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글. 사진. 아홉시 영화로 읽는 시공간 - 70년대 (여자) 영화 포스터의 미학 / 글. 곡주대비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서경별곡」 / 글. 고수진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글.박재현 한국영화 돌려깎기 - 설국열차 / 글.최지원, 곡주대비, exxx idology’s pick - 상반기 신인결산 게임 노동 일지 / 그림. 글. 철민 놀고 먹고 그리고 / 그림. 김혜리 Hwaiiana - 알로하! / 글. 사진. 이동걸 작곡가 B의 노트 / 글. Composer B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 소개소 / 글. 신당동 파르한 낭만 스파이 - 결혼 / 글. 사진. 낭만스파이 팟캐스트 ‘이리오너라’ 광고 사진 일기 / 사진. 글. 박민수 웹디자이너 생존 매뉴얼 - 인디의 생존 매뉴얼 / 글. 그림. 김성연 물질과 비물질 - 브로치와 코스터 / 글. 김종소리 사진.황은정 건축이 좋아 - 따뜻함과 야성미 / 사진. 글. aoikasa 부산오뎅 이야기 - My France / 글. 사진. odeng 국가란 무엇일까? - 8회 / 글. exxx 바다비 일요 시극장 광고
좋아서하는 일이라도 늘 좋을 순 없는거죠. 지금 편집을 하고 있는 제 기분이 그렇 습니다. 절대로 날씨 탓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불쾌지수 라 는 표현을 쓰는 것이겠죠. 휴가철만 되면 인근 카페를 전전하는 여러 작업인들에게 건투를 빌고 싶습니다. 편집을 마치는 오늘은 왠지 모르게 위아더 월드 너와 내가 없는 기분입니다. 프로그램 에러로 잔여 에너지를 소비해 더 쓸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세월호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이달에는 ‘한국영화 돌려깎기’ 라는 최초의 복수 필진 코너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것을 시작으로 몇개의 기획을 준비해 볼 예정이니 앞으로 즐겨주시면 되겠습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편집: 이훈보 표지: 이주용 주관: 프로젝트 이리 지원: 서울특별시,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공식트위터 @postyri
70년대 (여자) 영화 포스터의 미학 영화로 보는 시공간.
글. 곡주대비 (hjkanjy@gmail.com / kim810@illinois.edu)
한국으로 영구 귀국 해서 쓰는 첫 번째 기사다. 지금 이 지면을 대하는 필자의 기분이 얼마나 묘하고도 통 쾌한지 독자들은 모를 듯. 그간 한국에서 먹고 (퍼)마신 일지를 나열하고 싶지만, 잡소리 일설하고 이번 기 사에 대한 소개를 하자. 이번호에서는 영화 포스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일단. 포스터는 영화를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를 가졌던 분야 중 하나이고. 왜 선행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 지 않았는지 몹시도 의아했던 분야 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경우, 영화 포스터를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의 분야로 혹은 영화 마케팅의 수단으로 인지해, 영화, 순수 예술, (문화) 경제, 미디어 산 업 전반 적인 분야에서 연구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타깝게도, 포스터 연구는 (필자가 찾은 바로는) 장지영의 60년대~70년대 한국 영화 포스터 연구가 거 의 유일 무의 하게 영화 포스터 라는 매체의 주제에 가장 충실했던 연구로 보인다. 장지영의 연구가 한국 고전 영화의 포스터 변화를 전반적으로 짚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한국 영화 포스터 연구의 집약체 라고 말하기는 부족한 것이 60년대와 70년대라는 시간의 제한성, 20년을 아우르는 편수로는 다소 부족 해 보이는 120 편의 영화 샘플링, 등 이 연구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확실하게 해둘 것 은 필자가 장지영의 포스터 연구의 한계를 밝히는 것은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포스 터 연구 분야가 얼마나 많은 쟁점들과 논의 사항들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역설하기 위함이다. 관심 있는 독자가 이 주제로 소 논문이라도 쓰고 싶은 의향이 생긴다면 이미 한국영화사/문화사 의 큰 보탬이 아닌가. 한국 영화는 50년대에 들어 그 산업의 기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기존의 식민 지 시절 한.일 합작 영화의 형태에서 순수 한국인 인력으로 만드는 영화들이 탄생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 산업도 이때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유현목이나 신상옥 같은 이른바 인기 (거장) 감독들이 생겨나면서 더욱 커지게 된다. 포스터에 관한 얘기로 집중 하자면, 그러한 산업 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영화 포스터는 디자인 의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50년대 와 60년 대 영화포스터는 등장인물들을 나열하고 각각의 일러스트 아래 배우이름들을 한문으로 몇 자 적어내는 식이 전부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당시만해도 한문이 대중적으로 읽히고 쓰였기 때문에 한글로 된 광고 카피 라던지 배우이름이나 감독이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러한 한문/등장인물의 얼굴 스케치 위주의 영화 포스터가 7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 중 몇몇을 꼽아 보자면, 한글 사용, 선정적이고 눈길을 끄는 광고 카피들, (주로 문어체, 예를 들어, ~하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아이콘이 나 상징 (일러스트와 실사의 합성으로 만들어진 꽃, 나비 등) 의 사용 등 을 들 수 있다. 이길성의 70년 대 한국 극장 연구를 보면, 70년대 역시 영화 포스 터를 전적으로 디자인하는 직업군은 등장 하지 않았을 때 다. 다만 극장들에 주둔해 있던 ‘홍보부장’ 들이 대강의 포스터 디자인과 그림, 카피 까지도 끼워 넣어 신문사에 넘겨 주면 그대로 찍어내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단순화 된 포스터 산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70년대 포스터들은 미국이나 일본 같은 동시대의 다른 나라 포스터들과 견주어 떨어지지 않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했던 광고 카피와 시각화 의 조화는 가히 자랑할 만한 수준이다. 이러한 발전, 혹은 변화에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한데, 첫째 한글의 사용은 이 당시 박정희의 민족 문화 발전 사업 중 하나의 일환으로 한글 사용의 전폭적인 권장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외래어의 사용을 금한 것 이다. 이로 인해 한문 보다는 한글이 쓰였고 영어로 된 외래어가 영화 대사에서 검열 대상이 되기 시 작했다 (예. 김호선 감독의 ‘여자들만 사는 거리’의 검열기록을 보면 외래어를 순 한국말로 바꾸라는 검열관
의 지시들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포스터들이 한 글을 쓰기 시작하고 구어체의 문장을 광고 카피로 쓰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문제는 미적인 변화인데, 이 부분만큼은 어떤 요인 이라고 단언 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의 추측을 바탕 으로 좀 더 자세히 짚어 내자면 전 시대의 영화포스 터들에서 보여지던 엄청난 수의 캐릭터들이 급속히 줄기 시작하면서 한 두 명 정도의 주요 (주로 여성) 캐릭터들로 집중되는데 이는 이 당시 70대부터 쏟 아지기 시작했던 호스티스 영화나 여타 ‘여자’ 영화 들을 마케팅 하는 과정에서 여성 주인공을 상품화 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여성’ 이미지 들을 정중앙에 위치하고 그녀 들의 선정적인 포즈나 옷차림을 강조하면서 다른 조연 캐릭터들은 빠지게 되고 대신 그 자리에 그녀 들을 팔기 위한 선정적이거나 가학적인 카피들, 예 를 들어, “뼈와 살이 불타는 밤,” “꺾지 마세요! 아 파요,”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졌는가” 등의 구어 체 형식의 한글 문장들이 여성의 몸을 중심으로 위 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 포스터의 경향이 비단 여자 영화 (겨울 여자,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 등등: 호스티스 장르일 경우가 많다) 혹은 호스티스 영화에만 쓰인 것은 아 니다. 80년대에 들어 에로영화 붐이 일면서 소위 성 애 영화 뿐만 아니라 일반 멜로 영화나 혹은 야하 지도 않은 공포물들 까지 여성 캐릭터의 몸이나 그 녀의 몸에 코멘트를 붙이는 식의 광고 카피를 답습 해 더욱 가학적으로, 또한 빈번히 영화 포스터의 일 면들을 장식하게 된다. 필자가 포스터 연구를 깊이 있게 한 적도 없거니와 (논문의 작은 부분을 할애해 70년대 영화 포스터를 분 석 한 것이 전부), 방대한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70년대의 영화 포스터의 경향을 기사 한 꼭지로 요 약할 수 없음은 틀림 없이 인지하고 있는 바, 다음 호에서 영화 포스터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 9월호 에서는 70년대 영화 포스터에서 여성 캐릭터와 병치해서 쓰였던 (주로 섹슈얼한) 아이콘들과 상 징들을 통해, 당시 여성성에 대한 문화적인 메타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용되었는지 들여다 볼 것이다.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 작자미상 「서경별곡」
“왜 배를 내어 놓았느냐 사공아”
이번호에서 함께 살펴 볼 작품은 고려가요인 「서경별곡」이다. 고려가요는 고려시대 평민계
층의 노래였다. 고려속요라고도 불리는데, 이 장르는 구전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기록으로 남 겨졌다. 평민들의 노래인 만큼 주제 또한 삶과 밀접한 주제가 많았다. 특히 사랑과 이별에 관한
노래가 많았는데 그 내용이 지나치게 솔직하고 사실적인 묘사들로 인해 조선 유학자들이 심기
가 불편했었던 것 같다. 결국 대폭 수정하여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
는 고려가요는 대게 정갈한 작품들뿐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청산별곡’, ‘가시리’, ‘쌍화점’등 이 있다. (특히 쌍화점은..... 영화.... 영화여...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영화와 고려가요의
쌍화점은 저언혀 상관이 없다. 물론 고려가요의 쌍화점의 내용도 파격적인 사랑이야기. 예를 들자면 스님과 동네 아낙이 손을 잡아 정을 통했다던가...(이것도 지금 보면 매우 파격적이지 만!) 어쨌든 영화와 쌍화점은 아무 관련성이 없다.
그래도 이 오빠는 멋있었지...
향가 문학이 쇠퇴한 후 고려의 시가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갖지 못한 까닭에 사실
상 정상적인 발달을 보지 못했다고들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한문학이 문학의 주류를 형성함으
로써 우리 문학은 민속문 학적 위치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왔고, 평민문학과 귀족문학이라 는 두 가지 형태의 문학을 초래했으니, 경기체가가 귀족의 문학이라면 속요는 평민의 것으로 , 두 형식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속요의 내용은 다분히 체념적이고 해학적인 데가 있는가 하면, 세속을 초탈한 인생관이 담긴
목소리가 그대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체념적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서정성을 지녔음이 이 속요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 속요의 아름다움은 서정성에 있다. 이 속요의 서정성은 귀족층의 가요인 경기체가가
지극히 형식적이고 한자를 그저 나열하는데 비하여 그 내용이 매우 함축적인 데 있다. 또한 속 요의 형식도 이 서정성을 이루는 데 한 몫 톡톡히 담당하고 있다. 조근조근 읊조리다 보면 우
리의 전통적인 음수율에 가까운 3·3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꾸준히 내려오는 민요처럼 알맞 은 율격으로 노래 부르기 좋은 형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의 유학과 이 서정성이 함께 걸을 수 없었나보다. 결국 고려가요를 ‘
남녀상열지사’라고 낮추어 그저 남녀가 사랑하는노래. 뭐 그렇게 치부해버린 안타까운 문학사 를 겪었다. 지금에 와 읽어 보면 뭐.. 아마 독자들은 겨우 이정도 가지고 심심한데?.. 이럴 수 도. 워낙 별 별 세상이니.
서경(西京)이 아즐가 서경(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닷곤 아즐가 닷곤 쇼셩경 괴마른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평양이 서울(수도)이지마는 잘 닦아 놓은 서울(수도)이지만 그 서울을 사랑하지만
여므론 아즐가 여므론 질삼뵈 리시고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괴시란 아즐가 괴시란 우러곰 좃니노이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임과)이별할 것이라면 (차라리) 길쌈하던 베(여자의 생업)를 버리고 임이 절 사랑해 주신다면 울면서 울면서 따르겠습니다.
