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음면의 유래와 행정중심지 칠암리 정 재 윤 1. 칠암리의 역사와 위치 공음면 칠암리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으로 모로비리국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 는 백제국의 상로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 때인 경덕왕 16년(서기757년)에 개명된 장사현의 속지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태종 16(서기1416)년에 이르기까지에 는 그대로 이어왔으나 태종17년에 서해연변의 방위체제구축을 위해 무송현과 장사 현을 무장현으로 통합할 때에 이곳은 와공면(瓦孔面)과 동음치면(冬音峙面)으로 분 면 되어 구한말인 건양원년(서기1896)에 칙령 제36호에 의해 고창, 무장, 흥덕군이 전라북도에 편입될 때에도 변동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통 폐합령에 의해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통합될 때 와공면과 동음치의 양면이 합병되어 孔音面이 설치하였다. 이때 공음면의 12개 법정리가 형성되었는데 칠암리 는 동음치면의 용산리, 연동리, 칠암리, 갑촌리, 원동리, 장곡리 일부를 합병한 법정 리가 되었다. 이때 면소재지는 칠암리로 옮겼다. 2011년 7월 현재 칠암리가 관할하 는 마을은 원칠암, 신평, 갑촌, 연동, 원동, 용산, 산정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칠암리의 위치는 동쪽은 무장면이, 남쪽은 대산면이, 북쪽은 상하면이, 서쪽은 전남 영광군 법성포가 위치하고 있다. 칠암리는 무장에서 법성방면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교통상으로 4개 지역을 갈 때는 반드시 칠암리 신평을 경유해야만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로 현재 공음면의 행정중심지인 면소재지로 공음면의 주요 기관 단체 및 경제문화생활의 거점이다.
2. 칠암리 마을의 유래와 자연환경 1) 七岩(원칠암) 마을 칠암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대산방면으로 약 1km의 거리에 있으며, 設基年代는 1800년대 초로 추정해 보며 安東 金氏가 터를 잡고 집성촌으로 마을을 이루었으며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마을 뒷산에 7개의 바위가 있어서 마을을 지켜주고 있었다 하여 七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있었다고 하는 바위는 고인돌(지석묘) 이었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마를 뒷산 에 7개의 바위 중에 5개는 개간할 당시에 땅에 묻어버렸고 2개의 큰 바위는 남아 있으며 그 외에도 작은 바위(지석묘)들이 소나무 숲 사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 마을에는 귀목나무가 수령 5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새마을 사업 관 계로 없어졌다. <사진1> (칠암마을 앞 도로변에 설치된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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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산(龍山)마을 이 마을은 설기연대를 1800년대 초로 추정되며, 마을 뒷산이 龍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龍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공음면 소재지에서 무장방면으로 약 1km를 가다 가 용정주유소 약간 못 미쳐 도로변에 용산마을 입구라는 표지판에서 북쪽으로 약 300m쯤 걸어 들어가면서 마을 뒷산을 바라보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산 아래 옹기종기모여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 마을에 최초로 청도 김씨가 들어와 살았고, 그 뒤에 여산 송씨, 신창 표씨, 전주 이씨, 신안 주씨, 임씨, 해풍 김씨가 살아왔다. 한국전쟁 후로도 많은 성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다가 떠났다고 한다. 한창 번성할 때는 40여 세대가 살기도 했으나 현재는 26호가 살고 있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문화유적과 전설이 많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사지(절터), 효자 표진극 정려비, 전방후원형 고분, 여당산(일명 할머니 당산), 미륵불과 뒷산에 일제강점기에 만든 전략 요충지인 땅굴 21개가 산재해 있다. 마을 앞 表氏 효자비(효자 표진극 정려비) 건너편에 오씨 문중산 아래에 학바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천둥 벼락을 맞 아 한쪽은 지금 용정주유소 앞 길속에 묻혀있다. 벼락 맞은 학바위는 현재 용정주 유소 앞에 4조각의 바위로 남아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마을의 안녕과 번영 을 위해 당산(할매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마을 뒷산 절터에서 발견된 미륵불을 마을에 모셔다가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사진2> (용산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는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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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정마을 이 마을의 설기년대는 1800년대 초로 보고 있으며 옛날에는 민등이라고 불러 왔 다. 행정구역으로는 용의 형국을 지녔다는 용산마을과 함께 단일촌으로 행정리로 분리되어 있다. 이 마을은 공음 면소재지에서 무장방면으로 약 1km 지점에 용산 주유소 못 가 돌조각공원을 우측으로 50m쯤 걸어가면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현 재 축산업을 하는 가구가 있고, 국제결혼을 하여 다문화가정을 이루는 농가 몇 집 이 살고 있다. < 사진3> 산정마을 입구 법성방면 도로변에 있는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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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평(新平) 마을 이 마을의 설기년대는 1300년대로 추정되며, 마을명칭은 참나무쟁이라고 불려왔 는데, 이것은 옛날에 참나무가 많아서 참나무는 한자로 진목(眞木)이라 하였다. 이 런 연유로 참나무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언어학적으로 참나무쟁이는 참나무로 만 든 정자를 鎭木亭(진목정)이라고 할 때 “참나무정이”를 “참나무쟁이”로 모음 역행 동화현상을 일으켜 참나무쟁이로 불러져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공음면의 면소재지로서 행정과 경제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사거리를 중심으 로 대산방면과 영광법성방면, 상하방면, 무장방면의 교통중심지이며, 上平마을과 下 平마을로 분리되어 공음면의 45개 분리 중 신평마을이 2개로 분리되어 있다. 현재 는 금성 라씨 진주 채씨, 경주 최씨, 진주 정씨 등 28개의 성씨가 살고 있다. 현재 공음면의 행정기관인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공음중학교, 공음초등학교, 보건지 소 등이 있다. <사진4>
공음면 소재지의 모습(신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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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갑촌(甲村)마을 이 마을은 칠암리 면소재지에서 법성방면으로 1km지점에 있으며 마을의 설기년대 는 1400년대초로 보고있으며 안동 김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진 입로 입구인 공음에서 법성으로 가는 도로변에 하마비가 있고 영모당 김질(1496 ∼ 1555),을 주벽으로 하여 은송당 김경철, 현무제 김익철을 배향하는 도암서원이 있다. 현재의 도암서원 건물은 무진훼철(고종5년)대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헐려졌다 가 고종19년(1882)에 복원된 서원으로서 공간구성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일반적 인 배치로서 서원과 향교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안동 김씨 외에 진주 강씨, 밀성 박씨, 제주양씨 등이 갑촌과 연동에 살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연동마을과 함께 이장은 양종탁씨가 마을 일을 돌보고 있다.
