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사진. 글. @Ahopsi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환타지와 모순의 조우 (遭遇): 영화로 읽는 時空間 (시공간) / 글. 곡주대비 견자단 핑퐁클럽 광고 Midnight in Seoul / 글. 사진. aoikasa 비밀 안(not)스러운 생활 / 사진. 글. beamil 독후소설 / 그림. 황은정 글. 김종소리 서서학동 / 글. 사진. 박민수 0,0,0 / 글.그림.사진. Night Planet 부산 오뎅 이야기 / 글. odeng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INTO THE JAZZ / 글. 사진. 이상준 바다비 일요시극장 광고 바스티앙 비베스 (Bastien Vives) / 글. exxx. 그림. 지인
만우절이 지나고 다음날입니다. 어제보다 세상은 조용한것 같습니 다. 하루 놀면 하루 일하고 그런게 사는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 28일 최저 임금 1만원 토론회에 다녀왔는데, 꽤 재미있었습니 다. 생각하면 좋지 않습니까? 시급 1만원. 다녀와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이와 관련해 가장 많은 의견은 결국 물가가 올라서 4860원 받는거나 비슷할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최저임금은 법으로 정하는 정치의 영역이고 물가는 시장이 결정하는데 사람들은 결국 같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장 내일 한국의 시급 1만원이 된다고 국제 원자제 가격이 뛰지 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가가 당연히 오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정치를 못믿는게 아닐까 합니다. 시장의 담합이나 자본의 유 통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당장 1만원이 무리지만 언젠가 임금은 올라야 할 것입니다. 풍족하 진 못해도 사는데 궁핍하다는 생각은 없어야지요. 아껴서 선물도 사고 난방도 하고 책도 사고 차도 마시고 얼마나 좋습니까. 언젠가 한 걸음 내 딛어야 할 때 겁먹는일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번달을 마지막으로 박민수님의 서서학동 사진과 aoikasa님의 Midnight in Seoul 연재가 종료되었습니다. 지난달에는 안경미님 의 Egg in Wonderland과 김재원님의 시가 종료되었고요. Night Planet(야행성)님의 0,0,0 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달에도 재미있는 책으로 찾아뵙길 희망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벚꽃 잊지 마시길 바라며 월간이리 exxx 드림.
월간이리의 공식 트위터는 @postyri 이고 온라인 페이지는 postyri.blogspot.com 입니다. 이곳에서는 컬러 PDF 파일과 바로보기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회사 옆 미술관 강세기
화랑 미술제와 아트페어
아트페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미술이란 것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숭고한 그 무언가’라는 이상적인 생각보다는, 돗대기 시장바닥에 널부러지듯 걸 려있는 그림들을 보면 괜스레 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티스트와 기획자가 고민한 결과로 작업과 전시공간이 오묘하게 자아내는 궁합 역시 아트페어에 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명실상부 미술 판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는 이곳을 즐기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트페 어의 주인공인 판매자와 구매자, 이들을 통해 미술 판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트 페어는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혼자 방에서 즐겨오던 무언가를 공유하기 위해 모인 애호가들의 모임이랄까? 전형적인 컬렉터의 풍미로 딜러들과 얘기하는 사람들, 노부부들도 꽤 많이 눈에 띈다. 회사 부장님 차
림으로 껄렁껄렁 가격을 물어보는 아저씨들,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온 연인들, 아이들 손을 잡고 방문한 가족들까 지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
하나같이 다른 모양새지만 일단은 1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미술제에 온 것 자체만 해도 웬만한 art lover 아니고서 는 어려운 일 아니던가.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사람들이건만 동병상련의 정을 혼자 나누는 궁상에 빠졌더랬다.
갤러리들이 미는 선수들은 누군지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선택한 작가라기보다는 소장품 중에 팔릴 만한 작업을 중구난방으로 나열해놓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들 중에 국제갤러리는 젊은 작가만 선별하는 나름의 틀을 만들어 작품을 채웠다.
문성식
국제, pkm과 같이 단순한 미술품 유통창구를 넘어 시장에 영향력을 미칠 만한 갤러리들은 국제아트페어라고 불리기 에는 영세한 수준의 화랑 미술제에는 나름 수위조절을 하며 선별 출품(어장관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라리오, 갤러리 현대 등 메이저급 갤러리들은 출품조차 하지 않았다. 알지 못했던 작가를 만나는 재미도 있다. 이번에는 판화작가 제소정씨 작업이 인상 깊었다. 조금만 더 크레이지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보이는 작업에 팔렸음을 표시하는 빨간 딱지를 보았음에도 가격을 물어보았다. 100만원이란다. 사실 갤러리 언니가 안 팔리면 자신이 사려고 붙여놓은 거라고 말했다.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 만난 문성식의 작업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연필, 잉크라는 고전적인 도구를 가지고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는 문성식의 작업을 보다보면, 캐릭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특별한 매력이 없어도 굻은 캐릭터를 가지고 시장에서 기억되는 연예인들처럼 문성식의 그림은 ‘그’만이 보일 수 있 는 그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것을 잡는 작가들은 행복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아트 페어 중에 그나마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아트 페어는 키아프(KIAF) 뿐이다. 페어라는 게 이름처럼 축제의 장이 되어 이런저런 볼거리들도 많고 부대행사들도 많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아트 페 어는 이름만 그럴듯하지 막상 보면 정말 ‘파는데’만 집중해서 그런지 싱겁게 끝날 때가 많다.
시골서 열리는 5일장에 물건만 사러 가는 사람이 어딨나. 이런저런 주전부리도 사먹고 엿장수 구경도 하는 재미로 가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대부분 아트 페어는 갤러리 부스하고 땡. 재미 거리가 없다.
그나마 득템 한 것들은 한국과 세계의 컨템포러리 미술에 대해 특집을 낸 월간 ‘art’과월호와 2012년에 주목할 만한 미술 논문을 소개한 ‘아티클’ 정도였다.
사진 출처 : art info / moonsungsic.co.kr / Beltproject / 화랑미술제 facebook
kangjoseph.tistory.com
영화로 보는 시공간
모성멜로드라마의 무서운 진실: “밀양”을 통해 보는 한국영화의 모성 재현, 그리고 헐리우드 모성 멜로드라마 “레빗홀”과의 비교분석
지난 호에 예고한 바 와 같이 이번 호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비교적) 최근 영화, 밀양 (2007)에 대해서 분 석해 보도록 한다. 페미니스트 영화학자 유지나 교수는 한국영화가 고착화 되어있는 형태의 여성성만을 제시한다고 주장 한 바 있다. 한국 영화에서 여성은 주로 모성성이 넘쳐 나는 희생적인 여자 vs. 성적으로 과장 되어 있는 악녀로 이분화 되어 재현 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녀의 주장은 한국 고전 영화들에 더 가 까이 적용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한국 주류영화에서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이 두 모델에 국한되어 제시 되어왔다.
밀양의 주인공, 신애, 라는 캐릭터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속하는 “희생적인 모성” 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을 사고로 잃긴 했지만, 싱글맘으로서 꿋꿋이 어린 아들을 키워나간다. 남편을 잃은 상처를 잊 고자 그녀는 밀양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이웃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 고자 하고, 피아노 학원을 차림으로서 경제적인 독립도 수월하게 이루어 지는 듯 하다. 그런 그녀에게 어 느 날 갑자기 아들이 유괴/살해 당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고, 결국 사건은 그녀의 보험금을 노린 이웃 의 소행으로 판명이 된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는데, 영화 전반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종교활동은 진실된 안식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가령 그녀가 통성기도를 하거나 찬송가를 부르고 이웃들 집에 심방을 다니는 행동들이 다소 과장된 모습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가 살인범을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하기 위해 교도소를 방문하면서 시작이 된다. 용기를 내어 살인범에게 용서를 하겠다는 말 을 하자마자 살인범은 해탈한 얼굴로 “나는 이미 주님께 용서 받았고 회개하고 있다” 는 고백을 한다. 영 화는 이 시점부터 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이른바 신애의 신에 대한 복수다.
