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비밀 안(not)스러운 생활 / 사진. 글. beamil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윤동주 / 글. 사진. 고수진 환타지와 모순의 조우 (遭遇): 영화로 읽는 時空間 (시공간) / 글. 곡주대비 흔적도감 / 글. 그림. 왼손이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0,0,0 / 글.그림. Night Planet 독후소설 / 그림. 황은정 글. 김종소리 부산 오뎅 이야기 / 글. odeng INTO THE JAZZ / 글. 사진. 이상준 바다비 일요시극장 광고 봄 소풍 추천 / 글. 사진. exxx 양영순 / 글. 그림. 지인
5월 입니다. 어린이날 있고, 어버이날 있고, 스승의 날도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도 있고요. 왜 이렇게 5월에 날들이 많은지 모르겠지 만 얼핏 생각해 보면 날씨 따뜻하니 주변 사람들도 생각하면서 살 아라.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꽃도 벌써 한 번은 피고 지고 나무 순도 다 올라왔으니, 어지간한 즐거움은 다 한번씩 차고 진 셈입니다. 조금 있으면 덥다고 주변 사 람들에게 짜증내는 날이 오겠죠. 마치 지난해 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나쁜 고리들을 끊어야 합니다. 약간의 희생이 없 이는 불가하기도 하고요. 이번 달에는 먼저 사과하는 여유를 가져 보는건 어떨까 합니다. 그렇다고 ‘막’ 당하고 사시지는 말고 들이 받아야 할 때는 받으셔 야 합니다. 다만 그 상대가 가능하면 크고 또 커서 평소에 겁먹어 왔던 상대이길 바랍니다. 바보처럼 감기에 걸린 채로 쓰기엔 우스운 말이지만 5월은 옷이 없 어도 지낼 수 있는 계절입니다. 상실을 메우시고 큰 상대와 싸우는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이번달에는 고수진님의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이 새롭게 시 작되었습니다. 더욱 다양하고 재미있는 잡지가 될 수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5 18 민주화 운동도 잊지 않으시길 바라며 물러갑니다.
월간이리의 공식 트위터는 @postyri 이고 온라인 페이지는 postyri.blogspot.com 입니다. 이곳에서는 컬러 PDF 파일과 바로보기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비밀안( not)스러운생활 2013 MAY 16 22:24
2 16:22
9 13:13
9 21:19
22 19:42
벌써 월간이리 다섯번째 기고. 이제 더이상의 불친절한 고민은 버리고 사진에 적합한 이야기, 개인적이고도 객관적인 이야기로 다가가려 한다. 얼굴이 먼저 떠오르 면 보고싶은 사람이고 이름이 먼저 떠오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터넷 속 짧은 글을 보고 어떤 얼굴과 어떤 이름들을 생각해 본다. 아주 오랜만에. (-----.) 억지 짬을 내어 생각해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게 옛 연인이고 옛 친구고, 그런 사람들이라니 참 애달프더라. 그 기억속엔 자주 가던 닭 볶음탕집 할매도 있다.
22 16:51
15 11:49
9 15:38
1 20:54
{beamil}
그 할매를 떠올리니 함께 가던 사람들이 또 떠오른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 군중들 속에서, 일 속에서 완전히 외로워지는 순간이 왔을 때 떠올려 보는 것. 그 이름, 그 얼굴들. 그렇게 하나, 둘 안부를 묻는다. 꽉 찬 아이폰 달력 속 그 얼굴들. 고맙다. (이번 호 사진 속 사람들은 얼굴이 없습니다. 오직 소녀의 얼굴만이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있지요.) *Android, i-Phone APP ‘인스타그램’의 필터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들만 실어요.
페이지가 있다면 즐겨찾기로 저장한다. 1-1-2-2-1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면) 그냥 가격을 알았 다는 사실 자체로 끝.
1-1-2-2-2 (가격이 적정하다 생각들면) 집에 걸어놓을 수 있는 건지 생각해본다.
1-1-2-2-2-1 (집에 걸어놓으면 좋겠다 싶으면) 나중에 전시가 있을때마다 가격을 챙겨본다. 그리고 집에 걸어 놓는 상상을 한다.
1-1-2-2-2-2 (집에 걸어놓기에는 선뜻 상상이 되지 않 을때) 그냥 머... 보는걸로 만족한다.
1-2. (딱히..시선을 끌지 못하면) 얼른 다음 건물로 구 경간다.
전문지가 아니면서도 GQ와 함께 가장 미술과 디자인을
진지하게 다루는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는 미술 컬렉터
의 집을 자주 다룬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위에 말한 상 상놀이에 조금 더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머릿속 그리고 상상
갤러리에 들어가 미술품 앞에 서는 첫 10초 동안 머릿속
그리고 나와 좋아하는 성향이 비슷한 취향의 컬렉터의
집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괜히 친한 친구인양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선뜻 공감가지 않는 그림을 걸어 놓는 사람들도 보는 경우가 왕왕 있긴 하지만 말이다.
에는 대략 이런 생각이 흘러가는 것 같다.
내가 그리는 방은 우연히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 이 이미지에 시선이 끌리나?
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사무실이었다.
에서 메릴 스트립이 카리스마를 분출하며 연기한 패션잡
1-1. (시선이 3초 이상 머무르면)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
흑백 패션사진이 검은색 액자에 정갈히 걸려있는 하얀
1-1-1. (아는 작가와 이미지가 비슷하면) 기존작가와 비
는 그런 방이었다.
와 비슷해서 인가 아니면 새롭기 때문인가?
교해본다. 시선과 미세한 표현방식 등등. 내가 아는 비
색 방. 그리고 훤칠하게 밖이 내다보이는 큰 창문이 있
교할만한 작가와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다 싶으면 좀 보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각자 자신이 살고 싶은 집에 대
을 먼저 했는지 찾아본다. 검색할 때 기존작가와 막 발견
얀색으로 온 사방이 창문이 있는 방이 있었으면 좋다고
다 나온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 누가 이런 종류의 작업 한 작가의 이름을 동시에 입력하여 검색하면 이 둘의 관 계(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등)를 밝힐 수 있다.
1-1-2 (전혀 새로운 이미지 이면) 이런 경우를 득템이 라고 한다. 역시 이름을 적어가지고 와서 홈페이지나 경 매사이트 등에서 트랙레코드를 살펴본다. 그리고 제일 맘에 드는 작업의 가격도 한번 물어본다.
1-1-2-1-1 (집에서 찾아봤는데 내가 몰랐던 영향력있 는 작가다!) 뿌듯함을 만끽하면서 구름위를 걷는다.
1-1-2-1-2 (집에서 찾아봤는데 루키 또는 알려지지 않
은 작가다) 좋아하는 작가군을 넓혔다는데 만족하며 웹
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내는 기둥하나 없이 하 했고, 벽돌집을 좋아했던 나는 처음에는 편집증적 정신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었다. 데이트 단계까지
는 아니었던 당시 상황에서 ‘얘랑은 결혼하면 안되겠 군’ 했었는데 지금 결혼하고 보니 나도 그런 방이 참 시원하
고 좋아 보일거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좀 영향을 받았나 보다.
아무튼 상상력을 키워 정말 꿈꾸는 집에 갔을 때 걸어놓 고 싶은 그림을 골라봤다. 아휴 상상만 해도 즐겁다.
회사 옆 미술관 강세기
1. 김상길 김상길은 조용히 꾸준히 진화하는 작가라 생각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가이다. 미장센, 유형학, 포트레이트 등 최근 동시대 사진에서 주목받았던 기법을 단순 흉 내 내는데 그치지 않고 기술적으로 많은 공을 들여 자신만의 느낌을 내는 몇 안 되는 작가이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작업에 대한 나름의 생각의 틀을 구축하고 거기에 맞게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작업은 따라서 예측하
기 쉽지만 새로운 작품이 나왔을 경우 다음 작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크게 배가시킨다. 기존의 작업을 통해 스타일 을 인지했어도 어떤 사물을 다룰지, 그리고 그 생각의 틀이 어느 방향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오륙년 전인가 한창 공간 사진(공식적인 정의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우리가 사는 공간 또는 건물 등의 외관을 담은
사진)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형학적 사진이네, 공간 사진이네 등등해서 김상길도 그 분류에 하나로 들어갔는데 계속 그의 작업을 보면 결코 한쪽 장르에 규정할 수 없는 아티스트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딱 그와 같이 생긴 사람이 회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아는 척하고 싸인을 못 받은 것이 다. 그가 그인지도 물어보지 못하고 빨리 회사에 가느라 지나친 게 아쉽다.
