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비밀 안(not)스러운 생활 / 사진. 글. beamil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사진. 글. @Ahopsi 영화로 읽는 시공간 / 글. 곡주대비 서울시 시민 연극 교실 참여 기록 / 글. 이범 전시일정 및 포스터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김수영 1 / 글. 고수진 독신자의 독서일기 / 그림. 이다솜 글.권고마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독후소설 / 그림. 황은정 글. 김종소리 0,0,0 / 글.그림. Night Planet 뼈그림 / 글. 그림. 왼손이 건축이 좋아 : 테시마 박물관 / 글. 사진. aoikasa 제주도 버스노선 한방에 이해하기 / 정리. @tasteprice 웹디자이너 생존 매뉴얼 / 글. 그림. 김성연 부산 오뎅 이야기 / 글. odeng 마을길 마포 1로 “큰나무 길” / 글. 사진. exxx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장롱영화제 광고 바다비 일요시극장 광고 테오 얀센 (Theo jansen) / 글. 그림. 지인
휴가들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폭염이 끝나고 저녁 바람이 서서히 차가워지고 있 습니다. 비로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온 것 같 습니다. 월간이리는 이달부터 마을 미디어 지원센터의 후원 을 받아 부수의 증간과 함께 배포 지역을 늘릴 수 있 게 되었습니다. 매번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많 은 분들을 찾아 뵐 수 있게 되어 무척 즐겁습니다. 이달에는 새로 시작하는 코너들이 많이 있습니다. 숨겨진 마을 산책로를 소개해주는 <마을길 마포 1 로>, 건축을 이야기하는 <건축이 좋아>, 시민과 함 께 하는 연극을 생각해보는 <서울시 시민 연극교 실 참여기록>등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외에 도 제주도 버스노선 한방에 이해하기도 실렸습니다. 월간이리와 관련된 소식을 하나 말씀드리면 뒷면 표지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지인님의 전시가 9월 9 일부터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본 문에 포스터도 들어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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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안( not)스러운생활 2013 SEPTEMBER
8. 3 17:02
‘hole’
좋아하거나 혹은
hole : 구덩이, 구멍, (작은 짐승이 사는) 굴
기대했던 사람들 과의 갈등. 좋았던 것과 좋아지는 것.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믿음의 부재. 녹음 (綠陰). 변화의 시작. 겨울을 기다림.
8. 4 14:40
좋아했던 것, 좋아지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했지만, 의미없는 갈등이었다. 문제는 믿음의 부재였다. 내가 지금 아무도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 문제였다. 대상이 바뀌고 안 바뀌고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선택 전에 먼저 내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달의 반은 무진장 더웠고, 이제 슬 귀뚜라미가 운다. 반 중에 무더운 날 한 번 등산을 했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진 지금 나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 때때로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등산, 그리고 정상은 꽤 좋은 변화의 조짐이 되었다. 누구나 하는 말이겠지만 산을 등반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딛음-장애물-포기 또는 정진-공포-결정-사건-희망-성취 같은 것들이 다 들어있었다. 참 신기했다. 특히 각각의 상처나 즐거움을 가진 이들과 불쑥 마주치는 일은 100년 시대의 축소판같았다. 오르는 길에 다 받아들였고 내려오는 길에 다 비우게 된다는 것. 끝까지 감동이었다. 내게 바다가 사색, 계곡은 망각이라면 산은 무아였다. 조금 더 산을 알고싶다. 산은 믿을 수 있다. 그렇다고 산이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더 강하게 한다. 이미 겨울을 기다린다. 눈덮인 한라산에 오를거다.
* Android, i-Phone APP ‘인스타그램’의 필터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만 실어요.
영화로 읽는 시공간 곡주대비
계층의 재현: 설국열차와 숨바꼭질 비교분석 (Dynamics of Class: Comparative analysis of Snowpiercer and Hide and Seek) 백수가 된다는 건 슬프지만 복된 일이다. 물론 일시적이어
이며 그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이나 목격하게 되는 것들 (
야 한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최근 하던 강의들 몇 개를
하류계급 여자의 무단 가택 침입이나 빈민층 아파트에서
종강하고 한 이 주 여 시간을 빈둥빈둥 영화관에서 보내게
보여지는 하층민의 생활상) 은 명백히 하류계급에 대한
되었다. 덕분에 좋은 영화들과 그 잔상들을 다른 일들로
혐오스러움을 내적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날리지 않게 되어8천원 이상의 기쁨을 맛보았던 것 같다. 쉽게 말해, 설국열차는 하층민의 승리를, 숨바꼭질은 중 설국열차는 필자를 포함해 이미 너무나도 관객들이 거쳐
상류층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사실상
간 영화고 숨바꼭질도 의외의 선전을 하고 있는걸 로 알
보여주려 하는 것이 계급의 갈등이나 재현만은 아닐 것이
고 있다. 또한 이 두 영화를 다 본 관객들도 적지 않을 것
다. 혹은 계급의 문제가 메인 이슈가 아닐는지도 모르겠
이다. 이 두 작품을 다 본 이리 독자들이 있다면, 너무나도
다. 하지만 봉찬욱 (봉준호 감독, 박찬욱 제작) 의 작품 설
다른 장르와 다른 스타일의 이 두영화 에서 눈에 띄는 공
국열차에 경우 그 들의 전작들과 스타일로 미루어 계급의
통점을 인식한적 이 있는가?
문제가 분명 심도 있게 고려 되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의 심의 여지가 없다. 봉준호 감독들의 전작들에서 끊임 없
일단 이 두 작품은 스토리상의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의
이 재기되는 노동/피지배 계층 (화염병이나 고문 등의 소
대립으로 그 공통점을 갖는다. 설국열차에서의 열차 뒷칸
재들의 쓰임)의 활약, 박찬욱 감독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하류층/피지배 계급) 사람들이 앞칸 (상류층/지배 계급)
부르주아와 노동 계층의 마찰, 혹은 노동 계층의 무법적
으로 가기 위한 폭동과 숨바꼭질에서 손현주 캐릭터 (미
인 침입 (Three Extremes에서의 박찬욱 파트, cut) 등은
국 유학 출신의 부유한 상속자) 가 자신의 호화롭고 안락
이 두 감독들이 사회 계층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이 어
한 아파트에 무단 침입해 거주 하고자 하는 하류층 모녀
떻게 이번 설국열차 라는 작품에 묻어나 오는지를 보여주
로부터 자신의 가정을 구하려는 사투는 굳이 영화를 ‘분
는 좋은 예들이다.
석’ 하지 않아도 보이는 뚜렷한 계층간의 갈등이다. 흥미 로운 것은 설국열차 스토리의 중심인 커티스는 하류계층
계층이라는 같은 소재를 반대의 시선 (설국열차-> 피지
의 영웅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의 소지자 임과 반대로
배 계층, 숨바꼭질-> 기득권) 으로 그려낸 이 두영화의 입
숨바꼭질에서의 주인공이자 영웅인 손현주 분은 상류층
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는 일단 숨바꼭질부터 보자.
입양자로서 부모에게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상속받은 손현주 캐릭터는 미국이 친정인 아내와 아이들과 고급스런 레스토 랑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상류층 가장이다. 영화 초반부터 손현주 캐릭터 주변을 맴도는 하층민들, 홈리스 노인, 빈민 아파트의 거주자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다던지, 정신 착란증과 같은 증세를 보인다던지 (범인 을 제외하고도) 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대부분의 관객이 손현주 캐릭터와 계층적으로 더 (하층민 등장인물들 보다) 동떨 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현주 캐릭터에게 동화되어 하층민 등장인물들과 더 큰 거리감을 두는 효과를 준다. 반대의 예인 설국열차를 봤을 때 피지배 계층인 커티스가 히어로로 분한다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설 국열차 에서 보여지는 지배계층의 행태는 숨바꼭질의 손현주 처럼 도덕적이지도 고상하지도 않다. 가령 틸다 스윈튼의 흉 측스러운 외모 (우리는 그녀가 실제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지만), 향락 칸에서 곳곳에 쓰러져 있는 마약에 찌든 사 람들, 기차에 대한 집착이 아니면 그 어떤 면도 직관적인 능력이 보이지 않는 에드 헤리스 역할 등 상류층의 캐릭터 중 그 어떤 인물도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 두 작품 중 그 어떤 작품이 더 도덕적으로 적합하다던지 하는 견해를 필자는 절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계층을 심도있게, 더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을 본다면 설국 열차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스포일러가 될 것을 무릅쓰고 꼭 언급하고 싶은 씬이라면 앞칸 병력과 뒷 칸 민간 병력의 전면 대결이다. 이 장면은 두 계층이 결정적으로 정면으로 무력진압/대항을 하는 씬으로 군인들의 가면 쓴 모습의 위협적인 establishing shot이라던지 뒷 칸 군대의 희생이 low angle shot 으로 보여진다 던 지 하는 다채로운 테크닉이 보여진다. 필자는 항상 영화를 볼 때 인물 위주로 보는 편이다. 모든 영화의 인물이 주요한 요소인 것은 극명한 사실 이지만, 필자는 그 이상으로 인물에 집중하고 그 인물의 배경에 집착하는 편이다. 따라서 인물들의 계층에 관한 이슈는 언제나 필연적으 로 집중하는 요소가 되어왔는데 최근 비슷하게 개봉한 이 두 작품을 통해 한 두 특정 인물들이 아닌 한국 사회 혹은, 사회 전반 적으로 계층이 인식되는 시선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어 특별히 포만감이 드는 백수 주간되었음을 밝힌다. 이 리 독자들도 이 작품들, 혹은 다른 영리한 영화들로 ‘배뻥’ 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울시 시민연극교실 참여기록 강의에서 다루는 희곡의 한 장면을 두 사람이 짝을 이루어 보여주는 것, 시민들이 커리큘럼의 희곡 중에 선택한 작품을 팀을 이루어 지도하고 발표를 연출가. 이범
돕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9월 10일에 강의하는 <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 중견 배우 한 분과 배정되었다. 내 아내는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다며 스케쥴을 조정하고 있다.
1. 공고를 보았다. 서울시의 <시민연극교실> 운영 관련 공고. 그 중
3. 커리큘럼의 희곡들
한 파트에 <작가, 연출가> 자격으로 선발되어, 11
강의계획서에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이 두 편인
월 26일 까지 참여한다. 이 글들은 그 시간들의
점을 배제하고, 총 10편의 희곡이 등장한다. 강의는
기록이다. 전부터, 일반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12회 차인데, 그 중에 현대연극 감상과 발표 시간이
연극 프로그램이 없을까 라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있어서, 희곡은 총 10편이 되는 셈. 8월 13일 워크샵
오히려 이런 부분에는 현장에서 필요한 능력 그 이상의
때 시민청의 바스락홀에 모이기 전에는 어떤 희곡에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생각 또한 해 왔다. 그렇다면 이번
자신이 배정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10편을 다
<시민연극교실>은 그동안의 짧은 단상들을 정리할 수
읽어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건 8월 13일 이전 이야기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일부다.
이번의 글은 8월 13일과 20일에 진행된 <시민연극교실
몇 개의 익숙한 희곡들이 있어서 일까, 그 간의 메모를
> 사전 워크샵에 대한 스케치와 8월 13일 이전, 옛
살펴보니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을 가장 먼저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는 10여 편의 희곡을 읽으며 보낸
읽었다. 이 대목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시간의 일부를 담았다. 평소에 연극작업이나 희곡에
없다. 그 다음은 <코카서스의 백묵원>, 그리고 <
관한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분들에게는 매우
우리읍내>, <세일즈맨의 죽음> 나머지 희곡들은 후에
생소한 이야기로 느껴지실 수도 있겠다. 그 부분은
언급하겠다. 밝힌대로 이것은 8월 13일 이전 이야기의
실제 워크샵의 진행 내용이나 커리큘럼에서 오는 것이
일부다.
아니라, 내 글 솜씨의 미흡함에서 오는 것임을 감안해 주셨으면 좋겠다.
<세일즈맨의 죽음> 은 아서 밀러라는 극작가가 우리나라에 6.25가 발발하기 전 해에 발표한 희곡이다.
2. 8월 13일(화) 시민청 바스락홀
무슨 상관이냐고, 모르겠다. 또 이 양반은 우리나라가
9월 3일 첫 번째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8월에 두
휴전하던 해에 <시련>이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이
차례의 워크샵이 진행됐다. 8월 13일에는 이번 사업의
작품은 요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할아버지가 연출을
배경 설명, 질의 시간, 행정적 절차, 커리큘럼의 설명
맡으셨다고 뉴스에 나오는 그 작품이다. 나도 대학 때
등이 이어졌다.
