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영화로 읽는 시공간 - 서울역: 집에 가고 싶은 사람들의 아수라장 / 글. 곡주대비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퀴어 시를 스케치하다 - 개화,후 / 글. 루나 옆사람 인터뷰 - Nhou /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 31. 어쩌면 모든 것이 가능했을, 20세기 중반의 방콕, 그리고 짐 톰슨 / 글. aoikasa 지진파 - 절제의 형법학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경계인 - 9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나의 좌표는 / 글. 스푸트니크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9. 또 다른 올림픽 / 글. exxx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달 전기세가 평소보다 3배정도가 나왔지만 그래도 여름내 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잘한 결정이었지요. 독자 분들 중에서 전기세를 직 접내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저와함께 욕을 하셔도 좋습니다. 누진제 완화해야 합 니다. 진짜.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8월 모 정당의 전당대회에 투표를 하러 다녀왔습 니다. 그전에는 서울 지역의 선거도 갔었는데, 뭐 비슷비슷 했습니다. 커피마시면 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 듣다가 별 영향도 없을 것 같은 투표 하고 나면 끝이었습 니다. 이 정당이 너무 좋아서 숨을 쉴수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한국 정치를 바꾸겠다 는 거한 목표가 있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막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당원 이 된다고 정당이 급속도로 바뀌거나 좋은 의지가 막 물결처럼 퍼지지도 않을 것 입니다. 그런데 왜 하냐면 그나마 적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입니다. 그리고 또 언젠가의 누군가처럼 저도 좌절을 하겠지요.ㅎㅎ 뭐 괜찮습니다. 인생 이런 저런 경험 다 해보는 것이지요. 아!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여러분 뭐든 안하는 것보다 하는게 그나마 가능성이 생 기기 때문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저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당 대회 가보니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이 글을 보실 젊은 여러분들 나쁜 일이 아니면 뭐든 하십시오. 아주 작은 가능성 을 보고 하는 것도 좋습니다. 로또요? 저도 합니다. 다만 너무 많이 구입하시지는 마시고요.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남을 괴롭히는 것만 아니라면 저는 늘 응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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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집에 가고 싶은 사람들의 아수라장 >
서울역의 흥행이 시원치 않다. 사실 연상호가 작정하고 만든 작품은 서울역이고 기획해서 끼워 팔기로 만들어 준(?)게 부산행 이라는 것 치고는 주객이 크게 전도 됐다는 생각이 든다. 흥행이야 그렇다 치고 작품 이야기를 하자면 일단 서울역은 알려진 바 대로 부산행의 프리퀄이 아니다.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각 작품에서 신은경이 맡은 역 조차 동일 인물이 아니 다 (물론 이 부분에서 의견이 갈릴 수 있으나 신은경이 맡은 역할의 의상 및 시간차로 동일인물 로 보기는 힘들다). 서울역을 이해 하기 위해서 부산행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완전 다른 작품으 로 들여다 봐야 한단 얘기다. 서울역은 세 인물이 주인공이다. 집 나온 가출 소녀, 그녀의 놈팽이 남자친구 그리고 소녀를 찾는 아버지. 소녀와 남자친구는 서울역 주변 (정확히는 회현역) 의 싸구려 여인숙에서 근근히 생활하 는데 남자친구는 생활비를 위해 소녀에게 원조교제를 강요한다. 그들은 이 문제로 크게 싸우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한편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의 남자친구가 소녀 몰래 해왔던 원조교제의 광 고를 통해 손님을 가장해 남자친구를 만난다. 그들은 함께 소녀를 찾기 시작하고 이 순간부터 서 울역의 한 노숙자를 시작으로 서울 전체가 감염되어 좀비가 된 사람들의 습격으로 잠식 당한다. 이 셋은 결국 천신만고 끝에 만나게 되지만 이 만남에서 드러나는 대단한 반전이 있다. 일단 이 반전을 밝히기 전에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1. 영화가 시작부터 산만하다. 연상호는 많은 입들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 메인 캐릭터와 서포팅 캐릭터 몇 명이 아닌 지나가는 행인의 대사에도 연상호 특유의 사 회 비판 적인 대화를 심어 놓는다. 가령, 영화의 도입부에서 서울역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명 의 청년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엑스트라에 불과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역 앞에서 커피 마시는 사 람들이 하는 대화로서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복지의 관한 이야기를 신문 사설 읊듯 문어체 적인 대사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복지를 울부짖던 이들은 그 들을 지나치던 노인 (좀비에게 물린) 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도와주려다가 그가 행려자 라는 것을 알고, “에이, 행려자잖아” 하며 뒷 걸음 친다. 매우 연상호 스러운 설정이지만 앞으로 한 시간 반 동안 펼쳐질 사회 정치 비판 적인 에피소드와 암시들을 고려하면 굳이 이러한 잔가지를 넣어야 했을까 싶다. 2. 사이비나 돼지의 왕을 접해 본 관객이라면 (혹은 그의 단편들) 연상호의 작품들이 선이 곱고 색이 예쁜 ‘디즈니 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문제는 선이 투박하고 색이 칙칙한 것이 아니 다. 사이비나 돼지의 왕 때만 해도 연상호의 작품이 극장 스크린에 걸리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 지만 이번 서울역은 다르다. 대규모 극장 개봉을 염두한 작품이고 극장 관객을 위한 고려가 있 었어야 했다. 작화는 여전히 작은 스크린에나 맞을 완성도를 고수 하고 있다. 몇 몇 신에서는 후 경의 캐릭터들 얼굴의 눈코입이 다 그려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 하고 스크린이 커지다 보니 이미 지와 소리의 싱크가 맞지 않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산행과 개봉 날짜를 맞추기 위해 후 반 작업을 신경 쓰지 못했을까’라는 관대한 추측을 해 보아도 도저히 만원 주고 극장에서 볼 작 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글.
