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글. 사진. 아홉시 영화로 읽는 시공간 - 영화 베테랑의 진정한 베테랑, 류승완. / 글. 곡주대비 나의현대예술순례 #02 목격과 증언 사이에서: 이쾌대 展 / 글. 사진. 황정운 작곡가 B의 노트 - 오선 위에서 홀로서기 / 글. composer B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택시를 탔다 - 01. 첫째형 나빠요. /글. 사진. 고수진 물질과 비물질 - 16.핑거팁 모이스쳐 / 글. 김종소리 사진. 황은정 옆사람 인터뷰 - 물 만난 영화를 빛내다 / 글. 정리. 이내 Daily Archive - 꿀 도둑 / 글. 모음. 김혜미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소개소 / 글. 신당동 파르한 다시 쓰는 자본주의 / 글. exxx 건축이 좋아 - 23. 핀란드의 자연. 그리고 알바알토 / 글. 사진. aoikasa 조선소 노동자 - 그림. Min the Elephant Je m’en fous / 글. 사진. 김성연 Road - 9. 쏘맥 / 글. exxx
안녕하십니까? 근 5년을 만들고 있음에도 오보이 인디잡지 특집에도 실리지 못한 월간이리입니 다. 앙심을 품은채로 인사말을 시작합니다. 하하. 날씨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덜 덥고 시원하고 어디서나 술마셔도 기분좋은 계절 이 된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술을 못드시는 분들은 커피나 차를 마셔도 좋을 계절입니다. 비록 컬러도 아니고 광범위하며 열정적인 독자측은 없지만 어쩐지 보고있는 누군 가를 갖고 있는 월간이리에는 이달에도 새로운 코너가 2개나 생겼습니다. 재미있 게 구성하려고 새로운 필자분과 함께 열심히 대화를 나누어 내놓은 코너들이니 너 이녀석 얼마나 잘났어? 하는 멱살잡는 마음으로 즐겁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벌써 9월입니다. 올초에 뭐가 되니 마니 못하니 하니 했는데 이제는 그런건 하나 도 중요하지 않고 세월 간 것만 탓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여러분들은 이런 후 회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언제든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있으시면 이야기 하시고 세상을 바꿔나가시는 훌 륭한 독자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희도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 도록 가능한한 뒤에서 뽐뿌를 넣는 잡지가 되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연재를 원하는 분들은 ‘월간이리 기고안내문’으로 검색하시거나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시면 친절 안내 해 드리고 있습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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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화 로
영화 베테랑의 진정한 베테랑, 류승완.
보 는 시 공 간 류승완 감독의 커리어에 재미난 이력이 있다. 그는 현재 천만 감독 배열에 ‘등단’ 한 스타가 되었지만 과거 박찬욱 감독의 복수시리즈 중 두 개의 작품에서 지나가는 행인과 중국집 배달원 역할을 했다. 그가 박찬욱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인력 절약 목적에서 출연 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왠 뜬금 없는 류승완의 과거 재능기부 (?) 이야기로 시작을 한 이유는 이 작은 에피소드가 그가 연출했던 몇몇의 잘 알려진 작품 빼고 내가 아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억을 좀 짚어보자니 몇 개 더 생각 나긴 한다. 그가 말을 아주 잘하고 유머가 넘치는 입담꾼 이라는 것 (주진우 기자의 팟캐스트에서 들은 에피소드 몇 개들), 진보 성향을 가진 감독,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 아이’의 형아. 위에 늘어 놓았듯 난 그의 팬은 아니었나 보다. 류승완 감독을 좋은 사람, 감독으로 간주하지만 그의 작품 에 대해서 크게 열광 한적도 실망 한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연출한 모든 작품을 다 본 것은 사실이다). 다만 다찌마와 리를 보고 목이 꺾일 정도로 웃으며 극장을 나왔던 기억은 난다. 이러한 맹숭맹숭한 태도가 그의 최근작 베테랑을 보고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제일 좋았던 것은 그가 만 들었던 소소한 작품들 에서 그가 발휘했던 키치한 감성과 테크닉이 고스란히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살 려지고 순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난 류감독의 이런 장기가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 베를린의 가 장 큰 실패요인 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누적관객 천만이 넘은 영화가 됐으니 자세한 시놉은 생략하기로 하자. 잘 알려져 있듯이 영화는 정의 로운 형사(들)과 부패하고 부도덕한 재벌 3세의 대결을 다룬 영화다. 뭐, 정의가 승리하고 악은 패한다라 는 동화 적인 결론은 말 안해도 다 아실 듯. 영화를 보고 세가지 에 대해 감탄 했다. 그리고 그 세가지를 고하는 것이 이번 기사의 메인 테마라고 할 수 있겠다. 감탄 포인트 원: 워낙 호불호가 뚜렷한 성격이라 별로 좋아하는 않는 배우가 끼어있으면 절대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지 않는다. 다운 받아서도 안보지만 글을 써야 하는 책무가 있을 때만 억지로 보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면 베테랑도 그랬다. 써야 할 글이 있기에 억지로 나쵸 먹으러 간다 생각하고 표를 끊었다. 유 아인이 주연급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가장 큰 원인이다. 좋은 영화가 넘치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배 우가 나오는 영화를 굳이 봐야하겠는가.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지금, 난 그에게 몹시 죄스럽고, 그가 쏟아 냈을 엄청난 노력과 열정에 숙연하기 까지 하다. 이 영화에서 유아인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정말 잘 하 지만 역대급 최상이라고 하기엔 살짝 무리가 있다. 다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대급 최상의 연기 라기 보다 역대급 최상의 노력과 열정이라고 봐도 좋을 그의 분투가 그대로 씬마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난 그 것이 아름답고 숭고해 보인다. 최고의 배우가 될 것이라는 전조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악역이기에 열심히 소리를 지르고 미간을 후벼 팠다는 얘기가 아니다. 매 장면에서 그는 그가 해석한 ‘악’ 을 온 몸으로 전달한다. 상징적이고 관습적인 표정과 몸짓 몇 개가 아니라 눈동자의 움직임, 입꼬리, 손 짓 에서부터 걸음 걸이 까지 그의 모든 ‘장치’를 이용한다. 악역 연기의 교본이라기 보다 잘 써낸 그만의 해설 서를 읽은 기분이다. 감탄포인트 투: 몇 몇 이름있는 감독들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긴 하지만 류승완 감독 작품들에 선 유난히도 그의 단골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단골 주연인 황정민을 제외하고 라도 유해진, 천호진, 마 동석, 정만식 등의 출연을 보고 있노라면 류승완 감독에 대해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신뢰도를 가늠하지 않 을 수 없다 (아트박스 사장역 카메오로 등장한 마동석은 압권!). 좀 더 낭만적인 컨택스트로 말하자면 재 능 있는 갱 (gang) 들의 멋진 한 탕으로도 보인다. 감탄포인트 쓰리: 두 번째 포인트와 연계되는 이야기 이면서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사항이다. 이 대목에 서는 배우들이 가진 감독에 대한 신뢰도가 아닌 감독이 가진 배우들에 대한 신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 고 싶다. 베테랑을 보고 가장 특이하면서 감탄스러웠던 점은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주연급 두 배우 뿐이 아닌 모든 주조연 배우들의 행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필자가 이번 영화를 유독 집중력 있게 봤 기 때문이 아니라 감독의 역량으로 찬사 되어야 할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연이라고 할 수 있는 진경이나 유해진, 정웅인, 정만식 배우 분의 몸짓이나 표정 들은 일반적으로 주연배우를 찍듯 디테일 하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보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정성 스럽게 그려진다. 가령 유해진이 유아인의 범죄를 뒤집어 쓰기를 권유 (강요?) 받는 식사 씬 이나 진경이 경찰서에서 황정민에게 뇌물에 흔들렸던 자신을 고백하는 씬 에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지는 그 들의 시선처리나 주연배우 (황정민) 의 전유물로 할 수 있었을 법한 영화의 키 대사 “쪽팔리게 살지 말자” 를 진경에게 부여하는 것 등은 류승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배우들에 대한 신뢰가 단적으로 드 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좁은 공간 (예. 정만식의 아파트에서 여섯 명이 뒤엉키는 패싸움 씬) 에서 춤을 추듯 짜여진 액션 (정 두홍과의 콜라보가 또 한번 빛을 발한 작품이다)은 류승완이 현존 하는 감독들 중 액션을 가장 잘 쓰는 ‘ 베레랑’ 임을 다시 한번 증거한 장면이다. 흐뭇하고 즐겁다. 다찌마와 리를 보고 키득거리며 토요일 저녁 잘 때웠다고 중얼거리며 극장을 나온 것 이 불과 5년 전이다. 희한 하게 웃긴 B급 액션 영화를 만든 감독이 지금 ‘천만 감독’ 이 되었다. 그의 성공 이 유달리 므흣한 것은 장님이 문고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그가 차곡 차곡 쌓아온 실력과 인맥이 정직하 게 인정받았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참 요새 보기 드문 미담이자 류감독이 늘 추구해 왔던 ‘정의로 운 영웅’ 스토리가 아닌가.
글. 곡주대비
나의현대예술순례 #02 목격과 증언 사이에서: 이쾌대 展 글. 황정운
1_ 이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메두사 호의 뗏목>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두운 무채색으로 가득한 캔버스, 옷을 입은 것인지 벗은 것인지 불분명한 사람들의 모습이 비슷했다. ‘ 어쩌면 광기의 문이 활짝 해방되어 버렸기 때문에 몸을 덮는다는 것이 무의미할지 몰라’ 나는 이쾌대의 <군상 Ⅳ> 앞에 서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체 크기가 177 x 216cm나 되는 이 그림은 압도적이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 속 역동성에서는 하나의 지향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뚜렷한 선과 악의 구분도 없었다. 제각기 분열되어 발산하는 혼란만이 있을 뿐. 가라앉는 배의 사람들처럼 죽음을 향한 근원적인 공포가 사람들 얼굴에 담겨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던 날은 세월호 사고로 사망한 희생자 일부에게 정부가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뉴스를 읽고 나온 뒤였다 (첫 의결은 아니며 지금까지 희생자와 생존자를 합쳐 약 80 여명에게 배상금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그 뉴스를 듣고 서재에 있는 쁘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책을 다시 읽어보다가 집을 나섰다. 지금 내 앞 이쾌대의 군상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그 날의 혼란과 조금은 같은 것일까. 그의 그림 앞에서 지금까지의 나의 미의식을 전복시켜 버린 세월호라는 표식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고 체계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었다. 적록색약이라는 한계 때문에 적색과 녹색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게 유년기부터의 콤플렉스였는데, 시력검사 그림의 숫자를 못 읽는다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었으나 나 홀로 주변 시선을 만들어내 부담스러워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조금씩 미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일종의 전환이었다. 美의 세계는 색이 흐릿한 세상에서 나를 구원했고, 때문에 의심할 수 없는 眞의 영역이었다. 내가 더듬거리며 만지던 예술의 세계는 매우 안정적이었고, 그 질서를 깨트릴법한 수 많은 외부의 사건을 미와 추의 기준으로 속아내 버렸다. 요컨대 나는 사회와 단절된 채 고도로 추상화된 미학의 세계에만 빠져있었던 것이다. 내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귀를 닫은 채 나는 양식화된 부르주아의 살롱에 인상주의가 어떻네 하며 고고하게 머무를 뿐이었다. 실상 무엇이 정말 예술인가 고민해본 적은 드물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저 감상자에 불과했다.