<사진5>
갑촌마을 입구 법성방면 도로변에 있는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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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원동(院洞) 마을 이 마을은 공음면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km 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설 기년대는 1500년대로 추정하고 성주 이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후 로 안동 김씨, 청주 한씨, 전주 이씨가 차례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마을에 옛날부 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무장 원님이 마을 앞에서 말타기놀이를 즐겼다하여 院洞이 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장은 김진식씨가 현재 마을 일을 돌보고 있다. 조 선은 원래 교통 통신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역(驛)과 원(院)을 두었다. 역 은 역마(驛馬)와 역로(驛路)를 관리하고 공무로 지방을 다니는 관리에게 역마와 숙 식 등이 제공되었던 곳이다. 원은 지방 관아 근처나 역 주변 및 각 역과의 중간 지 역 등에 설치한 숙박시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興地勝覽)에 나타난 고 창군 관계 기록 중 공음면 칠암리의 원동에 비정(比定)되는 요광원(要光院)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요광원은 재현서십팔리(在縣西十八里)에 있다. <사진6> 원동마을 들어가는 도로변에 있는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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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蓮洞마을 이 마을의 이름은 마을의 모양이 연꽃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전해 오는 이름이 다. 마을은 연못 속에 연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마을 주위를 야산으로 빙 둘 러싸고 있어 포근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돌 림병 같은 괴질이 들어와도 이 마을 사람들은 무사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현재는 마을의 일부사람들이 정부의 주택 개량사업으로 마을 입구에 새로운 주택단지를 조 성하여 이사하여 주택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마을을 사람들은 다른 이름은 별 도로 지어 부르지 않고 주택 마을을 생략하여 “ 주택”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7> 연동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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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칠암리의 자연지명 갑촌(甲村) : 개가리로 불리며, 칠암 서쪽에 있는 마을로 효자 김질이 태어난 마을. 고동맷재 : 칠암 북쪽에서 무장면 용수리 석정으로 가는 고개. 공음교(孔音橋) : 갑촌 앞에 놓인 다리. 도첫골 : 원동 밑에 있는 골짜기. 동계(東溪) : 된계라 불리는 들로 신평 동쪽에 있음. 마당배미 : 칠암방죽 밑에 있는 논. 마당처럼 펀펀하고 넓음. 망모기 : 원칠암에서 무장면으로 가는 고개. 예전에 망을 보았다 함. 망목촌 : 칠암리의 옛 이름. 민등(산정) : 참나무쟁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정자나무가 있고, 밋밋한 등성이 밑 이 됨. 백호등 : 원칠암 오른쪽에 있는 등성이. 사거리 : 참나무쟁이 앞에 있는 마을. 무장, 법성, 대산, 상하로 가는 네 갈림길이 있음. 산보래기 : 참나무쟁이 앞에 있는 솔이 많은 산. 산정방죽 : 산정 앞에 있는 방죽. 생계릿보(송계릿보) : 송계리에 물을 대는 보. 석굴 : 원동 앞산에 있는 골짜기. 선두배미 : 마당배미 밑에 있는 논으로 조수가 드나들면서 배를 대었다 함. 섬배미 : 신정 앞에 있는 논. 섬처럼 되었음. 신대월 : 원칠암 앞에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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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배미 : 신평 위에 있는 논.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싸움을 많이 했다고 함. 여막골 : 감촌 뒤에 있는 골짜기. 조선조 선조 때 효자 김질이 시묘를 산 여막이 있 었다고 함. 외배미 : 칠암방죽 밑에 외따로 있는 논. 용산 : 용생이, 원칠암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용처럼 생겼다고 함. 장군수(將軍水) : 원칠암 앞들에 있는 샘. 이 물을 먹으면 힘이 세어진다 하여 유명 했는데, 갑자기 물이 흐려져서 지금은 먹지 못하고 빨래만 함. 재숫재 : 원칠암과 예전리 시묘 사이에 있는 고개. 옻나무가 서 있는데 지나면서 이 나무 밑에 돌을 던지면 재수가 있다 함. 중봉 : 원칠암 남쪽에 있는 산. 진목정(眞木亭) : 참나무쟁이로 원칠암 서북쪽에 있는 마을. 큰 정자나무가 있었음. 공음면사무소가 있음. 칠암방죽 : 칠암 앞에 있는 방죽. 하마석거리 : 봉안각 앞에 있는 길. 하마비(下馬碑)가 있었음. 황샘 : 산정방죽 옆에 있던 샘. 효포산(孝抱山) : 원칠암 앞에 있는 산.
