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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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나의현대예술순례 - 08. ‘겨울밤 0시 5분’ 즈음에 / 글. 사진. 황정운 영화로 읽는 시공간 - SPOTLIGHT: 저널리즘에 대한 단상, 그리고 마이클 키튼 / 글. 곡주대비 즐거운 편지 - 신용목 시인의 <만약의 생>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 글. 하얀병아리 택시를 탔다 - 마지막회. 남자는 말이야~ / 글. 사진. 고수진 작곡가 B의 노트 - 밤의 전파 / 글. Composer B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옆사람 인터뷰 - 12. 일상적 여행 /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 28. 하나하나 쌓아올린 (벽)돌 건축의 아름다움 / 글. 사진. aoikasa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경계인 - 실천편 : 심리치료 - 나를 공부하고 돌보기 / 글. 스푸트니크 Daily Archive - 거기에는 달콤한 틈이 있어 / 글. 모음. 김혜미 디지털 디아스포라 / 글. 김성연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3. 구두 닦는 군인 / 글. exxx

**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정말 친절히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


봄이 왔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한 봄이 왔습니다. 옷을 더 가볍게 입어도 되고 사람들 과 이야기를 하면서 걸을때 추위에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한동안 기우뚱 했던 월간이리가 요즘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 다. 다 늙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저는 한동안 허덕인다는 생각을 조금 했었답니다. 늙은 나무도 새싹을 돋우면서 한 해를 더 다짐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연과 추억을 만들어 가듯 저희도 그러기를 바랄 뿐 입니다. 부족한 면이 많은 잡지이고 사실 이걸 잡지라 부르는게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지 만 매번 찾아주시는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월간이리 공식 트위터에서 필진들의 트위터 계정 등을 홍보하고 있으니 언제든 @ postyri 를 통해 소식을 받아보세요. (페이스 북 페이지도 있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콘크리트 뿐이어도 우리는 나무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 입니다. 상상력을 잃지 말고 주름을 넘어 앞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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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현대예술순례 #08 ‘겨울밤 0시 5분’ 즈음에

글. 황정운

1_ 얼마 전 회사 근처 영풍문고 종로점에서 황동규 시인의 <겨울밤 0시 5분>을 읽었다. 현대문학에서 2009년에 첫 발간한 이후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복간한 모양이었다. 황동규…… 익숙한 그 이름에서 나는 J와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J는 나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5학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다 같은 중학교 입학 이후 수재로 소문난 J의 형에게서 과외를 받으며 J 와 급격히 친해졌던 것 같다. J는 나와는 다른 이과생이었지만 그답지 않은 유별난 점이 있었다. 다른 이들이 물리 공식을 외울 때,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와 같은 책을 읽고 내게 말해주곤 했다. J는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또래 이과생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취미였다. 나는 J의 그런 점이 참 좋았다. 문과생인 나조차 부족했던 문학에 대한 갈망이 그에겐 있었다. 그래서 J는 늘 무언가를 읽었고, 짧은 메모라도 그 기억을 단어로 담아내려 노력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J를 만난 것은 2004년 4월이었다. 졸업 무렵에 J는 서울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고 나도 대학생활로 정신이 없던 중 봄이 되었으니 술 한 잔 해야 한다는 말에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다. 허름한 가게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J가 주머니에서 구깃구깃 접힌 종이 여러 장을 꺼내 든다. 조금은 멋쩍어 하며 말이다. 사실 문학을 좋아했던 우리들은 그 날 만남에서 서로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급히 나오느라 미처 책을 준비하지 못했고, 대신 도서관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시 몇 편을 노트에 적어왔다는 것이다. 노트를 급히 찢어온 듯한 그 종이에는 <유성流星>, <겨울날 엽서>, <어떤 개인 날>, <저녁 무렵>, <박명薄明의 풍경> 황동규의 시 5편이 볼펜으로 적혀 있었다. 그때는 황동규 시인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황순원 작가의 아들이라는 것도, <즐거운 편지>로 유명한 시인이었다는 것도 생소하게만 들렸다. 그저 우리는 유명하다고 하는 시인의 괜찮아 보이는 시를 함께 읽고 서로에게 건넨다는 행위만으로, 이미 성인이 되었다고 자화자찬했던 것 같다. 어두운 가게 구석, J는 큰 목소리로 <유성流星>을 낭독했다. 나는 의대를 희망하는, 그러나 오히려 나보다도 더 문학을 사랑하던 J의 시 낭독을 참 감명 깊게 들었다. 지금에서야 그 밤의 그 모습이 얼마나 유치한 청년들의 자화상이었는지 부끄러울 뿐이나, 그 때 우리는 최고의 모던뽀이였다. 그게 십 여 년 전의 일이었다.


뜰 결에 말없이 서서 사소한 많은 일은 생각하다가 저기 몸 비비며 내려오는 유성 …… 그도 나에게 하나의 사소한 일로 될 때에 비로소 그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무심히 사랑해온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유성(流星)> 中


2_ 영풍문고에서 시집이 있는 문학 코너에 간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청계 방향 입구로 서점에 들어가면 왼 편의 인문코너나 오른 편 미술책 코너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가운데 정면에 있는 문학 코너는 사각지대였다. 사실 규모로 보면 서점의 한쪽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문학 코너가 압도적으로 방대했는데 말이다. 문학이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대학 입학이 경계선이었다. 대학이라는 사회에 진입하며 조금씩 현실의 세계에 눈을 떴고 그 때문에 문학에서 멀어졌던 것 같다. 사실 어릴 적 집에 있던 어린이용 세계문학전집은 정말 신세계였다. 세로 읽기 책이었는데도 <소공자>, <걸리버 여행기>, <해저 2만리 >는 책은 닳도록 재미있게 읽었다. 어릴 적 접했던 문학은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세계보다 더 멀고 높은 지평선을 알려주었다. 학교나 가족에서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문학 안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현실이 내 삶에 개입되기 시작하며 문학 속의 세계가 허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까라마조프’나 ‘안나 까레니나’가 결국 현실에 없는 사람들이고, 잠시나마 보였던 다른 세상은 책을 덮는 순간 책 속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현실과 문학을 분리한 순간 문학은 허구가 되었다. 허구의 세계는 쉽게 안착하지 못했다. 다시 영풍문고 문학 코너. 시詩 옆에 소설 쪽으로 가보니 2016년 제61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이 보인다. 대상은 김채원 작가의 <베를린 필> ……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나도 문학에 대한 존경과 글쓰기의 성실함을 믿던 때가 있었다.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작품인 김훈의 <화장>을 읽고 최명희청년문학상에 단편소설을 응모했던 것이 2006년 여름이었다. 작가처럼 200자 원고지에 글을 써야 한다며, 여름 내내 책상에서 원고지와 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 응모했던 단편 <초혼> 은 예심에서 탈락했다. “요즘 젊은 세대의 소설은 전체의 구성을 돌아보려 하지 않고 단어의 힘에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 대회에 응모한 작품 대다수가 그러했고 실로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간 작품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는 심사평은 나만을 지칭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때 나의 생각을 치열하고 성실하게 나의 언어로 표현했던 그 순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던 행복이었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나를 설명하는 나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황동규의 시집을 읽으며 십 여 년간 멀리했던 문학에 다시 흥미를 갖게 된 건 아니었다. 다만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문학 코너를 떠나지 못했던 건 ‘누군가는 이렇게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었구나’ 생각에 잠겨서였다. 그리고 나 역시 ‘쓰기’라는 행위를 존중했던 감정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 감정은 경건했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는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으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참았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겨울밤 0시 5분〉 中


3_ 십 년 전 J가 내게 읽어준 황동규의 <유성流星>은 1961년 시집 『어떤 개인 날』에 수록되었던 작품이다. 나는 1961년과 2016년 사이의 간격에 전율했다. 황동규 시인은 50년이 지난 이 추운 겨울밤 0시 5분까지도 계속 글을 쓰고 있었던 거다. 자신만의 생각을 글로 ‘쓴다’, 그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쓴다’는 하나의 행위에 무서울 정도로 성실하게 집착해 온 것이다. 어느덧 나도 서른 둘이 되었다. 대학 입학과 졸업, 직장생활로 이어진 지난 십 여 년,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글쓰기는 것이 정말 어색해진 거였다. 그건 세 가지를 의미했다. 어휘의 실종, 서사의 부재, 생각의 와해. 며칠 전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상투’라는 단어를 쓰며 속으로 아찔했던 적이 있다. 그런 단어는 최근 잘 쓰지 않던 것이었다. 오래 전 서사를 잊고 단어에 집착하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축축한 단어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1학년 ‘사고와 표현’ 교양 수업에서 나는 ‘치열한 삶의 흔적’ 이란 표현을 건방지게 적어냈다. 치열하지 못한 입이 치열함을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거짓으로라도 무언가를 쓴다는 순간의 기쁨은 순간 즐거웠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텍스트를 적어 나가는 이 순간이 즐거워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나를 나의 언어로 말하고 싶었던 거다. 생각하고, 써 내려가는 것…… 그것에는 Contemporary 혹은 Modern 이라는 구분이 없었다. 오직 쓴다는 그 행위와, 정제된 언어만이 삶을 관통했다. 나는 나에 대해 쓰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의 언어라고 믿어진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행복이 더 이상 희미 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분투였다. 최소한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고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몇 번의 붕괴와 재구성 이후에 살아남은 내 안의 타자를 나의 언어로 쓰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너는 무슨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나의 언어로 나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나의 아이덴티티를 더 명확하게 선언하고 규정하고 싶은 객관적인 정보가 아닌 주관적인 나의 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말하기보다 쓰기의 힘을 믿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정말로 쓰겠다고, 그것을 계속해보겠다고. 언젠가 곧 막차가 올, 마지막 겨울밤 0시 5분까지…… [끝]


SPOTLIGHT: 저널리즘에 대한 단상, 그리고 마이클 키튼

신문사를 배경으로 혹은 기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을 떠올리면 어김 없이 이어지는 이미지들이 있다. 빽빽히 채워진 책상, 그 사이를 가르는 파티션들, 커 피잔을 들고 좁은 통로를 휘젓고 다니는 지저분한 머리의 군상들. 그 들은 쉴새 없이 전화를 받고 서로가 목도했던 기막힌 사건들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1976년 작, <네트워크>의 오프닝 이지만 여타 다른 저널리즘을 주제로 한 영화 들의 시작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그 뒤로 펼쳐질 이야기도 다소 예상 가 능하다. 1. 한 기자가 비리를 제보 받거나 알게 된다. 2. 외압이 엄청난 이슈라서 본인이나 그의 가족이 협박을 받는다. 3. 갈등하지만 포기 하지 않고 취재를 진 행한다. 4. 결국 진실은 승리한다라는 해피 엔딩. 위의 4가지 조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화가 개봉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고, 그 ‘이슈’ 라는 것이 정치계 인사 비리나 살인사 건 등의 흔해 빠진 부류의 아닌 신부의 아동 성폭행, 그것도 싱글 케이스가 아닌 87명의 가해자와 200명이 넘는 피해자가 결부된 멀티플 케이스다. 영화는 보스톤 글로브지를 배경으로 하여 스포트라이트 라는 특종 전담팀이 이 케이스를 집중 취재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4명으로 구성된 이 기자들은 87명의 신부들 뿐만 아니라 사건을 은폐 하고 있었던 카톨릭 전체 시스템에 ‘묵 인의 죄’를 물음 으로서 여론의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퓰리쳐 상을 수상했다. 영화로만 보자면 배우들의 역량이 뚜렷이 드러나는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관전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배우들이 전문직종 의 배역 (PD, 기자, 프로그래머 등등)을 연기 할 때 그 직업이 가진 스테레오 타 입을 연기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 배우가 역할에 감기지 않고 그