이 작품을 연출했었다. 그게 1998년의 일이고, 요즘
이번
서울시의
<시민연극교실>은
3개의
그 시절에 관한 희곡을 한 편 쓰고(?) 있는데, 구상만 7
참여하는
년째다. 이 희곡의 주인공은 그 시절의 한 친구를 실제
프로그램의 명칭은 <시민과 배우가 함께하는 연극의
모델로 하고 있는데, 그 친구는 어느새 박사가 되었고,
탄생>. 선발된 책임강사의 커리큘럼에 따라, 12
결혼을 했다. 곧 아이도 낫겠지. 이 희곡의 주인공은
주 동안(1주일에 1회) 강의가 진행되고, 그 마지막
자신이 다음에 어떤 극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지 빨리
주에 이루어지는 참여 시민들의 장면(시연) 발표로
써달라며 울며불며 매달리고 있는데, 현실의 모델은
마무리 된다. 책임강사로는 한예종의 김석만 교수님이
오늘도 아내의 요리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선발됐고, 두 분의 운영조교, 그리고 나를 포함한 20
고상하게 늙어가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아, 지금
명의 배우가 선발되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어쨌든 아서 밀러 라는
선발 공고가 나간 뒤, 책임강사의 커리큘럼을 메일로
극작가는 마를린 먼로 라는 배우와도 결혼했었다고
받았다. 우리 배우들의 기본적인 역할은 책임강사가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극작가라고나 할까?
프로그램(섹션?)으로
운영된다.
크게
내가
이건 또 무슨 소리? <세일즈맨의 죽음>은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열연으로도 유명하다_ 물론 더스틴 호 프만을 떠올리면, 웽웽 거리는 우리나라 성우의 콧소리가 먼저 들려오기는 하지만_ 모르겠다. 일반인들은 어떤 때에 희곡을 읽는지. 난 공부하려고 읽었다. 알아야 잘난 척도 할 게 아닌가. 지금은 잘 안 읽는다. 잘난 척 할 대상이 없지 않은가.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그래, 지금 나는 8월 13일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꼭 읽어야만 하는 10편의 희곡을 받아들고, 마치 그 한 편 한 편이 경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안에서 온갖 환희와 갈등과 욕망과 좌절을 맛보려 했던 20여 년 전의 그 계절과 닮은 8월 13일 이전의 이야기. 무.엇.이 달라진걸까? 이번 기회로 다시 접한 <세일즈맨의 죽음> 은 상당히 괜찮았다. 구차하게 서술할 수도 있는 평들을 일축하는 하나의 문장은, 그리고 그토록 감명받은 이유는, 내가 그 사이에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명한 작품은 이게 문제다. 인터넷의 두산백과에 다 나와 있는데 도대체 여기 뭘 쓸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그 즈음 쓰쿠르가 깔아놓은 잔디 위에 캐츠비가 서 있는 풍경_ 그리고 도대체 디카프리오는 언제 늙는건가_ 라고 생각하는 지점, 그곳. 예술은 거창해서 잘 모르겠고, 좋은 작품은 그 작품을 통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 놓는 것 같다. 거기서 한창 유영하고 있을 무렵, 내 얼굴이 담긴 실종자 전단지를 전봇대에 부치는 아내의 뒷모습에 소스라쳐 깨어나는 그 어떤 곳. 4. 다시 8월 13일(화) 시민청 바스락홀 첫 번째 워크샵이 있었던 8월 13일의 얘기는 간략하고, 건조하게 적을 수 밖에 없다. 실존 인물이 등장하고, 프루스트를 좋아하지만 그렇게 쓰는 건 취향이 아니다. 기시감, 8월 13일에는, 이번 사업의 배경 설명, 질의 시간, 행정적 절차, 커리큘럼의 설명 등이 이어졌고. 전체 진행은 책임강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① 전반적인 배경 설명 -우리는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과-->문화예술과-->시민문화팀-->서울뉴딜일자리사업> 을 통해 <배우 강사> 타이틀로 참여하며, 우리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시민과 배우가 함께하는 연극의 탄생 > -강의는 연극사의 흐름과 연극이 상연되었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 가운데 주옥같은 희곡을 뽑아서 책임강사의 강연과 배우의 시연으로 이루어짐. 그리고 시민이 선택한 작품에 배우들이 같이 참여하여 지 도하고 발표한다 ※그리고 참여배우들의 질문시간이 이어졌다. ② 질문 시간 -남, 녀 역할을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가 -시민청의 공간을 활용해 시민들을 지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 -시연하는 장면의 길이는? -줄거리나 구성이, 하나의 매듭이 풀어지는 장면으로 선정해 볼 것. -밥을 씹어서 먹여준다는 심정으로 임해주기 바람.
-9.3~10 사이에 시민들의 참여팀이 결정될 것임 ③ 행정적인 처리 -이걸 어떻게 쓴단 말인가 ※그리고 김석만 책임강사의 이번 강의내용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④ 시민연극교실_연극의 탄생 커리큘럼에 대한 설명 -희곡과 당대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다루고 (예를들면, 경연대회 예산이 국가 예산의 40% 였던 고대 그리스의 사회상) -변별성을 굳이 들자면, 기존 시민연극교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지만, 이번 <연극의 탄생>은 연극이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지점에 대한 내용을 강의하고, 시민들은 이 연극의 장면에 주인공으로 참여하며 시대의 공기를 느껴본다 -한 주 강의의 구성은 강의 60분, 장면의 실연 15분, 질의응답 45분/ 총 2시간으로 이루어질 예정 ⑤ 그리고 다음 강의에 대한 예고_시민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하나의 매뉴얼(?) -오디션에서 커텐콜로 가는 동안 배우의 작업 과정_ 그 단계를 이야기하고 실습한다. 그리고 이 연습이 배우가 시민들과 만나는 동안 하나의 지침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5. 8월 20일_시민청 바스락홀_2차 워크샵 두 번째 워크샵이 이루어졌다. 지난 시간의 강의에 대한 복습, 연기의 쟁점에 대한 강의, 팀별 발표 희곡 장면 선정 그리고 시연 워크샵으로 진행되었다. ※ 4번 글 중 <시민과 배우가 함께하는 연극의 탄생> 커리큘럼과 두 번째 워크샵의 이론적인 강의 자료는 9월 중에 만들어지는 인터넷 카페에 올려 진다고 하니, 자세하고 전문적인 내용들은 다음에 링크를 달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① 지난 시간 강의의 복습 -오디션부터 커텐콜까지의 과정을 <연기의 쟁점> 이라고 표현해보자 -이 연습은 누구를 위한 연습인가? (예를 들면, 배우가 일반적인 검술을 배우는 것과 햄릿, 레어티스의 결투 장면에서의 검술을 익히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연기란 등장인물이 그 순간에 하는 생각을 배우가 하는 것이 아닌가? 연기란 그 등장인물의 행동이다. ② 연기의 쟁점에 대한 강의 -오디션>첫 연습>독회연습>블로킹>전체연습>총연습>공연>커텐콜로 가는 과정
※이 하나하나의 과정들은 챕터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면서 진행되었다 -행동(담긴 생각)과 행위의 용어적인 구분 -인물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_그 예로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되는 졸업식 노래_를 다같이 불러봄_진짜 다같이 불렀다, 3절까지. -과거를 통해 현재의 동기가 유발되거나, 미래를 위해 현재의 목적이 만들어지거나 -연습의 리듬은 인생의 리듬과도 닮아 있는데 ㉠로맨스(연애)_과거 진상 규명작업_이름, 번호, 선호도, 그녀가 어땠을까, 과거의 상처가 있는가 ㉡정밀화(은밀화)_둘 만의 시간, 자신들만의 세계 ㉢일반화_같이 행사에 참여하러 다니고.. (장인의 생일까지 알고 있다면, 이제 결혼 할 시기가 아닌가) -서브텍스트(대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 내재된 의미(숨어있는 의미) -내면의 독백_충동구매를 예를 들어 설명_충동구매는 과연 충동구매인가, 축적된 무의식이 발현된 것은 아닌가.. 이러한 부분이 교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닌가 -대사를 외우는 메쏘드_주어와 동사를 운전자와 엔진에 비유하여_공회전 하지 않는 법 ③ 팀별 발표 희곡 장면 선정 -팀별로 책임강사와 면담 -살아있는 인물의 시연, 그리고 즐겁게 소화할 수 있는 장면으로 구성해 달라 ④ 시연 워크샵 -안톤 체홉의 희곡 <벚꽃동산>의 첫 장면(6개의 대사)을 자원한 6팀이 단계에 따라 책임강사의 주문으로 시연하여 보여줌. -이러한 시연과 실습을 통해 습득한 과정을 시민들을 지도하는 시간에 응용하기 바란다는 취지와 함께 -시연 실습의 형태 ㉠팀별로 자유롭게 ㉡책임강사가 정해 준 블로킹을 따라서(촛점의 이동) ㉢책임강사가 모든 배우들에게 전해 준, 각기 다른 상황을 감안하여 -각 시연의 사이에, 배우의 연기가 변화하는 지점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6. 마무리 강의 받은 내용에 대한 실습을 끝으로 두 번의 워크샵은 종료되었다. 8월19일부터 21일 사이에 시민연극교실에 대한 모집이 진행되었다. 얼마나 많은 분들과 함께 할런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어쨌든 9월3일 <연극이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 이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모임이 이루어진다. 책임강사의 강의내용에 따르면 다루어지는 희곡은 <오이디푸스 왕>이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그 때의 기록부터다.
강세기
회사 옆 미술관
http://kangjoseph.tistory.com
여름에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 하다 오래 전부 터 생각해왔던 비평공모 도전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출은 포기했다. 이런 글이면 좋겠다 는 생각을 실현하기가 참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그린 그림은, “아티스트 콜렉티브가 현재 미술씬에서 어
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보 여주기 였다.
그러나 자료수집과 논리세우기, 그리고 쉽고 재미있게
글로 표현한다는 작업이 참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 기가 되었다. 마치 건축에서 구조물을 세우긴 했지만 세
부 골조로 채워야 되는 순간에 딱 막힌 듯 했다. 작업을 보면서 머릿속을 떠도는 이야기 거리를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도 준비과정 중에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이들이 밟아온 길을 따라 걸으며, 작업이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 지 추적하는 일도 상당히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이 글과 아티스트 사이트에 들어가 그들의 작업을 보니 아직 풀어내지 못한 얘기가 많다.
듬성듬성 완성된 글을 기고하려니 오글거리고 부끄럽지 만, 첫 노력의 소산으로 기념하고자 올린다. ^^;;
아티스트 콜렉티브는 2~3년 전 각종 미술매체와 평론가 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며 희미한 주목을 받았다. 구지 희 미하다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콜렉티브 작업을 하는 그
룹은 누구누구더라’는 일종의 현상이나 유행에 가깝게 다뤄졌기 때문이다.
국내 콜렉티브는 개수가 수십 개를 달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열거와 단편적인 소개는 있었어도 체계적인 연구
와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콜렉
티브가 각기 개성에 따라 보여주는 다양한 시각적 효과 가 또 새로운 형태를 가지지만, 이들이 동시대 미술씬에 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에 대한 파악은 아직 미미 한 듯하다.
당시 한국의 콜렉티브씬이 태동기 상태였기 때문에 다소 피상적인 소개만이 가능했다면, 현재는 지금까지 몇 콜
렉티브의 작업을 통해 이들의 시도가 단순한 현상에 그 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남길 수 있을지 궁 금했다.
아티스트 콜렉티브 artist collective는 2 인 이상의 예술 가들이 벌이는 공동작업의 형태를 지칭한다. 위키피디
아는 아티스트 콜렉티브는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는 2인
이상의 예술가들의 자발적 조합으로 빛어낸 창작물, 작 가그룹 또는 구심점(initiative)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작가간 협업이 시작된 시기는 가늠할 수 없다. 확실한 것
총 13개 콜렉티브의 작업으로만 전시를 채운 아르코미
다. 그렇다면 왜 콜렉티브를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 단면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수십년 후 미술사에서 이
은 이 현상이 최근 들어 새로 생긴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 시작을 기존 콜렉티브와의 차별성에서 바라보려 한다.
소그룹, 동인으로 통용된 과거 콜렉티브는 먼저 주류 미
술에 대한 저항을 그 동력으로 한다. 80년대 소그룹 운
동이 단적인 예로 서구 미술사조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 과 재생이 극에 달한 주류 미술계의 모노크롬과 민중미 술의 대립구도에 반발한 젊은 예술가들이 제3의 길로 소
술관의 ‘2인 공화국(2013.7.18~9.1)’ 는 현재 콜렉티브
들을 기억한다면 경향으로서 콜렉티브 그룹이 아니라 일 개 아티스트로서 남을 확률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
조로서 콜렉티브는 자리매김 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
떤 발자취를 남겨야 할까, 그리고 존재하는 콜렉티브에 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걸까? 라는 질문 앞에서 위 전시 참여자에게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룹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이들은 소위 주류와 차별화된 미학적 매니페스토 를 바탕으로 작업을 전개하는 특징을 보인다. 사상적 연 대라는 강력한 동인이 존재했다. 이는 물리적 통합에 우 선하는 과거 콜렉티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최근 콜렉티브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
양한 동력(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한다. 불
특정 다수가 자유로이 왕래하는 오픈형 구조 속에서 이 들은 단순히 개별 프로젝트를 위한 분업에서부터 자신
의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 위한 도구로 콜렉티브를 활 용하기도 한다.
구성원간의 관계구도 역시 기존은 A+B에서 AB를 만들
거나 C를 만들었다면 최근의 콜렉티브는 A, B, C가 그
대로 있는 동시에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점에서 차별화를 보인다. 따라서 콜렉티브는 반대로 완성된 프로덕트 보 다는 모여서 시너지를 내는 부분이 존재한다.
