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글. 사진. 아홉시 영화로 읽는 시공간 - 마션 : 또 다른 삼라만상 장르의 영화 / 글. 곡주대비 나의현대예술순례 - 04. 타자와의 접속, 그리고 Seele / 글. 사진. 황정운 택시를 탔다 - 03. ‘지나고 나면 다 웃을 수 있어요..’ / 글. 사진. 고수진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옆사람 인터뷰 - 08. 사회로 나아가기 /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 24. 다양하고 다채로운 북촌 / 글. 사진. aoikasa Daily Archive - 어떤 마임 연기자 / 글. 모음. 김혜미 Road - 11. 감 / 글. exxx
**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 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정말 친절히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병이 쑥 하고 낫는 일은 드물지요. 얇아지던 책이 쑤욱하고 살이 붙는 것도 희귀한 일이겠지요. 하면서 말도 안되는 핑계로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연재를 해온 <물질과 비물질> 김종소리님과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 소 개소>의 신당동 파르한 님이 지난달을 끝으로 연재를 중단하셨습니다. 오래되고 아끼던 코너들이었기 때문에 잠시 눈물을 ㅠㅠ 개인적으로도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겠지만 지면을 빌려서 오랫동안 수고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올해는 많은 일들이 있네요. 준비중인 코너들이 많았는데 잘 이루어진 것은 몇 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 달에는 핫한 분을 영입하려고 옆구리를 찌를 준비중 이란 사실 정도로 부끄러운 글을 줄입니다. 여러 코너들의 부재로 다소 얇아졌지만 한 편으로는 다른 필자분들을 영입할 기회 이기도 하니 잘 극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파도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답니까 ^^ 자 그럼 호빵들 따뜻하게 드시고 다음달에 건강하게 만납시다.
월간이리 exxx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아...삼라만상이라고? 이 인생이 싫었다가 좀 살아 볼 만 했다가 초 단위로 변하는 영적인 캐 미컬로 주체가 안되는 이 군상이... 삼라만상을 이야기 한다고? 단어의 뉘앙스만 싣고 싶었다 고 해두자. 지난 몇 해간 우주 장르라는 첨단의 프레임에 삼라만상의 미미함, 혹은 거대함을 쿨하게 담아낸 철학적인 영화들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 그래비티, 인터스텔라에 이어 마 션이 개봉했다 세 영화를 다 본 일인 으로써의 평가로는 마션이 제일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지구를 벗어나 하게 되는 아젠다가 세 명의 주인공이 다 다르지만 결국 깨닫고 돌아오는 이야기는 같은 줄 기 아니겠는가. 지구를 벗어나보니 인간은 세포의 집합체일 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 포체가 얼마나 기막힌 업적들을 이루어 냈는가 하는 역설적인 배움을 얻어낸다는 주제를 기 본 골자로 말이다. 우주 장르 라고 하기 좀 뭐하다면 ‘삼라만상’장르 라는 좀 특이한 용어를 써서 이야기 하자면, 이러한 장르의 영화가 감독, 리들리 스캇의 첫번째 작품은 아니다. 전에 프로메테우스 라는 좀 더 심오한 작품도 있었고, 속편이 나온다고 하니 스캇 감독의 잠재적인 또 다른 장기 분야 라 고 해도 좋을 듯 싶다.
화성 탐사를 위해 떠난 식물학자 마크는 화성폭풍으로 인해 대원들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된다.
영 화 로
그 후 몇년간 그와 나사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하여 결국 화성탈출을 성
보 는
거나 상상할 수도 없었던 스토리를 기대할 순 없다. 영화사 10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얼마
시 공 간
말해 what 의 싸움이 아닌 how의 싸움이 도래한 것이다.
공한다는...뭐 어찌 보면 그다지 특이 할 것 없는 스토리다. 다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이제 관객들은 굉장히 특이하 나 많은 영화가 만들어 졌고 그 가운데 정말 재현되어지지 않은 신대륙 같은 스토리가 남아있 을 것 같은가. 중요한 것은 모두가 아는 혹은 기대할 스토리가 어떻게 말해지는 가 이다. 짧게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션은 이 how에 싸움에서 대승리 했다고 말하고 싶다. 상업영화 감독이 지만 거장이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은 리들리 스캇의 업적일 것이다. 그리고 원맨쇼가 가능
마션: 또 다른 삼라만상 장르의 영화
글. 곡주대비
한 또 다른 배우의 등장. 맷 데이먼의 활약. 처음 부터 끝까지 구출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이 영화는 탐 행크스의 캐스트 어웨이나 산드라 블록의 그래비티와 비슷하지만 좀 다르게 느껴지 는 부분이 있다. 무한 긍정의 행크스도 절대 강자로 보이는 블록도 아닌 이 영화에서의 맷 데 이먼은 어떨 것 이라는 이미지가 없다. 그가 포기라도 할 것 처럼 투정을 부리면 그가 정말 그 럴 것 같고, 우주복을 뜯어내고 아이언맨 작전으로 우주선에 옮겨 탄다고 호기를 부리면 정말 그럴 것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하는 말은 곧 그가 할 행동 처럼 들린다. 관객에게 선입 견을 심어주지 않는 배우라는 말이다. 이는 맷 데이먼의 스크린 페르소나 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그가 나오는 장면들 을 유심히 보다 보면 감독의 세공(?) 이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비티에서 산드라 블 록이 광활한 우주의 한 점으로 보여지거나 굉장히 큰 배경에서 작은 물질 (?) 로 이동하는 것 이 많이 보여졌다면, 마션은 그 반대다. 맷 데이먼의 클로즈업이 시시때때로 쓰이고, 이는 얼 굴 클로즈 업 뿐만이 아닌, 그의 몸 전체, (예: 오프닝 시퀜스의 ‘자가 수술’ 장면) 혹은 그가 전 파를 타고 보여지는 스크린 씬 (나사에서 지켜보는) 을 통해 관객은 그와 ‘동일시’ 를 할 수있 는 기회가 훨씬 더 많은 것이다. 리들리 스캇의 또 다른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와는 또 다른 전략이다.
