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와 열, 전설이 있는 마을, 군유리 정재윤
공음면 군유리 두암리
1. 마을의 위치와 명칭 유래 구암리
신대리
군유리는 공음면 면소재지를 기준으로 볼 때는 공음면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군유리 석교리 장곡리
마을을 중심에 두고 보면, 북쪽은 상하면(上下面), 동쪽은 무장면(茂長面), 남쪽은 대산면(大山
용수리 선동리
칠암리
건동리
面)
그리고 서쪽으로는 전라남도 영광군과 인접해 있다.
공음면 군유리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로비리국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국의 상로현에 속했는데, 통일신라 때인 경덕왕16년(757)에 개명된 장사현의 속지였다. 고려시대를
예전리 군유리 덕암리
거쳐 조선조 태종16년(1416)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으나, 그 후 태종17년에 서해 연변의 방위 체제 구축을 위해 무송현과 장사현이 무장현으로 통합될 때, 무장현 와공면(瓦孔面)지역으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본래 무장군 공음면의 용산리(龍山里)와 응암리(鷹岩里)가 병합되어 군유리(群儒里)가 되었다. 마을의 유래를 마을 원로(정강열 씨 등)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추론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1400년)에 달성배씨(達成裵氏)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 고 한다. 지금은 달성배씨가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그 후 1580년대에 진주정씨(晉州鄭氏)가 입촌하여 자손이 번창하니 자연히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지형상으로 볼 때 군유리는 전체적으로 평지이며 마을 앞 중앙에 얕은 산의 형태인 도림봉 (道林峰, 돌音峰)이
있고 남서쪽에는 대산천이 흐르고 북서쪽으로는 선동천이 흐른다. 수리 관
개시설로는 해대마을 서쪽에 비석제(碑石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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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075
마을은 상군(上群), 하군(下群), 비석(碑 石)의
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정재정 씨가 운영
세 마을로 행정 분리되어 있고 각
하는 가게 앞 길 건너편에 담쪽으로 세워져 있다.
마을 이장(里長)이 마을 일을 돌보고 있
옛날에 인근 각처에서 도봉사를 찾는 사람들
다. 하지만 법정리는 군유리(群儒里)로
을 위해 설치됐는데, 도봉사 시제 때는 많은 사
되어 있다.
람들이 이것을 보고 찾아올 수 있어 편리했다고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마을이름을 살
한다. 또 지나가는 손님들도 이 표지석을 보고
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불렸던
약 200m 정도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 도봉
이름은, 마을 앞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사 참배도 한다고 한다.
많이 있어서 버드나무 많은 마을이라는
도봉사 입구 표지석
군유마을 표지석
뜻에서 ‘유촌(柳村)’이라 불렸다. 그런데
2) 하마비(下馬碑)
특이하게도 다른 지역보다도 군유리 마을에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버드나무 유(柳)’자
공음면 군유리(상군)에 있는 하마비는 조선시
대신에 ‘선비 유(儒)’자를 써 선비들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유촌(儒村)’이라고 부르게 되
대의 비석으로, 도봉사 앞을 지나갈 때는 누구를
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선비 유(儒)’자에 ‘마을 촌(村)’자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막론하고 말을 탄 사람은 말에서 내리도록 표시
다시 ‘마을 촌(村)’자 대신에 ‘고을 동(洞)’자를 써서 ‘선비들이 많은 고을’, 유동(儒洞)으로 부르
한 비(碑)이다. 도봉사 주차장 한 켠에 세워져 있
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유리 마을에서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면 유동이라는 마을 이름
다. 원래 이 자리에 군유리 마을사람들 모두가 사
을 따서 새로 시집온 아낙네를 유동댁(儒洞宅, 남자는 유동양반 - 필자의 고모가 평산으로 시집을 갔는
용하는 큰 샘(우물)이 있어서, 도봉사를 찾는 사
데 마을에서 ‘유동댁’이라고 불렀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에는 선비가 많다는 뜻을 더
람들이 말을 타고 가다가 이 하마비 앞에서 내려
강하게 나타내고자 선비들이 무리를 지어 다닐 정도로 많다고 하여 ‘무리 군(群)’자를 써서
도봉사로 들어가곤 했다고 한다. 비신(碑身)은 네
군유리(群儒里)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확실하게 군유리(群儒里)로 불리다가 지금까지 그 이
모진 모양으로 크기는 70×50×50cm 정도이고,
름으로 불려오고 있다. 그런데 속설에 의하면 마을의 모습이 학(鶴) 형국이어서 학이 선비를
전면에 ‘하마(下馬)’라고 새겨져 있다.
하마비
상징하기도 한 탓에 군학(群鶴)을 군유(群儒)로 불렀다고 한다(『고창의 마을유래』, p.107). 지금까지의 마을이름을 정리해 보면, 버드나무가 많다는 뜻에서 ‘유촌(柳村)’이 선비가 많다
3) 도봉사
는 ‘유촌(儒村)’으로 변했다가 ‘유동(儒洞)’으로 변하고, 이 유동이라는 이름에서 선비들이 무리
도봉사는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 상군마을에 있
를 지어 다닐 정도로 많다는 의미의 ‘군유(群儒)’로 바뀌어서 법정리인 군유리(群儒里)로 현재
는 진주정씨 사우(祠宇)로, 진주정씨 종모재(終慕
까지 사용되고 있다(정강열 씨).
齋)
정희주(鄭熙周)를 주벽으로 야은(野隱) 정민상
(鄭敏相),
2. 진주정씨(晉州鄭氏) 사우(祠宇) 도봉사
송은(松隱) 정유상(鄭有相), 항사재(恒思齋)
정취규(鄭聚奎)를 모시고 있다.