한가지 장르에 구애 받지 않는 시각적 자유로움과 어디
따라서 이 지면을 통해서는 단순한 시각예술 작업을 넘
TV예능에서 나오는 용어로 ‘캐릭터 하나 잡으면’ 그 쪽
콜렉티브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들의 결과물은 모양새는
로 전개될지 모르는 무방향성에 대한 신선함이다. 흔히
으로만 침잠하기 쉬운 1인 아티스트와는 다르다. 그래서 전시장소, 미디어, 퍼포먼스, 음악 공연 등 타 장르에 대
한 낯가림 없이 얼마든지 그 형태는 변화무쌍하다. 한 가 지 미디어로 정형화 할 수 없는 콜렉티브의 유연성은 그 들의 가장 큰 가능성이다.
어서는 작업을 보여주는,일종의 무브먼트로서 작용하는
각기 다르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일정 공통점을 지니며, 옥인 콜렉티브, 파트타임스위트와 일본의 침 폼의 활동 을 소개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어떤 점에서 비슷 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옥상
위에 언급한 콜렉티브(옥인, 파트)의 작업에 공통적으
로 등장하는 옥상은 현재 예술가의 위치를 그대로 재현 하는 듯하다.
이명박 정권의 성과주의는 그대로 예술계에도 도입이 되 었고, “취업=능력”의 잣대가 그대로 예술에도 적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낮은 취업율로 대학종합평가 점수를 깎 아먹는다는 이유로 미술학도는 학교 내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되고 있는 시대, 더 이상 전시를 못하는 예술가는 백수로 몰리고 있다.
미술학과는 더 이상 신비의 장소가 아닌 그저 학생 1인당
공간활용도가 가장 높은, 다른 말로 하면 방만 많이 차지 하는 잉여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줄어드는 정부와 학교 의 지원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2030대의젊은 세대에게 “옥상”이란 “88세대”까지는 아
이런 배경에서 옥인과 파트타임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로 꼽는다.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 공간은 옥상에 국한되지 않
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들 세대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IMF를 기점으로 우리 젊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낭만과
부러움에서 현실에 매여 허덕이는 삶 자체로 이동한다.
옥상은 위 현상을 적절히반영했다. 사실은 밀려갔다는 고 빈 지하(언더 인테리어), 공터(오프-오프 스테이지), 옥상(루프더루프) 등 다양하다.
이제 우리의 살 집은 드라마 “남자셋여자셋”의 단독주택
파트타임스위트는 인터뷰에서 “도시에서 공간을 찾아나
부터 노골적인 옥탑이 등장한다. 그 이후로 옥상은 자연
유사하게 굴러갔다는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지하의 공
에서 2000년대 초반 MBC 드라마 “옥탑방고양이”에서
스레 젊은 세대에 수용되어 88세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작용한다.
가는 과정이 비슷한 상황의 젊은 친구들이 처한 상황과 간을 썼고, 그 다음은 공터, 그 다음에 옥상에 올라갔는 데 그 과정은 예산 때문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옥상달빛(실제로 옥상달빛은 청춘 힐링밴드라는 별명에
상황은 옥인도 마찬가지이다. 강제철거를 앞둔 옥인아파
그라드는 가사로 구성된다), 장윤주의 옥탑방라디오(흔
순한 질문으로 시작한 옥인 콜렉티브는 그 첫 프로젝트
걸맞게 젊은 세대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간은 오 히 젊은이들의 멘토라 평가 받는 장윤주는 최근까지 거 주한 옥탑방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민다) 등 옥상은 젊은
세대의 피할 수 없는 현실, 그리고 거기에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나타내는 용어로 나타난다.
트에서 “어떻게 우리의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단 를 옥상에서 시작한다. “옥인동 파캉스”라는 제목의 프
로젝트를 통해 철거가 진행되어 반쯤 폐허가 된 아파트 의 옥상에 올라간다. 퇴출로가 없는 적지에서 마지막으 로 몰리는 형국이랄까.
낮은 목소리
대한민국의 핵심 권력이라면 누가 뭐래도 평당 최고 가 격수준의 금싸라기 땅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사는 미 대사관저 옆자리에 소심하게 계단을 설 치하는 행위, 그 자리에 삼각뿔을 던져 자신의 존재감
을 아무도 모르게 알리려는 행위를 통해 이들은 목소리 를 냈다.
이 작품을 “야간에 담 너머로 던져 설치했다”는 작가의 설명은 이 행동이 능동적인 의지에 의한 설치작품으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다.
점거의 확산
아티스트로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콜렉티브의 행보는
매우 조심스럽게 전개된다. 어떤 이는 타협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더인테리어와 오프-오프 스텐이지를 통해 존재를 알 린 파트타임스위트의 전시행위가 이를 나타냈다. 그들은 “하지 않는” 행위를 택했다. 지하 전시장을 비우고 물을
채워 넣은 것. 관객은 그 사이를 장화를 신고 돌아다닌
2011년 9월에 시작된 상위 1% 기득권층에 대한 99%의
하는 상황이라면 아예 손을 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일까?
파는 미술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리티시즘과 자본
다. 사방이 새하얀 이상적인 화이트큐브는 꿈을 꾸지 못
이들은 위층 식당으로 인해 거멓게 내려앉은 곰팡이의 흔적과 전 세입자가 남긴 설치물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
다. 작은 행동이지만 건물주와 싸워서라도 페인트를 칠
하는 식으로 화이트큐브를 만들려는 유혹을 받았을 법하
저항인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의 여 의 전당이 되어가는 공공미술관의 비판을 기치로 오큐파 이 뮤지엄(Occupy Museum) 운동이 촉발되어 MOMA, Frick Collection, 뉴뮤지엄 등 뉴욕의 주요 미술관 점거 시위로 이어졌다.
지만 그들은 주인의 요청에 순종한다. 아니면 부족한 예
비록 이 현상은 일회성의 정치적 이벤트로 치부될 수 있
수하여 전시의 일부로 구성했다. 이는 기존 질서에 대한
하려는 노력으로서, 상기 콜렉티브는 작품의 일환으로
산의 한계를 수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흡 저항보다는 타협을 즐겨 하는 젊은 세대의 특성을 대변 하는 듯하다.
이 소심성은 초반작업 전면에 등장한다.
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자신의 설 자리를 확보 서 점거의 방식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들의 점거는 단순한 물리적 행위를 넘어서 소통과 기
능이 단절된 도시의 공간에 새로운 통로를 연결해 준다 는 점에서 차별화를 보인다.
요즘 유행어를 빌어 정의를 하자면 ‘힐링’ 점거라고 할
까? 옥인 콜렉티브는 개발과 효용을 구실로 자행되는 폭력에 맞서 옥상을 점거한다. 그리고 그곳을 거주민이
버리고 간,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오브제로 새로운 공간 을 창조한다.
이들의 점거는 세분화 되어 나타난다. 건축물에 대한 점 유, 예술을 통한 점유, 기억을 통한 점유, 그리고 거리 점 유라는 다양한 방식을 혼합했다.
먼저 주거공간의 기능을 상실한 옥인아파트라는 건축물
을 물리적 점유를 통해 이를 치유한다. 비록 일시적인 해 프닝이지만 이들은 폐허의 공간에 사람의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다. 볼링장(볼링 포 콜럼바인), 바(고스트바), 그 리고 숙식장소와 파티, 공연, 여가놀이를 연이어 진행하 며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는 자들에게 아직도 이곳에는 생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재미있는 점은 옥인아파트는 콘크리트와 베이지색 페인
트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의 전형적인 산물이
지만 그 속에 여전히 생명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아파트
건축과 철거 모두 그 자체로 정권의 폭력을 나타낸다. 당 시 공기나 비용이 일반 토양에 비해 두세 배가 드는 암반
지대에 건축허가를 내며 무리하게 들어선 아파트는 40 년이 지나 그대로 반복되어 이제는 그 곳을 헐고 원상태 로 돌려놓았다.
생명(자연)을 몰아내고 다른 생명(인간)을 들여보내 다
시 4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다시 원래 생명(자연)
으로 복귀한다고 하지만,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정책가 들의 성과보고서에만 남을 뿐이다. 이들이 파헤치고 다
시 원상복귀 시켜 놓은 그 자연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생명을 잃은 인공자연 뿐이다.
옥인 콜렉티브는 끊어진 관계에 대한 회복의 일환으로
투어의 이름으로 거리점거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고스
트 워킹을 통해 현재 단절된 현실에 대한 목도하고, 그리 고 물리적인 점거가 불가능한 시점, 즉 생명이 존재했던
옥인아파트 건설전의 생명은 정선의 산수화를 통해 아카 이브 형태로 무형의 점유를 시도한다.
이들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끄집어 내어 기억상실증에 빠진 우리가 잊고 있던 옥인 아파트의 기억을 연결한다. 기억을 통한 점유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 기억은 옥인동
을 넘어 개발과 발전 그리고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소외 된 자연, 전통적 가치, 또는 인간성에 대한 기억까지도 연결하는 다리 구실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파트타임스위트의 점거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아무 쓸모없는 공터를 점유함으로 그 곳에 가치를 부여 하고, 텅빈 그 곳에 ‘장소’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그 곳의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즉 장소감을 가지게 된다.
무정형성과 영역의 확장 구성원의 유동적인 출입은 콜렉티브가 가진 최고의 자
산이 아닌가 한다. 몇몇의 인터뷰를 통해 모두를 일반화
할 수 없지만 이들은 고정적인 구성원이 되기를 거부하 며 매 프로젝트마다 다양한 동료들과 협업을 진행한다.
백지장도 맛들면 낫다고 했던가.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 진 복수의 구성원의 탐험심은 이들의 시각적 결과물을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성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 중 옥인콜렉티브는 그 개방성이 다른 콜렉티브보다
날것에 가까운 감성, 소소하고 때로는 ‘찌질한’ 삶을 관
모양새가 매 회 변화를 거듭한다. 진화 또는 발전이라는
는 보다 근본적인, 날 것 같은 해프닝에서 조금은 퍼
차별화 된 듯하다. 그래서 보여지는 형태 또한 그 종류와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기록을 위한 사진, 리서치(데이터 베이스), 음악공연, 퍼
통하는 이야기를 관찰하거나 수집하는 것에 관심보다 포먼스에 가까운 해프닝으로 발전, 진화 또는 변화되 고 있다.
포먼스(해프닝보다 보다 연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계획
비단 미디엄 뿐만이 아니라 관계적인 측면에서도 탁월
용하는), 그리고 웹케스트까지 그 영역은 무제한 적으로
지 기대를 하게한다. DIY를 넘어 DIWO(Do It With Oth-
된), 해프닝(특별히 창안된 환경 속에서 관객 참여를 허 확장 중이다.
함을 보이는 콜렉티브는 그확장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 ers) 즉, ‘타자와 함께 하기’를 핵심으로 하는 이들 방
식은 미술가 그룹을 넘어 이미 디자이너, 인문학자, 패 션디자이너, 철학자, 정치가 등으로 활동반경을 확장 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 확장은 장르간의 경계를 넓히는 것을 넘어 대립하는 상대방의경계 역시 확장되는 모습을 보 기를 원한다. 80년대 미술계 내부의 경직성에 대한 반
발, 그리고 자본주의와 몰인간성, 도시화에 대한 반대
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콜렉티브는 향후 어떤 상대를 만나 이야기를 펼쳐나갈 것인지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보면 콜렉티브의 태동은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 하는 구성원이 다소 충동적으로 그리고 느슨하게 시작하 는 모양새를 띈다. 따라서 백지라기 보다는 가공전의 찰
흙과도 같은 모습에서 한 두개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그 모양새가 빛어지는 형태를 띈다.
옥인 콜렉티브와 파트타임스위트가 지금까지 진행 프로
경향으로 다가왔던 콜렉티브가 지니고 있는 시너지가 다시 한번 동시대 미술판에 서 주목 받았으면 하는 바 램이다.
아티스트 사이트 파트타임스위트 www.parttimesuite.org
젝트가 10개 남짓한 상황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현재 진
옥인 콜렉티브 http://okin.cc/
지하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다.
참고목록
그러나 콜렉티브의 매력은 어디로 빚어질 지 모르는 묘
기-80년대 소그룹 운동의 비평적 재조명, 청음사, 2000
브의 모티브인 “작가로서 철박한 환경에서 다른일을 병
http://www.podopodo.net/forum/round/detail.asp?seq=11
에 대한 자문자답격인 프로젝트를 보면, 그 방법이 흔히
ㅇ 파트타임스위트 포트폴리오(서울시립미술관 아카이브)
행형인지도 모른다. 내부적으로는 정해졌어도 대중이 인
ㅇ 인터뷰-김관수, “TARA(Tabula Rasa 1981-1990)”, 한국현대미술 다시읽
한 긴장을 유발하는 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옥인 콜렉티
ㅇ 아티스트 콜렉티브의 힘
행하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ㅇ 옥인콜렉티브 단행본
하는 정치적 행위와 그 모양새가 확연해진다.