글라디에이터에셔는 막시무스의 액션과 몸이 콜로세움과 함꼐 보여지는 장면이 많은 반면 마 션에서의 마크는 우주복 안에서의 얼굴, 작은 우주선 안에서의 그, 정도로 공간이 좁혀지고 인 물이 커지는 씬이 많다. 결국 영화 말미로 가면, 마크는 ‘우리의 마크’ 가 되고, 그의 무사 귀환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 고 관객은 마크와 산전수전 스케일이 아닌, ‘삼라만상’ 을 같이 겪은 동료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인물의 감정선이 클로즈 업으로만 해결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배우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 하는 부분이다. 모든 도전, 실패 혹은 그 과정 전체를 이 인물이 감당하는 것이 당연해 보여야 하는데 맷 데이 먼은 그것을 너무나도 초연하게 잘 해내고 있다. 역할이 쏟아내는 분노와 설움, 기쁨과 체념이 선을 넘지 않고 현명히 조율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정말 오랜만에 좋은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특히 이 시대의 거장, 리들리 스캇의 손길로 빚어진 마션,말이다. 삼라만상을 목도하고도 유쾌하다고 느껴지게 할 수 있는 상업영화를 만들 수 있 는 몇 안되는, 거장이다.
나의현대예술순례 #04 타자와의 접속, 그리고 Seele 글. 황정운
1_ 몇 년 전 나는 공간과 음악의 이종교배를 시도한 적이 있다. 2010년부터 서울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도시갤러리프로젝트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뒤의 일이다. 나 자신이 서울시민임에도 서울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드물었고, 그래서 도시갤러리프로젝트 작품이 놓인 곳과 그 공간을 찾아가는 과정의 모든 공간이 새롭게 느껴졌는데 사실 서울이라는 공간 자체가 새롭게 기억되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서울이 정말 아름다운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중 일전에 언급했던 경희궁의 PRADA Transformer를 경험하고 나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다른 것들의 교합이 클리셰의 공간을 아주 신선한 경험으로 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서울의 고궁을 다니며 그 고궁에 어울리는 서양 클래식 음악, 그것도 교향곡만을 골라 서로 매칭해보자는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심포니 meets 서울” 이었다. 2012년 6월의 일이다. 프로젝트 시작으로 선택한 고궁은 종로 창덕궁이었는데 이 곳에 어울리는 교향곡은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창덕궁은 경복궁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광화문 아래의 넓은 광장을 지나 압도적인 사이즈로 위압감을 주는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동선이 일직선에 놓여있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가 한눈에 체감되지 않는다. 그나마의 규모도 넓은 후원에 가려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다시 수렴되는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생각한 연결고리는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이었다. 9번 교향곡의 타나토스를 경복궁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위압적으로 발산하지 않고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7번만의 아름다움이 창덕궁의 그것과 제법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런데 조금은 의외였다. 1악장부터 4악장이 끝날 때까지 천천히 창덕궁을 걸어 다녔는데, 처음 생각했던 심포니와 서울이 교접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서양과 조선의 간극만은 아니었다. 하나의 느낌, 하나의 목표를 두고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요소를 잠시나마 붙여놨지만 손을 떼자 삽시간에 떨어져나가는 이질적인 느낌 그 자체였다. 들뢰즈의 생각처럼 잠시 그들은 서로에게 접속되어 있었기는 했지만 결국 예술기계로 승화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은 창덕궁으로부터 생성된 것이 아니었다. 예술의 창조라는 필요에 의해 서로에게 연결되었을 뿐 그들은 각자에게 타자였을 뿐이다. 타자끼리의 접속은 하나로 내재화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프로젝트를 더 이상 계속하지 않았다.
2012년 6월 창덕궁 meets 베토벤 교향곡 7번, 그리고 카라얀
2_ 나는 기본적으로 칸딘스키의 예술론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예술에서 심미감을 발현되기 위한 씨앗은 외부와의 접속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가가 그 작품에 심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사유와 정신이 그 작품의 모든 방향을 이미 결정해 버린 것이며, 예술로서의 작품은 작가와 작품과의 최초의 접속 때 이미 운명된 것이다. 예술작품에 있어 타자란 작가라는 최초의 아담 한 명으로 충분했다. “칸딘스키는 회화는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사고, 감정, 진실, 즉 ‘내적 필연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살아있는 자연의 모든 형태가 영혼을 가지고 있듯이 추상형태는 내적 필연성이라는 영혼을 부여받으면서 존재의 권리를 갖게 된다” - 20세기 미술사, 김현화 지음, 한길아트 펴냄 이런 생각에 보면 베토벤 교향곡과 창덕궁을 교배하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이질감 때문이 아니라 창덕궁이 전달하는 소리로서의 예술은 창덕궁 내부에 이미 심어져 있어 거기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하는데 나는 외부(타자)와의 접속을 통해 인위적으로 소통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 생각은 작년 파리에 잠시 들릴 일이 있을 때 재확인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의 가장 큰 기대 중 하나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마네의 올랭피아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환상적인 경험은 오르셰에서가 아니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센 강을 걷다가 팔레 드 도쿄 바로 옆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에 들리게 되었다. 