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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KS Magazine

Beyond Routine Into Curiosity Keep Sai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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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여행 매거진 BRICKS 유럽 특집호 Vol.1 #europe

Prologue

4 긴 여행을 앞두고 Paris, France

14 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Sisimiut, Greenland

30 문화 예술의 도시에서 산다는 것 Firenze, Italy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Lisbon, Porto, and Coimbra, Portugal

56 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Amsterdam, Netherlands

70 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Firenze, Italy

Epilogue

82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며 Reykjavik, Iceland

03


긴 여행을 앞두고 글 당신의 봄 Prologue. 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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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을 앞두고 05


긴 여행을 앞두고,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건 뭘까?

저마다 여러 가치를 우위에 두겠지만,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준비는 바로 ‘마음가

짐’이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씩 마음을 다잡고 준비 하는 나의 마음가짐.

이번 여행을 앞두고 변수가 많았다. 처음에는 일 년 동안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 비

자를 받고 파리에서 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작년에 한 달 동안 다녀온 파리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온 11월부터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기 위 해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비자 발급에 필요한 각종 서류들을 준비하고,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보기 좋게 어그러졌다.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테러

의 일상화였다. 더 이상 파리는 테러로부터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파리 도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테러들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파리에서 일 년 동안 살아 보자!’는 파리에서 두 달 살아보는 계획으로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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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을 앞두고 07


떠나는 날은 다가오는데 좀처럼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 굉

장히 가벼운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여행이 아닌, 낯선 곳에서 나를 오래 두고 보고 싶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며 느낄 그 설렘과 떨림은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옅어져 갔다.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게 한 순간에 다 잡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작년 11월, 파리로 가는 비행기 표를 다시 끊었을 때를 떠올려 본다. 그땐 마냥 기뻤

다. 다시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을 이겨낼 만큼 행 복하고 기뻤다. 그리고 1월과 2월, 혹독하고 지겨운 겨울을 보내며 점차 그 기대감과 행복감은 희미해져 갔다. 스물일곱. 젊지만,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다. 현실적인 것

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사회 초년생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 는 주변 친구들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인가,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도 같 았다.

여행을 가고자 하는 이유가 명확해야 하는데, 별로 명확하지 않다. 가서 확실히 무엇

을 하겠다는 다짐도 없다. 단지 내 인생의 젊은 한 날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전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단지 그 정도가 이 긴 여행의 목

적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애인과 보내는 시간 이 점점 애틋해질수록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는 것도 두려웠다. 내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변함없이 이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을까. 그의 어깨를 바라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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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을 지나 봄이 왔다. 4월,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마음을 다잡아 갔다. 어

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 가야만 했다.

같이 여행을 준비하는 언니에게 물었다. 이번 여행이 언니에게 뭘 가져다주면 좋겠

느냐고. 언니는 이번 여행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깊은 공감을 표하면서, 한편으로 나는 이 여

행을 통해 뭘 배우고 싶으냐고 스스로 되물었다. 여전히 이렇다 할 답은 떠오르지 않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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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내 삶을 살아내고 있다.

어떤 불운과 시련이 닥쳐도 견딜 수 있을 의연하고 단단한 마음이 내게도 생겨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긴 여행이 내게 가져다 줄 무수한 영향력

에 대하여. 비록 처음에는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씩 내 삶 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시간은 결코 다시 돌 아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것도. 그저 이 마음이 긴 여행에서도 지치지 않고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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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당신의 봄은 콘텐츠 에디터. 취미는 사랑. 특기는 공상.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해 씁니다. 낯선 곳에서 여행이 아닌 일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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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글 밤하늘은하수 Sisimiut, Green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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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15


친구와 음악 축제. 그린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시시미웃Sisimiut’에 가기

로 마음먹은 이유 두 가지다.

내가 그린란드 사람을 처음 만난 곳은 아이슬란드였다. 그린란드에 대한 호기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금의 석사 과정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런 나의 첫 그린란드 친 구가 이곳 시시미웃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 간에 도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그린

란드는 바로 옆 마을에 가더라도 비행기나 배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 탓에 그린란드 에 1년 반 넘게 살면서도 친구의 집을 방문해 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한번 갈게.” 매 번 말뿐이었다.

2014년부터 매년 4월, ‘Arctic Sounds’라고 하는 음악 축제가 시시미웃에서 열리

고 있다. 올해 2017년에는 4월 6일부터 9일, 총 나흘간 열렸다. 노르딕 Nordic 국가 1)

출신 뮤지션들이 시시미웃에 모여 전통 음악에서부터 팝, 포크, 일렉트로닉 그리고

록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다. 본래 축제 광이었던 나에게 그린란드에서 열 리는 음악 축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찬스였다.

