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사진. 글. @Ahopsi 비밀 안(not)스러운 생활 / 사진. 글. beamil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박태원 / 글. 사진. 고수진 환타지와 모순의 조우 (遭遇): 영화로 읽는 時空間 (시공간) / 글. 곡주대비 0,0,0 / 글.그림. Night Planet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독후소설 / 그림. 황은정 글. 김종소리 세계의 직업 - 발레리나 / 글. 그림. 왼손이 부산 오뎅 이야기 / 글. odeng INTO THE JAZZ / 글. 사진. 이상준 흔적 도감 / 글. 그림. 왼손이 바다비 일요시극장 광고 절벽 / 글. exxx 장 뒤뷔페(Jean Dubuffet) / 글. 그림. 지인
이 더위! 믿을 수 있으십니까? 월간이리 30호! 믿을 수 있으십니까? 하하. 사실 저도 못믿겠습니다. 볼을 한번 꼬집어 봅 니다. 항상 최후의 마감을 고집하는 게으르고 (선) 성실한 (후) 표지화가 조 차 30장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도 사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게 음모론의 일부가 아닐까 합니다. 더우니 별 소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6월부터 더워진다 하는데. 뜨거운 태양을 앞에 두고 맞서지 마 시고 또 피하고 피하시길 바랍니다. 맞서 싸울 것은 불공평과 부당이지 자 연이 아닙니다. 요즘 수박이 제철입니다. 조금 있으면 향긋한 복숭아도 나오고요. 친구를 불러 과일으 나누어 먹어보는 건 어떨까요? 술 말고 차랑 과일을 나누어 먹어며 맨 정신으로 혁명을 이야기 해 봅시다. 그럼 결국 술을 마시게 되 겠지만 말입니다.
월간이리의 공식 트위터는 @postyri 이고 온라인 페이지는 postyri.blogspot.com 입니다. 이곳에서는 컬러 PDF 파일과 바로보기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 이 글을 보고 1주일 내에 4명에게 월간이리를 소개하지 않으면 당신은 격한 허기를 느끼게 됩니다.
비밀안( not)스러운생활 2013 JUNE 16 22:24
12 18:22
19 19:52
20 22:41
1 15:35
무언가 써내려 가고 싶지만 정말 그런 걸 쓰고 싶은 기분일 땐 그마저도 안 써진다는 걸 불과 얼마전에 깨달았다. 흐트러진 채로, 아무 글이나 마구 써내려 갈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축복이다. 매일 단편적인 개드립들을 140자 아니 15자에 녹여내고 쏟아붓는 트위터리안들처럼 사람이 정말 공허해지면 아무 말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는 거다. 그래서 월간 이리 6월호는 부유물처럼 둥둥 뜬 맘으로 찍어낸 사진들과 함께 덤덤하지만 강한 결기가 담겨있는 글 하나로 대체한다.
12 18:49
27 14:27
15 21:45
5 15:50
{beamil}
“확정적인 모든 것들은 지루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미래라면 내기를 걸어도 좋다. 새로운 세기랄까, 그런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내기를 걸 수 있다. 매혹적인 것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며 이미 온 것들은 지루하다.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되고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 어떤 것으로 바뀌어가겠지. 그러면 자신의 모습에 많이 슬프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속에서 희망을 찾는 자들이 불행한 것은 이제 과거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연수 / 7번 국도 (문학동네, 12p)
*Android, i-Phone APP ‘인스타그램’의 필터를 이용하여 찍은 사
내 앞에 있는 작품과 작가를 통째로 머리 속에 집어 넣어
데이터베이스화 하려는 욕구, 작가를 내 좁은 생각의 틀
에 가둬놓고 재단하려는 성급함과 같은 그런 경직된 태 도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만날 때 느끼는 희열도 있지만 어
느 때 보면 음반가게에 가서 레코드를 디깅하는 레코드 매니아처럼 눈에 불을 뿜고 좋은 놈을 발견해보리라며
미술잡지와 도록을 뒤지는 내 모습을 생각하면 과연 무 엇 때문에?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물론 많이 보고 느끼면서 좋은 취향을 가진다면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사는 것이 내 작은 꿈이기도 하
다. 하지만 그 꿈을 고군분투하면서 성취한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살아내고 싶은 생각이다. 그렇다
면 요즘 소위 잘나가는 작가에 쏠려있는 관심에서 길거
리 아티스트의 좌판에 올라간 창작품에도 얼마든지 기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아프리카에 출장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상사 를 졸라 남는 시간에 예술시장에 들렀다. 우리나라 인사
동처럼 가게들마다 고만고만하게 중복되는 기념품들 사 이에서 슬슬 재미가 떨어질 무렵 코코넛 나무 가지를 얇
게 깎고 잘라서 붙여 동물 모양을 만든 엽서가 눈에 띄었
다. 시장 어느 가게에서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주인장
6월의 기고
여자가 직접 만든 엽서였다. 투박한 비닐과 하얀 스케치
전형적인 교회 드러머로 활동한지 15년이 다 되어간다.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프리카를 만난 듯했다. 거기서만
나는 엄마에게 맞아가며 드럼을 배운 특이한 경력을 가 졌다. 엄마는 부흥회 큰북으로 시작해 직장생활 하는 와
북 종이 위에 동물들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던 가공되지 한 20분을 쭈그려 앉아서 엽서를 고르고 구경했다. 가지 고 간 현지 돈을 전부 꺼내 엽서 20장을 샀다.
중에 틈틈이 학원에서 드럼을 배우셨다. 엄마 외에 이렇
보통은 그의 연락처와 홈페이지를 받는 등 내 기억 속에
운 손놀림을 보며 느꼈던 그 감동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다. 일부러 그의 연락처도 홈페이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다 할 선생님이 없었던 나는 지금도 엄마의 그 부드러 어깨에 힘을 쫙 뺀 상태에서 리듬에 팔을 맡기고 흔들흔
들 춤췄던 그 손과 하이햇 터치... 지금은 드럼을 놓으신 지 꽤 되었고 반면 나는 교회에서 계속 활동(?)해왔기 때
문에 이제는 청출어람의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 때 엄마
의 어깨는 레전드인 스티브 갯보다도 부드러웠고 스티브 조단의 그루브보다 끈덕졌다.
넣으려 했을 테지만 왠지 그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3-4장만 남겨두고 모두 선 물로 돌렸다. 그와는 기념사진 한 장만 찍었을 뿐이다.
그 엽서를 봤을 때 느꼈던 감동과 정서 만을 되씹어 먹
고 싶었다. 다시 한국에 와서 행여나 다시그를 인터넷으 로 만났을 때 그 기억의 맛이 반감되는 것이 싫었기 때 문이었다.
약간 오픈한 상태에서 스틱의 탭(꼭다리)로 살짝 터치해
하다못해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아티스트의 말이 거짓
개미표 하이햇에서 나오는 소리 중에 단연 최고 였다.
