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5/21 (Thu) _ Korea Daily Texas _ Austin

Page 1

초이디자인건축사사무소 건축설계허가 사업부지선택 / 부동산 개발업무 저렴한 상담과 최고의 서비스

401.217.9023 TX 건축사면허 텍사스설계업무 I 건축사 최유승 Y. David Choi, AIA 연세대. UTArlington HKS 책임건축사경력 I dchoi@choidesign.net 3010 LBJ Freeway #1200, Dallas, TX 75234 I www.choidesign.net

4

남문기 뉴스타 회장 19532021

COPYRIGHT 2021 2021년 3월 22일 월요일

Tel: (문의) 972-242-9200 koreadailytx@gmail.com

Thursday, March 25, 2021 A

고 남문기 회장이 2006년 5월 치러진 제 28대 LA한인회장 선거에서 승리가 확정된후 지지자들 의 축하를 받고 있다. [중앙포토]

고 남문기 회장이 2011년 당시 한나라당 재외국민위원회 자문위원장 자격으로 재외선거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끝없는 도전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으로 뉴스타 신화 사업가 남문기 훈장 댁 아들, 행정학과 졸업생, 해병대 예비역, 주택은행 직원 …. 고 남문기 회장은 한국에서 의 평안한 삶을 뒤로하고 1982년 홀연히 미국으로 건너왔다. 막 도착한 이민자가 선택한 첫 직업은 청소업. 건물 바닥을 거 울처럼 닦자 사장이 화들짝 놀랐 다. 팀장으로 승진해 회사 매출 을 30배 이상 늘려줬다. 본인이 회사의 사장처럼 4년을 일한 뒤 에 사표를 냈다. 만류하는 사장 은 “미국에 온 내겐 더 큰 꿈이 있다”고 떨쳐냈다. 사실 남 회장은 바닥을 닦으며 부동산업의 매력을 발견했다. 거 대한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큰 규모가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 돌아보면 대학 학생회장을 지내 며 직접 확인한 본인의 협상력과 추진력에 자신이 있었다. 군에서 는 생각하면 행동으로 옮기고 불 가능이 없는 ‘해병대 정신’을 체 득했다. 은행에서는 화끈하고 자 상한 그의 성격에 고객들이 줄을 섰었다. 한국에 남기고 온 것들 이 전혀 쓸모가 없었던 것은 아 니었다. 뉴스타부동산 그룹의 시작은 1988년 9월 15일로 기록됐지만

남 회장 부부는 한 해 전인 1987 년 헌팅턴비치의 한 회사에서 부동산업에 투신했다. 남 회장 과 부인 제니 남은 부부 에이전 트로 활동하며 이듬해 각종 로 컬 협회에서 선정하는 최우수 상을 휩쓸었고 드디어 가든그 로브에서 뉴스타부동산을 창업 했다. ‘남문기’란 이름은 짧은 시간 내에 하나의 브랜드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문 광고는 물 론, 버스 정류장과 크고 작은 광 고판에 본인의 얼굴과 이름을 새 겨 부지런히 알렸기 때문이다. 경북 의성에서 조부와 부친이 훈 장인 한학자 집안의 자손이었 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볼 정도로 깨인 집안에서 익힌 미디어의 힘을 미국에서 적극적 으로 활용했다. 무엇보다 부동산은 낯이 익고 친숙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그의 분석은 주효했다. 남 회장은 고 객이 맡긴 집의 묵은 때를 벗겨 주고 잔디도 깎아주면서 좋은 입소문을 탔다. 이듬해 소속된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남가주 지 역 최우수 오피스로 선정된 것 은 결코 운으로 얻은 결과가 아 니었다. 그는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넥타이와 금장 시계를 직원 들에게도 주입시켰다. 회사 로고 가 새겨진 셔츠와 재킷을 입히며 남 회장은 에이전트 양성의 새로 운 꿈을 꿨다. 그리고 1991년 뉴 스타 부동산학교를 설립해 현재 까지 4곳에서 30년간 수많은 한 인 에이전트들을 키워냈다. 특히 에이전트의 자질 향상을 위한 실 전 적용 교육, 일대일 현장실습 교육과 각종 세미나, 재교육 등 은 지금도 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1990년대 후반은 뉴스타 부동 산이 남가주에서 네트워크를 넓 힌 기간이다. 1996년 LA지사 설 립 후 본사를 아예 LA한인타운 으로 이전했고, 1997년에는 토 런스·세리토스에 지사를 세웠 다. 이어 1998년 플러턴, 1999년 어바인·글렌데일·로랜하이츠 등으로 지사망을 넓혔다. 2000년대 초반 밸리, 라캬나 다, 랜초쿠카몽가, 팔로스버디 스, 치노힐, 리버사이드 등지로 지사를 확대한 뉴스타부동산은 2004년을 기점으로 전국 영업망 확대에 나섰다. 남 회장은 2002년 간경화 말기 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 만 멈추지 않았다. 2004년 라스 베이거스와 덴버에 지점을 낸 뒤

