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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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글. 사진. 아홉시 나의현대예술순례 - 06. 「권옥연 회고전」에 다녀와서 / 글. 사진. 황정운 영화로 읽는 시공간 - 10 TEN LIST (2015) For 월간 이리 / 글. 곡주대비 작곡가 B의 노트 - 말들에게 / 글. Composer B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택시를 탔다 - 05. 순대국밥, 나 그리고 기사님 / 글. 사진. 고수진 옆사람 인터뷰 - 10. 시드니에서 서울로 /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 26. 가깝고도 먼 나라의 대표건축가, 안도 다다오 / 글. 사진. aoikasa 경계인 - 인식편: 수치심낙인 / 글. 스푸트니크 Daily Archive - 페르난데스 토마스 길, 923호 / 글. 모음. 김혜미 X / 글. 김성연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1. 편견 / 글. exxx

**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정말 친절히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


1월이라는 압박감에 백지를 두고 앉아있다가.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사실 편집장의 인사라는 것이 한 60번 정도 쓰면 쓸 말이 없는것 같아요. 실은 30 번 이전부터 그랬습니다. 사람이 퍼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특히 이렇게 에 둘러 뭔가를 말해야 하는 순간에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쓸 말이 생겨 적습니다. 올 한해는 말에 휩쓸리지 않는 한해가 되시길 기원해 봅니다. 세상에 범람하는 말들, 글자들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히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차 분히 읽고 본질을 꿰뚫는 한해를 보내셨으면 합니다. 저희도 글자를 끌어다가 생각이란걸 담아서 여러분께 건내면서 이런 인사말을 쓰 려니 어딘지 모르게 머쓱합니다. 세상에 의미가 너무 많아서 쉴 틈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에 휩쓸리지 않는 한 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물론, 건강이 제일입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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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현대예술순례 #06 「권옥연 회고전」에 다녀와서

글. 황정운

1_ 크리스마스 날 아침은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걷혀 날씨가 깨끗했다. 2011년 작고한 권옥연 작가의 회고전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읽은 터였다. 밥을 지어 아침을 먹고 날이 좀 더 따뜻해진 점심에 P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집에서 평창동까지는 차로 30분 거리니 그렇게 멀지 않았다. 평창동은 2012년 7월 이후로 3년만에 찾는다. 그때 서울시내 미술관을 찾아 다니며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었는데 8번째 순서가 평창동에 있는 토탈미술관이었다. 그 해 6월부터 10월까지 전시했던 「The Vertical Village 아시아展」을 보았는데 서울시내에서도 지대가 높은 평창동에, 그 중에서도 높은 언덕을 올라야 간신히 찾아낸 토탈미술관을 <틈 사이의 미술관>이라고 소개했다. 비교적 최근의 예술을 소개하는 미술관답게 그 날의 전시도 굉장히 솔직했고 현대적이던 기억이 난다. 토탈미술관과 가나아트센터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사이. 3년 전 평창동을 찾았을 때는 광화문에 있는 회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어렵게 찾아왔는데 이제는 차를 운전해서 그곳을 찾는다. 달라진 것은 나의 시간이고, 같은 것은 여전히 미술이란 것이다. 생각하면 나는 마치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에 마비된 것처럼 지난 5년을 어영부영 살아왔다. 그때 낑낑대며 평창동 롯데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리며 토탈미술관을 향하던 나와, 가나아트센터를 향하는 오늘의 나는 여전히 같은 선 위에 서 있겠지만 그 사이 축적된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2월 연말은 회사의 조직개편과 인사이동으로 어수선할 때다. 새로운 직책자(팀장)로 승진한 인사발령이 공지되고 나 같은 미생들은 그것을 보며 입방아를 찧는다. 올 해 가장 최연소로 팀장으로 승진한 사람은 나와 8년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그 차이가 점점 좁아진다. 불과 8년 뒤면 내가 그 승진 대상에 속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수록 숨이 멎는다. 지금의 나처럼 그때의 누군가는 나를 보며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수십 년간 직장에서 – 생계를 이유로 일을 쉽사리 그만둘 수 없는 恒産恒心의 처지에서 – 어떻게 생존해야 할 것인가. 가나아트센터로 향하는 마지막 고갯길은 질문으로 가득했다. 직장생활과 예술순례는 같은 말이었다. 나의 현대예술순례에서 꼭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2015 쇼팽 피아노 국제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사진 출처: Chopin Competition Homepage)


2_ 권옥연(1923-2011) 작가는 한국과 일본과 파리에서 예술혼을 키워가며 한국만의 문학적 은유와 선율을 선보인 한국 추상미술 1세대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1957년에는 아내 이병복 여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후기인상주의, 앵포르멜, 초현실주의와 같은 다양한 미술사조를 접한다. 아내 이병복 여사 역시 한국 1세대 무대미술가이고, 그의 딸인 권이나 작가 역시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권옥연 작가가 2011년 타계한 뒤 첫 대규모 회고전…… 파리로 건너간 1950년대 이후부터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그런지 가나아트센터에는 우리를 제외하고는 두 명의 관객만이 있었다. 1층 전시관 한쪽 구석에 권옥연 작가의 평소 아틀리에를 재현해 놓았다. 권 작가는 좀처럼 아내를 아틀리에에 들이지 않았다는데, 광대뼈가 툭 불거진 억센 인상의 작가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그는 손을 허리에 짚고 나를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권옥연 작가는 1950년대 파리에서 앵포르멜(서정적 추상주의)을 접하고 난 뒤 한국적인 조형, 색감, 정취로 표현한 추상화로 유명하다. 2층에 권옥연 작가의 대표적인 추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달, 밤, 학, 산, 촛불과 같은 한국의 고전적인 표상들이 모든 채도가 제거된 채, 권 작가만의 느낌으로 진부하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 어떤 작품들은 김환기나 유영국의 그림이 연상되는 것들이 있었다. 다 같은 한국 1세대 추상미술의 거장들이니 그들이 보고 겪었던 환경, 고민했던 것, 고민의 답을 찾고자 했던 예술의 근원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분 없이 섞이는 것은 아니었다. 김환기는 김환기, 유영국은 유영국, 그리고 권옥연은 권옥연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궁금했던 <좌상 Sedentary>는 2층에 전시되어 있었다. 1968년 작품으로 특정한 대상 없이 상상 속의 여인을 그린 작품이다. 흰 옷과 바탕색에 검은 머리와 어두운 얼굴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여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기묘한 표정이 <모나리자>와 닮았지만 그녀에게서 어떤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림이 2차원의 평면성으로 가득했다고 해야 할까…… <좌상> 속 여인에게는 분명히 그만의 아우라가 있었지만 그런 아우라가 캔버스 밖으로 흘러나오진 않았다. 아마 권옥연 작가가 즐겨 사용한 청색, 갈색, 회색의 절제된 색감이 그림을 그림 안에 가두게 했을 것이다. 그런 점이 좋았다. 적당히 여인과 나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림을 감상하는 그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이 권옥연 작가만의 특징이고 그를 대하는 나의 자세였을 것이다.


좌상(Sedentary), 1968, Oil, 91x73cm


3_ P와 나는 2층 전시도 모두 둘러보고 가운데에 놓인 넓은 의자에 앉았다. 좌우 벽면에 걸린 그림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림들이 내게 말하는 것은 이곳에 전시된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그림이 제작된 “예술의 시간”이었다. 그건 “작가의 시간”이기도 했다. 사실 50년의 시간 동안 그의 예술사조는 크고 작은 변화를 수 없이 겪었을 것이다. 하나의 미술사조를 접하고 그것만을 수십 년 간 유지한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작가의 이념이 恒常性을 지킬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 전시실을 가득 메운 권옥연이라는, 오직 권옥연의 것이라는 이 평면성의 아우라는 무엇일까……

