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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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비밀동툰 / 사진. 글. beamil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글. 사진. 아홉시 영화로 읽는 시공간 - 하길종, 불멸의 살리에리: 2인자의 미학 / 글. 곡주대비 팟캐스트 ‘이리오너라’ 광고 회사옆 미술관 - 마지막 회 / 글. 강세기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김동인 「배따라기」 / 글. 고수진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그림. 배헤림 글.박재현 idology’s pick - 인피니트, 아이유 뼈그림 - 인간 여자의 골반뼈 / 글. 그림. 왼손이 Hwaiiana - 쉘 위 훌라? / 글. 사진. 이동걸 놀고 먹고 그리고 / 그림. 김혜리 작곡가 B의 노트 / 글. Composer B 낭만 스파이 - 결혼 / 글. 사진. 낭만스파이 게임 노동 일지 / 그림. 글. 철민 사진 일기 / 사진. 글. 박민수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 소개소 / 글. 신당동 파르한 웹디자이너 생존 매뉴얼 - 실전의 생존 매뉴얼 / 글. 그림. 김성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건축이 좋아 - 왕슈를 만나다 / 사진. 글. aoikasa 부산오뎅 이야기 - 재능기부 / 글. 사진. odeng 국가란 무엇일까? - 7회 / 글. exxx 바다비 일요 시극장 광고


이달을 끝으로 회사 옆 미술관 과 뼈그림의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고 잠시간의 휴재가 될 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분량을 채워야 하는 걱정 과는 다르게 쓸쓸함이 남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글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글을 쓰고 싶기는 한데, 그 런 글을 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모자라지만 저희 필진들은 좋은 글들을 써주고 계십니다. 설탕같이 혀끝에 서 녹는 글들은 아닐지라도 피가되고 살이 되는 글들이라고 믿고 한달 한달을 보 내고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믿음일 수도 있겠지요. 다른 분들은 예술을 무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술은 관철이라고 생 각합니다. 저희는 관철해 나갈 겁니다. 그래서 때로는 바보 같아 보여도 한걸음씩 나아가려고 합니다. 괜히 출간 일자가 늦어져 비장함을 덧 씌워보는 머리글이었습니다. 잡지는 역시 가볍게 보는게 제맛입니다. 다 읽고 꼭 라면받침으로 써주시길 바라 며 7월의 인사를 여기서 줄입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편집: 이훈보 표지: 이주용 주관: 프로젝트 이리 지원: 서울특별시,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공식트위터 @postyri


비 밀 동물툰 Animal Toon by BEAMIL

* 2014년에는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나름 위트있게, 뜨끔하게 쓰고 그린 짧은 만화를 기고합니다. 팩트를 뒷받침하는 기사와 간단한 의견도 함께입니다. 많이 공감해주세요. 제보도 감사합니다. twitter@ / _beamilie


* 그날도 어김없이 접속한 sns 피드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말았습니다. 고양이 학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도 잔인하고 차마 사람이 한 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라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겠습니다. 점심에 커피 한 잔 하며 습관처럼 접한 기사는 마음의 준비없이 돌을 맞았다고 해얄까요. 뭐 여하튼 무척 괴로운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조금 울다가, 나는 왜 늘 맞는 돌에 늘 같은 반응을 하는걸까 하며 잠시 저 자신이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유난 떨며 살아가는(혹자에겐 그렇게 보일) 사 람이라니 왠지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이라는 마음이 든 겁니다. 하지만 아니겠죠? 모두 외면하고 계신 건 아니지요? .. 그렇 게 혼자 이리 마감 즈음에 끄적거리게 된 그림을 이번 호에 싣습니다. 저는 우울할 때면 다른 나라의 길고양이 사진들, 다른 나라 사 람들이 동물과 함께 하는 법에 대해 찾아보곤 하는데요,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한 그 사진들을 보며 상상했 던 무의식이 이런 그림을 그리게 했나 봅니다. 특별히 월드컵 시즌이라 함께 축구를 즐기는 장면이 떠올랐는지도요. 어느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의 고백입니다. “어린 아이였을 때 누구도 강아지의 눈을 찌르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앞선 이리 비밀동툰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연쇄 살인범의 대부분은 과거 동물학대 전력이 있다고요. 우리 사회가 연약 한 인간들에게 너무도 큰 양극화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인지라 월드컵 시즌 이 돌아오면 행복해 미치겠습니다. 무언가 다른 즐거움이 찾아와 준 거니까요(설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사회가 늘어질 대로 늘어 져서, 너나 할 것 없이 어울려 축구보고 술 마시고 노래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화날 때 화내고 기쁠 때 기쁘다고 표현도 하고요.

‘Burnout Syndrome’ ‘번아웃 신드롬’은 오로지 한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정신적인 피로로 인해 무기력증과 자기 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후 군을 말한다. 번아웃 신드롬은 최근 야근, 특근 등을 비롯해 한가지 프로젝트에 매달려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탈진 증 후군이나 연소 증후군 등으로 불리는 신조어. 전문가들은 번아웃 신드롬의 예방을 위해 취미생활 등과 심리적 공백을 메워 줄 다른 일에 몰두 하는 것이 좋다고 적극 권유했다.

뉴데일리/newdaily.co.kr




하길종, 불멸의 살리에리; 2인자의 미학 영화로 읽는 시공간.

글. 곡주대비

사실 이번 호 글을 쓰기가 두렵다. 필자의 글을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하길종 감독을 2인 자의 혹은 열등감의 아이콘, 살리에리 (Antonio Salieri) 에 비유를 하는 것 자체에 비난을 받을 것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지면을 끝까지 떠나지 않아 주신다면 지금 ‘욱’ 한것이 공연한 것이었다고 느 낄 것에 확신한다. 하길종 감독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는가. 젊은 나 이 (당시 38세)에 요절한 안타까운 감독? 배우/감 독인 하명중의 형?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 출신 감독? 혹은 표절이나 검열 같은 이슈가 끊이지 않 았던 문제 (?) 감독? 혹은 (안타깝게도) 위에 나열한 그 어떤 것으로도 기억할 수 없는, 아예 알지 못했던 영화감독일수도 있다 (특히 이리 의 독자들 나이층을 고려한다면). 하길종은 1941년생으로 신필름 (신상옥 감독이 설 립한 영화사) 에서 잠시 일하다가 UCLA 영화 학교 대학원 과정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당신 영화 평론가 변인식 과 친분을 쌓으면서 작은 영화운동 들에 참여 하기도 했고 (영상시대를 결성하는데 중 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던 와중 자신의 데뷔작, 화 분 (Pollen of Flowers, 1972)을 연출한다. 필자의 논문 한 챕터를 쓰다가 하길종의 화분을 언급할 일이 있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한 줄 요약 하자면, 지금 봐도, 1970년대 정서를 생각하면 더 더욱이나 기괴하고 파격적인 영화였다. 영화는 푸른 집이라고 불 리는 집에서 벌어지는 파괴적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성애에 관한 묘사와 명 백히 청와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푸른집’의 은유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문제성은 당시 검열 로 영화의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갔다는 점으로도 시사가 되지만 필자가 더욱 주목하는 점은 이 영화와 이 탈리안 좌파 감독, 파졸리니의 (Paulo Pasolini) 테오레마 (Teorema) 와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줄 거리와 캐릭터들은 물론 포스터 까지도). 하길종 감독의 표절은 크게 문제화 되어 당시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외 되기도 했다. 평소 영상시대 (계간 지)나 다른 지면에서 유럽시네마 나 감독들에 대해 본인이 갖고 이상이나 존경이 대단했기 때문에 사실 하길종감독의 표절이 아주 놀랍게 느껴지진 않는다. 더구나 파졸리니는 사회운동을 했던 정치성향이나 ( 하감독도 미국으로 가기 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시나 소설을 쓰던 다채로운 예술가 였다는 점 에서 충분히 하길종의 롤모델 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좀 실망스러운 것은 이 데뷔작 이후 부진했던 흥행과 명성을 바보들의 행진 (1975) 같은 작품으로 극복했음 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절이 계속 됐다는 것이다. 물론 화분처럼 명백한 ‘카피’ 는 아닐지라도 속. 별들의 고향 같은 작품에서 데비빗 린의 Ryan’s Daughter 속 우산 씬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Blow Up 에서의 테니스 씬을 그대로 재현한 것을 영화감독 오승욱은 언급한 바 있다. 물론 하길종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재주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UCLA 졸업 작품이 학교 대표로 출품 이 된 적도 있다 하니 분명 그는 재능을 갖춘 감독이었을 것이고 바보들의 행진은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 족시킨 역작이 되었으며, 특히 그가 쓴 수없이 많은 기사와 칼럼들을 보면 분명 자신이 꿈꾸던 영화에 대 한 확고한 신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는 표절을 멈추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영상시대 활동을 통해 참된 영화는 현실주의와 심오한 영상미가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재차 강 조 했다. 특히 그가 집착에 가까울정도로 언급했던 ‘리얼리즘’ 특히 사회적인 리얼리즘 (social realism)은 그가 어떤 영화를 원했는지 대충이라도 가늠할수 있게 한다. 가령, 그는 거리에서 보여지는 가난이나, 노 동자들의 고통, 삶을 증명하는 것에 가까운 원시적인 섹스 씬들이 영화 안에서 자유롭게 묘사될 수 있어 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러한 묘사들이 박정희 군사정권 안에서 도저히 재현될수 없었던 요소들이 라는 것이다. 하길종은 영화의 진정한 가치는 리얼리즘을 통해서만 추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는데 그런 논리라면 군부정치 동안의 검열 시스템 안에서는 진정한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의 이러한 좌절이 사회적인 스탠포인트를 가지고 있던 여타 해외 거장들, 즉 앞서 언급한 파졸리니나, 혹은 뉴웨이브 감독들 (고다르나 트뤼포) 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고 차용하며 자위되었을 것이다. 하길종의 비극적인 삶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적잖은 유명세를 누렸던 일류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 제나 2인자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다. 다만 특별한 것은, 살리에리가 옆에 있는 모차르트를 바라 보 며 느꼈을 열등감과 분노와는 다른, 하길종 본인이 자처한 2인자의 자리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70년 대 정권에 의한 영화 탄압을 증오했고 (누구는 아니었겠는가) 속.별들의 고향 (본인은 원치 않았다 한다) 같은 상업영화라도 만들어가며 영화 감독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통탄했다. 그가 고다르나 코폴라 처럼 사회적인, 정치적인 자유를 누렸던 동시대 감독들을, 혹은 그들의 환경을 동경했을 것이고, 표절에 가까운 차용이라도 해서 그들의 자유를 소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표절이 문제시 된 후 그를 감시하는 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차용을 멈추지 않았던 것 을 보면 이는 감독이 이러한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다르가 위켄 드 (weekend) 에서 무모할 정도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에 순응하는 프랑스인들을 씹어대는 것을 꿈 도 못 꿀 자신과 자신의 상황에 대한 시위랄까. 하길종을 2인자라고 필자가 지칭한 것은 이러한 관찰에 근거한 또 다른 시선이었다. 그는 자유가 허락되 지 않는 상황에서 있는 것으로 쥐어짜가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현실을 흉물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의 끊임 없는 표절은 그가 이러한 흉물스런 현실에서 잉태되는 흉물스런 시네마의 1인자 이기를 거부했던, 일 종의 ‘쿠데타’ (그는 영상시대 활동 중, 영상시대 영화운동이 관습에 젖은 한국 영화의 쿠데타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였을 지도 모른다. 아이러니 한 것은 자신의 데뷔작을 카피할 정도로 숭배하던 파졸리니의 비극적인 죽음 (파졸리니는 자신 의 차로 수차례 치어 살해 됐다. 그가 극우파에게 살해 된 것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 범인은 결국 잡히지 않 았다) 처럼 그가 살해 된지 꼭 4년후, (1979) 하길종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죽음까지도 파졸리니의 2인 자 처럼 되버린 셈이다. 세상이 참 변했다. 박명수가 그렇듯. 홍진호가 그렇듯. 2인자가 주목 받는 세상이다. 숨을 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경쟁해야 하는 세상에서, 1인자의 위상보다는 2인자의 고군분투가 짠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지 기 때문이다. 하길종의 자처한 ‘2인자’ 가 더 용기 있고 철학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시대상과 무관하 지 않을 듯 하다.



회사 옆 미술관

글. 강세기

이번달 서울 시립미술관을 들린 사람이라면 볼만한 구경 많이 했을 것이다. 미술도 그러고 보면 사람장사다. 어떤 큐레이터를 새로 영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이 예년과

는 다르다. 일단 서소문본관 이외 3개 서울시립미술관이 분발하는 형태가 예사롭지 않다. 솔 깃한 전시들이 심심찮게 나온다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미술관 홈페이지에 가서 보면 될 것 이고(http://sema.seoul.go.kr/), 내가 미술관에 들린 날은 마침 아티스트와 점심을 먹는 ‘예 술가와 런치박스’를 하는 날이었다.