<군상 Ⅳ> 이쾌대, 캔버스에 유채, 177 x 216cm, 1948
2_ 그러나 세월호 이후 나를 구성하던 견고한 아이덴티티에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사고 이후 현재까지 1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시간이 내가 믿어온 질서와 안정의 미의식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껏 내가 감상해온 예술의 세계는 정적이었다. 예술의 감상 과정에 잡음이 침식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가 조용한 질서 속에 놓여 있어야 했다. 내가 감상하는 대상도, 나 자신도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는 내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질서가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에 내가 절대선이라 믿은 미의 세계도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는 아도르노의 말은 오늘 날에도 유효했다. 세월호 사고 이후에 새롭게 나를 구성하는 것은 우아하기만 했던 미의식에 대한 거부와 불안감이었다. 이쾌대(李快大)가 느낀 불안감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최근 의미가 활발하게 복권되고 있는 20 세기 월북예술인 중 한 명이다. 백석, 정현웅, 박태원, 임화가 그랬다. 그들은 남과 북, 우와 좌라는 구분보다는 조선이라는 아이덴티티로 스스로를 규정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록 이념이 그들을 6.25 이후 북으로 이끌었지만, 이토록 간극이 깊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디아스포라적 분열은 이쾌대를 읽는 키워드 중 하나다. 사실 그 자신은 얼마나 많은 모순을 경험하며 살아왔던가. 조선 풍속을 벗어나 서양화풍을 배웠지만 결국 열강에 지배되는 아시아 화가라는 한계, 동경 제국미술학교에서 유학했지만 결국 식민지 경성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이쾌대가 미의식을 성장시키는 과정 자체가 모순과 분열이었고 그는 고스란히 그걸 기억할 수 밖에 없었을 거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다. 제국이라는 절대 악, 절대 목표, 절대 지향점이 사라졌고 해방은 무질서를 배설했다. 메두사의 시선은 수 천 만개로 늘어나 방향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때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신하였을까?) 이쾌대도 그 혼란을 목격하였을 것이고 그의 미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지금의 혼란을 누군가는 전달(증언)해야 했는데 언어는 왜곡되기 쉬웠고 무질서 속에 표류하기 쉬웠다. 그래서 그는 목격한 것을 비 언어적 예술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태생적 분열을 경험했기 때문에 시대의 분열을 읽을 수 있었고, 읽을 수 있기에 비로소 누군가에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 대상들 모두가 증언의 대상이자 동시에 각자가 증언의 주체였다. 군상에게는 역동성이 느껴졌고, 그것을 그린 이쾌대의 시선에서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내가 목격한 것을 말하고 싶다, 혹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이쾌대, 캔버스에 유채, 72 x 60cm, 1948
3_ 20세기 해방 후의 자유. 자유로 표상화된 혼란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사회의 분열을 전달하는 예술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 예술에 참여하는 우리 역시 균열을 목격하고 이해하려는 역동성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이었다. 세월호 사고는 이 두 가지를 살아남은 모두에게 환기시킨 사건이었다. 그것을 깨달아버린 지금,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을-왜 증언해야 하는가? 이쾌대에게 예술을 통한 증언은 현재를 목격하고 기록하여 그 다음 방향을 알고 싶다는 혹은 방향을 만들고 싶다는 출발점이었다. 그 출발점에서 분열을 봉합하고 싶다는 욕망의 한 갈래다. 틈에 갇혀있을 수만은 없다. 모든 공간이 혼란으로 가득하다면 중요한 것은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방향성이 생기면 역동성이 뒤따라오고 군상들은 그 방향을 따라 또 움직일 것이다. 그 움직임 속에서 외치는 것이다. 질서와 조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것 역시 삶의 하나이며, 무엇보다 이 시대를 구성하는 존재양식의 하나임을 말이다. 이 역동성과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예술이 지닌 증언의 힘이라고 믿는다. 누군가는 목격한 것을 증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전시실을 빠져 나오며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앞에 섰다. 전달과 증언은 타자가 아닌 자신의 균열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안의 수 많은 군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타자의 균열을 읽어낼 수 없다. 아이덴티티의 붕괴-재구축이 반복될수록 예술을 통해 사회를 증언하려는 자격이 내게 부여된다. 이제서야 균열을 막 인식한 나에게 역사와 타자를 증언하는 것은 아직은 어렵다고 느꼈다. 아직 나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선은 더 많이 목격하고 싶다. 내 주변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주위의 사람들은 어떤 붕괴를 경험하고 있는지 우선은 그것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 그런 후에라면 내가 목격한 것에 기대어 적어도 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현대인으로서의 나에 대해서만큼은 증언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조금은 출발선에 선 기분이었다. 그래서 현대예술의 의의는 동시대의 붕괴를 내게 증언하여 결국 그 시대의 하나인 나 역시 분열된 존재임을 자각하는데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제 나도 당신에게 무언가를 증언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로 성장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목격과 증언 사이에 서 있다. 분열된 우리들의 군상과, 그리고 그것을 그려내는 현대예술을.
전시 정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Lee Quede: An Epic of Liberation) 2015.11.01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제1,2 전시실. 관람료 무료 www.mmca.go.kr
작곡가 B의 노트 <오선 위에서 홀로서기> 글.
composer B
1악장. 학교를 떠나 나는 작년 2월에 학교를 졸업했다. 그것도 전통적으로 휴학과 복학, 재휴학을 반복하며 졸업을 미루 는 일이 난무하는 음대에서 단 8차 학기 만에 졸업했다(물론 군 휴학은 했지만). 당시 나는 교수님의 영향권으로 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졸업 이후 2년 정도는 계속 한국에 있으면서 혼자 유학을 위 한 준비를 하겠다고 이야기(라 쓰고 선제공격이라 읽지)했었다. 워낙 좁은 바닥이다 보니까 이렇게라 도 하지 않으면 졸업을 하고서도 교수님이 떠넘기는 온갖 잡무에 시달릴 것 같아서였다. 물론 괜히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나도 실제로 그 2년의 시간동안 어학공부에 전념해야했기 때 문이다. 어학 자격증이 없으면 외국의 학교에 지원 자체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쭙잖은 실력으로 어찌어찌 합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토론식 수업이 주를 이루는 외국의 대학원 에서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국어로 토론을 하라고 해도 머리가 아파오는데 그걸 외국어로 하라니, 세상에나.)
그런데 사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공부 외에도 한 가지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교수님의 손 을 벗어나 온전히 나 스스로의 힘으로 곡을 써보는 일이었다. 보통 외국 대학원의 작곡 전공 시험은 자 신이 그동안 썼던 작품들 중에서 괜찮은 작품을 골라 포트폴리오로 제출하고, 교수들 앞에서 그것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유학을 준비하는 상당수 학생들은 한국에서 학부 과정을 다닐 때 썼던 곡을 제출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 역시 학부 새내기 시절부터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좋은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던 터였 다.
하지만 대학에서의 작곡 공부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말 많이 달랐다. 애초에 내가 계획했던 작품 의 큰 틀과는 상관없이 교수가 ‘옳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고쳐 써야만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작품의 전체적인 짜임새나 호흡보다는 단편적인 이론에 집착해 앞뒤가 어그러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상 당수의 교수나 강사들이 강박적으로 가지고 있던 ‘우리는 한국적인 색채가 담긴 작품을 써야한다’는 생각들이 만들어낸, 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던 모습의 곡들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보고 싶다).
아무튼 앞서 계획했던 2년 동안 교수님은 나를 되도록이면 동 대학원에 묶어놓고 싶어 하셨다. 표면상 의 이유는 유학 가기 전까지 혼자서 힘들게 공부하느니 함께 곡을 쓰며 준비를 해보자-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나를 조교로 만들어 온갖 일들을 다 떠넘기고 싶어서 그러셨던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역시 위에서 언급했던 이유들로 인해서 이래저래 학교에 질려있었던 상태였고, 교수님의 권유 여부와는 상관없이 졸업과 동시에 더 이상 한국의 대학에서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는 교수님 앞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방문을 닫고 나올 때는 잘 몰랐었다. 그냥 곡만 잘 쓰면 될 줄 알았으니까.
2악장. 말로만 듣던 자기와의 싸움 나는 그 이후로 기특하게도 정말 혼자서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갓 학교를 졸업한 젊은 학생이 혼자서 무언가를 창작 한다는 건 뭐랄까, 정신과 실험에서 피 실험자와 실험자의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교수님에게 레슨을 받으며 곡을 쓸 때는 ‘정말 이걸 내가 작곡했다고 말할 수 있겠나’하고 욱하는 마음이 생겨도 다음 시간까지 교수가 지시한 사항들에 맞춰서 어쨌든 수정만 잘 해간다면 일단 일주일 동안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라면, 정말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을 뜻했기에 모든 것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짜놓은 계획대로 곡을 조금씩 써 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곡을 쓰던 나’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관찰자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그 악보를 냉정하게 다시 관찰해보고 ‘너라면 이 음악을 다시 듣고 싶겠어?’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머릿속에서는 자신만만함과 소심함이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주도권을 뺏고 뺏겨가며 공방전을 벌여댔고, 너덜너덜해진 심리 상태 때문에 정작 곡은 단 한 마디도 쓰지 못하는 날이 거듭되기도 했다.
솔직히 정말 힘들고 불안했다. 물론 뒤에서 칼을 들고 날 쫓아오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절대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말로 힘들면 혼자서 새로운 곡을 쓰는 건 그만 두고, 학교 다닐 때 썼던 작품이나 손보며 유학 전까지 맘 편하게 지내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거기서 그냥 끝낸다면 오히려 그로 인해 엄청난 패배감을 느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소리 뻥뻥 치며(물론 속으로) 자신 만만하게 학교와 교수님의 품을 박차고 나왔는데, ‘아 역시 아직은 무리야’하고 둘러대며 그만두는 스스로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운동선수들이 부상을 당했을 때 가장 힘든 것은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것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내가 혼자서 곡을 쓴다고 보냈던 시간들이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 지켜봐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견뎌 내야하는 이 시간이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냥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늘 기본 옵션처럼 따라다녔고, 그럴 때면 망상이 뭉게뭉게 커져서 당장 눈앞에 있는 곡 쓰기에 대한 고민이 아닌 다가올 삶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새벽 서 너시는 되기 마련이었고 짧은 밤 산책으로 허한 마음을
달래거나, ‘에라 모르겠다’며 다 그만두고 친구와 술을 한 잔 하며 마음속의 찝찝함을 걸러내곤 했었다. 위인전이나 부상에서 회복한 스포츠 스타를 다루는 기사에서 상투적으로 보던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이 마냥 폼 나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고, 또 그걸 지켜보면서 한 쪽에서는 그 괴롭힘을 이겨 내려고 방어와 반격을 동시에 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과정인데, 그걸 몰랐으니.