에서 느꼈던 소소한 감동을 붙잡고 싶었다. 그 따위 진
서 시원하고 감칠 맛나게 찰찰거리는 그 하이햇 소리는 미술을 대할 때도 엄마가 드럼을 칠 때 보였던 그 느낌처 럼 힘을 빼고 싶을 때가 있다.
이라도, 그가 어디서 떼다 팔았다고 하더라도 내겐 그 곳 실은 무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최 소한의 장치만을 한 채 가둬두지 않고 모든 것을 보냈다.
회사 옆 미술관 강세기
미술을 이렇게 즐기고 싶다. 머리로 즐기는 미술도
재미있다. 하지만 미술놀이의 묘미는 길거리에서든
갤러리에서든 장소 구애 받지 않고 작품 앞에 힘 쫙 빼고 선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음미할 때가 아닐까?
고백하자면 시작은 이번에 읽은 “현대미술과 문화 1950-2000”라는 책에 대해 쓰려했다. 동시대 미술
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에 이만한 책이 또 있을
까 생각하면서 재미나게 봤으나 생각해 보니 정작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왠지 마 음에 걸려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니 이렇게 글이 이 어져 버렸다.
회사 옆 미술관
이 책은 평생 두고 읽고 싶을 정도다. 참고로 구하실
분들을 위해 알려드리면 이미 모든 서점에서 절판
글. 사진. 강세기
이 되어버렸다. 반디앤루니스 인가? 김포공항 롯데
http://kangjoseph.tistory.com
데 인터넷 서점에서는 취급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몰에 있는 대형서점에서 한 권 본 기억이 나긴하는 커다란 하드커버보다는 보급판으로 나온 사이즈가 아담하고 도톰하니 엄청 귀엽게 생겼다.
참고로 2013년 5월호 월간 미술의 기고문에서 이 책을 ‘1900년 이후 미술사’와 ‘테마 현대미술 노트’ 와 함께 동시대 미술관련 필독서 3권 중에 하나로 꼽았다.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 박태원
글, 사진 고수진(gomin19@hanmail.net)
박태원
도시 속 무기력한 지식인의 이야기, 혹은 당신의 이야기. 5월호에서 예고한대로 이번시간 우리가 함께 볼 문학작품은 1930년대 현대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다. 작품을 읽어보기에 앞서 1930년대 모더니즘과 ‘구인회’를 빼 놓을 수 없기에 잠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30년대 소설에서 확인되는 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상에서 개별화된 인간의식, 도회적 풍물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고찰하는 문학작품을 뜻한다. 이념성을 배제하고 순간순간의 의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등장시켜 인간관계의 상실, 개인주의적 태도 등 도시의 속성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셈이다.
1933년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 모더니즘 문학가들은 ‘구인회’를 조직하며 그들의 문학세계를 본격화 하였다.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라 할 수 있는 이상의 집을 개조한 경복궁역 근처의 제비다방. 이곳은 구인회 멤버들이 모여 담소를 나눴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곳엔 이상의 작품들과 음료가 무료 제공된다. 그러나 하필 내가 갔을 때는 보수 공사 중이었다. 8월말까지 공사
구인회 멤버 중 이상 박태원 김소운
이제 모더니즘 문학가 박태원의 소설
‘구보’는
‘소설가
쪼개어
기다리는, 누구보다 고독할 어머니의
‘구보’가
행복을 생각하고 이제는 결혼도 하고
보내며
생활도 갖고 창작도 하리라 다짐하며
보자.
구보씨의 제목처럼,
도시에서
일일’을 소설가
무료한
일상을
특별한 사건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자신의
행복보다
자식을
집으로 향한다.
있는 이 소설은 박태원의 모습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로도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방황하던 의식은 잃어버린
중심사건이 발단-전개를 거쳐 절정의
일상적 행복과 기쁨을 찾아간다. ‘
클라이맥스로
구체적인
구보’의 내면 성찰은 오히려 ‘구보’가
갈등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이
행위나
이어지는
등장인물들
간의
이렇다 하게 나와 있지 않은 이 소설은 그
당시
파격적인
되었다.
소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소설은
다른
작품들과
다른
독특한 표현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주인공
내면을 마치 내레이션 하듯 독백으로
제공할 것이라 생각된다. ‘구보’처럼
구보가 집을 나서서 다시 집으로
풀어내고 있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비록, 머리가 아플지라도 끊임없이
돌아오기까지 [집-천변길-종로4가-
기법인데,
나를 생각해 보는 것. 어떨까?
화신상회(현재 종로타워)-전차 안-
풍경과 사람들을 보고 그의 생각과
조선은행-다방-거리-경성역(현재
추억을 두서없이 나열하여 30년대
소설은 허구다. 독자는 이 허구를
서울역)-조선은행-다방-거리-다방-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무기력했던
읽고 사회 현실 의미를 고민하게
거리-식당-거리-술집-카페-종로
모습을
나타내었다.
된다. 오히려 문학은 이 세계를 가장
4가-집] 산책이라고 표현하긴 좀
여러 가지 계기들에 의해 떠오르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통의 창이다.
뭐 하지만, 어쨌든 그는 아침에 집을
신변잡기와 내면묘사를 소설 곳곳에
요즘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나와 도시 구석구석을 배회하다가
자리 잡은 쉼표와 문단 건너뛰기를
보라. 차라리 소설이 낫다.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
통해 소설가 ‘구보’의 텅 빈 우울함과
동안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이 소설의
내면을 독자에게 더 강하게 드러내고
얼마 전 뉴스에서 어떤 대학에서는
주를 이룬다. 그 하루의 시간 속에서
있는 셈이다.
취업의 문제로 국문과를 통폐합한다고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길거리에서
효과적으로
만난
여러
주인공은 잃어버린 옛날의 애인을 떠올리고
떴다.
그
대학교
총장의
우리들은 달리는 지하철이나 버스에
인터뷰를
머리에서
몸을 싣고 곧장 이어폰을 귀에 갖다
미래를 걱정하시는 이 시대의 진정한
한다.
댄다. 그리고 뭐 그리 바쁜지. 빠르게
제젠틀맨이 아니던가, 웃프다. 웃기며
주인공이 이렇게 도시를 배회하며
하루를 산다. 속물주의, 타협주의.
슬프다.
그의 의식도 방황을 거듭한다. 온정을
도시를 묘사하는 이 부정적인 단어
찾을 수 없는 냉정한 눈길들에 슬픔을
속에서 한 번쯤 씁쓸함을 느끼기도
인문학은
느끼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중학 시절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상적인
파고들어
열등생의 예쁜 애인에 질투도 느낀다.
행복을 찾고 발견하기도 한다.
독자에게 스며든다. 이러한 인문학이
떠올리고
일상의 추억에
잠기기도
기사가
하며,
사소한
추억에
일들을
잠기기도
다방에서 만난 사회부 기자 친구가 돈
보았다.
