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영화 수업 -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로 읽는 시공간 - ‘과함’ 의 미학, 그 짜릿함에 대하여: 아수라 / 글. 곡주대비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퀴어 시를 스케치하다 - 6월 12일 올란도 / 글. 루나 옆사람 인터뷰 - 떠돌이 가족의 마을 영화 /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 32. 별이 쏟아지는 그 곳, 호시하나 빌리지 / 글. aoikasa 지진파 - 법률가의 탄생, 불멸의 신성가족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경계인 - 10화. Unapologetic - 착한아이 증후군 벗어나기 / 글. 스푸트니크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10. 다 같은 2016년 / 글. exxx
태풍이 지나고 오늘은 날이 좀 흐립니다. 기본적으로 월간이리는 시기를 타지 않는 잡지를 지향하기 때문에 왠만해서는 표 지의 숫자와 저의 인사말만이 출간 시기의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0 월호에는 그 즈음에 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매번 인사말을 쓸 때마다 언 젠가 썼던 글을 또 쓰고 있는 것 같은 강한 기시감에 빠지곤 합니다. 두렵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따로 새롭게 쓸 말이 없다는 것이죠. 하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뭐 잘났다고 매번 이것을 저만 쓰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 다. 왜 이제까지 한번쯤은 필진 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코너를 열어주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다음달에는 잘 골라서 필진 분 중 한 분에게 이 코너 글을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탈 권위적이면서 방만한 운영을 하는 잡지 어디 보셨습니까.. 여러분, 이 모든게 느슨함에서 나옵니다. 운동을 할 때도 쉬는 날이 있지요. 밥을 먹고도 소화하는 시간이 있고요. 저희는 여러분에게 여백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 다. 그래서 흑백인쇄를... (아닙니다.) 가끔은 월간이리의 내용들이 조금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저희는 힘을 주 기 보다 빼는 개구진 집단을 하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늘 관심있는 분 야 늘 신경쓰는 분야에서 벗어나 눈을 돌릴 때 마음에 담아둘 그럴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죠. 뭐 그렇습니다. 당장 다음달부터 약 10달간 제가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벌 써 그만 쓰고 싶어지네요. 그럼 다시 만날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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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수업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화란 무엇인가? 모든 학문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그 학문의 본질을 물어보는 질문이다. 문학은 무엇인가? 음악은 무엇인가? 미술은 무엇인가? 1년 전, 어느 수업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화가 뭐지?” 학생들은 말이 없었다. 영화를 좋아하고, 짧은 시간이나마 영화를 공부하면서 나도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자문해 본 적이 없다. 영화는 무엇인가? 그 이후에 몇 시간 정도 영화의 기본 요소나 영상이 영화가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 명확한 결론을 내기가 힘들었다. 뭐, 그게 그렇게 중한가?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스스로에게 ‘아 그래서 영화가 뭐였더라?’ 다시 자문한 건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Bristol 에서 매년 열리는 Encounters Short Film Festival에서 열 다섯 편 정도의 단편 영화를 봤는데, 그 중 한 영화가 나에게 다시 그 머리 아픈 질문을 던진 것이다. 존 스미스(John Smith)의 Steve Hates Fish (2015)는 5분 가량의 영화로, 스마트폰 번역 어플리케이션(이하 어플)으로 촬영된 영화이다. 간판 등에 카메라를 대면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해주는 이 어플은 오류가 많다. 감독은 이 영상을 런던 길거리에서 촬영했는데, 어플을 런던 거리의 간판에 적용했을 때 번역이 필요하지 않은 영어 간판들을 엉뚱한 단어로 바꿔서 보여주는 식이다. 심지어 아무런 글씨가 없는 창문까지 번역을 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감독의 Vimeo 계정 링크; Steve Hate Fish 일부 영상 https://vimeo.com/151430983 ) 영화를 볼 때는 별 다른 고민 없이 보고 넘겼는데, 하루 일정을 마친 후 리플릿을 보면서 당일 봤던 영화들을 찬찬히 되짚어 보다가 문득 이 한 작품이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이걸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거야?’
글.kim
아무리 영화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하지만, 영화 역시 기본적인 구성요소가 있다. 마치 교과서에서 음악의 3요소가 리듬, 가락(멜로디), 화음이라고 배우듯 말이다.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영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두가지 요소를 조형성과 몽타주라고 말한다. 조형성에는 무대장치와 분장양식, 연기양식, 조명, 화면구성 등 구도를 완전하게 만드는 여러 조건들이 포함된다. 몽타주는 편집으로 영상의 시간성을 조정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종합해보면 결국 영화는 구도와 시간의 예술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앙드레 바쟁은 모든 영화에서 조형성과 몽타주가 영화의 본질이 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영화 장비의 기술적인 발전에 의해서 영화 매체에 다양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영화에 말소리를 입힐 수 있게 된 것이나, 기동성이 좋은 카메라로 야외촬영을 손쉽게 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그런 예들 중 하나이다. 기술의 발전은 감독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감독들은 때로는 기존의 양식을 발전시키고 보완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때로는 파격적인 방법으로 영화 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영화보다 앞선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의 예술에도 ‘00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관객들의 웅성임과 기침소리로 가득한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나 공장에서 찍어내는 앤디 워홀(Andy Wahol)의 그림들,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작가 이상(李箱)의 시가 그렇다. 당시에는 파격의 작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모두 작가 각각의 작품에 담은 의미를 인정받고 하나의 새로운 형식, 혹은 작가만의 스타일이 되지 않았는가. 아마도 이것은 각 예술분야에서 많은 세월 지식과 경험을 쌓고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작가들이 걸어온 길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존 케이지의 4’33” 악보)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고 나서야 나는 감독에 대해서 찾아봤다. 어린 감독의 엉뚱한 발상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존 스미스는 1970년대 중반부터 활동한 실험영화 감독이며, 내가 흥미롭게 봤던 The Girl Chewing Gum(1976)1) 이라는 실험 영화의 감독이었다. 이런 과정의 끝에서 나는 존 스미스의 ‘Steve Hates Fish(2015)는 영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취향에 맞지 않은, 그리고 기술적인 면이나 창의성에서도 전혀 흥미롭지 않은 실험영화라는 부연을 덧붙이기로 했다. 영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다른 예술의 의미까지 훑어보며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다지도 속이 후련할 수가 없다. 존 스미스의 영화 뿐 아니라 그동안 봐왔던 많은 실험 영화들 – 여덟시간 동안 엠파이어 빌딩을 찍은 앤디 워홀의 Empire(1964) 라든가 43분동안 방 안에 고정된 카메라를 서서히 줌인’만’하는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의 Wavelength(1967)- 까지 왜 ‘영화’ 라고 불리고 있는지 명확해진 느낌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앙드레 바쟁의 영화 공식을 대입해보더라도, 영화는 나름의 조형성을 가지고 있으며, 감독이 나름의 생각으로 편집을 통해 몽타주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어쩌면 감독이 ‘영화’로 만든 영상물을 보면서 ‘이것은 영화인가,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마 어리석은 것이었을 지 모른다. 세상에는 영화가 아닌 영화는 없다. 관객은 영화를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 영화의 영화적 장치들이 효과적으로 쓰였는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찍었는가 등 다양한고 세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뿐이다.