3. 칠암리의 문화유산 1) 지석묘군(支石墓群) : 공음면 칠암리 332번지. 지석묘군은 칠암마을(원칠암) 북 쪽 야산에 있었다. 이 야산은 남북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서쪽 능선으로 현재 능 선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지석묘는 7기가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야산을 개간할 당시에는 7개의 바위 중에서 황소 모양의 “소바위” 와 말 모양의 “말바위” 등으로 불리던 지석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매몰시키고 밭으로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 왔으며 현재도 군데군데 여러개의 작은 지석묘가 산재해 있다. <사진8> 칠암 마을 뒷산에 있는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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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자요지(白磁窯址) : 공음면 칠암리 932번지. 조선시대의 백자요지는 현재 조 사한 바에 의하면 공음중학교 맞은편에 공음 보건소의 뒷편으로
위치한다. 이곳은
대체로 지형상으로 볼 때 매우 완만한 경사를 가진 능선으로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능선의 하단부에는 다량의 백자편들이 전사면에 산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에 보건소를 건립하면서 일부지역이 절개되었다. 3) 절터(寺址) : 공음면 칠암리 932번지. 절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 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터는 용산마을의 뒤편 개곡부에 현재 폐사지가 있다. 용산마을 은 북측의 노적봉 (해발 206m)에서 남측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의 해 마을이 형성되었다. 능선의 동쪽은 용산제가 있고 남쪽으로는 비석골로 불리는 곡간이 형성되어 있다. 폐사지는 현재 개간되어 절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주변에서는 다량의 기와 조각이 산재하고 있다. 몇 년 전 이 폐사지에 있던 석불좌 상 1기를 마을 내에 전각을 짓고 이전하여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기 원하며 미륵불상을 모시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132 x 80cm로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보인다. 불상은 마멸이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사진9> 절터에서 나온 미륵불로 현재 용산마을 전각에 안치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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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마비(下馬碑) : 공음면 칠암리 932번지. 이 하마비는 조선시대의 비석으로 공 음에서 영광으로 가는 22번 국도변에 위치한다. 비신의 머리가 둥근 下鉉形 碣石이 다. 비신의 전면에는 “下馬碑”라는 비명이 있다. 이 비의 크기는 120 x 58 x 35cm이다. 이 비는 도로 맞은 편에 있는 갑촌 마을 도암서원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金質이 부모에 대한 효심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사진10>
갑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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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입구에 있는 하마비 5) 효자 표진극 정려비(孝子表珍極旌閭碑) : 공음면 칠암리 132-2번지. 이 효자비 는 근대에 세워졌으며, 무장에서 공음으로 가는 796번 국도에서 왼쪽으로 용산마을 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따라 100m들어가면 도로변에 1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 석의 크기는 183 × 69 × 40cm 로 지붕형태의 비수를 가지며 비 전면에는 “孝子 新昌表公珍極 旌閭” 라고 기록되었으며 건립연대는 己未年(1919년)이다. 효자 표진 극 정려비와 부인 박씨의 정려비문(송사문헌 P184,무장향교 발행, 1996,3,21, 호남 문화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효자신창표공진극정려 배열녀밀양박씨정려비 내가 표씨(진극)의 효열에 대하여 개관해보면 표씨는 나이 8세에 소학에 들 어가서 스승의 가르침과 부모님의 훈육을 받아서 효도하는데 멀리하지 않았 고 가르침과 배움을 자신의 말과 같이 암송하였다. 그리고 그의 행실을 살펴 보면 혹시 미치지 못하기도 했으며 효자는 하늘로부터 드물게
태어나기도
한다. 문사와 군자는 책을 읽어서 의리를 아는 자도 있고 혹은 나라를 위해 서 몸을 바치기도 하고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모두가 타고난 성품과 자질에 말미암은 것으로서 이를 가르쳐 인도함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공(진극)은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했고 옛 사람들의 효도를 들어 아는 바가 없었지마는 물고기를 잡고 산에 가서 땔감 나무를 해다가 맛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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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만들어 부모님 봉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앓고 계실 때는 아버지 대신 자기를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고 그리고 아버 지의 병을 낳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넓적다리를 칼로 찔러서 흐르는 피를 아버지에게 수혈하여 목숨을 연장시켰다. 그리고 초상을 당해서도 장례에서 제사까지 슬픔을 예에 따라 행하고 장례절차도 지극한 정성과 신뢰로 하였 으며 비록 소학의 효를 충실히 따른 사람이라고 가히 말할 만하다. 