그
이런,
학생들의
시대정신을
오히려
더
깊게
적나라하게
요즘 참 천대받고 있다. 잠시, 책, 책,
때문에 매일 살인, 강도, 방화범인의
구보의
눈을
통해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애달파
도시의 일상은 생기 없고 우울하다.
한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구보’는
이어폰으로
핸드폰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 필자가 이
무기력과 고독, 상실감에 빠져 있다.
바라보는 여전히 고독한 도시의 삶을
소설에서 가슴이 뭉클했던 장면은
그러다 새벽 두 시의 종로 네거리에서
살고 있는 무기력한 현재 우리들에게
바로 이 장면이다.
귀를
본
막고,
30년대
책! 을 읽읍시다.
새벽 두 시
‘구보’처럼 나도 그가 걸었던 길을 걸어보았다. 마침 석가탄신일이라 거리마다 연등이 가득해서 번잡했다.
종로 4가
나는 영락없는 주변인이 된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으로
가는 비 내리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곳에 끊임없다.
박태원, ‘구보’를 떠올려 본다. 그와 담소를 나누고 싶다.
그들은 그렇게도 밤을 사랑하며 마지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 날 바라보는 그의 얼굴빛은 뚜렷할 것이다. 치열한
그들은 그렇게도 용이하게 이 밤에 즐거움을 구하여
고민으로 얼룩진 원고지만큼 그의 얼굴빛은 시냇가의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일순, 자기가
조약돌 같았을 것이다. 과연 지금 내 얼굴빛은 어떠할까?
가장 행복된 것 같이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이 도시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그들의 걸음걸이에 역시 피로가 있었다. 그들은 결코 위안 받지 못한 슬픔을, 고달픔을,
우리들은 어쩌면 미래에 대해 고민만 많은 것은 아닐지.
그대로 지닌 채, 그들이 잠시 잊었던 혹은 잊으려
소통이 무엇인지 몰라서 사랑할 사람을 옆에 두지
노력했던 그들의 집으로, 그들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행복을 나눌
않으면 안 된다.
수 있을…….
(중략) 평안히 가 주무시오, 벗이 또 한 번 말했다. 구보는
시작은 시선이다.
비로소 그를 돌아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하였다.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 그러나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어딘가에 앉아 글을 쓰고 몰두하고 있었던 그의 뒷모습을
내일부터, 나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상상하며 나 또한 새롭게 사람들을 보았다.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고 싶다.
‘좋은 소설을 쓰시오.’ 시선을 나누고 싶다. 벗은 진정으로 말하고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조그만 한 개의 행복을 갖는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맥주를 한 잔 하며 나는 문득 어릴 때 할머니께서 해주셨던 ‘훌륭한 사람으로 커라.’가 떠올랐다. 참 막연한 말이었는데 살아보니 막연한 것도
현재의 종로 역시 새벽 두시가 넘어도 사람들로 복잡하
아니고 대단히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대게 얼큰하게 취해 있다. 하
일을 다 하는 것. 구보가 다시 펜을 잡는 마지막 장면에서
루를 열변하는 사람들, 혹은 끌어 오르는 젊음을 뿜는 청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던 것은 왜 일까?
춘들. 그들 모두 그 밤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다들 한편 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피로가 가득할 것이다. 30년대
작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보고 싶은 밤이다.
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참 벅찬 일. 이런 순간에 30년대를 사는 구보는 새로운 결심을 한다.
다시 한 번 시간을 소중하게, 사람을 소중하게.
하루 동안 종로 바닥을 쉼 없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머리 를 정리하고 지난 추억을 돌아보며 사랑하는 이에게 용
다음 시간에는 기생시조, 그녀들의 애달프고 당돌한
기 없음을 후회하고 돈이 중요한 세태에 실망하며 다시
사랑, 홍랑&황진이의 시조를 살펴보겠다.
자신을 위해 나보다 더 외로우신 늙은 어머니를 위해 소 설을 다시 창작하기로 결심한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참고: 권영민,『한국현대문학사-1』
월간이리에서 필진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싣고 싶으신분들은 언제든지 편하게 문의 주세요. @postyri 트위터 계정이나 exxx2x@gmail.com 으로 연락주시면 친절히 안내해 드립니다.
영화로 보는 시공간
‘야한 영화’의 정치학: 1960-70년대 소프트 코어 (soft-core) 영화들로 본 사회상 1959년에 헐리우드는 영화 검열제가 없어지고 등급제로 교체 되면서 다양한 장르의 (특히 심의제가 없어 지면서 수혜를 입을 만한 폭력성이 난무한) 영화들의 생산이 가능해지게 된다. 그 당시 쏟아져 나왔던 블 랙스플로이테이션 (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착취장르 영화: 주로 검열제 당시에는 다루지 못했던 인종 차별에 대한 비판이나 백인 위주의 사회를 경멸하는 폭력적인 액션물들이 이 장르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나 선정성이 눈에 띄게 높아진 에로 호러 영화들이 그 예 들이다. 그 중에서도 소프트 코어 장르 – 하드코어 포르노 보다는 수위가 낮고 일반 주류 영화 보다는 높은 성인영화 – 의 부상은 블록 버스터의 탄생과 함께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소프트 코어의 부상은 1960대를 시작으로 하여 1970년대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러한 현상은 미국뿐만이 아닌 일본이나 유럽 쪽에서도 관찰된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나 70년대 말에서 시작되어 80년대로 넘어가면서 시작되는 에로영화들의 홍수도 이러한 현상과 절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소프트 코어는 검열제의 부재를 이용한 지극히 상업적인 문화상품이라 할 수 도 있겠지 만 사실상 이러한 성인영화들이 정치적인 메시지, 특히 저항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성을 이용한 경 우도 많았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운동으로 make love not war 라는 캠페인이 히피들에 의해 주창 되었고 이 당시 많은 다큐멘터리나 독립 영화들이 그 들의 반전 의식을 ‘성’이라는 모 티프를 통해 담기도 했다. Deep Throat (주: 성 불감증을 갖고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클리토리스가 목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내고 오럴섹스를 통해 오르가즘을 느끼며 성을 탐험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을 물 론 이러한 의식 있는 영화들의 일례로 꼽을 순 없겠지만 많은 학자들이 이 영화가 여성이 성욕을 자유롭 게 표현한 데 있어서 급진적인 영화로 볼 수 있고 따라서 2세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텍스트로 읽을 수 도 있다고 하였다.