마침 관람요금도 무료여서 가방을 맡기고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보다가 어느 큰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북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행진곡에서 들릴법한 경쾌한 북소리가 아니라 타이티의 이국적인 청년들이 늦은 밤 제식행사에서 울릴 법한 깊고 두려운 북소리였다. 내 눈 앞에 놓인 건 마티스의 <La Dance inachevee>… inachevee라는 말 답게 색채가 희미하고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는 미완성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생 뻬떼르부르끄의 완성작 <La Dance>에 근접한 거대한 몸짓, 힘, 생명이 눈 앞 가득 펼쳐져 있었다. 마티스의 군상은 시각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동성은 소리로 환원되었고, 아니 자동적으로 소리로 환원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완성되지 않았지만 마티스는 이 그림 안에 압도적인 생명과 힘을 시각, 청각, 촉각으로 그려 넣었던 것이다. 외부의 다른 매체로부터의 접속과 도움은 필요 없었다. 침묵으로 포효하는 군상이 마티스의 영혼이었고 북소리는 단순히 귀로만 들리진 않았다. 춤이라도 출 일이었다. 그 작품은 복합적이면서도 대단히 순수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La Dance inachevee>, 1909, Matisse, MusĂŠe dâ&#x20AC;&#x2122;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3_ 사실 이 것은 결국 현대예술 앞에서 나의 한계를 다시 깨닫는 자기 고백의 그것이다. 자기반성을 해보면, 타자와의 접속이 필요 없는 예술의 내재성은 결국 예술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나의 한계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직까지 현대예술은 다양한 매체의 조합을 통해 작가정신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는 것이었고 여전히 그런 현대예술 앞에서 추의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나의 감정을 재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대예술에서의 다양한 시도들. 물성적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단순히 교합시켜놓으면서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뒤샹 식으로 명명하는 그것들에게서 나는 솔직히 환멸을 느꼈다. 그들의 예술성은 작가와의 접속 순간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타자, 다른 사물과의 접속 그 순간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며 또한 작가과 작품과 관객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얼마 전 서울역에서 열린 ASYAAF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젊은 작가들이기에 주제뿐만 아니라 표현의 소재와 방법에 있어서도 대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작품에서는 Seele가 잘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그 부재는 현대예술과 나 사이의 현재 시점의 한계일 것이다. 마티스의 미완성 작품을 보며 느꼈던 희열도 거기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며, 창덕궁에서 들었던 교향곡은 그러한 관습을 깨보려고 했던 보기 좋은 실패였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는 내 눈앞을 가득 메운 수화 선생의 그림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언제나처럼 하얗고 조용한 부암동 환기미술관을 거닐고 있으면 캔버스가 복합적으로 발산하는 점과 색과 선과 소리에 우두커니 압도당한다. 1970년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의 명멸하는 점들에서는 우주의 소리가 들린다. 우주의 냄새가 흘러나온다. 1938년작 <론도>에서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보인다. Chopin의 Polonaise라도 연주하는 것일까, 경쾌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2층을 가득 메운 거대한 거인들.. 이름도 없는 거인들이다. 사람의 조형이 아니라 직선, 곡선, 청색, 적색, 흑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이지만 일련의 <Air and Sound> 작품은 정지한 채 호흡하고 소리 내는 거대한 군상들이었다. 그 힘과 몸짓과 생명력은 파리에서 보았던 마티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뒤샹이기 보다는 마티스였던 것이다. 뒤샹과 마티스는 20세기 초 동시대인이었는데 Contemporary Art에 대해 믿고 생각하는 바가 그들을 전혀 다른 예술세계로 접속시켰다. 그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나와 현대예술 사이의 간극도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어지간히 두꺼운 종이 한 장이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1970, 환기미술관
환기미술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자하문로40길 63 현재는 진유영 작가의 <빛 위에 그리다> 작품 전시 중 (2015.12.31일까지)
택 시 를 탔 다
S#3. 구반포역-우리집, 15700원 - ‘지나고 나면 다 웃을 수 있어요.’
글, 고수진 (gomin19@hanmail.net)
이제 집에 왔다. 벌써 중3은 기말고사 시작이다. 11월 2일부터 졸업고사를 보는데 우리에게는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대치동과 방배, 반포를 다니는 소위 8학군이라 부르는 지역의 중3 학생들이 졸업고사를 치르고 예비고1이 되면서 학원을 대거 움직이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 나는 하라는 수업 준비는 안하고 술을 가볍게 마셨다. 내 주량은 소주 반병인데 혼자 좀 마셨다. 집에 와 씻고 원고를 쓰고 있다. 생생한 감정 그대로 쓰고 싶다. 오늘은 10월22일 새벽 1시 40분이다. 3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연봉도 또래에 비해 많이 받는 편이다. 이 모든 게 주말을 반납하고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는 빨간 날도 일하고 추석 때도 일한다. 내가 오로지 쉬는 날은 월화, 그것도 시험기간은 월요일 하루다. 좀 쉬고 싶으면 “고3인데 명절에 쉰다고요?”이다. 할 말이 없다. 나도 너희들도 너무 안쓰럽다. 휴일을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날리니 돈은 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좋아하는 일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내 맘처럼 쉽지 않았다. 조용히 고이 접혀 나비처럼 포슬하게 날아가 버렸다. 붙잡아 볼 수도 없었다. 내겐 그럴 용기와 여력이 없었다.