부인 박씨는 예로써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먼저 죽자 장례를 치루는데 모자 람이 없게 하고 음식 올리는 것을 예에 맞게 하였고 장례와 제사를 마치고 나서 남편을 따라가고자 조용히 목숨을 끊었으니 충과 열이 특출하다 하겠 다. 무릇 지금의 사대부들은 임금을 팔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자들이 그 소 식을 듣고서 어쩌면 부끄러움을 깨닫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데 표공(진극)의 충과 효는 안동(안동김씨)에 숨어있는 여러 현인들 가운데 남계와 모제의 충효가 세상에 알려진 바와 같이 여겨지며 이 는 모두 다 그 선열들이 잉태하기 전 하늘에서 얻어진 빛이다. 그리고 부인 박씨는 정숙하고 그 자태가 군자들이 이른바 논쟁할 바가 아니며 듣건데 하 늘이 마당히 준 정려로 특별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하늘이 정해주는데 시 일이 오래가지 않고 모범이 되고 조상의 덕을 닦아 손자를 위함이 증대하여 갔다. 표군은 수명이 학처럼 장수하고 여러 해를 상종하여 삼가 그 사실을 기록한 후에 이를 전한다. ( 행주 기우만이 삼가 글을 쓰다) 고창군 문화유적 분포지도, 2005,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고창군』P 191.] <사진11> 효자 표진극 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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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방후원문 장구형묘 : 공음면 칠암리 932번지. 이 고분은 안산에서 뻗은 능선 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으로는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남북으로 길게 조성된 분구형태는 남쪽과 북쪽이 각각 원형과 방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방 후원형으로 판단된다. 분구 높이는 후원부가 전방보다 약간 높고 좀 더 경사가 심 한 편이다. 특히 전방부의 남서쪽 모서리 부분은 민묘에 의해 파괴된 상태이다. 규 모는 남북 총 길이 55m 전방부 장폭 30.8m
후원부 장폭 38.4m 높이 전방부
5.7m 후원부 10.3m 이다. 매장시설은 후원부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칠게 가 공된 장대석들이 노출된 것으로 보아 이미 도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은 삼국시대 왜계 양식인 전방후원분의 북방한계선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고대 한일 간의 교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4. 마을의 수호신 할매당산(일명 여당산 : 고창군 보호수 9-14-46호)) 칠암리 용산마을에 할매당산이 있다. 나무는 느티나무로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어 여당산 또는 할머니 당산이라고 했다. 당산 나무는 약 500년생으로 추정되며 오래 된 나무에 큰 구멍이 뚤어져 있어 옛날에는 마을 어린이들이 이 나무의 구멍속에 들어가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 역할을 해왔다고 한 다. 이 마을에는 할매당산에 대한 전설이 있다.
어느날 이 마을에 청도 김씨 할머
니가 살고 있었다. 때 마침 돌림병(전염병)이 횡횡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병은 괴 질병으로 치료가 불가능하고 한번 이 병에 걸리게 되면 거의 죽고 마는 무서운 돌 림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하루는 청도 김씨 할머니가 잠을 자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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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하얀 옷을 입고 긴 수염을 한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김씨 할머니에게 개 울가에 있는 무슨 무슨 풀을 캐다가 끓여 먹으면 괴질병이 이 마을에는 없어질 것 이라고 말을 해주고는 그 백발의 노인은 당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 다. 또 하나의 전설은 옛날에는 모두가 가난하게 살아왔기에 마을에 좀도둑이 가끔 씩 있었다고 한다. 봄 농사철을 맞이하여 농촌에서 못자리를 만들어 농사준비를 하 려고 씨 나락(벼씨)을 항아리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도둑놈이 씨나락을 훔 쳐가지고 도망을 가는데 도둑놈은 이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밤새도록 당산나무만 빙빙 돌다가 날이 새자 훔쳐간 씨나락을 나무 밑에 놓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음력 정월 14일 날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돈을 출렴하
여 제사를 지내오고 있으며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도둑맞는 일도 없고 마을 사람들이 상부상조하며 잘 살고 있다고 한다.(용산마을 , 표을종씨 이야기)
<사진12> 할매당산과 할매당산의 유래를 말해주는 표을종씨
5. 영묘당 김질 봉향 도암서원 : 1) 도암서원 개요 : 도암서원은 원래 명칭이 도암사(道巖飼)였는데 2005년 6월 17일 고창군 향토문화 유산 제 7호로 지정되면서 도암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음면 칠암리 819번지 갑촌마을에 있으며
공음면 소재지에서 법성쪽으로 500m
쯤 내려가면 삼거리를 지나 도로변에 하마비가 있고 건너편에 홍살문이 있으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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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솟을대문) 안에 강당, 뒤로 旌閭(정려)와 奉安閣(봉안각)이 좌우로 있고 내삼문 (孝忠文)안에 사우가 있어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강당 옆에 유생실이 있고 그 옆에 화장실이 있다. 사우는 道巖祠(도암사)이니 3칸(6.2× 4m) 맞배지붕 목조한와 건물이다. 호박주초 두리 기둥에 창방과 평방을 올린 양식이며, 창방과 평방 위에 도리를 올리고 그 위 에 처마의 연목을 걸고 부연을 단 형식이다. 창문은 3칸에 2짝씩 6짝이고 빗살무늬 이다. 전면 단청했다. 안에 永慕當 金質(영모당 김질)을 주벽으로, 증손
