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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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2014 11 #47


순서 입니다. 비밀 동툰 / 글. 그림. beamil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글. 사진. 아홉시 영화로 읽는 시공간 - 영화제이야기 / 글. 곡주대비 한국영화 돌려 깎기 - 사이비 / 글. 최지원, 곡주대비, exxx 팟캐스트 ‘이리오너라’ 광고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박완서 「나목」 / 글. 고수진 작곡가 B의 노트 - 주체적 음악듣기의 딜레마 / 글. Composer B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전부 / 글. 박재현 기록에 대한 기록 - 아카이브에 든, 아카이브가 남긴 보라빛 멍 / 글. 박이현 낭만 스파이 - 이렇게 살고 싶소 / 글. 사진. 낭만스파이 idology’s pick - 떠나가는 아이돌들, 레드벨벳 건축이 좋아 - 베니스의 고요한 정원,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 사진. 글. aoikasa 놀고 먹고 그리고 / 그림. 김혜리 웹디자이너의 생존 매뉴얼 - 생존 매뉴얼의 끝 / 글. 김성연 바다비 일요 시극장 광고 게임 노동 일지 / 그림. 글. 철민 물질과 비물질 - 나비 / 사진. 황은정 글. 김종소리 부산오뎅 이야기 - 잘못된 만남 / 글. 사진. odeng 국가란 무엇일까? - 11회 / 글. exxx


얼마전 멍때리기 대회가 있었죠. 쉰다는 건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뭔가를 바쁘게 준비하다가 쉰다고 게임을 하면서 머리를 한껏 돌리면 이건 쉬는 건가 안쉬는 건 가 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여러분 쉬십시오. 게임 같은 거 말고, 잠 말고, 눈뜨고 멍때리거나, 산책을 하시거 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등등 아무 생각 안하면서 최대한 쉬시길 바랍니다. 인문 예술 멀티 교양지 월간이리 따위는 던져두시고 쉬십시오. 농가에서는 서서히 추수가 끝이나고 겨울 잠바를 꺼내입는 날씨입니다. 12월이 되 면 정신이 없을 테니 올 한해 연락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미리 연락해서 인사도 나 누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는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월간이리 연재문의 는 exxx2x@gmail.com 이나 @postyri 로 문의주시면 됩니다. 친절 안내 보장합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편집: 이훈보 표지: 이주용 주관: 프로젝트 이리 지원: 서울특별시,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공식트위터 @postyri


비 밀 동물툰 Animal Toon by BEAMIL

* 매번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만 전하는 것 같아 이 달엔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해봤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 안 가져도 할 말 없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하하 저는 사실 취미가 티비보기 라고도 할 수 있는 잉여인간이라서 각종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편입니다. 그런 즈음 신선한 변화를 느낄 수 있겠더 라구요. 그것은 바로 동물농장을 보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티비 프로그램 속 동물들인데요, 그 시작은 JTBC 뉴스9에서였습니다. 내용은 정의 를 실현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타계 소식이었습니다. 경건하게 보고 있던 와중에 우측 하단에서 낙엽보다 큰 어 떤 물체가 당당히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름 아닌 고양이! 예능에서는 종종 출현했으나 괴리감이 없어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르지만, 검은 배경의 황망한 화면에서 만난 하얀 고양이는 충격 그 자체였습 니다. 검은 배경에 하얀 고양이... 위대한 사람의 타계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동물이 나타나니 오버 좀 더해서 평화의 상징이자 고인이 된 만델 라가 보낸 녀석인가 싶기도 ㅎㅎ .. 뭐 다 차치하고, 뉴스화면에 고양이가 등장할 위기에도 스탭의 저지가 없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죠. 그 이후로 지켜보다보니 이젠 아예 리얼 버라이어티 속 동물의 등장은 히든카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SBS 예능 룸메이트에서도 시즌1, 2 를 거쳐 강아지가 출연하고, JTBC 삼시세끼에서도 밍키라는 마스코트를 등장시킵니다. 특히나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요물이라는 인식이 강 했던 고양이의 잦은 등장은 저의 기분을 둥둥 뜨게 합니다. 삼시세끼 속 아무도 관심을 안 줘 배경이 되어버린 고양이나, 1박 2일 속 개그맨 김 준호씨의 야외취침을 방해하던 고양이나 모두모두 좋습니다. 부디 이런 변화가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10월 27일. 마음 따뜻했던 마왕 신해철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도 고양이를 무척 사랑했다고 하더군요. 먼저 떠나보냈던 반려묘 돌 비와 만나서 인사나누고 있을까요. 기대했던 마왕의 복귀 프로그램 첫 방송을 앞두고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어요. 아쉬운 마음에 고인이 된 신해철님도 그려넣어봤어요. 독설 뒤에 숨겨진 그의 진심을 좋아했습니다. 부디 그 곳에서도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힘써주세요. * 2014년에는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나름 위트있게, 뜨끔하게 쓰고 그린 짧은 만화를 기고합니다. 팩트를 뒷받침하는 기사와 간단한 의견도 함께입니다. 많이 공감해주세요. 제보도 감사합니다. twitter@ / _beamilie


TV 프로그램 속 동물들 TVN 삼시세끼

KBS2 1박2일

JTBC 뉴스9




영화로 보는 시공간 : 영화제 이야기

이 번호 에서는 과거 필자가 참여했던 영화제에 관한 잔상들을 늘어놓아 볼까 한다. 필자와 영화제의 첫 인연은 시네마테크에 계시는 김성욱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회고전 에서 통역으로 참 여하면서 였다. 회고전을 시점으로 서울 디지털 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의 ‘하녀’ 디지털 복원작을 소개하 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크고 작은 영화제를 자비로 가기도 하고, 일을 맡아 가기도 했다. 사실 영화제는 ‘축제’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제 에서 보는 영화들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 구나 그렇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적게는 두 편 많게는 네 다섯 편의 영화를 봐야 하고, 그러므로 끼니는 대 충 김밥 같은 것으로 때우거나 (전주 영화제에 가니까 전주 맛집 투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은 망상이란 얘기다) 중간에 잠이 들것을 염려해 사실상 굶을 때가 더 많다. 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숙소에 가기 전 술을 진탕 마시는 호사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다음날 영화를 보는데 반드시 여파가 있으므로 봐 야하는 영화의 경중을 잘 따져 조절 할 일이다. 물론 주옥 같은 영화들을 본 다는 ‘대의’가 있으므로 끼니 따위는 간단히 무시해버려도 될 일이다. 그렇다 해도, 하루에 보는 영화가 세 편이 넘어갈 경우 잠이 들 즈음이 되면 360분 짜리 한 영화가 되 버리기 일쑤 라 결국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봐야 할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영화제라는 것은 이 삼일 여간의 고된 노가다 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영화제 예매 싸이트가 열 리기 시작하면 시놉을 정독 하고, 신체리듬과 영화 장르를 고려하여 스케줄을 짜고 (가령 잠이 쏟아지는 오후 타임에는 코메디나 호러), 미리 누가 영화제에 가는지 파악하여 어느 술자리에 참여할 것인지 꼼꼼히 채워 놓는 준비를 하는 등은 나의 ‘내제된’ 근면함을 발휘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 이다. 시덥 잖은 필자의 생일 맞이로 부산 국제 영화제는 놓쳤지만 올해 참여했던 두 개의 영화제, 1. Ebert Film Festival (Champaign, IL , USA, 매년 4월경)1) 2.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 (매년 8월경) 는 위에 나열한 즐거 움 (과 고생)을 모두 만끽했던 영화 축제였다. 특히 영화제의 창시자인 로저 에버트의 안타까운 사망은 평소 보다 훨씬 더 많은 관객과 배우들을 미국 촌구석 샴페인 까지 불러모아 그가 영화계에 기여한 무수 한 업적들을 회고 할 수 있게 했고, 다른 주류 영화제들 보다는 작은 영화제지만 제천 음악영화제는 음악 영화라는 장르적인 제한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편수를 걸어 나를 포함한 많은 서울 토박이들을 한 달음 에 달려가게 했다. 올해가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 기대 할 만한 영화제가 남아있다. 11월 27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리는 서울 독립영화제가 그것인데, 필자가 참여해 보지 않은 영화제라 기대하고 있는 행사다. 영화제

1) 미국의 저명한 영화 평론가 Roger Ebert 가 만든 영화제로 그가 학위를 받은 일리노이 대학교 인근에서 매년 봄에 열린다. 오랜 투병을 해왔던 그는 올해 영화제 직전에 사망하였고 그래서 더더욱 많은 관객들이 몰리기도 했다.


가 서울에서 열리니 버스표나 기차표를 예매할 필요도 없고, 단편 영화제니 두세 편씩 연달아 보다가 궁 뎅이에 쥐가 날일도 없다. 뭐, 남다른 시네필 (cinephile) 이 아니더라도 극장에서 초겨울을 맞는 감성놀이 한번 쯤은 본인의 문화적 이력 (cultural resume) 을 위해서도 꽤 생산적인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을 맺기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영화제 에티켓 몇 가지 쏟아놓고 갈란다. (C모 영화관에서 금호타이어 요정이 읊어주는 ‘그것’과는 다르다). 1. 영화제 상영시간은 반드시 지킨다: 대부분 영화제에서는 상영시간이 시작되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 다. 중간에 나가는 일도 대부분 금하고 있다. 2. 절대로 음식을 들고 들어가지 않는다: 심도 있는 관람을 목적으로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음식의 소리가 나든 안 나고, 냄새가 나던 나지 않고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food-free 상태로 들어간다. 3. (이 조항은 필자가 특히 좋아하고 엄중하게 지키는 조항이다, 이 때문에 영화제에 간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것이다) 영화제에서는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반드시 엔드 크레딧 까지 자리를 지키고 (불도 켜지 지 않는다) 마지막 필름 스탬프가 올라오면 박수를 친다. 이 박수는 영화를 만드는데 참여한 모든 아 티스트들과 스탭들에 대한 고마움과 경외심의 표현이다. 특히 좋은 영화 한편을 보고 박수를 칠 때의 전율이란 며칠째 계속 되는 배고픔과 숙취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것의 기쁨이고 축복이다.

글. 곡주대비


최지원:

곡주대비 (hjkanjy@gmail.com) :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함을 느꼈던 장면에 대해

전체적으로 볼 때 사이비는 호평을 받기에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장면은 목사가 쓴 거짓 편지를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다만 필자가 이

들으며 민철이 오열을 하는 장면이다. 목사는 민철의 딸이

영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칭찬하지 않고,

쓴 편지라고 말했지만, 민철은 금세 거짓말이라는 것을

“호평에 ‘무리가 없는,’”

알아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철은 울고 만다.

표현으로 여지를 남겨두는 이유는 영화가

식의 완곡한

갖는 몇 가지 불편한 설정들 때문이다. 사실

민철은

영화에서

누구보다도

악한

인물로

이번호 돌려깎기에서의 필자의 역할은

그려진다. 그는 전혀 가정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설정들을 나열하는 것 뿐이다. 동의의

딸이 대학등록금으로 모아둔 돈마저도 몽땅 도박으로

여부는 독자들에게 맡긴다.

탕진해버리는 인물이다. 심지어 그는 딸이 돈을 돌려달라며 사정할 때에도 오히려 폭력으로 대응한다. 몇몇 장면들을

‘사이비’의 불편한 설정 1:

통해서 민철이 어떠한 인물인지 알게 되기 때문에, 민철의

사이비의 시간 적 설정은 정확히 언급되지

눈물이 의아할 수밖에 없다.