아무튼 그의 사진을 걸려면 집이 아주 넓어야 한다. 사진이 2미터는 기본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1천 만원은 기본 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모양새도 보면 딱히 걸어놓데가 있을랑가 모르겠다. 만약에 걸어놓는다면...음. 사실 집에 걸
어두라면 딱히 장소는 없다. 워낙에 압도적으로 큰 사진 크기와 이미지가 주는 무감정적인 모습? 좋게 말하면 엄청 쿨해보이는데 나쁘게 말하면 ‘완존 밥맛 상실’한다. 그래서 밥 먹는데 걸기에도 그렇고, 애기들 방에 걸어두기도... 우리 회사 회장이 된다면 회의실에 걸어두거나 아니면 집에 들어오는 통로에 걸어놓고 싶다.
* 참고로 그에 대한 비평은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인 코리아’에 잘 나와있다. * http://blog.daum.net/real-time/
김상길 2. 뉴요커의 2001년 9/11표지 시사주간지의 표지는 때로 어떤 미술작품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그 중에서 군계일학을 꼽으라면 단연 2000년 9/11테러 직후 발행한 뉴요커의 표지다. 작가마다 특징은 모두 다르지만 뉴요커의 일러스트와 표지 디자인은 그냥 잡지에서 오려다 액자로 넣어도 될 정도 로 뉴욕 특유의 경쾌함을 세련되게 표현한다.
그러나 테러참사 직후 발행된 그 표지는 시꺼먼 바탕에 잡지 제호만 흰 글씨로 쓰여 있었다. 자세히 보면 쌍둥이 빌 딩을 암시하는 건물 두 채가 희미하게 새겨져있다.
테러 직후 미국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초대받아 갔던 미국 교수님 집에 이 잡지가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당
시 유색인종으로 괜한 눈치를 없지 않게 보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에 만난 그 잡지 표지는 당시 내가 미국사회에 느 꼈던 그 침울했던 분위기를 그 어떤 문장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후 돌아와 집에 정말 걸어놓고 싶어서 뉴요커 사이트를 뒤졌지만 막상 사려고 하니 사이트에서 판매를 하지 않 았다.
* 뉴요커는 잡지 캐리커쳐와 표지 등을 프린트해서 판매하고 있다. 가격은 좀 비싸긴 하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쏠 쏠하다.
* http://www.newyorkerstore.com/
kangjoseph.tistory.com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 윤동주
글, 사진 고수진(gomin19@hanmail.net)
나는 중, 고등학생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학원 강사이다. 고등학생들도 아는 문학작품을 우리 어른들은 점차 잊고 지내며 살고 있다. 5월부터 함께 할 이 공간은 책 읽기보다는 스마트 폰에 빠져 사는 우리들을 위해 가볍게 문학작품들을 소개하고 ‘아, 한 번 쯤 찾아 읽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마련되었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첫 시간 함께 해 보자.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때 시인이었으며 자아성찰의 시를 썼던 시인으로만 기억된다. 그리고 그의 자아성찰은
늘
부끄러움을
수반한다.
이
부끄러움이란
현실적인 문맥에서 이해하자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성의 결여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등학생들에게 올바른 실천의 길,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들의 행보를 설명하기 위한 주제로 10여년간 ‘서시’와 ‘쉽게 씌여진 시’를 당신은 윤동주의 시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실어 놓고 ‘윤동주=부끄러움의 미학’ 이라는 공식을 토해내고 말았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란 윤동주의 삶과 시를 지탱해주는 근원적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계기이자 그의 시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그러나 이렇게 그의 시를 ‘부끄러움의 미학’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맙소사. 고등학생들에게 저렇게 가르쳐놓은 현재 교과서가 정말 부끄럽다.
그리하여 오늘 첫 시간은 학창시절 우리가 배웠던 윤동주의 그 유명한 ‘서시’, ‘쉽게 씌여진 시’를 제쳐두고 그가 23살, 청춘의 한 가운데에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을 때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라고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골라 보았다. 그의 시 세계는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서정적이다.
소년 윤동주
여기저기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소년의 사춘기적 애상의 감정이 담겨있는 이 시는 막 봄의 절정을 맞이한 우리에게 다소 와 닿지 않은 가을의 계절감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과감히 이 작품을 5월의 첫 수업의 주제로 정했다.
사랑, 이 화두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이 없다. 끊임없이 우리를 들었다 놨다하고, 사랑이 끝난 이들에겐 수많은 밤, ‘자니?’ 혹은 ‘잘 지내고 있니?’를 보낼까 말까 번민과 후회를 남기게 하는 것. 윤동주가 보여주는 ‘소년’이란 시가 얘기해주는 사랑은 참 절묘하고 서글프기까지 하다.
사랑의 끝은 늘 이별이다. 슬플 수밖에 없는 것, 영원함과는 거리가 있는 그 서글프지만 아찔한 사랑의 감정을 윤동주는 ‘ 소년’을 통해 투명하고 청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준호야 미안, 윤동주시는 이렇게 지루하지 않은데.. ㅈ..ㅈ...자...ㅏ...자니?)
필자도 얼마 전 아주 상큼하게 뻥 차였었다. 벚꽃을 함께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넌 말 잘 통하는 귀여운 동생이야. 앞으로도 그럴꺼고’ 라는 아주 진부한 멘트와 함께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패션계는 냉정해서 진부한 디자인은 런웨이를 떠나야 한다는데 도대체 저따위
멘트들은 언제쯤 참신해질까?
집에 돌아오는 새벽길은 정말 한 마디로 제기랄, 이었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고, 잊을 수 없는 29살의 생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3개월 전 취미로 기타를 배우며 만난 기타 선생님이었다.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시간들은 어느새 설레게 갔다가 집에 오는 길은 공허했고, 뭘 입고 가야하지, 뭘 좋아 할까? 이상형은 누굴까? 의 시간이 되었고 한 시간 조금 넘는 수업을 위해 일주일을 투자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 돈 내고 듣는 수업에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회의감이 들 때 쯤 나는 결국 밥상을 뒤엎고 말았다.
짝사랑도 똑똑한 사람이 잘한다. 나같이 앉아서 글자만 팠던 사람은 밀당이 무엇이랴, 식당에서 메뉴도 못 고르는데. 결국 결코 여자가 먼저 해서는 안 된다는 고백을 젊음의 용기로 무장하여 날려버렸고 보기 좋게 엔딩을 맞이했다. 기타라도 건져야 했는데 어설프게 배우다 끝났으니 이도저도 안 되는 실력이 되어버렸다. 결국 취미도 놓쳐버렸다.
먼지가 점차 쌓여간다. 또 하루 멀어져 가는 나의 취미여.
나만 이런 경험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이
소년의 부끄러움으로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새로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 중 누군가도 자다가 이불 속에서
계절이 시작되기 전 각자의 애틋한 기억을 꺼내어 놓고
아 부끌부끌햇! 덮고 있던 이불을 하이킥하고 싶은
위로받고 위로해 보자.
고백의 기억이 있지 않을까나? 그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불교철학자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말했다.