그림의 톤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작가의 그림은 사방 1 센티미터만 잘라 놓아도 그 그림의 제작자를 알 수 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 사람의 체취입니다. 좋은 작가라면 섬뜩할 정도의 개성을 풍겨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술이란 과정의 걸음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권옥연 작가의 말 中) 권 작가의 그림들은 소재와 표현이 달라도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 있었다. 절제된 청색, 갈색, 회색의 색감이 대번 그의 그림임을 알게 한다. 권옥연만의 고유한 포에지(poésie)다. 그것이 평창동을 올라오며 품었던 질문 – 어떻게 직장생활을 할 것인가? 어떻게 예술순례를 이어갈 것인가? - 에 대한 답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순례의 대상과 그 방법이 조금씩 바뀔 수는 있을 것이다. 회화만 관심을 두던 것에서 조금씩 연극과 무용에 지평을 넓히고 있다. 내가 쓴 작품후기를 불과 수 개월 뒤에 다시 읽어보면 더 이상 동의하기 어려워져 버린 글도 많다. 그러나 나의 예술순례를 돌아봤을 때 …… 변화로 가득했음에도 결국 同質의 마티에르가 느껴지도록 할 일이었다. 同質의 마티에르, 그것이 곧 나만의 포에지다. 3년 전 토탈미술관을 다녀오던 그 무렵부터 나만의 포에지는 이미 조금씩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을 잃었는가, 잃지 않았는가는 앞으로의 시간이 증명할 일이다. 권옥연의 그림에서 느낀 것은 꼭 예술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生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틈이라 여겼던 문을 지나 들어가보면 은은한 황홀한 예술로 향하는 또 다른 길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미술, 책, 음식, 여행, 철학, 생각과 같은 삶의 다양함을 경험하고 내 삶에 녹일수록 나는 예술의 한 단면을 우연히 배워나갈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나의 인식을 의심하고 깨트릴 때 새로운 예술이 다가올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2012 년 7월 토탈미술관을 나오며)

[끝]


권옥연 회고전 서울시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2016. 01. 24일까지


10 TEN LIST (2015) For 월간 이리 (listed in random order)

영 화 로

1.바다마을 다이어리 (これえだひろかず코레에다 히로카즈) 2.내부자들 (우민호) 3.앙 (かわせなおみ 가와세 나오미)

보 는

4.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 (홍상수) 5.무뢰한 (오승욱) 6.매드맥스 (George Miller 조지 밀러) 7.내일을 위한 시간 (Dardenne Brothers 다르덴 형제) 8.마션 (Ridley Scott 리들리 스캇) 9.위플래쉬 (Damien Chazelle 다미엔 차젤레) 10.킹스맨 (Matthew Vaughn 매튜 본) 이리 독자님들 안녕하십니까? 한 해를 정리 하는 개인적인 의식들 중에 올 해 개 봉 한 영화들 중 탑 텐 리스트를 꼽아 보는 것 이 있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 다. 리스트를 채우고 있노라면 올 해를 헛되이 보내진 않았구나 하는 위안과 보 람이 느껴지곤 합니다. 나름의 위로 의식이라고 할까요. 아카데미 시상식이 그렇 듯, 하반기에 개봉 할수록 순위에 들어가는 것이 더 유리해지긴 합니다만 가급적 연 초에 개봉한 작품들 역시 꼼꼼히 고려하고 종합한 결과 임을 말씀 드리고 싶 습니다. 위에 밝혔듯 10개의 영화들 안에서의 순위는 없습니다. 개인의 소견이 므로 당연히 주관적인 시선과 기준으로 선택 되었지만 더 많은 관객들에 의해 공 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자 적습니다. 10개의 작품들이 모두 훌륭하지만 특히 가와세 나오미의 ‘앙’ 과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 만큼은 그 중에서도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앙’의 경우, 가와 세 특유의 실낱처럼 가녀린 시선이 영화 곳곳에 빔을 쏘듯 흩뿌려져 있는 작품이 라고 할 까요. 단팥빵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더더욱 애정이 갈 수도 있겠다 싶 습니다. 사실 빵에 대한 이야기 라기 보다는 (빵이 더 중요한 관객이라면 일본 드 라마, 한밤중에 베이커리를 추천합니다) 죽음과 삶에 관한, 좀 원론적인 이야기 라고 하고 싶습니다. 나병에 걸린 할머니 손에서 빚어지는 마법 같은 앙꼬빵 에 게서 치유받는 몇 명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삶과 죽음이 빵 속을 채 우고 있는 내용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늘 보기가 힘겹습니다. 도정되지 않은 곡물을 삼키는 느 낌 이랄까요. 늘 목에 걸리지만, 그 만큼 그 열매의 향이 짙고 오래 갑니다. 하지 만, 중요한 것 은…버겁습니다. 삼킨 뒤 속도 좋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탄 소년 이 그러했고, 이번 작품, 내일을 위한 시간 역시 그렇습니다. 정리해고를 맞게 된 한 여성 노동자가 동료들 의 집을 방문해 탄원서의 서명을 받는 48시간 여를 그 리고 있는 이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처럼 각자의 현관에 등장하는 한 명 한 명의 공장 동료들 그리고 그 들만의 이유 (서명을 하는 혹은 해 줄 수 없는)를 각 각의 에피소드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줄거리를 놓고 보면 사실 당장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왜 이 영화가 그리도 고통스러운지 감을 잡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영화는 앞 서 언급했듯, ‘도정’하지 않습니다. 따듯한 이웃의 온정도 냉정하고 치졸한 그 글. 곡주대비

시 공 간


들의 핑계나 거절도, 조사가 빠진 직설화법으로 전달 합니다. 수려한 카메라 워크 도, 매끈한 편집도 그들의 영화 속엔 부재합니다 (“sparsely stylized cinema”). 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팬이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시절부터), 솔직히 그의 자기 복제 적인 작품들이 이젠 조금씩 무료해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번 그의 영화가 주는 엄청난 청량감을 거부하지 못하고 개봉 날 첫 번째 상영을 꼭 챙겨 봅니다. 이 번 영화 역시 홍감독의 교집합 적인 요소들 (e.g. 찌질한 영화 감독, 그의 하룻밤 타겟녀, 횟집, 소주) 이 구성하고 있는데 변주가 있다면, 결국 남자는 여자와 잠자리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편에서도 후편에서도). 모르 겠습니다 사실. 왜 홍상수의 영화는 내용을 뻔히 알면서도 늘 미치도록 기다려지 고 보면서도 미치도록 즐겁고 보고 나서도 미치도록 포만감이 드는지. 횟집과 남 자, 소주를 너무 좋아해서 일까요. 그의 부잡스러운 줌 (ZOOM) 도, 거슬릴 정도 로 raw한 사운드도 음악도…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매티스의 그림이 생각납 니다. (Music: Henri Matisse)

잘 그린듯 못 그린듯, 단순한 듯 아닌듯, 그럼에도 너무나도 큰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그의 영화, 그 때는 맞고 지금을 틀리다 역시 올 해 내가 누린 큰 호사 중 하 나입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관객들이 보았거나 (매드맥스, 킹스맨), 상을 받았거나 (위플래쉬) 등등 대동소이 한 이유들로 인정 받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킹스맨의 경우 음악의 선택이 탁월 했다는 이야기 를 하고 싶습니다. 특히 성당 씬 에서 Skynard 의 Freebird 는 정말이지 포르노 무비의 머니샷1) 에서의 클라이맥스를 그대로 액션화 한듯한 인상을 줍니다. 악당 의 설정도 기존의 스파이 물 보다는 신선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극히 미국적 이면서도 (교묘하게 천박함과 결부시키고 있는) 코믹한 (의도 된 것인지는 모르 겠으나 phat farm 의 창업자인 Raymond Simmons 와 상당부분 비슷하더군요) 새뮤얼 잭슨의 악당, 발렌타인은 정말 이지 이 영화의 중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뢰한. 크게 흥행하진 못해 많이 안타까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놓치 면 후회할 작품입니다.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전도연. 이상으로 탑텐 리스트의 코멘터리 였습니다. 영화의 힘으로 또 한 해를 버텼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 한해는 유난히도 2016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대에게 걸고 있 는 기대가 매우 큽니다! 1) Money Shot: 포르노 영화에서 남자배우가 사정을 하는 장면을 일컫는다.