3악장. 그리하여 모두에게 은총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곡은 무사히 완성되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서 나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그저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치부되던 것들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 도록 큰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아마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다 비슷할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아직 느껴보지도 못한, 더 크고 깊은 어려움에 빠진 창작자들이 더 많을 텐데 나는 그 부 스러기에 혀만 대보고 ‘너무 써서 못 먹겠다’며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아이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 고, ‘너는 잘 풀렸으니까 하는 소리’라며 핀잔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더더욱,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자신과 지독하게 싸워야 하는 창작자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게 끝내주는 멜로디와 코드가 나오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손 가는대로 명문이 나오는 은총이 내려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들 모두가 대박을 쳤으면 좋겠다. 예술적 성취는 당연하고 부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명성도 얻어서 그들이 했던 ‘개고생’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지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이미 수 천 년에 걸쳐 입증된건데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얼마 전에 글(QR코드 참조)을 읽다가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한 예술가가 성공의 반열에 오르면 자신이 이력서를 쓰는게 아니라, 세상이 이력서를 써준다’고. 뭐 굳 이 역사에 남는 성공의 반열이 아니라 작은 성공이라 하더라도 좋다. 몇 십 년 동안 스스로 이력서를 써야하는 상황만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언젠가는 세상이 이력서를 써 주는 날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더 강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진 ‘성공한’ 예술가가 되었 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어 내가 쓴 글을 보고서 ‘니가 뭘 했는지 몰라도 하나도 안 부러워’ 하며 비웃어 주는 예술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창작의 은총이 내리길 함께 기도한다.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택 시 를 탔 다
S#1. 천호 우리 집 –성신여자대학교, 15300원 - ‘첫째 형 나빠요.‘
글, 고수진 (gomin19@hanmail.net)
늦잠을 잤다. 학교 앞에 약속이 있었는데. 아이고. 부랴부랴 카카오 택시를 켜 택시를 잡는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경로 안내를 시작합니다).” 천호시장을 돌아 현대백화점 앞에서 신호를 받을 무렵이었다. “저기, 아가씨 카카오택시 어플은 어떻게 하는 거요?” “어.. 목적지를 입력하면 근처 가까운 택시에게 호출이 가는 것 같아요.” “아- 아가씨가 기사를 찍는 게 아니야? 지도에 기사들이 쫙 떠서 아가씨가 찍는 기사가 호출이 가는 건가 궁금했어.” “하하하하 아녜요.” “참 신기한 세상이지? 나도 다음에 택시 탈 때 해보려고. 나도 택시 기사지만 택시를 자주 타. 하하하”
카카오택시 작동방식이 꽤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카카오택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하시며 웃으시는 기사님과 어느새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가게 되었다. 뒷 자석에서 기사님을 살펴보았다. 머리의 반이 하얗게 세고 목소리에서는 쇳소리가 나셨다. 종이컵에는 담배꽁초가 꽤 많았다. 여름의 시작 무렵이라 에어컨을 빠방하게 틀어 놓기를 원하는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기사님은 약간의 감기기운이 있으신 듯 했다. 약간 땀이 나는 계절인데도 다소 두툼한 등산바지에 얇은 긴팔을 입고 계셨다. 나는 창문바람을 더 좋아해서 에어컨을 꺼도 괜찮다고 했다. 룸미러 사이로 기사님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기사님은 땡큐라고 짤막하게 말씀하시며, 택시의 에어컨 바람이 뼈를 삭게 한다고 여름에는 에어컨 때문에 힘들다고 하셨다. 얇은 볼 살 사이로 깊은 주름들이 보였다. 광진교를 건너갈 때 룸미러를 보시며 말씀을 이어 가셨다. ‘아가씨, 여기 광진교가 만들어진 지 오래 되었어. 내가 올해 70인데, 한강철교 다음으로 만들어 진 거야.’ 기사님은 웃으시며 내게 천호에 살고 있냐고 물으셨다. 기사님은 하남에서 사신다고 하셨다. 고향인 하남에 꽤 땅이 많아 어린 시절에는 유복하게 살았는데, 첫째 형의 사업 실패로 어려워졌다고 하셨다. 이내 목적지 까지 약 20분 동안 본인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이야기해 주셨다. 천호대로 초입. 오전 10시30분. 기사님의 원래 꿈은 요리사였다.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는데, 그 시절 장남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집안에 땅이 좀 있었기에 첫째 형은 든든한 지원 속에 대학까지 졸업하게 되었다. 큰 형은 대학 졸업 후 크게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업은 결국 많은 빚을 내게 되고 결국 부모님의 땅을 팔아서까지 그 빚을 갚게 되었다. 막내의 꿈은 그 땅과 함께 증발하였다. 중졸이었던 기사님은 집의 생계와 꿈 사이에서 고민하다 중국집에 취직을 했다. 중국집에서 그렇게 20대를 보내니 어느새 자신의 자그마한 가게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 해 어머님께서 치매에 걸리시고 말았다. 모두 다 사는 게 팍팍하다며 어머니를 모시기를 거부하는 상황 속에서 결국 막내는 가게가 있다는 이유로, 부양할 가정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형들은 여유가 없었고, 누나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시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큰 형은 집안의 재산을 다 가져갔음에도 살기 팍팍하다는 이유로 연락도 잘 닿지 않았다. 어머니는 7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때 막내의 나이는 37. 그리고 다음 해 둘째 누나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 “가족들이 너무 했네요.” “가난이 죄지. 그때 내가 이 답십리에 중국집을 냈었거든, 여기 답십리가 예전엔 달동네였어. 엄청 가난한 동네야. 여기 옛날 물건 파는 빌딩 이게 김일이 알아요? 박치기 선수 그 사람 빌딩이었어.”
결혼 후,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제 소박하지만 알콩달콩 잘 살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내가 암에 걸렸단다. 간암. 가족들에게 돈을 빌려 항암치료를 해 보았지만 아내는 좋아지지 않았다. 택시와 중국집을 하며 부단히 돈을 모았지만 항암치료는 한 집의 경제력을 무너트렸다. “아내가 암으로 죽은 지 4년 되었거든, 가난이 아가씨 사람을 참 무기력하게 한다오.” “그래도 내가 자식농사는 잘 지었어. 첫째형은 벌써 하늘나라 갔지. 근데 그 집 자식들은 어려서부터 돈을 물 쓰듯 써버릇해서 아직도 시집도 못가고 나이가 40이야. 내 딸은 대학도 장학금 받아서 다니고 결혼도 지가 모아서 갔어.” 여전히 첫째형을 원망하는 듯. 기사님이 첫째형과 자신의 자식을 비교하며 말씀하실 때 씁쓸함이 밀려 왔다. 다른 형, 누나들 모두 막내처럼 부모님의 돈을 다 끌어다 쓴 첫째를 야속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사님도 이제 쉬셔야죠.” “쉬다가 나온 거야. 젊었을 때 계속 쉬지 않고 일해서 그런 가? 집에서 좀 쉬니까 일하고 싶더라고. 평생 일할 팔자 인가봐. 허허허 나야 뭐 낼 죽어도 오늘 죽어도 여한이 읍서.” “그래도.. 아, 메르스 조심하셔요.” “늙은이야 뭐.... 아가씨 왼쪽이 떡전교야. 옛날에 할머니들이 앉아서 떡을 팔아서 떡전교야. 싸게 팔았어. 한 봉다리에 500원 300원 그랬지. 그 할마시들도 참 열심히 살았지.” 기사님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학교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곱씹었다. 가난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난 부모님 덕택에 참 걱정 없이 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오늘은 꼭 부모님과 저녁을 같이 먹어야겠다.
핑거팁 모이스처
한 달 간 쉬면 좋겠어. 쉬다니? 네? 대신 월급의 반은 지급해줄게. 지금 회사에 일이 없어서 네가 나와도 도와줄 것이 없어. 딱 한 달만 쉬고 다시 나오면 될 것 같아. 곧 받을 일들이 있어서. 그런데 이번 달은 좀 힘들어서 말이야. 네가 이해를 해주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주실 때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응.
한 달이 지났건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월급의 반도 입금되지 않았다.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팀장 새끼는 어영부영 이야기를 질질 끌었다. 나는 시체의 머리채를 움켜쥔 팀장의 모습을 상상했다. 시체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팀장 새끼는 그 시체 아닌 시체를 어딘가에 묻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삽질이 이어지고 숨은 끊어질 것이고, 잠깐, 그게 나 아니야? 그래서요? 제가 궁금한 건 제가 언제부터 나가면 되는지인데요. 아, 미안한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을까? 일 들어오기로 한 게 아직 들어오질 않아서. 그럼 그, 말씀 드리기가 조금 죄송하긴 한데요. 그, 월급의 반 말인데요. 그건 혹시 언제쯤 입금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미안. 그거 아직 입금을 못해줬구나. 내가 바쁜 거 끝나는 대로 입금해주고 먼저 연락 줄게. 미안. 아니에요. 정신이 없으시면 천천히 주셔도 괜찮습니다. 응, 그래. 그럼 내가 곧 연락 줄게. 네, 수고하세요. 그런데 이 새끼, 월급도 못 챙겨줄 정도로 바쁘면 나 써도 되는 거 아니야? 뭐지? 그만 두라는 건가? 에이 설마. 그런 거면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어? 그냥 그만 두라고 하겠지. 4대 보험도 안 해줬는데 내가 신고 못할 처지인 것도 알면서 굳이 이렇게?
일주일하고도 이틀이 지날 때까지 팀장 새끼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여전히 입금은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팀장, 이 개새끼는 나를 눈치도 없는 새끼라고 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정도 눈치를 줬으면 먼저 그만 두겠다고 할만도 하지 않아? 진짜 눈치 없다니까. 눈치도 눈치지만 그보다 너무 예의가 없는 게 아닌가. 사람을 자를 거면 자르겠다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줘야 다른 일자리를 구하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니야, 이
개새끼야.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팀장 새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사에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저기, 죄송한데요. 저 회사 그만두려고요. 응? 미안, 미안. 내가 연락을 준다는 게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근데 갑자기 왜? 뭐라고? 갑자기 왜냐고? 이 새끼가 정말 미쳤나? 네가 월급의 반을 준다기에 그거 기다리다가 지쳐서, 한 달만 쉬라는 게 어느새 두 달이 다 되어가니까 그만두겠다고 하는 거 아냐 이 개새끼야. 이런 씨발 새끼가. 아니요. 그러니까요. 제가 언제까지 계속 기다리기만 할 수 있는 사정은 아니어서요. 아, 그렇지. 미안하다. 회사가 좀 힘들어. 그래도 그만두겠다고 말씀은 드리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 그래. 너는 그래도 사람이 됐어. 제 물건들도 좀 챙겨가고 하려고요. 응. 내가 정말 미안하다. 주기로 한 건 내가 어떻게든 챙겨서 전하고 연락 줄게. 아니. 월급 한 달 치는 온전히 챙겨서 줄게. 너도 오죽 힘들면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했겠니. 요즘 경제가 정말 말도 못하는 것 같아. IMF 때보다 힘들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네 나이를 아는데 너 IMF 때 고딩이었잖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네. 정말 요즘 힘들다고들 하더라고요. 그래. 너한테도 영향이 있긴 있을 거야. 그래도 넌 아직 어리니까 뭐라도 하면 할 수 있지 않겠어? 네. 저도 그렇게 생각, 하긴 뭘 해, 이 개새끼야. 너는 아직 인간이 덜 됐어. 서른 넘도록 도대체 인간 안 되고 뭘 한 거니? 어차피 너 연락도 안 줄 거잖아. 돈 줄 생각도 없잖아. 어차피 처음부터 나 자를 거였으면서 괜히 네가 나쁜 새끼 되기 싫어서 월급의 반이니 뭐니 하는 거짓말을 지껄여댄 거잖아.