1만원을 내면 한달에 한번 꼴로 미술관에서 선정한 예술가와 점심도시락을 먹는거다. 앉아서 밥만 먹지는 않고 아티스트가 연출한 그의 방법으로 밥을 같이 먹는거다. 내가 간 날은 박승 원, 이지양이 점심식사를 차린 날이었다.

어떻게 먹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관객을 은색 돗자리에 앉힌채 30여분간 펼치는

그들의 퍼포먼스를 보며 드는 생각은 ‘예술가들은 지 맘대로 싸지르지 않으면 못배기는 사람 이어야 하는가보다’란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행동을 하는건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려하는 건지는 둘째치고 펼쳐

지는 풍경에 어안이 벙벙했다(no offence!). 저들은 뭘먹고 사는걸까. 돈은 어디서 버나. 옷은

번드르하게 입은걸 보니 굶지는 않을 텐데, 저런 짓을 하는지 엄마는 알까, 나름 안무를 짰는 데 저런것도 협의해서 맞추는걸까, 설마 연습까지는 하는건 아니겠지(그런데 막하는 것 치고 는 합이 나름 잘 맞는다), 만원 내고 들어온 이들은 저들이 이런 얼토당토 않은 퍼포먼스를 하 는 줄 알았을까.......

어떻게 보면 이들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느꼈던 일말의 당혹감이나 생소함이 요즘 미술을 만들 어내는 사람들이 꿰하는 바가 아닐까 했다.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미술의 매력이 이번 서울시립미술

관에서 열린 세 개의 전시를 연결하는 끈이었다. 이번에는 1층에서 열린 전시에 대한 소감을 적으려한다.

1층에 들어서면 ‘유니버설 스튜디오 서울’전이 시작된다. 입구를 떡하니 막고 설치한 작업은 바로 탈루 엘엔의 나무 설치 작업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나름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이

다. 조용한 미술관에 난데아닌 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그 어떤 소음도 용납하지 않는 미술관에 서 망치질이라니. 난 처음 작가가 퍼포먼스로 나무에 못질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서 울 시 립 미 술 관

좋 아 졌 다


서 울 시 립 미 술 관

좋 아 졌 다

탈루엔 그런데 못질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동전 을 못으로 박으라는 작가의 지시문을 따 라하는 관객이었다.

조용한 미술관에서 울려 퍼지는 망치소 리. 작업의 존재감을 물리적인 작품뿐 아 니라 소리로도 부각시키는, 그래서 홀 안 에 있는 모든 작업들을 아우르는 듯한 느 낌을 받았다. 이 작가의 다른 작업들 역

시 스케일 면에서 월등했다(단순히 크기 만 아니라 느껴지는 포스랄까). 아라리 오 소속 작가로 알고 있는데 나무, 청동

등 고전적인 소재에서 가져오는 원초적 인 어떤 마력이 느껴지는 작업을 선보였 다. 지금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

겠지만,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게 한 작가였다.

참 이번 전시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 작가를 모은 것이다. ‘외국인’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한국의 내노라하는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 걸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아직까지는 외국인이라면 덮어놓고 플러스 알파를 주는 나라이긴 한가보다.

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평이한 작업들이 많았으며, 특히 한국을 표현한답시고 ‘land

of morning calm,’ ‘chosun dynasty’등의 진부한 소재를 들이대는 식의 작업도 많았다. 알고 보니 엄청 유명한 작가의 작업이면 뭔 망신이냐는 생각도 들지만, 단순히 외국인의 눈으로 한 국의 소재를 평이하게 열거하는데 그친다면 그야말로 미술관 장소가 아까울 판이다.


잉고 바움가르텐 그러고 보면 더 이상 미술판에서 작가의 국경을 논한다는 말 자체가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업을 보고 작가의 국적이 한눈에 보인다면, 미술관보다 박물관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잉고 바움가르텐이라는 작가의 작업도 흥미로웠다. 전시 내내 눈길이 갔던 작업은 내가 외국 에 갔을때 다가오는 낯설음이라는 감정이 잘 포착되는 작업이었다. 잉고 바움가르텐의 작업이

그랬다. 그가 그린 건물이 한국의 전형적인 8-90년대 개인 주택인 건 한눈에 알아차렸다. 익 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문 열고 들어가라면 선뜻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 남의 집 같았다.

그것은 멕시코 칠리가루에 김치를 절여먹는 듯한 형용하기 어려운 친숙한 거부감이었다. 컴퓨 터 그래픽으로 작업하는 요즘 건물사진처럼 오밀조밀한 소품을 모두 제거해서 그런걸까. 아 니면 한시간 간격, 발 한걸음 차이로 태양 빛이 다른 우리나라의 자연조명과는 달리 모든 면

에 일정한 빛을 쏘는 지중해 동네 집처럼 빛을 다뤘기 때문에 그런걸까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건 우리집이 아니었다. 그림에 그가 한국의 집을 바라보는 감정이 녹아져 있는 듯했다. 믿거 나 말거나 말이다.

마지막으로 올리버 그림의 작업도 재미있었다.

두평 남짓한 사각형 공간 테두리에 사람, 비행기, 총 등의 형상을 설치하고 가운데 조명기구 를 통해 스토리를 전개하는 작업(Game ver. 1.2)은 한눈에 봐도 주제를 알수 있는 전쟁에 관 한 것이었지만 신선했다.


상황 묘사와 설명에 있어서 우리작가들보다 훨씬 외국 작가들이 직설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은근한 맛을 미덕으로 삼아서 그런가 우리나라 작가들은 에둘러 표현하는 것을 외국 특히 구

라파 작가들은 얄짤없다. 번쩍번쩍, 찌릿찌릿 쉴새없이 움직이고 변형하는 조명기구를 따라가 다 보면 그가 그리는 이야기의 실체를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어도 ‘전쟁’의 잔인함에 대한 반 항심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머지 두 개 전시 역시 매우 흥미로웠다. 아트스타코리아의 파이널 3가 결전을 펼치는 ‘은밀

하게 위대하게’전은 좁은 공간안에서 세명의 아티스트가 뽑아낸 산출물이 신경전을 마구마구

벌여댄다. 지난 호에 다뤘음에도 막상 프로그램은 한번도 보지못해 아쉬웠던 마음을 좀 달랠 참에 맘에 들어오는 한 작가가 있었으니 신제현이었다.

나는 교훈형 작가에 뭔가 끌리는게 있나보다. 나는 미술을 미술로 보지않고 뭔가 메시지를 던 져주면서 나를 부끄럽게 하는 그런 자기학대적인 관객인가보다. 신제현은 고리 핵발전소 건 설 폭발사고라는 가상의 큰 줄거리를 설정한후 파생되는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냈다.

그의 작업은 먼저 이 사고가 실제 발발할 경우 사망할 수 있는 인근 지역 주민의 이름을 하루

면 증발하는 펜으로 이름을 써내려가는 퍼포먼스, 그리고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경우에 아이들

과 함께 폭발사고 해결법에 대해 워크샵을 진행하여 그 결과물을 영상과 그림으로 남긴 기록,

마지막으로 폭발로 인해 탄생된 자이언트 닭과 로봇의 격투를 주제로하는 유치뽕짝 B급영화 까지 총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사회적 이슈와 키치 정서, 그리고 관객참여라는 복잡한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를 자연스레 녹 여냈다는 점이 참 매력있었다. 물론 핵발전에 대한 경각심을 웃기게 표현한 것 역시 센스만점 이었고.

앞으로 이런 웃기고 심각한 작업을 많이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언제나 월간이리 미술글 을 쓸때 느끼는 거지만 결론이 항상 고민된다. 어렵게 내린 결론은 서울시립미술관 디게 좋아 졌다. 특히 이번 전시들은 참 좋았다. 끝!

<마지막 회>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김동인 「배따라기」

“거저, 다 운명이외다” 창문을 열어도 이제 시원하다 라는 느낌이 나질 않는 7월이다. 나이 서른에 사랑니가 급격히

잇몸을 뚫고 나오고 있어, 결국 쉬는 날 이 아이를 발치하고 말았다. 볼 한쪽이 사탕을 문 것처

럼 아주 예쁘다. 마치 뭐랄까... 데쓰메탈을 듣고 싶은 모습이다. 날은 덥고 볼은 욱신거리고 격동의 7월이다. 이제 곧 있음 장마가 오겠지. 여름을 난 무척 싫어한다. 모기, 더위, 장마, 난 못가니까 휴가 간다는 사람들. 흥!

교통정체 사진을 굳이 검색해 싣고 나니

휴가 못가는 설움과 짜증이 약간 가라앉 고 있다. 후후

오늘 함께 볼 작품은 김동인의 「배따

라기」이다. 이 작품을 고른 이유는 대게

소설에서 보여주는 운명개척의 내용이나,

자아와 세계의 치열한 대결을 다루지 않 고 있다. 오해가 불어 일으킨 파장, 그리

고 그 안에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 그것을

운명이라 여기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주인공의 모 습이 아닌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대동강으로 봄 경치를 구경 갔다가 ‘영유 배따라기’를 부르는 ‘ 그’를 만나 사연을 듣는다.


조그만 어촌에 부자이며 배따라기 노래를 잘 부르는 두 형제가 산다. 형제는 부부사이 못 지않게 의가 좋았다. 형인 ‘그’는 영유 사람으로, 아름다운 아내와 늠름한 동생을 두었다.

성품이 쾌활하고 친절한 젊은 아내가 미남인 동생에게 특히 친절한 것을 못마땅해 하며

질투심에 아내를 자주 괴롭히게 된다. 그 후 아내와 아우 사이의 관계가 유난히 원만하자

형은 둘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기회만 있으면 꼬투리를 잡아 혼내 주려고 벼른다. 그런 참 에 아우가 영유에 자주 출입하면서 첩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가 형에게 동생을 단 속하라고 보채자 의심은 더욱 깊어진다.

어느 날 아내에게 줄 거울을 장에서 사 들고 집에 들어오다가 아내와 동생이 방에서 옷매

무새가 흐트러진 채로 씩씩대는 것(사실은 방에서 쥐를 잡느라고 그리 된 것임)을 보고 오해한 나머지 둘을 등을 밀어 내쫓았다. 저녁 때 방에 들어와 성냥을 찾던 형은 낡은 옷

뭉치에서 쥐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으나 다음 날 낮쯤 아내는

시체가 되어 바다 위에 떠오르고, 이 때문에 아우는 집을 나가 행방이 묘연하게 된다. 결 국 형은 20년 동안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며 뱃사람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동생을 찾아 뱃 사람으로서 방랑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그 후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서 동생을 만난다. 그러나 “형님, 그저 다 운명

이웨다!”―이 한마디와 함께 동생은 환상처럼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시 10년 세월을 유 랑하지만 동생을 다시 만나지는 못한다.

그 날 밤 ‘나’는 ‘그’의 숙명적 경험담에 잠 못 이룬다. 다음날 아침 대동강에 나갔지만 ‘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아우, 붙임성 있으면서 성미가 급한 형수, 선량하나 난폭한 형. 이들은 ‘

쥐’ 잡기 사건이 가져온 오해로 인해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 전개 속에서 운명 앞 에 인간의 무기력함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거기에 구슬픈 민요 ‘배따라기’를 삽입하여 서정 적인 비애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1인칭 관찰자인 ‘나’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대동강으로 봄 경치를 구경하 러 나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은 시작된다. 완

벽하고 이상적인 ‘유토피아’라는 미의식을 꿈꾸는 ‘나’가 만난 그의 삶은 회환과 유랑을 계속 해야만 하는 비극미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배따라기’라는 민요가 가진 한과 서정성을 잊지 못해 결국 ‘나’는 다시 ’그‘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고 독자에게 여운 을 주며 끝이 난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우보다 못난 자신을 평소에도 부끄러이 여기다 결국 비뚤어진 의처증이

오해를 가져오고 그것이 증오로 표출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관계를 와해시키는 모습. 이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 장면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집 방안에 들어설 때에는 뜻도 안하였던 광경이 그의 눈에 벌리어 있 었다.

방 가운데는 떡상이 있고, 그의 아우는 수건이 벗어져서 목뒤로 늘어지고, 저고릿 고름

이 모두 풀어져 가지고 한편 모퉁이에 서 있고, 아내도 머리채가 모두 뒤로 늘어지고, 치

마가 배꼽 아래 늘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그의 아내와 아우는 그를 보고 어찌할 줄을 모르 는 듯이 움쩍도 안하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어이가 없어서 서 있었다. 그러나 좀 있다가 마침내 그의 아우가 겨

우 말했다.

『그놈의 쥐 어디 갔나?』

『흥! 쥐? 훌륭한 쥐 잡댔구나!』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짐을 벗어 던지고 뛰어가서 아우의 멱살을 끌어 잡았다. 『형님! 정말 쥐가―』

『쥐? 이놈? 형수하고 그런 쥐 잡는 놈이 어디 있니?』 …(중략)… 서편으로 바다를 향한 마을이라 다른 곳보다는 늦게 어둡지만, 그래도 술시(戌時)쯤 되

어서는 깜깜하니 어두웠다. 그는 불을 켜려고 바람벽에서 떠나 성냥을 찾으러 돌아갔다.