蘟松堂 金
景哲(은송당 김경철)과 賢武齌 金益哲(현무제 김익철)을 좌우로 배향했다. 정려와 봉안각의 건물 구조는 사우와 같고 전면 단청했다. 봉안각은 전면 벽으로 막고 판 자문으로 봉쇄했다. 강당은 방풍을 단 한와 팔작집이다. 도도록하게 다듬은 덤벙 주 초와 두리기둥이고 2간은 대청, 좌우로 방을 들이여 방에는 2짝문을 재청에는 각각 4짝문으로 격차장이다. 영모당 김질은 조정과 중국에 까지 알려진 大孝(대효)일 뿐 아니라 忠(충)을 겸하여 녹권 봉안각을 갖추어 있는데, 영모당, 정려, 봉안각이 다 오랜 역사를 추정할 수 있고, 봉안각의 녹권함과 하마비 또한 이 고장 유일한 유물 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효자 영모당 김질(孝子 永慕堂 金質) : 공의 호는 영모당이고 부령공 김종한의 현손이고 좌랑공 김귀덕의 증손자이다. 공은 1496년(연산2년) 1월 15일 전북 고창 군 공음면 갑촌에서 찬의공 김복중의 외아들로 출생, 공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바 르게 다스리고 총명하여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부모에 효도하고 매사에 예 의가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공은 벼슬에 뜻은 없었으나 어머니가 문과에 급 제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하니 어머니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진사 시에 급제하고 사마벼슬에 올랐으나 공은 영모당을 따로 지어 부모에 효를 다하기 위하여 과업을 폐하려 하자 어진 선비들이 만류도 하고 또 벼슬에도 천거하였으나 끝까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등창이 발병하자 밤에는 빌고 잇몸으로 빨아 신통한 효험을 얻고, 부모 상을 당하였을 때는 인부를 쓰지 않고 몸소 묘소를 만들고 묽은 죽을 먹고 찬곳에 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매일 조석으로 성묘하며 곡을 하였다. 공은 제수로 쓸 술과 간장은 종노를 시키지 않고 손수 마련하여 봉제하며 부인을 멀리했다. 조부모의 상 을 탈복하고서는 부안군 변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캐어 배에 싣고 와서 선영인 제청 산 산소 주변에 치산을 하고는 후손에게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라고 하였다. 하루는 제수에 쓸 간장을 산쥐가 흐려놓아 공은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미물들을 감동시키지 못한 나의 죄라고 통곡하니 그 날 밤 산쥐 떼가 장독아래에 와서 다 죽 었다고 하며, 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생전에 즐기시던 꿩을 구하러 저자에 가려 하였으나, 폭설로 인하여 가지 못해 통곡하니 꿩이 스스로 부엌으로 날아들어 제사 에 쓰게 되었으며, 한겨울에 폭설이 내렸으나 묘소 주변에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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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향리 주민과 선비들은 이런 기이한 일은 공의 효감에 감복하여서라고 하며 그의 땅을 일러 제청산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이 연안을 샅샅이 훑어 사당 서원 모두가 잿더미가 되었는데 영모당 현판[효자 진사 김질지려]을 보고 감히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은 항상 예의가 두터운 풍속이라 하여 온갖 바른 행실을 몸에 익히고, 역, 시, 서, 춘추, 예, 탁, 중국의 6경과 소학, 가례, 효경, 경전과 사기 등을 즐겨 탐독하고 성리학을 연 구하여 항상 지식이나 견문 또는 식견이 변변치 않은 선비가 되지 않으려고 인성과 천리를 논한 유교 철학에도 속속들이 파고들어 연구하였으며, 후손들을 위하여 "영 모록"과 "육사자책설"의 두 권의 책을 지었다. 공은 전라도, 충청도에서 학문을 배 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감화되어 예경과 제의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할 것을 강론하고 항상 근면하였으며, 학자인 하서 김인후는 공의 집에 편액하기를 「영모당」이라고 하였고 "차영모당"이란 시 한수가 영모당에 현판되어 있고, 미암 유희춘은 평소 공을 사모하다가 무장 현감으로 와서 공과 서로 학문을 즐겼으며, 선정을 베풀고 떠날 때는 많은 백성들이 아쉬워하니 공은 이별의 시 한수를 적었고 유미암은 화답한 시한수가 현재 영모당에 현판 되어 있다. 고봉 기대승과 송천 양 응정 등의 선비들과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선비들은 공을 일러 영모당 선생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는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충렬 효행을 물어오매 본도 안찰사 졸당 민성휘는 공이 효에 으뜸이라고 천거함에 1546년(명종원년) 명나라 황제가 친 필로 [효자진사김질지려가정병오천조정려]라고 사액하여 현재 봉안각에 현판 되어 있고, 정문을 명하고 특별히 포상하였다. 공의 효가 천하에 알려지자 도내 선비와 유림들이 사당 세울 것을 제청하였으며, 향중에서 도암사우를 일으켜 지금까지 유림이 향사하고 있다. 김하서, 유미암, 기고 봉은 같은 당세의 제군자들에게 고증을 들어 참판인 포암 윤봉조가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지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재 황윤석이 비문을 찬술하 고 해사 김성근이 "영모당" 현판을 썼다. 이글은 영모당 행장, 영가세적, 포암집, 한 국사 대사전 등에서 간추린 내용임. 서기 1731년에 편찬한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1998년 4월 23일에 공의 16세손인 김만길이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 찾음,
< 사진13> 도암서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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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4> 효자사액현판과 봉안각
<사진15> 효자 영모당 김질 묘비(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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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6> 홍살문 및 효자 영모당 김질 하마비(도암사 입구 국도변)