좀 더 가까운 예를 들자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 (1976) 을 그러한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 을 수 있을 것이다. 거장 ‘오시마 나기사’의 충격적인 작품, <감각의 제국>은 당시 보수 적이었던 일본 사 회에서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영화는 한 기생과 그녀의 연인 (흔히 기둥서방으로 일컫는) 이 밤낮으로 벌이는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성행위 중 서로의 목을 조르는 ‘놀이’를 일 삼는데 그 수위가 점점 높아져 급기야 남자가 목졸려 죽게 되고 이에 충격을 받은 기생은 그의 성기를 잘 라 삼일 밤낮을 거리를 쏘다니며 갖고 다니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현재 시대에 봐도 꽤나 파격적인 이 줄 거리는 사실 1920년대 일본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나기사 감독은 이 두 배우에게 실 제로 성관계를 할 것을 요구했는데 헤어 누드씬은 물론이며 흔히 포르노 영화에서나 보여지는 이른바 ‘삽 입 씬’ 등이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나기사 감독의 이러한 엄청난 시도 들을 영화학자 ‘도날드 리치’는 세계 대전 패망 이후 1970년대 일본 사회를 잠식 하였던 극 보수 파에 대한 강한 저항으로 읽은 바 있다.
오시마 나기사
우리나라의 예로 문학 평론가 ‘용석원’은 1970년대 호스티스 소설을 영화화 한 호스티스 영화들이 소설보 다도 훨씬 더 성적인 수위를 높여 제작된 경우가 많은데 이는 감독들이 군사 정권에 대한 저항을 사회적으 로 금기시 되어오던 성 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하기 위함 이라 언급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당시 한국 영화 시장이 텔레비전의 부상으로 인해 많이 침체 되어 있었고 그러한 텔레비전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 한 전략으로 성인물 컨텐츠 들을 많이 생산 했다라는 것을 고려 하면 ‘용석원’의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 하다. 하지만 이 당시 양산된 다수의 성인물들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성의 폭력에 의해, 더 흔하게는 강간이 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고통 받고 파멸에 이른다는 플롯이 다루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성이라는 모티브 가 저항의식의 은유화에 기여 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 된다.
사실상 모든 영화 장르들이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에 영향을 받아 생성되고 소멸하기도 한다. 허나 유독 성 인물의 경우 단순히 이 그룹의 영화들이 가진 세속성 때문에 그들의 정치성이 가려지거나 묵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 더 씁쓸한 사실은 일본의 로망 포르노 장르나 미국의 선정 착취 장르들이 나중에 라도 역 사적으로 조명 받는 반면 우리 나라의 7,80년대 호스티스 장르나 에로 사극들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깊이 있게 다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러한 연구들이 활발해 지기를 바라는 것에 앞서 필자가 바라는 것은 지금 대한민국의 문화 구성원들이 (이리의 독자들을 포함한 모두) 이러한 영화 장르들이 100년 전도 아니고 50년 전도 아닌, 불과 30년 남짓 전에 한국 영화 시장을 휩쓸었다는 사실 이라도 인식해주었음 한다 는 것이다. 이 영화들을 찾아봐 주는 것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테지만 (유튜브에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1975)와 별들의 고향 (이장호, 1974) 이 올라와있다) 그것도 무리인 듯 싶다면, 한국 근대 문화사의 의미 있는 하나의 조각 찾기 정도로 이러한 성인 영화 장르들의 존폐와 시대상 정도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글. 곡주대비
<0,0,0>
야행성Night Planet
twitter : @hitchhiker_j
“도시의 높은 인구 밀도를 해결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등장한 다가구 주택은 1984년 양성화 되면서 어쨌든 도시 서민의 보편적인 주거 형태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세번째 집(1998 - 2000)>
아파트 생활은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다. 시골에서 외할아버지와 지내시던 외할머니의 건
강이 급격히 나빠지시는 바람에 우리 집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집과 부모님의 꽃가게가 먼 것이 여 러모로 부담이었다. 하루 아침에 친구와 소일거리가 없는 낯선 도시에서 살게 된 할머니를 하루 종 일 집에 혼자 계시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꽃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밤 늦게까지 계시게 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모님은 아직 중학생 밖에 안 된 내가 엄마 울타리에서 너무 벗어나 있는 것 이 신경 쓰이던 차에 마침 잘됐다 싶었는지 이사를 속전속결로 진행하셨다. 살고 있던 아파트는 급 한대로 전세를 주고, 꽃가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다시 돌아온 동네는 묘하게 낯설었다. 4년전, 꽃가게가 있는 동네에 살다가 신도시로 이사
갔을 때 느꼈던 위화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신도시의 넓은 도로와 따로 구획된 주차구역, 단지 안 에서 마주쳐도 나에게 무관심하던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탓에, 다시 돌아온 이 곳은 정겹고 따뜻하 기만한 예전에 그 동네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나 길 한 쪽으로 늘 차가 주차되어 있는 물리적인 환경들은 불편하게 느껴졌고,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집안 사정을 빤히 알 고, 가깝게 지내는 것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집 앞에 데려다 주고 나면 며칠 뒤에‘통장 딸 연애한다’는 소문이 나는 그런 동네였다.(어머니가 통장이셨 다.) 여기선 ‘동네 사람’이 그냥 일정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가 옆 집 일에 참 견 할 권리가 있고, 잘 지내는지 들여다보고 돌 볼 책임과 의무도 있다고 여기는 전통적인 의미의 ‘이웃’이었다. 사실 동네는 그대로인데 변한 건 나였다. 더이상 아빠가 지은 집에 살던 그때의 내 가 아니었다.
<한 지붕 세가족 다가구 주택>
전학해 온 중학교에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그대로 올라왔지만 낯설었고, 느 낌탓인지 신도시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보다 피부 도 까맣고 촌스러운 느낌이었다. 아파트에 살 때 는 집도 우리 동네, 엄마의 꽃가게가 있는 곳도 우리 동네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동네로 이사를 오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붕 떠있는 느낌 이 들었다. 당시에 막연하게나마‘집이란 고정적 인 것, 변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가 평생의 집이 될 거라 생 각하던 나에게, 갑작스런 이사와 전학이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그냥 부모님이 하시는 건 뭐든지 못마땅한 사춘기 여자 아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 겠다.
새로 이사한 집은 적벽돌의 다가구 주택
이었다. 조성된 지 오래 된 주거 지역에 가면 가 장 흔하게 볼 수 있는‘적벽돌의 다가구 주택’은 단독주택을 짓도록 지정된 땅에 2개 이상의 가구 가 들어가도록 불법으로 건축하던 것이 양성화된 것이다. 싸게 빨리 지어서 임대 수익을 내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벽돌은 가격도 저렴하고, 시공 시에 전문성이 크게 필요하지 않아 시멘트 블럭과 함께 선호되는 재료였다. 집주인은 세를 내서 임대 수 익을 얻고, 서민들은 도시에서 아파트에 비해 상 대적으로 저렴한 집을 얻을 수 있으니 양쪽 모두 에게 이익이 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급하게 지은 만큼 최소한의 주거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악 한 주택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대부분의 다가구 주택들이 재료나 규모가
비슷하다보니 겉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인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똑같은 평면을 가진 집들이 층층 이 쌓여 있는 아파트와는 다르게, 한 층에 보통 한 가구에서 세 가구 까지 들어가고, 가구마다 출 입구가 마당이나 대문과 연결되는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다가구 주택이 밀집된 주택가를 살펴 보면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 예를 들어 계단실은 외 부로 드러나 있는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집 안으 로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고, 외부로 드러난 계단 실에 샷시를 설치하고 실내 공간처럼 사용하는 경
<동네 다가구 주택 대문 유형>
우도 있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외관에 비해 실내 평면을 구성할때는 유연성이 떨어져서 집 크기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안방 한개와 작은방 두개, 거실, 주방, 화장실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규모가 작은 집에 이 모든 방을 꾸역꾸역 넣고 나면, 창고 용도 외엔 어디에 써야할 지 애매하게 작 은 방이 만들어 지는데도 말이다.