도봉사 현판
도봉사 표지석을 따라 마을 안 길로 약 100m 정도 오면 외삼문이 있고, 이 문 안으로 들어
1) 도봉사 입구 표지석
서면 종모재(終慕齋) 강당(講堂)이 있다. 마당에는 단기 4339년(2006년) 4월에 세운 용두석에 거
군유리 마을(상군) 입구에 도봉사(道峯祠)를 안내하는 도봉사 입구 표지석이 있다. 공음면에
북좌대를 한 도봉사묘정비(道峯祠廟庭碑)가 있고 종모재 강당 뒤로 내삼문을 들어서면 사우인
서 대산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도봉사 입구 표지석은 가로 50cm 세로(높이) 140cm 크기
도봉사(道峯祠)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전학후조(前學後廟)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강학(講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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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077
4) 배향사위(配享四位)의 효도 이야기 (1) 종모재 정희주(1633∼1704) 정희주(鄭熙周)는 조선시대 수군절제사 종순(宗 舜)의
현손(玄孫) 정기현(鄭期顯)의 아들로 1633년
(인조11)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태어났다. 호
는 종모재(終慕齋), 조선 중기의 효자이다. 종모재 희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모님의 사랑을 독
종모재 현판
차지하였으며 글 읽기를 매우 좋아하여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통달하고, 평생토록 배움을 몸소 덕행으로 실천하여 조선 중기의 효자로 소문이 났다. 종모재 희주의 효성은 남달랐다. 도봉사 외삼문
도봉사 종모재
부모님이 병석에 누워 거동이 불편해 대소변을 가리기 어려웠을 때도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부모님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깊은 산골에 있는 온갖 약초를 캐러 갔다가 뱀에 물려 여러 날 고생을 하기도 했다. 또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에 부모님이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눈밭 에 꿩을 잡으러 산에 갈 수도 없고 해서 한탄만 하고 있는데 석양에 어디선가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부모님께 꿩고기를 해드렸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덕분에 하늘이 도 와 준 것이다. 또한 부모님의 대소변을 손수 맛을 보며 임종이 다가옴을 예견하고 밤낮으로 하늘에 빌 어 부모님의 목숨을 연명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부모님의 목숨이 위급해지자 사람의 생피 를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손가락을 째서 피를 마시게 하는 열지주혈(裂指 注血)로 인근 고을에 소문이 났었다. 이처럼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하늘을 감복하게
도봉사 내삼문
도봉사 전경
하여 아버지는 16년을, 어머니는 6일을 연명케 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살아 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함을 후회하며 3년 동안이나 된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고 살았다. 그리
는 곳과 사묘(祠廟)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도봉사 우측(동쪽)에는 ‘효자증동몽교관정희 주지려(孝子贈童蒙敎官鄭熙周之閭)’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도봉사는 조선시대 순조27년(1827)에 창건되어 그 후 잘 보존되어 오다가 1868년에 철폐되 었다가 다시 1929년에 재건립되었다(『모양성의 얼』, p.510). 도봉사의 건물형태는 3칸 건물로 팔 작지붕에 홑처마로, 내삼문 1동, 강당 4칸, 외삼문 1동, 그리고 마당에 있는 묘정비 옆 창고 1 동이 있다. 2012년 현재 도봉사 관리는 진주정씨 종모재공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종모재 정희주의 ‘효자증동몽교관정희주지려’의 현판은 조선시대 고종6년(1869)에 항사재 정취규가 임금님께 찾아가 알현하지 못하고, 대궐 밖에서 정려(旌閭)를 내려 달라고 글을 열 번이나 올려서 마침내 명정(命旌, 정려의 명)한 것이다. 그래서 1870년 3월에 정려각이 세워졌으 며 제사일은 음력 8월 20일 완정일로 현재 향사하고 있다. 078
종모재 정희주 정려
정희주 정려 현판
고창의 마을 제4집…079
고 부모님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엄동설한을 다 이겨내며 조석으로 호곡하면서 시묘살이를
초막을 짓고 6년을 시묘살이 하였다. 형 민상과 함께 주위 친척과 마을 어른들이 과거에 응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3년 동안이나 시묘살이 할 때 천지가 감동했는지 아니면 하늘
시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이 부모님을 위한 길이라고 권장을 했지만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
이 도와주었는지 밤에는 호랑이가 찾아와 초막 옆에서 호위를 해 주었고 여름철에 큰 가뭄이
고 평생을 독서로 자락(自樂)하며 여생을 보냈다.
들 때에도 샘이 저절로 솟아나 맑고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부모님 묘소 주위에 있는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성하자 내 효성이 부족해 저런 미물들이 찾아온다고 가슴
(4) 항사재 정취규(1782∼1834)
을 치며 통곡하자 날아가는 까마귀들이 벌레를 다 잡아먹어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고 한
정취규(鄭聚奎)는 조선 중기의 효자로서 자는 내겸(乃謙)이요 호는 항사재(恒思齋)로 민상의
다(『전북향교원자대관』, p.360~362).
증손(曾孫)으로 정조6년(1782)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출생하였다. 항사재는 어려서부터 효 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 14세 때 어머니의 병세가 위급하자, 어린 마
(2) 야은 정민상(1661∼1720)
음에도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면 어머님의 병환이 나을 거라는 믿음으로 조석으로 하늘에
정민상(鄭敏相)의 호는 야은(野隱)이요, 자는 훈거(燻擧)이며 종모재 정희주의 아들로 조선 현
지극정성으로 빌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손가락을 째고 피를 흘려 어머니의 입에 넣어 여러 날
종2년(1661)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출생했다. 옛말에 왕대밭에서 왕대가 난다는 말처럼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효행을 보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시
대효자 가문에 효자가 생겨난 것이다. 정민상은 가훈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
묘살이를 하였으며 선세(先世)의 망북헌(望北軒) 정흘(鄭忔), 경모재(敬慕齋) 정기현(鄭基顯), 종모
하여 학문이 깊고 아우 송은(松隱) 정유상과 함께 행실이 바르고 착하며 마을의 대소사 어려
재 정희주, 야은 정민상 등 네 사람의 충효에 대한 임금님의 정려가 내려지지 않음을 통한해
운 일에 항상 솔선수범으로 덕행을 실천한 효자였다.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백수(白首)의 몸
하며 임금님 대궐 문 밖에 엎드려 글을 올리기를 열 번을 하였다. 임금님이 마침내 감동하여
으로 조부모님 묘에서 시묘살이 하는 모습을 보고 차마 아들로서 날씨가 추워도 온돌방에서
정문(旌門)을 내려주어 인근 고을에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항사재 정취규는 어려서부터 가
거쳐할 수가 없다고 하여 뒷산 언덕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
훈을 이어받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고 항상 언행이 독실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살아 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함을 후회하며 전후 6년간이나 죽 만 먹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인 종모재 정희주는 하늘이 내려준 대효(大孝)인데도 임
그리고 홍경래난이 일어났을 때 우국충정의 애국심으로 의병을 모아 난리를 평정하고 귀향 하여 부모님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금님으로부터 정려의 은전을 받지 못함을 한탄하며 살았고 동생 정유상과 함께 형제가 과거 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사모곡(思母曲)을 지어 부르며 슬픔을 달
5) 도봉사 묘정비
래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평생 효성과 덕행실천의 선비로 추앙을 받았다. 만년에는 도림봉(道
도봉사 앞 마당 동쪽으로 2006년 4월에
林峯)에 초당을
짓고 거문고 악기에 시를 노래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
다(『전북향교원자대관』, p.360~362).
세워진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후손들이 선조 들의 효행과 업적을 기리도록 종중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후손들이
(3) 송은 정유상(1670∼1730)
읽어 볼 수 있도록 원문을 한글로 쉽게 옮겨
정유상(鄭有相)은 조선 중기의 효자로 자는 원거(遠擧)요, 호는 송은(松隱)이다. 효자 종모재
본다.