않지만 현대임은 분명하다. 등장하는 소품들, 예) 슈퍼마켓에 놓여진 상품들,

그렇다면 민철은 왜 우는 것일까? 편지의 내용을 듣는 순간

거리에

잠시 동요한 것일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는

개봉했던 2013년 에서 떨어 지지 않은 근

것일까? 그렇다면 민철은 좋은 아버지로 변화할 수 있는

과거나 현재 임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걸려있는

상호들은

것일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싸늘한 딸의 시체일 뿐이다. 민철은 그 앞에서조차도 그놈들이 가짜였다고, 자신의 말이 맞았다며 소리를 지를 뿐이다. 민철의 말대로 사기꾼이었던 최 장로는 살해되었고, 괴물이 되어버린 목사 또한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마을에서 가장 악인이었던 그가 사이비 종교의 진실을 밝히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 듯하지만, 아직 마지막 장면이 남아 있다. 줄곧 사이비를 의심하고 부정했던 그는 동굴에 들어가 자신이 만들어놓은 제단 앞에서 주문을 외우듯 기도를 한다. 이 장면을 보고 나니 앞에서 의아함을 가졌던 장면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민철은 마을에서 가장 악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나약함을 가진 인간이었음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영화는 ‘사이비 종교’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소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거짓임을 알면서도, ‘왜’ 맹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은 결코 결말이 아니다. 우리는 극장을 나왔지만, 영화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사이

영화가


이러한 시간적인 배경이 중요한 이유는 등장인물들, 즉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되는 희생자들이 다소 억지스러울 정도로 현실 혹은 현세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사기꾼 장로가 도시에서 배우들을 사서 가짜 앉은뱅이 역할을 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블랙딜’ 은 버젓이 읍내 한 복판에 있는 술집에서 이루어 진다. 이러한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어째서 거대 사기모의가, 모두가 모두를 아는 작은 마을 한 복판의 술집에서 이루어 질 수가 있다는 말인가. 또한 이를 지켜 보던 주인공 (김민철)이나 혹은 그의 지인들 (마을 사람들, 교회 관계자들) 그 누구도 핸드폰이나 기타 통신수단을 쓰지 않는데 (2000년대에!), 이러한 비현실 적인 설정이 필요했던 것은 그런 의사소통 수단의 부재가 김민철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사이비의 정체) 정보가 은폐되고 따라서 범인의 악행이 지속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사이비’의 불편한 설정 2: 영화에서는 세가지 부류의 악인이 나오는데 1) 대놓고 나쁜놈인 사기꾼 장로 2) 선한 인물이었다가 악인으로 돌변해 살인까지 사주하게 되는 목사 3) 밤낮으로 가정폭력과 도박을 일삼는 주인공, 김민철. 영화는 3번이 1,2번의 악행을 고발하고 처단함으로서 사실상 이 영화의 영웅으로 삼고자 하는 뉘앙스를 보이는데 이는 1,2 번의 악행은 용서할 수 없지만 대의를 이룬 3번의 악행은 용인될 수 있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상대적인 악 ( 명분이 있는 악; 즉 2번이 저지르는 악행) 도 용인돼서는 안 되는 종교의 악행을 고발하는 영화라면 1,2,와 3에게 적용되는 도덕적인 논리가 같아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 돌려 깎기


exxx

지의 왕>을 먼저 보다가 <사이비>란 작품을 놓치는 실 수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게되는 이유에는 시장의 기대와 찬사 그리고 홍보로 인한 노출 등으로 인해 등 떠밀리는 경우도 있지

ps. (스포일러)

만 어떤 영화는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호기심을 끄는 영

주인공이 늙은 후에 마주하는 대상은 화면에 드러나지

화가 있다.

않는다. 멋대로 해석하는일이 없도록 하자.

흥미롭게도 같은 감독의 전작인 <돼지의 왕>을 전자의 이유로 봤다면 <사이비>는 후자의 이유로 본 경우이다. 작화가 변해서 그런 것도 있고 같은 감독이 다루는 재료 가 더 흥미로웠던 것 이유도 있다. 그런 이유로 보았고 충분히 감탄하면서 본 작품이었다. 누군가는 <사이비>가 기독교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가만 뜯어보면 기독교 영화라기보다 사람의 ‘인지’와 ‘믿음’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다만 일 어날 법한, 혹은 일어났었던 사건의 형태를 차용한 정도 의 문제 때문에 기독교 라는 함정에 빠져 헛갈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높게 평가하고 이렇게 억지로 고 르기 까지 한 이유는 연상호 감독의 활동이 한국에서 애 니메이션 작업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전작인 <돼지의 왕>이야기를 하자면, 솔직 히 그 작품은 평가보다 아쉬움이 큰 작품이었다. 나쁘다 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추천하기가 쉽지 않은 작 품이었다. 혼자는 그럭저럭 본다 해도 상대방에게 추천 할 수 있는 포인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래서 더더욱 <사이비>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감독은 단숨에 그 단계를 훌쩍 넘어버린 작품을 내놓았다.어찌 찬양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역으로, <사이비> 상류의 것, 감독이 끓는 점 앞 에 서있던 <돼지의 왕>을 추천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하나의 완성도를 즐기는 재미도 있겠지만 하나의 완성 도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읽는 것도 예술의 재미가 아니 던가. 하지만, 반드시 <사이비>를 먼저 보기를 부탁한다. <돼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박완서, 「나목」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빠져들 듯이 풍선이 멀어져 간다.

피부에 닿는 가을은 참 짧다. 나무들은 이제 가을인데 내 옷은 벌써 겨울에 가깝다. 후~ 입김

이 벌써 공중에 하얗게 흩어진다. 수족냉증인 나에게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계절이 오고 있 다. 으으으.

이번호에서는 박완서의 「나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목」은 그녀의 대표작이며 많은 분

들이 읽었을 것으로 안다. 이 소설은 실제 작가의 삶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작가는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빠와 삼촌이 죽자 생계 를 잇기 위해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했으며, 이때 화가 ‘박수근’을 알고 그의 그림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그림 ‘나무와 여인’은 이 소설의 창작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읽고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분인데 개인적으로 필자

는 이 분의 소설을 약간, 유난스럽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렇게 느껴져서 즐겨 읽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나목」은 좋아하고, 「월간이리」 독자들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었다. 작품 전반

에 흐르는 쓸쓸함과 그 쓸쓸함의 원인은 점점 멀어지는 젊은 날의 꿈, 이상향 그리고 결코 해결 되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함께 생각하고 느껴보고 싶다.

이 작품은 6.25전쟁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황폐했던 주인공 ‘이경’이 등장한다. 그녀가 가진

내면의 상처를 바탕으로 차츰 치유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다. 먼저 줄 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 ‘이경’은 6. 25전쟁의 폭격으로 두 오빠를 잃었다. 그리고 그 폭격의 흔적이 아직

도 남아 있는 서울의 고가(古家)에서 홀어머니와 살고 있다. 암울한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이경’은 미군 부대 PX에 있는 초상화부에서 미군들로부터 초상화 주문을

받아 내는 일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옥희도’라는 남자를 만난다. 황량한 눈을 가진 ‘옥 희도’에게 마음이 끌린다. ‘이경’은 ‘옥희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옥희도’는 자신들이

서로 어울리는 사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옥희도’는 진짜 화가가 되고 싶다고 미치도록 그 리고 싶다고 말하고 며칠 동안 초상화부에 나오지 않는다. ‘이경’은 ‘옥희도’가 걱정되어 그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거기서 그림을 하나 보는데, 무채색의 불투명한 참담한 모습의 나무 그림이었다. 그것을 본 ‘이경’은 ‘고목’을 생각한다.


‘이경’은 얼마 후 자신에게 현실적이고 평범한 남자인 ‘황태수’와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

이경’과 ‘태수’는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이경은 ‘고(故) 옥희도’ 유작전이 열린 기사를 읽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낀다. 남편과 함께 유작전에 간 ‘이경’은 지

난 날 ‘옥희도’가 그리고 있던 어두운 방 안의 ‘고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고목’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나목’임을 알게 된다. ‘이경’이 ‘고목’으로 보았던 이유는 전쟁에 대 한 아픈 상처와 이루어 질 수 없었던 미련, ‘옥희도’가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의 ‘이경’은 예 술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산 ‘옥희도’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옥희도’와는 이루어 질 수 없었 음을 깨닫고 내려놓았을 때 그 그림의 의미가 보인 것이다.

‘이경’ 그녀에게 정신적 성숙을 가져다주는 중심축은 ‘옥희도’와 ‘옥희도의 그림’이다. 앞서 얘

기 한 것처럼 작가는 실제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옥희도’는 ‘박수근’ 화가이며 작가 박완서는 박수근과 나누었던 기억과 그의 그림 ‘나무와 여인’을 보고 느꼈던 인 상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자 이제 ‘이경’이 ‘옥희도’의 유작전을 다 보고 나온 후 자신에 대한 ‘옥희도’의 의미를 뚜렷하 게 자각하는 장면을 떼어 읽어보자.

나무와 여인

나는 S회관을 나와 잠깐 망연했다. 오랜 여행 끝 에 낯선 역에 내린 듯한 피곤인지 절망인지 모를 망연함, 그런 망연함에서 남편이 나를 구했다. “어디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쉬었다 갈까?” “저기가 어때요?”

나는 턱으로 바로 눈앞에 보이는 덕수궁을 가

리켰다.

우리는 은행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황금빛 세례

에 몸을 맡겼다.

아이들이 뛰고, 여인들이 거닐고, 퇴색한 잔디

에 쏟아지는 가을의 양광은 차라리 봄보다 따 습다.

“아이들은 데려올걸.”

남편이 다시 나를 상식적인 세계로 끌어들인다. 빨간 풍선을 놓친 계집아이가 자지러지게 운

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빠져들 듯이 풍선 이 멀어 간다.

드디어 빨간 점을 놓치고 만 나는 눈물이 솟도록 하늘의 푸르름이 눈부시다.

옆에 앉은 남편도 풍선을 쫓았던가 고개를 젖힌 채 눈이 함빡 하늘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뿐, 이미 그의 눈엔 십 년 전의 앳된 갈망은 없다. 그뿐이랴. 여자를 소유하고 가


정을 갖고 싶다는 세속적인 소망 외에는 한번도 야망이나 고뇌가 깃들어 보지 않은 눈. 부

수수한 머리가 늘어진 이마에 어느새 굵은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한 중년의 그가 나는 또 다시 낯설다.

저만치서 고등학생들이 배드민턴을 친다. 콕이 나비처럼 경쾌하게 날아와 라켓에 부딪치

는 소리가 마치 젊은 연인들의 찰나적인 키스의 파열음처럼 감각적으로 들린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이마의 주름진 곳에 그런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낯선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가 아주 타인처럼 낯선 게 견딜 수 없어서였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우수수 바람이 온다.

이미 낙엽을 끝낸 분수가의 어린 나무들이 벌거숭이 몸을 애처롭게 떨며 서로의 가지를

비빈다.

그러나 그뿐, 어린 나무들은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못한 채 바람이 간 후에도 마

냥 떨고 있었다.

‘이경’는 비로소 ‘옥희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옥희도’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이해하게 된 나는 마치 낯선 역에 내린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경’는 ‘옥희도’ 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잠시 사랑한 여자였고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 어쩌면 나도 그가 황폐했던 시절에 내 괴로움을 알아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기대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난날 자신의 미성숙함을 깨닫게 된다.

어느새 내 옆에는 나를 상식적인 세계로 이끄는 남편이 있다. 그와 함께 빨간 풍선을 든

계집아이를 본다. 그리고 빨간 풍선을 보며 젊은 시절 이상과 꿈이 있던 나를 기억해 낸다. 빨간 풍선이 계집아이의 손에서 벗어난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솟구친다.

어린 시절 철없이 킬킬대며 친구들과 나누었던 꿈들, 이야기를 등지고 일과 시간에 쫓겨

달려오니 어느새 서른하고도 11월이다. 29살에서 30살로 넘어갈 때는 오히려 신이 났었다.

뭔가 안정적인 사회인이 된 기분과 멋진 도시여성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30 살에서 31살로 넘어가는 지금 이 시점은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하다. 아, 정말 이젠 뒤를 돌아보고 싶어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가도 취미 이상의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라고 뭇사람들이 얘기를 건네지만 글쎄,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얼마 전 한 동생을 만났다. 교생실습을 하며 친해진 동생인데, 그 친구는 한문교육과

출신이었다. 지금은 선생님의 꿈을 접고 대기업에서 근무 중이다. 그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가 어린 시절 꿈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친구는 동화작가가 꿈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살면서 알고 싶지 않았던 걸 알게 되고 거기에 맞춰지고 하다 보니 이젠 동화를 읽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안쓰러웠다.


내 꿈은 무엇이었지? 국문과 복수전공을 결심한 계기는 ‘시’였다. 교내 학술문학상에서 ‘시’로 상을 받고 학보에

인문대 친구들 사이에 지리학과였던 내가 덩그러니 껴 있던 묘한 기분과 내 ‘시’를 칭찬해

주시던 국문과 교수님의 말씀에 덜컥 복수전공으로 국문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범한 30대 직장인이다. 나이가 깡패다.

그래도 잃어버린 아쉬움 속에서 어떤 깨달음이 있다. 날아간 풍선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푸르름이 눈부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직 난 미성숙한 건 아닌지. 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느라고 거부하고 불안에 젖어 있는 것 같다. 현실로 돌아오자.

나무들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우수수 바람이 분다. 그리고 여기저기 낙엽이 뒹군다. 그것뿐이다. 나무들은 바람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고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계절은 잘 흐른다.

다음시간에는 고전시가 고려가요중에 「청산별곡」을 살펴보겠다. ‘얄리얄리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건 다 알더라고. 지각하면 보강이다.


