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면장두리(42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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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우수 새마을사업 마을, 장두리 김영춘・이병열

고수면 장두리 무평리 봉산리

예지리 남산리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황산리

인성리

와촌리

고수면 서남부에 자리 잡은 장두리(長斗里)는, 국도 23번을 따라 고창읍에서 고수면소재지

무곡리

장두리

상평리

를 지나면 나오는 마을이다. 장두리는 동쪽으로 부곡리, 서쪽으로 인성리, 남쪽으로 사내리 와 초내리, 북쪽으로 남산리와 접하고 있다. 2010년 3월 현재 면적은 2.18㎢인데, 이 가운데

초내리 은사리

경지 면적은 1.52㎢로 밭 0.76㎢, 논 0.76㎢, 임야 0.26㎢ 등이다. 지금의 장두리는 1895년(고종32) 이후 수곡면(水谷面)의 월계리(月溪里)와 오산리(五山里), 장두

평지리 두평리

리(長斗里)로 나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오산리(五山里)·월 계리(月溪里)·신월리(新月里) 일부와 무장군(茂長郡) 성송면(星松面)의 사내리(沙乃里) 일부가 병 합되어 고수면에 편입되었다. 장두리는 법정리이고, 장두리·오산리·월계리 등은 행정리이며, 운월은 월계리의 자연촌락이다.

1) 장두(長斗) 장두마을은 북향으로, 풍수상 노루형국을 하고 있다. 장두마을은 원래 수곡마을에 속한 마을이었다. 마을이름은 ‘章頭-章斗-長斗’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章頭’라는 한자를 썼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광산인 김상대가 성동면 사내에서 수곡면 장두로 입향 한 1835년 전후의 광산김씨 김상대의 호적단자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상대의 아들 김기두 고창의 마을 제4집…043


(金箕斗)의

77세(1907) 호적단자에도 ‘章頭’라는 한자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가 쓰여 있다. 따라서 최소 19세기 초부터 쓰이기 시

마을 앞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버드나무 당산목이 있다. 그리고 마을 냇가에는 자라머리

작해 20세기 초까지 쓰이던 명칭이라 할 수 있다. 그

와 비슷한 높이 70cm, 직경 30cm 가량의 돌덩이도 있었는데, 근래 하천공사 때 매몰되어 없

런데 이것이 1914년 부・군통합령에 따라 고사면과

어졌다.

수곡면이 통합되면서 ‘長斗’라는 한자로 바뀌었다. 한편, ‘노루 장(獐)’이라는 한자를 쓴 것도 보이는

3) 월계(月溪)

데, 정확하게 언제부터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광

월계마을도 예전에는 수곡면에 속했던

산김씨 34세 기문(箕文, 1828~1877)의 묘지가 수곡

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내에 달이

면(水谷面) 장두(獐頭)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

비치면 그 모양이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나 기문이 살았던 시절 당시의 광산김씨 김상대

하는데, 여기에서 비롯된 이름이 이 ‘월

(1806~1884)와

계(月溪)’라고 한다.

그의 아들 기두(1828~1910)의 호적단자

에는 모두 ‘글 장(章)’으로만 기록하고 있어 마을이

장두마을 표지석

1498년, 밀양박씨(密陽朴氏)인 양오(楊

름으로 ‘獐’은 보편적으로 쓰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

梧)

박서봉(朴瑞鳳)이 무오사화(戊午士禍)

다. 단지 기문의 묘소 위치에만 ‘獐’자가 기록되어 있어, 풍수적 형국의 의미로서만 쓰인 것

를 피해 무안 등지로 피신했다가 고창에

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그리고 장두마을 동쪽에 있는 관총(官銃)이라는 산줄기와 연관되어

입향하여 은적(隱跡)하여 살았다. 양오공

‘노루 장(獐)’자를 썼다는 설도 있다. 관총이라는 산줄기가 장두마을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

의 후손들이 월계의 동편 신곡(新谷)에

는 모양이라, 노루머리가 총알에 맞는 격이라고 해서 이 한자를 썼다는 설인데, 그 정확한

터를 잡아 사는데, 그 터가 도둑이 자주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난다는 풍수설에 따라 1700년대에 월계로 마을 터를 옮겨 세거했다. 이후 광산김씨(光山金氏)

월계마을 유래비

계암처사(溪菴處士) 희길(熹吉)이 1790년에 해리면 왕촌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이 번창

2) 오산(五山)

하였다. 이후 월계에는 박(朴)·김(金)의 양(兩)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다가 여러 성씨들이 들어

오산마을은 본래 수곡면에 속해 있던 마을로 광해

와 세거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군12년(1620)에 금녕김씨(金寧金氏)가 입향하여 설기한

월계마을 입구 23번 국도변은 ‘먹[墨]거리’로도 불렸다. 인근의 묵점(墨店, 일제강점기에는 墨洞)

마을이다.

은 묵을 생산하던 곳이라 하여 그리 불렸고, 내창(乃倉)에는 먹을 생산해 보관하던 창고가 있

마을이름은 본래 오산(鰲山)이던 것이 오산(五山)으

었다고 한다. 청계는 먹을 생산하기 위해 나무를 공급하던 곳이었다. 월계는 바로 묵점에서

로, 그 한자가 바뀌었다. 마을 앞산에 ‘자라 알’모양

생산한 먹을 길거리에서 팔던 곳이라 하여 ‘먹거리’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월계에서 청계까지

의 돌멩이가 지금도 있는데, 이 돌멩이의 생김새에서

는 풍수적으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그래서 배에 많은 것을 싣지 못하기 때문에 인근에

비롯된 이름이 ‘큰 자라 오(鰲)’자를 쓴 오산이다. 그

내창과 같은 창고를 만든 것이다.

런데 일제강점기 때 ‘다섯 오(五)’자로 바뀌었다고 한

월계마을은 비가 조금만 와도 늘 물이 마을을 범람하여 가옥과 도로가 유실되었다. 1973

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고수면사

년도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하천 제방을 석축으로 정비하였는데, 전북

무소 직원이 ‘큰 자라 오(鰲)’자가 쓰기도 어렵고 획

에서 첫 번째로 이루어진 새마을사업이었다. 마을 앞에는 마을의 수구막이인 3백년 된 왕버

수도 많아 쓰기 쉽고 획수가 적은 ‘다섯 오(五)’자로

044

오산마을 표지석

들이 있다. 고창의 마을 제4집…045


4) 운월(雲月)

2) 장두리의 지명

운월마을은 장두리 월계마을 바로 옆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행정리인 월계리에

부곡잔등 : 월계 한마음주유소에서 장암 방면 국도 23호선 구 도로를 따라 부곡마을로 가

속한 마을이다. 마을 뒤로 흐르는 산맥이 운중반월(雲中半月)의 형국인데, 이는 구름 속에 반달

는 낮은 재다. 재 주위에 소나무, 아카시아 등이 많아 인적이 없어 음침하다. 한국전쟁 때 민

을 드리운 형으로, 달은 새로 시작하는 초승달로 희망을 상징한다.

간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지역으로, 1970년대 초까지도 인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옹 기항아리로 된 일반 초분도 많았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영광경찰서는 인민군들이 정읍을 거쳐 고창관내로 진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좌익사상을 가진 영광군민을 두 대의 트럭에 약

2. 장두리의 자연환경과 지명

40~50명 싣고 와 이곳에서 죽였다. 그 뒤부터 부곡잔등을 밤늦게 지날 때면,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뒤도 안 돌아보고 다녔다고 한다.

1) 장두리의 자연환경 지형은 대체적으로 평지이고 일부에

월계제(앙골 방죽) : 월계 북쪽 뒷골 안에 있는 월계제는, 1943년경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인

구릉성 산들이 있으며, 남쪽에는 평지

들이 쌀을 공출하기 위해 축조한 큰 방죽이다. 월계 사람들 남녀노소 모두 강제노역에 동원

천이 흐르고 있다. 장두리로 발달한

되어 지게를 지거나 괭이, 삽, 소쿠리 등을 들고 나와 이 방죽을 쌓았다고 한다. 방죽 안에는

산계(山系)는 장두마을로 발달한 것과

여러 개의 샘물이 솟아나는 속샘이 있었고, 방죽 위 논 모서리 부근에 샘물이 나와 일 년 내

월계-운월-오산마을의 배후로 발달한

내 마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포장을 치고 남자는 물론이고 부녀자들까

두 개가 있다. 다시 말해, 호남정맥(노

지 목욕을 하고 약수로 이용하여 이를 ‘물통거리(약수터)’라 불렀다. 축조 후 매년 농사철에 모

령산맥)의

구황산(500m)에서 남쪽으로

두 개의 산계가 발달한 셈이다. 하나

장두리 항공사진

심기가 끝나면 방죽물이 바닥을 드러내 온 동네 사람들이 쪽대(족대), 가래(물고기 잡는 기구) 등 으로 붕어, 가물치 등을 잡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1973년대 새마을사업의 소득사업 일환으로

는 두평천의 서쪽을 따라 발달하다가 부곡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발달하여 장두리

방죽 안에 자생되고 있는 순채(수련과)를 채취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마당바우 한일식품에 납

를 지나 인성리에서 멈추었다. 장두리에서 북쪽으로 발달한 한 줄기의 산계는 태봉(110.9m)을

품하여 새마을기금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루고 상갑리와 주진리에서 멈춘다. 장두리의 산계는 큰 줄기는 서에서 동으로 발달하나 이

애끼재 : 장두마을 입구에서 국도 23호선 영광선이 학천 방향으로 넘어가는 낮은 재를 가

산줄기들의 가지들은 북에서 남으로 발달하여 산자락에 월계부터 운월, 오산이 자리 잡고 있

리킨다. 월계마을에서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곳으로, 1960년대 전기가 안 들어오던 시절에는

다. 이 지역의 마을 수계는 서에서 동으로 발달하는 산계의 영향으로 마을 남쪽으로 평지천

차량은 물론 인적이 거의 없고 깜깜해서 칠흑 같은 밤에 비까지 오면 도깨비가 자주 나타났

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그리고 각각의 마을과 마을들 사이로는 골이 발달하여 논밭으로 이

다고 한다. 도깨비는 희미한 불빛으로 깜빡이거나, 크게 보였다가 작게도 보이는 등 움직이

용되고 있다. 이 골들이 바로 수계를 이루어 남쪽으로 흘러 평지천과 합류한다.

