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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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습니다. 뭐 더 말할 필요 있습니까? 계절을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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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미
관
미술 옆 기 회사 강세
장 미셸 바스키아와 인사이동
하아. 인사 이동 시즌이다. 입사 4년 3개월 동안 한번도 개인적으로 부른 적이 없는 전무님이 나를 느닷없이 호출했다. 새로운 부서에 옮길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잇는 걸 보니 옮길 부서가 영 가기 껄끄
러운 곳임을 직감했다. 그 앞에서 감히 ‘노’를 할 수도 없거니와, 일단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예스’라고 답하리 라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도 괜찮다고 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인사 이동시기에는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라고 내뱉은 영화 ‘타짜’의 아귀의 대사 를 신조로 삼으라고 하고 싶고, 나 역시 그렇게 살려고 한다. 꼬리를 무는 생각과 소문, 그리고 추측들에 자칫 말실 수도 할 수 있고 하니 빨리 생각의 끈을 자르는 게 상책이다.
요즘 내 상태 때문에 그런지 뉴욕의 허름한 거리에 물감과 스프레이를 마구 싸질러 놓은 ‘장 미셀 바스키아’의 자유
로움이 유달리 크게 다가왔다. 연신 프리덤을 외쳐대도 막상 멍석 깔아주면 그 자유를 십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누 가 있을까? 아마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의 나래가 뿜어져 나오는 대로 표현하는 바스키아의 그 재주가 부럽다. 캔버스라는 판에 그 마음을 있는 대로 토로하고 머리 속에 이것저것 떠오르는 그 무언가를 단 하나의 글자도 빠뜨리
지 않고 붓을 통해 옮겨 놓는 듯한 그의 그림을 보다 보면 우리네 직장인들은 얼마나 많은 말과 행동을 삼키고 사는 지 새삼 나 자신이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바스키아는 그림을 그릴 때 진짜 떠오르는 대로 그려댈까? 보고서 한 장 작성을 위해 수십번 이상을 왔다 갔다 종이
뽑았다 버렸다 하면서 고쳐야 하는 그 마음. 답 나오지 않는 지적에 ‘빠꾸’ 맞고 돌아가 제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모 니터 바라보는 그 심정을 바스키아는 알까 모르겠다.
인터넷 화면으로만 보던 바스키아의 그림을 실재로 보니 하 나의 감성이 와 닿았다. 그것은 어렴풋한 80년대의 에너지 였다. 마치 비행기가 이륙을 결심하고 활주로를 전력으로 달 리기 전에 내는 그런 벅찬 에너지 말이다.
그의 그림은 70년대 뉴욕 브롱스의 한 골목에서 시작된 힙 합이 80년대 뉴욕 전역을 비롯, 미국을 거쳐 전 세계로 퍼 지는 그 당시의 힘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짝 달라붙은 가죽
바지와 긴 머리의 메탈이 대세였던 당대에 조그만 인디 클
럽에서 찢어진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연주된 서브 컬처에 불과하던 얼터너티브가 퍼지기 시작했던 그 때의 정서였다.
‘응답하라 1997’의 미국 버전이었다. ‘응답하라 미국 1980’ 쯤 될까? 그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그림 이상의 정서를 공감
케 하는 마력이 있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문화를 함축하 기도 하고, 인간의 정서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당대의 작품 과 차별성을 보이며 이들이 생각지 못한 한 차원 다른 세상 을 보여주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이런 점에 있어서 내게 참 명 그림이다. 참 그리고 며칠 후에 나는 전무님이 보내려는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책상에 바스키아의 그림을 프린트라도 해놓아야겠 다. 답답할 때마다 지금 느꼈던 자유로 돌아가게 해주리라
Jean Michel Basquiat
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지나가다 보니 아라리오 삼청점이 강남지점과 통합되었다.
미술계가 어렵다고 하더니 진짜 그 말이 맞나 보다. 국제갤 러리의 신관 K3를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본 갤러리 중에 제일 이쁘게 생겼다.
글. 강세기(kangjoseph.tistory.com)
이미지와 사진은 국제갤러리와 구글 (www.kukje.org)
영화로 보는 시공간
모성멜로드라마의 무서운 진실: 1930년대 헐리우드 마터널 멜로드라마 (maternal melodramas) 와 스텔라 달라스 (Stella Dallas, 1937) 분석
글 by 곡주대비
그간 피와 내장으로 버무려졌던 공포 장르를 이 지면을 통해 논해왔으나 이번 달 기사는 독자들의 정서함 양을 위해 멜로드라마로 잠시 외도를 해볼까 한다. 사실 멜로는 필자가 특별히 총애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꾸준히 사랑 받아왔으며 그 중 한국과 일본 같은 아시아 권에서는 특히 인기 가 더 했던 장르였다. 신상옥 감독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신필름의 활약으로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에도 멜로는 총 제작의 6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1960년대는 한국 멜로 드라 마의 황금기로도 일컬어진다. 멜로드라마가 본격적으로 money making 장르로 인정받은 것은 1930년대 헐리우드로, 1930- 50년대 까지는 멜로드라마의 홍수기 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많이 제작되었 다. 이 기간 동안 만들어진 멜로드라마를 통틀어 학자들은 woman’s films 즉, ‘여자들 영화’라고 폄하하기 도 한다. 그 이유로는 이 시기의 영화들이 여자들만을 만족 시키기 위해 만든 지극히 신파적인 요소와 반 복되는 줄거리를 특성화 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르의 시작이 되는1930년대는 엄마와 딸이 주제가 되는 영화들이 많이 개봉되었는데 그러한 하부장 르를 maternal melodrama, 즉 모성멜로드라마라 일컫기도 한다. 필자가 굳이 어떠한 형태의 영화들이라 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이 장르의 성격에 대해서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와 딸의 등장 ->갈등->엄마 의 희생 혹은 엄마의 예기치 않은 사고/병->딸과의 관계회복, 눈물의 결말 – 이러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 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수없이 개봉되지 않았는가. (예: 최강희, 김영옥의 애자, 고 최진실, 김혜자의 마요네 즈) 혹자는 모녀간의 관계를 영화적인 시선으로 훈훈하게 바라보는 다소 도덕적인 장르라고 할 수도 있겠 으나 이러한 모성멜로드라마는 페미니스트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첫째로, 대부분의 모성 멜로드라마에서 딸 캐릭터들은 엄마보다 나은 – 사회적으로나 인격적으로 – 인간 상으로 제시가 된다. 예를 들어 앞으로 설명 하게 될 스텔라 달라스에서 엄마는 하층부류로 태어나 일확 천 금 만을 꿈꿨던 철없는 알코올 의존증 캐릭터로, 딸인 로렐은 학교에서나 또래 집단에서 언제나 모범적인 ‘ 신여성’으로 엄마와는 매우 대조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영화는 인격적으로 부족한 엄마가 나은딸로 인해 좋은 엄마로 거듭난다는 결말을 제시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렇듯 딸보다 못한 엄마가 좋은 엄마가 되겠다 는 모성적인 의지로 인해 ‘구원’ 된다는 것은, 영화학자 린다 윌리암스가 지적하기를, 자연 그대로의 여성 성 보다는 엄마라는 주체를 가진 여성성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 지극히 남성적인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어 있 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딸 보다 못한 엄마는 딸을 우러러 보게 되고, 엄마의 희생은 딸을 위해서 라기 보다 자신 보다 더 나은 인격체를 위한 희생으로 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독자들이 이 주장자체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모녀관계의 성스러움이 나 고결성을 폄하한다고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윌리암스가 주장 하는 것은 이러한 영화들에 서 그려지는 ‘나은 인간상’ vs. ‘열등한 인간상’ 의 구조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재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윌리암스에 따르면, 많은 모성멜로드라마에서 엄마와 딸이 한 거울을 같이 보는 씬들이 등장하는 데 이는 남성과 여성이 등장하는 로맨틱한 씬에서 남자가 여자를 관음증 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동일하게 처리 되어있다는 것이다. 정말 황당하지만 흥미롭지 않은가! 윌리암스는 이러한 그녀의 주장을 위해서 1937 년 작인 ‘스텔라 달라스’ (킹 비도 감독) 라는 영화를 예로 들고 있는데, 특히 마지막 씬 – 그녀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지만 자신의 초라한 위치 때문에 창밖에서 바라만 보다가 떠나게 된다 – 을 분석하며 증명하고 있다.