우리집은 반 지하층과 1,2층에 각각 한 가구씩 세들어 있는 주택의 2층집이었다. 집의 형식
이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바뀌었을 뿐, 방의 구성이나 배치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외할머니 와 같이 현관에서 가까운 방을 썼는데, 나중에는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혼자 그 방을 쓰시고 나 는 거실이나 언니방을 오가며 지냈다. 집에 마당이 생기긴 했지만 우리 가족이 이사오기 전부터 살 고 있던 1층 집이 이미 마당을 개인 공간처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이 끼어들 여지는 없 었고, 지나 다니는 것 외에는 사용한 일이 없다.
외할머니는 일주일에 두번정도 엄마가 병원에 모시고 가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 엄마랑 꽃
가게에서 지내셨다. 엄마가 시집을 가면서 15년 가까이 떨어져 살다 함께 지내게 된 외할머니와 엄 마는 매일 붙어 있어도 서로에게 애틋하고 각별했다. 외할머니는 엉뚱하고 귀여운 면이 있어서 엄 마를 웃게 만들었고, 엄마는 살뜰히 외할머니를 챙겼다. 나도 할머니를 많이 좋아하고 따라서, 매 일 저녁을 먹고 나면 둘이 산책을 나갔는데, 주택가 뒤쪽으로 논 길을 따라 걸으면서 엄마랑 이모 들 어렸을 때 얘기를 듣곤 했다. 30분 쯤 산책하고 학원에 가기 위해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는 일과는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이후에 건강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자 외할머니는 시골로 내려가 외할아버지와 함
께 시간을 보내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상하게도 세번째 집에 살던 이년 동안은 할 머니와 관련된 기억밖엔 없다. 내가 주로 사용하던 거실과 주방, 내 방의 모습은 기억이 생생한데 비해, 안방과 언니방은 가구배치라던지 분위기 같은 것이 전혀 기억나지 않고, 집 안에 나랑 할머 니 말고 다른 가족이 있는 장면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 마치 사람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정서적 단절감이 기억에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집에서 다른 가족들을 마주 칠 일이 별로 없었던 것 인지는 모르겠다.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워 졌지만 단절감은 해결되지 않았 다. 외할머니와 산책하던 주택지 뒤쪽 논에는 몇년 전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 왔고, 이 동네 도 지금은 신도시가 되었다.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 이 달의 선정 도서 『아스테리오스 폴립』, 데이비드 마추켈리, 박중서 역, 미메시스, 2010
아스테리오스 폴립. 그는 누구인가?
1. 페이퍼 아키텍트. 설계 하나는 끝내주게 하지만, 그가 설계한 도 면이 실제 건물로 지어진 적은 없는 건축가다. 2. 자신만의 잣대가 뚜렷하여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결 론짓는다. 3. 논리적인 사고를 앞세우고, 여기에 자신이 가진 다방면의 지식들 을 버무려 풍부한 말솜씨를 자랑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는 똑똑한 사람이다. 때문에(?) 자신의 영역 에 누군가 침범해오는 것은 용납지 않지만, 타인의 영역에는 멋대 로 침입한다.
이런 그의 집이 불타버린다. 그에게 남은 것은 지갑과 아버지의 유 품인 라이터, 자석으로 움직이는 시계, 스위스 군용 칼뿐이다. 이런 상황이 그를 변화시킨다.
만화 속 사색적인 대사들은 자꾸만 질문을 던진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타인이 부러워할 만한 재력과 권력? 또는 삶을 풍성 하게 만들어주는 문화적 소양? 모든 가치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 을 만한 논리적인 사고?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오랜 시간 동안 깊이 생각하거나, 혹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곤 한다. 하지만 때론 아주 단순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해결책 을 찾기도 한다.
단순하게.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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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
“취직하셨다고요?” “응.” “우와. 축하드려요. 어디 되셨어요?” “아, 어디 된 건 아니고. 그냥 인천에 있는 화장품 공장이야.” “아…… 관리직 비슷한 건가요?” “아니. 생산직이야.” “생산직이요?” 나는 당황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어쩌다 그녀가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 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내 질문이 그녀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다. “너 지금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나 생각하고 있지?” “아니요. 그런 생각을 제가 왜 해요? 어디서든 잘 살면 되는 거죠.” 말로는 이렇게 얼버무렸지만, 실은 그녀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녀와 내가 만난 건 토익학원 스터디를 함께 하면서였다. 학원에서 만난 몇몇이 모여 따로 공부하는 그룹이었다. 스 터디는 3달 정도 유지되었는데, 이후 다른 사람들과는 연락을 끊었지만, 그녀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녀도 나 처럼 방송국 PD를 꿈꾸고 있었기에, 정보라든지 따로 공부하고 있는 것들을 나누기에 좋았다. 당시, 그녀는 졸업한 지 반 년이 넘은 상태였고, 나는 졸업까지 한 학기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가 공장에서, 그것도 생산직으 로 일하게 되리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보다 먼저 그녀가 PD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가락 안에 꼽히 는 대학의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했고, 토익점수도 900점대에, 일반 상식이라든지 면접에 대한 지식, 글쓰기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다. 성격이나 인간관계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은 건 순전히 내 쪽에 서 그녀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나는 궁금하지도 않은 걸 억지로 물었다. “일하시는 건 어떠세요? 힘들진 않으세요?” “응. 할 만해.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 12시간씩 일해. 월급은 130만원. 집에서 버스타고 20분 정도 가면 공장 에 도착해. 반장님 빼고는 전부 여자야. 다 아줌마들이지. 아줌마, 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있지? 딱 그런 분들이야. 그냥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 힘든 건 없어. 아니 오히려 행복한 것 같아. 준비할 때보다.” “행복하시다고요?” “응.” 나는 그녀가 개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자기합리화. 하고 싶은 일이 분명히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고 포기한 뒤, 그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고 싶지 않아 억지로 생각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이성적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녀가 안쓰러웠다. 왜 저렇게 밖에 못하는 거지? 더 열심히 해 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정말 행복하세요? 누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닌데요. 솔직히 말해서 정말, 진심으로 행복하세요? 누나는 PD 하고 싶으셨잖아요.” “맞아.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그냥 이자체로 좋은 것 같아.” “지나친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내 말에 그녀가 웃었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충분히 알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 너무 쉽게 회피해버리는 것이 보기 싫 었다. “맞아. 자기합리화. 조금 지나친 것 같기도 해. 그런데 마음이 편해. 그냥 이거면 된 것 같아. 이전까지는 내가 너무 나를 옭죄며 살아온 것 같아. 넌 어때? 아직 준비하고 있는 거지?” “네. 이제 2년째 된 것 같아요.”