(실은 내가 차이고 이 시를 읽고 참 감명을 받았더란다.)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자 다시 한 번 가장 절정의 구절을 쪼개서 읽어 보자.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인연의 마주침으로 생긴 근사한 추억들. 오래된 영화를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좋아했던 것, 같은 음악을 좋아했던 것, 사소한 농담에도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하늘 구석구석 퍼지던 서로의 웃음소리. 슬픈얼굴로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다가오든 따뜻한 얼굴로 다가오든 결굴 지난 추억을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되새기게 하는 게 사랑이다. 그리고 그 추억에 우리들은 웃었고 부끄러워했다. 이렇게 우리들은 모두 윤동주처럼
하루하루 소년의 마음에는 소녀가 점점 크게 자리
부끄러움의 미학을 품고 사는 문학가들이 아닌가. 이게
잡는다. 그리고 소년은 깨닫는다. 보고 싶은 소녀, 아,
내가 이 시를 첫 수업 주제로 정한 이유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구나. 소년은 사랑하는 소녀의 얼굴이
-
떠올라 주체할 수 없는 격정적인 감정에 두 눈을 감고 만다.
벌써 옷이 얇아지고 있다. 광합성을 하듯 햇볕을 쬐러 나가자.
사랑을 하는 청춘의 볼은 상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뀌는 계절이 기다려지는 것은
설렘과 아름다움을 붉은 단풍잎과 푸른 하늘의 시각적
아마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감일 것이다.
대조로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상기된 따뜻한 볼을
아름다운 그들의 얼굴 속에서 광합성을 즐겨보자.
쓸어내면 소녀의 얼굴이 손바닥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 사랑처럼 슬픈 얼굴’이란 표현은 참으로 절묘하다.
다음시간에는 30년대 모더니스트 세련미 철철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도시남자의 감각이 살아있는 박태원의
감정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바로, 지금, 여기가 중요한
소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뜯어보자.
것이지 그 이후가 어찌되었든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순간은 절실했으며 당신이란 존재를 그 수많은 인연들
지각하면 보강이다.
중에 알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 시는 사랑의 종착지가 슬프다 만을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그 순간의 황홀함마저도 품고 있는 사랑의 양면성을
참고서적: 나가르주나 『중론』
영화로 보는 시공간
비교 분석 두번째 이야기: 영화로 재현되는 한국의 여귀 와 서양의 유령으로 보는 ‘부재’에 관한 통찰 한국 고전문학이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귀에 관해 서는 필자가 몇 달 전 연재글에서 잠시 언급한 적 이 있다. 사실 공포라는 장르는 필자의 석사 논문을 위해서 2년이나 바쳤던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지만, 많 은 영화 학도들이 한번쯤은 달려들게 (?) 되는 매력적인 분야이다. 특히 공포물을 구성하는 골자인 공포 의 주체, 즉, 괴물이나 귀신, 혹은 유령 같은 존재는 어느 나라의 고전 이야기 혹은 전설에서 반드시 등장 하는 중추적인 요소이다.
지난 글에서 지적 하였듯 로빈 우드 라는 영화 학자는 이러한 공포의 대상은 각 나라의 사회에서 가장 억 압받는 계층이 괴물화 되어 영화로 재현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 하였는데, 이를 사실이라고 추정을 한다 면,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여귀로서, 서양은 무엇이 무엇으로 재현된다고 떠올려 볼수 있을까? 이번 호 에서는 서양 공포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드라큐라나 연쇄살인범등의 공포 대상을 한국 공포물의 여귀와 비 교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한국 괴기물에 대해 글을 썼던 백문임 교수는, 그녀의 저서 여귀로 읽는 한국공포영화사 에서, 한 국 여자 귀신들이 종종 사또에게 자신들의 한을 하소연 하기 위해 밤마다 등장하는 것이 현생에서 억압되 는 여성들의 입과 귀를 상징적으로 죽은 혼령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녀는 또한 우 리나라 귀신들이 종종 울음이 아닌, 웃음소리로 공포를 가중화 것 에 대해서 “평범한 인간들이 지르는 비 명과 대조를 이루면서 이제 여귀가 우월하고 능동 적인 위치로 옮겨갔음을 공표하는 동시에 공포영화라는 장르가 공공 영역에 청각장을 여성의 웃음소리로 메우는 유일한 장르임을 표명하는 것 이다” 라고 기술하 였다. 따라서 이는 여성의 웃음소리는 사회적으로 ‘적절치 못한 것’ 이며 이는 공포영화에서 공포의 대상 으로나 표현될 수 있다라는 역설이 된다.
그렇다면 여귀는 억압된 여성들의 그들이 생전에 듣지 못하고 하지 못한 ‘소통’ 을 하기 위해 죽어서 라도 돌아오는데, 서양의 귀신들은 무엇 때문에 돌아오는가.
서양 공포물, 그 중에서도 미국 호러 장르중 가장 흔한 연쇄살인마를 예로 들어 보자. 다수의 미국 호러 물 에서 살인마는 성 정체성이 불분명 한 남성이며 (양들의 침묵, 13일의 금요일, 할로윈) 백인인 경우가 많 고 그의 희생양 역시 유색 인종 보다는 같은 백인, 특히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호모섹슈얼리티 에 대한 청교도적인 강한 부정과 남성중심의 가부장 적인 시선이 성적으로 모호한 살인마가 여성을 남근 상징적인 무기로 처단한다는 내용으로 다소 간단히 은유된다고 할수 있겠는데, 그렇다 하면, 유색인종이 아닌 백인이 살인마로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리처드 다이어나 호미 바바 같은 학자들은 미디어의 인종 차별이 특정 인종에 대한 부정적인 스테레오 타 입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장 극단 적인 방법은 negation, 즉 부정, 혹은 부재화 에서 나타난다고 지적 하였다. 70, 80년대 호러물의 전성기에서 흑인이나 다른 유색 인종들은 범인으로도 희생양으로도 등장하
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귀환’ 하여 하소연 할 수 조차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너무 극 단적인 시선을 제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흑인 캐릭터가 드라큐라나 연쇄 살인범, 혹은 희생자 역 할이라도 등장하게 된 것은 90년대 이후 Scream, Scary Movie series, Blade혹은 TV 시리즈 물에서 시 작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다소 쌩뚱 맞지만 <두개의 문>과 <지슬> 이라는 독립영화 두 편에 대해 생각해 보 았다. 이미 관람한 독자들이라면 어떤 주제를 다룬 영화들인지 인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 두 편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되는 대중들이 용산 참사와 제주도 학살 사건에 대해서 생각이라도 해보게 되었 을까. 몇 해 전 영화 전공 초반에 들었던 토의 수업에서 어떤 그룹이든 부정적인 시선이라도 표현이 되는 것 이 나은지, 혹은 아예 표현이 되지 않아 존재 조차 불분명 한 것이 나은지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 이 있 다. 대부분 유색인종에 관한 의견들이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란 나라처럼 인종 적인 이슈가 중추적이진 않 지만 그 못지 않게 굵고 깊은 역사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된 지 모른 채 매장 – ‘부재화’ – 되고 있지 않 은가. 영화를 전공하게 되면서 수많은 영화들을 ‘읽어내기’ 시작하며 가장 역설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수많 은 ‘부재’들 때문에 보이는 즐거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귀들이 죽어서야 비로소 사또에게 자신의 한을 고할 수 있듯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집단들이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되고, 혹 은 더 많은 집단들이 과거 서양공포물의 유색인종 캐릭터들 처럼 부재화 되고 있음이 세상을 반영하는 대 중 문화의 아이러니가 되어버렸다.