ㅇ 당신의 도시를 점유하라, 심영규, 월간 Space 8월호 ㅇ퍼포먼스 개념의 일관성 (http://www.arko.or.kr/zine/artspaper90_09/19900917.htm)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김수영 I
“진실은 불편하다” 이번 호에서 다룰 문학작품은 지독했던, 잔인했던 60년대 부조리한 시대를 그만의 언어로 풀어보려 노력한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이다. 김수영이 죽은 지 50여 년이 지났다. 민주주의는 이루어 냈으나 완전한 자유의 모습은 아니다. 허용된 자유, 2013년도의 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체제가 마련한 자유 안에서 우리는 체제가 요구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오늘은 자유정신을 목청껏 내며 진정한 인문정신을 걸어가기 위해 노력한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괜찮은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김수영은 자신을 사랑하고 이 대한민국을 무척이나 사랑한 시인이었다. 그래서 61년 군사독재가 시작되고부터 그를 그답게 하지 못하게 한 일체의 것에 저항하였다. 초기 김수영의 작품은 50년도를 전후한 당시의 모더니즘 경향을 따르고 있었다. 문명에 대한 비판, 암울하고 불안했던 시대의 흐름 같은 것을 시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56년 「눈」을 시작으로 관념성에서 탈피하여 시대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볼 작품은 65년에 발표한 작품이며 이는 60년대 군사독재 정부로 얼룩진 시대, 탄압당하는 예술정신을 지키기 위한 목소리였다. 정치권력과 자본주의는 우리의 눈을 가렸고, 우리를 길들이려 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만이 자신을 가로막는 억압을 느낄 수 있다. 반면에 허용된 자유 안에서 안락함을 느낀다면 체제의 모순을 자각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려는 인문학은 억압과 검열에 민감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김수영은 누구보다도 더 날카롭게 현실을 바라보았다.
4 19 혁명, 자유 정신의 수호
자, 이제 시의 전문을 살펴보자.
글, 고수진(gomin19@hanmail.net)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이발쟁이에게
가로놓여 있다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작으냐
너스들 옆에서
정말 얼마큼 작으냐……
경찰에게는 단 한마디 못하면서 갈비탕집 주인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내가 비겁하여 서럽고, 사랑하는 마누라와 자식을 핑계삼아, 그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 주어야 하는데 가장으로써 그러지 못해 부끄럽고, 월급을 주는 갑의 횡포에 바른 소리 한 번 못하고 굽실거려 서럽고, 이상(理想)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데, 앉아서 이렇게 시를 쓰는 자신이 부끄럽고 서럽다. 그의 시에는 서러운 김수영, 서러운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느 날 김수영은 고궁을 다녀왔나 보다. 고궁을 나오며 그는 권력과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1960년대 대한민국에 서글퍼졌다. 그러면서 그는 시를 통해 옹졸하게 반항하는 자신을 서글퍼 한다. 소시민적인 삶. 먼저 김수영의 시를 이해하려면 소민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소시민의 사전적 정의는 기존 질서 안에서 지배계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흔히 생활자체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모방하는데 만족하는 계층을 말한다. 김수영 시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소시민적 태도는 말로는 대의적 명분, 사회적 정의, 희생을 부르짖지만 막상 그것을 행동화 하지 못하고 개인적 안위와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시안에서 자기 스스로 소시민이라 칭하고 그 태도를 비난하고 있다.
속물근성, 비굴성, 그러한 것들이 일상에 도사리고 있고, 거기에 따른 고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시란 무엇인가? 자신만의 언어로 사랑, 삶, 예술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불친절하고 날이 서 있다. 불친절하지만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 그의 날선 자유정신은 명확히 알 수 있다. 맨 얼굴, 그의 시에는 맨 얼굴이 드러난다. 1968년 6월 15일 원고료를 받은 김수영은 오랫동안 자신을 도와준 신동문에게 한턱내려고 약속을 잡는다. 그런데 신동문은 가난한 시인에게 술을 얻어먹을 수 없어 지주 출신의 소설가 이병주에게 연락한다. 셋이 함께 마시면 돈 많은 이병주가 술값을 계산할 것이고, 그렇다면 가난한 김수영의 돈을 아낄 수 있으리라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가 오히려 김수영에게는 매우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신동문의 배려는 알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대접하기 위해 룰루랄라 온 김수영은 자존심이 무척 상해버리고 말았다. 1, 2차로 이어진 술자리에서 대취한 김수영은 소설가 이병주에게 ‘네 작품에는 울림이 없다고 ‘라고 자극했지만 이병주는 대인처럼 웃으며 그를 달랬다고 한다. 아이취급을 받는 그는 그 술자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이병주에게 주먹을 날리고 버스를 타고 자신의 집 마포에서 내렸다. 버스 종점에서 내렸을 때 그는 취해 비틀거렸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버스를 보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날 이병주에게 김수영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딜레당트’ 와 ‘울림이 없는 작품’ ‘딜레당트’는 어설픈 예술 애호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예술을 겉멋으로 추구하는 부류를 가리킨다. 이런 작품에는 당연히 울림이 없다.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고 흉내만 내는데 우리가 어떻게 감동을 받을 수 있는가? 진실성과 진지성. 울림, 소통. 그렇다. 삶과 예술 모두 다 같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이성부 시인이 아주 멋진 말을 했다. 사랑, 삶, 예술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온몸으로 부딪히면 그게 시가 되고 삶이되고 사랑이 된다. 그래서 김수영의 작품에는 그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선불교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말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맨 얼굴’ 즉 맨얼굴로 자신과 세상에 직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맨얼굴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당한 가면을 써야 내가 편하고 상대도 편하다. 서로의 상처를 줄일 수 있다.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 잘 살고 있다고 믿는 척, 사랑하는 척, 모르는 척, 나의 일이 아니니 척.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내 옆에 있는 ‘너’를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나 자신조차도.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벽’을 보면 된다. ‘벽’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그래서 벽에 다다른 진실은 늘 불편하다.
나의 무기력, 무능력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모습을 끝까지 본 사람은 그 이후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 아야 할 것은 김수영이 이 후「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같은 시는 더 이상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택은 나의 몫이다. 마주하여 평안함이란 벽을 깰지. 그래서 한 번 사는 인생 내가 누군지 더 다가갈지. 다음 시간에는 김수영의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살펴보려 한다. 김수영에게도 애절한 사랑의 시가 있었다. 그 의 언어로 쓴 이별의 시「너를 잃고」를 살펴보겠다. 벌써 하늘이 높아졌다. 가을이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독신자의 독서일기: 공중전과 문학 소설과 문학에 대해서는 쓰지 않고 싶었다. 더 잘 쓰는 이들이 많고 더 잘 읽는 이들이 많다. 나는 그저 역사 책 사회 책을 만들고 소설을 취미로 읽는 편집자일 뿐이다. 지난 한 달간 읽은 책이 하나같이 소설이어서 이래도 되나 하는 직업적 경각심이 생기기도 했다.
『월간 이리』 두 번째 마감일이 어느새 코앞이었고 무엇이든 골라야 했다. 한 달간 읽은 책 중 어쨌든 소설이 아닌 것이 단 하나,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이었다. 하필이면 제발트였다. 지난 5년 동안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소설가를 물으면 언제나 레이먼드 카버와 제발트를 꼽았다. (사실 카버와의 인연은 이리 까페가 무과수슈퍼 아래 있던 때에 프로젝트 이리 ‘문학을 들려주다’로 시작되었다. 카버의 「대성당」을 일종의 낭독 극으로 연출한 것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 장면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카버는 이제 한국에서 꽤 유명한 작가가 되어서 작년엔 『레이먼드 카버』라는 960쪽짜리 평전도 나왔다. 카버를 좋아한다면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제발트도 한국에 적잖게 알려져 있다. 특히 소설가 배수아 씨가 제발트의 팬인 것으로 유명하다. 배수아 씨는 『토성의 고리』 뒤표지에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 그리고 점차 번갯불처럼 명료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사실: 나는 제발트를 읽었다, 그 이후에도 하루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변한 것은 단 한 가지, 제발트 이전과 제발트 이후가 있을 뿐.” 이만큼 매혹적인 추천사로는 제임스 설터의 소설 『가벼운 나날』 뒤표지에 실린 신형철 씨의 글 정도가 떠오른다.
제발트는 1944년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반생을 보내고 2001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작가이다. 대부분의 작품을 독일어로 썼으니 독일인 작가라고 보면 된다. 1992년에 소설 『이민자들』을 발표했고 수전 손택의 추천사와 함께 영국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 우리 시대에 이와 비슷한 책이 발표된 적은 있지만, 이 책의 숭고함을 따라올 수 없다.” 제발트는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당한 사람들, 돌이킬 수 없는 구멍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그린다. 2차 대전에 관한 많은 소설들과 달리 그는 전쟁의 풍경을 직접 그리지 않는다. 그는 ‘이후’의 삶을 기록한다.
『공중전과 문학』은 문학동네에서 무려 ‘W. G. 제발트 선집 01’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다. 제목은 독일어판 원서의 제목 ‘Luftkrieg und Literatur’을 그대로 옮겼다. 영어판에서는 다른 글들과 함께 ‘On the Natural History of Destruction’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책의 표지를 처음 보았을 때, 내용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바로 이 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 디자이너는 ‘국자와 포크 디자인’이라고만 되어 있고 구글 검색으로도 자료를 찾을 수 없다. 판형에 비해 본문의 좌우 위아래 여백이 넓어서 처음에는 마뜩지 않았지만, 워낙 적을 게 많아 오히려 감사해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본문 말미에 실린 ‘주요 인물 정보’를 대강이라도 먼저 읽고 보면 좋다. 해외서에 실린 자료를 번역한 것이든, 아마도 편집자가 자료를 수집해 쓴 것이든, 귀한 자료다. 이 자료를 싣기로 한 편집자의 결정에 감사한다.
이 책에는 199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강연을 토대로 쓴 「공중전과 문학」, 독일 소설가 알프레트 안더쉬를 구실 삼아 전후 독일 문학을 비판한 「알프레트 안더쉬」가 실려 있다. 앞의 글 「공중전과 문학」은 어떤 비유적 의미 없이 ‘공중전’과 ‘문학’에 대해 말한다. “영국 공군이 독자적으로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고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으며 “독일 민간인 60만 명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된 사건. 그렇게 붕괴된 도시 가운데 미국인 포로 커트 보네거트가 살아남은 드레스덴이 있다. 보네거트는 이 기억을 『 제5도살장』에서 정말로 훌륭하게 그렸다.(품절될 줄도 모르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한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친구야 너 누구니.)
제발트는 수십만 명이 죽고 종전 무렵엔 750만 명이나 거리로 나앉았던 이 사건, 폭격과 공중전의 기억을 독일 사회에 환기했다. 그의 환기는 도발이었다. 제발트는 전후 독일 사회가 이 사건을 놀라울 만큼 감쪽같이 망각해버렸고, 전후 독일 문학이 거기에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무능함으로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는 “왜 독일 작가들은 수백만 명이 경험한 독일 도시들의 파괴를 서술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서술을 하는 데 왜 그렇게 무능했는가를 추적”(108쪽)한다.
하지만 그 추적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게 너무나 아름다운 소설을 쓴 소설가의 문학론이다. 이것은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다. 가령 이런 대목들이 그렇다. “파괴에서 형이상학적 의미를 구해내는 이들은 대개 그런 비참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이 하는 작업은 정확한 기억보다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76쪽, 강조는 인용자) “노사크의 글에서 적어도 상당 부분은 진리의 이상이 전적으로 소박한 사실성에 입각해 결의되어 있으며, 이 진리의 이상은 완전한 파괴에 직면하여 문학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근거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초토화된 세계의 폐허로부터 미학적이거나 유사 미학적인 효과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학이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박탈하는 처사이다.”(77쪽, 강조는 인용자) 그는 “형이상학적 의미”, “미학적이거나 유사 미학적인 효과” 같은 말로 전후 독일 문학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자신이 인정한 몇몇 소설가들의 작품을 “소박한 사실성”, “순수한 사실성”, “산문적 냉정성” 같은 말로 표현한다. 이 두 가지 대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첨예한 주제에 관한 말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 무책임한 독자는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잘 쓰면 된다. 어떻게 쓰든 잘 쓰면 된다. 나는 소설과 문학을 지도하려는 주장을 탐탁해하지 않는다. 소설이나 문학이 어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쓰고 싶은 사람이 쓰고 싶은 것을 쓴다.(단, 그가 자신이 쓰고 싶어 한 것을 잘 썼는가 못 썼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소설은 어떤 말이 덧붙든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개연적인 허구이다. 소설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데 물론 동의한다. 소설은 역사학과 사회과학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말할 줄 아는 훌륭한 문학을 한데 뭉뚱그려 규정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 문학은 그저 잘 쓴 ‘걸작’이다.
사실 나의 취향은 제발트의 소박한 사실성과 산문적 냉정성 쪽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에게 제발트의 소설은 잘 쓴 소설이다. 그는 자신이 쓰고 싶었던 것을 잘 썼다. 나는 그가 그린 황량한 풍경과 상실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의 문장들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이런 인물과 이야기와 세계를 아름답게 여길 것이라고 예감했다.
