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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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영화로 읽는 시공간 - 단팥빵의 삼라만상: 앙(あん, 2015). / 글. 곡주대비 나의현대예술순례 - 07.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상설전에 다녀와서 / 글. 사진. 황정운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즐거운 편지 - 토마스 하디의 “우연(Hap)이란 신이 다스리는 세상” / 글. 하얀병아리 작곡가 B의 노트 - 노래 신청 받나요? / 글. Composer B 택시를 탔다 - 06. 아내가 요리를 너무 못해 / 글. 사진. 고수진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옆사람 인터뷰 - 11. 낭만 옥탑방 /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 27. 오겡끼데쓰까. 雪國建築탐방. / 글. 사진. aoikasa 경계인 - 인식편: 현실부정과 신용이 만났을 때 / 글. 스푸트니크 Daily Archive - 오, 루씨! 오, 아가사! / 글. 모음. 김혜미 시청 앞에서의 키스 / 글. 김성연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2. 어떤 망망대해 / 글. exxx

**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정말 친절히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


명절을 앞두고 고향에 내려가는 게 좋을지 안내려가는게 좋을지 고민을 하던 시 절도 있었습니다. 막상 내려가면 뭔가- 좀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내려가지 않으 려니 개운치 않은 감정도 있고 휑한 도시에 있자니 조금은 쓸쓸한 감도 있어서 내 려간 적도 있지요. 명절이 되면 좋다 나쁘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걸 보면 모두의 큰 이벤트 하 나가 참 다양한 감정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갈까 말까 하다가 요즘엔 가자는 방향으로 많이 바뀌었는데, 그게 내려갔다가 뭐 구설수에 얽혀서 잠깐 기분이 안좋을 수는 있지만 그 사람들 다 죽 으면 못본다고 생각하면 또 측은해지고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가능하면 가려고 합 니다. 가면 또 흰머리 희끗희끗한 삼촌들이랑 투닥거리겠죠. 뭐 저는 큰 돈을 벌지 못해서 (사실은 돈을 벌긴하나 싶기 때문에) 대부분 빈손으로 내려가지만 막상 또 보면 기분이 막 안좋거나 그렇진 않습니다. 스스로가 작아지 는 느낌 같은 것도 있겠지만 또 그게 제가 선택한 삶의 한 면이니 어쩌겠습니까. 번듯하고 으스대면서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살 거 였으면, 이런거 만들면 안되었죠. ㅎㅎ 아무튼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저의 친가 외가 모두 통틀어서 비밀이랍니다. 여러분도 굳센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보세요 화이팅!

ps. 이달에는 새로운 코너가 2개! 생겼습니다. 찾아보세요!

월간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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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빵의 삼라만상: 가와세 나오미의 앙(あん, 2015).

어린 시절부터 단팥이 들어간 모든 음식을 탐닉했던 것 같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어린 시절, 내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은박지에 싸여진 연양갱이 항 상 쥐어져 있었고 그 후로 몇 년이 지나 머리가 좀 커져있을 때는 버스비를 붕어 빵 사먹는데 탕진해버리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중학생이 되었을 때쯤 해서는 집 앞 영국빵집에서 팥빙수를 개시하기만을 기다렸었드랬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변한 것은 없었다. 응팔의 성동일 처럼 술만 마시면 단팥빵이 가득한 종이 봉투를 안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 나의 주사 중 하나 였다. 미국으로 이사 하고 제일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팥이 들어간 그 어떤 음식도 곁에 둘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나의 푸념을 듣던 일본인 친구는 오만가지 종류의 단팥 빵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단팥이 들어간 음식, 특히 단팥빵은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 한 20 여년을 상징하는 표상 같은 것이다. 처음으로 다른 나라로 옮겨 독립해야 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의 부재에 대한 슬픔은 단팥빵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환되고, 삭혀지고, 우상화 되었다. 즉, 단팥빵은 내게 있어 격리와 이별의 상 징인 셈이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그런 나의 단팥빵 감성을 누군가가 꽤 뚫기라도 하듯이 영 화로 만들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2015년작, 앙 (あん) 은 도라야끼를 만들 어 파는 작은 가게에서 진정한 단팥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고립 과 외로움의 관한 이야기다. 작은 도라야끼 가게의 점장인 ‘센’은 아무런 비전도, 야망도 없이 사제 단팥을 공 급받아 오고 가는 여고생들 에게 도라야끼를 파는 것으로 생을 연명하는 중년의 남자이다. 그런 그의 가게에 어느 날 76세 할머니가 찾아와 아르바이트를 하겠 다고 하지만 센은 그녀가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거절해 버린다. 그녀는 다음날 자신이 만들었다는 단팥을 맛보라며 놓고 떠난다. 그녀의 단팥의 맛에 놀란 센은 그녀를 고용하지만 곧 그녀가 나병 환자 였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게 되면서 사람 들은 더 이상 그 들의 도라야끼를 사지 않고 결국 가게는 문닫게 된다. 영화의 제목으로 가늠할 수 있듯, 영화의 상당 부분이 도쿠에 할머니가 단팥을 만드는 장면으로 할애 되는데, 그녀는 새벽 벽두부터 팥을 끓이고 졸이는 과정 내내 팥과 대화를 하며 ‘팥들’과 눈을 맞춘다. 그녀는 이러한 과정이 거친 바람과 비를 이겨냈을 팥에 대한 예의라고 여겨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 모든 과 정을 귀찮아 했던 점장도 점점 그녀의 방식에 익숙해 지게 되고 그녀의 인생 이 야기에도 귀를 기울기게 된다.


‘앙’은 도쿠에 할머니가 그녀의 십대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내야만’ 했던 시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세상과 단절 된 채 환자들을 위한 간식들을 만들 어야 했고, 세상과 시간의 흐름을 그녀는 지붕 아래에서, 부엌 안에서 자연의 매 개체인 팥으로만 가늠 해야 했다. 나병 환자들이 법적으로도 자유를 얻게 되면서 그녀는 50여년 만에 세상으로 나 올 수 있게 되었고, 팥 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의 산물에 대 해 경이로워 한다. 그녀가 밟고 지나가는 벚꽃 잎들,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 바 람 한 자락을 그녀는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아 말을 걸고, 손 끝을 얹어 보고, 이제 는 너무 늙어버린 그녀의 시선을 나누고 싶어한다. 어찌 보면 그녀의 단팥이 들어간 빵이 범상치 않은 맛을 가지고 있던 것은 너무 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삼라만상이 다 들어가 있는 단팥은 과연 어떤 맛을 내 겠는가. 나오미 가와세의 작품들은 ‘부재’ 와 ‘격리’ 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지고자 한 다. 필자가 그녀를 처음 조우하게 된 그녀의 초기작 다큐멘터리, 달팽이: 나의 할 머니 (1997) 에서 그녀는 부모에게 버려진 자신을 입양해 키워준 할머니와의 일 상을 통해 감독 본인이 부모의 부재와 그것을 극복하는 혹은 해야만 과정에서 필 요했었을 더 큰 존재와의 ‘조우’에 대해서 말한다. ‘달팽이’ 에서의 할머니와, ‘앙’에서의 자연은 가와세 나오미가 부재를 통해 발견 해낸 큰 존재들이다. 그녀는 이러한 ‘큰 존재’들을 섬세한 카메라 웍으로 롱테이 크를 이용해 담아 내는데 앙에서 팥을 끓이는 과정과 도쿠에 할머니가 벚꽃 나무 를 쫓아가는 느린 걸음 등이 바로 그러한 예 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많이도 울었다. 도쿠에 상이 감내해 온 엄청난 시간들과 외 로움을 내가 단팥빵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던 그 시간들과 비 교할 수는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무언가로부터 격리되어 느끼는 ‘부재’ 라는 ‘존 재’가 너무 입체적으로 느껴 졌기 때문이다.

영 화 로 보 는 시 공 간

영어식 표현 중에 소울 푸드 (soul food)라는 말이 있다. 그 음식을 먹으면 영혼 이 만져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 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단팥빵이 그런 음식이 아닌가 싶다. 시간의 부재를, 사랑하는 존재들과의 격리를 채워 줄 것만 같은 그 런 음식 말이다.

글. 곡주대비


나의현대예술순례 #07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상설전에 다녀와서

글. 황정운

1_ 지난 해 환갑을 맞으셨던 어머니는 요새 일주일에 한 번 다시 그림을 배우러 다닌다.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그림을 가르쳐주는 클래스가 있는데, 강 건너 집에서 홍대까지 짧지 않은 길을 다녀가신다. 그림을 다시 그리신다는 것은 어머니가 꽤 오래도록 그림을 그려오셨다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원래 손 재주가 좋으셨다. 어릴 때 초등학교에서 내준 표어 그리기 숙제도 척척 대신 그려주셨는데, 끝이 네모난 붓으로 진한 포스터 물감을 묻혀 왼 손으로는 전화기를 붙잡고 어딘가와 통화하시면서 다른 한 손으론 반듯반듯하게 표어 글씨를 쓰시는 모습은 참 경이로웠다.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시던 그 모습에서 예술이라는 낯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풍경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셨을 즈음이었다. 갈색의 나무 이젤이 집에 놓여 있었고 풍경사진은 이젤 머리에 집게로 꽂혀있었다. 수채화를 그리실 무렵이라 4절지 스케치북이 걸려 있었는데, 어머니는 주로 산을 그리셨고 산에는 나무가 있었고 가끔 그 나무들 사이로 오래된 절이 그려져 있었다. 수채화란 안료를 물에 개거나 풀어서 그리는 그림 ...... 물로 적절하게 색의 농담을 조절하는 미묘함이 좀처럼 어려워 보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의 이젤엔 스케치북 대신 캔버스가 놓이기 시작했다. 유화를 시작하신 거다. 유화는 물감을 손에 쥐는 법부터 달랐다. 검은색 팔레트에 수채물감을 칸 마다 짜놓던 것과 달리, 둥근 나무 판대기 같은 것에 유화 물감을 덕지덕지 흩어 놓았던 기억이 난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은 상당히 희미하지만 단 하나, 어린 내게 젊으셨던 어머니의 뒷모습은 예술인의 그것이었다. 그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강렬하다. 어머니의 입에서 ‘천경자’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도 그 즈음이다. 시립회관이었나, 큰 공공기관에서 주말에 어린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 강사가 어머니가 그림을 배우시던 그 분이기도 했던 거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나란히 이젤 앞에 앉아 열심히 아그리파를 스케치하고, EBS에서 봤던 Bob Ross 아저씨처럼 수채통에 붓을 힘차게 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이 아주 조금 미술에 다가갈 때 어머니가 가끔 이야기하던 무슨 전시회, 무슨 작가라는 것이 낯설지 않게 들렸는데 그 속에 분명 ‘천경자’라는 이름이 있었다. 다만 그때 ‘천경자’라는 이름이 여성의 그것이라는 이유로, 나는 어머니가 당신의 그림 강사를 일컫는 것이라고 오해 했었다. 오해하지 않게 된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지만, 그 이름은 특별하게 기억되었다. 그건 이젤에 앉아 그림을 그리시는 어머니의 뒷모습,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를 포괄하는 그 자체였다.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무료