이미지 만을 연기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예를 들어, 기자의 경우 시종일관 바 쁘고 신경질 적, 형사의 경우 염세적이고 거친 말투와 행동, 프로그래머의 오타 쿠 스러움 등 대부분의 경우 상당히 과장 되어 있어서 좀 보고 있노라면 인형극 을 보고 있다는 느낌 까지 든다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많은 캐릭터들 에서 그 런 경향이 보인다). 스포트라이트를 보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레이첼 맥 아담스 처럼 예쁜 배우 라면 칙칙한 분장으로 미모를 좀 덮고 키보드나 열심히 두드리는 역할일 것이고 마이클 키튼은 신경질 적인 편집장 정도로 나오겠지.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엄연히 ‘기자들에 관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캐릭터도 ‘기자’를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 들은 기자라는 직업을 가 지고 있는 한 인물을 연기한다. 영화 오프닝 중 한 중견 기자의 은퇴식 씬에서 마 이클 키튼 분의 작별 스피치에서 그는 실제 보스톤 글로브지 사무실에서 한 20년 은 묵었을 만한 일상적이고 정겨운, 평범한 직딩의 톤으로 동료의 은퇴를 ‘축하’ 한다. 지하철 7호선 보다 더 낮은 저음의 소유자, 마이클 키튼의 저음은 격양되지 않지만 모두가 주목하게 하고, 그가 읊조린 단어들을 되내이게 만든다. 그의 어떤 행동도 으레히 ‘기자라면…’ 떠올렸을 때의 이미지을 재현 하지 않는다. 개인적으 로 버드맨에서의 그의 연기 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포트라이트는 곁가지에 낭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관습 적으로 넣어야 할 장면이나 설정이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스톤 글로브의 새로운 편집장에 게 마이클 키튼 분이 싱글이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그렇다 할 뿐 왜 결혼을 하 지 않았는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혹은 왜 보스톤으로 전근 오게 되었는 지도 언급하지 않는다. 편집장은 영화에서 조연이지만 그가 성직자 케이스의 재 취재를 명령한 인물이기에 그의 역할이 작지 않음에도 작품 전체 에서 그에 대한 그 어떤 사적인 배경도 밝혀지지 않는다. 이는 다른 주요 캐릭터 들도 마찬가지 다. 우리는 그들이 나누는 작은 농담, (“일요일에도 사무실 나오면 와이프가 안싫 어해?”) 이나 결혼 반지 등으로 그들의 사생활을 가늠하지만 영화는 그 어떤 작 은 디테일도 유의미 하지 않은 것에 낭비하지 않는다. 그럼 스포트라이트에선 무엇이 유의미 한가? 바로 증언이다. 이 영화는 가해자 와 피해자, 그리고 이 사이 사실 관계를 정리 하는 기자들의 증언과 그 증언들 이 전달 될 때의 묘사가 중추를 이루는 영화다. 이번 호 기사를 쓰기 위해 ‘배신 (Betrayal)’ 이라는 원제의 원작을 읽었는데 아무래도 기자들이 쓴 글이다 보니 대화글 보다는 수치와 날짜 등의 사실 관계의 기록이 상당 부분을 차지 하는 르포 타쥬 (reportage) 의 형식을 따른다.

영 화 로 보 는 시 공 간


영화에서는 증언이 전달 되는 당시 상황이 디테일 하게 재현되는 데 가령, 성 추 행 피해자 (‘신성모독’ 이라는 단체의 단체장) 와 스포트라이트 팀이 처음으로 대 면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피해자를 통한 자세한 정황 서술 뿐 아니라 그가 왜 자신 이 했던 과거의 피해 제보들은 모두 묵살 당했는지 원망하며 증거 상자를 던졌을 때 이를 바라보던 마이클 케인의 복잡한 표정 (팀원들은 모르지만 그가 과거에 이 사건의 제보를 묵살 했던 본인이다) 을 짓는 등 등의 디테일을 세심히 그려진다. [영화 첫번째로 등장하는 희생자]

예전에 본 티비 프로그램에서 박찬욱 감독은 좋은 영화란 “관객이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영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같은 질문에 대해 필자는 “과하지 않은 영화”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트라이트 는 박찬욱 감독이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는 작품이다. 한 도시에서만 80명 의 성직자가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성추행 했다 는 충격 적인 주제로도 이미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지만 이 문제의식이 관객에게 더 가감 없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는 이를 단순 역할극이 아닌 사실 에 근거한 디테일과 미묘함으로 가득 찬 시각적 르포타쥬 (visual reportage) 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글. 곡주대비


즐거운 편지

글. 하얀병아리

신용목 시인의 <만약의 생>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어느 날 이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시의 한 구절이란 것만 기억이 났다. 순간 이 구절이 갑자기 내가 막연히 생각해온 그러나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세상의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 참 이 시의 제목을 생각해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꼭 기억해 내고 싶으면 늘 그렇듯이 머리의 양쪽 부분이 꽉 막혀 아려오는 느낌으로 생각날 듯 생각이 결국 나지 않았다. 어디서 읽었는지도, 누구의 시인지도, 제목에 들어간 단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을 답답해했다. 겨울날 이미 학기를 다 마친 학교 정문을 지나는데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 때는 끝내 시 제목을 찾지 못하고 지나갔다. 나중에 한참 지나고 나서 인터넷에 ‘지옥의 거울’이라고 쳐서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겹겹의 공간들>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시였다. 만약의 생 - 신용목(1974~) ​ 창밖으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달에 대하여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리고 있었다 그림자에 대하여 어느 정오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고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불을 끄고 누웠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내가 이 시를 처음으로 접한 <겹겹의 공간들>이란 책에서는 이 가장 맑아서 잔인한 거울이 새벽 5시 편의점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누구는 하루의 노동을 시작하고, 또 누구는 고단한 노역에서 해방되는 그 짙푸른 시간에도 편의점은 늘 한결 같은 조도로 삶의 고밀도 현장을 밝힌다. 거기 거울이 있다. 구석구석 벽기둥 마다 천장 높이로 서 있는 편의점 거울들은 감시의 사각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새벽, 자신과 자신의 선 자리를 가혹하게 대질시키는 무대가 된다. 편의점마다 없는 곳이 없는 그 거울들을 우리가 쉽사리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충혈 된 눈동자와 거기 비친 눈가의 주름, 핏기 없는 얼굴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시는 아무것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데도 읽고 나면 우리는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시를 한 걸음에 읽고 나면 한 쓸쓸한 사내가 떠오른다. 도시의 밤을 거닐고 있는 사내 말이다. 밤이니 당연히 도시는 어둡다. 어두운 도시를 혼자 말 건넬 사람 없이 조용히 걷는다. 사내의 조용한 걸음과 달리 도시는 시끄럽다.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가 그득하다. 앞 차를 재촉하는 소리가 소란스러울수록 그 소음으로부터 지친 몸을 보호하려는 듯이 사내의 침묵은 더욱 안쪽으로 침잠해간다. 지친 사내의 길은 당연히 퇴근길일 것이다. “지옥 같은 일상의 감옥, 사실 은유나 그 무엇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가상공간인 지옥이란 대게는 일상을 에누리해 부를 때 쓰는, 일상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겹겹의 공간들>의 설명처럼 이 시를 읽었을 때 시인이 선택한 너무 강렬하고 직접적인 ‘지옥’이란 시어는 나에게도 ‘지친 일상’과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일상이란 단어와 지옥이란 단어가 가진 무게가 다름에도. “창밖으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달에 대하여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리고 있었다 / 그림자에 대하여“ 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항상 그 장소에 있었던 달이 보일테다. 오늘만 뜬 달이 아니며 오늘 따라 특별히 더 밝은 달도 아니지만 그날따라 언제나 같은 거리에서 빛을 내는 달이 특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달이란 시어는 그리움이랑 종종 연관 지어진다. 달은 종종 ‘가족’이나 ‘연인’ 혹은 ‘유년시절’과 곧 잘 어울린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봤던 달, 연인과 함께 본 로맨틱한 달. 달에는 그런 추억들이 그득 그득 묻어 있다. 신기하게도 그런 달을 우리는 본 적이 없음에도. 어쩌면 시 속에 사내도, 그리고 시를 읽는 우리도 ‘달’이 가지고 있는 관념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왜냐, 사내도 우리도 단 한 번도 가족이랑 함께 달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니 그 때는 달이 하늘에 떠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항상 있는 달이고, 항상 함께 하는 가족인데 유난 떨 필요 없었으니깐, 어쩌면 연인이랑 그 흔한 데이트 장소라는 남산에 올라가 달을 본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런 로맨스를 바랄만큼 우리는 어려본 적도 여유로워 본 적도 없으니깐. 그렇게 바쁜 일상에 잊어먹기도 했고 잊어먹기 위해 바빴던 적도 있는, 어쩌면 과거의 있었던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기 보다는 과거에 없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바로 도시의 ‘그리움’처럼 시에는 묘사 돼 있다.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린다고 말한다. 달을 보게 한 건 달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도시의 시끄러운 경적 소리란 거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고/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는 질문은 직설적으로 직역하자면 “왜 그렇게 바쁘게 사냐” 는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개겨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라는 질문에 대한 자조적인 대답이 수납장이 있어야 할 집도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수납장이란 것이 무언가를 곱게 접어 보관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 꺼내 입는 용도라면, 그럴 여유도 없이 무엇을 준비하거나 무엇을 보관 할 새 없이 그저 시간에 쫓겨다니기 때문이란 대답으로 들린다. 바쁜 한낮에는 자신의 삶을 느낄 새가 없다. 아플 시간이 없어 아프지 못한다는 말처럼 생각도 느낌도 시간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녁이 돼 혼자 고요한 방에 있으면 모든 후회와 없던 자조도 몰려들어온다. 그런 마음을 시인은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그림자”로 표현한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천국이 있기에 지옥도 존재한다. 지옥의 거울은 마땅히 가장 맑다. 그래야 가장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그게 지옥의 형벌이다. 누군가는 천국을 볼 수 있게, 천국을 비추는 거울로 지옥을 만들었다고 말하겠지만. 때로는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천국의 존재 때문이다. 사내를 괴롭게 하는 건 이 바쁘고 외로운 도시의 삶이 아니다. 지금 이 도시의 ‘삶’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삶을 꿈꾸기에 괴롭다. 그는 지옥, 이 도시에서 천국, 다른 삶을 꿈꾸기에, 누구보다 절실하게 그릴 수 있기에 그가 사는 이 곳이 지옥이 된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란 이 구절은 절망스럽게 들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절은 가장 힘든 시기의 나에게 가장 힘이 돼주던 시였다. 내가 이 시를 소개하고자 했던 이유기도 하다. 이 시를 인터넷에 애를 써서 찾았던 때는 한창 취업을 준비로 바쁠 때였다. 당시 ‘사토리 세대’와 ‘달관 세대’란 신조어가 화제였는데 나를 힘들게 한 건 취업이라기보다는 ‘달관 세대’란 단어가 그 당시 나 자신을 표현하는데 너무 적합했기 때문이다. “달관세대”는 한 언론사에서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며 ‘안분지족’ 한다는 뜻을 지닌 일본의 ‘사토리(さとり)세대’를 현지화해 만든 신조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 애를 쓰다가도, 금세 나는 ‘왜 그래야 하지?’라는 상념에 사로잡혔었다. ‘행복하기만’하면 되는 거 아닌가. ‘행복’이란 게 그리 거창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이 오히려 나를 괴롭게 했다. 대학 입학 후 나를 가장 즐겁게 해주던 건 ‘먹방’과 ‘수다’ 그리고 ‘영화’였다. 친구들을 만나면 맛집을 찾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프랜차이즈 커피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게 내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 술 더 떠서 행정고시를 공부하는 친구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고시 공부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 야식을 먹으며 ‘아빠 어디가’ 예능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 그게 천국이라는 거다. 소소한 행복. 청년들이 바라던 삶과 그리던 꿈은 아니지만 청년들이 그나마 붙잡고 놓을수 없는 마지막 행복. 그 땐 ‘헬조선’이 아니라 ‘달관세대’란 단어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사회적으로는 지금보다 불만도 적었고 불평도 적었던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근데 그래서 그 시절이 더


