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문화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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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사업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포천문화원∙경기도문화원연합회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포 천 문 화 유 적 지 도 .......................4p 포 천 문 화 유 적 현황 .......................6p 1. 국 가 지 정 문 화 재 ...........................8p - 보물 .........................................10p - 사적 .........................................12p - 명승 .........................................14p - 천연기념물 ...............................16p 등/록/문/화/재 ............................18p


2. 경기도지정문화재 ......................20p - 유형문화재 ...............................22p - 무형문화재 ...............................28p - 기념물 ......................................30p 문/화/재/자/료 ..........................36p

3. 포천시지정문화재 ...................40p - 향토유적 ...................................42p 전적기념물 ..............................72p




문화재 현황표 [국가지정문화재] 구

포천시 소재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소 계

0 2 1 2 4 0 0 9

등록문화재

2

11

포천시 소재

6 2 9 0 17

[경기도지정문화재] 구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 념 물 민속문화재 소

5

문 화재자료 합

22

포천시 소재

[포천시지정문화재] 구

49

향 토유적 합

49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7



1. 국가지정문화재 국가지정문화재란 문화재청장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중요문화재로서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및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등 7가지로 분류된다. 현재 포천시에는 보물 2점, 사적 1점, 명승 2점, 천연기념물 4점으로 총 9점이 있으며, 지정문화재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지정문화재 외 근대문화유산 중 보존과 활용을 위한 특별 조치가 필요한 문화재인 등록문화재 2점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징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서경우 초상 및 함 (보물 제1897호)

<서경우 초상 및 함>은 오사모에 흑색 단령을 입은 좌안 7분면의 전신교의좌 상으로서 쌍학흉배를 하고 있다.

서경우(1573∼1645)는 1603년(선조

화면 속 인물의 안정적 모습을 연출하기

36)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주목사, 좌승

위해서 양 어깨의 형태나 경사 각도를 약

지를 거쳐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경기

간 과장하여 처리했다. 사모는 모정이 평

도관찰사, 도승지, 형조판서, 우의정 등 주

평하고 양각은 넓고 짧으면서 둥근 17세

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기 초의 모제를 반영하였다. 사모는 굵고

서경우 초상은 지금까지 큰 손상 없이 원

검은 선으로 윤곽을 규정하고, 그 안에 엷

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으로

은 먹으로 운문을 그려 넣었다. 안색은 옅

17세기 초상화의 우수성과 수준 및 특

고 밝은 살빛을 띠고 이목구비는 약간 짙 은 갈색 선으로 하였다. 특히, 바깥 양쪽으 로 뻗치는 의자 손잡이 모습은 17세기 초 의 시대성을 보여주는 회화사적 의의가 큰 초상이다. 함은 조선시대 후기의 것으로서 초상화 와 함께 역사성을 일정 정도 공유하고 있 기 때문에 함께 국가지정문화재로 가치가 크다.

> 소재지 : 포천시(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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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서문중 초상 및 함 (보물 제1898호)

서문중(1634∼1709)은 조선 후기의 문 신으로 1680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하여 당상관에 올랐으며, 후 판서를 비롯

> 소재지 : 포천시(개인 소장)

한 여러 요직을 거쳤다. 1698년 우의정을 시작으로 1699년 좌

서문중 초상은 조선시대 시복본 전신좌

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정치적으

상 가운데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는 뛰어난

로 소론에 속했으며, 군사제도와 기근구

작품으로 평가된다. 오사모에 담홍색 시복

제 등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 등 족적이 선

을 착용하고 삽은대를 두른 전신교의좌상

명하다.

으로 교의에는 표범가죽이 덮여 있고 족좌 대에는 민돗자리가 깔려 있다. 얼굴과 신 체의 비례가 적절하고 인물의 개성과 특징 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함은 조선시대 후기의 것으로서 초상화 와 함께 역사성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 기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가치가 크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11


국가지정문화재

포천 반월성 (사적 제403호)

포천시 군내면에 위치한 이곳은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 나, 조사 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 실이 드러났다.

> 소재지 :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3290번길 19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

반월성지는 해발 283m의 청성산(일명

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

반월산) 정상을 중심으로 축조된 퇴뫼식

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게 되

산성이다. 둘레가 1,080m로써 포천시 주

어 있다.

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성곽 중에서 그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성은 특히 마홀수해

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치성 4개소,

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고 새겨진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

기와 조각이 출토 되어 포천시의 옛 고구

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

려 지명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 밖에 <

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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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TIP

!! 이중로 정사공신 교서 (보물 제1174-1호)

이중로(1577~1624) 선생은 조선

군되었다. 이중로의 <정사공신 교서>

조 개국 공신인 청해백 이지란 선생의

는 인조 3년(1625) 4월 반정에 참여

후손으로 인조 ‘이괄의 난’때에 경기

한 공신에 대한 포상의 내역을 알 수

강원 양도의 방어사가 되어 싸우다가

있는 자료이다.

예성강 상류인 마탄에서 순사하였다. 그 후 인조 1년(1623) 김류, 이귀 선

현재 이중로 선생의 묘는 포천에 위 치하고 있다.

생 등과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 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청흥군에 봉

> 보관장소 : 용인 기흥 상갈로 6 (경기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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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포천 화적연 (명승 제93호)

영북면 자일리와 관인면 사정리 경계에 있는 화적연은 한탄강에 있는 큰 바위와 깊은 연못으로 이루어진 절경이다. 마치 볏짚 단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상이여서

> 소재지 :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 산115

‘볏가리소’를 한자로 번역한 ‘화적(禾 積)’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은 어

자 물이 왈칵 뒤집히며 용의 머리가 쑥 나

느 날 늙은 한 농부가 3년 가뭄에 비 한 방

왔고, 꼬리를 치며 하늘로 올라가더니 엄

울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면서 “이 많

청난 비를 뿌렸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부

은 물을 두고서 곡식을 말려 죽여야 한다

터 이 지방에 가뭄이 들면 화적연에서 기

는 말이냐?하늘도 무심커니와 용도 3년

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수면 면적

을 두고 낮잠만 자는가 보다.”라고 탄식하

은 약 400평, 수면 위 높이는 13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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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포천 한탄강 멍우리 주상절리 협곡 (명승 제94호)

포천 한탄강 멍우리 협곡은 한탄강변을 따라 주상절리가 잘 발달되어 수려한 경 관을 보여준다. 멍우리 주상절리는 한탄강 의 대부분 협곡과 달리 하식애 양안이 모

> 소재지 : 포천시 관인면 뗏마루길 147

두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협곡으로 높이는 20~30m 내외이며 길이는 약 4km이다. 협곡 구간에는 주상절리의 침식과 박리

애, 고토양층의 발달 과정 등을 관찰할 수

로 인한 소형 하식동굴이 약 30여기 이상

있는데 이는 지질·지형학적인 가치를 지

형성되어 있다. 멍우리 협곡은 선캄브리아

닌다. 또한 주상절리 협곡 길이가 약 4km

기 변성암류와 상부의 제4기 현무암질 용

에 달해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을 연상시

암류 사이의 부정합 구조, 주상절리, 하식

킬 만큼 풍광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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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한탄강 대교천 현무암 협곡 (천연기념물 제436호)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냉정리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에 걸쳐 있는 이 협 곡은 다양한 기둥 모양의 바위틈과 굴착 작용 및 마식 작용에 의한 하상 지형을 이

> 소재지 : 포천시 관인면 냉정리 1101

루고 있다. 한탄강 연안에는 현무암 평원 이 발달하고 있으며, 현무암 평원을 관류

차지한다.

하는 한탄강 유로에는 경관이 특이한 현

현무암 협곡의 총 길이는 약 1.5Km이고

무암 협곡이 형성되어 있다. 철원 대교천

협곡의 깊이는 20∼30m로 경관이 빼어나

현무암 협곡은 그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

며 현무암 내에 보존되어 있는 주상절리의

으로서 제4기의 지질과 지형 발달을 이해

우수한 보존성 등은 제4기 지질을 이해하

하는데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포천 직두리 부부송 (천연기념물 제460호)

고 나란히 서서 서로를 안고 있는 듯한 기 이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 치 한 그루처럼 보인다. > 소재지 :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2985번길 180(직두리)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 선(포천)의 정기를 끊기 위해 영험한 신

군내면 직두리 부부송(夫婦松)은 수령

성을 가진 이 소나무의 가지 10개를 잘라

이 약 3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그루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의 처진 소나무는 나지막한 동산을 뒤로하

무속 신앙인들이 기도처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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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포천 한탄강 현무암 협곡과 비둘기낭 폭포 (천연기념물 제537호)

고 작은 하식동과 주상절리, 판상절리, 협 곡, 용암대지 등 포천-철원-연천지역의 지형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 > 소재지 : 포천시 영북면 대회산리 415-2

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용암분출에 따른 침식기준면의 변동과 수계발달 간의 작용,

포천 한탄강 현무암 협곡과 비둘기낭 폭

용암대지 내의 폭포 발달 과정을 알 수 있

포는 한탄강 용암대지가 개석되면서 형성

는 독특한 폭포 지형으로 지형·지질학적

된 현무암 협곡과 폭포로 그 주변에는 크

가치가 매우 크다.