이듬해부터 시애틀, 플로리다, 뉴욕, 애리조나는 물론, 한국에 도 뉴스타 지사를 설립했다, 현 재 뉴스타부동산은 LA한인타운 본사와 지사 등 30여 곳에 지사 망을 두고 있다. 산하에 에스크로, 건물관리회 사, IT 회사, 광고기획사, 투자 그룹사, 부동산학교는 물론, 뉴 스타 문화공간 등을 두고 뉴스타 부동산 그룹으로 성장했다 또한 20년간 뉴스타 장학재단 을 운영하며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뉴스타부동산은 1000여명의 에이전트와 직원을 거느리며 대 형 부동산업체들과 어깨를 나란 히 하고 있다. 연간 10만 달러 이 상의 소득을 올리는 톱 에이전트 도 매년 300명 이상 배출된다. 남 회장은 생전에 “목표 없는 인생은 표류하는 배와 같고 언 젠가 침몰하고 만다. 확고한 목 표와 끝까지 밀어붙이는 끈기 가 뉴스타부동산이 발전해 온 성공의 비결”이라고 입버릇처 럼 말했다. 창업 이후 33년 뉴스타부동산 이 보여준 발전상은 미주 한인 부동산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 모 델로서 새롭게 평가 받고 있다. 류정일 기자

약력 1953년 경북 의성군 출생 [학력] -인천 선인종고(졸) -건국대 법대 행정학과 졸업 -건국대 대학원 경영학석사 MBA -건국대 명예정치학박사 학위 취득 -Yeshua University (뉴욕): 명예 교육학 박사학위 -World Trinity University 명예 철학 박사학위 [현직] - 건국대학교 경영대학 특임교수 -미주한인회장협회 총회장 (현)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 의장(공) -뉴스타그룹 명예회장 [경력] -세계한인회장대회 의장 역임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총회장(23대)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연합회 장 역임(21대) - LA한인회장 역임(28대 직선) -미주동포후원재단 이사장 역임 -재미해병대전우회 회장 역임(해병 대 전역 266) -미주한인부동산중개업협회 회장 - OC 한인상공회의소 회장 역임 [저서] ‘성공한 사람의 인생을 벤치마킹하 라’, ‘미국에 한인 대통령 만들자’, ‘나는 여전히 성공에 목마르다’, ‘해외한인 참정권과 복수국적’, ‘잘 하겠습니다’ 등

페이스북에서 ‘텍사스 중앙일보’를 검색하시면 보다 많은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81년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에 참가한 남회장(가운데) 2016년 중앙일보 주최 사랑의 마라톤에 뉴스타 직원들과 함께 2019년 투병중 설악산 대청봉 등반. 딸 에이미씨의 2013년 결혼 식 2019년 11월 간 이식 수술전 간제공자 사위 서지오 성씨와 함께.

피우지 못한 정치인의 꿈  한국계 대통령 만들자 활동가 남문기 남문기 회장은 미주 한인들의 정 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그는 ‘한국계 미 국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게 꿈’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업가서 활동가로 사업가 남문기가 단체장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1년 OC해병대전우회장을 맡으면서다. 남 회장에게 해병 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대학 등록금 마련이 어려워 선택한 것이 해병대 입대(266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2000년 제26대 OC한인

는 모든 재외동포들의 권익 신장 에도 관심을 가졌다. #직선 LA한인회장 당선 남 회장의 한인단체장 활동 정 점은 2008년 LA한인회장 당선 이었다. 해외 최대 한인사회의 대표라는 상징성 외에 당시 한인 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뽑힌 회장 이었기에 의미가 더 컸다. 임기 2년의 짧은 기간이었지 만 굵직한 업적들을 남겼다. LA 총영사를 현지 한인으로 임명하 자는 캠페인을 벌였고 이명박 대 통령 당시 김재수 변호사가 총영 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밖에 한인타운 자율방문 단 신설 올림픽 및 피코 일방

회장대회 공동의장, 해외한민 족대표자협의회 공동의장 등 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750만 해외동포로 활동 확대 2011년 7월 18일 당시 한나라 당 최고위원회의는 남 회장을 재 외국민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는 “당이 원하는 것과 750만 해외동 포들이 원하는 것을 조화롭게 조 정해 나가겠다”고 소감을 밝히 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등의 재 외국민위원장 자리는 국회의원 3선 이상의 중진이 맡는 것이 관 례였다. 따라서 남 회장의 위원 장 임명은 파격이었다. 때문에 남 회장은 시민권까지 포기했지 만 결과적으로 자진사퇴로 끝이

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LA한인 회장때부터 재외동포들의 권익 을 위해 누군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 다. 아무튼 그의 이런 꿈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사업만 열심히 했었다면 어떻 게 됐을까?’ 아쉬움을 갖는 사람 들의 물음이다. 그는 동포청 설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동포들의 위상이 제대 로 세워지려면 동포청이 필요하 다는 생각이었다. 투병 중이던 2017년 그는 자 신의 모교인 건국대에 1억원을 기부했다.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 에서 그는 “평소 새벽 1시에 잠

필요성과 절실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 이다. 장학금 수여식 때마다 그는 수 십명의 장학생들에게서 한 가지 서약을 받는다. ‘장학금은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빌려주는 것으 로 나중에 누군가에게 장학금을 되돌려주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국계 미국 대통령을 염원하며 쓴 소책 자(미국에 한국인 대통령을 만 들자)를 나눠준다. “장학금을 받은 자녀의 생활 태도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간혹 듣습니다. 제 노력이 실제 효과 가 있는 겁니다. 제 꿈이고 우리 A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