구스리 아즐가 구스리 바회예 디신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긴히 아즐가 긴힛 그츠리잇가 나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다고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즈믄 를 아즐가 즈믄 를 외오곰 녀신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신(信)잇 아즐가 신(信)잇 그츠리잇가 나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천년을 홀로 살아간들 사랑하는 임을 믿는 마음이 끊어지겠습니까? 대동강(大同江) 아즐가 대동강(大同江) 너븐디 몰라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내여 아즐가 내여 노다 샤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대동강 대동강 넓은지 몰라서 배 내여 주었느냐 사공아 네 가시 아즐가 네 가시 럼난디 몰라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녈 예 아즐가 녈 예 연즌다 샤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네 각시 바람난줄 몰라서 넓은 배에 내 남자 태웠느냐 사공아 대동강(大同江) 아즐가 대동강(大同江) 건넌편 고즐여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타 들면 아즐가 타 들면 것고리이다 나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
대동강 대동강 건너면 내 님이 건너편 꽃을 꺾을 것입니다.
현대어 해석과 함께 작품을 살펴보면 내용은 이렇다. 시적화자는 여성인 것 같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가는 상황인데 자신의 생업인 베를 짜는 일을 버리고서라도 절절하게 붙잡는
상황으로 보여 진다. 그런데 이 여자가 울고 붙잡으니 남자는 우리가 헤어져도 믿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구슬이 바위에 떨어져도 끈은 끊어지질 않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듯이 달랜다.
그러나 이 여성은 참을 수 없다. 남자의 말도 믿음이 가질 않는다. 그리고 결국 아무 상관없는
제3자. 사공에게 화를 내고 있다. 사공에게 너의 아내는 지금 다른 남자와 놀고 있는데, 네 아내에게 달려가야지, 여기서 왜 배를 움직이려 하는 것이냐고 따지고 있다. 사공은 당황스럽다. 뭐지, 이 여자.. 그리고 이 여성은 이내 넋두리를 한다. 분명이 이놈은 날 떠나 이 넓고 넓은 대동강을 건너면
따른 여자(건너편 꽃)를 만나 꺾어 버릴 것이다. 날 잊을 것이다. 하며 울어버린다.
헤어지는 상황을 이토록 솔직하고 당돌하게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이게 바로 고려가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예나 지금이나. 떠나는 남자들은 단골멘트를 범했으며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둥, 널 위한다는 둥, 뭐 개솔.. 개굴개굴 개구리 같은)
그리고 이 상황에서 결국 붙잡는 사람은 늘 일방적 이별통보.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사공에게 화풀이를 하는 장면이다. 사공에게 지금 내
남자를 태우고 있을 시간이 없다며 너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뭐 이상한 소리를 하며 사공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 해학적이면서도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읽다보면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다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별한 뜻은 없는
후렴구로 보면 된다. 예를 들자면, 발라드의 ‘워우워우 baby’같은 느낌이랄까.
굉장히 슬픈 노래이다. 절실하게 임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처절하게 이별을 거부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사공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있을까. 사랑과 이별은 ‘한끝차이’라고 하던데 남겨진 사람에게는 한끝이, 한~~~~~~~~~~~~~~~~~~~~~~~~~~~끝 정도 되는 것 같다. 다음 시간에는 고려시대 문학을 하나 더 보려 한다. 가전체 장르의 ‘공방전’이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그의 음악이‘히트’하기까지
송창식에겐 남부럽지 않을 만큼 히트곡이 많다. ‘피리 부는 사나이’, ‘한번쯤’ ‘고래 사냥’, ‘왜 불러’, ‘사랑이야’, ‘가나다라’, ‘우리는’, ‘푸르른 날’, ‘담배가게 아가씨’ 등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이 중 세 곡 이상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제목만 보고서도 멜로디가 줄줄 흘러나올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대중의 ‘넘버 원’이었던 건 아니다. 트윈 폴리오와 초기 솔로 시절엔 주로 대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젊은 오빠에 가까웠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당시 그는 ‘야리야리’ 한 음악을 주로 만들어 불렀다. 그러다 그의 음악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는 3대 독자라 군 면제가 가능했지만 특수자라고 해서 잡혀가. 병무청에서 7개월 동안 방위 복무를 했다. 그때 우연히 AFKN에서 방송한 아마추어 노래 대회를 봤는데 한 흑인이 부르는 노래에 큰 충격을 받았다. 프로가 잘하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했지만 아마추어가 자신보다 훨씬 잘하는 모습에 크게 절망한 것이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렸다. 그 뒤 또 우연히 티브이에서 본 전주대사습놀이가 결정적이었다. 장원과 차석을 차지한 사람들보다 자신이 훨씬 못하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창피한 것을 물론이었고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에 분해 3개월간 눈물로 하루를 보냈다. 제대한 그는 작심하고 모든 것을 바로 잡았다. 피타고라스가 정리한 서양 음계는 물론 화성학 체계를 위시해 국악까지 처음부터 다시 연구했다. 그 결과 ‘우리의 음악’, ‘내 속의 것’을 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발표한 ‘피리 부는 사나이’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뿐 아니라 ‘한번쯤’, ‘고래 사냥’, ‘왜 불러’ 등이 대한민국 전역, 전 세대에 유행하며 그는 완전한 대중 가수가 되었다. 나는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그와의 인터뷰 때 질문했다. 먼저, 그때 이론을 완전히 뒤집고 나서 한국적인 정서를 일부러 넣은 것이냐고.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 전에 갖고 있던 모든 음악적인 이론이……. 이 음악 이론이란 건 뭐냐, 그렇게 안 하면 아닌 거예요. 지금의 의학처럼. 의학이란 것이 고대로 되지 않으면 아닌 것처럼. 음악도 이미 수백 년간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음악이 가지고 있는 그 미학적인 요소대로 하지 않으면 아닌 거였지. 그런데 그 외에 요소가 더 많다는 걸 알은 거예요. 책에 써 있는 미학적 요소보다 진짜 음악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요소가 있구나. 그러니깐 그거대로 음악을 한다는 건 바보짓이다. 그거죠. 너무 좁은 의미의 음악이니깐. 그러니깐 국악을 접목했다 이런 게 아니라, 내 음악이, 내 속에 있는 음악이 내가 그동안 이론적으로 공부했던 그 음악인가 거기에 대한 회의가 일었던 거지. 그래서 ‘아니다. 내 속엔 더 많은 걸 가지고 있다.’ 그래 가지고 다시 하기 시작한 거예요. 하다 보니깐 실제 내 안에는 국악적인 요소가 더 많았던 거지. 한국 사람이니깐. 아무도 그 얘길 감히 못하지만, 실제로는 국악이라는 이론에서 볼 때 서양 음악의 이론을 보면 틀린 거예요.
그러자 그가 답했다. “ 트로트는 한국 사람이 서양 음악을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형태예요. 서양 음악의 복잡한 건 이해하기 어렵고. 사람들이 트로트를 전통 음악이라고도 하고 뽕짝이라고도 하고 왜색이라고도 하는데, 그게 좋으니까 좋아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서양식의 음악 중 가장 쉬운 형태가 트로트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서양 음악이 세기 때문에 국악이 틀린 걸로
그 외에는 지난 한 50
돼 있죠. 그리고 서양 음악이 틀린 거라고 주장할 만큼 국악을
년간 한국에서 필요하지
잘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주장을 못하는 거지. 그래서
않았어요. 지금 와서 서양
서양 음악한테 지는 거지. 또 실제로는 국악만 가지고도 음악이라
음악에 대한 접점과 경험들이
할 수 없어요.”
쌓이면서 취향들이 많이 변해 가지고 트로트가 싱거워
이어 물었다. 그 뒤에 만든 음악이 굉장히 히트를 했는데 일부러
보이는 거지. 옛날에는 안
대중적인 코드를 넣은 건지 말이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
그랬어요. 옛날에는 트로트
네, 처음엔 일부러 대중적인 코드를 넣은 거예요. 일단은 먼저
자체가 너무나 첨단적인
힘을 가져야 되겠다, 그런 거였으니까. 내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음악이었어요. 쉽게 말하면
하더라도……” 그럼 본인 안에 있는 것보다는 대중적인 게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더 강했다는 건가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처음에 그렇게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시작했다니깐. 내 안에 있는 음악이 있었다, 없었다가 아니라.
고조 장단이라는 건데…….
아예 타겟을 거기에 맞췄다구요.”
장단이라는 걸 맞추면, 서양 음악적으로 분석하면 4/4
그렇게 만든 노래가 과연 뜰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을까. “그럼.
박자 ‘딱딱딱딱’ 하는 짝박인
내가 만들자마자 히트 할 거다 생각했죠. 내가 그동안 판을 스무
박자가 우리나라엔 없어요.
개 정도 냈는데, 스무 개가 뭐야. 제가 독집을 그 정도 냈는데
전부 다 ‘둥두둥두두둥’ 하는,
타이틀로 들어갔던 모든 노래, 히트 안 된 게 한 곡도 없어요.
말하자면 스윙이지. 전부
이건 히트 될 거다 한 건 다 됐고 그 밑에 깔아둔 곡들이, 약간
삼박자 계통의 음악이지.
음악적이라든지, 그냥 뭐 곤조가 있었다든지, 그런 게 좀 있었지.
이박자 계통의 음악이란 게
타이틀 곡은 안 그랬어요. 한 곡도 그냥 넘어간 게 없을 걸?”
우리 전통 음악엔 없어요. 서양 음악은 삼박자 계통의
그의 곡에 들어간 국악적 요소, 서양 음악과의 결합 등이 워낙
음악도 정확하게 삼박자로
궁금했던 터라 나는 “그런 음악 속엔 한국적인 요소나 트로트
나눈 거지. 우리처럼 홀짝,
박자, 서양 음악이 섞였다고 생각하면 되나요?”라고 물었다.
홀짝으로 나눈 게 아니에요.
그러므로 서양 음악의 삼박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안 맞아요. 짝박자 계통 중에 가장 쉬운 리듬이 뽕짝이에요. 뽕짝뽕짝 하는 거. 그러니깐 그게 제일 이해하기도 쉽고, 마음에도 맞고. 그리고 거기에다 멜로디를 붙일 땐 우리 식의 멜로디를 붙였으니깐. 악보로 적을 때는 서양식의 멜로디지만 부를 때는 그렇게 안 불렀으니깐. 한국식으로 불렀으니깐. 그러니까 뽕짝이라는 노래가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보다 훨씬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전통이라 부르기엔 곤란하지만 ……. 조금 어려운 이야기로 흘러갔지만 되새겨 볼 만한 말이었다. 트로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것도 물론이었다. 이어 나는 ‘대중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것이 한국적인 코드를 말하는 건가 조금 헷갈렸다. 이번에도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게 아니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감정, 감각을 말하는 거죠. 보통 대중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우리끼리의 치기가 있다구요. 한국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막 즐거워하는 그런 치기. 그 코드를 말하는 거예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달랐다. 아무리 자신만의 색깔, 난해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이 예술이라 해도 대중이 없으면 과연 그것은 의미가 있을까. 정리해 보면 그는 자신의 이론을 확립한 뒤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해, 대중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한국인만이 가진 치기를 맞춰 대중적인 곡을 만들었던 것이고, 그 음악에 확신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이런 노래들을 만들면서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배제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 곡 가운데서도 조금씩 그 이론을 대입했던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 ‘한번쯤’, ‘고래사냥’, ‘왜 불러’ 등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 후렴구에 나오는 “언제나 웃는 멋쟁이.” 의 “어~언제나.” 부분이 바로 그것인데 상당히 독특한 음정이 구사됐다. 또 ‘왜 불러’의 ‘‘ 아니 안 되지, 돌아서면 안 되지.”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렇게 대중의 반응을 살펴 그는 점차 실험적인 소절을 늘려갔다. 그의 이론이 가장 많이 도입된 곡은 ‘가라나다’다. 하지만 그것도 반 정도가 들어간 것이라 하니 완전한 ‘송창식 표’ 음악이 궁금할 뿐이다. 송창식처럼 시대를 읽고 대중들의 마음을 맞출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알고도 그것을 완성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창작이라는 게 세상에서 가장 황홀하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기에. 다음 호에선 창작에 대해서 다뤄 보려고 한다. 물론 그의 말과 생각으로 말이다.
