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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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시 / 글. 사진. 김재원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사진. 글. @Ahopsi 세계의 직업 / 그림. 왼손이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환타지와 모순의 조우 (遭遇): 영화로 읽는 時空間 (시공간) / 글. 곡주대비 Midnight in Seoul / 글. 사진. aoikasa 비밀 안(not)스러운 생활 / 사진. 글. beamil 흔적도감 / 글. 그림. 왼손이 사서학동 / 글. 사진. 박민수 독후소설 / 그림. 황은정 글. 김종소리 꽃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 / 글. 안언주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Public Gastronomy / 글. 사진. 미식의 별 부산 오뎅 이야기 / 글. 사진. odeng INTO THE JAZZ / 글. 사진. 이상준 ‘홍라희’와 관련된 속좁게 길고 쓸데없는 이야기 / 글. exxx 바다비 일요시극장 광고 댄 퍼잡스키 (Dan Perjovschi)/ 글. 그림. 지인


한달 정도 쉬고나니 슬슬 기운이 납니다. 이래서 학교 다닐때 방학이 한달인가 싶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유전자 조작 생물(GMO)이 수입되고 있습니다. 옥수수나 콩 등이 대표적으로 수입되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법에 따라 두부나 된장 그 외 여러 식품들에 GMO가 들어가더라도 표기되지 않는게 현실입니다. 여전히 GMO식품의 안전에 대해 논란이 있음에도 GMO가 들어가있다는 표기마저 들어가 있지 않은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국가의 근본인 국민의 알 권리와 선택의 자유를 위해 기업은 장기적입 수입원이 되는 고객의 알권리와 불만 해소 그리고 상호 신뢰를 위해서라도 GMO표기는 이루어져야 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해성에 대한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말입니다. GMO를 사용한 식품들에 GMO를 사용했다는 표기를 넣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 2013년 꾸준한 활동을 벌일계획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힘을 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블로그는 http://yourtools.tistoey.com 에서 트위터는 해쉬태그 #한국GMO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몇 달동안 재미있는 꽃 이야기를 연재해주시던 플로리스트 안언주 님의 글이 이달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새로 김재원 님의 시와 관련된 코너가 생겼는데 3월호 부터 시와 관련된 부분 을 조금 더 보완해 볼 생각입니다. 월간이리의 공식 트위터는 @postyri 이고 온라인 페이지는 postyri.blogspot.com 입니다. 이곳에서는 컬러 PDF 파일과 바로보기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월간이리에 연재를 희망하시는 분은 언제든 편하게 공식 트위터로 멘션을 주시거나 exxx2x@gmail.com로 어떤 글을 쓰시고 싶으신지 문의 메일 주 시면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침묵을 지킨다 일몰의 도시는 단단한 껍질을 벗으며 따각따각 소리를 낸다 상점의 그늘을 지나면서 그는 짙은 회색이 되었다가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강렬한 황금빛이 된다 말을 시켜도 답이 없다 장차 돌아올 도시의 냉기에 관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의연하게 걸을 뿐이다 종일 질문을 반사시키는 일에 몰두한 창문들 숨이 트이면서 탄식이 쏟아진다 먹구름같은 낱말들 툭툭 보도에 뱉어지고 검은 포말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공장지대의 굴뚝같이 머리들에서 김이 솟는다 길 건너편에 서서 그는 이쪽을 바라본다 빛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는 어두운 실내 창 안의 어둠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는 안쪽에 집착한다 주머니 안에 넣어진 손 식당의 구석 자리반지 안쪽에 새겨진 글자 배꼽의 모양상처 입은 타인의 내면으로 어린 아이의 손같이 작은 힘에 이끌려간다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예외 없이 自我의 안쪽 도시 지층에 기록된 그의 생몰 연대는 익명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흐느낌처럼 슬픔이 무정형으로 그를 지나간다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각자로부터 멀어져가는 속도의 결별의 실없는 세계 물 속에 떨어진 한방울 먹(墨)이 만드는 궤적을 보았는지 자존심을 껴앉고 침몰하는 자의 무력한 내면이 그와 같다 쇠약한 빛이 보도에 마지막 파종을 끝내고 대열을 이탈한 새들 몇 전선에 착석한다 덮은 책을 펼칠 때 세계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일몰 속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춘다 펼쳐진 그의 페이지들이 바람에 넘어간다


그는 잠시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 어둠 속에 한 움큼 빛으로 켜지는 호텔 복도에 떨어진 tv수상기같이 마주치는 어디에도 개연성은 없다 무릎을 감싸고 온종일 들여다보는 볼수록 궁핍해지기만 하는 증거들 웅성거리는 밤의 상점에 걸린 나란한 전구들 앞에서 그는 목구멍 깊숙히 숨겨진 상처를 확인한다 고통의 주변에 산포된 환한 빛 다시 침묵만이 그를 견디게 할 것이다

글. 사진. 김재원






회사 옆 미술관 글. 강세기

갤러리들 돌다보면 왠지 모르게 턱 막히는 느낌, 발을 들여놓긴 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낄 때가 종 종 있다. 사방은 하얀데다 책상 앞에는 한결 같이 뚱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는 갤러리 직원들, 이 사람들

도 밥을 먹긴 하는 건가? 차라리 등을 보이고 있으면 좋으련만, 하필 도록은 왜 프론트에 비치해놔서 살펴보는 내내 얼굴이 마주쳐야 하는지..

그러나 안 들어갈 수는 없기에 마음 속으로 주문을 건다. 갤러리 자체도 결국은 자신을 사가 줄 누군가를 한없 이 기다리며 폼 잡고 서 있는, 백화점 쇼윈도의 마네킹과 다름없지 않은가. 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쫄 리는 마음이 다 잡혀 진다.

갤러리가 물건을 판매하는 그림 가게에 불과하다는 단순무식한 논리는 어렵기 만한 갤러리 문턱을 조금 낮게 느 껴지게 한다. 하지만 안 팔려도 좋은 작가는 얼마든지 많은데 자칫 이런 작가들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이 들 때면 갤러리 구경 가는 재미가 쉬 떨어지기도 한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시장논리에 의해 가치 있는 작품이 사장된다면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것만큼 아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갤러리는 신작, 특정 컨셉 또는 특정 시기에 전시작을 한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가를 온전히 맛

보는데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작가에 대해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간 변화상에 집중하는 신작위주의 갤 러리가 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은 갤러리와는 달리 시장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작가들을 선별해

서 보여준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단순 전시에 그치지 않고 작가와의 대화는 물론, 모든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며 작가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들이 동시대 미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우 고맙다.

전시를 통해서는 마음으로 감동받고, 기록을 통해서 그 작업의 가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기 때 문에 난 기록물을 좋아한다. 사실 그런 점이 미술관의 특권이자 의무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미술관에 이벤트성 전시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좀 안타까운 점이다. 게다가 '세계 거장전’ 뭐 이

런 이름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후원의 전시들은 전시기간도 참 길다. 준비한다고 몇 주, 전시한다고 몇 달, 이벤

트 전시하나 뜨기 시작하면 조용한 미술관이 북새통이 된다. 그림을 보는 건지 뒤통수를 보는 건지 모를 정도다. 참 미술관이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전시설명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번 빠르게 전시장을 돌고, 도슨

트의 설명을 들은 다음, 다시 한번 전시장을 천천히 도는 것이다. 구경 날짜를 잘 맞춰서 작가와의 대화가 있다 면 금상첨화다.


도록 역시 해당 전시도록 뿐 아니라 작가의 일대기를 쭉 훑을 수 있도록 초창기 도록부터 구경할 수 있게 한 서

비스 역시 미술관이 좋은 이유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1월 26일까지 작년에 개최한 두개의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포트폴리오와 도록 자체를 ' 전시'한 "2012 Sema 아카이브: 돌아보기/내다보기"전이 그 좋은 예다.

종료일 이틀 전 점심시간에 산책 도중에 그만 이 전시에 대해 알았다. 아 억울하다. 파트 타임 스위트와 김상 돈, 강홍구 등 관심 있는 작가들이 참여한 거의 모든 도록을 볼 수 있는 이 꿀 같은 전시를 단 30분 만에 독파해 야 하다니.

팀 버튼 전으로 그야말로 시장판이 되어있는 시립미술관 구석에 소리 소문 없이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내게 그 야말로 완소전(완전 소중한 전시)이었다. 이 전시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마구 활보하며 책들을 파헤 쳤다. 30분만에 다 먹어 치워버릴 기세였다. 간단하다. 작가의 대표 도록을 정리해놓고 읽고 싶은 만큼 보는 거다. 이 전시를 통해 몇 가지 참고할 만한 좋은 도록과 자료들을 발견했다. 대안 공간 풀에서 기획한 '연속과 강도', ' 동시대 한국미술의 지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획)' '시선의 반격 (전시도록)'이 매우 흥미 있었다.