1) 1976년 존 스미스가 만든 작품.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찍은 후, 후반 작업으로 감독의 오디오를 추가했는데, 사 람들이나 차가 지나가기 전 마치 감독이 지시를 내리는 것 같은 내레이션을 씌웠다. 당시 기존 주류영화에 반하는 방법으 로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주목할만한 실험영화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 (감독의 Vimeo 계정에 올라온 영화 일부 영상: https://vimeo.com/102716538 )
‘과함' 의 미학 (Aesthetics of an Excess), 그 짜릿함에 대하여: 아수라 (김성수 작, 2016)
영 화 로 보 는 글.
시 공 간
곡주
대비
*스포일러 주의 수 년 전 일이지만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에 대해서 ‘폭력미학’ 이라는 제목을 붙여 소논문을 쓴 적이 있다. 두 명의 남자 주인공들이 소대 하나는 족히 넘길 인원을 기관총 몇 개로 뭉개 버리는 성당 라스트 신은 영화사에서 두고 두고 회자 되었고, 아울러 80년대에 오우삼이 만들었던 일련 의 홍콩 느와르 영화들은 폭력과 ‘후까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영화적 시 (時)로 표현 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인 텍스트 같은 작품들이었다. 아수라를 보고 나면 80년대 오우삼 감독의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프닝 크레딧 부터 클로징까지 지긋지긋하게 일관적으로 어두운 필름 톤, 시대와 공간을 가늠하기 힘든 암울한 뒷골 목들, 범법과 합법의 제약에서 애당초 벗어나 버린 디스토피아 적인 캐릭터들. 등장인물 들은 피 칠갑을 두른 만신창이에 몸에도 조롱과 냉소를 쏟아 내고 그들의 마지막 대결은 대극장의 발레 공연처럼 우아하고 성스럽게 전시된다. 아수라는 80년대 홍콩 느와르 장르의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 ‘베 테랑’ 등 의 계보를 잇는 이른바, ‘한국형 비리 장르 (악덕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절대악에 맞서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가진 영화)’ 의 스토리를 입혀 2016년에 재탄생한 새로울 것 없는 ‘복고풍 영 화’다. 줄거리와 캐릭터의 뻔함을 느와르 식 ‘추억의 장치’들이 메워주고 있으며 관객의 평이 극 단으로 갈리는 것은 영화의 즐거움이 이러한 장치들을 얼마나 소환할 수 있으며 즐길 수 있는가 에 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가상의 도시, 안남시의 악덕 시장, ‘박성배 (황정민 분)’ 그리고 그의 악행을 뒷처리하는 비리 형사, ‘한도경 (정우성 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박성배의 비리 질주를 응징하고자 하는 검 찰, ‘김차인 (곽도원 분)’ 이 한도경을 미끼로 쓰기 위해 접근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파괴
하는 ‘아수라’ 판이 열린다. 결론부터 말 하자면, 아수라는 느와르 장르의 관습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표현의 수위나 방법이 극단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3초 마다 육두문자를 들이 붓는 대사에서부터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 든 폭력과 살해 및 자해 장면까지 기존의 한국 영화들이 시도 했던 관습 들을 두 세 배씩 응축하 여 설정과 비주얼을 꾸린다. 예컨대, 유리컵을 씹어 뱉고, 커터칼로 머리를 찢고, 코를 산산 조각 으로 만들어 버리는 (정면) 린치 장면 등은 최근 제작된 한국 영화들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수위 의 폭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고 하고 아수라는 훌륭한 영화다. 별 다섯개 짜리 뻔 한 영화라고 할까?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토록 과한 설정과 캐릭터들이 개연성이 다소 떨 어짐에도 불구하고 짜릿하고 빛난다는 것이다. 이에 공헌하는 것이 배우의 연기나 미장센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아수라는 특히 공간과 빛을 구성하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작품이다. 시종일관 어둡고 좁지만 아수라에서 보여 주는 공간들은 등장인물에 맞게 도식적으로 활용되고 빛은 공간과 인물을 유기적으로 표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수라의 캐릭터들은 누구 하나 정상적인 면 하나 찾기 힘든 악인들 이 지만 각자가 가진 두려움, 욕망의 정도가 다르다. 그들에게 입혀지는 공간은 이들의 내면을 반 영하고 그에 따라 기능한다. 정우성이 분하는 한도경의 경우, 비리를 일삼지만 그의 악행은 병든 아내의 치료비를 위함이라 는 나름의 명분이 있으며 그는 어쩌다가 잘못 걸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억울한’ 인물이다. 이 를 반영하듯 그가 속한 공간은 창도, 빛도 없는 극도로 작고 폐쇄적인 공간이고 이 안에서도 주로 모서리에 배치된다. 가령 한도경이 김차인에 의해 트럭 (수사팀이 잠복용으로 쓰는 탑차) 으로 불려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한도경은 씨퀜스 내내 한 번 일어나 보지도 못한 채 트럭 의 모서리에 ‘꼬불쳐’ 진 채로 심문 당한다. 동선이 공간의 지배를 받고 이는 연출적인 계산으로 보인다. 