박재현(소설가) walrus1618.blog.me
‘열차’의 활용법 (최지원) : 봉준호 감독은 <마더>의 골목길이나 <괴물>의 한강의 하수구 등의 장소들을 스릴러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설국열차 돌려깎기 곡주대비 (hjkanjy@gmail.com)
활용해 왔었다. <설국열차>의 공간인 ‘열차’ 또한 감독의 전작에서 많이 등장했던 좁고 밀폐된 장소의 연장선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 ‘열차’는 전작들의 공간과는 다르게 모든 사건들의 무대가 되고, 공간의 특수성을 가진다.
설국 열차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건 내 코너가 아니니, ‘어떻게 깎아’ 봐야 하는가.
열차가 가지는 특수성은 ‘열차에 수많은 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열차’를 능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감독은 열차 안의 계급 사회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또한 수족관, 교실, 꼬리칸 등 각각의 칸이 가진 개별적인 특징으로 인해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수평적인 공간 안에서 꼬리칸의 인물들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음에도, 각각의 칸마다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되는 액션 장면들 또한 역동적이고, 색다르게 느껴진다.
다른
좋은
필진들이
어떤
각도로
설국열차를 볼 지 필자도 기대가 된다. 그것은 두고보면 알게 될것이고. 필자에게 설국열차는 단 한가지 주제.
‘계층’
에 관해 말하는 영화다. 가혹한 핍박과 처벌을 받는 피지배층이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지배층을 이긴다는 내용인데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인가. 이 쯤해서 뜬구름 하나 잡자면, 최근
특히 ‘교실’ 의 공간이 가장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앞에서 화려한 액션 장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실의 시퀀스가 가장 섬뜩하고, 잔혹했다. 아기자기한 모빌들이 걸려있는 교실 안은 온통 밝은 색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과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교사의 모습은 여느 영화에 등장하는 교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교사는 아이들에게 마치 영웅담을 들려주듯 윌포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윌포드의 이름을 외치며 그를 찬양한다. 이때에 여교사의 배를 찍은 인서트 컷이 뜬금없이 등장하는데, 우리는 이 인서트 컷으로 인해 여교사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 인서트 컷에 대한 호기심과 의구심을 갖게 되다가도 교실의 일상적인 컷들이 연이어 지나가면서 우리는 교실 안의 모습을 유람하듯 보게 된다. 여교사가 아이들에게 달걀을 나눠주고, 제럴드의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장면들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제럴드의 바이올린 줄이 끊긴다. 곧이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잔혹한 여교사의 총기 난사 장면이다.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부여잡고서 사람들을 향해 총질을 하는 여교사의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섬뜩하다.
개봉한
‘논픽션
다이어리’라는
다큐멘터리에 대해 잠깐 말해보자. 이 다큐멘터리는 삼풍 백화점 사고를 일으킨 백화점 경영진과 지존파사건의 범인들에게 주어진 처벌을 비교한다. 직무유기로 몇백명을 죽게했던 인명사고를 초래한 백화점 최고 경영진과 ‘부자는 다 쓸여버려야 한다’는 아젠다로 다섯명을 토막 살해한 일곱명의 살인범들에게 주어진 (각각) 징역 7 년과 사형이라는 엄청난 차이의 구형을 대조하는데 왜 대한민국은 5명을 죽인 7명에게는 사형을, 500여명이 넘는 인명 사건을 초래한 경영진들에게는 7여년의 징역을 선고했는가. 이러한 수학적인 머리로 이해가 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죽음’ 이라는 희생자의 절대적 피해 보다‘누가’ 이러한 일을 저질렀는가 에 대한 논리가 더 많이 적용되었음이 아닌가. 결국 강남에서 가장 큰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들은 한 마을에 사는 인구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사건의 명백한 책임이 있어도 사형 같은 중형은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논리 혹은 반대 논리로 설국열차를 보자. 극악무도한 지배층 (앞칸) 의 폭력을 못이긴 피 지배층 (뒷칸)이 전쟁을 시작하고 결국 지배층을 말살시키는데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피지배층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 라면 혹은 영화를 본/볼 관객 이라면 어떤 스탠포인트를 가질것인가. 죽어 마땅한 쪽은 어느쪽인가. 지배층? 피지배층? 저소득층? 고소득층? 이 질문의 의도를 다들 간파하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과연 누가 만들어 어떻게존립 되는것인가.
한국영화 돌려 깎기
두번 본 설국열차 (스포일러 포함)
exxx
첫 감상 원시시대부터 시작해서 서비스 유흥업까지로 이어지는 흐름을 열차에서 보여주었다는 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처음 볼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2 가지다. 첫째는 ‘사관’의 존재. 먹을 것도 없는 기차안에 역사를 기록하는 화가가 있다는 것은 영화 전체를 역사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쉽게 넘기기 어려운 흥미로운 요소라고 생각한다. 사관은 일상도 기록하고 영웅의 모습도 기록한다. 둘째는 초반부 꼬리칸의 사람들이 거의 처음으로 햇빛을 보는 순간들이다. 소리와 함께 눈이 빛을 스치고 지나갈 때의 ‘찡!’ 한 느낌을 무척 잘 살렸고 이 장면 다음부터 인물들은 본격적으로 역사시대에 접어든다. “빛이 있으라.” 던 성경 구절이 생각나는 장면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감상. 처음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영화 구석구석의 디테일이나 배우들의 옛스러운 연기를 가만히 보면서 나는 설국열차가 고전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런데 과연 이 영화는 한국의 고전영화로 자리잡을까? 아니면 다른 어딘가의 영화로 남게 될까? 길리엄과 메이슨은 영화의 혀를 담당하는 두 인물이 같은 순간에 죽는다. 사실 영화의 액션신은 전반부에 대부분 몰려 있지만 실제 입을 닫고 싸우는 장면은 두 혀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이 둘의 사망시기를 잘 조율했다. 그리고 메이슨은 엔진칸에 가본 적이 없다면서도 그 손동작을 몹시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거짓말이거나 습관적으로
손동작을
반복하는
윌포드의
모습을
흉내냈을 가능성이 있다. 윌포드가 고기를 굽다말고 왼손을 움켜쥐는 모습을 놓치지 말라!
한국영화 돌려 깎기의 필진이 되고 싶으신 분들은 문의 주세요! @postyri 혹은 exxx2x@gmail.com
’s pick
상반기 신인결산
빅네임들의 컴백과 국가적 비극이 겹친 2014년 상반기. 안 그래도
종합 부문 1위 :
살아남기 힘든 아이돌 세계에서 신인들에겐 더욱 힘든 시기였음에
마마무 - Mr. 애매모호
틀림없다. 아이돌로지는 올해 상반기에 데뷔한 발매한 신인들을 대상으로 필진들의 의견을 모아보았다. (이미 데뷔한 팀의 솔로나 유닛, OST 등 비정규 음원만을 발매한 팀 등은 제외했다.) 음악적 포텐 부문, 곡 부문, 외모 부문, 콘셉트 부문, 프로덕션 부문으로 나눠 진행된 이 결산의 종합순위를 공개한다. 1위 마마무 2위 갓세븐 3위 베리굿 4위 1PS 5위 JJCC 필진에 따라 “올해 최고의 신인”이란 단언을 받기도 한 마마무가 1위를
인피니트 - Be Back (2014)
차지했다. JYP의 저력을 다시 일깨운 갓세븐, 특정 필자의 강력한 콧수염
by 별민 (http://idology.kr/1109)
지지를 받은 베리굿도 상위권에 올랐고, 일견 수수할 정도로 정도를 걸은 1PS와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 JJCC가 뒤를 이었다.
“Be Back”은 전체 인피니트 음반 중에 ‘전멤버의 보컬 역량 강화’를
아이돌로지가 집계한 상반기 데뷔 신인은 모두 26팀이었다. 그러나 결산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앨범이며,
결과에서 볼 수 있듯, 이처럼 치열한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팀들은
그중에서도 ‘서브 보컬(호야, 엘)
일부에 국한되는 경향도 있었다. 하반기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좋은 활동을
의 메인 보컬화’와 ‘래퍼 동우의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또한 하반기에는 더 참신하고 매력적인
보컬 재발견’을 시사점으로 꼽을 수
신인들의 등장 또한 기대해본다.
있겠다. 기존의 행보에서 멤버들의 역할 비중이 각각 ’1/7′을 지키는
각 부문별 순위, 상반기 데뷔 신인 26팀의 목록, 그리고 번외편인 상반기
데에 충실했다면, “Season 2″와 “Be
최고의 괴작 부문은 본문에서 확인하시길. http://idology.kr/1058
Back”을 발표하고 ‘인피니트 제2막’
을 선언한 시점부터는 그 비중이 ’1/7, 그 이상’이 되지 않을까. 이번 앨범을
letters : 갓세븐 - ‘A’
by 쓴귤
포함한 ‘인피니트’의 전체 디스코그라피를 한 편의 드라마에 비유한다면, 인피니트 음악의 기조를 형성해온 스윗튠과 제이윤이 쓴 시놉시스 위에
* letters는 아이돌팝 가사에 관한
Rphabet 등 다른 작곡가들이 극 중 가장 긴장되고 격정적인 장면들을
칼럼이다. 때로는 이색적이고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주연 배우인 인피니트 멤버들의 호연
때로는 마음을 파고드는 아이돌팝
덕에 전체 작품은 완성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아이돌 기획자들은
가사의 세계를 쓴귤의 섬세하고
이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진 제작 공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치 있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다지 면밀하게 이들을 관찰해온 사람이 아니라면, 인피니트가 항상 비슷비슷한 음악만을 해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개별 작품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그 각각의 의미들을 관통하는 근간을 형성하는 것 역시 아이돌을 포함한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성장이나 진보는 바로 그 근간 위에서 꽃피워지는 것이 미덕일 것이며, 많은 가수들이 이 성장과 진보의 미덕을 충실히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그 노력이란 그저 ‘안 하던 짓을 해본다’에 그치는 단발성 일탈을 ‘도전’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해오던 것은 꾸준히 유지하되, 그 전에 해본 적 없었던 무언가를 추가하거나 새로 조합해 작은 발걸음이나마 앞을 향해 내딛음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피니트는, 꾸준하며 여전했지만, 동시에 항상
갓세븐 - “GOT♡”
새로웠다. 비유하자면, 정규 2집 “Season 2″가 가장 인피니트다운 모습을
JYP 엔터테인먼트,
꾸준히 이어가겠다는 약속에 해당했다면, 정규 2집 리패키지인 “Be Back”
2014년 6월 23일
은, 그러나 절대 같은 모습만을 보여주지는 않겠다는 다짐에 해당한다. 앨범 프로듀서와 제작진은 물론 멤버들도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은 놀라울
듯, 며칠 전 라디오 방송에서 멤버들은 ‘”Season 2″에서 부족함을 느낀
정도로 많이 연애를 했다. 아마
청자들은 “Be Back”을 통해 그 부족함을 채우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강의실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였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충분히 유효하다.