작 곡 가 B 의 노 트

Composer B 1악장. 본말전도(本末顚倒) 오래 전부터 기다렸던 연주회를 보고 온 뒤, 혹은 유명한 연주자의 신보를 듣고 난 뒤에는(음반의 위력이 예전보다 못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다.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겠지만, 클래식 음악의 비평문화도 다른 장르의 비평계 못지않게 살벌하다. 왜 신기하냐고? 클래식 음악이 워낙 ‘조용함’이나 ‘고상함’이라는 키워드와

말 들 에 게

엮이는 일이 잦은 장르라 그런지 이 음악을 듣고 평론을 하는 사람들도 부드럽고 점잖은 수식어들을 구사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돌려서 말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과 글들이 모이는 지점에서는 어김없이 격렬한 다툼과 자기자랑이 펼쳐지곤 한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고이고이 간직해두고 싶은, 음악가 본인에게도 피와 살이 되어줄 수 있는 예리하고 냉철한 리뷰가 어쩌다가 한두 번 보이기는 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음악가에 대한 깊은 애정(무조건적인 추종이 아닌)과 존중을 적절한 강도로 표현할 줄 알고, 음악 자체가 주는 기쁨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또한 게으르고 불성실한 음악가에게는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언어로 일침을 가해 그들이 어떻게 해야 원래의 기량을 되찾을지 조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칼럼니스트(혹은 단순한 애호가일지라도)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음악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생각을 담은 말과 글들이 늘어나는 건 환영해 마땅한 일이다. 그 말과 글들이 음악계 전체의 토양을 보다 풍부하게 할 것이고 더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켜 업계 전체의 수준을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글을 쓰는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편협한 시각과 상대해 대한 존중 없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우리의 토양을 풍부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커녕 그러지 않아도 좁고 얕은 애호가들의 세계를 더욱 더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예전에 음반가게에서 일하던 시절 손님으로 자주 왔던, 몹시도 시니컬했던 S씨가 했던 자조적인 한 마디를 떠올리곤 한다. “클래식 음악 좀 듣는다고 하는 종자들은 대개 가방끈이 좀 길거든.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서도 자기 잘난 맛에 듣기 때문에, 음악 듣다가 싸움이 붙으면 거기서도 잘난 척을 하면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하더라고.” 그래, 이거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음악을 들으며 포근한 행복과 쾌감을


느끼게 만드는 세포 같은 건 이미 죽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그들은 ‘누구의 몇 년도 녹음이 최고!’ 라든지 ‘~적인 스타일로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같은 말들로 자신들의 신앙이 바탕이 된 감식안(혹은 귀)이 최고임을 증명하는 일들에 안달이 나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2악장. 덕질 왜 하니? 어떤 한 분야에 ‘입덕’을 하게 되면 장르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일련의 절차들이 있다. 그 세계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하는 과정 말이다. 처음에는 그 분야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고 새로우며, 하루하루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활력이 생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지식과 경륜이 쌓이면 그것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좀 더 깊고 자세하게솔직히 ‘집요하게’라는 표현이 더 나아보이지만- 그것에 대해 알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기대했던 바와 다르거나 흐트러진 부분을 강박적으로 찾아다니거나, 그런 것들을 찾아 정리·비판해놓은 자료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고 그에 대해 주변사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이전투구도 서슴지 않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겪고 나온 이들은 마침내 ‘다 내려놓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어지간한 자료나 새로운 것을 보더라도 ‘결국 다 돌고 도는 거야’ 라며 딱히 호기심을 보이지도 않으며,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보여줬던 으르렁거림은 ‘나도 옳고 그대도 옳소’ 정신으로 진화하게 된다. 나는 모든 덕후들의 말과 행동들이 늘 마지막 단계의 그것과 같았으면 한다.틀린 것들을 집어내고 취향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정통이 아니다’ 라고 찍어 누르며 자신의 덕력을 과시하는데 급급한 모습이 과연 우리가 원했던 진정한 덕자의 모습인걸까. 그래서인지 자신이 사랑해왔던 것들을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뽐내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린 그들의 말과 글들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들이 나열했던 세세한 지식들과 현미경 같은 눈과 귀도 이제는 더 이상 부럽지 않으며 그저 피곤하게만 느껴진다. 그 말과 글들이 피곤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건방져진 탓일까, 아니면 정말 그들이 교조적인 집착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기 싫어도 매일같이 봐야해서일까. 이 글을 쓰고 잠시 쉬는 순간 열어본 페이스북에는 모 음악 칼럼니스트가 온갖 오그라드는 수사로 장황하게 덧칠해놓은 음반 리뷰가 올라와 있었다. 아무래도 난 말과 글을 쓰고 읽는 것에 대해는 재주나 체력이 없나보다. 그냥 불 꺼놓고 눈 감은 채로 음악이나 들어야겠다.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택 시 를 탔 다

S#5. 구반포-우리집 13400원 순대국밥, 나 그리고 기사님.

글, 고수진 (gomin19@hanmail.net)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 난 지독한 몸살감기와 화장품 때문인지 팩때문인지 전날부터 후끈하게 부어오른 피부 때문에 고생 중이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대략 10분정도를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다. 화도 나고 무엇보다 춥고 배고팠다. 감기약 때문에 기름진 음식을 조심해야 했지만 순대.. 순대국밥에 맥주를 반주로 마시고 싶었다. 진하고 육덕진 그런 국밥.. 결국에는 조금만 더 걸어 근처 신의주 국밥집에서 포장을 하고 (집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파자마 입고 먹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다시 택시를 잡았다. [구수한 냄새가 나네요.] 기사님이 룸미러를 보시며 싱긋 웃으시는데 살짝 민망했다. [순대향이 오늘은 좀 강하네요. 죄송합니다.] 기사님은 우리엄마 또래로 보이는 여성분이셨다. 오늘은 왠지 더 편안하게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의 이야기, 여성 기사라는 이유로.


[여성 기사님이라 더 고충이 많으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밤에 술에 취한 손님들은 무서울 때가 많아요.] 손님에게 굉장히 깍듯한 존댓말과 목소리 톤은 기사님의 성격을 유추하게 했다. 기사님은 10년 된 베테랑 택시드라이버셨다. [손님께서는 이 늦은 시간에 퇴근인가요? 힘드시겠어요. 피곤하시죠?] 살가운 말투에 오히려 푸근한 퇴근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꽤 늦은 밤, 차는 빠르게 압구정을 지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여자다 보니 과한 손길이 종종 있어요. 한번은 여기 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다가 쉼터에 차를 세워달라고 하더라고요.] 기사님은 술이 많이 취하셔서 속이 불편하신가보다 그래도 차 안에 실례를 하지 않으셔서 오히려 고마웠다고 하셨다. 쉼터에 차를 세우고 손님은 화장실 쪽으로 급하게 뛰어 가셨다. 약 30분 뒤 손님은 돌아 오셨는데 불편한 향이 택시 안으로 확 덮쳐 들어왔다. 기사님은 창문을 열고 달려야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손님은 다짜고짜 주먹으로 얼굴을 쳤고, 내가 내린 사이 미터기를 왜 끄지 않았냐며 돈에 환장한 년이라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으셨다, 환장한 년.. 기사님은 재빨리 문을 열고 나와 경찰소로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뉴스에 나오지 않았을 뿐 이런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택시를 하고 계시는 기사님이 안타까웠다. [결국 돈 때문이에요. 제가 올해 쉰셋인데요, 폐지 줍는 일은 도저히 하고 싶지가 않고.. 아, 제가 자식이 없어요.] 그녀의 과거를 더 이상 여쭤 볼 수도 없었고 그것은 예의가 아님을 느꼈다. [그래도 동료 기사들도 생기고 친구? 비슷한 사람들도 많아요. 외롭지 않아요. 남녀차별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 생각보다 없어요. 오히려 다 같이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동료들로 생각하죠. 손님께서는 올 해 몇 살이세요?] 내 이야기를 들으시던 기사님은 싱긋 웃으시며 멋있다고 칭찬해 주셨다. 순대국밥이나 사들고 가는 31살, 내가 멋지다는 칭찬을 들으니 머쓱해졌다. 칭찬 받은 만큼 진짜 열심히 살아야지. 본의 아니게 택시 안에서 연말을 느끼고 새해 다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손님께서도 좋은 일 가득하세요. 너무 늦은 시간에는 택시 타지 마시구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살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10_ 시드니에서 서울로

옆 사람 인터뷰

함께 여행하던 언니에게 일이 생기면서 혼자 하루를 보내야 했다. 홍콩에서 배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마카오에 가기로 결정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항구를 찾았다. 홍콩과는 또 다른 마카오의 낯선 언어와 풍경은여행하며 당혹감을 음악하기 안겨주었고, 그 1_ Granz Globewalker, 틈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H의 도움으로 마카오의 중심인 세나도 광장에 갈 수 있었다. 2014년 1월 반나절의 동행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1년 후 �� ���� ��� ��� ���� ���� ���� ��� 다시 만났다. 시드니에 사는 그가 방학을 맞아 서울에 와 준 ����� ����� ��� 밤�� �� ��� ���� 결 덕분이다. ��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에 가도 있

최근 몇 년간 한국여행을 꽤 한 것 같아요. 2009년 이후로 한국에 종종 왔어요. 가족과 오기도 하고 친

것은 시간은 사람이요, 사람으로 펼쳐진 시공간이 만나서는함께한 고작 10시간 남짓이었어요. 그래서인

구들이랑 오기도 했습니다. 서울, 강원도, 대구, 경주, 부산, 제

었다.와내가 만나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결정이었 또한 지 이렇게 주어서만났고 더 고맙고 신기해요.