한도경의 모서리 배치는 재개발 구역 뒷골목 지하방 (역시 비밀수사를 위한 위장 공간) 에서도 보여진다. 김차인에 의해 몰래 찍힌 섹스비디오로 협박 당하는 이 장면에서 한도경은 좁 아 터진 지하방 안에서 조차도 코너에 몰려 무릎을 꿇는 것으로 절박하게 표현된다. 반대로 박성배는 절대 권력을 가진 인물로 그가 소유하거나 차지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넓고 탁 트인 장소들이다. 가령 법원 중앙 복도, 재개발 사업 계획 발표장, 사격장 그리고 피날레가 펼쳐 지는 장례식 장까지. 이 장소들에서도 박성배는 계단 위에 선 다는지 (법원 복도), 책상 위에 앉 는 다는지 (사격장) 하는 배치로 다른 캐릭터 보다 다소 높은 곳에 위치 하고 그의 공간은 인공적 인 빛 (스포트라이트나 무대 조명, 백열광) 으로 다른 캐릭터들 부다 훨씬 밝게 조명된다. 어두운 후경이나 전경으로 한도경의 얼굴 조차 가려버리는 테크닉과는 대조되는 화법이다. 이 외에도 한국영화사에 기리기리 남을 차량 추적씬 (카메라 워크) 이나 한 편의 뮤지컬을 보고 있는 듯한 장례식 피날레 (음악의 사용) 등은 아수라 라는 작품이 한국 영화의 작법을 모조리 넘 어서는 보석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굵직한 예 들이다. 이미 다수가 지적한 대로, 개연성 면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영화가 뿜어내는 엄청난 기가 적지 않은 단점들을 눈감게 만든다. 홍콩 느와르가 판을 치던 198,90년대 이후로 이런 ‘과함의 미학’ 을 기다렸던 모두에게 선물 같은 작품이다. Viva Asura!
살들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퀴어 시를 스케치 하다
장면1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한 게이 나이트클럽에서 12 일 새벽(현지시간) 인질극과 함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최소한 50명이 숨지고 53명 이상이 다쳤다. 총격은 새벽 2 시께 올랜도에서 인기 있는 게이 클럽인 ‘펄스’에서 발생했다. (중략) 목격자들에 따르면 당시 클럽 안은 주말 밤을 즐기던 300여명의 남녀로 가득 차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올랜도 총기난사 최소 50명 사망…美사상 최악 총기참사( 연합뉴스, 2016.06.13, 종합5보)
장면2 오늘은 우리의 친구들,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들에게 특히 더 가슴 아픈 날입니다. 총격범은 사람들이 친구를 맺고, 춤추고, 노래하고, 살아가기 위해 찾는 나이트클럽을 노렸습니다. 공격 받은 장소는 단순한 나이트클럽이 아닙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의식을 고양하고 그들의 생각을 말하며, 시민권을 주장하던 연대와 자율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이건 - 인종이나 민족, 종교, 성적지향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 미국인에 대한 공격은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이자, 우리를 한 나라로 묶어주는 근본 가치인 평등과 존엄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을 다시 번쩍 깨닫게 하는 사건입니다. -2016년 6월 12일 올랜도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오바마 미 대통령의 기자회견문
장면3 ‘증오범죄’ 증오범죄(憎惡犯罪), 또는 영어로 헤이트 크라임(영어: hate crime)는 가해자가 인종, 성별, 국적, 종교, 성적 지향 등 특정 집단에 증오심을 가지고 그 집단에 속한 사람에게 테러를 가하는 범죄 행위를 말한다. -위키백과 한국어판
장면4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범죄자들에 의한 미국의 대형 살상 사건들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인권과 교육정책 실패로 인한 장면5 6년만의 콘서 트로 돌아온 가수MC몽의 과거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MC몽은 과거 MTV ‘모스트 원티드’에서 “동성 연애자 에 대해 어떻 게 생각하느 냐”라는 질문 을 받았다. 이에 MC몽은 “우리 나라가 총기가 허가 된 나라라면 그런 XX들 쏴 죽여야 한다” 라며 “성경에 도 분명 죄라 고 나와 있다” 라고 대답해 모두를 놀라 게 만들었다. -MC몽, 과 거 동성애자 들 관련해 ‘xx 들 쏴 죽여 야’…분명히 ‘ 죄’ (조선비즈 2015.09.05)
인성문제이다. 개인의 인권만을 강조하여 방종으로 치닫게 하고,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지게 함으로 남과 함께 더불어 살며, 남을 배려하고, 생명과 도덕과 윤리를 존중하는 선한 사회적 가치를 파괴시켰기 때문이다. 항문성교를 절대적 인권가치로 부각시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성적자기결정권을 극대화시켜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에 이르기 까지 이를 교육함으로 청소년들을 성적방종과 타락에 이르게 한 미국의 인권정책 실패에 문제가 있다.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올랜도 참사, 혐오 부각시켜 차별금지 입법몰이 하려는 음모 중지하라
6월 12일 올란도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 아무날 내가 죽어갑니다
땅끝부터 땅끝까지 나는 오물을 뒤집어쓰며 핏줄을 잘라내고 이성의 맛을 강제로 입가에 처넣고 투명인간이 되어 생을 사는데
이제는 살지도 말아라 너가 너이니 살지도 말라는군요.