“그럼, 너랑 안 지도 어느새 2년 반이 넘은 거네?”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우리가 언제 만났지?” “반 년은 넘은 것 같아요.” “반 년이나 됐구나…. 그 사이에 나 다른 데 다니다 그만 뒀어. PD 준비도 지치고 해서, 잡지사 들어가서 잠깐 일 했었어. 2달. 근데 힘들더라고. 애당초 내가 기자나 PD라는 직업을 왜 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더라. 일이 즐겁지가 않더라고. 물론 방송국 PD와 잡지 기자는 차이가 있지.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성격이잖아? 그런데 그 일을 하는 동안 하나도 즐겁지가 않은 거야. 오히려 괴로웠어. 하루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날이 없고. 그런 일을 내 가 왜 억지로 하고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러면서 든 생각이,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방송국 PD가 아 니라 방송국 PD를 하면 얻어지는 명예라든지, 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명예나 돈은 PD가 된다고 해 서 즉시 얻어지는 건 아니잖아? 어느 정도 년차도 쌓아야하고, 오랜 시간 그곳에서 버텨야하는 거잖아? 나는 그 시간 을 그렇게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즐겁지도 않고, 그저 미래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을 하고 싶 지 않았어. 그저 순간순간 즐거울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 “그럼 누나 말은 지금은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일하는 게 아니란 얘기에요? 공장에서 기계처럼 한 가지 일만 반복 하는 게요?” “응. 일은 일일 뿐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때론 전시를 보기도 하고, 음악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 공장에선 일을 해.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하고 있어. 여기서 오는 만족감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같아.” 나는 그녀가 또 개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PD를 하면서도, 그녀가 그렇게 쉽게 그만 둔 잡 지 기자를 하면서도, 충분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단순한 책임회피. 결과물에 대해 책 임을 지고 싶지 않을 뿐인 것처럼 여겨졌다. 잡지 기자든 PD든 그녀가 하고 싶다는 글쓰기를 일로써 할 수 있다. 일 로써 하는 일이란 돈을 받기에 책임감이 부여된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이 쓴 글로 어느 정도 이상의 책임을 지는 것 이 버겁고,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야기의 화제를 돌 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네요. 근데 누나 제가 학원을 가야해서요.” “그래. 나도 오랜만에 만나니까 좋다. 학원은 언제 가는데?” “5시까지요.” 그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까만 우레탄 재질의 손목시계. 원래 그녀가 차고 다니던 시계가 아니었다. “벌써 4시가 넘었네? 학원 어딘데?” “신촌이요.” “신촌이면… 토익?” “아뇨. 요즘은 한겨레에 논술 배우러 다니고 있어요.” “그렇구나. 힘내.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네.” “그럼 언제 가면 돼?” “이제 슬슬 일어나야할 것 같아요.” “아, 그렇구나. 그래. 그럼 잘 가고. 난 여기서 책 좀 더 읽다가 갈게.” “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그래. 잘 가.” 카페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앉아있을 카페 2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불쌍하고 안쓰럽단 생각 이 들었다.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끝없는 자기합리화에 빠져버린 아까운 인재.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 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고 내쉰 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부산오뎅 이야기 (할아부지 할아부지)
5월의 어느 날 나는 새로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가게와 200m남짓. 거리가 가까워서 좋은 것도 있지만 출퇴근 할 때 시간이 1~2분정도 걸리니 배부른 소린지는 몰라도 사 람들이 출퇴근 할 때 느끼는 시간에 대한 압박과 그 속에서 느끼는 잠깐의 여유. 요즘은 그 사색의 시간이 부럽다. 그래서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집처럼 너무 가깝지도 않은 집을 찾아 나섰다. 가게를 기준으로 5~6km정도가 좋을 것 같아. 컴퓨터로 몇 집을 알아보고 부동산을 돌아다닌다. 몇 집은 눈으로 봐야할 것 같아서 오토바이를 타고 홍은동으로 나선다. 주인이 직접 내놓은 집이라 가격이나 상태가 좋아보였다. 지도를 확인하고 찾아간 홍은동 집은 집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인왕산이 눈에 들어왔다. 홍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즈넉함 과 쾌적함이 물씬 풍겨왔다. 힘겹게 올라가는 오토바이.
하지만 그 동네의 매력에 빠져서인지 그 힘겨운 오르막 조차 운동삼기 좋은 최적의 조건이라 셀프 세뇌를 시작. 그렇지만 충동구매는 하지 않는 합리적이고 명석하고 셈에 능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음 동네로 향한다. 으쓱. 홍은동을 지나 홍제동을 거쳐 연희동으로.. 거기서 부동산 한군데를 들어갔다. 다른 손님이 계약중이라 좀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 기다리는 시간이 5분이 지 나고 10분이 지나고, ‘바로 맞은편에도 부동산이 있는데 저기에 갈까? 그래도 여기서 기다린 시간이 있는데 길 건 너기도 귀찮고, 좀 더기다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먼저 왔던 손님이 계약을 마쳤다. 계약을 마친 손님이 복비는 복비대로 지불하고 점심 식사나 하시라며 부동산 주인에게 꼬깃꼬깃 쌈짓돈을 건낸다. 부동산 주인은 뭘 이런 걸 다주냐며... 자연스럽게 주머니로.. 요즘 보기 힘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많이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하다는 부동산주인에게 투정 아니 인상도 쓰지 못할, 아니 쓰면 안 될 연세로 보였다. 그러면서 원하는 방을 물어보시는 부동산주인. 그냥 간단히 말해서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같은 아저 씨도 아닌 명백한 할아버지. 책상위에 있는 컴퓨터로 뭔가를 하시는데 주민번호 로그인을 하신다. 헉 (뒷자리는 보지 않았다.) 보려던 것은 아 니었는데 할아버지의 연세는 무려 84살 1931년생 이었다. 31년생의 연세에 인터넷을.. 잠시 후 내가 원하는 가격의 집 몇 개의 주소를 확인하시고는 지도를 꺼내셨다. 여느 부동산 벽에 붙어있는 큼지막 한 지도가 아닌 A4용지 2장정도의 크기의 지도. 그 지도를 언제 부턴가 가지고 계셨는지 색이 누렇게 바랬지만 몇 군데 번지를 제외하곤 또렷하게 보였다. 보관을 엄청 잘하신 것도 잘하신 것인데. 심지어 할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그린 지도였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대동여지도? 나는 마치 고대유물이라도 발견한 양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동산계의 김정호 옹을 내가 만나고 있는 건가?’ “할아버지 직접 그리신 거예요?” 할아버지는 웃으며 얼버무리시고, 실은 그냥 오래된 인쇄물인 듯 했다. 눈이 안 좋은 할아버지와 나는 손주와 할아 버지로 빙의하여 조그만 그 지도에서 위치를 탐색하기 시작. ‘내가 할아버지의 수고를 덜어드려야지, 내가 얼른 찾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음과 동시에 할아버지 탐색종료 “아. 여기 있네” 집을 찾아가기로 한 할아버지와 나는 어떻게 갈지를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여쭌다. “할아버지 혹시 오토바이 괜찮 으세요?” 독자들이 들으면 여든 넘으신 할아버지한테 오토바이가 말이 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할아버지 걸어가기 힘드시니.. 오토바이가 있냐는 할아버지는 화색을 하시며 그럼 잘됐다며