성냥은 늘 있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저기 뒤적이노라니까, 어떤 낡은 옷뭉

치를 들칠 때에 문득 쥐소리가 나면서 후다닥 뛰어나온다. 그리하여 저편으로 기어서 도 망한다.

『역시 쥐댔구나!』

그는 조그만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만 맥없이 덜썩 주저앉았다.

아까 그가 보지 못한 때의 광경이 활동 사진과 같이 그의 머리에 지나갔다.

아우가 집에를 온다. 아우에게 친절한 아내는 떡을 먹으라고 아우에게 떡상을 내놓는다.

그때에 어디선가 쥐가 한 마리 뛰어나온다. 둘(아우와 아내)이서는 쥐를 잡노라고 돌아간 다. 한참 성화시키던 쥐는 어느 구석에 숨어 버린다. 그들은 쥐를 찾노라고 두리번거린다. 그럴 때에 그가 집에 들어선 것이다.

『상년. 좀 있으믄 안 들어오리……』 그리하여, 낮쯤 한 삼사 리 내려가서 바닷가에서 겨우 아내를 찾기는 찾았지만, 그 아내

는 이전 같은 생기로 찬 산 아내가 아니요, 몸은 물에 불어서 곱이나 크게 되고 이전에 늘 웃음을 흘리던 예쁜 입에는 거품을 잔뜩 물은, 죽은 아내였다.

아내의 죽음으로 일단락되는 이 중심사건은 다소 돌발적이다. 이후 집을 떠난 동생과의 만남도

너무 극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래도 순수 예술 단편으로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동생을

만나 미안하다 사과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 할 때 동생이 그저 운명이었다며 내뱉는 장면은 동생의 한이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이 된다. 이 짧은 대사 한 구절에는 다시 만나

함께 살더라도 예전의 우애 깊은 형제로 돌아갈 수 없고,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정말 운명일 것이니 받아들이고 그렇게 묻고 살자라는 아우의 절절함이 담겨 있다.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한 모습과 끝없는 회한, 계속 된 자책. 사실 우리가 그 얼마나 운명을 거스르며 살고 있을까?

필자는 월, 화가 휴무다. 다소 불편하고 솔직히 좀 짜증도 나는 도시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남들은 금욜밤이 좋다지만 난 금욜부터 긴장하기 시작한다.) 여하튼 그러다보니 어쩌다 ‘ 효녀’가 되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요즘 약간의 갱년기가 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이리저리 구경을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월, 화’쉬는 친구들은 없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월요일 아침에

떠나 화요일 저녁쯤 돌아올 수 있는 코스의 국내 여행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최근 강원도 미시령 고개를 넘어가기 전 ‘백담사’라는 절을 구경했다. 만해 한용운은 이곳에서 수양을 하고 ‘님의 침묵’도 창작했다고 한다. 절 안에 기념박물관도 있고 관광객도 많고 템플스테이도

하는 곳이고 여러모로 바쁜? 사찰이었다. 이곳에서 난 그냥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불공을 드리고 그리고 역시 그냥 집에 갈 수 없는 모녀기에 근처 백숙집에 들어가 도라지 막걸리를 한잔 하게 되었다.

아아 오마니, 저 고개만 넘으면 속초인데....

그리고 지금은 앞에 조금 써놨던 원고를 마무리 짓지

못해 결국 일터에서 마저 쓰고 있다. 학원강사의 삶도

어언 5년이다. 원장이 내가 딴 짓을 하는 줄 어떻게 알았는지 자꾸 내 강의실에 들어오는데 주말도 못 쉬는

삶이라 에이 그만둘까 하다가도,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상 이렇게 “예. 노예1호 임미다. 하루살이처럼 사는 거 그려, 운명이여!” 하고 체념하게 되었다.

그래, 내일은 좀 더 맛난 점심을 먹겠노라며 사소한 즐거움을 찾으며 다시 받아들이겠지. 또 시간은 흐를 것이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손이 어설프게 두꺼워져 지금 기타 배워요~ 티내지만 학원근처에 ‘ 기타교습소’가 있고 출근 시간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취미 생활을 다시 시작하여 기쁘고 설렌다. 이거 혹시, 완전 기타 천재가 될 운명이려나...?

운명, 운명 뭔가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그게 또 재미지게 사는 맛 아니겠는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혹은 그 반대일지 그건 아무도 모를 테니까 말이다. 다음시간 작품 고전 시 고려가요 서경별곡을 살펴보겠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을 ,

지도 알

요즘

음 악

비트가 멜로디에 앞서는 요즘 음악에 사실 흥미가 없다. 게다가 멜로디 역시 유치하거나 짧게 반복하는 ‘후크송’ 위주라 오래 듣고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가요계엔 작곡가들이 몇 없는지 대부분의 곡들이 비슷하게 들린다. 밤새 혹은 몇 주 동안 고민해 곡을 정성스럽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붕어빵 구워내듯 컴퓨터로 쉽게 곡을 만드는데, 팥의 양이 아주 조금씩만 다른 붕어빵처럼 입력하는 소스에 따라 조금씩 다른 곡들이 무더기로 만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리라. 대중의 기호라는 이유가 크겠지만 그래도 항상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송창식은 요즘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요즘 후배들 음악이 어떤 거 같으냐고 물어봤다. “컴퓨터 음악이죠. 전혀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도 옛날에 섬세하게 표현하던 음악과 같은 가치를 갖게끔 변했으니까 어떤 게 더 좋다곤 말 못하죠. 단지 시대에 따라 변한 거지. 그리고 옛날 가수들보다 지금 가수들이 노래 못하지 않아요. 잘하지. 단지 옛날 가수들이 가지고 있던 고 맛은 없지. 근데 옛날 가수들은 요즘 가수들이 꼭 가지고 있는 게 없었지.” 나는 그의 말에 “요즘 제 세대도 그렇고 요즘 노래는 노래 같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똑같은 말이 반복되는 가사에 내용도 없잖아요.”라며 의견을 표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건 듣는 사람이 만족을 못해서 그런 거지. 실제로 그거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거만 가지고도 충분히 광란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구요. 그러니까 안 그런 사람들은 취향이 다른 거지, 뭐. 옛날에 우리 노래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저 뭐야, 옛날에 뽕짝 좋아하던 분들은 ‘저거 너무 시끄럽고 복잡하다.’ 그러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런 건 언제든지 있어요. 같은


세대 중에도……. 그리고 우리가 음악을 할 때도 미국 음악이라는 게 같이 있었으니까. 솜씨로 봐서 미국 애들한테 안 되니까. 그 솜씨만 가지고 한국 가수는 가수로 안치는 우리 또래 친구도 많았어요. 그게 무슨 음악이냐 그러구……. 외국 사람들의 음악만 좋아하고 한국 사람들의 음악은 안 좋아하는 그런 계층들이 있었어요, 그때도. 그러니까 할 수 없는 거지, 그거야. ‘ 지금 음악은 음악 같지도 않다.’ 그렇게 말하면 더 음악 같은 다른 음악을 좋아하는 거지, 뭐.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 음악 좋아하잖아요. 일단 싸이 같은 애들 봐요. 그런 가수 우리나라에 있었나? 없었는데. 물론 매체의 장점이 있었지만……. 역시나 그다웠다.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대답이었다. 그는 지금의 대중음악을 시대의 현상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를 인정했다.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의 음악과는 형식이 다를 뿐이지 수준을 논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두 음악을 거의 같은 위치에 놓고 바라보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에 기성세대 혹은 외국 음악만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으니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이해가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막론하고 ‘시대’라는 숲을 멀리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박수를 보냈다. 그 덕에 나 역시 요즘 음악을 바라보는 눈이 미약하게나마 너그러이 변했다.(물론 그 이전부터 걸 그룹의 의상과 안무엔 눈이 갔다. 당연히.) 시간이 흘러 또 어떤 음악이 세상을 울릴지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붕어빵식의 공산품보다는 공을 깃들인, 세상에 하나뿐인 음악이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다. 송창식의 그것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과 거기서 파생된 진보적인 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말의 개성이나마 묻어 있길 바라본다. 혹 주류가 취향에 맞지 않아도 불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디라는 넓은 바다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고기를 잡으면 될 것이기에. 물론 이러나저러나 난 송창식을 리스트의 맨 윗줄에 올려놓을 테지만. 팁으로, 그가 인정하는 후배 가수들을, 알려주고자 한다. 내가 “가요계 후배 가수들 중에 마음에 드시는 가수 있으세요?” 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잘 몰라요. 근데 노래 잘하는 가수 많드만! 박정현이라는 가수. 또 알리라는 가수도……. 그리고 그 누구냐 이름이…….” 나는 예전 한 기사가 떠올라 자우림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아 걔도 물론 잘하고 걔는 잘한다기보다 기초가 튼튼하더만. 그러고 남자는 걔 이름 뭐지? 젤 유명한 놈 요새, (그때 옆에 있던 함춘호가 김범수? 라고 도움을 줬다.) 어, 김범수. 박재현(소설가) walrus1618.blog.me


데뷔 앨범부터 타이틀곡과 찰진 짝을 이루며 앨범의 전체적인 색을 규정해 온 다채로운 인트로들은, 인피니트 앨범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이번 앨범의 경우 타이틀곡의 일부를 차용해 믹스했던 이전

’s pick

작업들과는 달리, 마치 콘서트의 오프닝처럼 편곡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뒤이어 강렬하고 둔탁한 드럼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는 타이틀곡 ‘Last Romeo’가 이어진다. 세월을 거슬러 다시 친정부모 같은 스윗튠과 손을 잡고 완성한 이 노래는, 인피니트가 지금껏 사랑받아왔던 모든 요소들 – 8, 90년대 팝을 연상시키는 편곡, 선명한 멜로디, 집착으로 수렴하는 가사 등이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블렌딩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전면에

인피니트 - Season 2 (2014)

밴드 사운드가 나선다. 드럼, 베이스, 기타에서 관현악기에 이르기까지, 플러그나 전기의 힘보다는 손과 발의 도움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 이 ‘ 생’ 소리들은, 다른 아이돌 그룹들과 차별되는 인피니트의 다소 촌스럽고 낭만적인 색채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이 신박한 조화는 지금까지 진행한 모든 콘서트에서 올 밴드 라이브만을 고집해 온 이들의 이력과 겹쳐지며, 이들의 ‘두 번째 시즌’에 그 어느 때보다 라이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런 예측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중략)

이 앨범이 가진 진짜 힘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온다. 그렇게 부담스럽도록 많은, 심지어 한 곡 한 곡 공통점을 찾기도 힘든 다양한 곡들이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가 “Season 2″ 안에서 너무도 잘 어울린다. 실제로 이번 앨범은 지난 5년간 인피니트가 발표한 그 어떤 앨범보다도 유기적 완성도를 자랑한다. 더욱 고무적인 건 그 끈끈함의 원인이 그 누구도 아닌 인피니트 정규앨범, 울림 엔터테인먼트,

멤버들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아이돌 앨범의 완성도를 낮추는 주범인

2014년 5월 21일

멤버 개개인의 솔로 곡들과 뻔한 발라드 트랙들, 그리고 이번 앨범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곡가 이기/서용배의 곡 ‘소나기’까지. 이 모든 게

“아이돌의 순정”

‘말이 되는’ 지점에는, 한결같이 인피니트 멤버들이 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을 선사하는 성규와 우현의 목소리가 여전히 건재한 것은

글. 김윤하 http://idology.kr/762

물론, 오랜 투어 덕분인지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각 멤버들의 곡 소화력은, 주요 멤버의 역량에 기대는 것에서 그치고 마는 아이돌 악곡

(전략)

특유의 단조로움을 매번 요령껏 피해간다. 특별히 누가 눈에 띄거나

3년 만에 발표하는 정규 앨범으로

튀려고 하기보다는, ‘인피니트’라는 브랜드 가치 하나만을 위해 그 누구도

제2막을 열겠다는 이들의 뜨거운

한눈팔지 않는 멤버 이하 스태프들의 집중력이 앨범 전체를 휘감고 있다.

포부는, 오랜만에 익숙한 모습으로

그 놀라운 기운이 손실 없이 그대로 반영된 앨범을 우리는 흔히 좋은

수록된 인트로에서부터 감지된다.

앨범이라고 말한다. (후략)


1st Listen : 인피니트 - Season 2 정점을 찍는다. 이어지는 ‘Follow

http://idology.kr/755

Me’는 발랄한 보컬 멜로디와 뒤에 김영대

:

스윗튠이

아이돌에

깔리는 스트링 선율 덕에 RPG

최적화된 팀이라는 느낌은 없지만

게임의

‘Last Romeo’의 몰아치는 브라스와,

개인적으로 취향이다.) ‘로시난테’,

촌스러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숨

같은

또한 납득할 만하다. 타이틀곡의

후렴의

애매한

호소력은,

주제가를

쉬자’로

연상시킨다. 이어지는

양보할 수 없는 정체성, 인피니트

완성도에

브랜드의 가장 직접적이고 거친

못했던

전작들과는

구현이다.