주도 등에 가 봤어요.

아름다운 여행지의 하나였다. 여행을 이야기하 을 것 같아요. 고 싶었으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

최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한국까지 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각했다. 사람을 여행해볼 작정이라고. / 만난 건 정확히 말하자면 홍콩의 항구에서였죠. 배에 오를 때 누가 발

꽤 오랜 기간 일을 했고, 뒤늦게 법 공부를 하기 위해 로스쿨

을 밟고 툭툭 치는데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어요. 하하. 잔돈이

에 진학했습니다. 더 넓은 선택권을 갖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없어서 제가 버스비를 대신 내준 셈이 된 거고, 제게 길을 물어 게스트하우스에는 다양한 삶이 오고갔다. 그 보기에 알려주다가 같이 다니게 된 거죠. 연락만 하다가 1년 랜트는 미국에서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후 학기를 마치고 오게 되었습니다. 행을 온 사람치고는 그의 하루가 꽤 정적이었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 끝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장거리 연애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다. 그는 공용 공간에서 편의점 음식을 먹거나 중학생 때 호주에 이민을 갔어요. 비틀즈의 전곡을 모아 놓은 교본을 옆에 두고

이전의 경험이 있어서 장거리 연애는 다시 하지 말아야지 생

기타를 치고는 했다. 내가 그의 반려자와 다름 네. 부모님을 따라 호주로 갔고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생 없던 기타를 두 동강 내기 전까지는(당분간 활했습니다.

중요하겠죠. 는 비틀즈와 로드리게즈 만큼이나 그의 노래를

Hey Jude를 배우겠다고 설칠 일은 없으리라). 지금까지 반은 한국에서 반은 호주에서 시간을 보낸 셈이네

각했는데, 인연인 것 같습니다. 하하. 서로 신뢰하는 마음이

좋아한다. 2016년입니다. 어떤 한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있 다면.

때부터 그가것의사가 요. 이민 어릴 생활에는 분명 사람들은 어려움이 따를 같아요. 될 것을 기대했지만 6살 때부터 그는 음악을 꿈꾸었다

제게는 숫자의 뿐 무언가 시드니에 새로워지거나 조금 새해가 더 오래 머물변화일 줄 알았는데 갔 다시

사람마다 다르긴소망은 하지만 이민 느끼는 외로움이 고 한다. 오랜생활 시간중에 그대로였으나 대학큰

시작하는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항상 오늘에 충실하고 싶 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것 같습니다. 인종차별도 않아온전히 있고, 아무리 호주에서 을 졸업한 후에야없지 그는 음악을 하기로교

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

육을 받고 자랐다고 해도 민족성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먹었다.

다.나도 다만오래 자기 있고 신념에싶었지만 치우쳐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그 사람이 관광비자만으로는 되지는 말아야죠.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힘든 점이 있습니다. 완벽히 정착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 직접 녹음한 아홉

지 시드니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비행기

곡이 담긴 CD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요즘 나

표를 사기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영화 <그녀>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운영체제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휴대폰으로 안부를 물어야 할 때 내가 사만다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감사한 시간 덕에 기다림도 견딜 수 있었으리라. 그는 곧 호주로 돌아가고,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관계에 있어 서툰 내게 신뢰와 가능성을 가르쳐준 사람이기에 나 또한 멀리서나 마 작은 위로와 힘이 되길 바란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글, 정리 : 이내


건축이 좋아. # 26. 가깝고도 먼 나라의 대표건축가, 안도 다다오. aoikasa

이웃 나라에 안도 다다오라 하는 건축가가 있다.

복서였다가 건축가가 된 이, 건축 교육을 받지 않고도 스케치 여행만을 통해 자신만의 건축을 만든 이, 노출 콘크리트의 마법사, 건축사가 Kenneth Frampton에 따르면, 20세기 전반모더니즘의 대안으로서의 비평적 지역주의의 일본편을 완성한 이로 여겨지는 일본의 대표건축가. 우리나라에도 강원도 원주의 한솔미술관이나 제주도의 본태미술관 등을 건축하여 우리들에게도 친숙하며 세계 곳곳에서 그의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그의 건물들은 그의 고향인 간사이 지역에 있는 그의 초기작들. 갤러리아 아카, 빛의 교회, 물의 절 등이다. 안도 하면 떠오르는 노출 콘크리트와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들이 돋보이는 이 작업들은 그의 후기작들만큼 크고 숭고(?)하진 않지만 안도 다다오만의 개성이 오히려 잘 묻어나오는 작업들이다.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의 공간들이 계단이나 램프 등 내부의 길을 통해 오밀조밀 엮이는 그의 건축의 특징은 갤러리아 아카처럼 작은 상업 건물에서도, 빛의 교회나 물의 절처럼 작은 규모의 종교 건축에서도, 베네세 하우스나 뮤지엄 산 같은 대규모의 리조트 건축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 곳곳에, 그리고 한국에도 있는 그의 건축을 일단 간사이지방을 중심으로 규모별, 용도별로 다양하게 살펴보자.

갤 러리아 아카 오사카 신사이바시 근처의 빌딩. 건물명은 갤러리아 아카 이지만 미술관은 아니다. 까페, 미용실 등의 복합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로 사실 굳이 찾아가려 맘 먹고 가지 않는다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날 것이다. (맘 먹고 찾아가도 찾기 쉽진 않다). 이 건물에서 중요한 건 '길'인 듯 하다. 도심 속 작은 규모의 건물에서 주요 용도의 공간들은 안 쪽 깊숙히 숨어버렸고 그 곳에 이르는 길들(복도와 계단)들이 이리 저리 엉켜 건물의 전면부를 차지하고 있다. 안도 다다오 건축만의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에서 나오는 기념비성이 오히려 발견되지 않는 건축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갤러리아 아카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조금은 어두우면서도 강직한 힘... 일본 공간 특유의 음예공간의 특질이 잘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미요시 주택에서 방과 방을 잇는 중정 위로 떠있는 다리같은 복도가 좀 더 복합적으로 나타난 예라고 할까. 반면 복도와 계단이 얽혀 있는 공간의 반대편 벽은 지하부터 상층부까지 거대한 노출 콘크리트 벽으로 되어 있어 안도 건축 특유의 단순함에서 나오는 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신사이바시 근처의 화려하고도 번잡한 도시 번화가에서 이 건물로 들어오는 순간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근처의 Rue de Bar가 있는 건물도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다. 다시 오사카를 방문한다면 갤러리아아카의 2층 까페에서 느긋하게 차 한 잔하고 밤에는 Rue de Bar에 가서 술 한 잔 느긋하게 하리라. (갤러리아 아카. 작은 건물 내부에 얽혀있는 복잡한 길들과 지하의 작은 정원)