특히 연속과 강도는 한국 동시대 미술 씬에 대한 아티스트와 비평가가 참여하는 토론을 그대로 녹취하여 실었 다. 판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얘기들이 오간다.

마지막으로 얼마 없지만, 도록, 작가와의 대화, 도슨트 설명을 모두 해주는 미술관 및 기관의 리스트를 끝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대림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선재,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역서울284(서울 역사를 개조한 전시공간), 전시 공간은 아니지만 김달진 미술연구소가 운영하는 아카이브, 한국미술정보센터(http://www.artarchives.kr) 등이 있다. '대안 공간 풀'도 있다.


글: 곡주대비

환타지와 모순의 조우 (遭遇): 영화로 읽는 時空間 (시공간) 1980년대 틴호러에 비친 여성상: 여성의 재물화와 남근 무기들

시작하기 전,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다. 지난호에 예고했던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가 아닌 틴호러 (teen horrors: 13일의 금요일 이나 나이트 메어 같이 십대들이 주로 나오는 호러 시리즈 물)로 주제를 바꾼것에 대해 서. 첫번째 이유는 필자의 지난 글 중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바가 있어 중복을 피해야겠다 고 생각한 것이 가장 크고 두 번째는, 과잉이라고 생각 하는 틴호러의 장르가 끊임없이 반복 되며 회자 되고, 그 장르적인 장치들이 반복 되면서도 재 생산되는 것이 분명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 공포 장르를 끝내기 전에 한번쯤은 독자들에게 탐험 (?) 시켜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독재적인 이유에서다.

이번호에서는 198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현재도 할로윈 시즌 이면 한번쯤 등장해주는) 틴호러 장르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독자들은 그 당시 유행했던 호러물 중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일단 필자로 시작 을 하자면 (호러물의 지나친 광팬으로서 별로 객관성은 없지만) 단연 ‘13일의 금요일’이다. ‘할로윈’이나 ‘나이트 메어’, 혹은 ‘엘름가의 공포’ 시리즈들을 제치고 특별히 ‘13일의 금요일’을 뽑는 이유는 이 시리즈가 유독 1. 야했 으며, 2. 여성 희생자가 더 많이 등장하고 3. 제이슨이라는 괴물에게 다른 프랜차이즈 물보다 더 “불쌍” 한 과거 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인 이유를 배제하고 ‘13일의 금요일’이 갖는 중요성이라 하면 80년대 봇물을 이 루었던 틴호러물 들의 모태가 된 영화 라는 사실이다.

‘13일의 금요일’은 현재 13편까지 개봉되었고, 그 중 두 번째 편은 케빈 베이컨의 무명 시절 출연으로 유명 하기 도 하다. 대강의 줄거리는 (사실상 열 세편의 줄거리는 거의 흡사하다; 프레디 vs. 제이슨 제외) 항상 한 무더기 의 대학생 혹은 고등학생들이 외딴곳으로 캠핑을 가면서 시작이 된다. 며칠 되지 않는 이 여행에서 참여했던 대 부분의 모든 멤버들이 제이슨에게 죽임을 당하고 제일 ‘바람직한’ 커플 하나 만이 살아남아 제이슨을 벌하는 것 이 매 세그먼트의 결말이다. 매회의 에피소드에서 학생들은 캠핑장에서 문란한 성관계를 갖고 즐기는데 대부분


이 ‘문란한 성관계’를 가장 많이, 혹은 가장 빨리 갖는 커플이 제이슨의 첫 희생양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첫 커플들이 시리즈를 막론하고 시각적인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들은 언제나 1. 백인 이며 2. 금발이고 (주 로 여성) 3. 보수적인 커플들을 비난하는 비교적 ‘리버럴’ 한 (피임조차 하지 않는) 히피일 때가 많다.

무척 위험한 상황

이러한 희생자들의 불문율은 1980년대 미국의 사회상을 생각해 볼 때 매우 의미있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영화 학자 로빈 우드는 80년대에 개봉했던 이러한 틴 호러물 들이 1950년대에서부터 시작되어 70년대 까지 이르는 미국의 사회문제들, 특히 베트남전 이후의 미국사회의 병폐들에 대한 지극히 자극적이고 임시방편 적인 해결책 을 제시한다고 논한바 있다. 예를 들어, 틴호러에서 흔히 등장하는 ‘강한 소녀상’이 레이건 집권 동안에 활동했던 네오 보수파 들이 경계 했던 여성운동에 대한 회유책에 하나로 재현되었다는 것 이다. 이러한 공포영화 속 강한 소녀들은 영웅처럼 보이지만 그 나마도 남성중심적으로 건설된 유형일 때가 많다. 즉, 금발의 인형 같은 소녀 보 다는 지극히 청교도 적인 갈색머리의 여전사가 괴물을 벌하는 것이 그 예이다. 혹은 틴호러물에서 간간히 등장 하는 록큰롤에 대한 우상화, 대마초 문화 등은 모두 베트남전의 후유증에 대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제시된다고 말한 바 있다 (see “Reaganite Entertainment” from Robin Wood).

앞서 말한 첫 번째 커플에 대한 불문율에 적용을 해보자면 13일의 금요일은 신보수파 들이 옹호할만한 주제, 즉, 히피들에 대한 처벌 (제이슨이 죽이는 섹스 우호자들), 혹은 대중문화에서 성적인 코드를 가시화하는 금발 백인 여성에 대한 경계 등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문화적인 상품이며 프로파간다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13일의 금요일을 포함한 여타 틴호러물들에서 괴물 역할로 나오는 캐릭터들을 살펴 보자. 제이슨 (13 일의 금요일) 레더매스크 (택사스 전기톱 살인마) 프레디 (할로윈), 이 불행한 괴물들은 대부분 하층민이고, 얼굴 이나 신체적인 장애가 있으며, 이들의 엄마나 누나와 남다른 (?) 관계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결 국 이들은 이러한 약점들로 주변 사람들에게 따돌림으로 죽게 되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괴물로 만드는가. 결국은 남들보다 못살고 못생겼으며, 몰상식 하다는 지극히 보편적 일 수 있는 특징들로 이들은 살인마 가 된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생각 해보라. 우리는 과연 이 “남들” 의 범주에 자신있게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리학자 라캉은 인간들은 자신이 되고 싶지 않은, 혹은 자신 안에서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내면을 누군가를, 혹은 특정 집


단을 타자화 (othering) 시킴으로서 자위한다고 말한 바 있다. 틴호러물 에서 재현되는 살인마들은 이러한 우리 들 내면에 드러내기 싫은 면모가 형상화 된 괴물 아닌 괴물이라고도 풀이 할 수 있겠다.

다시 오늘 주제로 돌아가서, 이런 괴물에게 희생되는 혹은 살아남는 여성 ‘재물’들을 살펴보면 극도로 명백하게 양극화 되어지는데, 앞서 언급했던 금발의 창녀 vs. 갈색 머리 수녀 의 축으로 정리 되어진다 (사실 이러한 극단 적인 표현은 흔히들 일컬어지는 영어식 표현의 blond whore 를 해석한 것이다).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는 괴물 의 남성성은 그 들이 휘두르는 극히 남근 상징적인 무기로 나타나고 이들의 여성 재물들은 이들의 무기들에 처 참히 희생된다.

금발의 섹스옹호자들은 이들이 휘두르는 남근 상징적인 무기에 첫 번째 희생자가 되고, 갈색 머리를 가진 지극 히 청교도 적인 사고의 ‘바른’ 아가씨들은 더 가공할만한 남근 무기로 이들을 대항한다. 이제껏 개봉했던 틴호러 물들, 스크림을 포함한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종말을 떠올려 보라. 살아남는 소녀들은 모두 갈색 머리이며 성 적으로 미화되지 않았으며 큰 칼이나 막대기 등으로 괴물들을 처치하는데 초반에 필자가 인용했던 캐롤 클로버 라는 학자는 이러한 결말이 여권 신장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인 여성만이 살아 남을 수 있고, 그들은 꼭 남성성 (남근 무기로 재현되어지는) 을 옹호해야만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필자는 호러 장르에 영혼을 바치는 광팬이라 그렇 기도 하지만, 독자들이 보기에도 이러한 공식들이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더더욱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한 사실 은, 공포장르의 시작인 1930년대, 그리고 그 전성기였 던 60년대와 80년대 중후반에 고착화 되었던 이런 장 치들이 (여성희생자, 괴물의 무기) 적잖은 시간이 흘렀 음에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며 그것이 국경을 넘어 다 른나라 호러물에도 투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글을 맺기 전에 복습 차원으로 독자들에게 “요가학원” 을 추천하 고 싶다. 가히 영리한 영화라고 추천하진 못하겠지만, 이 글에서 언급된 많은 공식들이 드러나 있으므로 남아 도는 시간이 있으시면 한번쯤 체크해 보실 것.