전반이

일정

선율의

응집력으로만

본다면 ‘추격자’보다 나은 곡. 훨씬

수록곡들이

(

구성

따라가지

달리,

수준을

앨범

유지한다.

반가운 일이다.

음방분석 노동 : 2014년 5월 4주 인피니트 - Last Romeo

더 정제된 클럽튠 ‘Follow Me’, 아예 작심하고 제목부터 사운드까지 80

유제상

년대의 대표곡 서너 개를 동시에

인피니트를

‘남성판

던져대는 ‘Reflex’, 딱히 흠을 잡기

생각해왔다.

일단

애니메이션

<인기가요>는 기본 안무 대형을

힘든 제이윤의 가요 발라드까지,

주제가 같은 스윗튠의 곡을 주로

삼각으로 설정하고, 손을 앞으로

귀가

이런

사용하는 점이 그렇고, 오종종한(?)

뻗는 등 공격적인 안무의 특성에

구성은 좋은 걸까? 다시 근작(

멤버들이 건강한 색기를 낸다든지,

조응하여

광각렌즈로

이자 괴작) “The Origin”의 욕심을

무대든

과장시킨

장면들이

떠올린다.

정체성은

차있다든지 하는 점이 더욱 그렇다.

광각렌즈를 단 카메라를 지미집

언더독, 그들이 의도하는 것이 정녕

이처럼 두 그룹을 동일 선상에

(Jimmy Jib)에 얹고 하이앵글로

트렌드의 경주가 아니라 팝, 록,

놓고

인피니트의

피사체를

클럽, 신스팝, 가요 모두를 아우르는

신보 “Season 2″는 카라의 정규 2

꼭짓점에

스펙트럼에 대한 확인과 과시라면,

비슷한

부르는 멤버를 강조하는 쇼트를

내 평가는 “yes”다.

입지를

하겠다.

포착한다.

쉬어갈

틈이

없다.

인피니트의

:

평자는

예능이든

비교한다면,

오래전부터 카라’로

열의에

“Revolution”(2009)과 가진

글 ML http://idology.kr/724

음반이라

가득

눈에

담으면서, 서서 이

입체감을

자신의 컷의

띈다.

대형의 파트를 앞뒤로,

이들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야

안무대형에서 디테일을 표현하는

오요 : 인피니트 특유의 비장미를

한다면 인스트루멘탈 하나 없이

멤버들의 쇼트를 내보내며, 안무

좋아하는 사람에게 ‘Last Romeo’

열세 트랙을 꽉 채운 “Season 2″를

전체상과

는 꽤 만족스러운 싱글일 것이다.

택하겠다. 다만 “Revolution”에는

그려낸다.

과격하기까지

소리와

카라를 탑클래스로 올려준 노래 ‘

풍성한 브라스는 그를 극대화하며

미스터’가 있다. 과연 타이틀곡인

후반부로 가며 음악의 감정선이

“세상아 보거라 이기게 해다오 /

‘Last Romeo’는 인피니트를 최고의

상승함에 따라 천정에서 무대로

태양아 뜨거라 내게 힘을 다오 /

자리에 올려줄 수 있을까? 평자의

쏟아져 내리던 조명은 좀 더 강렬한

운명아 듣거라 길을 막지 마오”

귀에는 ‘Follow Me’-’로시난테’-’숨

빛을 내어 빛줄기를 만들고, 그

라는 가사에 이르러 비장한 정서는

좀 쉬자’의 삼연타가 더 좋았는데…

움직임 또한 격렬해진다. 이 새하얀

드럼

운동감을

능숙하게 (중략)


빛줄기는 인피니트의 무대 의상에 완벽히 조응한다. 갈수록 강렬해지는 조명은 새하얀 빛으로 무대배경을 대체하고, 곡이 끝나 멤버들이 포즈를 취하며 멈출 때 그 사이사이를 채우며 화사한 시각적 쾌감을 안긴다. 더불어 이 조명은 어설펐던 무대 미술의 한계를 보충하는데, ‘Last Romeo’ 뮤직비디오의 세계가 표현하던 국적불명의 고딕적인 판타지를 그럴싸하게 표현해내는 것이다.

(중략)

<인기가요>는 자신들이 이미 구축해놓은 빠른 커팅과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로 컴백 무대부터 ‘Last Romeo’ 퍼포먼스를 능숙하게 받아냄과 동시에, 광각렌즈로 퍼포먼스의 특성을 과장시키고 조명 연출을 통해 효율적으로 콘셉트를 구현해냈다. <음악중심>의 경우, 다른 음악방송이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카메라 워크를 그 용례에 대한 파악 없이 차용하여 발생하는 민망함 탓에, <음악중심>의 장점으로 곱씹을 만한 지점들을 날려버렸다. <엠카운트다운>의 경우 뮤직비디오에서 제시한 콘셉트를 세심하게 수용한 무대 미술을 선보였고, 방청객 시점을 구현하며 현장감을 전달하려는 초점을 맞춘 연출로 인기가요와는 다른 재미를 보여줬다. <엠카운트다운>의 29일 ‘Last Romeo’ 무대에서는 <인기가요>가 인상적으로 제시한 조명 연출을 수용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음악방송이란 게 컴백 후 방송 회차가 늘어갈수록 단점들을 내부보완하고, 타 음악방송을 참조 및 차용하며 완성도를 높여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제 곧 시작할 <인기가요>가 타 음악방송에 어떻게 화답하는지 눈여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번 달은 이것 : 아이유 - 꽃갈피 (2014) 리메이크 앨범, 로엔 엔터테인먼트, 2014년 5월 16일 “나는 지금부터 ‘여동생’이 아니다.” 글 미묘 http://idology.kr/690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에 관해 많은 평자들은 놀라움을 표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주로 원곡들을 현재로 가져오기보다 원곡의 시점으로 돌아간 듯한 접근방식이 가장 큰 놀라움을 자아낸 듯하다. 음반 커버와 뮤직비디오 등의 시각적 요소들이 특히 그런데, 음악적으로도 이 음반은 (굳이 꼬집자면) 원곡이 위치한 시대보다는 각 원곡의 세계를 따라가고 있다. 단적으로 아이유의 보컬은 ‘나의 옛날 이야기’의 “아름답던 그 밤들을” 부분에서 다소 비음을 섞은 허스키 보이스로 음정을 올렸다가, 반복되는 음정을 바이브레이션으로 흩어버리는 식으로, 조덕배의 시그니처를 시뮬레이션하는 듯하다. ‘꽃’에서는 김광석처럼 중고역을 쨍하게 찌르고 들어가며, ‘너의 의미’에서는 소년 같은 김창완의 목소리와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중략)


‘너의 의미’의 마지막에서 김창완은 “도대체 넌 나에게 누구냐?”고, 투박한 듯 다정한 어미로 묻는다. ‘국민 여동생’과 ‘삼촌’의 묘하게 어긋난 족보의 소용돌이를 정면으로 뚫고 지나온 아이유는 대체 지금 무엇이 되려 하고 있는 것일까. 40대에게 귀여운 조카가 되고자 했다면 각 아티스트의 조금 더 유명한 곡을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곤 완연한 현재적 음악으로, 혹은 시대상이 거의 사라진 담백한 어쿠스틱 연주로 일관하면 됐을 것이다. ‘어른들’은 “하긴 요즘 애들이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를 알리가 없지. ‘꿈에’를 아는 게 어디야?”라며 충분히, 오히려 더욱 사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실제로 데뷔 초 아이유가 인기를 끈 라이브 영상들이 그랬고, 많은 아이돌들은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요즘 아가씨’의 모습으로 매력적인 젊은 여성을 어필했다. 그러나 “꽃갈피”는 그렇지 않다. “삼단고음”을 내뿜는 기특한 ‘조카’로서 수많은 ‘삼촌’들을 녹다운시키다가 유난한 스캔들을 겪은 뒤 ‘분홍신’(2013)으로 도발과 ‘성숙’을 묘하게 선보인 아이유다. 3-40대와 문화적인 공감을 넘어 동조하고 있는 “꽃갈피”는, ‘아저씨에게 어필하는 (기특한) 소녀’나 ‘아저씨를 이해하는 (기특한) 소녀’ 같은 이미지를 넘어서 ‘아저씨를 뼛속까지’ ‘알고’ 있는, 혹은 ‘아저씨와 뼛속까지 똑같은’ 음반이다. 아이유가 “나의” ‘ 옛날이야기’를 부르는 기묘한 풍경은 그렇게 설명된다. (처참한 현실의 20대 앞에서) “황금기를 누리지 못하는” 3-40대가 아이유에게 힐링을 받았다는 글도 나왔다. 혹시 아이유가 보컬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따오는 날에는 차라리 제2의 김연아가 될 것 같은 풍경이다. (후략) 1st Listen : 아이유 - 꽃갈피 http://idology.kr/690 김영대 : 아이유는 탁월한 멜로딕 싱어지만 가사를 소화하는 감수성에서는 분명 아쉬움이 느껴진다. 내가 프로 듀서라면 그 점을 더 물고 늘어질 것이다. ‘여름밤의 꿈’은 윤상이나 김현식보다는 늘 조금 더 가볍고 청아한 곡 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이유의 톤과 제법 그럴듯하게 들어맞았다. macrostar : 아이유가 언젠가 이런 걸 꼭 한 번은 하고 싶다면 지금이 제때가 아닐까 싶다. 적절한 타이밍, 적 절한 선곡, 적절한 퍼포먼스. 리메이크 음반이라 아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역시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실 히 보여줌.

ML : 추억 속 그 곡을 요즘 유행에 맞게 리메이크한 것이 아니라, 아이유 가 그 시절에 활동했었던 것 마냥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집중하고 있는 점이 재밌다. 음반 커버와 폰트, 사운드, 뮤직비디오 속 소품들 하나 하나 세심히 조율되어 콘셉트를 곱씹기 좋다. 특히 지난 뮤직비디오들에 서 자신이 하고 있던 역할을 최우식에게 맡긴 후 관찰자 입장에서 그 모 습을 보며 애상을 느끼는 아이유의 모습을 담고 있는 ‘나의 옛날 이야기’ 뮤직비디오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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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동걸 mm17@me.com! ! www.facebook.com/mapuki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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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까무잡잡한 피부의 볼륨감 넘치는 언니들의 훌라댄스를 머리에 그리고 있는가?

!

이번엔 하와이의 훌라에 대해서 얘기 좀 해볼까 한다.

아오이 유우가 연기했던 일본의 하와이 문화 광광단지가 들어서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훌라걸스’에서 나온 훌라는 사실 두개 의 섬의 훌라였다. 타악기 소리에 맞춰 아오이 유우가 빠르게 풀치마를 입은 골반을 흔들며 그녀의 춤에 대한 열정에 어머니로부터 뜨거운 눈물과 박수를 받은 훌라는 화가 고갱의 사랑 ‘타히티’섬의 훌라였다. 사람들은 하와이 훌라하면 의례 이 이미지의 훌라를 연상을 하던데 사실 영화 ‘훌라걸즈’에서 훌라 선생님이 탄광촌의 여인들에게 처음으로 손동작으로 의미를 설명하던 훌라가 바로 ‘하와이’ 훌라였다.

‘하와이’ 훌라의 특징은 다른 섬들의 훌라보다 동작과 표정 하나 하나로 표현하는 노랫말의 의미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내가 공연을 할땐 하와이 노래를 부르기 전 대략적인 뜻을 설명해주고 함께 하는 훌라댄서들의 동작을 자세히 보며 그 뜻들을 유추해볼 수 있도록 얘기한다. 처음엔 훌라에 대한 별 다른 경계없이 앉아서 구경을 하는 관객도 훌라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보게 되고 그러면서 훌라의 진지함에

!

매료된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사실 훌라라는 단어는 Hula라는 단어 자체가 ‘춤’ 혹은 ‘춤을 추다’ 라는 뜻으로 태평양에 위치해있는 폴리네시아 군도의 여러섬에서는 각 각의 역사와 문화에 맞춰 변형된 훌라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사모아 훌라, 타히티 훌라, 통가 훌라 등등) 옛날 폴리네시아인의 기원중 가 장 지지를 많이 받는 학설은 인도네시아쪽에서 부터 오랜 시간동안 배를 타고 별을 보며 태평양의 섬에서 섬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학설이 다. 그래서인지 폴리네시아 군도 전체에 퍼져있는 섬들에선 언어나 풍습에서 많은 공통점이 발견이 되는데, 문화가 어떻게 변화되고 유지 가 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꽤나 흥미롭게 이루어지고 있는곳도 이곳이다. 고대 폴리네시아 군도의 섬들엔 언어는 있었으되 문자가 없었기 에 그들이 숭배하는 자연이나 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선 어떤형태에서이던지 기록매체가 필요했을것이다. 그런 필요가 여러 이유중 하나로 생겨난 것이 훌라가 아니었나 싶다. 이때까지의 훌라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훌라와는 많이 다른데, 서양인 선교사들이 흘러들어가 그네들의 편의를 위해 문자가 생기고 찬송가를 가르치기 위한 서양의 음악교육을 통해 현재 우리가 아는 낭만적인 남국의 음 악과 훌라가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다.