역시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사람을 구하는 곳은
어디든 있으니까 일은 구했다. 먹고 살 만큼은 벌게 되었다. 물론 팀장은 온전한 월급은커녕 월급의 반도 입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팀장에게 다시 연락하지는 않았다. 내 머리채를 움켜진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내 두발로 걷기 위해서. 그리하여 내 숨은 이어지고 그렇지만 그 새끼의 숨도 이어지고.
그런데 몇 달 뒤 얼마간의 돈이 팀장의 이름으로 입금되었다. 되게 애매한
금액이었다. 178,560원. 뭐 이리 애매한 금액인가. 곰곰이 생각해본 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누구 놀리나? 팀장의 머리채를 움켜쥐러 가고 싶었지만 회사에 출근하는 중이어서 참기로 했다. 심호흡. 씁씁, 후후.
7_ 물 만난 영화를 빛내다
옆 사람 인터뷰
내게 지난 2014년과 올해의 여름 한가운데에는 제천과 영화, 음악이 있었다. 영화와 음악의 조화는 제천이라는 공간과 1_ Granz Globewalker, 여행하며 음악하기 버무려져 여름을 시원하게 달구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폐막식이 있던 날, 자원 활동가인
뚜렷한 것 같아요. 저는 집이 전주이고, 그래서 전주에서의 영
송이에게 편지와 과자 묶음을 선물로 받았다. 나도 자원
화제는 관객으로도 가 봤고 친근해요. 제천은 이번에 처음 와
�� ���� ��� ���� ���� ���� 활동가인 적이 ��� 있었다. 스태프로서 영화제를 보낸 ��� 이후,
봤어요. 정말 청정도시라는 느낌이 들고 좋아요. 영화제가 아
����� ����� ���역할이 밤�� �� 얼마나 ��� ���� 결 영화제에서 자원 활동가의 소중하고
니었으면 몰랐을 텐데, 친구들에게 여기 오라고 추천하고 있
감사한지를 깨달았다. 송이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사람이라는 생각이영화제 스쳤다. 어디에 가도 있
어요. 다음에는 관객으로 오고 싶어요.
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으로 펼쳐진 시공간이 벌써 영화제가 끝났네요. 일주일있는 동안 사람들 어떤 일을또한 했는 었다. 내가 만났고지난 만나고 지 얘기해주세요. 아름다운 여행지의 하나였다. 여행을 이야기하
영화제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힘든 점은 없 었나요?
고 싶었으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 저는 자막팀에서 자막지기로 일했어요.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각했다. 사람을 여행해볼 작정이라고. / 영화들은 세계 각지에서 오기 때문에 한국어 자막을 필요로
있었어요. 개막식 다음날 금・토・일이 가장 바빴는데, 상영작
해요. 화면 오른쪽에 한국어 자막을 쏘지요. 제 역할은 이 일
출근하고 12시에 퇴근하고요. 그래도 기숙사가 괜찮았고 밥
을 하는 자막가님을 보조하는 거였어요. 가장 중요한 일은 상 게스트하우스에는 다양한 삶이 오고갔다. 그 영관 안에 있는 장비를 보호하는 거고, 설치 및 관리, 자막가 랜트는 미국에서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님 스케줄 확인 등의 일을 했습니다. 행을 온 사람치고는 그의 하루가 꽤 정적이었
도 잘 챙겨주셔서 힘이 되었어요. 음, 영화제를 많이 즐기지 못
도 많고 쉴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보니 힘들었어요. 8시에
한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영화제의 핵심은 영화라고 생각 해요.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해요.
그는잘공용 공간에서 편의점일도 음식을 먹거나 더불어다. 영화가 나오는지 확인해주는 함께 해주었어
자막지기 분들은 자원 활동가 중 유일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
비틀즈의 전곡을 모아 놓은 교본을 옆에 두고여 요. 지난 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자막지기로 일했는데,
어요. 가장 좋았던 영화는 무엇인가요.
치고는 했다. 그의 반려자와 다름 러 팀 기타를 가운데 자막팀에 지원한내가 이유가 궁금해요. 없던 기타를 두 동강 내기 전까지는(당분간
는 비틀즈와 로드리게즈 만큼이나 그의네노래를 저는 <오스틴에서 보스턴으로>라는 영화요. 개의 밴드가
대학교에서 스페인・중남미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어문계이다 Hey Jude를 배우겠다고 설칠 일은 없으리라).
미국에서 음악 투어를 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예요. 의림지 좋아한다.
보니 영화 번역이나 자막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어요. 영화
야외무대에서도 상영했다고 하는데 정말 좋았을 것 같아요.
를 통해 배우는 문화도 좋았고, 언어와 접하기에 영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그가문화를 의사가 될 것을
음악도 영상도 좋고, 이 영화를 보고 나니까 여행을 떠나고
는 좋은 매체이고 영화 자체도 매력적이에요. 자막팀이나 기 기대했지만 6살 때부터 그는 음악을 꿈꾸었다 술상영팀 쪽 일이 영화와 가장 가깝고, 즐거울 것 같았어요. 고 한다. 소망은 오랜 시간 그대로였으나 대학
을 졸업한 후에야 그는 온전히 음악을 하기로 올해 전주와 제천에서 영화제에 참여했어요. 제천국제음악 마음을 먹었다. 영화제가 전주에서의 영화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요.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 직접 녹음한 아홉
곡이있어서 담긴 음악영화제이다 CD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주제가 요즘 보다 나 상영작에 보니 영화의
싶었어요. 조금 더 오래 머물 줄 알았는데 시드니에 갔
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영화제를 누구보다 가깝게 지켜보았어요. 영화제를 이렇게 즐기면 좋겠다, 싶은 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나도 오래 있고 싶었지만 관광비자만으로는 그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저의 경우는 이 영화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어요. 상영작 지 시드니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비행기 섹션도, 바람 불어 좋은 밤과 같은 프로그램 이름도. 당일에 표를 사기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와서 예매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전에 카탈로그 등으로 정보
를 알고 오는 게 영화제를 즐기기에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영화제에서의 자원 활동을 다른 친구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나요? 진짜 추천하고 싶은데,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열정 페이에 매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친구가 많아요. 힘들기도 하지만 이때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많은 추억을 쌓았어요. 무엇보다 팀원들이 정말 좋았고, 캔 맥주 하나로 새벽까지 매일 이 야기하다가 잤는데, 잊지 못할 거예요. 제천이라는 도시도 너무 좋고요. 추천합니다. 앞으로의 진로와 관련해서도 영화나 영화제 일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해요. 사실 제천에 오기 전에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는데 영화제가 너무 가고 싶어서 이렇게 왔어요. 이제 영화제가 끝났으니 다시 공 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교육 행정 쪽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영화제는 앞으로 관객으로 다니려고요. 제천도 다시 오고 싶 고,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도 가고 싶어요.
배려와 존중이 오가는 일터는 즐겁다. 영화가 있고, 좋은 이들이 있어 감사한 자리에 송이를 비롯한 자원 활동가들의 활력은 축제다운 공기를 피워낸다. 영화제의 매력에 빠진 송이를 조만간 어느 영화제에서든 마주칠 수 있을 듯하다. 폐막과 함께 한 여름의 더위도 가셨다.
Daily Archive 꿀 도둑
지난 달이 시작될 무렵, 여름을 맞이하여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한 방안으로 방을 장식해 보기로 했다. 이런 저런 인테리어 소품들을 생각하다가 얼마전에 플리마켓에서 본 웨지우드 (wedgwood) 도자기들이 생각났다. 내가 파스텔톤 표면 위의 동식물과 사람 형상으로 양각된 무늬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을 때, 주인 여자가 다가와 이것들은 18세기에 만들어진 수공예 작 품이고, 장식된 문양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것으로 지금 구입한다면 앞으로 그 가치가 더 높 아지게 될 것이라고 거창하게 설명했다. 관심을 보이는 손님에게 그곳의 대부분의 상인들이 그 렇듯 물건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예견으로 그 소개 가 끝이 났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잠시 그것들을 사러 가볼까 고민하다가 가격 대비 그들의 사 용 가치가 시각적인 면에 그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었다.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장식 품의 주된 역할이긴 하지만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그 때 문득 꽃이 떠올랐다. 꽃은 수명 이 다하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으니 역사니 가치니 하는 이야기에 대한 부담도 없고, 무엇보다 돈이 들지 않는 장식물이었다. 나는 집 주변의 공원을 둘러보다가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 꽃나 무 가지를 한 움큼 꺾어와 병에 넣어 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방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고, 꽃 병 주변으로 은은하게 나는 향기도 마음에 들었다. 그 꽃나무의 이름은 Prunus avium(양벚나 무)였다. 이 생소한 단어의 어원은 각각 중국의 자두, 매실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묘사한 도자기 의 전통적인 장식(prinus)과 야생, 샛길 또는 새, 악마(avium)를 의미한다고 했다. 이 의미들은 어딘지 모르게 웨지우드 도자기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다. 꺾어온 꽃나무는 삼 사일 여만에 시들어버렸고, 나는 그 가지들을 조심스럽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튿날 저녁,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윙윙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주위를 둘러보니 의자 밑에 엄지 손가락 만한 크기의 왕벌이 낮게 날고 있는 것 이 보였다. 놀람은 둘째 치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 방은 언제나 창문이 닫혀있고, 현관에 서도 멀리 떨어진 안쪽에 위치해 있어 아주 작은 벌레조차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 벌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러나 왜 들어왔는지는 조금 짐작이 갔다. 이 틀 전에 버린 꽃이 아직 쓰레기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벌이 그 꽃향기를 맡고 들어온 것 이 확실하진 않지만 가장 납득할만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나는 룸메이트까지 동원하여 가까스 로 벌을 바깥으로 내보낸 뒤, 벌의 침입을 유도했다고 믿은 꽃까지 내다 버렸다. 이 사건 이후 로 벌의 존재가 계속 내 주변을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를 들어, 벌의 시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몸이 동그랗게 말려있어 벌인지 돌멩이인지는 굳이 자세히 관찰해야 구분할 수 있음
에도 불구하고 담벼락, 화단, 시멘트길, 아스팔트길 등에서 어찌나 잘 보이는지 매번 놀라웠다. 또 어떤 날은 동네 도서관 게시판에 붙어 있는 브뤼헬(Peter Bruegel)의 양봉 장면을 그린 드로 잉을 발견했다. 그 드로잉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는데, 특히 그림 맨 앞쪽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 는 듯이 보이는 사람은 너무 섬뜩해 양봉모 뒤에 숨은 눈빛과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작업실을 같이 쓰는 친구가 갑자기 양봉 장면을 그리면서 벌들을 형광색으로 칠하기 시작 했고, 다른 친구는 벌 모양의 귀고리를 구입했으며, 또 다른 친구는 벌 코스튬을 입은 남자가 찍힌 사진 엽서를 나에게 선물했다. 꺼림칙하게도 어린 애들을 위한 코스튬을 입은 사진 속 남 자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고, 가슴에 모으고 있는 두 손 안에는 작은 칼이 숨겨져 있었다.