2_ 이런 나의 작은 경험과는 무관하게 이미 한국 화단의 거목이었던 천경자 작가의 사망 소식이 2015년 10월 무렵 언론에 전해졌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훨씬 이전에 그녀의 작품을 기증 받아 2000년대 초부터 상설전시회를 시작했는데, 내가 정작 그 전시를 찾게 된 것은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난 다음이 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 2층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상설 전시회는 최근 몇 년간 미공개 되었던 작품을 중심으로 3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그림은 1985년 무렵에 그린 <여인의 시> 그림 두 점이었다. 천경자 작가 특유의 여성 이미지, 멍한 시선으로 아무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면서도 그 느낌이 허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의 내면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한 느낌이었는데, 단단해 보이진 않았지만 쉽지 않은 단어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아마 천경자 작가처럼 자신의 一生과 자아를 이토록 직유의 화법으로 캔버스에 그려낸 작가도 드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누구나 자신만의 지문을 작품에 남긴다. 표현 기법과 주제 의식의 차이일 뿐 작품을 대하다 보면 누구의 것인지 대번 알 수 있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그 사람만의 마티에르다. 그런데 천 작가의 여인들은 그녀가 창조한 여인이 아니라, 그녀 자체였다. 절망을 겪었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시키는 걸까. 그래서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식물로 표현되거나 상관없이, 그림은 나의 분신” 이라는 그녀의 말은 여러 작품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자메이카에서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1989, 혹은 그라나다에서 <그라나다 두 자매> 1993 만난 이국적인 여인들을 그린 작품을 보면, 푸른 색 머리 스카프나, 표범무늬 옷으로 그녀들의 이질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타자와 자신 모두를 관조하는 그들의 표정만큼은, 그들이 천경자 자신의 다양한 분신임을 숨길 수 없게 했다. 발표 당시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그녀의 존재를 각인시키게 한 <생태> 1951 그림을 보고 나오며, 한 그림에 못이 박힌 듯 계속 바라보았다. <생태>에서 보았던 뱀 몇 마리를 머리에 머리띠처럼 두르고 있는 한 여인의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였다. 천경자 작가가 54세 때 그린 대표적인 자화상으로 22살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린 작품인데 굳게 입을 다문 그림 속 여인이 ‘이 그림만은, 아니 이 그림만큼은 내가 생각하는 온전한 진짜 나의 모습이다’ 라고 말을 건넨다. 현실세계에서 수용되지 못하는 진짜 그녀의 내면이 그림에 쏟아져 나온 것만 같았다. 어쩌면 현실의 천경자 자신이 오히려 여인들에 의해 그려진 자화상일지도 몰랐다.



3_ 천경자의 여인들은 그녀의 분신이다. 다만 <영원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전시회 제목에는 조금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흠뻑 빠진 나르키소스는 아메이니아스의 저주에 씌어 수면에 떠오른 또 다른 자기를 좇아 연못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나르시시즘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포장되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며, 거대한 환상이었다. 그러나 천경자의 그림은 자신에 대한 집착도, 환상도 아니었다. 여인들은 작가의 진정한 내면에 가까웠고, 때문에 천 작가는 그녀들을 단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의 그들을 기억하고 인정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나는 지금 나의 인생 전부의 어느 선에 서 있는지 모르나 지나간 날을 생각해 보니 별로 후회할 일도 없이 무던히 살아왔다는 자부를 갖는다. 나의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母情)이라는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된다. 꿈은 그림과 함께 호흡을 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서식을 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천경자, 꿈과 바람의 세계 (경미문화사, 1980) 상설전시회를 나오며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요새 그리시는 것은 수채 색연필화였다. 스케치를 하고 파버-카스텔이라든지 프리즈마라든지 색연필로 색감을 입히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그리신 그림은 종로구 서촌에 있는 오래된 대오서점 주변 풍경이었다. 어머니는 그 그림을 보여주시며 “자꾸 예전에 수채화를 그리던 버릇으로 색을 칠하게 되네. 요즘에는 요즘의 트렌드가 있다던데” 하면서 그림 강사가 조언해준 내용을 나에게 말해주신다. 천경자의 그림을 보며 그런 어머니와의 대화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천경자의 그림은 그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자아 찾기, 그리고 평생에 걸친 내면의 대화였다. 옛날 방식으로 채색된 대오서점은 어머니만이 알고 있는 당신의 분신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내가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도 30년 전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설령 당신의 젊은 날이 기쁨과 우울, 절망이 모두 혼재된 복잡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천경자의 여인에서 그 시절의 어머니를 엿보았던 거다. 시립미술관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가며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당신은 그림을 그리시던 30 년 전의 그 순간을 여전히 분신처럼 기억하고 있으신 건지. 마치 천경자의 그림 속에 당신을 두고 온 것처럼, 뱀을 머리에 인 채 허공을 응시하는 퀭한 그 두 눈이 계속 생각났다. 어머니…… 나는 계속해서 어딘가 낯선 그 이름을 계속 불러보는 것이었다. [끝]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즐거운 편지 글. 하얀병아리

토마스 하디의 “우연(Hap)이란 신이 다스리는 세상” “토마스 하디와 제인 오스틴 중 누구에 끌려 영문학을 선택했느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주인공 그레이가 영문학을 전공한 여주인공 아나스타샤에게 묻자 그녀는 “ 하디”라고 대답한다. 아마 하디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아나스타샤의 모습에서 <테스>의 순결한 아름다움 때문에 파멸하는 여주인공을 떠올릴 것이다. 사람들은 토마스 하디를 <테스>라는 소설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소설이 마음에 들어 조금 더 그에 대해 읽어 본 사람도 그 다음으로 소설 <쥬드>를 떠올릴 것이다. 한국에서는 물론 영문학에서도 소설가로서 더 유명한 토마스 하디지만, 사실 그는 말년까지 시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누구보다 열정 넘치는 시인이었다. 하디의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교회 성가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하디 역시 어린시절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노래부르는 것을 즐겼다고 하니 시가 가진 음악성에 끌린 건 당연한 순리였다. 토마스 하디의 시는 사실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돼 있지 않다. ‘지식을 만드는 지식’ 이란 출판사에서 <하디 시선>이란 이름으로 한 출간한 게 전부다. 서점에서는 구하기 쉽지 않으니 혹시 이 글을 읽고 나서 관심이 생겼다면 온라인으로 구매할 것을 권한다. 토마스 하디는 18세기 중반에 태어나 19세기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그리고 다시 사실주의에서 자연주의로 넘어가는 다양한 사조들의 분기점을 산 시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시는 자연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 사조는 모르는 사람이 들었을 때 ‘자연’이란 단어에서 오는 목가적 느낌 때문에 오해하기 쉽다. 어감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과 달리 이 사조에 속한 작품들은 굉장히 거칠고 비극적이며 역동적이다. 오히려, ‘자연’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전원시나 목가적인 시는 주로 낭만주의에 속하는데, 자연주의는 이런 낭만주의에 반하는 사조다. 자연주의는 사람의 운명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타고난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당시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과학과 서양의 사고체계를 뒤흔든 다윈의 ‘진화론’이 문학에 영향을 미친 결과다. 때문에, 자연주의 작품 속 인물들은 본능에 충실한 이들로 자신의 태생적 한계(성격을 포함해 집안이나 신분)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괴’되고 만다. (여기서 패배라는 단어 대신 파괴라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헤밍웨이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되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면 지녀야 할 비극적 영웅성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위대함보다는 인간의 연약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조인 만큼 토마스 하디의 작품 역시 비극적이고 숙명론적이다. 그리고 숙명론은 결과적으로 염세주의로 이어진다. 그의 대표 소설 <테스>나 <쥬드>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타고난 환경과 섬세한 감수성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영웅적인 극복이나 초월도 동화 속 행복한 결말도 없다. 그의 시 역시 그의 소설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시는 특히 ‘운명’이란 단어가 띠고 있는 불행의 색에 탐닉한다. 운명이란 단어에는 인간이 거부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미 삶에 주어져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애초부터 비극을 품은 단어다. 그러나 하디에게 이 운명이 괴롭고 비극적인 것은 운명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거부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연(Hap) If but some vengeful god would call to me From up the sky, and laugh: “Thou suffering thing, Know that thy sorrow is my ecstasy, That thy love’s loss is my hate’s profiting!” 만약 어떤 악의에 가득찬 신이 하늘에서 나를 부르고 비웃으며 “너, 고통 받는 존재여 알다시피 너의 슬픔은 내 극상의 기쁨이며, 너가 사랑을 잃을수록, 나의 증오는 더욱 자라난다.” Then would I bear it, clench myself, and die, Steeled by the sense of ire unmerited; Half-eased in that a Powerfuller than I Had willed and meted me the tears I shed. 그러면 차라리 나는 참을 수 있으리라, 몸을 오그리며 죽으리라 감당하기 힘든 분노에 치를 떨면서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이 나보다 강한 이가 바라고 배당해 주었다고 생각하면 반쯤 편안해지리라.


But not so. How arrives it joy lies slain, And why unblooms the best hope ever sown? —Crass Casualty obstructs the sun and rain, And dicing Time for gladness casts a moan. . . . These purblind Doomsters had as readily strown Blisses about my pilgrimage as pain.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어떻게 기쁨이 살해되어 쓰러지며 왜 뿌려진 최상의 희망의 싹은 꽃피지 않는가 -지독한 우연이 해와 비를 가리고 주사위 놀이하는 시간은 장난삼아 슬픔의 신음을 던진다... 반쯤 눈먼 운명의 신들은 이미 제 뜻대로 나의 순례길에 고통만큼의 행복을 뿌려놓았구나

이 시의 제목은 우연(Hap)이다. 하디는 1연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악의의 찬 신을 가정한다. 그는 “너, 고통 받는 존재여 알다시피 너의 슬픔은 내 극상의 기쁨이며, 네가 사랑을 잃을수록, 나의 증오는 더욱 자라난다”고 비웃는 신으로 인간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신이며 사랑이 아닌 증오에 가득 찬 신이다. 기독교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이런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 바로 지옥일 것이다. 그런데 하디는 2연에서 차라리 그런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면 나았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차라리 나는 참을 수 있으리라, 몸을 오그리며 죽으리라 /감당하기 힘든 분노에 치를 떨면서/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이 나보다 강한 이가 바라고 배당해 주었다고 생각하면/ 반쯤 편안해지리라“ 하디는 신이 만약 악의를 가지고 우리를 괴롭힌다면, 우리는 ‘죽음’이란 저항이라도 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세상이 온통 나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면 나 역시 그런 신에게는 기대할게 없으니, 그를 적으로 여기고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맞서 싸우다 차라리 죽겠단 말이다. 그러나 하디는 그렇지 않기에 삶이 괴롭다고 말한다. “반쯤 눈 먼 운명의 신들이 이미 제 뜻대로/ 나의 순례길에 고통만큼의 행복을 뿌려놓았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건 제목처럼 바로 우연(Hap)이란 이름의 신이다. 우연은 어떠한 규칙이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논리가 없기에 따져 물을 수도 없다. 나에게 적의를 가진 존재도 아니니, 그를 나 혼자 증오해봤자 허무할 뿐이다. 또, 우연이 뿌리기에 고통과 행복은 순서대로 오지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그 순서를 알고자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내 인생의 고통과 행복의 양이 얼마 만큼인지 어떤 순서로 올지 알지 못하기에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라는 희망이 힘겨운 오늘을 견디게 한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이 없음을 알며, 불행의 뒷면이 행복임을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매일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떠돈다. 우리는 행복의 순간에도 불안해하고, 불행의 순간에도 절망치 않는다. 그래서 삶의 바퀴는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 그렇기에 하디의 말처럼 ‘우연의 신’은 ‘악의에 찬 신’보다 무섭다. 인간을 영원히 제 손아귀에 움켜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에 찬 신’이 얻을 수 있는 건 인간의 저항과 저주뿐이지만 ‘우연의 신’은 인간을 완전히 복종시킨다. 오늘의 고통에 신에게 저주를 퍼붓다가도 내일의 행운을 위해 인간은 어제의 고통을 겪고도 또다시 숭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종교나 절대적인 것에 매달리는 이유도 ‘내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낫길 소망하며 신에게 매달린다. 냉철한 설명이자 뼈아픈 통찰이다. 일견 그의 시는 염세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시를 쓴 건 단순히 인간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소위 ‘건강한 염세주의자’였다. 그는 인생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어떠한 낙관주의에도 기대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자연주의자’의 과학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파악하려 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 진보하기위해 필요한 태도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혐오한 건 ‘긍정적 자기기만’이었다. 그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다’라는 아무런 근거 없는 희망을 싫어했다. 그는 긍정적 자기기만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고, 인간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극복도 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의 천국도 그에게는 비슷한 매커니즘이었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을 위한 것이라는 자기 위안과 이생의 고통이 내생의 행복으로 보답 받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내세주의적 사고가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의 불행에서 눈 돌리게 하고 현실을 보는 두 눈을 가린다고 본 것이다. 하디는 눈 돌리기보다는 마주하려하고 긍정적 자기기만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절망하자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염세주의자라 부르는 것을 싫어했지만, 염세주의가 인생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며 그런 관점을 가지면 인생과 세계에 대해 덜 실망하게 된다고 부연한다. “간단히 말해서 염세주의(어떻게 부르든 간에)란 확실한 게임이다. 여러분은 거기서 지는 것이 아니라, 승리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결코 실망하지 않을 유일한 인생관이다.” 꿈은 순간적으로 현실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에게 인간의 행복은 도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현실에 적응시킴으로써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디의 시는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깨닫게 한다. “인생이여, 나는 그대를 원한다. 그대는 인식될 만한 가치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리스 문명이 최전성기 때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즐겼던 반면 몰락기에 다다라서는 비극이 쇠퇴하고 희극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모순과