포천 아우라지 베개용암 (천연기념물 제542호)

아우라지 베개용암이 위치한 곳은 영평 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아우라지 는 두 강물이 만나서 어우러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아우라지라 는 지명이 있다.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신흥리 209-8

유로를 따라 흐르다가 물이 고여 있는 곳

베개용암은 현무암이 물과 만나 급랭하

에서 물과 만나 급랭하여 형성된 것이다.

는 곳에서 베개모양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현무암질 용암은 온도가 약 1200도 정도

것이다. 베개용암은 흔히 볼 수 없는 구조

인데, 물과 만나 바로 냉각되어 굳어버렸

인데, 이곳에서는 여러 개의 베개를 쌓아

다. 또 뒤에 밀려오던 뜨거운 용암이 굳어

놓은 듯한 베개용암을 볼 수 있다. 베개용

버린 현무암의 틈으로 빠져나와 또 굳어버

암은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구 한탄강

리고 이렇게 해서 베개용암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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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구 포천성당 (등록문화재 제271호)

1955년경 군(軍)의 도움으로 건립된 고 딕 양식이 가미된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석조 성당이다. 1990년 화재로 목조 마룻 바닥과 목조 지붕틀 등이 소실되어 현재

> 소재지 : 포천시 왕방로 191(신읍동)

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정면 중앙의 종탑, 화강석 조적 조의 포 인티드 아치창, 두꺼운 벽체(60~65cm),

호)과 공간적 특성(단일홀에 의한 강당형

버트레스 등이 특징인 건물로, 한국 전쟁

평면 구성) 및 화강석 조적 구법의 특징을

직후에 건축된 석조 건축이 갖고 있는 전

잘 보여주고 있어 종교사적, 건축 양식사

형적인 의장적 특성(종탑과 뾰족 아치 창

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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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포천 방어벙커 (등록문화재 제578호)

포천 방어벙커는 남과 북이 날카롭게 대 치하고 있던 1948년에 북한군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당시 38도선 부근에 4개의 진지를 설치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42-2번지

하여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6·25전 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었 다. 6·25 전쟁 후 4개의 진지 중 3개소는 훼손되었고 현재 포천 방어벙커만 유일하

카롭게 대치하고 있던 상황을 보여 주는

게 남아 있다. 이곳은 6·25 전쟁 전에 남

전적 기념물로 전쟁의 참상을 잘 보여 주

과 북이 각각 단독 정부를 세우고 서로 날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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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기도지정문화재 경기도지정문화재란 도지사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경기도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로서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및 민속문화재 등 4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현재 포천시에는 유형문화재 6점, 무형문화재 2점, 기념물 9점이 있으며 경기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향토문화 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경기도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자료 5점이 있다.


경기도지정문화재

청성사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64호)

신라 말의 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857: 헌안왕 1~?)을 봉향하는 사당이다. 영조 44년(1768) 영중면 금주리에 고운영당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춘추 향사를 모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청성사길 99

셔 오던 중 철폐되었으며 이후 포천 유림 의 발의로 193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 고 청성사라 개칭하였다. 선생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 때 과거 에 급제하여 표수 현위를 지냈으며 「토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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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격문」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29세에 한림학사 등 벼슬을 역임하던 중 신라 국운이 기울자 해인사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 향사 일은 9월 15일이다.


경기도지정문화재

용연서원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0호)

용연서원은 한음 이덕형, 용주 조경 두 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숙종 17년 (1691)에 이사상 선생 등이 건립한 곳으 로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듬해에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신창길 7

용연(龍淵)이라 사액되었다. 이곳은 훗날 서원 철폐령에도 포천에 서 유일하게 온전하게 보존된 서원으로 본전을, 1986년에 강당 및 내외 삼문, 홍 6·25 전란으로 다 타버렸는데 1972년에 살문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23


경기도지정문화재

인평대군치제문비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5호)

인평대군은 조선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이다. 치제문비는 글과 그림 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던 인평대군이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형인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 222번길 12-49

효종과 후대 왕들이 그의 인품과 업적을 치하하며 지었으며 임금이 제문을 직접

교에 중책을 수행한 공적 등에 대해 적혀

짓고 쓴 어제어필(御製御筆) 비문이다.

있다.

치제문비에는 인평대군의 생애를 비롯

제1비는 1693년(숙종 19)에 쓰고 1724

해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서 겪

년(경종 4)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 효종 후

었던 고초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 외

면엔 숙종의 어제어필이 새겨있고, 제2비 는 1792년(정조16)에 세운 것으로 상단 에 영조, 하단에는 정조의 어제어필이 새 겨있다. 인평대군치제문비는 조선시대 임 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소 중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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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정문화재

포천석조여래입상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5호)

포천석조여래입상은 왕방산 해룡사의 서 북향 50m지점에 있다. 기단 위에 배 모양 의 주형거신광배(舟形巨身光背)와 신체 > 소재지 : 포천시 어룡동 산 32-1

를 큰 바위 하나에 조각하였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2.63m, 광배 너비와

모습과 배를 내민 형태에서 통일신라시대

두께는 각각 1.2m와 11cm다. 불상 높이는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 수

2.3m, 머리높이 64cm, 어깨 너비 79cm,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볼 때, 얼굴에 살

가슴너비 28cm다.

이 빠져 있고 양 손의 길이를 다르게 표

머리 위에는 혹처럼 생긴 큼직한 육계가

현하는 등 의문의 처리가 소략한 점으로

있는데 육계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

보아 고려 시대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

얼굴은 역삼각형이며 이마에는 미간 사이

정된다.

에 백호를 새겨놓았다. 백호는 부처의 흰 머리터럭으로 백호에 서 나오는 광명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 고 한다. 깊게 패인 눈썹부터 내려오는 코 는 얼굴에 비해 큰 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양 뺨의 살이 빠져 광대뼈가 나오고 주 걱턱의 형상이다. 귓불은 길게 늘어져 양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배의 하단에 U장형의 유문이 유려하게 흐르고, 양 소매에서 내 려온 의문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배 를 약간 내밀고 있으며, 왼손은 펴고 오른 손은 들어 어깨에 대고 있는데, 특히 얼굴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25


경기도지정문화재

포천 동화사 목조불좌상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20호)

포천 동화사 대웅전에 안치된 목조여 래좌상은 아쉽게도 복장물을 도난당하 여 귀중한 내용물은 잃어버렸지만 17세 기 여래좌상의 형식과 양식을 잘 반영하 고 있는 작품이다. 이마에는 작은 백호가 있는데, 부처 등 의 백호에서 나오는 광명의 빛은 온 세상

> 소재지 : 포천시 이동면 성장로 1289번길 29

을 두루 비춘다고 한다. 목조여래좌상의 반쯤 뜬 눈꼬리는 살 짝 치켜 올라갔고, 둥근 눈썹과 이어지 는 코는 삼각형처럼 보인다. 귀는 비교 적 큰 편으로 양 옆으로 넓게 벌어져 있 다. 목에는 원만하고 광대한 불신을 나타 내는 상징적 형식인 삼도가 있다. 법의는 양 어깨를 모두 덮은 모습인데 이러한 형 태를 통견이라고 한다. 팔목을 거쳐 흘러 내려 가부좌를 튼 양 무릎 사이에 부채 꼴의 옷주름을 보인다. 또, 특이하게 가 슴과 배 사이에 여섯 잎의 연꽃을 조각 해 놓았다. 그리고 대의 뒷면 처리가 매 우 독특한데 뒷면 처리에 대한 무관심이 나 작가 개인의 창의적 표현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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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정문화재

서고(徐固)대에 이르러 포천에 정착했다. 포천 대구서씨 백자묘지 및 석함

이후 서성(徐渻)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06호)

고 아들 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이 후 대구서씨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경화사

포천 대구서씨 백자묘지 및 석함은 조선 중기(명종)부터 조선후기(순조)까지 경

족의 일원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정치 및 학문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화사족을 대표하는 대구서씨 집안의 업적

대구서씨는 조선중기 이후 중안 관인으

과 문화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

로서 활동하였고 동시에 포천이나 장단,

화유산이다. 대구서씨는 조선 초 경기도

가평, 양주 등지에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장단지역으로 세거지를 이동한 후 12세인

현재 포천중중 소장 대구서씨 묘지석은 이

▽ 서고

장이나 개장 과정에서 수습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 서명인

▽ 서성 ▽ 서매수

▽ 서종급

> 소재지 : 포천시 호국로 8883번길 90-12 (설운동, 서동성 개인 소유)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27


경기도지정문화재

는 소리, 받는 소리, 메는 소리, 맺는 소리 포천메나리

의 다섯 마당으로 편성되어 각기 역할을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35호)

분담하여 부름으로 한 소리로 완성시키는 것이 독특하다. 그 내용은 농사일의 과정

메나리는 ‘농부 노래’를 뜻하는 순수 우

에 따라 ‘써레질 소리(소몰이)’, ‘모내기

리말이다. 포천은 논일과 밭일에 대한 노

소리(열 소리)’, ‘애벌 논매기 소리’, ‘두

동요가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소리 또한

벌 논매기 소리(메나리)’ 등으로 구성되

우수하다. 그 가운데 논맬 때 부르는 ‘포

어 있다.