1) 그린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스웨덴, 아이슬란드, 에스토니아, 페로 제도, 핀란드 등 16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그린란드 밴드 Piitsukkut의 공연.

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17


뮤지션들의 공연 시간과 장소는 Arctic Sounds 홈페이지에 공지됐다. 보고 싶은

두 뮤지션이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공연을 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척 고민이 됐

는데, 한 공연의 절반만 보고 다른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묘안으로 난감한 상황을 극 복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에게 ‘노르딕 음악’은 그렇게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나조차도 어떤 음

악가들은 생소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추천받은 뮤지션이 나의 취향이 아닐 때가 많

았다. EDM을 기대하고 갔던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의 음악이 내게는 제삼 세계의 음 악처럼 낯설게 들려 적응하기 힘들기도 했다. 차라리 1년여 동안 누크에서 들어오던

Da Bartali Crew, Malik, Piitsukkut, Secure Escape 같은 그린란드 출신들의 음악이 내게는 더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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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시미웃에는 내가 기대하고 갔던 음악 축제보다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시미웃은 북극선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린란드 내에서는 부동不凍항

이 위치한 가장 북쪽 지역인 동시에 개썰매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가장 남쪽 지역이기 도 하다. 그런 면에서 시시미웃이라는 도시는 그린란드 내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곳이다.

시시미웃 출신 친구들에게 시시미웃에 가서 꼭 해야 할 것을 물어보았더니 일 순위

로 꼽은 것이 바로 스노모빌 체험이었다. 스노모빌은 누크에서도 탈 수 있었지만, 시 시미웃은 누크와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누크와 달리 시내 중심에서 3Km만 벗어나 도 스노모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레저로 스노모빌을 즐길 경우 특별한 라이센스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경험이

전무하였기에 친구 등 뒤에 딱 붙어 탔다. 뒷좌석임에도 아쉬움은 없었다. 시원한 속 도감을 느끼며 바람과 대지를 마음껏 즐기기에는 뒷좌석도 충분했다.

눈으로 덮인 땅을 미끄러지듯 달리는 기분은 오토바이로 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시내 중심에서 얼마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탄 스노모빌 앞뒤로 사람 그 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대지가 펼쳐졌다. 오직 스노모빌이 지나간 긴 두 줄 자 국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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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21


우리는 세 시간 동안 총 50km를 달렸다. 많은 것을 보았지만, 꼭 하나 소개하고 싶

은 게 있다면 바로 개썰매다. 그린란드에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내 눈으로 직접 개썰 매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썰매를 모는 아저씨가 입은 하얀색 북극곰 바지 조차 너무나 신기했다.

썰매를 끄는 개들은 주로 도시 변두리에서 길러지고 있었다. 대부분 줄에 묶여 있었

다. 그린란드 개들은 성질이 사납다. 늑대와 교배하여 나온 종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

렇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로웠다. 개썰매의 주인과 대동하 면 거리를 좁혀도 되지만, 이마저도 안전하지는 않다. 줄에 묶여 있지 않은 건 새끼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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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23


시시미웃에 사는 친구에게 또 한 가지 고마웠던 것은 매끼 그린란드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린란드에서 그린란드 전통 음식을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

다.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퓨전 요리 혹은 창의적인 요리를 하 는 곳은 많지만, 전통 음식만큼은 거의 가정에서만 먹을 수 있다. 그린란드 여행자들 이 도대체 어디서 현지 전통식을 먹을 수 있을까 의아해 할 만하다.

내가 시시미웃에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준비해 준 음식은 메기 수프였다. 메기는 크

기부터 남달랐다. 게다가 특별한 양념을 하지 않고 냄비에 메기와 양파만 넣고 푹 끓 여 냈을 뿐인데 무척 깊은 맛이 나는 수프가 됐다.

친구가 이누이트 여자들의 칼인 울루를 사용하여 요리를 하는 모습도 메기의 크기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외국인인 내가 보기에 더 그린란드스러워서 괜히 좋았다. 그 린란드에서는 요리를 할 때뿐만 아니라 바느질을 하거나 전통의상을 만들 때도 울루 를 사용한다.

다음 날 친구가 준비한 요리는 고래 고기 스테이크였다. 고래 고기는 퍽퍽하고 비리

기 십상이라 즐겨 먹는 요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간장 양념으로 재운 고래 고기는 지 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고래 고기에 대한 편견을 싹 없애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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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루로 메기를 써는 친구.