는 실체로 도깨비를 보았다는 주민들도 있었다.

장두마을에서 멈추는 산계는 구황산에서 성송면 계당리와 추산봉을 지나 초내까지 북쪽

놀이터 : 월계 이상일 씨 집 앞 공터로 1960년대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로 이용하던 곳이다.

으로 발달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발달하여 낙양에서 멈춘다. 장두마을로 발달한 산계는 북쪽

이곳에서 동네 아이들은 공차기, 가로막기, 진또살이, 자치기, 댕강놀이, 못치기, 딱지치기 등

으로 발달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틀어 장두마을의 주산(60.5m)이 된다. 장두마을은 이 산계가

을 하며 놀았다.

잘 발달되어 좌청룡과 우백호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정자와 당산은 좌청룡과 우백호의 중

뒷동산 : 월계마을 김영대 씨와 김영구 씨의 집 뒷동산으로 박씨 문중의 묘지가 조성된 곳

심에 자리 잡고 있다. 수계는 장두마을의 동쪽과 서쪽으로 발달해 있다. 서쪽 수계는 성송면

이다. 이곳은 월계 주민들의 유년시절 놀이터로, 두 개의 망주를 이용해 진또살이 놀이 등을

학천리 잿등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가다 평지천에 합류한다. 동쪽 수계는 성송면 초내

했다고 한다.

마을 북쪽의 능선에서 시작하여 장두와 초내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다가 평지천과 합류한

월계(月溪) : 장두 북쪽에 있는 마을이기도 하고, 월계마을 앞을 흐르는 내 이름이기도 하다.

다. 장두마을의 뒷산(남쪽) 너머에는 뒷골이 있다.

관청들 : 국도 23호선 먹거리에서 초내 방면에 있는 들.

046

고창의 마을 제4집…047


안골 : 월계마을의 뒤 방죽(월계제) 아래쪽에 있는 골.

저사골 : 오산마을 앞 동쪽 들(장두리436번지 일대).

무당골 : 마을 뒤 방죽 위쪽에 있는 골.

비성골 : 오산과 운월사이 들(장두리 919번지일대).

틈안골 : 월계마을 뒤쪽에 있는 서씨제실 아래의 들.

박구태이 : 오산과 학산마을 중간에 위치한 냇가(인성리 268번지 일대).

달메골 : 마을 뒤쪽 서씨 제실골.

서당골 : 오산과 인동마을 사이 벌판(인성리 62-3번지 일대).

월계제(月溪堤) : 월계마을 북쪽에 있는 보.

웅골 : 오산과 운월 마을 사이 벌판(장두리 909번지 일대).

큰조시골 : 비석골의 서쪽에 있는 골.

새때골 : 오산마을 앞산의 동쪽방향 밭 구릉지(성송사내리 231번지 일대).

등가래들 : 보들 앞의 넓은 평지천 주변의 들.

새구랑목 : 오산마을 앞 동쪽 야산 아래 진입로(장두리 571-4 아래 도로).

신골(싱국) : 23번 국도변으로 월계마을의 북동쪽의 골. 월계들 : 월계마을 앞의 넓은 들.

3.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와 내력

보들 : 비석골과 큰조시골 앞의 들. 용오철 : 안골 서씨제실 좌측 골.

“고창은 조, 류, 김”이라는 말이 있다. 고창의 중심 성씨가 조씨, 류씨, 김씨라는 말인데, 이

읍내절 : 터골 뒷산으로 고창읍 김해김씨의 소유로 영광댁이 경작하는 밭.

때의 김씨는 광산김씨이다. 또 이것에 빗대어 “월계마을은 김, 박의 동네”라는 말도 있는데,

산영굴 : 초내에 있는 논으로 월계마을에서 부르는 들.

월계마을에 주로 밀양박씨와 광산김씨가 살고 있어 생긴 말이다. 밀양박씨와 광산김씨는 월

운월리(雲月里) : 장두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의 모양이 운중반월(雲中半月) 형국이라 함.

계마을의 토박이 성씨이기도 하다.

월계교(月溪橋) : 월계 어귀에 있는 다리.

월계마을은 고창읍에서 남서 방향으로 10여 리 떨어진 평야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각골 : 장두마을 동남쪽에 있는 골.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그 너머로는 너른 들이 펼쳐진다. 마을 뒤는 낮은 구릉지대로, 이

장두교(長斗橋) : 장두마을 동쪽에 있는 다리.

구릉이 마치 뒷산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월계라는 마을이름은 마을 앞의 내에 달이 비치

초내천(草乃川) : 하천의 시점이 되는 고수면 장두리 745의 논.

는 아름다운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뒷골 : 장두마을의 뒤(남쪽)에 있는 골. 운월천(雲月川) : 하천의 기점은 고수면 장두리 695이고, 시점은 고수면 장두리 184-27.

1) 장두마을과 밀양박씨 입향

비석골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94-4번지의 유물산포지 서쪽에 있는 골.

밀양박씨는 박언침을 시조로 하고 박서봉·박이종·박태동·박연호를 입향조로 하는 고창

운골(고라실골)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94-4번지의 유물산포지 동쪽에 있는 골.

군 세거 성씨이다. 밀양박씨는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을 시조로 한다. 밀양박씨는 파계가 여

숲쟁이(숯쟁이) : 월계 다리에서 내창 방면으로 보이는 낮은 산.

럿 있는데 대표적인 파로는 은산군파(銀山君派), 돈재공파(遯齋公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청재공

수득어지 : 운월에서 좌측으로 있는 들(계단식 논).

파(淸齋公派) 등을 들 수 있다.

물방아등 : 운월 다리 건너 동쪽에 있는 들.

양오공(陽梧公) 서봉은 은산부원군의 현손(玄孫, 고손자)으로 세조9년(1463)에 경남 밀양에서

궁계 : 월계마을 보 건너 남쪽에 있는 들.

출생하여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런데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스승 김종직(金宗直)과 친척이

너덜이 : 국도 23호선 월계교에서 동쪽으로 연동(고랭이) 넘어 가는 길.

화를 당하고 일가가 화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공은 노친의 사우 족척이 대화를 입어 일가에

터골 : 월계마을 뒷골.

화가 미치게 되자, 노친과 가솔을 데리고 밀양을 떠나 무안으로 갔다. 이후 추산봉 아래 고수

새밭이논 : 국도 23호선 먹거리에서 관청들 서쪽에 있는 들.

면 초내리(草乃里) 산양동(山陽洞)에 은거하였다. 공의 7세손 사일(師一)은 정조 3년(1779)에 고

오산(烏山, 五山) : 운월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가막산이 있음.

수면 장두리에서 아산면 중월리로 이거하여 박달(朴達)이라는 뜻으로 단목(檀木)을 집 뒤에다

가막산(烏山) : 오산 뒤에 있는 산으로, 산 모양이 까마귀처럼 생겼다 하여 가막산이라 부름.

심었다. 공은 호를 단음(檀陰)이라 하고 아산 중복에 입향하여 그 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048

고창의 마을 제4집…049


돈재공 박연생(朴衍生)의 증손 박이종(朴李宗)은 1480년(성종11)에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이

우, 강희5년 10월 병오년(1666)의 호구장(戶口帳)에서 ‘무장 성동면 방축리 거주 학생 김남진의

후 고창읍 노동리(蘆洞里)로 이거하였다. 밀성군 박척(朴陟)의 16대손 박태동(朴泰東)은 1659년

처 윤씨’를 기술하고 있는바, 이로써 보면 이때까지는 무장 방축리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벼슬에 뜻이 없어 한적한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공음면

수 있다. 27세 익엽(益曄, 1648~1709)에 이르러서는, 무오년(1678) 공의 31세시의 호구장에서는

덕암리(德岩里)에 정착하였다. 청재공(淸齋公) 박심문(朴審問)의 14대손 박연호(朴淵浩)는 전라북

‘성동면 방축리’에 거주하고 있으나, 다음 갑자년(1684) 공의 37세시의 호구장에는 ‘성동면 판

도 금산군 질곡(秩谷)에서 태어나 고창군 고수면으로 이거하였다.