오가는 감정을 눈에 보이는 선으로
전문 보기 : http://idology.kr/1109
그을 수 있었다면 쫀쫀한 직조물이 짜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관련글 Draft : 인피니트 - ‘Back’ http://idology.kr/1098 인피니트 - Season 2 (2014) http://idology.kr/762 by 김윤하 1st Listen : 인피니트 - “Season 2” http://idology.kr/755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연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놀랐다. “정말? 걔랑 걔가?” 한 친구는 날 조금 한심하게 쳐다보며 “몰랐어?”라고 묻고는 “쟤가 얘 좋아하는 거 같아”, “얘랑 쟤랑 몰래 사귀는 것 같은데…” 같은 추측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거의 신내림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내림의
비밀은 알고 보니 별것 아니었다. 약간의 관찰력과 상상력, 그리고 ‘아님 말고’의 찍기 정신이 다였다. 그 뒤로 나도 꽤 알아주는 선무당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내 일이 되자 나는 까막눈의 신세로 돌아갔다. 내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나만 모르고 심지어 학과 조교까지 알고 있었다. 아니, 나를 좋아했던 후배도 다른 사람이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둘 다 자신만의 세계에 살았던 것이다. 나는 심지어 왜 나한테만 밥을 사내라고 하냐며 면박을 준 적도 있고, 영화 보고 싶은 게 있다는 말에 네 단짝 친구랑 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 적도 있다. 내가 알아차리게 된 계기는 기억나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문득’ 떠오른 생각일 게 틀림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미 정상인보다 한참 뒤진 속도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알아차린 후의 세상은 알아차리기 전의 세상과 같지 않았다. 한 두 발자국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설명하면 민망하기 짝이 없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예사롭지 않았다. 멀리서 내가 돌아보면 사라지고, 돌아보지 않는 척 눈을 찢어 옆으로 쳐다보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학교에 안 간 날은 여지없이 문자가 오고, 밥은 먹었냐고 꼭 묻고 먹었다고 하면 실망의 표정이 스쳐 간다. 갓세븐의 ‘A’의 노랫말은 그렇게 달라진 세상을 처음 바라본 순간의 환희를 캡춰한다. 결국 이별이 오고, 똑같은 시작이 오는 관계의 되풀이에 지쳐 관계 맺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접근의 의도를 의심하며 작은 친절에도 가시를 세우는 닳고 닳음도 없다. ‘A’는 관계 그 자체가 신기하고, 나에게 전해지는 감정이 오묘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 연애의 뉴비가 신난다고 외치는 펄쩍거림이다. 자꾸 반복되는 “에에이~” 는 노랫말만으로도 후렴구를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지만, 이 곡의 정서를 확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제까지 별 생각 없이 바라봤던 똑같은 모습이지만 오늘은 “날 좋아하는 마음을 모를 거라 믿고 있는 네 모습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짐짓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없다고? 에에이~” 하며 마구 놀리고도 싶고, 아직까지 모른 척하고 있는 너에게 “에이, 언제 말할 거야?” 하며 묻고도 싶다.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오는 신나는 기쁨이 소년의 “에에이~”에 가득하다. 하지만 ‘A’의 “에에이~”하는 놀림 섞인 후렴구가 가장 청량하게 다가오는 것은 “오늘부터 우리 1일” 하자며 선언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망설임도 없고, 어느 누구는 ‘신중함’이라고 말하고 어느 누구는 ‘간’이라고 말할 재보기도 없다. 라임을 맞추기 위해, 혹은 유행하는 말을 넣기 위해 넣었을 “자 썸을 피하지 말고 나와 함께 썸 타” 라는 노랫말이 곡의 정서를 일부 흐리기는 하지만, 상대가 은연중 드러낸 마음에 자신이 느낀 감정을 여과 없이 부딪히는 자신감은 여전하다.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된 순간, 내가 느끼는 기쁨은 “에에이”라는 환호성이 되어 터져 나오고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 화답하는 나의 태도를 결정한다.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일수록, 연애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갖기 힘든 미덕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굳이 그린라이트인지, 아닌지 두 번 세 번 방송에까지 물어보고 확인해 보려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상큼한 아이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판타지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관련글 Draft : 갓세븐 - ‘A’ http://idology.kr/910
1st Listen : 갓세븐 - GOT♡ http://idology.kr/973
게임 노동 일지
글. 그림. 철민
�
! ! ! ! ! ! ! ! 글: 이동걸 mm17@me.com! !www.facebook.com/mapukiki ! �
! !
# Ekolu. 셋.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탈로하 Taloha����칼로하 Kaloha�������������������������아로파 Arofa������ ���������������알로파 Alofa’ ��������아로하 Aroha� ������������������������������������ �������������������������
!
A������������������������ L���������������������� O������������������������ H������������������������
!
A����������������������
�����������������������릴리우오칼라니 여왕���������������������������리디아 K. 아홀로������ ������������������������������������������������������������������������������ �������알로하��������������������������������������������������������������������
!
������헬레나 G. 앨런�����������������������������������������������������
�����������������������������������������������
!
! ! !"#$%&$'()*+,$-*./$$$$$$$$ ! ! !
�사��� ����� ������������� �1����
[1절] 0,1,+.*$2,$3,$4$5ā$6,)4 7.$54+4$,1.),$4$2,$5,+.). 8$+,+,4$,5,$6,+,$4$2,$)42* 93,$1ā+4+4$).+3,$*$32,
!
[후렴구] ()*+,$1*.:$,)*+,$1*. 8$2.$*5,*5,$5*+*$4$2,$)46*$ ;5.$<*5=$.>?@,A.:$ ($+*14$,1.$,3$ B5C4)$D.$>..C$,E,45
!!
[2절] 1;$2,$+,)41,$,)*+,$4$+424$>,4 7.$+*5.$,1.$5.4$4$7313$>,5,D, 1;$1*.$5,$2,13$46*$,)*+, ($)*2*$.$+,5,$5.4
!!
[3절] F,*6*6*$2313$142.$4$2,$5,54 GH$63,$@*I.$*$F,35,D4)4 J$),4),$+4,14,$5H$>,53 F4241,),$4$2,$5,54$*$2,$)46*
[1절] ������ 절�� ��내리� ���� 나무사이를 흘러내리며 ���리를 ��내� ��� ���� ��� ����.
!!
[후렴구] ��� ��� ��� ��, 나무�� ��� ���� ���� ���, ��� ���, ��� ��, �리� �� �� ����.
!!
[2절] ��� ��이� 내� �� �����. ��� ��� ��� �����. ��� ���� 나�� ��� ���� 사�� 절�� ��� � ���.
!!
[3절] � 이� ��� 사� �나���리� ��� ��� �� ���. �� 사��� ��이 �� ��, ��� ��� ��� �����.
�������������‘������������������������������������������������������� ������������������������������������������������������������������ ������������������������������������������������������������������ ������������������������������������������������������������������ ����������������������������������������������������������������� ����������������������������������������������������������������
!
����������������������������������������������������
��������������������������������������������������� ������������������������������������������������������������������ ����������������������������������������������������������������� ��������������������������������������������������������������������� ������������������������������������������������������������������ ������
작곡가 b의 노트 <작곡 레슨에 대한 고찰> 글. Composer B
1악장. 작곡을 ‘공부’한다니? 음악대학의 작곡전공 학생들은 (이 글에서의 ‘작곡전공’은 실용음악이 아닌 클래식음악 전공 을 뜻한다. 개인적으로 서양음악 창작의 분류를 ‘클래식’과 ‘실용음악’으로 나누는 현상과 용어 선정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보통 한 학기당 두 개의 작품을 제출해야한다. 학교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작품들은 ‘전공실기’ 라는 과목의 결과물이며 대개 자유곡 한 곡과 지정곡(학년, 학기 별로 악기 편성이 정해져있 다) 한 곡을 제출해서 교수들에게 채점을 받아야한다. 작곡 공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작곡도 레슨을 받아야 해요? 혼자서 쓰는 게 아니라요?”와 같은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질문은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 등장하는 작곡가의 이미지가 그들의 인상에 깊게 각인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산책을 하다가 갑자 기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악보에 무언가를 적어대거나,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작곡을 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는다든가 하는 모습들 말이다. ‘작곡 레슨’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고정된 이미지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작곡가인 나 스스로가 ‘작곡가는 즉흥적으로 작업 한다’는 인식에 대해 서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며 실제의 작곡 수업역시 추상적이고 오글거리는 표현이나 수사들로 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교수나 강사에게 보여주고 난 뒤 가장 많이 지적 받는 사항은 ‘영감’이나 ‘감성’ 보다 ‘형식’에 대한 것들이 많다. 여기서 말하는 ‘형식’은 그 곡이 전개되는 동 안의 전체적인 틀과 방향성, 균형미를 뜻하는 것인데, 우리가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잘 짜인 영화나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긴장감, 그리고 이야기나 사건이 해결되었을 때 느끼는 미학적 쾌감(?)에 포커스를 맞춘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기존의 섹션에서 또 다른 하나의 섹 션으로 이동할 때, 새로운 섹션이 이전의 부분들에 비해서 얼마나 독창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 으며 동시에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 주제와 분위기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지를 동시에 고민해야 하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까다롭고 힘 든 작업인 것이다. 지면이라는 한계가 있는 관계로 작곡 레슨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 겠지만, 음악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레슨’이라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학생과 교수 의 기싸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악장. 교수님, 무조음악 안 쓰면 안돼요? 앞서 말한 ‘전공실기‘시간은 다른 수업들과 마찬가지로 1주일에 한 번 편성되어있다. 학생들은 보통 곡을 써 오기에 앞서 어떠한 곡을 쓸 것인지 교수와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게된다. 지정곡 편성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곡으로 쓸 것인가? 자유곡으로 쓰고 싶다면 악기 편성은? 길이 는 대략 몇 분 정도로? 음의 소재는 조성음악? 아니면 무조? 생각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은 생각만큼 작품 구상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고뇌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교수님께서 정해주시니까! 사실 교수가 정해주든 정해주지 않든 학생들은 작품의 기본 틀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 요한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자신의 작품을 ‘조성음악’1)으로 쓰느냐 ‘무조음악’2) 으로 쓰느 냐의 분기점이다. 사실 21세기에 창작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무조음악을 써야한다는 규칙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 역시 무조음악이 무턱대고 어렵고 듣기에 불편하다 며 배우기 싫어서 도망다니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교수들은 바그너 이후로 시작된 조성음악의 붕 괴와 무조음악의 출현을 설명하고 가르치려면 학생이 직접 무조음악 작품을 써보게 하는 방법 이 가장 좋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순수하게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무조음악이 조성음악에 비해 훨씬 학구 적이고 ‘유치하지 않아’ 보인다는 이유(일단 남들 듣기에 어려우니까,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로 학생이 원하지 않는데 반강제적으로 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즉, 학생이 쓰고 싶은 곡이 있더 라도 교수가 선뜻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곡을 써야하거나, 고집을 부려서 레슨을 받더라도 흡족 한 가르침을 받기 힘든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물론 학생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관대한 교수님을 만나게 되면 저런 고민을 하지 않아 도 되겠지만, 1:1 도제교육이 주류를 이루는 음악교육의 특성상 대부분의 선생들은 자신의 음악 적인 것을 학생이 온전히 물려받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려한다. 그러다보니 음악을 비롯 한 예술 이외의 전공에서 볼 수 있는 활발한 토론문화나 다소 공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예리 한 질문을 하는 행위는 곧 스승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건전한 의미의 ‘학문적 싸움’이 주는 긴장감을 음악교육계나 비평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다. 물론 교 수에게 일단 숙이고 들어 가야하는 풍토는 다른 계열에서도 보편적인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 지만, 별다르게 특출한 능력이 없다면 졸업 이후의 취직자리라고는 교수가 주선해주는 출강이나 레슨이 대부분인 좁아터진 한국 음악계의 현실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인문이나 이공계열이야 전공과 무관하게 취직이라도 할 수 있지만, 요즘 취업시장에서 토익 한 번 제대로 본 경험이 없는 음대 졸업생이 대체 무슨 메리트가 있겠는가. 용가리 통뼈가 아니고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1) ‘C 장조’ ‘F 장조’처럼 음 조직이 일정한 체계와 정해진 음계와 으뜸음을 바탕으로 구성된 음악. 쉽게 말해서 우리가 듣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이 대부분 조성음악들이다. 2)그러한 조성체계가 없는 음악. 흔히 말하는 ‘현대음악’이 이러한 음소재로 작곡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협화음’ ‘이상하다’ 라는 단어로 표현되곤 한다.