특제 고래 고기 스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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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인 누크가 그린란드 안에서 현대적인 도시의 역할을 맡고 있다면, 시시미웃은

약간 친근하고 시골스러운 면이 있는 알록달록한 동네였다. 시시미웃을 방문하면서 그린란드를 조금 더 많이 알게 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달빛 밝은 밤, 이런 곳이라면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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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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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밤하늘은하수는 세계 최대 섬인 그린란드에 사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 린란드 대학교에서 West Nordic Studies 전공으로 사회과학석사과정 중에 있으 며, 그린란드 관광청 (Visit Greenland)에서 Student Assistant로 일하고 있다.

시시미웃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29


문화 예술의 도시에서 산다는 것 글 Stella Kim Firenz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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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의 도시에서 산다는 것 31


1817년,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

당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스탕달은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다리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는 이 기괴

한 경험을 일기에 남겼다. 그 두근거림은 아마 바로크 시대의 극사실주의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가 그린 <베아트리체> 때문이었을 거라고.

그가 사망한 뒤에도 피렌체를 관광하는 사람들 중 같은 증상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

다고 한다. 피렌체의 아름다운 회화와 르네상스와 중세를 오가는 건물들에 매료되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현상에 ‘스탕달 신드롬’이란 이름이 붙 었다.

이런 감정이 나에게도 한 번쯤은 올까? 그림, 조각들을 보면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

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는 걸까? 그동안 피렌체에 살면서 그림과 도시 이야기에

벅차오르는 감동은 느껴봤지만, 두오모 성당 쿠폴라의 464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을 때만큼 다리가 후들거린 적은 아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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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크로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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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스탕달 신드롬에 피해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

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은 대신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돌 아다니면 된다고. 피렌체는 작은 골목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골목골목 넋 놓고 거 닐다 보면 이대로 길을 잃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내가 가이드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건 미켈란젤로도, 그가 조각한

피렌체의 상징 다비드도 아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에서 사는 느낌은 어떤가요? 일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이다. 그들에게 어떤 내 일상을 얘기해줄까 고

민하지만, 사실대로 다 이야기하자면 꽤나 길어질 거다. 꼬박 하루 동안 내 이야기만 들어야 할 거다.

피렌체에서 관광객들이 보고자 하는 두오모 성당, 베키오 다리, 시뇨리아 광장 등 주

요 관광지는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 유유자적 3시간 정도 걷다 보면 도시는 내 안에 다 들어와 있다. 그 길이 그 길이고 두 번 이상은 다녔던 골목이다. 대중교통이 필요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오롯이 걸어서 도시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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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키오 궁전

문화 예술의 도시에서 산다는 것 35


투어를 마치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반나절 동안 쉼 없이 피렌체 곳곳을 소개하고

다니다 보면 온몸의 기를 다 분출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일을 끝날 때쯤엔 어딘가에 잠 시라도 앉아 숨을 돌려야 한다.

오늘은 어느 작은 골목 안, 의자 3개가 놓인 이탈리아식 선술집에서 보낼까 한다. 그

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골목에 교묘하게 터를 잡은 작은 와인 바이다. 토스카나 레드 와인 한 잔과 달콤한 꿀에 치즈를 찍어 한 입 베어 물으면 하루의 고됨이 풀어지는 듯 하다.

낯선 동양인이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바에 앉아서 와인을 마시고 있으니 동네 지나

다니는 이탈리아 할아버지들이 한참을 신기하듯 쳐다본다. 그냥 지나치는 법도 없다.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궁금한 건 참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 동양인에게 다가와 대화를 시도한다. 일본인인지 중국인인

지를 확인하는 질문에 한국인이라고 답변하기를 수십 번. 피렌체에 약 300명의 한국 인이 산다면 일본인들은 그 두 배 하고도 반이 넘게 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양

인 여행자는 알지 못할 비밀스러운 장소에 내가 앉아 있으면 당연히 이 도시에 거주 하는 일본인이리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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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유학생인지 여행객인지를 묻고 난 뒤, 기다렸다는 듯 피렌체의 역사와 예술

가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면 부족한 이탈리아어로 답한 것을 가끔은 후회 하게 된다. 때로 관광객인 양 이탈리아어를 잘 모른다고 질문을 회피하면, 이탈리아 에 와서 왜 영어를 쓰냐며 역정을 낸다.

“내가 한국에 가서 일본어로 음식을 주문한다면 좋겠냐?”