<사진17> 영모당 내 현판 및 편액-해사 김성근,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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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8> <金質 行狀> : <圃巖集>(윤봉조 저. 19복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6. 한림봉과 인공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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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림학사가 나올 한림봉 : 칠암리 용산마을은 마을 뒷산이 마치 병풍처럼 마을 을 둘러싸고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 포근한 느낌을 주고 마을 앞 쪽으로는 멀리 황 산이 보이는 천혜의 농촌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등산로가 있다. 이 등산로는 약 4.2km의 거리이며 2004년 4월에 개발하였으며 용정 주유소에서 무장방면으로 가 다가 달터 고개에서 시작되어 보건소 뒤쪽까지 이어지며 약 1시간 40분 정도의 시 간이 소요되는 등산로이다. 등산로 입구에 등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간판은 공음 가로등회에서 회원들의 협조로 세워졌다.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해발 200m 의 높이에 윷판두재라고 부르는 한림봉이 있다. 이 한림봉은 옛날부터 중국역사에 나오는 한림학사들이 산의 정기를 받아 훌륭한 선비인 한림학사가 배출된다는 풍수 지리설에 따라 이곳을 명당으로 불려왔었다. 이 한림봉에서는 옛날에는 극심한 가 믐이 계속 될 때에는 하늘에 비를 오게 해달라는 마을 주민들의 정성어린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왔다. 그리고 공음면 12개 법정리중 칠암리, 용수 리, 신대리, 구암리, 석교리 등의 5개리를 밟게
되고 정상에 서게 되면 멀리 태양
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낙조대가 있어 주변 산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느낄 수가 있다. 또한 이 한림봉에 서서 멀리 바라보면 6개 군의 땅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한림봉은 고창군이고 동쪽으로는 정읍군(정읍시), 서남쪽으로는
영광군과 장성군 그리고 함평군, 북쪽으로는 부안군을 볼 수 있으며 저 멀리 서해 안 칠산 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답답한 가슴이 확 트이는 조망은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
사
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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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윷
판두재(한림봉)가는 안내 표지판
<사진20>
한림봉 봉우리사진
2) 전략적 요충지 인공동굴(토굴) : 용산 뒷산의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자연적으 로 형성된 동굴이 아니고 군사용 전략요충지로 사용하고자 인간이 직접 시공한 인 공동굴이 발견된다. 이 인공동굴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이 1939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이곳에 전시벙커 및 주위 지형을 정찰하 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땅굴을 만들었으며 달터 고개에서부터 등산로를 따라 올라 가면서 보면 주변에 볼 수 있는 땅굴이 무려 21개(표을종씨조사함)나 되 며 이곳에 만들어진 벙커나 땅굴은 모두가 도로나 서해바다를 겨냥해 입구가 만들 어져 있다. 이 인공동굴을 찾아서 정리한 사람이 용산 마을에 살고 있는 표을종씨 이다. 현재 그는 공음 면소지에서 철물가계를 운영하면서 고향의 역사를 알리고 싶 은 마음에서 용산 마을 동네 토박이로서 동굴을 찾고 정리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마을 어른들로부터 동네 곳곳에 버려진 인공동굴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일본군 1개 대대가 주둔하였다고 했다. 표을종씨는 자신이 찾 은 인공동굴을 정리하여 2006년 5월 일제강점기 하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에 신고하였다. 위원회측의 말에 의하면 표을종씨가 찾은 용산마을의 동굴은 1945 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 말엽 태평양전쟁을 치르던 일본이 전라도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한 흔적으로 보며 동굴을 만드는데 주민들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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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학교수업은 하지 않고 동원되어 자갈을 줍고 동굴을 파는데 많은 일을 하 였다고 한다. 그리고 폭파기술자 등은 먼지역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땅굴을 만드는 데 강제노역으로 혹사당하였다고 한다. 그때 공음면 일대는 서해바다가 훤히 보이 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곳에 인공 땅굴을 만들어 군사요충지로 일본인들이 사용 하였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공음면 구수내가 동학혁명의 발원
지이기 때문에 동굴 중에는 동학혁명 당시 만들어진 것도 있을 가능성도 있다. <사진21> (인공토굴 위치 표지판)
<사진22> 전략적 요충지인 인공동굴(토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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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평 마을(면소재지)에 위치한 기관과 시설(2011.7.1현재) 1) 기관과 시설 기 관 명
전 화 번 호
가 계 명
가 계 명