3악장. 다시 써와라 다음 주의 레슨날. 퀭한 얼굴로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선 학생은 교수의 컴퓨터에 USB 메모리를 꽂고 프로그램에 자신이 써온 작품을 띄워 재생 버튼을 누른다(나이가 많은 교 수의 경우에는 학생에게 손으로 그린 악보를 가져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교수님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분량 때문에? 아닌데... 첫 레슨에 두 페이지 썼으면 많이 썼잖아? 곡이 별론가? 그렇다면 어디가 이상한지 곧 가르쳐 주시겠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교수님이 이런저런 전문 용어를 동원해가면서 설명을 해준다. 분명히 언어는 한국어인데 내용정리가 도저히 되지 않는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걸까. “네, 네... 아, 알겠습니다.” 같은 추임새로 교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척 하면서 요점을 정리해 본다. 대략 눈치를 보아하니 도입부와 그 이후 전개부분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는 말씀인 것 같다. 즉, 더 나중에 나올 뒷부분을 위해 도입부에 등장했던 주제 모티브를 전개부분에서 좀 더 유기적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학생이 교수님께 여쭤본다. 그럼 교수님! 어떤 방향으로 수정을 하는게 좋을까요?
“일단 지우고 다시 생각을 좀 해볼래? 지금 네가 써 온 곡은 주제에 접근하 는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 이러면 안 돼.” 그러면서 교수님은 마우스를 움직여 첫 번째 페이지의 9번째 마디부터 그 이후 부분 전체를 블록지정 한 뒤에 가벼운 손놀림으로 ‘Delete’ 버튼을 눌러 8마디 이후의 분량을 그야말로 ‘싸그리’ 날려버린다. 그리고 비워진 9마디 이후부터 음표 몇 개 를 찍어보기 시작하더니 혼잣말로 ‘음, 이렇게 되어야 맞지’ 라고 한다. 그러나 학생이 듣기에는 교수가 날려버렸던 아까 전의 음악보다도 더욱 어색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이미 ‘내 것’이 아니라는 찜찜함이 마음 한쪽에 남아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학생은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으려고 하는 교수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기에 앞서 일주일 동안 온갖 고민을 다해서 써낸 작품을 한순 간에 날려버리고 졸지에 교수의 음표들과 이종교배가 되어버린 자신(?)의 작품 앞에서 할 말 을 잃고 만다. 결국 자신이 써놓은 8마디와 교수님이 써준 그 이후부분을 토대로 다음 주에 다 시 레슨을 받기로 하고 수업은 끝나게 된다. 작품에 대한 치열한 토론과 가르침을 희망했던 학 생은 밀려오는 회의감과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나중에 작품을 제출할 때 작곡자 이름 뒤에 ‘feat. ○○○교수님’ 이라고 써 버릴까- 하는 하나 마나한 소리를 하고 피식 웃으면서.
4악장. 그래도 내 작품 조금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예를 들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이 절대 드물지는 않다. 물론 1차적으로 교수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선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 하다. 하지만 현재 전임 교수직에 있는 세대의 어른들이 대부분 수직적인 사회분위기에서 성 장한 탓도 있고, 교육자로서의 능력보다 실무경험을 중요시하는 예체능 계열의 특성상 학생과 상호 교감하는 체계적인 티칭의 방법론까지는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상황이라 필요 이상 으로 자신의 방식을 요구하는 이러한 상황이 크게 바뀌기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창작은 기악이나 성악과는 다르게 창작자 자신의 생각과 철학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 에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서 그 벽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자 극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보았듯 교수가 학생이 써온 모티브의 뒤 를 이어서 써 주는 식의 레슨이 아니라, 굳이 클래식 음악이 아니어도 좋으니 조금 더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학생 스스로가 확신을 가진 작품을 쓸 수 있도 록 말이다. 더디고 답답하게 느껴질지라도 결국 최종 책임자인 학생이 ‘이것은 내 작품’ 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학생의 예술적, 학문적인 발전은 요원하다는 뜻이다. 한 시간의 레슨 시간동안 단 네 마디를 놓고 한 가지의 질문만 던진다고 해도 무한개의 정답 이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곡 제출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그런 식으로 레슨을 진행 할 수는 없겠지만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선생들이 조금 더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고 학 생들을 이끌어준다면 지금보다 더 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소개소
1. 뭐 좀 한 것처럼 - 파라솔 [EP]
2. 바다보러 가자 - 하찌와 애리
3. 남국의 바다 - 더 문샤이너스
술탄 오브 더 디스코, 트램폴린,
진정 힐링이 되는 노래를 하는
오키나와로 떠나고 싶은 가장 큰
결성한 밴드. 처음 본 공연에서
정말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 것 같은
칵테일, 알로하셔츠, 남국의 바다’
(2014), 2
푸르내에서 단숨에
활동하는
반했다.
음이
멤버들이 어둡다가
중간에 밝게 변하는 부분이 가장 좋다.
걸맞는
그리고
가사와
흔치않은 독특한
제목에 보컬이
매력적이다. 음악을 들을 때 장르를
구분짓고 장르에 대한 마음의 벽이 있었는데, 이 노래를 들으며 그런 건 의미없다는 생각을 했다.
[꽃들이 피웠네](2011), 9
하찌와 애리. 요즘 이들의 음악은 기분이 들게 한다. 특히 노래 중간의
연주를 들을 때는 하와이 바다에 있는 기분이 든다. 판소리를 하는 애리씨의 목소리를 들으면 보컬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팀인데 보컬이 조용조용하지 않고 힘이 있어서 더 좋다.
[모험광백서 - DISK 2](2009), 6
계기가 된 노래. 노래 가사 중 ‘
라는 구절은 평소에도 문득문득 생각 날 만큼 좋다. 특히 ‘남국’이라는
흔히 쓰지 않는 단어를 택한 것이
문샤이너스 답다. 문샤이너스 특유의
코러스가 잘 어울리는 곡. 음악을 배우고 싶은 사람으로써 남국이 절로 생각나는 시원한 멜로디와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요즘 진정한 휴가없이 살다보니 오키나와로 긴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자주 합니다. 그런 생각을 부추기는 시원한 노래들을 소개합니다. 신당동 파르한 (@chungchoon98)
4. 첨벙첨벙 - 얄개들
5. 비밀 - 김사월X김해원
6. Turn me on - 구릉열차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밴드 얄개들의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김해원의
헬리비전, 세컨세션 등에서 활동하는
아니었지만 첫 부분의 시원한 기타
에코백과 함께 음원 다운로드 코드를
라는 이름이 독특해서 공연을 보고
[첨벙첨벙 / 밤이오면](2012), 1
디지털 싱글. 당시 관심 있던 곡은 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연주가 인상적이다. 여유로운 가사와 반복되는 드럼 소리가 마음의 안정을 준다. 여름에
가장 어울리는 한 곡을 뽑으라면 나는 이 곡을 택할 것 같다. 현재
얄개들의 멤버들은 푸르내, 밤신사, 파라솔에서 활약하고 있다.
[비밀](2014), 1
듀오. 일반적인 CD형태가 아니라 판매한다.
올해
레코드폐허에서
처음 공연을 봤는데 에코 소리 같은
김사월씨의 목소리가 참 좋았다. 서부 영화의 배경 음악 같은 연주로
시작해서 두 뮤지션이 잔잔하게 노래하는 것이 반전 매력이다. 다른 악기 없이 기타 두 대로 연주하는 데도 목소리 덕인지 참 아름다웠다.
[Single](2013), 2
멤버들의 트리오. 단지 ‘구릉열차’
싶었는데 기대만큼 좋았다. 공연에서 드럼 연주가 눈에 띌 만큼 멋있었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보컬도 좋고 연주 부분이 많은 것도 매력적이다. 특히 보컬이 시작되기 전의 긴 연주에서
기타, 베이스, 드럼 각자의 연주가
훌륭하다. 여름밤에 들으면서 누워 있으면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 NANGMANSPY letmeflywoo.tumblr.com
#5 속초,여름
ⓒ NANGMANSPY letmeflywoo.tumblr.com
#5 속초,여름
Chapter 14 {인디}의 생존매뉴얼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팟캐스트 인터넷망을 통해 다양한
1) 내가 꽤 오래전부터 즐겨듣던 팟캐스트 ‘빨간책방’의 로고가 바뀌었다. 이것은 홍대 근처에 빨간책방 카페가 생김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빨간책방의 로고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붕가붕가레코드’ 하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
떠오르는 김기조 씨라고 한다.
기존 라디오 프로그램과 달리
빨간책방 기존 로고는 붉은 바탕에 거친 손글씨로 디자인된 다소 투박한 느낌이었고 완성도의 부족에서
방송시간에 맞춰 들을 필요가 없으며, 스마트폰을 통해 등록만 해 놓으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는 관심 프로그램을
느껴지는 ‘아마추어’적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디자이너인 나는 그 거칠고 조야한 로고가 싫지 않았다.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내려 받아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다.
두 패널의 진보적인 성향이 잘 반영되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팟캐스트로는
너무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막하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디쯤엔가 머무르는 듯한 그런 느낌.
‘책 읽는 라디오’, ‘나는 꼼수다’ ‘시사난타 H’ 등이 있다.
이번에 교체된 빨간책방의 로고는 무척이나 특이해 보인다. 김기조씨 하면 떠오르는 88만 원 세대의 마이너한 감수성을 한껏 머금은 느낌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교체된 로고에서 유달리 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련됨이다. 특이함과 세련됨의 공존은 사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스타일과 그 시대가 요구하는 미적 감수성이 적절히 조응했을 때 발생하는 순간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2) 팟캐스트가 국내에 처음 붐이 일기 시작했을때를 기억한다. 그것은 독일의 철학자 발터벤야민이 영화라는 매체를 바라보며 품었던 희망과 닮아있었다. 개인이 하나의 매체가 되어 고착화된 사회의 담론들을 하나하나 상쇄시켜 나가는 미디어의 역동적 가능성.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아직 모두가 바란 그런 모습이 도래하지는 않은 것 같다. 현재 팟캐스트 상위에 등록된 프로그램들은 기존 라디오 문법들을 그대로 의태하고 있다. 방송을 대표하는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날 방송의 맥락을 넘겨 짚을 수 있는 진행자의 멘트가 뒤따른다. 이렇듯 새로이 등장한 매체가 기존의 익숙한 방식들을 재현하는 방식은 청취자에게 확실한 편안함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렇게 제공받은 편안함은 때때로 힘들게 만들어진 새로운 가능성에 커다란 암막을 드리우기도 한다.
3) 독일의 극작가 페터 한트케는 자신의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가 가진 의미보다 그 언어가 어떠한 맥락에서 사용되는가에 더 주목해야 한다.” 언어는 맥락에 따라 달리 사용되어야 하고, 그러한 측면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사회는 보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보통 ‘욕’을 나쁘게 생각하고 최대한 내 삶에서 멀리 밀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페터 한트케는 자신의 희곡 ‘관객 모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욕설을 하게 되면, 여러분은 우리가 한 말을 그냥 흘려듣지는 못하고 주의 깊게
페터한트케 독일의 희곡작가. 문학의
경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우리 사이 거리는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치화를 주장하였는데
욕설을 듣게 되면, 여러분의 몸은 부동자세로 경직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을 욕하는 게 아니고,
기존의 문학, 예술, 정치를
여러분이 하는 욕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욕들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를 가리켜
비판했다. 그는 언어를 통해 계몽하려 했다.