일련의 벌의 출현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의 “비너스에 게 불평하는 큐피트”(Cupid complaining to Venus, about 1525)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날 박 물관에서 우연히 이 그림이 눈에 들어온 것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더 재미있는 점은 그림의 내 용이었다. 얼핏 봐서는 쉽게 간과될 수 있는 큐피트의 몸짓 주변으로 작은 점같은 것들이 보이 는데 그것들은 벌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의 전원시인, 테오크리터스(Theocritus)가 B.C 3세기 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목가시집의 19번 시 “꿀 도둑”*을 배경으로 한다. 내용인즉슨, 큐피트 가 벌집의 꿀을 훔치다가 손가락 모두가 벌에 쏘였다. 괴로워하며 날뛰는 큐피트는 비너스에게 상처를 보이며 불평을 하자, 비너스는 웃으며 저 작은 벌과 작지만 사랑의 화살로 큰 고통을 주 는 너와 서로 닮았다고 대답한다. 이 이야기는 북유럽 르네상스 예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 중 하 나였고,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다. 크라나흐는 이 주제로 무려 30여점을 그렸다 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그는 화면 오른쪽 귀퉁이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삶의 짧은 즐 거움은 고통과 함께 한다.” **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남겼다.
며칠 뒤, 나는 지인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다시 그 플리마켓을 찾았다. 더 이상 특별하 게 보이지 않는 웨지우드 도자기들을 뒤로 하고 발견한 것은 빈티지 출판물을 팔고 있는 구간 이었다. 그곳에는 종이에 인쇄된 모든 종류의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가 판대 위에는 보관 상자나 수첩, 편지, 손거울과 같이 값비싸 보이는 소품들이 놓여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낡은 짙은 갈색의 나무함이 있었고, 그 안에 포스트잇 크기의 작은 책들이 보관 되어 있었다. 거의 두 세기는 지나온 것 같이 보이는 책들은 모두 흑백으로 프린트 되어 녹이 슨 고리로 묶여 있었다. 그것이 제작될 당시 나름 귀중한 것이었는지 몇 장 되지도 않은 페이지 의 책 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각자의 책갑을 가지고 있었다. 책의 대부분은 여행지를 찍은 사진 들을 모아 놓은 사진집이었다. 사진의 크기가 너무 작은데다 표면이 닳아 있어 오랫동안 들여 다 봐야만 장소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작은 세계로 들어가 디테일을 찾아보는 재 미도 있었다. 나는 이 매력적인 책들을 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주어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 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무함 속에 들어 있는 책들 중 하나를 손에 잡히는대로 집어 재빠르 게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는 아까 봐두었던 그림책 한 권을 떨리는 손으로 계산하고 빠 른 걸음으로 마켓을 벗어났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주인이 알아채지는 않았을까, 목격한 사람 은 없었을까, 뒤따라 오는 사람은 없을까 노심초사했고, 마켓 정문을 빠져 나왔을 때는 책 가판
대 쪽을 바라보고 있던 교회가 떠올라 이 일로 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몰려왔 다. 심지어 아까 여행지를 찍은 책에서 보았던 악마 형상의 건축 조각 사진까지 떠올랐다. 나 는 거의 뛰다싶이 하여 근처 공원의 인파 속으로 들어가 벤치에 앉았다. 다리가 떨리고 심장도 빠르게 뛰었는데, 죄책감 때문인지 책을 손에 넣었다는 쾌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주머 니에서 그 작은 책을 꺼내 책갑에서 빼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한 장을 조심스레 넘겨 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내가 기대했던 여행 기념 사진이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몇 가지 종류의 곤 충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표지에는 곤충 도감(Illustration of Insect)이라고 쓰여 있었 고, 첫 장에는 여섯 개의 다리를 활짝 벌린 꿀벌(Honeybee)이 검고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 Idyll XIX, “The Honey Thief” (Love, stung when robbing a beehive, complains that so small a creature can hurt so much. His mother retorts that his own victims might say the same.)
** 라틴어 원문 “Dvm pver alveo (lo) f (vratvr me)lla cvpido/furanti digitvm cv(spide) f(ixit) apis/sic etiam nobis brevis et (peri)tvra volvptas/qvam petimvs tri (s)t(i) (m)ixta dolore n(o)cet.”
이미지 출처> wikipedia / wikiart / Wedgwood Museum / thepottery.org / New England antiques journal / Vogue Italy, 2012, 11 / courtesy of Yucheng Ji / The National Gallery / Unbekannter Fotograf / Grosvenor Prints / The Vigilant citizen / vintage.es / The Deadly Bees, 1966 / 개인소장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소개소
1. My First Kiss - Hi-STANDARD
2. START - locofrank
3. Sun which never sets - dustbox
[Love Is A Battlefield](2000), 2
[Starting AGE](2003), 1
[13 Brilliant Leaves](2006), 9
일본 펑크 밴드의 전설로 여겨지며, 주로
<START>는 아마 내가 가장 처음 들었던
dustbox의 음악 중 가장 먼저 좋아하게
줄여서 ‘하이스타’로 불리는 밴드 Hi-
일본 멜로딕 펑크곡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된 곡이다. ‘Searching for freedom is
STANDARD의 커버곡. 엘비스 프레슬리
좋아하는 일본 멜로딕 펑크곡들 중에서
not to escape from Uneasy things and
커버곡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이 곡을 대표곡으로 꼽을 수 있다. 멜로딕
hesitation in my heart’라는 가사를 들었을
커버하며 알게되었다. 2000년 활동중지
펑크 특유의 연주와 가사는 물론이고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이렇게
후 11년만에 자신들이 주최하는 <AIR
처음 이 노래를 들은 순간, 곡의 완성도에
빠른 음악에 이런 가사를 쓸 수 있을까?’
JAM 2011>에서 재결합 무대를 선보였고,
완전히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3
하는 생각이 들 만큼 dustbox는 신기하게도
이어 다음해 <AIR JAM 2012>에서 이
인조
생각하지만
아주 세밀한 가사에 어울리는 빠른 음악을
곡을 연주하였다. 당시의 라이브 영상을
곡을 꽉 채우는 이들의 연주를 듣다보면,
한다. 어떻게 하면 복잡한 감정을 가사에
보면 인트로부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locofrank는 특히나 3인조의 정수를 아주
담을 수 있을지 고민될 때, dustbox는 아주
느낄 수 있다.
잘 보여주는 밴드라고 생각된다.
좋은 본보기가 되어준다.
밴드들이
그렇다고
요즘 가장 좋아하는 일본 밴드 음악들을 골라봤습니다. 모두들 크게는 ‘멜로딕 펑크’라는 장르로 분류되지만 밴드 각자의 매력이 잘 드러나고 각각 다양한 배울점이 있는 곡들을 소개합니다. 신당동 파르한 (@chungchoon98)
4. Good fight and promise you
5. Notebook - FOUR GET ME A
6. . 신기루 - 10-FEET
- TOTALFAT [FOR WHOM THE ROCK
NOTS [Triad](2010), 1
[thread](2012), 4
관심있게
FOUR GET ME A NOTS는 남녀 트윈보컬이
영어 가사의 일본 밴드 음악을 많이 듣던
듣고있는 밴드이자, 요즘 좋아하는 밴드
있는 혼성 밴드이다. 이 곡도 두 멤버가
나에게
중 유일하게 4인조 밴드이다. 이 곡을
파트를 나눠서 부르는데, 기타리스트 겸
드는 일본어 곡이다. 언제나 ‘밴드는 곧
좋아하게 된 것은 느린 부분과 빠른 부분이
여자 보컬 멤버가 부르는 ‘You have your
라이브 공연’ 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이
확실히 구별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eyes to open so don’t keep them closed’
노래의 라이브에서는 인트로의 저음이
때문이다. 특히 느려지는 듯 ‘I promise
라는 가사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주 돋보인다. ‘슬픔은 행복의 원석이지만
you~’를 부르지만 다시 빨라지는 연주가
특히 인트로부터 빠른 드럼 연주가 돋보이는
뛰어넘지 못하면 단지 돌멩이일 뿐’ 이나, ‘
좋다. 항상 음악을 들으며 나의 연주에도
곡으로, 쉼없이 끝까지 달리는 것이 아주
잃어버린 그 때의 꿈도 지금은 내일을 사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으려 하지만, 막상
시원시원하다. 작년, 이 앨범이 한국에서도
의미’ 같은 가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악기 파트에는 귀기울이지 못하는 나에게
발매되면서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매년 교토에서 <교토대작전>이라는 락
ROLLS](2009), 1
TOTALFAT은
요즘
가장
TOTALFAT은 그런 약점을 깨준 밴드이다.
<신기루>는
오랜만에
마음에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멋진 밴드이기도 하다.
다시 쓰는 자본주의
글. exxx
헛소리 같고, 아무 권위도 없는 사람이 처음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볼만은 할 것입니다.
01. ‘자본주의’라는 말이 잘 이해가 안되 시작한 글 실타래가 있다고 생각하면 간단할 것 같다. 실을 단순히 보관하려면 그것이 꼬여있든 먼지가 뭍었든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실을 쓰려고 들면 순서대로 풀어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꼬인 실타래와 같아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충 그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그동안 실컷 듣고 봐왔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도 같은데, 누군가 물어본다면 설명을 못하겠기에 글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예전에 ‘보수주의’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많이 쓰이고, 다들 쉽게 쓰고 있어서 아는 듯 하지만 나에게 그 말은 무척 두루뭉술한 그 무엇이었다. ‘자본주의’ 와 관련된 생각을 할 때면 사고의 바닥에는 늘 뿌리가 없어서 생각의 갈피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완벽한 글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간 잘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을 일정부분 정리하게 된 것 같아 보다 쉽게 순서대로 적고 생각을 나누려고 글로 써본다. 사실 ‘자본주의’도 자본주의지만 그에 앞서 ‘자본’이라는 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자본’ 이란 이렇다. 자본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므로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우며 입장이나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그 개념이나 정의도 달라진다. 자본을 기능적인 면에서 본다면, ① 실물(實物) 로서의 자본, ② 화폐(貨幣)로서의 자본, ③ 자본의 분업(分業)이라는 3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본 [capital, 資本] (두산백과) 위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막연하게 알던 자본이 그간의 막연한 이해의 정도로 적혀있다. 몇 번을 읽어봐도 어슴프레 알던 만큼이고, 알던만큼 적혀있는 정도이다. 나는 이 단어의 설명이 ‘자본’이라는 단어의 용도를 적어놓았을 뿐, 정확히 자본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을 풀어야 하지 않을까?