정리(板井里)’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1678년과 1684년 사이에 방축리에서 판정리로 이

(효종10)

2009년 현재 박서봉의 후손들이 고수면 초내리에 13대째 살고 있고, 아산면 중월리 중복

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29세 상덕(象德, 1708~1766)에 이르러서는 ‘성동면 사내지리(沙內地里)’

고수면 장두리 장두와 월계 등지에서도 살고 있다. 박이종의 후손들이 고창읍·아산

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는데1), 이후로 30세 언승(彦承, 1731~1788)에 이어 31세 진길(鎭吉), 32세

면·고수면 등지에 살고 있으며, 박태동의 후손들이 공음면 덕암리에 11대째 살고 있다. 박연

달현(達泫)까지 이어지고 있다(다만 진길공 48세시 1798년에 작성된 호구단자에서는 마을이름을 沙乃地里

호의 후손들은 고수면 평지리 청계, 고수면 장두리 월계, 고창읍 등지에 살고 있다. 2000년

에서 沙內之里로 표기하고 있으며 이 후는 모두 바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中福),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창군에 살고 있는 밀양박씨는 1,500가구에 4,073명이다. 장두동 입 구에 은산군파 후손들이 세운 희구정(喜懼亭), 아산면 중월리 중복에 추모비(追慕碑)가 있다.

이들 후손들의 사내지리 거주는 33세 상대(相大, 1806~1884)에 이르러 고창현 수곡면(水谷面) 장두리(章頭里)로 옮겨졌다. 그 시기는 상대공의 나이 35세(1840) 전으로 추정되며 이후는 현재 까지 변함이 없으니 장두리만을 놓고 본다면 약 160여 년 간 거주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2)

2) 장두마을과 광산김씨 입향 광산김씨 선대의 무장 입향 이후 후손들의 분가 이주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21세 부정공의 거주지에 대한 것이다. 곧 부정공이 무장에서 고창으로 분가 이주한 것이라고

(世)

하였다. 그러나 고창현의 어느 마을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부정공의 아들인 돈목재공(敦睦齋公) 기서(麒瑞)의 경우이다. 돈목재공은 정암(靜 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서 효행으로 광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양학포

(梁學圃)

팽손(彭孫)과 경의(經義)를 강론하였다. 공은 기묘사화 이후 둔세에 뜻을 굳히고 후학

을 기르기에 전념하였다. 공은 모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었으며 상을 당 하여는 죽을 먹으며 시묘하였는데, 여묘를 마친 뒤에도 차마 그곳을 떠날 수 없어서 그 자리 에 머물러 살았다. 당시에 사람들이 그 집을 돈목재라 부르고 그 마을을 시묘동(侍墓洞)이라 하였다 한다.

29世 象德

30世 彦承

31世 鎭吉

32世 達泫

33世 相大

34世 箕斗

1708-

1731-

1751-

1779-

1806-

1828-

1766

1788

1799

1810

1884

1910 箕泰

輔泫

相大

1781-

1806-

(양자, 장두 입향)

1820

1884 相滿

箕文

1808-

1828-

1833

1877

35世 在聲

在興

在元 在萬

돈목재공의 아들인 노계공(蘆溪公) 경희(景熹)의 거주지는 그대로 호동이었다. 공은 과거에 응시해 급제했으나, 당시의 권간(權奸)에게 꺼림을 받아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후 다시 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에 뜻을 잃고 낙향하여 호동에 취석정(醉石亭)을 짓고 제생들과 학문을 강론하 였다고 한다. 그 뒤 호동에서 노동으로 옮긴 듯, 24세 부사공(남원부사) 홍우(弘宇)의 출생지가 노동(蘆洞)임을 밝히고 있다. 이상에서 보면 부정공의 후손들은 호동과 노동에 분가 이주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실례를 부정공의 5세손인 26세 남진(南鎭)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집안은 호적단 자와 소지(所志)류를 현재까지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기에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남진의 경

050

1) 星 洞面第 沙乃地里 乙酉成戶籍單子 第0統 第0戶 幼學金象德年五十八 戊子本光山[영조41년 을유(1765)의 호적단자] 2) 3 3세 상대(相大)공의 경우 20세, 23세, 26세 때의 호적단자에는 주거지가 모두 사내지리로 표기되었는데 비해 35세 때인 경자년(庚子年, 1840)의 호적단자에는 ‘水谷面 章頭里’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앞서 작성되었을 29세, 32세 때의 호적단자를 접할 수 없으므로, 따라서 거주 이전 시기는 29세(1834)부터 35세(1840) 사이에 해당됨을 알 수 있겠다. 한편 호적단자에 의하면 相大공은 원래 이름이 漢裕였는데 68세에 相裕로 개명하였다가 71세에 相大로 다시 개명하였음이 드러난다. 또한 32세 達泫공의 경우는 호적단자에는 達鉉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창의 마을 제4집…051


4. 마을의 인물과 행적

3) 월계마을과 광산김씨 입향 월계마을의 광산김씨 입향은 31세인 전리판서공파 김희길(金熹吉)부터이다. 공의 자는 내백 (來伯)이고

호는 계암(溪菴)이다. 공은 영조 정해(1767) 11월 3일생으로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맑고 빼어났다. 공의 재주와 기질은 총명하고 민첩하여 경서와 사학을 강구하였다. 공은 해 리면 왕촌에서 고수면 월계로 이거하였으며, 경인(庚寅, 1830) 11월에 졸하였다.

1) 김훈석(金勳錫, 1884~1962) 공은 자가 덕현(德賢)이고 호는 인암(忍菴)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노계(蘆溪) 경희(景熹)의 후손이고, 장계(章溪) 기두(箕斗)의 손자이며, 노천(蘆川) 재성(在聲)의 아들이다. 고종21년(1884) 에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長斗里)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는 가학으로 글을 배웠다. 광무1년

25世 汝剛

26世 南銑

27世

28世

29世

30世

31世

14세 때 『사서(四書)』를 독파하고 겨울에 노사의 문인 보산(普山) 기우승(奇宇承)의 문하

에서 수업했으며 뒤에 거산(巨山) 강천수(姜天秀)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진취했다. 광무

15701649

(1897)

7년(1903), 그의 나이 20세 때 전남 광주의 도강소(道講所)에서 『서경(書經)』의 「우공(禹公)」편 南鎰 1600-

을 줄줄 암송하여 강장을 놀라게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리에서 은거하며 당시 이 고

長曄

장의 ‘6군자’라 불리던 회천 김재종, 신암 이공우, 국사 김기일, 두치 유익경, 갑촌 강내성 등

1644

과 함께 청계재(淸溪齋)에서 학문을 강론하며 교유하였다. 또 선대의 문헌을 모아 간행했다.

斗曄 尙曄

萬瑀

廷曄

萬璉

1639-1677

1670-1737 萬瑀(出)

重曄 南鎭

그는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갖고 구용(九容), 구사(九思)의 조목과 사물(四勿)의 구절을 써서 벽에 仁復 1703-1770

龍震 1737-1794

景復

萬秋

迪吉 鐘吉

붙여 놓고 좌우명으로 삼아 몸소 실천했다. 나이 70세가 넘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붓 을 잡으면 시구와 문장이 줄줄 나왔다. 1962년에 졸하니 향년 78세이고 저서로 『인암문고(忍 菴文稿)』 3권 1책이 있다.

熹吉(월계입향)

再復

1767-1830

2) 김재관(金在寬, 1888~1958)

장두의

1612- 광산김씨 선조 1656

고창군 고수면 월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명(舜明), 호는 후석(後石), 아버지는 기락(箕洛) 이다. 지은 최전구 선생에게 수학하고, 1905년 최면암의 의병진에 참여했다. 1908년 기삼연 등의 호남의병창의대와 합동하여 고창전투에 참가하여 5~6차의 전투를 치렀다. 1913년 경술

4) 오산마을과 금녕김씨 입향

국치 이후에 새로 조직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관의 직책을 받고 첩보

금녕김씨는 본래 장성군 북일면 성덕에서 살다가 아산면 반암으로 이거를 한 후 고수면 장

활동을 하였다.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때에는 고창 성송 추산봉에 망곡단(望哭壇)을 만들어 2

두리 오산과 성송면 포동에 정착을 하였다. 오산마을의 입향조는 1620년경 반암에서 고수의

년 복을 마치어 충의의 정을 극진히 하였다. 1980년 광복절 날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

장두 오산으로 이거한 금녕김씨 16세 김동호(金東浩)이다. 금녕김씨는 현재까지 오산과 포동

았다. 광산김씨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부정공/양촌공의 후손이다.