자신도 용서하지 않은 중죄인을 이미 신이 용서를 했다는 말에 신애는 기독교에서 금하는 모든 죄를 고의 로 행하기 시작한다. 친한 신도의 남편을 꼬여내어 간통을 하고,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며 교회에서 열리는 행사에 “세상은 요지경”을 틀어놓아 교인들을 교란시킨다. 결국 영화는 그녀가 정신병원에 갔다가 나와 “ 정상적으로” 이웃들을 맞이 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물론 많은 디테일들이 생략된 대강의 요약이지만, 독자들은 이 줄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순히 아들을 잃은 엄마의 아픔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하기엔 많은 장치들이 있어 보인다. 앞서 흥행했던 전 형적인 한국 모성 영화의 장치들처럼 밀양 역시 아들의 죄값을 신애에게 부과시키기도 하지만 그녀의 죄는 전통적인 한국 부모들의 “자식 먼저 보낸 죄” 수준이 아닌 훨씬 더 다 차원 적인 죄로 집행이 된다. 첫째로 그녀는 아들을 잃었고, 둘째로 (그녀의 시어머니 대사가 나타내듯) 남편을 “잡아먹은” 여자이다. 고 로 이미 남자 둘을 살인한 여자가 된다. 셋째로 기독교의 교인으로 자신을 등록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 인 “원죄 (예수님을 죽게 한)”를 껴안는다는 의미가 된다. 마지막으로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교회를 교란 시키고 신도의 남편을 유혹한다는 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이 되며 결국 그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중 죄인이 된다.
그렇다면 그녀의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그녀의 죄목들의 공통점을 보자면 모두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남성의 존재를 가시화 시키기 위한 가치에서 성립되는 죄들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여성의 죄의식을 다 른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들을 짓게 함으로서 극대화 시키는데 그런 죄들은 모두 남성의 존재를 파괴시키 는 죄들로서 무의식적인 남성에 의한 처벌을 각성하게 한다. 따라서 여성의 몸을 처벌과 희생의 장소로서 합리화 하는 것 이다.
신애의 이러한 coping method 는 레빗홀 (Rabbit Hall, 2010)의 니콜 키드만이 아들에 대한 슬픔을 타인, 즉 가족이나 남편과 나누게 된다라는 결말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레빗홀에서 니콜 키드만 역시 아들을 교통 사고로 잃게 되고 그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는 여성이다. 그녀 역시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갖가지로 고통 받고 방황 하다가 결국엔 자신의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 고 결국 자신의 다른 상처들의 치유를 통해서 아들을 잃은 상처 역시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신애와 니콜 키 드만이 맡은 엄마역할 의 이러한 대조적인 반응은 필자가 전에 읽어낸 적이 있는 1970년대 한국의 호스테 스 장르를 떠올리게 한다. 호스테스 영화에서 두드러졌던 장치였던 산업화 동안 일어났던 여성의 육체적 인 희생, 그리고 그런 여성의 희생을 통해 내포되었던 남성 우위의 젠더 서열화는 현대영화인 밀양을 통해 서도 재현되고 있다.
이 지면에 종종 등장하는 영화학자 린다 윌리암스는 미국 멜로드라마, 호러 영화, 포르노 영화들이 female body genre, 즉 여성 몸의 장르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장르들이 여성의 몸의 재현을 통해서 (호러물의 여성 희생자, 포르노에서는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 멜로물은 여성의 과잉 된 감성) 남성 우 위적인 문화적인 시스템을 양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양은 어쩌면 그런 여성의 “마땅한 희생”을 요구함 으로써 (남성적인 관점에서만 성립이 되는) 여성을 하향상징 하는 텍스트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많은 사람들이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영화 해석이라는 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억지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논지인데, 이 글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읽히지 않을까 신경이 쓰인다. 이 짧은 지면을 통해 미디어 이론이나 영화 해석론 을 다 논할 순 없지만 꼭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리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한가지 사실은, 영화는 한 개의 “ 재현된” 상품이라는 것이다. 한 명의 캐릭터가 등장하여 비누를 사는 씬을 찍는 다고 가정을 해보자. 각 감 독들 마다 매우 다른 버전은 씬이 만들어질 것이다. 여성 캐릭터 인지 남성 캐릭터 인지, 수퍼를 가는지 동 네 구멍가게를 가는지, 낮에 사는지 밤에 사는지, 비싼 도브 비누를 사는지 싸구려 오이비누를 사는지 이 모 든 환타지는 각 크리에이터들의 무의식 혹은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 재현이 되는데, 영화에 드러난 줄거리나 모티브들은 그런 무의식/의식적인 지배의 연장으로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애가 밀양에서 저지른 네 가지 죄는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모성영화 (여 성의 ‘지나친’ 희생이 강요되는) 장르의 맥락에서는 한국적인 특수성과 젠더 가치가 투영된 또 다른 문화적 인 재현으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감탄하는 편집인 글. 곡주대비
홍대 술인을 예 화 문 위한 임 친목모
집 회원모
시인 김경주 : ’ 장 단 탁구장 ‘필승 휘 옆 연 박 아마트 . 코치 : pclub 정동 코 합 구 /gjdp 포 m o 마 c 1110 : . 27 aver 장소 6 n . 2 e f 0 //ca 7, 01 http: - 276 8 카페 : 4 6 8 10 용료) 의:0 구장이 (월 탁 가입문 원 0 00 : 50, 기준) (주1회 월회비 원 0 0 0 : 20, 수강료
Midnight in Seoul (부제: 우리 동네 이야기)
글. aoikasa Prologue 남대문로가 어딘지 아시나요? 남대문로 하면 그저 ‘남대문’ 근처 어디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로 네거리, 즉 종로타워와 보신각이 있는 종 로 1가와 종로 2가 사이에서부터 롯데백화점을 지나 남대문을 지나 서울역까지가 바로 남대문로 입니다. 생각보다 꽤나 긴 길 이지요? 남대문로 역시 종로처럼 1가에서 5가까지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길은 종로만큼이나 서울의 중심 상업대로로서, 서 울의 주요 남북축을 이루어 있었던 도로입니다.서울의 중심대로였던만큼, 이 도로의 변화는 그 어떤 도로보다 매우 빠른 속도 로 이루어졌으며, 서울의 주요 금융시설과 상업시설들이 이 곳에 이른 시기부터 들어섰습니다. 유독, 1930년대 소설이나 영화에는 종로만큼이나 남대문로가 자주 등장합니다. 아마도 이는 그만큼 남대문로가 그 시대 사람 들에겐 큰 의미였기 때문이며, 이 길이 주는 근대적 ‘감각’이 강렬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구보 박태원은 남대문로와 접한 다동에 집이 있었고, 집을 나서 화신 백화점(지금의 종로 타워 위치)으로 향하죠. 이상 역시 집을 나와 미츠코시 백화점(지금 의 신세계 백화점) 위에서 남대문로를 바라보죠. 그리하여 이번 달은 ‘남대문로 이야기’를 근대적 도시의 감각과 연관지어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동네 이야기 그 여섯번째. 남대문로 남대문로, 근대의 감각
Figure 1. 2. 용1890년대 말의 남대문로(출처:With Tommy Tomkins in Korea, 1905) 와 1930년대의 남대문로
1880년대 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에 의해 찍힌 한 장의 사진과, 1930년대 아마도 일본인에 의해 찍힌 다른 한 장의 사진. 왼쪽의 사진은 남대문 위에서 남대문로를 찍은 사진, 오른쪽의 사진은 아마도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위에서 남대문로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들이다. 그 지점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두 사진 보두 남대문