3. 영화의 반전: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 럽게도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
영 화 로
는 부분이다. 적어도 부산행과는 다른, 진 정한 연상호의 인장이 느껴지는 반전이 다. 소녀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던 중년의 남자는 천신만고 끝에 소녀를 만나자마
보 는 시 공 간
자, “야, 이 쌍년아 어디 갔었어!!!!!!” 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곧 ‘아버지’ 라고 주장했던 그는 소녀가 몸을 팔던 곳의 포 주임이 밝혀진다. 의미 심장하게도 소녀, 포주, 소녀의 남자 친구가 서로를 재회하 게 된 곳은 아파트 모델 하우스다. 소녀는 포주를 보자 마자 도망치려 하고 그녀를 쫓으려는 포주를 막으려던 소녀의 남자친 구는 포주에게 칼에 찔려 살해 당한다. 마 치 현대식 궁전 처럼 모델 하우스는 멋지 고, 횡하다. 포주와 소녀를 제외하고 사람 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곳이다. 이 들은 추격전 끝에 ‘84평’ 아파트 안으 로 들어가게 되는 데 이곳에서 소녀는 끝 내 포주에게 잡혀 강간 당하기 직전에 이 른다. 이 때 소녀가 좀비로 변해 포주를 물기 시작한다. 좀비의 중심지를 탈출 하 다가 살짝 물린 상처가 그녀를 좀비로 만 든 것이다. 프롤로그: 여인숙을 전전하던 소녀와 소 년. 밤 만 되면 서울역을 가득 채우던 행려 자들. 소녀 혹은 비슷한 소녀들을 찾아 헤 매는 포주까지 서울역의 인물들은 집 없 는 사람들이다. 이 들은 포주의 말 대로, ‘ 살아보지도 못할’ 가상의 집에서 또 다시, 헤매고 떠도는 좀비로 공간을 채운다. 부 산행에서도 김의성의 악역 캐릭터가 되내 이듯, 우리 모두는 집에 가고 싶지만 공간 의 한 부속물로 전시되고 채워진다.
곡주
대비
살들 크고 곧고 건장한 몸이 주는 벽 같은 단단함과 큰북 같은 웅숭깊음. 그런 감정을 느낀 시절도 있었다.
글,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퀴어 시를 스케치 하다
[장면 1] 남자 1. 남성(男性)으로 태어난 사람.
남성 1. 성(性)의 측면에서 남자를 이르는 말. 특히, 성년(成年)이 된 남자를 이른다.
여자 1.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
[장면 2] 트랜스젠더: 사회적 성과 생물학적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 중 자신의 육체적 성별의 반대 성별 집단의 일원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들을 성전환자(
여성 1. 성(性)의 측면에서 여자를 이르는
트랜스섹슈얼)이라고 하지만, 모든 트랜스젠더가 성전환자인 것은 아니다.
말. 특히, 성년(成年)이 된 여자를 이른다.
개인의 성 정체성은 성적 지향을 암시하거나 규정짓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성(性)
범성애, 다성애, 무성애자일 수 있다.
1. 사람이나 사물 따위의 본성이나 본바탕. 2. 남성과 여성, 수컷과 암컷의 구별. 또는 남성이나 여성의 육체적 특징. -네이버 국어사전
-한국어 위키피디아
[장면 3] 나바호
부족(미국
원주민
부족 중 하나)는 아이의 젠더( 사회적 성)가 의문스러울 때면 여성의 도구인 베틀과 남성의 도구인
활,
화살을
함께
놓아둔 천막에 아이를 두었다. 그러고는 천막에 불을 붙인 후 아이가 들고 달려 나오는 도구로 이렇게
성별을
결정했다.
나바호족은
아이가
자신의 성별을 결정하는 데 의견 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케이트 본스타인 저 <젠더 무법자> 중.
[장면 4] “주민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고, 또 수술 해봤자 임신 못하잖아. 그럼 남자 아니니?”