낫다는 게 아니다. 나는 ‘달관 세대’란 말보다는 지금의 ‘헬조선’이란 말이 차라리 좋다. 그리고 그게 내가 저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라는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잘 맑다.” ​ 천국을 볼 수 있게, 천국을 비추는 거울로 지옥을 만들었다고 말하겠지만, 때로는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천국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제 ‘달관세대’ 대신 우리 사회는 ‘헬조선’이란 단어에 사로잡혀있다. 나는 ‘ 헬조선’의 청년들이 분노하는 데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보기 때문이라 믿는다. 절망은 포기다. 오히려 ‘ 희망’이 ‘분노’의 원동력이 된다. 꿈이 있기에, 누리고 싶은 삶이 있기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나는 사토리 세대나 달관 세대란 단어보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더 좋다. 천국을 꿈꾸지 못하기에 자신의 지옥을 인식 못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천국을 알기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지옥이라 인식하고 끊임없이 불만을 토하고 분노하는 게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청년 들이 힘없이 안주하고 무표정으로 있기보다는 분노하는 게 더 보기 좋기 때문이다. 내가 힘든 것도 모르고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보다는 혹은 힘든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더 나은 삶은 없다고 단정 지어 버리기보다는. 새벽 5시 적나라한 편의점 거울에 비춰질 내 얼굴이 두려워 고개 숙이고 얼른 사고자 하는 물건만 짚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래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마주보고 거울 속 얼굴에 깜짝 놀라기를 바라는 거다. 슬프지만, 너무 사실이라 슬프지만, 너무 적나라해서 슬프지만 그래서 위로가 되는 시라고 생각한다. 패배주의적인 것 같지만 그런 패배주의를 마주하는 용기가 그득한 시다. 내게는 <만약의 생>이란 시가 그랬다. 신용목 시인의 시는 아니지만, 비슷한 감동을 주는 시가 있다.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15초>라는 시집에 수록돼 있는 <청춘>이란 시다. 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의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때 분노에 복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 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줄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는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이 시를 읽을 무렵에는 또 “아프니깐 청춘”이라는 힐링이 유행했었다. 삐딱한 나는 그 때도 ‘힐링’일나 말이 싫었다. 그 때도 나는 심보선 시인의 이 <청춘>이란 시가 더 좋았다. 진짜 청춘이 이 시 안에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깐,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이 때가 청춘이라는 심보선 시인의 말이 더 와 닿는다. 상처는 받다보면 무뎌진다는데, 청춘은 아직 너무 여려서 작은 상처에도 너무 아프다. 그래서 작은 상처도 너무 아파서, 앞으로 이런 아픔을 어떻게 더 견디며 살지 라는 생각을 무수히 자주 하게 된다. 고통은 너무 강렬하고 자주 오는데, 그에 비해 행복은 너무 짧고 너무 드물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이라면, 앞으로 더 고통스럽다면 사람은 왜 살까? 그런 생각이 미래를 무섭게 만들었고, 미래가 무서워서 밤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막연한 공포에 울었던 적이 있다. 그런 내 앞에 아프니깐 청춘이다란 말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라는 시 구절을 나도 생각 했었던 것 같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난 적도 있었다. 길을 가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우울해서도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이유 없이, 햇살이 너무 밝을 때, 겨울바람이 너무 매서울 때, 버스에 앉아 학교로 갈 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방에 혼자 있을 때. 친구들이랑 헤어져 홀로 사람들 사이를 걸을 때 또는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을 걸을 때. 우을증이 아니다. 이 시를 읽으니 왜 나의 청춘이 그랬는지 알겠다. 그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였다. 정확히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나에게 ‘삶’이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서.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누군가는 삶은 견디는 거라고 말하지만, 청춘이 너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어서 견디는 것으로 격하되는 건 ‘삶’이 아니기에. 때로는 너무 소중해서 아주 조그마한 것도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깐 내게 청춘은 너무 소중했던 거다. 슬퍼하는 것도, 이 삶이 견딜 수 없는 것도 그건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아직 놓지 않은 내 안에 빛이 있기에 바깥의 어둠을 누구보다 뚜렷이 인지할 수 있는 거다. 그걸 잃지 않는 것. 그걸 잃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시가 아닐까. 그 추운 날 나는 <만약의 생>과 <청춘>이란 시를 읽고 한껏 가라앉는 게 아니라 한껏 들 뜬 기분을 느꼈다. 아, 나는 아직 내 삶이 소중하구나, 너무 소중하구나.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구나를 한껏 느꼈다. “그러니깐,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는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택 시 를 탔 다

마지막회. 노원-우리집 오늘의 이야기, [남자는 말이야~]

글, 고수진 (gomin19@hanmail.net)

이 글을 연재하면서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불친절한 택시기사님은 없었어?’라는 질문이다. 사실 따뜻한 이야기를 추린 것도 있다. 정말 불친절한 기사님도 종종 만난다. 처음 들어 본 종교인데 그 교리를 설명하시는 기사님, 엄청 무뚝뚝한 기사님, 담배 냄새가 시트에 절어 있는 택시, 현 정권에 대해 무한 찬양과 문재인 의원이 세상 둘도 없는 빨갱이라며 금괴를 찾아야 한다고 하시는 기사님, 엄청 퉁명스러운 기사님 (경리단길 어디로 가주세요라고 했더니 내가 어떻게 압니까? 라고 대답이 돌아와서 순간 너무 당황했었다. 내가 잘못 한 건가..), 가장 황당했던 기사님은 내 나이를 묻고 내 직업을 묻고 내 남자친구 여부를 묻더니 자기 동료 중에 정말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혹시 한 번 만나 볼 의향이 없겠느냐고 했다. 다만 나이가 좀 많다고 올해 39이라고......................... 정말 당장 내리고 싶었다. 동료애인가? 정말 무례하다고 느꼈다.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음악을 듣는 척 하던가 차라리 ‘스미마셍’이래버리라고 하는데 나는 그저 웃으며 아 예. 이런다. 나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미 난 이 택시 안에 있고 기분 나쁘게 목적지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내가 웃어넘기면 그만 이니까. 그러다 얼마 전 정말 최악의 택시 기사님을 만나고야 말았다. 오늘의 이야기 [남자는 말이야~~] 동생이 결혼을 한다. 내가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하하) 기쁜 마음으로 축가를 불러주기로 했다. 음악을 하는 지인이 있어 그의 작업실인 노원으로 갔었다. 노래 연습을 하고 술 한 잔 하니 시간이 12시였다. 대중교통이 다 끊긴 시간이라 부랴부랴 택시를 탔다. 일요일-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시간이라 도로는 매우 한산했다. 기사님은 나이가 있으셨지만 매우 훤칠한 외모를 가지셨다. 이국적인 코와 부리부리한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요일 밤에 조그만 여자애가 타니 궁금하셨나보다. [올 해 몇 살 이여?] [저 32입니다] [어따, 나는 중학생같이 봤어 그래서 놀랬지. 엄청 동안이네] [아, 감사합니다.] 사실 일요일 밤은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시간이다. 오전부터 시작 된 9시간 풀타임 강의 때문에 밤이 되면 그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사실 그냥 자고 싶었다. 하지만 기사님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노원역 근처에 내 친구가 술집을 하는데 여기 살면 5일장 포자 한 번 가봐. 어떤 택시 기사님이 추천해 주셨어요. 하면 잘 해 줄 거야] [그 친구도 참 젊었을 때 같이 징그럽게 놀러 다녔지. 엊그제도 같이 노래방에서 놀았는데 남자 둘만 노니 참 심심한거야 적적하고. 그래서 노래방 도우미를 불렀어. 한 80만원 썼나? 돈이 그냥 후루룩 나가 크하하하하, 미친 새끼 때문에 내가 술값이랑 도우미 값이랑 80 몇 만원을 썼어. 그런데 재미는 있어 확실히 하하하하]


[아가씨, 남자들은 가끔 이렇게 놀아줘야 대. 이해해야 해. 아직 결혼 안 했죠? 남편이 밖에서 가끔 스트레스 푸는 거 이해해야 해. 안 그러면 다 바람 나. 바깥생활 해 봤으니 아가씨도 알겠네. 여자들은 이 남자의 본능, 수컷의 본능을 몰라.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남자를 이해해 줘야 해. 그 본능을. 물론 늘 그런 곳을 가면 그 새끼는 싹수가 노란 거고, 아주 가끔은 괜찮다는 거지. 크하하하하하. 남자는 다 살면서 한 여자만 못 봐. 하지만 그게 도의적으로 하면 안 되니까, 이렇게 가끔 놀아 주는 거지.] 기사님의 큰 웃음소리가 마치 난 남자다를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순간 너무 거북해 졌다. 그리고 도대체 저 타당성을 가장한 헛소리는 뭐인가. 그러다 문득, 이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워낙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사니까. 남동생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세상이 변했지만 예전에는 여자들은 그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만 쓸 줄 알았지. 그러니 남자들의 이 돈에 대한 스트레스 책임감, 이게 엄청났다고. 내 아내도 그랬거든. 그러니까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 요즘에는 자기 소일거리 한다고 학교 급식 조리원 일을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거라도 버니까 다행이지 뭐. 아 근데 요즘 힘들다고 그만 둘까 말까 고민하더라고. 그래서 조금 아쉬워. 진짜 그만 두면 내가 더 일해야 하는데 크하하하하] 아, 저 기사님은 왜 저런 얘기를 내게 하시는 것일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좋은 일 혹은 힘든 일을 나누자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친목을 다지거나. 나는 오늘처럼 피곤한 귀가 길은 오랜만이었다. 아 피곤하다. 차라리 자고 싶다. 기사님은 쾌남의 웃음소리를 뽐내며 천호 현대백화점이 보이는 교차로까지 쉬지 않고 자신의 남성성과 남성의 본능을 연설하셨다. 차마 여기에 더 옮기지 못하겠다. 우리 집은 더 가야 했지만 현대백화점에서 세워 달라고 했다. 카톡으로 집에서 쉬고 있던 남동생을 졸랐고, 남동생이 이미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름값 3만원을 준다고 했다. 휴 내 신세야.) 남동생은 이 이야기를 듣더니 웃으며 그런 남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자기는 그런 남자는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난 다시 한 번 세상에 믿을 남자는 우리 아빠밖에 없다고 느꼈다. 끝


작 곡 가 B 의 노 트

Composer B 1악장. 야행성 인간들의 공간 돌이켜보면 나는 심야 라디오로부터 참 많은 음악들과 그에 어울리는 ‘분위기’라는 것을 배웠던 것 같다. 심야라디오에 대한 첫 추억은 아마 초등학교 3~4학년 때로 기억한다. 라디오는 음악세계에 갓 입문하는 단계에 있었던 나에게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24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수준과 장르별로 다양한 음악들을 틀어주는데다가 음악평론가나 연주자들이 출연해 작품과 연주에 대한 해설까지 해주고, 가끔 추첨을 통해서 음반이나