결국 이탈리아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역

사와 문화 이야기에 몰두한다. 친절하게도 천천히 또박또박. 이런 연유로 난 미술대 학 교수를 역임했거나 미술관에서 근무했다 은퇴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친구로 지내기도 한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들이 문화고 예술이다. 하나같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고,

50년 넘게 살아온 도시임에도 그 끝없는 매력과 마력에 사로잡혀 피렌체를 떠나지 못 한다. 그래서 그들 그대로 문화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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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가운 볕을 피해 그늘진 골목을 들어간다.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오페라 가수의 노

래를 따라 작은 바에 앉으면 한 잔의 여유가 있고, 고개를 들면 하얀 구름이 ‘파아란’ 하늘에 스며들어 있다. 바 위에 놓인 작은 화분들 속 아름드리 핀 꽃향기에 취해 서늘 한 듯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레드 와인 한 잔의 시간을 오롯이. 그 순간도 예술이다.

매일 비슷한 일상이고, 여유로움 가득하다. 지극히 평범하다. 피렌체를 배경으로 찍

은 옛 영화들을 보면 수년이 지난 현재와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 10년, 100년이 흘 러도 피렌체는 지금 그대로 문화, 예술을 간직한 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도시 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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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푸블리카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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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글쓴이 Stella Kim은 짧은 여행이 아쉬워 낯선 도시에 닿으면 3개월 이상 살아 보고자 했다. 호주를 시작으로 필리핀, 이탈리아, 말레이시아, 태국에 머물렀다. 다시 이탈리아에 돌아와 4년째 피렌체에서 거주하며 여행을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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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글 루꼴 Lisbon, Coimbra, and Porto, Portu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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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43


모처럼의 일이었다. 여행하는 열흘 내내 거짓말처럼 비가 퍼부었다. 잠시 빗방울이

멈추면 그 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지금껏 20여 년 여행을 하면서 이토록 지독하고 끈질기게 비를 맞으며 여행한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래도 믿었다. 그간 늘 운이 좋았던 것처럼, 행운의 여신이 손짓

하여 아름다운 포르투갈의 햇살을 마주할 거라고. 그런데 사흘이 지나면서 조금씩 고 개가 갸우뚱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그렇게 끝내 우산 없인 다닐 수 없는 여행 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마음을 비우면서 포르투갈의 있는 그대로의 빛을 마음속에 담아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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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45


포르투갈행 항공권을 끊기 전까지 여정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유럽의 끄

트머리에 위치해 있고, 직항은 당연히 없으며, 아무리 스카이스캐너를 검색하고 유 럽 항공사 사이트를 뒤져보아도 저렴하면서 시간대가 적절한 항공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난 돈에 신세를 졌다. 한국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날아간 후 비싸지만

같은 터미널에서 떠나는 포르투갈 항공권을 결제한 것이다. 그리고는 룰루랄라 여행 날을 기다렸다.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리스본에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로

이동하며 본 차창 밖의 리스본은 유럽의 고풍스러움과 남미의 빈티지함을 섞어놓은 느낌이었다. 노란 트램이 눈에 띌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즐거운 비명

이 터져 나왔고, 모든 건물과 창문을 꾸미는 포르투갈식 타일 장식(아줄레주) 또한 볼

때마다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저마다 다른 스타일과 컬러감을 뽐내는 타일의 향 연에 취해 길을 걷는 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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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47


그렇게 며칠을 리스본에서 지내면서 포르투갈식 여행에 길들어졌다. 영어가 잘 통

하진 않았지만 그들만의 친절한 표정과 몸짓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출출해질 즈음이면 언제 어디서나 선명한 노란색 에그 타르트를 사서 먹었다. 파삭파 삭 쫄깃한 식감에 속도 든든해진다니! 더군다나 가격은 한 개 천오백 원꼴. 이 감동적 인 맛이 한국이나 홍콩, 마카오에서 파는 것의 반값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유난히 다른 나라의 대학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당일치기로 코임브라도 다녀왔

다. 포르투갈 중부에 위치한 코임브라는 이 나라 최고의 지성 도시로 유명하다. 1210 년 개교한 코임브라 대학 때문이다. 12세기에 지어진 산타크루즈 수도원, 13세기에 지어진 교회도 압권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코임브라 대

학 도서관이다. 고서에서만 나는 특유의 냄새에 대학의 유구한 역사가 느껴져 절로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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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임브라 대학 도서관의 웅장하고 화려한 실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49


여정의 마지막 도시는 포르투였다. 많은 이들이 방문 전부터 극찬해 마지않았던 그

곳, 포르투. 리스본에서 출발한 버스가 포르투로 진입하던 순간, 도오루 강 위로 펼쳐 지던 그림 같은 풍경이란…. 유럽의 재발견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을 만큼 아름다웠 다.