천메나리’는 포천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 요다. ‘포천메나리’는 메기는 소리, 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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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메나리길 72 (포천메나리 보존회)


경기도지정문화재

풀피리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38호)

풀피리는 초적(草笛) 또는 초금(草琴) 이라고도 불렸던 향악기로 나뭇잎이나 풀 잎을 접어 입술에 대고 휘파람을 불듯 소 리를 내어 연주하는 악기이다. 농민들이 주로 연주하였던 풀피리는 전문 악사들에

> 소재지 : 포천시 영북면 북원로255번길 24 (보유자 오세철)

의하여 궁중음악으로 승화되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풀피리를 무 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에 힘을 기울이

민속 기악곡, 메나리, 각도 민요 연주뿐만

고 있다. 현재 보유자 오세철 선생은 초금

아니라 한탄강 아리랑을 작사 및 작곡하여

(草琴) 연주법을 바탕으로 청성곡, 산조,

풀피리의 전승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29


경기도지정문화재

이항복 선생 묘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24호)

이항복 선생은 선조 13년(1580) 알성문 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 5번이나 병 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삼정승을 두루 거 치고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시호는 문충 이다.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 예장되었으 며, 그 후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 사를 받들었다. 작은 구릉 위에는 부인 안동 권씨 묘와 더 불어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 앞에 묘 비 상석, 혼유석, 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 이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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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 4-2


경기도지정문화재

채산사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30호)

항일 의병운동의 의병장이자, 대마도 순 국 열사로 명성이 드높은 면암 최익현 선 생과 우국 지사 염재 최면식 선생을 봉향 하는 사당이다. 채산사는 1906년 최익현 선생이 순국하자 유림들이 그의 우국충정 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는데, 1927년 일 본군이 헐어서 없애 버렸으나, 광복 이후 1947년에 이르러 사당을 복원해 위패와 영정을 봉안해오다가, 1975년 낡아서 무 너진 것을 해체·복원하였다. 1989년 포천 염재 최면식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함께 유림의 뜻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봉안하여 매년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낸다.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청성사길 101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31


경기도지정문화재

서성 선생 묘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35호)

약봉 서성 선생 묘는 곡담 양머리에 장 방형의 화강석을 세워 장식한 후 봉분을 중심으로 하여 사괴석으로 돌렸고 봉분의 호석은 높고 둥글게 한 후 봉토하였다. 묘 전방에 묘비와 혼유석, 상석이 서 있다.

> 소재지 : 포천시 설운동 산1-14번지

선생은 명종 13년(1558)에 출생하여 선 조 19년(1586) 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

민 국경인의 반란으로 잡

호조·공조판서를 두루 거쳐 대사헌, 우참

혀갔던 왕자와 재상을 지

찬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토

략을 써서 구해냈다.

화산서원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46호)

효종 10년(1659) 화산서원으로 사액을 받 았다. 고종 5년(1868)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그 뒤 유림들이 뜻을 모아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227-40

사우터에 단을 만들고 향사(享祀)를 이어 왔다. 1971년 포천 유림들이 화산서원 복 원 추진회를 결성하여 본전인 인덕전을 복

백사 이항복 선생을 배향한 서원으로 창 원하고, 지속적으로 동강재와 필운재를 보 건 당시(1631년)에는 백사(白沙)서원이 수하고 고쳤다. 매년 음력 9월 12일에 향사 었으나 지금의 자리인 ‘꽃뫼’로 이전한 후 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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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정문화재

충목단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102호)

충목단에는 사육신 중 한 분인 유응부 장군의 유허비와 단비가 세워져 있다. 공 은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한 무인으로서 평 안도 절제사를 거쳐 1455년 동지 중추원

> 소재지 : 포천시 소흘읍 소흘로116번길 13

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1456년 성삼문, 박

(1746)에 설단 봉안하였으나 서원 철폐령

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중 김질

에 의해 고종 1년(1864) 헐어서 없애버렸

의 배신으로 잡혀 고문 끝에 생을 마쳤다.

다가 고종 27년(1890) 복원하여 한남군

사후 숙종 때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목

이어, 병마절도사 퇴은 양치 선생을 추가

공의 시호와 정려가 내려졌고, 영조 22년

배향했다. 향사 일은 9월 11일이다.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130호)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 의 동생으로 학문이 깊고 서예, 그림에도 능했다고 한다. 37세에 요절한 인평대군 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조를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 222번길 12-49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그 후 인조가

명성을 떨쳤다. 신도비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자 인

묘역 입구에 세워졌는데,

조 18년(1640)에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높이 325㎝의 거대한 규

갔다 왔고 효종 1년부터 네 차례나 사은사

모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가 되어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외교관으로

정교한 모습이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33


경기도지정문화재

포천 영송리 선사유적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140호)

포천 영송리 선사유적은 하천을 따라 형 성된 영평천 주변의 계단 모양의 지형 위 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유적은 청동기 시 대 후기에서 삼국 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 소재지 :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 158-2

발견된 곳으로 포천 지역에서 선사 시대 유적으로는 최초로 조사된 곳이다.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94년 7월부

견된 바 있으며, 유적의 지표조사에서 신

터 9월까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발

석기 시대의 토기가 채집되었다. 이를 통

굴된 유적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의 집터와

해 볼 때 영송리 유적에는 오랜 기간 동안

유구,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유적의

우리 선조들이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을

주변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가 발

이루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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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정문화재

포천 고모리산성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185호)

고모리산성은 고구려의 남진 과정에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 기지 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이다. > 소재지 :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산 64

이곳은 특히 나당 전쟁 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매초성이 승리를 거둔 권역내의 성으로 역사 학계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 해 봐야 할 성지이다. 고모산과 노고산(해

성이다.

발 380m)에 걸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성

안타깝게도 현재는 대부분이 붕괴되어

은 고모산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데 두

정확한 성벽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개의 계곡을 끼고 있는 일종의 포곡식 산

그 터만은 포천에서 잘 보존 중이다.

포천 자작리 유적지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220호)

상유구 4기가 발견되었고, 2호 주거지는 길 이가 23.6m에 이르는 대형 수혈 주거지와 부뚜막 등 당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귀 > 소재지 : 포천시 호국로 1145번길 20

중한 자료이다. 출토 유물은 동진대 중국청 자편, 통형기대, 파수부동이, 대형 옹, 심발

자작리 유적은 한성백제 시대의 지방 거점

형토기 등인데 이로 미루어 일반 마을과는

마을유적이다. 2001년 발굴 결과 주거지 5

현격한 차이가 있는 독자적인 지배 영역임

동과 소형유구 6기, 굴립조 건물지 1동, 구

을 알 수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35


경기도지정문화재

포천향교 (경기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6호)

포천향교는 고려 명종 3년(1173)에 창 건되었으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 를 갖추고 있다. 선비나 유생들이 학문을 닦는 학교(지금의 고등학교)였으며 공자

> 소재지 :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 3274번길 37

를 비롯한 5성(五聖)과 송대 4현(宋代四 賢) 및 동국명현(東國名賢) 18위의 위패

으로 일부가 파손되었다. 1983년에 대성

를 모시어 배향하고 있다. 창건 이래 원형

전과 명륜당을 복원하고 지속적으로 동재,

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1592년)으로 다

서재, 내·외삼문, 담장 등을 복원하여 현재

타버리고 이듬해 복원하였으나 6·25 전란

에 이르고 있다.