갈등이 해소되어 버린 안락하고 평화로운 세계가 구현된 ‘희극’을 희구하는 것은 이들이 삶에 지치고 삶을 견딜만한 힘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반면 건강한 시기의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삶을 고뇌에 찬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비극을 향유한 그리스인들은 염세주의자지만 삶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강함에서 비롯되는 염세주의라는 게 니체의 설명이다. 하디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용기와 여유가 있는 ‘건강한’ 염세주의자다. 하디의 시는 유려하지 않지만 무미건조함에서 오는 맛이 있다. 태도는 냉소적이고 신랄하지만 말투만큼은 차분하고 조용하다. 그래서 어떨 때는 더 그의 시가 주는 전언이 무겁고 무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악의에 차 있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진리를 담담히 알려주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나라의 토마스 하디의 시를 변역해 소개한 윤명옥 씨는 “하디는 그의 시에서 어떤 낭만성이나 장식도 없이 사물을 하나의 일상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그는 그저 건조하게 말을 할 뿐이다. 그래서 하디의 시는 ‘잘 빚은 도자기 항아리’라기 보다 ㅁ‘거칠게 조각된 목조 그릇’이라는 평을 듣는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시 하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하디의 ‘중간 색조(Neutral tone)’라는 시다. 사랑의 색 하면 우리는 ‘빨강’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이별의 색은? 하디의 시를 읽고 나면 ‘중간 색’이 떠오른다. 아마 ‘ 잿빛’정도의 색일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영화 <무뢰한>이 생각난다. 전도연과 김남길이 주연한 영화인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영화 <무뢰한>의 주된 시간적 배경은 새벽이다. 영화 속 새벽의 적막함과 어슴푸레한 하늘빛이 이 시와 잘 어울린다. 삶을 사는데 다 자신을 소진시켜버린 이들의 사랑은 타오르는 불꽃보다는 다 타버린 재와 같다. 시가 마음에 든다면 영화도 보기를 추천한다.


Neutral Tone 중간 색조 We stood by a pond that winter day, And the sun was white, as though chidden of God, And a few leaves lay on the starving sod; – They had fallen from an ash, and were gray. 우리는 그 겨울에 연못가에 서 있었다. 태양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마치 신의 꾸지람이라도 받은 것처럼 낙엽 몇 개가 굶주린 땅 위에 떨어져 뉘어 있었다. 물푸래나무에서 떨어진 것들로, 잿빛이었다. Your eyes on me were as eyes that rove Over tedious riddles of years ago; And some words played between us to and fro On which lost the more by our love.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은 마치 오래된 지루한 수수깨끼들을 푸는 듯했다. 그리고 몇 마디가 우리 사이를 오갔다. 우리 사이의 누가 더 많이 상처받았는가에 관해서 The smile on your mouth was the deadest thing Alive enough to have strength to die; And a grin of bitterness swept thereby Like an ominous bird a-wing…. 너의 입가에 미소는 완전히 죽은 것이었다. 오로지 죽을 정도만의 생기를 가진 그 쓰디쓴 미소가 너의 입가를 스쳐지나갔다. 날아가는 불길한 새 같았다... Since then, keen lessons that love deceives, And wrings with wrong, have shaped to me Your face, and the God curst sun, and a tree, And a pond edged with grayish leaves. 그 때 이후로 사랑은 속일뿐이며 잘못으로 괴롭힐 뿐이라는 쓰디쓴 교훈이 나에게 남았다. 너의 얼굴, 신에게 저주 받은 태양, 그리고 나무 하나. 그리고 잿빛 잎사귀에 둘러싸인 한 연못.


작 곡 가 B 의 노 트

Composer B 1악장. 신세계를 발견하다 언제부터인가 술자리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대개 3차쯤- 으레 LP바로 향하는 버릇이 생기기 시작했다. 늘 함께 가는 사람들이어도 좋고, 처음 가보는 사람이어도 좋다. 설령 처음 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와 함께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음악에 반쯤 미쳐서 사는 부류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좀 쭈뼛쭈뼛하다가도 바의 한 쪽 벽에 빼곡히 꽂힌 LP판들을 보는 순간부터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그 분위기에

노 래 신 청 받 나 요

적응하기 때문이다. 허나 요즘은 그 LP들도 일종의 인테리어 요소 정도로 취급하는

?

어김없이 꽐라가 될 때까지 술을 사주곤 했던 선배가 하루는 ‘죽여주는 곳이 있다’며

경우가 생기다보니, ‘천 장당 얼마’ 하는 식으로 개업과 동시에 어디선가 LP를 따로 받아오고, 음악은 스트리밍 사이트에 접속해서 틀어주는 경우가 꽤 있기는 하다만... 그래도 책장을 꽉 채운 LP가 주는 묘한 분위기는 LP세대가 아닌 나에게도 꽤 멋진 풍경임에 틀림은 없다.

생각해보면 그 ‘언제부터인가’는 아마도 재작년부터였던 것 같다. 광화문에 가면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갔던 적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담배 연기로(매장 내 금연법이 시행되기 전이므로) 가득 찬 어둑어둑한 실내가 들어왔다. 출입문의 맞은편 벽을 보니 무언가 검고 큰 동그라미 두 개가 공중에 떠 있는 게 보였다.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며 잔뜩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저게 스피커거든... 근데 저기서 나오는 소리가 대박이야... 그냥 가슴을 뚫고 들어와.” 라고 말했다. 기껏해야 호가든이나 하이네켄 정도가 있을 줄 알았던 냉장고에는 올드 라스푸틴이나 히타치노 네스트처럼 마니아가 아니면 잘 찾지 않는 맥주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잖아도 몽롱한 술기운에 신천지 같은 풍경을 보니 정신이 없는데, 선배는 카운터에서 가져온 메모지에 무언가를 슥슥 적더니 가게 주인에게 그 쪽지를 넘기고 있었다. 잠시 후, 아까 그 스피커에서는 나지막하고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would be...”

세상에.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이 분위기말이다. 단순히 음악의 볼륨을 크게 틀어놔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공간을 가득 채운 달고 쓴 술 냄새와 음악소리는 외부의 공기를 철저히 막아주고 있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오로지 술과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걸까. 나 같은 사람은 매일같이 달고 사는 게 음악이다 보니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도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늘 음악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먹고 마시기에 정신없는 술집에서 과연 어떤 관대한 업주가 음악을었틀어주려고 하겠는가. 그도 아니면 그냥 장르나


분위기, 음악의 퀄리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어딜가나 들을 수 있는 ‘인기차트 100’ 을 자동재생으로 걸어놓기 일쑤인 이 나라의 그 수많은 가게들1)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참 많은 음악들을 듣고 배웠다. CD로 들었던 신해철과 데미안 라이스 그리고 제프 버클리의 노래는 물론이고, LP판으로 들었던 재니스 이안, 돈 맥클린, 카펜터즈, 오지 오스본, 프로콜 하럼 그리고 캣 스티븐스의 노래들까지. LP바에서 만났던 그들이야말로 음악은 술과 ‘분위기’라는 안주와 함께 즐길 때 가장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가르쳐준 진실로 위대한 선생들이었던 셈이다.

2악장. 내 노래 좀 들어봐요 그런 LP바에서 가장 좋은 순간이 또 하나 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대화를 멈추고 내가 선곡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는 순간 말이다. 음악을 깊게 듣는 사람들끼리는 동지의식도 있지만 때로는 묘한 경쟁의식도 있어서 그런지 내가 권한 음악을 상대가 수용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없는 쾌감 비슷한 걸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이런 거다. 비슷비슷한 음악이 흘러나와서 살짝 지루해진 장내에 누군가가 신청한 노래가 나온다. 자기들끼리 떠들던 옆자리 손님들은 어느새 수다를 멈추고 음악을 들으며 말없이 술잔만 비운다. 그러다 음악이 끝나면 그들 중 한명이 조심스레 카운터로 다가가 주인에게 다가가 “이 곡... 제목이 뭔가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주인은 신청곡 메모지를 그 사람에게 건네며 턱으로 신청자 쪽을 슬쩍 가리킨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향해 발사하는 경탄과 거만함의 눈빛을 동시에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일부러 잘난 척을 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그 음악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해 하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DJ를 꿈꿨다던 사람들도 이런 감정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음악 혹은 다른 분야에서든- 즉 취향이 확실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구축해놓은 세계가 확실하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궤적이나 철학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세계를 대표하는 애청곡 리스트를 남에게 공개한다는 행위는, 자신의 마음 속 내밀한 곳을 남들과 공유하고 또 인정받는 가장 세련된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바에서 직접 음악을 틀어보고 싶다. 그 가게의 콘솔을 만지는 법도 배우고 음반이 어떻게 정리되어 있는지도 배우면서 음악과 술에 잔뜩 취한 손님들을 더 취하게 만들어버리고 싶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그런 호사를 부려볼까. 일단 단골집부터 만들고, 사장과 형이니 동생이니 하는 사이가 되는 게 우선이겠지만... 가뜩이나 해야 할 일이 쌓여있는 나에게 그럴 시간이 있을지나 모르겠다. 1)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서울시내 대다수 음식점과 술집들의 선곡 센스는 가히 최악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카페는 그나마 좀 낫다. 안 그래도 좁아서 모든 소리가 다 들리는 20평짜리 밥집에서 EDM을 들으며 밥을 먹어야 한다니.


택 시 를 탔 다

S#6. 구반포-우리집 오늘의 이야기, [아내가 요리를 너무 못해]

글, 고수진 (gomin19@hanmail.net)

올 겨울 최악의 한파. 한파주의보, 문자로 긴급재난문자까지 오던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을 가기 위해 지하철로 내려가다 친구들에게서 카톡을 받았다. 날도 어마무시하게 추운데 천호에서 소곱창 어떠냐고. 자몽의 이슬은? 하... 소곱창이라니 택시를 타면 집까지 15분거리, 지하철은 1 시간 10분정도. 고민할 필요가 없지. 나도 가겠다며 답장을 날리고 택시를 잡았다. 너무 추워서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무슨 바람이기에 피부에 닿았는데 이렇게 쓰리지? 칼바람이 이런 바람이려나.. [천호역 현대 백화점으로 가주세요] [예, 손님 잠시 통화해도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어. 내가 천호역 들렸다가 바로 집으로 갈게.. 그려...집으로 갈게, 떡국? 알았어. 내가 할게. 떡국 먹고 싶어? 놔둬놔둬. 알았어. 나 손님 왔어. 끊어] [참말로.. 뭔 떡국이여. 손님 추우시죠? 히터 온도 더 올려드릴게요] [아니에요, 따뜻해요.] 차는 잘 달리다 잠시 압구정 쪽에서 밀렸다.