정희주의 아들로 야은 정민상과 형제지간이며 조선 현종11년(1670)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 서 출생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는데도 부모님 봉양과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돈독하였
이곳 군유리에 도봉 있어 도봉사가 세워지니 종모
으며 항상 형인 민상의 뜻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예(禮)에 조금도 어그러짐
재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아드님 야은 선생과 송은
이 없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인 종모재 정희주가 하늘이 내려준 대효인데도 정려가
선생, 야은선생의 현손 항사재 선생을 배향한 사우
내려지지 않음을 평생의 한(恨)으로 여기며 살았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묘소 옆에 조그만
(祠宇)이다. 향선생을 추모하여 조두(俎豆) 받들어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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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사 묘정비
고창의 마을 제4집…081
사(享祀)함은 고예(古禮)라. 본사는 순조 27년 정해(丁亥)에 창건되었다가 고종 무진(戊辰)에 조령으로 대동훼
선생의호 종모재는 사우간의 경칭이요
철(大同毁撤)되었다. 지난 계사(癸巳)에 유론(儒論)이 재발(齋發)하여 다시 세우게 되어 야은, 송은, 항사재, 이
학문깊고 행의높아 향현사에 존향했네
렇게 세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삼가 네[四] 선생의 행적을 살피면, 종모재 선생의 휘(諱)는 희주요 자는 허여
야은송은 두아드님 아버님을 본받아서
(嘷汝)이니 진주 망족(望族)으로 충장공 휘황의 십일세 손이요, 임란에 창의한 망북헌 휘 흘(忔)의 손이며 창의
사생사사 정성다해 오치의효 다하였고
(倡義)사경(士敬) 외재 휘 기현(期顯)의 아드님이다. 충효가에 수미한 자질을 타고나 칠팔 세에 효경, 소학을 배
여력으로 학문하여 호남유종 되셨으니
워 자신의 일처럼 외웠고 사친에 성경을 다하여 봉친에 힘써 감지(甘旨)받들고 병화에 상분축천(嘗糞祝天)했
감진어사 천을하고 수령들은 존문했네
으며 운명함에 이르러서는 단지(斷指)를 하여 소생케 했으며 아버님은 16년 연수하고 어머님은 6일 연명하게
야은현손 항사재는 충효가에 독생하며
했다. 상을 당해서는 전후 6년을 시묘했는데 범이 와서 호위하고 벼락쳐서 묘 곁에 원천수가 솟았으며 송충을
효를하고 충을하여 위선사에 성근하여
오작이 쪼아 없앴다. 탈상하고는 애통사(哀痛詞)를 지어 종신토록 유모하면서 공명을 멀리하고 성리학에 잠
선덕들쳐 복궐하고 행록모아 상재하니
심하니 자사(刺使)는 그 행의를 천하고 수의(繡衣)는 계달(啓達)하여 효종 때 복호(復戶)가 내렸으나 사양했으
재재다사 송모하여 조두의예 올린다네
니 사실이 예부와 여람에 올랐다. 야은 선생의 휘는 민상이요, 자는 훈거(燻擧)이다. 아우 송은 선생과 함께 지
(咸陽 朴東洙 謹 撰, 同宗 定黙 謹書, 齋長 朴東爀, 都有司 在元 檀紀 4339년 丙戌 四月 日)
효로 사친하여 오치의 정성을 다했는데 아버님이 출천한 효로 몽정(蒙旌) 못함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 사친곡
을 지어 사모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위연(嶎然)히 호남의 유종이 되었다. 숙종 때 본도 감진어사 홍공석보가
6) 진주정씨 삼강각(三綱閣)
선생의 행의를 듣고 찾아와 크게 경탄하여 형제의 효를 특천하여 복호를 내렸으나 영문에 글을 올려 아버님의
진주정씨 삼강각은 1958년에 건립되었으며 공
의행으로 대신할 것을 간청하고 형제가 상경하여 진청하려다가 중도에 홀연 돌아가시니 사우가 개탄했다. 송
음면 소재지에서 대산 방면으로 약 4km 가다보
은 선생의 휘는 유상이요, 자는 원거이다. 효우가에 선열이어 여묘 정절이 아버님과 한결 같았고 학문 깊고 지
면 군유리 상군마을 도로변 비석 중화길 1호에
절 높아 호유가 경망하여 송은 처사라 칭했으나 임창계기 송암과 의례를 문답하고 권공이 진안공 세징이 본
자리 잡고 있으며 진주정씨 유동파 종중에서 선
졸로 와서 포의교를 했으며 도백이공광덕은 기절과 문장으로 세상의 사표가 된다 했으니 이 사실이 <예조여
조들의 충(忠), 효(孝), 열(烈)의 열세 사람을 기리는
지충효록>에 실렸다. 항사재 선생의 휘는 취규요, 자는 내겸이다. 효를 타고나 친환에 축천혈지하고 거상에 철
정문으로 현재 진주정씨 유동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열세 사람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
죽(啜粥)여묘했으며 위선에 특성을 보여 선세 의적(懿蹟)이 혹 묻힐세라 부궐복주하기 십차에 마침내 조두(俎
삼강각 현판
다. 충에는 정흘(鄭忔)이요, 효에는 정근일(鄭根日)과 정근수(鄭根琇)이며, 효부(孝婦)에는 천안전
豆)의 은전을 무릅썼다. 또한 후생 계도를 사명으로 과정을 엄히 세워 소학을 우선하고 사서를 뒤로하여 수기
씨(天安全氏)와 신평송씨(新平宋氏), 그리고 열부(烈婦)에는 청송심씨(靑松沈氏)와 여주이씨(驪州李
치인의 도와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공이 모두 여기 있다 하였다. 정조가 승하하매 설위하여 북망통곡하고 홍
氏),
경래난에 창의 부난했다. 삼가 살피어 이곳 군유는 네 선생이 생장한 곳으로 군유가 배출하여 지칭한 동명이
다. 효열(孝烈)에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장흥고씨(長興高氏) 두 분으로, 모두 열세 분의 충, 효, 열
라 하며 동전에 소도 있어 관죽전이고 십리장천에 관해전(官蟹箭)있어 예조에서 허급했으니 이는 고례에 없는
을 기리고 있다. 간략하게 이들이 살아생전에 국가와 부모님께 행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이수였다. 무릇 효는 백행의 근원이라 미루어 사군하면 충이요 수신하면 현이며 육영하면 사표가 되니 그래서
같다.
창녕성씨(昌寧成氏), 함평이씨(咸平李氏), 능성구씨(綾城具氏), 청도김씨(淸道金氏) 등 여섯 분이
지행 있으면 조가에서 포양(褒揚)하고 사림은 존향하는데 향사만이 능사리요 선현의 의행(懿行)을 알고 본받 아야 하기에 국한혼용으로 묘정비 세우는 소이가 여기 있으니 본사에 출입하는 후생들은 마음 경건히 살피어
(1) 충
퇴패한 인기(人記)를 부식(扶植)하기 기망하면서 삼가 가사(歌詞)를 더하여 명(銘)에 가름한다.
정흘은 조선시대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대 창의하여 도백이 성을 맡기자 목숨이 다할 때까 지 전력을 다해 끝까지 성을 지켜냈다.
진주정씨 충장공파 천출한호 계시어서
(2) 효
부모섬겨 성효하여 종신토록 사모하니
정근일의 호는 송포(松圃)로서 부모님 전후상에 6년을 여묘하는 효행을 보였고 정근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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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083
호가 광재(廣齋)로서 생시에 온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셨으며 종신토록 사모하는 효로 그
(鄭根碩)의
처로 남편이 병석에 오래도록 누워 있는데 남편의 목숨이 갑자기 위급해지자 손가
이름이 주변 고을까지 널리 알려졌다.
락을 째서 피를 입에 흘려주어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능성구씨는 정근철(鄭根哲)의 처로,
(3) 효부
남편의 병을 낫게 하려고 자기의 허벅지의 살을 칼로 베어 구환하고 또한 시아버지 병에 열
천안전씨는 정의원(鄭義源)의 처로 영조4년(1728) 이인좌의 난에 병화의 와중에 시아버지
지주혈(裂指注血) 하였다. 그리고 청도김씨는 정근수(鄭根琇)의 처로 남편의 병을 간호하는 데
를 업고 피난하여 생명을 보존케 하는 효부였고, 신평송씨는 정동찬(鄭東瓚)의 처로 영조4년
10년을 대소변을 맛보아 가며 병세를 가늠하였으며 남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밤낮으로
(1728) 이인좌의 난에 시조부를 업고
하늘에 빌었다.
피난 다니다가 불행하게도 함께 세상을 떠났다.