그렇게 내가 죽었습니다 다르지만 다르기에 나인 네가 저 멀리서 스러졌습니다
위로도 울음도 금지된 죽음의 이유조차 파묻어버리는 도리어 축배를 드는 자들이 번화한 지금
나는 아직 살아있지만아직은 살아있군요 유예된 사형을 부둥켜안으며.
루나 @QueerPoemLuna https://www.facebook.com/QueerPoemLuna
**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설마 이런걸 연재가 될까? 하는 것들 다 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
19_ 떠돌이 가족의 마을영화 더운 여름 종종 원효대교 아래에 갔다. 그곳에는 신지승 감
옆 사람 인터뷰
독님, 이은경 피디님, 하늬, 하륵이 가족이 영화를 만들고 있 었다. 하나의 축제 프로그램으로 시민들과 함께 만드는 영화 에 나는 소소하게나마 도움을 드렸다. 영화와 삶이 다르지
1_ 가족. Granz축제가 Globewalker, 여행하며 음악하기 않아 보이는 끝나고 여전히 한강에서의 작업을 이어가고 계신 이은경 피디님을 만났다.
오랜 시간 마을영화라는 것을 만들어 왔습니다. 생소한 개념인데, 어떤 종류의 영화인지 말씀해주세요. �� ���� ��� ��� ���� ���� ���� ���
����� ����� ��� 밤�� �� ��� ���� 결 단순히 농촌 주민이나 마을의 노인, 어린이가 영화에 참여하거나 전문가 집단 중심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에 가도 있 과 소비가 분리되지 않는 공동 생산과 패치워크라는 창작 방식의 영화입니다. 패치워크 기법은 이어 붙인다는 뜻으로 어떤 전 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으로 펼쳐진 시공간이 혀 다른 개개인의 이야기를 하나의 큰 이야기로 엮어가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찍는 것과는 다르지 었다. 내가영화를 만났고 만나고 사람들자본, 또한 요. 기존 프레임으로 만드는 방식은있는 불가피하게 연기자, 극장, 상품적 이야기라는 요소와 결합할 수밖에 없어요. 아름다운 여행지의 하나였다. 여행을 이야기하 싶었으나 한국으로지금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 한강에서 촬영하고 계세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주로 작은고마을에서 작업했는데, 기존의 장소와는 다른 각했다. 사람을 여행해볼 작정이라고. / 한강이라는 공간에서의 작업이 독특하기는 하지만 이전에도 대구의 두류공원과 부천의 영화세트장 등에서 프로젝트를 진행 한 적이 있어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평소 영화와 거리가 있던 사람들, 대개 생애 최초로 연기에 도전하는 사람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다는게스트하우스에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다양한 않아요. 삶이 대중 공동 창작으로의 오고갔다. 그 지향이 중요하지요.
랜트는 미국에서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행을 온 사람치고는 그의 하루가 꽤 정적이었 다. 그는 공용 공간에서 편의점 음식을 먹거나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우연히 원효대교 아래에 사는 원씨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한강 다리를 지붕 삼아 살아가는, 흔히 우리가 비틀즈의 전곡을 모아 놓은 교본을 옆에 두고 노숙자라고 부르는 분이지요. 서울 시민들과 더불어 그가 연기를 하고, 참여하기도 합니다. 또 사우디아라비아, 네팔, 중국, 방 기타를 치고는 했다. 내가 그의 반려자와 다름 글라데시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던 건 한강이라는 공간이기에 가능했던 작업인 것 같아요. 없던 기타를 두 동강 내기 전까지는(당분간 는 비틀즈와 로드리게즈 만큼이나 그의 노래를 Hey Jude를 배우겠다고 설칠 일은 없으리라). 좋아한다. 어떻게 이런 새로운 방식의 영화와 삶을 지향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양평으로 때부터 귀촌했어요. 사람들은 그곳에 그가 의사가 될 것을 16년 전 경기도 살면서 마을의 주민들과 영화를 찍게 되었고, 연기자가 아닌 사람들의 생활 속 기대했지만 때부터 그는 음악을 꿈꾸었다 조금상업성을 더 오래포기하고 머물 줄 알았는데 시드니에볼 갔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한6살 후 지금까지 이 작업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활인들을 선택했다고 수도 고 한다. 오랜 얼굴 시간지문을 그대로였으나 대학 요즘은 어떻게 있어요. 그들의 멋과 소망은 맛, 그들만의 남길 수 있는 기록성도다. 담보한다고 생각해요.지내고 있나. 을 졸업한 후에야 그는 온전히 음악을 하기로 개인이 아닌 한 가족이 함께 영화를 만들며 생활하는 모습이 인상 깊어요. 감독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어진 건가요. 마음을 먹었다. 나도 신지승 오래 있고 싶었지만 관광비자만으로는 그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독립 프로덕션에서 MBC 엄정화의본문화 연출하고 무렵 영화를 시간을 하고 싶어보내려고 당시에 활동하는 감독을 찾 그를 마지막으로 날,프로그램을 직접 녹음한 아홉있었어요. 지 그시드니에서 한다. 비행기 곡이 담긴 CD 한 장을 선물로 받았다. 요즘 나