[아까 우리 아내가 전화를 한건디, 우리 아내가 요리를 오지게 못해.] 오늘의 이야기, 요리 못하는 아내. [아 그러셔요?] [보통 못하는게 아니야. 이제 마흔이 넘었어도 못해. 요리도 센스인가봐. 요리 센스가 없으면 나이가 먹어도 뭘 넣어야 할지. 한식은 사실 만들기가 쉽거든 서양요리는 그 소스 그런 것이 만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식은 아가씨 간장, 소금, 된장, 고추장만 잘 쓰면 어느 정도는 맛이 나오거든. 우리 아내는 국을 만들면 한강이야 한강 만들어] [하하하 한강이요?] [어 소태(‘아주 짜다’라는 뜻)를 만들어서 물을 자꾸 부으니 한강 맹그러 놓지 뭐] 기사님의 아내는 마흔이 넘으셨다고 한다. 지금 두 분은 덕소에 사시는데 아내가 요리를 너무 못해서 기사님이 아침, 저녁을 만드신다고 했다. 딸 둘은 결혼을 했는데 친정에 오면 아버지 음식이 그립다고 한다. 바뀌었다고, 원래 딸들은 엄마 음식 그리워하지 않냐고. 자기가 공부를 못하고 집이 가난해서 그렇지만 아마 정식으로 요리를 배웠다면 요리사를 했을 거라고 하셨다. 기사님의 풍채는 소위 어깨들처럼 크고 거대했다. 그런 기사님이 섬세한 한식의 양념 비법을 얘기해 주시는데 너무 웃기면서 뭔가 귀여웠다. [아가씨 볶음 요리는 들기름. 들기름으로 볶으면 향이 달라져요. 아가씨는 참기름만 알았지? 참기름은 나물에만 쓰는 거고 볶음은 들기름. 기름도 뭘 쓰느냐에 따라 향이 달라져요. 그리고 한식은 마늘이 제일 중요해. 마늘은 꼭 한 숟갈씩 요리에 넣으면 잡냄새가 싹 잡히지. 국 끓일 때 새우젓 국물만 한 숟갈 넣어도 감칠맛이 생겨, 다시다 넣지 않아도 돼요. 아가씨는 요리를 잘 하나? 지금 내가 알려주는 거 처음 들었지? 이거 진짜 좋은 거 알려주네.] 기사님은 신이 나셨는지 계속 요리강연을 하셨다. 아하! 라고 맞장구치는 내가 마음에 드셨나보다. 사실 난 무어라고 말 할 수 없는 그러니까 놓쳐버린 꿈에 대한 기사님의 아쉬움들이 말 사이사이에 느껴져서 더 많이 맞장구를 쳤다. [오늘 날씨가 추우니 떡국 생각이 나셨나보다.] [떡국 그 세상 쉬운 것도 그냥 내가 하는 게 마음이 편해. 그래서 결혼하고 줄곧 내가 밥 했다우. 허허허허.] [딸들도 그래도 지 아빠가 요리하는 거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서 다행히 기본은 하지만 내 아내는 아직도 기본을 몰러] 차는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춥죠] [아가씨 오늘 오전은 이 도로 상황이 아주 최악이었어요. 추우니까 다들 차를 들고 나와가지고 오전에는 그냥 서 있었어. 이 택시가 날씨 영향이 아주 커요] [아 그랬구나, 전 오히려 지하철을 많이 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비가 많이 오거나 너무 추우면 택시를 많이 타. 근데 나도 추운 건 너무 싫어, 나도 택시 끌고 나가기가 싫더라고 근데 어떻게 해. 돈 벌려면 나가여지 허허허.] [네 고생이 많으셔요. 저 저기 1번 출구에서 세워 주세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달려 나가는 사람들, 꿈을 추억처럼 품고 사는 사람들, 꿈을 아직 찾고 있는 사람들, 저 하늘의 별처럼 너무 많다.


뼈와살들 놀이터 옆 건물 지하에 강의실이 있었다. 이름만 강의라고 부를 뿐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누드 모델 한 명, 그림 그리는 사람 스물에서 서른 명 정도, 조교 한 명. 1분 포즈 30분, 3분 포즈 30분, 5분 포즈 30분으로 진행되었고 중간에 는 10분씩 휴식 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에 들어가 누드를 그렸다. 모델은 말 없이 포즈를 바꾸고 밝은 강의실 안에는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음 악이 가득 찼다.


누드 모델은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만 오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 고, 흉터나 점이 많은 사람, 풍만한 사람, 깡마른 사람 등등 다양한 모델이 있 다. 한국에서 자라 오며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 예쁘거나 날씬하지 않은 몸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모델들 을 보며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배가 나와도 주름이 많아도 털이 있 어도 밝은 불빛 아래 당당히 드러낸 몸들은 매력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 로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날것인 인간의 몸이 뿜어내는 제각각 의 언어가 있는 것 같았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거울을 보며 내 몸을 그려 보았다. 아직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나에게도 고유한 몸의 언어가 있을까. 어 떤 말을 할까, 내가 가진 이 살과 뼈들은.

글,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11_ 낭만 옥탑방

옆 사람 인터뷰

딸랑. 대부분의 새로운 연락은 나를 교묘히 존중하는 듯하다가 새로운 휴대 전화 혹은 보험, 그도 아니면 송금하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래서인지 카카오톡 창에 뜬 ‘정규문’ 이 세 글자가 참 반가웠다. 열 살 차이 나는 친구. 3년 전 그는 1_ Granz Globewalker, 여행하며 음악하기 단편영화 상영회에서 자신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거의 삼 년 만에 보는 거예요.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

영화를 찍고 싶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한 번은 올 거예요. 지

해요.

금은 이렇게 촛불 켜 놓고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게 더 좋아요.

�� ���� ��� ��� ���� ���� ���� ��� ����� ��� 밤�� ��3년 ��� ����만났 결 2년은 ����� 재미없게 1년은 재밌게 지냈어요. 전 우리가

오히려 지금 하는 일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하

��재미없게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출근하고, 어디에 일하고, 가도 있퇴 을 때도 지내고 있을 때였죠.

고 있나요?

것은 시공간이쓸 근하고는집에 와서사람이요, 인터넷 하고,사람으로 게임 하고.펼쳐진 나는 시나리오를 거야, 영화를 음악을 만들 거야 하고또한 실천 었다. 만들 내가 거야, 만났고 만나고 있는생각만 사람들

IPTV 이용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전공은 다르

은 못 했어요. 제가여행지의 중점적으로 두었던 가치는 당장이야기하 하루에 마 아름다운 하나였다. 여행을

지만 지금의 일이 잘 맞아요. 그래서 따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주치는고사람들의 평가였고 11시, 돌아오는 12시 퇴근이 다반사였죠.생사 싶었으나 한국으로 비행기에서

최근에는 관련 자격증을 땄어요. 또 제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

실 그 당시에는 회사에서의 성취를 작정이라고. 나의 성취로 생각할 수있 각했다. 사람을 여행해볼 /

한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 만족스러워요.

을 것 같았고 재밌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 고 환경의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1년 전 처음으로 부모 님의 품을 떠나 옥탑방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게스트하우스에는 다양한 삶이 오고갔다. 그

랜트는 미국에서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영상학을 전공하고,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 행을 온 사람치고는 그의 하루가 꽤 정적이었 어요. 3년 전 기억하는 바로는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 그는 공용 공간에서 편의점 음식을 먹거나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한 것 같아요. 비틀즈의 전곡을 모아 놓은 교본을 옆에 두고 기타를 치고는 했다. 반려자와 다름싶 안정적인 수입원을 구하고 나서내가 하고그의 싶은 일을 계속하고 기타를 두 시나리오 동강 내기 전까지는(당분간 었어요.없던 하지만 그 이후에 하나 쓰지 못하고, 음악 하 Hey 못했어요. Jude를 배우겠다고 설칠 일은 없으리라). 나 만들지 그렇게 이야기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제

옥탑방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옥탑방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막상 오고 보니 함께 즐길 사 람이 없었어요. 용기 내어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친한 사람 들이 생기면서 지금은 여러 사람들과 즐거운 생활을 공유하고 있어요. 옥탑방에서 밥 먹고 술도 마시고 노래하고 기타 치고. 또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을 때는 혼자 나와서 음악 틀어 놓고 구름을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밤에는 별과 달도 보 비틀즈와 만큼이나 그의 노래를 고.는이런 게 삶의 로드리게즈 즐거움 중 하나예요.

좋아한다.

모습이 실망스러워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있어

3년 전 들려주었던 기타 연주가 기억나요. 음악을 만들던 장

요. 제가 3년 연락한 것도 그런그가 이유예요. 원래는 어릴만에 때부터 사람들은 의사가 될 영화제 것을

비도. 기타는 언제 배운 건가요?

에 가거든 연락하고 6살 싶었죠. 반대로 업으로 삼았으면 힘들어 기대했지만 때부터 그는 음악을 꿈꾸었다 서 그만뒀을 거예요. 부끄러운 나는 그 일을 그렇게 고 한다. 소망은 오랜고백인데 시간 그대로였으나 대학 좋아하지 않았던 거예요. 가짜였죠. 경제적인 문제였지만 실 을 졸업한 후에야 그는 온전히 음악을 하기로 제로 부딪혀 보지 않고 바로 취업한 거예요. 사실 그렇게 부끄 마음을 먹었다. 러운 일도 아니에요. 하고 싶은 건 많았는데 다 업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깨달았어요. 하지만 여전히 영화가 좋고, 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 직접 녹음한 아홉 건 찍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곡이 담긴 CD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요즘 나

조금 더 오래 머물 줄 알았는데 시드니에 갔 어린 음악 과목을 싫어했는데 다. 시절에는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중학교 2학년 때 같 은 반 친구가 기타를 들고 와서 연주하는 걸 봤어요. 그때 한 마디로 뻑이 갔어요. 하하 바로 기타를 사서 연습했어요. 기타 나도 오래 있고 싶었지만 관광비자만으로는 그 도 피아노 작곡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고 다 독학이었어요.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지금은 악기도 장비도 많이 갖추었죠. 지 시드니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비행기

표를 사기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일하면서 이렇게 여가 시간을 즐기기가 쉽지 않은데, 일과

수박 주스도 만들어 먹고, 텐트도 치고 놀고. 마음 맞는 친구

개인의 시간이 균형 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들을 만나서 기뻐요.

아이러니하게도 궁지에 몰리니까 지금의 생활이 갖춰졌어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가는 것 같아서, 또 그 삶이 여유 있고

요. 힘든 시간이 있었기에 환경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집에

즐거워 보여서 보기 좋아요. 또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있으면 괴로워서 밖에 나가고, 이전의 나를 잊어버리니까 변

지 궁금해요.

화가 가능했어요. 일로 인해 지쳤을 때는 나는 단거리를 달 리는 게 아니고 마라톤을 하는 거라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더 재밌게 살고 싶어요.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미 다 해

그래서 일하는 시간도 조절하려고 하고 제 삶을 더 즐기려

버려서 이제는 옥탑방에서의 생활 말고 다른 거. 여기서 글

고 노력해요.

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에서 결과를 내고 싶어요.

옥탑방과 친구들이 지금 생활의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날들이 삶의 큰 활력

겨울치고는 비교적 따뜻한 공기 덕분에 옥탑방 풍경을 누릴

이 된 것 같아요.