밤 의 전 파

연주회 티켓을 선물로 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특히 방학 시즌 나의 일과는 아침에 라디오를 켜는 것으로 시작되곤 했다. 특히 고정채널로 듣다시피 했던 KBS 1FM(지금은 ‘클래식 FM’으로 바뀌었다)은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배하다시피 했었다. 보통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는 유명한 소품이나 악장 단위로 발췌한 음악들을 틀어주었고, 오후 시간에는 매니아들을 위해 전곡 길이의 교향곡이나 협주곡 녹음을 들려주는 무거운 프로그램도 있었다. 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전설적인 연주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놀라운 연주를 자연스럽게 배워나갈 수 있었고, 동일한 작품을 서로 다른 음악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 녹음을 비교해 들으며 음악을 대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낮의 라디오 전파가 나에게 음악을 듣는 이성적이고 예민한 귀를 가져다 주었다면 밤의 전파는 나에게 ‘감성’을 가르쳐주었다. 사실 ‘감성’이라는 명사와 ‘가르치다’ 라는 동사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다가(그게 가르친다고 될 일이던가), 당시의 나는 그 ‘밤의 감성’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좀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참 유별난 초딩이었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현재의 나를 만들어 준 공로는 낮의 라디오보다는 밤의 라디오 쪽이 더 클 것이다. 심야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잔잔하고 웅숭깊은 음악들과 중간 중간 읽어주는 감성 충만한 글들은 그러잖아도 또래의 남자 아이들보다 몇 배는 예민했던 내 감수성을 건드리곤 했었다. 아, 그리고 심야 라디오에는 클래식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웃 채널로 돌리면 구수한 멘트와 함께-요즘 ‘아재스럽다’고 말하는 그 말투- 트롯을 주로 틀어주는 교통방송도 있었고 아이돌들의 댄스 음악이나 발라드를 틀어주는 MBC 라디오도 있었다. 사실 내 또래들은 아이돌이 나오는 라디오를 훨씬 많이 들었고, 공식 집계되는 청취율도 그 쪽이 훨씬 높았겠지만 나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그들이 소수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치기어린 분류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마음이 든다. 단지 그 조각들이 크고 작고의 차이일 뿐, 그들은 전부 내 어린 날의 밤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벗들이었고 더불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위대한 선생님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2악장. 잠 못 들었던 이유 대학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한동안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특히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방송은 더더욱.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라고 해봐야 새로울 것도 없는데다가 해설을 곁들여가며 듣는 소품이나 단악장 위주의 음악들은 직업 음악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내가 들을만한 수준의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12월만 되면 산타클로스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두근거리던 아이가 산타는 더 이상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단지 돌아다니기에 불편한 날이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어른이 되는 것처럼-내게 있어 라디오를 멀리함은 그런 의미였다. 그러던 어느 해의 지루한 여름밤이었다. 아마 8월이었던가. 당시의 나는 끝이 없는 공부와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비슷비슷한 음악들에 몹시 지쳐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클래식 음악만을 위주로 들어온 탓에(가요를 아예 듣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레퍼토리의 한계를 넘지 못해서였을까. 아무튼, 무어라도 좋으니 좀 새로운 것을 접하고 싶었던 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평소엔 잘 듣지도 않던 MBC 라디오 어플을 스마트폰에 설치하고 있었다. 설치가 완료된 뒤 재생시킨 라디오에서는 매가리 없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 길고 지루한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내 몸이 기운다. 멀어진 마음, 이제와 아무 소용없는 말...1)“

길고 지루한 여름의 한 가운데라! 내가 갇혀있던 계절과 상황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찌르는 가사였다. 세상에 이런 음악이 다 있었다니.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 2시부터 4 시 사이의 시간을 무조건 그 방송을 듣는데 할애했다. 아무래도 심야 시간대에 나가는 방송이었기에 그들은 굳이 인기 있는 노래들만을 들려주려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노래들을 매일 밤마다 접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도 남았을 전설적인 가수들과 밴드들의 노래를 뒤늦게 배우기 시작했고, 영미권 팝음악과 한국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을 찾아듣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었다. 그렇게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는 동안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됐다. 내가 새로운 음악과 그 세계를 접하는 순간에는 늘 심야라디오가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밤의 라디오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되어주는 포탈과도 같은 곳이었고, 좁았던 시야를 넓게 틔어주는 멘토와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요즘도 나는 심야 라디오를 자주 찾는다. 그곳에 가면 전보다 더욱 많은 것을 알고 또 들어봤다며 뿌듯해하며 부리는 거만함을 깰 수 있어서 좋다. 누군가 말하길, 매너리즘은 늘 가던 곳, 늘 먹던 것 그리고 늘 듣던 것만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심야라디오가 그 매너리즘을 깨줄 수 있는 존재로 내 곁에 언제까지나 남아주기를 기도한다. 내가 음악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될 때, 그 길목 길목에서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존재로써. 1) 「별 수 없는 마음」by 이영훈



뼈와살들 몸에 남은 흉터들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있다. 이미 아물어 사라진 상처도 그러하다. 어떤 흉터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 성인이 된 뒤에는 다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데고 베이고 넘어진다. 애초에 상처가 생기는 걸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잘 아물도록 관리하느냐가 남은 숙제일 것이다.

글,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12_ 일상적 여행

옆 사람 인터뷰

내가 아는 언니는 자연 안에 있기를 좋아하고, 산에 가기를 즐기지만 정상에 오르지는 않는다. 다음을 위한 여지였던 것 으로 기억한다. 안부를 물을 때는 그곳이 한국인지 이탈리아 1_ Granz Globewalker, 여행하며 음악하기 인지 인도인지 혹은 남미 어디쯤인지 묻게 되는 효정 언니.

출퇴근이 자유로웠어. 연구 환경이 정말 좋았고. 이거 몇 밀리

여행이 삶을 이루는 것일까.

저거 몇 밀리 섞어서 이거 만들어라 이런 게 아니라 이때까지 는 이 정도의 결과를 내면 좋겠다 이런 식이야. 인턴인데도 자

얼마 전 다녀온 이탈리아 이야기를 듣고 싶어. 언제 갔다 언

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따로 주어졌어. 일

�� ���� ��� ��� ���� ���� ���� ��� 제 온 거야?

주일에 한 번 회의하는데 내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개인 과외

����� ����� ��� 밤�� �� ��� ���� 결

를 해주기도 하고.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조깅을 하고 아

12월 말에 가서 2월 초에생각이 왔어. 이탈리아 도시인 모데나 �� 사람이라는 스쳤다. 북부 어디에 가도 있

침을 해 먹고 킥보드를 타고 일을 하러 나갔어. 사람들이 자

에서 지냈어. 밀라노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시공간이 도시인데 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으로 펼쳐진 발사믹었다. 식초로내가 유명해. 남자친구랑 토리노라는 만났고 만나고같이 있는 사람들 도시를 또한

전거를 많이 타는데, 킥보드도 정말 많이 타. 나도 남자친구

여행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새해를 맞았어. 와인 한 병이랑 종 아름다운 여행지의 하나였다. 여행을 이야기하 이컵을 가져가서 사람들과 춤추고 소리 지르면서. 춤이 좀 웃 고 싶었으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 기고 오그라들어서 나는 못 췄지만. 우리는 여행을 가면 그 나 각했다. 사람을 여행해볼 작정이라고. / 라 그 도시의 특산물을 먹고, 그리고 박물관에 가는 걸 좋아

에 무료하다 싶으면 호숫가에 가서 태닝을 하거나 책을 읽어.

가 킥보드를 구해줘서 매일 이걸 타고 출퇴근을 했어. 퇴근 후 바비큐 시설도 있고, 공원 안에는 책 기부함이 있어. 자기가 안 읽는 책을 꽂아두면 다른 사람들이 읽는 거야. 그곳에서 책을 정말 많이 읽었어.

해. 토리노의 음식도 박물관도 좋았어.

게스트하우스에는 다양한 삶이 오고갔다. 그 남자친구가 이탈리아 사람이야. 남자친구를 보기 위한 여행 랜트는 미국에서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이었구나.

항상 여행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언니는 앞으로 어떤 삶 을 살까 궁금했어. 언니는 여전히 연구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 일적으로 어떤 목표가 있는지 궁금해.

행을 온 사람치고는 그의 하루가 꽤 정적이었 다. 그는 공간에서 편의점 먹거나 맞아. 원래 이란에공용 꼭 가보고 싶었고, 이란에음식을 갔다가 이탈리아

어릴 적 막연하게 신기술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 현재 과

전곡을 모아 놓은 교본을조금도 옆에 못두고 에 갈 비틀즈의 계획으로 돈을 모았어. 근데 그 여행을 미뤄

학이라는 게 혼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 어려운 것 같고 만약

서 남자친구에게 시간을했다. 들이지내가 못하면, 뭔가 내가 그 사람을 기타를 치고는 그의 반려자와 다름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여기 없었을 거야. 신소재공학을 전

좋아하고 수 있는 불구하고 그걸 채 없던노력할 기타를 두 부분이 동강 있음에도 내기 전까지는(당분간

공했고, 연구하는로드리게즈 일을 하고 싶어. 정확히 뭘 연구할지는 는 비틀즈와 만큼이나 그의 노래를 모르

우지 않는 Hey느낌이더라고.. Jude를 배우겠다고 설칠 일은 없으리라).

겠지만 그 행위 자체가 굉장히 좋아. 사실 최종적인 목표는 환 좋아한다. 경운동가야. 나중에 은퇴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환경 이

작년에 스위스에도 있었는데 언제 갔던 거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의사가 될 것을

슈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 아름다운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연

기대했지만 6살 때부터 그는 음악을 꿈꾸었다 스위스에는 3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있었어. 스위스에 있는 연 고 한다. 소망은 오랜 시간 그대로였으나 대학 구소에서 인턴을 했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어. 을 졸업한 후에야 그는 온전히 음악을 하기로 요즘은 돈을 주고 일하는 인턴직도 많은데, 그곳에서는 보험 마음을 먹었다. 도 들어주고 생활비도 나왔어. 삼시 세끼 외식은 절대 할 수 없

습하면 가능할 것 같아. 문학이나 이런 글쓰기는 내가 잘할 수 조금 더 오래 머물 줄 알았는데 시드니에 갔 없는 분야이지만 설득하는 글은 연습으로 가능할 것 같아. 환 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경에 관심이 많아. 화장품을 잘 안 쓰는데, 지금 갖고 있는 쉐

었지만 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었지.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 직접 녹음한 아홉

곡이 담긴 CD 궁금해.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요즘 나 스위스에서의 생활이

도우나 이런 것들은 다 예전에 산 거야. 이외에 수분크림, 바 나도 오래 있고 싶었지만 관광비자만으로는 그 디로션, 샴푸 등은 조금 비싸더라도 동물 실험을 안 하는 걸로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찾아서 써. 다른 방법도 많지만 현재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 지 시드니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비행기 정도인 것 같아. 나이가 들면 실질적인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표를 돈을 사기버는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연구는 행위이기도 해.


여행을 참 많이 했어. 여행에 대한 언니의 생각이 궁금해.

요즘 하고 있는 것들.

여행을 많이 했는데 나한테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야. 이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어. 학비가 저렴하기도 하고 이 분

여행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여행을 가서도 그

야에서 독일이 유명하기도 하고. 그래서 올해 목표는 무조건

나라에서 현지인처럼 생활하려고 해. 한 도시에 최소 일주일

독일어. 그리고 새로운 운동을 배우고 싶은데 우선 하프 마

은 있자는 게 내 규칙이야. 여행을 하다 보면 배우는 건 있는

라톤을 하려고 달리기를 하고 있어. 돈, 아르바이트는 해야

것 같아. 차이를 배우는 것. 많이 들은 이야기가 그래서 여행

하는 거고. 또 내 연구가 좋아서 석사를 하고 싶은 건데 막

에서 무엇을 얻었냐는 질문이었어. 나 나름대로 생각도 많

상 하는 공부는 그게 아니라 언어인 거야. 매일 논문 하나

이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지냈는데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씩 읽을지, 책을 하나 사서 생물 분야를 혼자 공부할지 아직

해본 적은 없어서 당황스러웠어. 이걸 어떻게 하나의 스펙으

은 모르겠어. 고민 중이야. 사실 작년에 힘든 일이 있었고 쉬

로 이야기할지 뭘 깨달았는지 물어보는 거야. 내 여행이 결

운 길을 찾으려고 했는데,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

과물이 있어야 좋은 거고 그게 아니면 방황으로 이어지는 건

보다 능동적인 나. 한편으로는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평범

가 싶기도 하고. 이 질문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지

하게 공부를 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요즘 생각하는 행

만 한편으로는 슬펐어.