마을에 분산 입향하여 10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오산마을은 금녕김씨 익화공파가 이웃 성송 면 포동마을과 함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3) 김재익(金在翌, 1897~1957)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世雄

東浩

茂位

德秋

有相

應泰

-1597

1591-1636

1622-1675

1662-1745

1693-

1727-1790

오산 입향

052

공은 월계에서 태어난 효자로 본관은 광산이다. 공의 자는 명원이고 호는 월촌(月村), 노계 (蘆溪)

경희(景憙)의 12대손으로 송파(松坡) 기호(箕鎬)의 아들이다. 공은 어버이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공의 노모(老母)가 머리에 발찌(부스럼의 하나로, 다른 부스럼보다 위험하다)가 나 농즙(濃汁) 이 흐르고 구더기가 생겨 어떤 약을 써도 듣지 않았다. 공은 노모의 농즙을 입으로 빨아내고 고창의 마을 제4집…053


날마다 첩약(貼藥,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지어서 약봉지에 싼 약)을 지어 3년을 하루같이 지극정성으

차의 족보편찬(族譜編贊)에 전념하였다. 만경(晩境)에는 부정공(副正公) 종중 도유사에 선임되어

로 간호하니 병세가 호전되었다. 이웃 마을사람들은 공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계해파보(癸亥派譜)」를 속간(續刊)하고 「노산사지」를 역간(譯刊)하였다. 문집으로 『송하사고(松

된 것[孝感所致]이라 칭찬하였다. 공의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2004년 고창향교의 향천과 남원

下私稿)』가

있다.

향교・나주향교・광주향교・전주향교 등 사장관(四掌館)에 천이 되어 2006년 성균관에서 최종

포양(襃揚)을 받았다. 또한 공은 일찍이 문예를 이루어 일삼성(日三省)으로 경계를 삼아 성인의

6) 김대진(金大鎭, 1926년생)

가르침에 종신복응하였고, 후학 양성에도 정진하였다. 공의 묘는 효자비와 함께 월계 선영에

육군 준장으로 오산에서 출생하여 3군관구 부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있다.

7) 김익현(金益鉉, 1932~1990) 4) 박성근(朴成根, 1902~1963) 박성근은 농악 상쇠 명인으로, 1902년 지금의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에서 태어났다고 알

김익현은 고수면 장두리 149번지에 태어나, 고창고와 조선대를 졸업하였다. 그는 조선대학교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와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1903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아치실)에서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 다. 호적은 장두리이지만 장두리는 형 박영근이 살던 곳이다. 형의 주소를 호적에 기재한 것

8) 반재우(潘在羽, 1929~2012)

이다. 그는 어려서 조실부모 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생활했다. 그는 쇠잽이 강성옥에

장성군 서삼면 내연 출신으로 진사 영구(榮龜)의 손(孫)으로 두환(斗煥)의 장녀이다. 남평반

게서 주로 쇠를 배웠고, 김성대에게 굿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특히 부포놀음에 매우 뛰어났

씨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품자정숙하고 효우천식하여 19세에 월계로 시집와서 병든 시조모와

고, 쇠가락뿐만 아니라 상쇠로서 굿판을 통솔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1900년대 이후 출생한

시모 및 연로하신 시부를 정성껏 모시고 미혼인 어린 시매 등을 수발하는 등 가사가 너무 많

영무장(영광·무장·장성·함평 등의 지역) 예인들은 대부분 박성근으로부터 예능을 배웠고, 걸궁

고 바빠 잠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특히 결혼 후 1~2년만에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상을

패 활동을 함께했다. 1947년 창경궁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해 특등상과 개인상

당하자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과 삭망(朔望)에 존곡(尊哭)을 빠뜨리지 않고 삼년상을 마쳤다.

을 함께 받았다. 이후 다양한 농악경연대회에 참가했으며, 이를 계기로 미국 공연까지 했다.

그 후 시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삼년상을 치르는 등 효를 몸소 실천하여 2010년 고창향교의

남원에서 여성농악단을 지도하다가, 1961년 61세의 나이로 고창군 아산면 주진리 17번지에

효부로 추천받았으며, 1992년 고수경로당에서 효부로 표창장을 받기도 하였다

서 사망했다.

9) 이경연(李京淵, 1946년생) 5) 김종현(金宗鉉, 1929년생)

광주농고를 졸업하고, 광양시청 국장과 전남도청 과장(서기관)으로 재직하였다.

자는 덕신(德信)이며 호는 송하(松下)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노계 경희의 13대 후손으로 고수면 월계에서 출생하였다. 인후한 성품으로 타고나 거가(居家, 집에서 한가롭게 지냄)에 효우

10) 김영춘(金永春, 1954년생)

로, 재향(在鄕)에 성신(誠信)으로 처신하여 향인의 신망을 얻었다. 일찍이 가학(家學)을 익혀 동

고수면 월계에서 태어나 고창고를 졸업하였다. 그는 38년 간 공직에 있으면서 상하와 해리

곡(東谷) 성환규(成桓奎)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의 대방(大方)을 깨우쳤다. 19세에 모친상을 당

면장, 문화관광과 과장, 주민생활지원과 과장을 거쳐 현재 고창군청 기획예산실장(지방서기관

하고 가세 또한 기울어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지만, 주경야독으로 사서를 섭렵(涉獵)하여 소

4급)으로

재직 중이다.

양을 넓혔다. 그는 서예가로도 활동했는데, 여가로 연묵(硏墨)하여 필법이 정묘(精妙)하여 한 국서화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고창향교 등 네 개 향교의 향천(鄕薦)과 향교의 사

장관으로 성균관의 포양(襃揚)을 받은 아버지의 효를 선양하기 위한 효행비도 세웠다. 향사로 고창향교 전교와 성균관 전의 및 각원사(各院祠)를 역임하였고 종사(宗事)에도 특성을 보여 누

054

11) 박혁(朴爀, 1963년생) 월계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법고시 40회에 합격하여 정읍시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고창의 마을 제4집…055


12) 김정용(金正容, 1969생)

습된 곳은 현재 축사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개배편, 경질토기편과 연질토기편 등이 수

김정용의 아버지는 고수면 장두리 장두마을에서 출생하였고, 김정용 박사는 고려대 물리학

습되었다.

과를 졸업하고, 미국신시내티 문리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인천대학교 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장두리 유물산포지4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83-5에 있는, 원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로 월 계마을의 북측 구릉이고, 하단부에는 송림농원이 위치한다. 구릉은 동서로 뻗어 내린 해발

13) 장두리의 박사와 사무관

66m의 저평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정상부는 월계마을로 이어지는 소로가 개설되어 있으

김용주(金容柱, 1967생)는 전남대학교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 김금남(金錦男, 1965년생)은 문

며, 주변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경질토기편과 연질토기편 및 옹관편 등이 수습

학박사 학위, 박정기(朴正基, 1961년생)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되었다.

박인규(朴仁圭, 1952년생)는 월계 운월 출신으로 포항 해병대 군속 사무관, 박종기(朴鍾基, 1953 년생)는

장두 출신으로 정읍시청 상교동장 과학산업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박경수(朴京洙, 1955

장두리 고인돌군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78-2번지의 고인돌군은, 청동기에서 삼국시대의

년생)는

월계 운월 출신으로 전북도청 보건환경연구원 연구원 기획실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유적이다. 장암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맞은편에 지석묘 8기가 있다. 이 주변은 현재 개간이

운월의 김형일(1962년생)은 서울시청 기획관실 사무관으로, 오산의 오판동은 교육과학기술부

이루어져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개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상석이 옮겨졌고 하부가 유실

사무관으로 재직 중이다.

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의 판석재와 활석들이 도로변에 쌓여 있는 상태이다. 그 중 양호한 지석묘의 크기는 235×147×45cm이며, 평면 형태는 제형이다. 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있다.

5.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지석은 없으며 장축은 북동-남서 측이다. 또한 주변에서 다량의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 수 습되었다.

장두리 유물산포지1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94-4번지에 있다. 시대상으로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로 학산마을의 남측에 위치한다. 고수면에서 동서로 뻗어 내린 가지구릉의 남측

쌍괴정(雙槐亭) : 쌍괴정은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283번지에 있는 정자로, 단기 4200년 정묘

일부이며 비석골과 운골 사이의 구릉이다. 북측으로는 인성제가 있다. 구릉 남측에는 밭이

(고종 4년, 1867)에 건립되었다.