빛의 교회 어두운 사각형의 공간, 그리고 십자로 갈라진 노출콘크리트 벽체 사이로 강렬하게 비취는 빛. 십자가를 형태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공간에 스며드는 빛으로 표현한 이 교회는 오사카에서 교토가는 길의 중간쯤인 이바라키시에 위치해 있다. 이바라키역에서 버스로도 갈 수 있지만, 교회 예배 시간에 맞춰 이 곳을 방문하려면 택시 이용을 추천. 빛의 교회는 방문객들에게 호의적인 편이지만, 예배 시간에 방문하길 권한다. 멋진 사진을 찍기엔 아무도 없는 시간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빛의 십자가로 가득찬 그 공간의 느낌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서는 예배 시간에 방문하는 편이 더 좋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예배이지만 영어로 된 주보도 나누어주고, 작은 공간에 오밀조밀 모여 앉아 드리는 예배 시간은 잘 못 알아들어도 그저 따스하고 그저 성스러운 느낌이다. 빛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오롯이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라할까. 전체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예배를 인도하는 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뒤의 빛만 남는다. 이 곳의 주인공은 오롯이 ‘빛’이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바로 옆의 친교실에서 그 곳의 성도들과 목사님과 더불어 차와 쿠키를 먹을 수 있다. 워낙 유명한 건축물이라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방문객들이 귀찮을 법도 한데, 이 교회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 한 주, 단 한 번 들리는 방문객들을 맞는 것이 본인들의 기쁨인양 대하며, 그들이 애써 찾아온 이 건물, 작지만 강렬한 힘이 있는 이 시골교회 건축물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교회 하나 있음 참 좋겠다 싶은… 이 곳에서 새벽 동터올 무렵 기도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도 드는…

물 의절 빛의 교회와 대응하는 듯한 물의 절. 고베의 아와지섬에 위치한 아주 작은 절이다. 일본어 이름은 水御堂. 本福寺라는 시골 마을의 작은 사찰의 본당이라할까.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종교적인 공간을 만드는 안도의 내공이 잘 느껴지는 작업이다. 연꽃이 피어있는 물아래로 내려가면 왕가나 종교건축에서 사용되는 다홍빛으로 채색된 기둥들로 둘러싸인 동그란 지하공간이 나온다. 안도의 건축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는 원, 삼각형, 사각형 등의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들과 그 형태들을 엮는 ‘길’을 따라 느껴지는 공간적 변주일텐데 이 건물 역시 굉장히 작은 규모지만, 길을 따라 놓은 기하학적 형태들의 공간이 엮이면서 역동적이면서도 극적인 공간을 연출해 낸다. 특히 이 건물은 안도가 선호하는 노출콘크리트로 외부는 되어 있지만, 내부는 다홍빛 열주로 되어 있어 일본 전통건축과도 연결되는 특징을 가진다.


유메부타이 아와지까지 물의 절만 보러가면 좀 억울한 여정이 될 수도 있지만 (물의 절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아와지까지 가는 길이 꽤나 고되다는 뜻이다. 특히 겨울엔) 다행히 아와지엔 호텔+미술관+정원 등이 결합되어 있는 안도만의 리조트건축인 ‘유메부타이’가 위치하고 있다. ‘꿈의 무대’라는 그 낭만적인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이 곳은 일본인들이 결혼식 장소로 선호한다는 ‘결혼식용 예배당인 바다의 교회’와 ‘결혼식용 야외당’이 그야말로 로맨틱하게 펼쳐지는 장소이다. 빛의 교회, 물의 교회와 대구를 이루는 듯한 바다의 교회는 호텔과 컨퍼런스장 사이 복도 한 구석에 있어 찾아가기도 쉽지 않은데 이 곳에서는 천장에 십자의 개구부를 내어 그 빛이 제단이 있는 벽쪽으로 떨어지게 함으로서 십자가를 형상화한다. 빛의 교회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이 곳에서 큰 감동을 받았을 터인데, 이미 빛의 교회를 보고온 터라 그 감동은 반감. 아무튼 이 공간 역시 꽤나 아름답다.

(유메부타이 내 바다의 교회)

유메부타이 최고의 장소는 바로 바다를 향해 넓게 펼쳐진 야외의 계단식 정원인데, 우리는 1월에 방문했기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이 곳에 봄,여름에는 꽃으로 가득차 있어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 그 사이에 가득찬 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아래에 있는 유리로 된 작은 공간 역시 결혼식 등에 자주 사용된다고 한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장면. 갤러리아 아카에서 보였던 길을 따라 공간과 공간이 만나며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고, 실내와 외부가 교차하고, 인공적인 것(건축)과 자연이 교차하는 그 느낌이 굉장히 큰 규모로 확장되어 나타나는 듯하다. 유메부타이에서 나타난 안도 다다오의 리조트형 건축물 만들기 기법들은 나오시마의 베네세 하우스, 치추 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제주도의 본태박물관, 원주의 뮤지엄 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묵묵하고 고요한 노출콘크리트 벽이 만드는 빛과 어두움,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의 공간이 담고 잇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힘, 그리고 그 공간들 사이 사이로 스며든 그 장소만의 자연이 각각의 장소에서 각각의 느낌으로 (그래서 사실 뮤지엄 산에 갔을 때는 살짝 지겨워지기도) 살아 있다.


(유메부타이 곳곳에 흐르는 자연. 물과 정원, 그리고 바다)

치카츠아스카 미술관 치카츠아스카 미술관은 오사카라 하기엔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해 있다. 오사카시에서는 한참 전철을 타고 가야 나오는 카난 지역의 현립 박물관인 이 곳은 712년 기록된 ‘고사기’라는 곳에 기록된 지명인 치카츠 아스카(近つ飛鳥)를 딴 명칭이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겠지만 아스카 시대의 유적,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고분군이 남아 있는 장소이고 이 것을 보존, 전시하기 위해 1990년대 초반 만들어진 미술관이다. 안도 다다오 건축의 기하학적 형태는 그 규모가 커질수록 굉장히 기념비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이 건축물은 그 기념비성의 정점을 찍는 건물이 아닐까 싶다. 입구로 가기 위해 오르는 계단은 그 자체만으로 고대 문화, 고대 문명으로 다가가는 시간을 느끼게 하며 전시실 내부 고분을 둘러싸고 나선형으로 펼쳐진 전시공간은 모든 중심을 고분군으로 모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와서 인근 국립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과 박물관에서 한참 떨어진 노출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물인 초소 같은 곳에서 바라보는 치카츠 아스카는 산 속에 그대로 들어가버린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을 전시하는 공간인 만큼 이 곳은 그 묵직한 기념비성을 그 어디에서도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갤러리아 아카 등에서 보이던 작은 공간을 다루는 섬세함은 덜 느껴지지만 거대 스케일의 기념비적 성격을 가진 건축만의 힘이 느껴지는 건축이다.


그리고 … . 1990년대 이후 이토록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으며 다작을 한 건축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도 다다오는 일본과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노출콘크리트 미술관들을 세우고 또 세웠다. 때로는 너무 과하게 소비되는 듯한 그의 건축이 지겨워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그 곳의 자연을 담아 그만의 건축물을 만들어내어, 그 안에서만큼은 오로지 그 공간에 집중하게 하는 그의 힘은 여전히 놀랍다. 얼마 전 전 일본을 들썩이게 했던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 현상설계 건으로 시름이 많았을, 이제는 할아버지같은 느낌의 안도 다다오.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다는 소문도 있던데… . 건강하시고 계속 좋은 작업 해주시길. 무엇보다 당신의 ‘콘크리트’는 참 따뜻해서 좋습니다.

P.S. 안도 다다오의 미술관 건축물들은 멀리 떠나지 않아도 볼 수 있다. 입장료가 좀 비싸긴 하지만 잠깐의 여유를 내어 원주 오크밸리 내의 뮤지엄 산. 그리고 제주도 비오토피아 앞의 본태 미술관을 방문해본다면, 그의 따뜻한 콘크리트와 그 곳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니…. 겨울 휴가지로 추천. 이 글에서는 빼먹었지만, 교토의 고쇼 앞에 ‘명화의 전당’이라는 이름의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야외 미술관 같은 건물도 있으니 간사이 지역 안도 다다오 답사를 떠난다면, 혹은 교토 고쇼 근처에서 더 갈 곳이 없을까 고민된다면 추천. (지난 여름, 원주 뮤지엄 산에서)


경 계인

2화.인식편 : 수치심 낙인

스푸트니크

나는 어떤 집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을,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태어나기 위해 겪어야하는 ‘인생의 가장 무서운 제비뽑기’로 생각한다. 셜리잭슨

1)

의 단편소설 ‘제비뽑기’의 결말만큼의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태어나보니 부모님이 성인군자급의 절제와 관대함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면 운이 좋은 것이겠고, 반대로 친부가 재가한 뒤 학교도 못가게 하고 별것 아닌일에 몽둥이로 때리고 굶기는 사람이라면, 그런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얼마전 뉴스로 본 일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는다. 그 아이는 그래도 용케 탈출에 성공한 뒤 뉴스에 나와서, 어쩌면 조용히 묻히고 있는 다른 아동학대에 비해서는 지원을 더 받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지원을 받아도 아동기의 상처는 쉽게 고쳐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란 것을 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걱정되었던 상처 중 하나는, 그 아이에게 계속 낙인처럼 반복해 주입했을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수치심은 아이가 가진 많은 장점과 단점들 중에서 단점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아이의 자존감을 낮춘다. 사람은 당연히, 장점도 단점도 있는 것인데, 수치심은 자신의 단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상의 경계 밖으로 내몰게 만든다.