그전까지 하와이에선 노래라고 함은 우리가 듣기에 단순한 드럼비트에 이야기를 읊조리는 주술(챈트 Chant)의 형태였고, 훌라는 그것에 맞춰 챈트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채널이었다. 그렇게 하와이인들을 포함한 고대의 폴리네시안들은 그들의 신들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후손에게 전달했을게다.

지금 우리가 아는 풀치마에 코코넛과 조개껍데리로 가슴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엉덩이만 살랑살랑 흔드는 섹시한 훌라걸의 이미지 역시 사실이긴 하다. 고대 하와이 훌라나 타히티의 훌라의 복장이 원래는 여성의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놓 고 풀치마만 입었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성의 섹시한 이미지만 부각한 훌 라걸의 이미지는 미국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알려진 왜곡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만을 부각한 훌라다. 원래의 훌라는 고대엔 공식적인 나라의 제사의식엔 남 성들만이 훌라를 출 수 있었듯 훌라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을뿐만 아니 라 동작과 표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한 나라의 오래

!

된 전통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부심 높은 숭고한 춤이다.

하와이에선 훌라는 굉장히 엄격한 도제 교육 시스템으로 어느 스승으로 부터 배 우느냐에 따라 뜻을 표현하는 훌라의 동작과 의복 스타일에 차이가 있다. 한국 사 람하면 모두가 태권도를 배울거라는 외국인의 인식처럼 하와이 사람이라면 모두 훌라를 배운다고 생각하는건 무리다. 전통적인 훌라는 철저하게 스승(쿠무 라고 한다)의 허락하에 정식 제자가 되고 자국의 문화와 역사

!

를 대표하여 계승한다는 엄청난 자부심을 갖지 않고선 섣불리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것이 하와이인들의 인식이다.

나의 훌라와의 첫 만남은 특이했다. 친구의 파티에 초대되어 놀러갔던 곳에서 만난 (당시엔 정말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유명하다고 하던) 어떤 훌라 쿠무가 나더러 무턱대고 ‘넌 내가 에너지가 좋아.’ 라는 말로 자신에게 훌라를 배우기를 청했던 것이 훌라 세계로의 첫 발걸음이 었다. 그렇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기회였는지도 모른채 마냥 신나서 시작했던게 나의 훌라 인생의 첫 시작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훌라를 통해 하와이인들의 자부심과 그들의 정서를 배우기 시작하면 서 정말로 진지하게 훌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와이에선 훌라를 배우는 외국인 들을 바라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색안경이 존재한다. 이미 하와이의 훌라 인구수 를 훨씬 뛰어넘은 일본인의 훌라붐으로 인해 다른 외국인들이 훌라를 배운다고 하면 정통성을 이야기하며 외국인의 훌라를 가벼이 여기기까지 하는 하와이인들이 있다.

그래서 나처럼 외국인이 훌라를 배운다고 하면 일단 겉으로는 놀라워하며 반겨주는 이들이 있는 반면, 처음부터 경계를 하는 이들도 있다. 이때 훌라 스승이 누구냐에 따 라 그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리게 되는데, 어떤 훌라의 계보를 잇는 훌라 쿠무 (쿠 무: 마스터, 스승, 명인)의 양성소에서 훌라를 배우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몇번정도 나의 훌라 이름과 훌라 탯줄은 어떤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얘 기했을때 놀라워하며 진지하게 나를 대해주던 하와이인들이 있던것을 기억하고 있 다. 이번글을 마무리하며 소개 할 하와이 노래는 내가 훌라를 배우기 시작하고 두번째

왼쪽이 나의 훌라 쿠무 Tony Conjugacion

로 배운 곡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내가 무대에서 숨겨놓은 댄스욕망을 90도 수직으로 분출하는 곡이 되겠다. 다정한 연인과 둥근 보름달이 뜬 조용한 와이키키 해변을 거니는 시간을 노래한 곡이다. !

!


Pō laʻilaʻi# (밝은 보름달 빛)#

!! !

작사 메리 푸쿠이, 작곡 매디 램 (1958)!

Kāua i ka holoholo
 둘이 산책을 떠나자 I ka pō mahina laʻilaʻi# 달빛 밝은 밤에 E kilo hoʻonanea# 즐겁게 바라보자 I nā hōkū o ka lani#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

Kō mai ana ke ʻala# 어디선가 흘러오는 이 향기는 O ka pua o ka pīkake# 쟈스민의 향내 I halihali ʻia mai# 우리에게 흘러왔네 E ka makani kolonahe#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

Hoʻolono ana i ke kani# 잠시 멈춰 들어보자 Honehone a ka ʻukulele# 우쿨렐레의 달콤한 노래 Me ka mele hoʻohauʻoli# 기분좋은 멜로디에 Hoʻolana i ka puʻuwai# 가슴이 벅차오르네

!

Huli aku kāua i uka 산쪽으로 돌아보면 I ka ‘āʻā a nā kukui# 반짝이는 불빛들 Ua like me nā hōkū# 마치 수많은 별들이 E kau ana i nā pali# 언덕위에 떠있는듯 하네.

!

!

Haʻina mai ka puana# 다시 한번 이야기하며 마무리 짓자면 No ka po mahina laʻilaʻi# 이노래는 달 밝은 밤에 대한 노래 Hoʻolono ana i ke kani# 우리는 잠시 멈추네 Honehone a ka ʻukulele# 달콤한 우쿨렐레의 노래소리에

! ! ! ! 이 노래에선 사랑하는 연인이 둥근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와이 키키 해변으로 산책을 권한다. 해변을 거닐면 어디선가 향긋한 쟈 스민 향이 코끝을 간지르고, 아련히 들려오는 우쿨렐레와 노래 소 리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잡아준다. 그러다가 산쪽을 올려다보면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이 밤바다의 산책 을 더욱 낭만있게 그려주는데, 이런 산책으로의 초대를 마다 할 사

!

람이 누가 있을까?

난 해가 떨어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사람이라서 고민을 조금 해봐야겠지만 이런 낭만적인 데이트는 에너지 드링크라도 마

!

셔가며 일단 나가고 보는게 맞다고는 생각한다.

하와이의 여유로움과 낭만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노래로서 아래 의 QR 코드를 따라가면 이곡에 맞춰 춘 훌라 영상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훌라 아가씨의 영상을 기대하고 보는 남성들에게 경고한

!

다. 미안하지만 영상의 훌라 댄서는 나다. 하하하!

! ! ! ! ! ! ! ! ! ! ! ! ! !

알로하~



작곡가 b의 노트 <악보에서 시대를 읽다> 글. Composer B

1악장. 취향은 곧 ‘다름’에서 시작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당신은 클래식 음악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 애호가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3번「영웅」이 정말 끝내준다는 선배의 귀띔에 음반가게를 찾아가 알파벳 ‘B’의 ‘베토벤’코너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음반 진열장 앞에 서서 눈으로 한번 쭉 훑어보니「영웅」의 음반 종류만 해도 어림잡아 열 몇 장이 넘게 진열되어 있다. 당연히 서로 다른 레이블, 서로 다른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들이다. 어차피 똑같은 곡인데 뭐 이렇게 복잡해? 고민하던 당신은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선배! 베토벤「영웅」사러 왔는데요, 추천 좀 해주세요! 종류가 너무 많아요!” “네 취향에 맞는 게 제일 중요하지. 좀 무겁더라도 두텁고 풍성한 연주를 듣고 싶으면 카라얀 이 지휘한 1984년 녹음을 들어보고, 거칠어도 좋으니까 활력 넘치고 시원시원한 연주를 듣고 싶으면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한 1993년 녹음으로 들어봐!” 전화를 끊은 당신은 어떤 음반을 선택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둘 다 사기로 결심한다. 집에 와서 비교해가며 들어보니 과연 선배가 말해준대로 지휘자와 연주단체에 따른 특징이 귀 에 확연하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선 템포의 차이도 그렇지만 음색의 차이가 확실하게 두드 러진다. 분명히 어떤 악기의 소리나 음색이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연주한 녹음에서는 잘 들리 지도 않거나 굉장히 둔하게 들렸던 것 같은데 가디너가 지휘한 음반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선 명하게 들리는 부분도 있고, 가디너의 음반에서는 다소 방정맞게 들렸지만 카라얀의 음반에서 는 장엄하고 풍성한 음향을 뽐내는 부분도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2악장. 고증과 현실성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디너의 연주가 베토벤의 원곡의 모습에 조금 더 근접해있는 연주 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카라얀의 연주를 원래 베토벤의 의도를 왜곡하려고 작정한 연 주라고 볼 수만도 없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시대의 따라 변화하는 음악가들의 사고방 식에 대해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변화의 시작을 찾으려면 19세기의 음악시장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 한다. 산업기술의 급격한 발달은 음악계에도 어마어마한 영 향을 끼쳤다. 경제적으로 더욱 부유해진 중산층들은 이전세대까 지만 해도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 었고, 이들은 곧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 하는 적극적인 음악 애호가로 변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공방에서 소량을 생산하는 방 식으로 영업을 해왔던 악기제조상들은 시대의 문화적 욕구와 기 술의 발전이라는 흐름에 맞춰 대규모 생산 시설을 갖춘 악기 공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장을 세웠고, 이는 음악과 관련된 모든 시장의 판도 변화를 불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게 되었다.

DG 439002-2 (음반코드)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음악가들의 실질적인 연주 방법에도 변 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소수의 귀족들만 받아도 상관없던 연주 홀들은 본격적인 비즈니스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더 많은 관객을 수용하는 연주 홀과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장소의 변 화는 필연적으로 악단 규모의 확장을 불러오게 되었다. 또한 19 세기 음악가들의 낭만주의적 환상에서 시작된, ‘크고 아름다운’ 것을 선호하는 거대주의(gigantism)적 욕망 역시 이러한 변화를 부채질하는 한 요인이기도 했다.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 혁명과 낭만기의 오케스트라

따라서 본래 2관 편성(목관악기를 종류별로 두 대씩 사용하는

Archiv 4778643 (5CDs)

편성. 고전주의 시기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보편화 된 편성이었 다)과 50명 안쪽의 현악기 주자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베토벤 의 교향곡을 4관 편성(당연히 2관 편성의 두 배가 된다)으로 연 주하는 건 기본이고, 목관악기와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현악 기 주자 역시

1)

두 배로 늘리다 보니 100여명에 가까워진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 “24대의 바이올린으로

세세한 연주 기법의 변화까지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기뻤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1)

적어도 악단의 규모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상당한 변화가 이루 어진 셈이다. 바로 이 100여명 남짓한 오케스트라의 구성과 확대 지향적인 연주방식이 오케스트라의 보편적 모습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만 하더라도 이러한 풍조는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의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어서

본문에서는 쉬운 이해를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예로

들기는 했지만, 음악사적으로 볼

때 하나의 방향으로 단순하게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3악장. 원형을 찾기 위한 노력 이러한 악단 규모의 확장과 낭만주의적인 ‘웅장함’에 대한 동경은 필연적으로 아티큘레이션 (Articulation: 선율의 각 음들을 보다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표현법)의 희생을 불러오게 되 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연주할 때는 이전시대의 소규모 편성으로 해왔던, 전체적으로 날 렵하고 빠르면서도 세부가 섬세하게 강조되는 식의 연주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토 벤 이후의 시대부터 진행된 악기장치의 개량역시 예상치 못한 논쟁거리를 낳게 된다. 사실 베 토벤 시절의 악기-특히 금관악기-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모 든 음계를 자유롭게 연주하기 힘들어서 배음에 기초한 제한적인 음들만을 연주할 수 있었고 그 외의 음들은 손으로 악기 입구를 막거나 입술의 힘으로 조절해서 내야만하는, 상당히 불완 전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수준의 악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적 결함은 금관악기가 담당하는 선율의 작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멀쩡히 선율이 전개되다가도 그 악기가 낼 수 없는 음역에 도달하는 상황이 되면 갑자기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무리한 움직임이 나온다거나 소리가 끊겨서 전체적인 음색이 텅 비어있는 것 처럼 들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지휘자들은 이런 음향상의 불균형 을 해소하기 위해서 베토벤의 악보에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죽어버 린 베토벤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필(加筆)작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위에 서술한 카라얀 역시 그런 흐름에 있는 지휘자이다.