이 마지막 씬에서 엄마, 스텔라는 딸, 로렐이 좋은 집안의 재력남에게 결혼을 하는 것을 창문 밖에서 바라 볼 수 밖에 없다. 스텔라는 천한 집 출신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 만을 꿈꿨던 시골 처녀였고 그녀의 꿈이 이루 어져 부자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곧 버림 받게 되고 그와의 딸인 로렐만을 바라 보며 살아왔는데, 그녀는 로 렐 앞에서 자신의 천한 출신이 행여 흠이 될까 결혼식에서 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헐리우드 영화라 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국적이지 않은가!!!) 영화는 스텔라가 눈이오는 추운밤 창문 밖에서 그녀의 딸이 신랑에게 키스를 받는 것을 보며 눈물 섞인 미소를 짓는 것을 보여주며 결말을 짓는다.
언뜻보면 지극히 신파적이고 흔한 설정이라 할 수 있지만 윌 리암스의 분석은 그렇지 않다. 창문을 통해 딸을 바라보는 스텔라의 시선은 특별한 카메라 워킹 없이 고정된 시점 샷 (POV, point of view shot)으로 처리가 되는데 이는 윌리암 스의 주장에 의하면, 주로 스릴러나 여타 다른 로맨스 영화 에서 남성이 여성을 페티쉬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때 쓰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1930년대 (혹은 지금까지도) 헐리우드 의 영화감독들과 제작에 참여하는 주 인물들, 프로듀서, 제 작사 스텝들, 까지도 대부분 남자였다는 지극히 남성 지배적 인 구조를 고려해보았을 때 이러한 윌리암스의 주장이 억측 은 아닌 듯 하다.
그녀의 결론은 이러한 남성 지배적인 초반 할리우드 구조가 여성관객들에게도 남성적인 시선을 강요하였고 그것이 지금 껏 여성관객들에게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 관객은 남성입장에서 밖에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 장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필자들은 이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그녀의 주장이 사실로 증명된 바는 없고 다른 페미니스트 영화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들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크리스틴 그레드힐이라는 학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윌리암스의 주장이 ‘시선’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여성관객들의 이 미지를 인식하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이해하는 지적 능력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글레드힐의 비 판이 무리가 아니며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34년간 보아온 여성이며 ‘독립적인 개체’로서 더더욱 믿고 싶은 지극히 덜 학문적인 소견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맺으며, 독자들에게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추천하고 싶다. ‘밀양’은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지는 않지만, 보라 라는 인물을 통해 모성이라는 개념을 남성적인 시각으로 정의하고 강요하고 있는 영화임은 확 실한 듯하다. 다음화에서는 밀양에서 그려지는 토속적인 모성과 니콜 키드만의 영화, 레빗홀에서 보여지는 서양적인 모성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비교/대조를 해보기로 하겠다. 기대하시라!
월간이리에서 필진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싣고 싶으신분들은 언제든지 편하게 문의 주세요. @postyri 트위터 계정이나 exxx2x@gmail.com 으로 연락주시면 친절히 안내해 드립니다.
Midnight in Seoul (부제: 우리 동네 이야기)
글. aoikasa
Prologue 얼마 전 ‘용산철도병원’이라는 1928년 건물 하나를 실측하고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에 대해 알아보면서, 용산이라 는 지역의 ‘지역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영어회화를 배우러 다니던 ‘용산미군부대’는 그야말로 다른 세 상이었죠. 할로윈 파티며 엄청나게 큰 피자를 팔던 가게며, 부대 안 마을은 마치 미국 드라마에서 보던 모습이었거든요. 어린 나이에도 왜 여기는 서울인데, ‘미국’이 있을까 의아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용산철도병원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니 ‘용 산’이라는 지역은 20세기 초반부터 우리 땅이 아니었더군요. 20세기 초 일본에 빼앗긴 이후 용산 지역은 쭈욱 ‘남의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이, 해방 이후에는 미국이, 그리고 용산부대의 이전 이후에는 ‘국제화를 꿈꾸는 거대 자 본’이 이 곳을 지배하면서 말이죠. 뭐, 그 덕에 용산은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서울에서 가장 독특한 지역인 거 같기도 합니다. 국제업무지구와 이태원, 이촌동과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용산공원까지…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지요. 다만 그 다양함 속에서 포함되지 못하고 쫓겨 나간 이들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테지요.