수 있었다. 몇 개의 촛불과 음악, 담요. 그는 종종 노래를 부 르고 기타를 연주했다. 밤하늘에는 얼룩말 무늬의 구름이 흐

새로운 친구를 사귈 기회는 회사 입사 때가 마지막이었어

르고 그 사이로 작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사실 서로의 안

요. 지금의 동네에 이사를 오고 소모임이라는 앱에서 연남

부에서 공통된 부분은 그간 느낀 ‘우울’이었으나 이내 닿을

동 어쿠스틱 라이프라는 모임을 보고 나가게 됐는데, 동갑

수 있는 지점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러니까 꼭 이 밤에

내기가 많은 게 좋았어요. 동네에서 같이 술 마시고 금세 친

빛나는 옥탑방처럼!

해져서 같이 짜장면 시켜 먹고 밤새 기타 치고, 여행도 가고,

글, 정리 : 이내


건축이 좋아. #27. 오겡끼데쓰까. 雪國建築탐방. aoikasa

お元気ですか。 아리가또, 사요나라, 스미마셍과 함께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본어. 영화 ‘러브레터’에서 ‘잘 지내냐’ 묻는 저 인사는 왠지 언젠가 한 번쯤은 눈이 가득 쌓인 설원에서 외쳐 보고 싶어지는 말이 아닐까. 진심을 다해, 잘 지내냐 묻고 싶은 그 인사.

소녀 ‘후지이 이츠키’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도로, 메르헨 교차로 (높은 건물은 오르골당)

겨울의 끝에, 유독 (서울에는) 눈이 적었던 이 해를 기억하며, 홋카이도의 몇 몇 건축물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러브레터의 그녀가 일하던 오타루의 우체국 건물, 그리고 하코다테의 붉은 창고들.

나카야마 미호의 직장, ‘일본우선회사 오타루지점’ 오타루는 1872년 최초로 부두를 건설해 항구도시로서 북해도 개척의 시작점이 된 도시이다. 1880년에는 삿포로와 철도가 개통됨으로 홋카이도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게 된 오타루(그러니까 서울과 인천과의 관계랑 비슷한 것이다)에서 해운, 즉 배를 이용한 무역의 중요성은 절대적이었고, 배로 물품을 실어 나르는 회사인 우선(郵船)회사의 번영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듯 하다. 영화에서 우체국으로 나오는 이 장소가 사실은 ‘郵船’ 회사라 하니 그 장소성도 어느 정도는 유사한 듯 하다. 아무튼, 그 고풍스럽던 기억의 장소를 찾아가 보았다. 눈이 3m가 넘게 와서 걷기조차 어렵던 길을 걷고, (결국 중간에 택시타고) 걸어 도착.

익숙한 계단. 러브레터의 그 장소이다. 일본우선회사 오타루지점 포치

러브레터에서 소녀 후지이 이츠키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오르골당 앞 거리에는 관광객이 엄청


많았는데, 이 곳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오타루 눈등 축제기간이라 호텔이 전부 만실일 정도로 관광객이 많은 데도 말이다. 덕분에 가이드상의 가이드를 홀로 받으며 우선회사 관람

이 건물은 아주 두꺼운 석조벽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서양 고전주의 건축이 일본에 소개되며 다쓰노 긴고(오타루에는 그가 설계한 일본은행 오타루지점이 있다.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조선은행 설계한 사람!)와 같은 일본의 제 1세대 건축가들은 석조를 이용하여 (유럽에 있는 건물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아주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축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관공서와 은행, 무역회사 등 자본이 많고 근대적 기능을 담고 있는 건축물들로 사용되었다. 이 우선회사 오타루지점의 경우 19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신치지로 라타테라는 공부(工部)대학교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다. 중앙의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되어 있어 권위적인 인상을 주는 이 건물의 지붕에는 프랑스에서 자주 사용되던 망사르 지붕이 있으며, 양 옆으로는 도머창(지붕 위로 살짝 튀어나온 뻐꾸기창 같은 창)이 나 있어 대칭성을 더해 준다.

(좌: 다쓰노 긴고 설계, ‘구 일본은행 오타루 지점’ / 우: ‘구 일본우선회사 오타루지점’)

이 곳의 2층 회의실에서는 러일전쟁 당시 양국 대표가 국경문제로 회의를 하고, 그 옆의 귀빈실에서는 축배를 들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는 당시 우선회사의 내부를 거의 재현해 놓았는데, 이 곳에 인테리어로 사용된 재료들이 기가 막히다. 이탈리아산 수제 이중 유리창, 미국산 스틸셔터, 일본산 긴카라카와시(金唐革紙, 양가죽에 금박을 박고 문양을 새긴 뒤 니스를 칠한 유럽식 내장재처럼 종이를 이용하여 만든 일본식 벽지,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기 시작하며 생산), 이탈리아산 레이스 커튼 등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거의 최고급 재료들로 내부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1층은 영화 속 나카야마 미호가 일하던 바로 그 장소인데, 층고가 매우 높은 탁 트인 공간에 책상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을 당시의 전구가 달려있는 그 높은 1층은 20세기 초 오피스 공간, 실의 구분 없이 동일한 책상들이 연속적으로 놓여 있는 그 모습을 상상하게 해 준다. 이렇게 1층을 높게 만드는 건 20세기 초반 건축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특히 사무 공간은 이렇게 매우 높은 층고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20세기 초반 석조 건축물들도 대부분 1층 층고가


매우 높다. 화폐박물관으로 쓰이는 조선은행 건물이나 인천이나 군산의 옛 은행 건물들에 가 봐도 마찬가지 특징들이 나타난다.) 1층의 한 구석에는 금고실이 있는데, 금고실 중간에 (사람의 어깨 높이 정도?) 문이 하나가 나 있는 게 독특하다. 왜 문이 저기 있냐 물으니 홋카이도는 워낙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기 때문에 눈이 많이 쌓여서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경우, 금고실의 문을 통해 나가야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긴, 내가 방문했을 때도 도로 양 옆으로 내 머리보다 더 높이 눈들이 쌓여 있었으니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좌: 1층 업무공간 / 우: 2층 회의실)

금고실의 작은 비상문 외에도 이 곳에는 설국이기 때문에 가지는 건축의 특징들이 많이 발견된다. 75 츠나 되는 두터운 석조벽, 단열효과를 위해 설치된 이중 유리창, 외기를 막기 위해 철제 셔터를 사용했고, 벽의 냉기를 차단하기 위해 긴카라카와시를 내부에 사용했다. 마치 눈 속 요새처럼 느껴지는 이 건물, 눈 덮힌 추운 외부와는 달리 햇빛이 들어와서 수제 유리에 비취면서 만들어내는 빛의 질감과 주변의 모든 것이 차단된 듯한 따스한 분위기가 내부에 스며들어 있다. 영화 속 나카야마 미호가 입고 있던 두터운 스웨터의 포근함이 느껴지던 장소. (햇살은 따스하지만 워낙 층고가 높고 큰 공간이기에 실제로 내부는 꽤 춥다.) 일본우선회사 오타루지점은 20세기 초 서양의 문물이 그대로 들어오던 오타루의 부귀와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이자 혹독한 추위를 버텨내기 위한 건축적 대응을 잘 보여주는 장소이다.

(좌: 수제 유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 / 중간: 가죽처럼 보이는 진짜 금이 새겨진 벽지 / 우: 에디슨 전구)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리리카의 오빠 모토가 살던 하코다테, 카네모리 창고군 그다지 유명한 소설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소설이 있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바로 그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사랑을 주세요’. 하코다테는 ‘사랑을 주세요’의 참 좋은 오빠 모토가 살던 도시이다. 일본 최고의 미항(美港), 일본의 나폴리라 불리는 하코다테가 한 눈에 보이는 하코다테 로프웨이의 케이블카 승무원으로 일하던 소설 속 주인공을 찾아 떠난 여행. 그 곳에서 카네모리 창고군이라는 매력적인 건축을 만났다.

하코다테 역시 오타루와 마찬가지로 홋카이도의 주요 무역항이다. 홋카이도에서 오타루가 북항, 하코다테가 남항의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현재는 오타루에서 삿포로, 삿포로에서 하코다테가 모두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삿포로에서 하코다테는 바다가 보이는 해안선을 따라 기차가 달려가니 겨울 바다와 겨울 설국의 풍경 모두를 감상하고 싶다면 이 열차를 타길 강력히 추천한다. 매우 아름답고 살짝 추우며 꽤나 비싸다.

삿포로-하코다테 가는 길 풍경

카네모리 창고군은 하코다테의 항구 옆 창고들을 개조하여 상점과 미술관, 결혼식을 위한 교회 등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유독 홋카이도에는 옛 산업시설들을 개조하여 새로운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삿포로의 맥주 공장을 활용하여 만든 삿포로 팩토리 쇼핑몰, 그리고 하코다테의 카네모리 창고군 등이 모두 이러한 예인데, 이는 산업과 항구가 발달했었던 홋카이도 삿포로 비어 팩토리 쇼핑몰

지역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필요가 없어진 시설들을

없애지 않고 문화시설로 변용하여 오히려 산업도시/항구도시를 관광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한 예들이라 할 수 있다. 일본우선주식회사 오타루지점과는 달리 기능에 충실한 건축이기에 석재와 같은 고급재료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화려한 장식도 없다. 그저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들고 지붕은 목재 트러스로 짜 올린 단순한 박공지붕일 뿐이다. 내부는 창고이기 때문에 텅 비어 있으며 설비도 단순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붉은 벽돌의 창고 건물들이 쭉 늘어선 풍경은 이 도시가 간직한 시간의 기억들을 품고 누군가에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누군가에는 이 도시의 역사를 이야기해주며

그 자리에 서 있다.

한 때는 하코다테 항을 드나들며 세계 곳곳으로, 일본 각지로 전해지던 물품들이 있던 장소가 지금은


세계 곳곳과 일본 각지에서 방문한 관광객들로 넘치는 장소가 되었다. 창고이기 때문에 방습과 저장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을 터. 그래서 창고 안에는 외부로 향한 개구부가 최소한이다. 창호도 거의 없고, 아주 두터운 문들만 곳곳에 있을 뿐인 이 곳에서는, 그래서 그 내부에 들어가면 극장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도 든다. 두텁게 쌓인 흰 눈과 대조되는 붉은 색의 창고,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듯한 이 곳 역시 눈의 나라의 건축이다.

(카네모리 창고군: 홋카이도에서 이 정도 눈과 눈보라는 기본!)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과 인천 아트플랫폼’ 이 도시들과 건축물들을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도 든다. 바로 오타루, 하코다테와 많이 닮은 도시, 인천. 인천에 가면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과 물류창고들을 개조하여 미술관 등으로 이용하는 인천 아트플랫폼을 만나볼 수 있다. 이전같으면 당장 부수고 새롭게 지었겠지만, 다행히도 언젠가부터 산업시설을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면서 인천의 통운회사 창고들은 인천 아트플랫폼과 근대문학관으로 변용되었다. 역시나 붉은 벽돌과 목재트러스로 만들어진 단순한 박공지붕으로 만들어진 이 창고들에는 극장도 들어가고, 미술관도 들어가고, 문학 전시관도 들어가면서 인천의 새로운 명소로 거듭났다. 하코다테의 카네모리처럼 눈쌓인 풍경을 보긴 쉽지 않겠지만, 전시도 좋고 건물과 공간도 좋으니 인천 차이나타운을 방문한다면 꼭 들려보길 권한다.