“하리수가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 들어보세요. 그 이유는 뭔가요?” “네. 몸을 바꾸었다 한들 본인의 염색체와 호르몬은 결국 남성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트랜스젠더 여성분에게 끌리시나요?” “아무래도 그... 성적인 게, 일반 여성과 비해서 더 특출나다고 들어서. 테크닉 같은 게...”
“...굳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히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요. 수술과 호적 정정이 끝난 트랜스섹슈얼은 커뮤니티에도 발길을 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수술이나 호적정정을 생각하고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은데 후기를 쓰거나 답변해주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죠.”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와 관련하여 기억나는 말, 말, 말들.
개화, 후 -
꽃이 피는 날 나는 꽃밭 사이로 사라져버릴테야
수술이 암술로 암술이 수술로 되는 그날 내 몸이 피어오르는 그날부터 나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테야
봄바람에 한껏 흩날리는 꽃가루 장마에 젖은 이슬 떨구는 잎사귀 눈발에 말라붙어 떨어지는 꽃잎 벌 앞에 고개 젓는 봉우리 단 하나, 단 하나도 보여주지 않을 테야
나를 보여주면 꺾어갈테니 꽃밭과는 사뭇 다른 너들의 화환을 위해 제멋대로 너 세상 장식으로 써버릴테니
그러니 숨어버릴 테야 그저 꽃 한 송이로 살고픈 나에겐 차라리 무관심이 편할 테니까
차라리 숨어버릴 테야 너희들이 나를 추궁할 수 없는 꽃밭으로 꽃이 필 수 있는 그곳으로
루나 @QueerPoemLuna https://www.facebook.com/QueerPoemLuna
**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설마 이런걸 연재가 될까? 하는 것들 다 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
18_ Nhou
옆 사람 인터뷰
작년 여름 대만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Nhou를 만났 다. 8월 말 대만의 하늘은 대부분 흐리고 종종 약한 비가 내 렸다. 새로운 나라를 여행할 때면 그곳의 영화관과 대학교를 Granz Globewalker, 여행하며 음악하기 가 보고는1_한다. 하루는 호스텔에서 알게 된 Nhou와 국립대 만대학교 교정을 걸었다. 그녀의 솔직하고 친절한 성격 덕분 인지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 이 아닌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던 Nhou. 일 년이 지난 오늘 서울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 ���� ��� ��� ���� ���� ���� ���
����� ����� ��� 밤�� �� ��� ���� 결 한국 여행은 이번이 처음인가. ��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에 가도 있
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으로 펼쳐진 시공간이 그렇다. 4일간 휴가를 보낸다. 드라마와 었다.서울에서 내가 만났고 만나고한국 있는 사람들영화를 또한 즐겨 보는 편이다. 최근에는 웹드라마 <드라마월드>를 보았는 데 재밌더라. 이렇게 직접 와 보니 새롭다. 낯선 풍경에 북적이는 사람들로 아직 정신이 없다. 아름다운 여행지의 하나였다. 여행을 이야기하
고 싶었으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 이곳에서 가장 먹어 보고 싶은 음식이나 가장 가 보고 싶은 장소가 있나. 각했다. 사람을 여행해볼 작정이라고. /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온 것은 아니다. 대만에 있으면서 한국 음식점에 가 보기는 했지만 한국 음식을 잘 알지는 못 한다. 같이 일하는 친구가 추천해준 음식이 있는데 해장국, 오리고기, 순두부찌개, 냉면, 목살 등이다. 가능한 한 다 먹어 보고 게스트하우스에는 다양한 삶이 오고갔다. 그 싶다. 가 보고 싶은 곳은 DMZ고 내일 아침에 가려고 한다. 랜트는 미국에서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행을 영어를 온 사람치고는 그의 하루가 현재 대만에서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꽤 정적이었 다. 그는 공용 공간에서 편의점 음식을 먹거나 비틀즈의 전곡을 모아미국 놓은 교본을 옆에 1년 전 처음 대만에 왔다. 고향은 미네소타 주에 있는두고 작은 도시다. 우리가 작년 8월 말에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네가 서 울로 돌아간 직후 9월에 구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오후 2시부터 7시 30분까 기타를 치고는집을 했다. 내가 그의 반려자와 다름 지 일하면서 하루에 세 개의 대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좋아해서 이 일 역시 하고 없던 기타를 두 수업을 동강 진행한다. 내기 전까지는(당분간 는 전공했고 비틀즈와아이들을 로드리게즈 만큼이나 그의즐겁게 노래를 있다. 아이들이 정말 귀엽다. 오전에는설칠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하루하루좋아한다. 바쁘게 지내는 것 같다. Hey Jude를 배우겠다고 일은 없으리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의사가 될 것을 고향을 떠난 타국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외국에서 살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기대했지만 6살 때부터 그는 음악을 꿈꾸었다 조금 더 오래 머물 줄 알았는데 시드니에 갔 고 한다. 