우리 동네 이야기 그 다섯번째. 용산 용산이라 하면 기차역 , 미군부대, 전자상가 , 용산공원 , 이태원 등이 떠오른다. 아무 연관 도 없을 듯 한 다양 한 것들이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이 동네는 대체 언제 부터 이렇게 혼성적 이고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일까 ? 용산을 큰 범위로 보면 미군기지였던 용산 공 원이 그 중심에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고 , 이를 중심으 로 그 서편에는 용산역 일대가 그 동편으로는 이태원 일대가 위치한다. 그런 데 이 동편의 용산역 일대는 이 전에는 철도 관사들을 비롯한 일본인 동네가 있었으며 서편의 이태원 일대는 미군들의 위락지대였 으니, 20 세기 용산지역의 변화는 그야말로 ‘외부 ’의 유입과 함 께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Figure 1. 1. 용산공원부지와 양 옆의 용산역과 이태원일대 (지도출처 : maps.daum.net)
서울로 향하는 관문 . 용산 용산은 한성의 남서부에 위치한 한강 유역의 포구로서, 그 지명은 ‘龍山’ 즉, 모악으로부터 한강변으로 길게 뻗 은 산의 모양이 용과 같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 지역은 산줄기가 한강으로 이어지는 지형을 가지고 있어, 한강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 위에는 정자들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용산은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지 역으로서, 한양 도성과 한강을 잇는 조선시대 주요 육로 9개 중 하나가 지남으로 교통상 유리한 입지조건을 가 지고 있었다. 이러한 교통상의 이점으로 인하여 용산에는 공용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기관인 이태원(利 泰院)과 중앙의 공문을 지방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치한 청파역(靑坡驛) 등이 위치하였다. 또한 외부로부터의 물자 조달이 중요하였던 군용 기와와 벽돌을 굽던 관청인 와서(瓦署)와 관곽(棺槨)을 만들던 귀후서(歸厚署), 왕실또는 문묘에서 제사용으로 쓰이는 짐승을 기르던 전생서(典牲暑) 등의 관청들과 군자감 창고, 별영창, 별 고, 만리창 등이 위치하였다. 17,18세기에는 산성부의 인구가 급장하고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용산을 비롯한 마포 등의 남대문을 통해 한 양도성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충지들의 상업적 성장이 두드러졌다. 특히 이 시기 용산은 뚝섬, 마포, 서강과 더불어 가장 번성했던 강항(江港)으로서, 용산포구를 위시한 용산연안지역에는 상업 지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Figure 2.동국여도 중의 도성도 (용산부분 확대본: 19세기 전반, 규장각) – 용의 모양을 한 산자락 아래 군자감, 만리창 등의 건물이 보인다.
1904년 러일전쟁 그리고 일본군에게 빼앗긴 용산 용산지역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하고, 1884년 용 산이 개시장(開市場) 이 되면서부터이다. 1888년부터는 일본상인들과 중국상인들에 의하여 인천-용산 간 증 기선 운행이 시작되었고, 1891년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용산신학교를 하였다. 1890년을 즈음하여 용산포구( 성저십리란(城底十里), 한성부의 4대문과 4소문으로 둘러싸인 성곽으로부터 10리씩 떨어진 지역이라는 뜻으로서, 동으로는 중랑천 일대, 서로는 마포, 남으 로는 용산과 한강유역까지, 북으로는 북한산 일대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일컫는다. 개시장은, 항구가 아닌 내륙지역에서 외국인의 교역이 허락된 장소를 말한다. 1882년 한성부 내에서의 외국인의 교역이 허가된 이후, 양화진이 개시장으로 선정되었다가 1884년 용산으로 변경되었다.
현 원효로 3,4가 일대)에서 거주를 시작한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이후에는 효창공원까지 그 거주지역을 넓혔 으며, 1896년부터는 일본 군대가 용산지역에 상주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경의철도 부설권을 얻어 철도 건설을 시 작하였다. 이에 따라 1906년 신축된 용산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철도 관련 시설들과 종사자들의 관사가 들어서게 되었고, 일본인들의 거주가 본격적으로 이 일대에서 시작되면서 (게다가 대형 군사주둔지가 생기면 서) 일본식 유곽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용산 도원동에는 모모야마(桃山) 유곽이 생겼는데, 이는 현 쌍림동 일 대의 신마치 유곽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유곽이었다. 이렇게 1910년 이전부터 용산일대에는 일본 군대 와 일본식 집들, 그리고 일본식 유곽까지 생겨 나면서 일본식 도시 풍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Figure 3.(위) : 1906년 완성된 용산역 (일본건축양식을 가진 2층 목조건물이었다.) Figure 4.(오른쪽) : 1927년 용산시가도 (용산역 주위로 네모 반듯 한 도시계획이 보인다.)
Figure 5.(왼쪽) : 1906년 설치된 모모야마 유곽 Figure 6.(위) : 1928년 신축된 용산철도병원 (현재 용산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철도관련시설
일제시대 용산은 용산포구 근처의 구용산, 용산역근처의 신용산, 그리고 군주둔지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구용산지역(현재의 원효로 일대)은 한강 유역의 포구가 있던 지역으로 원래 용산의 취락이 시작된 곳이었다. 일본인들의 거류 역시 이 지역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들은 이 지역을 모토마치(元町)이라 불 렀다. 신용산지역(현재의 한강로 일대)은 용산역의 설치와 함께 개발된 지역으로, 철도관련시설들과 관사들 이 들어서 네모 반듯한 계획된 도시 시가지의 모습을 가진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군주둔지(현 용산공원 부지) 와 그 주변의 고시정(동자동), 삼판동(후암동), 강기정(갈월동) 일대의 군수용품 조달을 위한 유통상업지역이 다. 특히 한양 도성 지역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북촌과 남촌으로 나누어 살았듯이, 용산지역 역시 구용산에 는 한국인들이, 신용산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면서 민족에 의한 공간의 분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 분 리는 중간에 놓인 철도 궤도라는 경계를 따라 동서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1910년 남대문에서 용산을 잇는 도로를 수선한 이후 일본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남촌일대(청계천 이 남 지역)과 용산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1910년대에 들어서는 경성 지도에 용산이 같이 표현되기 시 작하였는데, 그 크기나 개발 정도가 남촌 지역과 비슷할 정도였다. 이처럼 서울은 성내지역과 용산으로 이루 어진 이중 도시의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표주박과 같은 모양을 한 이 도시 구조는 사실상 기존의 도시에 새로운 세력(일본)의 신도시가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이중도시, 즉 식민 도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 다. 이렇게 용산은 1904년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 발전하여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지만, 그 지 역은 일본인들 위주의 지역이었기에 한국사람들에겐 우리의 ‘서울’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용산’이라는 느낌 이 더 강하였던 것 같다.