하지만 너무도 자주, 너무도 갑작스럽게 압도하는 기억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오로지 글을 쓰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갇혀 있었더라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져 결국 나는 그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기억들은 몇 달, 몇 년 동안 우리 마음 속에서 잠자면서 소리없이 점점 더 자라나다가, 결국 어떤 사소한 일을 계기로 되살아나 기묘한 방식으로 삶을 향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나 자주 나의 기억들과 이 기억들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굴욕적이고, 결국은 저주할 만한 일로 느끼곤 했던가! 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우리는 가장 단순한 생각조차 정리하지 못할 것이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심장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존재는 무의미한 순간들의 끝없는 연쇄에 불과할 것이고, 과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토성의 고리』, 299쪽.)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뚫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그 천장은 지난 몇 년 동안에도 내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어둠으로 덮었네. (『이민자들』, 240쪽.)
『공중전과 문학』 156쪽의 각주는 자칫 잘못된 내용일 수 있다. 1933년 독일 제국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은 각주에 적힌 대로 흔히 “나치스 정부가 반나치스 세력을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비상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강조는 인용자), 독일 역사가 브로샤트에 따르면 네덜란드인 “판 데어 루베의 단독 범행이 더 이상 부인될 수 없는 사실”로 1969년에 이미 확립되었다고 한다.(『히틀러 국가, 114쪽.) 아마도 편집자는 각주의 내용을 집념의 검색으로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검색 결과들을 거듭 확인했을 것이다. 사실 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자 일말의 여지를 남길 수 있고 엄격히 말해 틀렸다고도 볼 수 없는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알려져 있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적절히 책임을 회피한 셈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제발트를 좋아하는지에 관해서 소설가 김사과 씨의 글을 추천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막연히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정확한 언어로 만나는 경험을 했다. 2011년 11월 11일 “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게재되었다.
<끝>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 이 달의 선정 도서 『설국열차』, 자크 로브, 뱅자맹 르그랑 글, 장마르크 로셰트 그림, 이세진 역, 세미콜론, 2013
기후무기를 통해 눈으로 뒤덮여버린 지구.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변해버 린 지구 위로 1001량의 기차가 달리고 있다. 디스토피아의 방주. 설국열차. 그 안 의 사회는 이전의 사회와 다르지 않다. 체계화된 시스템.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계 층과 시스템 내에서 움직이는 계층. 시스템 밖으로 나가면 죽을지 모른다는 암묵 적인 공포. 만화 속 주인공들은 시스템에 의심을 품고 시스템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거나, 시 스템의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 이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어쩌면 단지 시스템 자체가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모두들 뭔가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그 런데 시스템을 파괴하거나 수정한다고 해서 그들이 원하는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걸까? 애시당초 성취하고자 하는 뭔가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어항 속 금붕어 정은이가 바다에 동경을 품게 된 것은 유치원 때 본 한 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바다 생물들’이라는 제목의 그 책은 일본에서 나온 일종의 어종도감이었는데, 정은이는 그 책에 그려진 물고기들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엄마 나 이거 보고 싶어.” 정은이는 책 속의 물고기를 가리키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바다에 가면 볼 수 있지. 근데 평소에도 볼 수 있다? 너 아침에 먹은 거 있잖아. 생선. 그게 그거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그건 까맣고, 이건 파랗잖아.” “그건 구웠으니까 까만 거고, 원래는 파래.” 이건 여담인데, 정은이는 그날이후로 지금까지,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은 절대 입에 대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정은이는 엄마에게 바다에 가자고 졸랐다고 합니다. 엄마는 바다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대요. 기차를 타고 여섯 시 간을 가야하고. 여섯 시간이면 유치원에 가서 집에 오는 시간까지 만큼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내내 기차 속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고요. “나 앉아있을게. 가자.” “거짓말하지 마. 너 심심하다고 떼쓸 거잖아.” “아니야. 나 떼 안 써.” “바다에 가도 물고기는 못 볼지도 몰라.” “왜?” “물고기들은 바닷물 안에 있거든.” “그럼 들어가서 보면 안 돼?”
“들어가면 숨을 못 쉬어.” “숨 참으면 되잖아.” “그만큼 들어가서는 물고기 못 봐. 물고기는 깊숙한 곳에서 살거든.” “얼마나?” “엄마 밥 차려야 되니까, 이따 아빠 오면 물어봐.” 아빠든 엄마든 물고기를 실제로 보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대요. 바다도 여러 번 다녀오고, 돌고래쇼도 보고, 수족관도 다녀온 뒤인 중학생 때 정은이는 자신의 진로를 스킨스쿠버로 정했습니다. 처음 스킨스 쿠버를 알게 된 것은 EBS의 다큐멘터리 덕분이었대요. ‘스쿠버와 해저생물들’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였는데, 정은이는 ‘이거다!’싶었다고 합니다. 매일매일 바다 속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이라니. 정은이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던 셈이지요. “엄마. 나 스킨스쿠버 하려고.” “스킨스쿠버? 그 바다 들어가는 거?” “응.” “그거 비싸지 않아?” “아니. 나중에 커서 그거 하고 살려고.” “스킨스쿠버를 하면서 산다고? 그거 돈 벌 수 있는 거니?” “몰라.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그거 하면서 사는 사람 있더라고.” “우리나라?” “아니. 외국.” “외국이잖아.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 없을걸? 그리고 너처럼 뚱뚱한 애가 무슨 스킨스쿠버야.” “뚱뚱한 게 왜?” “너 수영도 못하잖아.” 보시다시피, 정은이는 지금도 뚱뚱하긴 합니다. 아무튼, 그날이후로 일주일간 밥을 조금씩만 먹었대요. 물론, 일주일에서 끝났지만요. 이제 대충 감이 오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평생에 한 번 있는 특별한 날을 정은이에게 더욱 특별한 날로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제 긴 이야기를 들어주신 이 자리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저희 잘 살겠습니다.
* “고마워 오빠. 마음만으로도.” “아, 진짜. 돈 좀 주고 부탁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정사정해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제주도 쪽도 알아봤는데. 그쪽도 안 된대.” “근데 수족관에서 결혼하면 진짜 멋있긴 하겠다. 글도 재밌고 좋았어.” “대신 어항이라도 큰 거 갖다 놓고, 금붕어 몇 마리 풀어놓을까?”
야행성Night Pl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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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tter : @hitchhiker_j
<여섯번째 집(2004-2007)>
언니와 내가 언니네 학교 근처 원룸으로 따로 떨어져 나와 사는 동안 엄마와 아빠도 꽃가게
와 가까운 신축 빌라로 이사했다. 바로 전에 살던 다세대 주택은 부모님 소유였던 걸로 아는데 갑자 기 그 집을 전세로 내주고, 새로 전세를 얻어 이사한 사정은 자세히 모르겠지만, 대학에 다니는 자 녀가 둘인데다 자취까지 하고 있고, 거기에 꽃가게 이사가 겹치며 이래저래 돈 새나갈 데가 많았으 니 아마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언니와 함께 원룸에 살았던 1년간은 주말에만 왔다 갔다 하며 지내다가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면서 부모님이 사는 본가로 아예 짐을 싸들고 들 어와 살기 시작했다.
여섯번째 집은 단독 주택 두채를 헐은 자리에 12가구가 살도록 지은 한 동짜리 신축 빌라
였다. 빌라는 보통, 단지를 조성해서 대규모로 지어지는 아파트와는 다르게, 주택가에 단독 주택이 있던 필지 두, 세개를 합필해서 짓는 경우가 많은데,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와 비교했을 때 분양가가 저렴한 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집 값이 오르지 않아 투자 가치가 없다고들 하지만 쉽게 값 이 떨어지지 않는 장점도 있다. 아파트에 비해 놀이터나 녹지 공간, 커뮤니티 센터 등 주민들이 공 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조성되는 경우는 별로 없고, 주변 환경이나 기반 시설도 열악한 편인 데, 내가 살았던 빌라만 해도 한동에 사는 가구는 12가구인데 반해 1층 현관앞까지 겹겹이 차를 대 도 주차 자리는 6대 정도가 전부여서, 주차 자리를 두고 싸움이 자주 났었다.
집안 평면이나 구성은 아파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깊고 폭
이 좁은 거실이 있었는데, 거실 쪽으로 베란다가 없고, 바로 옆에도 집이 붙어 있는 주택가에 지어 진 빌라이다 보니 일반적인 아파트처럼 거실 전면에 큰 창이 나있지는 않았다. 여느 가정집처럼 거 실에는 창을 옆에 두고 TV와 소파가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었고, 소파 옆으로 키가 큰 행운목 화 분이 있었다. 이사다닐 때마다 따라다닌 녀석인데, 언젠가는 꽃을 피워서 20년 넘게 꽃집을 한 엄 마도 행운목에 꽃인 핀 건 처음 본다며, 사진도 찍어 인화해서 집에 붙여두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 다. 현관 왼쪽으로 화장실을 지나 집 안쪽으로 들어가면 가운데에 아담한 크기의 부엌이 있고, 오 른쪽으로 안방이, 왼쪽으로 작은 방 두개가 붙어 있었다. 이 두 방 중에서 내가 쓸 방을 골라야 했 는데, 한 방은 크기가 큰 대신 베란다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방이었고, 나머지 한 방은 한 쪽 벽에 장롱이 들어가고 나면 사람 두명이 어깨를 붙이고 누워야 할 만큼 폭이 좁고 창이 어두운 방이었다. 크고 밝지만 가족이 수시로 드나드는 방과 작고 어둡지만 사생활이 보장되는 방. 한마디 로 쾌적성과 독립성 중의 선택이었는데 그때는 멋모르고 쾌적성을 선택했었다.‘가족끼리 사생활은 무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건축학과 2학년을 마친 후 본가에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수중에 돈도 좀 있
겠다, 방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패션으로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자주 사용하고 머무르는 공간이 나 자신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어줍잖게 컨셉 도 잡고 스케치도 하고 돈이 생기는 대로 가구도 하나씩 사서 그림대로 완성해가는 재미가 있었는 데, 계획했던 대로 다 실행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사이즈를 재보고 여러모로 생각하며 계획을 세 웠는데도 실제의 방은 너무 작고, 잡동사니들이 많았다. 지금 그때의 스케치나 사진들을 보면 부끄 럽긴 하지만 내 방(집)이 나를 드러낸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고, 내가 지내는 공간을 ‘내 공간’으로 만드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부모님과 1년 반을 떨어져 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 문제 없이 지냈다. 나도
나름대로 바빴고, 매일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쉬는 날도 없이 일하시던 부모님과는 부딪힐 일은 커녕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이, 거실에 누워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를 함께 보는 것이 유일하게 함께 하는 활동이었다. 아빠는 맥주를 마시며 드라마를 봤고, 엄마는 늘 반쯤 보다 잠들었다. 나는 드라 마가 끝나고도 밤 늦게까지 프로그램 두개 쯤을 더 보다가 티비를 켜놓은 채로 소파에서 잠들어 아 침이면 잔소리를 들었다. 별 일 없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문제를 가진, 여느 평범한 가정의 평화롭 고 위태로운 날들이 삼개월 쯤 이어졌다. 그 때는 한 회라도 놓치면 큰일 날 것처럼 그렇게 티비 앞 에 모여 열심히 드라마를 봤지만 어떤 드라마를 봤었는지 기억나는 건 없다. 그러나 여섯번째 집에 서 살았던 시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엄마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파자마 차림의 아빠는 맥주와 유리잔을 앞에 두고 바
닥에 앉아서 어깨를 자기 손으로 주무르며“오십견이 왔나보다. 어깨가 아프네”라고 했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던 나는 바닥으로 내려와 아빠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평소엔 아빠랑 살 스치는 것 도 싫어하던, 살가운 구석이라곤 없던 차가운 딸이었던 내가, 지금 생각해도 무슨 바람이 불었었나 싶다. 그때 어깨를 주무르면서 아빠 등이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아빠도 늙는 구나 뭐 그런 생각. 아빠는 통 자기 입으로 어디가 아프단 소리를 하는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곪 아 터질때까지 병을 키우는, 자기가 어디가 아픈 줄도 모르는 그런 미련한 부류. 그 날로 부터 며 칠 뒤에 아르바이트를 하다 엄마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의 엄마가 울고 있었다. 나는 이유도 알지 못한채 따라 울었다. 엄마는 한참을 울다 전화를 끊기 전에 아빠가 췌장암 말기 임을 알려왔다. 어깨가 아픈 것도 췌장암 말기 환자의 흔한 증상 중에 하나였단 걸 알고 난 이후로 티비 앞에서 아빠 어깨를 주무르던 그 날의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아빠가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음에도 엄마와 나는 아빠가 아프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아빠는 마치 진단을 받기까지 참아왔던 사람처럼 증상이 악화되더니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아빠를 장미꽃이 그려진 항아리에 담아 일산에 있는 납골 공원의 30cm x 30cm x 30cm의 방에 남겨두고 엄마와 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52년을 산 평범 한 한 인간이 생의 마지막에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란 그 정도인 것이다. 남겨진 세 모녀는 마 치 한 남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구심점으로 모여있었던 사람들처럼, 미워할 대상을 잃고는 서로에게 서 멀어졌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심하게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건축이 좋아 #1 aoikasa Prologue. 건축을 전공하며 이 곳 저 곳 건물을 보러 참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 중 유독 마음에 남는 장소들이 있더군요. 머리가 아닌 마음이 먼저 반응해버리는 그런 장소들... 죽기 전에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던 그런 장소들. 한 편으로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오랜 시간 지내다보니 누가 지었는지도 언제 지었는지도 잘 모르지만 마음 속에 들어와 버리는 소소한 일상 속의 건축들도 생겨나더군요. 화려하지 않지만 그 곳에 계속 있어주어 고맙다는 기분이 들던 장소들.