02. 기존의 자본 기존의 용법에 따라 자본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먼저 생각해보기로 했다. 다음은 그냥 하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길을 가다 돌맹이 하나를 보았다. 돌맹이의 모양이 아름답고 마음에 걸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돌맹이를 주워든다. ‘이 돌맹이는 나의 자본이 된 것일까?’ 누군가에게 다가가 “내가 지금 주운 이 돌맹이가 나의 지본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아마 흰 소리를 한다고 웃고 말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웃음을 당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친구가 내가 주운 돌맹이가 몹시 마음에 들어 나에게 그 돌맹이를 달라고 한다면 어떨까? 나는 그 돌맹이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냥 줄 수는 없었고, 무언가와 바꾸기를 원했다. ‘판매를 제안한다면 어떨까? 돌맹이는 자본이 되는 것일까?’ 친구가 나의 돌을 갖고 싶은 마음과, 지불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돌의 아룸다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쌀 다섯주먹을 들고와 내가 주운 돌을 이 쌀과 바꾸자고 말했다. 나에게 팔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쌀 스무주먹을 달라고 한다. 결국, 친구는 나의 돌을 쌀 열 주먹에 사갔다(바꿔갔다). 그리고 그 돌이 몹시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또 다른 사람이 돌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친구가 내게서 사간 돌맹이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겨 갈 수도 있다. 나의 돌맹이는 쌀 열주먹이 되었다. 자본이 된 것이다. 내가 주워온 돌이 처음부터 자본이었고 한다면, 아마 세상 사람들이 지금쯤 세상의 모든 돌을 다 주워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감정과 우연들이 겹쳐 자본이 된 것이다. 내 마음에 들었고 친구의 마음에 들었다는 우연. 그 감정과 우연을 자본으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 위의 이야기를 그간의 자본과 관련된 설명을 이용해 설명한다면, 처음의 돌맹이는 자본이 아니지만 최초에 돌을 주운 나는 돌의 가치를 알아 본 감식안과 돌을 들고 나른 노동력을 이용해 자본을 만들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의도없이 오직 나의 만족을 위해서 바람을 쐬듯 선선한 마음으로 돌을 들어올린 것이었다. 움직였느나 노동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는 돌을 집어든 것이 수렵활동이나 채취활동과 같은 활동을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렵이나 채취는 애초에 목적을 갖고 하는 행동이다. 경제활동에서 이익을 취하거나 최소한의 본전 교환 (물물교환)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의 몸을 움직여서 수렵이나 채취를 한다. <먹기 위해 과일을 주우러 다니거나 동물을 잡으러 다니는 것>. 이것은 기존의 설명에 따른 노동에 해당한다. 그리고 비록 누구의 것도 아닌 공중에서 그것을 수렵하거나 채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나의 돌맹이와 관련된 행동은 그렇지 않다. 노동으로 설명되기 위해 노동이라는 행위에 끼워맞추어지는 것이다. 돌맹이는 자본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자본으로 둔갑했다. 대체 언제일까?
03.자본의 탄생 내가 돌맹이는 자본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어느 순간 돌맹이는 기존의 자본에 부합하는 것이 되었다. 위의 이야기에서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정이든 우연이든 결과적으로 돌맹이는 기존의 자본에 부합하는 것이 되었다. 위의 이야기에서 대체 언제 돌맹이는 자본이 된 것일까? 이 상황을 숫자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순서로 적을 수 있다. 1. 나는 마음에 드는 돌맹이를 주웠다. 2. 돌맹이가 친구의 마음을 끈다. 3. 친구는 돌맹이가 갖고 싶어졌다. 4. 나에게 쌀 다섯 주먹을 제안한다. 5. 나는 쌀 스무주먹을 달라고 했다. 6. 쌀 열주먹에 돌맹이를 넘겼다. 이 중 돌맹이가 기존의 자본에 부합하는 상황이 되는 순간을 고르면 6번에 해당한다. 즉, 나와 상대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순간. 돌맹이는 자본이 되었다. 이처럼 상호간의 ‘합의’ 는 자본에 필요 조건에 해당한다. 여기서 나온 ‘합의’라는 단어를 기억하자. 이처럼, 자본에는 ‘ 합의’가 필요하다. 나와 친구의’ 합의’로 돌맹이는 자본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요즘 사건으로 바꾸자면 <수석>을 취미 겸 용돈벌이 겸 한 셈이다. 나와 친구는 돌의 가치에 합의했고, 둘의 합의는 돌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 그 순간 돌은 자본이 된 것이다. 이 돌을 탐내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 돌은 친구와 나 사이만의 합의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의 합의를 통해 보다 보편적 ‘자본’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극적으로는 현대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04. 자본의 죽음 갑자기 뜬금없지만 이번에는 ‘자본’을 죽여 보려고 한다. ‘그런데 만약에 왕이 있다면? 어떨까?’ 나와 친구의 돌에 대한 집착을 지켜본 왕이 둘의 합의를 깨버릴 수 있다면? 갑자기 왕이 등장해 저 돌에는 아무 가치가 없고 돌을 주워다 판 이는 잘못된 이익을 취했다고 왕이 정의하는 것이다. 친구는 쓸모없는 헛된 물건을 소중한 쌀을 주고 샀다고 비난받는다. 이 경우를 생각해보자. 쌀은 다시 친구에게 돌아가고 돌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거나 왕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빼앗아간다면? 부숴지거나 압류되어 처음에 들고 온 그대로 들고갈 수 없다면? 다시 말해 , ‘둘의 합의를 깨버릴 수 있는 현실의 존재가 있다면? 그 돌은 자본이 될 수 있을까?’
아마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자본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합의’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 바로 ‘평등’이다. 아무도 멋대로 ‘합의’를 깰 수 없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자본’의 발달기를 되돌아보면 왕과 같은 권력은 늘 존재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을 이야기함에 있어 ‘합의’에 대한 고민은 많았고 고도화 되어왔지만 ‘평등’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배제되거나 화제가 될 수 없었다. 혹은 금기시된 영역으로 잊혀진 채 현대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가 ‘평등’하지 않은 상태의 합의는 자본을 완성시킬 수 없다. ‘합의’를 무력화 시킬 수있는 왕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자본은 불완전하다.
05. 순서의 재정립 이런 관점에서 돌아보면, 현대 민주주의가 확립된 시점. 한 국가안의 존재들이 모두 평등하다고 합의되고 법으로 공표된 그 시점에야 비로소 자본은 성립할 수 있다. 자본이 ‘합의’와 ‘평등’ 이라는 두 다리 위에서 성립이 가능하면 우리가 흔히 자본주의라고 지칭하는 현대의 경제 환경은 정치와 떼어놓을 수 없고, 자본주의의 개념 또한 정치적으로 연계, 확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자본주의를 다시 정리해야한다. 실타래를 보관만 하다가 풀어야 하는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평등’이라는 기준점을 새로 만들었으니 그곳에서부터 꼬인 실을 풀어 나가야 한다.
06. 기존의 자본주의 란? 자본에 대한 이야기는 얼추 정리 된 것 같다. 기존의 것을 건드리지는 않고 다만 그 시작점에서 꼭 고려해야 할 것을 추가한 것 뿐이다. 그럼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주의’ 란 무엇일까? 기존에 정리된 특징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1.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2. 모든 재화에 가격이 성립되어 있고 3.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고 4. 노동력이 상품화 되고
5. 생산 전체로 볼 때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등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자본주의의 기존의 정의들을 다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특징들을 그대로 두더라도 현대 자본주의의 방향은 ‘자본’이라는 기준이 수정됨에 따라 그 방향성을 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07. 다시 쓰는 자본주의 마치 새로운 것인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현실의 자본주의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다양한 지역과 국가에서 부분적으로 수정되고 발전 되어 나아가고 있다. 개별 제도들이 지역마다 도입되는 수순이 다를 뿐 그 개념 바닥은 동일하다 할 수 있다. ‘합의’와 ‘평등’이라는 두 다리로 서있는 ‘자본’의 관점에서 복잡하게 얽힌 ‘자본주의’ 실타래를 풀어보면 어떨까? 현 상황들을 정리해보자. 최저임금제도 - 국가 안의 존재가 모두 평등하다면 최소한의 임금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개별 능력에 따라 임금의 차등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평등한 존재라는 기준점인 최저 임금이 보장되지 않으면 평등의 기준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도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 노동을 하는 각기 다른 회사의 문제 예를 들면 각기 다른 자동차 회사 1,2 에서 완벽히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둘의 임금은 같아야 한다.는 주장은 합의 당사자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왼쪽 바퀴와 오른쪽 바퀴를 만드는 하청업체가 다르다고 같은 바퀴를 만드는 사람들이 임금을 다르게 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계열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동일 노동은 동일 임금을 받아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 같은 기업 내에서 동일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동일한 임금을 받야아 한다. 이는 평등에 대한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흔히 이야기 하는 기업 유동성 확보의 문제보다 평등의 가치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혹 현실적인 이유로 기업의 유동성을 감안하여야 한다면 비정규직은 감가상각 되는 자신의 시간과 안정성을 희생하기 때문에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기업입장에서 비정규직에 대해 일시적으로 더 높은 임금 지불이 불가능 하다면 비정규직의 사회안전망 확보를 위한 상시적으로 충분한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법제도의 정비 - 평등을 고려했을 때, 최저임금이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면 그 기준점을 기반으로 많은 것들이 재정비 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탈세와 같은 어마어마한 비용의 기업범죄와 같은 경우 최저임금에 기반해 형량을 고려해야한다. 이는 사회의 기준이 되는 평등값인 최저임금의 배수만큼 약속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국가기관의 근무자와 국회의원을 포함한 세금으로 임금을 수령하는 모든 사람은 최저임금에 기반해 임금이 구축되어야 한다.