주황색 지붕 사이사이 골목마다 노랑과 흰색으로 칠해진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리

스본과 매한가지로 갖가지 타일이 그 외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강가를 둘러싼 와이너

리 거리를 걸으며 포르투 와인에 취했고, 취기 때문인지 강의 아름다운 야경에 반해 서인지 발걸음은 가벼웠다. 또, 조앤 K.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쓰는데 큰 영감

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렐루 서점은 관광객의 입장 시간을 따로 지정해 놓았을 만큼 이 동네의 명소가 된 지 오래였다. 여느 관광객이 그러하듯 우아한 나선형 나무 계단 앞

에 줄을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했다. 이런 여러 가지 매력 때 문에 많은 이들이 유럽 최고의 여행지로 포르투를 손꼽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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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51


그런데 나의 지나친 감탄사 연발(?)이 신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우산 두 개

를 사용하면서 매일 비 오는 포르투갈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는데, 와이너리에 갔 다가 카메라를 떨어트리는 사고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단언컨대 여행 중에 카메라는 내게 여권보다 소중하다. 내가 매 컷 최선을 다해 찍

은 여행의 기록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인 시음을 하 다가 그 차갑고도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카메라를 내팽개치고 말다니! 일순간 나

도 모르게 지른 비명소리와 주변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기억한다. 모서리가 비참하 게 부서진 카메라를 다시 주워 담으려니 내 부주의를 원망하는 것도 부족해 나 자신

을 용서하기 힘들 정도였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여정의 마지막이라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비도, 카메라도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가 늘 바라는 대로만 되지는 않 을 테니까.

52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결론적으로는, 그럼에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포르투갈이었다. 여행 내내 비가 오고

카메라를 박살냈다는 가슴 아플 만큼 잊지 못할 이유에서 또 포르투갈에 가야 할 명

분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아니 감사하기까지 한 여행 이 아닌가. 해가 짱짱 뜰 다음 포르투갈 여행을 기다리며 난 오늘도 그곳에 다시 갈 날 을 꿈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53


54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글쓴이 루꼴은 최소 2개월에 한 번은 비행기를 타줘야 제대로 된 행복한 인생이 라고 믿는 여행교 교주. <미국 서부 셀프트래블> 외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베스 트셀러 직딩 여행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55


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글 miya Amsterdam, Neth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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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57


사랑하는 사람과 공항에서 재회하는 것만큼 애틋한 일이 또 있을까?

국경을 넘는 짜릿함과 게이트 너머 들떠 있을 그의 얼굴. 그는 비행기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을 들여다보며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지친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사

람들 사이에서 나의 얼굴을 찾을 것이다. 다가가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그 설레 는 한 순간을 위해 게이트를 바라본다.

H와 알게 된 건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직장 신입 시절, 유난히 위계질서

가 엄격했던 회사 분위기 속에서 동갑내기인 H에겐 언제나 깍듯한 존대와 호칭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매일 계속되는 야근에 점심, 저녁, 간식까지 세 끼를 함께하며 열네 시간을 꼬박 붙어있다 보니 이내 한숨 섞인 연애사까지 공유 하며 서로 토닥이는 베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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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헤이그에 회의가 잡혔다는 H의 반가운 연락에, 쓰던 논문을 팽개치고 암

스테르담으로 날아갔다. 나는 런던에서, H는 인천에서. 출발지는 달랐지만 비행기 도착시간은 같았다. 공항 라운지 저편에 나타난 H에게 두 팔 벌려 달려가 얼싸안고 방방 뛰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나오고 만다.

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59


기차는 단 17분 만에 우리를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내려놓았다. 오후 회의까지는 여

유가 있어서 담(Dam) 광장 주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은 이미 크리 스마스였다. 역을 나서자마자 도로를 따라 늘어선 사람들. 그 틈을 헤집고 들어갔더 니 크리스마스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있었다.

네덜란드에는 신터클라스(Sinterclaus)와 검은 피터(Zwart Piet)라는 독특한 크

리스마스 문화가 있다. 신터클라스는 12월 5일에 찾아와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 고, 나쁜 아이에게는 하인 검은 피터가 벌을 준다. 온몸을 새까맣게 칠한 검은 피터가

퍼레이드 선두에서 아이들에게 비스킷을 나눠주며 분위기를 돋운다. 사실 이는 네덜

란드가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네덜란드에서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논란을 일으키며 전통이다, 인종차별이다, 대립이 첨예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던 우리는 눈앞에서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휙휙 날아다니는 피터 에게 손을 뻗어 비스킷 몇 알을 얻어내 두 볼 가득 우물거리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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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61


담 광장으로 향하는 골목에는 트렌디한 옷가게, 레스토랑, 치즈 가게, 펍, 카페가 뒤

섞여 지루할 새가 없었다. 먹고 싶은 토핑을 골라 만드는 ‘Burger Bar’의 수제 버거 는 내 인생 버거였다. 아삭거리는 채소, 한입 베어 물면 숯불 향이 코를 찌르는 두툼한 패티, 살굿빛 체다 치즈에서 느껴지는 궁극의 고소함까지.