포천 금현리 지석묘 (경기도지정 문화재자료 제47호)

으로 낮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였다. 상 석은 화강암으로 563cm×478cm×45cm 의 규모이며, 둘레는 16m로 판석형이다. 이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304-10

정도의 판석을 움직여 얹으려면 장정 200 명 정도는 동원 되어야 한다고 볼 때 당시 주변에 1,000명 정도 집단이 주거하였으리

금현리 지석묘(支石墓)는 청동기 시대의

라 추정된다. 즉, 이 지석묘는 그 시대에 포

선사 유적으로 무덤이며 고인돌이라고도 한

천에도 사람이 부족을 이루며 살았음을 증

다. 이 지석묘는 탁자형의 전형적인 북방식

명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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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정문화재

현재 이 터에는 당시 안채, 사랑채, 대문 포천 안동김씨 고가터

자리가 남아있으며, 장대석 및 초석, 계단

(경기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8호)

석 등이 산재해 있다. 확인이 가능한 사랑 채는 사각형 초석을 놓아 기둥을 올렸으

안동김씨 고가터는 조선 시대 포천 지역 에 거주했던 안동김씨의 고택으로 2004

며, 계단석이 남아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 면 대문은 솟을대문이었다고 한다.

년 발굴조사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 등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이 고가터는 금수정 진입로 부근에 위치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 고가 터에는 99칸이나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38선에 인접하여 인 민군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국군의 북진 때 소실되었다.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전영로 1128번길 57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37


경기도지정문화재

불법총론 (경기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79호)

2014년 8월 2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된 불법총론은 조선 중기 에 제작된 전적류의 책으로 2001년 왕산 사로 부임했을 때 청매 스님이 찾아와서

> 소재지 : 포천시 호병골길 193(신읍동 왕산사)

가사와 경전을 주면서 잘 보관하라는 부 탁에 의해 소장하게 되었다. 천마산 사문 보일 스님이 편찬한 불법을

과 달리 희귀본인 불교개론 필사본이며 순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경전을 참고하여

한글로 정리된 조선시대 불교개론서로서

저술한 책으로 추정되며, 궁체로 쓴 필사

는 최초로 소개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본으로 왕실에서 궁녀에 의해 쓰여진 것 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언해본 경전

포천시에는 전적류(서지)의 지정문화재 가 없으므로 전후 세대의 활용 및 학술자 료로서의 가치가 클 것이다. > 불법총론이 소장되어 있는 포천 왕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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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정문화재

의 화기가 잘 남아 있어 제작 당시 상황 및 포천 화봉사 신중탱화 (경기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82호)

시주자와 그들의 신앙 특성 등을 상세히 알 수 있으며, 화면구성과 도상, 화풍 면에 서도 19세기 중반 신중도의 전형적인 양

탱화가 소장되어 있는 포천 화봉사는 고

식을 보여준다.

려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조

덕분에 탱화 제작 모습 등을 살필 수 있

선 시대 고종대 화봉사 스님과 불자들이

는 유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탱화

삼전각의 삼탱화를 불사하기 원하여 조성

는 1867년(고종 4) 오봉산 석굴암에서 제

을 발원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한 것을 옮겨온 것이다.

화봉사 신중탱화의 경우 조선말기 근기 지방의 탱화 제작 양식을 보여주는 불화 이며, 171cm×129cm의 규모이다. 불화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227-37(화봉사)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39



3. 포천시지정문화재 포천시지정문화재란 시장이 문화재보호법, 전통 건조물 보존법 및 경기도문화재보호 조례의 규정에서 제외된 향토유적 가운데 역사 및 예술상의 가치가 있고 이에 준하는 고고학적 자료와 향토유적으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고 기대되는 유적을 포천시 조례에 의거하여 지정한 문화재로서 이를 향토유적이라고 한다. 현재 포천시에는 향토유적 49점이 있다.


포천시지정문화재

씨(全州崔氏)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 전계대원군 묘 및 신도비

다. 원형의 봉분 둘레에 호석을 둘렀으며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호)

봉분 뒤편으로는 기와를 얹은 곡장을 둘렀 다. 봉분 오른쪽에 방부개석형(方趺蓋石

전계대원군은 철종의 생부이다. 헌종이

形) 묘비가 있으며, 봉분 좌우측 끝에 망주

후사 없이 승하하자 전계군의 아들 원범이

석과 무인석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왕위에 오르니 곧 그가 곧 조선의 제25대

신도비에는 전자로 ‘유명조선국전계대원

왕 철종이다. 전계군은 현종 10년(1844)

군신도비명병서’라 기록되어 있고 ‘숭정

에 별세하여 양주에 안장하였다가 철종 2

기원후사병진삼월일립’이란 문구로 보아

년(1851)에 포천으로 이장되었다. 1986

철종 7년(1856)에 건립되었다. 묘역입구

년 4월 포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에 신도비각이 있고 일자각의 위쪽으로 묘

전계대원군 묘 신도비는 왕방산 기슭에 부

역이 있다.

인 완양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 전주 최

> 소재지 : 포천시 삼육사로 2111번길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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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자작리 지석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호)

자작리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가는 43번국도 서 쪽 자작동에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의 형 식은 탁자식으로 평지에 조성되었다. 덮

> 소재지 : 포천시 호국로 1145번길 14

개돌(427×347×55cm)과 4개의 받침 돌이 있으며, 석재는 화강암이다. 무덤방 안의 규모는 180cm×122cm이고, 높이 다. 무덤방은 포천천이 흐르는 방향과 일 는 144cm이다. 남쪽에 있는 받침돌은 고 치하고 있는데, 동쪽으로 30도 정도 틀어 의로 깨뜨린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 져 있다.

효자 오백주 정문 (포천시향토유적 제3호)

호부사와 귀성진병마첨절제사에 올랐다. 공직 생활이 청렴결백하여 당시 사람들 의 모범이 되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구하 > 소재지 : 포천시 정문동 1길 38

기 위해 지성으로 기도하였고, 산삼과 석 밀(石密)을 구해 병을 고쳐 나라에서 정

조선 숙종 때 효자 오백주(1643~1711)

문이 내려졌다. 이 정문에는 공의 증손 오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경종 3년

수진 선생과 그의 부인 인천 이씨, 오몽량

(1723)에 건립했다. 포천 태생의 공은 효

선생의 처인 문화 유씨의 효자 열녀 정문

종 10년(1659) 무과에 급제하여 귀성도

도 함께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43


포천시지정문화재

류인선 효우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호)

류인선 선생은 성종 23년(1492) 포천 자 작동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어질고 착해서 어버이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다가 돌아 가신 뒤에도 3년간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

> 소재지 : 포천시 자작동 153

고 사는 시묘(侍墓)를 지냈다. 5형제가 한집에 살면서 우애가 깊어 소

현 선생이 짓고 김상옥 선생이 썼으며, 뒷

문이 자자했고, 명종 4년(1549)에 효우정

면은 봉래 양사언 선생이 글을 짓고 썼다.

려를 내렸다. 정문을 세우는 대신 비석으

화강암으로 정교한 거북등 위에 세워졌

로 대신하였다. 효우비는 명종 4년(1549)

고, 비의 뚜껑돌은 팔작지붕형의 골기와

에 건립되었고, 비석 전면의 비문은 이의

를 조각했다. 구읍리 석불입상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5호)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은 전체적으로 불신 의 비례가 잘 어울리지만 조각 기법이 섬 세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표현된 경향을 보 > 소재지 :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167-1

이고 있어 고려 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 로 추정된다. 석불은 낮은 석축 위에 조성 되었는데 주변에서 기와와 토기편이 발견

이 석불은 포천향교 뒤편에 위치하고 있

되는 점으로 보아 원래는 보호각이 있었

다. 석불이 있는 절터는 약 700평 정도의

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미륵불로 알

규모로 보이는데, 석불의 전면에 2단의 기

려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

단을 구축하고 남서향의 사찰을 건립했던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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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구읍리 미륵불상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6호)

이 미륵불상은 구읍리에 소재한 용화사 법당 안에 봉안되어 있다. 거석불로 비록 원형이 손상되어 있지만 파손된 부분에 석 고를 발라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 소재지 : 포천시 군내면 포천로 1444

이 석불은 규모의 거대함뿐만 아니라 세 부적인 수법을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고려 시대

미륵불상은 수도인 개성과 가까운 경기도

거석불이 경기도 안성에서부터 충청도와

북부지역에 건립되어 있어 거석불의 발생

전라도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구읍리

및 계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군내면 선정비군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7호)

감과 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던 사 람들의 업적을 기리고 칭송하고자 조성한 공덕비군으로, 모두 13기의 비가 보존되 > 소재지 :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 2-4

어 있다. 원래는 다른 장소에 있었으나 1997년에 현재 장소인 청성산 기슭의 청성문화체육 공원으로 이전했다.