글. 곡주대비


Midnight in Seoul (부제: 우리 동네 이야기)

글. aoikasa

Prologue 언젠가 1930년대 엽서를 보다 여기가 대체 어딜까 한참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마치 포토샵으 로 지저분한 것들은 다 지워내고 정제된 모습만 남은 듯한 이 엽서 속 사진 속엔 장식없는 모더니즘 건축물과 가로수 들이 쭉 늘어서 있고.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단장(지팡이)을 든 모던 보이들이 걷고 있었습니다. 마치 외국의 풍경을 보는 듯한 기분에, 생각보다 1930년대의 경성이 꽤나 모던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죠. 그리고 이 풍경을 이루고 있는 건물의 건축가들 중에 조선인 건축가도 있다는 사실에, 이 거리가 궁금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부청 앞 광장(현 시청앞 광장)이 있는 태평로의 모습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 거리만은, 이유가 무엇이었건간에 많이 변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도 듭니 다. 적어도 경성부청의 뒷면이 무참히 헐려 나가고 새롭다 못해 가끔은 무서운 새 시청사가 들어서기 이전까지는요…

우리 동네 이야기 그 세번째. 태평로.

Figure 1. 1930년대 태평통 1정목(현 태평로 1가)의 모습. 사진 왼쪽의 건물이 조선일보 사옥, 건너편 3층 건물(사진 중앙에 위치)이 동아일보 사옥으로 보인다.

모단한 거리에 모단한 건축물, 그리고 모단한 신사 남대문에서부터 서울시청앞, 그리고 광화문역까지를 잇는 서울의 주요 가로 중 하나인 태평로는 조선시대에는 없었 던 도로이다. 이 도로가 생겨난 건 1912~13년 경의 일, 즉 한일병합 이후 일본에 의해 경성시구개정사업이 처음 진행 되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이 거리는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을 경계로 태평통 1,2 정목으로 나뉘었는데 태평통 1정 목(황토현 사거리(현 광화문역사거리)에서 경성부청까지)은 모단한 빌딍들이 늘어선 경성 최고의 근대적 거리였던 반면, 태평통 2정목(경성부청에서 남대문까지)은 소공동일대의 중국인 지역의 지저분함과 더불어 가로변에도 전근 대적 한옥들이 늘어서 있어 태평통 1 정목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1930년대 가장 근대적인 거리로 여겨지던 태평통 1정목은 1910년대의 경성일보사 사옥이 들어선 것을 시작으 로, 1920년대 이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사옥들도 건축되며 명실공히 경성 최고의 언론가(街)가 되었다. 이 건 물들 외에도 경성부청, 부민관, 통신국 사업회관, 미술품제작소, 법정학교 등이 들어서며 이 거리는 대형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풍경을 가지게 되었다.

Figure 2. 1937년과 2013년의 태평로 1가. 조선일보 자리에는 코리아나호텔이 들어섰으며, 동아일보는 일민미술관으로, 부민관은 서울특별시 의회로, 경성부청은 서울도서관으로 각각 변경되었다.

1937년의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비교해보면 이 거리에는 덕수궁과 경성부청, 부민관, 동아일보 등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필지의 구성 역시도 거의 유사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민관의 높은 탑 위의 시계는 현재 서울시의회 라는 글씨와 의회휘장인 무궁화꽃으로 대체되었다. 아무튼 이 거리는 모단한 건축물과 모단한 가로풍경(도로포장 에 보차분리, 가로수와 가로등을 갖춘 전형적인 근대적 가로의 모습), 그리고 모단한 양장을 한 신사들이 가득차 있 는 거리였다. 1930년대 가로 풍경을 담은 엽서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 곳이 파리일까 싶을 정도로…

Figure 3. 경성부민관의 시계탑이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태평로 1가의 모습. 왼쪽 사진의 부민관 우측 건물은 조선일보사 사옥이며, 오른쪽 사 진의 부민관 건너편 건물은 경성부청이다.

모단 건축, 그리고 모단 건축가 우리에게 모단 건축은 무엇일까?? (왜 자꾸 ‘모단’ ‘모단’ 할까? 엄연히 말하면 모단은 モダン 즉, 일본식으로 modern을 읽은 것이다. 당시에는 근대(近代)라는 표현보다 모단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다.) 크게 생각해보면 모단 건 축, 즉 근대건축은 우리 나라의 전통 건축을 대치한 서구식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구식 건축 역시도 소위 고전주의(classicism)라 불리는 양식주의 건축과 국제주의(international style)라 불리는 모더니즘 건축으로 나누 어 볼 수 있다.


식민지 초기 제국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주로 석재로 만든 양식주의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졌다면 1920년대 중반 이 후에는 새로운 재료인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모더니즘 건축이 많이 세워졌다. 특히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고층(4,5 층 이상)의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오피스 빌딩들이 많이 세워졌다. 바로 이런 1930년대 이후 지어진 철근 콘크리 트조의 모더니즘 양식 건축이 좀 더 좁은 의미에서의 ‘모단 건축’에 가까운 것이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세워진 동아일보사(1926)나 조선일보사(1935)는 대표적인 ‘모단한’ 오피스 빌딩들이다. 그리고 부민관(1935)은 오피스빌딩은 아니었지만 매우 ‘모단한’ 스타일의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던 태 평통 1정목은 자연스레 모단한 거리의 풍경을 만들었을 터이다. 사실 이 건물들은 지금의 우리 눈에는 그다지 특별 해 보이는 건물들은 아니다. 우리 도시 곳곳에서 많이 보았을 법한, 네모난 박스형태에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 는 창문들, 콘크리트 혹은 벽돌, 타일 마감의 벽체들을 가진 그냥 그저 그렇게 보이는 일상의 건물들일 뿐이다. 그런 데, 당시 이 건물들이 지어질 때에만 해도 이 건물들은 당시 ‘최신 유행’의 ‘미국’ 스타일의 ‘고층 쁼딩’들이었다. 이 런 건물들이 지어질 때마다 각 신문들은 비중있게 이 새로운 건축을 소개하였으며, 심지어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이 런 최신 스타일로 사옥을 짓기에 이르렀다. 비교적 철근콘크리트 도입 초기인 1926년에 준공한 동아일보 사옥은 일 본 오사카의 건축사무소에서 설계를 담당하였고,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을 혼합하여 사용하면서, 외장재로도 타일과 석재를 혼용하였다. 1920년 대 중반 유행하였던 베이 윈도우(돌출창)을 입면의 주요 요소로 활용하여 르네상스 스타 일과 모더니즘 스타일의 과도기적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3층으로 계획되었으나, 1939년에 2개 층 증축, 1963년에 1개층을 증축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2002년 동아미디어센터의 준공과 함께 이 건물은 리노베이 션을 거쳐 현재 일민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 사옥은 한국인 건축가 박동진이 1935년에 설계한 건 물이다. 조선일보 사옥은 철근콘크리트의 사용이 보편화된 1930년대 중반에 지어진 만큼, 5층의 철근콘크리트조 건 물로 지어졌으며, 5층의 아치 창을 제외하고는 전혀 장식이 없는 모던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1969년 철거되고 이 자리에는 코리아나 호텔이 들어섰으며, 조선일보 사옥은 이 건물의 후면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 다. 부민관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옥보다 한층 더 모단한 분위기를 내었던 최신식 건축물이었다. 시민을 위한 다 목적 공연장을 표방한 (실제로는 일본인들과 일부 친일파들을 위한 시설이었지만) 이 건축물은 장식없는 외부 처리 에 반복되는 직사각형 창문들의 단조로움이 그 외관상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철저히 모단한 외관을 가진 이 건축물에는 높이 46.6m에 이르는 거대한 시계탑이 있어 태평로의 경관을 지배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부민관의 경우 해방 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여의도로의 국회의사당 이전(1975) 이후에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 용하다 현재에는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Figure 4. (좌) 동아일보사옥 (중) 조선일보사옥 (우) 부민관

조선인 모단 건축가: 박동진, 박길룡…. 그리고 이 상 동아일보 사옥과 부민관의 경우, 일본인 건축가들이 설계를 담당하였지만 조선일보 사옥의 경우 박동진이라는 조선 인 건축가가 설계를 담당하였음이 눈길을 끈다. 근대적 건축가의 양성이 채 이루어지기도 이전에 식민지가 되어 버 린 식민지 조선의 건축활동은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식민지 조선은 일본인 건축가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다. 일본 내에서 기회를 잡기 어려운 젊은 건축가들은 대학 졸업 후 바로 조선으로 넘어와서 조선 총독 부 등에서 일하며 일본에서였다면 할 수 없을 규모의 프로젝트들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일본인 건축가들에게는 조선 은 기회의 땅이었던 반면, 조선인건축가는 쉽게 성장할 수 없었다.