그만 둘까? 그러기에는 할 줄 아는 게 이 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병맛 임용 제도를 탓하며, 좋아하는 사람과 일을 그렇게 날려버리고 학원 앞 혼자 먹어도 아무렇지 않을 술집에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미국 서부 영화처럼 생긴 맥주집이다. 거기서 병맥주 2병을 마시고 택시를 탔다. 타자마자 울었다. 모르겠다. 울었다. 쓰면서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울지 마세요, 아가씨 예쁜 얼굴에 울면 늙어요.” 아저씨는 라디오 볼륨을 줄여주시고 휴지를 건네셨다. 나는 코를 풀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밤중에 울면 나쁜 사람들이 나쁜 짓해요.” 그러시면서 뒤쪽 창문을 활짝 열어주셨다. 감사했다. 그렇게 ‘엘루이호텔’ 을 지나갔다. 그냥 주절거렸던 것 같다. 힘들다, 허하다, 다 멀어져가는 것 같다 뭐 등등등 “욕먹기 싫어서 열심히 일하고 그러다보니 모든 게 멀어져 가요 나이만 먹었어요.” 라고 얘기 했다. 기사님은 청담 쪽 도로 쉼터 같은 곳에 잠시 세워주셨다. 미터기를 끄시며, 실컷 울고 출발하자고 하셨다. 지금 쓰면서 눈물이 난다. 너무 감사해서. “아가씨 나는 23에 결혼을 했어요.” 오늘의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다 웃을 수 있어요. 기사님은 23에 결혼을 하셨다. 연애결혼이었다. 집안의 반대도 컸지만 이 사람이다 싶었다. 기사님은 특정한 직업은 없으셨다. 소매업체에서 물건을 사서 5일장, 3일장 이런 곳에서 물건을 팔았다. 장돌뱅이의 삶. 고단했다. 아내가 임신을 했다. 아내와 태어날 가족을 위해 지금보다 더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다. 가방끈도 짧고 특정한 자격증도 없어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일이 이 택시였다. 그런데 장돌뱅이 때 보다 더 힘들었다. 손님들이 무시하고 욕하고 아직도 우리나라는 직업을 보며 사람을 무시하는 후진국이었다. 이유 없이 뒤통수를 맞는 일도 있었다. 미터기를 고장 냈지? 길 돌아갔지? 내가 누군지 알아? 야 너무 험하게 운전했으니까 돈 못주겠다. 너희 회사 사장님께 말해라.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 요즘은 젊은 친구들이야 좀 예의 있지만 그것도 아주 적은 소수고, 젊은 애들도 싸가지 없는 놈은 없다고. 하시며 담배를 무셨다. 첫째 아이는 집안 형편 때문에 사춘기 때 무진장 방황했지만(이 이야기를 하시며 담배를 계속 빠시는 걸 보니 정말 무진장 방황인 것 같다.) 지금은 벌써 회사원이 되어서 생활비도 보태고 둘째 놈은 군대 갔고 다들 다행히도 잘 컸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가만히 담배를 끄셨다. 그리고 자기가 벌써 이 일은 한 지 10년이 되었다고. 벌써 베테랑 택시기사라며 서울에 모르는 길이 없다며 웃으셨다. 택시를 그만 두고 싶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이런 생각에 놓지 못했다. 그런데 참고 참으니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넘기게 되고 무뎌지고 오히려 여유까지 생겼다. 그리고 일도 자식 일도 시간이 다 이끌어 주는 것임을 배웠다. “아가씨 힘들어, 원래 사는 게 힘든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아무렇지 않게 지금 내가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 나도 참 고생한 삶이거든, 아가씨 힘내 지금 이 서글픈 감정도 나중에는 웃으며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며 위로 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 늦은 시간에는 택시 타지 말고. 세상이 험해.” 자그만 체구지만 크게 벌어진 어깨. 두툼한 손마디.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시간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체면 생각하지 말고 펑펑 우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묘하게 시원한 밤이다.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8_ 사회로 나아가기
옆 사람 인터뷰
요즘은 ‘현실’이라 일컫는 사회의 흐름을 생각한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에 이어 수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에 나 또한 있다. 조금 늦게 졸업을 앞두고, 주변에는 제각기 Globewalker, 사회로 나아가기여행하며 위한 노력이 즐비하다. 1_ Granz 음악하기 오랜만에 만난 지현이도 나와 같이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날씨는 벌써 겨울에 접어든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어 �� ���� ��� ��� ���� ���� ���� ��� 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 ����� ��� 밤�� �� ��� ���� 결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에있다. 가도 있 비교적�� 적은 수업으로 여유롭게 학교를 다니고 동시에 는 것은 사람으로 펼쳐진 취업 준비를 하고사람이요, 있다. 전공과 관련은 없지만 경찰시공간이 공무원 시
진로 선택에 있어 영향을 준 삶의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현실적인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었다. 더불어 뭔가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개
었다. 내가 만났고 만나고 있는 사람들 또한 험, 순경 시험을 준비한다.
인적으로도 경찰이라는 직업이 내게 괜찮은 것 같다. 비상근
아름다운 여행지의 하나였다. 여행을 이야기하
무가 아니면 일이 규칙적이라서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이
요즘은고전공을 살리는 일이 오히려 드문 것비행기에서 같다. 그래도생경 싶었으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때 다른 발전적인 일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찰은 생각지 하하 원래 전공은 무엇인가./ 각했다.못했다. 사람을 여행해볼 작정이라고.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다. 이 경험이 네게 어떤 변화를 식품생명공학을 전공한다. 고등학생 때 수학이랑 화학 등의 과목이 좋았고 성적도 잘 나왔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던 게스트하우스에는 다양한 삶이 오고갔다. 그 때에 막연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과목을 심화해서 배울 수 있 랜트는 미국에서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는 전공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택한 게 식품 행을 온 사람치고는 그의 하루가 꽤 정적이었 생명공학이었다. 동기 중에는 이쪽에 흥미를 느끼는 친구들이 다. 그는 공용 공간에서 편의점 음식을 먹거나 많은데, 나는 보다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 의미라는 비틀즈의 전곡을 모아 놓은 교본을 옆에 두고 게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기타를 치고는 했다. 내가 그의 반려자와 다름
없던 직업이 기타를친숙하면서도 두 동강 내기 경찰이라는 나와는전까지는(당분간 다른 세계인 것 같 Hey Jude를 배우겠다고 설칠 일은 없으리라). 다. 경찰은 어떻게 되는 건지, 시험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 주면 좋겠다.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텍사스에 1년 정도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교환학생 이후 그게 많이 사라졌다. 비교하고 경쟁 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문화를 접하며 나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 로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 얘기를 하고 싶은데, 가 장 가까이 지냈던 엘리자베스라는 친구는 농업을 전공하고 는 비틀즈와 그의 노래를 있었다. 그 이유가로드리게즈 아프리카에 만큼이나 자신이 배운 기술을 알려주고
좋아한다. 도와주고 싶어서란다. 감명 깊었다. 감사하게도 좋은 친구들 을 많이 만났고 내게 좋은 에너지를 주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의사가 될 것을 내가 보려는 시험은 6살 순경 때부터 공채 시험이다. 관련 필기시험, 체력 기대했지만 그는 음악을 꿈꾸었다
우리는 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시드니에 만났다. 그때도 조금 1학년 더 오래 머물 줄 알았는데 갔 느
시험, 면접 등을 본다. 시험은 한번 본 적이 있고, 지금은대학 어느 고 한다. 소망은 오랜 시간 그대로였으나
낀다. 거지만 항상어떻게 모든 일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잘해온 것 같 요즘은 지내고 있나.
정도 공부가 되어 있는 상태다. 체력시험인데, 시험을 을 졸업한 후에야 그는문제는 온전히 음악을 하기로 준비하기 전부터 오래 달리기 등 운동에 취미를 붙인 게 도움 마음을 먹었다.