베토벤 교향곡 3번에서 악보가 원본(위)과 가필(아래). 아래와 같이 수정하면 원본의 소리와는 다르지만 더욱 자연스럽고 짜릿한 팡파르가 된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이러한 흐름에 본격적으로 변화가 생긴 것은 영국의 음악학자인 조너선 델 마(Jonathan Del Mar, 1951~)가 독일의 베렌라이터 출판사와 손잡고 1996년에 정식으로 출판한 ‘베렌라이터 원전판(Bärenreiter Urtext)’을 출판하면서 부터이다. 현대에 새로 창작되는 음악의 악보는 작곡자의 권한이 절대적이어서 편집자가 임의로 수정하거나 추가하는 일이 거 의 없다시피 하지만, 베토벤 당시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던 각 출판사와 편집자들이 임의로 이음줄, 다이내믹 지시, 스타카토, 심지어는 템포에 대한 표기를 수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 다. 물론 악의가 담긴 수정은 아니었고 인쇄상의 오류나 베토벤의 자필악보(베토벤은 악필로 유명했다)를 잘못 읽는 데에서 기인한 실수들도 있다. 그 악보가 바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베 토벤 교향곡 악보의 주류로 자리를 잡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어텔(이하 브라이트코프)’ 출판


사의 악보이다. 델 마는 브라이트코프 판의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 베토벤의 자필 악보와 편지, 대화수첩, 다른 악보의 필체와 음형까지 면밀히 검토한 끝에 원래 베토벤의 의도 를 담은 악보를 1996년에 정식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베렌라이터 판의 등장 이후로 상당수 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들이 적극적으로 이 판본을 선택해서 연주하게 되었고, 편성 역시 이전 의 4관 편성에서 원래대로의 2관 편성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먼저 소개한 가 디너의 1993년 녹음은 베렌라이터 판이 정식으로 나오기 이전에 델 마의 연구 성과를 부분적 으로 반영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른바 ‘베렌라이터 전성시대’의 초기 모습에 가깝다. 따라 서 가필과 악기의 중복을 당연하게 생각한 카라얀의 연주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요소들이 모이고 모여서 분명히 같은 작품인데도 지휘자가 어느 출판사의 악보 를 선택하느냐, 어느 시기에 녹음했느냐 혹은 어느 시대의 형태로 된 악기를 선택했느냐에 따 라서 음악의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사실 이 외에도 무수한 음 악적, 기술적인 차이가 있고 베렌라이터와 브라이트코프가 아닌 또 다른 판본을 사용한 연주 도 존재한다. 다소 머리가 아플 수도 있겠지만 “아, 이런 세계도 있네?” 하는 마음으로 여러 종 류의 연주를 비교해가면서 듣다 보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글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자기가 좋아하는 거 들으면 된다.




게임 노동 일지

글. 그림. 철민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소개소

1. Our Scene - ...WHATEVER THAT

2. 오래된 연인 - 장미여관

3. 큰푸른물 - 레이지본

한국인과 외국인 멤버로 구성된 3

사실 인기있는 밴드로만 알았는데

여름은 역시 스카 펑크의 계절이다.

시작된다.

밴드 전체적으로도 잘 어울리는

음은 듣는 사람을 시원하게 해주는

MEANS [Sixty Eight, Twenty-Two] (2014), 3

인조 펑크밴드. 빠른 드럼 연주로 간간히

나오는

여자

베이시스트의 힘찬 코러스가 곡을

더 신나게 만들어준다. 알면서도 지나치고

생각해보게

싶었던 하는

것들에

가사가

대해

좋다.

특히 펑크락 씬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흥미롭다.

[산전수전 공중전](2013), 2

[Lazy Diary](2002), 4

라이브에서 멤버들 각자도 잘하고 밴드였다.

특히

베이스

소리가

너무 좋아 깜짝 놀랬다. 곳곳에서 나오는 멤버들의 기합소리가 정말 적절하게

가사

사이의

빈틈을

채워줘서 즐겁다. 느리게 부르는 후렴구와 드럼 연주가 잘 어울린다.

가사가 재미있으면서도 리듬감이 느껴지는 노래이다.

트럼펫이 더해진 스카 펑크 특유의

힘이 있다. 특히 이 노래는 가사부터

시원하다. 중간에 보컬이 갑자기 빨라기 노래하는 부분이 재미있다.

레이지본의 음악을 잘 몰랐지만 라이브에서 좋아하게 된 노래. 작년에 8년만에

원년

멤버로

재결성한

레이지본을 올해 처음 봤는데 팬들의 반응이 정말 뜨거웠다.


제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노래들을 선곡해봤습니다. 잔잔한 곡 뿐만 아니라 활기차면서도 좋은 가사를 가진 노래, 꽉 찬 리듬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노래들도 소개합니다. 신당동 파르한 (@chungchoon98)

4. 사랑이 아니야 - 원더버드

5. Let me Home - 버닝햅번

6. 열린 회로 - 거닐숨

원더버드의 차분한 연주 영상을

항상 음악소개소를 위해 아껴 두고

공연에서 이 곡이 연주되자마자

특히

조용한 스카 펑크 음악이다. 라이브

대로 연주하는데 베이스를 연주하는

[The Story Of A Lazy Bird](1999), 8

보면 마음이 절로 평화로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드러머의

연주가 참 위안을 준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나와는 닮지 않은

사람’과

인상적이다.

같이

실력파

가사가

뮤지션들이

모인 밴드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젠

활동하지 않지만 2010년 GMF와

단독공연, 그리고 2011년 펜타포트 락 페스티발에서 잠시 재결성했다.

[Life Goes On](2010), 8

있던 노래. 그리운 기분이 들게하는 영상에서는 음원과 달리 전주를 연주한 뒤 노래를 시작하는데 그 부분이 노래를 더 멋지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원곡과 달리 두 명의

보컬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더 좋다.

라이브에서 들으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아직 공연을 몇 번 못봐서 더 기대되는 노래.

[차가운 힘](2013), 1

좋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분명 기타 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못의 < 날개>를

들으며

우울하면서도

위로가 되었는데 베이스 같이 낮은 음의 이 노래를 듣고 몇 년 만에 다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제목에 걸맞게

나를 둘러싼 상황을 회로와 연관지은 가사가 참 기발하다.



Chapter 13 {실전}의 생존매뉴얼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드라이 플라워 피어 있는 상태 그대로

1) 비가 찔끔거리며 내리던 오후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동창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당시 같은 반이었던 다른 친구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그 친구가 현재 이태원

말린 꽃. 생화에는 없는

경리단길에서 꽃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 기억 속 그 친구의 이미지와 꽃이 불협화음을

독특한 색조가 있어

내던 찰나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우리는 경리단길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다.

장식으로 쓴다. ‘말린 꽃’으로 순화.

친구의 꽃집에는 내가 아는 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는 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과 친구가 꾸며놓은 소박한 공간의 조화는 감각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꽃가게를 하는 친구와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십 여년이랑 시간 밑으로 침전된 기억의 찌꺼기들을 그러모아 우리는 오랜만에 수줍은 듯 대화를 나눴고, 이내 달큰한 술자리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다소 말괄량이처럼 느껴졌던 친구는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런 친구의 신념을 반영이라도 하듯 보통 꽃가게 하면 쉽게 떠올리는 붉은 장미나 튤립 같은 꽃은 보이지도 않았고, 그 자리를 대신한 ‘드라이 플라워’들이 저마다의 공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술자리는 점차 무르익어갔고 취기 때문인지, 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와 그 공간이 간직한 소박한 아름다움에 내가 무언가 보탤 것은 없을까 하는 오지랖이 일었다.


물질적 보답 없이는 절대로 디자인에 임하지 않는 내게, 그런 충동이 일었다는 사실이 나는 난처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던 찰나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로고를 다시 만들고 싶다는 소리를 했다. 나는 웃으며 친구의 제안을 반겼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답례를 바라지 않는 내 인생 최초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 ‘제대로 하고 싶다.’ 이 생각이 도무지 머리를 떠나지 않자 모니터 한쪽 귀퉁이에 글귀를 메모해 붙여 놓았다. 그러자 마법처럼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졌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는 로고만 부탁했지만 나는 로고에서 끝낼 수가 없었다. 이미 공간에 매혹된 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소박한 공간의 전반적인 경험을 새로이 조직하고 싶었다. 모든 작업이 끝난 지금에야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내가 한 것 중 새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내가 한 것이라곤 그 공간에 본디 내재해 있던 의미들을 시각화함으로써 조금 더 명징하게 보여준 것뿐이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의 끝에서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디자인의 윤리적 딜레마를 느끼게 되었다.

국문기본형 / 윤명조 700

국문변형형 / 윤명조 700

플라워살롱, 낭

플라워 살롱, 낭

3) 언어화하지 못할 만큼 미세하고 부드러운 감각의 홀씨들을 하나의 컨셉(언어)으로 조직해 공간을 규정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여기서 컨셉에 해당하는 언어는 일종의 권력을 쥐게 되는 셈이고 공간을 쥐락펴락할 것이다. 컨셉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내가 처음 이 공간과 마주쳤던 인식 이전의 감각들은 박멸되고 외부화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부유하는 감각의 편린들에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면역력을 부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생각이 드니 지난날 내가 했던 디자인들에 대한 깊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내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외부로 쫓아낸 작지만 소중했던 감각들. 그것들은 어딘가로 흐르고 흘러 깊은 바다를 이루고 있을 것만 같다.

4) 디자인의 전 과정에서 친구가 했다는 느낌을 모조리 지우고 싶었다. 어찌 보면 나로서는 새로운 도전이었기에 성의 없이 노트북만 덜렁 들고가서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정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로 했고, 다른 친구에게 빔프로젝터를 빌렸다. 노트북과 빔을 연결하는 데는 단자가 필요했고(친구에게 단자가 없었다.) 그 날 나는 인터넷을 통해 주문을 넣었다. 하지만 피티 바로 전날까지 단자는 도착하지 않았고, 나는 점차 초조해졌다. 피티 당일이 되어도 택배는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화물추적을 통해 담당자 이름을 검색해 보다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담당자 이름이 ‘문대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었지만, 그 자리에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썩은 이를 내비치고 계셨다. 나는 마침 경리단길에서 커피숍을 경영하고 있는 얼리어답터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는 전화기로 난색을 보이며 단자 이름을 말했고 나는 만세를 외쳤다. 피티날이 되자 하늘에선 병아리 눈물 같은 비가 쏟아졌고, 나는 우산도 펴지 않은 채 꽃집으로 향했다.


5) 나는 친구 커피숍에서 단자를 받아 즐거운 마음에 피티 장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문대기의 망령이 씌었는지 단자는 빔과 호환되지 않았고 나는 또다시 좌절에 빠졌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자 습도는 올라갔고 어딘가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짙게 내린 어둠을 뚫고 단자를 구하러 달리기 시작했다. 가게 바로 옆에 있는 전파사에 가서 단자의 행방을 묻자 아저씨는 통신사로 가라고 했다. 맞은편 통신사로 가니 다른 통신사로 가란다. 다른 통신사로 가니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있는 전파사에 단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몸은 젖어 습해졌고 아까 들렸던 개구리 소리가 더 가깝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겨드랑이를 들어보았다. 시간은 늦었고 경리단길에 존재하는 모든 가게의 불이 꺼졌다. 나는 얼리어답터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전화해 빔프로젝터를 빌려달라고 애원했고 친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처음 생각했던 빔프로젝터보다 몇 배는 큰 기계를 한쪽 손에 들고 나타난 나는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 앞에서 그저 겸연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 손에 이끌려 꽃집에 자리한 작은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내 생애 가장 소박하고도 근사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6) 우선 컨셉을 잡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이 공간이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는 하이쿠[俳句]

점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일본의 시 형식인 ‘하이쿠’가 생각났다. 이러한 연상은 아마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친구가 일본에서 유학했고 그곳에서 꽃을 배웠다는

일본 중세 시대에 이루어진 정형시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았다는 시간적 사실보다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은 친구의

시란 별명을 갖고 있다.

내면에서 흘러 나오는 ‘일본적 정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절어와 매듭말이 꼭 들어가야

십여 년이 흘러 만난 친구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속 주인공을 동경했고,

하고, 첫째구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며 3구 17음절로 형성된다.

그녀의 소설에 나올 법한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의 끝에서 나는 이 공간을 정의할 만한 세 가지 키워드를 도출해냈다. 그것들은 ‘하이쿠’, ‘살롱’, ‘마른 꽃’이었다.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る桜哉 두 사람의 삶, 그 가운데 활짝 핀 벚꽃이여

7) 하이쿠[俳句]; 일본의 에도시대 작가인 마쓰오 바쇼가 남긴 위의 짧은 하이쿠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끝없이 의미를 생성하게 하는 위대한 구석이 있다. 실제로 친구들에게 이 하이쿠를 보고 연상되는 이미지를 물었더니 한 친구는 젊은 두 연인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노년의 부부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마쓰오 바쇼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가 정보와 어떻게 다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정보는 보는 이에게 해석이 아닌 빠른 직관만을 요구한다. 우리는 신문이나 일간지를 읽으며 숨겨진 의미들에

일본 에도시대 전기의 하이쿠[俳句] 작가. 전국 각지를 여행하여 많은 명구와 기행문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노자라시 기행 , 사라시나 기행 등이 있다.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정보는 언제나 이야기보다 기능적이며 명료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명료함보다 침묵에 가깝다. 이야기는 언제나 명확한 것들의 주위를 배회하며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다. 이야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의 불투명성 때문에 성경이나 그리스 시대 비극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8) 살롱[salon]; 옛 프랑스사람들이 살롱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을 상상하자 아득함이 밀려왔다. 그곳은 과연 어떠했길래 남녀노소, 신분과 직위를 가리지 않고 계층 간 차이를 무너뜨리며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일까. 살롱의 여주인들은 남녀노소, 신분과 직위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문학을 읽고 함께 토론하곤 했는데 그로부터 살롱문화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추측컨대 살롱에서 그들이 나눴던 대화는 명확한 정보를 살롱 17-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성행되던 귀족과 문인들의 정기적인 사교모임.