나는 12살에 새엄마와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를 버리고 갔다며 친척들이 친엄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안 키워도 될 아이들을 키우는 새엄마에게 항상 미안해하며 얹혀사는 기분으로 사춘기를 보냈다. 이혼전 엄마는 집안일은 잘 돌보지 못했고, 어린나이에 아이를 낳아 이루지못했던 자아실현을 하느라 지방에서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봤을 때, 바깥으로 나돈다는 말을 듣기 좋은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런 점들을 친척들이 근본없다며 험담을 했는데, 그 험담은 엄마가 떠난 이후에는 우리에게로 대상이 바뀌었다. 아빠를 비롯한 친척들이 집안일이 서투른 나의 단점을 언급할 때 ‘가정교육이 부족하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는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라는 그 주입된 생각을 바탕삼아, 깊숙한 컴플렉스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벽증에 가깝고 매사를 완벽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새엄마 밑에서, 눈치를 보는 습관을 키우게 되었고, 동시에 내가 열등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열등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저 시키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노력을 들인만큼 성과는 나왔지만 자존감은 여전히 높지 않았다.

*1) 생전 악마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둥‘마녀’라는 소문이 많았던 셜리 잭슨은 20세기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고립되고 오래된 저택에 사는 수상한 거주자들을 다루는 고딕 미스터리에 혁신적인 작품들을 남겨 고딕 호러의 선구자로 불린다. (Yes24 작가소개 인용)


결국 그 컴플렉스는 혼자 살게 된 후, 현실이 되었다. 대학에서 낙오한 뒤, 정신상태가 바닥인 상태에서 용역을 부를 정도로 방을 방치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른 큰 업적을 세우지 않아도, 살아숨쉬는 자체가 같은 일상을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걸, 모든 걸 놓음으로써 여실히 겪어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을. 괴로워서 그 일을 털어놓았더니, 나에게 실망해 멀어진 친구가 둘이나 있었다. 그랬기에 결국 그 일은 내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렇기에 내게도 ‘수치심’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었다. 그걸 극복하는 데는,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도 있다)를 읽은 경험과, 연극배우 친구와 같은 집에서 살았던 경험이 좋은 전환점이 되었다.

첫번째로 그 소설의 주인공 중 한명인 골드문트는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헤르만 헤세의 2)페르소나이기도 하다. 골드문트는 수도원 학생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엄격한 그의 아버지는 골드문트가 예술가, 방랑가 기질이 있어 그대로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를 닮을까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하고 수도원에서 그 천성을 없애기를 원했던 것이다. 소설을 통해 나의 과거가 환기되면서, 내가 보지 못했던 큰 그림이 보였다. 내가 당사자였기에 너무 깊숙이 연루되어 있어서 보지 못했던 그림. 골드문트가 방랑길에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자유의지 이외에도, 과연 진짜로 그의 피에 섞인 엄마의 유전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받은 낙인이 무의식에 쌓여있다가 현실화 된것은 아닐까? 하는 소설에서 비롯된 질문이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

두번째 전환점은 연극배우 친구와 같은 집에서 살게 된 경험이다. 또 다른 방에는 한때 TV 드라마에서 주연을 했던 배우도 살고 있었다. 다시는 전과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조심했다. 방을 깨끗이 하고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 더군다나 타인과 함께 살기까지 하니까. 하지만 연극을 하는 그 친구는, 빨아야 할 속옷을 거실에 벗어두거나 방이 개판오분전이라도, 보란듯이 방문을 활짝 열어두고 다니곤 했다. 다른 배우도 만만치 않았다. 마치 대결이나 하듯, 방을 어지럽힌 채로 몇주씩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물론 예술을 하는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방상태로만 보자면, 세상에서 가장 거친 야성을 간직한, 하우스메이트들과 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부모님과 살면서 직장을 다니는, 별다른 집안일을 할 줄 모르는 친구들이 성별을 막론하고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수치심 그것이었다. 그들은 물론 나처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트라우마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그들은 숨기려 하지 않았다. 더러움이란 건 그냥 스스로에게 불편함을 유발하니까 처리해야 하는 어떤 것에 불과해 보였다. 더러우면 치우면 되지. 그 더러움이 자신의 인격으로까지 옮아가서 스스로를 타박하지 않는 듯 보였다.

*2)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 그리스의 고대극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데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이야기 했다. 일종의 인터페이스 역할 (위키백과 인용)


신기하게도, 그제서야 내가 불필요한 낙인에 고통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엄마도 내가 뱃속에 생긴 것이 20살 사회초년생이였으니, 줄곧 어른이 되는 과정동안 잔소리가 심한 아빠를 비롯한 친가에게 여러 낙인을 받아가며 불필요한 부정적 자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유감이었다. 엄마도 그냥 하루종일 애들 가르치느라 힘이 빠져 집도 못치우고 자는 불쌍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낳아주고 유전자의 반을 물려준 이가 열등하거나 비정상이라는 생각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크다. 특히 그 ‘문제있는’ 혈족과 나 자체를 운명적으로 동일시 하게 될 때는, 사실상 유연한 사고가 불가능하다.

최악으로는, 프로그램된 유전자성향을 탓하며 나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상황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 없지만, 타국에서는 이런 낙인행위에 ‘shame and blame’이라는 능동적인 동사를 붙인다. 수치심을 심고 계속 비난하는 행위를, 육체적피해가 없어도, 학대행위 abusing의 범주에 넣는 것이다. 이것이 축적되면 negative reinforcement(부정적 강화)에 해당된다. 우리나라는 아직 부부싸움하거나 이혼한 뒤, 애꿎은 애들에게 ‘누구닮아서’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쓴다. 수위가 그리 높지 않아도, 그러한 표현들은 훈육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많다. 무심코 뱉는 말이 아이들의 무의식에 어떻게 작용할지를 좀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엄마를 욕하던 친척들을 계속 관찰해보니, 그들의 비난에도 이면이 있었다. 단지 객관적 사실만을 두고 건설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열등감, 질투심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피아노학원을 하는 워킹맘이었고 아빠보다도 수입이 많았다. 그분들은 전업주부였고, 자신들과는 다르게 집안을 등한시한다는 점이 그렇게 크게 부각돼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난 뒤 그분들과 시간을 보내며, ‘남편이 집에 나를 잡아두지만 않았다면 나가서 어떤 일을 해도 잘했을 것’이라는 그들의 불만을 듣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요즘은, 동선이 큰 직업상 귀가하면 씻기도 귀찮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양치하고 씻고 눕는다. 그정도는 이제 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번은 청소를 한다. 설거지도 바로바로 하는 수준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1주일 내에 하고 있다. 이전의 트라우마도 다 내가 만든 것이고, 내가 남들에 비해선 좀 게으른 편이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게으른 게 자랑은 아니다. 그래도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도 “게으르게 지내거나 집안일을 소홀히 하면, 네가 불편해지고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실용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하고, 내 자신이 사과해야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냥 스스로가 깨끗하게 기분좋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집안일이고 위생관리라면, 매일 조금씩 즐기면서 할수도 있을 것이다.


Daily Archive 페르난데스 토마스 길, 923호 (923 Rue de Fernandes Tomás)

포르토에서 우리 집 앞 건물은 매춘을 하는 여자들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삼층 건물이었는데 일 층은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작은 라운지가 있었고, 이층과 삼층은 방들이 있는 구조였다. 우 리 집의 거실과 부엌은 삼층에 있어서 요리를 하거나 거실에서 시간을 보낼 때 고개만 돌려도 창 문 너머로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쉽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층과 삼층의 창문들 은 언제나 셔터로 닫혀있었다. 거실 겸 리셉션, 대기실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이는 방의 창문 만 항상 열려 있었는데, 창가 쪽에 늙은 여자가 앉아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일상은 거의 매일 똑같이 단조로워 보였다. 그녀는 상체를 창문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내 밀고 길거리를 내려다보거나 손님을 맞이하거나 돈을 세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냥 앉아있었 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사람들 모두 그 건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흥미롭게 생 각했고 그곳에서 새롭게 일어난 일을 마주한 날이면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듯 이야기하곤 했다.