Figure 7.(위) : 1917년 경성시가전도의 용산부분 – 철도를 기준으 로 서측의 용산포구를 중심으로 한 구용산, 동남측.의 용산역을 중 심으로 한 신용산, 그리고 동측의 군주둔지들이 보인다. 특히 신용 산지역의 격자형 도시체계는 인상적이다. Figure 8.(오른쪽) : 1917년 경성시가전도. 조선시대 한양도성 만큼 이나 팽창한 용산지역이 눈에 띈다. 이 두 지역은 남대문으로 연결 되며 표주박형 이중도시를 만들어냈다. 남북을 잇는 주요 도로체 계 역시 용산-남대문-광화문을 잇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용산 미군기지와 해방촌, 그리고 이태원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하고 이 지역이 겨우 우리에게 돌아오나 싶었는데, 다시 그 땅을 미국군이 차지해버렸다. 일본부대가 머무르던 땅은 미군기지가 되어버렸고, 다시 이 곳은 50여년간 미국 땅이 되어버렸 다. 일본이 차지하였을 때의 면적이 약 115만평, 미국이 차지했을 때는 80만평이니 용산 대부분의 지역을 일본 과 미국에게 점유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 1904년부터 1945년까지 약 41년을, 미국 이 미군정시기 3년(1945~48), 그리고 1953년의 한국전쟁 정전협상 이후부터 2008년의 반환까지 55년, 총합 58년을 점유하고 있었으니 지난 100년간 용산은 우리 땅이 아닌 남의 땅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일본인들이 그 주변을 마치 일본 동네처럼 만든 것처럼 미국 역시 그 주변을 미국 동네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 러한 과정에서 성장한 지역이 이태원이었다. 이태원은 본래는 조선시대의 역원 중 하나였던 이태원(梨泰院)이 있었다는 데에서 그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하지만, 다른 유래로는 전란 속에 외국인들에게 겁탈당해 혼혈인들이 태어난 곳이라고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린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이질적 장소였던 것 같다. 미군기지의 설치 이후 이태원은 미군들을 주요 고객을 하는 상점들과 그들에게 유흥을 제공하는 클럽과 술집들이 들어선 위락장 소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여성들인 이태원양공주들과 이들과 미군 사이에서 태 어난 혼혈아들이 다수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1960~70년대의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과 마찬가지고 이 국적인 풍경이지만, 무언가 어둡고 범죄도 많이 일어나던 지역이 바로 이태원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한국인 들이 가기엔 위험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한편, 이태원의 북쪽, 즉 남산 2호 터널과 3호 터널이 지나는 남산의 남쪽 언덕 위에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 어 있는 도시 풍경이 형성되었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던 이 지역(현재의 용산동 2가 일대) 은 소위 ‘해방촌’이라 불렸는데, 이는 광복 후 돌아온 해외 동포들, 북에서 월남한 실향민들, 그리고 한국전쟁으 로 인한 피난민들이 모여 살게 된 동네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남대문 시장이나 용산 미군 기지 등에 노동 력을 제공하며 힘겹게 타향살이를 한 이들이었으며, 이들의 힘겨운 삶의 이야기들은 1960~70년대의 문학작품, 예술작품 등에서 다루어지며 그 시절 해방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 준다. 이렇게 고향잃은 이들의 힘겨운 서울 살이가 펼쳐지던 해방촌 역시도 현재 이태원이 서울의 트렌디한 상업지구로 자리잡음과 함께 상업이 발전하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1월 말에는 용산구청과 학생들, 시민들이 협력하여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하 며 예술마을로 변화시키고자 한 시도까지 있었다.
Figure 9. 해방촌의 옛 모습.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이 남산 언덕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출처: 다큐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http://www.youtube.com/watch?v=9hBSo2ANqw4)
미군에게 위락을 제공하기 위해 발전한 이태원, 그리고 미군기지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던 해방촌은 분명 ‘용산 미군기지’가 만들어낸 부산물로서의 도시지역이다. 미군기지의 용산공원화가 결정되고 이태원과 해방촌 역시 상업들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위험한 지역이 아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문화와 예술이 있는 상업지역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빠르게 상업자본이 침입해가면서 (자본주의 도시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 겠으나) 이 지역들 역시, 그 독특한 색을 다 잃어버릴까봐, 그리고 원래 그 곳의 거주자들을 다 쫒아내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용산공원, 정말 이 땅의 역사를 치유할 수 있을까? 2008년 반환된 미군기지는 이제 곧 ‘용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국제공모를 통해 당선된 용산공원 당선안의 제목은 ‘Healing the Future’이다. 분명 이 설계공모에 참여한 모든 건축가들은 이 곳이 가진 역사적, 사회적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게 빼앗기 고, 미국에게 빼앗겼던 100여년의 아픈 역사를 지나 개발의 미명하에 쫓겨나는 자들과 쫓아내려는 자들의 투 쟁까지… 이 땅이 가진 아픔이란 10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이들은 치유되어야 할 대상일 수 밖에 없을 테니… 아마도 ‘치유’라는 주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시설은 ‘공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국의 반환되는 미군대지들 중 다수는 공원화될 예정이라 한다. 부산의 하야리아도 마찬가지이고… 치유과 자연, 분명 어울리는 주제임은 틀림없을 것이며, 서울에 이렇게 큰 공원이 생긴다는 것도 반갑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크고 멋진 공원 을 만들면서 바로 옆에서는 재개발 계획으로 인한 갈등과 그에 의해 목숨을 잃는 자들까지 나오게 되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이 땅이 누군가에게 빼앗긴 땅과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Figure 10. 용산공원 국제설계 공모 당선작: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Healing -The Future Park, West 8+이로재 컨소시엄) (사진출처: http://www.park.go.kr)
100년이 넘게 남의 땅이었던 이 땅 용산이, 이제야 우리에게 돌아온다. 용산공원은 단순한 도시공원 그 자체 로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동네였던 동측의 용산역 일대와 미군부대의 위락지역이었던 서측의 이태원일대와 함께 이해되어야 하는 장소이다. 바라건데, 당선안이 말하듯, 이 공원이 가진 치유력이 그 주변의 땅에도 스며 들어갈 수 있길, 그리하여 이 땅이 또 다시 누군가에게 ‘빼앗긴’ 땅이 아니라 그 곳을 지켜온 이들과 함께 공존 하는 땅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 다음 달은 세종로-태평로와 더불어 조선시대 주요 남북축도로였으며, 용산과 서울역을 매개로 연결되는 ‘남 대문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Twitter : @aoikasa27)
Really begins, 2013
march.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3월이다. 날씨는 어중간하지만 마음만은 확실한 선로를 정하는. 사고싶은 것도 하고싶은 것도 많아지는-그것들의 간극에 대해서 떠올리 는- 새 해의 새로운 3월이 또 다시 돌아왔구나 생각하면 날씨만큼 뒤숭숭해지지만, 결국은 정해진 어떠한 길로 걸어가야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매서운 칼바람을 겪고 나와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갑자기 날카로움이 남아있는 바람 한 줄기가 귓등을 치고 지나가더라도, 흔들리지 말자.