(4) 열부
(5) 효열
청송심씨는 정희철(鄭曦哲)의 처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리워하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김해김씨는 정계두(鄭桂斗)의 처로 숙부인(淑夫人)으로 불렸으며 부모 봉양에 극진하였다. 상
남편 곁에 가서 함께 있고 싶어 물에 빠져 세상을 하종했다. 여주이씨는 정계천(鄭桂天)의 처
을 당하여서는 예에 어긋남이 없이 하여 고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장흥고씨는 정금묵(鄭
로 정부인(貞夫人)으로 불렸으며 남편을 항상 예(禮)로 도와 곤절(壼節)의 의표가 되게 하여 드
디어 남편이 이조참판에 오르도록 하였다. 창녕성씨는 정낙원(鄭洛源)의 처로 남편을 하늘보
金黙)의
처로 남편이 수년 동안 병석에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병을 간호하였고 남편의 병을
낫게 하고자 열지주혈(裂指注血)하여 남편의 목숨을 수일 동안 연명하는 효열을 하였다.
다 더 높게 항상 모시고 살았으며 남편이 병이 들자 남편의 병을 낫게 하고 싶은 애정으로 손가락을 째고 피를 내어 남편의 입에 흘려주어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고, 함평이씨는 정근석
7) 진주정씨 열행비 군유리 마을 입구 도로변에 진주정씨 열행비(烈行碑)가 있 다. 열행비의 후손은 지금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정운 재 씨이다. 열행비는 정운재 씨의 고조모(高祖母)인 부안김씨 (扶安金氏)와
증조모(曾祖母)인 영광정씨(靈光丁氏) 두 분의 열
행을 기리고, 이를 후손에게 알려 만인의 귀감이 되게 하고 자 정운재 씨 집안에서 세웠다. 부안김씨는 정종암(鄭鍾巖, 30世孫)의 처로, 남편이 괴질병 에 걸리자 온갖 정성으로 병간호를 하고, 남편의 목숨이 위 급해지자 자기의 손가락을 칼로 째서 남편의 입속에 핏방울 을 넣어 주어 남편의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열행을 했다. 영
진주정씨 열행비
광정씨는 정용수(鄭龍洙, 31世孫, 정수중의 5대손)의 처로 남편이 죽고 임신한 채로 친정에 갔다가, ▲삼강각
친정부모의 간절한 재혼요구를 강력히 뿌리치고 밤에 몰래 칼을 품은 듯이 독한 마음으로
삼강각 망북헌 현판▶
시댁에 돌아와 임신했던 아이를 낳아 잘 길렀다고 한다. 비문은 “恭人扶安金氏 烈行碑, 孺人靈光丁氏烈行碑”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강각 안에 있는 효열비
8) 진주정씨 유동파(儒洞派) 종친회(宗親會) 연혁 2001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회장제 창립 삼강각 효열비 현판
084
유동파 종중 종약 제정 공포 시행
고창의 마을 제4집…085
유동파 종중 제1대 회장 정기동 님 선출(재임기간 : 2001. 1. 20~2003. 1. 19)
를 계승하게 되었다.
2003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2대 회장 정재원 님 선출(재임기간 : 2003. 1. 20~2005. 1. 19)
그녀가 하는 제의는 가내의 제액초복(擠厄招福)을 위한 재수(財數)굿인 성주굿과 망인(亡人)의
2005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3대 회장 정재원 님 연임(재임기간 : 2005. 1. 20~2007. 1. 19)
영혼을 락지(樂地)로 천도시켜 주는 씨금굿(씻김굿), 그리고 선주(船主)가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2006년 4월
기원하는 연신굿을 하였다. 배성녀는 정태임 무계 가정으로 출가하여 칠 남매를 낳아 그 중
도봉사 내 묘정비 건립
2007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4대 회장 정재백 님 선출(재임기간 : 2007. 1. 20~2009. 1. 19)
에서 장자 정근석과, 차자 정년근, 말자 정정일이 정씨 가정의 단골 무계를 계승하고 딸들도
2007년 6월
도봉사내 강당 및 문간 지붕개량 실시
무계혼으로 출가하였다. 배씨의 당골 무계에서는 배성녀의 조부인 배의근이 명창 광대였으며
2008년 6월
도봉사 제실 지붕 보수 및 용왕제 지붕기와 보수공사
그 밑으로 그의 아버지인 배인석 역시 명창 광대로 전북 일원에서 배광대(裵廣大)하면 모르는
2009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5대 회장 정일송 님 선출(재임기간 : 2009. 1. 20~2011. 1. 19) 2009년 3월
송은(유상) 묘역 정비
2009년 8월
용왕재 표지석 설치 및 도봉사 주차장 설치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고창의 전통과 생활사』, p.63). 배성녀가 소유한 단골판은 군유리 200호, 예전부락 200호, 신평부락 60호, 응암부락 20호, 율천부락 20호 모두 500호 정도였다. 하지만 씻김굿 한번에 보통 10만원 정도인데, 제수를
2011년 1월 20일 유동파 종중 제6대 회장 정재인 님 선출(재임기간 : 2011. 1. 20~2013. 1. 19)
장만하고 피리, 젓대, 해금 등의 고인들 일당을 주고 나면 당골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아주 적
2011년 10월
었다. 그래도 단골판에서 봄가을로 거둬들이는 곡식이 있었는데, 그녀가 관장하던 마을의 가
용왕재 4대 봉산 묘역 주변정비 및 잔디작업 실시
정마다 1년간 신사(神事)를 돌봐주는 대가였다. 그래서 옛날에는 중류급 이상의 부자 부럽지
3. 전통무가(傳統巫歌)와 시조창(時調唱) 명인(名人)
않게 살았다고 한다. 또 군유리에서는 아낙네들이 아기를 낳을 때면 반드시 당골에미가 와서 안전 분만을 기원
1) 전통무가 당골에미 배성녀
하고 산파역할도 해 주었는데, 아기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집에서는 당골에미에게 물어
군유리에는 전통무가 사설(辭說)에 이름난 당골에미(당골, 단골, 무당), 배성녀(裵成女)가 있었다.
보면 기억력이 아주 좋아서 잘 가르쳐 주기도 했다. 필자의 경우도 조실부모하여 생일을 알
출생한 곳은 고창군 해리면 금평리이며 조상 대대로 세습되어 온 배씨 무계(巫系) 가정에서
수 없었는데 큰 고모댁에서 당골에미한테 물어서 필자의 생일을 알아냈다고 한다.
태어나 해리의 정씨(鄭氏) 무계로 출가한 세습 무로서, 전형적인 당골에미였다. 배성녀는 고창
필자가 1974년도에 공음초등학교 사택에서 살고 있었을 때 배성녀의 굿을 본 기억이 있다.
지역의 전통적인 제의(祭儀)에 밝고 무가사설(巫歌辭說)에 정통한, 고창의 마지막 정통 세습무
어른들이 6・25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는 억울하게 죽은 그 영혼들을 달래주어 극락세계
가 당골이었다.