다. 지금 시험도 즐기면서 하고 있는 것 같고. 공부 체질인가.
이 되고 있다. 요즘은 윗몸 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등을 연습한 다. 처음보다는 많이 늘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 직접 녹음한 아홉
곡이 담긴 CD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요즘 나
나도 오래 있고 싶었지만 관광비자만으로는 그 공부라고 생각하면 너무 지루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좋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다.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데, 공부를 지 시드니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비행기 표를 사기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운동 같은 것도 하고 나면 몸에 변화가 느껴져서 즐겁다. 안에서 맴도는 게 싫 은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대해 긍정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졸업을 앞두고 아쉬운 점이 많다. 너는 어떤가.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혹은 이걸 해보면 좋았겠다 싶은 무 언가가 있나. 연극동아리에 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과 교류하며 하나의 작품을 직접 만드는 과정을 경험하고 싶었는데, 그 게 아쉽다. 네가 경찰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과의 교류가 좋다. 그 사회와 교류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해결해주고 싶다. 손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는 따뜻한 여 경이 되고 싶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모두 같은 길을 간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각자 고유한 길을 걷는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은 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졌으나 동시에 헤매는 일도 많다. 주어진 것 안에서 나는 어떤 색깔을 가질 수 있을까. 아무렴 여경이 된 지현 이가 우리를 지켜주겠지. 글, 정리 : 이내
건축이 좋아. #24. 다양하고 다채로운 북촌 aoikasa
북촌.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의 거주지이자 현재에는 옛날의 서울을 그나마 잘 보여주는 역사문화지구. 오래된 한옥들을 보존하고 활용하여 서울 내에서 가장 '한국'적인 풍광을 지닌 곳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북촌을 찾고 아끼고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일텐데...
우리가 '북촌'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도 한옥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한옥들이 조선시대부터 있 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회동31번지로 대표되는 북촌의 'ㅁ'자 한옥들은 대부분 1930년대 중반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그 것도 집단적인 도시 개발에 의해서 말이다. 아무튼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원래의 주택을 변형시켜 (기존의 큰 땅을 작게 잘라 쪼개 고 담장을 없애고 건물의 외벽을 주택의 겅계로 사용한다는 등) 우리식 도시주거유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북촌의 1930년대 도시한옥들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건 축물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사실 북촌에는 이런 한옥만 있는 건 아니다. 북촌을 찾는 많은 이들은 '한 옥'을 보러 찾겠지만 사실 북촌에는 한옥 외에도 다양하고도 다채로운 건물들과 풍경들이 있다. 한옥만 보다 되려 놓치는 풍경들, 한옥만 보존하려다 되려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리는 건축들. 이들이 함께 있 었기에 현재의 북촌이 만들어진 건데, 이들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조금 더 들여보면 조금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우리의 북촌. 낯익으면서도 낯선 그 풍경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계동길을 따라 놓인 좁고 긴 2층상가들’ 북촌문화센터를 지나 계동길을 조금 올라가다봄면 코너에 아주 작고 얇은 붉은 벽돌 2층 집 하나가 있 다. ‘최소아과’라 쓰여진 오래된 간판이 붙어 있는 이 곳은 북촌에서 오래 사신 주민들이 어린 시절부터 이용하였다는 소아과이다. 지금은 의사선생님이 나이가 많으셔 더 이상 진료를 하지 않는 곳. 그리하여 지난 해부터인가 내내 문이 닫겨있는 곳이다. 이 건물은 참 작다. 입구가 있는 짧은 변을 보노라면 일본 에서 유행하는 ‘협소주택’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계동길을 따라 가다보면 이렇게 좁고 긴 건물 들이 자주 보인다. 어떤 건 벽돌로, 어떤 건 나무로, 어떤 건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들은 모두 좁고 긴 땅 모양 그대로 좁고 길게 세워졌다. 왜 이런 땅모양과 건물모양이 생겨난 것일까? 몇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원래 ‘ㅁ’자형 인 한옥들이 많았던 이 지역의 특성상 상업이 발달하면서 ‘ㅁ’자형 한옥 중 가로변과 맞닿은 부분만 따로 떨어져나온 것이다. (여전히 이런 스타일의 건물 뒤편으로 ‘ㄷ’자형의 한옥 이 이어지는 경우가 꽤 남아 있는 데다가, 이런 유형의 건물들이 한옥의 폭과 비슷한 폭을 가진 것을 보 면 아마 이 추정이 맞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경우는 똑같이 ‘ㅁ’자형의 한옥이 있었던 땅 앞의 도로 가 넓혀지며 앞부분인 ‘ㄷ’자 형이 ㄷ떨어지고 뒤의 ‘ㅡ’자형 부분만 남아 좁고 긴 땅 모양이 만들어진 것 이다. 아무튼 이렇게 좁고 긴 땅들에 세워진 작은 집들의 역사를 찾아보니 길게는 70년, 짧게는 40년 정 도의 시간을 지닌 것들이 다수 있다. 북촌의 대표격인 도시형한옥들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인데, 아무