법인 - 법인은 현대사회에 나타난 제도로 법인의 용도를 감안하더라도 공공을 위한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과 같은 세율을 적용해야 한다. 공공을 위한 경우라도 이익구조가 있고 그 규모가 클 경우 높은 세율을 적용해야 한다. 그 외에 목적이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실제 매출이나 규모에 따라 추가적인 세율 가산 또한 고려해야 한다. 법인이 위법행위를 하는 경우, 법인은 인간의 형벌과 같이 행동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으므로 기본적으로는 징벌적 배상을 해야하며 법인의 구성원이 법인이나 법인의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위법한 행위를 저지를 경우 징벌적 배상과 더불어 개인적인 형벌도 고려되어야한다. 법인이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을 고려하여 전량 회수는 아니더라도 주기적인 (마치 상속과 같은) 세금을 적용해야 한다. 동일 사업이 영속되는 한 이름이 바뀌거나 하는 정도로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도록 정하고 마치 인간의 상속세와 같이 30-40년 마다 한번씩 추가적인 세금을 내도록 한다. 법인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세금을 통한 이익분배가 아니다. 자본이 숫자가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낼 수 있는 (동원할 수 있는) 힘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것이 무한히 커져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골자이다. 기업과 노동조합 - 국가는 기업에 R&D 와 같은 세금 보조를 하고 기업은 이를 이용해 추가적인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와 같은 혜택을 충분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노동자는 국가로부터 우선적으로 보호 받을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갈등 상황에서 균형을 맞출 때 더욱 중요하다. (추가 보완 할 것. 금융 자본 관련 등)
08. 마치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을 대할 때 기저의 갈피와 방향성 없이 헤메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같이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지향해야할 예의범절이나 태도와 자세들의 가치관을 치켜세우며 호의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은 개개인의 선의에서 비롯한 행동들에 기댈 문제가 아니다. 왕정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그것이 그렇게 작동해 왔다 하더라도 더이상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된다. 국가를 이루는 국민이 존재하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평등한 존재로 인정되고 합의하고 있다면 자본의 문제 또한 이 필수 요건을 어기지 않게 정리되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만한 기준점을 갖고 문제에 접근하고 정리해 나가야한다.
진짜 명예는 상식적인 것보다 더 가치있고 숭고한 것을 해낼 때 주어져야 한다.
건축이 좋아. #23. 핀란드의 자연, 그리고 알바 알토 aoikasa
'핀란드'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자일리톨 카모메식당 휘바휘바 그리고 최근엔 귀여운 무민까지. 그리고 백야, 시벨리우스...
그러나 내게 핀란드는 첫째도 둘째도 알바알토이다. 알바알토의 나라 핀란드.
조만간 핀란드로 여행을 간다는 지인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오래된 핀란드 여행의 기억, 그리고 가장 좋 았던 알바알토의 '여름별장' 방문 기억을 꺼내어본다.
핀란드의 자연, 그리고 알바 알토. 피요르드의 나라 핀란드, 울창한 침엽수림과 하얀 눈, 그리고 붉은 벽돌. 내가 핀란드를 알바 알토의 작품집에서 볼 땐 초록, 빨강, 하양의 나라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런데 막상 한 여름에 찾은 핀란드는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햇빛이 하루 종일 비치는 곳, 파란 눈과 빛나는 금발의 사람들 이 있는 곳, 붉은 벽돌에 청동 지붕이 자연스러운 곳이었다. 침엽수림이 빡빡한 건 당연. 알바 알토의 건축에도 핀란드의 자연, 특히 울창한 침엽수림과 강렬한 햇빛 (그 햇빛이 동절기에는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싶다. 오후 2시면 해가 지니 아주 짧게 만날 수 있을테니)은 알토 건축의 가장 중요한 요소 이기도 하다. 오타니에미 공과대학, 세이나찰로시청사, 핀란디아홀, 여름별장 등 알토의 대표작들은 모두 핀란드의 자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투박하지만 묵직한, 오타니에미 헬싱키 공과대학 헬싱키에서 잠깐 버스를 타고 가면 나오는 오타니에 미에 있는 헬싱키 공과대학. 건물이 빡빡하게 들어선 한국의 캠퍼스들과는 달리 드넓은 잔디밭에 듬성듬성 건물들이 서 있던 오타니에 미 대학의 캠퍼스. 부채꼴 모양으로 중앙에 펼쳐진 공과대학 건물은 외 부 지붕이 마치 원형극장의 좌석처럼 펼쳐지며 학생들 그림1. 무려 13년 전의 메모
이 자유롭게 누워서 책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여 부러웠을 정도. 붉은 색의 부채꼴 모양의 건물 옆으로는 마치 손가락이 뻗어 나오듯 길게 가지쳐 나온 건물들이 보인다. 이 부분은 가로로 긴 창들이 연속적으로 있는 하얗고 단순한 박스들이다. 1920년대 이후 모더니즘 건축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로로 긴 창이 여기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이 곳은 건축과의 디자인 스튜디오로 사용되는 곳인데, 살짝 내부를 보니 여기도 역시 지저분. ㅎㅎ 역시나 건축과 스튜디오들은 세계 어딜가나 비슷한가 보다. 아무튼 붉은 벽돌과 하얀 콘크리트 벽의 조화, 그리고 그 앞의 푸르른 잔디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던 곳. 무언가 세심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투박하고 무겁지만 그 곳에 묵묵히 서 있는 듯 한 인 상. 진중하게 침묵하고 있는 듯한, 그러나 권위적이지 않은 따스함을 품고 있는 듯한 건축을 만났다.
그림2. Helsinki University of Technology, Helsinki, Finland (1949–66)
여름이면 생각나는 곳, 숲과 호수 그 곁의 Summer House. 알토의 여름별장은 가기도 어렵고, 가려면 꽤 많은 돈을 주고 예약을 한 후 가이드에 따라 가야하는 곳이 다. 운좋게 연구실 답사에서 이 곳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알토의 건물 중 가장 인상깊은 아주 작고 작은 ‘집’ 하나였다. 이 곳은 알토가 머무르던 숲 속의 작은 여름 주택인데 (우리 식으로 별장이라 하 면 사실 너무 거창하게 여겨져서 summer house, 여름 주택이라는 말이 더 와 닿는다.) 숲 속 깊은 곳 아름 다운 호숫가에 붉은 벽돌의 작은 집이, 정말 작은 집이 놓여 있다. 집은 작은 거실과 방 3개가 전부로, ‘ㄷ’ 자형의 아름다운 집이다. 내부의 가구 역시 모두 알토가 디자인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외부는 붉은 벽돌의 벽에 초록이 짙은 담쟁이 덩굴이 있으며, 중간 중간 아름다운 푸른 색 타일이 포인트로 들어가 있다. 정말
매력적인 공간은 ‘ㄷ’자형 중앙 부분의 중정. 중정에는 여름동안 바베큐를 할 수 있는 작은 화로가 중간에 있어 한여름 이 곳에서의 저녁을 상상해보았다.
너무 작은 집이라 알바 알토를 이야기할 때 잘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숲 속에서 자연을 전혀 해치지 않고 마치 헛간 하나가 놓여 있 듯 자연스레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이 건물의 자리잡음이나, 붉은 벽돌 사이 푸른 색 타일 이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새겨져 있는 모습 이나, 작은 공간안에 본인이 디자인한 가구 와 소품들로 채운 따뜻하면서도 편안한 공
그림3. 한 폭의 추상화같은 Summer House의 벽
간은 알바 알토의 좋은 점을 모두 다 모아 놓은 듯한 그런 너무나도 ‘알토스러운’ 곳이었다. 백색과 유리의 모더니즘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그 시기, 모더니즘 건축의 간결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그 지역 특유의 재료를 가지고 그 지역의 자연에 맞춘 건축을 했던 알바 알토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던 작은 집, 그 앞의 호숫가에 배를 띄우고 그 곳의 중정에서 바베큐를 먹으며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자연의 바람을 느끼고, 하늘의 별을 보았을 그 공간의 수수하지만 묵직한 울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림4.5. 담쟁이넝쿨과 붉은 벽돌벽, 바베큐를 위한 중정의 화로.
그림6. 역시 13년전의 메모. ‘ㄷ’자형 평면과 각 실 명칭.
그림7.8. 알토가 디자인한 가구와 소품들로 가득차 있는 작고 심플한 부엌과 침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세이나찰로 시청사
알토의 유명한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작업. 세이나찰로라는 작은 시의 시청사. 역시나 중정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해 있다. ‘ㄷ’자 형으로 놓여진 사무동에는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2층에는 시의회실이 있다. 이 곳 역시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중정의 푸른 잔디와 시청사 밖의 침엽수림과 어울려 자연에 그대 로 파묻힌듯한 그러면서도 자신의 색을 분명히 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경사진 지형에 있어 주사무동과 중정은 앞에 있는 건물의 2층과 만나는데, 앞에 있는 건물은 시민들을 위 한 도서관으로 사용된다. 중정을 둘러싼 사무동의 복도에서는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중정의 푸르름과 평 화로움 역시 같이 중정으로 스며든다. 마치 여름별장을 공공용으로 조금 크게 확대하고 좀 더 열려있게 한
느낌의 시청사. 우리 가족용이 아니라 우리 동네사람용 집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마침 갔을 때는 대낮이 었는데 동네 꼬마들이 잔뜩 몰려와 중정 가운데의 연못을 둘러싸고 노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권위 적인 관공서가 아니라 모두의 집같은 느낌.
그림 9.10. 빛으로 가득찬 세이나찰로시청사의 중정 과 복도, 그리고 의회실로 오르는 계단.
북유럽 디자인, 그리고 알토. 그 외에도 백색의 대리석이 반사해내는 빛이 인상적이었던, 역시나 핀란드의 아름다운 호수 옆에 있던 핀란 디아홀. 이 건물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연상하게 하는데, 알토 건축 중에서 가장 대규모기며 가장 기 념비적이었다. 또한 역시나 알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서관을 가지고 있던 국민연금보험건 물, 그리고 Academic Bookstore를 헬싱키에서 만날 수 있으며, 유비스킬레에 가면 folk museum과 aaloto museum, theater 등을 만날 수 있다. 핀란드 어느 곳에 가도 알토가 디자인한 곳들이 가득. 핀란드의 매력이 한 두개는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 중 하나는 핀란드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엔 ‘알바 알토’의 건축과 그가 디자인한 가구와 생활용품들이 한 몫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알토의 디자인 가구나 생 활용품들은 사실 크게 비싸지 않아 핀란드에서는 알토가 디자인한 건물들에는 극장이며 콘서트홀이며 모 두 알토가 디자인한 의자, 천으로 엮어 만든 의자를 사용하고 있다. 휴게실이나 경비아저씨가 앉아있는 의
자 조차도. 알토 디자인의 생활용품들은 여전히 이딸라 (https://www.iittala.com)에서 판매중! 요즘 우리 나라에 한참 유행중인 북유럽 디자인의 뿌리라 할까. 그 건 그냥 단순히 그 스타일의 모양이나 패턴이 아닌, 정말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 수수하면서도 묵직한 그 힘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만난 핀란드의 파빌리온.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파빌리온 안에서는 끝없이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나무를 스치며 만들어내는 소리들, 푸른 하늘과 강렬한 여름 햇살. 아, 이 것이 핀란드의 여름!