작곡가 b의 노트 <주체적 음악듣기의 딜레마> 글. Composer B

1악장. 거기에 나온 그 음악이요 KBS「개그콘서트」의 코너인 <쉰 밀회>를 본 적이 있는지? 얼마 전 종영했던 드라마「밀회」를 패러 디한 코너다. 특히 원작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했던 배경음악1)이 흘러나올 때는 이 코너를 보는 모두 가 ‘아, 밀회에 나왔던 그 음악이네’ 라고 할 정도로 음악을 통한 연출도 놓치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 었다. 그런데 예전부터「밀회」와 같은 음악 드라마를 보고나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있다. 드라마에 등 장했던 음악이 화제가 된 뒤에는 오로지 특정한 ‘그 곡’만 주목을 받는 현상 말이다. 즉, 사람들이 “이 드라마 덕분에 클래식을 좋아하게 됐어요”라고 하지만, 그 작곡가의 다른 곡(드라마에 등장하지 않 은)이나 비슷한 편성이나 분위기의 곡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듣는 경우로 이어지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시청률이 높은 화제의 드라마에서 클래식 음악이 등장하면 음반사에서는 기존의 명 반들 중에서 그 작품이 녹음된 음반을 시중에 더 풀거나, 드라마 제작사측과 협력해서 삽입곡들을 묶 어낸 ‘드라마 공식 클래식 앨범’같은 포맷의 신보를 발매하기도 한다. 즉,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음반 시장에 작게나마 붐(?)이 일기를 기대하는 차원의 전략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가장 재미( 음반사 입장)를 보는 쪽은 ‘드라마 공식 음반’의 형태이다. 즉, 사람들은 확실히 ‘드라마에 나왔던 음 악’만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차이냐고? 아래 두 음반의 트랙리스트를 보도록 하자. [음반 A] 1~3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환상곡 D.940 4 바흐: 평균율 제1곡 ‘프렐류드’ BWV 846 5 리스트: 파가니니 대연습곡 4번 ‘아르페지오’ 6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K310, 1악장 7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3악장 8 차이코프스키: 사계 中 4월 9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1악장 10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D.760, 4악장 11 쇼팽: 첼로 소나타 Op.65, 3악장 12 쇼팽: 연습곡 Op.10 No.1 13 모차르트: 작은별 주제에 의한 변주곡, K265 14 모차르트:네 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 K521-1악장

1) 슈베르트(F.Schubert)의「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


[음반 B] 1~3 모차르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448 4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 5~7 모차르트: 기계식 오르간을 위한 환상곡 F단조 K.608 8 모차르트: 네 손을 위한 안단테와 변주곡 G장조 K.501

음반 A는 드라마「밀회」의 ‘공식 클래식 앨범’이며 혹시 음반 B는 거장 피아니스트들인 라두 루 푸(Radu Lupu)와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가 녹음한 네 손(Four hands)을 위한 피아노 작품집이다. 일단 공통점은 작곡자가 한 명이 아닌 점, 최소 두 곡 이상의 작품이 실렸다는 부분 이다. 그러나 두 음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만들어진 이유에 있다. A음반은 드라마에 나왔던 ‘배경음악’을 모아놓은 것들이고 B음반은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음악이 라는 컨셉을 가진 작품들로 구성해서 최소한의 특정한 ‘음악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구성된 음반 이다. 밀회 음반의 같은 경우는 곡의 모든 부분이 실린 것은 슈베르트의 환상곡 한 곡 뿐이고,

2)

나머지는 원래 곡의 흐름에 상관없이 드라마에 등장한 음악만 추린, 특히 하나의 악장씩만 실어 놓은 음반이라 거의 샘플러와 같은 느낌을 준다.

2악장. 클래식이라서가 아니라, OST라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음반의 구성이 옳다 그르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컴필레이션 음반(이하 ‘컴필’)만이 잘 팔리는 상황이, 과연 현대인들이 클래식 음악 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나아가 음악을 창작하는데 있어서 어떤 파급효과를 주게 될지 궁금해서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의 완결된 곡이 담긴 음반보다 컴필레이션을 선호하는 걸까? 너무 길어서? 2시간짜리 영화는 다들 잘 보는데? 클래식이 어려워서? 정보를 찾기는 예전보다 훨씬 쉬워졌고 가이드북도 훨씬 다양한데? 돈이 아까워서? 음원사이트에 가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다. 어떤 연주자의 음반이 좋은지 몰라서? 드라마에 나왔던 음악은 연주자를 다 알고 듣나? 이 선에서는 아무리 봐도 딱히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잘 안 보인다. 사람들은 왜 스스로 음악을 찾아서 듣고 자신의 취향을 확실하게 정하는 걸 못하는 걸까? 당장 대형 음반가게의 클래식 음반 코너에만 가봐도 수많은 음반들이 연주자, 작곡자, 장르별로 정리가 되어있고 초심자를 위한 입문서도 잘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음악을 만들어 유통 시키는 사람들도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을 뒤늦게 묶어서 음반으로 판매하는 행위 외 에는, 숨겨진(일반인들의 기준) 좋은 음악을 더 온전한 형태(하나의 악장만 발췌하는 형태가 아 닌)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일까. 2) 3개의 트랙으로 나눠져 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악장으로 구성된 약 20분짜리의 곡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너무 음악만 중심에 두고 생각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클래식 음악’에 매료됐다기보다는, ‘드라마 속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음악이기 때문 에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는 뜻이다. 똑같은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콘서트홀 에서 연미복을 입은 음악가가 연주할 때는 너무 지루해서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져도, 그것이 드라마에서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장면에 은은하게 삽입된다면 ‘세상에 저런 음악이 있었다니!’ 를 외치며 그 음악을 당장 찾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저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요’라고 하면 서 매번 특정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했던 곡들(그리고 특정한 악장)만 무한반복해서 듣는 사람 들의 대부분은, ‘덕력’이 깊은 애호가들이 생각하는 ‘좋아한다’는 단어의 기준과는 애초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음악에 집중할 목적이라기보다는 자신 이 좋아하는 드라마의 인상적인 장면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음반을 사고 음악을 듣는 것이며, 그것이 단지 ‘클래식 음악’ 이라는 장르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3악장. 완결, 그 끝을 위해 우리는 영화관에 걸려 있는 모든 영화의 내용을 다 알지 못한 상황에서 그냥 예고편이나 하 이라이트를 보고, 혹은 누군가의 추천이나 입소문을 듣고 느낌이 좋으면 ‘나도 한 번 볼까?’ 하 는 마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다가 재미있으면 그 감독이나 배우의 다른 작품 도 찾아서 보게 되고, 같은 장르 안에서 비교가 될 만한 영화도 적극적으로 찾아보며 자신만의 기준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게 된다. 보통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영화를 참 좋아 하시네요” 라고 말을 하지, 예고편이나 하이라이트, 혹은 귀동냥으로 부분적인 것만을 듣고서 “스토리 다 아는데 왜 그걸 다 봐? 예고편 재밌게 잘 만들었던데?”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이지는 않지 않는가. 물 론 음악은 악장 단위로 끊어져 있어서 단 하나의 악장만 듣더라도 충분히 시작과 종결의 느 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여러 개의 단편 악장을 굳이 하나로 묶어서 ‘교향곡’이 나 ‘피아노 소나타’라고 부르는 것은 그 3~4개의 악장들이 하나로 뭉쳐 전 곡으로 연주가 될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야기 구조)으로 완결됐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전체 를 관통하는 힘을 유지하는 한편, 지루하지 않도록 변화를 주는 과정-작곡가들이 만들어낸 그 과정이 바로 우리가 듣는 그 음악들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치밀함 끝에 설계된 작품의 큰 그림을 보려하는 욕심을 더 이상 내지 않고 일부만 듣고 끝낸다는 것, 그리고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일단 음반을 팔아야 하니까’라며 컴필 음반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작곡가 인 나로서는 못내 아쉽게 생각될 뿐이다. 클래식 음악이든 새로 작곡된 음악이든 처음부터 끝 까지 부동자세로 앉아서 감상하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음악의 단편적인 부 분들로 인해 기본적인 흥미를 가지게 됐으면 그 다음부터는 더욱 긴 호흡, 그동안 듣지 않았던 음악들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갔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람 중 하나는 4, 50대가 되어서도 대학생 때 읽었던 책에 대한 이 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이왕 음악을 듣는 거 매번 들었던 음악, 귀에 익숙한 음악에 서 좀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놀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세상인 것처럼 들을만한 음악 도 정말 많다. 또 그렇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찾아낸 나만의 음악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송창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전부

누군가를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데. 송창식은 특히나 더 그렇다. 세상 평균과는 워낙 다른 삶의 기준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음악으로 시작해 음악으로 끝난다는 말을 함부로 써도 될 만큼, 그에게 ‘음악’ 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그가 두세 살 때쯤 어딘가로 사라지곤 하면 그의 어머니는 꼭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그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또 불려 다니면서 노랠 불렀으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턴 채보가 가능했다. 노래하는 걸 워낙 좋아했던 그는 학교에 입학해 음악책부터 접했다. 1학년 음악책부터 3 학년 음악책까지 본 뒤 4학년 음악책을 봤는데, 콩나물 대가리 밑에 ‘도레미파’가 쓰여 있는 걸 보고 계명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혼자 터득했단다. 그에게 음악은 타고난 것이었다.

시대적 상황은 흥미를 배가해 줬다. 그의 유년 시절은 6·25가 막 지났을 때였다. (그가 네 살 때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없고 가난해 학교에서 기가 죽었을 뿐.) “6·25가 일곱 살 때 끝났고 그 해에 학교에 들어가야 했는데 호적이 한 해 잘못되는 바람에 다음해에 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당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뻔해요. 그땐 장난감도 많지 않았어요. 전쟁 후에 뭐가 있겠어요. 그 대신 어떤 애들은 그림을 그린다든지, 어떤 애들은 노래를 부른다든지, 그런 한 가지 취미가 있으면 다들 그걸 잘했죠. 나는 음악 쪽이었는데, 그것도 너무 일찍부터 음악 쪽이었죠. 그냥 아이들로서 굉장히 음악적인 아이들이었다는 거지, 그때 당시엔 그게 뭐 천재니 이렇게 말했지만 그런 건 말도 안 되는 거였고……. 우리 친구들은 그때 당시 다 그랬어요. 좋아하는 걸 하는 거니깐. 놀 거리가 없으니까.”

음악밖에 할 게 없었던 소년은 지금까지도 음악밖에 할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잘 알다시피 늦게 잠들고는 오후에 일어나 운동하고 기타 치며 공연하면서 하루를 보내는데, 이 외에는 뭘 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거의 없어요. 여기서 안 변한 지가 수십 년 됐어요.” 그럼 따로 여가 생활이란 게 없는 거냐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그게 다 내 여가지 뭐.”라고 쿨 하게 하는 그의 말에 나 역시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여가라지만 절대 허투루 하는 건 아니다. 특히 그는 매일 몇 시간씩 기타의 기본 박자를 연습한다. 그 쯤 되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그의 말은 이랬다. “그게 기본이라서 연습하는 게 아니에요. 거 참 어려운 얘긴데. 내가 기타를 짜앙, 치잖아요.


그러면 쳐서 나야 하는 고 소리가 고 때 나야한다고요. 그래야 음악이 되는 거예요. 쳐서 나야 되는 그 소리도 안 날뿐더러, 고 때도 못 내는 게 보통 음악인들이에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몰라요. 순간이기 때문에. 박자는 머릿속에서 새는 거잖아요. 딱 머릿속에서 새는 박자로 나와 줘야 되는데, 그게 원래 안 맞게 되어 있어요. 하나는 머리고, 하난 몸인데 속도가 맞아요? 안 맞지. 그 속도를 맞추는 연습인 거지. 박자 연습하는 게 아니야. 허허.” 그러니 하루라도 빼놓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예전 한 인터뷰에서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이는 한마디로 음악에 묻혀 사는 수도승이다. 내가 붙인 별명이 ‘밥 줘 삼창’ 이다. 음악 일에 빠져 있다가 하루 세 번 한마디 해서 그렇게 놀려댄다. 결혼할 때 어느 정도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했는데 결혼해서 보니 정말 세상일과는 담을 쌓고 산다. 결혼 뒤에도 이사를 세 번 했는데 왜 이사를 했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다. 가구 정리를 끝내고 부르면 들어서면서 첫마디가 ‘내 공부방 어디야?’다. 침실에 다락이 있는 것도 몇 달 지나서 알더라. 그렇게 음악밖에 모르고 살지만 난 그이가 좋다. 그것이 무능으로 안보이고 맑은 순수성이 느껴진다. 그런 그이를 한 번도 미워해 본적이 없다.”(내가 예전의 사모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자, 그는 덤덤하게 “그래요? 음…….”이라고 말했지만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 정도의 순수함이 섞인 열정이라면 누군들 이해하지 못하랴. 그의 부인이, 또 그의 하루가 조금 이해되었다.