도 이 좁고 긴 2층 상가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 하여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계동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좁고 긴 건물들)
근대인의 생활을 추구하던 서양식 집들 북촌은 한옥마을로 알려져 있지만, 재미있게도 1920년대 중후반이후 지어진 서양식 주택들도 꽤 많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 권문세가, 그러니까 안동김씨를 비롯한 지체높은 양반들과 왕의 친척들이 살던 북촌은 20세기가 되어도 그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조선 귀족 작위를 받은 이들(이전 까지 북촌에 살던 이들이 양반에서 귀족으로 바뀐 것 뿐이다.)이 거주하는 곳이었으며 자본의 성장과 함 께 실업가들(우종관이나 박흥식같은) 이들이 사는 곳이었다. 아무튼, 19새기 말 이 동네에 여러 채의 한 옥(일본풍이 가미된)을 지었던 한상룡(현 산업은행관리가옥도 백인제가옥도 다 한상룡의 집이었다.)을 비롯하여 윤치호의 형제들, 그리고 실업인 우종관 등이 건축한 주택들은 여전히 북촌에 남아있는데 사실 이들 중 대부분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담장의 길이와 담장 너 머로 솟아오른 지붕을 보며 그 ‘대궐같은 집의 규모’에 놀랄 뿐이다. 아무튼 실업가였던 우종관의 경우 두 채의 서양식 주택을 지었고 이 두 주택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당시의 문화주택 (즉 당시 사람들이 동 경하던 서양식 생활을 할 수 있는 집, 문화인이 사는 집)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나름 당시의 건축 잡지인 조선토건축에도 소개되었던 집이다.) 그 중 한 채(가회동 주소지인 집)의 경우 이후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 거주하였고 당시 한국인건축가 박길룡이 증축을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윤치호 형제들의
집은 현 가회동 큰 도로의 양측편에 위치했는데 현재는 윤치왕 가옥밖에 남아 있지 않다. 작년 이맘 때 만 해도 윤치왕 가옥의 건너편(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저)에 있던 윤치창 가옥은 이젠 흔적도 없이 사라 져버렸다. 아무튼 윤치호형제들의 집은 한국에선 최초로 미국에서 건축학위를 하고 시카고에서 설계사 무소를 다니다가 온 박인준이라는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것인데, 완전히 서양풍의 붉은 벽돌집을 북촌 한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에 지어진 집이니 거의 90년이 된 것이다. 또 한옥마을로 유 명한 가회동 31번지 위편에는 이준구가옥이 있다. 석재를 사용하여 지은 유럽의 성을 연상시키는 이 집 역시 비슷한 시기 지어진 서양식 주택이다. 이처럼 북촌 곳곳에는 1920~20년대 지어진 서양식 주택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말 그대로 정말 높은 담장에 숨어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북촌한옥마을의 주인공, 도시형 한옥들 북촌이 한옥마을인 이유는 바로 이 도시형 한옥들 때문이다. 한국인 건축가들과 돈있는 자들이 문화인 은 이런 집에 살아야한다며 서양식 주택을 만들던 그 때. 개발업자 정세권은 다른 생각을 하였던 거 같 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서양식 주택들이 위치해있던 땅의 크길르 보면 예상할 수 있듯, 이 지역엔 이전부터 고관대작들이 살던 큰 집들이 많았다. 그 큰 집들이 위치했던 큰 땅을 정세권은 아주 작은 필 지로 (ㅁ자형 한옥이 경계에 딱 붙어 들어갈 정도로) 쪼갠 것이다. 그리하여 가회동 31번지 같은 경우 원 래 하나의 땅이었던 곳을 수십 개의 땅으로 쪼개고 그 사이 사이 반듯하게 뻗은 길들을 었다. 그리고 거 의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ㅁ자형 한옥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역이 한옥들이 가득 남아 있
는데 31번지라는 1개의 번지로 부르는 것이다. 이 곳의 한옥들은 조선 시대 한옥들과는 많이 다르다. 담 장이 쭉 둘러싸여 있고 집은 그 안에 있던 조선시대 한옥들과 달리, 집의 외벽이 그대로 외부와의 경계가 된다. 그리고 벽돌이나 다른 재료들도 다양하게 사용한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와 같은 구분은 사라지 고 그저 마당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공간으로 엮인다. 아, 또 하나. 문 근처에는 ‘분간방’을 만들어 셀르 놓을 수 있게도 되어 있다. 지금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의 한옥이 되었지만 당시로선 도시 중상류층을 위 한 분양 주택이었던 셈이다.
(1912, 1936, 2015년의 지도를 비교해보면 가회동 일대의 땅이 쪼개어져 작은 필지로 분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것이 코리아 북촌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 도시형 한옥들과 그 사이 사이의 빌라들, 저 멀리 오피스 빌딩들과 그리 고 이 ‘코리아’라는 글씨가 선명히 보이는 목욕탕 굴뚝이 함께 보이는 이 풍경. 왼쪽으론 북촌이 오른쪽 으로는 삼청동과 경복궁이 보이는 이 풍경이 참 ‘코리아’스러워 좋다. 다양한 것들이 섞여 만들어낸 혼종 적이지만 역동적인 이 풍경. 북촌의 이 풍경 안에는 ‘한옥’만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좁고 긴 2층 한옥 도 있고 90여년이 된 서양식 주택도 있다. 중간중간 오래된 학교들도 있고 또한 그 주변에는 번사창 같 은 19세기 말 건물도 있다. 다음에 북촌에 가시거든 최소아과 건물도 눈여겨 보고, 계동커피 건물도 눈 여겨 보고, 언덕 위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는 이준구 가옥도, 대로변 윤치왕 가옥도 한 번 살펴봐주시길.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코리아’를 담은 북촌을 느껴보시길. 이토록 우리 시간의 흔적은 다양하고 다채 로운데…. 그 것이 역사의 본연의 모습일터인데….