흡족하게 배를 채운 우리는 고풍스러운 왕궁을 뒤로하고 담 광장을 가로질렀다. 마

차, 핫도그, 거리공연, 관광객, 비둘기로 뒤섞인 광장 끝에 얼키설키 각목을 쌓아놓은

듯 독특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그 주변을 서성이는데 훈남 하나가 나타나 매거 진에 쓸 크리스마스 특집 기사 취재 중이라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크리스마스에 뭘 할 건가요? 나는 런던 월세 방에서 쓸쓸히 라면을 끓일 것 같네요, 하고 말했다. “교 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북한 망명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 같습니다.” H의 상반된

답변이 훈남 기자를 감탄시켰다. 잡지에 실리면 한국까지 보내준다는 말에 주소를 꼭 꼭 눌러 적고 구태여 핸드폰 번호까지 남겨줬다.

어느덧 H의 회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는 서둘러 헤이그를 향해 떠났고, 나는 회의

가 끝날 때까지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브라운 카페(Bruin café)를 찾아 유대인 지 구(The Jordaan)에 가보기로 했다.

62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63


브라운 카페는 네덜란드의 전통 펍을 일컫는 말이다. 담배 얼룩과 세월의 흔적이 나

무로 지어진 벽과 천장을 짙은 갈색으로 물들여 브라운 카페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 다. 안네의 집(Anne Frankhuis)을 지나쳐 수로 옆 근사한 은행나무 아래 브라운 카

페 ‘Cafe ‘t Smalle’로 들어섰다. 짙은 고동색 바 뒤로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각종

술병과 술통들, 낮게 드리운 샹들리에와 낡은 테이블에 마치 18세기로 시간을 거슬 러 온 듯했다.

삐걱거리는 좁은 계단을 따라 천장이 낮은 2층으로 올라갔다. 단출한 가구는 본래의

선명한 고동색을 잃은 대신 세월의 빛이 더해졌다. 아늑한 다락방 같았다. 작은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이라고는 나와 옆 테이블의 영국 남자 셋뿐이었다. 하

이네켄이 이렇게 청량한 맥주였던가, 일기장을 꺼냈다. 이따금 창문 너머 옆집을 들 여다보다가, 옆 테이블 남자들이 아주 진지하게 네덜란드 여성을 품평(!)하는 얘기를 훔쳐 듣다가, 문득 그들의 이야기에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솟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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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65


어느새 석양이 은행나무에 내려앉았다. 금빛으로 물든 구름 아래 가로등이 하나씩

불을 밝히고, 잘 깎아놓은 연필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건물들이 물 위로 흔들렸다. 발

개진 얼굴로 수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보니 저 멀리 나를 기다리고 있는 H가 보였다. 나는 또다시 두 팔 벌려 그 설레는 한 순간을 위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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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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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miya는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 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 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시간을 거슬러, Bruin Café 69


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글 margareta Firenz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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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71


겨울에 토마토는 너무 비쌌다. 마트에 갈 때마다 토마토를 집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은 사지 못하고 돌아서곤 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거리에 벚꽃이 흩날리고 외투 가 얇아지더니, 현관 앞에 날아든 마트 전단지에서도 토마토가 제 몸값을 내렸다. 그 길로 남편과 함께 마트에 달려갔다. 잘 익은 토마토를 여러 개 집어 저울 위에 올려도 겁이 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빨간 토마토를 큼지막하게 잘라 접시 위에 놓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 샐러리 한줄기를 얇게 썰어 색을 더했다. 거기에 소금, 발사믹 비네거, 그 리고 올리브 오일을 둥글게 뿌려놓았다. 순식간에 샐러드 한 접시가 완성됐다.

여기에 시금치 페스토를 바른 빵과 버섯을 썰어 넣은 스크램블 에그를 곁들였다. 휴

일에 어울리는 느지막한 아침식사, 나는 토마토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마침내 기나 긴 겨울을 지나 그렇게 돌아온 순간이었다. 입 안 가득 산뜻하고 개운하게 퍼지는 토

마토 과즙, 곧이어 따라오는 올리브 오일의 깊은 향미. 토마토가 뜨거운 태양을 상기 시킨다면 올리브 오일은 나를 토스카나의 어딘지 모를 곳으로 데려온 듯 했다. 순식

간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거기에서도 피렌체에 있던 시간 속으로 빠져 들어가 아득 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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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73


피렌체 요리 유학 시절 나는 페르난다 할머니의 집에서 머물렀다. 봄이라 말하기엔

이른 3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이 층 집이었고, 꼭 그래야 한다는 듯 내 방은 이 층 에 있었다. 할머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여자의 체형과는 거리가 먼 작은 체구였다.