복이기도 해.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야?

여행하는 언니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여행보다도 그 용 기가 그렇다. 인도에서는 찢어진 옷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다

아마도 가장 오래 있었던 베네수엘라가 기억에 남아. 여행

니고, 호주에서는 네 달간 일만 하다가 그 돈으로 여행을 떠

지로서 가장 좋았던 곳은 에콰도르랑 볼리비아. 에콰도르는

났다. 험난한 산을 종주하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남미 생

그냥 이유 없이 좋았고 볼리비아는 참 예뻤어. 여행자 사이

활 중에는 뎅기열에 걸려 한 달을 고생했다. 그 와중에 부

에서 자선 파티가 종종 열리는데, 거기에도 참여하고 자원봉

지런히 공부하고 돈을 벌어서 길을 열어간다. 한때 수영 선

사도 하고. 좋은 레스토랑의 맛있는 음식들을 저렴한 가격

수였던 언니는 이제 삶을 유영하는 듯 보인다.빛나는 옥탑

에 누릴 수 있었어.

방처럼!

글, 정리 : 이내


건축이 좋아. #28. 하나 하나 쌓아올린 (벽)돌건축의 아름다움 . aoikasa

建築. 세울建. 쌓을築. 모름지기 건축은 세우고 쌓는 기술이자 예술이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흙과 돌을 쌓아 집을 만드는 원시시대부터 철골기둥을 세우고 시멘트블록을 쌓아 빌딩을 만드는 지금까지 건축은 쭉 ‘세우고 쌓는’ 기술이자 예술이었다. 세우고 쌓는 건축은 가구식 구조(혹은 미식 구조, 즉 기둥과 보로 건물의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구조)와 조적식 구조(벽돌이나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구조)라는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만들어 냈다. 파르테논 신전이 가구식 구조의 대표적인 예라면, 판테온은 조적식 구조의 대표적인 예이다. 가구식 구조는 나무나 돌 (현대에 와서는 철골과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조적식 구조는 돌이나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건축은 대부분 목재 가구식 구조였기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화재가 있을 때 타버린 경우가 많아 현재까지 남은 목재 가구식 구조인 한옥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조적식 구조는 사실상 벽돌을 건축물의 주재료로 사용하지 않았던 한국의 특성상 19세기 말에나 한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최고의 벽돌 건축물, ‘번사창 ’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로 만들어진 조적식 건축물은 바로 무기제조소이자 창고이던 ‘번사창’이다. 현재는 삼청동 금융감독원 뒤뜰에 고이 숨어 있는 이 건물은 벽돌건축이 흔치 않았던 시절, 조선에 생긴 벽돌건축물이었다. 번사창은 처음에는 1 동인 아니라 5 개 동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조선시대부터 화약도감이 있었던 터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돌건축물인 ‘번사창’)

조선에서 김윤식 등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하여 신식 무기 제조를 배우게 하였고, 그들이 돌아 온 후 무기제조를 위해 만들었던 건물 중 하나였다. 즉, 화약을 제조하고 무기를 보관하기 위해 (즉, 화기를


사용하기 위해) 당연히 목조건축이 아닌 불에 강한 재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무려 132 년이 된 이 건물은 현재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비록 처음의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

일본의 점령 이후 한국 신식 군대의 무기 제조소는 당연히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고, 이 공간은 일제 시기 세균검사실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현재의 금융감독원이 사용하기 이전까지 이 일대는 국립방역연구소로 사용되었는데, 대체 무기고와 세균검사실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벽돌’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불에 강한 벽돌, 그리고 방수, 방습에 유리한 벽돌이라는 벽돌의 물성 그 자체가 결국 이 공간의 쓰임새를 결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번사창은 상당히 ‘청나라’ 느낌이 강한 벽돌 건축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벽돌을 건물을 재료로 사용하였는데, 대체 우리는 왜 이리 벽돌을 사용한 시기가 늦었던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조적식 건축은 그 (벽)돌이 쌓인 시간의 켜 를 보여준다. 번사창의 측벽은 벽돌 색과 상태의 차이에 의해 그 것이 쌓인 시간이 나타난다.)

(자세한 내용은 박성형의 ‘벽전’ 이라는 책을 참조하면 좋다.) 명나라와 사대 관계에 있었기에, 명나라의 재료를 우리가 쓸 수 없다(중층 건물을 만들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로 설명되곤 한다.) 라든지 아님 흙이 좋지 않아서라든지 (도자기를 구워낸 흙이 있었는데 말이다~) 혹은 벽돌을 구워내는 가마의 문제나 기술의 문제 등을 들곤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 벽돌 건축이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무라는 재료도 많고, 기후도 온난하여 벽돌 건축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19세기 말의 유행, 한옥 + 2층 벽돌 건물 조합의 주택 19 세기 말 등장한 벽돌 조적식건축은 이후 특수한 용도의 군대나 창고 건축과 같은 건축물 뿐 아니라 일반 점포나 주택 건축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국가의 중요한 건축물들은 ‘석조’로 지어지는 경우도 다수 있었지만 석조에 비해 짓기 쉽고 가격도 싼 벽돌은 서양인들의 공사관이나 주택, 학교, 병원 등에 주로 사용되다가 한국인들의 점포나 주택 등에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0 세기 초 서울의 사진들을 보면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의 사진들을 종종 확인해볼 수 있는데, 이 당시 지어진 벽돌 조적식 건축들은 벽돌로 된 2 층 정도 규모의 내력 벽체(힘을 받는, 즉 구조를 담당하는 벽체)에 서양식 트러스 구조의 박공 지붕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특별히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윤웅렬 별서이다.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부암동


언덕 위(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서와 가까운 위치)에 위치하여 뒤로는 아름다운 북한산의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경관을 소유한 건축물이다.

(2 층 벽돌건물과 단층의 한옥, 그리고 그 위의 테라스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의 윤웅렬별서)

(다른 색의 벽돌과 내어쌓기, 아치쌓기로 장식성을 더하고 구조적 보강도 더한 벽체)

이 건물은 1904 년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2 층 벽돌 건물+ 단층 한옥으로 이루어진 사랑채와 한옥으로 만들어진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 2 층 서양식 건축물은 사실상 작고 단순한 구조의 2 층 건축물인데 붉은 벽돌을 영식 쌓기(길이 쌓기와 마구리 쌓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구조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벽돌 쌓기 방식이다. 벽돌이 의장재가 아닌 구조재로 사용되었던 20 세기 초기 벽돌 건축에서 자주 살펴볼 수 있는 방식이다.)로 쌓고 가로 띠 장식이 필요한 부분과 창호 주변부에는 검은 벽돌을 내어쌓기하여 장식성을 더하였다.

이 건물의 2 층으로 오르면 한옥의 지붕 위로 이어진 테라스로 오를 수 있다. 이 테라스에 오르면 눈 앞에 가득 펼쳐진 서울의 풍광. 역시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은 땅만 아니라 이 땅의 ‘풍광’마저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포의 눈물, 목포의 ‘돌건축 ’ 사실 개인적으로 조적식 건물을 참 좋아한다. 목조 건축의 세장함도 멋지고, 콘크리트 건축의 자유로움도 좋지만, 누군가들이 하나 하나 쌓아 만든 조적식 벽이 참 좋다. 그 것이 벽돌이건, 돌이건 간에...

얼마전 근대도시,건축 답사를 위해 방문한 목포는 유달산에서 나는 이 돌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유독 많은 도시였다. 양동교회, 청년회관, 선교사사택 등. 100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이 돌들은 유달산에서 이 곳으로 옮겨져 쌓여 그 시간을 버텨 왔다. 그 묵직함에 시간의 깊이까지 더해졌다.

양동교회는 1911 년 신자들이 저 돌들을 유달산에서 하나씩 옮겨와 지은 교회이다. 꽤 거리가 있는 유달산에서 이 무거운 돌들을 옮겨 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부역이라 했지만, 당시 기독교가 권력자의 것이 아닌 가난한 한국인들의 종교였을 것임을 생각해보면... 부역이라기 보단 자발적 노동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돌을 하나 하나 쌓은 이의 마음들은 분명 어떠한 간절함이었을 터이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양동교회 / 선교사주택 / 남교소극장 그리고 이름모를 건물 하나)


청년회관(현 남교소극장)도 선교사주택도 모두 한국인 동네에 한국인들 혹은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서양인 선교사를 위한 공간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팔라쪼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거대한 돌의 러스티케이션(거친 혹두기 마감)이 인상적인 이 건물들의 돌 하나 하나가 그래서 더 마음에 새겨진다.

(남교 소극장 돌의 러스티케이션(왼쪽 사진), 견고한 성채를 연상시키는 이 벽은 르네상스 건축의 팔라쪼의 그 것을 많이 닮아 있다. 오른쪽 사진은 피렌체의 팔라쪼 메디치)

돌을 쌓아 벽을 만든다는 것. 그 것도 오랜 시간을 버티는 견고한 벽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과 정성이 가득 담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견고한 벽은 쉬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것을 쌓아온 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배려없고 무례한 이들의 방해에도... 쉬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목포지역에 유독 많은 근대건축물이 남은 것도 아마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견고하게 그 곳에서 버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루이스 칸의 유명한 ‘벽돌’에 대한 문구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루이스 칸이 벽돌에게 물었다. "벽돌아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저는 아치가 되고 싶어요."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경 계인

4화.실천편 : 심리치료 - 나를 공부하고 돌보기

2010년에 사귄 연인은 핀란드 사람이었다. 그는 뉴질랜드로 박사 후 과정 연구생을 하러가기 전 한국을 여행하던 중이었고 첫날, 나와 우연히 만났다. 둘다 불교철학을 좋아하고, 음악과 영화 취향이 맞는 까닭에 친해져서 1주일 정도 가이드를 해줬었고 이후 장거리연애를 이어갔다. 만나는 것은 1년에 1~3달 정도가 다였지만, 내 인생에서 첫번째 스승이었다. 나의 증상을 발견하도록 함께 공부했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생활력 자체를 내게 전수해주었다. 그는 당시 자신을 심리적으로 학대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의절한 상태였다.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것이, 자신에게는 해방의 순간이었다는 그는 핀란드에서는 우울한 기억 밖에 없어 외국에서 연구생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 나 또한 당시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태여서, 상처가 많은 서로가 자석처럼 끌렸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 연애는 시한폭탄 같았다. 그런 연애의 최대장점은 서로의 폐허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감정적 주파수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단점은 각자가 감정적인 숙제를 보통사람보다 10배씩 갖고 있는 덕에,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10배의 노력이 든다는 점. 나는 이 친구를 만나기 전 2명과 사귀면서, 위기가 올때마다 헤어지자는 말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증상이 있었었다. 친구와 절교도 많이 했다. 통제가 안될 정도로 ‘버림받는다’는 느낌이 이성을 지배하곤 했는데 이 친구 앞에서도 그런 증상이 나오자, 그는 단순히 이것을 넘겨버리지 않았다. 자신 스스로를 탐구하면서 불안장애를 발견했듯 내 증상의 정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같이 살기 위해 내 부모님과도 만났던 터라 가족수준의 책임감도 갖고 있었고 결국 내 증상과 BPD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즉 경계성 인격 장애의 증상이 동일함을 알아냈다. 물론, 처음부터 난 그것에 동의하진 않았다. 나를 낙인찍는 생각까지 들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방어기제로만 보기엔, 그 증상들이 내가 겪어온 불가해한 증상과 일치했기에 나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BPD는 자해와 같은 극단적인 증상을 제외한 증상들이 비경계인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감정의 극단화버전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BPD의 증상은 대부분 연인관계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버림받음에 대한 강박’으로 이별통보를 밥먹듯이 하는 것, 흑백논리적 사고방식, 자기파괴적 행동패턴 등이다. 이 증상의 원인은 대부분 아동기에 학대나 애착관계 형성 실패 등이다. 내 경우엔, 엄마와 어렸을 적 떨어지면서 자연스러운 애착관계를 쌓지 못한 것이 가장 컸나보다. 물론, 나 자신을 공부하기 전엔 몰랐다. 단지 연인이나 친밀한 친구관계에서만 나타나는 증상이었기에. 어쨌든 덕분에 그와 사귄지 2년째 해에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내겐 사실 상담의 최대 장점은 이제 나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일종의 의식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나를 돕는 전문적인 제3의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 그것이 돈을 내는 계약에 의해서라는 것은 중요치 않다. (오히려 돈을 내면, 비용회수를 위한 동기부여가 된다. 돈은 많이 들어도)내 자신이 이제 향상을 목표로 하는 한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 그런 것들이 상담의 가장 큰 장점였다.