(의도치 않았던 지난 달의 갑작스런 휴재에 혹여나 기다렸을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Daily Archive 어떤 마임 연기자
<Etienne Decroux’s perfomance>
포르토(Porto) 시청 광장은 2차선 도로를 합쳐 놓은 것 만큼 넓고 길게 펼쳐져 있어 서 광장을 벗어나려면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내가 포르토에서 머물고 있는 집 은 시청 건물 근처이고 바닷가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 광장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포 르토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그곳을 걸어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 임 연기자는 그 광장 앞에 있었다. 광장이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기에 마임 연기를 하는 장면을 마주치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질 일 은 아니지만, 그 마임 연기자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 그가 광장 중앙의 흰 대리석 조 각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습은 광장의 조각상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 문에 생각없이 걷다보면 그냥 지나치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가 조각상인 아닌 사람이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다시 지나오면서였다. 한눈 을 팔고 걸어오다가 그와 거의 부딪힐 뻔 했던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서 그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는데, 감은 두 눈 사이에 불그스름한 점막이 비쳤고, 눈꺼풀 이 강한 햇살에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하얀 분이 군데 군데 고여있는 살결과 주름도 보였다. 그는 얼굴과 수염에 흰 분칠을 하고, 흰 두루마 기 천으로 전신을 휘감고, 흰 장갑과 양말을 신은 마임 연기자였다. 흘러내리는 천의 주름하며 분장이 거의 완벽에 가까웠고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 조각상과 하나
가 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는 눈을 감은 채 나름의 동작을 하고 서있었는데 어떻 게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중심을 잡고 서있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나 는 그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하고 벤치에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 나 지나가던 한 사람이 습관적으로 그 앞에 동전을 던져주었는데, 땡그랑하고 소리 가 나자 마치 동전을 먹은 자동 인형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움직이지 시작했다. 동전을 던져준 사람도 기대하지 않았던 움직임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갑자기 눈 을 뜨고 고개를 돌리더니 돈을 던져 준 사람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여러가 지 손 동작을 하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각본이었지만 동 작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다양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동작 은 그가 두 손을 모았다가 펼친 뒤 입으로 그 사이를 후 하고 불었던 것, 손등을 앞으 로 보인 채 얼굴에 대고 좌우로 흔들거렸던 것, 표정은 없지만 눈을 찡긋거리거나 윙 크를 했던 것, 허리 춤에서 비눗방울을 꺼내 불었던 것, 그리고 돈을 준 사람을 향하 여 손목을 까딱까딱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으로 연기를 마치고 다시 잠자던 자 동 인형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다. 돈을 던져주는 사람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움직 이는 연기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적었다. 그러나 간혹 돈을 던져준 사람들 중에 그의 연기에 흥미를 느끼고 연이어 그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연 기는 조금씩 변주되는 디테일을 보였다. 또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쳐다보는 구경꾼 들에게는 발작적으로 움직이거나 눈을 번쩍뜸으로써 놀래키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 의 의상과 멈추어있는 동작은 성경에 나올법한 인물들 중 하나로 보였지만, 그가 움 직일 때 하는 연기는 코믹한 장난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마 이 극단적인 이중성이 다른 구경꾼들에게도 기괴하면서 재미있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날 나는 약 여섯 번 의 연기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나는 그가 또 다시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광장으로 나가보았다. 나에 게는 거의 고행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그의 연기가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기 때 문이다. 그는 그날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옆에 위치한 관광 정보 센터 직원에게 들어보 니 그는 오전 11시쯤부터 나와 해가 지기 전까지 매일 연기를 한다고 했다. 그가 이 광장에 나타나지 않는 날은 아마 장소를 옮겨 다른 곳에서 연기를 하고 있음이 분명 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한 손을 공중에 든 채 가만히 서있 었고, 한산한 거리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준비해온 동 전을 그에게 던지고 나를 위한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감상했다.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틀어 인사를 할 때 붉게 충혈된 눈과 마주쳤는데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과 어떤 서사가 담긴 듯한 간결한 손짓들을 기억한다.
몇 주간 그의 연기에 매료되어 내 머릿속에서 그의 형상은 마치 그가 한 분장과 같은 이미지로 -약간은 성스럽고 경이롭게- 미화되어 갔다. 이 상상에 정점을 찍은 사건은 그를 ‘안식을 위한 목초지’라는 뜻을 가진 묘지 (cermetery of Prado do Re-
pouso) 입구에서 본 날이었다. 그 묘지는 포르토의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이 개인 묘지를 만들지 못해 버려진 목초지 위에 묘를 짓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묘지였 다. 때문에 오랫동안 공식적인 묘지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시의 특권층에게 멸시를 받았고, 19세기에 와서 근대적으로 재건축되었는데 그 전에는 수많은 비석이 거칠게 세워진 넓은 농장일 뿐이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자 관광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를 그곳에서 본 것은 놀랍지 않았다. 내가 놀랐던 것은 연기를 하 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연기를 다시 한번 보기 위해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몸을 움직이더니 땅 바닥에 놓여있던 천과 동 전을 주워들고 입구에서 꽃을 팔고 있던 늙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동전으로 꽃 값을 치르고 묘지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한참을 안쪽 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한 묘지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꽃을 옆에 놓고, 묘비 위에 떨 어진 나뭇잎을 치우고, 액자를 닦기도 하며 묘를 정리한 뒤, 앉아있기도 서있기도 하 면서 시간을 보내는 듯이 보였다. 나는 멀리서 그를 지켜 보았는데 그날 따라 강한 햇 살 때문인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주변의 묘비와 더불어 그의 모습 또한 눈이 부 셨고, 마치 묘비의 조각상들의 일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가 묘비 앞에서 뭐 라고 중얼거렸는지, 얼만큼의 눈물을 흘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떠난 뒤 그 묘지에 다가가 보니 일반적인 묘석 위에 특이하게도 배구공 조각상이 있었다. 성모 마리아, 예수, 천사, 혹은 악마와 같은 ‘저 너머’의 형상으로 가득한 다른 묘비들과는 너무나 도 다르게 ‘이 곳’의 사물이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인지 나 스스로 끼워 맞춘 이미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배구공을 보며 처음으로 떠오른 장면은 그가 연 기 중에 두 손을 공중에서 번갈아가며 휘적거리는 동작이었다. 그 동작은 공을 가지 고 노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었을까.
묘지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런던을 떠나기 전, 세인트 제임스 성당에서 읽 었던 짧은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성당입구의 오른편 게시판에 사람들이 써붙여 놓은 기도 제목들을 읽어보다가 발견한 기사였다. 기사의 내용은 기이한 사고, 우연으로 인해 죽은 한 과부와 나이든 부부에 관한 것이었다. 발레리 웨스턴(Valerie Weston) 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자신의 집 정원 아래쪽에서 화분을 가꾸고 카누를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입고 있던 외투가 강풍에 부풀면서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가 누지 못하고 불어난 강쪽으로 밀려가 결국 강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시 신은 다음 날 강의 하구에서 발견되었지만 그녀를 강으로 실어 나른 코트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 다른 기사에는 60대 후반의 남편이 부인의 생일 파티를 마친 뒤, 그녀를 들어 침대로 옮기다가 척추가 부러졌고, 부인은 쓰러진 남편을 도우려고 하다 가 그의 몸 위로 넘어지면서 둘 다 숨을 쉴 수 없는 자세가 되어 사망했다고 했다. 부 부의 사인은 자세성 질식사(postural asphyxiation)였다. 묘지를 나오면서, 나는 어떤 사연이 있음이 분명할 배구공 조각과 엄청난 양의 묘지들을 보며 그 죽음 뒤에 숨어
있을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공을 던지는 연기를 하거나 기 사를 오려 성당 내부에 게시해 놓은 것과 같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기리는 나름의 방식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던 것 같다.