표를 사기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다가 1996년경 단편영화를 찍고 있던 신감독을 만났지요. 결혼하고 10년 넘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마을영화를 찍었습니다. 농어촌의 순수한 아이들을 만나면서 아이를 갖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다가 네 번째 시험관 시술에 운 좋게 쌍둥이를 임 신했어요. 2011년 하륵이와 하늬를 낳고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찍으며 다니고 있어요. 6살 쌍둥이 하늬와 하륵이가 스스로 스마트폰을 들고, 캠코더를 들고 순간순간을 담아내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참 귀 여워요. 아이들이 어떻게 크면 좋겠다 하는 게 있나요? 요. 아무래도 너무 형식적으로 카메라를 대하지 않도록 하려고 해요. 이번 영화 제목이 <어찌 원효뿐이겠는가?>이거든요. 그 처럼 스스로 즐거우면서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어느 순간 촬영이 없을 때에도 카메라로 촬영 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아이들끼리 ‘레디 액션!’ 하며 연기도 하고요. 지금은 영화 속에서 연기자 역할을 하지만 조금 더 크면 함께 시나리오와 촬영, 연출 등 영화의 전 과정에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요. 마을영화를 하면서 한 달, 아니 며 칠 만에 작업이 고되어 떠나버리는 스태프들을 보면서 힘들고 외롭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함께해주어 즐겁고 의미 있 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10월까지 한강에서 촬영을 이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노숙자라고 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지금은 한강 다리를 지붕 삼아 원효다리 기둥을 벽 삼아 하루하루 캔을 주우면서 기초수급자 생활을 거부하며 살고 있어요. 추운 겨울 껌을 팔고 살아야 하는 그를 위 해 ‘껌 파는 영화제’를 준비 중입니다. 이후에는 거문도의 한 마을에서 촬영을 할 계획이고요. 또 15년간 방방곡곡 마을 시민 들과 함께 만든 작품을 전국마을영화제라는 이름으로 길거리에서 열어가려 합니다.. 글, 정리 : 이내
건축이 좋아. #32. 별이 쏟아지는 그 곳, 호시하나빌리지. aoikasa
살면서 그런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이 영원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순간. 그럴 때 난 조용히 눈을 감고 언니네 이발관의 '순간을 믿어요' 를 듣는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 기억 속의 영원한 순간을 믿어요'
잔잔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귓가에 울리는 내가 젤 좋아하는, 부드러운 이능룡의 기타소리.
그런 순간이 인생에서 가끔가끔 찾아온다. 그 첫번째는 바로 (건축이 좋아 1)에서 다루었던 테시마 미술관에서였고, 두번째는 바로 오늘이 아닐까. 호시하나빌리지의 '수영장' 앞 선베드에 누워 책읽으며 음악을 듣는 순간.
치앙마이 그리고 호시하나 빌리지 올 여름 몇 달 전부터 계획하던 이탈리아 여행을 어이없게 취소하고 떠난 태국. 동생의 여행길에 살짝 올라타 방콕에 들렸다가, 치앙마이로 혼자 왔다. 연구실에 붙여두고 내내 바라만 보던 영화 수영장의 포스터 속 그 곳, 바로 호시하나빌리지에 오기 위해서.
방콕을 떠나 치앙마이공항으로. 치앙마이 공항으로 착륙하는 데 풍경이 다르다. 산과 물이 가득한 북부 태국. 날씨도 꽤나 선선하고 분위기도 조용하다. 공항에 마중나온 카세 료는 없었지만, 그래도 친절하고 영어도 잘 하는 택시아저씨를 만나 치앙마이까지 무사히 도착. 치앙마이에서 하루를 보내고 난 후에는 호시하나빌리지의 운전사 아저씨가 데리러 와 줬다. 치앙마이를 벗어나 40분 정도 달려가니, 치앙마이 그랜드 캐년이 나오고! (이 거 뭐라니!) 잠시 후 호시하나 빌리지가 등장. 분명히 만실이라 했는데 이 곳엔 나와 풀벌레밖에 없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치앙마이 속 작은 일본 같은 이 곳은 일본인 스태프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각자의 cottage가 있고, 그 곳에서 그저 ‘고요하게 그리고 느리게’ 머물다가 가는 곳이다. 호시하나 빌리지에는 총 7개의 cottage가 있다.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는 수영장과 그 옆의 다이닝 공간, 그리고 ichikawa cottage이다. 영화속에서는 마치 수영장 바로 앞에 이 cottage가 있는 거 같지만 그렇진 않다. 각각의 cottage는 모양도 다르고, 내부 공간 구성도 가격도 다르다. suika나
ichikawa, nakaniwa, dam 같은 경우에는 울타리가 쳐져있는 개별 정원도 있지만, 사실 이 건 없어도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호시하나 빌리지 전체가 정원이고 방만 나서면 전부 즐길 수 있으니까.
(호시하나빌리지의 다양한 Cottage들, 그리고 스케치)
Wabisabi (わび(侘)・さび(寂)) 호시하나빌리지의 cottage들은 겉에서 보면 작은 오두막집처럼 생겼다. 목조에 벽돌을 쌓고 그 위에 모르타르를 바른 거 같은 이 집은 일본의 미학인 ‘wabi sabi’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모던하고, 아무 것도 없는 거 같으면서도 매우 본질적인. 에어콘이 없어도 두터운 벽과 깊은 처마는 이 곳의 더위를 피하는데 꽤 효율적이다. 벽을 둘러서 난 고측창들은 방 안의 더운 공기를 계속 빼내어
준다. 일년내내 더운지역이니 가능한 것있껬지만, 저 창문들은 닫을 방법도 없다. 무언가 이 곳에 있으면 나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할 거 같은 그런 기분마저 든다.