공음초등학교 공음 중학교 공음면사무소 공음파출소 공음면자율방범대 공음면의용소방대 공음면 예비군중대 공음 우체국 선운산농협공음지점 삼광신용협동조합 농업 기술센터 공음 보건지소 공음 청년회 공음 노인정 공음 실내체육관 공음 교회
564-1054 562-7323 562-2555 562 - 7112 562 - 5220 564 - 0119 562 - 7112 562 - 7113 562 - 7888 564 - 9324 564 - 1704 560 - 2654 564 - 9133 562 - 7201 560 - 2579 562-7048
성창카센터 공음카센터 용정식당 하나식당 매일식당 공음식당 신흥식당 황지식당 참남재식당 반도이발소 쉼터미용실 세븐미용실 공음정미소 공음명다방 공음농약사 대성농약사 들녁마트
만복건강원 공음가스 공음주유소 용정주유소 공음농기구 공음엘지농기구 이일관광 고창고속관광 공음석물공장 고창황토 공음건강원 공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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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공음초등학교 공음초등학교는 공음면 칠암리 54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9년 7월 5
일 공음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어 7월 8일 공음면 칠암리 소재 안동김씨 제 각에서 임시 가교사로하여 개교하고 제1학년 1학급을 수용하였다. 1935년 4월 18일에는 본교 부설 선동 간이학교 설립인가가 있었고 동년 5월 1일 아동 41명으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1938년 4월1일에는 본교의 명칭을 공 음공립 심상소학교로 개칭하였다. 그 후 3년 후인 1941년 4월 1일에는 다 시 공음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동년 7월 11일에는 공음공립청 년후년소가 인가되어 12월 6일에는 공음공립특별청년연성소 및 공음공립여 자 청년연성소 입소식이 있었다. 이는 바로 2차대전 전시동원체제의 일환으로서의 제도라 할 수 있다. 1950년 6월 1일 공음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87년 3월 1일에는 본교병 설 유치원 2학급 인가가 있어 개원하였다. 본교의 학구는 공음면 칠암리, 용수리, 장곡리, 석교리, 구암리 5개리 일원 으로 되어 있다. 본교의 역대 교장은 일본인 小玉政郞, 秋吉保記, 진상ㄷ덕, 國金逢三郞, 荒 木正重, 최량득, 김팔암, 서정희, 이상호, 정봉해, 계병운, 김병은, 박봉규, 허 정선, 김준원,
김형수....
교감은 1960년부터 이규철,
박석봉, 정중호, 김원회, 서경환, 김팽수,
김
상식, 배양수.....
나)공음중학교 공음중학교는 공음면칠암리
570-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1년 1월
16일 6학급으로 설립 인가되어 동년 3월 1일 개교하였다. 1978년 12월 5 일에는 학급증가로 18학급 편성 인가가 있었으나 1982년 3월 2일 17학급 편성의 학급 감소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87년 1월 26일 공음중 병 설 공음고등학교 설립계획 승인신청으로 동년 4월 9일에는 그 승인이 있었 다. 동년 9월 21일 고등학교 설립인가 신청(보통과 1학급 남녀공학)이 있었 고 동년 11월 27일에는 공음중 병설 공음고등학교가 인가되었다. 학구는 공면 전체 공음면 마을이 대상이며 현재는 3학급 규모로 정원이 많 이 줄었으며 역대 교장은 김형복, 정정모, 이건중, 이석민, 김기섭, 권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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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은 권혁성, 이석민 이정구, 은진동, 김영섭, 김철희, 박정규, 김진문...등 등. 2) 칠암리 마을 이장 마
을
명
이
장
이
름
전
화
번
호
원 칠 암
김 도 식
011-9868-7793
용 산
김 영 철
011-411-7300
산 정
김 영 철
011-411-7300
신 평(상평)
최 경 연
010-3166-7075
신 평(하평)
정 금 석
010-9855-4527
갑촌, 연동
양 종 탁
010-5507-6663
원
김 진 식
011-656-7114
동
비
고
3) 칠암리의 인구 세대수 현황표(2011.8.31현재) 신평
신평
(상평)
(하평)
20
26
13
10
28
30
마을명
원칠암
용 산
남 자
15
여 자 계
갑 촌
연 동
원 동
계
37
5
16
14
133
8
7
3
4
4
49
34
44
8
20
18
182
4) 칠암리의 마을 성씨별 세대주 현황 성씨
김 함 함 진 안 광 여 전 밀 청 성 전 여 신 천 신 달 해 남 충 남 진 동 청 해 해 양 평 주 동 산 양 주 양 도 주 주 산 안 안 창 성 주 양 주 평 주 래 주 풍 김 오 이 강 김 김 진 이 박 김 이 최 송 주 전 표 서 오 홍 지 문 정 정 한 김
마을 원칠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1 19
암 용산 산정 상평 하평 갑촌, 연동 원동
계
2 10 2 5 5
1 2
2 2
3 1
1 7 6
3
2 3 2
8
1
2
2
1 2
3
4 8
2
3
2 1
1
2
1
2 6 3
3 1 2
2 5
- 26 -
2
1
1
1
28
3 2
1 16 2 1
2
1 1
1
1 1 1
1
1
2 1
1
14 34 2 44 28
8
18
8. 칠암리 마을의 노인정과 마을회관 1) 공음 노인정 : 공음 노인정은 1974년에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만들어 졌다. 공 음이 고향인 독지가로서는 광주에서 살고 있는 김영진씨와 최경주씨 그리고 신촌이 고향인 최봉규씨 등 3인이 사비를 거금을 출연했으며 이중 김영진씨가 주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공음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던 허정선 교장선생님이 노인정 건물 을 완성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윤석기씨의 도움으로 공음 노인정의 건물은 최종 마무 리되었다. 노인정 건물은 공음면 칠암리 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음면 관내 사람들로서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으며 현재는 102명의 회원이 등 록되었다. 노인정 운영비는 자치단체의 보조금과 회원들의 희사금으로 운영하며 연 800만원의 예산이 소요되며 점심식사는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20 명이상이 노인정에 와서 점심을 먹고 있다. 역대회장은 배성수, 김병은, 최병두, 김 수문, 김상진, 김홍회, 김병태, 권영술, 김형성씨가 일을 맡았고 부회장으로는 강윤 배, 김금용, 김용욱씨가 하였고, 감사로는 김병순, 황수영씨가 했다. 2011년도 노인 정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에 김형성, 부회장에 나승호, 황긍선씨이고, 감사에 김 병호, 김삼낭 그리고 총무에 김하대 재무에 김대식씨가 일을 보고 있다. (전화 : 562-7201) <사진23> (공음 노인정 “老老齊”)