로 가는 굿을 해 주어야 한다고 해서 배성녀 당골에미를 초청하고 거액을 들여서 굿을 했었
배성녀는 149cm 정도의 작은 키에 얼굴이 좁고 이마가 잘룩졌으며 말이 많은 편이었다. 교
다. 그 때 배성녀가 신(神)내림을 받아 방바닥에서 공중으로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나이가 든
육수준은 무학(無學)으로 한글을 터득한 정도였다. 단골인 어머니 임(任)씨와 아버지 배인석(裵
할머니의 몸으로 평상시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던 사람이 신을 받은 순간만은 상상을 초
仁石)
사이에서 태어난 무남독녀로 그의 어머니가 19세 때 낳았다. 가족이 장수한 집안으로
월한 인간이 되어 굿을 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머니는 89세, 아버지는 85세에 사망하였다. 배성녀는 12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무가(巫歌)를 배웠는데, 무가사설이 적힌 책을 보고 외웠고, 매우 총명해서 한 번 배우면 하룻밤에 다 외웠
2) 마을 민요(지경 다지는 민요)
다고 한다. 배성녀는 17세 때 약혼하여 이듬해인 18세 때 음력 4월 29일 날 17세인 정태임(鄭 泰任)과
결혼하였다. 남편 정씨도 세습무계의 북을 치는 고인(鼓人)이었다. 그녀는 시집간 뒤에
어럴럴 상사뒤야 높이 들어서 쾅쾅 놓세
음력 정월 15일부터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굿을 하러 다녔는데,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시백
어럴럴 상사뒤야 여기도 다구고 저기도 다구고
모를 따라다니며 굿을 배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배성녀는 시집가기 전에 그의 어머니로부
어럴럴 상사뒤야 고루고루 잘 다궈 보세
터 무가사설을 배우고 출가하여서는 시백모에게서 굿의 의례(儀禮)를 배워 정씨가 단골 무계
어럴럴 상사뒤야 이 집터를 잘 다궈 가지고
086
고창의 마을 제4집…087
어럴럴 상사뒤야 초가삼간의 집을 잘 지어서
경창대회 심사위원과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부터는 교도, 사범과 심사자격 위
어럴럴 상사뒤야 부귀영화를 이룰 적에
촉 중앙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전국대회인 임방울, 대사습, 종로국악제 심사위원장 등 350여
어럴럴 상사뒤야 아들을 낳으면 효자를 낳고
회의 전국대회 및 지역 경창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시조창의 저변 확대를 위
어럴럴 상사뒤야 딸을 낳으면 열녀가 되고
하여, 2007년도에는 고창고등학교의 요청으로 방과후 활동 시간에 시조반을 지도하여 청소
어럴럴 상사뒤야 마를 키우면 용천마가 되고
년들로 하여금 시조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청소년 시조 경창대회에 출전시켜 입상하게 하
어럴럴 상사뒤야 닭을 키우면 봉황이 되네
는 등 우리고장의 시조창 저변 확대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군유리 이봉수 씨, 남, 60세.『고창의 전통과 생활사』, p.122)
전국적으로도 시조창 확대를 위해서 2006년에 CD와 테이프 1집과 2집을 각각 3000매씩 제작하여 전국에 무상으로 배포하여 임천 정재선 선생의 독특한 창법인 던음청(이중창과 겹소
3) 시조 명창 임천 정재선 선생
리)을
전국의 시조창 동호인들에게 홍보하여 지금 현재 경기, 충청, 호남, 경상, 제주 강원도에
군유리 마을에서 시조 인생으로 50여 년을 살
서까지 개인적으로 던음청 창법을 배우고 있다.
아가고 있는 시조 명창 임천(林泉) 정재선 선생
2009년 12월 6일자로 세계문화 예술대상 수상(시조분야)에 외통등록 27호로 등재되었으며
은, 고창시조협회 사범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하
전라북도 문화관광과에 인간문화재 시조 분야로 신청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임천 선생이
고 있는 이 시대 불멸의 가객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고장에서 인간문화재의 꿈을 이루고 우리나라 시조의 발전과 시조 저변 확대를 위해 꾸 준히 자기 연찬(硏鑽)과 시조 사범으로서 후진양성에 전력을 다하시길 바란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고창고등학교에 다닐 때라고 한다. 방학을 맞이하여 마을 강당에 심 부름을 갔다가 우연히 마을 유림들이 시조를
4. 마을의 전통 민속과 설화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시조 가락에 매료되어 그 때부터 시조에 관심을 갖고 마을 어른들로부 터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조창 발표회
1) 마을 당산제 군유리 마을에는 상군과 하군에 당산(堂山)이 있었다. 옛날의 신역(神域)이나 솟대와 같이 마
영무장 시조에 훌륭하신 분들 중 우리 고장의 이도삼, 김춘경, 고민순, 유연태 선생님들을 찾
을의 수호신으로 마을 뒷등에 당산수를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매년 정월에 온 부락민들이
아가 사사를 받았고, 시조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석암 정경태 선생을 만나 체
마을에 닥치는 돌림병 같은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다. 군유리 상군마
계적인 공부를 한 때로, 임천 정재선 선생은 지금도 석암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을 사람들은 할아버지 당산이 마을의 액살을 막고 맹수와 도적, 질병까지 막아 육축을 번성
고 한다.
케 하고 농작을 풍성하게 하여 마을의 안녕과 복록을 가져오게 한다고 강하게 믿었다. 하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시조에 대한
만 오랜 전통 속에서 삶의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는 민속신앙적 존재로 이어져 오다가 19세기
열정을 가지고 공부를 계속하여 왔으며 1975년도에는 전국시조경창대회에 출전하여 평시조
말 서구사상의 전래와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무속은 미신
와 사설시조부에서 1등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1989년 6월 22일에 대전광역시에서 주관한
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그 전통이 단절되고 말았다.
경창대회에 특부 1등상 수상, 1998년 9월 23일 전국 시조진흥원 주최 경창대회에서 명창부 1
당산나무에 지내는 당산제(堂山祭)인 부락제는 대개 음력 정월 보름에 지냈다. 당산제 지낼
등상 수상, 1999년 10월 1일 문화관광부 주최 경창대회에서 대상부 1등 수상, 2001년 8월 9
무렵에는 마을에 사람이나 가축이 죽거나, 출산이 있어도 부정하다고 하여 다음 달로 연기하
일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대상부에서 1등을 하여 국무총리 대상을 받았으며 개인적으로 시
기도 했다. 당산제의 경비는 고정적인 재원이 없어 정초에 걸립(乞粒)을 한다. 걸립을 하면, 마
조창 발표회를 금년까지 7회째 개최하여 우리나라 시조창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을 주민들이 농악을 구성하여 집집마다 방문하여 그 집의 액을 없애고 일 년 동안 운수대통
1976년부터 부안, 정읍, 고창, 영광 등지에서 지도연구를 시작하여 현재는 전국을 상대로
088
케 한다는 뜻으로 그 집의 부엌, 장광(장독대) 등 집안을 돌며 한바탕 굿을 친다. 그러면 집주 고창의 마을 제4집…089
인은 쌀이나 돈을 내놓는데, 이를 거두어 당
오고 있으며 마을 주민(나병채, 66세)의 말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온 이야기로 아기를
산제 경비로 쓴다. 당산제의 제주(祭主)와 제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와서 백일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아기를 낳는다는 소문이 멀리까지 퍼
수(祭需) 등을 주관하는 유사(有事)는 마을에
져서 정월 보름날 밤이면 미륵불상 앞에 촛불을 켜 놓고 소원성취 기원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서 제일 정결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일단 선
고 한다. 또 다른 마을에 돌림병이 돌 때면 이 미륵불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
정된 사람은 당산제가 있을 때까지 일정 기
면 돌림병이 이 마을에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여 오랫동안 마을의 수호신으로 보호해 왔다
간 부부간 동침을 해서도 안 되고, 매일 목
고 한다.
욕재계하며 한사코 몸의 정결성을 지녀야 한 다. 만일 부정한 일이 있으면 당신(堂神)의 노
3) 마을의 칠괴담(七怪談)
여움을 사 마을에 흉년과 재앙을 불러온다 고 믿었다.