그 건물에는 약 10여명의 여성들이 함께 살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대부분 40-50 대로 보이는 중년 여성들이었다. 나는 그녀들의 나이를 정확이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외향적으 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들은 아주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이 자신을 꾸미기 위해 어설프게 화장을 하지 않았거나 한껏 멋을 낸 옷을 입지 않았다면 매춘을 하는 여성이라고 생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들은 키가 작았고 살집이 있었으며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멋을 부린 옷은 촌스러웠고 그 의상들은 몇 벌 되지 않아 같은 옷을 돌려가며 입는다는 사실 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트랜스 젠더로 보이는 여성도 있었고, 다운 증후군 환 자처럼 보이는 여성도 있었다. 특히 다운 증후군 환자의 얼굴을 가진 여자는 뚱뚱하고 커다란 체 격에 꽉 끼는 티셔츠와 과할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건 물 입구에 몇 시간이고 기대어 서있었다. 그들은 보통 새벽 5시나 6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 지 일을 했다. 각자의 영역이 있었고 그 영역들은 우리 집 건물이 위치해 있는 도로 변을 비롯해 주변의 작은 골목들 전역에 퍼져 있었다. 우리 집 바로 뒷골목에도 두 세명의 여성이 항상 같은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남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그냥 종일 서있거나 조금씩 돌아다니며 자기들끼리 영역을 바꾸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 다. 그러나 간혹 길을 지나가던 남자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면 잠시 대화를 주고 받다가 함께 건 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이 어떻게 그녀들의 직업을 알아챘는지 궁금했 다.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 건물의 정체는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 -스시 레스토랑과 철물점을 운영하는 사람들- 과 오랜 단골 손님들 정도만 알고 있고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고 했 다. 내가 본 광경은 아마 단골 손님이 접근한 경우였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거리낌 없이 자연스 럽게 그 건물을 들락날락하는 몇몇의 남자들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곧장 이층 리셉션으로


올라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거나 방을 서성거렸다. 손님이 들어오면 그 방을 지키고 있는 늙은 여 자가 웃으며 그들과 수다를 떨었다. 가끔 그녀들이 먼저 남자들에게 접근하여 말을 거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보통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성들이었고 그러한 용기있는 접근은 대부 분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무시 당했다. 처음에는 그런 일을 하는 여성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 다는 이유만으로 흥미로웠지만 점점 그들을 보는 것이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될 정도로 가까워지 면서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일상이 너무 지루해 보였고 그 지루함이 안돼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한국에서 보내온 소포에 포장되어 온 공기쿠션 포장팩을 뜯어 길가의 쓰레기통에 잔 뜩 버린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녀들 중 한명이 그 포장팩을 주워 한움큼 손에 쥐 고 하루 종일, 그리고 다음 날까지 그것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일 때 마다 뽁뽁 터지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장면은 내 마음을 좋지 않게 만들었 고 그 이후로 나는 그쪽 쓰레기통에 어떤 것도 버리지 않았다.

그녀들 중 내가 포르토에 도착했을 즈음 일을 처음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있었다. 집 앞을 지나가는데 두 명의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분홍색 미니 스커트 와 오버 사이즈 자켓을 입고 앞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채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그 일을 하는 여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다른 한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에 평범한 청바지와 갈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대화를 주고 받는다기 보다 짙은 화장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면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예상이 맞다면 어떻게 일을 하는지 신입에게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그녀 는 갑자기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더니 한 남자에게 뛰어갔다.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무언가를 말 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같이 건물로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은 비교적 젊어 보였고 행동은 대담 하고 약간 거칠어보이기까지 했다. 반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자는 동작이 작고 소 심해서 어딘가 부족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은 언청이처럼 입이 삐뚤어져 있었는데 부정교합인 턱도 같이 삐뚤어져 있었다. 하관쪽을 제외하면 꽤 예쁜 얼 굴이었고, 그런 외모가 그녀를 더 소극적이고 말이 없어 보이는 인상을 풍기게 했다. 다음 날부 터 나는 같은 장소에서 그녀를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빠르게 이 일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몇 주가 지나지 않아 특정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다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기 때문이 다. 그는 여기에서 새로 사귄 남자이거나 단골 손님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행복해 보 일 때도 있었다. 하루는 집 앞 교회 광장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었고 꽤 많 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햇빛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그녀가 급하게 걸어오더니 벤치에 앉아서 잠을 자고 있는 한 남자의 뺨을 세게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 는데, 그는 그것을 장난처럼 받아들였고 여느 연인들이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껴안고 좋아했다.

저번 달 말에도 함께 거주하고 있는 작가들과 오픈 스튜디오를 열었다. 우리 중 음악을 하는 한 친구가 현지에서 사귄 사라(Sara)라는 친구를 초대하여 데리고 왔는데 그녀 또한 뮤지션이었 다. 그녀는 우리 건물로 들어오자마자 놀라며 자신이 이 집에서 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서 이 건물의 역사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우리 집 건물은 10년 전 까지만해도 건너편 건물과 같이 매춘을 하는 여성들이 사는 공간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포르토


에서 이런 일을 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녀들은 어디에나 있어.’라고 한번 더 강조하며 거듭 말했는데, 길가, 골목, 공원, 시장, 광장, 교회 앞 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고 했 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나잇대의 중년 여성들이고, 특히 은퇴한 남성들이 모여 카드게임을 하거 나 내기를 하는 공원에서 서성거리는 여성을 보았다면 그들은 거의 그 직종의 여성으로 의심해 볼만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집의 내부 구조가 개별적인 방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잠금 장치가 되어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위 아래 층으 로 방이 5개나 있는 것에 비해 거실과 부엌이 좁은 것이 그랬고, 각층에 방들과 화장실을 제외하 고 다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집의 구조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5년 전 쯤 그녀가 이 건물로 이사왔을 때가 막 건물의 용도가 바뀌었을 시점이라고 했다. 어떤 이유 에서인지는 몰라도 -아마 재정적인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그 여성들은 모두 이사를 갔고, 그 때부터 뜻을 같이 하는 예술가들이 함께 거주하는 집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 건물 의 1세대 예술가 거주자들 중 한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건너편 건물을 소개하며 저들을 아느냐 고 물었다. 그녀는 열려 있는 창문을 잠시 바라보더니 당연히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그 녀들이 정말로 하는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저들을 방문하는 남자들은 같이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이 대화를 하기 위해서인 것 알 고 있어? 그녀들은 아주 좋은 대화 상대이자 청자(listener)야. 포르토 사람이라면 모두 이 사실 을 알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저들이 이 도시에 기여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어. 포르토에는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들은 모두 외롭기 때문이야. 그들이 친 구가 필요할 때마다 찾아가는 장소가 저기야.”

내가 포르토를 떠나기 몇 주전, 함께 거주하고 있는 R이 건너편 건물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며 나에게 말해주었다. R은 그 건물의 스시 레스토랑에 들렀다가 들었는데 옆집에 서 일하는 여성들 중 한 명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몇일 째 그녀의 행방을 찾고 있는데 도대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제는 그들 중 한 여성이 우리 집 벨을 눌러 사라진 그 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R은 기본적인 포르투갈어만 할 수 있었고 그 여 자가 말을 너무 빨리 했기 때문에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왠지 짐작이 가는 여자가 있다고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여자는 약 두 달 전부터 새롭게 일을 시작한, 행복해 보였던 그녀였다.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 궁금했지만 그 이후에도 그녀가 실종이 된 것인지, 어 떤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인지, 발견은 되었는지, 아니면 제 발로 돌아왔는지, 그 이상의 정보 는 더 알 수 없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 전 날 새벽 일찍 포르토를 떠났다. 그 날부터 상가의 크리스마스 휴가 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앞 건물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상가의 문이 닫혀 있었다. 새벽 3시쯤 집 밖으로 나왔는데, 한 남자가 흐느끼면서 또 간혹 소리를 치면서 건너편 건물의 닫혀있 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절박해보여 단순히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한 두 드림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고, 문득 그가 사라진 그녀를 찾고 있는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명의 X 태풍이 지나간지 한참인데도 거리의 창문에는 X가 즐비하다. 익명의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낸 X에는 애니미즘적 상상력이 스며 들어있다. 대자연의 풍파 속에서 안전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주술적 오브제를 만들어냈던 옛사람들처럼. 하지만 현대의 X가 유통되는 구조에는 또 다른 힘이 개입된다. 권력이 메트로폴리스를 통치해내기 위해서는 지식 통치가 필수불가결하다. 예컨대 “담배가 폐암을 일으키는 확률.”이라는 정보를 유통하기 위해 정부가 모든 국민들을 관리하는 것은 비용적 차원에서 효과적이지 못하다. 이럴 때 통치자는 공익광고와 같은 형태로 미디어를 통해 지식 담론을 유포한다. 이렇게 유통된 지식 담론은 가정이나 학교와 같은 소규모 집단에서 사회 전체로 번져 나가는 구조를 띤다. 이것은 효율을 문제다. 몇 해 전부터 태풍 대비에 효과적이라는 윈도 테이핑 문화는 지식 통치의 효과로 볼 수 있다. 뉴스나 블로그를 통해 우리는 창문에 테이핑 하는 방법을 숙지하게 되고, 그것을 하지 않았을 시 찾아오는 손해에 대해 배우게 된다. 급기야 사람들은 스스로를 검열하며, 담론의 효과는 X로 시각화된다.