누구나 열정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걸 매일같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 매일 글을 쓰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먹고 살아야 하니)회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고 다듬는 일을 해서,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지쳐서, 간혹 그럼에도 버텨 앉지만 괜찮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커서 등의 이유로 마음만큼 글을 못 쓴다.( 먹고 살 만해서이지 않을까.) 그럴 때면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뻐끔거리는 대신 나는 턴테이블에 엘피를 얹곤 한다.

그러면 니코틴이 신경 조직을 흥분시키듯 그의 음악이 내 정신에 파고든다. 로저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줄담배 피우듯 하염없게 돼 옆길로 새지만 결국은 음악에 대한 그의 진지함에 자극을 받아, 쓰는 행위에 보다 탐구하려는 욕망이 생긴다. 그는 오래 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노래는 나에게 신성한 학문이고 가수 활동을 한 번도 밥벌이나 놀이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서 재미없이 산다고.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짬’이 좀 찼다는 몇몇 가수들이 어린 친구들에게, 음악은 음‘ 학’이 아니라 음‘악’이기에 즐기면서 해야 된다며 퉁을 주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썩 동의하진 않는다.


물론 즐기면서 하면 신 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수준의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즐기는 것 이상으로, 음악을 신성하게 또 진지하게 대한다면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이 얘기를 꺼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즐긴다, 그러는 거 자체가요. 즐거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사실. 음악이니까 ‘낙’이니까 이게 즐기는 거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예를 들어서 야구를 한다. (그러면)운동이니까 즐기는 게 아닌 거 같아요? 그것도 즐기는 거고, 정치를 한다. (그러면)그 사람들 정치를 안 즐기는 거 같아요? 즐기는 거예요, 다. 즐기는 거라고 말을 하면 다 즐기는 거예요. 이름이 음악이라고 해서 그것만 즐기는 게 아니고. 그리고 즐기는 거 자체가 즐기는 고 단순한 감각에서 끝나는 즐거움이라는 게 없어요. 그것도 다 이론적이고 체계적이고 깊이도 똑같고 그런 거지. 그러니깐 말로는 음악은 ‘낙’이니까 즐기는 거다, 이렇게 얘기하면 간단하게 말하는 거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요. 다 즐기는 거니까. 즐기지 않는 게 어딨어? (사진 기자를 바라보며)저 카메라 봐요. 저 사람. 다 즐기는 거지. (그럼 선생님도 즐기는 거예요? 라고 내가 물었다.) 그러면! 나는 사는 거 자체가 즐기는 거예요. 지금. (예전에 학문처럼 여긴다고 말씀하신 건?) 학문 자체를 즐기니깐. 다른 가수처럼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학문처럼도 한다는 거죠. 학문의 요소가 많거든요, 음악에. 그러니깐 그것도 학구적으로 해야죠.

학문을 즐긴다는 말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시금 그의 작품들을 떠올려 본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는 그의 값진 결과물을. 그의 음악은 참으로 당당했다. 평단과 대중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다. 뛰어난 재능에 끊임없는 연습과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까지, 어찌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음악이 삶의 전부인 그가, 그의 전부가 좋을 뿐이다.

글. 박재현


기록에 대한 기록 : 아카이브에 든, 아카이브가 남긴 보라빛 멍 <보라The Color of Pain>(이강현, 2010) 리뷰

박이현(현대쎈타 http://medium.com/centah-news) 우리는 세월호에 관한 영상과 당시 탑승자들과 구조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담은 기록들에 온전히 접근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월호 관련 기록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맞서 유가족들은 보상보다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그리고 진실에 대한 권리란 다름 아닌 ‘아카이브Archiv’에 대한 접근권이라 할 수 있다. 아카이브는 사람들이 남기는 수많은 기록들 중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여 보관함으로써 원할 때 찾아 읽을 수 있게 하는 기록물보관소 또는 기록물 그 자체란 뜻이다. 우리는 아카이브를 토대로 논쟁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린다. 아카이브는 공론과 비판의 준거다. 그런데 아카이브는 진공에 자리한,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다.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카이브에 대한 접근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지 않다. 하지만 국가는 자신이 건설한 아카이브가 아니라할지라도 여기에 자기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의 카카오톡 검열이 알려졌듯 말이다. 아카이브는 권력에게 있어 핵심적인 수단이다. 보다 권력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아카이브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아르케arché는 시작, 기원, 통치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정치적 권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록물보관소에 대한 통제 즉 기억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 국가는 이런 통제권을 사람들에게 쉽사리 이양하지 않는다. 애당초 국가가 선별한 기록들만 보관이 되며, 그마저도 우리에게 모두 공개되지 않는다.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우리는 국가의 안내를 따라서만, 어떤 양보를 통해서만 기록물에 접근할 수 있다. 어떤 기록이 선택되고 공개될까? 당연히 아카이브 건설자에게 유리한 역사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아카이브를 두고 “사고와 표현의 범위를 제한하는 하나의 강압적인 도구”라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아카이브는 더욱 확장되고 있으며, 이는 돌이킬 수 없다. 칼 마르크스는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변혁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미디어 이론가 권터 안다스 말대로 어차피 세계는 우리와 무관하게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가 우리 없이 변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없는 세계로 변화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러한 변화를 해석해야만 하고 또한 변화를 변화시켜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아카이브에서 해석과 변화를 시작해야만 하고, 달리 다른 길은 없다. 왜냐하면 아카이브는 하나의, 단 하나의 준거이자 모든 논의가 모이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 아카이브의 외부가 있을까? 오늘날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되고 저장되는 시대로 보인다. 그렇게 들린다. 디지털 즉 전자화된 미디어는 거의 무한한 기록들을 저장할 수 있다. 여기저기 CCTV가 널려있으며, 우리가 SNS를 통해 나눈 대화들은 회사 서버에 기록으로 남으며, 기록될 뿐만 아니라 빅데이터 사이언스덕에 정보로 가공되어 이용된다. 이 정보는 이를테면 책을 더 많이 파는 데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데 이용된다. 그렇다면 아카이브에 포섭되지 않은 어떤 공간이 있을까?


이강현 감독의 2010년작 다큐멘터리 <보라>는 아니라고 답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산업안전보건법>이라는 법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를 1년 여간 촬영한 기록물에서 출발한 영화이며, ‘글로벌’하고 ‘디지털’해지는 세계를 다룬다고도 알려져있다. 그렇게 제작사는 알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거기서 출발했을 지라도 제작자가 예상치 못한 다른 장소 즉 아카이브로 도착한 영화라고 본다. 나 역시 제작자의 의도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이나 ‘디지털’에 초점을 맞추겠지만, 다소간 제작자의 의도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보라>를 읽어보려 한다. <보라>는 일견 산업재해를 주제로 하는 영화로 보이나, 거기에만 집중해서 보면 이 영화가 가진 다른 결을 놓칠 수 있다. 나는 <보라>에서 아카이브와 그 외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강현 감독 전작은 <파산의 기술>로 테크놀로지할 때 그 기술技術이 아니라, 기록하고 서술한다는 의미의 그 기술記述이다. 말하자면 감독은 기술 즉 기록에 대해 고민해왔는데, 이 영화에서 역시 텍스트와 영상 기록에 대해 성찰하며 아카이브의 생애와 생산 조건, 생산자에 관해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 <보라>는 작업환경을 측정하는 건강검진 의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산업 현장의 쇼트들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로우키의 공장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며, 마이크는 지글지글 째깍째깍 쇳소리에 귀를 닫지 않는다. 핸드헬드 탓인지 몰라도 카메라에는 종종 공장의 진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공장이 ‘낯선’ 어떤 관객은 감독의 POV 쇼트를 따라 이 숭고한 광경에 견인attract되어갔을 거다. 초창기 매혹의 영화cinema of attraction를 닮은 2분 여의 용접 시퀀스는 용접하는 장면에서 공장의 구석으로 우패닝하며 끝나며 사무실 시퀀스로 이어진다. 단지 시선을 전환하는 효과일까, 혹 감독의 어떤 외면일까? 적어도 분명한 건 감독 역시 국가가 노동자들의 노동과 건강을 기록하고 이런 기록물을 관리하듯, 감독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는 이미지들의 활용가능성에 대해 감시할 수 있는 권리, 즉 모종의 ‘시선의 권리droit de regard’ 를 소유하고 있는데, <보라> 역시 이들에 대해 시청각적으로 접근하고 미디어로 기록해내고 있으며, 보다 다큐멘터리의 이름으로 ‘감시권droit de regard’을 전유해낸다.

증언과 증거 : 소음과 목소리를 텍스트(나 다른 무엇으)로 기록하기 영화가 담고 있는 공장의 소음은 배경음ambient sound이라기보다, 공장 스스로 내는 육성 같다. 영화는 로우컷(저음부를 삭제하는 음향처리 방법) 없이 사물의 소리를 그대로 담아내는데, 보다 이러한 소음이 주가 되는 장면도 있다. 바로 한국타이어(주)의 역학조사 결과 발표 자리로, 여기서 패널들이 등장하기도 전에 무대에서 발생한 하울링(소리가 마이크스피커를 연쇄하며 과잉 증폭되어 나는 소음)을 영화는 담는다. 발표자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고, 소음이 났다는 것 말고는 사건이랄 것도 없다. 한참 뒤에야 다른 시퀀스를 통해 발표 내용이 소개되는데, 여기서도 하울링이 한 번 더 발표 현장을 덮친다. 부당한 결과에 대해 반박하듯 비명을 지르듯, 그렇게 소음은 영화에 끼어든다. 그렇게 소음은 사물 자신을, 이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 게 아닐까? <보라>에는 비인간 주체의 증언 뿐 아니라 노동자의 증언도 담긴다. 법정에서의 증언은 “사실 만을 말하겠다.”는 선서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선서를 하지 않았다 뿐이지 같은 전제가 있다. 그들은 의사 앞에서, 조사원 앞에서 사실 만을 말할 것을 기대되며, 때때로 거짓말처럼 보이는 말도 하지만 어쨌건 그렇게 한다, 권위 앞에서. 이처럼 산업재해(의 가능성)는 면바지를 입은 노동자들의 육성으로 증언 된다. 그들이 현장에서 겪은, 보라빛 멍이 든 고된 경험이 여기 있다.


그리고 이 말들은 정리되어 산업 현장에 대한 하얀 가운을 입은 자들의 분석에 덧대 레포트로 증거 된다. 이제 이 텍스트는 하나의 매듭이 된다.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보상받는데에도, 회사가 보상을 거부하는데에도 준거가 된다. 텍스트는 이렇게 힘이 강해진다. 영화는 사무실과 공장을 오가는데, 감독은 쇼트 사이로 검은 배경에 흰 글씨로 법령에 관한 정보를 끼워 넣는다. 법, 텍스트는 무겁다. 그들은 노동자에게 강압적으로 명령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매뉴얼, 텍스트는 가볍다. 그들은 텍스트의 무게감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는 걸지 모르겠다. 그들은 매뉴얼의 지시를 무시하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다. 그게 텍스트의 폭력에 가할 수 있는 조그만 반항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반항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괴 하게 된다. 의사들은 노동자와의 상담 결과를 끊임없이 기록한다. 그들의 손에는 늘 팬과 종이가 쥐어져있다. 하지만 노동자에겐 팬이 없다. 그들은 말을 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사진으로 찍거나 혹은 사진으로 찍힐 뿐이다. 이 사진은 추억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분석의 대상이 된다. 영화는 도시의 조망을 거쳐, 공장에서 농장으로 옮겨간다. 하얀 가운을 입은 자들은 여기서도 사진을 찍는다. 농부의 신체와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분석하기 위해서다. 할머니들은 텍스트 없이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의사는 농부에게 “쪼그려 앉아 일하는 걸 하루에 몇 시간 씩하십니까?”하고 예의바르고 정갈하게 묻는다. “하루 종일 하쟤. 점심만 먹고 하루 종일 허쟤.” 설령 할머니가 텍스트를 다룰 수 있데도, 이 구수한 사투리 육성은 곧장 텍스트로 옮겨질 수 없고 아마 “하루 종일 함” 정도로 옮겨질 것이다. 시골의 허리 굽은 할머니가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문제와 텍스트에 진입할 수 있냐 없냐 문제는 다르다.