군내면 선정비군은 조선시대 후기인 19 세기 초엽부터 19세기 말엽까지 포천의 현

군내면 선정비군은 포천 지역의 향토사 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45


포천시지정문화재

이경여 선생 묘 및 신도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8호)

이경여 선생 묘는 정경부인인 풍천 임 씨와 합장되어 있고 묘 앞에는 상석, 향 로석, 우측에 묘비 좌우에는 동자석, 문인 석, 망주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이경여 (1585~1657)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

> 소재지 :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산22

로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이 다. 벼슬은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 형조

는 문정(文貞)이다. 신도비는 현종 10년

판서, 우의정, 영중추부사, 영의정 등을 지

(1669)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

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선생이 짓고, 심익현 선생이 글씨를 썼으

저서로 <백강집(白江集)>을 남겼다. 시호

며 김만중 선생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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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효자 신급 정문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9호)

이 정문은 포천 출신의 효자 신급(1543~ 1592)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 다. 공의 맏형인 신집은 승지였고, 동생 신 립, 신할은 왜구와 싸워 나라를 지킨 명문 집안이다. 공은 고고한 선비로 벼슬에 뜻 을 두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어머 니를 모시고 강원도 이천으로 피신하여 산 위에 올라가 적정을 살피고 내려온 사이, 어머니와 가족이 적에게 화를 당했다는 잘 못된 소식을 듣고 멀리 떨어져 있던 맏형

> 소재지 :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734-2

과 전사한 두 동 생을 생각하고 불 효를 자책하며 절 벽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이규채 선생 행적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0호)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402

이 행적비는 이규채 선생의 조국 광복을 위해 바친 공로와 독립투쟁 정신을 기리 기 위해, 1982년 포천 출신 독립 유공자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 다. 이규채(1888~1947) 선생은 창신서화 연구회를 창설하여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전개했고, 상해로 망명하여 1924년 임시 의정원의 의원으로 피선, 1930년 한국독 립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34년 신한 독립당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1935년 왜 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 역 중 1940년 가출옥되었다.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연맹위 원, 미소공동회의 대책국민연맹 대표위 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등을 지냈 고,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 1995년 건 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47


포천시지정문화재

정기안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1호)

정기안(1695~1767) 선생은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28년 별시문과에 급제 하고, 1752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 온 뒤 대사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선생 은 유·불·선교는 물론 의술, 음률, 산수에 도 정통했으며 저서로 <만모유고(晩慕遺 稿)>가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 2기와 혼유 석, 상석, 향로석, 지주석, 망주석 등이 배 치되어 있다.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가산리 산 42-1

묘비는 순조 31년(1831) 아들 정만석 선 생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김재찬 선생이 짓고, 이익회 선생이 썼으며, 유한지 선생 이 전자(篆字)하였다.

이범영 선생 공적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2호)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80

이 공적비는 이범영(1890~1955) 선생 의 항일독립운동과 민족 교육사업에 헌 신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포 천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건립위원회에 서 포천유지들의 정성으로 건립되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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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독립지사, 교육자로서 청성학교를 설 립, 충의를 교훈으로 민족혼을 고취했으며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 대동청년당 결성 에 참여하여 항일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포천소 비조합을 창립했고, 그 후 교편을 잡으면 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광복 후 한국독립 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활약하였으며, 화산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63년도에 독립유 공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 추서되었다.


포천시지정문화재

류경선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3호)

류경선 선생 묘는 정부인 전주 이씨와 합 장묘이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동자석·망주석 등이 배 치되어 있는데 장명등은 1981년 도난 당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 34

했다가 이후 후손이 다시 건립하였다. 류경선(1519~1575) 선생은 조선 중기

수를 역임했다. 선조 2년(1569) 한성부서

의 무신으로 가산면 방축리에서 출생했다.

윤을 거쳐 영암군수, 경원부사 1573년에

명종 8년(1553) 과거에 합격한 뒤 도총부

는 충청수사가 되었고, 이듬해 회령부사,

도사를 거쳐 웅천현감, 제주판관, 양산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정만석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4호)

형조참판, 우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 임했다. 순조 12년(1812) 평안도 관찰사 가 되어 홍경래의 민란으로 피폐된 민생을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시우동2길 55-19

수습하여 생사당이 세워졌다. 그 후 한성판윤,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

정만석(1758~1834) 선생은 조선 순조

정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때 청백하기로 이름 높았던 문신이다. 정

<관서신미장계(關西辛未狀啓)>가 있으

조 7년(178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며 시호는 숙헌이다. 묘역에는 봉분을 비

뒤 성균관 전적, 대간직을 거쳐 여러 차례

롯하여 묘비 2기와 혼유석, 상석, 향로석,

암행어사로 나갔다. 병조참의, 동래부사,

망주석, 산신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49


포천시지정문화재

264m²이고 봉분의 높이는 1.5m, 둘레는 심통원 선생 묘 및 신도비

4.8m이다. 단분인 원형의 봉분 둘레에 낮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6호)

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 최근 새로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고 묘비 앞

심통원(1499~1572) 선생은 조선 중기

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다.

의 문신으로, 중종 32년(1537) 별시문과

봉분 좌우측 끝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에 장원급제 한 뒤, 우승지, 좌승지, 경상도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귀부

관찰사를 역임했다.

와 이수를 갖춘 1면 비로 비문은 아들 진이

이어 예조참판, 한성부판윤, 우의정을

울며 지었다고 하며 아들 방은 전액을 썼

거쳐 명종 1년(1564) 좌의정에 올랐다가

으며, 손자 유학(幼學) 극명(克明)이 글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역의 전체 면적은

을 썼다고 기록되었다.

> 소재지 :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 산 21

50


포천시지정문화재

금수정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7호)

금수정은 우두정(牛頭亭)이라는 작은 정자였다. 김명리라는 사람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경치가 하도 좋아서 작은 정자를 세우고 우두정이라 했는데 그 위치가 소의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

머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정 자를 에워싸고 흐르는 물도 우두연이라 하

수정이라 개칭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였다고 한다. 김명리는 후에 봉래 양사언

옛 정자는 6·25 동란 때 소실되고 포천

에게 이 정자를 주었는데 봉래 선생이 금

시비 지원으로 현재 정자로 복원되었다.

송우리 태봉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18호)

인 정희왕녀의 태를 태운 재를 묻은 곳이 라 전한다. 그래서 왕녀봉이라 불린다. 현 재 팔각형 목조건축으로 보호각을 세웠다. > 소재지 :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 산 28-3

태항은 훼손되어 없어졌으며 석대와 개석 만이 남아있다. 석대는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데, 화강암 으로 직경 97㎝, 잔존높이 16㎝이다. 석대

이 태봉은 송우리 송우 초등학교 뒤 태봉 산 정상부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소생

상면의 개석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상 면이 좁은 원통형이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51


포천시지정문화재

최면식 선생 공적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0호)

이 공적비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손자 이자 독립지사인 최면식(1891~1941)선 생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 와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선생은 1910년 조선이 국치를 당하자 국 외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해 수시로 국내 에 잠입하여 군자금 및 무기조달에 전념하 였으며 그 후에는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에서 수차 옥고를 치렀다. 1917년 광복단 조직을 위해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갔다.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829-3

1921년 다시 밀입국 하였으나, 광복단 사 건으로 체포되어 공주 형무소에서 복역 후 출옥한 뒤 순국했다. 1977년 독립유공 대 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 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성여완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1호)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산24

성여완 선생 묘는 부인 경안택주 금성군 나씨와의 합장묘로서 묘역에는 상석, 향로 석, 묘비 2기, 동자석, 문인석 등 석물이 배 치되어 있어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봉분의 우측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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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는 태종 1년(1401)에 건립한 것이다. 성여완(1309~1397) 선생은 고려 말기 의 충신으로, 충숙왕 5년(1336) 문과에 급 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우왕 때 정당 문학상의에 이르러 창녕부원군에 봉해졌 으나 정몽주 선생이 선죽교에서 돌아가시 자 고려의 국운이 쇠퇴했음을 알고 포천 의 왕방산에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검 교문하시중에 창성부원군으로 봉해졌으 나 끝내 사양하고 절개를 지켰다. 시호는 문정이고 창령의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포천시지정문화재

성석린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2호)

성석린(1338~1423) 선생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자 명필가로 성여완 선 생의 아들이다. 1357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거쳐 양광도 관찰사를 지낼 때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산 23

큰 흉년이 들자 의창을 설치하여 백성의

초(眞草)를 잘 써 당대 명필로 이름을 떨

구호에 노력하였다. 이후 여러 요직을 거

쳤다. 묘는 부인 화숙택주 순흥군 안씨와

치면서 예문 대제학, 문하 찬성사에 올랐

합장묘로서 묘 앞에는 상석 2기, 장명등,

고 조선 개국 후에는 창녕부원군에 봉해졌

그리고 좌우에는 신·구 묘비와 문인석 2

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시문에 능하고 진

기가 배치되어 있다.