로를 찍은 것이다. 이 사진들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40~50년 만에 이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 다는 것이다. 거리에 늘어선 단층 한옥들은 높은 대형 빌딩들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전혀 대형 빌딩이 아니지 만, 약 80년 전의 감각으로 보면 말이다.) 대체되었고, 도로 위 느긋느긋하게 걸어가는 사람들과 짐을 실은 소 들은 전차와 자동차, 트럭들에 그 자리를 내 주었다. 텅 비어있던 커다란 거리 위에는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이 있는 대형 광고판이 세워졌고, 도로에는 전차 선로와 보도 등 갖가지 선들이 새겨졌다. 서울의 관문인 사대문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남대문으로부터 종로를 잇는 이 길, 특히 전차와 철도의 등장은 남대문로를 다른 어떤 길보다 더 중요한 서울로 향하는 길로 만들었고, 1880년대 이후 이 길을 통해 새 로운 근대의 문명과 문물, 그리고 새로운 근대의 감각이 들어왔다. 교통상 중요했던 장소였던 만큼 이 길을 두 고 청나라 상인들과 일본 상인들의 세력 다툼도 치열했다. 그 사이 이 길의 원래 주인이었던 조선 상인들은 그 자리를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에게 내어주게 되었고, 그렇게 점점 이 길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근대적 눈의 감각’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어느 날. 남대문로 2정목과 3정목이 만나는 한국은행 앞 광장. 정오의 사이렌이 울리면, 미츠코시 옥상에서 당장이라도 이상이 나타나 ‘날자 날자 날자꾸나’를 외칠 것 같다. 미츠코시는 다채롭다. 미츠코시에는 없는 게 없다. 미용실도 있고, 갤러리도 있고, 까페도 있고, 심지어 옥상 정원도 있다. 옥상정원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떠한가. ‘レートクレーム(레-토 크림、화장품)’과 ‘キリンビー ル (기린 비-루)’라 크게 쓰인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의 광고가 보인다. 이쯤이면 이 곳이 일본인가 조선인가 싶 을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언어의 혼재 속에 나타나는 다채로운 감각. 그 것이 식민지적 현실이어 슬프건, 아니면 혹은 지배자의 관점에 서 기쁘건 간에, 분명 이 모습들이 보여주는 건 도시가 주는 다채로운 감각이다. 호불호나 선악의 문제가 아닌, 그저 근대가 주는 ‘자극적인 눈의 감각’ 인 것이다. 남대문로에는 경성역(지금의 서울역)과 조선은행(지금의 화폐박물관), 미츠코시 백화점과 조지아 백화점 (지 금의 롯데 백화점 영플라자), 식산은행(지금의 롯데호텔 신관자리)까지 당시 경성에서 꽤나 크고 멋진 건물들 은 다 모여 있는 듯 하다. 그 것이 조선인들의 것이 아닌, 일본인들이 1894년부터 이 곳으로 본격적으로 진출 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낸 산물들이라는 점에서 근대 도시의 화려함 이면에 있는 피식민지의 아픔이 느껴지 지만,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으로 둘러싸인 이 거리는 그저 ‘다양한 빛과 색의 불야성의 거리’일 뿐인 것이다.
‘속도의 감각’ 이 곳은 조선 ‘최고’의 모단한 거리 ‘남대문로’ 남대문에서 종로까지를 잇는 이 대로에는 참으로 다 양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와 버스, 전차에 자전거와 인력거,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까지... 모두가 빠른 속도로 근대의 거리를 질주한다. 1930년대 영화인 ‘미몽: 죽음의 자장가’에는 모단한 삶을 꿈꾸는 여자 ‘애순’가 등장한다. 그녀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조선의 가정에 속한 ‘ 부인’이자 ‘정희의 엄마’이지만, 전통적인 삶의 질서 에 순응하고 싶어하지 않아 한다.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던 그녀가 택한 것은 그녀가 속한 현실로부터의 ‘탈출’ 백화점으로, 극장으로, 티룸으로, 호텔로... 경성의 온갖 모단한 장소들을 다니며 ‘근대의 감각’ 을 쫒던 그녀는 결국 ‘택시’를 타고 남대문로를 질주 한다. 그녀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Figure 3. 서울에 나타난 자동차 (출처:jungdong.culturecontent.com) 자동차 한 대의 등장으로 놀란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1900년 즈음 남대문
1930년대 만들어진 몇 편의 영화들에는 비슷한 장면 들이 반복된다. 자동차를 타고 혹은 전차를 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 는 장면. 자동차는 남대문로를 지나 남대문역으로 향하며, 주 변의 고층빌딩들과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지 나친다. 거리의 수도 없이 많은 ‘움직이는 것’들은 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간다. (하긴, 지금 도 남대문로 일대에서 사람들과 자동차들의 흐름을 보고 있자면 머리가 아플 정도이다.) 자동차는 또 다 Figure 4. 영화 ‘미몽: 죽음의 자장가’ 중 애순이 타고 가던 택시와 그리고 나란히 달리고 있는 기차.
른 근대의 상징인 기차의 질주와 함께 대비되며 도시 의 ‘속도의 감각’을 설명한다.
‘시간의 감각’ 속도의 감각은 곧 시간의 감각이다. ‘Korean Time’이라는 말이 있었다. 시간개념이 별로 없는, 즉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한국사람들을 일컫던 말. 마치 일 분 일 초도 헛되게 쓰지 않고 보람차게(?) 채워가야 할 거 같은 지금으로서는 ’Korean Time’이 라는 말 자체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 생각 해보면, Korean Time이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저 시간을 천체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 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인 채, 어떠한 ‘틀’을 씌 우지 않고 몸에 체화된 감각으로 느끼던 시절의 관성 이라는 건... 아마도 무섭게도 온 몸에 배여 있었을지 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보다 먼저 서양식 시간관을 받 아들인 일본에 의해 조선은 그저 ‘게으른 (내포된 뜻 은 그리하여 우리(일본)가 문명개화시켜야하는 존재’ 였을 뿐일테니 ‘Korean Time’이란 그저 부정적 속성
Figure5. 동아일보 19220611.
만 가지고 있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6월 10일을 시(時)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했다. 사진은 시간 선전하는 경성부원의 모습
1896년 처음 태양력을 도입한 이후 일제시대에는 ‘시(時)의 날’ 등의 일종의 기념행사도 전개하며 사람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교육했다. 그러나 이 ‘시간’의 개념이라는 게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건 아마도 사 회적 시스템, 혹은 규율 등을 통해서였다. 기차나 전차를 타기 위해서는 ‘시간’을 맞추어 가야만 했고, ‘학교’와 ‘공장’은 모두 ‘시간’에 맞춰 시작하고 마친다. 학생들은 ‘학교 종이 땡땡땡’ 치면 ‘어서 모여야’하고, 직장인들 은 이제 ‘정오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점심을 먹으러 도로로 나선다. 근대적 교통수단들은 ‘시간’에 맞춰 오 지 않으면 탈 수가 없고, 서양식 의료 기관에서는 ‘시간’에 맞춰 약을 복용하라고 한다. 즉, 일상의 구석구석에 시간이 스며든 것이다. 이렇게 ‘시간’에 맞추어 사는 이들은 대부분 ‘시골’이 아닌 ‘도시’에 살며 ‘논과 밭’이 아닌 ‘직장 혹은 학교’ 에 정시에 출발하는 ‘전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었 다. 따라서 곧 ‘시간’이라는 것음 ‘모던’의 하나의 상징 이 되고 말았다. 상점가 곳곳에 위치한 시계포들에서 는 ‘고가의 진귀한 물건’이자 ‘패션아이템’인 시계를 팔았고, 모던한 장소인 전차회사, 백화점, 병원 등에 는 커다란 시계가 건물 앞에 걸렸다.