‘우리동네이야기’ 연재에 이어 이번엔 제 마음 속에 남은 건축 이야기들을 해보려 합니다. 조금은 감성적으로, 조금은 말랑말랑한 기분으로 말이죠.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풍경을 잠깐 바라보는 시간을, 혹은 우리의 일상 속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을 보다. 테시마(豊島) 미술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건축과 예술. 천국같은 그 곳. 테시마미술관(豊島美術館、Teshima Art Museum)
2년전 이맘 때였다. 갑작스럽게 예약하게 된 오카야마행 비행기 티켓. 1박 2일의 짧은 시간 동안 나오시마와 테시마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카야마에서 우노항까지 그리고 우노항에서 나오시마를 거쳐 테시마까지…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지만, 파란 바다와 하늘아래 있던 테시마 미술관을 만났을 때, 그 때 그 순간, 그 감동을 아직 잊을 수 없다.
카가와(香川)현의 테시마(豊島)는 14.6km2의 면적에 1,000여명밖에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베세토 아트프로젝트로 유명한 나오시마 섬으로부터 약 4km 떨어진 작은 섬. 약 25,000년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는 이 섬은 농업 및 축산업, 어업이 발달하여 말 그대로 풍부한(豊) 섬이었는데, 1975 년 이후 인구의 고령화와 산업폐기물의 불법 투기로 인해 점차 쇠락해가고 있었다고 한다. 1990년 이후 산업폐기물들을 제거하고 섬을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약 2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현재는 다시 아름답고 풍요로운 테시마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9년부터는 한동안 중지되었던 쌀 재배가 다시 시작되어 테시마 미술관 부지 주변에는 푸른 논들이 펼쳐진 풍경이 만들어졌고, 그리고 2010년에는 비로소 테시마 미술관이 이 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테시마미술관(豊島美術館, ‘Teshima Art Museum’)은 건축가 Ryue Nishizawa(西沢立衛)와 아티스트 Rei Naoto(内藤礼)의 합동 프로젝트다. Nishizawa가 건축과 랜드스케이핑, 그리고 가구까지를 담당하 Naoto는 미술관 안의 설치 작업을 담당하였는데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방울’이라는 주제를 공유하며 함께 한다. 즉, 기존의 미술관에서는 건축가는 일종의 하얀 벽(?)으로 표상되는 작품을 둘 곳을 마련해주고, 아티스트는 그 위에 둘 작품을 만들어서 두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이 미술관에서는 이 둘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즉, 테시마미술관에서는 건축이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곧 건축이 되었다.
이는 테시마라는 섬의 자연환경을 다루는 Nishizawa의 랜드스케이핑 작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테시마의 항구에서 약 15분 언덕을 걸어오르면 언덕 위에 하얀 호빵(?) 같은 게 두어 개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데, 그 호빵(건축가는 물방울이라 하였는데, 너무 하얗다보니 자꾸 난 호빵처럼 보였다.)들이 바로 테시마 미술관이다. (항구에서 버스타면 금방 가는데 버스 시간 기다리기 싫어 걸었다가 36도의 날씨 아래 죽.을.뻔. 했었다… 그래도 걸었기에 그 호빵들이 보였다 말았다 하는 그 장면을 볼 수 있었으니 그 걸로 만족) 스페인 빌바오역에 내려서 빌바오 미술관을 보러가는 그 길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자태와는 너무나도 다른, 정말 극과 극의 경험이었다. ‘내가 빌바오의 바로 그 구겐하임이오’가 아닌 ‘내가 곧 테시마고, 테시마가 곧 나이요’라고 말하는 듯한 기분이라할까. 아무튼 이렇게 올라와서 작은 입구를 들어와 몸을 돌리면 매표소가 나온다. 고요하다못해 적막하여 ‘표 1장이요’를 말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던 그 곳. 그래도 조용히 가방을 맡기고 표를 받고 안내하는 분의 말씀을 듣고 미술관으로 다시 향한다.
표를 사면 바로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게 미술관의 관례이거늘, 이 곳, 그 것조차 거부해버렸다. 잠시 시원해졌나 했는데 다시 나가랜다. 다시 나가서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가라 한다. 그 길을 따라가다보니 테시마의 바다가 보이고, 푸른 논밭이 보인다. 그리고 만난 작은 숲. 숲길을 따라 가다보니 이제야 테시마 미술관이 눈 앞에 나타난다. ‘건축적 산책’을 통해 테시마를 충분히 경험하고 미술관에 오라는 건축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미술관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내부에 있는 아트 프로젝트가 아니라 테시마 전체 섬이라고 소곤소곤 속삭여주는 듯 하다. 건축과 랜드스케이핑이 하나가 되어 자연스레 흐르는 것이다.
드디어 미술관 입구. 입구 앞에 서 계시던 안내원 분이 신발을 벗으라 한다. 보기만 해도 뜨거워 보이는 저 바닥으로 맨발로 들어가란다. 그리고 사진도 찍지말고, 그림도 그리지 말고 그저 느끼라 한다. 살짝 긴장된 상태로 마치 어느 굴의 입구와 같은 콘크리트 입구를 통과한다. 그리고 약 1분 후 들어가던 모든 이들의 공통된 감탄사 ‘우오~’. 그 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모든 것이 있었다. 햇빛과 바람, 하늘과 벌레소리, 새소리,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마치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콘크리트의 감촉, 그리고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는 물방울들 (놀랍게도 이 물방울들이 Rei Naoto의 Art Work이다.) 낮지만 넓은 쉘. 그리고 그 쉘 한 가운데의 커다란 하늘을 향해 난 구멍. 그 구멍 사이로 흔들리는 줄 하나와 바람따라 흔들리는 나무 잎새들. 모든 소리와 모든 행동이 증폭되어 울림을 만드는 곳. 이 곳에서는 그저 ‘ 느낀다’라는 말 외엔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각각의 모습으로,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하며 마음껏 ‘테시마’를 즐긴다. 나는 조용히 누워 ‘순간을 믿어요’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들었다. 지금의 이 순간을, 마치 ‘천국’을 본 것같은 이 순간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있었는지 모르겠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듯한 경험. 아마 평생 잊지 못하지 않을까.
건축가 Nishizawa의 말처럼 이 곳은 예술과 건축, 그리고 주변 환경이 한 데 섞여 공존하는 바로 그런 장소이다. 잡지에서 봤던 ‘하얀 미니멀한 공간’으로서의 작품같은 건축이 아닌 ‘공감각적 경험이 살아있는 장소’가 바로 이 곳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2011년 8월. 테시마에서 난 ‘천국’을 보았다.
제주도 버스노선 한방에 이해하기 by @tasteprice
μ μ Έν λ² μ
웹디자이너 별볼일
없는
생존매뉴얼 스펙으로
Chapter 3
“영화 좋아하세요?”
{취향}의 생존매뉴얼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위의 질의응답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네”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상대부터 시작해 같이 일하게 될 사람, 혹은 친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잘 다니던 4년제 대학을 때려치우고 서울로 상경해
사람들에게 건넬 첫 질문으로 훌륭한 골격을 갖췄다.
발 빠르게 2년제 디자인 과를 졸업.
망망대해 같은 두 사람 사이에 선명한 선 하나를
막상 졸업하고 나니 받아주는데도 불러주는데도 없다.
그어주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이 악물고 익힌 갖가지 처세술과 생존법을 이용해
나는 혈액형이나 별자리는 믿지 않지만, 내 앞의 사람이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1년 6개월 만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뱉어내는 취향의 노드(node)들은 믿는 편이다.
앞으로 수주에 걸쳐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몸 건강히
그 점들을 잇다 보면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총체적 취향성이
살아남는 방법을 쓸 예정이다.
형상화되는데 그것으로부터 상당 부분 그 사람이 살아온
거의 모든 텍스트가 주관적 경험에 의거한 것이기에 관점에
삶의 궤적을 역추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 비판적 지점들이 상당 부분 형성될 여지가 크다.
그래서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국내의 많고 많은 웹디자이너 중 하나의 개별적 사례로
이 질문을 던진다.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전 회사에 팀장으로 있을 때 나는 꽤 다양한 면접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나이도 경력도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내가 누군가를 면접 본다는 자체가 사실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그래서 항상 어깨에 힘을 쭉 빼고 면접실로 들어갔다. 면접에 있어 엄숙함을 버리자 내 시선은 이내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내 앞에 앉은 처음 보는 사람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경험들이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됐던 것 같다.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내 면접의 첫 질문은 항상
그 아이가 현대미술을 접하려면
‘영화 좋아하세요?’ 였다.
KTX를 타고 시골을 빠져나와 서울에 내려
내가 면접 본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영화를
유명 미술관에 표를 끊고 들어가 관람을 해야만한다.
싫어한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한 문화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하지만 디자이너들의 면접치고 취향에 있어 보편적이고
그 시골아이는 현대미술에 대한 취향은커녕 존재의 유무조차
평범한 답변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모르고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갈수록 난해해져만 가는 현대적 예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물질적, 정신적 투자가 필수이다.
내가 면접자들의 답변에 대해 기대를 걸었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취향 역시 단순히 주말에 어떤 영화를
역시나 디자이너라는 독특한 직업성 때문이었다.
보며 시간을 때울까 하는 부가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디자이너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집단이라고
우리는 손쉽게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서 자본에 의해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선된 4~6개 정도의 영화 중 하나를 택일해서 본다.
그러면 옆집에서 누가 창문을 드르륵 열며
즉, 우리에게는 선택의 폭이 6개밖에 없다는 말이다.
‘취향에 높고 낮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거기에서 벗어나 ‘나는 조금 더 다양한 선택의 폭을
내게 소리칠지도 모른다
가지고 싶어’ 라고 생각한다면 독립영화관이나 군소
그렇다면 나는 그 물음을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영화관들을 방문할 것이다.
답변으로 미루고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그는 취향에도 분명히 위계가 존재하며 취향의
취향의 폭을 넓히기 위해 시간과 경제적인 투자를 하는
민주주의는 재앙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수동적인 문화적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보다
신형철이 말하는 취향의 위계란 문화 자본적인
취향의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측면으로 바라보면 조금 더 이해가 쉽다.
멀티플렉스에 걸리는 영화들 대부분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손쉽게 다량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시골아이가 한 명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른바 군소 영화들은 관람자의 능동적인 자세를 필요로 한다.
그 아이가 사는 곳에는 푸른 들판과 우거진 숲은 있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관람자의 자세란 비단 영화관에서
미술관은 없다.
영화를 볼 때 마땅히 행해야 할 에티켓만을 지칭하는
그 아이가 태어나 감상해본 미술이라곤 학교의 선생님들이
것은 아니다.
그려서 벽에 걸어놓은 풍경화 몇 점뿐이다.
그것은 취향의 폭을 넓히기 위해 관람자가 스스로 투자하는 시간의 총체성에 가깝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귀요미 펑크녀는 회사의 면접에서 떨어졌다. 나는 적극적으로 펑크녀를 뽑자고 실장님께 의견을 개진했지만, 면접장에 안 계셨던 실장님은 그녀의 외관과 특이한 이력, 그리고 나의 말을 종합해 그 당시 회사에 다니고 있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 판단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펑크녀와 일하고 싶었고 실장님의 그러한 결정에 며칠간을 삐친 상태로 회사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한 시간의 총체성 속에는 아마도 문화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성숙한 태도가 상당 부분 습윤 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면접 본 사람 중 자신의 취향에 대해 놀랄 만큼 확고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을 통해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진행해보겠다.
펑크녀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느냐고 누군가 내게 질문해오면 우선, 얼굴이 내 스타일이었고(죄송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변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준비해온 포트폴리오는 아마추어틱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분명 남들과 다른 시각적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면접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펑크녀의 강한 포스에 압도돼 쭈뼛거리다 자리를
7월의 더운 여름날, 나는 면접 때 물어볼 질문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프렌차이즈 커피숍의 친절한 점원마냥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제일 처음 질문은 영화 혹은 취향에 관한 것.
녹차와 커피 둘 중에 어떤 것을 드릴까요? 라고 물어봤다. 펑크녀는 얼음물을 주문했고 나는 냉큼
약속시간 10분 전에 면접자가 들어왔다.
뛰어가서 얼음물을 담아왔다.
면접자는 20대 초반의 여성이었고 짧은 커트 머리에
펑크녀는 더웠는지 얼음에 담긴 물을 원샷한 다음,
노란색으로 염색을 했다. 눈가에 스모키 화장이 그득했고 머리카락색을 빼고는 단 하나의 색상도 없이 온통 블랙이었다. 그녀는 굽이 높은 펑크스타일의 메리제인슈즈를 신고 있었지만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귓불은 피어싱에 의해 남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뭔가 조화롭지 않은 두 개의 기운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가는 느낌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날따라 회사에는 실장님과 이사님이 계시지 않았고, 내 앞의 이계(異界)적 마력을 내뿜는 펑크족 여성을 혼자 상대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마른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얼음 한두 개를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그러한 펑크녀의 모습에서 면접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아예 보이지 않았는데 예의가 없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무구함 같은 것이 배어 나와 오히려 호감이 갔다.