“자네는 오토바이를 타고오게나.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감세.” 자..자..자..자전거????? 여기서 몇 해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대화가 생각난다.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닐까하는 여든 넘으신 할아 버지의 말씀에 “영감탱이 황천길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이 났냐!”는 할머니의 호통. 암튼 부동산할아버지가 자전 거를 지금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머니도 아니고 자전거를 원래 타셨으니. 내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시 는 것에 대해선 말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부동산 문을 잠그시고 담배를 한대 무시고는 능숙하게 자전거를 타고 앞 으로 가신다. 담배 피실 때는 한손 코너링까지... 대동여지도를 보고 찾아간 집을 둘러보고는 다시 부동산에 돌아와 새로운 집이 나오면 전화를 주시겠다며 나의 간 단한 인적사항을 받아 적으시는. 게다가 명필! 할아버지. 집은 못 구했지만, 덕분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추억을 다시 한번 되새겨주신 동광부동산 고광수 할아버지. 담에 저랑 한강 자전거 라이딩 한번해요. 글구 할아부지 할아부지 나 할아부지랑 살면 안돼? 아아아앙
into the jazz - 문제3: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실력’이다.
INTO THE JAZZ 요즘 음악이 인간의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과거에 도 음악이 우리 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많이 있었지만 말그대로 ‘ 설’과 ‘주장’일 뿐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증명된 사례는 많이 없었다. 또, 우리가 잘알 고 있는 모짜르트 음악이 IQ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또는 태교에 좋다는 것 역시 주 장일뿐 실제로 학계에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기에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 다고 이야기한다. 아무튼 이러한 많은 음악관련 ‘설’들이 주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뒷받침 또는 오류을 증명할수 있는 과학적 연구가 요즘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 은 흥미롭다. 2011년 4월 20일자 Science Daily지 “Childhood Music Lessons May Provide Lifelong Boost in Brain Functioning”란 제목의 기사가 무척 흥미롭다. Neuropsychology 란 학술지에 실린 The Relation Between Instrumental Activity and Cognitive Aging
글. 이상준
란 제목의 Brenda Hanna-Pladdy그리고 Alicia MacKay의 연구논문을 소개한 기사이 다. “음악이 우리 뇌와 인지능력에 미치는 영향”를 보고한 기사로서 음악이 실제적으 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한번쯤 눈여겨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60세에서 83세 사이의 건강한 성인 70명을 과거 음악활동여부에 따라 3개 의 그룹으로 나누어 이뤄졌다. 첫번째는 음악교육 및 음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 두번째는 음악교육 및 음악을 해본 경험을 1년에서 9년정도 가지고 있는 사 람들, 그리고 마지막 그룹은 10년이상의 음악교육 및 음악활동을 해온 사람들로 나 눠졌다. 음악교육과 음악경험이 서로 다른 이 3그룹에게 인지능력시험(Cognitive Test)이 주 어졌고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음악교육과 경험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3번째 그 룹이 공간시각기억(Visuospatial Memory), 사물인지(Naming Objects), 그리고 새로 운 정보에 대한 흡입능력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높은 능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고 2 번째 그룹이 두번째로 음악교육과 경험이 전혀 없는 첫번째 그룹은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연구는 보고 하고 있다. 이 연구를 진행한 Brenda Hanna-Pladdy과 Alicia Mac Kay는 지난 날의 음악교육과 경험은 우리의 뇌와 인지능력에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결론을 내 린다. 실험결과가 말해주듯 음악을 접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리의 뇌는 분명 더 발 달되고 더 좋은 효과가 있어 보인다. 음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 긍정적이다. 한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성악이 아닌 기악훈 련(instrumental activity)을 받은 사람이었고 음악 역시 서양음악으로 독보(musicreading)를 바탕으로 음악교육과 경험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우리는 주 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에 다른 성질의 음악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기악이 아닌 성악, 서양음악이 아닌 비서구권 음악, 그리고 시각적인 독보중심의 음악교육이 아닌 철저히 귀만 이용한 청각적 음악교육. 예) 락 또는 팝음악) 역시 같은 결과를 가 지고 올지 아니면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올지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하다. 서론에서 이야기했듯 과거 음악관련 연구는 그저 ‘설’ 또는 ‘주장’에 가까웠고 단순히 정서(?)에 좋다고 우리가 알아왔다. 그러나, 전파와 자기장을 이용한MRI(자기공명영 상)의 발명으로 우리는 음악이 실제로 인간의 뇌에 어떤 자극을 주는지 확인 할 수 우 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있게 되었다. 많은 관련연구가 Neuroscience(뇌과학)분야에서 현재 이뤄지고 있고 이제는 ‘설’이 아닌 실제로 음악이 어 떤 영향으로 우리에게 주는지 알수 있는 점은 무척 고무적이라 할수 있다. http://www.sciencedaily.com/releases/2011/04/110420112058.htm http://www.apa.org/news/press/releases/2011/04/music-lessons.aspx
이상준 email: jonleemusique@yahoo.com website: www.jonleemusique.com
“이보게, 시란 무엇인가?”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05.30 http://cafe.daum.net/badabie
절벽
사람은 절벽에 서면 마음이 간질간질 해 집니다. 이거 확! 하고 마음을 먹지 않아도 슬쩍 실수 아닌 실수라도 하면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지랑이 같은 생각이 슬금슬금 마음의 틈을 비집고 올라옵니다. 아래서 절벽을 올려다 보면 그 현기증 나는 높이에 그런 생각은 절대 안할 것만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 보면 또 다릅니다. 그것이 처한 환경과 상황이 주는 요지경 같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땅은 절벽의 아래와 위가 연결 되어 있습니다. 기껏해야 돌아 올라가는 몇 백 미터. 집 밖에 나와 라면을 사러 들르는 수퍼마켓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삶은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 지극히 다른 이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평생 그런 일 없이 살아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누군가는 일상적으로 절벽 위에 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의 땅을 나누어 쓰는 이상, 인생의 물결이 오고가는 이상 누가 그 위에 설지는 아무도 모르고 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지간해서는 누구나 한번쯤은 절벽에 설 차례까 돌아오고 맙니다. 결국, 당장은 아니어도 우리는 그 위에 서게 되고 평생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도 얼결에 발을 헛딛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눈을 돌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까요? 애써 손을 잡으려고 다가서고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당신이 응당 믿고 서있는 땅에도 허방이 그득합니다. 별일 없이 걷다가도 굽이 빠지고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졌다가 어쩐일인지 평생 일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스치면서라도 얼굴을 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절벽의 위와 아래를 나누지 않는 일이 아닐까요. 같은 땅에서 나누어 걱정하고 함께 극복하는 것. 이것이 사는 게 아닐까 합니다. 여기, 저에게 절벽의 아래와 위가 같은 곳이란 것을 알려준 세권의 책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더위를 피하실 때 함께 하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유아사 마코토 / 빈곤에 맞서다. 장 지글러 / 빼앗긴 대지의 꿈 마이크 데이비스 / 슬럼, 지구를 뒤덮다.