상담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나는 나와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혼자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에 누군가에게 나의 폐허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어찌보면 큰 감정적 짐을 지우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보편적이지 않은 집안환경덕에 그 이야기를 꺼내도 이해받을 확률이 낮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나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할 기회가 잘 없었다. 부정적기억이 클수록 자기자신을 마주하는 것에는 많은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더욱 필요한 것이다. 나 또한 그로 인한 큰 도움을 받았기에,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새로 상담을 시작할 마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미리 알리고 싶다.

1.심리치료 시작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 1)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요즘 한국의 사설 1:1심리상담비는 1회 50분에 평균 9만원 정도. 만만치 않다.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학교 상담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을 권장한다. 내 경우엔 처음 12회를 무료로 학교에서 받았다. 물론 대기자가 많기에 첫 테스트이후 몇주~몇달 정도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 후에는 회당 5만원을 내고 이용해야 한다. 나는 총 7개월정도를 주1회로 받았다. 대학생이 아니라면, 각 구청의 무료 상담프로그램을 문의해보면 된다. 내 동생은 그렇게 상담을 받았다. 또한, 최대효과를 위해서는 나 자신의 성찰을 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그 시간을 확보하고 따로 떼어두어야 한다. 2)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대학 상담프로그램의 대부분의 치료사는 학교의 심리학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었다. 대부분은 내 스스로 문제를 찾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묵묵히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로 적극적인 방법론을 제시 하진 않는다. 처음에 나의 생각을 기록하고 함께 읽어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후, ‘잡았다 네가 술래야’라는 책을 소개해주고 중간중간 방향성을 잡아주는 정도였다. 학교에서 상담세션이 끝난 후에는 홀로 BPD 집중치료로 알려진 DBT (Dialectical Behavioral Treatment)변증법적 행동치료를 찾아다녀 한 곳에 가보았지만 막상 치료를 시작해도 이전 치료사들과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대학교에서 만났던 석박사과정 연구생보다야 더 많은 연륜을 갖고 있었음에도 치료에 대한 방법론을 자세하게 세워놓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숟가락 떠먹여 주듯 알려주는 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한 심리상태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받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약간 실망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남자친구가 그랬듯 나 또한 직접 BPD관련서적이나 치료서들을 찾아 읽고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을 공부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도 초기의 심리상담이 내게 도움이 많이 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3) 중독을 걷어내기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보다 너무 많아 자꾸 도피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어떤 것에 중독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인터넷일 수도 있고, 쇼핑이나 과식 등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중독이든,


나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돌보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심리상담을 하면서도 꼭 병행이 되어야 한다. 쇼핑중독을 끊기 위해선 지난 화에서 이야기 했듯 신용카드를 해지하고 체크카드를 쓰거나, 그것도 부족하면 현금만 쓰는 방법을 권장한다. 내 경우엔 인터넷 중독 증세까지 있었다. 일이 있는 날 집에 저녁10시에 들어와도 집에 혼자있고 외로우니, SNS를 하면서 함께인 기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선 중독의 대상을 멀리해야 했다. 첫번째로 스마트폰을 2G폰으로 바꿨다.누워서 스마트폰 들여다보기는 너무 쉬운 것. 쉬운 것을 쉽지 않게 만들어야 중독을 면한다. 대신 간단한 사진찍기나 메모, 문서작업은 타블렛으로 wifi되는 곳에서만 쓰게 하였다. 두번째단계는 집의 인터넷을 끊는 것이었다.이건 좀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한데, 이메일을 보내거나 확인하기 위해서 피씨방이나 wifi되는 까페를 가는 기회비용이 꽤 든다. 하루에 3500 원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러 까페에 한번만 가도 한달이면 10만원이 넘으니까 한달인터넷 비용도 요즘 최고 25000원 선을 생각하면 3배! 하지만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바에 그 돈을 들여서라도 날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신 까페에서 작업을 하게되면 생산성도 높아지고, wifi가 없는 곳이나 대중교통 안에서 책을 읽게 된다. 사람이란게 직접적으로 날 주시하진 않아도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더 열심히 일하게 마련. 안타깝지만 나는 그런 타입이었다. 4)운동을 시작한다. 심신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기에, 물리적인 자극이 정신적인 문제에 함몰되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폐인으로서 만성피로를 갖고 있던 사람이 바로 격한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고, 우선 충분한 영양섭취, 규칙적인 생활패턴을 되살리기, 충분한 수면 등으로 건강을 챙긴 후, 산책정도의 가벼운 운동을 시작한다. 동네 주위의 야산을 걷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됐다. 그 후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해서 내 노력여하에 따라 몸이 직접적으로 변하는 그 느낌을 즐기게 되었다. 몸이 강해지니, 자신감도 생기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만날 기대감 덕분에 근육결이 찢어지는 고통도 즐기게 되었다. 확실히 운동을 하면, 기분이 전환되어 파괴적인 생각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다. 5)기쁨의 자원을 준비하기 증상이나 나쁜 기억들을 들추어내고 동시에 몰아내려면, 그것을 대신 채워줄 기쁨의 자원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기억을 회상시키는 부작용이 너무 커져서, 치료를 조기에 중단하는 일이 발생한다. 상담 처음에는 주구창창 한풀이를 할 수 밖에 없다. 환부를 소독하듯 부정적기억을 꺼내어 말려야,

구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에. 감정이라는 대상은

너무도 막연해서, 남에게 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언어가 되어서야 그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1달 정도는 그렇게 자신의 문제를 구체화하는데 보내도 괜찮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반복되면 내 뇌속에 하나의 길을 만든다고 한다. 계속 과거의 부정적 기억을 현재에 투사하게 되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래서 현재 내가 하는 생활에 더 생산적이고 보람된 일을 투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울도 중독이 될 수 있는 건, 나를 더 기쁘게 만들 대안이 없을 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의 양을 늘리는 것도, 좀 더 바빠지는 것도 필요하다. 단, 치료를 받으며 스스로 돌아볼 여유는 남겨두고 말이다. 즉, 단지 과거의 일을 해석하고 의미부여하거나 합리화하는 데 그치지 말고,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사고방식을 새로 정립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2. 상담받는 사실을 주위에 비밀로 할 것인가? 상담받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꼭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우선, 내가 특정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남에게 알리는 것이, 그 상대방에게 내 증상을 내보이는 면죄부가 될 가능성이 있다. 즉, 나도 모르게 상대가 내 증상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날 덜 조심스럽게 만든다. 그렇기에 내가 정말 그 증상을 억제할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생기기 전에는 쉽게 털어놓지 않는 편이 좋다. 내 부모님 세대는 심리치료에 대한 정보를 잘 모르기도 하고, 6.25전후 국가재건을 거친 시기에, 먹고 사는 문제로 그런 정신적인 문제를 돌볼 겨를이 없었던 분들이 많다. 사실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할 때 어떻게 비싼 돈을 들여가며 정신과 클리닉에 갈 수 있겠나? 내 세대가 그때보다는 경제가 좋아졌기에 내 문제 또한 제대로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이해를 구하는 것은 조금 상담의 진전이 있은 후에 이루어지는 편이 낫다. 또한, 이런 정신적 문제를 결함으로 생각해서 심리치료 자체를 꺼리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내가 주위에서 들었던 가장 예상치 못했던 반응은, “요즘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였다. 한국에서 남자들은 자랄 때 대체로 눈물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게끔 교육받았고 약함이 곧 도태라는 어떤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처음에 내가 저런 반응을 접했을 땐 ‘네가 내 사정을 어떻게 알고 그런 이야기를 하냐’는 반감이 들었지만, 그 상대 또한 얼마나 힘들길래 저럴까 하는 측은지심이 들었다. 나의 고통을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 사연팔이’로 치부되고 부러운 일이 되는 것은 그만큼 사회분위기가 얼마나 팍팍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다. 그것이 심리상담을 받고 치료를 제대로 시작하는 것을 미루는 방해요소로 작용한다면 과감히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다. 어차피 세상에서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또한, 정신적인 상처에 절대적인 경중을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내가 부모의 두번째 이혼으로 한창 방황할 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상대가 ‘뭐 그 정도 가지고!’ 하며 비웃었던 기억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는 아버지가 식칼로 위협할 정도의 폭력을 행하고 어마한 빚을 지는 등의 막장드라마 뺨치는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듣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역시, 저마다의 정신적 상처를 등급매기듯 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상대에게 깨우침을 주기보다는 불쾌감만 더 얹어줄 뿐이다. 어차피 내 인생이고 힘들 때는 각자 홀로 그 터널을 지나야 한다. 그렇기에 각자의 고투에 응원 한마디는 해주지 않더라도 차가운 시선은 보내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나 또한 그런 일이 있고는 아무에게나 그런 일을 털어놓지 않게 되었으니 한 수 배운 셈이다. 결과적으로 어찌 되었든 나는 심리치료를 시작했고 그 덕에 조금은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상담을 끝낸 뒤에는, 현재도 가끔은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지만 예전처럼 절교를 하거나 이별통보를 하진 않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상담 뿐만 아니라, 나를 돌보는 현재의

노력이 모여 새로운 나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픈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다면 좋겠다. 나 또한 죽을 때까지 계속 나를 돌볼 것이다.


월간이리에서는 여러분의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패션, 과학, 의학, 무속, 작업 일지, 에세이, 비평, 시나리오, 사진, 드로잉, 만화, 동네 게시판 용도 등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신청해 주시면 언제든! 가능한! 친절하게! 응대해 드리니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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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Archive “거기에는 달콤한 틈이 있어.”

