 있다. 당초에는 파출소 앞 빈터에 주민들의 쉴 곳을 마련키 위해 시멘트 바닥에 비가림만 시설하여 제공되었었다. 그러나 파출소가 옮겨지고 건
참고문헌
물이 폐쇄되자 2011년 3월경 고창군에서 600여 만원을 지원하여 재정비하고 고급판자로 마
『고창군 고읍지 영인본』, 고창문화원, 1991.
루를 만들어 주민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전북전래지명총람』, 민음사, 1993. 『구 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조선총독부, 1912.
(5) 성덕마을 모정
『고창향교 교지』, 고창향교, 2005.
성덕마을 모정은 성덕마을에 건축되어 있어서 ‘성덕마을 모정’으로 말하는 것이지, 실제는
『금암사지』, 금암사, 2002.
뉴캐슬빌 주택 모정이다. 2012년 5월 뉴캐슬빌 시공사인 송원건설 사장(허남헌)이 주택을 완
『어사각지』, 김내곤, 2006.
공하면서 특별히 900여 만원의 예산을 들여 건축한 모정이다. 성덕마을 이장(주순영)의 설명에
『전북불교연감』, 전북불교총연합회, 1993.
따르면, 뉴캐슬빌 48세대와 태양아파트 40세대의 주민을 위해 양쪽건물 중앙에 특별히 건축
『고창군지』, 고창군, 1992.
되었다고 한다. 정사각형의 목재로 3평 가량의 공간이며 슁글지붕으로 마감되어 있다.
『단군성전지』, 호남문화사, 2000.
4) 성덕마을 부녀회 마을 부녀회는 10여 년 전 태양아파트 40세대 부인들이 조직한 모임체이다. 실제로 마을주 민 빼고 아파트 주민으로만 구성해, 1세대 1명씩 40명이 모임을 가진 것이 기원이다. 지금은 회원수가 13명으로 감소되어 친목계로 바뀌었고 매월 12일 모임을 갖는다. 약 400여 만원의 기금으로 김재인 회장이 상부상조 정신과 회원과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계 모임으 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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