군유리 마을은 1400년대 초에 달성배씨(達成裵氏)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당산제 나무
이어져 왔으니, 꽤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전해 오는 기이한
군유리 상군마을 뒷잔등에 할아버지 당산이 있고 하군마을 뒷등에 할머니 당산이 있는데,
일곱 개의 이야기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군유리 칠괴담(七怪談)’이라고 말한다. 그 괴담들
이는 남성과 여성의 음양을 병립하는 것이다. 여기에 제사를 지낼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남
을 열거해 보면 영군바위[領郡岩], 마동(馬洞), 주결(舟結), 돌음봉(突音峯), 말바위, 해대(海垈), 맥
녀별, 가족별로 일 년 신수의 대길(大吉), 대통(大通)을 비는 소지축원(燒紙祝願)도 했다. 또한 마
무덤 등에 얽힌 일곱 개의 전설이다. 이 전설을 마을 어른들의 증언을 토대로 간략하게 기술
을 집집마다 짚 다발을 거두어서 긴 줄다리기용 밧줄을 만들었다. 세 가닥씩 세 줄씩 아홉
해 본다(정강열 씨).
가닥의 줄로 만들어진 밧줄을, 낮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어깨에 메고 마을을 돌아다 니고 밤에는 남녀가 패를 갈라 농악놀이와 함께 줄다리기로써 승부를 가리는 중에 풍년을
(1) 영군바위 이야기
기원한다. 줄다리기에서 여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해서 남자 편에서 짐짓 져주는 것이
이 바위는 군유리 오거리에서 대산면 칠거리 쪽을 향해 약 1.5km 정도 걸어가면 도로가 있
통례이다. 제전이 끝나면 줄을 당산나무에 빙빙 감아 두었다. 이렇듯, 군유리에서는 오랫동안
는 야산 능선에 있다. 이 지역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바위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지금은 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이 있었다. 상군
간하면서 땅에 묻히거나 치워진 상태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바위가 현재 위엄을 드러내고
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은 현재 죽은 나무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풍습으로 전해 내려온 당산제
있는 영군바위[領群岩]이다. 영군바위란 이름은 “옛날에 어떤 장군이 이 바위 위에서 군사를
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거느리고 통솔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혹자는 이 바위를 장군바위[將軍岩]라고도 한다. 이 바위 전설이 군인들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장군(將軍)과 관련이 있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2) 미륵불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장군바위로 기록되었음).
군유리 비석마을 정성진 씨 집 마당 왼쪽
강열 씨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이 바위에서 군사를 통솔
에 돌로 된 미륵불상이 하나 있다. 아주 오래
하고 진두 지휘하며 국가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왔다는 전설로 보아서 ‘영군바위’라고 하
된 불상으로 비바람에 마모되었지만 지금도
는 것이 옳다고 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불상의 모습은 확실하게 나
군유리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장 원로이신 정
조선시대 1811년에 홍경래(洪景來) 난이 있었을 때, 당시 동원부장인 정치규가 순무중군(巡撫
타난다. 이 미륵불상이 여기에 있다는 것과
中軍)
연결되어 이 근처에 절[寺]이 있었다는 이야
는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훈련하였기에 혹자는 영군바위라고
기가 전해 오고 있다.
했다는 것이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 미륵불상을 현재는 정성진 씨가 관리해
090
미륵불상
유효원(柳孝源, 1751~1813)의 명을 받아 군유리 마을 근처 야산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필자가 선동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이 바위 옆길로 학 고창의 마을 제4집…091
교에 가기도 했는데, 토요일에는 집에 오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함께 바위가 보이는 쪽에 나무를 심었고, 그 뒤부터는 매년 풍년
는 도중에 친구들과 이 바위 위에 올라가
이 들고 마을에 재앙이 없었다고 한다.
서 놀기도 하고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바 위 밑 부분을 돌멩이로 두들기기도 하며
(2) 마동 이야기
놀았다. 바위를 두들기면, 딱딱한 돌멩이
군유리에는 마동(馬洞)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 마동은 한자를 해석해 보면 말이 있는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가죽
고을이란 뜻인데, 지명에서 드러나듯 이곳에는 말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으로 만든 방구를 두드릴 때 나는 소리와
마동은 현재 군유리 뒷잔등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점인데 일명 ‘구
같은 것이 났다. 그러면서 바위 속에 텅
부동’이라고도 불린다. 구불구불한 길로 가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마
빈 방이 있다고 전해 들은 기억이 있다.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마을의 자취도 없고 전설만 전해내려 온다.
영군바위에 관한 전설은 대략 이렇다.
영군바위
옛날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지나가던 도
마을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있어 영군바위 전설과도 연관되어 있다. 영군바위 쪽에서 보면 남쪽으로 마동마을이 있고 그 앞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영군바위에서 장군이 군사 훈련
승(道僧)이 영군바위 근처에 있는 늙은 소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해 잠시 쉬고 있다가 깜박 잠
을 하고 쉬는 사이에 말들이 갈마구수(渴馬求水)를 해결하려고 마동까지 내려와서 물을 먹고
이 들었다. 도승은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디선가 기골이 장대하고 건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물을 먹으러 다니는 마을이라고 해서 마동(馬洞)이란 지명이 유래
장한 체구의 장군 한 명이 흰 말을 타고 달려와 큰 바위의 문을 열고 바위 속으로 사라지는
했다고 한다(정강열 씨).
것이었다. 놀란 도승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바로 눈앞에 큰 바위가 있었다. 그래 서 도승은 바위 옆으로 다가가서 바위 주위를 돌며 살펴보니 바위 위에 방금 지나간듯한 말
(3) 주결이야기
발굽 자국이 나 있고 큰 바위 앞쪽에 사각형 모양의 큰 문틀과 문틈이 있었다. 하도 궁금해
주결(舟結)이란, 바다나 강가에 배를 묶어 둔다는 뜻이다. 곧, 지금의 부두(埠頭)나 선창(船艙)
서 도승이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도승은 꿈
을 말하는 것이다. 군유리에 옛날부터 주결이란 말이 전해 오고 있다는 것은, 언어학에서 말
속에서 보았던 흰말을 타고 달려온 기골이 장대한 장군의 모습과 바위의 말 발자국에 대한
하는 일물일명설(一物一名說)에 비추어 볼 때 마을 어딘가에 배를 묶어 두는 곳이 있었음을 암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마을로 내려와 마을 촌로(村老)들에게 이 기이한 사실을 알려주고 어
시해 준다. 마을에 살고 있는 어른들 말에 따르면, 군유리 앞은 바다였다고 한다. 배가 물건
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이다.
을 싣고 나갈 때는 주결까지만 와서 물건을 부리곤 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듯, 마을 앞에 흐르
그 후 군유리 사람들은 영군바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곤 했는데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러워
는 내[川]를 팔 적에 배 돛대가 여러 개 나왔고, 조개껍질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
질 때면 바위 속에서 군대를 호령하고 훈련하는 소리가 역력히 들려오곤 했다고 전한다. 그
기를 곰곰이 곱씹어 보면 군유리는 아주 오래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어촌마을이었을지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고 웅장한 병영과 정예군을
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거느린 훌륭한 장군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 왔던 것이다. 또한 이 바위를 ‘영금바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옛날에 정월 초에 바위 앞에 촛불을 켜고 소원을 빌면 영금(영검-사람의 기원대로 되는 신기한 징험)스럽게도 소원이 잘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영군바위에 관련해서 예전리 중예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정강열 씨). 어느 날
배를 매 두는 곳에 집터가 있었는데 이 집터가 명당 터라고 해서 군유리에 사는 이학춘 씨 어머니가 이 집터를 비싸게 사서 자기가 죽으면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주 결에 관한 이야기는 비석마을이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해대(海垈)라고 불리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스님(도사)이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데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예전처럼 시 주를 잘 해주지 않았다. 도사는 군유리 영금바위를 가리키며 바위에 살이 붙어서 이 마을에
(4) 말바위 이야기
흉년이 드니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바위 앞에 나무를 심어서 가려 주면 해를 막을 수 있다고
군유리 앞 들녘 냇가 안쪽으로 말바위가 있는데, 일설에는 영군바위를 마주보고 있다고 해
092
고창의 마을 제4집…093
서 ‘맞바우’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
고 말았다. 그러자 아기의 이가 사흘만에 모두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자는 집안
다. 오랜 동안 ‘맞바우’라고 불리던 것
에 큰 인물이 날 것을 내심 기대했다가 크게 실망하여 밤이면 돌음봉을 쳐다보며 한탄했다고
이 바위의 일부가 땅속에 파묻혀 말[馬]
하는데, 그 깊은 한탄 소리가 집안까지 들려 왔다고 한다(정강열 씨).