만세교리 태봉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3호)

각에 소장된 <태봉등록(胎峰謄錄), 규( 圭)12893>에 의하면 이 태실의 주인공은 영조 14년(1738) 1월 29일에 태어난 영조 후궁 소생의 옹주아기씨로 되어있다. 금표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산 8-3

(禁標)에 의하여 엄격히 보호받던 이 태 실은 일제시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어 오늘날 석재만이 남아 위치를 증 명해 주고 있으며 표석에 건륭3년 정월 29

만세교에서 남쪽으로 500m 거리인 태 봉산 정상에 있는 태실이다. 서울대 규장

일 축시생, 건륭 3년 3월 26일 오시 립이 라 새겨져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53


포천시지정문화재

조영원 선생 공적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4호)

조영원 선생 공적비는 조영원 선생의 민족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와 애국 정신을 기 리기 위하여 1982년 포천유지들이 뜻을 모 아 건립한 것이다. 조영원(1892~1974) 선 생은 1920년 상해로 망명, 상해임시정부 의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옥수로 58번길 4 창수초등학교

정원의원, 임정 국무원 비서장서리 등을 지

선생은 1933년 만주에서 왜경에게 최포되

냈고 1926년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 신

어 사형수로 복역 중 5년 간 집행 유예로 본

민부의 군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해림신창

국에 합송되었다. 광복 후 한국독립당 대표

학교를 창설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1931

최고위원으로 피선되기도 하였고, 1968년

년 한국독립군총사령부 총참모로 독립군 규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0

합 및 한·중 연합전을 교섭하여 실현시켰다.

년 건국훈장인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청해사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5호)

의형제하여 조선 개국을 적극 도왔다. 고 려에서는 청해백에 봉해지고 조선에서는 청해군에 봉해졌으며 양조에서 높은 벼슬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포천로 2721번길 18

을 했다. 이중로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무관

조선 개국공신이며 청해 이씨의 시조인

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이 되

이지란 선생과 그의 후손 정사공신 이중로

었으며 이괄의 난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모시는 사

병조판서에 추종되었고 시호는 충장이다.

당이다. 이지란 선생은 태조 이성계와 결

청해사의 향사는 매년 음력 3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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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옥병서원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6호)

옥병서원은 사암 박순 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동은 이의건, 문곡 김수항, 촌로 김성 대, 유심재 이화보, 존성재 윤봉양 등 여섯 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인조 27년(1649) 박순 선생의 학덕을 추 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지었으며 숙 종 39년(1713)에 옥병(玉屛)이란 사액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면

(賜額)을 받았다. 그러나 서원 철폐령으

서 대사헌, 대사간, 삼정승을 역임하였다.

로 철거되어 없어졌다가 다시 1980년에

옥병서원의 경내 건물로는 6칸의 숭현각,

사당과 삼문, 담장과 동·서재, 홍살문을

삼문으로 구성되었고 매년 3월 중정(中

복원되었다. 박순 선생은 명종 8년(1553)

丁)일에 향사를 모시고 있다.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옥수로 327번길 189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55


포천시지정문화재

김중행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7호)

이 묘는 김중행 선생과 부인 순흥군 안 씨의 합장묘이다. 묘역에는 3단의 계단석 이 마련되어 있으며, 봉분을 비롯하여 묘 비, 상석 2기, 장명등, 무인석 등이 배치되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 137

어 있다. 묘비는 조선 초기 양식으로 비좌 와 이수를 갖추고 있으며, 비신 뒷면에 간

김중행 선생은 그 당시(단종 1년인 1453

지가 기록되어 있어 1455년에 건립되었음

년) 벼슬이 숭의당 군자주부에 이르렀는

을 알 수 있다. 김중행(1397~1452) 선생

데, 이후 관직을 모두 사퇴하고 은둔 생활

은 사마감찰사로 있다가 단종 복위운동에

을 하다가 여생을 마치고, 숙종 때에 영의

가담하여 생육신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정으로 추증 되었다.

인흥군 묘 및 신도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8호)

1649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 요구와 축성 등 방비에 대한 문책을 답변 > 소재지 :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산 18-6

하고 돌아왔다. 이 묘는 부인 여산군 송 씨

인흥군(1604~1651)은 조선 선조의 제

와의 합장무덤으로, 묘역은 곡담으로 둘러

12 왕자로 광해군 2년 (1610) 7세 때 인흥

져 있고, 봉분 앞으로 상석, 혼유석, 장명

군에 봉해졌으며 인조 2년(1624) 이괄의

등, 망주석, 석양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

난으로 왕이 공주로 피난할 때 수행하였

는 숙종 8년(1682)에 세웠고 신도비는 옥

다. 인조 5년(1627) 병자호란 때 남한산

개와 귀부를 갖추었다. 비문은 송시열 선

성으로 피난하는 왕을 수행했다.

생이 짓고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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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성동리산성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29호)

성동리산성은 양문리 근처 38휴게소에 서 동북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해발 180m의 8~9부 능선에 위치한 퇴뫼식 산 성이다. 현재 이 성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 소재지 :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763

옛날이나 지금이나 군사적 요충지임을 상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성은 918년 왕건의 군대에 쫓기던 궁 예가 한때 이곳에 웅거하면서, 백성과 군

형태나 출토되는 토기편이나 와편을 보

사를 동원하여 한탄강에서 돌을 날라다 성

면 삼국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을 급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의 축조

성벽의 일부는 지금도 비교적 양호하다.

태봉 석조물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0호)

효명세자로 봉해진 왕자이다. 그 후 효명 세자는 순조 12년(1812) 익종으로 추존 되었고, 헌종 2년(1836) 이 태실이 태봉 > 소재지 : 포천시 영중면 호국로 3140

(胎封)으로 가봉되어 석물을 조배(造排)

영중면 성동2리 향교 골에 소재한 태봉산

3월 12일에 추가로 설치하였으나 일제 때

(胎峰山)에 있던 추존왕 익종(1809~183

문화재 조사라는 명목으로 도굴되고 파괴

0)의 태실을 성동1리 영평천가 도로변으

됨은 물론 그 후 밀반출이 이어져 많이 없

로 옮겨 놓았다. 익종의 휘는 영이며, 순

어졌다. 현재는 남은 석조물을 한자리에

조와 순원왕후 김 씨의 큰아들로 태어나

모아 놓았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57


포천시지정문화재

와 상석, 향로석, 제주석, 그리고 망주 김흥근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1호)

석이 설치되어 있다. 묘 우측에 건립된 묘비는 고종 13년 (1876)에 건립된 것으로 팔각지붕형

김흥근 선생(1796~1870)은 조선 후

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고,

기의 문신으로 순조 25년(1825) 알성

비문은 이경재 선생이 짓고 글씨는 송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판서, 경

근수 선생이 썼다.

상도 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 임했다.

김흥근 선생의 시호는 충문(忠文) 이다.

김흥근은 조선 후기 세도 정치의 대 표적인 세력인 안동 김씨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1864년에는 지실록사로 「철 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그의 묘는 1단 의 호석이 둘려진 원형봉분 앞에 묘비 > 소재지 :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산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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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양사언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2호)

양사언 선생은 명종 1년(1546) 문과에 급제한 후 평생 관직에 종사했다. <열운정 기(閱雲亭記)>를 저술하였으며 모두 여 덟 고을을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했

> 소재지 :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 193

다고 한다. 선생은 조선 시대 3대 명필가로

묘비 앞으로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을

저서로는 봉래집이 있다.

마련하였다. 그리고 봉분 좌우에는 2구의

묘의 봉분 앞에는 이수와 비좌를 갖춘 묘

석인상과 2기의 망주석을 세웠는데 묘역

비가 섰는데, 총 2면비로서 용주 조경 선

하단에는 숙부인 음성 박 씨와 간성 이 씨

생이 찬하신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

두 분의 배위를 합장으로 봉분을 조성하

이 어렵다.

였다.

수입리 지석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3호)

덮개돌은 사각형으로 상부에 구멍이 1개 가 파였는데, 지름은 13cm, 깊이는 3cm이 다. 무덤방안의 크기는 180cm×80cm이 > 소재지 : 포천시 일동면 수입리 9-6

고, 높이는 93cm이다. 청동기 시대에 만

수입리 지석묘는 덮개돌과 2개의 받침

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는 북방식

돌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과 서쪽에 받침

탁자형이다. 도로변의 평지에 있으며 고

돌이 있고, 남북 방향으로 받침돌이 없어

대 생활 및 신앙, 풍습 등의 연구 자료로서

트여 있다.

그 가치가 크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59


포천시지정문화재

동음사는 1907년 일제가 훼손하여 1914 동음사

년에 보수했지만 6·25전쟁 중인 1952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4호)

다 타버렸다. 그 후 포천의 유림과 후손 들의 성금과 군비에 의해 1988년 9월에

동음사는 안산 김씨의 선조인 김성대 선

중건하였다.