{beamil}
아직은 청순한 청춘이니까. (하하) 꽃샘추위의 역량을 고스란히 느꼈던 전주여행도, 다시 집으로 복귀한 여전한 혼란 속 지금도,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바리스타 김이 홀에 앉아 커피잔을 마주하고 있다 문이 열리고 불안이 성큼성큼 들어와 김의 테이블에 앉는다 손님이 없어서 불안한가 김은 천천히 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 대답한다 그렇소만 잠시 뒤 가슴에 훈장이 달린 검은 제복이 들어온다 홀을 두리번거리더니 김의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다 뜨겁군! 혀를 데일뻔 했잖아! 눈에 힘을 주며 경고한다 넝마차림에 볼이 홀쭉하고 눈이 퀭한 자를 보지 못했나 김은 불안이 가서 잠든 쪽을 눈짓할까 하다가 관둔다 못봤소만 제복은 바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고 지난 밤의 사건들을 들여다본다 이런 부랑자들! 죄다 잡아 처 넣어야해! 주먹을 내리치며 소리친다 김은 지루해져서 그럼 콩이나 볶아볼까 생두자루를 열었더니 주소 없는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순식간에 홀은 사람들로 가득찬다 메뉴판을 달라는 아우성 계산은 선불이라고 하자 돈이 없다고 생떼를 쓴다 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리한다 자, 커피를 드릴테니 조용히 하세요
커피를 내려주니 홀은 이내 평화로워진다 서로 이야기하며 웃는 사람들 김은 돈은 못 벌었지만 기분은 썩 괜찮다 그 때 신문을 접고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는 제복 자리세를 받으려는지 테이블을 돈다 거의 모든 잔이 그의 손아귀에서 엎질러진다 사람들은 제복을 올려다보며 벌벌 떨고 김은 울상이 되어 바닥을 닦는다 불안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다가 그 모습에 그만 깔깔깔 웃음이 터진다 자네 금방이라도 울음이 나올 것 같군 그래! 순간 제복이 불안의 멱살을 잡고 창 아래로 던져버린다 불안의 비명이 짧게 들렸다가 사라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밝아지는 사람들 먹이를 들고 집으로 귀환하는 개미들처럼 제복을 둘러메고 자루 속으로 들어간다 발버둥치는 제복의 마지막 호통 전투가 끝난 전장같이 홀에 깊은 적막감이 번진다 어두워진다 (FO) 글. 사진. 김재원
- 이 달의 선정 도서 『담요』크레이그 톰슨, 박여영 역, 미메시스, 2012 지나간 사랑에 대해 : 어떤 이는 헤어진 그 순간부터 미화하기 시작한다. 행복하 기만 했다라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는 끊임없이 그 사랑에 대해 집착한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와도 그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잊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 완벽한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소중히 그 사랑을 간직한다. 아무도 모르도록 은밀 하게 마음 속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둔다. 이따금 그 사랑을 꺼 내 추억한다. 현실과는 다른 미화된 사랑을. 『담요』의 주인 공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는 앞에 말한 어떤 이와 같은 행 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순간에 가졌던 감정들을 차분히 이야기할 뿐이다. 차분히…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마치 공간감이 느 껴지지 않는 심심한 정물화를 보는 듯 했다. 그렇지만 다 읽고 나니, 그가 지나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느꼈을 감정이 내 가슴으로 전해 졌다. 뚜렷하게 어떤 감정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렴풋이, 다른 무언가에 빗대어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가 느꼈던 감정을 짧은 소설을 통해 표현해보고 싶다.
- 두번의 코웃음 “달라졌어.”
“딴 남자라도 생긴 거야? 아니. 딴 남자가 생겼
“그래. 나도 알아. 그렇지만 너도 달라졌어.”
더라도 그게 뭐 네 잘못이야? 사랑이 맘대로 되
“알고 있어.”
는 건 아니잖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헤어지자는 이야기지?”
까 고개 들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우리가 오랜 시
덤덤한 자신에게 놀랐다. 예상해오던 일이었지만
간을 거치며 갖게 된 버릇이었다. 일종의 위로법
그렇다고 해서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
이랄까? 그녀는 내 손길에도 여전히 고개를 숙인
려 나는 그녀와 계속 사귀고 싶었다.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래.”
“잘잘못 따질 생각 없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내 대답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
그런 거야. 이유도 묻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대
다. 이별의 순간에 취할 법한 태도였다. 나는 그
로 그렇게 하자. 대신 지금 이렇게 우울하게 있지
태도가 싫었다. 이별의 순간엔 어째서 누군가는
않았으면 좋겠어. 이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
가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어야만 하
아. 안 그래?”
는 것일까? “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 테이블에 뭐 재 밌는 거 있어?”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처 음 만난 날 날 바라보던 표정이 겹쳐서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날 ‘뭐 이런 미친
“아니.”
놈이 다 있어?’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
“그럼 뭐 잘못한 거 있어?”
는 그런 그녀를 안았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
“…”
아해. 나랑 결혼해줘.’ 그녀는 날 밀쳐내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마치 기가 찬다는 듯이…. 추억에
도 더 그녀와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
잠긴 나를 깨운 건 그녀의 목소리였다.
일지도 모른다.
“너 미쳤어?”
“넌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아니?”
“그런 게 있을 리 있겠어? 헤어지려고 마음먹
“나 다른 남자 생긴 거야. 근데 넌 괜찮다고?” “괜찮다는 게 괜찮다는 게 아니고, 그걸 내가
고…… 나온… 음! 나왔는데.” 나와 헤어진다는 생각에 목이 메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잖아. 그래서 그럴 바엔 그
“울어?”
걸 억지로 돌릴 생각이 없다는 거야.”
“아니?”
“미친놈.”
“우는 것 같은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의 손을
“아닌데?”
잡았다. “잠깐만. 헤어지는 건 헤어지는 거고. 대신 오 늘만 나랑 있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울먹였잖아.” “아니야.” “나랑 헤어지기 싫으면 안 헤어져도 돼.”
그녀가 나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
“아니? 너랑 헤어지고 싶은데?”
“오늘 하루만. 더 이상은 바라지 않을게.”
“왜? 딴 남자라도 생겼어?”
“뭐 할 건데?”
“아까 말했잖아. 응. 딴 남자가 생겼어.”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마지막인데 이
“거짓말하지 마.”
렇게 끝내고 싶진 않아.”