파란색과 하얀색 : 영화라는 기록에 대해 성찰하기 텍스트와 영상 촬영은 기록/미디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텍스트와 영상 및 음성은 변별가능하며, 어떤 지점에서는 필시 그래야 한다. 자크 데리다는 인쇄 매체와 달리 영상과 음성 기록매체에 어떤 “반성성에 고유한 필연성”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기존 매체와는 다른 ‘정확성’이 있으며, 고로 여기서 이끌어지는 “장래에 대한 다양한 관계들 및 반성성”이 있기 때문이다.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이 관계가 바로 문제다. <보라>는 이 반성성을 어떻게 자기-성찰하고 있을까? 영화는 농촌에서 공장으로 다시 옮겨가는데, 그 다음 시퀀스는 전통적인 노동운동가의 회의를 담은 영상이다. 한 활동가는 “깨놓고 얘기하자면”이라며 회사에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연설한다. 잠시 뒤 발언은 다른 활동가로 바통이 넘어가고, 그 활동가는 회의 장면을 DSLR 카메라로 담기 시작한다. 혹시 촬영 즉 기록한다는 점에서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의사들과 유비되는 게 아닐까? 한편 감독 역시 ‘감시권’을 지닌 사람이며 텍스트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보라>에서도 법령 뿐 아니라, 공장에서의 소음과 사투리 탓에 전달이 안 되는 음성을 감독은 자막으로 보충해내지 않나. 노동운동 활동가를 담은 시퀀스는 공장의 자욱한 연기와 노이즈로 끝난다. 여기서 영화는 파란색 옷에서 하얀색 옷으로 갈아입는듯 하다. 말하자면 영화의 앞 ⅔ 분량은물질 노동을, 뒤의 ⅓은 비물질노동을 담는다 할 수 있는데, 사무직을 담당하는 화이트칼라는 기록을 다루는 자이며, 현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는 그렇지 않은 자로 정의할 수 있다. 시퀀스는 이제 다음으로, 서버관리자로 넘어간다. 인터넷 데이터베이스 센터 서버가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기록물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여기저기 전파될 것이다. 여기에 삽입된 인서트는 꽤 정치(精緻)하다. 카메라는 전봇대가


아니라 ‘전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인서트에서 감독의 시선은 낮의 전선을 틸트 다운, 마을 부감 쇼트, 밤의 전선을 틸트 다운, 밤의 가정을 우패닝한 쇼트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서버관리실로 돌아온다. 서버관리자는 그 옆 사무실에서 따분함을 견디고 있다. 그러다가 감독에게 슬쩍 자신이 찍은 사진에 관해 얘기를 건넨다. 이제 누구나 영상을 찍는 시대다. 이 지점부터 본격적으로 <보라>는 자기 성찰에 몰두한다. 서버관리자는 사무실 구석에 침대라고 마련한 허름한 박스 안으로, 마치 관으로 들어가듯 들어가 잠에 든다.

아카이브의 생애 이 유사-죽음에서부터 아카이브의 생애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보자. 서버는 기록된 생산물이 아카이브로 저장되는 장소다. 바로 이 기록물 보관소에서 감독은 서버관리자가 감독 자신처럼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다. 둘 모두 어떤 영상 즉 기록의 생산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는 취미로 하고 누구는 생계로 한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기록물은 먼저 생산되고 저장되며 이윽고 폐기되는데, <보라>는 위 성찰을 따라갔기 때문에 저장(서버 관리자) → 기록물 생산 (DSLR족) → 기록물 폐기(용산 전자상가 하드웨어 복구업체) 순으로 구조화되어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영상 생산은 대중화되었다. <보라>는 이제 산업재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DSLR족들 시퀀스로 넘어간다. DSLR족은 공원으로 출사나와서 풍력계를 찍고 있다. 한 사진 동호인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모자를 쓴 이 아저씨는 자기 자식 마냥 대구경의 카메라를 품에 안고 있다. 그는 카메라 기종에 대해 자뭇 진지하게 전문가처럼 얘기를 한다. 이 시퀀스에는 야구하는 소년과 수영장 아줌마들이 삽입된다. 여기는 생산과 소비라는 자본주의의 사이클에서 벗어난 어떤 바깥 같다. 감독은 이어 용산상가 하드웨어 복구 업체로 간다. 사람들은 자료를 살리기 위해 여기에 와있다. 원하지 않게 지워진 기록물이 소생하는 장소다. 그런데 여기에는 버려진 하드웨어도 많다. 기술자들은 망가진 하드웨어를 고쳐 다시 쓴다. 가끔 이전 소유자의 사진도 복구되는데 몇몇에는 보라빛 멍이 든 아픈 기억들이 담겨 있을 거다. 디지털/자본주의 사회는 이렇듯 연결되어있다. 우리는 그 내부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며 멍이 든다. 어떤 기록은 우리를 멍들게 하며, 어떤 기록은 이런 멍을 담고 있다. 참, 아까 어떤 ‘바깥’이 있지 않았나? 그런데 그 바깥마저도 <보라> 에 포획되어 영상으로 남아있다. 어디서도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저장을 한다. 심지어 버려진 저장물들은 어딘가에서 복구까지 된다. 말하자면 쉴 곳이, 자본주의의 바깥이 하나도 없는 굉장히 우울한 상황을 우리가 마주하고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유령들이 아카이브의 외부를 떠돌고 있다. 세월호의 비생존자들의 시신은 아직 모두 수습되지 않았다. 그들은 잠수부의 카메라에도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으며, 어떤 기록으로도 남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보라빛 시체가 되어 우리에게 귀환하며, 아카이브의 바깥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다 정의 그 자체로 우리에게 응답 reponse을 요구하지만, 대통령과 청와대는 이러한 아우성에 침묵함으로써 책임responsibility을 회피하고 있다. 그리하여 내게 <보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뚝 서있는 볼링장의 심볼이 유령 같은 추모비처럼 느껴졌다. 참고자료 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그린비, 2011 자크 데리다·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저, 진태원 역, 『에코그라피』,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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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귀농했다. 엄마는 시골에 꽤 오랫동안 산 적이 있었어서 그 삶을 늘 그리워했었는데 작년 겨울 드디어 전 재산을 긁어모아 화천의 산골마을에 집을 지었다. 덕분에 난 매달 유기농 농작물과 힐링되는 풍경을 얻는다. #8 이렇게 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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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데 난 엄마의 삶이 멋지고 부럽다. 남들이 추구하는 삶을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일까. #8 이렇게 살고 싶소


아이돌로지 팝업 TALK

떠나가는 아이돌들 2014년 10월 14일 | 전문 보기 : http://idology.kr/1677 최근에는 유독 팀을 떠나는 아이돌의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 이유도 형태도 다 양한 가운데, 아이돌 산업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결말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그만큼 개별 사안에 대한 시각과 의견도 사람에 따라 극에서 극으로 갈리게 마련. 최근 두드 러졌던 몇 건의 탈퇴 사건들에 대해 아이돌로지 필진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보았다.

김윤하 :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중국인 멤버들의 팀 이탈 경우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가 존재한다고 보는데, 바 로 중국시장의 크기와 비약적 인 성장속도다. 13억이 넘는 인구는 고된 타향살이 없이 자 국 장사만으로도 충분한 토양 이고,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가 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경 제/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지금 도 그 땅에 부지런히 씨를 뿌 리고 물을 대고 있다. 십 수년 간의 발전을 통해 정교하게 구 축된 아이돌 양성시스템은 지금 그 중국 시장이 유일 로나 내적으로나 SM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회사 하게 갖지 못한 한국만의 원천기술이다. 오요 : 객관적인 규모의 열세. 한국식 아이돌 육성 시 스템의 구조적인 문제이자 기획사의 한계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중국 진출 및 활동에 대한 장기 적인 계획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SM 엔터테인먼트 라는 회사가 동력 혹은 비전을 상실한 게 아닐까 생 각되기도 한다. 이는 비단 SM 엔터테인먼트의 문제

에서 이 아티스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말고, 이 아티스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회사가 어떻게 해주

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티스트의 주체성을 높여주고 회사는 에이전시 개념으로 빠져야 한다는 뜻이다. 시장에서 아티스트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더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미묘 : 별민이 제기한 의견에 동의하는 바도 있지만,

만은 아니고 케이팝 산업 전반에 그런 기류가 느껴진 ‘인간에 집중’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울 좋은 상황으 다. 극에 달해서 허물어질 일 만 남은 것 같은. 별민 : 시스템과 기획력에 대한 과신을 버려야 한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역설적이게도, 인위적으 로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발생한다. 사람 한 명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 음악 외적으

로 번지기 좋은지를 생각하면 회의적이 되는 부분도 있다. ‘가족적인 분위기’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우리

사회에서 뭘 말하는지도 다들 알지 않는가. 때려서 ‘사람 만든다’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크다고 본다.


레드벨벳 - Be Natural (2014)

2014년 10월 11일, 미묘 전문 보기 : http://idology.kr/1657

레드벨벳의 ‘Be Natural’에서 재해석으로 ‘들릴’ 만한 것은 거의 없다. 모 든 것이 2000년 원곡 그대로이다. “수필 같은 넉넉한 말들” 같은 가사는 지금의 걸그룹 곡으로 생각하면 제법 생경하다. (이건 소녀만화 잡지 말

미에 실리는 작가의 말 같은 질감을 보이던 바다의 캐릭터와도 관련된 다.) 유니슨으로 처리한 후렴은 요즘의 아이돌 보컬 편곡을 역행하고, 걸 그룹 곡에 남자 래퍼가 거드는 형태도 예스럽다. (심지어 S.E.S.의 원곡에 들어간 멤버들의 랩 더블링마저 이번엔 빠져 있다.) 사운드의 퀄리티는 나아진 듯하지만 편곡 자체는 원곡과 거의 다르지 않다. 음악 외적인 부분까지 본다면 이 곡은 또한 제법 다르다. 심재원의 퍼포 먼스 디렉팅과 카메라워크가 결합된 뮤직비디오는 적당히 컷을 나누기도 하고 디졸브로 클로즈업이 들어가기도 한다. 지난 몇 년간 소속사가 일궈 낸 콘텐츠 중 하나이자, 혁신적이기에 자랑해야 했던 이 기법이, 이제는

레드벨벳 Be Natural SM 엔터테인먼트 2014년 10월 13일

뮤직비디오의 다양한 언어 중 하나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의상 탓인지 S.E.S.에 비해 길쭉하고 여리여리해 보이는 멤버들의 몸짓은, 꽤 어리게 들리는 목소리와 더불어 더 가냘픈 여성성을 강조해, 사뭇 ‘야 하게’ 다가온다. ‘있어 보이는’ 세트 속에서 상징적인 듯한 안무를 소화하 는 멤버들의 모습에는, ‘칼군무’의 유행이 지나간 자리에 세워진 절도와 통제가 깃든다. 이 곡이 보여주는 새로움이란 (멤버들의 신체 조건과 패 션의 변화를 포함해) 아이돌 산업의 기술적, 미학적인 발전이다.

레드벨벳 - Be Natural https://www.youtube.com/ watch?v=QpAn9ryoB4Y

그 지점에서 이 곡은 리메이크의 정의로 되돌아간다. 한 아티스트가 다른 아티스트의 곡을 재해석하는 리메이크가 아니다. 소속사가 한 아티스트 에게 다른 아티스트의 곡을 리메이크하도록 시킨 경우도 아니다. 이것은 산업적, 예술적 주체로서의 소속사가 자신의 곡을 다시 발매한 일이 된다. 그러니 이 곡은 차라리, SM 엔터테인먼트(혹은 S.M.E)란 이름의 아이돌이 발표한 ‘Be Natural (2014 Rerecorded)’이라 표기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 인다. 그리고 마침 이 곡은 묘하게 건조하다. 유니슨인 보컬도 그나마 매

S.E.S. - Be Natural https://www.youtube.com/ watch?v=QpAn9ryoB4Y

우 평탄하게 처리돼 있어, 보컬 믹스에 입체감을 부여했던 원곡과 대조를 보인다. (티 나게 처리하지 않아도 보컬의 존재감을 살려낼 수 있는 기술력의 향상을 전시하려는 것일까.) 화 려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비디오는 시종일관 어딘가 매끈하게 움직이는 밀랍인형들 같고, 마침 안무도 두 멤 버가 다른 두 멤버를 움직이게 하거나 여러 멤버가 겹쳐져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 동작들이 눈에 띈다. 그리 고, 색깔로 멤버를 구분해야 했던 전작 ‘행복’에 뒤이어 무채색으로 옷을 맞춰 입은 레드벨벳의 멤버들은, 여 전히 각 멤버 개개인보다는 팀으로서만 존재감을 보인다. ‘얼굴 없는 아이돌’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김윤하 : 콘셉트도 가요 프로그램 순위도 갈 데까지 가봤다. "Error"는 데뷔 3년 차 막 전성기를 맞이한 아이돌 그룹 특유의 활기와 패기가 느껴지는 결과물이다. 흡혈귀와 좀비에 이은 사이 보그를 또 다른 충격 콘셉트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제 그런 것들 자체가 부수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타이틀곡 'Error'에서 빅스 특 유의 타르처럼 검고 진득한 무드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후렴구 '나를 놓치기 싫어 / 나를 더 망치기 싫어'는 '다칠 준비가 돼 있 어'부터 꾸준히 호흡을 맞춰오고 있는 작곡가 황세준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파트이자 지금껏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켄 이외 빅스 Error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2014년 10월 14일