소망은 오랜 시간 그대로였으나 대학 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 보고 싶었다. 어느 한 곳에서만 지내다 보면 작은 세계에 갇히는 것 같더라. 그렇다고 여행을 많이 다닌 을 졸업한 후에야 그는 온전히 음악을 하기로 것은 아니다. 일본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이해하고 싶었 마음을 먹었다. 나도 오래 있고 싶었지만 관광비자만으로는 그 다. 처음 대만에 왔을 때 힘든 점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사람을 이해하고 문화를 이해하게 되면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자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연스러워졌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 직접 녹음한 아홉 지 시드니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비행기 곡이 담긴 CD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요즘 나
표를 사기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며 지낼 수 있었을 거다. 왜 대만이었는지 궁금하다. 어딘가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인터넷으로 여러 나라를 찾아보았다. 사람이 좋다는 말이 많더라. 그렇게 무리하게 일하지도 않고, 일이 끝나고 술을 많이 마시는 일도 별로 없다고. 일본과 한국은 술을 많이 마신다더라. 하하. 이외의 특별한 이유가 있 던 것은 아니고 그냥 대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도 있나. 지금 일하는 곳에서 일 년만 더 일하기로 했다. 이후에는 고향에 돌아가려고 한다. 이후의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이들이 좋고,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에 더 마음이 가더라. 독서는 내게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작가는 독자를 행복하게, 슬프게, 화나게,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감 정과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글, 정리 : 이내
건축이 좋아. #31. 어쩌면 모든 것이 가능했을, 20세기 중반의 방콕, 그리고 짐 톰슨. aoikasa
삶이란 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새로운 길을 만나는 게 아닐까. 오랜시간 준비했던 유럽여행의 취소, 그리고 차선으로 선택한 태국여행. 늘 가고픈 곳도 많고 보고픈 것도 많은 나이지만, 유독 태국 아니 동남아시아만큼은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던 터라 큰 기대 없이, 아니 어쩌면 아무 기대없이 발게 된 땅 방콕이었다.
그래서일까. 예상치 못한 만남이 더 반갑게 여겨지고, 그 감동 역시 몇 배였던것은... 'Jim Thomson' 태국의 대표적인 실크 브랜드이름이자 해당 브랜드의 창립자 이름. 1906년 델러웨어에서 태어나 펜실베니아에서 대학을 다닌 후 뉴욕에서 건축가로 일하던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특공대로 태국에 파견되었고, 전쟁 이후 태국으로 이주해왔다. 첫 1년은 오리엔탈 호텔 복원 사업을 하며 건축가로서의 경력일 이어갔으나 이내 그는 태국의 실크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태국에서 실크는 다른 기계 직물들의 등장으로 점점 쇠퇴하던 중이었는데 그는 태국의 실크 산업의 상업화에 주목하고, 뉴욕에 태국의 실크를 소개하고 the Thai silk company를 설립하였다. 특별히 '왕과 나'의 의상에 태국의 실크를 공급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가 태국에서 실크 산업을 시작한 지 10여년 후인 1960년대에 이미 태국에는 실크 회사만 100개가 넘었고, 이 나라의 대표 산업이 되기에 이르렀다.
짐 톰슨 하우스는 방콕의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짐 톰슨이 1958년 건축을 시작해 1959년에 완공한 후 1967년 말레이시아의 정글에서 실종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실크 뿐 아니라 태국의 전통 가옥과 전통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눈여겨 보았던 전통 가옥들을 이전해 현재의 장소에 재조합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태국의 곳곳에서 가져온 예술품들과 공예품들로 집안 곳곳을 장식했다. 티크재로 된 이 건물은 하천으로부터 배로 접근이 가능한 입구를 가지고 있으며, 태국의 다른 집들이 그러하듯, 홍수와 맹수를 피하기 위해 기둥으로 높이 건물이 띄워져 있으며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기에 경사가 매우 가파른 지붕을 가지고 있다. 왕궁이나 사원처럼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 않지만, 결코 격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의 이 집은, 톰슨과 또 한 명의 태국 건축가가 디자인하고 아유타야에서 온 목수들이 실제 시공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이 집에는 곳곳에 재미있는 공간들과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배를 타고 오면, 이 곳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배에서 내려 바로 닿는 곳이 이 집의 주출입구이지만(마치 베니스의 집들처럼), 실제 이 집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그 반대편의 게스트용 입구를 통해 이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방문객용 입구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석상 두 개가 놓여 있고, 입구를 들어오면 가파른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이 집의 2층에는 거실, 서재, 식당, 게스트룸 등 주요 실들이 위치하는데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또 인근 하천으로부터의 범람을 피하기 위해, 또한 맹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태국의 전통