Figure6. 안석주의 만문만화: ‘모-던 걸의 장신운동’ 모던 걸들의 필수 아이템이 된 ‘손목시계’
‘소리의 감각’ 째깍째깍 하는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그 소리는 그 소리의 일정함만큼이나 우리의 일상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어 나간다. 도시의 소리는 어떠한가. 사진 속 보이는 남대문로의 풍경 속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자. 사진 안에 멈춰져버린 그 시간이 돌아오면... 다양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기차의 칙칙폭폭 소리. 전차가 내는 소리. 전차의 차장이 정차장 마다 지르는 소리. 자전거를 탄, 인력거를 탄 사 람들이 혼잡한 도로에서 서로를 비껴가며 내는 소리, 레코드 가게에서 틀어 놓은 음악 소리.... 정오의 사이렌이 울리면 일순간 모두가 조용해졌을까? 아니면 그저 정오의 사이렌마저도 일상의 일부분으로 받 아들인 채, 그 많은 소리 중에 하나로 사라져 버렸을까? 근대의 도시가 주는 또 하나의 감각은 바로 이 ‘소리’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빠르게 지나는 교통기관들과 번화한 상점가의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을 통제하는 ‘시계’와 ‘정오사이렌’의 소리까지... 정오의 사이렌은 아마도 조선시대 시각을 알리던 종루(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모서리에 있던)의 종소리와는 분명 달랐을 터이다. 도성 안에 널리 널리 퍼져 나가던 오래된 ‘종’소리와 달리 사이렌은 기계적이고 차갑고 게 다가 사람들을 모두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조차 숨어 있었다. 게다가 이 다양한 근대의 소리들이 나타나기 시 작하며 종루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니...
‘날자, 날자, 날자꾸나. 이 근대 도시로부터’ 이상이 미츠코시 옥상에서 느낀 건 무엇이었을까? 정오의 사이렌 소리, 눈 앞의 화려한 도시 풍경,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소리들. 이상은 ‘근대 도시가 주는 감각’의 한 가운데서 지쳐버 린 게 아니었을까? 넘치고 넘쳐 그를 ‘피곤하게 만들어 버린’ 그 근대의 감 각. 그 감각의 중심에 남대문로가 있었다.
Figure7. 1930년대 선은전 광장과 남대문로 2가: 아마도 이상이 미츠코시 백화점 위에서 보았을 풍경 (출처: modernseoul.culturecontent.com)
Figure 8.9. 1920~30년대의 남대문 1가와 2가 광통관, 한성은행, 식산은행 등의 대형건물들이 늘어선 거리의 모습 (출처: modernseoul.culturecontent.com)
.... 남대문로는 1,2가와 3,4,5가의 모습이 매우 다르다. 이는 아마 남대문 시장의 영향이 클 터. 1930년대에도 그랬다. 1,2가가 금융과 대규모 상업의 중심지라면 3,4,5가는 소형 상업과 운송업 등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성격은 아마 지금도 변치 않은 듯 하다.
Figure 10.11. 1920~30년대의 남대문 4가, 한옥상가와 소규모 상가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 (출처: modernseoul.culturecontent.com)
Figure 12. 전차길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성벽이 무너지고 섬이 되어버린 남대문
p.s. Midnight in Seoul, 우리 동네 이야기는 잠시 쉬어가기로 합니다. 몇 달 후에, 다시 ‘새로운 이야기’들을 가지고 찾아뵙도록 하지요. 그동안 재밌게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Twitter : @aoikasa27)
비밀안( not)스러운생활 2013 APRIL 7 22:35
16 17:24
14 20:51
16 19:19
26 20:28
날이 풀린다 풀린다 밀당하기를 몇 주 째, 시간의 흐름은 언제나 대단해요. 꼬까꼬까한 옷들을 잔뜩 사두고 기다린 봄은 그 옛날 “뭐가 지나갔냐?”하던 깜찍한 광고 속 캐릭터의 벙 진 표정처럼 우리를 황망하게 할테니까요. 그러니 지금의 추위를 즐깁시다! 라고 말하면 엉뚱하지만 나빼고 모두가 바라는 듯한 따뜻한 공기 는 기다리지 않아도 올거예요. (흑흑 / 그리고는 곧 이 여름이 언제 가나 하겠죠!) 언제나 겨울과 여름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보이스를 가진 Rufus Wainwright
16 17:38
17 20:05
26 20:57
26 21:59
{beamil}
의 음악을 들으며 느긋한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얼른 나가 이 더위를 때려부수라고 떠미는 듯한 열정의(!) 여름보다는 겨울의 푸른 빛 어스름한 아침을, 차분한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저는 북유럽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언젠가는. 그 언젠가가 현실이 되어서 이 지면에 푸른 빛 사진들을 잔뜩 보여줄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Dreams come true!
*Android, i-Phone APP ‘인스타그램’의 필터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들만 실어요.
- 이 달의 선정 도서 『그해 여름』, 다비데 레비아티, 임순정 역, 미메시스, 2012 뭔가 잘못됐다. 주인공 코페르는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는 알 지 못했다. 하지만 알았다 한들 달라질 것이 있었을까? 추측하건데, 아마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 이다. 나 역시도 읽는 내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주인공이 느끼는 딱 그만큼이었을 것이다. 동네엔 공장이 있고, 어른들은 공장을 찬양하며 일한다. 이따금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기도 하 고, 밤이면 경찰들이 돌아다니고, 사이렌 소리에 대피하고 하는 것들이 공장 때문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어른들이 왜 공장을 찬양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평을 찾아보았다. 1950년대 당시 세계 석유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던 미 국,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 등의 메이저 석유회사의 주도 권을 종식시키고자 이탈리아 정부는 국영석유기업을 세 웠다. 〈엔리코 마테이〉라는 이탈리아의 실업가는 그 국 영기업을 받아 확대, 개편하여 새롭게 국영석유기업 에 니(ENI)를 세웠다. 시추 국가에게 비교적 공정한 조건을 내세워 이집트, 이란, 모로코 등의 허가를
얻어 그 사업
은 점차 확대되었다. 에니는 이탈리아 경제에 많은 영향 을 끼치는 3개 국영기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주인공 코 페르의 마을에도 엔리코 마테이가 세운 공장 아니크 (A NIC 국립 연료 수소화 공장)가 있었다. 마을을 살만한 곳으 로 만든 엔리코 마테이를 모두 좋아했다. 위대한 그 인물은 세상을 창조했으며, 그가 창조한 세상은 바로 우리들의것 이라며 마을사람들은 그를 찬양했다. (『그해 여름』 출판사 서평 中)
읽고서야 정확히 알게 됐다.
그래서 이번 소설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을 그려보고자 한다.