그녀의 주위엔 항상 그녀가 태운 담배 냄새가 떠돌아다니며 공기를 어지럽혔다. 가끔 은 그 냄새가 그녀가 내는 인기척보다 먼저 다가와 집안 어딘가에 있는 그녀의 존재 를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매일 피렌체 국립대학의 비서실로 정시 출퇴근을 하며 규칙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

는 그녀에게도 몇 가지 인생의 낙이 있었다. 늘 식탁 한 모퉁이에 놓여 있는 와인과 그

녀 전용의 작은 잔, 그리고 저녁 8시마다 다이닝 룸에 있는 티비에서 펼쳐지는 퀴즈 프로그램. 와인 마개는 늘 같은 걸 썼는데, 피렌체 기념품 가게에서도 많은 이들의 사 랑을 받는 피노키오 인형이 달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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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식사 시간마다 전용 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며 자신도 퀴즈 프로그램에 참가

한 양 열성적으로 퀴즈의 답을 맞히고는 했다. 그 다음으로 그녀를 기쁘게 하는 건 매

주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과 지인들을 불러 모아 함께하는 주말 식사 자리였다. 손수 차린 음식을 마음과 시간이 맞는 사람들과 나눠 먹으며 그녀는 지나간 이야기들을 하 나씩 풀어놓았다. 이 시간에 초대 받는 이들은 대체로 페르난다 할머니의 친구인 마 리아 할머니와 정원사 다니엘레, 피렌체 대학교에서 와인을 공부 중인 유학생, 그리 고 할머니 집에 세를 들어 살던 나였다.

피노키오 와인 마개가 뽑히면 식사가 시작된다. 안티파스토, 프리모 피아띠, 세꼰도

피아띠 그리고 디저트가 차례로 등장하고, 정오에 시작해서 오후 3시에서 4시까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75


그런 식사 초대가 있기 며칠 전이면 그녀는 서재에 있는 꽤 많은 양의 오래된 레시피

책 중 몇 권을 골라 그날을 위한 요리를 골랐다. 나는 1인용 소파에 앉아 레시피 책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돌아오는 주말 점심 요리에 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거나 그 녀를 따라 다른 레시피 책 몇 권을 꺼내 보는 것을 좋아했다.

페르난다 할머니는 계절에 어울리는 요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봄에는 싱그러운

녹색의 채소를 잔뜩 넣어서 요리를 해야 해. 봄에 나는 아스파라거스는 절대 빠질 수 없지.” 예컨대 그렇게, 식탁 위에 계절을 올릴 수 있다는 듯, 그녀만의 규칙과 철학을 레시피 안에 담아 넣었다.

언젠가, 아마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친구 한

분이 자신의 집에서 수확한 무화과를 우리에게도 나눠주셨는데, 태어나 처음 먹어보 는 생무화과였다. 그저 달기만 했던 말린 무화과와는 달리 잘 익은 생무화과에서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독특한 맛과 향이 났다. 그 오묘한 맛의 매력에 빠져 며칠에 걸

쳐 내 몫의 무화과를 아주 천천히 아껴 먹었고, 그럼에도 하나씩 사라지는 무화과의 숫자를 세며 어찌할 바를 모르곤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남은 무화과를 먹을 땐 너무 아쉬워 울상을 지었는데, 페르난다 할

머니가 우리 집 정원에서도 곧 무화과 열매가 열릴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하 지만 그 무화과가 열릴 즈음에 여름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므로 난 페 르난다 할머니의 정원에서 수확한 무화과를 끝내 맛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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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77


페르난다 할머니는 계절을 따라다녔다. 계절이 할머니를 따라다녔는지도 모른다.

여름이 되면 할머니는 다채로운 향의 생허브를 이용한 요리와 함께 이런저런 과일을 썰어 차갑게 만들어 먹는 마체도니아라는 디저트를 즐겨 드셨다. 이 여름용 디저트는

봄이나 겨울에는 오로지 딸기만을 이용해 레몬즙과 레드 와인, 설탕을 뿌려 하룻밤 냉장고에 재워두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사실 이 변칙적인 마체도니아가 더 좋았 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옥수수 가루로 만든 폴렌타라는 요리 를 만들었다. 폴렌타는 뜨거운 가스불 앞에서 오랜 시간 국자를 젓는 인내 끝에 만들 어지는 음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가을 혹은 겨울에 만들어 먹는 것이 좋다.