공포물의 귀신들 이야기가 다소 추상적으로 되어버렸지만, 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꼭 당부 하고 싶 은 것은 행간을 읽는 것은 책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인용하였던 영화 학자 로빈 우드가 지적 했듯, reading against the grain, 즉 보이지 않는 혹은 보여짐을 거부 당하는 현실을 읽어내는 것이 영화 관객들 의 진정한 권리 행사 일 것 이다. 글. 곡주대비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0,0,0>
야행성Night Planet
twitter : @hitchhiker_j
* 스케일 왜곡이 상당합니다
“대한민국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는데, 크기나 구체적인 배치는 차이가 있어도 아마 구성이나 전체적인 구조는 이 집이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두번째 집>
1995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가족은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 했다. 새 집은 엄마, 아빠의 직장이자 우리 가족의 집이었던 꽃가게와는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집과 꽃가게를 오갈 때 마치 구 도시와 신도시의 경계를 통과하듯 ‘고가’를 넘으면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포도마을, 보람마을, 꿈마을 등으로 이름 붙여진 아파트들은 단지 단위로 서로 다른 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처음 찾아온 손님들도 아파트 색만 말해주면 쉽게 집에 찾아 왔지만 밤이 되면 아파트 색을 구분할 수 없는데다 어딜 가도 거리풍경이 비슷해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이웃의 개념도 좀 달라졌는데, 한 라인에 살고 있던 사람들까지를 이웃으로 봐야 하는 건지, 한 동까지는 그래도 이웃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교류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웃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마주보고 있던 앞집 정도였고, 한 건물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모르고 산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사오기 전에는 만약 누군가와 함께 동네를 걷다가 아무 집이나 찍어가며 “이 집 사람들은 어때?” 하고 묻는다면 “이 집에는 동생이 은행장인 아저씨가 혼자 사는데 늘 메리야스 차림으로 집에 있거든. 화장이 짙은 아가씨들이 자주 드나들어.“ 라던지 “저 집 언니는 우리 언니랑 동갑인데 아주 쌀쌀맞아.” 라고 설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여기선 달랐다.
이웃이나 동네를 어디까지로 생각해야 할지도 막막 했고, 새로 이사 왔으니 서로를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것 외에는 서로 사귈 기회가 없었다. 사람들은 개인 공간인 집을 나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개인 공간인 자신들의 차로 들어가버렸고, 아이들은 왜 그런지 길에서 사라졌다. 아파트 단지 안에 수목공간이나 놀이터가 조성되어 있긴 했지만 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니면 학원 때문에 바빴는지 놀이터는 한가로웠다. 가끔 아파트 단지 안으로 야채나 해산물, 옷가지 등을 파는 트럭들이 몰려와서 ‘반짝 시장’이 생겨날 때가 있었는데, 무채색의 아파트 단지가 다채롭게 빛나는 유일한 기억이다.
“거대 주차장에 집 짓고 사는거 같아”
밋밋한 기억만 가득한 집 밖과는 달리, 집 안은 정말 굉장했다. 평평한 벽과 천장, 바닥,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들 하며, 거실은 물론 각 방마다 큼직한 창들. 아빠가 지은 집에선 없던 요소들이다.
당시에 비슷한 시기에 입주한 집들 사이에서 베란다 확장이 엄청난 화두였는데, 우리 집도 엘리베 이터에 붙어 있던 베란다 확장 공사업체의 광고전단을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다. 저평형대의 아파트에서 폭 1.2m-1.5m의 공간을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건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지만 곧 베란다 확장이 구조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뉴스와 불법확장 단속 관련 기사 등을 보고는 마음을 접 었었다. 요즘이야 베란다 확장이 제재를 가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보편화 돼서, 건축하는 사람들도 이미 확장을 염두하고 아파트를 설계 하지만 그렇게 확장된 공간이 외부와 직접 만나면서 생기는 단열과 결로문제를 생각하면 공간 넓게 쓰고 싶은 욕심은 버리는 게 낫지 않나 싶다.
베란다 확장은 포기했어도 꽃가게는 뒤에 있던 살림집을 헐고 확장했다. 언니랑 나는 다니던 학교를 전학 없이 다녔기 때문에 아침마다 온 가족이 한 차로 출근, 등교했다가 저녁에는 각자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이어졌다. 달라진 생활 환경이 생활 주기에 영향을 미쳤고, 각자의 리듬은 달라졌지만 아침밥은 꼭 함께 먹었다. 모두에게 방이 생겼지만 방문을 닫고 지내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주말 저녁이면 외식을 하고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거실에 누워 함께 드라마를 봤다. 지금의 내가 그리워 하며 살게 될 줄 몰랐던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했던 풍경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 근처의 중학교로 진학 하자 엉겁결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부모님은 하루 12시간 이상을 꽃가게에서 보내셨고, 우리를 세심하게 챙기고 돌보는 대신, 열심히 사는 것으로,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수 있도록 키우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런 부모님에게 언니는 챔피언 벨트 같은 존재였다. 과외 한번 안하고도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던 만큼 학원이나 독서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 밥을 챙겨 먹고, 학원에 다녀와 혼자 TV 를 보며 부모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부모님의 관심의 울타리가 느슨해 지자 또래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학원을 빠지면서 거짓말을 했고, 부쩍 술에 취한 날이 잦아진 아빠가 귀찮아서 부모님 귀가 시간에 맞춰 방에 들어가 자는 척을 하곤 했다. 한 방에서 먹고 자던 시절은 금새 잊혀졌고, 서로를 피해 각자의 방으로 숨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 틈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지만 아파트에 살았던 건 이 때의 4년이 전부다. 우리 가족의 균열을 단순히 주거 환경의 변화 탓이라 말한다면 아파트도 억울한 면이 있겠지만 여전히 애먼 아파트를 미워하고 있다.
“창문이라도 집에 사는 사람 마음대로 낼 수 있다면 어떨까?”
- 이 달의 선정 도서 『너 좋아한 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 김영준 역, 미메시스, 2012 제목부터 거짓말이다. 주인공을 비롯해서 주변의 친구들까지. 모두 들 어딘가 꼬여있다.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줄 모르고, 제대로 받을 줄도 모른다. 어딘가 꼬인 게 아니라, 단지 할 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전달하지도, 받지도 못하니 일은 꼬이기만 한다. 문 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푸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 인데, 이들은 솔직해지지도 못한다. 단지 이들이 어리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일까? 스스로 신념이라 믿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일까? 어쩌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망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계를 만들면 결국 상처를 받는다. 그렇기 에 깊은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결국 그것이 본 심이 돼버린다. 그렇지만 그렇게 가려진 것이 본심이 될 수 있는 것 일까?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아쉽 게도 이 만화는 그런 모습까지 보여주진 않는다. 그래서 답답하다. 읽으면서 피식거리며 비웃기도 했다. 어딘가 꼬인 사람을 표현하는 데 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런 인물들의 행 동에 내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기도 했다.
진심을 알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혹은 진심을 몰라서 솔직하지 못한, 그런 상황.