몇일 전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다가 그 마임 연기자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는 분장을 한 채 편하게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일상복을 입은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 끝으로 담배를 잡고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연기를 힘껏 빨아들여 내뱉는 모습은 여느 흡연자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내 머릿속 에서 형성된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그 행동을 보고 있는 것이 불편했 다. 나는 그가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는지 궁금해서 그 주변에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 기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와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는 몰라도 아주 화가나 있어 보였다. 그의 성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충격적이면서 배 신감 또한 느끼게 했는데, 그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침묵이 깨져 버 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대에서 나오는 엄청난 성량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만들어낸 그의 인상과 분위기는 분장이나 환상적인 연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 라 그가 노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늙고 병들고 약한 것 은 언제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마임 연기자가 젊었다면 느낄 수 없었을 무언가가 늙음과 약함, 죽음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으로 마주한 그 노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강하고 젊고 공격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 의 연기를 보고 처음에 느꼈던 신비함을 앞으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사 실보다 사소한 이유로 인해 최초의 느낌이 변질되었다는 사실이 더 안타까웠다. 그 리고 내가 그를 마주칠 때마다 높게 쌓아 올린 그의 이미지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엘리야나 모세를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는 이제 그냥 어떤 마임 연기자이다.
글.김혜미
Road - 11 (감) 글. exxx
감으로 뭔가를 아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배로 바닥을 쓸면서 입으로 온갖 것을 다 빨아먹으며, 손가락으로 만가지 것들을 건드리며 우리는 생존해 왔다. 시각을 포함해 몸에 닿는 모든 것들을 경험이라는 이름하에 기록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것이 축적되어 판단을 내리는 (혹은 단순한 찍기인) 감이란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어찌보면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더이상 불안에 떨지 않고 금전이나 지위로 인해 이후의 생이 안전하다면, 감을 확장시키거나 번뜩이며 살 필요가 없는 것도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탐구하거나 경험을 확장하려는 자세는 늘 즐거울 수 없고, 오히려 그러한 자세는 삶을 힘들게 만들 확률이 더 높다.
영화 변호인의 송강호만 봐도 그렇다. 국밥집 아주머니가 부탁만 안했어도 그 애의 등을 안봤을 것이고 그 애의 등을 봤더라도 자신의 안정을 꾀했다면 집에가서 뜬눈으로 고민하거나 생전 안읽어본 여러 책들을 읽으며 밤을 샐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냐면.. 오늘의 주제가 ‘감’ 이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 나는 감을 오래 두어도 영썩지 않는 것을 보고 참으로 신기하다 여겼다. 다른 과일들에 비해 감이란 녀석은 벌레먹지 않고 상하지도 않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어렸을 때 감을 말리고 또 말려 곶감으로 만드는 것을 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당시는 할머니가 샘 한곁에 널어놓은 감이 곶감이 되는 것이 무척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 사이에 벌레가 먹거나 쉬거나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달고 상큼한 사과도 아삭하고 물 많은 배도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포도도 다 썩어 문드러지는 마당에 땡구란 감만 능청맞게 들어앉아 오랜시간 윤기를 뽐내는 것을 보니 그것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그래서 감을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흐뭇함이 지나쳐 어느 순간엔가 ‘감이 한국에만 있는 것인가?’’ 아니 이 맛있는 감을 다른 지구의 사람들은 다 모른단 말인가!?!?’ 하면서 알 수 없는 자부심과 사랑을 더해 흐뭇한 미소를 짓기에 이르렀다. 더 웃긴 것은 이 당시만 해도 일본의 감씨과자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에서 감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나의 뇌는 충분한 근거를 판단의 변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계절이 돌고 돌아 한 번의 여름이 지나고 나무에 흔하게 감이 열리는 시절이 되니 요 며칠 감을 선물해 주는 이들이 몇 있었다. 상품으로써 감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곶감이 비싼것은 알고
있다.) 시골의 감은 지나가는 계절에 작대기를 들고 나가 맛을 보는 정도로 즐기는 과일이지 그 수가 풍족해서 내다 팔거나 즐겨 나누는 과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을 선물 받는 일은 그것이 단 한 알이라 할지라도 나에겐 무척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감을 받아들고 능청맞은 감을 바라보다가 역시! 감은 한국에서만 먹는 독특한!? 과일이지 라는 나의 호언장담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의문이 든 것이다. 정말 그럴까? 교역도 하지 않고 가만 두기에는 너무 맛있는 과일인데?
누군가에게 멍청하게 감 만세! 한국 만세! 하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다가 검색해보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국제 연합 식량 농업기구 통계 (2005)에 의거 중국(180만톤), 한국(25만톤), 일본(23만톤), 브라질(15만톤), 이탈리아(5만톤), 이스라엘, 뉴질랜드, 이란, 호주, 멕시코 가 상위 10개국 정도의 생산량을 보인다.
단순 감에 의지해 판단하기 보다 검색한번 하니 얼마나 시야가 트이는지 모르겠다.
자 이제, 오늘부터 우리는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감을 보면서 상상할 수 있다. 중국, 일본, 브라질, 이탈리아, 이스라엘, 뉴질랜드, 이란, 호주, 멕시코의 감을 바라보는 사람들.
‘오늘 먹을까 말까?’ ’떫을까 안 떫을까?’ ‘이른가? 좀 더 뒀다가 먹을까?’ ‘아직도 안 상했어?’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쫄깃해질 때까지 침을 삼키며 기다리는 누군가나 껍질을 벗길 생각에 귀찮아 하는 마음이나, 우물거리며 씨앗 근처의 얇은 살을 떼어먹는 누군가를 떠올려도 좋겠다. 아참!
감은 맛있는 것이니 꼭! 나눠먹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