- 자기최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대체 그
학원에 갈 돈을 받을 수 없었다. 말해도 받지 못
림을 그려서 뭘 하겠다는 이야기냐며 화를 냈다.
하리란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생
나는 단순히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그리고 싶다
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말했지만 역시나.
고 이야기한 것뿐인데, 아버지는 마치 내가 살인 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대했다. 아버지는 그림 그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
리는 일이 무지막지한 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
시 미술학원 한 달 등록비는 오십만 원에 육박했
다. 어머니는 그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다. 반년이면 삼백, 일 년이면 육백, 이 년이면 천
침묵은 동조라고 했던가? 어머니 역시 아버지와
이백. 우리 집이 천이백을 벌려면 한 푼도 쓰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않고, 아버지가 하루 종일 택시를 타고, 어머니가
부모님의 반응이 그러하리란 건 알고 있었다. 그
하루 종일 마트에서 계산을 해도 반 년 이상이 걸
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고선 미술
렸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밥 먹고, 월
세 내고, 기타 등등 들어가는 돈들까지 쓰며 암만
던 물감들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거기에 붓으
아껴가며 모은다고 하더라도 일 년은 걸릴 터였
로 물을 발라 녹였다. 밑그림에 색을 입히기 시작
다. 그만한 돈을 아버지가 살인과 같다고 생각하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칠했다.
는 일에 줄 리 없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다. 알고 는 있었지만 난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지금껏 그림을 그리면서 그 순간만큼 황홀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희선의 나체를 그릴 때에 도, 술에 취해 들어와 거울을 바라보며 자화상을
그날 이후로 나는 그림 이야기는 입에 담지도 않
그릴 때에도, 그때만큼의 희열을 느끼진 못했다.
았다. 그저 매일매일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노 트 필기를 했다.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는 이상 미대에 진학하기 란 하늘의 별따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걔들은
희선… 희선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대에 가지 않은 건 축복이야. 그곳엔 아무 것도 없어. 껍데기만 번지르르할 뿐이야.”
하루 반나절 이상을 그림만 그려대는데 그런 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격지심을
들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그럼에도 그림
느꼈다. 미대는 늘 내게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
에 대한 꿈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값비싼 미
는 장난감과 같은 것이었다. 그 장난감이 아니어
술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이기지 못해도 상관없
도 가지고 놀 장난감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었다. 미대에 가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솔직
난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보지 못했다. 희선 같
히 말하자면 미술학원도, 미대도 가고 싶었지만
은 사람들은 날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를 부러워하기도 하는 듯 했다. 사람은 늘 가지
아주 단순히 이야기하자면, 그저 나는 그림을 그 리고 싶었던 것이다.
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법이다. 나는 그들을, 그 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우연한 기회에 참가했던 단체전에서 처음 희선
교과서나 노트에 낙서나 끼적이던 것을 좀 더 본
을 만났다. 안면도 튼 적이 없던 내게 다가와 다
격적으로 해보기로 했다.
짜고짜 물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싸구려 사 절 스케치북 한
“당신이 이동현이에요?”
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뒤져 초등학
그렇다고 하자, 내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생 때 썼던 포스터 칼라와 수채 물감, 팔레트, 싸
엉터리라고. 엉터리인 게 마음에 든다고. 모르는
구려 붓, 먹과 벼루 등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들
사람에게 그림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그
을 방 안에 펼쳐놓고 바라보았다. 그날의 기분이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맙다는 인사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설렜다. 마치 대
를 했다.
단한 작가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동안 단순히 그 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낙서나 끼적이
수능을 치른 날. 부모님과 함께 중국집에 가서 탕
고, 미술학원에 다니는 애들을 부러워하고, 부모
수육과 자장면을 먹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동
님에게 말하지 않고 숨기는 데 급급했던 것이 바
안 감사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이냐고
보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싶으면 그리면 되는 것
물었다. 나는 이제 그만 집을 나가려고 한다고 했
을! 어째서 그동안 그리지는 않고 그리고 싶다는
다. 아버지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며 대학은
생각만 했던 걸까?
가지 않을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학에 갈 생각
본격적인 시작의 첫 작품으로 무엇을 그릴지 고
이 없다고 말했다. 부모님 모르게 계속 그림을 그
민했다.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을 그리기
려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버지는 젓가락을 내
로 했다. 낙서하듯 먼저 펜으로 펼쳐놓은 도구들
려놓았다. 어머니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탕수육
을 그렸다. 팔레트를 열자 아주 오래 전에 짜놓았
을 집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그 뒤 길고긴 아버지의 이야기. 자신과 같은 삶
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을 살 거냐. 대학도 가지 않고 대체 뭘 어쩌겠다 는 것이냐. 대체 그림을 그려서 뭘 어쩌겠다는
얼마 전, 잡지를 보다 희선을 보았다. 나를 만날 때
것이냐. 그거 해서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줄 아
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모습을
느냐……
보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희선의 사진 옆에 이 런 타이틀이 붙어있었다.
돈 벌기가 쉽지 않은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아버
‘뉴욕에서 주목 받는 신예, 장희선.’
지와 어머니를 이십 년이나 봐왔으니 그걸 모를
희선은 나와 헤어질 무렵 학교로 돌아갔다. 전해
리 없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빚은 늘 빚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남아있었다. 삶은 늘 구질구질했다. 내가 대학에
을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목 받는 신예
가면 빚은 더 늘어날 것이 뻔했다. 그러고 싶지
가 된 모양이었다.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부모님은 힘든 사람들이
그녀의 그림들이 보였다. 아니. 내 그림들이 보였
었다. 차라리 내가 집을 나가는 것이 부모님에게
다. 잡지에 내 그림들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녀
도 좋을 것이었다.
의 그림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아니. 내 그림은
그전에 이미 난 숙식제공을 해준다는 일자리
아니었다. 그녀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들을 알아두었다. 그곳에서 돈을 벌어서 재료들
림들은 내 그림들이었다. 희선이 내게 엉터리 같
을 사고 꾸준히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언젠가
아서 좋다고 했던 그 그림이었다. 잘못된 것은 아
알아주는 이들도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꼭 미대
니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내 화풍의 느낌이 좋아
를 나와야만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 아니
그렇게 그린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단순히 이
라고 생각했다.
야기해서 그저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이니 까. 어쩌면 내가 보길 바라며 그 그림을 잡지에 보
지금껏 그렇게 믿어왔고, 그래서 꾸준히 그림 그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사를 보고 내가 자신을
린 지 십 년이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순
추억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진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믿음처럼 누군 가는 내 그림을 좋아해줬다. 희선이 그랬고, 그녀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말고도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내 그림
그리고 싶다.
은 팔리지 않는다. 경력?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들에 비하면 경력 은 많다. 단체전 십여 차례. 개인전도 두 차례나 진행했다. 하지만 지금껏 팔린 작품은 손가락에 꼽힌다. 그나마도 다른 작가들 작품 가격의 절반 도 채 되지 않는 돈을 받았다.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좀 더 나 은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십 년 만 하면 뭐라도 된다고들 하지 않는가.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십 년만 버텨보자고 이 를 꽉 깨물고 버텼다. 이제 십 년이 되었는데, 난 뭐가 되었을까? 그저 그림을 그리기만 하는 것으로 행복했던 시 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은 욕심을 부
안녕하세요. 박민수 입니다.
서서학동은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이분들의 삶의모습을 왜곡하진 않았나 고민을 많이했습니다.
마지막은 제 나름대로 좋아하는 컷을 모은것 입니다.