- 50 그녀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다. 내용인즉, 그녀가 지금껏 잠자리를 함께한 남자가 50명에 육박한다는 것 이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당연히 거짓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라. 이제 갓 20살이 된 여자아이가 50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니… 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이 꼭 거짓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명이랄지, 90명, 80 명이면 절대 믿지 못하겠는데, 50명이라고 하니, 어딘가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따져보자. 일주 일에 한 명의 남자와 잔다고 쳤을 때, 50주. 1년이 약 52주니까, 1년이면 가능하다.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가 불법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건 성인이 미성년자와 잘 때의 이야기이고, 미성년자가 미성년자와 잔다 면 그건 불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19살 때부터 꾸준히 일주일에 한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고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물론 일주일마다 꼬박꼬박, 그것도 남자를 바꿔가며 잠자리를 가진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무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기간을 1년이 아니라 2년, 3년까지 늘린다면? 아니다. 요즘은 발육이든 뭐든 간에 빠르니까, 첫 경험을 16살이라고 가정한다면, 4년 동안 50명의 남자 와 잔 꼴이 된다.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어쨌든, 생각만 해서는 그녀가 50명이랑 잤는지 100명이랑 잤는지 절대 알 수 없었다. 직접 그녀에게 묻고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다 짜고짜 몇 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냐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대신 그녀와 내가 함께 알 고 있는 남자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기 시작했다. “저기 말인데. 최근에 섹스 언제 했어?” 이런 식의 접근이었는데, 이런 질문을 하면, 최근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남자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물 론 여자친구가 있는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여자친구가 없는 경우라면 거의 대부분 스스로 신나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개 이런 식이다. “얼마 전에 클럽에 갔다가 여자를 만났는데, 걔랑 잤어. 가슴이 너무 작아서 별로였는데, 아, 무슨 남자 도 아니고…. 아무튼 걔랑 잔 거? 그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텔에 서 나왔어. 또 하고 싶진 않더라고.” 그런 식의 이야기를 들은 뒤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난 저번에 걔랑 잤는데. 얘기 들어보니까 걔 50명이랑 잤다는 것 같더라? 설마 너도 잤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질문을 받은 주변 남자들 중 그녀와 잤다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다들 ‘진짜? 50명? 걔 이제 겨우 20살 아니야?’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소문이 거짓일 거란 쪽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거짓일 거란 쪽으로 생각이 기울긴 했지만, 그렇 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진실을 알기 위해선 그녀에게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코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10살이나 어린 여자애한테 전화를 걸어서, ‘너 정말 50명 이랑 잤니?’라고 묻는 건 미친놈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나는 애써 궁금증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우선 동호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녀는 꽤 열성적인 회원이었 고, 동호회 카페에 접속하거나 모임에 나간다면 100퍼센트 그녀와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 다시금 궁금증은 커질 것이었다. 동호회에 발길을 끊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친구들에게서 요즘 왜 동호회에 발길이 뜸하냐는 연 락이 왔다. 나는 그저 회사 일이 바빠서, 라고 대충 둘러댔다. 자전거 따위, 같이 타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물론 친구들에게 핑계를 대기 위해서 한 말이긴 했지만 실제로 회사 업무가 늘어나기도 했다. 갑자기 동 기 하나가 회사를 관두는 바람에 그 친구의 일까지 내가 맡아서 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회사 일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점심을 먹을 땐, 무엇을 먹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가 면서는 자기 전까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인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자 그녀에 대한 내 궁금증은 마치 궁금해 한 적도 없다는 듯이 깨끗하 게 사라져버렸다. 궁금증이 사라지니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동호회에서 만난 인 연이란 것이 그러하듯, 그저 적당한 관계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핸드폰에 뜬 그녀의 이름을 보는 순간, 새까 맣게 잊고 있던 그녀와 50명의 남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흥 분을 가라앉히며 사무실 밖으로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분홍인데요.” 분홍. 그녀의 이름은 분홍. 확실히 젊은 부모가 지은 이름이라 그런지 세련된 느낌이었다. 내 이름은 덕형. 김덕형. 촌스럽기 그지없다. “네. 어쩐 일이세요?” “카페랑 모임에 통 안 보이시길래요. 요즘 바쁘세요?” “아, 네. 회사 일이 바빠서요.” “친구 분들은 매주 꼬박꼬박 나오시는데, 덕형 씨만 안 나오시니까,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해서 전 화해봤어요.” “아, 그러셨군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별 일 없으시면, 이번 주말엔 나오세요. 같이 자전거 타요.” 나는 화가 났다. 50명의 남자와 뒹군 노하우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확 물어볼까 하다가 겨우 참았다. 통화를 마친 뒤, 사무실로 들어가, 다시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머릿속엔 하나의 수식만이 가 득 채워졌다. 50+1.
부산오뎅 이야기 (응답하라 1995)
1995년 이맘때였나보다 20대 초반의 꽃미남 돋던 그시절, 나는 친구와 4대4미팅에 나섰다. 장소는 카페도 아니고 빵집도 아니 고 고기집도 아니고 밥집도 레스토랑도 아닌.. 소주 노래방이었다. 주선자와 주선자친구 포함 우리는 총10명이 한방에 들어갔다. 일단 주문을 한다 안주는 숙녀들에게 주 문을 하게하고 술은 돈 없는 20대 초반이기에 당연히 소주. 그런데 병당가격보다 한 박스를 시키면 싸 다는 문구를 보고서는 싸서 시키는 게 아닌 뭐 어차피 먹다보면 한 박스 정도 마시지 않겠냐며 절대 돈 이 없어서 한 박스를 시키는 게 아니라는 인상을 주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 소주 한 박스를 시킨다. 술 과 안주가 들어오자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잔씩 마시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우리는 백수 직장인 공무원 시험을 앞둔 친구 갓 군대를 전역해서 취업전선에 뛰어 들어야 되는 친구
다양한 직업군 이었지만 그녀들은 4명 모두 나레이터 모델이었다. 요즘이야 나레이터라는 일이 꼭 모델이 아니어도 하지만 그 당시 나레이터 모델이라 하면 지금의 레 이싱모델과 도찐개찐 이었다. 우리는 그녀들의 나이를 묻고는 부산스타일로 바로 오빠동생을 먹었다. 하지만 서울출신인 나는 그녀들에게 자리가 끝날 때까지 격식(?)을 갖추고 꼬박꼬박 존대말을쓴다. 일단 혼자서 호감점수로 별하나를 획득 하였다. 그 중에 제일 예쁜 1호 여성이 서울이 고향이라는 공 통점을 발견하곤 소주노래방의 메시로 빙의하여 그 친구를 향해 돌진. “저 서울 봉천동에서 5살까지 살았어요. 아! 진짜요?” 친구들에게 서울말 쓴다고 재수 없다며 한소리를 듣는다. 나머지 2호 3호 4호 여성들도 우리의 얘기를 들으며 남자 2,3,4호와 호감도 측정을 하기 시작한다. TV에서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김기훈 채지 훈등의 결승전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남자2,3,4호는 저거 이미 결과 나온건데 봐서 뭐하냐 어쩌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와중에 남자 1호인 나는 쇼트트랙의 룰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하며 별 두개를 획득한다. 그러는 와중에 소주는 계 속 주거니 받거니 하며 10병을 넘어 20병에 가까워 졌다. 거기서 낙오를 하고 바닥에 뻗어버린 남자4호.. 오직 승리자만을 원하는지 그녀들은 우리에게 무차별 오빠 짠을 외쳤다. 25병에 가까워오자 남자 2,3호는 이제 그만 가자고하고 나도 정신력의 한계가 왔는지 몸과 정신이 분리되기 일보직전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끝까지 매너 남의 모드를 유지하고 행여나 방안에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화장실로 가서 소주7병정도를 마셔 부 푼 나의 속을 비운다. 이미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고.... 그때 나를 걱정하며 나타나선 나의 등을 토닥이는 나이팅게일같이 화사하게 나타난 여자1호...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신데 저한테 이러시냐며 이러지 마시라며 여자화장실로 가세요 아줌마라고 하며 나이팅게일의 손길을 거부한다. 나의 그 모습에 그녀는 실망감을 가득안고 먼저 자리를 떴다는 슬픈 소식을 방안의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 이젠 소주30병을 먹고 싶어서가아니라 환불이 되지 않기에 돈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다 먹은 남자2,3,4
호는 서로에게 의지를 하며 여자 2,3,4호는 안중에 없는 듯 먼저 떠나갔다. 그러자 여자2,3,4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시선을 나에게 나는 무주공산에 홀로 서있었다. 여자 2,3호가 싸우기 시작한다. 너는 남자2호 좋다고 하지 않았냐 아니다 맞다 너는 남자3호라고 아까 얘기 하지 않았느냐 아니다 니가 잘못들은거라야. 아까부터 1호 오빠였다 그러자 여자4호가 니네 둘다 웃긴다며 원래 내가 남자1호라고 했지 않냐 급기야 3명이서 싸우기 시작을 하더니 이제 서로 보지말자하며 의절을 선언 한다. 결국 먼저간 여자1 호부터 2,3,4호 모두 최종선택은 나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몇 달이 지난 후 주선자에게 의뢰를 한 결과. 그 셋은 진짜로 의절을 했다는 슬픈 얘기를 들었다. 이 죽일 놈의 인기... 그렇다고 지금도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런 일화가 있었다는 것 뿐 다들 자기들만의 리즈 시절이 있듯. 나의 리즈시절은 아마 1995년 봄 벚 꽃 만개 했던 그 시절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into the jazz - 문제3: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실력’이다.
필자는 한때 운동선수였다. 캐나다 BC주 대표선수를 5년 연속을 했고 올림픽에 나가 서 메달을 딸 정도로 능력이 대단하지 않았지만 매년 캐나다대표선수 선발전에서 선 전했던 꽤 괜찮은 선수였다. 그러나, 늘 좋았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운동을 하 다보면 실제로 우리가 뉴스에서 접했던 것 처럼 납득하기 힘든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몇달동안의 나의 노력이 한순간 사라진적도 여러번 경험했다.