당시 근대적 건축교육은 경성고등공업학교(전신은 경성공전) 건축과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몇몇 조선인이 있어 근대적 건축교육을 받고 근대적 건축가가 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박길룡(1919 졸업), 박동진(1924 졸업), 그리고 우리가 이상으로 알고 있는 김해경(1926 졸 업)이다. 이들은 졸업 후 대부분 조선총독부 기사로 근무하였으나 박길룡의 경우에는 1932년 종로에 최초의 조선인 건축사무소를, 박동진의 경우에는 1938년 태평건설회사를 설립하여 독립하였다. (이상의 경우 1933년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를 사임하고 이후에는 제비 다방 등을 경영하며 문인으로서 살아간다 .)

Figure 5. 경성고공(경성공전) 출신의 조선인 건축가들: (좌) 박길룡(1898~1943) (중) 박동진(1899~1981) (우) 김해경(1910~1937

1930년대에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한 박길룡과 박동진은 다수의 작업들을 남겼다. 박길룡은 조선총독부에 있을 때 부터 김연수 저택, 조선생명보험회사 사옥 등을 설계하였으며, 이후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후 화신백화점, 한청빌딩 를 설계하였다. 박동진은 보성전문학교 본관을 비롯하여 조선일보사옥, 영락교회 등을 설계하였다. 박길룡이 좀 더 모더니즘 건축을 지향했다면, 박동진은 고딕 양식 등 양식주의 건축을 좀 더 지향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건축가가 1935년에 건축한 한청빌딩과 조선일보사 사옥은 1930년대 중반 모단 건축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 들이라 할 수 있다. 슬프게도 한청빌딩과 조선일보사 사옥 모두 현재는 철거되고 없지만, 두 건물이 보여주던 당시의 기술력과 디자인은 두 대표적인 조선인 건축가들의 역량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해준달까.

사라져 버린 1930년대의 ‘모단’ 건축들 식민지 시대의 한국 건축은 아직 ‘일본’에 의한 건축으로 여겨지며 ‘우리’의 건축으로 심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 려운 상황인 듯 하다.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조선 총독부 철거 등의 사건으로 볼 때 ‘그들’에 의한 건축은 그 저 지워져야할 과거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건축가로서도 항상 해방 이후의 건축가인 김수근과 김중업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박동진과 박길룡은 건축과 학생들에게조차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역 시도 박길룡과 박동진이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근대건축가’로서 인식되기 어려우며, 그들 의 건축 역시도 우리의 건축이라기 보다는 그저 일제시대 그들에 의한 건축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박길룡의 화신백화점과 한청빌딩, 박동진의 조선일보 사옥은 모두 개발의 미명하에 사라져버렸다. 1930년대 모단 경 성의 대표적인 모단 건축들은 별다른 논의도 없이 (화신백화점의 경우에는 철거 반대 논의가 잠시 있었기는 했으나, 결국 라파엘 비뇰리의 탑 클라우드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렇게 기억조차 되지 않고 잊혀졌다. 1930년대 모단 건축을 잘 보여주는 태평로의 부민관 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아버릴까. 적어도 그 일만큼은 벌어지지 않길 바 라며, 모단 경성의 엽서 속 풍경을 머리속에 그려 본다.


Figure 6. 박길룡의 대표적인 작업인 화신백화점(좌측 사진의 중심 사진)과 박동진의 대표적인 작업인 조선일보사 사옥 (우측 사진의 부민관 옆 붉은 건물)이 동시에 나와 있는 1930년대 엽서.

* 얼마전 용산 참사 4주년이었지요. 용산은 20세기 이후 단 한 번도 우리의 땅인적 없었던 곳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늘 누군가에게 빼앗겼던 땅, 용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Twitter : @aoikasa27)


Allez, 2013

사회초년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웹툰만큼 재미있지도 않고 드라마처럼 관대하지도, 영화처럼 아름답지도 않은. 첫 사회로의 발걸음은, 조금 힘겹다. 갓난쟁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되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는 있지만, 그 누구도 그때처럼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지는 않는다. 세상에 부정이든 긍정이든 인생을 정의내리는 말은 많고 많지만 결국 현실은 현실이고, 매년 똑같은 다짐과 계획으로 새해를 시작한다면 그것조차


{beamil}

우리의 삶이니 인정하도록 하자. 한 시, 하루, 한달, 일년을 매일 완벽하게 살아야한다면 너무 힘에 부치니까. 당신의 시작은 어떠셨나요? 저의 시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때문에 상처받고 사람덕분에 위로받았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냈고 또 그렇게 1년을 보내겠지요. 이제 2월입니다.


왼손이


서서학동을 돌아다니다 미용실이 보였다.



촬영을하고싶어 무작정들어가서 촬영을 해도되냐고 물어보았다




생각보다 흔쾌히 촬영을 허락해주셨다.

이런 후진 미용실을 찍어뭐하냐.

등등.

글. 사진. 박민수


촬영을 하며 짧은대화가 오고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계속하는 단어가 ‘후지다’였다.

이런 후진 동네를 왜찍냐.

그날대화로만 보면 그분이 사는곳도 일하는곳도 후진곳이었다.



- 이 달의 선정 도서 『브이 포 벤데타』, 앨런 무어 글, 데이비드 로이드 그림, 정지욱 역, 시공사, 2008 웃는 얼굴 가면을 쓴 단발머리 남자에겐 이름이 없다. 그저 ‘브 이’라고 불러달란다. 복수(vendetta)의 브이? 승리(vic tory)의 브이? 어쨌든 그는 브이이고, 공권력을 이 용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조직을 향해 폭탄을 던진다. 법을 비웃으며 혼란을 야기하고, 모든 기 준을 박살내고 새로운 기준이 세워지길 바란다. 생각하라! 의심하라! 분노하라! 깨어나라! 이처 럼 무거운 이 만화의 주제는 검정색이 강조된 묵직한 붓 터치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생각하기엔 지루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읽 어보니 웬걸? 재밌었다. 한 번 손에 잡으니 놓을수 가 없었다. 이 달엔 체제에 반대하는 한 남자의 모습 을 그려보고자 한다. 브이처럼 무겁게 말고, 가볍고 발랄하게!

- 내게 그런 핑계 대지 마 “오늘 내가 너희들을 부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 너

“야. 와이프랑 자식이 없는 건 좋은 일이야. 난 니

희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기 싫어했지……. 사

들이 불쌍해. 허구헌날 눈치 보면서 살잖아. 근데 오

실, 그게 핑계가 아닌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핑계는 핑

늘은 대체 뭐 때문에 꼭 오라고 한 거야? 어차피 술이

계야. 어제 회식을 해서 힘들다고? 그래, 그렇겠지. 어

나 먹자는 거 아냐? 일단 술부터 시키자. 다 같이 모인

제 술을 많이 마셨으면 힘들만도 하지. 그런데 생각해

것도 오랜만인데.”

봐. 만약 내가 오늘 차에 치여서 죽을까 말까한 상황 이어도, 그랬을까? 와이프한테 혼날까봐 못가겠다고

봉수가 테이블 위 벨을 누르자, ‘띵동’하고 요란 스러운 신호음이 술집에 울려 퍼졌다.

했을까? 아니지? 설마 그러진 않겠지. 그렇지만 돌아

“그래. 봉수 네 말이 맞아. 넌 행복한 삶을 살고 있

봐봐. 너흰 오늘이 내 장례식이라고 해도, 이런 핑계

는 거야. 술 얘기도 잘했어. 우린 오늘 필름 끊길 때까

를 대면서 안 왔을지도 몰라. 내일이나 갈 수 있을 것

지 술을 마시는 거야. 한 명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

같다면서… 예전 같았으면 생각조차 못했을 일이지.

어. 알겠어?”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니야. 불과 오 년 전만 해도 내게

민식의 말에 봉수, 그리고 현성은 속으로 같은 생각

그런 일이 생겼다면 너흰 절대 핑계 따위 대지 않고,

을 했다. 이 새끼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래? 그

무조건 왔을 거야.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어. 너희에겐

걸 읽기라도 한 듯, 민식이 말을 이었다.

가족이 있고, 물론 봉수, 너는 가족이 없지만. 아니, 미

“너흰 분명 지금 내가 뭘 잘못 먹은 건 아닌가, 싶

안하다 봉수야. 가족이 없는 게 아니라 와이프랑 자식

을 거야. 하지만 나는 잘못 먹은 것 따윈 없어. 왜냐면

이 없는 것뿐이지.”