욕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 뿐입니다. 여러분은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1966년 발표된 《관객모독》은
\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너희들은 항상 거기에 앉아 있었다. 이 연극에서 너희들의 성실한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희들은 다만 제목을 제시해 준 자에 불과했다. 너희들의 위대함은 생략을 통해 이루어졌다. 너희들은 이 모든 사실을 침묵으로 대변했구나, 허풍쟁이들아. \ 너희들은 모두가 똑같은 모습이었다. 너희들에게 오늘은 좋은 하루였다. 너희들은 서로 훌륭하게 연기했다. 너희들은 삶의 이야길 듣고 배웠다. 멍청이들아, 막돼먹은 인간들아, 무신론자들아, 부도덕한 인간들아, 떠돌이 사기꾼들아, 불결한 유대 종자들아.
4) 관객 모독에서 흘러나오는 욕을 기존의 의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개개인이 처한 상이한 맥락으로 초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할 것인가. 아마도 여기에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를 바라보는 자신의 미학적 진보성을 확인할 척도는 어느 정도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내가 관객 입장에서 그 욕들을 청각적 이미지로 모두 번역해 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욕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또한, 단순한 기호쪼가리로 전락해 버린 욕이 아닌 욕들을 통해 마침내 나는 모독당하고 있는 관객으로서의 형상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5) 라디오와 팟캐스트는 본질적인 차이[리얼타임/스트리밍]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현재의 라디오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라디오의 일회성 즉, 흘러가면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러한 일회적 측면이 청취자에게 특유의 아우라를 제공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팟캐스트에는 리얼타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탄생과 동시에 원본이 사라지는 스트리밍 방식을 제공하고 있다. 원본보다 선행하는 복제라는 점에서 모네가 그린 수련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팟캐스트를 청취하다 내용이 흘러갔어도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간단히 복귀할 수 있는 편의성은 청취자에게 분명 라디오와는 다른 방식의 태도를 요구한다. 팟캐스트를 간편하게 들을 수 있는 사이트인 ‘팟빵’을 보고 있으면 더이상 팟캐스트는 청취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커다란 LP판과(이것이 LP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 밑으로 달린 무수히 많은 댓글. 팟캐스트의 시청자 참여도는 과거에 존재했던 매체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승했다. 올드 미디어에서 행해졌던 소극적 방식의 참여(감성적인 글귀들로 무장한 편지따위)가 아닌 프로그램에 스트리밍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동적 방식의 독자를 팟캐스트는 원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독자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인터넷에서 음성이나 영상, 애니메이션 등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기법.
독자는 더 이상 원전의 권위에 복무하는 생산미학적 주체에서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전을 읽어내려가며 기존의 텍스트에 자기 생각을 열심히 덧붙이는 주석가가 되고자 한다.
6) 지금처럼 글이 많이 쓰이는 시대가 또 있을까. 하루 사이 SNS와 블로그에서는 천문학적인 글들이 쏟아지고 지워진다. 글 중에는 많은 사람에게 유의미한 글도 있지만, 타인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목록이 포함된 사적인 글도 있다. 이렇게 쓰인 글들은 또한, 과거 어느 시대 보다 빠르게 소각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남겨진 수많은 글들. 그 글들은 서로의 맥락을 잃어버린 채 파편화되어 어느 공간에서 어떻게 사용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페터 한트케가 시도했던 언어를 하나의 특권적 의미에서 떼어내려는 작업은 지금은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맥락에서 떨어져 나간 언어의 파편들이 다른 공간에 침투함으로써 최초로 작성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우리는 당연시 여긴다. 온라인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쓴 글들을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잘라버리고 문제시될 가능성이 있는 부분만을 토막 내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일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징후로서 받아들여진다.
내가 쓴 글의 의미를 고정할 압정이 내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은 이내 무력감으로 다가와 굳게 닫힌 내 방문을 두드릴 것이다. 나는 식은 방 구석에 앉아 쓰다 남은 의미의 조각들을 부여잡고 애써 시간을 지연시켜 보지만 얼마 안 가 문은 열릴 것이고, 그것들은 강탈당할 것이다.
7) 나는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가 지닌 모호함이 좋다. 다루는 책들의 깊이와 관계없이 이따금 흘러나오는 욕설과 잡담. 진행자들이 가진 주류적 입지와는 별개로 이야기되는 정치적 진보성. 잡음없는 쾌청한 녹음 환경. 기존에 라디오에서 자주 보던 익숙한 진행 방식. 날짜에 맞춰 방송이 등록되면 거의 동시에 의견이 반영되는 팟빵 게시판. 게시판에 쓰인 의견 때문에 바뀌어버린 방송 편성시간과 진행 방식. 그리고 이 모든 애매한 지점들을 시각화 시켜놓은 것 같았던 로고.
8)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빨간책방 로고를 새로이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김기조씨 라는 것은 기존의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던 그 모호성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된 로고는 확실히 기존의 관습적 김기조
미의식에 쉽사리 매몰되지 않을 만큼 독특하긴 하다. 하지만 현재의 로고를 보고 있자면 그 독특성이 컨셉에 의해 합리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이라는 느낌 역시 지우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한글타이포그래피디자이너. 붕가붕가레코드 디자이너로서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한 디자인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물론 모든 팟캐스트 프로그램들이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팟캐스트 상위에 랭크된 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라디오 문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으며, 좋은 음질과 모던하고 세련된 브랜드 이미지를 획득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새로운 매체가 태어날 때 그것은 어떠한 지향성을 가진다. 그 지향성이 어떠한 정치적 성격을 지녔는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디자인은 어쩌면 너무도 쉽게 새로움에 대해 보편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자인된듯한 느낌이 주는 불편함은 어쩌면 불필요한 합리성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팟캐스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다수가 원했던 바람은 사실 이런 게 아니었다. 좋은 음질과 깔끔한 진행방식 이전에 사회에서 비가시화된 소재들에 대한 주목이 있었다. 주류 방송에서 다룰 수 없는 민감한 소재들을 다루는 팟캐스트들은 얼핏 해적방송 같은 느낌이 났다. 조야한 음질과 어색한 진행방식, 어눌한 패널들과 또한 어눌한 진행자들의 말솜씨. 이들은 어느 것 하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방송을 청취하고 있을 때 내가 느끼고 있을 자연스러운 불편함들은 한 번쯤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 정말 완벽한 방송형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상위에 랭크된 방송들이 전범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 내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편안함은 과거에 내가 즐겨(보고)들었던 매체에 의해 훈육된 것은 아닌가? / 음질이 떨어진다고 해서 정말로 듣지 못할 정도인가? (그렇다면 자신의 스피커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 깔끔하고 세련된 로고는 실제로 신뢰감을 주는가? (그림판으로 그린듯한 로고가 흥미로웠던 적은 없는가?)
9) 여러분은 도로를 횡단했습니다. 여러분은 양옆을 살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인사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잠시 서 있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공연 작품에 대한 여러 의견도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공연 작품에 대한 의견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악수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많이 즐기시라고 인사도 했습니다.
10)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관습의 선들이 오늘도 내 주위를 지나간다. 나는 신호등의 붉은빛에 무의식적으로 멈춰 서고 카페에 가서 누가 시키지도 않지만 알아서 커피값을 계산한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진동벨을 기다린다. 영화를 볼 때는 스크린을 향해 앉고 책을 읽을 때는 꼭 왼쪽부터 먼저 읽고 오른쪽을 읽는다. 이러한 관습들은 당연히 지켜야 할 관념적인 것들로 치부되지만 사실, 몸이 저장해놓은 안락함을 다시 호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들도 많다. 그렇다면 새로운 매체에 걸맞은 형식에 대한 고려는 기존의 우리 육체가 저장해놓은 안락함과 결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요 며칠 간 성 소수자 문제와 관련된 팟캐스트 몇 개를 듣고 있고, 그다지 목소리가 좋지 않은 남자의 낭독 팟캐스트를 듣고 있고, 디자인과 관련된 팟캐스트를 듣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음질이 조야하다는 것이다. 독특한 소재의 팟캐스트를 듣기 위해서는 내 신체를 거기에 걸맞게 훈련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자기 가학적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지금은 위에 언급한 팟캐스트들을 불편함 없이 들을 수 있게 됐고, 지금은 아주 좋은 음질의 팟캐스트에서 되려 이질감을 느껴지기도 한다.
11) 내가 즐겨듣는 팟캐스트 중 [퀴어방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음질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다루고 있는 주제 또한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 매력을 느끼게 된 이유는 팟빵에 등록된 정체를 알 수 없는 로고(?) 때문이었다. 낙서인지 로고인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는 이로 하여금 기억의 지점을 만들어주기에 로고와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조야하게 그려진 초록색 별들과 들쑥날쑥한 보랏빛 선들, 그리고 중간에 그려진 낙서 같은 동그란 얼굴. 얼굴에는 싸웠는지 반창고 같은 것이 붙어져 있고 입에는 어떤 것을 물고 있는데 이 역시 명확하지 않다. 이성애자 남성의 입장으로써 이러한 도상이 성 소수자들의 이미지와 어떠한 관련을 맺는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배워온 기존의 잘 만들어진 로고와는 거리가 먼 것이 분명하다. 소위 잘 만들어진 로고란 도상과 지시대상사이에 뚜렷한 자명성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퀴어방송]의 로고에는 그러한 자명성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 매력적이다. 도상이 지시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으니 오히려 조야하게 그려진 그림 자체의 형식에 주목하게 된다. 반면, 빨간책방의 새로 바뀐 로고에서 보이는 깔끔한 마감들에서(컨셉과 상관없이) 내 생각을 주입할 빈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 로고의 일부에는 지금 세대의 찌질한 감수성을 미학적 영역으로(의도치 않아도 반영되는 디자이너의 정체성) 옮겨놓으려는 시도가 담겨있을텐데도 말이다. 이제 인디밴드의 거친 기타를 통해 홍대에 울려 퍼지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목소리도 김기조씨의 패색이 짙은 레터링도 예전만큼 신뢰하지 못하겠다. 어디까지가 세대적 감수성의 반영이고 어디까지가 유행으로 소비되는지가 명료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냥 지속적해서 의심해보는 것뿐. 그러다 의심에 지쳐 한 번쯤 쉽게 속아 넘어간 자신을 책망하며 의심의 세계로 다시금 회귀하는 커다란 원운동이 있을 뿐이다. 어쩌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위에는 한가득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고 어째 하나같이 나랑 비슷한 얼굴임에 나는 크게 놀랐다.
clichecliche@naver.com
blog.naver.com/clichecliche
브로치와 코스터 마을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쳤다. 땅에 발을 딛는 순간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숨이 턱, 막혔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며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찻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너머로 육교 옆에 가파른 언덕이 보였다. 그녀의 이야기대로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더운 날 밖에 나오는 건 자살행위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교를 오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데 담배까지 피우고
있으니, 잘못하다가는 질식할 것 같았다. 숨이 가빠 쓰러지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누워 있다 보면 다시 숨은 쉬어질 테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119에 신고해줄 사람이 없을 테고, 그 상태로 계속 쓰러져 있다가는 일사병까지 겹쳐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 둘, 최대한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데 겨드랑이에서 옆구리로 땀이 흘러내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가 몸 위로 기어가는 것 마냥 기분이 나빴다. 팔로 몸을 쓰다듬어 땀을 닦고 티셔츠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이마가 답답해 앞머리를 쓸어 올렸더니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묻었다. 버스에서 내린 지 불과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에 배어난 땀으로 축축해진 담배를 빨았다. 연기가 아니라 더위가 폐에 차는 것 같았다. 멈춰 서서 연기를 뱉었다. 문득 며칠 전 취재 일정을 정할 때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작업실로 오시면 힘드실 것 같아요. 작업실이 좀 높은 데에 있거든요. 여기까지
오는 버스도 없고요. 날도 덥고 해서 고생스러우실 것 같은데, 장소 정해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나갈게요.”