의 형상과 닮은 데가 있다고 해서 지 금은 ‘말바위[馬巖]’라고 불린다는 설도
(6) 해대 이야기
있고, ‘맞바위’보다는 ‘말바위’가 발음
군유리 비석마을을 해대(海垈)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해대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마을
하기에 더 부드럽고 상대방도 잘 알아
은 바닷가에 터를 잡고 있었다. 이는 군유리 앞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것이고, 이것은 주결
들을 수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
말바위
(舟結)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일설에는 비석이 많이 있어서 ‘비석등’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하는 마을 어른들도 있다. 어찌되었든
해대라는 이름보다는 ‘비석등’이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군유리 들녘 건너 금구마을
지 간에 지금 군유리 사람들은 ‘말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에서 멀리 쳐다보면 바닷가에 있는 지금의 전형적인 어촌 마을처럼 보인다.
이 바위에 얽힌 전설에는, 도깨비가 바위에서 나오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것과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넘치면 홍수가 마을로 밀려오지 않게 막아 준다는 것이 있다. 지금은 바위의 일
(7) 맥무덤 이야기
부가 흙에 묻혀 있는 상태로 있다.
군유리 맥무덤 이야기는, 맥무덤의 뜻과 연관되어 있다. 맥무덤은 맥을 흙으로 묻어 버렸다 는 뜻이다. 군유리의 형상이 상군과 하군을 멀리서 한눈에 보면 거북이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5) 돌음봉 이야기 군유리 하군마을 앞 들판에 조그만
어느 날 마을을 지나가던 도승(道僧)이 마을 촌로에게 이르기를, 이 마을은 거북이가 등에 보
봉우리로 된 산이 하나 있다. 이 봉우
물을 지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 형세이니 가지 못하게 흙으로 거북이를 묻으라고 하는
리를 도림봉(道林峯)이라고도 한다. ‘돌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마을 뒷잔등에 흙을 돋우고 거기에 당산을 만
음봉’은, 마을에서 큰 소리로 이 봉우
들었다고 한다. 그 당산이 상군마을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이고 하군의 할머니 당산이다. 거
리를 향하여 말을 하면 그 소리가 봉
북의 가슴에 ‘만석궁(만석꾼) 집터’와 ‘천석궁(천석꾼) 집터’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거북의 가슴
우리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뜻에
부분 만석궁 집터는 정재을 씨가 살고 있는 곳이고 천석궁 집터는 정강열 씨가 살고 있는 집
서 ‘돌음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터라고 한다(정강열 씨).
이 돌음봉에 얽힌 옛이야기가 전해
돌음봉
임진왜란 때에 있었던 이야기도 있다. 의병들이 이 집터에서 기거하면서 의병활동을 하고
내려오는데, 옛날에 어떤 부자가 돌음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영광에 가서 의병들의 거처를 밀고했다. 그리하여 일본군들이 찾아와
봉이 명당이라고 해서 묘를 썼다고 한다. 어느 날 부자는 태몽을 꾸는데, 꿈속에서 하얀 옷
서 집에 불을 질러 버렸는데, 그 뒤 이 집터를 파면 불에 타버린 빨간 흙돌이 나왔다고 한다.
을 입은 도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아기를 낳으면 3년 동안 소문을 내지 말라고 당부하며 이 아이는 커서 반드시 나라에 큰일을 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5. 6・25동란 때 적대세력의 가족몰살 사건
묘를 쓰고 난 지 3년만에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태어나면서 이가 네 개가 나 있었다고 한 다. 부자가 보기에도 이 아기는 분명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서 집안 식구들에게
1) 사건 개요
소문을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 집안 식구들은 소문을 내지 않고 잘
1950년 6・25동란 때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서 남로당 출신이자 인민위원이었던 이들이
지냈는데, 아기를 받은 여인네가 우물가에 가서 빨래하면서 동네 아낙네들에게 말을 해 버리
네 가족을 몰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고창군 공음면에는 마을에 정보원이 배치되어 있
094
고창의 마을 제4집…095
고, 공음면 단위에는 ‘공음면 분주소’라는 관리소가 있었다. 마을의 정보원이 정보를 수집하
가 궁금해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여 공음면 분주소에 정보를 제공하면 분주소에서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양민을 학살하곤 했었다.
3)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결정 통지서
사건의 내용은 그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사람(정종환, 인천직할시 계양구 거주)의 증언에 의하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고창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으로 정고봉 외
공음면 군유리 마을에 사는 정보원 김재섭과 김재남은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네 명(정고
2인이 지방 좌익에게 희생당한 사건과 정재화 외 3인이 지방 좌익에게 희생당한 사건의 진실
봉, 정근기, 정재화, 정삼용)을 ‘반동분자’라고
규명 신청사건의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결정해서 통지해 왔다.
공음분주소에 밀고하여 1950년 9월 28일 오후 10시
공음면 용수리 사갓봉에서 이 네 명을 살해하여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였다. 그 후 정세가 대한민국 국군에게 유리해지자 무고한 네 명을 학살한 남로당원 공음분주소
<귀하께서 신청하신 진실규명 신청사건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직원과 마을 정보원인 김재섭과 김재남은 신변의 위험과 후환을 두려워하여 죽은 네 명의 가 족을 모두 몰살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50년 10월 20일 오전 12시경에 마을 주민을 한 곳에
고창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은 사건 발생 시기를 기준으로 ① 인민군 점령 직전에 일어난 희생사건
모이게 하고 인민재판을 하여 생존한 네 집 식구들(어린아이는 제외함)을 대창으로 찔러 죽여 군
② 인민군 점령 기간과 후퇴 기간에 일어난 희생사건 ③ 군·경 수복 이후이나 치안이 부재한 시기에 일어난 희
유리 산 23번지에 구덩이를 파고 함께 매장하였다. 정고봉, 정근기, 정재화, 정삼용, 네 명과
생사건 ④ 군·경의 완전한 수복 이후 일어난 희생사건 등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인민군 점령 직전과
그 네 집안 가족이 몰살당한 비참한 사건이었다.