글. 김혜미

나는 로니 혼(Roni Horn)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작업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생 각한다.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감동을 주었다. 나는 약 5년 전 아이슬란드의 어둡고 긴 겨울을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녀가 쓴 에세이를 읽으며 견 딜 수 있었다. 물의 도서관(Vatnasafn /Library of Water)이라는, 그녀가 아이슬란드에서 한 프 로젝트 중 하나로 그 모든 과정을 엮은 책이었는데 그 책이 내가 그곳에서 발견한, 거의 유일하 게 흥미가 가고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된 책이었다. 지금은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한 동안 그녀가 방문한 지역을 추적하며 여행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2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그녀의 전시를 마주칠 수 있었다. 엄청난 더위 속에 가우디(Gaudi)가 남긴 흔적 이외에 달리 눈 에 들어오는 구석이 없는 그 도시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몬주익 언덕(Montjuic Hill)에 서 길을 잃고 불만스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코너를 돌자 왼편에 그녀의 이름이 크게 쓰여진 건물이 나타났다. 후안 미로 재단(Juan Miro Foundation)에서 그해의 작가로 선정 된 그녀의 전시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그 전시에서 그동안 실제로 보고 싶었던 그녀의 거의 모 든 작업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와 관련도 없고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와 동 일한 기류 안에 머무를 수 있고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그곳에서 일하던 한 사람과 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로니를 향한 나의 열정에 감동했는지 유리 캐스팅된 작업 중 하나를 손끝으로 살짝 만져볼 수 있 게 허락해주었다. 산티아고 길 걷기를 마치고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도 우연히 그동안의 여정 을 상기시키는 ‘길 위에서(On the Road)’라는 제목의 전시를 볼 수 있었다. 그 전시는 전체적으 로 아주 인상적이어서 그동안 쌓여왔던 피로와 실망을 한번에 보상받는 느낌을 주었다. 로니 혼 의 작업은 전시가 열리는 메인 건물에서 약 10분 정도 거리에 떨어진 성 도밍고 성당(Church of Santo Domingo de Bonaval)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작업들은 거대한 돌 건물 바닥 위에 가볍 고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내가 성당에 들어갔을 때는 해가 지기 직전이었는데 그때 창문 사이로 흐릿하게 새어 들어오는 주홍빛이 공간 전체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고 빛의 세기에 따라 미세하 게 달라지는 유리의 색 -작품은 푸른기가 도는 반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다.- 을 감지하는 것이 나의 임무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그동안 이것을 향해 걸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 중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 타시타 딘(Tacita Dean)이 로니 혼과 서신왕래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녀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알 수 없는 흐뭇함을 느꼈다. 타시타는 한 편 지글에서 그녀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베니스 공항에 잠시 체류하게 되었을 때 우연히 로니 를 만났다고 썼다. 거기에서 로니는 타시타에게 자신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때 타 시타는 로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아이슬란드 여행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의 편지글 을 읽으면서 나는 베니스를 떠나기 전에 로니 혼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달 초에 트론(Tron Bykle)이라는 작가를 만났다. 그는 80세가 넘은 노인이었지만 정신 만큼은 나보다도 더 젊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노쇠해서 마르고 구부정했지만 그의 신 장과 손, 발의 크기를 보았을 때 젊었을 적에는 좋은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우리는 매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번은 내가 나의 말하기 실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는 것을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영어와 한국어 모두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과 문법적 실 수들이 내가 말하는 문장의 몇 마디 간격으로 침입해 들어오고, 거기에서 오는 답답함이 가끔 은 아예 말을 하고 싶지 않게 만든다고 했다. 그는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예술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상투적이지만 진실된 위로의 말과 함께 자신이 영어를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지만 본래 노르웨이 사람이다.- 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다가 문 득 “Slip of the tongue”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헛나온 말, 말실수라는 의미로 그는 이야기를 하 던 도중 갑자기 이 관용어가 떠올랐고, 이 관용어를 제목으로 한 전시가 Punta Della Dogana에 서 열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전시가 열리고 있던 건물은 지금은 현대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본래 오래된 세관청 으로 베니스 남쪽, 땅과 바다가 맞닿은 꼭지점 끝에 위치해 있었다. 그 거대한 건물 안에 120 점이 넘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로니 혼의 작업도 포함되어 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진심으로 기뻤다. 전시되고 있던 작품이 오래전부터 꼭 보고 싶었던 골드 필드(Gold Field; 금 지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된 벽돌 로 둘러싸인 공간의 바닥에 오롯이 놓여 있었다. 맞은 편에는 베니스의 물과 건너편 풍경이 보 이는 아치형의 창문이 있었고, 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해 반사된 금의 표면이 반짝거 리고 있었다. 이 신비한 금 매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로니 혼이 쓴 제작 노트에 대해 간략 히 소개되어있다.

“1980년에 나는 태양과 더 가까운 관계를 가지길 원했고, 골드 필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나는 메사츄세스의 Engelhard Precious Metals -미국 최대 규모의 귀금속 특수 제작 회사- 에서 일 하고 있는 한 엔지니어를 찾아냈다. 그는 4x5피트(125.5x152.5(cm)) 크기의 금 매트를 제작하 는 방법을 알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가능한 최대로 얇아야 했다. 또 하나의 물건처럼 서로 붙어있어야 했고, 100퍼센트 순금이어야 했다. 즉 접착제를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 리는 사람의 머리카락보다 더 얇은 10000분의 6인치(0.002(cm))의 두께의 금을 고안했다. 나 는 이 고안 방식에 만족했는데, 표면이 전체적으로 균등하게 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이 특별한 방식의 강화 과정(금속을 더 부드럽게 만들고 힘을 가하지 않는 냉동공정; cooling process)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나서 금이 납작하게 망치질될 때 서로가 스스 로 붙을 것이었다.(압축 용접; compression welding) (…)”

조금 덧붙이자면, 마치 쿠킹 호일처럼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해 보이는 물성은 특수한 열 공정 (heating process)을 통해서 유연하고 형태가 쉽게 잡힐 수 있게 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품이 반복적으로 튜브에 말려 보관되고 다시 펼쳐지는 과정에서 금 표면의 접힌 자국,


구겨진 주름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 반사면 또한 많아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태양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나는 살짝 들려 말려있는 한쪽 면의 가장자리가 서로를 반사 하며 몇 배나 더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부분을 마치 태양빛을 보듯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다. 그러나 내가 이 작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기술적 미스테리나 결과물 자체의 아 름다움보다도 이 작업이 가지고 있는 뒷이야기 때문이다.

사실, 총 세 점의 골드 필드가 존재한다. 가장 처음으로 제작된 것은 내가 그날 전시에서 보았 던 것으로 1980년에서 82년에 거쳐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두 점은 1994년에 제작되었다. 두 점 이 한 쌍으로 제작된 두번째 골드 필드는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Paired Gold Mats, for Ross and Felix”라고 불린다. 토레스와 그의 연인 로스(Ross Laycock)는 1990년, L.A의 현대 미술관(MOCA)에서 열린 로니 혼의 전시에서 처음으로 골드 필드(1982)를 보게 되었다. 그때는 로스가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다 음 해에 로스가 세상을 떠났고, 3년 후 토레스가 로니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뒤로 둘의 우 정이 시작되었다. 그때 로니는 새로운 우정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토레스에게 한 장의 정사각형 금박지를 선물했다고 한다. -토레스의 작업 중 프린트된 종이를 한 더미 쌓아 놓고 관객이 한 장 씩 가져갈 수 있게 만드는 형식의 작업이 있다. 로니는 이 작업을 연상시키는, 그러나 일반 종이 가 아닌 금박지를 선물함으로써 둘 사이의 연관성을 건드린 것이다.- 로니는 “그는 언제나 로 스와 함께 처음에 경험했던 골드 필드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곧, 나는 우리 셋 사이에 연대(sense of triangle)를 느끼게 되었지요. 나는 한번도 로스를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죠.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있었어요. 어떤 시점에서 펠릭스는 “Untitled”(Placebo-Landscape-For Roni), 1993: 금색 셀로판지로 포장된 수백 개의 사탕들을 바닥에 깔아 놓은 작업을 만들었어 요. 나는 1994년에 Paired Gold Mats, for Ross and Felix 로 그에게 응답했지요.”라고 회상했 다. 이 두번째 작업에서 두 점의 골드 필드는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올려진 채 서로 겹쳐있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나를 알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로니와 토레스의 우정은 토레스가 1996년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골드 필드를 본 이후로 그때의 경험에 대한 어떤 종류의 글이라도 써보려고 시도했지 만 토레스가 쓴 것만큼 진심이 담긴 문장을 쓸 수 없었다. 토레스의 글, “1990: L.A. ‘The Gold Field’”(아래)에서 우리는 시대의 풍경과 상실의 아픔과 우정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반복 해서 읽게 되었고, 읽을 때마다 내가 골드 필드를 마주한 순간을 천천히 곱씹어 생각해 볼 수 있 었다. 이 과정에서 깨닫게 된 작은 사실 하나는 “Untitled(Portratit of Juile Ault)(줄리 얼트의 초 상)”(1991)이라는 토레스의 작품이 골드 필드와 같은 공간에 전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돌 천장을 받치고 있던 나무 기둥에 글자를 새긴 텍스트 작업이었다. 이 텍스트는 줄리 얼트의 삶에 서 개인적으로, 대외적으로 벌어진 사건들을 마치 캡션처럼 간략히 요약해 년도와 함께 나열한 것이다. 텍스트를 쓰고 선택하는 과정은 꽤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거기에 로니 혼도 집 필자로 참여했다.- 땅에 로니의 작업이, 하늘에 토레스의 작업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 가 전시를 방문했던 그날은 1월 9일로 토레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 “L.A. 1990년. 그렇다. 아주 우울했고, 이런 어두운 사회 환경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기는 힘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희망,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소망의 낭만적 추진력, 정의를 위한 바램, 의미와 역사를 위한 염원, 어떻게 이들을 유지하고 지 킬 수 있을까?

L.A.1990년. 로스와 나는 매주 일요일 오후, 도시의 모든 것을 금빛으로 변하게 만드는 볕이 드 는 “마법의 시간 magic hour”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L.A의 전 지역을 오랜 시간 운전하여 돌 아다니면서 갤러리, 박물관, 중고 가게를 방문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들은 최고이자 최악 의 시간이었다. 로스는 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나를 두고 떠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무슨 연유에서 집세를 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있었던 내 인생의 최초의 시간이었다.(로스는 삶 의 본질이자 핵심이었다.) 절망의 시기였지만 성장의 시기이기도 했다.

1990년, L.A. 골드 필드(The Gold Field). 내가 어떻게 골드 필드를 설명할 수 있을까? 잘 모르 겠다. 그러나 골드 필드는 거기에 있었다. 로스와 나는 현대 미술관에 들어갔고, 그것이 로니 혼 의 작업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연약한, 수평적 존재. 그것은 하얀 공간 에 그것 자체로서 존재했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보다 가볍게 바닥에 내려 앉은 채로. 새로운 풍경, 새로운 지평선, 안식처, 그리고 완전한 아름다움. 상상의 영역을 옮겨 다닐 의지를 가진, 그리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는 제대로된 관객을 기다리며. 이 작품은 그 저 얇은 한 장의 금박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웰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가 쓴 훌륭 한 시의 모든 것이었다.; 정확하고, 여분의 부담이 없는, 부가적인 것이 없는. 안정적이고 그 자 체로 해명할 수 있는 과감함이 있는 시, 꾸밈없이 발가 벗겨진, 촉각적인 감각을 즐길 수 있는, 그리고 그 이상의, 지적인 방식으로도 감상할 수 있는. 로스와 나의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골드 필드의 제스쳐는 우리를 편히 쉴 수 있게 하는 모든 것, 우리로 하여금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생 각하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장소를 더 나은 장소로 만드는 것을 꾀할 수 있는 작가의 타고난 능력으로 보여졌다.