이런 그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굳이 작업실로 가겠다고 했다. 작가의
작업실에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건 내게 있어 일종의 예의와 같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면, 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예의고 장점이고 나발이고 간에 작업실에 찾아가기도 전에 더위에 질식해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권유를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난간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바람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에 사람이
없는 거리는 고요했다. 고요한 더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태양과, 그림 같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움은 고통을 수반할 때 진정성을 갖는다”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고통이 수반된 진정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뒷주머니에 꽁초를 쑤셔 넣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덕 초입에 편의점이 보였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착 달라붙었다.
소름이 돋았다. 땀에 젖어 축축해진 티셔츠가 금세 차가워졌다. 메로나를 사서 한입 베어 물고 언덕을 올랐다. 잠시 쐰 에어컨 바람 덕분에 더위가 무디게 전해졌다. 막대를 타고 녹아내리는 메로나를 입 안에 넣어 빨았다. 동그랗게 매끄러워진 녹색의 아이스크림. 소설이라면 제법 괜찮은 복선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매끄럽게 뭉쳐진다. 하지만 이내 다시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다시 입 안으로, 다시 녹아내리고, 다시 입 안으로, 그러다 결국 사라져버린다. 남은 나무 막대를 바닥에 버리려다 뒷주머니 속 꽁초가 생각났다. 꽁초 냄새가 밴 바지를 입은, 땀에 절어 끈적끈적한 남자. 불청객일 게 분명했다. 불현듯 전 여자친구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사각형의 옥탑방. 회색 페인트가 발린 벽. MDF 공간상자들이 빼곡한 한쪽 벽면과 그 안의 소설책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있던 피규어와 잡동사니들. 바닥에 널브러진 빨래들. 그리고 방 중앙의 테이블을 사이에 둔 그녀와 나. 그날도 더운 여름날이었다. 맥주가 담긴 잔에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나는 잔을 집을 때마다 손에 물이 묻는 게 싫었다. 그녀에게 휴지를 달라고 하자 그녀는 휴지 대신 코스터를 건넸다.
“아니. 코스터 말고 휴지 줘.”
“왜? 코스터가 더 좋아. 컵에 안 달라붙고.”
“아니. 테이블에 물이 고여서 아니라 손에 묻는 게 싫어서.”
“아. 그래? 알았어. 근데 이것도 써. 어차피 꺼냈으니까.”
두꺼운 녹색 실로 엮은 코스터였다. 그 위에 잔을 놓자 아이러니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여름을 대표하는 시원한 맥주가 두꺼운 털실 위에 놓여있었다. 인터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언덕 꼭대기에 보이는 주택 옥상에서 손을 흔들며 한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집에서 작업을 한다는 설명과 함께 옥탑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문이 활짝 열린 방 안에서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방은 전 여자친구의 방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테이블, 책상과 공간박스. 다른 점은 놓여있는 물건들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답게 그림도구들과 종이들, 이미지 위주의 책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더우시죠?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쥬스라도 드릴까요?”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담배 냄새와 땀 냄새를 풍기는 남자를 불청객으로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코스터를 꺼내 내 앞과 자신의 앞에 놓았을 때, 다시금 녹색 실의 코스터가 떠올랐다. 그녀가 놓은 코스터는 하얀 레이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 여자친구의 코스터와 비교했을 때, 무더운 날씨와 훨씬 더 잘 어울렸다. 그녀가 플라스틱 컵에 오렌지 쥬스를 따라주는 사이에 멍하니 코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에 들어오기 전,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뭔가를 암시해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포트폴리오를 꺼내와 앉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자주 웃었다. 조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인터뷰이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궁금했고, 때문의 그녀의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녀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 외에 브로치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며
각양각색의 브로치들을 꺼내와 보여주었다.
“혹시 브로치 관심 있으세요? 관심 있으시면 하나 드릴게요. 근데 남자
분이시라…….”
나는 얼른 관심이 있다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브로치들 중 녹색을 골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왠지 녹색이 어울리실 것 같아요. 가방 같은 데 다는 것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녹색. 메로나부터 시작해서 전 여자친구의 코스터와 브로치까지. ‘그린 라이트’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자 무더위 속에서 왜 그토록 고생을 해야만 했는지 쉽게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녀와 인연이란 확신이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옥탑방을 나서며 그녀에게 내 호감을 전하고 싶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작 건넨다는 말이,
“혹시 담배 피우세요?”
였다. 그러자 그녀는
“네. 같이 피우실래요? 얼마 전에 친구가 미국에 갔다가 사다준 담배가 있는데요. 진짜 맛있어요. ‘뉴포트’라고요. 잠시만요.”
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담배를 들고 나왔다. 생각지 못한 좋은 반응이었다.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들고 나온 ‘뉴포트’ 담뱃갑의 색깔이 더욱더 확신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녹색이었던 것이다. 담배는 그녀의 말대로 맛이 있었다. 멘솔이었는데 독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담배를 다 피워갈 때쯤 용기를 내어 입을 뗐다.
“혹시 오늘 약속 있으신가요? 괜찮으시면 저랑 맥주나 한 잔 하실래요?”
“네? 그럼 좋긴 한데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그럼 다음에 한 번 같이 드실래요?”
“그럼 좋죠. 근데 기자님 여자친구 있으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가방에 달아놓은 브로치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다. 카페든 술집이든 코스터를 사용할 때에도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면 지나간 일이니 그냥 웃고 만다. 정말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세상 일 중에 마음대로 되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다.
건축이 좋아. #11. 따뜻함과 야성미.
aoikasa
Itami Jun, 유동룡 10여년 전이었다. 건축가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이 내게 각인된 것은…
이타미 준이라는 건축가를 그저 '재일교포건축가'라는 것과 스케치가 멋지다라는 정도 밖에 몰랐던 건 축과를 갓 졸업한 대학원 1년차에게, 남태령 전원마을에 위치한 '각인의 탑'의 방문은 이 건축가가 그저 그렇게 흘려 보내서는 안 될 거라는, 그리하여 그의 이름 석자를 머리 속에 ‘각인’시킬 수 밖에 없는 느낌 을 남겼다.
좀 더 개인적인 측면에선, 당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바로 그 건물에 위치한 건축설계사무실에 다 니며 잦은 야근을 했었고 (그래서 종종 놀러 갔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그에 대 한 학위논문을 썼으니 어찌 보면 건축적인 입장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는 것 이상으로 개인사적으 로도 자연스레 그에 대한 관심은 이어져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각인의 탑’ 다시, '각인의 탑'으로 돌아가면...
'각인의 탑'은 어쩐지 신기한 건물이었다. 당시의 건축계 유행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있기도 했고, 무언가 어두침침하면서도 비를 머금은 듯한 느낌 이 있었다. 그 곳에 간 게 주로 늦은 시간이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여름에도 서늘한 느낌이 들었고 내부는 그저 고 요하기만 했다. 마당의 석물들은 무언가 말을 하고프면서도 말을 머금고 있는 듯한 기분이기도 했고.... 아무튼 그 마당에선 토토로나 작은 정령이라도 곧 튀어나올 거 같 기분이었다. 전원마을이라는 특성상 도심과는 떨어진 지역이기도 했지만 그 느낌은 그 동네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무언가 그 주변은 모두 뿌연 안개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치 포토샵서 blur처리한 것처럼) 그 건물만 독특한 아우라를 내뿜는 것이었다.
이 것이 일본의 전통미라는 '음예' 1 라는 것일까... 라고 당시 책에서 본 것을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역시 그는 재일교포건축가이기에 일본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일까 하는 그런 생각. 그래도 뭔가 매우 정교 하고 세련된 일본 건축가들과는 다른, 좀 더 투박하면서도 거친 느낌 그러면서도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의 그의 건축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훌쩍 지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몇 년 전, 그의 타계후 그의 스케치들을 모아 만든 전시. 건축가 정기용 선생님의 스케치들을 모아 전시한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두번째 건축 아카이 브 전시였다.
그리고 난 그 곳에서 십수년 전 그 때 내가 '각인의 탑'에서 느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 다. 그 것은 바로, 현대 건축에서는 찾기 어려워진, 그러나 이타미 준 건축의 영원한 테마였던 '야성미' 그리고 따스함'이었 다.
(그림1.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 벽면의 글)
1 (음예陰翳란 일본의 옛 것에서 느껴지는 어두움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완전한 어두움은 아니지
만 손때묻은 느낌의 어두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그늘이나 그림자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
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책을 통해 그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무언가 일본의 전통적인 공간들, 그러니까 신사나 사찰, 주택 같은 데에서 정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느 낌은 느낄 수 있었던 거 같다.)
‘이타미 준’에게 한국이란…. 재일교포 친구들이 몇 명 있다. 그들에게 ‘한국’은 꽤나 어렵고도 무거웠던 주제였던 거 같다. 자발적으 로 이민을 간 재미교포들과는 또 다른 상황의 그들. 식민지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그 곳에 눌러 앉았 던 이들. ‘자이니치’라 불리는 그들의 이야기는 아마 축구 선수 ‘정대세’나 ‘이충성’ 그리고 GO의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 등을 통해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는 듯도 하다. ‘자이니치’들은 지금은 조금 덜하여진 듯 하지만 오랜 시간 많은 차별을 받았고,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조총련계 학교를 다니거나 아니면 한 국 국적을 새롭게 받아서 국제 학교나 일본 학교를 다니거나, 그 것도 아니면 일본으로 귀화하여 ‘일본 인’으로 살아가는 세 가지 유형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 같다. 일본학교를 다닌 내 친구들의 경우에는 대 부분 꽤 나이가 들 때까지 자신들이 자이니치임을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국적이 일본이 아닌 한국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한국어도 할 줄 모르고 한국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다는 사실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한 이유에서였는지 그들은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한국어 공부를 하고 한국에 대해 배워 갔다. (물론 이 건 아주 소수의 내 친구들 의 이야기이다.)
아무튼 재일교포건축가 ‘이타미준, 유동룡’에게도 한국은 궁금한 나라였던 것 같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전통미에 관심을 가지고 민예품을 모았고,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연구를 하고 책을 썼다. 그의 친구 중에는 역시 재일교포인 화가 ‘이우환’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한국’을 찾고 연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같은 시기 다른 한국인 건축가들의 접근과는 달랐다. 1960년대 말 이후 한국적 조형, 한 국적 공간을 찾는 데에 열심이었던 한국 건축계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는 좀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였 던 것 같다. 그는 오히려 한국 땅이 가진 것들, 돌과 나무 같은 재료, 바람과 물 같은 자연 요소에 집중 하였다. 그 것은 그의 제주도 프로젝트들에서 잘 나타난다. 조형이나 공간적인 것이 아닌 ‘풍토적’인 한 국성에 대한 그의 탐닉이랄까…
전시회 초입에는 건축가 이타미 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양한 인터뷰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 중 전봉희 교수 님의 이타미 준에 대한 평이 인상적이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건축은 민족적 특수성에서 벗어나 탈민족적 보 편성을 획득하였다.’