내가 먹는 거라곤 맨날 똑같은 것들뿐이니까. 새마을

민식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식당, 놀부 부대찌개, 아님 맥도날드… 여하튼 거기서


거기야. 내가 잘못 먹은 거라곤 오로지 나이. 그래. 나

게 살래? 응?”

이뿐이지……. 이건 너희도 마찬가지야. 지금 너희들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

꼬라지를 봐. 이제 겨우 서른여덟이야. 근데 꼬라지

“여기 놔주세요.”

들이 그게 뭐야? 마흔다섯이래도 믿겠어. 안 그래?”

현성은 맥주 5,000을 들고 온 종업원을 향해 살갑

“야. 그러는 넌? 돼지처럼 살만 뒤룩뒤룩 쪄가지 고.”

게 말했다. “씨발, 넌 언제까지 영업이나 하면서 살래?”

현성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민식이 그런 현성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래. 난 돼지야.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

“네가 무슨 상관이야? 다짜고짜 모이래서 힘든 몸

희만 그렇다는 게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란 거야. 이

끌고 왔더니, 무슨 그따위 지겨운 이야기를 하고 앉았

건 아니지 않아? 이건…”

어? 그만 해. 그냥 술이나 먹자.”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현성이 잔에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민식이 말을 이어가는데 종업원이 불쑥 나타났다.

“그래. 민식아. 다들 그런 생각하면서 살잖아. 그런

“맥주 5,000이랑요. 후라이드 한 마리, 양념 한 마 리 주세요.”

얘긴 해서 뭐해. 그냥 술이나 먹자.” 봉수도 현성의 말에 동의하며 덧붙였다. 민식은 눈

“맥주 5,000이랑 후라이드 양념 한 마리씩이요?”

을 질끈 감았다. 아, 이런 씨발 놈들. 노예 같은 새끼

“네.”

들…….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내 말은 이거야. 봉기를 들자 이거야.”

주문을 마친 현성은 만족스럽다는 듯, 소파에 기대

“봉기는 얼어 죽을… 봉수랑 술이나 마셔라.”

더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민식의 말에 현성이 비아냥거렸다. 봉수는 웃었고,

“야. 오늘은 내 얘기에 집중 좀 해봐.”

민식은 눈에 힘을 주며 현성을 노려보았다. 현성은 잔

민식이 현성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현성은

을 민식에게 건넸다.

미동도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봉수는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눈치를 보았다. “아, 씨발. 내가 서두가 너무 긴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이렇게 살지 말자는 거야.” 민식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살자. 그런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래? 자, 술 이나 마시자.” 셋은 술잔을 부딪히고 맥주를 마셨다. 민식은 벌컥 벌컥벌컥 목젖을 세 번 움직이며, 현성은 꼴깍, 한 모 금을, 봉수는 입만 대고 말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냔 말이야. 언제까지 돈 벌

“그래. 나도 네 말처럼 계속 그렇게 살아왔어. 그런

어다 집에 갖다 바치고, 하고 싶은 일이라곤 집에 누

데 오늘, 출근하다가 차에 치일 뻔 했어. 진짜 씨발 완

워서 텔레비전 보는 거 말곤 없고, 씨발 이게 사는 거

전 코앞에서 끼익, 소리까지 내면서 멈춰 섰다니까?

냐 이 말이야. 빌어먹을 와이프한테 다 갖다 바치고,

그러고 나니까 하루 종일 이 생각만 들더라고. 아, 진

허구헌날 와이프들 눈치나 보면서, 아니, 씨발 돈은

짜 이렇게 살기 싫다. 돈 벌어서 뭐하나. 갖고 싶은 것

우리가 버는데 왜 우리가 눈치를 봐야 돼? 그렇다고

도 없는데. 와이프랑 자식새끼에 대한 책임감? 개나

우리가 집안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봉

줘버려. 와이프랑 내 새끼가 나를 위할 것 같아? 둘 다

수야 미안하다. 이런 얘기할 때마다 네가 신경 쓰이

나한텐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 아니. 관심이 있긴 있

는 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너

지. 저 인간 또 술 처먹고 들어왔네. 아빠는 맨날 누워

희 아버지, 어머니 눈치 보고, 회사에서 그 정신이 오

만 있어……. 진짜 왜 이러고 사는 거냐? 너희는 안 그

락가락한다는 부장 새끼 눈치 보고… 언제까지 그렇

래? 니들도 똑같지 않냐? 이건 아니잖아.”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 현성이 강냉이를 씹으며 물었다. “봉기를 일으키자는 거지.” “뭘 어떻게?” 봉수가 물었다. “가출하자.” 봉수와 현성의 입에서 같은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풋!” “주문하신 후라이드, 양념 나왔습니다.” “여기요, 여기에 놔주세요.” 현성이 미소를 지으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민식은 후라이드 닭다리를, 현성은 양념 닭가슴을, 봉수는 후라이 드 날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다들 맥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너 농담 하냐?” 현성이 물었다. “농담 아니야. 우리 다 같이 가출 한 번 하자. 다 같이 휴가 맞춰서, 해외로 떠나는 거야.” “나야 가고는 싶은데, 남은 연차가 없어.” 봉수가 이어 말했다. “난 그런 짓 했다간 마누라한테 죽어.” 현성이 손가락을 빨며 답했다. “아, 진짜 이런 씨발. 니들은 언제부터 그렇게 노예가 된 거냐? 안 가고 싶어? 돈 없어? 휴가야 어떻게든 만 들면 되는 거 아냐? 결국엔 또 핑계대면서 회피하는 거야?” 민식은 이렇게 말하며 양념 닭다리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러자 현성이 민식의 손을 제지했다. “야. 너 닭다리 하나 먹었잖아.” “지금 닭다리가 중요하냐? 계속 이렇게 살 거냐고.” 그러자 현성이 노래를 불렀다. “내게 그런 핑계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셋의 입에서 닭살들이 튀어나오며 이런 소리를 냈다. “풋!”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꽃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 홍대에서 플라워 카페를 오픈하여 시작한 레슨은 연남동 작업실로 이전을 하면서더 많은 사람들이 문의를 하고, 더 많은 수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 레슨 공지는 포스터 제작까지 하면서, 홍대 군데군데 홍 보처도 알아보러 다니고 SNS에 주변 지인들 홍보까지 보 태어 진행되었는데. 5명의 모든 학생들이 자리하시기 전까 지 그 긴장감이란...! 카페 장사는 안할 것처럼 테이블은 수 업 위주로만 정돈해 놓고 꽃은 혹시나 부족할까하여 꽃시 장의 계절 꽃은 종류별로 색깔별로 다 사놓았고 시계를 1 분에 한 번씩 힐끔힐끔. 혹시 오지 않으시진 않을지.

환불을 요청하시면 그럴 순 있어도 남을 재료는 어떨지 걱 정이 걱정을 낳을 때 쯤. 한 분 한 분이 자리 잡으셨습니다. 긴장되어 미리 준비해 둔 이론 수업 지를 한 장씩 나누어 드 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드리고 수업 지를 읽어가던 전. 금새 종이를 내려놓고 눈앞에 직접 보이며 단계를 설명 해 나갔습니다. 눈을 마주보고 한 사람 한 사람 살피면서.. 수강생의 반은 디자이너였고 반은 일반 직장인들 이었습니다 남자분도 계셨고. 수업을 마칠 쯤은 제가 더 소외감이 들만 큼 어느 순간 서로 언니 동생 하며 서로의 작품을 평가하고 돕고, 웃고 휴대폰을 꺼내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싱글벙글 하며 맘껏 꽂은 꽃을 태우려고?! 택시를 잡아타면서도 행복한 건지 자신의 이런 주객전도 된 모습이 우스운 건지..흥분 된 웃음소리를 남기면서..그들이 떠나고. 남은 가게를 정리하며 전 자꾸 미소가 지어지고 행복했습니다.

꽃을 시작한지 7년 차. 일을 시작하고 직원들 교육은 수도 없이 시켜보았지만. 일반인에게 어떻게 재밌게 쉽게. 아니, 가 르칠 수나 있는 건지. 제 스스로에게 의문 투성 이던 수업은. 이상하게도 수강생들보다 더 제가 즐거운 시간이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음 수업은 언제에요? 엄마가 술 풀 돈으로 맨 정신에 꽃 들고 온다고 무지 좋아해서요.