있다. 유물이 수습된 곳은 하단부의 평탄한 곳으로 2기의 민묘와 송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박서봉(朴瑞鳳)의 10세손인 밀양인(密陽人) 처사(處士) 박승현(朴升鉉)이 마을 앞에 홰나무 두 그

이곳에서 경질옹관편과 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루를 심었는데, 나무가 번성하여 녹음(綠陰)을 이루자 그 손자 양휴(陽休)가 그 곳에 정자를 세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전면 2칸, 측면 1칸의 누정이다. 양오(陽梧)

우니, 향우(鄕友)가 휴식하는 곳이 되었다. 고수면 장두리 마을 앞에는 지금도 보호수로 느티 장두리 유물산포지2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91-11번지에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로, 운월마을 북측 구릉에는 양계장이 있고, 서쪽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정상 부는 송림으로 운월마을과 이어지는 소로가 개설되어 있다. 구릉은 동서로 뻗어 내린 능선의 말단부로 저평한 편이다. 유물이 수습된 곳은 서사면으로 광산김씨의 묘가 있다. 이곳에서는 경질토기편과 연질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장두리 유물산포지3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184-9번지에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의 유 물산포지로 월계마을의 북측 구릉이며, 월계제의 사측이다. 구릉은 해발 50m의 저평한 대지 이며 남북으로 뻗어 있다. 구릉의 말단부에는 서씨재실과 묘역군이 형성되어 있다. 유물이 수

056

쌍괴정과 장두 모정

희구정

고창의 마을 제4집…057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245년(2010년 기준)인 이 나무는 둘레가 4.2m나 되는 고목으

에는 3면에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정면에는

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다. 괴목나무 옆에 있는 쌍괴정은 나지막한

‘효자 광산 김기두 지려 고종갑오삼월일명정’

기단에 둥근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정면 2칸, 측면 1칸의 정자이다. 팔작지붕은 초익

이라 쓰여 있다. 담장 밖에 ‘忍菴居士金勳錫景

공 홑처마로 간결하게 중수했다. 정자 안에는 역사를 말해주는 「쌍괴정기」가 걸려 있고, ‘쌍

仰碑(인암거사김훈석경앙비)’가 서 있다. 보존 상

괴정’이라는 편액은 설주 송운회의 글씨로 고색창연하게 걸려 있어 운치를 더한다. 시문은 송

태가 비교적 좋다. 개항기의 정려각으로 문화

사 기우만(奇宇萬)과 직지사 이승욱(李承旭)이 썼고, ‘謹次雙槐亭韻(근차쌍괴정운)’은 인암 김훈석

재적 가치가 높다.

(金勳錫)이 썼다.

송운회(1874~1965년)는 전남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이건창의 문하에서

인암거사김훈석경앙비(忍菴居士金勳錫景仰碑) :

형 명회와 함께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이때부터 중국과 우리나라 명인들의 필법을 두루 익혔

김훈석의 경앙비는 고수면 장두리 44-1번지

다. 특히 동기창의 필법에 심취하였다. 5체에 모두 능했으나 주로 해서와 초서를 많이 썼다.

광산김씨 정려 앞에 있다. 글은 현곡(玄谷) 류영

이 쌍괴정 편액도 행서로 썼지만 복잡한 구성에는 초서를 접목하였다.

선(柳永善)이 짓고,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가

고종황제 칙령

썼으며, 1962년 3월에 세웠다. 희구정(喜懼亭)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장두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단기 4322 년 임신(1989)에 중건(重建)한 6각의 정자이다. 양오 박서봉이 조선 성종 때에 경상감사(慶尙監 司)로

열부청도김씨기적비(烈婦淸道金氏紀蹟碑) : 기적

재직하다가 노친(老親)을 모시고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밀양으로 돌아갔다. 그

비는 고수면 장두리 287-1번지에 있으며, 글

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피하려고, 고창군 고수면 산양동(山陽洞)으로 들어와 살며 추산

은 광산김씨 김재남(金在南)이 짓고, 동화(東華)

아래에 손수 지은 정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퇴락하자, 후손이 1989년 3월에 현재의

정연숙(鄭燕淑)이 썼다. 열부 청도김씨는 1888

( 山)

위치로 옮겼다.

광산김씨정려와 인암거사김훈석경앙비

년(戌子)에 태어나 1956년에 향년 68세로 졸하 였다.

광산김씨정려(光山金氏旌閭) : 정려는 고수면 장두리 44-1(장두길 9)에 있으며, 조선시대 광산인 김기두(金箕斗, 1828~1910)의 효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공의 자는 경칠이며, 호는 장계이다. 공

송당재(松堂齋) : 고수면 장두리 월계마을에

은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314번지에 태어났으며 향년 82세로 졸하였다. 공은 고창 지역에서

있는 재실로, 송당 박영태(朴永泰)를 기념하기

널리 알려진 김경희의 후손으로 공의 효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공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

위해 1987년에 건립되었다. 「송당재기」는 김동

고 형제간에 우애도 돈독했으며 학식이 높았다. 부친이 병에 걸리자 눈 속에서 싱싱한 채소를

리 선생이 썼다.

열부청도김씨기적비

얻어 밥상에 올렸고, 부친의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부친 입에 넣는 등 열의를 다 하여 간병하였다. 1894년(고종 31) 예조에서 고종에게 정려할 것을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 전라관찰사에게 관

운월재(雲月齋) : 이천서 씨의 재실로 1987년 에 창건하였다.

문을 보내 정려하였다. 송사 기우만이 정려기를, 정규삼이 행장을 지었고, 그의 효행은 『호남 삼강록』에 실렸다. 김기두 정려는 흙으로 만든 담장 안에 콘크리트로 기단을 만들었고, 그 위

월계의 줄다리기와 당산제 : 줄다리기는 대부

에 둥근 기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보와 결구하고 있다. 공포는 익공 양식이다.

분 대보름날 행사였다. 정월 대보름, 즉 첫 보

정면 1칸, 측면 1칸에 네 벽이 홍살로 처리되었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정려각 안

름달이 뜨는 밤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줄다

058

송당재

고창의 마을 제4집…059


리기는 대낮에 그러한 짓을 하는 자는 없고 해가 져야 이루어진다고 하여, 마치 이것을 성행

위처럼 여기는 것이 지방 노인들의 관념이었다. 특히 암줄(여자 편)과 수줄(남자 편)의 고리를 거 는 일을 그렇게 여기는데, 여기에서 암줄 편인 여자 편이 이겨야 대지에 풍년이 든다는 믿음, 그것을 성행위로 여긴다는 것은 특히 민간신앙에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와 같은 행사들의

핵심은, 한마디로 말해 풍요의 기원이다. 월계 당산나무 : 월계마을 당산나무는 월계마을 505번지에 있는 수령 350년, 300년 된 두 그루의 왕버들이다. 왕버들은 낙엽, 활엽 관목이며, 습지나 냇가에서 자생한다. 한국, 일본, 중 국, 대만 등지에 분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도 이남에서 분포한다. 수피는 회갈색으로 깊

오산마을 당산나무

김창수 고가

게 갈라지며 피목이 있다. 버드나무속 가운데 가장 크게 자라는 수종이며, 잎이 새로 돋아 날 때 붉은 빛을 띠므로 쉽게 구별된다. 장두리 월계마을의 왕버들은 수령은 350년이고 높이

오산마을 당산나무 : 오산마을 내 회관 앞 모정 옆에 노거수 한 주가 있다. 수종은 왕버들나

15m, 가슴 높이 둘레 5.7m, 나무갓 너비 20m이다. 왕버들은 마을을 수호해 주던 나무이다.

무로 수고는 10m 정도이며 둘레는 2m이다. 수령은 300년 정도 되었고, 마을에서는 당산나

왕버들은 당산나무로 외지인이 마을의 물건을 훔쳐 이곳을 지나가면 경기가 나 물건을 가져

무로 부르는데 정월 초하룻날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당산제를 올리고 마을 주민들이 새끼줄

갈 수 없고 그냥 가면 경기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당

을 꼬아서 나무에 감는다고 한다.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오산 442-1의 왕버들은 2006년 12

산제를 지내고 있다. 왕버들은 1999년 9월 15일에 보호수 제9-14-29호로 지정되었다.

월 5일에 보호수 제9-14-52호로 지정되었다.

장두마을 당산나무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장두 283번지에 있는 느티나무가 장두마을 당산

김창수(金昌洙) 고가(古家) : 김창수 고가는 고수면 장두리 장두길 22-3번지에 있다. 이 고가는

나무이다. 장두 마을회관 앞에 있는데, 옆으로 쌍괴정과 모정이 있다. 느티나무 잎이 한꺼번

광산김씨의 장두 입향조인 김상대가 성동면 사내에서 이거한 1835년 전후에 건립한 건축물

에 피면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고, 느티나무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굿을 지내고 있다.

로, 장두마을의 광산김씨 큰집이다. 본래 이 가옥의 구조는 ㄷ자형으로 방 네 칸, 우사 한 칸,

수고는 15m이며, 둘레는 4.2m이다. 수령은 약 240년 정도 되었다. 현재 두 그루이며 관리가

부엌 한 칸이었다. 그런데 1974년 새마을사업을 할 때, 一자형의 여섯 칸 집으로 개조하여 오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지정번호는 9-14-2-5-1로 1982년 9월 20일 지정되었다.

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고가는 팔작지붕이며, 고가의 정원에는 예전에 디딜방아가 있었고, 지 금도 디딜방아를 찧던 학독이 남아 있다. 특히 이 고가의 기둥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이 고가 의 기둥은 본래 심하게 휜 나무였으나, 이를 곧게 펴기 위하여 굽은 곳의 안쪽 부분을 잘라 그곳에 나무를 박고, 밖에는 잘라내어 일직선이 되도록 나무기둥을 만들어 세웠다. 이런 기둥 이 현재 이 고가에 네 개나 남아 있다. 장두 들독 : 장두마을의 풍락정(豊樂亭, 장두 모정) 앞에는 둥그런 돌이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 은 이 돌을 들독이라 부른다. 마을 고로들에 의하면, 이 돌의 중량은 약 150근(90kg)이라 하 나 그 근거는 없다. 이 들독은 광산김씨 양간공파 34세 김기풍(金箕豊, 1847~1889)이 산에서 퇴 비용 풀 짐을 해올 때 한 쪽이 기울어지자 짐의 균형을 잡기 위하여 한 쪽에 올려 마을로 가

월계마을 왕버들

060

장두마을 당산나무

지고 왔다고 전한다.