기계적으로 실어나르는 대화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 살롱에서 사람들이 나눈 대화들은 만개한 벚꽃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빛처럼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그런 순간과 닮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어쩌면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9) 마른꽃[dry flower]; 쇼윈도에 장식된 알록달록한 장미와 튤립은 철부지 아가씨가 꿈꾸는 낭만과 닮아있다. 알록달록함은 이내 허영기 가득한 환상으로 변해 보는 이를 달콤한 늪 속에 빠뜨린다. 철부지 아가씨의 꿈 속 이야기는 언제나 백마 탄 왕자와의 행복한 결혼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화자는 이후의 일상에 대해서 더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철부지 아가씨의 낭만에는 타인과의 완전한 합일이 전제되며 그것은 깨어질 리 없는 신앙과 같은 것이다. 그곳에는 나에게 낯 선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그것과는 조금 다른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는 철부지 아가씨의 얼굴을 닮은 붉은 장미는 없지만 가장 찬란한 순간에 시간을 멈춰놓은 듯한 마른꽃들이 있다. 마른꽃은 무엇을 그토록이나 가득 머금고 있는 것일까. 마른꽃은 헛된 희망이나 타인과의 완벽한 하나 됨에 대해 쉽사리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대신 죽을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타인의 어떤 지점에 대해 인정하려는듯한 외로운 표정을 짓는다. 마른꽃은 세월이 흘러 우리가 뒤를 돌아봤을 때 기억조차 나지 않을 일상의 흐릿함에 대해, 어쩌면 우리 대신 한가득 미련을 머금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겐 매일이 축제 같은 삶의 화려함보다 볕에 바짝 마른 일상의 편린들이 더 소중할 것이기에. 이것은 감히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blog.naver.com/clichecli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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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이달에도 재미있는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PDF를 보시면서 누르셔도 되고 스마트 폰으로 찍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월간이리 내 원고의 일부분이나 필진 이름, 블로그 주소등을 누르시는 경우 해당 페이지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건축이 좋아. #10. 왕슈를 만나다.

aoikasa

왕슈 Wang Shu 2012년 4월, 건축계의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그 이름. 해외 유학을 하지 않은, 베이징도 아닌 항저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중국 건축가가 건축계의 노벨상이 라 불리는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전 세계 건축계에 큰 놀라움을 주었겠지만, 한국 건축가들에게는 거의 쇼크와 같은 일이었던 거 같다.

(그림1. 2012년 9월,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의 왕슈(왼쪽)와 니시자와(오른쪽))

그리고 나서 2012년 9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왕슈를 두 번째로 만났다. 수줍은 소년처럼 하 얀 셔츠를 입고 나와 얌전히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던 니시자와씨(류에 니시자와, 2010년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SANNA의 건축가, 이상하게도 난 류에 니시자와는 니시자와씨라 부르고 싶다 ^^;) 와는 달 리 검정색 차이니즈 셔츠깃을 가진 옷을 입고 나와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던 왕슈의 첫 인상은 그의 건축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당시 강연회에서 내 마음을 제일 끌었던 것은 바로 항저우에 있는 (실제로 그가 가르치고 있는) 중국 예 술 학교 (Chiese School of Art) 였는데, 왕슈 스스로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유독 열정적으로 설명하


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전의 건축 유적으로부터 얻은 재료의 재활용이라든지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에 대한 현대적 변용, 그리고 자연과 건축의 공생 과 같은 그의 건축에 있어서의 중요한 이슈들이 하나의 캠퍼스 안에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가 직접 그 곳에서 가르치고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실험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저 곳에 가면 왕슈를 이해할 수 있겠구나, 왕슈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기분. (I.I.T 캠퍼스에서 만나는 미스 반 데어 로에가, 크라운 홀에서 느껴 지는 그의 흔적이, 다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에서와 느낌이 다르듯 말이다.)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인 2014년 6월. 드디어 왕슈를 만났다. 아니, 왕슈의 건축을 만났다가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항저우 중국 예술 대학은…. 왕슈라는 사람이 생 각하는 바가, 건축에 대해 꿈꾸는 바가 그대로 다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림2.버스에서 내리면 만나는 풍경, 저 푸른 초원… 아니 토끼풀밭을 지나 중국예술학교)

‘중국예술학교, 항저우 샹샨 캠퍼스 찾기’ 2014년 6월, 항저우를 방문하게 된 것은 건축 답사가 아닌 친구들과의 여행길에서였다. 모두 건축을 전 공하긴 했지만 한 명은 시공, 한 명은 전통건축을 하기에 ‘현대건축’인 왕슈 건축을 보러 하루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엔 항저우 시내에 있는 캠퍼스인줄 알았는데, 이 곳은 항저우 중심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도의 캠퍼스였다. 이 곳에 가려면 우리 숙소에서 대중교통 으로 2시간 여가 걸린다 하고, 택시로는 20분 여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탈 엄두가 안 나니… 이 친구들 을 어찌 설득해야 하나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도 항저우까지 왔는데 중국예술학교를 안 보고 갈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결국 다른 모든 일정은 친구들의 원하는 바에 다 맞춰주는 것으로 하고 이 곳에


만 가면 좋겠다라는 의사를 강력히 표현. 결국 구글맵과 본능적인 네비게이터 기질을 발휘함으로 친구 들을 중국예술학교까지 끌고 가는데 성공하였다. 다행히 이 학교엔 나만 반한 게 아니라 왕슈가 누구인 지도 모르던 친구들도 반하는 바람에 오전만 보내기로 한 일정이 오후까지 연장되고, 덕분에 한 건물 한 건물 자세히 찬찬히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중국 남방지역 건축’ 항저우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샹산이라는 항저우 서쪽 지역. 송나라 시대 성이 있다는 마을을 지나 도착한 한적한 마을, 버스 종점에서 내리니 왕슈의 전매특허와 같은 벽돌을 쌓아 만든 벽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 건물로 가는 길의 오래된 아파트 한 동. 그런데 이 아파트 예사롭지 않 다. 지금 현재 거주중인 일반 가정집도 있는 듯 하지만, 다수의 창문에는 중국 예술 학교 학생들의 작업 인 듯한 결과물들이 튀어 나와 있다. 학생들의 스튜디오로 쓰는 것인지, 아니면 오래된 아파트에 설치한 설치작업들인지 구분은 가지 않지만, 중국 예술 학교의 실험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 다.

(그림3.이 곳은 아파트인가, 학생들의 전시장인가…)

중국 예술 학교의 첫 인상을 사로잡은 도서관을 지나 정문으로 들어선다. 오른쪽, 왼쪽 어느 곳으로 갈 까 고민하다 들어오며 스친 도서관을 보러 오른쪽으로 향한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체와 중간 중간의 기와가 만들어내는 수평띠들.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단정한 느낌. 햇살은 뜨거운데 이 검은 색 건물 이 그다지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벽돌과 벽돌 사이의 틈새들 사이로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 낌 때문이기도 하고, 건물의 구성상 중간 중간에 만들어진 중정들에 드리워진 그림자들 때문인 듯 하다. 도서관을 지나 나온 강의동들은 공통적으로 1.중정을 가지고 있으며, 2.나무와 콘크리트, 벽돌 벽체가 주가 되어 이루어지되 재료 그대로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간소한 공간들을 만들고 있었다. 이 건물 들도 모두 왕슈가 디자인한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시원시원한 공간 구성과 재료들의 솔직한 표현,


그리고 너무 정교하고 깔끔해서 하나의 틈도 주지 않는 듯한 일본 건축과는 다른 거칠고 때로는 좀 더 럽지만 대륙의 호방함이 느껴지는 건축 공간의 매력,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 학교 학생들의 작업이 자연 스럽게 펼쳐지고 있는 모습들이 매력적이었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즐겁게 돌아보고 있는 한국에서 온 두 사람과는 달리 중국 친구는 그다지 이 공간이 인상적이지 않은 듯 하여 ‘별로냐’고 물어봤더니… 이 건 그냥 중국 남방에서 너무 흔한 스타일의 건축이란다. 더우니까 개구부를 많이 만들 수 밖에 없고, 중 정을 많이 쓸 수 밖에 없다고. 그렇구나. 우리가 인상적으로 보고 있던 부분들은 모두 결국 중국 남방지 역건축의 지역색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며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나 그 것이 자연스레 현대건축에 스며들었다는 것이 나에겐 인상적으로 남았다.

(그림4(좌). 기와지붕이 차곡 차곡 쌓여 수평 레이어를 만들어내는 도서관과 그림 5(우) 중정으로 둘러싸인 강의동)

‘하나의 자연, 다양성의 세계' 도서관과 비슷비슷한 강의동들을 열심히 돌아보다가 지나가는 학생에게 ‘식당’이 어디냐 물었더니, 산을 넘어 아주 먼 곳에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산을 넘다니… 대체 이 학교 얼마나 큰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방향을 틀어 다시 캠퍼스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다보니, 정말 산도 나오고 물도 나온다. 마치 동 네 뒷 산 산책하듯 학생들은 산넘고 물건너 캠퍼스 사이를 이동한다. 왕슈가 프리츠커 상을 수상할 때 자신의 건축을 이야기하며 자신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다양함과 차이가 있는 하나의 세계를 디자인한다 고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샹산 캠퍼스 전체는 왕슈가 만들어 낸 하나의 세계이다. 건물 하나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건물들이 서로 엮이고 그 것이 자연환경과 엮이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세계.

건너편으로 가서 만난 왕슈의 건축들. 학생식당을 비롯하여 기숙사, 전시관, 본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들과 강의동들.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다 다른 건축물들의 면면들은 그가 말하는 다 양성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연속적인 램프가 전체 건물을 둘러싸면서 건물을 전체적으로 연결하고,


이 것이 또 다른 건물로 이어지면서 그 길이 계속된다. 외부에서 연결되던 램프는 내부로 다시 연결이 되 고, 그러면서 건축적 산책은 다양한 빛과 다양한 색채를 가지게 된다. 이 건축적 산책을 인도하는 램프 의 난간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건물의 벽은 대나무 거푸집을 떼어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거친 느낌을 보여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지만 (조금 과장되게 말하여) 마치 대나무 숲을 걷는 듯한 느낌까지 주는 것이다.

(그림6. 램프의 연속으로 내부와 외부가 엮이고, 아래와 위가 엮이는 공간 구성)

중앙의 복도와 양 옆 중정을 중심으로 기숙사 각 호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기숙사는 겉에서 보면 그냥 일 직선 모양이다. 그러나 장방형 형태의 기숙사는 불규칙한 창문들과 역시 불규칙하게 배열된 그 앞의 얇 은 기둥들 (마치 대나무를 연상케 하는)로 인해 유쾌한 리듬감이 있는 입면을 만들어 낸다. 수평으로 긴 콘크리트 띠는 각 방의 실외기들을 가려준다. 중국 상해와 남방지역에서는 빨래를 길거리에 널어 말리 는 독특한 풍경 (중국 뿐 아니라 동남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만)을 볼 수 있는데, 이 기숙사에서는 외부 에서 그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기숙사인줄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내부로 들어가니 중정을 향해 빨래를 널어둔 것이다. 무언가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겉에서는 보이 지 않게 해주는 배려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림7.8.9. 마치 대나무숲 같은 기숙사의 입면과 중정, 그리고 대나무 기둥 뒤 숨겨진 실외기)

‘중국적 색채에 대한 고집과 시행착오들이 만들어낸 결과’ 1970년대 즈음이었다. 한국건축에서 ‘한국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한참 진행될 무렵, 주요 국가 프로젝트들의 현상설계 공모 지침에는 ‘한국적 디자인 요소’에 대한 반영을 하라는 지침들이 반드시 포 함되었다. 그러한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경복궁 내에 있는 옛 국립중앙박물관, 현 민속박물 관이다. 콘크리트로 만든 탑(?) 형식의 이 건물은 재료는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마감하여 만들면서도 기 왓장을 올려 한국 전통 건축의 의장적인 요소를 구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건축인들에게는 오랜 시간 동 안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 관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프로젝트들에는 한국적 인 기둥, 한국적 지붕 양식, 한국적 돌담 등의 요소들이 흔하게 사용되었는데 어쩌면 이는 스스로 근대 화의 과정을 겪었다기 보다 외부, 혹은 식민 주체로부터 주입된 근대화 (혹은 서양화)를 겪은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중국 역시도 마찬가지로 개혁개방 이후 적극적으로 중국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특히 중국 전통 건축의 지붕을 현대건축에 응용한다든지 전통 재료나 구법 등을 응용하는 시도들이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초기의 전통 지붕을 그대로 현대건축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일차적인 방식에서 점차 전통 건 축의 형태를 디자인 요소로 압축하여 사용한다든지 재료, 구법 등의 활용 등으로 그 정도와 표현 방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왕슈 건축을 바라볼 떼. 왕슈의 건축이 중국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왕슈 건축, 특히 이 항저우 샹샨 캠퍼스가 많이 언급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예전에 사용했던 벽돌, 기와들을 철거현장 등에서 주워와서 다시 사용한다는 점과 모던하고 심플하면서도 중국만의 분위기를 잘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방지역 중국건축의 지역적 특징들을 잘 담고 있는 점도, 대나무를 사용 하여 콘크리트벽을 타설하는 점도, 중국 전통 건축의 지붕을 연상하게 하는 곡선을 가진 모던하고 날렵