글. exxx
장 뒤뷔페 (Jean Dubuffet) ‘나는 무엇을 잘 못해.’ 이 말을 하긴 쉽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해.’ 이게 어렵죠. 왜 어려울까요? 겸손이 미덕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크게는 잘한다고 자평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객관적으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분야, 예를 들어 달리기 같은 경우, 국민 대다수 가 자신의 100m내지 50m달리기 기록을 알기에 평균내기도 쉽죠. 프로선수와 비교하면 잘하지 못 하지만 대중과 비교하면 잘하는 것일 때 편하게 ‘나 잘해’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 중,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감 상하고 잘한다, 나쁘다 얘기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무언가를 많이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접해도 영 감이 안 오는 분야가 있지만 접하다보면 적어도 취향은 생기니까요. 그런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의 구분을 하는 것이 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접해가며 취향을 넓히거나 깊이 파고드는 것을 취미생활이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취미 하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잘 치냐고 물어보시면 멜로디를 왼손 코드에 맞춰 연주할 정도이지만, 꽤 좋아합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기도 하고요. 만약 집에 피아노가 없다면 저는 피아 노를 치는 생활을 할 수 없겠죠. 우리 집에선 오로지 저만이 피아노를 칩니다. 다행히 소음문제로 이웃에게 헤를 끼친 적은 없었으나 각자 방에 있는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는가하고 신경이 쓰이곤 해요. 그래서 가끔 엄마에게 여쭤봅니다. 너무 시끄럽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음악 은 잘 모르지만 딸내미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좋아.’ 라고 말하십니다. 네, 저 사랑 많이 받고 자랍 니...가 아니라, 그러니까 엄마의 말씀에는 ‘엄마는 좋긴 한데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좋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하는 태도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잘 모른다는 것은 많이 접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피아노를 치고 도서관에서 책빌리는 것처럼 흔히 연주할 공간이 있다면 아마 다른 생활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면 하는 것이다가 자연스러워지는 것을요. 무언가를 좋아한다-싫어한다 구분하고 좋은 것을 취하며 탐구하는 것은 개인 취향을 공고하게 하 거나 혹은 다른 차원으로 높여줍니다.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인 것이며, 건전한 취미생활 환경이 조성되어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크게는 사회의 문화융성과 함께 가는 말로 아마추 어 감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잠재적으로 아마추어 생산자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산,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거죠. 결국 풍부한 아마추어 대중은 그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것. 따라서 무언가에 대한 이론을 깊이 알 때만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 리라 여기는 풍토는 사회적 결핍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에 대한 결핍이냐. 예술이 소수의 엘리트화 된 것에 비해 중간층이 즐길만한 여유와 환경이 없다는 것의 고백입니다. 그러니 까 예술향유가 생활이 아니라 교양인 삶을 산다는 거죠. 이론은 잘 몰라도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것
에 스스럼없는 층이 넓다면, 그것의 저변이 넓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 무 언가를 접하고 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기 때문에요. 따라서 예술작품이 좋다 싫다고 말하는 사 람이 많다면, 그 판단의 수준을 차치하고 대중도 예술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인 거죠. 그런데 사람 들은 대부분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흔히 듣게 되는 말이 ‘내가 잘 몰라서...’이 고요. 그리하여 무엇이 왜 좋은가를 말할 때 엘리트의 말에 기대게 되는 것이죠. 예술에 잣대를 댈 수 없겠으나, 그 잣대가 있다면 엘리트가 알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장 뒤뷔페는 콧방귀를 뀌죠. 뒤뷔페는 ‘예술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작품’을 연구하면서 전통적이고 진부한 창작의 원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이러한 ‘전통적’ 예술이야말로 문화적 예술보 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그의 창작 방식 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진정한 발견이었다. 뒤뷔페는 ‘예술은 한 사람(예술가)의 전유물이 아 니라 모두의 것이며, 타자로부터의 어떤 가르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장 뒤뷔페 [우를루프 정원]도록의 서문 18p 잣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장 뒤뷔페를 이번호 예술가로 꼽은 것은 순전히 그의 사상 때문이에 요. 그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을 따돌린 채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엘리트 문화를 비 판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내는 그림, 정신병원 에 갇혀있거나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은 이들의 그림을 수집하고 컬렉션 시켰습니다. 그렇게 그가 주창한 아웃사이더 아트를 살펴보면 대중보다는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광인의 광기에 의 한 예술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넘사벽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 다고 생각돼서 부분적으로만 동의하지만요. 예술에서 순수함과 광기를 드러내는 것. 정신을 번뜩 뜨이도록 낯설게 만드는 힘. 새삼 번뜩 뜨인 정신이 새로운 것들을 깨닫는 것, 잊었던 것들을 깨닫 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우선은 단순 유희로써 좋다-싫다를 밝혀보는 것이 분명히 도움될 겁니다. ‘예술은 놀이, 즉 정신의 놀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주된 놀이인 것이다. 여기 순간적으로 헝 겊뭉치를 쳐다보는 아이가 있다. 어떤 생각이 아이의 머릿속을 스친다. 아이에게 헝겊뭉치는 이제 인디언이다. 그리고 진짜 인디언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헝겊인형을 두려워하기로 결심 한다. 실제로 아이는 헝겊인형이 무섭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이것이 단순한 헝겊뭉치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애초에 인형을 인디언이라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다분히 장난끼의 발동이다. 아이는 헝겊인형을 인디언이라고 믿기로 결심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믿게 될 것임 을 알고 있다. 아이는 바로 이런 식으로 정신이 작동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신적 과정의 실험과 검증이다. 아이는 마치 아기가 작은 발 을 움직이면서 노는 것처럼 이렇게 자신의 정신을 움직이면서 논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같은 도록 233p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