가옥들은 2층으로 띄워져 있어 계단으로 올라야 한다.) 이 공간들 곳곳에는 각 나라에서 그리고 태국의 왕궁 등에서 가져온 진귀한 예술품들과 가구들이 가득하다. 2층으로 오르기 전 만나는 현관홀은 아유타야 북서쪽의 팍 하이 마을에서 가져온 건물이라는데, 이 곳의 바닥 대리석 타일은 방콕의 한 궁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출입구 가운데는 사암으로 만든 부처의 토르소가 있는데, 7-8세기 태국의 롭부리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부처 뿐 아니라 이 집의 곳곳에는 불상들이 다양하게 놓여 있다. 어떤 것들은 롭부리지역에서, 어떤 것들은 아유타야에서, 또 어떤 것들은 미얀마로부터 온 것들로 시대도 다양하고 그 양식도 다양하다. 이 집의 중심인 응접실은 1800년대로 추정되는 방크루아의 직조단지 안에 있던 집을 가져와 재조합한 것이다. 작은 방 여러개로 나뉘어 있던 집을 하나의 공간으로 짜맞추기 위해 몇 가지 변형이 일어났는데, 원래 창이었던 것이 벽감이 된다든지, 조각된 패널이 밖이 아닌 안쪽을 향하게 된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응접실과 식당에는 원래 방콕의 왕실에 있었던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데, 그 중 식당의 것은 원래 벨기에산이라고 한다. 역시나 팍 하이 마을의 집 일분를 가져와 만든 식당에는 출라롱코른 왕의 기장이 새겨져 있는 19세기에 만들어진 탁자와 19세기 중국에서 제작된 청화 백자, 14-15세기에 베트남에서 제작된 도자기 등이 있으며 이 집의 중심적인 사교장소였던 만큼, 서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곳의 창을 통해 배를 타고 오는 입구 부분이 보인다. 서재에는 17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랑스 판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침실에는 태국에서 발굴된 크메르 예술품들 뿐 아니라 애완용 쥐들을 위한 미로집까지 놓여 있으니, 집 전체가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라 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침실에서는 외부의 열대정원과 (작지만 정말 밀림같은 느낌을 준다!) 매일 짐톤슨이 배를 타고 건넜던 운하가 보인다.
(중국에서 가져온 사자 석상이 서 있는 출입구 / 정글, 그리고 짐톰슨 하우스)
아무리 격동의 시기였다해도, 한 외국인이 (물론 일반 외국인은 아니다. 태국 실크 산업의 아버지격인 외국인이니) 태국의 다양한 예술품들을 이토록 많이 모아서 자신의 집에 가득 채워놓을 수 있었다니. 그의 보는 눈이 놀랍고, 그 것을 모으는 수완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태국의 전통 가옥에 관심을 가지고 그 것을 가지고 재조립하여 자신의 집을 만들었다는 건 그의 선구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태국의 전통가옥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살리면서도 공간구성이나 전체적인 느낌은 단순화시킨 것은 근대 건축교육을 받은 그였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얼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며, 앵무새와 애완쥐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는 그는 매일 정글을 바라보며, 또 운하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레이시아의 밀림에서 실종되어 버린 그의 마지막처럼, 알 수 없는 짐 톰슨의 장소. 짐 톰슨 하우스는 이국적이면서도 모던한 느낌도 갖춘, 개인적으로는 방콕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였다. 20세기는 서양과 동양의 만남과 그 사이에서의 혼종성(hybridity)가 흥미로운 시기. 식민지를 겪지 않았던 태국에서도 한 미국인이 이토록 혼종적인 장소를 만들어냈으니, 한국이나 중국와는 또 다른 색깔의 20세기를 맛본 기분.
짐톰슨 하우스를 둘러보고 나오며 머릿 속에 내내 머물던 질문은 “대체 그는 어떻게 중국, 인도네시아, 벨기에, 베트남, 프랑스 등등 각 국의 물건들을 다 그의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설령 그 것들을 직접 가져온 것이 아니라 태국의 왕궁 등에서 가져왔다 하더라도, 대체 왕실과 어떤 관계였길래 왕궁에서 대리석 타일도 떼오고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였다.
글쎄. 결론은...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니까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무한한 기회의 시간이었을 20세기니까.
Tip.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인들은 많이 오지 않는 곳인 듯 하다. 가이드 투어만 가능하고, 영어 / 일본어로 제공된다. 약 30분간의 가이드 투어 동안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나 사진 촬영은 금지. 가이드 투어가 끝나고 나오면 원래 차고였던 곳을 개조한 책방에 들리면 짐톰슨 하우스에 관련된 책들과 무려 한국어로 된 가이드북도 살 수 있다. ^^ 별개의 동에는 짐톰슨 매장과 꽤나 괜찮은 레스토랑도 있으니 짐톰슨 하우스를 바라보는 외부에서 식사하는 것을 추천.