“거짓말 아닌데?”
“그럼 어떻게 끝내길 바라는데?”
“거짓말 맞아.”
“즐거웠으면 좋겠어.”
“그만 하자.”
“너 좀 이상해. 알지?”
“그래.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넌 늘 그 소리를 입에 달고 살잖아. 근데 너도
“몰라. 생각하기 싫어.”
이상해. 알아?”
그녀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어디가?”
“너랑 더 있기 싫어.”
“나보고 이상하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는 게 이상한 거야.” “내가 언제 하루도 빠짐없이 너한테 이상하다 고 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싸우지 말자. 그리고 일단 앉아. 오늘은 즐겁게 보내자.” 다행히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나는 너랑 더 있고 싶어.” “더 있어봤자 계속 이렇게 싸우기만 할 거야. 즐거울 수 없어.” “아니. 즐거울 수 있어.” “아니. 즐거울 수 없어. 그래서 내가 너랑 헤어 지려는 거야.”
손을 놓았다. 마치 그것이 그녀를 놓는 것 같아 가
“거봐. 다른 남자가 생긴 거 뻥이지?”
슴이 아팠다. 이별이 느껴졌다.
“딴 남자 생긴 것도 맞아.”
“뭐 할 건데?”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뭘 하면 좋을까? 함
“거짓말 아니라니까.”
께 자주 가던 기사식당에 가서 소주를 한 잔 할 까? 아님 늘 가자고 말만 했던 공원에 갈까? 마
“그러지 말고 좀만 더 있다가 가. 오늘은 서로 웃으면서 헤어지자. 부탁할게.”
트에 가서 시식코너를 돌아도 기분이 좋을 것 같
“계속 있어봤자, 우린 계속 싸우기만 할 거야.
다. 사실 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그리고 웃으면서 헤어지는 게 가능할 것 같아?”
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다. 조금이라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더 길어져봐야 우린 더 심하게 싸울 것이었다. “그래. 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덤덤했다. 사방이 새 하얀 카페 공간 안의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져갔 다. 테이블이 사라지고, 아르바이트생이 사라지 고, 카운터가, 소파가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서 자 내가 앉아있던 의자도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 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손 을 끌어당겨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그녀는 날 밀쳐내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이곳은 서서학동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다. 간판도 없고 문에 신진상회라고 써져있다.
할아버지는 가게가 집인듯하였다. 가게 안에 아주 작은 방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놀러 오셨다.
짧은 대화가 오고갔는데 연탄봉사가 이마을에서 이루어진다는걸 알수있었다.
인터넷에 서서학동을 쳤을때 나오는 것이라고는 얼마안되는 문화제 정도인데 이분들은 그런것은 신경도안쓰는듯했다.
부산오뎅 이야기 (의연함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술을 언제부터 마셨는지 기억을 하는가? 제사 지내면서 음복으로? 중학교 때 소풍 가서? 고등학교 수학여행? 처음으로 술을 마신 순간의 기분 은 어땠는가? 처음 술 마신 술집은 기억하는가? 처음 마신 술의 종류는 ? 내가 처음 술을 마신 것은 아마 초등 학교 때의 일로 제사 지낼 때 음복으로 어른들이 한 잔씩 나눠 주 던 막걸리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어린 나이에 홀짝홀짝 한 두 잔씩 마신 술에 헬렐레해서 아버지 한테 맞은 기억도 어렴풋하다. 이야기는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이야 마포구 최고 동안, 동안 끝판 왕, 동안 홍보 대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발 육이 남달랐던 나는 또래보다 빨리 변성기도 오고 2차성징도 나타나며 중학교 때 콧수염이 거뭇거뭇 한 게 어른의 풍모를 풍겼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그때 어울렸던 친구들도 다들 겉늙어 보였었다.
중2가 늙어 보여 봐야 얼마나 늙어 보였겠냐 만은 아무튼 우린 늙었었다. 중2봄방학이었나보다. 어느 해, 이제는 기억하기도 힘든 엄청 오래 전의 어느 해 2월말과 3월 초 사이의 일이다. 7명의 늙은 친구들 은 술집에 도전(?)하기로 결의 했다. 지금이야 술집이 만19세미만 출입금지로 지정 되어있지만 당시는 법으로 지정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고2고3정도면 술 마시러 다니고 고3정도는 사회적으로 인정해주 는 시기랄까? 하지만 암묵적으로 시인해주는 그러한 환경 사이에서도 중 2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을 믿고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해 일요일 밤12시 월요일0시 인적이 드문 시간 네온사인 하나 없는 변두리 쪽 그것도 장사 엄청 안될 것 같은 한적한 호 프집으로 정하고 개선 장군 마냥 들어섰다. 주인장도 우리의 겉모습에 속았는지 장사가 안되니 중 학생이든 뭐든 받아보자는 건지 몰라도 우리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착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 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알바 누나가 건넨 메뉴판을 가장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받아 들었다. 이제 메뉴 를 고른다. 그 당시 우리가 선택한 최고의 안주는 쏘야...쏘시지 야채볶음 2개. 학교에서도 최고의 반찬이던 쏘시 지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안주로 골랐다. 여기에 생맥주가 싸다는 습자지 같은 지식만 가진 상태였 으므로 당연히 생맥주를 골랐다. 그런데 탄탄대로와 같던 우리의 앞에 문제가 터졌다. 생맥주 종류가 너무 많았다. 500cc / 1000cc / 1700cc / 3000cc / 10000cc / 리터에만 익숙하던 우리에게 cc 라는 개념은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거기서 갑작스레 우리는 긴급 회의를 시작했다. 1.알바 누나에게 물어본다. 2.주인에게 물어본다. 3.집에 전화해서 아빠한테 물어본다 (죽음을 각오하고.) 4.엄마한테 물어본다. 5.형한테 물어본다. 6.옆 손님한테 물어본다. 7.아니면 우리 중 한 명이 총대를 메고 알아서 해결한다. 이런 여러 안건이 상정된 가운데. 결국 지식의 총량을 따져 본 바. 그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던 필자 가 주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진취적이고 정의롭고 남 앞에 나서기 좋아했던 나는 약간 으쓱하는 마음 으로 알바 누나를 불렀다. 친구들이 나에게 어떻게 할거냐는 전전긍긍한 목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 고 모르면 물어야 한다는 그 상식조차 무시한 체 모냥빠지지 않기 위해서 호기롭게 주문을 시작했다. ‘모르면 중간으로 가자.’도착하지 않은 알바 누나를 다시 한번 재촉했다. 이윽고 알바 누나가 도착. “저기요 여기 ‘1700cc 7개주세요.” “네??? 1700cc 7개요??? 너무 많지 않으세요?” 순간 뇌리를 스치는 직감 ‘아...내가 잘못시켰구나...’ 제일 공부 잘하고 진취적이고 정의롭고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내가 여기서 더 작은 맥주로 바꾸 면 친구들의 실망감과 허탈감은 어떡하냐는 생각으로 그대로 밀고 나간다. “그냥7개 주세요. 어차피 마시고 또 마실꺼니까. 괜찮아요.”