글. 이상준
우리가 운동경기를 보면 석연치 않은 심판판정으로 받아드리기 힘든 경기를 종종 본 다. 좋은 예로 유럽축구클럽대항전이라고 하는 챔피온스리그 첼시(당시 히딩크 임시 감독)와 바르셀로나 4강전, 런던올림픽때 박태환 부정출발사건, 그리고 같은 대회 펜 싱 신아람 눈물의 1초 사건등이 있다. 아마도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크고 작은 편파 판정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으리라 믿는다. 기본적으로 경기규칙은 공정해야한다. 공정함은 신뢰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안타갑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 공정하지 못할때가 많이 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 캐나다는 물론 유럽 역시 온전하게 공정하다고 보기 힘들다. 위에서 말했듯이 스포츠정신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겨야할 올림픽에서도 공정 치 못한 판정을 경험하는 것은 이제는 흔한 일이다. 예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홍대거리에서 외국인(백인)들에게 대하는 아주 특별하고 (?)과 친절한(?) 우리의 태도를 우리가 외국에서 현지인에게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은 크나 큰 착각이다. 많은 신규 유학생 또는 이민자들이 외국생활 초기에 현지인들 에게 크고 작은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을 종종 본다. 우리는 우리땅에서 그들에게 우 리이웃보다 더 친절하게 잘 해주었는데 그만큼을 돌려받지 못하니 그만큼 상처를 받 는 것은 당연하다. 인종에 따라 줄을 세우는 것은 바로 차별을 뜻하지만 이러한 차별 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줄에서 백인은 늘 가장 앞에 서있다. (물 론, 어떤이들은 인종차별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차별이 존재하지 않다면 굳이 인종차 별퇴치운동도 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언어문제, 인종적 약자의 입장, 그리고 현지 네트워크의 부재로 외국에서 게임(?)을 할 때 공정하지 못한 판정을 경험할때가 종종 있다. 이런 공정하지 못함을 불평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같은 불평불만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가져주는 것은 아닌듯 하다. 적당한 불평불만을 한 후 현실을 현실로 냉정 히 인식하고 이런 불리함의 문제해결에 대해 보다 더 냉정하게 고민하는 것이 더 바 람스로운 자세인듯 하다. 요즘 잘나가는 김연아(예전에도 잘 나갔던), 추신수, 그리고 기성용선수를 보자. 김연 아선수의 경우 세계피겨계에 명함도 못내미던 나라의 선수로서 많은 불리함을 선수 생활초기에 경험했을 것이라 지레 짐작한다. 더 나아가 이웃국가 일본의 로비와 광고
비로 심판판정에도 상당히 많은 텃새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예로 추신수선수 역시 초창기에는 메이저리그에 이치로가 버티고 있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 않았 을까. 그러나, 지금은 신시내티에서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손꼽는 선수로 당당히 톱타 자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기성용선수 역시 스코틀랜드 진출 초기에는 많은 여러움 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실력으로 이겨내고 현재 스완지 시티에서 없어서는 절때 안 되는 자리에 있다. 앞서 이야기한 박태환선수나 신아람선수 그리고 과거 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 동국선수나 이천수선수의 경우는 매우 안타깝다. 같은 조건이 아닌 상태에서 그런 가 혹한 대우를 경험하는 것은 심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외국에서 살면 매일같이 경험하는 일이다.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많은 운동선수 들은 물론 그외 여러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모 두가 이런 성공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문제, 인종적 차별 그리고 약한 네트워 크등의 문제로 출발지점에서 가장 뒤에서 출발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결코 같은 조건과 상황에서 경기에 임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악조건을 이겨내려면 그 조 건의 차이만큼을 훌쩍 넘어설 수 있는 압도적인 실력과 정신적인 강인함이 필요하다. 쉬운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외부의 탓을 하기보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진 않은 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이상준 홈페이지: www.jonleemusique.com 블로그: jonleeblog.blogspot.com
꽃놀이의 맘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05.26 http://cafe.daum.net/badabie
월간이리에서 필진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싣고 싶으신분들은 언제든지 편하게 문의 주세요. @postyri 트위터 계정이나 exxx2x@gmail.com 으로 연락주시면 친절히 안내해 드립니다.
봄 소풍 추천
글. exxx
인간의 마음은 언제 가장 격렬하게 움직일까?
그 순간을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사랑 또는 집착을 따라 마음이 요동치곤 한다. 오늘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사랑과 집착 그리고 그것들에서 나오는 격류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을 여러분께 소개하려 한다. 경마장. 경마의 사전적 정의는 대략 이렇다. 1.일정한 거리를 말을 타고 달려 빠르기를 겨루는 경기. 2.가장 빨리 달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말에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오락. 3.[같은 말] 경주마(경주에 출전시키기 위한 말) 멋지고 깔끔해 보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경마의 사전적 정의는 도박 : 1.[같은 말] 노름1(돈이나 재물 따위를 걸고 주사위, 골패, 마작, 화투, 트럼프 따위를 써...). 2.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댐. 여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마장에 가서 자꾸 돈을 잃어서가 아니라 공간의 느낌이 정선의 카지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포장을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오히려 테이블 단위에서 좌절과 희열이 오고 가는 카지노보다 매 경주마다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경마장이 어찌 보면 더 큰 에너지를 주는 노름판이다. 심지어 가깝고 합법적이다.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돈을 걸 수 있는 것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복권, 카지노, 스포츠 토토 그리고 경마, 경륜(자전거), 경정(모터보트)가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복권과 경마이다. 나머지 것들은 어쩐지 없어도 될 것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슬그머니 만들어 놓았다. 생긴것들 따라 좋아하는 분야도 다 다르지만 없어도 불편함이 없는 것을 꼭 만들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하하. 돈이 돈인지라. 그 이문을 노리는 사람이 어디 없었을까. 경마만 해도 30분 한판에 10억은 우습게 움직인다. 그게 보통 10 경주 씩 있으니 이틀에 200억 정도 왔다갔다 하는 셈. 이것도 아주 작게 이야기 한 것이다.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2010년 기준 경마장의 전체 매출은 7조 5천 700억원 이번에 다녀온 과천 경마장의 하루매출은 511억이다. 세상에 이런 땅 짚고 헤엄치기가 또 있을까?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경마장에 다녔는데,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경마장에 대한 강한 인상은 두가지이다. “오! 재미있다.” 그리고 “아빠! 그 돈 어디서 났어?” 어린 내가 봐도 집이 잘 사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셨는지.. 경마장에 가면 다들 그렇게 어디서 쌈지 돈을 구해들고 온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첫 경마는 500원을걸어 9배인 4500원을 땄었고, 돈을 쥐고 무척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왠지 아빠는 기분좋은 나에게 추임새도 넣어주셨다. (아이교육에는
정말... 해로운 아버지 -_-) 그 이후로 벌써 몇 년인가.. 그 후로 제대로 딴 적이 없으니 도박의 재능은 거의 0인 셈이다. 여기서 추억을 좀 더 되짚어보면 아버지는 집에 갈 때, 돈 따면 맛있는 것을 먹자고 이야기 했었지만 제대로 맛있는 걸 사준 일은 없었다. 우동이나 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울 뿐이었다. 주말이면 외출한 아들과 아버지를 기다리며 영문 모르는 엄마만 저녁밥 준비에 바쁘셨다. (진짜. 이아버지는 정말) 분명 돈을 땃던 날도 있었을 텐데,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지. 그건 모두 다음 주의 탄약이었나? 여기서 경마의 방법이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진부한 일이다. 그런 건 직접 가서 몇 번 돈을 잃어보면 알게 될 일들이니 생략하고, 오늘 이렇게 경마장 이야기를 꺼낸 이유만 간단하게 독자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다. 경마장은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음의 격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A양 B군에 대한 각기 다른 사랑이나 집착이 아닌 돈이라는 하나의 사물을 향한 전체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각자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서 마권을 구입하고 경주가 시작되어 말들이 결승선을 향해 치달을 때면 어지간한 묘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격류가 공간을 지배한다. 말은 먼지를 일으키며 저 멀리서 달려오고 사람들의 고함은 당신의 마음 저 깊은 곳의 감정들을 들끓게 한다. 더욱이 당신이 돈을 건 말이 달려오고 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가만히 서있어도 당신의 마음은 벌써 파도 위이다. 나는 예술을 하거나 예술에 관심이 있거나 혹은 인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마장에 꼭 가보라고 이야기 한다. 어쩌면 당신은 돈을 딸 수도 있고 중독이 될 수도 있고 흔한 경마장 경험담처럼 패가망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승선을 향하는 순간 카지노나 로또, 토토 등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동시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오직 경마장 뿐이란 사실. 그것은 아주 강렬하고 무섭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그곳을 권한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천원짜리 경마정보지를 사고 마음만은 경마꾼의 마음으로 호기롭게 입장해보자. 모든 것이 다 재미와 경험을 위한 여흥 아닌가. 만약 당신이 연이은 패배나 승리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면 경마장은 좋은 경험과 추억을 줄 것이다. 어쩌면 영화 <타짜>에서 예림이가 말하던 것 처럼 평소 차갑던 손발에 찌르르 하면서 피가 도는 무서운 경험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걸 느끼면 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아버지의 명언 하나를 남기며 글을 맺는다. “도박장에 돈 잃으러 오는 놈 하나 없다. 다 돈 따려고 오지.” 여러분의 건승을 빈다.