(왼쪽은 짐톰슨 매장, 오른쪽은 레스토랑. 짐톰슨하우스 관람은 6시까지지만 이 곳들은 좀 더 오래한다.)
p.s. 지난 3개월간의 휴재는…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건축이 좋지가 않았기에… 아니 ‘건축이 좋아!’라고 느낀 시간이 거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이었습니다만, 다시 건축에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하고 용기내어 연재를 이어갑니다. ‘건축이 좋아!’라고 언제까지나 마냥 행복하게 외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진파
절제의 형법학 p17:
사형존폐론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법철학, 헌법, 형법과 형사정책 등의 여러 분야에서 이 논쟁의 거의 모든 쟁점이 검토된 바 있다. 적어도 형법학계에서는 사형폐지론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입장을 요약하면, 사형은 국가 이전의 인간의 천부적 권리이자 헌법상 모든 기본권의 본질적인 부분인 생명권을 박탈한다, 사형은 사회방위라는 국가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사형은 형벌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적합성, 피해의 최소성 등 원칙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사형은 예모범(豫謀犯), 격정범(激情犯), 확신범 모두에게 위하력 (威嚇 力)을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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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이라도 법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로 나아갈 수 없다.
경 계인
9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나의 좌표는
글. 스푸트니크 (salomet@naver.com)
이 연재의 제목을 ‘경계인’이라고 지은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이전에도 언급했듯 한때 BPD(경계성인격장애)라는 증상과 유사한 증상으로 고생한 것 때문이다. 두번째는 내 인생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고 지금까지도 극복해야 할 최대의 과제가 ‘나를 지탱해온 세계와 내가 지향하는 세계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이기에.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영화 주인공처럼 나의 한계를 넘어 탁월함의 세계에 한번 도달해보고 싶다는 소망들은 누구나 한번쯤 혹은 평생 갖게 될 것이다. 김연아의 클린한 연기를 보고 있을 때, 남성 격투가인지 헷갈리는 UFC 격투가 크리스 사이보그의 훈련영상을 보다 보면 뭔가 온몸이 찌릿해져 오면서 이 세상의 중력을 벗어나려는 이카루스의 움직임을 목도하는 것만 같다. 그런 몸부림은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리듯 평생 나약한 인간으로서 매일 거르지 못할 숙명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란 슬프게도, 세헤라자데로 천일동안 뱉어낼만큼 널린 것이다. 원치도 않았는데 태어나는 폭력적인 탄생인데다가 내 무의식의 프로그래머가 될 가족구성원들을 제비뽑기로 만난다는 것 등등, 이미 삶이란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옛날과 달리, 양반집과 궁궐담이란 것도 요즘엔 유리장벽으로 바뀌어 훤히 그 ‘불가능한 좋은 것’들의 상대적 괴리감은 오히려 더 높아진 것만 같다. 자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인스타그램은 내 콩알만한 자존감에 쥐약인 것. 이 세상에서 나만 빼놓고 다 행복해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어떻게 행복하게 ‘잘’살 것인가. 그리고 세상에 어떻게 나갈까.
어렸을 때부터 질투가 심했다. 그 힘으로 공부를 하기도 했고. 초등학교때 반에 ‘ 채송화’라는 이름도 어여쁜 친구가 있었는데,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흠잡을 데가 없었다. 요즘말로 ‘엄친딸’, ‘우월한 유전자’였던 셈이다. 그에 반해 나는 4살때부터 사시 때문에 돌리네 안경을 꼈고 어른들이 내 외모를 갖고 칭찬하는 코멘트는 ‘똑똑하게 생겼네’정도. 정확하게 그 무렵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산에 대한 불편함이 생긴 시기가. 항상 내겐 ‘노력’이외엔 답이 없었으니......
중학교 때 영어 말하기 경시대회에 나갔다. 첫번째에 상도 타고 두번째 대회를 준비할 무렵 지도 선생님이 세 명을 앉혀놓고 아빠 직업이 뭔지 물어봤다. 각각 ‘교수’, ‘의사’ 라는 대답이 나왔고, 나는 ‘피아노 조율사’라는 직업을 말할 수가 없어 ‘피아노사 사장’ 이라고 구라를 깠다. 초등학교 복도에서 IQ에 따른 직업분포도 맨 밑바닥에서 그 직업을 목격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조율을 하시지만, 피아노 운반도 같이 하셨기에 항상 ‘구루마’를 갖고 다니셨고 봉고가 아빠의 자가용이었다. 사춘기때엔 그게 창피해서 학교에 날 데려다주실때 교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달라고 해 아빠 마음에 못을 박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선 전학을 하도 많이 다니니 이제 친구를 사귀는 것을 포기하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아이들은 내 첫인상을 보고 맘에 안들었던지 왕따시키기도 했는데, 성적이 나오면 그제서야 인기있던 부반장이 짝꿍하자며 회유하는 걸 보고 ‘패거리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반에는 항상 뒷자리에 앉는 잘나가는 아이들과 앞이나 중간에 앉는 평범한 아이들의 경계가 있었다. 나는 항상 어디에도 정확히 속하는 법이 없었다. 조용히 살자니 내 안의 상승욕구, 야망이 들썩거렸고, 메이저그룹에 끼기엔 유머감각과(그것도 유전인 것 같다) 결정적으로 잘 사는 아이들이 갖고 있는 ‘여유’같은 것이 없었다. 차별에 대한 감각을 깨친 후에는, 나라도 그렇게 사람을 대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타고난 아름다움은 그대로 인정하되, 나는 노력과 땀의 아름다움을 지지하겠다’고. 그리고 적어도 탁월함의 기준은 내 자신에게만 적용시킬 뿐 남을 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됐다.