마음 속으로 잘 대처했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몰려왔다. 그리고1700cc 7개가 나온다. 모두들 처음 온 술집에 처음 보는 1700cc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이게 제대로 나온 건가?’ ‘우리가 이걸 다 마실 순 있는 건가?’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 나는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이거 몇 모금 마시면 없다며 자신감을 북돋 워 준다. 그때 나의 목소리를 들은 알바 누나 “잔 드릴까요?” “아니요 우리 잔 필요 없어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저쪽 한구석에 앉아계신 사장님과 알바 누나가 우리를 보며 몰래 키득거린다. 우리는 아랑곳 하지 않 고 건배를 외치며 무거운1700cc잔을 두 손으로 받들며 힘겹게 맥주를 마셨다. 7명이서 170번정도 트림 을 한듯하다. 그렇게 우리의 첫 술집 도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맥주를 즐겨 마시지 않아서인지 그 후 로 1700cc는 마신 기억이 없다. 그때 그 사장님은 우리가 가고 알바 누나가 일 잘했다며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를 해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장님!! 부자 되세요~~.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왼손이
into the jazz - 문제1: 의사소통
오늘 외국에 나간다면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의사소통이다.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어떤 외국사람이 우리나라로 유학 또는 코리안드림을 품고 온다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늘 거꾸로 놓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답을 찾고 싶 으면 질문을 스스로 많이 하는 것이 좋고 말을 잘하려면 상대가 하는 말에 귀를 기 울이는 것이 바람직하고 글을 잘 쓰고 싶으면 먼저 책을 많이 읽어야한다. 외국인들 이 우리 나라에 처음오면 접하는 의사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풀수 있을지 조언 해주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접하는 소통의 문제해결책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듯 하다.
1. 영어를 열심히 배우자. 일본 메이저리거나 영국 프리미어리거들이 영어를 배우지 않아 소속팀원들과 소통 이 원활하지 않다는 뉴스를 종종 접한다. 그나라에 사는데 그나라 언어를 배우지 않 는다는 것은 매우 바보 같은 일이다. 우리가 열심히 언어를 배워도 현지인과 원활하 게 소통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거꾸로 어느 외국인이 열심히 기본적인 한국말 을 배우고 사용한다 생각해보자. 그들은 나름 노력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소통하는 것 이 그다지 편하지가 않다. 생소한 억양과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등등 굳이 만나지 않 아도 되는 사람인데 이런 어려움을 가지면서 억지로 소통하려는 사람은 자원봉사자 가 아닌 이상 많지 않다. 영어문화권에 간다면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다행히도 영어 문화권은 복합문화에 익숙해 단일민족인 우리나 독일인들에 비해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선 영 어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라는 4가지 기본적인 언어영역을 꾸준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이들은 오로지 말하고 듣는 것에만 집약적으로 공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본인 이 필요한 것을 골라 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또 단기적인 목표로서는 좋다. 다만, 중 장기적으로 볼땐 4가지 영역모두 골고루 하는 것이 좋다. 쓰기와 읽기는 자신의 사고 를 명확하게 하기에 말하고 듣는데 큰 도움을 줄뿐 아니라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4 가지 영역이 서로 없어서는 안되는 동맹관계이다. 단기적인 목표와 중장기적인 목표 를 두어 열심히 공부해보자. 2. 문화를 배우자. 우리가 언어만 배운다고 의사소통이 해결될까. 물론 어느정도는 해결이 될것이다. 또 다시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느 외국인의 우리말 실력이 완벽하다고 치자. 그러나, 그가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과연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까. 물론 그와 같은 철저한 서구식 사고를 가지고 있는 한국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보편적인 한국인이 라면 말이 통해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 것이다. 같은 한국사람이라도 세대간의 다른 문화 또는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 소통이 안되는 데 말만 통한다고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문화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가진 배경과 너무나 다른 상 대방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수 있을까. 나는 먼저 열린마음과 겸손한 자세를 갖지 않 으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배움
에서 시작하는데 겸손한 자세와 열린마음없이는 배움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홍대근처에 있는 많은 외국인들중 우리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의 공통 점은 다름 아닌 열린마음과 겸손한 낮은 자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낮은 겸손한 자세와 열린마음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에게 비교적 많은 정이 가고 보다 더 소통하게 됨은 당연하지 않는가.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문 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무척 중요하다. 3. 공통관심사를 찾고 준비하자. 서울에 사는 외국인이 우리말도 제법 잘하고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력과 존중심이 크 다고 해도 서로간에 공통관심사가 없으면 소통이 지속되기 쉽지 않다. 이것은 비단 문 화가 다른 서로간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언어 같은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흔히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쟤와 나는 대화가 오래 못가고 자꾸 끊 겨…아무래도 나랑 잘 안맞는 거 같아!”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다름이 아닌 서로간의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다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언어구사력, 문화에 대한 이해력과 함께 공통 관심사를 자꾸 만들어야한다. 외국에 살다보면 정말 다양한 취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 는 사람들을 만난다. 물론 모든 사람을 다 상대할 생각으로 관심사를 억지로 만들 필 요는 없다. 다만, 외국의 스포츠, 문화예술, 정치 그리고 사회등에 보다 더 많은 관심 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필자의 경우 미국인들과는 주로 야구와 미식축구 그리고 유럽사람들과는 축구이야기 를 의도적으로 많이 한다. 보다 더 연대감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외국인이 우리말 도 잘할뿐 아니라 K리그와 우리 축구대표팀에 대해 아주 잘안다고 생각해보자. 축구 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외국인과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갈것이다. 또, 우 리 정치에 대해 해박하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대화가 꽤 오랜시간 지속될것이다.