이탈리아의 겨울은 여름만큼이나 혹독하다. 마침내 사계절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페르난다 할머니는 감자로 만든 뇨끼를 크림소스에 버무려 먹고는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부엌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도마와 밀대 방망이를 늘어놓고 잘 삶아

진 감자를 으깨 밀가루를 조금씩 흩뿌려가며 뇨끼 반죽을 만들었다. 반죽은 포크로 지그시 눌러 장식을 새겨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감자의 식감은 겨울과 잘 어울렸 다. 모포처럼 혀를 감싸주는 그 질감이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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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절감이 느껴지는 정원과 그 정원이 내다보이는 부엌에서 계절에 어울리는 요

리가 만들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참으로 좋았다. 일요일 아침, 우리 집 식탁에 올린 토 마토 샐러드에도 그녀에게 배운 요리 철학을 조금 뿌려놨을지 모른다. 토마토, 샐러 리, 발사믹 비네거와 올리브 오일. 싱그럽고 향긋하며, 어딘지 모르게 깊은. 우린 그 런 형용사들로 또한 봄을 수식하기도 하니까.

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79


80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글쓴이 margareta는 꽃이 좋고 요리가 좋다. 식탁 위에 뭔가를 올려놓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다이닝 잡지사에서 일했고, 플로리스트가 되었다. 요즘은 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에 거기서 꼭 가고 싶은 곳을 고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페르난다 할머니의 계절 요리 81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며 글 라이언 Epilogue. Reykjavik, Iceland.

82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며 83


84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다 보면 지구의 신비와 경이로움에 연신 감탄하게 된다. 냉혹한

날씨 때문에 먹을 것 하나 재배할 수 없던 아이슬란드의 자연은 이제 인간들에게 축 복처럼 다가온다.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며 85


흐베리르에 가면 이 모든 게 확실해진다. 뜨거운 증기가 솟아 나오는 땅을 보고 있으 면 살아있는 지구의 모습을 목도하는 것 같다. 뜨거운 증기가 폭발하면서 생겨난 웅 덩이를 한 바퀴 돌자 신발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됐다. 발을 잘못 디뎌 화상을 입는 사 람도 종종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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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베리르에서 나오는 유황은 화학 제조용으로 유럽 등지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의 삶에 도움은 됐겠지만, 그것이 하필 무기를 만드는 데 쓰였다는 것은 아이

러니한 일이다. 이젠 이곳에서 나오는 증기를 난방에 활용한다고 한다. 인간이 앞으 로도 자연을 지혜롭게 활용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며 87


88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용암 밭과 그 사이를 흐르는 온천수가 장관인 이곳. 희뿌연 청록색 분위기가 흡사 바 다 같다. 몽환적인 분위기는 나에게 당장 뛰어들라고 속삭인다.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며 89


겨울철 아이슬란드의 온천은 여행의 피로를 씻어내고 다음 여행지로 떠날 수 있는 활 력을 준다. 하늘을 보며 사색에 잠기기에도 좋다. 오롯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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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엔 오로지 오로라를 보기 위해 오는 장기 여행자들이 많다. 그들을 ‘오로 라 헌터’라고 부른다. 나 또한 같은 이유에서 여기에 왔지만, 장엄한 오로라를 보며 감 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이상으로 온천에서 보낸 시간은 감격스러웠다.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며 91


척박한 땅과 혹독한 기후라는 조건 속에서도 아이슬란드의 삶은 계속된다. 이곳 바이 킹의 후예들은 자연에 지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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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이슬란드 여행에서는 이곳의 풍광을 만나는 데 주력했었다. 언젠가는 지금까

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이슬란드의 신화,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마주하고 싶다. 그때 까지 아이슬란드는 불과 얼음이 공존하는 나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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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áumst síðar, Ic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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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라이언은 54개국, 162개 도시 이상을 여행한 여행 작가. 강의와 여행 컨 설팅, 여행 칼럼 기고 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작 <비지트 아이슬란드>를 비롯한 다수의 여행 서적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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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여행 매거진 BRICKS - 취중유람 醉中遊覽


여행 매거진 BRICKS - 유럽 특집호 Vol.1

발행처

알레투어 앤 미디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서울숲2길 32-14 갤러리아포레 B1 112호 이수진

발행인

이주호

편집장 편집인

광고 및 기고문의 웹진 및 홈페이지 SNS

신태진

02-465-4352

bricksmagazine@aller.co.kr

http://www.bricks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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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매거진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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