생과 그의 아우 김성발, 김성옥 선생 등을

동음사는 삼문을 두고 그 주위로 담장

비롯하여 청풍 김씨 김평묵 선생 등 네 분

을 둘렀으며, 그 안에 사당을 배치하였

을 봉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다. 삼문 앞에는 신도비가 있다. 삼문은

김성대 선생은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

솟을삼문이며 ‘동음사(洞陰祠)’라는 현

였으며 72세 때 진사시에 응시하여 숙종

판을 걸었다. 사당은 봉정각으로 규모는

으로부터 제릉참봉을 제수받았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그러나 연로하여 취임하지 못하였고, 사후 에 자헌대부에 추증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대사헌에 재차 추증되었다. > 소재지 : 포천시 이동면 화동로 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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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흥룡사 청암부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5호)

흥룡사는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가 창 건한 절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6·25 이후 건립되었고 사내에는 2기의 부도가 있다. 이 석조부도는 1648년에 흥룡사 암자 인 보문암을 창건한 청암대사의 사리탑이 다. 현재 대석, 탑신석, 옥개석 등 3석만 남 아있으나 원래는 당대에 성행한 기단부와 상륜부가 결구된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였 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부도의 표현 수법으로 보아 조선 시대 후기에 건립된

> 소재지 : 포천시 이동면 포화로 236-73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보가산성지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6호)

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보가산성은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으로 그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그 둘레 > 소재지 : 포천시 관인면 중리 산 251

가 약 800간, 높이가 1~2간이라 기록되 어 있다. 보가산성의 내부는 급경사 지역

전설에 따르면 보가산성지는 궁예가 왕

으로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평

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길 때 왕건군

탄지를 찾기 어렵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

과 싸운 성터라고 전해온다. 산성 주위에

할 때 이 산성은 일종의 차단성 내지 보루

는 지장봉, 화인봉, 고남산, 금학산 등 높

성의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61


포천시지정문화재

이국주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7호)

이국주 선생의 본관은 연안이고, 연안 군 호조판서 숙기의 손이다. 성종 18년 (1487)에 출생, 중종 20년(1525) 사마시 에 합격한 뒤 의장고(儀仗庫)의 낭청, 제

> 소재지 : 포천시 화현면 지현리 산 5-8

용주부 이천현감이 되었으며 후에 연선부 원군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증정경부인 여주 민씨와 비안 박씨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

두 부인과 합장묘이며 원형봉분으로 호석

되어 있다. 묘비의 비문은 호음(湖陰) 정

을 돌렸다. 묘역에는 2기의 묘비와 상석,

사룡(鄭士龍)이 지었다.

이사검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8호)

에 갔다가 명나라 선종에게 특별한 장군 모를 하사받았다. 묘 앞의 장군석은 특이 한 모자를 쓴 형상인데 명나라 황제가 하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4

사한 장군모를 본뜬 것이라 한다. 묘역은 3단 대지 위에 조성되었으며, 이사검과 그

이사검 선생은 본관이 양성이고, 조선조

의 부인인 이천 서씨의 합장묘로 마련되

의 무신으로 태종 5년(1405) 무과에 급제

었다. 봉분 앞에는 묘비 2기와 무인석을

하여 사직을 지내고 중추원부사, 동지중추

좌우에 배치하였다. 상석과 무인석 사이

원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에는 마모가 심한 장명 등의 옥개석이 남

세종 9년(1427) 진응사가 되어 명나라

62

아 있다.


포천시지정문화재

영평리 선정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39호)

영평리 선정비는 조선 후기에 영평 군(포천군과 별도의 군으로 존재하다 가 1914년에 포천군에 병합됨)의 군수 와 현감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던 사

> 소재지 :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 253-1

람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

겨 다시 세운 것이다. 이 부근은 본래

덕비다.

영평현의 관아 터로 추정된다. 모두 석

영평리 선정비(永平里 善政碑)는

비로 이지백(李知白), 이제원 (李濟

모두 5기로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 주

元), 김굉집 (金宏集), 현흥택(玄興

변에 산재하던 비와 건물 공사 중 발견

澤), 홍태윤(洪泰潤)의 선정과 애민

된 비를 모아 영평초등학교 앞으로 옮

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권종 충신문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0호)

권종 선생은 처음 개령현감을 시작 으로 여러 군, 현의 수령을 지냈는데, 어느 곳에서나 청렴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들었다.

> 소재지 : 포천시 소흘읍 한성1길 34

권종 선생이 금산군수로 있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국은, 내 조국은…!’하고 부르짖으며

이때 권종 선생은 금산에서 왜병을 만

순절했다고 한다. 후에 이 소식을 전

나 접전하던 중 중과부적으로인해 패

해들은 선조는 탄식과 애도를 표하였

하게 된다. 이때 권종 선생은 임금이

고, 충신정려를 명해 향리에 충신각과

계신 북쪽을 향해 크게 절하고 ‘내 조

충신정문을 세웠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63


포천시지정문화재

창옥병 암각문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1호)

창옥병이란 글자가 말하듯이 기암과 괴 석으로 이루어진 한 폭의 병풍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최근에 발견된 암각문(岩刻文) 십수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옥수로 327번길 198

점은 창옥병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이 암각문은 사암 박순 선생이 쓴 <이양 정기>에 글쓴이, 새긴이, 지은이가 자세

은 이양 정주인 선생이고 큰 글씨와 작은

히 기록되어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주부 한호 선생이며 그

책에 따르면 암각문을 짓고 기록한 사람

것을 11개 돌에 새긴 이는 신이 선생이다.

조경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2호)

장했고,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고자 상소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 대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산 1-1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이도를 쇄신하고 관리 등용에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었으

조경 선생은 포천에서 출생하고 살았으

며 1658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조경 선생

며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이

의 묘 봉분은 남향으로 조성되었으며 하부

다. 광해군 4년(1612)에 문과에 장원급제

에 호석을 돌렸다. 묘비 앞으로 상석과 향

하여 정언, 교리, 이조정랑 등을 지낸 뒤

로석이 마련되었으며, 근래에 조성한 장명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

등과 망주석이 있다.

64


포천시지정문화재

조득남 장군 정려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4호)

조득남 장군은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 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왕을 호종하 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이시백 장군 휘하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마산리 583-3

에서 북문을 지키며 결사 항쟁하였던 장

에 공의 애국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충신

수이다.

정려를 내려 화현면에 건립했다.

조남득 장군은 병자호란 때 수차례 승리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되었

를 거두었으나 결국 수적인 열세로 장렬

다가 2001년 5월에 가산면 마산리로 이

히 전사하였다. 이에 영조 을사년(1725)

전, 복원하였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65


포천시지정문화재

길명사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5호)

길명사는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한 이 고장 제 1의 석학으로 조선 시대 3대 명필가이자 대문장가로 추앙받고 있는 봉래(蓬萊) 양사언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 소재지 : 포천시 일동면 영일로 645-50

모신 사당이다. 양사언 선생은 1546년 문

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

과에 급제한 후 안변 대도호부사를 역임

다….”라는 시조는 오늘날 만인의 사랑을

하기까지 여덟 고을을 효제와 교화로 다

받는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저서로

스렸으며, 국난에 대비한 공로를 인정받

봉래시집 3권이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

아 당상관 품계인 정3품 통정대부 반열에

어 있다. 양사언 선생의 향사일은 9월 16

오르게 되었다. 양사언 선생의 시조 가운

일이다. 운담영당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6호)

사를 모셨다. 김평묵(1819~1891)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높이 추앙을 받고 있는 분이다. > 소재지 : 포천시 일동면 화동로 1240

그 후 운담영당은 6·25 때 남김없이 다 타버렸다가 그 후에 복원 추진위원회가 새 로이 모금 활동을 하는 한편, 경기도 및 포

운담영당은 뜻있는 지역 유지 인사들에

천군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1999년 10월

의하여 1915년 음력 10월에 건립된 곳으

29일 다시 준공되었고 이후 안향 선생을

로 중암 김평묵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향

추가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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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박순 선생 묘 및 신도비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7호)

박순 선생 묘는 박순과 부인 개성고씨 의 분묘가 각각 있는 쌍분형태이다. 박순 (1523~1589)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며,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 (和叔), 호는 사암(思菴)이다. 1553년(명종 8)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옥수로 327번길 231

원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다.