경마장와서 처음 돈 따면 1년안에 망한 다 왜-> 배팅이 커져 패가망신 지름길 1. 여자(쌔컨) 마누라 말고 2. 도박중독 (특히 경마) 3. 사기 (이 사진이 이번 원고의 계기가 되었다. 저 사인펜은 아마 마권 구매용...)
아이 시원하고 좋다. 경마 공원 답지 않은가.
경주전에 말을 볼 수 있다. 이때는 왠지 다 맞출 것 같다.
기수들이 말에 올라타고 몇바퀴 돌면서 응원도 받고 기세도 보여준다.
말이 결승선에 다가올 수록 저 뒤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커진다. 저일 윗층은 마주들의 공간 .
제주도 경주도 베팅할 수 있다. 내기에 최적화.
현실은...
우동, 떡볶이, 김밥, 북어국, 제육덮밥 등. 하지만 해피하지 않다.
멘탈 회복을 위한 인공 폭포 (돈을 뽑기 위해 ATM기에는 가도 제정신인 사람이면 아무도 폭포에 가지 않는다.)
그날의 경주가 남았어도 떠날 사람은 떠날 수밖에 없다. (부제: 아빠와 함께 걷던 쓸쓸한 길)
한탕만이 살길이다. 끝.
양영순
글.그림. 지인
전 만화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특히 웹툰은 매일 챙겨봅니다. 하루에 두 포털, 다음과 네이버에서 대여섯 작품씩 보고 있죠. 이번에는 양영순 작가를 그려보았습니다. 음. 팬심을 담아 작가님의 그 림체를 참고로 해서 그렸는데 느낌이 살았나 모르겠습니다. 작가에 대해 몇 자 적기 전에 잠시. 전번 4월엔 만화가 바스티앙 비베스를 꼽아놓고 글을 펑크 내 는 바람에 편집장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사실 그렇게 할 말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개는 하 고 싶은데 뭐라 써야할지 종종대다가 그림만 보냈어요. 편집과정에 고충이 많으신데 지면을 빌어 (이 말 써보고 싶었습니다.) 한 건 더해드려 죄송했다는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바스티앙에 대해 못 한 말을 좀 적겠습니다. 만화를 제식대로 구분하면 어떻게 읽느냐로 나누어. 웹툰과 출판 만화로 나뉩니다. 인터넷에 접속 해서 보면 웹툰, 종이책으로 보면 출판만화죠. 그리고 출판 만화는 대여점에서 빌릴 수 있는 종류 와 그렇지 않은 종류. 단편과 장편으로 나뉩니다. 주로 장편은 대여하거나 만화방에서 보고, 단편은 구매해서 보는 편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 분류에 의거해 바스티앙 비베스는 그래픽 노블, 즉 대여 점에서 접하기 어려운 매끈한 종이에 컬러 인쇄가 되어있는 만화책을 내는 작가입니다. 참고로 만 화를 볼 때 제가 지불하는 대가가 작가에게 > 아니라면 유통시스템에 > 그마저도 아니라면 파생시 장으로 갈 텐데, 뒤로 갈수록 죄책감이 커집니다. 모든 만화를 사서 볼 수는 없지만..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에서 작가는 현실을 배경으로 자기 또래일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렸습니 다. 작가의 섬세함으로 묘사된 주인공들은 꽤 평범함에도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작가의 작품 중 하 나인 [염소의 맛]은 한 권 완결로, 척추 교정을 위해 수영을 시작한 남자 젊은이가 수영장에서 만난 전직 수영선수인 여자 젊은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야기로, 배경은 동네의 ‘작고 나이스한 수영장’ 이며, 큰 사건 없이 물에 몸을 담근 채로 부력을 느끼는 듯 멍한 기분이 듭니다. 만화 제목인 ‘염소 의 맛’의 염소를, 저는 막연히 매에 우는 염소라고 생각했었죠. 만화를 중간쯤 볼 때서야 물을 소독 하는 염소란 걸 알았어요. 여하튼 볼 때마다 작가가 그림을 참 잘 그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 인상 깊었던 것은 어. 이 작가 다 컴퓨터로 그렸네? 하는 것인데, 그것이 두드러졌던 이유는 디지털 잉크임에도 그 선이 회화적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경향은 최근작 [폴리나]에서 더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타블렛을 사용하면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에도 필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선의 강약 말인데요. 강하게 누르면 두꺼워지고 살살 누르면 얇아지는 거죠. 그런 선은 원형을 기 본으로 강하게 누르면 두꺼운 원으로 시작되었다가 살며시 떼어내면 점처럼 끝나는 식이에요. 염 소의 맛에선 수영장의 푸른 색 분위기를 주는 색 처리가 많았지만, [폴리나]는 인물의 형태와 감정 을 선으로만 그리다시피 해서 필력에 기반 한 쫀득한 획들로 세밀한 선도, 과감한 처리로 그렸습니
다. 볼수록 참 잘 그렸다, 생략한 것도 참 감각적이다 하게 되요. [폴리나]라는 작품도 단권입니다. 매끈한 종이에 컬러프린트 된 데다 더해서 양장본입니다. 무용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주인공 폴리 나의 성장담이며, 무용학교에서 만난 동기들과의 관계, 그리고 사제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특히 사 제관계가 이야기의 전체를 아우르는데 제가 특히 흥미를 느낀 것은 무용학교 이후의 일들로, 어머 니의 독려로 무용을 시작한 폴리나가 연극을 하는 동료들을 만나 자신이 스승에게 배웠던 무용을 풀어내게 되는 부분입니다. 참 인상 깊었어요. 이런 성장이 곁들여진 이야기에선 제가 제 자신에게 아쉬워하는 부분들을 새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졸업하고서 ‘예술가 뭐뭐’, ‘예술가의 뭐뭐’하는 책들을 찾아 읽었는데 그중 하나의 제목이 ‘예 술가의 탄생’이었습니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책을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뭐, 예술가로 탄생 하고 싶었나봅니다. 나이 들어서 뭔가를 이뤘다 싶은 때에 뒤를 돌아보면 자신을 있게 한 여러 사 건들이 보이겠죠. 그리고 삶의 궤적이 하나의 길처럼 보일 겁니다. 예를 들면 ‘그때 미국에 가서’, ‘ 그때 누구를 만나서’, ‘그때 그 것을 갖추고 있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하고 말하게 되는 거 죠. 하지만 아직 뭐가 되지 않았다 싶은 때엔 그런 역사적인 결과를 줄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 스스 로를 무척 지치게 하지 않나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 가장 조바심이 넘쳤어요. 당장 뭐가 되고 싶었죠. 고대하던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고대하던 졸업전 시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폴리나가 독일로 가서 일 을 구하려고 헤매다가 연극하는 친구에게 자신의 무용을 보여주고, 그 친구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 보는 장면에서 엉엉 울었더랬습니다. 그 장면은 그녀가 겪은 모든 일들이 하나로 응집되어 시작되 는 전환점이자, 그녀의 능력이 인정받은 것이었기 때문에요. 성장이야기에선 개인의 삶에서 사건 하나가 획기적인 전환을 만들어주게끔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정된 시간 내에 이야기를 풀어가 기 위한 장치인 그 것이 내게 그런 상황이 오길 기다리게 반작용을 하곤 합니다. 반작용이라고 말 은 하지만 언젠가 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물을 타는구나,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산 을 타는구나 알아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것을 바라거나, 내가 갈고닦아온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 내 지 상황과의 만남이라든가 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나를 알아봐주길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는 지. 뭐 그렇네요. 그때가 오든 말든 별 수 없이 갈고 닦는 것으로 지금은 괜찮다는 마음이지만요. 위에 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림을 말하며 회화적이라고 했죠. 주관적인 견해입니다만 단정조로 얘기 하겠는데 양영순 작가의 그림은 회화적이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제게 회화적인 것을 말하자면 그림을 글이라고 생각했을 때, 회화적이라고 한다면 은유적인 표현의 글인 셈이죠. 그러한 그림은 선이나 색을 이용해 형태를 그리되 암시하며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양 영순 작가의 머릿속에는 뼈와 살과 근육이 다 들어있습니다. 양영순 작가의 캐릭터는 뼈와 살 째