-계속이상준 jonleemusique@yahoo.com jonleeblog.blogspot.com www.jonleemusique.com
겨울의 끝.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03.31 http://cafe.daum.net/badabie
시스토 로드리게즈 Sixto Rodriguez 작년 11월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글 전개 차원 에서 그 내용을 살짝 읊으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다큐멘터리 후기처럼 된 이번 글입니다. <서칭 포 슈가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50만장이 팔린 앨범을 낸 유명 가수 로드리게즈를 찾 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가수를 어떻게 찾으면 다큐감이냐 싶겠지만 로드리 게즈는 유명한 무명인이었습니다. 앨범이 나온 당시인 1970년대의 남아공은 정치적으로 몹시 보 수적인 상태로 정부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시기였습니다.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가사의 자유로움으 로 인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으나 외려 저항음악으로 더욱 더 알려지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큐 의 표현대로라면 남아공에선 전축이 있는 집이라면 대부분이 로드리게즈의 앨범을 가졌으며 그 인 기는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유명무명 했다시피 로드리게즈가 현재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물론 당시에도 어떤 인물이었는지 남아공의 아무도 몰랐습니다. 로드리 게즈는 앨범만 남긴 가수였기 때문인데요. 앨범으로 돈을 벌었을 음반사의 행방자체가 묘연하고 팬들 사이에 그나마 있는 루머는 모두 로드리게즈가 진즉에 죽었다는 얘기로 ‘연달은 공연 실패로 인해 자살’, ‘공연 중 관객에게 인사를 고하고 자살’, ‘약물 과복용으로 자살’ 등등이 있었습니다. 로 드리게즈의 빅팬이었던 시거맨은 그토록 인기 있던 가수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사는지 아무런 정보 가 없음에 놀라워하며 그를 찾기 시작했는데 로드리게즈의 노래 가사에 적힌 지역명을 힌트로 남 아공이 아닌 미국, 디트로이트를 추적해냅니다. 그래서 밝혀진 사실은 음반이 처음에 미국에서 발 매되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음반 제작자는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 남성 의 음악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그가 바로 로드리게즈였으며 담배연기 자욱한 바 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사는 곳은 어디인지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사는지 모두 알 수 없었고 다만 정처 없는 일용직 노동자 정도로 살았으나 그는 진짜 예술가였다는 평을 합니다. 음반 을 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거의 무명과 마찬가지로 끝을 냈는데, 그들은 로드리게즈의 실패에 아 직도 납득하지 못한 채로 멕시코 출신임이 너무 분명한 그의 이름 때문에 미국에서 제대로 평가되 지 못한 게 아닐까 말합니다만 여하튼 음반이 실패하고 계약도 마친 뒤 로드리게즈는 음악가로 다 시 활동하지 않았고, 그 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 또한 미궁인 채였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에 대 한 정보를 얻기 위해 웹사이트를 열어둔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한 여성의 연락을 받게 됩니다. 그녀 로부터 자기 아버지가 당신들이 찾는 로드리게즈인 것 같다면서 자기 아버지는 살아있다는 이야기 를 듣죠.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가 미국 디트로이드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고 네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로 살고 있다는 것과 남아공에서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랑 을 받았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로드리게즈를 발견한 시거맨과 다른 사람들은 열광하며 남아공으로 그를 초대하고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남아공에 도착한 로드리게즈
의 딸들은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음악적 성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던 나머지 자기들끼리의 대화로 공연장에 20명만 있으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축구장만한 공연장에 심지어 가득 차 기까지 한 관중은 로드리게즈가 무대에 등장하자 열광을 멈추지 않아 10분간 곡은 시작도 할 수 없 었습니다. 로드리게즈와 무대에 선 밴드멤버들은 그가 너무 많은 관객 때문에 주눅이 들면 어떡할 까 걱정했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고, 로드리게즈는 완전히 준비되어있었으며 무대에 선 그는 완벽히 그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 그 말이 너무 멋졌습니다. 그 자 신으로 완전히 준비되어있음이 말이죠. 그가 갈고 닦여있음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던 것이고 외부 의 요인은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인 것인데, 그가 갈고 닦여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겠 죠. 로드리게즈는 정말 그야말로 군자입니다. 공자 말하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 온 불역군자호. 다른 이가 알아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음(혹은 역성내지 않음) 또한 군자가 아니 겠는가! 했으니 말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그렇듯 저 또한 이 구절이 좋아 종종 떠올리게 되는데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받아 합당한 자리 앉아서 뜻을 펼치고 길이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자 하 는 바람은 천하통일의 영웅이 필요했던 시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 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으며 사는, 자기가 평가하는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외부 에 성내지 않고 삶은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향한 이러한 사람을 만나면 기쁩니다. 자신의 절대값으 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고로 건강한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두 다른 역량과 조 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과의 비교를 통한 것이 아닌 자기다움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하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진정 자기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 자신을 두는 것. 너는 어떠한 뭔가가 되기보 다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하는, 그래서 전 ‘너 자신을 알라’가 그런 시작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관객의 열광이 멈추지 않았던 10분간, 그 순간을 그가 삶의 보상으로 여길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기뻐했음은 분명합니다. 그 열광 뒤에 그는 관객에게 ‘Thanks for Keeping me alive.’라고 말 했으니까요. 음악적 삶에서 보상을. 아, 보상이란 말은 그간의 무명이 마치 인정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므로 선물이라고 고치겠습니다. 음악을 통해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이의 감사함이죠. 사람들은 예술을 하는 이에게 창작을 한다는 그 신비로움으로 인해 주목을 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유명세에 따라 다르지만 원하던 원하지 않던 미칠 영향력이라면 건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삶을 사는 예술가이기를 바랍니다. 로드리게즈를 찾는 데 가장 열성적이었던 시거맨은 로드리게즈를 찾은 뒤로 자신은 음반가게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함께 로드리게즈를 찾아낸 다른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으나 정작 로드 리게즈 자신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딸도 아버지는 콘서트 수익금을 주변에 다 나누어주고 여전히 그전처럼 살고 있다고 하고요. 그는 본디 자기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기 때문입니다.
신현림 시인의 시 ‘지금 필요한 것’ 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만 발췌하는 것을 유 감스럽게 여기며 부디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완벽한 생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두더지처럼 깊이로 사는 당신 얘길 듣고 싶다 당신 손에서 목수의 손을 본다. 나무와 톱 망치와 못을 다스리는 손 사려 깊은 손, 뭐든 일으켜 세우는 손, 그 진지함을 일용직 노동 중에서도 남들이 피하는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로드리게즈는 제게 그러한 손 을 가진 목수로, 완벽한 삶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으로 산 개인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기에 힘쓰 며 자기를 세우는 삶을 살고 그를 통해 타인 또한 세우는 사람인 개인을 존경을 담아 사랑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글과 그림을 맡은 제 블로그는 www.freshdrawing.blogspot.com 요새 저 스스로 눈에 좋은 블로그라고 칭하곤 합니다. 피드백도 환영합니다. h.sommone@gmail.com 로 메일 주시면 됩니다.
글. 그림. 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