1565년(명종 20) 대사간이 되었으며, 대

묘역은 조성 당대의 분묘와 석물 일부(

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두루

문인석, 망주석)가 남아 있고, 근래에 장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명등, 상석, 묘비, 묘역 입구 등을 새로 조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사후에는 옥병서

성한 상태이다. 이벽 선생 묘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8호)

> 소재지 :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89-1

이벽(1754~1785) 선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덕조(德操), 호 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 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에서 태어났다. 이벽은 국내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에게 첫

번째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서학을 학문에 서 종교적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조선 최초 의 천주교 교단을 조직하여 강학을 주도하 며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여 한국천주교회 의 창립 성조(聖祖)로 추앙 받고 있다. 이 벽의 생가터(화현면 화현리 543-1) 인근 선산에 묘가 있다(유골은 1979년 6월 광주 천진암으로 이장). 이벽 묘역은 1979년 이 장 이후 새로 조성되었으며, 봉분과 묘비도 이장 당시에 새로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67


포천시지정문화재

운악산성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49호)

운악산성은 포천시 화현면, 일동면, 군내 면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운악산 서쪽 사 면에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 조한 것이다.

악산 제2정상 일대에서 수습된 와편, 토기

지형을 이용하여 적은 부분만 성벽이 축

편, 청자편, 백자편, 동경편 등이 있다. 운

조되었으며, 성돌은 대개 화강암 계통의

악산성은 고려 시대 거란, 몽고, 왜구 등의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현재 서북쪽(무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 입보 산성으로 시

지폭포 동북쪽)의 성벽구간(약 50m)만

급히 축조된 산성으로 판단되며, 장기간

잔존해 있고, 성벽 내 ‘대궐터’라는 건물

사용하지 못하고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가 있다. 유물은 ‘대궐터’라 불리는 건물지와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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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포천시 화현면 화동로 190


포천시지정문화재

립 농악, 두레 농악 등 가림새가 분명하 오가리 가노농악

며, 지난 2005년부터 전문적인 발굴 및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50호)

복원을 거쳐 2011년 ‘전주대사 놀이 전 국대회’ 농악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오가리 가노농악은 약 300년 전에 영

오가리 가노농악은 소고와 법고의 구별

평현에서 내려오는 농악으로 당시 조정

이 없고 다른 지역에 비해 북을 적게 쓰는

에서 도장을 가노부락(오가리)에 하사하

편이다. 특히 빠른 가락을 고르게 쓰는 쇠

여 연천, 철원, 가평 등 지역에 농악을 관

가락이 분명하고 암채, 숫채 가락쇠 가락

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농악을 하려면

변화를 구사하는 짝 쇠 놀이가 발달하였

이 도장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행할 수 있

으며, 쩍쩍이 가락은 포천 오가리 가노농

다고 전한다. 경기 북부 지역 농악의 원형

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아

적인 형태를 잘 계승한 오가리 가노농악

이들로 짜인 무동 타기가 발달하였고 12

은 소고놀이와 쇠놀이, 연희적 성향을 보

발 놀이, 설 장고놀이 등 판제 안에 여러

이는 무동놀이 등도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가지 놀이가 발달하였다.

이 특징이다. 형식에 있어 연예 농악, 걸

> 소재지 :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69


포천시지정문화재

하고, 남쪽으로는 잉읍점을 응한다.”라고 독산 봉수지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51호)

하여 조선 시대 포천현의 중심 봉수 역할 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봉수대 규모는 동서 8m, 남북 12m, 높

독산 봉수지는 반월산성에서 천주산 능

이 2~2.5m(현재 석축이 무너진 상태로

선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

존치)이다. 1번 건물지는 동서 21.2m, 남

서 약 2,600㎡ 규모의 대지로 조성되어

북 8.3m 규모로 부지 남동쪽에 위치(현

있다. 독산 봉수지는 산등성이부터 토단

재 ‘ㄷ’자형태의 무너진 석재 존치)하

을 형성하여 정상부를 확장한 형태이며,

고 있으며, 2번 건물지는 남북 17m, 동

포천 시내와 반월산성, 신북면 일대가 잘

서 15m 규모로 부지 동북쪽에 위치하고

조망되는 곳이다. 독산 봉수는 <신증동국

있다.

여지승람>에 포천현 봉수조는 "현의 북 쪽 15리 지점에 위치한다." 라고 기록되 어 있다. 북쪽으로는 영평현 미로곡을 응 > 소재지 : 포천시 신북면 기지1리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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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지정문화재

화현 분청사기 요지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52호)

화현리 분청사기 요지는 반지하식 구조 이며, 토기를 굽는 공간인 소성실은 1개 를 갖춘 단실이고, 불길을 일으켜 그 열기 로 자기를 굽는 등요(오름식 가마)로 구 성되어 있다.

출토자기는 대부분 분청사기와 문양 이 없는 회청사기이며, 백자가 소량 출

가마는 크게 전반부 작업공간인 요전부

토되었다. 종류별로는 발과 접시가 가장

와 불을 때는 봉통부, 소성실로 나누어지

많고 종지, 잔, 병 등이 섞여 있었다. 자

며 굴뚝부인 배연부는 유실되었다. 크기

기의 양식적 특징과 백자를 제작한 점

는 현존 기존으로 전체 길이가 28m에 달

을 고려 할 때 본 요지의 운영 시기는

한다.

1420~1440년대로 추정된다. > 소재지 : 포천시 화현면 화동로 184번길 39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71



전적기념물 전적기념물이란 전쟁의 아픔과 호국장병들의 노고,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기념물을 의미한다. 현재 포천시에는 다양한 전적기념물이 있다.


전적기념물

충혼탑 (관리번호 15-2-10)

충혼탑은 독립 유공자 및 참전 용사들이 6·25 동란 때 조국 수호를 위하여 순국한 호국 영령의 뜻을 기리고자 건립한 것으 로 전쟁의 상처와 함께 나라 사랑의 정신 을 일깨워 준다. 현재 이 탑은 포천 청성문화체육공원 내 에 위치하며, 규모는 탑신 17m, 면적 200

> 소재지 : 포천시 군내면 하성북리 산106

평이다. 영위는 독립유공자 12위, 군인 312위, 경찰 24위, 징용병 20위, 노무자 14위,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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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 7위, 무직위 13위, 독수리 유격대 16 위 등, 모두 418위가 봉헌되어 있다.


전적기념물

육사생도 6·25참전비 (관리번호 15-2-12)

1950년 6월 25일, 북괴공산군이 불법남 침하자 수학 중이던 육사생도 1기(현 육 사 10기) 312명과 생도 2기 330명은 육 사 장교 및 교관들의 지휘 아래, 6월 26

> 소재지 : 포천시 가산면 우금리 산89-1

일 여명에 이곳으로 출전하여 급편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하였는데, 정부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세

진지를 구축한 우리 군은 공산군 제3사

우고 장렬히 산화한 전몰생도들의 넋을

단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

기리기 위하여 동기생들이 모은 기금과

였다. 포병의 지원도 없이 소총만으로 싸

국비 1억원의 지원으로 1979년 12월 1일

워야 했던 이들은 이곳에서 27명이 전사

참전비를 건립하였다. 육사생도 6·25 참전비는 전체 대지 면적 165㎡에 1.2m의 화강암 기단을 쌓고 높 이 5m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비석의 전 면에는 한자로 ‘육사생도 육·이오참전기 념비’라고 새겨져 있다. 현재 이 비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우금 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천 시민과 타 시 도 사람들에게 나 라 사랑하는 마음 을 일깨우고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75


전적기념물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 (관리번호 15-2-43)

독수리 유격대는 6·25 당시 자유민주주 의를 수호하려는 포천 지역의 반공 애국

> 소재지 : 포천시 이동면 노곡2리 산146

청년 63명이 1950년 11월에 조직한 것이 다. 이 유격대는 결성 직후에 국군 제2사 단 제17연대 및 제32연대와 합류 작전을 실시했으며 공비 토벌 작전에도 참가했다.

독수리 유격대 전적비는 유격대의 위업

또한 가평군 설악면 전투와 현리, 광덕산,

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전장에서 산화한

김화의 천불산, 734고지 전투 등에 참가하

대원 16명의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해 독

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수리 유격대 기념사업회에서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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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기념물

태국군 참전 기념비 (관리번호 15-2-52)

태국군 참전 기념비는 태국군의 6.25 참전을 기념하고 전쟁 중 1,296명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태국군의 마지막 주둔지인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 건

> 소재지 : 포천시 영북면 문암리 산24-2

립하였다. 기념비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

문이 적혀 있다.

운 타일랜드 육군, 해군, 공군 용사들!

기념비의 오른쪽으로 50m 떨어진 곳

여기 그들의 마지막 주둔지에 피흘린

에는 불상을 모신 태국식 사원이 조성

1,296명의 뜻을 길이 새긴다.」라는 비

되어 있다.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77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발 발 발 기 글

행 일 : 2018. 2. 28 행 처 :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행 인 : 염상덕 획 : 포천문화원 / 취재 : 포천문화원 브로드스톰 디 자 인 : 박성주 정리·교정 : 조선학 서하늘 편집·제작 : 브로드스톰

ISBN 코드: 979-11-85591-07-0

[비매품] ⓒ 포천문화원 /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017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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