그녀는 상품포장 전문 디자이너 팀의 막내 여직원이었습니다. 26? 27? 정도 된 그녀는 몹시 예쁜 얼굴을 한 원피스가 잘 어울릴 것 같은 가녀린 몸이었지만 늘 운동화에 신축성 좋은 청바지.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늘 선배들의 커피 심 부름을 오기도 하고 남자 선배들과 허허 거리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 수업을 하면서 저에게 보이는?! 그 분의 성격 중 에도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이.....하하.. 직장 선배는 그녀에게 “봐봐, 딱 꽃도 너처럼 어중간하고 애매하고 주눅 들어 있어.!!”라고 꽤 독한 멘트를 날리는데 워낙 막역한 사이라 그러한지 얼굴을 마주하고 웃고 맙니다.

그녀가 돌아가 다음날. 딱 저렇게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치여 매주 금요일 밤이면 술에 취해 들어가던 딸이 맨 정신에 꽃을 들고 들어가니 엄마가 너무 좋아하셨다. 술값을 아껴 꽃값을 대야겠다..는!! 의외의 수강생분의 재 수강 요청에 저는 처음으로 꽃 수업이 단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Healing”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족들이 자꾸 소질 있다고 해서 뉴질랜드 화훼학과 알아봤다니까요 하하


홍대라는 공간이 몹시 잘 어울리는 최강동안?!의 상큼한 바리스타 쏭양.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음... 몹시 해피바이러 스 가득한 그녀는 도무지 저에게 낯선 존재였음은 틀림없었습니다. 뉴질랜드에 워킹을 하기 위해 출국 예정인 그녀는, 나 가서대화능력이 떨어지는 대신 예쁨 받을 뭔가를 채워가겠다며 꽃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첫 수업 전 날. 작 업실 식당 카페까지 3차로 돌아다니며 일명 ‘입 터진 날’을 맞이한 우리 두 사람의 수업이란... 1월 14일에 출국한 그녀는 12월 마지막 주까지 수업을 들으며 가족들과 저에게 소질을 인정받고 정말 학교를 알아봤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말은 첫 수강생과 똑같았는데..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출국일이 다가오며 생기는 불안,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힐링의 시간이 되 었어요 쌤!”

이것으로 제 수업의 방향은 더 확실시 되었습니다. 이 시간은. 지적인 나눔이 될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소통이 중요한 힐 링의 시간이라는 걸.

이 외에도 다양한 에피소드를 가진 수강생들이 많습니다. 룸메이트와 같은 날 실연의 상처를 안고 수업을 신청하신 두 여성분의 서른 즈음의 파혼의 인생사 힐링 타임과 28살 꽃 처녀들의 귀여운 신부 수업시간. 씩씩하게 카페 데커레이션을 하겠다며 찾아오시는 멋쟁이 미녀 바리스타님들들들과 아기들의 눈물과 함께하는 아기어머니들 레슨 등등!!!!

기혼자분들에겐 “돌아가실 때 케이크 하나 사 가셔서 가족들과 더 좋은 분위기 내세요~” 하고 미혼자들에겐 “언니, 오늘 이거 하고! 수다 1차 풀고. 내일 아침 일찍 사우나가서 마사지 좀 하고 오후에 네일아트하면서 수다 2차 주말 힐링 끝!“ 하고 이야기 합니다.

꽃은 살아있는 녀석이라 그런지. 기특하게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뭔가 답답하고 조용히 혼 자 있고 싶거나 해소가 되지 않을 때엔 예쁜 꽃을 만져보시는 것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행복한 2월 되세요!

글. 플로리스트 안언주.


Public Gastronomy 13회 - 소박하지만 내공 있는 화상(華商), 구무전(九畝田) 글, 사진 / 미식의별 (트위터 = @maindish1)

연희동의 숨겨진 고수 구무전(九畝田) 중식당 중에서도 화교가 운영하는 곳을 화상(華商)이라 하는데, 현재 서울에서 화상(華商)이 가장 밀집해있는 지역은 바로 마포구 연희동과 연남동 일대이다. 이 지역의 화상(華商) 중 나름 알려진 곳만 꼽아도 십 수 군데는 되며, 잘 알려지지 않은 곳까지 모두 합하면 물경 수십 곳의 화상(華商)이 영업을 하고 있으니, 가희 서울 속의 차이나타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화상(華商) 중에서 솜씨에 비해 유독 알려지지 않은 곳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연희동의 구무 전(九畝田)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구무전(九畝田)은 연희동 사러가마트 맞은편 골목에 위치해 있는데, 유동인 구가 있는 골목도 아니고 가게가 대로변에서 보이지도 않는데다 이름마저 평범치가 않다 보니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구무전(九畝田)의 사전적 의미는 밭 아홉 마지기인데, 이는 밭 아홉 마지기만 있 으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 이런 이름 그대로 사장님 일가족이 소박하게 운영하는 곳이지만 그 이상의 내 공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연희동 연남동에는 제법 규모 있는 화상(華商)과 이렇게 소박하게 운영하는 화상(華商)이 서로 혼재되어 있는 데, 작은 지역에 이렇게 많은 화상(華商)이 모여들고 생겨난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홍대 인근의 저렴하고 맛있는 업소를 소개합니다.


연희동의 화교 인구 연희동 연남동에 화상(華商)이 많이 몰려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연희동의 한성화교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서 울의 화교 인구가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서울 화교 인구는 과거 한성화교소학교와 중고등학교가 있 던 명동 일대에 주로 거주하고 있었으나, 1969년 대만 과 국교가 단절되며 당시 대만대사관(구 명동중국대사 관) 내에 위치해 있던 한성화교중고등학교가 연희동으 로 이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화교 인구 또한 연희동 을 중심으로 커 나가게 되었다.(한국에 있는 화교 학교

구무전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삼선짬뽕

는 모두 대만의 지원과 협조하에 운영되고 있으며, 교 과서도 대만에서 지원받고 있다.) 현재 연희동 일대의 화교 인구는 서울에 거주하는 화 교의 50%, 한국 전체 화교의 20%에 달한다고 하니, 그 토록 많은 화상(華商)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쉽게 이 해가 되지 않을지.

구무전(九畝田)의 독특한 삼선짬뽕 구무전(九畝田)에서 일단 먹어봐야 할 메뉴라면 삼선 짬뽕(6천 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짬뽕의 트 랜드라면 보다 호화스러운 재료와 자극적인 맛이 아닐

짜사이를 파채와 함께 무쳐낸 것도 특이하다.

까 싶은데, 구무전의 것은 호화스럽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깊은 맛을 가지고 있다. 국물 맛은 마치 간장 국물에 고춧가루를 넣어 볶은( 끓인) 듯한 맛이 나는데,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클래식 한 느낌이 드는 것이, 처음에는 약간 당황될 정도로 일 반적인 짬뽕국물과는 다른 맛을 보여주지만, 조금 먹 다 보면 구무전(九畝田)만의 개성에 고개를 절로 끄덕 이게 된다. 건더기에 있어서는 해물이 듬뿍 들어가는 등의 호화스러움은 없지만, 센 불에 볶아낸 배추가 듬 뿍 들어있어, 그 아삭한 치감이 즐거운 쾌감으로 다가

대부분의 요리가 1만 원대 초반.

온다. 삼선짬뽕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다음은 요리를 먹어볼 차례. 구무전(九畝田)의 요리들은 가격이 대부분 1만 원대 초반으로, 부담 없는 가격에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다만 사장님께서 혼자 요리하시다 보니 주문 이 밀리면 음식이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 한 번에 여러 요리를 하시다 보면 상태가 간혹 일정치 않을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관용이 미식 생 활을 좀 더 풍요롭게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식사 메뉴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소박한 가게지만 그 이상의 맛을 보여주는 구무전(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8

九畝田). 기존 연희동 연남동의 유명 화상(華商)들과

전화 : 02-3141-8788

는 다른 개성과 그들에 뒤지지 않는 솜씨를 한 번 즐

위치 : 연희동 사러가마트 맞은편 본죽 옆 골목

겨보시길.

기타 : 오후 3시~5시 브레이크 타임.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공공(Public)의 미식(Gastronomy)을 추구합니다.


부산오뎅 이야기 (잘 계시죠?)

혹독했던 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아직 완전히 물러간 건 아니지만 이쯤 해도 괜찮은 것 같다. 2년 전 즈음, 나는 외할머니가 계신 은평구 어딘가의 외갓집에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가곤 했다. 할머니랑 밥도 먹고 용돈도 좀 드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어느 날 허리가 안 좋으셔서 입원한 할머니는 얼른 퇴원을 하고 싶어 하셨는데, 얼른 나아서 집으로 가고 싶어 하신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것보다 60년을 넘게 피워오시던 담배를 못피게 하는 병원 생활에 더더욱 빠른 퇴원을 하고 싶어 하 셨다. 같은 애연가로서의 그 고통을 알기에 나는 매일 할머니가 계신 병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간병인 아주머 니가 못 나가게 하곤 했지만 잠깐 바람 쐬러 나간다며 휠체어를 끌고 내려와 할머니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 면 세상에서 젤 행복한 표정으로 맛있게 태우시던 게 눈에 선하다 그렇게 한동안 매일 가서 담배한대 태우시 게 해드리곤 돌아오던 어느날, 매일 오는 손자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할머니께서 이제 담배를 끊으시겠다며 이 제 매일 안와도 된다고 말씀 하시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할머니와의 끽연 미팅은 그것으로 끝났다.