(좌: 인천아트플랫폼 / 우: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은 오타루지점처럼 크진 않지만, 더 앞선 시기인 1888년 건립된 건축물이다. 일본우선회사는 인천의 해운업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최근까지도 해운회사의 사무실로 이용하다 현재는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로 이용중이다. 사무실이기 때문에 내부를 들어가볼 수는 없으나, 외부에서는 둘러볼 수 있다. 1층 규모로, 조적벽에 노란색 타일을 붙여 만든 작은 건물이나 중앙의 현관포치에 작은 박공 지붕(마치 그리스 신전과 같은 느낌의 지붕장식)을 하였으며, 양 옆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19세기말~ 20세기 초 한국에도 도입되었던 서양 고전주의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코다테 로프웨이에서 바라본 풍경. 눈 속에 파묻힌 도시는 생각보다 많이 아름답다)


경 계인

3화.인식편 : 현실부정과 신용이 만났을 때

12월의 어느 날 인디영화 ‘거짓말’을 보러갔었다. ‘태양은 가득히’처럼 리플리증후군1) 을 다루는 영화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몇년동안이나 나를 괴롭게 하던 습관과 이별하기 위한 의식으로써. 영화 ‘거짓말’의 주인공은 리플리증후군을 다룬 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거짓말로 극복해보려다가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본인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 영화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껴질 것이다. 즉,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렇게 보이고라도 싶어한다. 신분상승을 이뤄줄 재벌남자 또는 상류층 여자주인공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요즘 드라마를 보라. 그것은 가장 취약계층이 보수당을 지지하는 불가사의한 이유일 수도 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공유하고 연대하기보다, 행복한 미래를 지향하며 성공한 계층과 정체성을 같이하고 싶어한다는 아이러니. 나는 리플리처럼 거짓말을 해서 타인을 이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경제적 상황은, 그 현실부정의 거짓말을 내 자신에게 반복했기에 생긴 재앙의 결과였다.

지인 중에 신용불량자로 파산신청을 한 사람이 있었다. 몇년동안 핸드폰하나 자기명의로 만들지 못해 내 명의를 빌려쓰는 등 힘들게 재기한 M. 그런 사람이 곁에 있었는데도 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 또한, 카드론(장기카드대출) 빚을 지면서도 미래에 대한 투자라며 합리화하고 안일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M의 최근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저축해서 신용이 겨우 생기자마자,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만들고 이전의 악순환에 다시 빠졌던 것이다.

나의 몰지각한 금전습관이 시작된 것은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해 신용카드사를 대폭 밀어주고 소득증빙이 안되는 대학 신입생들에게도 카드발급을 남용하던 시기다. 알바비를 가지고 대학생이 써봤자 얼마나 쓰겠나? 무보증금의 월세20만원 방과 고시원을 번갈아 살다가, 카드로 인해 한도가 주어지니, 생활이 풍요로워진 느낌이었다. 고지서를 받기 전까지는...... 사실 뒷감당이 힘들어서 그렇지 과소비는 달콤한 것이다. 물론 나와 집안의 경제적환경이 비슷했지만, 제 정신이었던 현명한 친구들은 열심히 학과공부에 매진해서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은행권에 취직해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바꿔나갔다. 정말 대단한 친구들이다. 그럼 나와 M이 저 현명한 친구들과 달랐던 점은 무엇일까?

*1) 리플리증후군: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뜻하는 용어. 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1955)라는 소설에서 유래되었다.[Ripley Syndrome, ─症候群] (두산백과)


5년전 불교캠프를 갔다가 불교 쉼터를 소개받았었다. 당시 알거지였기에 그곳에서 보증금을 모아 나오기로 결심하고 그곳에 들어갔다. 나오기 전엔 전원참석필수인 작은 강좌를 듣게 되었다. 재무설계사를 초대해서, 자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돈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들었다. 물론 다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1. 단순히 생각하면 과소비, 즉 번 것보다 많이 쓰는 것이 문제다. 2. 되도록이면 현금을 써야 돈을 쓰는 순간을 제대로 의식할 수 있다. 3. 신용카드 싸인패드는 사실 대출계약서 서명란이다.

그러니까 재무설계사의 설명에 의하면, 내가 그 지경에 이른 것은 이 세가지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14년말 금융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신용카드사들은 현금서비스의 명칭을 ‘단기카드대출’로 바꾸기로 했다. 현금서비스는 실질적으로 대출 상품인데도 일부 소비자는 명칭 때문에 대출이 아닌것으로 생각하는 사례가 많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알고보면, 가계부채가 심각하게 늘어나고 신용불량자가 늘어나 신용카드사마저 피해를 입게 되자, 방관하고 있던 정부가 뒤늦게 나선 것이다. 이쯤 되면 ‘신용’의 정체가 무엇인가 짚어볼 수 밖에 없다.

찰스 디킨스의 1860년작인 ‘위대한 유산’을 읽다보면, 주인공 Pip이 친구 Herbert와 함께 런던생활을 하면서 ‘신용’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실물카드는 없어도, 일정양을 갚으면 갚은만큼의 한도로 빚을 다시 낼 수 있다는 점은 지금의 신용카드와 유사해보인다. Pip 또한, Magwitch에게 받은 재산이 있음에도 젊고 부유한 Estella에게 어필할 ‘젠틀맨’이 되기 위한 목적에서 이 ‘신용’ 을 지나치게 굴리다가 호되게 당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결국 Pip이 그렇게 된 이유는 그의 ‘ 현실부정’이 ‘신용’과 만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결국은 모두 빚이지만, 대출과 신용은 다른 점이 있다. 대출은 빚을 지고 그것을 상환하는 단순한 과정이라고 하면, ‘신용’은 똑같이 빚을 쓰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써도 되는’ 한도라는 인식의 왜곡을 준다는 점이다. 결국 빚을 지고 갚는 ‘주체’로서의 의식이 사라지게 되고, 채워진 신용이 현재 자산인 양 착각하고 계속해서 빚을 지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이 신용 메커니즘이 1860년 당시부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그 것이 얼마나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과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옛날부터 그 시스템이 존재했다면, 그만큼 그로 인한 피해를 본 사람들도 많았을텐데 왜 이것이 폐지되지도 않고 이렇게 잘 유지되어왔을까? 이미 그로 인해 고생을 해 본 내 입장에서는, 그 원인을 생각해내는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즉, 대부분의 신용불량자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자제력이 부족해 그런 지경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대부분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니 그것으로 본 피해를 공론화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런 사태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빚을 진 본인에게 있다.

실제로 내가 쓰던 H카드 같은 경우 일시적인 상환이자율 우대를 명목으로 카드론을 공격적으로 마케팅했다. 당시 빚을 질 생각이 없었음에도,

‘여유자금을 마련해놓으세요’라는 코멘트로

시작되는 전화를 받고, 보증금 마련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내어 빚을 지기 시작했다. 제 1금융권도 아닌 제2금융권의 높은 12.9%이자를 내면서 결국 빚지라는 이야기인데, 감언이설을 해대며 빚을 지우는 카드사에는 책임이 없는 것인가? 결국 신용카드사는 소비자의 탐욕이든, 수치심이든 그들이 감정에 휘둘릴 수록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감정을

착취할수록 더 큰 이윤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년 9월에 이재명시장과 박원순시장을 공동은행장으로 출범시킨 주빌리은행의 대표 제윤경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금융을 ’약탈적 금융’이라고 비판한다. 그녀는 상환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빚을 권해놓고는 가혹하게 추심하는 금융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채무자의 도덕적해이만큼이나 금융업의 도덕적해이도 제대로 다스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빌리은행은 이미 금융업 회계장부에서는 손실로 털어내진 부실채권이 아직 개인채무자들에게만 추심되고 있는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그 부실채권들을 사들인 뒤 채무자들에게 7%정도만 상환받고 나머지는 탕감해주고 있다. 또한, 상환받은 7%마저도 다른 부실채권을 사기 위해 투입된다. 이 글을 쓰면서 뒤늦게 친구의 제보로 알게 되었는데, 실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떤 사람은 힘들게 갚고 어떤 사람은 갚지 않아도 되는 불공평한 상황과,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와 같은 문제는 계속해서 개선해나가야 할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법적인 상황이 조금 나아진다고 해도, 개인차원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자신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지 않아도 그것을 직시하지 않고 부정하면 망한다.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고 서야, 나를 유혹하는 ‘순간의 행복’이라는 거짓딱지가 붙은 빚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망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인 것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마음먹은 대로, 있던 모든 신용카드를 해지해버렸다. 내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었던 여주인공을 생각하며, 내 몰지각했던 과거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Daily Archive 오, 루씨! 오, 아가사!

시라쿠자(Syracusa, Sicily)의 순교자 세인트 루씨(St. Lucia/Lucy)의 시신은 기적적이게도 오늘 날까지 부패되지 않고 보존되어 왔다. 그녀의 시신은 1040년 시실리가 비잔틴 제국의 침략을 받 았을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빼앗긴 후, 제 4차 십자군 전쟁 때 다시 되찾을 수 있었는데 당시 베 니스의 총독이였던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는 자신의 고향 베니스의 세인트 죠르지오 마조레 성당(St. Giorgio Maggiore) 안, 세인트 죠르지오 수도원에 시신을 안치시켰다. 1280년 그녀의 시신은 세인트 루씨 성당으로 옮겨졌지만 1840년대 지금의 산타 루치아(Santa Lucia)역 을 만드는 과정에서 성당이 철거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시신의 주요 부분과 유물은 세인트 제레미아(St. Geremia) 성당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나는 산타 루치아역 광장으로 가는 길 에 제레미아 성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인트 루씨의 시신은 화려하게 조각된 제단 위의 유리 관 속에서 금색으로 장식된 붉은 가운을 입고 몸을 하늘로 향한 채 누워있었다.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유리관 바로 뒷편의 좁은 통로를 통해 시신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는데 미라화 되어 고동색으로 말라 오그라든 오른손 -왼손은 시라쿠자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과 두발만 이 노출되어 있었다. 시신의 크기가 놀랍게 작아서 마치 오래 지난 시간만큼 그녀의 몸도 함께 줄어든 것 같았다. 1513년부터 보르쥬 대성당(Bourges, France)에 보존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 은 섬세하게 세공된, 빛이 나는 은 마스크가 대신하고 있었다. 세인트 루씨는 장님과 눈에 관련 된 질병을 가진 자들을 위한 성인이다. 그녀는 보통 승리를 의미하는 종려나무 잎을 가슴에 안 고 두 눈알이 놓여있는 금쟁반 혹은 컵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 눈알들에 관해서는 다양한 전설들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가 그녀의 눈에 반한 구혼자를 단념시 키기 위해 스스로 눈알을 뽑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현지 구전에 따르면 뽑은 눈알을 접시에 올 려 구혼자에게 전해주었는데 그녀가 죽은 뒤 시신을 준비하면서 그녀의 눈이 새로운 눈으로 회 복되어 있는 기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신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이유로 혼인을 거부하자 화 가 난 구혼자는 당시의 로마제국 통치자에게 그녀가 기독교인이라고 고발했고 그에 의해 눈알 이 도려내지는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 그녀가 죽기 직전에 그에게 불행한 최후와 처벌에 대한 예언을 하자 화가 나 그 자리에서 경비대를 시켜 그녀의 눈알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 진다. 그녀의 이름 루씨가 빛을 의미하는 라틴어 “Lux”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은 눈이 사람의 영혼을 밝히는 것이라는 비유나 눈이 빛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시각 기관이라는 점에서 어떤 연 관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녀의 빼앗긴 시신을 다시 이태리로 되돌려온 총독 엔리코 단돌로가 장 님이었다는 사실, 그가 그녀의 시신 앞에 무릎을 끓었다는 기록 또한 나에게 의미심장한 인상을 남겼다. 워낙 기상천외하게 잔인한 방식으로 순교를 당한 성인들이 많기 때문에 고문의 방식과 미숙하게 못그려진 기괴한 눈알이 큰 충격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내가 제레미아 성당에서 시간