로 모델링된 존재입니다. 캐릭터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세계관 또한 단단한 뼈와 살, 그 리고 근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작가가 네이버에 연재하는 [덴마]는 이전부터 작가가 꾸준히 이야기하던 세계관을 총망라해서 풀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저는 SF장르를 볼 때 그 배경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는 터라 여러분께 여기서 작가님의 세계관을 풀어내드릴 수 없음을 밝 힙니다. 스타워즈를 볼 때도, 카우보이 비밥을 볼 때도 그랬죠. 아주 간단하게 우리 팀-남의 팀 내 지는 피해자-가해자 정도의 범주로 나눌 뿐이고요. 추리소설 재밌다고 보면서 추리는 않는 사람 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우시겠죠?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을 겉핥으면서 이야기의 흐름에 재미 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는 쪽이라 이 글에선 세계관을 정리한다기보다 제가 매력을 느낀 부분을 나열하는 정도가 될 겁니다. [덴마]는 우주가 온, 오프로 연결되어있는 세상이라는 설정입니다. 기술도 현재와는 차원이 다르 게 진보되어있죠. 인간외에도 여러 생명체가 존재하며, 그 중 퀑으로 분류되는 생명체가 있는데, 그들은 물리법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특수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다스리 는 조작하기도 하는 존재는 자본가와 귀족과 종교인들이며 그들은 퀑 위에 군림합니다. 덴마의 이 런 설정은 단순하고도 비판적이게 현실을 반영하고 와중에 음모론적인 분위기를 주기 때문에 무 척 즐겁습니다. 동음이의어 장난에서도 그런 삐딱한 느낌이 있어요. 행성간의 이동도 자유롭고 전 체를 지배하는 계층이 있어서 행성별 이슈들이 결국 하나로 엮이는데, 그 중 행성 벨라를 배경으로 한 주인공 고드는 GOD이라고 써놓고 고드라고 읽는 이름을 가진 캐릭터로 디자인도 예수처럼 되 어있고, 스스로를 사랑의 신이라고 명명하죠. 육체는 죽었으나 의식은 나노물질로 구성되는 무기 질(?) 신체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변형하며 움직이는데 여간한 퀑들따윈 상대도 되지 않는 물리력 을 갖습니다. 이 고드 역시 행성의 실제 지배자의 아래에서 관리됩니다. 이런 역학관계를 통해 우 리가 사는 세상을 느낄 수 있어요. 때로 작가가 그려내는 캐릭터의 내면 상황이 심히 단순하다는 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척 정 형화 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해서 복수의 길에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남자. 가 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사랑의 방식이 소통되지 않아 버림받은 아버지 등의 캐릭터는 이 미 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맡은 모습입니다. 이야기 한 김에 더 말하자면 정형화되어있긴 하 지만 겉모습으로나 역할로나 다양한 남성캐릭터에 반해 여성 캐릭터는 아름다운 쪽이 대부분이 며 가끔 등장하는 평범하거나 못생긴 여성은 상대 여성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등장하고 그 와중에도 대부분 평균이상의 외모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만화 웨딩 피 치의 주인공 피치는 별명이 분홍돼지이며 통통하다고 놀림 받는 설정임에도 전혀 통통하게 그려 지지 않고 완벽한 비율의 몸매를 가졌는데요. 그처럼, 아름다운 캐릭터가 아닌 설정에서도 주 캐 릭터로 등장하는 여자는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갖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여성 캐릭터의 내면 묘사 에 있어서도 드러나서, 예수에 빗대어진 성자 조슈아의 어머니 마리아라든가, 소녀가장 라미라든 가의 존재들에서 보이는 모성애의 심리 외엔 귀족이나 수호사제로부터의 일방적 보호를 받는 데
바 아그네스는 겉보기엔 카리스마와 지성을 갖은 컨셉이지만 이야기에서 그러한 그녀가 직접 주 인공으로 움직이진 않죠. 그런 단순한 캐릭터들이라는 것은 어쩌면 덴마의 거대한 스케일로 인한 것일 겁니다. 작가가 리모 델링한 거대한 세계에 곳곳에 배치된 캐릭터는 체스나 장기의 말과 같습니다. 각각의 말들은 정해 진 규칙대로 자신의 길을 걸으며 게임을 만들어나가죠. 작가 인터뷰를 보면 ‘이야기 자체에 생명력 이 있어 가는구나 싶기도 하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기반 자체는 작가가 내외적으로 닦은 토대에 서 가능한 것이겠죠. 작가가 자신이 가진 재료들을 이용해 상상해낸 것을 어떻게 다듬었는지 가늠 해보는 일이 무척 즐겁습니다. 캐릭터와 세상이 동시에 일어나 서로를 공고히 다듬어가는 그런 작 용을 느낄 수 있어 이야기를 쫓아가는 틈틈이 감탄을 멈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작가식의 유 머가 곁들여진 비유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걸 달리 뭐라고 해야 할까요. 무척 재미있는데요. 양영순 작가의 연재 여정을 보면, 그 자체로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좌초된 이야기들이 몇 있었고 [덴 마]가 나오기 전까진 그 이야기들이 미결된 채로 남아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들이 하나로 묶 이면서 큰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만화만 보는 것도 좋지만, 작가의 그런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예술가가 어찌 탄생하는지는 말 안 되는 질문이라도, 예술을 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탄생 정도를 얘기해 볼 순 있죠. [폴리나]에서 주인공 폴리나에게 스승 보진스키가 한 말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네가 전달하는 감정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봐서는 안돼.’라고요. 후에 폴리나 는 그 말을 동료에게 전하면서 ‘나한테 (사람들은 네가 보여주지 않는 건 볼 수 없단다)고 하셨어.’ 라고 말하고요. 그러면 작품의 탄생은, 이야기의 탄생정도가 되지 않을까. 보여주는 것, 전달하는 것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 바스티앙 비베스는 무용을 통해 예술가로 사는 사람의 이야기 를 했고, [덴마]의 양영순 작가에게는 작품 속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창작 과정 또한 이야기이겠습니다. 시간을 내서 올해 3월 21일자 네이버 케스트의 양영순 작가편을 보 시면 좋겠습니다. 네이버에서 직접 검색하셔도 되고 bit.ly/ZXba9c로 링크를 타고가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