또 다른 메인 보컬 레오의 매력을 새롭게 어필할 수 있는 킬링 포 인트다. 빅스 앨범의 특징이라면 타이틀곡 이외에도 꽤 괜찮은 싱글들이 늘 수록된다는 점인데, 이번 앨범에서는 군더더기 없는 상쾌한 보이 팝 'Time Machine'을 꼭 놓치지 않길 바란다. 별민 : 빅스는 2012년 아이돌 붐에 데뷔한 팀 중 가장 주목해야 하는 팀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미 어떤 성공 모델을 제시하기 시 작했다는 점에서 리스너들이 주목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생 각도 든다. 판타지 스토리텔링에 기반을 둔 드라마틱한 음악이나

VIXX - “Error”

퍼포먼스를 소화해내는 능력이 동급 아이돌 중에는 단연 최고인

https://www.youtube.com/

데, 이 능력이 심지어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watch?v=IF8kySIcWNw

인상적이다. 앨범 전체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전에는 전체 곡에서 종종 섞이지 못하고 둥둥 뜨는 듯한 인상을 주었던 래퍼

라비가 이번 앨범에서부터 드디어 곡과 완벽하게 조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래핑 실력은 둘째 치고 가사를 잘 쓴다는 큰 장점이 있는 그가 곡에 녹아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앞으로 이어질 빅스의 음악 적 커리어에 있어서 굉장히 기대할만한 점인 것 같다. '사이보그'라는 콘셉트 아래 일관성을 유지하 고 있는 트랙들도 마음에 들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 뮤직비디오. 전체 트랙을 관통하는 스

토리에 퍼포먼스 포인트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아이돌 장르에서만 볼 수 있는 드라마타이즈드댄스 뮤직비디오를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 다만 영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무래도 무대 연출인데, 일 단 콘셉트를 과감하게 차용한 것치고 분장이나 의상이 지나치게 무난하다. 그리고 후렴구에서는 사 이보그 인간이 제자리에서 달리는 동작이 각각 두 번씩 등장하는데, 한 번 정도는 다른 동작으로 변 주를 시도했을 법도 한데, 느리고 단조로운 동작이 후렴 내내 연달아 이어지다 보니 '보는 맛'이 줄 었다. 몸에 있는 플러그를 뽑거나 꽂는 동작이나 기계를 형상화한 몇 가지 동작들을 좀 더 활용했다 면 더 재미있는 무대가 됐을 것도 같은데. 물론 시작 부분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엔딩 동작이라든가, 클라이맥스에서 레오가 중앙으로 달려 나오는 퍼포먼스 등 덕분에 이미 충분히 인상적이긴 하다. 장 담하건대 빅스는 지금 성장하고 있으며, 이 성장세는 앞으로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MRJ : 이 곡은 2014년 나의 최고의 곡 중 하나이다. 보컬 편곡, 노래와 녹음도 놀랍고, 연주 트랙도 아름답게 만들어졌으며, 뇌리를 벗어나지 않는 멋진 뮤직비디오도 걸작인 이 노래에 곁들여졌다. 빅 스는 데뷔 후 매우 단시간에 다른 엘리트 그룹들 틈을 뚫고 케이팝 음악 세계의 정점으로 솟아오른


그룹이다. 다음의 링크에서 이 곡과 뮤직비디오에 관한 나의 분석 전체를 볼 수 있다. https:// www.youtube.com/watch?v=BtXff_YzbT0 유제상 : 묵직한 워블 베이스의 여는 곡 'Steel Heart'에 뒤이어 타이틀곡 'Error'로 이어지는 흥겨움 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수록곡이 전반적으로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것도 미덕. 간결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이땐 흥겨운 후렴구가 나와줘야지', '이땐 다다다 랩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적절히 각 요소들이 등장하는 것도 반갑다. 빅스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공표한 앨범.

미묘 : 크롬 엔터테인먼트가 이번에는 간보기를 하는 것으로 보 인다. 네 곡과 각각의 인스트루멘탈을 전부 수록한 것 또한, 어 떤 루트를 선택할지 애매한 심경을 드러내는 듯하다. 곡들의 구 체적인 면모 또한 그렇다. 'OK'는 로킹한 사운드에 시끌벅적하고 별난 매력을 선보이고, 'Feel So Good'은 단발머리와 다소 노선 을 병합하면서 "핫둘셋" 등으로 아저씨를 겨냥하는 애교를 담았 으며, 'Hello'는 처연한 감정을 뜨겁게 뿜어내는 발라드, '알려주 세요'는 소녀 아이돌스러운 달콤하고 부드러운 R&B 발라드이다. 다른 음반이었다면 이런 산만함이 감점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

나 음악적 차별화에 대한 욕심에 비해 역량이 한참 못 미치던 크

크레용팝-딸기우유

롬 엔터테인먼트의 기존작들과 비교하면 상당한 퀄리티 향상이

The 1st Mini Album

더 크게 다가온다. 다소 '다른' 아이돌을 지향하며 시작해 마침

크롬 엔터테인먼트 2014년 10월 15일

그것이 효과를 거두기까지 한 뒤, 다소 판단착오가 있었던 듯한 크롬 엔터테인먼트다. 다소 뻔한 아이돌 음반의 수록곡들 같지 만, 그것은 그 '뻔함'의 위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방증. 그들 이 상업적 설득력과 '다른' 아이돌의 이상 사이에서 앞으로 어떤 항로를 잡아나갈지 무척 궁금해진다.

별민 : 정말 놀랍게도, 4개 트랙 중 2개가 발라드 트랙이다. 그리 고 더욱 놀랍게도, 보컬은 우리가 2000년대 초중반쯤에 익히 들 었던 '칠공주 벨소리'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렇다, 그 128화음의

크레용팝-딸기우유 - “OK” https://www.youtube.com/ watch?v=1VQ-OJ3vCn0

풍부한 사운드... (하략) 유제상 : 1. 크레용팝이 윙크, 테이스티처럼 쌍둥이 그룹이 되어버렸다...는 아니고. '딸기우유'란 이름 아래 쌍둥이인 초아와 웨이의 유닛 활동 개시, 2. 타이틀은 흥겨운 곡 'OK'. "귀여운 여자아이가 둘인 데 얘들이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죠?"란 질문의 전형적인 답 같은 곡이다. 3. 크레용팝 시절을 생각 하면 곡의 만듦새가 매우 깔끔하다. 이제야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온 느낌. 4. 인스트루멘털을 제외한

수록곡은 총 네 곡. 이 중 두 곡은 흥겨운 곡, 나머지 두 곡은 (과하게) 진지한 곡이다. 5.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넘쳐나는 뮤직비디오를 보며,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스미스 요원이 "Me, Me, Me..."를 외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6. 수록곡들이 인상 깊지는 않지만, 정성 들여 만들어졌음은 분명하다. 이 제 엽기적인 이미지도 많이 씻겨졌으니 크레용팝 본진도 이 정도 퀄리티로 밀어주시와요.


건축이 좋아. #14. 베니스의 고요한 정원,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aoikasa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는 건물과 건물 사이 물길들이 마치 작은 골목처럼 엮여, 온 도시를 관통한다. 그만큼 대지모양은 불규칙적이며 도시는 언제든 물에 잠길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게 보인다. 꼬불꼬불한 물길을 따라 배가 오가고, (지금은 주로 관광용 곤돌라지만) 물길 옆으로는 물결에 대응하는 듯한 베니스 건축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베니스의 건축물들은 이탈리아에서도 유독 독특한 성격을 가지는데, 그 것은 아마 물의 도시라는 베니스 만의 독특한 지형으로 인한 것이다. 고전주의의 전통이 강한 이탈리아 본토와는 달리 그 자체로 바로크적 인, 그래서 다소 장식적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하기도 한 베니스 건축만의 독특한 특질은 뱃사람 특유의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소 화려하고 장식적인 베니스의 건축물들 사이에 '아주 고요하고, 고요한 보석같은 건축'이 하나 숨겨져 있다. 바로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이다.


Carlo Scarpa,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카를로 스카르파. 대표적인 베니스 출신의 건축가이다. 기차로 약 40여분 밖에 안 떨어진 비첸차에 건축가 팔라디오가 있다면, 베니스에는 스카르파가 있다. 비록 400여년의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팔라디오가 16세기 이탈리아 건축을 대표한다면 스카르파는 알도 로시 와 함께 20세기 이탈리아의 대표 건축가가 아닐까 싶다. 독특한 계단을 만들기로 유명한 이 건축가의 대표 적인 건물, 건물 그 자체보다 계단과 정원이 더 유명한 'Fondazione Querini Stampalia'을 살펴보기로 하자. 'Fondazione Querini Stampalia'을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산마르코광장 동측 레스토랑이 많이 있는 꼬불꼬불한 미로 같은 베니스의 골목들을 지나 곤돌라들이 열심 히 운행중인 다리를 건너 (건물과 바로 맞닿은 다리를 건너면 안 된다. 그 다리를 건너면 길이 없다.) 작은 광장을 지나 다시 다리를 건너 건물로 들어간다. 아마도 구글 맵과 GPS가 없었더라면 분명 몇 십 분은 헤 맸겠지만, 구글맵과 GPS만 있으면 세상 어디에도 갈 수 있다는(꽃남에서 하얀 닻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던 루이처럼) 평소의 믿음에 부응하듯 꽤나 수월하게 21세기의 여행자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 (첫 페이지의 사진에서 보이는 Fondazione Querini Stampalia의 스카르파가 디자인한 철제 문과 다리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시 골목을 지나 동쪽으로 이동한 후 옆의 건물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

아무튼 화려하고 번잡한 베니스의 시내를 지나 다리를 건너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으로 들어가 면 모던하고 고요한 스카르파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곳은 Querini Stampalia 집안의 소유로, 16 세기 에 지어진 팔라쪼(귀족의 저택)이다. 현재는 일반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이자 도서관으로 사용된다. 카 를로 스카르파는 1960년대에 이 건물을 리노베이션 할 때에 1층과 정원부를 설계하였고,이후에는 Valeriano Pastor와 Mario Botta가 이어서 다른 부분들을 디자인하였다.


물의 도시 베니스, 물이 흐르는 공간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베니스의 집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물과 맞닿은 비정형적인 대지에 들어서 있는 이 집에서 역시 '물'은 막아 내야 할 첫 번째 요소였다. 베니스에서는 잦은 범람으로 인해 1층이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기에 이 것을 어 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중요한 이슈였다. 그래서 대부분 주거공간은 2층부터 형성되어 있으며 (이는 이탈리 아 팔라쪼의 특징이기도 하다. 피렌체나 로마 등의 다른 도시에 건축된 팔라조는 주로 1층이 방어의 목적 으로 두꺼운 성벽처럼 만들어져 있었으며, 2층부터 주거공간으로 구성된다.) 1층에는 배로 접근이 가능하 면서도 최대한 물을 막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개구부를 줄이고 두꺼운 성벽처럼 만든다든지...)

그런데 스카르파는 이 공간을 리노베이션하며, 물을 막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 같다. 즉, 물을 방해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베니스의 집을 구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 소로 보고 그 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철문으로 되어 있는 이 집의 주출입구에는 작은 배가 닿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배에서 내리면 몇 개의 계단을 올라 1층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아치형의 주출입구 옆으로는 집으로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모던한 철제 계단이 놓여 있어 각기 다른 레벨에서 이 집 으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런데 사실 1층 공간은 내부이지만 언제든 물에 잠길 수 있는 외부같은 내부이다. 범람이 잦은 베니스의 특성에 대응하기 위해 건물의 입구와 주변 공간을 마치 수로처럼 디자인 한 것이다. 수로가 벽을 따라 1층의 전 공간을 흘러감으로써 수면 높이가 높아질 때에는 그 수로를 통해 물 이 흐르게 된다. 자연스레 1층 공간은 여러 개의 단이 놓여 전체가 마치 커다란 계단과 같은 여러 층의 공간 을 형성한다. 마침 내가 이 곳을 찾은 날에는 아침부터 비가 꽤 왔는데 덕분에 이 공간에서 또르륵 또르륵 떨어지는 빗소리와 빗방울이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파장들을 실컷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집은 '물의 도시 베니스'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집이 아닐까.


화려한 베니스 이면의 고요함. Fondazione Querini Stampalia의 정원 한편, 이 건물의 내부 공간은 화려한 베니스의 외부에 비해 모던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고대 건축의 유산인 아치와 기둥들과 붉은 벽돌벽, 그리고 마치 테트리스 조각 맞추기 하듯 디자인된 묵직한 콘 크리트와 대리석의 부재들이 공존한다. 고전적인 건축어휘가 주는 무게감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근대 모 더니즘의 날렵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사실 과거의 역사적 전통이 굉장히 강한 이탈리아에서 20세기의 새로 운 정신인 모더니즘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터인데 스카르파는 모더니즘 건축 어휘를 그만의 묵직하 고도 조형적인 어휘로 번역해냄으로써 이 전의 역사적 건축과의 공감을 만들어 낸다.