지금 내 생계인 과외를, 내가 학생 때는 가난해서 받지 못했다. 새엄마가 어설픈 서울사립대 갈바엔 경북대 가라는 말에 탈출감행, 혼자 서울 전학까지 해서야 겨우 원하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정작 들어와보니 새로운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턱걸이다보니, 우수한 아이들 사이에서 이제껏 인식하지 못했던 내 악습관, 불성실, 온갖 결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나마 잘한다는게 공부였는데 그마저도 타이틀을 뺏기니 정체성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앞서가는 삶’의 낙이 없어지니 어떤 것에도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기에 내 하나밖에 없던 지원군인 ‘노력’의 미덕을 잊고 지내기도 했다. 방황하다가 들어간 락밴드에서는 한 기수 위 선배가 AC/DC의 Back in Black 을 초고음역으로 불러내어 기를 팍 죽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셀프비교가 습관이었던 내게는 대학자체가 지옥이었다.
결국 나름의 대책은 틈새시장이나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동아리 선배들이 RATM (Rage against the machine)의 내한공연에 데려갔는데, 예습하다가 보컬 잭 덜라로차의 맛깔난 랩의 매력에 눈을 떴다. 게다가 그 좌파밴드는 가사가 예술이었다. 계급에 대한 불만도 높아져 있던 때라 신나게 외워 부르다보니 자신이 생겨 공연에도 올리게 되었다. 노래실력으로 감탄시키게는 못해도 관중들이 앞에 뛰어나와
헤드벵잉하고 신난다는 평은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엔 선배들이 ‘우리도 공연때 RATM 공연하고픈데 부럽다’는 피드백을 보냈다. 결국 그 길로 점점 음악에 빠져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 똑같이 살 필요는 없지 않나. 똑같은 행복을 추구할 필요도 없고. 물론 세속적으로 성공했고, 그것으로 카르텔을 형성하고자 하는 친구들은 정신건강을 위해 멀리 하고 있다. 나도 내 길로 성공한다면, 모두에게 열린 사람이고 싶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능력만 된다면 조금 더 열린 사회를 만드는데 보탬이 되고도 싶다.
또 하나는 루쉰의 아Q가 부러울 정도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내가 얼마나 위로 솟아있는지 현재 나의 좌표만 본다. 어떤 밑바닥을 헤치고 나왔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너는 왜 그것밖에 못하냐며 쪼는 사람만 많고 칭찬해주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좋은 것을 가까이 하고 싶으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대고 일일이 내 상황을 설명하면 ‘변명이 많다’고 할테니 그냥 자책하고 방구석에 숨기만 하라고? 아니 아니, 아니올시다. 반성은 하되, 나도 뻔뻔하게 기어 나와야한다. 그러려면 내 편이 있어야 한다. 나같은 인간들은 흔히 그렇듯 의지할 부모들은 다들 자기 삶 힘들다고 허덕이고 있으니 믿을 구석은 나 자신밖에 없다. 내 고락을 모두 지켜봐온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으니까, 자기합리화는 해야 한다. 잘했다고 칭찬해주어야 한다. 남들과 같은 잣대로만 내 좌표를 정해선 안되고, 내 마음속에 나만의 상대적인 좌표를 정해주고, 도닥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주의사항이 있다. 아Q가 끝내 비극으로 끝난 것은 그 합리화가 ‘ 정신승리’만 하고 끝났기 때문이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좌표 만들기가 어려운 것은 그런점에서다. 그 일방적인 정신승리의 관성은 결국 나를 몰락시키기 때문에, 어제의 나보다는 그래도 나아지게 앞으로 나를 이끌어야 한다. 모든 좋은 것들이 나를 소외시킬 때, 기준은 ‘어제의 나’보다 좋은 것이 없다. 사람은 바뀌기 힘든 법이라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증거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껏 좌충우돌의 삶을 갈아넣은 나의 최후 모토는 ‘정성’이다. ‘자기절제’, ‘중용’ 같은 모토는 왠지 너무 멀고 차갑다. 그런데 ‘정성’은 다르다. 자기절제든 중용이든 ‘정성’ 이 없이 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구태여 저런 언어들로 격을 나누어 나를 소외시킬 필요는 없다. 나만의 격언을 만들어 나침반 삼고, 내 좌표를 잘 챙기는 것. 그게 현재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다. 내가 생각하는 탁월함의 세계는 그 여정 끝에 있을 것이다.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9. 또 다른 올림픽 글. exxx
2016 하계 올림픽이 끝난 리우에서 9월 7일
패럴림픽과 관련된 신체적 장애는 근육의 손상
부터 패럴림픽이 개최된다. 오늘은 이것과 관
(하반신 마비 및 사지마비, 근육 영양 장애, 포
련된 이야기를 위키에서 정보를 끌어모아 정리
스트 소아마비 증후군, 척추 피열), 수동적 운
소개해 보려고 한다.