허리가 안 좋아서 입원한 할머니는 당뇨와 혈압. 여러 가지 잔병으로 더 이상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기가 더 이상은 무리여서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경기도 파주의 어느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요양원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던 나는 수시로 요양원을 찾아가 할머니에게 맘에 안 들면 집으로 모신다며 언제든 얘기를 하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당신께서 너무 좋다고 하셨었다. 그때부터 1년 정도의 요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또 거길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이것저것 할머니가 드시 고 싶어 하시는 먹을거리를 사서 간다. 말이 파주지 내가 엄청난 효손도 아니고 부산 집에 계신 어머니와 이 모한테 안부 전해드리고 전화 통화시켜 드리고 하는 전령사+손자로서의 약간의 책임감이지 순전히 내 마음 에서 100%우러나 간 건 아니라고 고백한다. 차가 없는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황사 날리는 봄에 황사 맞으며 다녀오기 일쑤고 한여름에 햇볕에 땀 뻘뻘 흘리고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흠뻑 젖은 채 다녀오기도.. 구제역비상에 오토바이타고 방역약품세례도 받고 추운겨울에 눈물 콧물 흘려가며 다녀오기도 하고 다녀오는 길 힘들어 이제 그만가고 싶다고 ‘이제 그만 장수하셨으니까 돌아가실 때 되지 않았냐’ 며 오토바이가 고 장 나던지 아님 내가 사고 나서 입원을 하면 병문안을 한동안은 안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불효막심한 생각도 하곤 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 이던 습관이던 마음에서 우러났 건 멈출 수 없었던 그길 ... 2 월이면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1주년이다 비 온 다음 날 햇볕 쨍쨍한 날 코를 찌르고 역겨웠던 요양원 즈음 밭 에 뿌린 거름냄새마저도 이젠 그리웁다. 고장 나지 않고 달려줬던 나의 당나귀야 고맙구나... 가실 때를 직감 하셨는지 1년 동안 간병해줬던 간병인 아주머니들 한 분 한 분 불러서 잘 있으라며 고맙다며 나는 이제 간다 며 천국 간다며 작별인사하고 떠나신 할머니... 잘 계시죠?


into the jazz : 외국에서 음악하기

외국생활이 어느덧 벌써 만 24년이다. 89년에 캐나다 밴쿠버로 건너가 지금까지 타 지생활을 하고 있다. 계산을 해보니 내 인생의 65%를 영미권 문화에서 보냈다. 초등/ 중학교를 뺀 모든 학창시절과 사회생활 그리고 음악활동을 모두 캐나다/미국에서 했 으니 외국(영어권)생활에 대해 제법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경험해야 할 것과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이젠 내 몸 속에 두 개의 문화(한국문화와 영어권문화) 가 동시에 완전히 흐르는 듯 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서는 한국식이고 생활습관은 영어식으로 자리 잡혀있다.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문화가 이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난과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승엽 선수나 이 동국 선수의 경우는 국내용이라며 여전히 사람들은 비 아냥거린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외국에서 보낸 나에 나는 스포츠를 매우 좋아한다. 음악뉴스는 안 봐도 포

겐 지금 지동원 선수나 박주영 선수처럼 좀처럼 자리

탈사이트에서 메이저리그와 유럽축구뉴스는 꼭 접하

를 잡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

고 산다. 특히, 과거엔 박찬호와 김병현, 지금은 추신수

적이라 생각한다.

의 경기결과는 물론 유럽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박지 성, 기성용, 박주영, 이청용 등 모든 유럽리거들의 소식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가고 이민을 간다. 이곳 밴쿠버

을 실시간으로 챙겨본다. 스포츠를 유난스레 좋아하는

에도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

이유도 있지만 외국에서 사는 나로선 거칠고 매정한

고 온다. 뉴욕은 말 할 것도 없이 각 분야에서 아메리

유럽리그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

칸 드림을 꿈꾸고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모든

고 있는 우리선수들에게 큰 위로와 자극을 동시에 받

유럽리거와 메이저리거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듯 많은

기 때문이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나에

유학생들은 본인이 꿈꾸던 일을 이루기는 커녕 학위도

게 정말 큰 힘이 된다.

못 마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민자의 경우 보기 좋은 아메리칸 드림은 온데간데 없고 녹록지 않은 외국생활

그러나 이런 대단한 선수들도 실패하고 내리막길을 걸

에 지쳐 다시 한국으로 역 이민을 가는 경우를 우리는

을 때가 있다. 박찬호 선수도 그랬고 추신수 선수도...

종종 본다. 왜 그럴까. 외국에서 성공하고 사는 것을 자

그 외 여러 유럽리거들도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연스레 생각하는 것은 분명 기대치가 높은 것으로 좋

을 우리는 때때로 접한다. 물론 성공은 커녕 해외 진

은 일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들이

출 후 한 경기도 나서지 못하고 귀국해 쓸쓸히 사라지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아

는 선수들도 있다.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도 이

닌가 싶다. 외국생활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접하는 것

런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실패와 내리막길을 걷는 여

처럼 결코 쉽지 않고 낭만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절망

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 대한 응원

에 더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보다는 입에 담지 욕설과 비난, 그리고 언론 역시 힘들 고 외로운 외국생활에 대한 심층적인 기사보다는 오로

꽤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나와 음악으로 성공한 자신

지 실패라는 단순한 결과만을 가지고 기사를 쓰는 것

의 멋진 모습을 한국에 있는 지인 또는 주위사람들에

을 보면 매정하고 거친 외국생활을 오래한 나로선 마

게 증명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물론, 도전하는 것은 좋

음이 매우 쓰라리다.

은 것이다. 그러나 열정과 패기만으로 헤쳐나가기엔 외국생활이 보기보다 쉽지 않다. 외국에서 음악을 하

우리는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박찬호 선수나 박지성

면서 접할 수 있는 여러 어려움들을 앞으로 월간이리

선수처럼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과거 김

에서 몇 차례 걸쳐 심층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두현 선수나 최희섭 선수같이 실패한 선수는 종종 비

음악칼럼니스트 이상준 홈페이지: www.jonleemusique.com 이멜: jonleemusique@yahoo.com 트위터: @nomidguitar