(그림2.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 벽면의 글)
‘물, 바람 , 돌… 그리고 제주도’ 제주도에는 미술관도 많고 박물관도 많다. 대체 왜 제주도에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아프리카 박물관’ 이며 ‘헬로키티 박물관’이며 ‘유리박물관’…. 수도 없이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제주도의 아름 다운 풍광을 다 잠식해버린 듯 한 기분조차 든다. (제주도 같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는 곳에는 박물 관, 미술관 허가 내는 것도 좀 더 신중했으면 하는 바램…)
유독 제주도를 갈 기회가 없었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곳인데 유독 떠날 수 없었 던 곳이 제주도이다. 아무튼 지난 7월 초. 제주도에 갈 기회가 생겼다. 나는 마음 속으로 제주도라면 ‘이 곳은 반드시’를 외치며 제주도로 떠났다. 그런데 하필 비가 많이 왔고 태풍 너구리도 왔다. 덕분에 걸어 서는 이동이 어려운 ‘이 곳, 즉 물, 바람, 돌 미술관’은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가고팠던 그 곳 ‘물 미술관’ ‘바람 미술관’ ‘돌 미술관’은 핀크스 비오토피아 안에 위치 한 미술관들이다. 이 미술관들은 사실상 사유지에 속하는 비오토피아 안에 있기 때문에 일반 입장은 불 가능하다. 그러나 들어가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 것은 바로… 비오토피아 안의 레스토랑 에서 식사를 하면 되는 것이다. 가격은 다소 비싸지만 그래도 꽤나 맛있다니까.. 그리고 미술관 관람료 는 무료이니까, 일단 식사를 예약하고 이 곳에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림3.제주도의 물미술관, 바람미술관, 돌미술관)
왜 하필 이타미 준은 이 곳에 미술관을 만들면서 ‘물’ ‘바람’ ‘돌’을 그 주제로 택했을까. 그 것은 아마도 그에게 제주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바로 ‘물’ ‘바람’ ‘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듯 이 곳 에서 건축은 그저 매개체일 뿐이다. 물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돌을 느끼는…. 그리고 그 곳에서 물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돌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제주도 그 자체일 것이다. 그 지역의 재료, 그 지역의 바
람, 그 지역의 소리가 모두 담겨 만들어낸 ‘제주도’ 그 자체의 현현(顯現)일 것이다.
전시장 끝에는 이 세 공간에서 제작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또 다른 물, 바람, 돌> 제 1부. 인간과 건 축, 제 2부. 자연과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두 편의 영상이 상영된다. 고요히 앉아 영상을 바라보다 보니 이타미 준의 건물이 매개체가 되어 인간과 그리고 자연을 연결지음이 느껴진다. 노인과 아이, 햇살과 비 바람, 그 가운데 있는 건축.
언젠가 보슬비가 내리는 날, 저 곳을 찾아보리라. 다짐해 본다. 아주 고요히 그 안에 담겨 제주를 그저 느껴보리라. 생각해본다.
(그림4. 전시회 영상 <또 다른 물, 바람, 돌> 중에서: 감독 정다운, 제작 김종신)
p.s. 7월 27일까지라 했던 전시는 8월 31일까지 연장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정기용 아카이브에 이어 하는 두 번째 건축 아카이브 전시회이다. 건축가의 아카이브 전시는 완성된 건축물만 보여주는 것 이 아니라 그가 그 건축물들을 만들어내기까지 고민했었던 모든 흔적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 다. 메모장에 한 낙서들, 거친 스케치들, 생각을 적은 글들, 건축가의 작업 공간까지…. 과정이 아닌 결 과만을 보는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이렇게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낯설지는 모르겠으나 그 ‘과정’을 함께 따라 가 보며 이타미 준의 건축을 느껴 볼 기회가 1달여 남았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http://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menuId=1010000000&exhId=20130 3140002903)
(그림5. 건축가의 아뜰리에 옆에 놓여있던 박스 하나. 저 안에 담긴 수없이 많은 스터디 모형들은 곧 그의 건축의 시간이자 역사일터.)
여러분은 가고 싶은 나라가 있는가? 앞으로 갈 나라?아님 다녀온 나라,맘속에 호감을 갖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어떤나라에 대한 생각 동경 방문에는 다들 각각의 이유가 존재할것이다 아님 우리나라도 볼 게 얼마나 많은데 외국은 개뿔이라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암튼 나는 프랑스다. 왜 프랑스일까?프랑스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왜 프랑스인가?나폴레옹?샹송?영화?와인? 혁명?에펠탑?모네?고흐?지단 or 앙리? 암튼 다양할것이다 이런 이유말고 프랑스는 고등 학교때 짝사랑했던 제2외국어 선생님을 생각나게 하는 나라이다 내가 제2외국어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독어와 불어 두가지의 제2외국어중 남자 독어선생님 여자 불어선생님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일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어선생님의 미모에 빠져 봉주르 봉슈아 꼬 망딸레쥬 꼼시꼼사 열심히 공부를 한다 이러다가 나도 불어선생님이 되는거아냐라고 생각 을 하게된다. 하지만 그 살짝꿨던 꿈은 선생님의 결혼... 사직으로 무참히 깨지고 만다. 독어로 갈아탈까하 다가 그렇게까지 하는건 불어선생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싶어 그냥 불어라는 과목은 유 지한채 불어를 그냥 놓아버렸다. 그렇게 내 맘속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프랑스는 다녀 온적도 없고 앞으로 갈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먼훗날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다가도 행 여 프랑스와인이라도 마시게 되는 날에는 나 제2외국어 불어야라며 의미없는 말을 던지기 도하고 축구를 보다가 프랑스가 잘하기라도하면 아...나 제2외국어 불어였지라며 혼자 중얼 거리기도 프랑스영화가 개봉을 하면 제2외국어 불어인 나는 다른사람들은 몰라도 봐줘야지 라며 사랑이 뭔지도 모를 10대시절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프랑스영화 베티블루37.2도를 보 며 베티의 충격적인 죽음에 감독을 욕하기도 하고, 여신 트로이카 소피마르소 피비켓츠 브 룩쉴즈중에 소피마르소의 책받침만을 고집하기도 하고 밑도 끝도없는 차범근 독일 사랑도 아닌 프랑스앓이를 프랑스도 안가본 주제에 하곤했다. 그러면서 플라티니 지단 앙리 축구 선수들도 알고 와인도 마셔보고 유학갔다온 친구들에게 귀동냥을 가끔하고 나만 느끼는 프 랑스는 누군가에게 프랑스는 이런나라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말로 정형화할수없는 뭔가가 있긴 있는거 같기도하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스국적으로 추정되는 여성 세명이 가게에 왔다 왠지 고향친구들이 온거 같았다 불어 메뉴판을 준비 안한 내불찰을 탓한다 프랑스식 가정식안주를 검색하고 싶었 다 다행이 그중 한국사람이 있었다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본 그들은 생맥 세잔을 시켜먹었 다 안주는 공기밥 셋이서 오손도손 공기밥에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또다른 나만의 프랑 스를 알아간다
e~ c n a r yF M h O
부 산 오 뎅 이 야 기
국가란 무엇일까? (8회)
나는 자전거 한 대를 갖고 있다. 내 소유 재산이래 봐야 기껏 해야, 노트북 컴퓨터나 이어폰, 데스트탑 모니터 녹슨 전자 기타 정도 인데, 대부분 전기가 없으면 못쓰는 것들 뿐이니 전쟁이 나면 들고 도망갈 재산이란 것은 자전거 뿐 인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좋은 것은 아니고 중고로 팔아봐야 10만원 내외의 물건이다. (수리비가 벌써 10만원이 넘기는 했다.) 문득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재산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진다. 이런 변방의 소규모 잡지를 읽는 독자라면 아마 많아야 10억 내외의 재산을 갖고 있지 않을까? 이것도 독자가 많다는 가정을 하고 그 중에서 최대한 잡지를 읽는 층이 다양하고 부유하다는 희망을 적용해서 쓴 돈이다. 그래봐야 10억이다. 물론 10억이 작은 돈은 아니다. 돈 100만원이 없어서 죽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100억을 가진 사람도 부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는 세상이니 10억 정도는 쉽게 말해도 좋지 않을까? 자꾸 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니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대포는 어떨까? 여러분의 동네의 누군가가 집에 대포가 있다면 어떨까? 화약도 있고 대포알도 있어서 언제든 쏠 수 있다. 대포가 아니라 폭탄이라면? 어떨까? 아마 그럼 여러분들은 그 꼴은 절대로 볼 수 없고, 그런건 안된다고 항의할 것이다. 저것을 치우라고 말하고 항의 하다가 신고도 하고 할 것이다 그리고 경찰들도 와서 돕겠지. 그렇다면 왜 안 되는 것일까? 위험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해로움이나 손실이 생길 우려가 있다.’ 는 말인데, 반대로 이야기 하면 통제가 어려운 큰 힘이란 말이기도 하다. 방의 의자 모서리와 달리 날아다니는 모기처럼 통제가 되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은 위험하다. 위의 사례라면 단순히 위험물로부터 떨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의 힘의 균형이 지나치게 틀어져서 위험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자 그럼 이번에는 무기 말고 다른 힘은 어떨까?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 유순한 듯 하니 예를 들면 ‘돈’ 같은 것이 좋겠다. 욕망의 아이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원하고 돈을 좋아한다. 그래서 인지 현대사회에서는 돈이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뭐 개와 고양이가 주인인 세상이라면 돈이 그다지 쓸모 없을 것 같지만 요즘은 어딜가나 인간 투성이니 이런 말 자체가 시간낭비이다. 돈으로는 무슨 짓들을 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막걸리 사주고 표도 사고 몸이 위험하면 보디가드도 고용하고 여차하면 흥신소 등을 이용해 폭력도 구입할 수 있다. 돈만 있으면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책을 낼 수도 있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사다가 재미삼아 낙서를 해 볼 수도 있다. 제정신 박힌 소리는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상황과 환경 안에서 많은 것들이 돈을 매개로 거래된다는 것이다. 물론 행복이나 시간 같은 것을 살 수는 없다. 행복을 살 수는 없다지만 즐겁게 영화를 볼 수는 있다. 재롱부릴 재주꾼을 구할 수도 있고, 시간은 살 수는 없어도 일을 한다면 시간을 절약해 줄 일꾼을 고용할 수는 있다.
그럼 돈은 힘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만약 돈에 힘이 있는 것이라면 그 힘은 한계가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내가 만약 하나의 거인이라면 나는 견제 당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맘씨 좋게 친절을 배풀고 풀이나 뜯어멱으며 살아도 그저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로 나는 견제 당할 것이다. 도로위의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고 해도 외출 시간에 제약이 생길 것이고 힘이 붙어서 사람들을 더 괴롭히거나 혹은 위험하게 할 수 도 있다고 먹는 것도 강제로 조절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몸에 열이 많아서 도심의 온도가 올라간다고 도시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르고 산에라도 갈라치면 나무들이 다친다고 뭐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견제하고 비난할 것이고 의견이 모인다면 분명 나는 법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당할 확률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거인인 나는 하나의 몸일 뿐이다. 큰 코끼리 몇 마리가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정도의 해악일 것이다. 하지만 악한 마음을 갖고 돈을 무한정으로 모으려 드는 부자라면 어떨까?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돈을 쓰고 사람들이 자립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착취를 거듭해 나간다면? 이건 거인 하나가 전신주 부러뜨리는 수준의 훼방이 아닐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돈에는 분명 힘이 있다. 이미지 나 단어상으로 힘이 없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것은 힘이 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이 돈의 총량을 무한하게 흡수하는 것은 문제가 될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늘 부자는 좋은 것이라거나 부러운 것이라거나 긍정적인 방향인 것처럼 이야기 해왔지만. 부의 재분배 같은 삶의 격차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총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무제한적인 자본의 축적은 일정부분 견제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 정도가 위에 적어놓은 5억 10억 이런 수준은 아닐 것이다. 사람마다 크게 생각하는 금액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와닿지 않는 얼마의 금액이 될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500억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5천억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1조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한을 한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 구경도 못해보는 총량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미 갖고 있기도 하다. 당장 서울 시장 후보로 나섰던 이웃집 몽준형만 봐도 2조가 넘는 재산을 갖고 있지 않던가. 자 그럼 여러분은 얼마정도라면 수긍할 수 있을까? 재미삼아 생각해보자. 더운데 이런거라도 해야하지 않겠나.
글. exxx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4.8.31 http://cafe.daum.net/badabie
월간이리에서 필진을 구합니다. 글솜씨가 남달라서 도저히 감출수 없다거나 이 말만큼은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릴것 같다거나 세상에 요래 재미있는게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아쉽네 하는 등등 의학, 무속, 물리학, 지구과학, 철학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기로 유명하오니 언제든지 트위터 @postyri 나 이메일 exxx2x@gmail.com 으로 문의 주시면 친절 답변 드립니다. 월간이리의 역사가 되어보세요. 후훗~
그림. 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