이런 작업이 필요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미지의 바다였다. 이것은 불가능하지만 실재했고, 우리 는 그 풍경을 보았다. 다른 어떤 풍경과는 다른 풍경. 우리는 느꼈다. 우리는 함께 헤아릴 수 없 는 일몰을 보았다. 그러나 어디로부터 이런 작업이 나온 것일까? 도대체 누가, 기본적인 플랫폼 (작품을 바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놓는 받침대)이나 플랙시 유리 박스(작품을 외부로부터 보 호하기 위해 씌우는 투명한 박스)가 쓰이지 않은 채로 그저 바닥 위에 놓인, 그 자체로 너무나 연 약하여 스스로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있는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왜 이전에 그녀의 작 업에 대해 몰랐을까, 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쳤을까? 로니의 작업은 기존 체제를 따른 적이 없다. 결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로니의 작업을 순수한 형식주의(formalism)로 일축한다. 마치 하나 혹 은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가 젠더, 인종, 사회 경제적 지위, 그리고 성적 성향에 의해 변모한 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이런 순수성이 가능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


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공허(무지), 그리고 그녀의 작업과 글이 우리에게 주는 거의 온전한 감정들 과 해결책들을 보지 못하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꿈을 꾸기 위한 장소, 기운을 회복하기 위한 장소, 모험/도전을 할 수 있는 장소. 로스와 나는 매일같이 이 작업이 얼마나 큰 영향을 우리에게 미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모든 일몰은 “골드 필드”가 되었다. 로니는 언제나 존재 해왔던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의 시각과 그녀의 상상력으로 일몰을 본다.

로스의 임박한 죽음이라는 우리의 사적인 재앙 가운데, 그리고 이 특정한 역사적 순간의 어둠 가 운데, 우리는 우리의 호흡을 회복하고, 오직 진정한 연인들만이 숨 쉴 수 있는 낭만적인 공기를 마시는 기회에 대해 생각해보는 행운을 얻었다.

최근에 로니는 골드 필드를 다시 만들었다. 이번에는 두 장이다. 둘, 우정/동료애의 숫자, 갑절 이 된 기쁨의 숫자, 한 쌍, 커플, 하나 위에 다른 하나. 반사하고 발산하는 빛. 나에게 이 새로 운 작업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달콤한 틈이 있어.(There is sweet inbetween.)” 나는 그것을 알았다.”

*한국어 번역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원문 번역한 것입니다. 혹시 번역본이 나와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디지털 디아스포라 Ⅰ 과거 예술가들은 표현하려는 주제에 적합한 사이즈를 정해 그림을 그렸다. 시작과 동시에 캔버스 사이즈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이미지는 하나의 사이즈로 기억된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는 정사각형이고, 잭슨 폴록의 [넘버 5]는 가로가 세로보다 긴 직사각형이다. 사이즈는 작품의 인상을 좌우한다. 마릴린 먼로와 넘버 5의 사이즈가 서로 바뀐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디지털을 매개한 창작품은 더 이상 하나의 사이즈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것은 작품을 보는 사람이 소유한 디바이스 종류에 따라 다르게 출력되기 때문이다. 모니터와 태블릿PC, 모바일에 뿌려진 하나의 작품은 서로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것이 진짜 규격이냐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작품의 규격은 디바이스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디아스포라 Ⅱ 어떤 디바이스에서 주로 보일 것인가에 의해 디지털 디자이너의 캔버스는 정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창작자의 캔버스는 ‘확정’이 아닌 ‘기준’에 불과하다. ‘주로 보인다’라는 것은 통계에 의한 마케팅적 추적으로서 실존적 삶에서는 붕괴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인쇄 지면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쇄 지면이 확정성에 바탕을 둔다면 디지털은 변화(variation)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예컨대 웹사이트가 기준이 되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완성형이 아니라 다른 디바이스에서 유연히 대처할 수 있게끔 디자인된 것이다. 아래는 웹과 모바일에서 출력된 하나의 이미지이다. 첫 번째 이미지 속 남자는 와이드 한 배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웹이 기준이었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구상한 정서에 가장 가까운 사이즈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미지는 모바일 사이즈를 기준으로 제작된 것이다. 모바일 디바이스에서(아직까지는) 가장 범용적인 아이폰4를 기준으로 제작된 아래 디자인은 웹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모바일 디바이스의 특성상 웹의 와이드함을 가지고 오기가 힘들기 때문에 공간의 여백이 사라지게 되었다. 여백이 거의 사라진 이미지는 클로즈업 사진 같은 인상이 되었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최초 웹에서 구상한 정서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웹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과 모바일이 주인 사람은 이 이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인상을 양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웹에서 떠도는 하나의 이미지는 과연 몇 개의 사이즈와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디바이스는 출시되고 과거 이미지는 리사이징 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미지는 미래에 또 어떤 디바이스에 의해 다른 인상을 획득할지 모른다. 예컨대 화두가 되고 있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같이 구부러지는 속성의 화면 위에 뿌려질 이미지들은 지금과는 또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디지털 디아스포라 Ⅲ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주요 저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증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Ritual)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벤야민이 말한 정치란 정당정치보다는 권리의 문제에 가깝다. 창작자가 모든 의미를 움켜졌었던 과거 예술은 폐기된 지 오래다. 창작자가 세상에 작품을 내는 순간, 그가 내뱉는 말 역시 대중 속 하나의 의견에 불과해졌다. 내가 소유한 디바이스는 이미지를 어떠한 형식으로 보겠다는 표방이 되었다. 이것은 대중으로 편입된지 오래인 수용미학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 캔버스 사이즈는 예술가가 정했다. 그것은 작품의 일부였으며 권력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작품은 디바이스(대중)의 눈치를 보며 기준을 옮겨 다니기 바쁘다. 디지털 디자인은 다양한 디바이스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캔버스의 권력은 이동했다. 그것은 우습게도 나의 디지털 취향에 따라 그림자처럼 옮겨붙을 것이다.

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발터벤야민]

clichecliche@naver.com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3. 구두 닦는 군인 글. exxx

지난 달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보건 복지부 조사결과에 따르면 장애인의 70.5%가 한달에 5회도 외출 하지 못한다.” 장애의 종류는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 거리에서 장애인을 마주쳤을 지라도 알아채지 못했 을 수도 있다. 장애인 출현율 보다 장애인을 만난 체감이 안된다는 이야기는 이런 이유로 ‘당신이 알아채지 못 했을 뿐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청각 장애인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면 우리가 그것 을 쉽게 눈치 챌 수 없을 것이다. 그럼 한가지 궁금증이 있을 수 있다. 과연 청각 장애의 비율은 어느정도 일까?

장애인 출현율 5.59%. 1만명당 559명의 장애인이 있다고 할 때, 15개의 법정장애 중 출현율이 가장 높은 유형 은 지체 장애로 2.75%. 그 다음은 뇌 병변 0.59% 청각장애 0.57% 시각장애 0.56% 이다. 앞서 적힌 것들을 제외 한 나머지의 합은 1.12% 가량이다. 여기에 적힌대로라면 청각장애인의 비율은 총 장애인 중 약 10.1% 가량이다. 그럼, 한달에 5회 이상 외출하는 장애인 중에서 청각장애인은 몇 프로 일까? 나는 99%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다. 물론 두 가지 이상의 복합 장애를 겪는 경우로 인해서 99%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수하게 청각 장애만 갖고 있다면 외출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청각 장애인을 제외하고 과연 몇 프로의 장애인들 이 한달에 5회도 외출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난 달, 이 코너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외출의 불편함이 사회의 환경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이 야기를 했었다. 그러니까 보도블록의 울퉁불퉁함과 높낮이 차이, 서울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산이 포함된 환 경, 애초에 탈 수 없는 버스(일반 시내버스, 고속버스 등), 있어도 탈 수 없는 버스 (저상버스) 등을 이야기 했었 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자, 이제부터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정말로 그것이 전부라면, 대통령이 나서서 “올해는 장애인의 해로 삼아서 모 든 자원 투자를 장애인 관련 시설 정비에 투자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한다면 그것들이 쉽게 해결 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나올 반발은 아주 상식적인 세 글자 일 것이다. “아니 왜?” 그 다음은? “세금을 그런 곳에 쓴다고?” 정부의 편에서서 열심히 꿀을 빨고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물을 것인다. 아니 왜? 그 돈을 다 거기다 투자해? 우리도 나눠 먹어야 하는데 (우리가 진행하는 사업에 예산이 필요한데?) 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 야 할까? 대화를 시작하겠지. 자 이러이러 해서 설득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이게 될 일이 라고 생각하는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애초에 한 명의 의사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주 거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한번 더 상상력을 동원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 OK 가 떨어졌다. 어찌어찌 기적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올해 우리는 장애인의 해로 삼에서 모든 자원 투자를 장애인 관 련 시설 정비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발표를 하고 사업이 진행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이렇게 기적적인 상 황이 연달아 일어난다면 “보건 복지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애인의 70.5%가 한달에 5회도 외출하지 못한다.” 는 현실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을 것이다.’’ 라거나, ‘소폭 상승할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 는 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정말로 이렇다 할 의미를 갖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부터 어떤 궤변을 늘어놓을 참이다. 늘 그렇듯 장애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어떤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이 참 화려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옷들 이 참 화려하다.’ 신발도 비싸고, 잡지를 봐도 TV를 봐도 모두 빛나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 았다. 사진을 찍어도 예쁘게 찍고 예쁜 사진이 ‘좋아요!’를 받고 일상적으로 물티슈를 찾고, 그런 모든 것들이 다 한 방향으로 가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회의 흐름이고 변화이거나 일종의 패션의 발달이나 혹 은 청결 의식의 발전일 수도 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질감을 느낀 일이 있었다. 어느날 부턴가 사람들이 물컵을 따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 어? 친구들이 물컵을 각자 쓰기 시작하네?’ 지금에야 당연하지만 그때 나는 그 것이 너무 이상해서 한동안 유심 히 사람들이 컵을 따로 쓰는 것을 관찰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즈음 부터는 앞접시를 아주 당연하게 사용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은 물티슈가 그렇다. 지금은 그저 모든게 상식이자 통과의례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여 진다. 아무도 앞접시나 개인 물컵, 물티슈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에 반발 하거나 흐름을 거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한다. 과연 사람들이 물티슈가 엄청나게 비싸서 못쓰는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 다시 물티슈를 쓰지 않고, 개인 물컵도 쓰지 않고 앞접시도 안쓰는 시절이 돌아올까? 여기 서 한 번 더 이야기를 틀어 보려고 한다. 군대 이야기로 휘리릭.

나는 게으른 군인이었다. 평소에는 구두 솔로 구두를 대충 몇 번 문지르고, 아주 가끔씩만 재미삼아서 맨질맨질 하게 구두를 닦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열심히 구두를 닦았다. 그러니까 나는 순위로 따지자면 거의 최하위권의 구두닦이 였다. 다림질도 좀 대충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구두 닦는 것처럼 엄청 열심 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름을 칼같이 잡았고 이것을 ‘칼주름’ 이라고 부르곤 했다. 가끔은 그 과도한 주름이 우 습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다들 칼주름을 칭찬했다. 나조차 아주 드믈게 멋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높은 완성도! 예술적인 면이 조금은 있지 않은가? 그 완성도 말이다. 당시는 이 젊은이들이 전부 참 할일이 없어서 이렇게 열심히 주름도 잡고 구두도 닦는 구나. 하긴 군대에서 뭐 할게 있나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인지도 모르지만.. 주변에 구두를 닦는 군인 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아닌가? 가지런한 머리, 정돈된 옷차림 어느 것 하나 흠 잡기 힘든 각양 각색의 신상 의복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다 못해 추켜세우는 광경을 보면서 ‘어? 내가 시대와 다른 사람이 되었나?’ 하는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패션잡지를 챙겨보거나 옷차림에 무던히 신경쓰지는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스스로 의심하는 것 이었다. ‘내가 너무 신경을 안쓰나?’ 매일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입는 등 나와 주변에 감염과 관련된 위생 문제 가 없음에도 순수하게 외모 때문에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송 마저도 매번 외형을 치켜세우고 빛나는 것 들을 찬양하다 못해 중독되고 결국은 서로 세뇌하는 듯 한 장면을 연이어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고고하다거나 옳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장애 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것과 이것이 다르다고 이야기 할 사람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넘나 사랑하는 나!”의 이질적임이나 부족함도 못참는 사회에서 타인의 장애를 유 연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의심이 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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