그 중 최고는 바로 중앙홀을 지나 만날 수 있는 중앙 정원이다. 역시나 수로가 있어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이 공간은 베니스에서 가장 고요하고 가장 절제된 공간이다.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그리고 간혹 바람 이 불고 햇살이 비치는 이 공간은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콘크리트 벽과 만나 공명을 만들어 낸다. 내부 공간 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치 테트리스 조각 맞추기한 듯한 매스의 구성들이 마치 20세기 초반 화가들의 미술 작업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실제로 스카르파 디자인의 상당 부분은 Paul Klee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 라 한다.) 정원의 단순함과 고요함은 마치 일본 정원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게 한다. 실제로 스카르파도 일 본에 다녀온 적이 있으니 그 영향이 있었을 수도...

정원 옆에는 까페가 있다. 까페와 정원을 이용하는 건 굳이 미술관 티켓을 사지 않아도 가능하다. 까페에 앉아 맛있는 이탈리안 커피를 마시며 아주 고요히 스카르파의 정원을 즐기노라면, 화려한 관광 도시 베니 스에서 받은 피로감을 100%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베니스스럽지 않은, 그러나 가장 베니스스러운 ... 개인적으로 나에겐 이 곳이 베니스에서 가장 좋았던 공 간이었다. 뭐랄까. 가장 베니스스럽지 않은 것같으면서 도 가장 베니스스러운 건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화 려한 외관의 베니스와는 다소 어울려보이지 않지만, 어쩌 면 베니스 사람들은 그 외부의 화려함을 떠나 이렇게 고 요한 무언가를 만들어놓고 자신들만의 '집'을 만들고 싶 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물과 늘 싸워왔었 던 그들이겠지만 동시에 물과 늘 공존하였던 그들이었기 에 자연스레 물이 흐르는 그 공간이 가장 베니스스러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했던 날, 빗방울이 꽤 떨어지고 날씨가 흐린 것에 대해 미술관 Staff은 내게 유감이라 말했지만, 난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이 곳 은 빗소리가 함께 있어야, 빗방울이 함께 있어야 더 좋은 것 같다고, 난 그 것이 너무 좋다고'... 카를로 스카르파는 1906년에 태어나 내가 태어난 1978년에 일본에서 사고로 죽었다. 그 것도 계단의 마법 사라 불리던 이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도 역시 그만의 독특한 계단들 을 만날 수 있었고, 홀을 주변으로 감싼 방들의 공간은 내겐 아주 크고 완만한 계단의 공간으로 느껴졌었 다. 그와 내가 만날 일은 결코 없었겠지만 그와 나는 그의 계단을 통해 만나고 그의 정원을 통해 만났다.

P.S. 베니스를 떠나 며칠 후 들린 로마의 MAXXI에서는 카를로 스 카르파의 스케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건 전부 담배갑 종 이에 한 스케치라는 점.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생각이 나면 그의 손은 쉬지 않고 그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그의 수많은 담배갑을 감상...




Chapter 16 생존매뉴얼의 {끝}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일 년 사 개월 남짓 웹디자이너의 생존매뉴얼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이제 더 쓸 것이 없다. 디자인에 관한 다른 주제와 형식으로 새로운 글을 쓸 예정이다.

회사에 소속됐을 때 지겹게 듣던 말들이 있다. 디자이너는 책을 안 읽는다. 디자이너는 글을 못 쓴다. 디자이너는 맞춤법에 취약하다. 이러한 소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말들에 오염돼 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곧 직업적 자괴감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에 한 번 제시간에 맞춰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월간이리라는 잡지 특성상 까다로운 검열이 없고, 교정교열 같은 부분을 글쓴이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낀 바 있다. ‘디자이너는 한 장의 비주얼로 수많은 말들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이 생각의 완전한 반대에 서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말(혹은 글)과 비주얼은 발화되어 상대방에게 닿는 형식이 다르므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포함한 많은 디자이너는 자신의 비주얼을 언어화하는 것에 대부분 게으르다. 물론, 이러한 게으름은 조형이 가지고 있는 비의적(언어화할 수 없는) 부분에서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때로는 변명처럼 들릴 때가 있다.

한 보험회사의 웹사이트를 디자인한다고 상상해보자. 최상단에 네비게이션과 로고가 배치되어있고, 메인비주얼 영역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 아이의 주위에는 긍정적 느낌을 연출하려는 듯한 추상적 도형들이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긍정적’ 느낌을 주는 도형이라는 것은 수많은 사용사례를 통해 사용자에게 축적된 학습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추상적 도형은 아이의 웃는 모습 위에 친화적 레이어처럼 덧씌워진다. 긍정 위에 다시 한 번 긍정적 표현이 부 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에 가깝다. 이제 하나의 컨셉 하에서 ‘보험상품’-’어린아이’-’추상도형’은 계열화에 성공한 듯 보인다. 그 위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약속(가제)’이라는 보험회사의 슬로건이 더해지면 완성된 하나의 비주얼이 탄생한다. 웹디자인의 울타리에서 비주얼의 가장 큰 역할은 상품의 컨셉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다. 비주얼은 이렇듯 서로 다른 계열의 형식들(사진, 타이포그래피, 도형)이 하나의 컨셉에 도달하기 위하여 끝없이 닮아가려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계열들의 시각자료들이 실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잘 만들어진) 컨셉은 상당 부분 보는 이에게 자의적 해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웹사이트라는 것이 한국에 정착된 지도 이십 년이 넘어간다. 그 사이 수많은 디자이너 사이에서 반복되어 온 패턴들이 있을 것이다. 반복은 문법화되어 ‘connotation(함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주얼 너머의 컨셉을 읽는다는 것은 웹상에서 수없이 답습된 클리셰들을 구성하는 수동적 순간에 불과하다. 숭고한 회화작품을 볼 때에만 ‘상상계’가 작동하는 것이 아닌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한 가지 윤리적 질문. (웹) 디자이너는 자신이 제작한 비주얼의 어떤 지점에 대해 언술해야 하는가?

오늘날 자신의 손만으로 창조할 수 있는 시각자료라는 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구글을 통해 검색된 아이의 얼굴과 미리 준비된 서체 팔레트에서 잘 어울릴 것 같은 폰트 하나를 집어 든다. 그리고 그래픽 툴에 내장된 벡터 도형 샘플을 선택해 모서리를 잡고 조금 비튼다. 이것들을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비례에 근거해 디지털 캔버스에 ‘배치’한다. 배치는 위의 과정 중 가장 능동적이며, 우연적인 요소가 녹아들어 있다. 손맛이나, 눈길이라고 하는 신체의 불완전한 특성 덕분에 획득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클라이언트 앞에서 그들이 가진 크리에이티브라는 신화를 조금이라도 더 지속시켜줄 의무가 있다. 그들에게 ‘예술성’이란 새롭고(착시) 잘 만들어진 공산품을 위한 스킨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빽빽하게 들어찬 클리셰의 우주를 피하고자 디자이너 스스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이 얼마나 수고스러웠는지에 대해 토로하는 편이 예술에 대한(비의적) 장광설보다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토로는 실패에 대한 변명이 될 가능성이 짙다. 하지만 잘 표현된 변명 하나가 반질한 표면에 균열을 가하며, 그 깨진 틈새 속으로 신선한 담론들을 주입하는 순간을 우리는 가끔 목격하지 않는가.


에픽하이의 ‘born hater’ 뮤직비디오를 시청하다 문 듯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새로움은 세로라는 연출 형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영상이 세로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조형언어들은 모두 형식에 복무하며 하나의 컨셉을 이룬다. 서사는 부재하며 세로라는 형식을 뒷받침하고 있는 조형언어들을 강조하기 위해 애쓴 흔적만이 남아있다. 익숙한 미장셴과 힙합적 제스쳐들이 세로라는 프레임 안에서 새롭다는 착시를 주는 것은 첫 시도라는 측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전에도 세로로 촬영된 영상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세로 영상들이 born hater만큼의 신선함을 주지 못했던 것은 형식에 맞는 조형언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로로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뮤직비디오 문법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진부한 서사들이 흘러넘쳤다. 그것은 단순히 특이하고 싶은 몸부림에 불과했다. 형식에 알맞은 조형언어는(세로에 맞춘 뮤비 속 좁은 공간과 소실점 등) 그 자체로 하나의 컨셉이 된다. 프랑스의 한 영화감독은 ‘영화에 총이 등장하면 그것은 반드시 발사돼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총은 살상용 무기이며 실탄을 넣고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리가 문화적 관습을 통해 미리 답습한 코드를 매개로 해서만 발현될 수 있다. 이미지는 어떠한 문화적 자장 안에 등록되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의미들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총에 대한 코드를 가지지 못한 문화에서 그것은 ‘발사되지’ 않고 ‘던져질’ 수도 있다. 해리포터가 아프리카에서 ‘마법사’가 아닌 ‘샤먼’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born hater의 세로에 적합한 조형언어를 보고 완전히 정복한 듯 여겨졌던 뮤직비디오의 굳건한 문법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쓰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그런. 하지만 이것은 미적 차원이 아닌 지적 차원이다.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비주얼은 미적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이 미디어 친화적 장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새로움이 지적 차원에서 미디어를 통해 대부분 발현된다면(물론 예외도 있지만) 디자이너들이 비의적 지점을(구닥다리 모더니즘) 옹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획자들에게 화난 어조로 ‘디자인에 대해서 조또 모르시잖아요.’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부심 가득한 디자이너들을 배척의 대상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디자이너가 조형에 몰래 심어놓은 숭고한 의미 따위야 가로에서 세로로 회전한 이 간단함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끝) blog.naver.com/clichecliche


ㅇㅇ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4.11.30 http://cafe.daum.net/badabie


게임 노동 일지

글. 그림. 철민



나비

얼마 전에 아는 언니가 일하는 가게에 갔는데. 그 왜 있잖아. 그림 그린다는 언니. 응. 그 언니 술집에서 알바하거든. 그 술집 지날 때면 들러서 술 한 잔 마시고 인사하거든. 아무튼 갔는데, 바에 어떤 남자가 앉아서 언니랑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좀 떨어져 앉으려고 하니까, 언니가 친구라면서 옆에 앉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 옆에 앉았어. 맥주 한 잔 시키고서 그 남자랑 인사를 나누는데 꽤 잘 생겼더라고. 정우성? 조인성? 뭐 그쪽 계열은 아니고. 좀 왜소해서 귀여운 느낌이었어. 근데 나이는 좀 있는 것 같고. 언니 친구니까 삼십대 중반은 됐겠지. 응? 에이. 그런 건 아니었어. 나 잘 생긴 남자 별로 안 좋아하잖아. 잘 생긴 남자는 잘 생긴 값을 하게 돼있어. 뭐 그것도 마흔까지지만. 아무튼. 언니가 맥주를 갖다 주고, 그래서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어. 정치 얘기, 문학 얘기, 영화 얘기 뭐 이런 얘기들을 했는데 얘기를 듣다 보니까 시인인 것 같더라고. 시인인데 시로는 돈을 못 버니까 번역 일, 청탁 오면 글 쓰고 하면서 먹고 사는. 뭐 생긴 것도 번듯하고 목소리도 멋있고 한데 뭔가 좀 찌질한 구석이 있었어. 아니야. 언니랑 사귀거나 썸 타거나 그런 것 같진 않았어. 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같더라고. 언니는 그림 그리고, 그 사람은 시인이니까, 이렇게 저렇게 인연이 닿아서 알고 지내는 거겠지.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안 물어봤어.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재밌더라고. 그 사람이 좀 웃겼어. 그래서 한 잔이 두 잔 되고, 세 잔 되고, 네 잔 되고, 계속 마셨지. 얼마나 마셨는지는 모르겠어. 비면 또 달라 그러고, 비면 또 달라 그러고 했거든. 거기 가면 언니가 맥주를 막 줘. 그래서 일단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아. 그러다가 일 끝나면 언니랑 같이 술 마시러 가고. 그런 식이야. 들어갈 때는 가볍게 한 잔만 하고 인사만 해야지, 해도 꼭 그렇게 된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계속 마시다 보니 결국 취했어. 언니야 일하는 중이었으니까 안 취했고, 나랑 그 남자만 취했어. 보니까 그 사람 어디서 이미 소주를 마시고 온 것 같더라고. 그러니 안 취할 수가 없지. 나랑 비슷하게 계속 맥주 마셨으니까. 근데 그때부터 진짜 진상이었어. 아니. 나한테 껄떡댈 일이 있겠어? 시인씩이나 하는 사람이 나 같은 애한테 관심이 생길 리가 없지. 내가 엄청 예쁜 것도 아니고. 나한테 관심 가질 리가 없지. 웃겨? 왜 웃어? 너는 예쁘냐? 됐고. 아무튼 갑자기 헤어진 여자친구 얘기를 시작하더라고. 그때부터 계속 그 여자친구 얘기만 들었어. 이제 헤어져서 여자친구 아니고 엑스지. 아무튼 그 엑스 여자.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다고. 다시 보고 싶어 미치겠다고. 그 여자랑 있었던 일들, 그 여자랑 헤어지던 날, 그 여자 생김새, 목소리, 그 여자가 좋아하던