지금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주 서서학동 글. 사진. 박민수
0,0,0 최초의집
By Night Planet(야행성) 모두가 떠돌지만 그 와중에도 ‘돌아갈 곳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과 ‘돌아갈 곳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떠도는 것에 대한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이 어머니의 자궁을 자신의 원점으로 여겨왔듯이 누군가는 고향을 자신의 원점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가족을, 연인을 원점으로 여긴다. 내 삶 좌표계에서의 <0,0,0>점은 언제나 ‘집’이다.
<최초의 집> 태어나서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꽃가게 뒤에 붙어 있던 아빠가 지은 집에서 살았다. 아빠가 지은 집이라고 하면 흔히 사람들이 상상할만한 ‘2층의 양옥집’과는 거리가 멀다. 손재주가 좋던 아빠가 주먹구구로 지은 집이라 창문 하나 없었다. 폭이 약 4m, 길이가 14m정도로 비닐하우스로 된 꽃집 뒤로 나무로 지은 안방, 주방, 작은방이 길게 붙어있었는데 아마 불법 건축물이었지 싶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내가 태어나고 부터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선 나를 복덩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열심히 일하는 집들은 운이 특별히 나쁘지만 않으면 다들 형편이 피는 시기였던 것도 같다. 그래도 복덩이라고 부르는 게 좋았고 늘 나는 운이 좋은 편에 행운을 불러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최초에는 꽃가게와 안방이 있었다. 인도에서 유리 샷시를 열고 들어오면 꽃가게가 있었고 꽃가게와 안방 사이에 40cm정도의 턱이 있어서 신발을 벗고 턱을 내려와야 했는데 꽃가게를 찾은 손님들이 들어오도록 허락된 공간은 여기까지였다. 단골 손님이 와서 커피 한잔에 한참씩 수다가 이어져도 엄마가 집안까지 손님을 들이는 일은 잘 없었다. 나는 이 턱 위에서 슈퍼맨 팔을 하고 뛰어내리며 놀았고, 누군가 자주 이 턱에 걸터 앉아있었던 기억이 있다. 안방 뒤쪽으로 아주 좁은 주방이 있었고 언니와 내가 자라자 주방 뒤쪽으로 작은방이 생긴다. 그 방을 언니와 함께 썼는데 어린아이 둘이 누으면 꽉 찰만큼 작았다. 재밌는 것 중에 하나가 작은 방에서부터 집 뒤쪽까지 폭 40cm정도의 개천이 있었다. (그걸 개천이라고 불러도 되는건지 모르겠지만) 낚시를 좋아하던 아빠는 이 작은 개천에서 늘 잡아온 생선을 손질하곤 했다. 물고기들은 머리가 잘리고도 한동안 아가미를 펄떡거렸고 눈꺼풀이 없어서 눈을 감는 법이 없었다. 언니는 그 기억때문에 지금도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해산물이라면 환장을 하는 아이였지만 지금은 채식을 하니까. 어쩌면 방 앞에서 매주마다 목이 잘려나가던 물고기들이 영향을 미친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방 앞에는 수도가 있었고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겨울엔 아마 물을 데워서 씻었나보다. 언니랑 내가 자라서 더이상 주방 옆 수도에서 씻을 수가 없으니까 아빠는 작은방 옆으로 샤워실을 만들어 줬다. 애시당초 집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엔 샤워실을 쓸 수 없었고 그래서 지붕도 없었다. 필요가 없는데 지붕을 얹을 만큼 (미적 사치를 부릴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재료나 아빠의 노동력을 생각한 경제적 선택이지만 지붕이 뚫린 샤워실이라니 굉장히 비상식적이다. 주변에 1층을 넘는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네 벽만이 있는 샤워실 샤워하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하늘과 담장을 점령한 등나무. 여름이면 연보라색의 꽃들이 짧게 피었다가 금새 져버렸다. 단순함은 명쾌하고 그래서 힘이 있다. 우리집은 꽃과 항아리를 팔았기 때문에 마당에는 팔아야 할 항아리들이 늘 잔뜩 쌓여있었고 그 중에는 내가 보물들을 숨겨놓던 항아리도 있었다. 보물이래봐야 물에 담궈 놓으면 크기가 커지는 공룡인형 같은 거였다. 공부를 잘하던 언니는 늘 학교 학원으로 바빴고나는 마당에서 자주 혼자 놀았다. 마당은 우리 집 말고도 가구점, 철물점, 씽크대 공장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웃집들과 부모님 나이 대며 자녀들 나이대가 비슷했어도 딱히 사이좋게 어울린 기억은 없다. 정서적 유대감이라는 건 한 공간을 공유한다고 해서 저절로 생각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저녁이면 차에 화분이며 항아리를 싣고 장사를 다니시던 아빠의 트럭이 그곳을 차지했다. 부모님은 성실하셨고 내가 5학년이 되자 우리가족은 신도시의 아파트를 분양 받아 이사했다.
부산오뎅 이야기 (첫사랑 개론)
나이가 들다보니 첫사랑의 아련함 애틋함은 사라진지 오래고... 짝사랑도 첫사랑에 넣어햐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논쟁에 감정 이입은 커녕 관심조차 가지 않는 노땅 이 되어버린 3월말.. 따뜻한 봄날이라는 걸 느끼지도 못할 만큼 어두침침한 야심한 새벽. 모처에서 술 한잔을 한다. 모처라 고 할 것도 없이 곱창을 팔지 않는 곱창전골... 이 가게에서 어느 날 가게에 새로 온 알바 양과 직원회식을 가졌다. 이집 곱창이 맛있으니까 곱창스페 셜을 시키니 마니 곱창스페셜이란 안주에 곱창이 있네 없네 양념을 시키니 소금구이를 시키니 하는 종 류의 이야기 들.
곱창을 팔지 않는 곱창전골에서 재미없는 곱창 얘기로 몇 분을 보내고는 술잔을 기울인다. 그러다 가 이 가게는 LP를 틀어 주는 가게니까. 요즘 노래는 없고 예전 7080음악을 틀어주는 곳이란 이야기 를 하며 아는 노래있냐고 해서 시작된 노래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씩 꺼내놓다 생각난 나의 첫사랑 과 노래하나. 91년 이미연 이경영 김민종이 출연했던 곽재용 감독의 가을여행 속 OST 신촌블루스의 아쉬움 이란 곡 이 있다. 나의 첫사랑 그 친구와 나는 초등학교동창. 중학교를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중학교 2학년 어느날, 집으 로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러며 밑도 끝도 없이 집 앞에서 만나자고 해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교복 입 은 채로 나간 그날 영문도 모른 채 그녀가 하자는 대로 시내버스를 타고 무작정 나갔다. 그게 첫 데이 트였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같은 학원 다니고, 같이 집에 오고 같이 손 한 번 제대로 잡은 기억조차 없고 밥 한번 먹은 기억도 없고, 그냥 같이 마냥 걷기만 해도 좋았던 나의 첫사랑.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첫사랑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 그 영화가 바로 가을여행이었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그녀 손 한 번 잡아보 고 싶어서 일까. 가슴만 콩닥거리다가 영화를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았던... 영화가 끝난 후 극장 밖을 나와선 극장 옆 레코드가게에서 그녀가 나에게 사준 가을여행 OST 앨범 선물을 받았다는 기쁨에 집에 가서 그 앨범을 얼마나 들었던 가.. 그리곤 며칠있다 집으로 날라온 그녀의 편지 그동안 즐거웠다며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며, 대학가면 만나자는 이별통보 그때는 어찌나 괴로웠던가 얼마나 울었던가. 삼시세끼를 제외하곤 얼마나 식음을 전폐 했던가.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럴 경우 머리에 ‘열공’ 머리띠를 두르고 열심히 공부해서 일반 대학도 아니고 의대 니 법대에 합격해서 여자친구 앞에 짜아잔~~하며 나타나선 대학가서 로맨스를 키우곤 하지만 51등하다가 38등 했다고 부모님께 칭찬받고 용돈 받고 하던 나에겐 그건 드라마, 영화 속 이야기였다 나에게 선물 받았다는 기쁨과 헤어짐의 아픔을 동시에 주었던 나의 가슴을 후벼팠던 그 노래
신촌블루스의 아쉬움을 소개하고자한다 별 빛 같은 너의 눈망울에 이슬방울 맺힐 때 마주잡은 너의 두 손에는 안타까운 마음뿐. 조그마한 너의 두 손으로 내게 전한 편지는 하고픈 말마저 다 못하고 끝을 맺고 말았네 뒤돌아가는 너의 모습 너무나 아쉬워 달려가 너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마주잡은 너의 두 손에는 안타까운 마음 뿐. 뒤돌아가는 너의 모습 너무나 아쉬워~ 달려가 너의손을 잡고 무슨말을 해야할까마주잡은 너의 두손에는 안타까운 마음뿐. 마주잡은 너의 두손에는 안타까운 마음뿐.. 안타까운 마음 뿐. 이별을 염두하고 나에게 앨범을 사줬던 것 일까? 암튼 나의 첫사랑 ㅇㅇ아! 살 좀 빼고, 애들 잘 크지?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into the jazz - 문제2: 한인사회는 피해야할 대상인가?