동장애, 사지 결핍 (절단 및 지이상), 다리 길 이의 차이, 짧은 신장, 긴장과도, 운동실조, 아
패럴림픽은 (paralympic Games)신체적 장
세토시스, 시각 장애, 지적 장애를 포함한다.
애가 있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제 스포츠 대
1980년 이까지는 의학적 분류를 기준으로 선
회이다. 1948년 세계 2차 대전의 영국 퇴역
수를 분류하였으나 1980년 이후로는 기능적
군인들의 작은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의
분류로 선수들의 장애가 그들의 선수 활동 운
paralympic은 척추 상해자들끼리의 경기에서
동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중점을 둔다. 이 시스
비롯되었기 때문에 ‘paraplegic’(하반신 마비
템에서는, 전체 다리 기능의 손실을 가진 선수
의)과 ‘Olympic’(올림픽)의 합성어였다.그러다
들이 대부분의 종목에서 함께 경쟁 하게 된다.
다른 장애인들도 경기에 참여하게 되면서 현 재는 그리스어 전치사 ‘para’(옆의, 나란히)를
패럴림픽은 운동성과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대
사용하여 올림픽과 나란히 개최됨을 의미한다
회가 이루어진다. 동계 패럴림픽과 하계 패럴
고 설명하고 있다. 초기의 ‘paralysis’(마비)나
림픽이 있으며,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이후
‘paraplegia’(하반신 마비)의 원래 어원에서는
로는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에서 국제 패럴림픽
벗어나 있다.
위원회의 주관 하에 개최된다. 1988년 처음으 로 이것이 정립되었다.
청각 장애인과 발달 장애인은 패럴림픽에 출 전하지 않으며, 청각 장애인은 데플림픽에, 발
하계 패럴림픽의 종목은 다음과 같다.
달 장애인은 스페셜 올림픽에 출전한다. 패럴 림픽을 흔히 장애인 올림픽이라고 부르긴 하지
(굳이 종목을 나열하는 이유는 선수들의 경기
만 올림픽 위원회에서 올림픽이라는 이름을 사
모습을 확인해 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용하도록 허가한 것은 스페셜 올림픽 뿐이다.
골볼 / 뇌성마비 7인제 축구 / 보치아 / 사격 / 사이클 / 수영 / 승마 / 시각 장애인 5인제 축구 / 양궁 / 역도 / 요트 / 유도 / 육상 / 조정 / 좌식 배구 / 탁구 / 휠체어 농구 / 휠체어 럭비 / 휠체 어 테니스 / 휠체어 펜싱
리우패럴림픽 참가 대표선수단은 총 139명(선수 81명, 임원 58명)으로 수영, 양궁, 유도, 육상, 조정, 탁구, 테니스에 참가한다. 패럴림픽은 오는 9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개최되며, 개막 식은 현지시각 9월 7일(수) 저녁 6시 15분에 마라카나경기장에서 열린다. 홈페이지에서 경기 관 람도 가능. http://2016rio.koreanpc.kr/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스페셜 올림픽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여동생이자 로버트 F. 케네디의 누나인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가 1963년 미국, 메릴랜드에서 지적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일일 캠프를 개최한 것이 계기로 시작되었다.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는 많은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 지적발달장애인(정신지체장애인)들이 스포츠와 신체활동분야에서 뛰어난 자질 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고, 조지프 P. 케네디 주니어 재단의 후원을 받아 1968년 시카고 솔저 필 드에서 제1회 스페셜 올림픽 국제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스페셜 올림픽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스페셜 올림픽은 지적발달 장애인들이 개인이나 단체 스포츠에 참가하여 적절한 지도를 받고 격 려를 받는다면 그들도 배울 수 있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수많은 장애인 들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함으로써 장애인들에 대한 부 정적인 태도를 바꿀 수 있으며, 장애인들을 받아들이고 축복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재미삼아 마무리 이야기를 더하자면 나는 패럴림픽과 관련해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갖고 있 다. 군대 이등병 시절 처음 배치 받은 곳에 도착했을 때 TV에서 패럴림픽 폐회식이 틀어져 있었 는데 폐회식에서 나오는 노래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상태에서도 곁눈질로 TV를 보면서 그 밴드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려고 머리속으로 외우고 또 외웠다. ‘제발 까먹지 않 게 해주세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밴드여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선배에게 부탁 해 앨범을 구하기 까지 2년 정도가 걸렸는데, 아직까지 그 앨범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글과는 조 금 연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1998년 호주 song of the year 곡이니 들어보자. Whitlams - No Aphrodisiac .
오늘 알아본 이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 이다. 나도 글감을 찾아 헤메기 전까지는 패럴림픽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한 장면 처 럼 당신에게도 이 글이 한 장면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그런거 좋지 않은가.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인정해 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