고창의 마을 제4집…061


오연양반 서당 터 : 고수면 장두리 133번지에 있던 1950년대 장두리 유일의 한문 서당이다.

사위이며 창평전투에서 58회나 승리하여 청 태종의 총애를 받던 명장이었으나 예친왕 다락

이곳에서 송하 김종현 선생은 기역자형 초가 자택의 사랑채에서 한문을 배우고자 하는 주민

을 따라왔다가 박의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청나라 사기에서 보듯, 청 태종은 그의 죽음을

들에게 1954년부터 1957년까지 3년 간 가르쳤다. 송하 선생은 추구, 천자문, 사자소학, 명심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하며 무훈왕에 봉하였다고 한다. 양고리가 죽은 뒤에 산으로 조급

보감 등을 가르치고 지필묵으로 한문서예를 지도하였다.

히 몸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청군이 저 사람이 양부마를 쏜 사람이라 하니 활을 잘

서당 유생들은 천자문 등 한문책을 읽을 수 있고 해독을 할 수 있으면 책거리라고 하여 떡 한 시루와 술 등을 자진해서 가져와 서당 유생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또한 겨울철 눈이

쏘는 애륵을 시켜 박의를 잡아 목을 베었다고 한다. 박의의 묘소는 고수면 예지리 양정에 있 으며, 후손은 고수면 장두리와 아산면 중월리 등에 살고 있다.

오면 유생 모두 함께 강천들이나 읍내절 등 야산에서 토끼 사냥하는 등 체력을 단련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당에서 배운 주민들로는, 김유현, 이창연, 이경연, 박병국, 박병기, 김영상, 김

2) 소안치가 어치씨를 입으시고이다

영일, 박인규, 박원규, 이제우, 김영달 등이 있고, 장두에서는 김창수, 김진용, 고창에서는 김영

이 지역에서는 주민들 사이에서 옛날이얘기(옛날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여기서 소개할 이

규, 김영관 등, 내창에서는 김수일, 이옥현 등이 있다.

야기의 구술자는 심재순(양동댁, 여)이다. 심재순은 어려서부터 고창 지역에서 컸지만, 원래는 장성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사람이다.

월계 물방앗간 : 운월에서 월계를 잇는 다리 건너에 있는 논을 이곳 사람들은 ‘물방아등’이 라고 불렀다. 물방아등은 원래 이곳에 물방앗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던 것으로 추정

긍게 인자 메누리(며느리)가 헌단 말이, 밥을 허믄서 헌단 소리가

된다. 현존하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 물방앗간은 1940년대까지도 김옥현 씨 집 앞 냇가

“소안치(송아지)가 어치씨(어치는 소에게 입히는 짚 옷)를 입으시고 뛰시고 개님도 뛰시고. 인자 소안치 허

건너 광산김씨 종중의 소유였으며, 월계에 거주하는 김봉현(부처울양반) 씨가 운영하였다고 한

구 개 허구 같이 장난 마냥으로 뛰지라잉.”

다. 그 후 박대근(새기촌양반) 씨가 먹거리의 다리 건너 내창 방면에 물방앗간을 만들었고, 이

시아버지가,

를 박병채, 박병권 등이 1990년대까지 운영하다가 폐쇄되었다.

“뭔소리냐, 뭔소리가 후닥닥 후닥후닥 그러냐?” 헌게,

6. 마을의 전설과 풍속

“아버지 눈깔치로 보시지오.” 아버님이라고도 않고, “아버지 눈깔치로 보시지오”그래 버렸어. 지지리 존댓말 허다 시아버지께다“아버

1) 방장산에 얽힌 양고살재의 일화 양고살재는 병자호란 때 고창 출신 박의(朴義) 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陽古 利)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박의는 1599년(선조32)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고창 입향조인 관찰사 양오공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용기가 대단하고 말을 잘 타며 총을 잘 쏘아 박포수라 불렸다. 1642년 (인조2)

지 눈깔치로 보시지오”했으니 망신이지라잉. 긍게 징허게 까시럽제. “야야, 너 어째 그렇게 말을 허느냐?” 헝게, 인자 무색해서 말도 못허제 메누리가. 긍게로 메누리가 헌단 말이, “내가 아부이(아버님)게다 너무 다 실수했고 죄송헝게 용서해 주시시오.” 용서해도라고.

무과에 급제, 부장(部將)이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한양이 함락당하

고 임금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수모를 당하고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

이 이야기는 단순한 웃음의 이야기를 넘어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야기의 직접

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근위병을 거느리고 수원 근교 광교산에서 적을 만나 싸워

적인 배경은 시집온 여성이 시집 식구들과의 언어적 상호작용에서 채택해야 하는 존댓말 사

여러 번 이기기는 했으나 갑자기 내린 폭설을 만나 양군이 격전을 벌인 끝에 아군이 패하게

용의 이상적 규범이다. 즉 한국사회에서 혼입(婚入)한 여성은 규범적으로는 시집 식구 모두에

되었다. 박의는 적군의 이동로인 방장산 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자 적의 대장을

게 말을 높이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새 며느리가 시집의 모든 식구들에게 말을 높여서 해야

총탄에 명중시켜 쓰러지게 했다. 죽은 적의 상장인 양고리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누루하치의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상적 규범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출발한다. 위의

062

고창의 마을 제4집…063


이야기 주인공인 며느리는 개평리에서 자조적인 비꼼의 속담을 실제 담화에서 그대로 실천하 는 어깃장을 시아버지 앞에서 놓게 된다. 그래서 ‘어치’에다 ‘-씨’를 붙이고, 주체 존대의 선어 말어미 ‘-으시-’를 집 안의 짐승들에게 모두 바친다. 따라서 ‘소안치는 어치씨를 입으시고 뛰 신다’, 개에게도 님을 붙여 ‘개님도 뛰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시아버지는 이것이 결코 인간 세상에서 보이는 말씨 사용이 아님을 판단한다. 그래서 이 말을 아무 의미 없는 단순한 의성어, 즉 ‘후닥닥 후닥후닥’이라는 소리로 인지한다. 그러자 며느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 아가서 짐승에게도 쓴 존칭 표현을 시아버지(존칭 표현을 써야 할 대상)에게는 쓰지 않고 거두어 들여 버린다. 그리고 시아버지를(시아버지에게 쓰는) 존칭인 ‘아버님’대신 (친정 아버지에게 쓰는) 평

새마을운동 전의 월계마을

칭인 ‘아버지(고창 말은 아부지임)’로 부른다. 심지어는 시아버지의 눈을 ‘눈깔치’라는 비어로 쓰 을사업을 제대로 할 터이니 지원해달라고 도지사에게 직접 요청했다. 그러자 도지사가 지원

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시집온 여성의 새 가족, 즉 시집 내에서 불평등한 언어사용 규범(이

할 것을 확약하고 바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극히 냉소적인 비꼼의 정서가

월계의 새마을사업은, 1972년 하천에 제방을 쌓는 일부터였다. 월계마을은 조금만 비가 와

반영되어 있다. 개평리에서는 이것을 슬픈 자조의 속담으로 표현했다. 이 지역에서는 웃음 또

도 냇물이 도로에 넘쳐 주민들이 다닐 수가 없고, 마을의 공동우물은 흙탕물로 변해 식수로

는 비꼼이 가득한 말장난의 이야기로 장르를 바꾸어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짧

이용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큰 비가 월계마을에 오면 냇가에 사는 덕으멀댁(덕정댁, 김영노 씨) 집

은 이야기이지만, 이 속에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겪는 감정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이 가장 먼저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덕으멀댁은 재난의 위험표시로 징을 울리며 큰소리로 위

있는 것이 특징이다(왕한석).

험을 동네 주민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홍수로 도로가 물에 잠기면 아랫마을 주민들은 월계

것이 당연히 야기하는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

뒷동산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새마을사업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이 제방의 둑 을 쌓는 일이었다. 이 사업에 마을 주민들이 총동원되었으며, 마을 안길의 확・포장, 담장개량,

3) 고창 장두 사숙소식

전북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야소교회(耶蘇敎會) 신도 중 이병묵(李炳黙)・정일도(鄭一도)・김성

지붕개량, 농촌주택개량, 부엌개량, 하수구정비, 지붕도색, 담장도색, 마을회관과 새마을공동

관(金成琯) 제씨는 금 춘본예배당 내에 사숙(私塾)을 설립하고 생도 23명을 모집교수 하든바

창고의 신축, 메탄가스 등을 설치하여 주거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이장과 새마을지도

일익 증가하는 학생은 현하 칠십 여명에 달하여 교실이 협착곤란이더니 동면 유지 이관녕(李

자, 부녀회장, 개발위원장 등이 새마을사업의 구심체가 되어 남녀노소 가구당 1명 이상 작업장

琯寧)・김낙술(金洛術)・박사진(朴士進)・박용필(朴容弼)・백남철(白南哲)

제씨의 동정 의연금 백여

에 매일 나와 제방을 쌓았다. 마을의 온 주민들이 새마을노래를 부르며 지게나 리어카, 소쿠

원으로 본 교실을 증축하고 강사 정일도(鄭一도)・이철환(李鐵煥) 양씨는 한서(寒暑)를 불고(不

리, 세숫대야 등으로 골재를 나르면서 마을 공동작업을 해 나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

顧)하여 근성교수(勤誠敎授)하야

로 하천에 제방이 만들어져 월계는 홍수와 범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양호한 성적을 거(擧)한다더랴(『동아일보』 1921년 12월 30일).