나는 첫 질문으로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봤고
[의지의 승리]에 나오는 신체적 아름다움은 자본을
펑크녀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위한 것이 아닌 오롯이 하나의 이념으로(비록 그것이
그리고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비윤리적일지라 하더라도)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영화들에 대한 장광설을 내 앞에 펼쳐놨다.
순수한 육체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고 말이다.
지금은 꽤 오래된 일이라 펑크녀가 말한 많은 영화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지만,
나는 순간 위험하지만 멋있다고 생각했고, 속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반짝이며 대답하는
말로 말리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모습은 기억에서 잘 잊히지 않는다.
펑크녀는 소설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중에서도
겉모습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중요하게
일본의 극우 문학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인식하는 듯 보이는 펑크녀의 취향은 역시나 특이했다.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압권이었는데
갈수록 빡세지는군! 이라고 속으로 생각한 나는
펑크녀는 히틀러시대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펑크녀에게 도덕적인 것과 미적인 것의 상관관계에
레니 리펜슈탈의 작품인 [의지의 승리]를 제일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고 물었다.
좋아한다고 말했다. 펑크녀와 나치라, 말랐던 내 이마에
그녀는 물론 도덕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다시금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창작자로서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나는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이름을 대학 시절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
교양수업으로 수강한 세계 영화사 시간에 얼핏 들었던
순간 내 머리를 향해 1톤 해머가 슝 날라와 머리를 강타했고
기억이 났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린 생각의 파편들을
히틀러로 대변되는 나치의 선전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서둘러 다시 조립해야 했다.
작품을 21세기의 펑크복장을 한 귀여운 얼굴의 여자가 좋아한다는 사실에 사뭇 위험함을 감지한 나는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용기.
떠듬거리며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분명 히틀러고 나발이고 예쁜 건 예쁘다고
펑크녀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말할 수 있는 깡다구를 지녔다.
자신은 히틀러와 그를 둘러싼 게슈타포[gestapo]를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정말 싫어하지만 하나의 절대적인 권력이 다스리는
나는 그 당시 그녀의 생각에 백 퍼센트 모두 공감한 것은
제국주의에는 이상한 순수성 같은것이 있는것
아니었지만 참 용기 있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같다고 했다.
또한, 펑크녀의 모습에서 내가 가진 부족한 것들에
한계는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낸다고 했던가?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나는 그러한 맥락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했고
사람 앞에서, 그것도 면접 자리에서 내가 아름답다고
계속 경청해나갔다.
생각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야기 할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많은 의구심을 남긴 채 펑크녀와 나의 인연은
펑크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짧은 면접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영화 [의지의 승리]를 보면 어린 독일병들이 햇볕에
혹시나 펑크녀가 세상이라는 벽에 막혀 무구함 대신 영악함이
탄탄한 근육질 몸을 드러내며 격렬한 운동을 하는
가득 들어차지는 않았을까하는 괜한 염려도 들지만
부분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 컷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분명 어딘가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용기있는 발언을
그런 부분들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지속해나가며 멋지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더 크다.
주위에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보자.
선배 디자이너들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자신의 취향을 위해 노력하시는 편인가요?’
혀를 끌끌 차면서 ‘네가 아직 배가 덜 고파봐서
‘무슨 소리임?’이라고 답변하는 다수의 디자이너
그래’라고 말했다.
사이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는 몇몇 디자이너들이 보인다. 분명 자신의 깊은 내면에 귀를
나는 대학등록금때문에 제대로 된 방학을 보내 본적
기울일 줄 아는 진중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없는 88만원 세대를 살아왔고 먹고 사는 문제를 등한시 할 만큼 현실감각이 없지도 않다.
사실 상업디자인을 하다 보면 나의 독특하고 특별한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데 있어
안목보다는 대중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표현해야 할
맹목적으로 주위의 물질적 풍요만을 쫓는 것이 옳은가
경우가 훨씬 많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암묵적으로 디자이너들 다수가 그렇게
삼성에 입사한 엄친아가 받은 보너스가 내 연봉과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맞먹을 때 드는 무력감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 나도 대중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표현하는 것에
자존감밖에 없다.
대해 맹목적으로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자존감은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니다.
알기위해 내면 깊숙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다만, 창의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가진 디자이너라는
진지함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부분집합에는 다양한 관점이 항시 공존해야 한다는
창작자에게 있어 자신의 취향을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생각이다.
태도는 먹고사는 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될
철저히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끈을 놓지
만큼 하찮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않는 성실한 디자이너도 필요한 반면, 그 반대편에는
그것이 비록 ‘연봉’이나 ‘복지’처럼
분명 독자적인 미의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표면적으로 드러나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만한 것이
노력하는 펑크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생긴다.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까놓고 말해 디자이너에게 있어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부류들을 색안경 끼고
‘취향이 너무 좋으신것 같으세요’라는 말보다
배척하는 풍토가 암묵적으로 조성된 있는 것을
더 기분 좋은 말이 어디있으랴. (끝)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가령 면접에서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예비 디자이너들은 착실해 보이는 인상의
<4부 화술의 생존매뉴얼 계속>
예비 디자이너들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내가 여태껏 겼었던 공간들의 보수적인 특성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에 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가끔 디자이너들이 모여있는 공간에 눅눅하게 습윤된 보수성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 때가 있다.
블로그 clichecliche.blog.me
때로는 외롭기도 했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기도 했다.
이메일 clichecliche@naver.com
부산오뎅 이야기 ( 다행이다 )
7월의 어느 날 나는 이사를 하게 된다. 이사를 가서 집 정리를 며칠에 걸쳐하고 동네 밥집 편의점 시장 배달음식점 등을 스캔 한다. 원래 배달음식을 잘 시켜 먹지는 않지만 그런 것 있지 않는가? 술집이나 밥집이나 하나만 시켜 먹 어보면 그 집이 맛있다 맛없다 같은 통계를 내리는 자기들만의 노하우... 한집만 시켜 먹어보면 이 동네 배달밥집 맛의 퀄리티를 대충은 알 수 있을거란 막연한 통계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서 우리가게도 메뉴판에 1번으로 전진 배치해놓은 메뉴가 부산오뎅탕이다. 오뎅만 먹고 다른 안주를 안 시켜먹 고 가더라도 부산오뎅이란 집의 기억을, 오뎅이 그럭저럭 했으니까 다른 안주도 그럭저럭 할 것이라는 출처 없는 믿 음감. 뭐 그렇다고 내가 오뎅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다. 수우미양가에서 미정도? 겸손한건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건 아니고 암튼 이사 간 동네의 배달음식을 시켜 먹어 보 기로 했다. 비가 주륵 주륵 오는 어느 날 뭘 먹을까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내 눈에 들어온 전단지속 메뉴는 돈가스. 주문을 하고 배달 온 돈가스를 받아 경건하게 냄새를 한번 맡는다.
“음...스멜~~”이라고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처음 시
건들면 울 것 같다. 나는 지금 이밥에 몰입 되어있다. 국
킨 배달음식에 대한 기대감과 제발 맛있었으면 좋겠다
이 매일 바뀐다. 반찬이 매일 바뀐다. 그 다음날 또 간다.
는 절박함이 결합된 나만의 의식을 치르곤, 첫날밤 새 신
나의 밥집 탐방은 여기서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부 옷고름 풀듯 노란고무줄을 조심스레 푼다. 노란고무
름 모를 국이 나온다. 역시 맛있다. 다 맛있다고 하며 드
줄을 풀고 우걱우걱 먹은 돈가스 배가 고파서인지 마파
시고 나가고 하시는데 겨우 나 한명 더 맛있었다고 “왜
람에 게눈 감추 듯 먹어치운다
이렇게 맛있어요. 자주 올께요.” 라고 하면 괜히 거는 말 에 일일이 응대하심이 귀찮을까봐 나는 폐 끼치기 싫어
첨 먹은 배달음식... 먹고 먹고 배 안부른 돈가스도 있지
서 쓸데없이 말도 안 걸고 먹기만 한다.
않는가? 배가 불러서인지 돈가스 가격대비 그럭저럭 별 다섯개 만점에 3개 반을 부여 한다. 그리곤 담날부터 본
그러던 어느 날 며칠동안 감상에 젖어 음식의 맛에 빠져
격적으로 동네 밥집 탐방을 다닌다.낙지수제비 생산구이
있던 내가 중대한 실험에 들게 된다. 밥을 한참 먹고 있
백반 분식집 초밥집 불백집 김치찌게집 기사식당등등 집
던 중 국에서 날파리 만한 너무도 작은 벌레가 나온다. 바
에서 200m안이 밥집의 전쟁터와 같다.
퀴벌레다... 걷어내고 먹는다. 놀랍지 않다. 엄마가 해주 신 밥에 바퀴벌레. 큰 것도 아니고 날파리만한거 나왔다
그 밥집의 전쟁터 속에 마치 종군기자가 된 마냥 이집 저
고 역정낼껀가? 겨우 날파리 만한 바퀴벌레 한 마리에?
집을 매일 번갈아가며 다닌다. 생선구이 백반은 두 집이
이집을 두번다시 안 오기라도 할껀가? 필자를 아는 사람
나란히 붙어있다 하루는 왼쪽 집 하루는 오른쪽 집을 가
들은 알지 않는가? 나의 일편단심 나의 순애보적. 해바
본다 그럭저럭 맛있다. 식약청 직원마냥 주방청결상태도
라기적인 마음.
소심한 스캔...맘속으로 더 괜찮은 집을 점지해놓는다. 초 밥집은 맛있는데 비싸다 담에 여자랑 가서 돈 많은 오빠
장소나 사람에 대한 오롯한 마음 씀씀이...
코스프레 할 때 가기로 점지해놓는다. 낙지 수제비집도 가보고 마지막으로 ㅇㄴ식당을 가본다.
‘저는 괜찮은데, 다른 손님한테 들어갈까봐. 걱정 되서 말씀드리는거라고 귓속말이라고 하고 나오지.‘ 라고 생
밥값은 6천원 메뉴는 한 가지. 카드불가. 이집의 주인장
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몇 달에 한번 몇 년에 한
은 어머니 이모 연세이다. 왠지 정이 간다 밥집에 어머
번 나올까말까 한 벌레가 나한테 우연히 나온 것일 뿐이
님 이모님 연세가 어디 이집뿐이겠는가. 하지만 이집의
다. 큰 국통에 벌레가 들어갈 0.000001%의 가능성에 내
일하시는 분과 주인아주머니에게서 풍기는 이미지는 뭔
가 로또 맞은 것이다.
가 달랐다. 사사로운 정에 냉철한 판단력과 경험으로 맺 고 끊음이 정확한 나의 누적된 데이터에 혼란이 온다.
내 잘못이다. 다행이다. 다른 손님한테 나오지 않아서..
밥이 나온다 반찬이 8-9가지 눈은 휘둥그레 정이 느껴진
단지 아쉬운 건,
다. 다 맛있어 보인다. 보여주기 위한 반찬의 나열이 아 닌 내 자식에게 맛난 음식을 이것저것 주려다보니 개수
내가 제일 무서워 하는 바퀴벌레 였다는 것. 차라리 날파
가 많아 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뭔 반찬을 이렇게 많
리 였으면 이라며 국을 계속 먹는다. 나의 바램이 이루어
이 꺼냈냐는 혀를 ㅉㅉ하시는 아버지의 환청이 들린다.
진 걸까? 진짜 날파리가 나온다 므흣한 미소가 나온다. 벌레야 걷어내고 먹으면 그만이다. 다행이다. 나한테 두
반찬하나 밥 한 톨 남기면 농부들이나 ㅇㄴ식당의 주인
마리가 다 나와서 ‘지나가는 나그네 목이 말라 물 한잔
이모님한테 죄 짓는 것 같은 생각에 싹싹 다 비운다. 계
얻어 먹는데 급하게 마셔 체할까봐 띄워준 나뭇잎이라고
산을 하고 나온다. 정신이 혼미하다. 내가 뭘 먹은거지?
생각하면 될 것이고, 나뭇잎이 우연히 두 잎 들어갔을 뿐
그 다음날도 간다. 그 다음 날도 간다. 몇 개월 간 1일1식
이고. 설령 일부러 넣었다는건 말도 안될 일이고 벌레가
을 해서 뺀 살 들이 다시 찌고 있었다.
날아다니다가 자유낙하를 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낙하 할 때 내가 잘 막았으면 될 것을 내 밥그릇도 못지킨 나
이밥은 먹고 살쪄도 된다고 최면을 건다. 아니 걸렸다. 옆
의 책임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란 생각이 들었다.