와비(侘) / 그리고 사비(寂)는 원래 각각의 미학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붙여서 일본의 전통미학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와비는 말 그대로 낙망할 차(侘), 사비(寂)는 고요할 적을 의미하는데,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이 두 단어가 일본 불교 선종에서 미학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며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미학으로 ‘와비사비’가 자리잡게 되었다. 와비는 무언가보다 변변치 않은, 그래서
소박하고 간소한 것을, 사비는 시간이 지나 모든 게 사라지고 고요해진 상태를, 그래서 정적인 것을 의미한다. 와비사비의 특징으로 Leonardo Koren은 그의 책 Wabi-Sabi for Artists에서 "imperfect, impermanent, and incomplete” 을 들고 있다. 즉,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으며, 또한 완성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와비사비의 미학은 가공된 것이 아닌 날 것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머금고 변하는 것을, 완벽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그 자체로 괜찮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무언가 덜 가공된 듯한 초가지붕, 가공하지 않은 채 그저 나무의 물성 그대로를 드러내는 창살과 기둥들, 아무 꾸밈도 없는 린넨천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 이 모두가 그냥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도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될 거 같은 기분.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듬성 듬성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괜찮은 그런 시간을 선물해주는 것이다.
오두막을 사랑한 이들 18세기 프랑스의 로지에는 ‘원초적 오두막 Primative Hut’이 건축의 본질이라 이야기했고,
마리앙뚜아네뜨는 그렇게 화려한 궁전을 마다하고 작디 작은 시골의 오두막을 사랑했다고 한다. 와비사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센 리큐도 떠오른다. 그의 작고 별 것 없는 다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빛 다실보다 더 숭고한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토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 리큐를 질투했고, 질투에 눈이 먼 나머지 할복을 지시할 정도 —; 였다고 ‘리큐에게 물어라’에선
이야기한다. 뭐, 믿거나 말거나.) 센 리큐가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찾은 것은 바로 불완전한 것들의 아름다움이었으며, 그래서 그의 다완(茶碗, 차마시는 도구)이나 다실 역시도 검소하고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을 갖춘 것들이었다.
오두막은 자연 그대로의 건축이다. 곧게 자라난 나무는 기둥이 되고, 큰 가지들은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보가 되고, 지붕을 만드는 서까래가 된다. 서까래 위에는 나뭇잎 혹은 풀을 말려 만든 것을 올려 지붕을 만든다. 태초의 집, 가장 원시적이지만 집의 본질을 담고 있는 집이 바로 오두막이다. 숲 속에 놓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집, 비를 피하게 해주고 강렬한 햇빛을 피하게 해 주지만, 자연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은 집. 이 집에 벽을 붙이고 창문을 내면 사람이 거주할만한 ‘최소의 집’이 된다.
어쩌면 건축은 이 거면 되지 않을까…. 더 크고 더 높고 더 넓고 더 화려하지 않아도 말이다.
오두막의 매력과 와비사비의 미학은 닮아 있다. 자연이 되려고 하는 것, 아니 자연 그대로 있으려 하는 것 말이다. 특별히 무엇이 되려 하지 않고, 특별히 더 나아지지 않으려 해도 그대로 괜찮은, 그대로 아름다운 것인 채….
호시하나빌리지에서 잠시나마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위로를 받으며, 숨을 골라본다. 오늘 밤에는
별이 쏟아질까.
호시하나빌리지의 또 다른 매력 1. 인근에서 자란 신선한 재료들로 만든 ‘예쁜’ 음식들. 영화 ‘수영장’과
‘카모메식당’ ,’안경’ 등에서 빠지지 않는 ‘소울 푸드’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들에선 특별히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매 식사마다 눈과 입이 즐거워진다.
호시하나빌리지의 또 다른 매력 2. 아침 먹으러 나오면, 먼저 와서 인사하는 호시하나의 고양이들. 영화 ‘안경’의 장소인 요론섬에 강아지들이 있다면, 이 곳엔 느긋한 고양이들이 있다. 갈색 빛깔 고양이는
영화 ‘수영장’에 나온 그 고양이가 맞다.
ㅍ
지진파
법률가의 탄생 중에서..
사법권의 독립이란 법치주의 속에서 최종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법관에게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면제하기로 한 헌법적 지혜일 따름이다. 따라서 사법권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와 독립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곧바로 반 헌법적인 사법 독 재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사법의 독립은 사법의 독점이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고 선언한 이상, 사법에 대한 국민의 참여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전제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 법치주의와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하고 입법대의 기구와 사법대의 기구를 설치한 헌법 구조 속에서 법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정치로부터 소외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따지고 보면 헌 법적 정치는 모두 법을 통한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법의 민주화와 분권 화는 정치적 평등. 법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을 여는 것이다.
이달의 책은 원래 <법률가의 탄생>을 소개할 생각이었지만 비슷한 부분을 좀 더 자 세한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하는 <불멸의 신성가족>을 떼어놓고는 이 코너는 정리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연관된 두 책을 골랐습니다.
좀 쉽고 재미있게 읽는다면 <불멸의 신성가족>을 먼저 읽는게 좋고 실제로 문장도 이쪽이 더쉽게 읽힙니다. 조금 따분하게 느껴져도 틀을 잡고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본 다면 <법률가의 탄생>을 먼저 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지난달에는 조국 교수의 <절제의 형법학>을 소개해서 두 달 연속으로 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게 지루할 것도 같아 부담스러웠지만 왼편에 적힌대로 우리가 사법의 민주화와 분권화를 고민해 보기 위해서는 연이어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생 각해서 이렇게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경 계인
10화. Unapologetic - 착한아이 증후군 벗어나기
글. 스푸트니크 (salomet@naver.com)
‘Unapologetic’은 리한나의 7번째 정규앨범 타이틀이다. 리한나는 반항적인 이미지가 매력적인 요즘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이고,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갖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너무 착하다’는 말이 모욕처럼 들리는 시대가 있을까? 착함은 강아지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배를 보이며 재롱을 떠는 을의 상태, 또는 무능력을 메꾸기 위해 보이는 비굴함의 댓가로 치부되는 것 같기도 하다. 반대로 나쁜 여자, 나쁜 남자는 그 당당한 태도로 추켜세워지고 각광을 받는다. 사실 그건 나쁨, 무례함 자체의 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잘 보일 필요 없는’ 독립적인 상태에 대한 동경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으며 남 눈치 보지 않고 자랐음, 직업전문성을 가졌음, 독보적인 유능함 등의 등가로서 말이다. 또한, 이기적이라는 건, 재수 없을 수 있지만 중심이 외부가 아니라 자기내부에 있다는 것만큼은 보증하고 있다. 남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입한 상태가 멋져보이기도 하고.