초가 60여 채는 물론 부속건물까지 한 집도 빠짐없이 슬레이트로 지붕을 개량하였다. 농가주

7.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택개량사업으로, 정부의 융자금을 받아 다섯 가구가 깨끗한 집을 신축하였다. 마을 안길은 리어카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여 농작물 운반도 어려웠다. 그리고 집

1) 전국 최우수 새마을사업 월계마을

의 울타리들도 흙이나 대나무, 볏단으로 만들어져 너무 지저분했다. 마을의 안길은 하천에

월계에서 새마을사업이 최초로 시작된 동기는, 1972년 시작된 고수면 내창마을의 새마을사

제방을 쌓은 덕으로 반듯해졌고, 진흙길도 포장했다. 지저분한 담장들도 블록으로 쌓았으며

업이다. 당시 이춘성 전북지사가 내창마을을 순시하고 고창방면으로 가던 중 월계 다리에서

대로변에는 페인트칠까지 해서 깨끗한 마을로 조성하였다. 월계마을은 1972년부터 1974년

박병권(당시 새마을지도자) 씨가 도지사의 차량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월계마을도 새마

까지 3년여 동안의 새마을사업으로 동네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064

고창의 마을 제4집…065


그래서 1974년 월계마을이 전라북도 최우수 마을로 선정되었다. 그 후 이춘성 전북도지

록 지원하고 있다.

사가 월계를 방문한 바도 있고, 당시 권승주 군수와 김영수 면장은 수시로 방문하였다. 고

한편 한국인들의 조상숭배사상과 직결된 토장묘제도도 시대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수면사무소의 안재식 담당직원은 매일 상주하며 박병권 새마을지도자와 하옥순 부녀회장,

이러한 묘제는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묘 관리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관리가 편하고 묘의

그리고 김영중・이수성 이장 등과 함께 새마을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월계마을은 새마

면적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 납골당으로 바뀌고 있다. 장두리에는 광산김씨가의 납골당 두 곳

을사업의 선두주자로 전국에서도 최우수 마을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

이 있다.

로 전국 각지에서 견학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으며, 이로 인하여 월계마을은 우수 마을 시상 금을 받았다. 아울러 당시 공로자로 박병권 새마을지도자는 대통령훈장(근면장 16호)까지 받

4) 성씨별 거주 현황(2012. 8월 현재)

은 바 있다.

(1) 장두(22가구) 광산김씨 15가구/ 경주김씨 2가구/ 금녕김씨 1가구/ 영성정씨 1가구/

2) 장두리의 인구 변화

여주이씨 1가구/ 전주이씨 1가구/ 밀양박씨 1가구

장두리의 인구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장두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10년

(2) 월성(46가구)

전보다 32%가 감소하여 매년 3% 이상 인구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두의 인구감소

광산김씨 20가구/ 밀양박씨 10가구/ 전주이씨 3가구/ 풍천임씨 2가구/ 김해김씨 1가구/

는 군단위의 농촌마을에서도 비교적 큰 것으로 보인다. 다른 행정리인 월계는 20%, 오산은

경주이씨 2가구/ 한산이씨 2가구/ 부안김씨 1가구/ 해주오씨 1가구/ 울산김씨 1가구/

11% 감소하였는데, 오산의 경우 다른 농촌마을에 비하여 인구감소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동장씨 2가구/ 연안이씨 1가구

마을 장두 월계 오산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39 41 41 40 32 29 29 30 30 82 78 76 63 56 56 58 57 57 44 41 37 36 31 27 27 28 27 82 82 71 63 72 69 74 70 72 163 158 140 123 140 133 137 133 134 132 81 76 69 60 68 64 63 63 62 47 43 43 38 35 36 34 37 36 92 89 90 82 73 76 77 79 80 82 45 46 47 44 38 40 43 42 44 83

32 25 72 60 39 43

※ 앞은 전체, 위는 남성, 아래는 여성(단위 : 명), 연말 기준, 단 2012년은 7월 말 기준

(3)오산(42가구) 금녕김씨 16가구/ 제주양씨 7가구/ 광산김씨 4가구/ 이천서씨 4가구/ 진주정씨 2가구/ 김해김씨 2가구/ 경주이씨 2가구/ 임씨 2가구/ 고흥유씨 2가구/ 부안김씨 1가구

5) 장두리 주요기관과 시설 장두리에는 마을마다 회관과 정자가 있어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월계마을 마을회 관은 월계1길 1번지에 있으며, 근래에 신축된 건물이다.

3) 장두리의 산업과 생활상

월계마을 입구에 있는 월계공동창고는 국도 23호변에 있으며, 농협의 공동창고이다. 월계 공

장두리는 평지천을 사이에 두고, 평지천의 남쪽에 장두마을이 있고, 북쪽에는 월계와 오산

동우물은 가운데뜸(박석규 씨 앞)과 아랫뜸(김영필 씨 앞)에 2개소가 있었다. 이 우물의 축조 시기

마을이 있다. 이 지역은 평지천의 범람원지대에 있기 때문에 비옥한 농토 위에 농업이 발달해 있다. 장두리의 대부분은 논농사가 발달 했으며, 특히 오산마을은 평지천의 범람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에 하우스단지가 있어 수박, 복분자, 그 외 과수, 벼 등 다양한 농 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오산마을은 농업기 술센터에서 지정하여 농기계와 편의장비를 구입하여 주민들이 농업에 전력할 수 있도

066

장두 광산김씨 납골당

월계마을회관

운암마을 모정

고창의 마을 제4집…067


는 1944년경으로 아래뜸 우물을 먼저 축조하고, 가운데뜸 우물은 그 후에 조성하였다. 그 이

오산마을 마을회관은 고수면 장두리 오산 443-1번지에 대지 200평 위에 건립된 마을회관이

전에는 마을 앞에 흐르는 시냇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1950~1960년대 우물의 형태

다. 땅은 마을주민인 김영탁 씨가 104평을 기탁하여 정부지원금과 마을 주민들의 부담으로

는, 땅 밑은 돌로 쌓았고 지면 위로는 콘크리트 원형관을 올린 것이었다. 우물의 깊이는 2미

2005년 6월에 착공하여 8월 말에 완공하였다.

터 내외로 물이 차면 1미터 정도였는데, 온 동네 주민들이 이 우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 물

오산마을 모정은 2001년 7월 26일에 건립된 정면 두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이다. 또한

을 퍼 올릴 때 양철로 만든 바가지 또는 고무로 만든 두룹박(두레박)이라 불리는 바가지를 사

마을회관 앞에 6각형의 모정이 있다. 이 모정은 농촌진흥청과 전라북도농업기술센터 및 고

용하였다. 가운데뜸 우물은 큰비가 오면 흙탕물이 나와 사용하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1972

창군농업기술센터가 지원한 농작업안전모델 시범사업(2010~2012년)으로 선정되어 건립된 모

년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우물은 폐쇄하고, 높은 곳에 간이 상수도 물탱크를 설치하여 물

정이다.

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각자 집에 작두 샘을 파서 식수로 이용하였다. 운월마을

오산마을 우물은 마을회관 뒤에 있으며, 상

모정은 단기 4320년(1987)에 건립되었다. 이 모정은 다른 마을의 모정에 비해서는 초라하지

수도가 들어오기 전 오산마을 주민들이 함께

만, 80년대 한국 농촌의 전형적인 모정 형태를 볼 수 있다.

이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

일명 풍락정(豊樂亭)이라고도 불리는 장두마을 모정은, 고수면 장두리 283번지에 있다. 모정

지 않다.

은 1886년(丙戌) 6월 6일 마을에서 건립하였고, 상량문은 인암 김훈석이 짓고 썼다. 그 후 모

한편 고수면 장두리 299번지에는 기독교

정이 노후하여 2010년 5월 1일 군비 지원으로 정면 두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으로 건립

교회인 고성교회가 있는데, 담임목사는 강병

되었다.

인 목사이다. 장두리의 주요한 식당으로는 고

장두마을 마을회관은 장두리 장두길 18번지에 있으며, 근래 신축된 2층의 벽돌건물이다.

수면 장두리 21-4에 있는 장두가든이 있다.

오산마을 우물

그리고 장두리 547번지에 김길남이 운영하는 광산계란 양계장이 있다.

6) 장두리 사람들 장두리 사람들은 현재 전국 각지에 다양한 직종의 직업을 가지고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많은 장두리 사람들을 지면에 싣고자 하였으나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어 확인된 사람들만 이곳에 싣는다.