을 두고 관찰했던 것은 오히려 오늘날에 제작된 세인트 루씨에 관한 기념품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던 양초였다. 약 2-3cm 정도 높이의 타원형의 양초는 금쟁반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황색 의 토기 위에 놓여 있었고, 양초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두 눈 형상이 부각(relief)되어 있었 다. 가로로 눕혀진 물방울 모양의 눈알 주변으로 쌍꺼풀 혹은 눈주름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이는 테두리가 새겨 있었고 눈알 안에 눈동자, 눈동자 안에 동공, 그리고 그 동공 한 가운데에 심지가 박혀 있었다. 양쪽 눈 중심에 길게 늘어져 나온 하얀 심지는 뇌 속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는 시 신경을 연상시켰고, 마치 어떤 타격에 의해 시신경이 눈알을 뚫고 튀어나왔거나 눈꺼풀 사이로 잘못 삐져나온 비극적인 상황을 상상하게 했다. 형태가 새겨진 부분 주변의 여백은 볼륨감을 주 어 볼록하게 다듬어져 있었는데, 이 희한한 방식의 묘사는 그것이 의도되었는지 아닌지 모르겠 지만 실제 살집을 연상시키는데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나는 눈의 형태가 조악하고 실제감이 없 더라도 진짜 살 위에 새겨진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을 받았고, 불에 타는 심지를 상상했을 때는 내 눈을 꼭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기념품 진열대에는 그곳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가격만 대충 손으로 쓰여져 헌금이나 기부금을 내는 식으로 구매, 관리되고 있었다. 비싸봐야 3유로를 넘지 않는 양초에 이 정도의 공을 들인 것은 완전한 헌신으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성당을 나 와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의 중고물품 가게를 들렸다. 흥미로운 것이 있는지 구경을 하던 중 오 래된 책과 엽서를 무작위로 쌓아둔 한쪽 구석에서 브뤼겔(Bruegel the Elder)의 ‘장님 우화’(The Parable of the blind – The blind leading the blind)가 그려진 작은 엽서를 발견했다. 이 기막힌 우연은 세인트 루씨가 들고 있던 눈알이 브뤼겔 그림 속의 장님을 따라가는 장님들을 위해 준비 된 눈처럼 여겨졌고, 눈알의 크기와 기괴한 형상까지 모두가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루씨의 눈이 어둡고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의 눈을 밝혀줄 수 있을까.(*마태복음 15:14)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억지스러운, 그러나 그날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연결 고리들과 연상 작용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세인트 아가사(St. Agatha)는 시실리의 또 다른 성녀 중 한명으로 루씨가 태어나기 약 50년 전에 순교했다. 루씨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가사는 성인으로 공표되어 있었다. 세인트 아가사가 순교한 지역, 카타니아(Catania)는 시라쿠자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고, 세인트 아가사와 관련된 많은 기적이 행해진 장소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순례지가 되어 있었다. 루 씨는 그녀의 어머니 유덱시아(Euthychia)가 불치병에 걸려 낫지 않자 어머니의 쾌유를 소망하며 함께 카타니아의 세인트 아가사 무덤으로 순례를 떠난다. 기록에 따르면 순례 도중에 루씨와 세 인트 아가사의 만남이 이루졌다고 한다. 무덤 앞에서 기도하고 있던 루씨의 꿈에 세인트 아가사 가 나타나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 어머니의 병이 낫게 될 것이고, 자신이 카타니아의 성인이 된 것과 같이 루씨도 시라쿠자의 영광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꿈에서 깬 루씨는 어머니에게 세인트 아가사의 유품을 손으로 만지도록 했고 그렇게 하자마자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나는 세인트 아가사와 루씨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행적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예를 들어, 그녀들은 모두 순결을 잃게 하려는 로마의 통치자의 의도로 매음굴에 보내졌는데, 아가 사는 그곳의 유혹과 협박에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되돌려 보내졌다. 매음굴의 주인이었던 아프 로디시아(Aphrodisia)는 아가사의 확고한 믿음과 고집에 항복하면서 “그녀는 에트나(Mt. Etna)


의 용암보다도 더 단단한 머리를 가졌다. 단지 우는 것과 기도하는 것만이 그녀의 보이지 않는 남편이고, 그녀에게 조금의 애정 조차 기대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라고 통치자에게 전했다 고 한다. 루씨는 매음굴로 보내져야 할 자리에서 바위와 같이 무거워져 군인들과 황소들을 동원 하여 밀고 당겼는데도 불구하고 꿈쩍하지 않았다. 루씨의 눈이 도려내진 것과 같이 아가사 또한 같은 이유로 사지가 찢기는 고문을 받고 집게로 가슴이 도려내진 채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날 밤 감옥에서 천사와 함께 나타난 세인트 베드로(St. Peter)가 그녀의 상처를 낫게 해준다. 몇일 뒤 통치자가 치료의 전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리스도가 낫게 해주었다는 그녀의 대답은 그의 화 를 돋구게 된다. 결국 그는 숯불에 그녀를 태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 녀를 감싸고 있던 붉은 베일에 불이 붙지 않았고, 또 갑작스럽게 일어난 지진으로 목숨을 건지 게 되었다. 이후에 다시 감옥으로 보내진 아가사는 그 안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루씨 또한 불에 태워지는 형을 받았지만 그녀가 불에 타는 장작 더미 위에 올랐을 때 몸이 타지 않는 기적이 일 어났고, 결국 검에 목이 베어 죽게 되었다. 세인트 아가사는 유방암에 걸린 환자, 유모, 또는 종 제조자들을 위한 성인으로 세인트 루씨의 아이콘과 비슷하게 종려나무 잎을 가슴에 안고 잘려 진 두쪽 가슴이 놓인 그릇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둘이 함께 그려진 성화들에서 그들 의 모습은 마치 쌍둥이 자매같이 보인다. 내가 제레미아 성당에서 처음 세인트 루씨의 초상을 보 고 얼핏 세인트 아가사라고 착각했던 이유도 이 둘의 모습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타니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화산 폭발, 지진, 전염병과 같이 인간을 무력화 하는 재해들은 모두 세인트 아가사와 연관되어 있다. 지난 17세기 동안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과 기적을 통해 카타니아의 사람들은 세인트 아가사를 그들의 구원자로, 그녀가 그녀를 보좌하는 천사들과 함께 언제나 재앙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어왔다고 한다. 내가 다른 사건 들보다 흥미롭게 읽은 것은 1669년에 일어났던 에트나(Etna) 화산 폭발에 관한 기록이었다. 에 트나 산은 시실리 섬 전체의 지각을 점령하고 있고 유럽에서 가장 크게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 중 하나이다. 기록은 눈에 보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1669년, 사나운 화산 폭발이 있었고, 마을의 정상에서부터 땅 속의 크레이터까지 깊은 균열이 대지를 열었다. 재 기둥과 불타 는 돌이 하늘을 향해 뿜어져 나오고, 달궈진 철의 강 같은 핏빛 용암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어둠 이 카타니아를 뒤덮었고 참혹한 전율이 일었다. 이 오래된 마을이 완전히 용암의 바다에 둘러싸 여 굳어갈 때 그 검은 돌 더미 위에 남겨진 것이라곤 세인트 아가사 성당의 이중 돔이었다. 한 무 리의 수도사들과 추기경들이 그녀의 붉은 베일을 흔듦으로써 다가오는 용암의 흐름을 멈추게 하 려고 노력했지만, 용암은 약 20미터 높이로 솟아 마을을 뒤엎었으며 수도사들은 도망가기에 바 빴다.” -아가사가 순교를 당한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 에트나에 폭발이 일어났다. 헌신하는 마 음으로 도시의 사람들이 아가사의 석관을 덮고 있던 붉은 베일을 옮겨들고 기도자들에 둘러싸여 용암을 마주하며 행렬하니 마그마가 멈추는 기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물론이고 화산 중턱에 있던 마을조차 해를 입지 않았다. 카타니아 사람들은 252년부터 1886년까지 에트나가 폭발할 때마다 이 세인트 아가사의 기적을 기억했고 그것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믿어왔다. 1669 년의 폭발은 에트나 폭발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비극적인 폭발이었고 세인트 아가사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때이기도 했다.- 이어서 “이 사건 이후로 얼마간 세인트 아가사의 기적에 대한 믿


음은 빛을 잃었지만 오늘날 다시 되살아났다.: 기적은 바라는 자의 믿음이 충분히 간절하지 않 을 때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고 덧붙인다. 그리고 굳은 용암이 모두 파헤쳐진 마지막 세기 말에 세인트 아가사 교회 제단 탁자 속의 성유물함에 숨겨 보관되어 있던 그녀의 가슴이 발견되었다. 세인트 아가사의 가슴은 그녀가 순교한 이후 시신이 콘스탄티노플로 밀수되기 전까지 시실리에 조심스럽게 보관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이 불운한 여인 아가사는 그녀의 죽음을 조 급하게 기다리던, 심지어 그녀의 가슴이 세인트 피터에 의해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을 때 좌절했 던 열성적인 유물 사냥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9세기가 흘러 그녀의 시신이 카타니아로 돌아왔을 때, 사지의 근육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던 것과는 달리 가슴은 제자 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소문은 세인트 아가사의 가슴에 대한 더 큰 명성과 가치를 낳았고, 이 에 따라 유물 사냥꾼들의 그녀의 가슴에 대한 집착과 절도 행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몇 세기가 지난 뒤, 에트나 산 비탈의 작은 마을인 니쿨루시(Nicolosi)에서 가슴이 담긴 성유물함이 출토된 것이었다. 1998년에 쓰여진 작가 타시타 딘(Tacita Dean)의 세인트 아가사의 순교에 관 한 작업 에세이에 이러한 정보가 쓰여져 있다.; “이태리에 3쌍의 세인트 아가사의 가슴이 존재하 는데 첫번째로 가장 유명한 가슴은 베니스의 유물의 성소(The Sanctuary of Relics in Venice)에 전시되어 있다.” 타시타는 가슴들이 형태가 잘 유지되어 보존되어 있었지만 어쩐지 쪼그라들어 갈색을 띈 모습이 말린 무화과의 표면/외형 같았다고 썼다. 나머지 두쌍의 가슴은 각각 시실리 의 카타니아와 팔레르모(Palermo)에 보관 중이다. 베니스에 보관된 가슴이 오리지널이라는 많 은 증거와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시실리의 도시들을 주축으로 베니스에 보관되어 있는 가슴에 대한 진위여부에 대해 여전히 논쟁 중이라고 한다.