글. 이상준
20여년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을 만나왔다. 다양한 배경을 가 진 만큼 다양한 생각과 서로 다른 입장을 각기 가지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의 경우 우 리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간과 현지 한인사회에 대한 큰 불신과 편견을 가지고 있 는 듯하다. 외국으로 유학 또는 이민을 오는 경우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 지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한국에 대한 혐오증과 피해의식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 음을 가지고 있는 듯도 하다. 부푼 꿈을 가지고 이민이나 유학을 온 사람들을 보면 상대방(한인)을 상당히 경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어디를 가나 새롭고 낯설기에 상대를 경계하고 조 심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외국인을 대할 때는 잘 웃지 않는 문화를 가진 우리 임에도 처음부터 호의적으로 변해 먼저 다가가려고 하는 모습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상대를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일정하지 않고 매우 대조적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어디선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 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사람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 “사기치는 사람은 죄다 다 한국 사람들이야.” 20년 넘게 외국생활을 한 필자의 경우 위와 같은 말에 한편으로 동의하 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는 이유는 필자도 실제로 우리 한국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받은 경험이 꽤 많 기 때문이다. 반대로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필자의 영어실력이 점점 향상되면서 만나 는 사람의 폭이 캐나다/미국인은 물론 더 다양한 문화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확대되었 는데 재미있는 것은 비슷한 피해와 사기를 캐나다/미국인들에게도 당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인간이 사는 곳에는 악한사람과 선한 사람이 늘 있는 것이고 한 국인이라고 특별히 더 나쁘지 않고 미국/캐나다인이라고 특별히 더 나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한인사회는 과거에 비해 비교적 많이 성숙되어 있고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서 서양인들의 수준이 우리 기대치에 못 미 치는 경우가 요즘은 더 많은 듯 하다.) 외국사회에서도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 고 있고 우리가 우리사회 또는 한인사회에서 접할 수 있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부정 한 일들이 똑같이 일어난다. 인간사는 세상은 다 비슷비슷한 듯 하다. 필자는 외국에 원대한 꿈을 가지고 이민 또는 유학을 오는 것은 좋지만 굳이 부정 적인 편견에 사로 잡혀 한인커뮤니티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사는 것은 실제로 이민/ 유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속해 서로 교류 하고 지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에 나와서 오로지 한국유학생 또는 이민자들과만 교류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거꾸로 완전히 그들과 단절해 외국커 뮤니티와만 교류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균형이 필요하다. 오늘은 왜 한인 커뮤니티가 꿈을 이루는 유학/이민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외롭고 고된 외국생활을 달랠 수 있다. 외국생활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롭고 고되다. 우리가 언론에서 도 종종 접하듯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진출하는 프로선수들은 현지생활에서 겪는 외 로움을 언어문제와 함께 가장 어려운 문제로 손꼽는다. 맞는 이야기이고 외국에 나 오면 누구나 겪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어떻게 설명 할 수 없는 참 어려운 것 이기도 하다.
외국에 처음 나오면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다. 그러나 달콤한 허니문기간은 생각 보다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짧으면 한달 길어야 1년이다. 재미있고 신기한 시간이 지 나고 나면 누구나 내가 걸어왔던 과거를 찾게 된다. 내가 먹었던 음식 내가 만났던 사 람, 그리고 내가 생활했던 장소와 시간들이 늘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낯선 외국은 그런 비슷한 시간과 공간을 우리에게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외국에서 꼭 성공하겠다는 맘을 먹고 온 유학생/이민자들의 일부는 한국인을 만나 고 한인커뮤니티에 들어오는 것을 실패의 상징으로 반대로 외국인들과 어울리고 생활 하는 것을 마치 성공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시간이 지나 면서 자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자연스레 찾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인을 찾게 되고 한인사회에 조금씩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한국인을 찾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너무 자연스런 일이다. 외국에 나온 목적을 완전히 상실한 체 오로지 한국인들과만 어울리고 또 현지사회 에 적응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오로지 한인커뮤니티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분명 문제 가 있지만 균형감각을 가지고 일정부분 우리 한인들과 교류하고 커뮤니티에 속해있 는 것은 고되고 외로운 외국생활을 하는데 분명 큰 도움이 된다.
2. 대화의 상대차원을 넘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얻었으면 돌려주자.) 알다시피 우리 인터넷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외국 역시 각 지역마다 한인커뮤니티 포탈사이트가 있다. 뉴욕에는 “헤이 코리안(Hey Korean)”이란 사이트가 있고 밴쿠버 에는 “밴조선 (VanChosun)”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가면 정보들이 넘쳐난다. 숙박정 보는 물론 벼룩시장 그리고 외국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부터 고급정보까 지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일반적인 정보는 이런 한인 웹 커뮤니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포탈사이트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또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가 모든 정보를 이런 웹에서 얻고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과 경험을 컴퓨터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사람을 만 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교류를 통해야 정보뿐 아니라 학습까 지 이뤄진다. 나는 학습이라는 말에 강조를 하고 싶다. 인터넷에서 얻는 정보는 말 그대로 정보 이지 학습의 단계는 아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상대의 말뿐 아닌 숨소리와 감정을 느끼고 또 그런 상황 속에서 같이 행동함으로 많은 학습이 이뤄진다. 아주 간단한 예 로 운동을 컴퓨터게임으로 하는 것과 실제 나가서 하는 것과 학습이 같을 수는 없다.
내가 영어 (또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의 언어)를 자유자제로 구사한다면 여러 현 지인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고 또 학습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현실 적으로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굉장한 시간이 걸리기에 우리 한인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단절하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 정보의 루트는 물론 현지사정의 학습기회를 완 전히 배제시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외국에서 한국사람을 만나고 한인 커뮤 니티에 속한다는 것은 결코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현지사회에 적응하 기 위한 과정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받고 얻은 만큼 나보다 늦게 오는 사람들에게 돌려주자.)