(1) 장두리의 선생님들 풍락정

장두마을 마을회관

월계 출신인 박병권(朴炳權, 1930년생)은 고창남중학교 교장, 박병중(1935년생)은 전남여고 에, 박수철(朴洙哲, 1948년생)은 경기도 안산시 양지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김영상(金永相, 1949년생)은

남원여고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순창여중 교장으로 재직 중이고, 박성규(朴成

圭, 1953년생)는

정읍 칠보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이리공고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두 출신의 박정기(1961년생)는 수원 면무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선생님들은 김영 일(1951년생)은 서울 한양공고에 근무하였고, 박한구(1956년생)는 고창남중학교에 재직 중이다. 김영범(1956년생)은 전남 여수 화양고등학교에, 월계 박진(1961년생)과 장두 정관수(1961년생)는 오산마을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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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마을 모정

장성고등학교에, 정용수(1968년생)는 전주영상미디어고등학교, 정갑수(1970년생)는 광주 정광고 고창의 마을 제4집…069


등학교에, 오산 태생 양국현(1968년생)은 한양공고에, 월계 김인자(1974년생)는 정읍북초에 재직

(6) CEO와 공공기관 근무자들

중이다

월계 김영철(1955년생)은 서울에서 두성칼라출판이라는 인쇄업을 하고 있으며, 김창수(1937년 생)는

고창산림조합에 근무하였다. 김영주(1957년생)는 고창건강보험공단 과장에, 박흥규(1957

(2) 장두리의 장교와 직업 군인들

년생)는

서울지하철공사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월계 김영하(1949년생)는 광주은행, 월계 김용

월계에서 태어난 김옥현(金沃鉉, 1932년생)은 예비역 육군대위로 예비군창설시(1968년) 초대 고

달(1947년생)과 장두 김영열(1945년생)·김영관(1947년생)・김영봉(1949년생)·김영성(1959년생 재직

수중대장을 역임하였고, 박병상(1931년생)은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박원규(1947년

중)

생)는

예비역 대위(사무관)로 서울시 중대장을 역임하였다. 오산에서 태어난 김준근(1954년생)은

행정실에, 월계 김덕수(1964년생)는 고창교육청에, 박수성(1970년생)은 서울소방공무원으로 재

예비역 대위로 고수면 면대장을 역임하였고, 장두 김영옥(1948년생) 또한 고수중대장을 역임하

직 중이다. 월계의 이동순(1954년생)·이동님(1957년생)·이동숙(1960년생)은 고수단위농협에 근무

였다. 장두 김진수(1978년생)는 현역 대위로 재직 중이고, 월계 이삼성(1950년생)은 예비역 상사

하였다.

로, 박종관(1970년생)은 현역 상사로 재직 중이다

등은 고창교육청과 초등학교에 근무하였다. 현재 장두 김경숙(1960년생)은 대산초등학교

7) 장두리 역대 이장 (3) 장두리의 행정공무원들 김영대(金永大, 1933년생)는 고창군청 계장과 공음과 고수의 부면장을 역임하였고, 김정수 (1961년생)는 생)은

고수부면장으로 있다가 현재 흥덕 부면장으로 재직 중이다. 월계 김유현(1935년

대산 산업계장을 역임하였고, 김영조(1935년생)는 고창군청에 근무하였다. 현재 장두의

김정수(1963년생)는 고창군청 계장으로, 오산의 양제범(1966년생)·김기철(1977년생)·김동명(1984 년생),

월계 이재열(1971년생) 등은 군청에, 운월 김은중(1986년생)은 공음면사무소에서 재직 중

참사제도는 행정리별로 두었던 이장을 법정리에 한 명 두는 제도이다. 각 행정리마다 있던 이장 수를 줄이고 대신 법정리에 한 명의 참사라는 이장을 두어 월급을 조금 더 올리고 법정 리의 마을 업무를 모두 처리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1965년 처음 시행되었고, 1969 년에 폐지되었다. 장두리의 각 행정리의 연도별 이장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장두

오산

월계

1951.1.18. 양동석

1951.1.18. 박병엽

1952.10.13. 김영학

1951.6.30. 박석규

1960.3.1. 김영만

1952.10.13. 박원휴

(4) 장두리의 경찰공무원들

1961.8.9. 김택석

1953.11.10. 박병규

월계 출신으로 김영창(1942년생)은 완도경찰서(경위) 경무계장을 거쳐 정읍 산외파출소장을

1963.8.1. 김영덕

1954.11.30. 박병엽

역임하였다. 박이규(1940년생)는 고창경찰서(경사)에 근무하다가 무장파출소장을 지냈다. 그 외

1964.7.3. 김유현

1960.5.25. 박병호

경장 이의근(1953년생), 경사 이정환(1962년생), 경위 이동환(1963년생) 등은 현재 서울경찰청에

1965.4.5. (참사)서성수

1961.8.9. 박원휴

1965.7.1. (참사)김영후

1963.7.1. 박종휴

1966.3.1. (참사)김유현

1965.4.3. 박병호

1967.4.1. (참사)김영후

1967.12.9. 박원휴

1968.4.1. (참사)김유현

1972.1.1. 김유현

이다.

재직 중이다. 장두 김강만(1955년생)은 서울 서초동 중앙법원에, 김주연(1969년생)은 검찰사무직 으로 근무하고 있다

(5) 월계의 한전 근무자들

1969.4.1. 김유현

1972.1.1. 양재해

1973.1.1. 이수성

박일규(1937년생)는 한전 고창지점장과 전북도본부 영업과장, 김영원(1943년생)은 한전 광주전

1971.4.10. 박원휴

1974.1.1. 김홍재

1974.1.1. 김영중

력관리처 변전부 과장, 김영중(1949년생)은 한전 북광주전력소노조위원장과 전력관리처 송전부

1972.1.1. 김영만

1974.9.1. 양재해

1975.1.1. 이화영

정비실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박병휘(1950년생)는 한전 신광주전력소에서 근무한 바 있다. 김춘

1973.7.1. 김인술

1976.2.1. 오은기

1976.1.4. 박병곤

수(1958년생)는 고창한전에 근무하고 있고, 김미향(1972년생)도 고창한전에서 근무하였다.

1977.3.1. 김흥석

1978.3.1. 양재해

1986.1.1. 박태규

070

고창의 마을 제4집…071


장두

오산

월계

1980.1.1. 김영렬

1979.1.1. 양중현

1988.1.1. 이수성

1984.1.1. 김인술

1982.1.1. 정일남

1990.1.1. 김영곤

김창수(장두 토박이)

1990.1.1. 김춘경

1984.1.1. 김재남

1994.1.1. 강원주

김종현(월계 토박이)

1994.1.1. 김점동

1989.1.1. 정일묵

1996.1.1. 박병곤

천양기(고수면 부면장)

2007.1.1. 김원경

1990.1.1. 김재남

2006.1.1. 김영달

2008.1.1. 김영일

1999.1.1. 김재훈

2012.1.1. 박생규

2010.1.1. 김춘경

2006.1.1. 박성무

2012.1.1. 김영관

2010.1.1. 김순기

도움 주신 분

참고문헌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2009. 『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 고창문화연구회, 2012.

8) 장두리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장두리의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 원광대학교, 2005.

장두

오산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월계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1981

김인술

권영녀

양재해

김경례

김영구

하옥순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1982

김인술

권영녀

양재해

김경례

김영구

하옥순

1983

김영만

권영녀

양재해

김경례

김영구

하옥순

『광산김씨전리판서공파보』, 회상사, 1993.

1984

김영만

권영녀

양재해

김경례

김영래

하옥순

『牟陽城의 얼』, 고창군, 2009.

1985

김영만

권영녀

양재해

김경례

김영래

하옥순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1987

김영만

권영녀

양재해

김경례

김영후

박영희

『한국의 언어 민속지 전라남북도 편』, 왕한석,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1988

김영만

권영녀

양재해

조영숙

김영후

박영희

1989

김영만

권영녀

양재해

이영순

김영후

박영희

1990

김인술

이효숙

양재해

이영순

박생규

박영희

『동아일보』, 1921. 12.30. 『연합뉴스』, 2011.08.27.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1991

김인술

이효숙

양재해

이영순

박생규

박영희

1992

김인술

이효숙

양재해

정두례

이상일

박영희

1994

김인술

이효숙

김홍재

정두례

이상일

김순자

1996

김인술

이효숙

김홍재

정두례

이상일

김순자

http://gochang.grandculture.net/Contents

1998

김인술

이효숙

김홍재

정두례

이상일

김순자

http://www.sjbnews.com/news

2002

김인술

이효숙

김홍재

정두례

이상일

김순자

2003

김인술

이효숙

김홍재

정두례

이상일

김순자

2004

김인술

김재숙

류광석

정두례

이상일

김순자

2006

김인술

김재숙

류광석

이현님

이홍규

김순자

2008

김인술

김재숙

류광석

이현님

박수용

김순자

2009

김인술

김재숙

류광석

이현님

박수용

김순자

2010

김인술

김재숙

서치호

이현님

이규봉

최남순

2011

김인술

김재숙

서치호

이현님

이규봉

최남순

2012

김영봉

이현례

서치호

이현님

박광수

최남순

072

『경인일보』, 2011,08.02.

고창의 마을 제4집…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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