한 지붕선을 만들어내는 점도, 모두 중국적 색채가 강한 그만의 건축 분위기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림10. 중국 전통 지붕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세련되고 모던하게 표현된 지붕)

(그림11~14. 대나무 거푸집 흔적이 남은 벽체 / 벽돌과 기와 같이 쌓기 / 콘크리트와 나무 / 벽돌 쌓기)

‘중국예술학교의 보물’ 왕슈건축투어(?)를 마무리할 즈음, 강의동인 듯한 건물 하나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술학교인만큼 다양 한 작업과정을 볼 수 있었는데, 이 곳은 더욱 더 특별한 곳이었다. 벽돌을 말리고 있는 중정이 재미있어 바라보다 보니, 옆의 방 하나에 만들다 만 듯한 벽체가 보였다. 내려가서 이래 저래 살펴보다보니, 이 곳이 실제로 벽돌을 만들고 그 것들을 쌓아서 벽체를 만들어보고 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밖 을 보니 한 그룹의 학생들이 땡볕아래 모여 있는 것이다. 저들은 무얼 하고 있나 가서 하는 궁금증에 살 짝 가서 선생님?인듯 한 분이 설명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벽돌만드는 걸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실제로 기와를 쌓는 방식 등에 대한 구축물들이 있었고…


아, 왕슈 건축의 다양한 재료에 대한 실험이 그냥 나온 게 아니구나. 이전에 왕슈가 강연회에서 학생들 과 함께 실제로 철거현장에서 가져온 벽돌들을 쌓아보며 시험해봤다고 하더니,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 이 들었다. 건축과 졸업할 때까지 재료와 구축방법은 그저 책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내겐 그저 신선하게 만 느껴졌달까. 그리고 바로 이 곳이 중국예술학교 샹샨캠퍼스의 보물인 장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이 곳의 학생들은 자기가 만들 건물에 들어갈 벽돌과 기와부터 만들어가면서, 그리고 그 것을 직접 쌓아보면서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다. 펜과 컴퓨터만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만지고 보고 느끼며 하는 살 아있는 교육이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 그리고 중국예술학교’ 중국예술학교는 내 눈엔 마치 중국의 바우하우스처럼 보였다. 다양한 예술의 영역들이 서로 깊게 관련 이 되어 교육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실제도 그 결과물들을 제작하는 워크샵이 기본이 되어 교육의 중심 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내게 이 곳은 단순히 왕슈가 지은 건물이 많은 곳이 아니라 왕슈의 건 축에서 나타나는 그의 건축정신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으로 들린 건물 에서 ‘바우하우스’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 아마, 그들을 21세기 중국의 바우하우스를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그림15~18. 벽돌말리기 / 기와 및 벽돌 쌓기 / 수업중인 학생들 / 바우하우스 전시회)


나는 학창시절 유난히도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허리사이즈 26~7인 치 몸무게는 50kg남짓 먹는 것도 별로 없고 지금 생각해보면 마라톤선수 같은 느낌이랄까? 이봉주 황영조를 연상케 하는 그런 몸이었다 몸이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학교 다닐 때 하던 오래 달리기에서 필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200m트랙을 5바퀴도는 1000m에서 너무 빨 리 들어와 심판감독선생님이 4바퀴밖에 안 뛰고 어디서 꾀부리냐며 선생님과 옥신각신하다 가 이래서는 내가 불리하다 심판의 판정에 일단 수긍을 하자 끝나고 상급기관에 제소를 할 때 하더라도...라는 마음가짐으로 6바퀴를 뛰고도 3등을 하는 탈 아시아 급의 학생 이었다. 그런 능력이 있다 보니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진학할 때 오래 달리기를 만점을 받지 않으면 내신1점에 학교가 바뀌고 과가 바뀌고 하는 최상위 그룹 학생들의 구세주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바로 대타 출전. 대타출전? 그게 가능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구체적인 설명은 접어두고 그 당시 학교체육의 어두운 단면이라고 간단하게만 얘기하겠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대타출전을 해 서 그 친구들의 체력장점수를 만점으로 만들어 주고 나면 그 친구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금방이라도 쏟을 것 같은 눈으로 사이다를 한 병 사준다. 학창시절 사이다를 한 병 다 먹기 가 힘들었다 왜냐면 사이다를 한 병 따면 우르르 몰려와 한 모금만 한 모금만하며 똥파리들 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타 출전 후 받은 사이다에 대해서는 아무도 건들면 안 된다 는 암묵적인 룰이 그 당시에는 존재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히어로가 되고 사이다를 얻어먹 고 생기는 뿌듯한 청량감은 사이다 때문인지 학우의 진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한 순수한 마음이었는지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알 수는 없다. 이랬던 내가 어릴 적 가지고 있던 대타DNA를 꿈틀거리게 한 사건이 있었다 1년에 한번 열 리는 동네 주민들이 하는 언니오빠운동회라는 행사가 있다 (facebook 언니오빠운동회참조) 이 운동회에 참여한 나는 어떤 팀에서 대타출전을 청탁 받는다. 그 게임은 4인5각. 팀원들이 오로지 여자로만 이루어진 팀에 남자멤버가 있어야 된다는 규칙에 전전긍긍하던 oo팀의 O 양은 나에게 갖은 교태를 부리더니 용병으로 스카웃을 하고 싶다는 제의를 한다 그 제안에 나는 우리 팀의 안위는 접어두고 그 팀의 요청에 응하고 게임에 참여 당당히2등으로 골인 을 한다 그 당시 무릎부상으로 담당주치의의 절대안정 당부가 있었으나 내 몸하나 아끼자 고 팀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맘속의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게임이 끝나고 최선의 최선 을 다했기 때문일까? 타 들어가는 듯한 목마름 주최측에서 준비한 생맥주기계까지의 거리 는 10m...너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서 먹는다 던지 O양에게 한잔 사달라는 것도 모양 빠지지 않겠나 싶어 가만이 있는다. 가만히 있은 내가 잘못이었다. 돌아오는 건 “수고하셨 어요!” 라는 한마디... 상수동 달고나라는 파스타 집에 스텝으로 일하는 O양 들으라 나 가 만있지 않겠다!!!!! 나 사이다 땡겨요 사이다 한 병 사듀세염!!!


@odeng2004

부 산 오 뎅 이 야 기


국가란 무엇일까? (7회)

세월호 사고가 있기 훨씬 전부터 친구 하나가 이민을 가겠다는 말을 꺼낸일이 있었다. 이유는 이대로 회사에 다니면서 승진을 하고 애를 키우고 살면 자기가 불행 할 것 같아서라고.. 그 다음은 아이들의 교육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아마 그 아이가 잘 자란다고 해도 자신이 지금 불행을 예감하는 것처럼 차후 아이들도 불행하리라 생각한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불행을 두고 친구는 떠난단다. 그리고 나는 그 불행의 근거지에 앉아 늙어갈 것 같다. 친구는 간섭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벼운 톤으로 나에게 이민을 제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더위를 먹으니 오늘은 보다 선명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확하게 ‘정치’ 란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 불행과 연관이 있다. 나는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어머니가 불행한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보다 훨씬 노력했고 국가의 지시에 순응하며 삶을 꾸려왔다. 거짓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믿을 수 없을 정도) 우직한 자세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후손들은 더 이상 배를 곯지 않고 나는 비가 새지 않는 집에서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분명 꿈꾸던 미래에 근접했는데 어쩐일인지 어머니는 행복하지 않으신 것 같았다. 어머니의 불행이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 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럴 확률이 훨씬 높지만) 어쩌면 어머니가 열심히 말린 곶감을 누군가 빼 먹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에 그 곶감을 안 빼먹었다면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앉아있지는 않을테니.. 그렇다 치자. 그 생각을 하고 보니 주변이 온통 의심스러운 것 투성이였다. 원래 불만이 많던 나는 의심도 많고 불만도 많은 사람이 되었다. 어디로 이어져있는지 모르는 도로는 다 쓸모없는 것 처럼 느껴지고 TV에 나오는 큰 건물은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찐다. 막연한 불만이면 좋으련만 이미 4대강 사업이란 것도 떡하니 세상에서 벌어져 버렸다. 전기세와 가스비가 오르고 과자값도 오르고 아니 어떻게 일년 기른 과일값보다 공장에서 튀겨낸 과자값이 비쌀수가 있나. “ 흐름입니다.” 라는 말보다 “담합입니다.” 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아닐까? 근 20년 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도로가 종횡으로 건설되었고 전기세와 가스비는 올라 겨울에는 순전히 금전적 이유로 춥게 지내는 사람도 늘고 있다. 친구는 서초구의 좋은 아파트에서 늘 잘 살아왔는데 불행을 이유로 이민을 택했다. 앓느니 죽는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아마 이민을 선택한 친구가 떠올렸던 미래가 어머니가 겪고 있는 현재와 닮아 있을 것이다. 국가란 무엇일까? 친구는 이민을 가고 어머니는 살아 버틴다. 한국이 아닌 국가를 선택하면 그 친구는 행복해 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대학교 시절부터 이민을 결심하기 까지 15년의 유예기간 동안 그 친구는 행복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 끝에 다른 땅을 선택했다. 이곳은 아니란다.


비단 이 친구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민을 이야기 한다.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민이란 말을 입에 달고 지낸다. 그 전에도 비슷한 나이 대의 사람들이 이래 저래 발이 묶여 망설이는 것을 포함하면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이 꽤 된단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왕왕 이민 이야기가 나온다. 농담처럼 진담처럼 말이다. 친구는 이민을 가기 전에 자신의 불행을 느낀 계기를 두가지로 들었다. 자신의 상사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모습 이 두가지를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미래가 될 상사의 모습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현재 회사의 일을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하면서 세일즈를 해야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했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했단다. 상사의 모습이야 그렇다 치고 (그것은 개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 현재 그 친구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것. 이것은 꽤 큰 일이다. 어떤 사람은 세일즈에 있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것을 천직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원치 않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개선의 여지가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누가 와도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이란 장사란 업무란 그런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큰일이다. 떳떳하게 세금을 내고 국민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해야하는 상황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 진다면 개인의 총합인 국가는 벌써 큰 균열에 휩쌓인 것과 마찬가지다. 실금이 누적되어가는 건물처럼 불안하고 피해야 할 것이 되고 언젠가는 훌떡 무너져 버릴 것이다. 물론 과장된 말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는 왜 거짓말을 당연시 하게 해야하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이에게 강요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도태되어야 하는 국가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한 영토 안에서 살고 있는 개인의 총합이 국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꽤 큰일이다. 게다가 나아질 기미가 안보여서 건물에서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것 또한 큰일 아닌가. 그 친구의 재능은 아마 앞으로 한국이란 국가를 위해 쓰일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손실을 15 년간 유도해왔다니 암담한 일이다. 그 친구가 떠난 이후의 국가를 생각해 보자. 우선 나는 친구를 볼 수 없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의 수를 잃게 된다. 당장은 친구 포함 가족의 수를 잃게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식의 자식, 자식의 자식까지 줄어드는 셈이다. 사람만 줄어드는게 아니라 여기에 그 친구와 가족들이 할 경제활동의 가치도 잃는다. 이것 뿐이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그 친구들의 친척들이 따라갈 경우나 여행갈 경우 그 비용 또한 잃게 된다. 그럼 이익은 무엇이 있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원래는 월드컵과 국가대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이것은 한달 미뤄지는 것일까. 아니면 증발되는 것일까? 그래 이것도 국가적 손해다. 글. exxx


시를 써도 야외에서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4.7.27 http://cafe.daum.net/badabie


월간이리에서 필진을 구합니다. 글솜씨가 남달라서 도저히 감출수 없다거나 이 말만큼은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릴것 같다거나 세상에 요래 재미있는게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아쉽네 하는 등등 의학, 무속, 물리학, 지구과학, 철학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기로 유명하오니 언제든지 트위터 @postyri 나 이메일 exxx2x@gmail.com 으로 문의 주시면 친절 답변 드립니다. 월간이리의 역사가 되어보세요. 후훗~


그림.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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