3. 나의 꿈을 키워 갈 수 있는 기본적인 밑거름 예전에 유승준(스티브 유)를 밴쿠버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한참 병역문제 로 소란스러웠을 때 인데 직접 만나 대화를 통해 그가 영화계로 진출하고 싶은 큰 꿈 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헐리우드 진출을 위해서는 우리 한국에 있는 과거 그의 팬들이 있어야 했다. 그 수많은 그의 팬들은 그의 큰 자산이 었고 헐리우드는 그것을 보고 그에게 투자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간 슬기롭지 못 한 판단으로 그것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그는 국적(시민권)문제보다는 영화계진출에 급한 브레이크가 걸린 것에 더 큰 아쉬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나는 조 심스레 한다. 필자가 외국에서 살면 살수록 더 더욱 뼈져리게 느끼는 것은 내가 태어난 우리 한 국이 잘 되야 나도 잘되고 또 외국에 있는 한인커뮤니티가 잘 되야 나도 잘된다는 사 실이다. 나와 한국을 단절시키고 또 나와 현지 한인커뮤니티와 단절을 시키고 나를 생각 할 수 없다. 위에서 예를 든 유승준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그가 병역문제 없이 한국에서 연예인생활을 순조롭게 해서 많은 팬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배우 이병헌보다 더 먼저 헐리우드에 진출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 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운동선수들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가 뒤에서 버티고 있지 않는 이상 그들이 외국에서 크게 성장하 기란 쉽지 않다. 아주 초능력적인 힘을 가진 인물이 아니고서야 현지 한인커뮤니티의 힘과 연계 없이는 외국생활의 험난함을 혼자서 뚫고 가기엔 너무나 큰 힘이 든다. (5월 14일 밴쿠버에 주 선거가 있다. 2명의 한인 후보가 나왔는데 한 분은 전혀 한인사회에 서 전혀 보지 못한 분인데 막상 선거레이스가 시작되니 한인들의 힘을 가장 필요로 하 는 듯 하다. 필요 할 때 나를 도와주는 곳은 우리 한국사람들이고 한인 커뮤니티이다.)
필자는 남들이 보기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준은 절대 아니지만 나름 이곳 외국에서 자리를 잡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그런 나쁘지 않는 삶의 뒤에는 한인커뮤니티의 힘이 크다. 나의 큰 버팀목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가장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또 공연을 해도 직접 시간을 내서 멀리서 찾아오는 분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바로 외국에 나와 있는 우리 한인들이다. 그들이 있기에 외국에 사는 외로움이 덜하다. 거꾸로 우리 한국사람들이 없고 한인커뮤니티의 연계가 없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초능력을 가진 인 간이라고 해도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한국에서 외국인에게 특히 백인에게 가지는 많은 관심을 같은 식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의 사회에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 큰 착각이다. 서구사회는 매우 냉정하다. 혹시 그런 생각과 기대가 있다면 애당초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필자의 경우 우리 한국인들이 있기에 어떤 일도 시작 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자연스레 현지 주류(?)사회는 힘을 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결론
결론적으로 말하면 외국에서 한국사람들과 한인커뮤니티는 피해야 할 대상이 아 니라 품에 안아야 할 대상이다. 물론 크고 작은 불미스런 일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 고 필자 역시 나쁜 경험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리 한국사람들만의 문제 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 한국사람을 외면하 고 외국사람만 상대해도 같은 문제는 되풀이된다. 그저 인간의 문제이지 국적과 인 종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보다 생활이 고되고 외로운 외국생활에서 우리 한국사람은 외면이 아닌 더 적 극적으로 찾아야 할 대상이다. 또, 쉽지 않는 언어문제로 현지사정과 그 외 여러 다양 한 정보를 위해서 한인커뮤니티는 거부 할 수 없는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 루고자 하는 꿈에 큰 힘과 밑거름이 된다. 외국에 나와서 꿈을 이루기 위해 현지 생 활도 열심히 하고 또 외로움과 힘든 생활을 잊기 위해 또 많은 도움을 받기 위해 한 인 커뮤니티와 균형적인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필자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 고 먼 훗날 우리가 도움 받은 만큼 새로운 new comer들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 을 잊지 말자.) -계속-
이멜: jonleemusique@yahoo.com 블로그: jonleeblog.blogspot.com 홈페이지: www.jonleemusique.com
봄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04.28 http://cafe.daum.net/badabie
바스티앙 비베스 Bastien Vives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하지 못할 일이라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떨 때에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야기 안에서 다루 어야할 범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오늘처럼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을 하나 보지 않고 글을 써야 할 때, 잊지 않아야 할 자세가 있 다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본 것처럼 쓰지 않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글을 쓰는지를 명 확히 하는 것이 아닐까? ‘바스티앙 비베스’가 활동 중인 만화라는 분야는, 작가만의 그림과 대사를 얽어 특유의 창조적 서 사를 이루어내는 예술 분야이다. 서사라는 면에서 소설이나 영화와 연관지어 이야기되기도 하지 만, 만화는 작가별로 컷 단위의 연출이나 그림체 문자의 사용법 등 작가가 펼쳐내는 다양한 구현 양상을 통해 앞의 장르들과는 완전히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슬쩍, 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 고 경지의 서사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간혹 몇몇 작품을 두고 그래픽 노블이라는 칭찬아닌 칭 찬의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단어를 활용해 몇 작품을 높이기보다. 만화라는 통칭 으로 장르 전체를 높이고 싶다. 혹자는 어린이의 장르로 한정짓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수라는 것은 그가 놓쳤을 몇 작품만 보아도 풀릴 오해이다. 너무도 훌륭했던 만화들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간단히 몇 작품만 이야기하면, 에이즈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푸른알약> 산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 ‘다니구치 지로’의 <신들의 봉우리>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 이야기 한 ‘아트 슈피겔만’의 <쥐> 고전을 새롭게 풀어냈던 ‘고우영’의 <가루지기> 냉전 시대와 정치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한 ‘앨런무어’의 < 왓치맨> 영원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츠카 오사무’의 <불새> 등등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작품들이 너무도 많다. 이 두 가지 이유로 글을 마무리 짓는 것은 너무 싱거우니, 오늘은 여기에 ‘신뢰’라는 양념을 더해 보자.
‘바스티앙 비베스’는 단순히 그의 이력만으로도 관심을 가질만한 작가이다. 1984년 생. 프랑스의 작가겸 삽화가. 『염소의 맛 Le Gout du chlore』으로 2009년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올해의 발견작가> 상 수상. 가디언지의 <2011년 7월의 그래픽 노블> 선정. 『 폴리나』로 만화 비평가협회 대상(2011년 12월 5일), 2011년 만화 전문 서점상, 「르푸앙」 선정 2011년 올해의 책 20선, 「르푸앙」 만화상 최종 후보, RTL 방송 문학상 최종 후보, 2012년 앙굴 렘 국제만화 페스티벌 최우수 앨범 상 후보. 그러나 단순히 이런 정보들이 그의 작품을 살펴보는 계기를 만들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여기에 우리는 ‘신뢰’라는 하나의 양념을 더하려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exxx는 오늘 내일 중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을 볼 예정이다. 이는 의무감이 아니라 전적으로 표지를 맡은 지인님의 선택을 신뢰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간이리를 아껴주시는 여러분들도 우리를 믿고 ‘바스티앙 비베스’를 놓치 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뢰’는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국내 번역 출시된 작품 목록 - 그녀(들) - 염소의 맛 - 사랑은 혈투 - 폴리나 - 로또 맞은 여대생 1
그림을 맡은 지인님의 블로그 : www.freshdrawing.blogspot.com 글. exxx 그림. 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