거, 싫어하던 거. 일일이 다 나열할 수도 없다. 전부 다 기억나진 않는데, 사적인 이야기들도 꽤 많았어. 가슴 옆에 점이 있었다느니, 그 점을 정말 사랑했다느니. 엄지발가락이 짧고 뭉툭해서 별로였다느니. 시인이라 그런지 막 허황되게 수사들 붙여가면서, 막 비유하면서, 거창하게 막 설명하더라고. 이름 빼고 그 여자에 대한 모든 것을 들은 것 같아. 진짜 상세하게 설명해줬거든. 평소에는 추리닝 바람으로 어디든 다니고, 무슨 전시회 오프닝이나 파티 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하고. 내가 말하니까 왜 이렇게 천박한 느낌이지? 그 사람이 말할 때는 이런 느낌은 아니었어. 뭔가 섬세했다고 할까? 뭐라고 해야 될까. 뭔가 딱 떠오르는 비유 같은 게 없네. 마치 가을이 오고 쌀쌀해진 날씨에 이제 곧 숨이 멎어가는 나비가 있는 힘을 다해 날갯짓을 하는 느낌이었달까? 아냐. 이런 게 아닌데. 나비가 뭐냐고? 그냥 내 나름대로 뭔가 그 사람 느낌을 비유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네. 역시 시인은 시인이구나. 그러니까 날씨가 추워지면 나비가 죽잖아. 근데 그 죽는 순간에도 나비는 그 죽음을 쉽게 맞이하기보다는 조금 더 살고자 날갯짓을 멈추지 않겠지. 근데 점점 죽어가니까 그 날갯짓에 힘이 없겠지. 점점 날갯짓이 느려지고 힘이 빠지고 결국 죽겠지. 이런 느낌? 근데 갑자기 왜 나비가 떠올랐을까? 뭐 한마디로 말해서 헤어지고도 잊지 못하고 찌질하게 구는 그런 남자였던 거지. 어차피 죽을 거 뭐하러 날갯짓은 하나. 그냥 고상하게 죽음을 맞이하면 될 것을. 그런데 그게 진상이긴 진상이었는데 그 표현들이 꽤 멋졌어. 지금 말하면서 생각해보니까 그랬던 것 같아. 좀 손이 오그라들긴 하는데 우아하고 섬세한 느낌? 역시 시인이라 그런가? 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난 잘생긴 사람 싫다니까. 진짜 그날 진상이었어. 네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돼. 그럼 너도 진짜 질색했을 거야. 듣고 싶지도 않은 얘기를, 그것도 여자 묘사, 찌질한 그 얘기를 듣고 있어봐. 그래. 당연히 나도 그랬지. 네 말처럼 나도 도중에 나가려고 했어. 근데 나도 취했잖아. 내가 취해서 간다니까 그 사람이 내 팔을 붙잡으면서 조금만 더 들어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어떡해. 더군다나 그때 언니 바빠서 우리 자리에 있지도 못했고. 진짜 짜증났었어. 아니, 무슨 처음 보는 사람한테 헤어진 여자친구 얘기를 그렇게 해? 안 그래? 그것도 사적인 얘기들까지 줄줄이 늘어놓고. 무슨 줄줄이 비엔나 소세지도 아니고. 응. 비엔나 소세지. 그 줄줄이 달리는 거 있잖아. 그래 미안해. 뭔가 나도 좀 그럴싸한 비유를 들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 그 사람은 잘만 하던데 나는 왜 잘 안 되지? 어쨌든 그랬다고. 그냥 최근 겪은 일들 중에 좀 재밌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했어. 뭐라고? 내가 그 사람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 이름도 기억 안 나는데. 가게 끝나고 언니랑 같이 소주 마시러 갔는데 그러고서는 기억이 안 나. 어쨌든 눈 떠보니까 집이더라. 나도 알아. 조심해야지. 걱정 마.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찌질한 놈한테 당할 일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타입이 아니었어.


결혼시즌이다 무수한 커플들이 결혼을 한다 형 누나 동생 친구 너나할거없이 백년가약을 맺는다 수많은 결혼식을 다니다보니 여러가지 결혼식의 변천사가 머 리속에서 지나간다. 식순도 이젠 꿰고있어 언제쯤 밥을 먹으러 간다 언제 쯤 사진을 찍는다 인사를 하려면 예식시간 몇분전에 가는게 좋다. 신부대기실도 들러주고 신부친구들도 스캔하고 뒷풀이를 가면 정확한 목표지점에 앉는 내 공에 예식장이름만 들어도 소요시간을 알고 신랑 신 부 얼굴만봐도 애처가상인지 공처가상인지 알수있다. 예전에는 결혼식에 초대를 받을때는 100%종이로 된 청첩장이였다. 요즘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청첩장도 진화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청첩장을 받을수 있 다. facebook으로 초대를 할수도 있고 타임라인에 띄 워 친구들이 볼수도 있고 채팅방을 만들어 수많은사 람들에게 모바일 청첩장도 보낼수 있고 개개인에 따 라서 청첩장을 주는 방식 받는 방식에 대해서 간편하 고 스마트한걸 선호하는 사람 고전적인 방식을 선호 하는 사람 병행하는 사람 다양하다. 주위에 결혼을 한 친구들의 청첩장돌린 얘기를 들어 보면 종이 청첩장을 주면 뭐이런걸 귀찮게 만나서 주 냐 간단하게 메세지로 보내지 하는 경우도 있고 모바 일로 보내면 성의가 있니? 없니? 하는 경우도 있다며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있다. 나도 여러경우의 청첩장을 받다보니 모바일청첩장이 던 종이 청첩장이던 가리지않고 받는다. 그리고 왠만 하면 간다.

부 산 오 뎅 이 야 기


(물론 갈사람인지 안갈사람인지 파악해서)어떤형태 의 청청장을 받아서 기분이 좋지않다는건 청첩장이 기분나쁜게 아니라 초대하는 사람의관계가 내가 궂 이 가야할 결혼식이 아닌데 초대했다는것에 대한 기 분나쁨이 아닌가한다. 저번달에는 총5차례의 결혼식엘 다녀왔다. 오뎅팔아 축의금으로 다 나가는 것 같은 한달이었다. 지방에 조 카결혼식도 다녀왔다. 그래도 평생에 한번인데 축하 하는 마음 가득안고 다녔다. 받아놓은 청첩장은 다 소 진됐다. 당분간은 결혼식은 없나보다 하며 11월을 맞 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날 시장을 다녀오다 돌아오는길 오토바 이를 타고 다니는 나는 적색신호에 걸려 신호대기중 이었다. 차가 없다 신호위반을 하고 싶었지만 걸리면 범칙금이 얼마야? 게다가 벌점도 있잖아...모든 지표 가 바닥을 달리지만 OECD 가입국의 국민이라며 브 레이크를 꽉잡는다. 그러던 찰라 내옆에 승용차가 한대 나란히 선다 한 3 년 만에 만난 친구였다 오랜만이라는 짧은 인사와함 께 차창 밖으로 손을 쑥 내민다. 나도 오랜만이라며 악수를 하려는 순간 악수를 청하는 줄 알았던 손에서 신호위반도 하지않았는데 범칙금 스티커가 발부된다. 나 다음주에 결혼해~~

@odeng2004 잘못된 만남


국가란 무엇일까? (11회)

마감 일자의 안이함이 드러나는 주제이긴 하지만 오늘은 단통법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고 한다. 단통법은 이미 여기저기에서 많이 다뤄졌기 때문에 관련 이해의 수준정도로 간단히 요약 정리 하고 시작하겠다.

소비자가 단통법으로 겪는 상황은 1. 요금제 변경시 할인 금액분에 대한 보상 또는 배상이 발생 (번거로워짐) 2. 단말기 지원금이 매우 낮음 (전보다 기기 값 상승) 3. 해약시 지원금과 계약에 대한 위배 금액 문제 복잡

통신사가 단통법으로 겪는 상황은 1. 주가 상승 (닥치고 이득이라고 시장은 판단중) 2. 단말기를 구매 원가를 공개해야 하지만 이번 법 처리과정에서 삼성전자의 반대로 누락 3. 대리점에게 줘야 할 프로모션 금액이 줄어듬 (이익률 상승)

대리점이 단통법으로 겪는 상황은 1. 과다 지원금 지급시 형사고발 및 벌금 2. 통신사에서 프로모션 금액 수익이 줄어들어 영업의욕 및 이익 감소 3. 소비자가 휴대전화 시장에 무관심 해짐 시장이 얼어붙음

뭐 대략 이렇기 때문에 짧은기간 시행된 단통법이 기업이 악법이다 뭐다 말이 많았는데, 아이 폰 6의 출시를 기점으로 아이폰6 영업을 위해 일시적으로 대란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언급될 정도로 보조금이 풀려버렸다. 이와 관련해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11월 1일 아이폰 판매분과 관련해 정부가 지정한 금액 이외의 지원을 받는 모든 기기의 개통이 취소되며 단말기를 가져 간 사람들 조차도 그 기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던 밤중에 줄 서기 핸드폰 구매 행렬을 재현하고 말았으니 적잖이 미움을 샀을 것이다. 빠른 시간내에 행정 적 처벌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단순 벌금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통신사 임원의 형사고발 마 저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

정부는 그리고 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은 단통법이 시작되면 단말기의 구매 원가가 공개되고 누구나 비슷한 지원금 범위에서 안정적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구매 원가는 여전히 비밀이고 지원금은 줄어들어 소비자는 고르게 전보다 비싼 금액으로 전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휴대전화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시장은 안정된 것이 아 니라 금액 상승으로 거래가 줄어든 것.

이렇게 불만이 쌓여가는 와중에 아이폰이 출시되었다. 그리고 시장 점유율 전쟁에 아이폰이


글. exxx

동원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 한국의 스마트폰 시장에 아이폰 3gs 가 등장하면서 한국 의 스마트폰 시장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는 것. 어째 외세의 침략 만이 변화의 시발점이 되는것이냐 말이다. ㅠㅠ

가장 고가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아이폰이 큰 보조금 지원으로 풀렸다. 풀린 형태를 보니 특정모델에 한해 보조금이 아닌 대리점 프로모션 금액을 크게 제공했고 극단적으로 벌금을 내 고도 남을 만큼 프로모션 이익을 챙기면 된다는 판단하에 대리점들은 아이폰 대란 이란 판을 짠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안좋은 것이라고 언급까지 했던 심야 단말기 구매 행렬이 재현되었 다. (그래 이익앞에서 임금님이고 나발이고..) 앞서 말한 것처럼 단통법에 어긋난 계약 단말기 는 문제가 될 것이고 앞으로 이와 관련된 갑론을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11월 1일에 있었던 이 사건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1. 소비자는 대부분 지금 단통법을 위반하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 2. 통신사와 대리점 양측 판매자도 위법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 3. 이 법을 둘러싼 소비자, 통신사, 대리점 3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그야말로 대놓고 위반 사례가 등장한 것이다. 악법도 법이냐는 질문도 괜히 해봄직 한 상황이다. 단통법은 그 법 자체로 보면 아주 악질적인 법도 아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 면 코걸이 같은 긴급조치나 국가 보안법 같은 게 아니다. 아주 좁은 범위의 휴대 전화 단말기 시장을 둘러싼 거래자 간에만 해당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 법이 사람들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고 욕망은 법을 무시한 채 날뛰었다. 그것도 법이 시행되고 얼마 되지 않은, 그러니까 간단 히 말하자면 “시범 케이스”를 잡아 낼 타이밍에 말이다.

그런데 이걸 단순히 욕망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누가 왜 만든 것 인가 말이다. 어쩌면 애초에 법이 호응과 동의를 구하지 못한 게 우리가 이상항에서 짚고 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시작 전부터 말이 많았고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법을 어기는 상황 이 횡행한, 그리고 위법임을 알면서도 모두가 뛰어든 것을 보면 지금 이 법이 사람들의 마음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나라에 이렇게 기괴하게 만들어진 법이 과연 이것 하나 뿐 일까? 몇 개의 함정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뛰어넘고 철 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절대 내가 아이폰을 못사서 이러는게 아니다.

그냥 옛부터 뒤틀린 베알이다.

끝.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야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서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 윤동주

그림. 지인

여행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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