나는 베니스에 도착한 이후부터 타시타의 글에서 읽은 작은 정보만을 가지고 세인트 아가사 의 가슴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선 ‘유물의 성소’라는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이름을 가진 장 소를 찾지 못하는 첫번째 난관에 이어 베니스에서 세인트 아가사의 흔적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 웠다. 내가 찾은 세인트 아가사에 관한 유일한 것은 세인트 아폴로니아(St. Apollonia) 교회 안의 종교 박물관(Museo Diocesanp d’arte Sacra)에서 발견한 작은 성유물함이었다. 그 안에는 형 체가 불분명한 천과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뼈가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운이 좋 게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녀는 그 뼈가 어디 부 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했다. 또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유물의 성소’와 같이 유물 만을 모 아서 전시하는 장소는 베니스에 존재하지 않고, 성유물함/성유해함(reliquary) 또한 각각의 교회 안에 보존되어 있지 그것들을 따로 모아 놓은 장소는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만약 세인트 아가사의 가슴이 베니스에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들어본 적이 없다고, 내가 알 고 있는 정보는 특별전과 같은 일시적인 전시로 베니스에 잠시 옮겨 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중들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베니스 어딘가에 깊숙이 보존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도 한번 조사해보겠다고 하며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몇일 전 같이 작업실을 쓰던 이태리계 미국인 작가 세레나(Serena)가 베니스를 떠났다. 우리 는 그동안 같은 층을 쓰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언젠가 내가 세인트 아가사의


가슴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가 어린시절과 십대를 시실리에서 보내고 잠시 미국에서 살다가 지금은 시실리에 정착했다고 말해 주었다. 시실리는 이태리 안에서도 특이하 고 지역적 자부심이 강해서 시실리 섬 사람들은 절대 자신들을 이탈리안이라고 하지 않고 시칠 리안(Sicilian)이라고 소개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시 칠리안으로써 세인트 아가사를 당연히 알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2월마다 열리는 세인트 아가사 축제와 엄청난 행렬에 대해 말해주었고, 세인트 아가사의 유해는 화려하게 조각, 장식된 여인 형 상의 유해함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안에 보관되어온 이후로 가슴을 포함한 유해는 세상 밖으로 노출된 적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세레나는 유방암 가족력이 있어서 언젠가는 자신도 암에 걸릴 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고, 그럼에도 자신은 단 한번도 세인트 아가사에게 기 도를 한 적이 없지만 할머니나 어머니는 했을지도 모른다고도 이야기해주었다. 세레나는 떠나기 전날 나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쪽지에는 ‘아가사의 가슴을 대신해줄지 몰라.(could be substitute for Agatha’s breasts.)’ 라는 말과 함께 베이킹 레시피가 차례대로 빼곡히 적혀 있었 다. 그 레시피는 세인트 아가사의 축일을 기리기 위해 시실리에서 전통적으로 만들어져온 ‘Minni di Virgini’(Memory of Virgin) 라고 불리는 작은 케이크의 레시피였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포스트 프로덕션 Ⅰ 지난달 한 의류 브랜드의 2016 S/S 시즌 룩북 촬영에 참여했다. 내가 맡은 일은 촬영에 대한 기획과 후반작업 전체였다. 애초에 로케이션으로 기획된 촬영이었지만 예산 문제로 인해 다른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간이 세트를 활용한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처음부터 후반작업의 비중을 크게 둔 촬영인 셈이다. 가로, 세로 4미터씩 되는 출력물을 뒤에 설치하고 앞에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오브제를 배치했다. 컨셉이 휴양지라면 바다가 배경인 출력물을 뒤에 설치하고 선베드나 야자수 같은 실제 조형물들을 앞에 배치하는 형식이다. 합성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여러 제약을 고려해보면 달리 대안이 없었다. 이런 촬영을 기획해 보면 예산을 줄이는 것은 보통 후반작업의 몫이다. 예컨대 질이 좋은 소품들을 구비할 여력이 없다면 유사한 오브제를 구비한 뒤 촬영 후 그 부분만 합성한다. 촬영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최종 결과물의 절반에도 도달하지 못한 셈이다. 촬영 감독은 내게 리터칭 기술자가 최종 결과물을 내는 것이기에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는 절대 일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보는 한 장의 이미지는 진실이 아니다. 사진이 순간을 증언해 주던 시대는 종언을 맞았다. 로베르 두아노의 ‘시청 앞에서의 키스’가 낭만적 연출일 거라는 비아냥은 애초에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신으로 역전되어 버렸다.


포스트 프로덕션 Ⅱ 사진이 저장된 웹하드에 접속해 원본 사진을 내려 받는다. 섹션 별로 분류된 사진들 중 A 컷을 뽑아내고 다시 한 번 폴더를 정리한다. 디자인 방향이 정해지고 나면 후반 작업에 필요한 소스들을 수집한다. 이때 수집되는 소스들은 예산이 허락된다면 질이 좋은 스톡 이미지를 사용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로 구성될 것이다. 만약 원본 사진에 하늘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극적 연출을 위해 새로운 하늘로 교체될 수 있다. 동일한 배경이 반복돼 지루함을 유발한다면 풍경은 곧바로 단색 배경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렇듯 원본은 작업자에게 언제라도 교체 가능성을 가진 상태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원본에서 바뀔 가능성이 없는 부분은 없는 것일까? 사실상 옷을 입은 모델이 후반작업을 통해 바뀌기는 힘들다. 하지만 피부를 보정하고 이목구비와 몸의 형태를 다듬고 나면 이것을 원본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지점이 온다. 분명 동일한 피사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디지털을 매개한 후반작업이 부재했던 과거에는 짐작건대 후반에서 소화해야 될 몫들을 인력과 시간을 통해 힘겹게 메꿨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과 노고를 디지털을 통해 절감하는 대신 양적 팽창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는다. 불어난 디바이스는 창작의 시간보다 노동의 시간을 더 많이 점유해 버렸다.


예술의지 르네상스는 예술에 있어 Wollen(하려고 하는 의지)와 Konnen(할 수 있는 기술)을 구별했다. Konnen의 관점에서 중세 예술들을 보게 되면 발전하지 못한 것, 쉽게 말해 못 그린 그림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오늘날 르네상스 예술은 르네상스 예술대로, 중세 예술은 중세 예술대로 아름답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Wollen에 주목하면서 미적 평가 자체가 다원주의화된 것이다. 의지가 있으면 기술은 자연스레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 낙관론은 최근에 와서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심사위원은 ‘때로는 기술이 감정을 창조하기도 한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의지를 가진 후 기술을 찾았던 과거 방식과는 별개로, 오늘날 우리는 기술을 매개해 의지를 다지는 경우가 많다. 포스트 프로덕션이라는 ‘Konnen’은 작업 과정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원본을 가공하는 입장을 넘어 ‘파라 리얼리티’의 세계를 창조했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더 이상 이 세계의 것도,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⑴ 서양미술사 [진중권, 르네상스 이후의 비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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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2. 어떤 망망대해 글. exxx 거대한 벽을 마주하면 그것을 넘어갈 생각을 하거나 돌아가거나 어떻게든 해법을 찾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처음 하는 것은 아마 좌절일 것이다. 거창하게 시작한 1회를 계획했던 내가 그랬다.

‘아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 지인찬스! 하지만 이상할정도로 정보가 모이지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접점이 없는 키워 드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한국사회 두다리 건너면 모를 사람이 없다는데,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결 국 나는 혼자 도서관에 찾아가 검색을 통해 몇권의 책을 알게 되었다. 아래는 그 중 읽은 것들이다.

한국 장애인 사 : 역사속의 장애 인물 (솟대) 동정은 싫다 : 미국 장애운동의 역사 (한국 DPI 출판부) 장애학의 쟁점 : 영국 사회모델의 의미와 한계 (학지사)

정보가 모이지 않았고 막막했기 때문에 고른 책들 치고는 정말 운이 좋게도 나에게 필요한 순서대로 책을 골랐 다. <한국 장애인 사>는 조선시대 중심으로 역사속의 장애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장애가 있는 분들이 자 신감을 되찾거나 그 외의 사람들이 편견의 시선을 갖지 않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글들이 실려 있었다. <동 정은 싫다>는 미국 장애운동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2000년대 이전의 쟁점들을 다루며 현대의 법적 토대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그 사고의 근거부터 과정까지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해놓은 책이었다. <장애학의 쟁점 >은 그 다음 시대 그러니까 9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이르기 까지 그 다음의 문제들을 바라보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 지를 다루는 책이다.

책을 다 읽을 즈음 나는 장애와 관련해 기본적인 생각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고 이것이 단순히 한번의 주장이 나 인터뷰와 같은 사례를 다루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위의 책들에서 다룬 내용들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전환점이 될 이야기를 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실제로 내가 제기할 수 준의 질문이나 사람들이 궁금해할 이야기의 대부분의 위의 3권을 읽으면 얼추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면 내가 이 시리즈를 통해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은 다른 방향의 어떤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계속 해서 하고 있는 고민이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내가 쓰는 이 시리즈를 읽고 조금이라도 장애와 관련해서 생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면 위의 책들을 순서대로 읽어가면 도움이 될것이다. 정말로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생긴다면 지금 위의 책들 을 메모하여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딱 한권을 읽어볼 시간 밖에 없다면 <동정은 싫다>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사실 나는 이번 달에 왜 우리 주변에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지 실제로 그 수가 적은 것인지 아니면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있어서 외출을 꺼리는 것인지 혹은 단순히 생활공간이 달라서 잘 알아채지 못하는지 같은 이야기 를 해 보려고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경복궁 왼편에 자리잡은 서촌에 가면 상대적으로 많은 장애인을 만난다. 이곳에 가면 내가 쏘 다닌 어느 지역보다 높은 비율로 장애인(시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 모습이 무척 낯설고 신기 했다. 왜 유독 이 지역에서만 자주 마주치는 것일까? 논리적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곳에는 100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 맹학교와 서울 농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거주상의 편리함, 이동의 편리함, 지리적인 익숙함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있었다.

“왜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별개로 ‘어?’ 하며 당황하는 마음을 나의 마음을 알아챘다. 모든 것이 이론과 실제가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서촌에서 장애인들을 만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곳에 맹학교가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주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촌 인근에서 장애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있다. 이제 나는 서촌 일대에서 누구나 어디든 다닐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왜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장 애인들을 마주치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중이다. 매 3년마다 실시되는 장애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장애 인 출현율은 10000명당 559명이다. “5.59%” 통계적으로는 하루에 100명을 만나면 그중 5명 정도 이겠지만, 여러가지 변수를 감안하여 그 숫자가 더 적다고 하더라도 서촌 일대에서는 상대적인 체감이 될 정도의 마주침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곳들은 어떨까? 대학로나 명동, 신촌이나 홍대, 잠실이나 동묘 등등 사람이 많이다 니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쏘다녀보면 서촌 만큼의 확률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왜일까?

이 타이밍에 아주 낮은 단계의 상상을 한번 해 보자. 휠체어를 탔다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홍대 정문 광장에서 약속이 잡힌다면, 상수역이나 홍대입구 역에 휠체어를 타고 도착해 홍대 정문에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그 인 파를 제외하고라도 홍대입구역에서 홍대 정문에 이르려면 지표에서 와우산 중턱 높이까지를 올라가야 한다. 상 수에서 홍대 정문까지 간다면? 기울어진 보도블럭을 따라서 수십개의 턱을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 구간은 몇 해 전 보도블럭을 전면적으로 새로 깔았음에도 여전히 도로는 경사져 있다. 멀쩡한 나도 걷다보면 그 경사에 발목 이 시큰해질 지경이다. 만약 내가 휠체어를 사용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절대 홍대에 나오고 싶지 않을 것 이 다. 인파는 둘째 하더라도 길이 너무 안좋다. 그냥 누군가를 만나겠다고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평지에 가까운 신 촌을 약속장소로 잡고 말 것이다. 홍대는 그저 TV로만 보겠지.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부족하지만 서울에는 저상버스가 30%정도의 보급률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상버스를 타면서 휠체어를 본 일이 몇 번이나 있는가?

뿐만아니라 고속버스 중에서 저상버스를 본 일이 있는가? 기차는 어떻고? 서울 시티투어 관광버스는? 법적으로 장애인 이동권에 근거해 저상버스를 확보해야 하는것은 시내버스 뿐이고 그것도 가장 부유한 서울시가 2025년 이 되어서야 100% 교체에 이른단다. 이유는 기존 버스와 저상버스의 비용차이가 거의 2배에 이르기 때문. 그런 데 과연 저 시내버스 하나가 답이 될 수 있을까? 실제로, 최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해 대 규모 시위를 벌인 일이 있었다. 겨우 하나, 꼴랑 하나씩 느리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조사 결과를 덧붙인다.

보건복지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장애인의 70.5%가 한달에 5회도 외출하지 못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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