-개혁가는 둘째가 많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칭찬받는 걸 좋아했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부모님 모두 집안에서 장남, 장녀였고 나도 장녀였으니 자연스럽게 모범이 되거나 남을 챙기고 배려하는 것을 내 역할이라고 여기며 은연중에 닮아갔다. 중학교에선 선도부도 했었고. 그런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개혁가들은 통계적으로 둘째가 많다고 한다. 첫째는 장녀장남으로서 타고난 책임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막내는 막내답게 사랑을 많이 받고 그 중간에 끼인 둘째는 어렸을 때부터 그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립적으로 투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요지인데, 그럴 듯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내가 부모님에게 못지 않게 많이 배운 사람은 어른이라고 무조건 존중하지 않았고 대들기도 잘했으며 무엇에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둘째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착한’ 감투는 감정노동의 댓가 실제로 나는 그렇게 착하지도 않고, ‘남 앞에서’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평소에 착하고 친절해보이니 나쁠 것 없지 않겠냐 싶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우선, 아무리 이상적인 자아상을 위해 스스로 택한 태도라 할지라도, 착한 척을
하는데는 감정노동이 필요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잘 대해주면 그것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나의 호의를 상대가 당연히 여기고 호구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착한 아이로 자란 사람은 적절하게 불만을 표시하고 브레이크를 거는 법에 서투르기 때문이다. 혼자 불만을 삭히면 결국 절교밖에는 답이 없는 지경까지 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오랜시간 자아상과 실제자아의 갭이 축적되면 자아가 아예 분리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정신병리학의 관심대상이 되는 것: 한마디로 꼬이게 된다. BPD 경계인들의 특징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문제가 없다라는 점인데, 아마 착한아이컴플렉스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아이상에 대한 욕심을 내려두어야 한다 착한아이 컴플렉스의 가장 큰 문제는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관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부모에게서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항상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야 보상으로 칭찬과 사랑을 받는 관계에 익숙해지면, 자신에게 너무 높은 자아상을 요구하고 자신의 완전함을 위해 남의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그러나 인생은 장기전이다. 더군다나 심리학 실험에서 첫인상에 너무 잘해줘버리면, 후에 그 모습을 일관적으로 유지하지 못할 때 오히려 뒷통수 친다며 악평을 듣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험참가자들은 처음부터 무뚝뚝한 사람들에게 더 신뢰를 보였다고 하고 실제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잘해주는 사람은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임을, 도를 믿는 분들, 다단계 종사자분들로부터도 많이 배우지 않았는가!
그러니 자신이 오래 일관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만큼만 착해야한다. 그 이상으로 자신에게 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뿐이다. 또한, 남에게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아야만 충족되는 자아상은 너무 불완전하고 위험하다. 실제로 그것이 자기자신에게 들였여야 할 노력을 포기한 댓가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자신의 전문직이 따로 없는 가정주부면서 자식들에 집착하는 엄마들도 유사한 예라고 본다. 당장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줄이더라도 자신 스스로 행복을 챙길 때, 아이들은 그 행복한 부모에게서 삶을 건강하게 사는 법을 배울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더 자주 목격했다. 내 행복을 좇는 과정에서 당장 날라오는 남의 평가에 대해 살짝 귀를 닫아두는 배짱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장기전을 생각하면서 과감하게 용기를 내야 한다.
-비관주의의 미덕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지 비관적인지에 대한 시각차가 ‘착한 태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인생에서 객관적이고 철저한 분석이나 준비가 일상이 된 사람이라면, 상대방보다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있기 때문에, 남에게 호의를 구하고 그것을 위해 또 내가 남에게 친절을 베풀 일이 적어질 것이다. 또한 미래를 대비하고자한다면 상대의 최선의 모습이 아니라 평균적인 모습을 보고 인연을 맺어야 나의 한정되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기에, 상대방의 인생관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인지 ‘좋은 게 좋은 것’인지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 상대가 당장 내게 잘해주는지의 태도는 우선순위에서 한단계 밀려나고, 그 사람의 전반적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인생관, 습관이 최우선순위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내 친구를 동생에게 일적으로 소개했다가 완전히 동생에게도 욕먹고 친구와는 절교를 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나는 상대에게서 장점을 주로 보고, 내게 잘해주는 모습이 전부라고 믿는 안이한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동생에게는 나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했다고 한다. 철저히 세속적이고 상대가 약하다고 판단되면 무시하는 예상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사실 그런 모습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고, 내게 당장 해가 되지 않으니 간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가족이라 한들 동생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누군가를 소개한다는 것은 참 조심할 일인데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덕분에 사람을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닫게 된 계기였다. 사람이 얼마나 입체적인 동물인지, 상대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변할 수 있는지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의 장점은 반드시 동전의 양면처럼 단점이기도 하다라는 점도 간과하지 않게 되었고. 나도 단점이 많고 한계가 있는 사람이기에, 내게서 너무 좋은 모습만을 찾고 잘해주는 사람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적절히 노출하는 법도 조금씩 익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너무 힘들다......