<사진24> 공음 노인정 안에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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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산 마을 노인정 : 용산 노인정은 마을회관과 겸용으로 마을 주민들이 사용하 고 있다. 용산 마을은 인구가 작아서 정부에서 지어준 것이 아니고 마을 의 원로 표을종씨가 영광 원자력발전소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협찬금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진 25> 용산마을 노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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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칠암 마을 경로당 : 칠암 노인정은 원칠암에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노래방기구를 설치해 놓고 있으며 낮에는 주로 여자 노인들이 담소 하며 이용하고 있으며 이 노인정에서는 이점례 할머니가 84세 최고령으로 칠암마 을에 19살에 시집을 와서 지금까지 이 마을 을 지키고 있는 산 증인으로서 칠암 마을의 유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사진26> 칠암마을 노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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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동 마을 노인정 : 연동 마을은 노인정과 마을 회관 겸용으로 주민들이 이용하 고 있으며 겨울철에는 난방비를 절약하고자 점심은 회관에서 공동으로 취사하고 담 소를 나누며 원로들이 이용하고 있다.
<사진27> 연동마을 노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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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원동 마을 회관 : 원동마을의 노인정은 회관과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농 한기에 주로 이용하며 겨울철에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점심을 해 먹으며 담소 하고 시간을 보내는 마을에 곡 있어야하는 필요한 존재로 비교적 관리를 잘하고 있 다.
<사진28> 원동마을 노인정
9. 용산마을의 풍광을 노래한 “내 고향 공음” 고향을 떠날 때는 삶의 어려움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 타향에서 향수에 젖어가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이 어찌 한 둘이 아니겠는가마 는 그래도 고향을 잊지 않고 성공하여 내 고향 공음을 트로트 가요로 만들어 부르 는 향우가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노래 말을 쓴 김영진씨이다. 그는 칠암리 용산마을 에 돌조각 공원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고향을 사랑하는 충정에서 개 인의 재산을 흔쾌히 기부하며 사업을 시작하다가 현재는 중단한 상태다. 그 분은 현재 광주에서 살고 계시면서 이 사업을 진행하고 계신다. 그분이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절하고 먼 후대들에게 자랑스런 고향문화를 전해주고 싶었을까? 하는 마음은 그가 쓴 “내 고향 공음” 트로트에 나타나 있다. 그 노래를 소개해 본 다. 가요 제목은 “내 고향 공음”, 작사 김영진, 작곡 김기범, 노래 김보성이 불렀다. 노 래 말은 ‘황산에 봄이 오면 진달래피고, 들녘에서 메뚜기잡고 시냇가에 물장구치던, 용산에 봄이 오면 고사리 꺾고, 청보리밭 사이 길에서 피리 불던 어린 시절, 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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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그 친구들은 그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고 싶은 내 고향 보고 싶은 내 고향 잊지 못할 내 고향, 떠나올 땐 서러웠어도 찾아갈 고향이 있으니, 행복해요 사 랑해요 내 고향은 공음이라네.
<사진29> 돌조각공원 표지석
※ 도움을 주신 분 1. 표을종(70세. 용산, 공음철물점 운영) 2. 박인철(80세, 정읍, 전 초등학교교장) 2. 이점례(86세. 원칠암) 3. 김수은(74세. 원칠암) 4. 박종인(53세. 신평. 공음주유소운영) 5. 신계원(고창문화원 이사) ※ 참고문헌 1.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고창군, 2009. 2. 『고창의 마을 유래』고창문화원, 도서출판 청동, 2003. 3. 『고창문화 21집』고창문화원, 2008. 4. 『고창군 문화유적분포지도』원광대학교마한. 백제문화유산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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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고창문화제20집, 도서출판 청동, 2007. 6. 『고창성당 50주년사』고창성당, 2010 7.『고창지석묘군 상석 채굴지 지표조사 보고서』전주대학교 박물관, 1999. 8. 『사적 제 391호 고창 고인돌 유적 지표조사보고서』호남문화재연구소, 2001 9. 『전북전래지명총람5』유재영, 민음사, 1999. 10.『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강복룡 외 10인,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5. 11. 『한반도의 전방후원분』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학연문화사, 2011. 12. 경향신문, 2007.6.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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