X의 버내큘러 버내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은 지역색과 습속에 기반을 둔 비정규 디자인을 총칭한다. 버내큘러는 디자이너 오브제와 차별화하기 위해 부정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부정적 뉘앙스에는 완성도나 디테일의 문제가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버내큘러는 대중들에 의해 최적화 되어가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꽃병이 된 물병, 오브제가 된 텅 빈 액자는 형태를 메타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려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도시의 즐비한 X를 단순히 지식 담론의 시각적 효과가 아닌 버내큘러의 질서에 따라 성장한 상징 차원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X를 마감하는 가위질 방법, 테이프 색깔 등은 비디자이너의 주관적 미감에 의해 결정되는 사항들이다. 창문의 형태와 보유 개수를 결정짓는 비디자이너의 습속(habitus) 또한 X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상업 공간의 X는 디스플레이 되어있는 상품들을 최대한 가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착될 것이며, 주거 공간의 X는 매뉴얼대로 부착될 것이다. 그러므로 100개의 X에는 100개의 상이한 형태가 존재한다.


X의 가능성 기능에 최적화된 동시대 버내큘러 디자인의 사례에서 추상성과 새로운 미감을 발견하고 그에 상응하는 디자인으로 교환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은 오래된 자본의 전략이었다. 추상화 과정에서 개개인의 삶의 흔적은 최적의 진화를 위해 용해된다. 이것은 얼핏 전체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읽히지만, 근대(modern)가 밀어버린 상상의 디테일 일지 모른다. 내가 수집한 X에는 개인의 습속이 약간이나마 녹아 있었다. 세련된 추상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교환 가치는 없다. 상업적 팔레트의 재료로서 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상의 교환가치를 매기는 기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그것은 말하기 곤란하다. 집단 내에서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합의점일 수도 있고, 권력을 가진 특정 개인의 취향일지도 모른다. 익명의 X는 폰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강력한 맥락을 품고 있다. 균일하지 못한 굵기와 제멋대로인 길이에는 개인의 버릇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X는 묘한 상상력의 기표를 생성하며 도시 전체를 부유한다.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여지를 남겨둔 채로.

⑴ 임근준 블로그 [디자인의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의 디자인]

clichecliche@naver.com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1. 편견

글. exxx 장애 (障碍) 막을 장 , 막힐 장 / 거리낄 애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장애’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어떤 사물의 진행을 가로막아 거치적거리게 하거나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함. 또는 그런 일. 2.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3. 유선 통신 이나 무선 통신에서 유효 신호의 전송을 방해하는 잡음이나 혼신 따위의 물리적 현상.

관련 어휘는 저해, 지장, 고난, 방해, 장해, 병신, 애로, 사고, 고장, 거리낌

참고로 ‘거리끼다’ 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1. 일이나 행동 따위를 하는 데에 걸려서 방해가 되다. 2. 일이 마음에 걸려서 꺼림칙하게 생각되다

크게 본다면 장애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의지와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모든 것을 뜻한다. 여기 서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다면 거리끼는 대상에 따라 상대적인 개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외눈박이 마을에 가면 두눈박이가 괴물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 본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인 셈이다. 얼추 바탕은 깐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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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시절, 어느 지방의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을 간 일이 있었다. 당시는 착하고 선 생님 말 잘 듣는, 그리고 성적이 상위권을 다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선별적으로 간택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안 믿겨 지겠지만 학급임원도 맡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초등학생 수십명이 관광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산 속의 한 시설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떠난 버스여행에 신이나 웃고 또 웃다 내가 도착한 곳은 아이 러니 하게도 말을 잘 못하고 밥을 먹거나 씻는데도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대부분인 곳이었다.

그 전까지 내가 살던 세상은 정말이지 밝고 또 밝아서 나는 그런 시설이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 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끔 신문이나 뉴스 혹은 TV프로그램에서 봉 사활동과 관련된 정보들을 보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포장육 같이 아주 잘 포장된 단면이어서 ‘핏물이 쏙 빠진 채로’ 나의 머리속에 글자의 형태로만 들어가 있었다. 왜 이렇게까 지 구구절절 하냐면, 나는 그날 무척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공간을 생각하면 아주 흐릿한 형광등 아래의 침침한 구석방이나 이름 모를 숲속 도로 를 거슬러 올라가 만난 산 그늘이 깔린 콘크리트 건물의 이미지만 머리속에 가득하다. 한기가 돌 던 단체 식당이나 무참한 느낌을 주던 샤워기의 곧은 물방울까지 하나같이 어두운 이미지로 가 득차 있다. 그리고 시설 안의 사람들을 마주 했을때의 당황스러운 감정.

그날 나는 솔선수범의 자세로 봉사활동도 잘 했고 환한 얼굴로 시설의 친구들과 작별을 했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그날 느꼈던 ‘당혹스러움’, ‘불편함’과 같은 소화하기 어려운 감정들에 얽혀 고 생해야 했다. 그리고 어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아, 진심으로 똑바로 못보겠으면 봉사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겠다.’

웃으면서 봉사활동을 하는 나의 모습이 모순적이다 못해 역겹기까지 해서, 나는 그만 ‘도망’이라 는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솔선수범했던 나의 모습이 너무 정답같아서 내가 겪었던 배반적인 생 각이나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는 그저 그 상황을 곱씹고 또 곱씹은 뒤 도망치기로 했다. 진심으로 할 수 없는 일, 스스로가 가증스러울 정도로 정말로 불편하게 생각 한다면 아얘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겠다는 훌륭한 도망의 지침을 마련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결론치고는 오래 생각하고 깊이 새긴 각오였었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 어떠한 종류의 봉 사활동도 자의로 신청한 일이 없었다. 사람들과 얽혀 가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매번의 상황이 정 말로 과거의 기억을 극복하고 또 스스로 잘한일이라고 느끼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쓰는 이유는 그때 나의 감정이 어떠했든, 나의 결정과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판단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돌려놓고 싶다. 과거의 나를 만나 면 어른으로써 먼저 물어봐주고 싶었다. 무섭진 않았는지 솔직히 낯설거나 불쾌한 감정이 있지 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대화를 해보고 싶다.

나는 이제 한쪽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사는 것을 반성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끝간데 없 이 자존감이 세지도 않고 그럴 체력이나 상황도 아니다. 충분히 작고 초라해서 말이라도 꺼내지 않으면 여기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지경까지 와서야 나를 돌아본다는 것이 참으로 구 차하긴 하지만 더이상 어떠한 적대적인 자세도 취하지 않고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갈 수 있는 처세 를 해 나간다고 무슨 삶의 보람이 있겠는가. 나는 늘 한쪽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채로 살아왔다. 충분히 오랜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도피는 2013년 한 질문을 만난다. 그 순간이 이 글의 시작인 셈이다.어느 모임에서 만난 우석훈 씨가 이런 말을 꺼냈다.

“한국에는 장애인이 별로 없는 것 같죠? 눈에 안보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런것 같다. 왜 안보이는 것일까?

이제 시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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