-칸트가 인정하지 않았던 선행 칸트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또는 경향성에 따라 선을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사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정의에 따르면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또는 은연중의 우월감에서 비롯된 행위는 선행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열정보다 이성을 중요히 여긴다기보다는,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자문해보지 않고 생각없이 하는 행위를 지양하는 취지로 생각된다.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각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 극복은 그런 점에서 왜 자신이 ‘착한 사람’이 되었는가부터 곰곰히 생각하고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
- no more drama queen! 우리 부모세대는 정신분석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는 커녕, 자신을 잘 관찰할 문제의식과 여유도 없는 분이 많았으니 자아분리의 갭을 심화시키기만 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것들이 한번 터지기라도 하면한편의 비극 드라마를 찍는 것이다. 그처럼 평소부터 불만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쌓아놨다가 억울(?)하게 성격파탄자로 낙인찍힐 것인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건강하게 실랑이하는 법을 익혀 시트콤으로 마무리할것인가. 이왕이면 즐겁게 살자. 힘들어도 지금부터 유우머를 익히고 착한 감투를 살포시 벗는 연습을 하자.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 / 10. 다 같은 2016년 글. exxx
제가 자주 가는 마포 평생학습관 1층에는 한국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에 위탁되어 운영되는 다 독다독이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근무자는 총 3명으로 장애가 있는 분이 2분 계시고 매니저 역 할 겸 교육 훈련을 도와주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동안 세 번 정도 이 카페를 방문하였는데, 처음 주문할 때 낯설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카페를 이용하는 동안 딱히 불편한 일은 없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동이나 시설의 편리함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 한 것은 꾸준히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업이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 니까. 직업이 있어야 다만 몇 일이라도 스스로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지요. 그래서인지 직업 과 관련된 뉴스가 장애인 전문 언론사에서는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직업과 관련된 뉴스가 많다는 것은 반대로 일상적인 환경에서 장애인 근무자를 만나는 일은 많 지 않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도 카페에서 조금 놀란 것 아닐까요? 가장 많이 근 무하는 제빵이나 패스트푸드점 안마사를 제외하면 쉽게 떠오르는 직종도 없습니다. 물론, 세세 하게 짚어간다면 변호사, 의사와 같은 전문직이나 예술가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직종의 뉴스를 보았습니다. 바로 호텔관련 직종인데요. 최근 부산시와 부 산 지역의 특급호텔들이 장애인 호텔리어 고용증진을 위한 협약식을 했다고 합니다. 장애인 고 용적합 직무를 발굴하고 고용친화적인 근무환경 제공, 협력업체 장애인 채용 등을 통해 고용증 진과 사회재활을 지원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부산시도 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과 지원 방안 마련에 적극 나선다고 합니다. 이는 지난 4월 장애인 호텔리어 채용을 위해 20여 개 지역 호텔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장애인 적합 직무 개발에 나서 도어맨, 룸메이드, 침구정리 등 업무를 장애인 적합직무로 정한 결과 입니다. 몇 몇 업무들은 호텔 내부 직종이지만 도어맨의 경 우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외부 직종이기 때문에 조금 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뭐 안될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연하게 (쉽게 말해서 괜히 시비거는 사람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 이루어질 일인지는 차차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런 단계를 밟아 나간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와 반대의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같은 2016년인데 말이죠.
검찰과 법원이 장애인 의무고용 비율을 지키지 못해 최근 3년간 납부한 부담금이 3억원에 달하 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현행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79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장이 공무원 외 근로자를 고용할 때 장애인을 2.7% 이상 고용하도록 하고 이를 지 키지 못하면 고용부담금을 납부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대법원과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한 것입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검찰은 2013년(1.27%)에 4842만원, 2014년(1.14%) 7214만원 등 최근 3년 간 1억 7717만원을 납부했고 대법원은 의무고용율을 미달해 2013년(1.05%) 1184만원, 2014 년(1.37%) 3054만원 등 최근 3년간 총 9525만원을 납부했다고 합니다.
이 발표에 붙여 박 의원은 “사회약자의 보호를 위해 모범을 보여야할 사법부 기관들이 법을 준수 하지 못해 부담금을 납부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장애인 의무고용제도는 장애인 고용 활 성화의 최소한의 기준”이라면서 “의무고용률 확보를 위한 방안을 마련해 최선을 다해야할 것” 이라고 이야기 했다고 하는데, 바로 위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참 비교되는 일입니다.
만약에 시장 경제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 기업이었다면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해도 비용 절 감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해할 수도 있겟지만 국민의 세금을 받아 쓰는 곳에서 ‘장애인 고용비 율을 늘려서 장기간 임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벌금을 내는 것이 절약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면 이것은 잘못된 사고 방식이 아닌가 합니다. 세금을 조금이라도 아껴 쓴다기 보다 올바른 형태 로 사용하는 방식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을 마무리 지으려는 찰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가 단순히 이 정도를 시사하 는 것일까?
좀 지나친 상상이겠지만, 앞코너 지진파에서 소개한 책 <불멸의 신성가족>이나 <법률가의 탄생 >에서는 법조계 특유의 선민의식과 폐쇄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법조 집단 외부의 상황이나 존재들에 대한 배려를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폐쇄 적인 집단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책입니다. 혹시 장애인 고용에서도 이런 측면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과한 상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에서 벌금을 낼 정도로 고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기이하지 않나요? 월급을 주나 벌금을 내나 돈을 쓰 기는 마찬가지 인데 왜 한명이라도 고용해서 일을 하게 하지 않고 벌금을 내는 선택을 하는 것 인지 의아하기까지합니다.
참 다 같은 2016년 이라는게 속상할 뿐입니다.
끝