‘홍라희’와 관련된 속좁게 길고 쓸데 없는 이야기

@exxx2x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미술 월간지 ‘아트프라이스’가 지난 1월15일부터 12월15일까지 미술인과 일반인 등 3368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31일 발표한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인물’에서 홍라희 씨가 2011년에 이 어 1위로 뽑혔다. 월간이리의 표지를 만드는 화가는 “어디 작가도 아닌 사람이 1위에 뽑히냐”며 분개했고 이와 관련 글을 쓰겠다고 이야기 했지만 결국 제가 씁니다. 작가가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죠. 그래서 작가의 작품은 생산된 상품으로 소비자에게 판매되어야 합니다. 작품 을 판 돈이 있어야 계속해서 작가활동을 영위할 수 있으니까요.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서 작가활동을 하려면 이 외에 돈 나올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국립 미술관에서 소장용으로 사거나 그외의 강연이나 상금 등의 부수 적인 활동일 겁니다. 운이 좋으면 후원자를 만날 수도 있겠죠. 성인 작가의 생활비를 고려했을 때 일년에 전시를 한번 한다면 재료비 빼고 판매 순이익이 2천만원은 되어야 합 니다. 그래도 한달에 167만원 꼴입니다. 그림을 판 돈이 다 주머니로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갤러리에서 보통 절반을 가져가니까 재료비 포함해서 못해도 총 판매금액이 4500만원은 되어야 할 겁니다. 이것도 최소 이야기 지요. 더 적은 금액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 입니다. 작가가 노력한 끝에 좋은 전시장에서 전시를 하면 많 은 사람들이 보러 옵니다. 마음에 들어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다른 상품들과 다르게 미술품의 경우 보통 사 람들은 마음에 들어도 그림 가격을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의 심리적, 금전적 여유를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 많은 방문객 중 소수,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들. 그 중에서도 꼭 마음에 드는 미술품이어야 주머니 가 열릴 겁니다. 사고 파는 이야기를 하자니 이제 겨우 홍라희 씨가 등장할만 합니다. 시장에서 돈 가진 사람이 왕이라지요. 그렇 지만 그렇게 되면 또 예술이라는게 너무 초라해지니 영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애초에 버둥거리는 심정으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서 혹시 이건희 회장처럼 마누라와 자식빼고 다바꿔야 한다는 식의 발언 을 한 것이 있나 싶어서 찾아보았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발언이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2012년 1월 1일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 홍라희라는 이름이 들어간 기사들입니다. 1737건 중 비슷한 것은 한건으로 묶었습니다. 그중 발언은 따로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12월부터 1월 순) 2012 한국 미술계 파워1위 홍라희 - 글의 계기 서미갤러리 ‘메가톤 세풍’ 내막 - (재벌 비자금 세탁처 의혹 단골) 이건희-홍라희 남 · 녀 주식부자 1위 - 1조5천564억 이건희 삼성 회장 취임 25주년 기념식 관련 - 동반 홍라희·이서현·정용진, 故 이병철 창업주 제사 참석 - 시아버님 제사 국가지정문화재 ‘퇴우이선생진적’ 34억 경매 낙찰… 알고 보니 주인은 삼성문화재단 - 홍라희씨는 보물 5점소유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비평가는 누구인가 - 인상 깊은 부분 아래 참조 런던으로 간 회장님들.. 기업 알리는 ‘국가대표’ - 참석 호암상 시상식에 모인 삼성家 - 참석 홍라희 관장, 여수엑스포 관람 - 참석 헌혈버스 기증식 참석한 홍라희 여사- 참석 한솔그룹 결혼식…범삼성가 한자리 - 참석 ‘CES 2012’참석 위해 출국하는 이건희 회장 - 동반 71세 생일 맞은 이건희 회장 - 동반 발언 ‘없음’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미술 월간지 ‘아트프라이스’는 뭘 보고 후보를 뽑았고 미술인과 일반인 등 3368명은 무슨 감화나 영향을 받았는지 말입니다. 이게 뭡니까. 전 정말 하나라도 나올 줄 알았습니다. 내심 기대도 했었습니다. 뭔가 나와서 반성하고 느끼기를 말 입니다. 그 난해하고 어렵고 긴 문장과 미사여구들이 한해 내내 돌아다니는 미술계의 영향력 1위가 한 해 동안 기사화 될만한 하나의 발언도 남기지 않았다는게 말이 됩니까? 대중들에게 미술과 관련해 이렇다할 발언이나 공 개된 인터뷰 하나 없는 사람을 1위로 뽑는일이 가능하다니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 입니다. 2013년에도 누군가 1위가 될 겁니다. 올해에는 부디 뭐라도 나온 사람이 선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는 사람 인 받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부끄럽진 않아야죠. 인상깊은 부분> 컬렉터들 역시 비평가의 역할을 한다. “한국 미술동네에는 청와대에 살지 않는 ‘또 다른 대통령’ 이 있다. (…) 미술인 누구나 그를 ‘지존’으로 인정한다. 가끔 미술관, 화랑가를 찾으면 ‘알현’을 하려는 화랑주들 과 작가, 기획자들이 몰려온다. 자기네 작품을 설명하고 한번이라도 눈길을 받으려고 안달이다. 그가 유심히 본 미술품은 당장 인기 그림이 된다. 기하학적 화면의 미니멀리즘 그림을 좋아하는 그는 서구에서 30년 전 끝난 이 그림풍을 1990년대 이후 한국 화랑가의 최신 유행으로 만들어내는 괴력도 보여주었다.”(‘위태로운 미술지존 홍 라희’ <한겨레21>, 2007년 12월6일자) 화랑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거기서 그녀는 거의 재림예수였다. 죽은 나사로를 되살린 예수처럼, 그녀는 죽은 예술언어를 되살린다.


개와 나무 사이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02.24 http://cafe.daum.net/badabie


댄 퍼잡스키 Dan Perjovschi

작년,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토탈 미술관에 처음 가봤습니다. 그 때 전시했던 작가가 ‘댄 퍼잡스키’ 입니다. 작가를 알고 간 건 아니고, 당시 일하던 곳에서 토탈 미술관 자체를 견학하라고 시간을 내 주셔서 들렀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인상 깊던 미술관 건축에 대해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토탈 미술관은 한 번에 건축된 것이 아니고 조금씩 이어 붙여가며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한정 된 부지 내에 건물이 적응해가며 자라듯 지어진 거죠. 그래서 층층이 느낌이 다르고 동선도 재밌 습니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 철근콘크리트 벽의 반 평 남짓한 부분이 뚫려있기도 하고요, 건 축에 방해요소로 여겨질 수 있는 암석을 그대로 살려 벽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공간에 맞춰 지은 곳이라 그런지 평소 접하기보다 좁은 통로를 만나는데 답답하다고 여길 틈에 작은 창을 두어 다 음 공간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런 시야 확보로 벽이 많은 데도 공간 자체는 열려있는 기분을 받습 니다. 이런 건물이 전시 공간이라니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 반면, 잘못하다간 그림이 죽겠구나 생 각하기도 했어요. 다행히도 ‘댄 퍼잡스키’의 작업은 토탈 미술관의 벽마다 훌륭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전시 주제였던 ‘The News after The News 뉴스 이후의 뉴스’는 미디어가 개인과 집단에게 미치는 부 정적 영향, 즉 정보를 통제하고 사상을 획일화시키려는 것. 거기에 익숙해진 개인, 집단의 병든 현 상, 즉 무엇이 옳고 중요하고 추구할 것인 가를 선택하는데 미디어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고 미디어 의 말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 그래서 하나 같이 비슷한 이슈, 가치에 몰두하는 것. 익명의 활동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풍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분단에 대한 그림도 있었고요. 작가는 한국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몇 달간 전시팀에게 한국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 고 전시를 앞두고 토탈 미술관에 머물며 벽에 직접 작업을 했다합니다.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 류애와 보편선에 의거해 공통메시지인 평화 추구. 그런 사이사이에 예술에 대한 기대와 허무가 섞 인 듯 한 그림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형식으로 부조리한 사회와 그로 인한 문제를 고발하고, 자신의 처지 또한 풀어내는 거겠네요. 3층 높이의 벽을 가득 매운 그림들을 유쾌한 기분 을 느끼며 감상 했습니다. 작업의 형식을 말하면 착상 후 벽에 그려지는 시간이 10초정도라고 예상할 수 있는 그러니까, 단 필의 ‘낙서’입니다. 작가는 평소 일기를 쓰듯이 낙서를 하고 그 가운데서 전시할 낙서를 추린다고 합니다. 작업에 쓰는 도구는 펜이나 마커이고요. 낙서이나 그만의 탄탄한 필력을 느낄 수 있는 작 업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댄 퍼잡스키’를 검색할 때마다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라는 표현 을 꼭 보게 되는데 ‘이것은 그냥 낙서가 아니다, 볼만한 것이 있다. 이것은 뛰어난 메시지를 뛰어 난 방식으로 담고 있다.’의 축약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생각키에 이런 때에 예술이라 이름 되는 것 은 일단 고급의 볼거리로 제공된 것입니다. 뭐, 말 그대로 예술은 이야기가 될 만한 볼거리 중 하


나입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풍성한 빈틈 사이사이가 이야기로 가득 차있고, 우리는 그 이야기 를 보러갑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자극으로 인해 활성화되어 ‘뭔가 를 할’ 동력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뭔가’에 몰두할지 방향을 정하는데 영향 받고 싶 기도 할 테고요. 이번에 ‘댄 퍼잡스키’를 그리기로 한 이유는 제가 생각하는 ‘예술가라면’ 할 일 중의 하나가 사회 구 조와 그 구성단위를 도식화해서 사람들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 니다. ‘댄 퍼잡스키’의 드로잉은 짝·홀, 음·양, 펜·칼 등의 비유로 이원 되어있기에 왼손·오른손에 무 엇을 두고 서로를 비교할지 제시해줍니다. 적은 획으로 최적의 풍자를 보이죠. 비교, 분류, 단순화 를 통해 잔가지 많은 세계를 뿌리-줄기-가지-잎으로 제시합니다. 어느 것이 위고 아래인지, 누가 강하며 약한지, 그리고 그런 것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등의 역학관계와, 구성요소는 무엇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는 이는 그렇게 단순화된 구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겠죠. 그러면 어떤 역할을 맡을지, 어떤 것을 거부하고 어떤 것을 받아들일지를 정하는 분별력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기위해선 잠시 멈춰야합니다. 이 정도로도 써두니 그것만으로 일단 충분할지모르겠네요. www.danperjovschi.kr/ 이 링크는 토탈 미술관에서 댄 퍼잡스키의 전시를 준비하며 마련한 사이 트인데 멈춰서 볼만하네요. ^^

freshdrawing.blogspot.com 제 블로그도 마찬가지로 볼만합니다.

글. 그림.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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