점령 직후에 발생한 희생사건의 경우 희생자들은 주로 총살되었고, 인민군 후퇴 기간에는 총살된 희생자도 있 었으나 죽창 등으로 희생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편 인민군이 후퇴한 이후 치안이 부재한 시기에 희생된 피해
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
자들은 대부분 죽창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또한 인민군 점령 전, 인민군 점령 기간, 군·경 수복 이후의 기간
(1) 신청자
에는 개별적이고 선별적인 희생사건이 주로 발생했던 것에 반해, 인민군 후퇴 시기와 후퇴 이후 치안 부재 시기
용수리 사갓봉에서 살해당한 정고봉, 정재화, 정근기, 정삼용의 후손 중에서 고창에서 살고
에는 가족 단위의 대규모 희생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고창지역 구빨치산, 내무서원, 분주소원
있는 정재윤과 익산시에서 살고 있는 정진택, 그리고 광주에서 살고 있는 정영백 세 사람이
및 지방 좌익, 신빨치산 등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좌익 인사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거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6・25집단희생 사건유형으로 진실규명신청서를 2006
대한 청년단 활동 등 우익활동을 하였거나 면장, 경찰, 군인 등 공직에 있었거나 마을 이장 등을 역임한 사람이
년 11월 23일 정재윤은 부모님(정고봉, 박복남)과 조부(정동옥)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고,
었거나 그들의 가족이었습니다.
정진택은 정재화, 강판순, 정준묵, 이평전, 네 사람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고창지역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 수는 진실규명 대상자 135명과 미신청 피해자 18명 등 총 153 명입니다. 이를 면단위로 구분하면 공음면에서 가장 많은 63명이 희생되었고 대산면에서 23명, 무장면에서 18
(2) 신청의 취지
명, 해리면에서 9명, 성내면에서 8명, 부안면에서 7명, 아산면에서 3명이 희생되었으며, 고창읍, 성송면, 심원면
6・25동란 때 인민위원(남로당원)들이 불법적으로 자행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중 한 마을에
에서 각각 2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무장면에서는 희생사건 이외에도 폭행사건 역시 발생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서 네 집안의 가족이 몰살당한 사건으로, 희생자의 자손으로서 국가적 차원에서 사건의 진실 을 규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해달라고 신청할 때는 필요한 이유가 있 었다. 첫째는 우리 부모는 농사짓고 사는 선량한 농민으로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덕망이 있고 인심이 좋은 집안이었는데 왜 죽였을까? 둘째는 인민위원들은 왜 한 마을에서 네 집안
각종 문헌자료에서 희생자 명단이 확인되었으므로 실제 희생규모는 153명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상과 같이 진실규명 대상자 135명과 미신청 피해자 18명 등 총 153명이 1950년 5월에서 1953년 2월 사이에 고창지역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진실규명 대상자 1명이 폭행당한 사실을 참고인 진술과 문헌자 료를 통해 확인하였으므로 본 사건은 진실규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8조의 규정에 의하여 위와 같이 결정되었음을 통지합니다.
식구들 모두 몰살시켜야만 했던가? 셋째 6・25때 집단 학살당한 가족의 자녀들은 국가보훈 처에서 보훈자녀 혜택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했을까? 등의 세 가지 이유
096
2009년 1월 1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고창의 마을 제4집…097
장만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정감 있는 모습은, 도회지에서 느낄
6.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수 없는 농촌의 넉넉한 인심이다.
1) 마을의 세대별 성씨 현황 성씨
정 김 박 이 구 천 최 배 강 류 오 마 신 유 윤 류 황 나 양 임 조 한
계
(2) 모정
상군
14 4
3
4
1
.
1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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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군유리 상군마을, 하군마을, 비석마을, 각 마을에 모정이 있다. 비석마을과 상군마을의 모
하군
4
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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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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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8
1
1
1
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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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정은 주민들이 잘 사용하고 있다. 여름철에는 모정이 바람이 잘 통하고 전망이 비교적 좋아
비석
16 7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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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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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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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
1
1
2
44
서 일을 하고 나서 쉴 때는 모정에 와서 낮잠을 자고 오후에 일터로 가는가 하면 옛날부터
합계
34 14 5 14 1
2
2
1
5
1
9
1
3
2
1
1
2
2
1
1
1
2
115
지나가는 나그네도 한 더위를 잊기 위해서 쉬고 가기도 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지나가는
(공음면 전화번호부 참조)
2) 마을 이장과 노인회 회장
도사가 모정에 들러 쉬면서 마을의 풍수지리를 설명하며 마을에 만석꾼과 천석꾼의 집터를 알려주는가 하면 장차 마을에 큰 사람이 나올 거라는 예견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모
구분
마을이장
전화번호
노인회장
전화번호
부녀회장
정이 마을의 전방에 위치해, 마을 앞 넓은 들녘을 바라볼 수 있어 낮에는 농부들이 일하는 모
상군
정재을
562-7082
이시원
562-7165
김용자
습과 벼농사가 잘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며 편안하게 오수를 즐기는 장소에
하군
신용욱
563-4505
이삼원
562-7027
비석
나병채
562-7211
이시원
562-7165
세워졌다. 정순자
(3) 게이트볼 장 상군 마을에 마을 주민들의 건강과 체력
3) 마을의 주요 시설 (1) 마을회관
단련을 위해서 지방 자치단체에서 시설해 준
마을 노인정과 함께 있는 마을회관은, 마을 사람들의 친목과 마을의 중요한 사항을 의결
게이트볼 경기장이 있다. 우천시에나 겨울에
해야 할 때 꼭 필요한 회합장소이다. 농촌에서는 농번기에는 농사일에 바빠서 마을회관을 이
도 할 수 있도록 실내 경기장을 만들었다. 게
용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지 않으나, 겨울에는 참 편리하게 이용되는 장소이다. 다행히도 지
이트볼 경기는 몇 개의 게이트를 만들어 놓
방자치가 실시되면서부터 겨울에는 군청으로부터 난방비 보조를 받게 되어 마을 부녀자들은
고 스틱으로 공을 쳐서 집어 넣는 노인들에
점심 정도는 함께 해 먹는다. 또 자기 집에 회갑이나 생일잔치 같은 경사가 있을 때 집에서
게 아주 적합한 스포츠 경기의 일종이다. 농
하군 마을회관
게이트볼 경기대회 출전 선수들
098
상군 마을회관
게이트볼 우승 트로피
고창의 마을 제4집…099
촌에서 남녀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로서는 심신 단련에 적합한 운동이다. 군유리 마을 게이트볼 회원들은 2010년 4월 12일 제 11회 고창병원장기 게이트볼 대회에 출전하여 남자
도움 주신 분
부는 2위를 했고 여자부는 우승을 했다. 2010년 5월 28일 경기에 출전해서는 남자부가 우승
정강열(81세, 군유리 상군마을)
했고 여자부는 3위를 한 실력이 우수한 마을로 고창군에서는 잘 알려진 게이트볼 회원들이
정재인(69세, 군유리 상군마을)
다. 게이트볼 실내경기장 안에는 그동안 각종 경기에 출전하여 상을 타 온 우승컵이 많이 진
나병채(66세, 군유리 비석마을, 마을이장)
열되어 있다.
정종환(82세, 인천시 계양구 효성1동)
참고문헌
(4) 교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고창군, 2009.
군유리 상군마을 도로변 가까운 지점에 기 독교 한국침례회 주님의 교회가 있다. 이 교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3.
회는 1988년 3월 24일에 창립되었으며 24
『모양성의 얼』
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영적 활동을 맡아오
『전북향교원자대관』, 전라북도향교재단발행, 1994.
고 있으며, 현재 담임목사로 이요한 목사님
『고창문화 21집』, 고창문화원, 2008.
이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교회의 주소는 전
『고창문화유적 분포지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유산 연구소, 2005.
북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 비석 334번지에 자
『전북전례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9.
리 잡고 있으며 시골의 작은 교회이지만 신
『고창의 전통과 생활사』, 김경식 저, 고창군편.
도들의 신앙심이 아주 좋고 목사님의 헌신적
주님의교회
인 사목활동으로 교회를 유지 발전시켜 가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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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 제4집…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