그림11.12. 2013 Venice Biennale의 Finnish Pavillion
조선소 노동자 #6 닭들의 회의
Min the Elephant @mintheelephant
Land Art 우리는 한 패션 브랜드의 룩북 촬영을 위해 인천에 위치한 폐공장을 찾았다. 브랜드는 공간에 떠도는 거칠고 빈티지한 느낌을 이번 시즌 옷들과 접목해 세련된 이미지로의 이행을 원했다. 불규칙한 빛의 굴절이 공장 곳곳을 통과했고, 강한 일사 덕분에 먼 곳의 경치가 아른거렸다. 총알 자국처럼 보이는 창백한 벽의 구멍들과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는 까만 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뜻밖에도 푸른 눈의 모델이 내뱉는 불평어린 말들과 찌푸린 사람들의 미간 가운데서 여름의 가장자리가 발견되었다. 매미소리가 들려왔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토(Christo-Javacheff )와 잔 클로드( Jeanne-Claude) 부부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파란색 포장 앞에 나는 잠시 머물렀다. 한발 다가서자 압도적 거대함에 하늘이 달아났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빛을 가득 머금은 포장이 넘실거렸다. 먼발치에서 풍겨오는 해로운 향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것을 바닷속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이 거대한 포장은 내용물의 맥락(Context)을 은폐시켜 버렸다. 파란색 포장 안에 담긴 것은 분명 공장과 관련된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시멘트 더미일 수도 있고,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기계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포장이란 내용물의 알레고리적 지위를 가진다. 초콜릿과 샤넬의 포장에는 언제나 여성의 마음을 위로하는 달콤함이 묻어 있다. 하지만 빳빳한 공업용 비닐은 내용물의 외형을 섬세하지 않게 가리는데 성공했고, 그것을 거대한 느낌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포장은 식상함을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새로운 포맷을 원하는 대중에게 미디어는 자극적인 스킨을 내밀며 이것이 새로움이라고 항변해왔다. 오래된 자본의 전략을 눈치챈 대중들은 디자인되지 않은 디자인에 목말라 했고, 투명한 생산 공정과 미니멀한 디자인을 앞세운 브랜드들이 이에 화답하기 시작했다. 이들 뒤에는 ‘윤리’ 라는 이름표가 따라다닌다. 과거 미니멀리즘예술은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는 경향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형상의 빈곤은 해석의 과잉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니멀리즘 예술은 비평가들의 지적 액세서리로 동원되었던 셈이다. 이와 유사하게 대중들은 장식 대신 윤리적 스킨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소비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앞의 거대한 공업용 비닐은 포장 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 여름의 강한 빛도 포토그래퍼의 값비싼 카메라도 그 안의 내용물을 포착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불필요한 장식도 윤리적 소비도 없다. 단지 거대한 넓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Je m’en fous Ⅰ 실내 촬영을 위해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창문을 통과한 네모난 빛 덩어리들이 발등 위로 떨어졌다. 조명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모델들은 환복을 위해 차로 향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떼어진 창문 두 개가 색 바랜 벽 앞에 놓여있다. 한 창문에는 불어로 보이는 Je m’en fous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온전한 창문에는 조금 전 불어와 함께 coffee&bread 가 쓰여 있다. 프랑스 이름의 카페가 폐공장 안에 존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검색을 통해 알아낸 이 단어는 ‘주망푸’, 즉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다.
Je m’en fous Ⅱ 하루의 빛이 밝아오기 한참 전, 공장 인부들이 커다란 철문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못된 잠버릇이 붙은 한 노동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를 정돈하는 젊은 노동자는 ‘주망푸’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커피의 쌉싸름한 향으로 잠의 찌꺼기를 털어내며 시비조로 주인에게 가게 이름의 의미를 묻는다. 주인이 의미를 말해주자 젊은 노동자는 격양된 어조로 그런 이름은 이곳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주름을 걸친 노동자의 이마에 한 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저 멀리서 동료들의 손짓하는 모습이 보인다.
Je m’en fous Ⅲ 바닥에 드리핑된 페인트 자국, 누군가 무심히 쓴 손글씨, 자연스레 낡은 숫자, 거칠게 벗겨진 외벽에는 신축건물과 달리 이야기가 숨어있다. 어쩌면 근대(modern)가 밀어버린 낡은 것들에는 상상의 디테일이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매일 새롭게 바뀌는 동네의 풍경은 어제의 기억을 관념 속에만 머물게 한다. 어제를 잃어버린 우리는 '디아스포라'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금발 모델이 벽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세련된 가죽 재킷 뒤로 자연스레 벗겨진 벽의 흔적들이 보인다. 촬영에 동원된 오토바이 한 대가 분위기를 더한다. 떠도는 폐공장의 기표에 남성적이고 거친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셔터가 터지며 브랜드 관계자들은 만족한듯한 웃음을 짓는다. 태양은 늦게까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까만 개 한 마리는 늘어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⑴ 미니멀리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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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 9 (쏘맥) 글. exxx 사실 소주하면 코리아고 코리아 하면 소주인 것 같지만, 소주는 원래 한국의 술이 아니다. 몽골이 아라비아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증류 방식의 술을 가져왔는데, 고려 충렬왕 때 쿠빌라이 칸이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진출할 때 한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 소주가 몽고에서 온 어쩌고 해봐야 백이면 백 소주는 한국 술이라고 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내가 소주! 라고 한다면 한국의 누구나 소주! 라고 정확히 같은 이미지로 받아드릴 것이기 때문에, 기원에 대한 것은 그저 재미로 읽고 넘어가자.
곡류를 발효 증류하던 증류주인 소주를 에탄올을 만들어 희석하는 희석식으로 만들어 대량 보급화 한것이 현대의 소주이다. 이것도 순전히 원가 절감이라고 욕할 수는 없는 시대적 배경이 있는데, 1965년 정부의 식량 정책으로 소주 발효에 곡류의 사용이 금지되어 증류주로써의 소주가 사라지게 되어 지금과 같은 희석식 소주를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쌀은 먹고 죽을래도 없는데 그걸로 술을 만들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욕을 얼마나 먹을지 상상해보자.
그래도 IMF 시절에도 양주마시던 사람이 있었던것을 생각하면, 법으로 금지되는 일이 없었으면 지금보다는 전통적인 방식이 좀 더 살아남았을 확률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기원이나 이야기조차 남지 않은채로 ‘ 소주’하면 투명하고 쓴 (이제는 쓴 것도 많이 사라진) 현대의 한국인들이 늘상 떠올릴 만한 그것을 고려인삼처럼 떠올릴 날이 오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 나오는 350ml 정도의 녹색병에 담긴 알코올 도수 20도 내외의 술. 합성감미료 포함.
지역마다 유명한 1개 정도의 소주가 있고 예전에는 지역에서 생산하는 소주를 일정 부분 지역내에서 소비해야하는 법이 있어서 입맛이나 정서적으로 길들여지다보니 특정지역에서는 특정 브랜드만이 소비되고 다른 지역의 소주는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요즘에는 그런 법이 사라져 어느 지역의 술집에 가더라도 주인의 고집이 아닌 다음에야 다른 소주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다만 여전히 지역마다 선호 하는 브랜드의 차이는 있는 듯 하다.
초기에 소주는 고전적인 소주의 형태와 비슷하게 보다 더 쓰고 높은 도수의 희석식 소주를 고수했는데 최근에는 도수를 점차 낮추는 것도 모자라 다양한 맛을 첨가하는데 이르렀다. 복숭아맛 블루베리맛 자몽맛 등등. 마케팅 측면에서 생각하면 시대의 입맛이 변한 것을 잘 캐치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술 자체의 질이 좋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저렇게 흥미를 유발해서 더 팔려고 하는 것이 기이하게도 보인다. 소비자의 측면만 보기에 일반 술집들이 한정된 냉장고에 늘어나는 다양한 제품들을 다 넣어놓을 여유가 있을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다.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알코올 음료로 기원전 600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극동은 극동인가보다.처음 한국에 공장이 생긴것은 1908년. 삐루니 비루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낮은 도수의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는 술. 현대는 직장인과 같은 노동자의 친구이지만 과거에는 꽤 고급품이었다. 마치 양주와 같이 말이다.
맥주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국산맥주의 고급화 과정에서 수입맥주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수입맥주의 맛과 국산맥주의 맛이 너무도 달라서 사람들이 보다 고급진 맛을 찾다보니 한국시장에도 고급맥주 라인업이 생긴 것인데, 막상 내놓은 맥주의 가격이 수입맥주보다 비싼경우도 왕왕있다. 요즘은 더 맛있는 것이 더 싸게 들어오는 상황.
최근에는 주머니사정이 안좋아지고 직장내 회식 및 음주문화가 많이 바뀌면서 집에 돌아가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하는데, 이런 흐름을 겨냥해 편의점에서 수입맥주를 싸게 팔고 있다. 취하기 위한 용도가 아닌 맛을 즐기고 휴식을 위한 용도로 맥주를 사들고 귀가하는 직장인들이 주요 고객층이라고 한다. 실제로 수입맥주 먹어보면 더 싸고 맛있다. 솔직히 한 백년 기다려줬으면 회사들이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만들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맘 돌아서는게 상책이지 싶다. 최근 양조법개정에 따라 소규모 맥주 업체들이 만들어내는 맥주들의 맛을 보면 이 생각은 더더욱 확고해진다. 보다 자세한 소주와 맥주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위키피디아를 탐독해보자.
잡다하게 주절거렸지만, 오늘의 주제는 쏘맥이다. 한국의 술 쏘맥.
닝닝한 한국 맥주(벌써 슬프다.)에 탄산기를 좀 죽여 목넘김을 좋게 만들고 낮은 맥주의 알코올 도수를 보충하여 누구나 확 갈 수 있게 만들어진 쏘맥. 일각에서는 맥주에 소주를 타면 소주의 감미료가 더욱 감칠맛을 살려 실제로 더 맛있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렇게 까지 많이 마시지 않아서 그것을 분석할 깜냥은 안되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겠다. 사람들이 괜히 마시겠는가. 어느정도 맛있으니까 마시지. 칵테일이라면 칵테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술보다도 한국적인 구석이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토종 술로 만들어진 칵테일. 그야말로 오리지날 중의 오리지날 아닌가.
하지만 그 맛이 빼어난 것은 아니고 딱히 일정 브랜드와 일정 브랜드를 섞어야 한다는 공식이나 비율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물론 어딘가에서는 장인들이 조합의 극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섞을 뿐...)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쏘맥이야말로 오리지날중의 오리지날. 과거와 현대를 관동하는 시대적인 흐름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밥도 비벼먹고 술도 비벼먹고. 딱히 정해질 조합법도 없이 시원하게 비빈다. 이거 뭐 못 비볐다고 문제삼는 사람도 없다. 밥에 고추장을 많이 넣어서 비빕밤이 짜면 밥을 더 넣으면 된다고 생각하듯 쏘맥이 별로면 맥주를 더 타거나 새로 조합하면 그만이다.
나는 한국인의 국민성이 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쏘맥을 만들어 먹을 때 보면 약간 대륙의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짧고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와 같은 산뜻함 이랄까. 신나게 섞고 선뜻 마시고 즐거워 한다. 상처를 술로 씻으며 달려온 동지들이라고 생각하면 맘이 짠하기도 하다. 취해 웃는 사람들을 보면 술을 안마셔도 덩달아 웃게 될 때도 있다. 물론 사고를 대차게 칠라 치면 신고가 답이다. 망설이지 말자. 흰소리들이었지만 언젠가는 좋은 맥주와 좋은 소주가 태어나 멋진 쏘맥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적어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