에 계신 60대 아저씨가 갓김치를 드시면서 예전 돌아가 신 어머니의 그 맛과 똑같다며 감탄사를 내뱉으신다. 그
후다닥 남은 밥과 국을 먹고 잘 먹었습니다 계산을 하고
옆 손님도 시골의 맛이라고 추임새를 넣으신다. 누가 툭
나온다. 그 담날도 또 간다. ㅇㄴ식당으로
마을길 마포 1로 “큰 나무길” - 약 1시간 (4km)
누구든 오해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죠. 오해가 아니어도 잘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속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곁에서 가만히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때 가만히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홍대는 술집과 프랜차이즈, 취객과 관광객만 남았다.’는 오해를 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홍대는 마포의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분이 잘 모르실 수도 있는 마을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열심히 지도를 따라가기보다 아이처럼 길을 잃기를 바랍니다. 호기심이 모든 길에서 여러분을 이끌기를 바랍니다.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나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또 다른 사람의 웃음 소리를 놓치지 않도록 음악을 끄고 즐겨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골목에서는 사진을 찍는 것 보다 집안에서 잠자는 아기의 잠을 깨우지 않게 입을 꼭 다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첫 마을길은 마포 1로 “큰 나무길” 입니다. 큰 나무와 높은 굴뚝, 가로수와 강, 유수지 체육공원 그리고 편히 돌아올 수 있는 마을버스 종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출발: 상수역 4번출구 마을길 마포 1로의 가장 빠른 시작점은 상수역 4번 출구 입니다. 나오자 마자 왼편으로 휙 돌아 오르막을 따라 올라오시면 gs25가 보입니다. 그 길을 따라 주욱 걷습니다. 멀리 그물로 짜여진 골프연습장이 보이면 제대로 가고 계신 겁니다. 4번 출구도 좋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3번 출구를 추천합니다. 3번 출구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3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서 강변북로 방향으로 가시면 길을 건너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양 측으로 놓인 가로수길을 즐기기에는 이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gs25 옆의 일방 통행 표시를 따라 가시면 흔히 상수 카페거리라는 길을 지나게 되실 겁니다. 150미터 쯤 걸으면 이리카페가 나오고 이리카페를 지나 오십미터 쯤 가면 왼쪽에 설렁탕집 오른쪽에는 보라색 칠이 된 스톡홀름이란 이름의 카페가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의 골목으로 주욱 내려갑니다. 정진 주류 간판과 건물이 보이고 그 너머로 빼꼼하게 나무가 솟아 있습니다. 큰나무의 끄트머리 입니다. 골목을 끝까지 내려가 찻길에 닿을 때 쯤이면 눈앞에 아마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만큼 큰 나무가 인근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네의 터줏대감과도 같은 나무입니다. 여름과 가을에 무척 아름답고 거대한 만큼 잎이 진 겨울에는 쓸쓸함이 있는 나무입니다. 잠시 나무를 보시고 앞에 놓인 도로를 따라 걸으시면 왼편으로는 당인리 화력 발전소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주욱 걸으시면 됩니다. 나무에서 보기에 왼편길은 평지이고 오른편 길은 오르막이지만 오르막을 잠깐 오르시는 편이 두루 보기에 좋습니다. 오른쪽으로는 작은 마을 공원도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앉았다 가세요. 오가는 차도 보고 잠깐 다리도 쉬어 줍니다. 앞으로 한동안 의자가 없습니다. 왼쪽의 발전소를 두고 심심한 길을 조금 걸으면 발전소 정문이 나옵니다. 발전소 앞의 원형 교차로를 지나면 동네 사람들이 무척이나 아끼는 가로수 길을 마주하실 수 있습니다. 상수동은 봄 벚꽃으로 유명한데 저는 여름 가로수길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중간 중간에는 예쁜 동네 카페들도 많이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가로수 길의 끝에 도착하면 두 개의 터널이 있는 마을버스 마포 07번 종점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앞의 터널로 주욱 올라가 볼 수도 있고 왼편의 지그재그 오르막을 따라 절두산 성지를 넘어 한강으로 가실 수도 있습니다. 여유가 있으시면 오른쪽의 외국인 선교사 묘역도 들러보시면 좋습니다. 흔치 않은 외국 방식의 묘역입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들르셔야 합니다. 저희의 길은 왼편을 따라가야 합니다. 왼편의 지그재그 길을 따라 오르면 절두산 성지가 나옵니다. 올라가자마자 위에 있는 교각을 따라 가면 바로 한강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한강에서는 강을 왼편에 두고 걸으시면 됩니다. 망원 나들목까지 가시면 됩니다. 망원 나들목앞에는 한강으로 내려갈 수 있는 경사로가 하나 있습니다. 왼편에서 그것을 발견하시면 오른쪽 출구로 나오시면 됩니다.나들목 터널을 따라 나오시면 나무가 심어진 원형 교차로가 나옵니다. 그 뒤로는 많은 식당이 있습니다. 한강을 방문하시는 분들을 위한 식당들입니다. 유혹을 이겨내고 왼쪽으로 꺾으시면 정면에 미끄럼틀이 보일겁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걸으시면 오른쪽으로 다시 꺾어지고 지역 주민들의 작은 주차장과 체력단련 공원이 조그맣게 있습니다. 그럼 제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오늘 산책로의 종점입니다. 주차장의 끄트머리에 망원유수지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체육공원으로 비가오면 넘치는 빗물을 받아 침수피해를 방지하는 곳입니다. 낮에도 좋지만 밤에는 더욱 좋습니다. 바로 앞에는 다시 여러분을 홍대 인근으로 데려다 줄 마포 09마을 버스 종점이 있습니다. 마을버스를 타시고 원하시는 곳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요약: 4번 출구 -> 강변북로 방향 -> gs25 골목 따라 직진 -> 설렁탕짚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찻길까지 주욱 내려감 -> 큰나무 -> 발전소 굴뚝을 왼쪽에 두고 직진 -> 발전소 입구 -> 가로수길 -> 양화진 터널 왼편 지그재그길 -> 절두산 성지 -> 한강 -> 한강을 왼쪽에 두고 직진 -> 망원 나들목 -> 나들목 출구 왼편 골목 길 -> 주차장 지나 망원 유수지, 마을버스 마포 09번 종점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이달에도 재미있는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PDF를 보시면서 누르셔도 되고 스마트 폰으로 찍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월간이리 내 원고의 일부분이나 필진 이름, 블로그 주소등을 누르시는 경우 해당 페이지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시는 너무 어려워...’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9.29 http://cafe.daum.net/badabie
장롱 면허처럼 외장하드 속에 잠들어 있는 감독님들의 작품들을 상영하고 관객과 대화하며 서로 교류하는 <장롱 영화제>에서 많은 분들의 출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jangrongcinema@ hanmail.net 으로 영화파일, 이미지 컷, 영화 정보, 간단한 필모그라피 와 소개서(자유 양식) 을 보내주세요.
전화: 02 324 0338 / 메일: jangrongcinema@hanmail.net
+상영작은 사운드 마스터링 후원합니다. +출품된 영화는 행사 당일의 상영 외 다른 목적으로 일체 사용 되지 않습니다.
테오 얀센 (Theo Jansen) 처음 테오 얀센의 작품을 접한 건 관심작가 발표가 있던 대학교 수업에서 였습니다. 아마 2008년 도, 테오 얀센의 전시가 한국에서 있기 전이었습니다. 전시는 2010년도에 있었거든요. 2008년 당 시 발표자는 해변에서 뭔가 기이한 조형물이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화질이 너무 나빴고, 발표자도 가진 정보가 많지 않았습니다. 페트병을 재활용한 친환경적인 작업물인데, 얘네가 막 해 변가를 혼자서 움직여요-라고 했죠. 그런데도 강력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페트병’, ‘얘네가 혼자 서 움직여요’ 이 두 포인트 때문이었어요. 테오 얀센은 물리학을 전공하고 예술가로 전향한 작가입니다. 그의 작업은 키네틱 아트로 분류되 는데, 움직이는 조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광기라든가 예민함을 전한다기보다 장인의 뛰어 난 기술 부분으로 깊이 닿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뭔가를 만들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맞는 도구를 고안할 수 있는 사람. 자신에게 적합한 재료를 발견하고 그것을 심화시킬 수 있는 사람에겐 그 고안해내는 능력의 뛰어남과 함께 그가 고안한 도구에서도 미의식이 담기게 되 어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재료도 그 목적에 훌륭하게 부합하는 것으로 동시에 아름다움의 가능성 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죠. 제가 ‘페트병’에서 포인트가 잡혔던 것은 플라스틱 관이 중심적으로 사용되는지는 몰랐던 상태였 기에 그런 것입니다. 분명하게 짚고 가자면 작가가 작품을 만들때 주로 쓰인 재료는 플라스틱 관 입니다. 훌라후프와 비슷한 재질이요. 작가는 바닐라색 플라스틱 관과 페트병 등을 이용하여 해변 가에서 바람을 맞으면 움직여 다니는 뭔가를 만듭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해변동물이죠. (Strandbeast 또는 아니마리스) 해변동물은 무척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그것은 전기나 석유를 필요로 하 지 않으며, 해변가의 바람을 먹고, 모터와 바퀴가 아닌 다리와 날개를 가지고 걸어 다닙니다. 사용 된 재료 중 하나인 페트병은 플라스틱 공업물로 그 형태도 단순하고 우리의 주변에 널려있잖아요?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페트병은 플라스틱 주형 기술이 이룬 고도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뭔가를 담고 밀폐할 수 있으며 여간해선 깨지거나 터지지 않고, 게다가 가벼운데 심지어 투명하죠. 잠재력 높은 저력 있는 재료인 페트병이 선택되어 대표적인 용도는 해변에서 부는 바람을 모아 압축 보관 하는 것입니다. 늘상 있어서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귀한 것이 귀한 곳에 쓰였다 뭐 이런 류의 기 쁨을 느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재료에 대해 좀 더 얘기를 해볼게요. 테오 얀센은 일종의 규칙을 두고 자신의 해변생물을 만드는 데, 플라스틱 관만을 이용한다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생물체가 단백질로 이루 어져있듯이 자신의 작품을 한 가지 재료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서라고 합니다. 단백질은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여러 목적을 담당할 수 있는데 플라스틱 관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가 선택한 바닐 라색 플라스틱 관은 이미 있는 도구와 그가 고안한 도구를 통해 다양한 변형이 가능해지고 그래서 머리가 되고 척추가 되고 촉수가 되고 발굽이 되어 전신을 이룹니다. 작가는 자신이 해변동물에게 구현시키고 싶은 동작에 한계를 맞자 다른 여러 재료도 포함되었으나 일련의 미감은 유지하는 채 로 발전합니다. 셀로판테이프, 케이블 타이, 페트병, 고무링, 밧줄 등은 그 형태를 보는 것으로 목 적을 파악할 수 있는 직관적인 재료들이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진 파레트를 사용하는데 그 해변 동물은 마치 코뿔소같습니다.
작가가 만든 무언가가 손을 떠나 스스로의 생존방식을 유지·발전시키며 파괴되기 전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동작한다면 그 장치를 생명체 내지는 생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죠. 단지 생물 같은 장치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뭔가를 부여할 여지가 있는데요. 해변이라는 바람이나 바 닷물, 단단하지 못한 지반의 변수 많은 공간에서 계속해서 동작하기 위해선 군더더기 없는 형상과 원리를 구현해야 하고, 그것에 성공하면 비록 외관은 플라스틱 관의 다발이라도,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큰 미적인 쾌감을 주는지 그래서 기쁜 맘에 그 것에 생명을 부여해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렇게 테오 얀센은 자신의 작품의 꼭대기부터 기 름을 붓고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해변동물은 왜 움직여야할까? 움직임은 동물의 성질이다. 예를 들어 양에게 다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리가 없다면 양은 들판에 누워 뒹구는 양털 공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머지않아 양 주변의 풀은 뿌리째 다 먹히고 말 것이다. (중략)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걷기가 생명체의 특성이 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이다.” 테오 얀센_위대한 공상가 63p 그래서 해변동물은 열심히 걸어다닙니다. 해변에서 바람을 맞으면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고, 물에 닿으면 뒷걸음질치고, 폭풍우가 치면 자신의 몸을 해변에 고정하고, 바람이 없으면 몸에 저장해 둔 공기를 이용해서 다시 움직이고, 때로는 모래를 몸에 발라 위장을 하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요. 해변동물은 사용되는 재료나 메커니즘의 변화에 따라 연대기가 달라집니다. 그 명명도 무척 재밌 는데 단적인 예로 칼리둠 시기와 테피데임 시기가 나눠진 이유는 플라스틱 관을 구부리는데 사용 한 열기구의 온도에 따른 것으로, 칼리둠 시기는 열기구를 고온에 맞춘 채로 관을 구부렸다면 테피 데임 시기에는 저온에 두고 구부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온도를 바꾼 이유는 고온에서 구부린 다 리의 관절이 금세 상해버려서 저온이 적당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요. 테오 얀센은 1990년 자신의 해변동물을 만들기 시작한 일을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해변동물 이 자신으로 하여금 만들기를 종용했다고요. 테오 얀센을 통해 해변동물은 세상에 등장하여 성공 적으로 발전하고 다양해지고 순회 전시도 다니고, 그리고 BMW의 이미지 광고에 등장하여 수백 만의 사람들의 정신에 남았다고요. http://youtu.be/M5GgZ-RfpD8 본 링크를 통해 광고를 보 실 수 있습니다. ‘위대한 몽상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업과 관련한 잡기에 대해 직접 쓴 책을 추천합니다. 저는 그 의 해변동물에 사용된 도구-예를 들면 관 절단 장치와 같은 것들 직접 만든, 나 해변동물의 관절, 발, 등의 신체 부위의 기록사진을 보면 두근두근한 기분이 됩니다.
글. 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